이집트 바자 (Egyptian Bazaar) - 므스르 차르슈 (Mısır Çarşısı)


므스르 차르슈는 사피예 술탄의 명령에 의해 1597년부터 1603년에 걸쳐 예니 모스크의 일부로 건축되었다. 

당초 예니 차르슈 등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18세기 중반이 되면서 이집트에서 수입된 향신료 등을 많이 취급하여 

이집트 바자 (Egyptian Bazaar)라는 뜻의 므스르 차르슈 (Mısır Çarşısı)라고 불리게 된다. 

또한 이집트에서 수입 상품에 과세가 이루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이 명칭이 되었다고하는 설도 있다. 

후에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인도, 페르시아 등의 상품도 판매된다. 


이렇게 향신료 를 취급하는 가게가 모아지게 되었기 때문에 스파이스 바자(Spice Bazaar)라고도 불린다. 

바자의 건설 당초 약 100점포 중 49점포가 향신료를 취급하는 가게였다. 

다른 점포의 대부분은 면화와 이불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오늘날 바자의 85개 점포는 향신료, 터키 젤리, 보석, 말린 과일 등을 판매한다. 

평일과 토요일에는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7시까지 영업하며, 일요일에는 오전 10시부터 6시까지 영업한다. 

종교일이나 공휴일에는 휴무한다.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이집트 시장 (Egyptian Bazaar)





갈라타 탑 (Galata Tower)



갈라타 탑 (Galata Tower)


갈라타 탑은 528년 비잔틴 황제였던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처음 세워졌는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348년에 재건되었다. 당시에는 방어를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1960년대 내부를 수리하면서 현재까지 전망대로 사용되고 있다. 

탑의 높이는 약 67m로 비교적 높은 편은 아니지만, 신시가지의 언덕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갈라타 탑에 오르면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전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입장권을 끊으면 엘리베이터로 최고층까지 올라가게 된다. 

한 층을 더 걸어서 올라가면 레스토랑이 나오고,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하여 밖에 있는 발코니가 바로 전망대이다. 

발코니에서는 가까운 신시가지는 물론, 360도로 펼쳐지는 구시가지와 아시아 지역의 멋진 전망을 내려다볼 수 있다.


레스토랑에서는 터키식 커피나 차이, 음식을 주문할 수 있으며,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다. 

저녁 8시 이후에는 터키 요리를 즐기며 벨리 댄스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인데, 

벨리 댄스를 보려면 반드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성수기에는 예약이 거의 꽉 차 있어서 예약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멀리 서 본 갈라타 탑 (Galata Tower)


멀리 서 본 갈라타 탑 (Galata Tower)과 갈라타 다리


갈라타 다리 (Galata Bridge)


갈라타 다리 안내판


갈라타 다리


갈라타 다리는 탁심 지구와 술탄 아흐멧 지구를 연결하는 다리로 유명하다.

길이 약 466m 폭 25m인 이 다리는 2층 구조로 차량뿐만 아니라 도보로도 이동이 가능하며

상부에는 이스탄불 전경을 보는 사람들,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하부에 해산물 레스토랑과 카페가 있다.





갈라타 다리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낚싯대와 낚시 용품을 파는 사람들


고기가 제법 잡히나보다



갈라타 다리 아래 선착장


갈라타 다리 건너편 에미뇨뉴 지역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바라보는 갈라타 타워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갈라타 다리 명물, 고등어 케밥 (Galata Kebab Mackarel)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갈라타 다리 위, 낚시하는 사람들 (Galata Bridge, Fishing)





탁심 광장(taksim)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중심지

옛 터키의 수로가 이곳에서 각각 다른 동네로 흩어지게끔 설계되었다 하여 

'분할(탁심, taksim)'이라는 이름이 붙은 광장이다. 

다양한 상점과 호텔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어 현지인 여행객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으로, 

현지 최고의 번화가인 '이스티클랄 거리'를 거쳐 '튀넬 역'까지 향하는 

트램과 지하철, 버스 등이 지나는 이스탄불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탁심 광장(taksim)


터키공화국 수립 기념비


중앙에 우뚝 솟은 '터키공화국 수립 기념비'가 있다.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탁심 광장, 추억의 전차 올드 트램 (Taksim Square, Old Tram)


이스티클랄 거리 (İstiklal Caddesi)


이스탄불의 명동이라 불리는 이스티클랄 거리는 신시가지로 많은 사람이 붐비는 최고 번화가이다. 

탁심 광장부터 쭉 뻗은 이 거리는 상점, 카페, 레스토랑, 극장, 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생활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즐비하다. 


이러한 현대문화를 즐길 수 있는 건물들 사이로 이스탄불의 명물 붉은색 미니 트램인 

트램바이(노스텔지어 트램이라고도 불린다.)가 지나간다. 

이 트램은 19세의 노면 전차를 복원한 것으로 보행자 전용으로 바뀐 이스티크랄 거리에 다시 나타났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빨간색 트램은 이스티크랄 거리의 상징이 되었다. 

어시장과 주점 골목으로 유명한 네비자데 골목, 독특한 소규모의 박물관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티클랄 거리 (İstiklal Caddesi)


이스티클랄 거리 (İstiklal Caddesi)




치첵 파사지 (Çiçek Pasajı)

다양한 레스토랑과 선술집이 들어선 아케이드형 거리


치첵 파사지 (Çiçek Pasajı)


'꽃의 거리'에서 '맛집의 거리'로 재탄생한 공간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작은 아케이드형 거리. 

터키어로 꽃을 뜻하는 '치첵'과 통로의 의미를 가진 '파사지'를 합쳐 '치첵 파사지'로 불리게 된 곳으로, 

1940년까지 거리의 대부분이 꽃 가게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은 꽃 가게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다양한 레스토랑과 선술집이 들어서 있어 

터키 전통 요리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의 요리와 주류를 즐기며 이스탄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스티클랄 거리 (İstiklal Caddesi)


이스티클랄 거리 (İstiklal Caddesi)에서 버스킹


흔히 이스탄불의 명동이라 불리는 탁심광장 이스티크랄 거리에는 수많은 패션 브랜드 스토어에서 줄지어 있으며, 

쇼핑을 즐긴 뒤 곳곳에 자리잡은 트렌디한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휴식을 취하며 트램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거나 

버스킹 연주를 들으며 여행의 여유를 만끽할 수도 있다.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버스킹


이스티크랄 거리에서 인증샷


성 안토니오네 교회


프랑스 성인 성 안토니오네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이 교회는 1912년 새롭게 건축했다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사랑받는 교회 


교회 내부


프랑스 성인 '성 안토니오네'


갈라타 탑 (Galata Tower)이 보인다.


1348년에 건축된 높이 약61m의 이 탑은 술탄 메흐멧에 의해 이스탄불이 정복되기 전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지어진 탑 중의 하나로 당시에 지어진 24개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탑이다.

해 질무렵에 탑에 오르면 붉은 빛이 감싼 술탄 아흐멧 지구 사원들의 실루엣이 환상적이라고 한다.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이스티클랄 거리, 세계 최고 사주카페 (Istiklal Street/Fortune telling houses)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Enameled Kiosk Museum ; Çinili Kösk Müzesi 타일 파빌리온) 전경


고고학 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타일 키오스크 박물관'은 147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Mehmed II)에 의해 건축된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오스만 투르크의 시민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1737년 원형 기둥이 소실된 후 술탄 압뒬하미드 1세(Sultan Abdülhamid I; 1774~89) 

재위 시기에 14개의 대리석 기둥이 있는 포르티코를 다시 세웠다. 

1875년에서 1891년 사이에 황실 박물관 (터키어 : İmparatorluk Müzesi )으로 사용되었다. 

이곳은 1953년 터키 이슬람 예술 박물관으로 바뀌면서 대중들에게 개관되었다.


박물관 자체가 하나의 유적인 셈이며 이곳에는 11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셀주크, 아나톨리아, 이즈니크 타일, 

그리고 오스만 제국 시대의 기와, 타일 장식, 도자기 등 2,000여 점의 예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시기의 이즈니크 채색 타일은 세계 최고 품질을 자랑했다. 

중앙 공간에서는 이브라힘 베이 이마레트(İbrahim Bey İmâret)에서 가져온 미흐라브(mihrab)를 감상할 수 있다.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Enameled Kiosk Museum ; Çinili Kösk Müzesi)

타일 장식이 아름다운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은 전시품이 많지 않지만 건물 자체가 박물관이다.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Enameled Kiosk Museum ; Çinili Kösk Müzesi) 부분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Enameled Kiosk Museum ; Çinili Kösk Müzesi) 부분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입구 부분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입구 세부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입구 세부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입구 세부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입구 세부



에나멜 키오스크 분수


에나멜 키오스크 분수


공작새와 꽃들로 장식된 분수대


공작새와 꽃들로 장식된 분수대


공작새와 꽃들로 장식된 분수대



공작새와 꽃들로 장식된 분수대


타일 ​​미라브 (mihrab)


1432년에 지어진 공공 주방 (Karamanoğlu İbrahim Bey Imaret)의 이 타일 미라브는 

14세기 후반 또는 15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 오스만 초기 초기에 인기를 끌었던 화려한 유약 기술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타일 ​​미라브 (mihrab) 부분


타일 벽 장식 - 세밀하게 표현된 꽃과 기하학적 문양


타일 벽 장식 - 세밀하게 표현된 꽃과 기하학적 문양











이즈닉 도자기 (Iznik Pottery) 사원 램프


이즈닉은 터키 이스탄불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전성기(15-16세기)에 

궁궐, 사원을 장식하는데 필요한 타일과 도자기, 그릇을 생산하던 전통 있는 지역이다.


13세기 실크로드를 통해 동방으로 전래된 중국 도자기는 오스만 제국의 왕가들에 의해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중국 자기를 현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즈닉 도자기가 탄생하기 시작한다. 

고령토(Kaolin)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산화 실리콘(Silica)과 유리질(Glass Frit)을 혼합하여 

중국의 흰색 포슬린 자기 느낌이 나는 도기(Pottery)를 만들고, 

여기에 코발트(Cobalt)에서 추출한 블루 물감으로 아라베스크 문양 및 중국풍 Pattern 으로 장식한 이즈닉 도자기, 그릇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모스크 램프이다. 세 개의 "귀"에 꽂힌 체인에 매달려 있게 제작된 것.

당시 이 코발트 블루 물감은 워낙 귀해서 금보다 더 비싼 값에 이 거래가 되었다고 한다.


16세기 이즈닉 도자기는 그 아름다움이 정평이 나 있다. 

이즈닉 자기에 타일 양식이 가미되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이 유물에서는 16세기 자기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코랄(산호) 레드' 색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다색의 이즈닉 (Iznik Pottery) 도자기 사원 램프


다색의 이즈닉 (Iznik Pottery) 도자기 부분


이즈닉 흑백 도자기 (Iznik Blue & White​) 사원 램프


이즈닉 도자기, 그릇은 이태리로 건너가 16세기 메디치 포슬린과 마졸리카(Majolica) 탄생에 영향을 주었고, 

17세기에는 프랑스, 네덜란드에서 파이앙스 도자기가 탄생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즉 유럽 Blue & White 포슬린의 원조격으로 보면 될 것.


이것은 모스크 램프이다. 세 개의 "귀"에 꽂힌 체인에 매달려 있고, "귀" 두 개가 보인다.

1510 년경 높이 27,6cm . Sokollu Mehmet Pasha 사원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지와 잎, 꽃과 꽃, 구름, 서예 등이 그려져 있는 흑백 도자기

이 디자인은 Topkapı Sarayı 워크숍의 예술가들에 의해 그려졌으며, 

Iznik의 도공들에게 보내져 제작되었다.


그릇에는 아라베스크 문양 외에, Floral Pattern으로 튤립, 장미, 카네이션, 히아신스 등이 많이 나오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디자인적인 특징이 다양하게 달라진다.


이즈닉 흑백 도자기 사원 램프

1512 년경 제작. Bayezids 무덤에서 출토되어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즈닉 흑백 도자기 사원 램프

1512 년경 제작. Bayezids 무덤에서 출토


다색의 이즈닉 플레이트

제작 년대는 1580~1585. 지름 26,3 cm


이즈닉 흑백 도자기 접시


이즈닉 흑백 도자기 접시


세라믹 플레이트. 높이 : 7 cm, 지름 : 45½ cm. 이즈 닉에서, c. 1500 년 n0 41/9 

코발트 블루 디자인. 큰 루미 및 구름 띠, 스크롤 가지 및 꽃이 있는 흑백 도자기.

오스만 제국의 사원과 궁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으로 수출되었다.


도자기 세부. 12 세기 후반 시리아에서 출토


차나칼레(Çanakkale ) 도자기. 18 세기 후반


차나칼레(터키어: Çanakkale)는 터키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로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1분기까지 

이즈닉과 쿠타야(Kütahya)와는 또다른 형태로 흥미로운 인물을 작품으로 만드는 도자기의 중심지이다. 


차나칼레(Çanakkale ) 도자기. 19 세기 후반


다색의 이즈닉 타일 - cuerda seca 기법


다색의 이즈닉 타일


다색의 이즈닉 타일


캔들 행거 (ORNAMENTAL BALL) - 쿠타야(Kütahya)에서 제작


쿠타야(Kütahya)의 타일 및 세라믹 생산은 처음부터 이즈닉(İznik)의 개발과 유사한 경로를 따랐다. 

이즈닉과 쿠타야의 타일 및 세라믹 작업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몇 가지 차이점을 제외하고 두 도시에서 동일한 기술이 사용되었다. 


18세기 초, 이즈닉에서는 제작이 마침내 끝났지만, 

쿠타야의 작업장은 사람들의 요구와 그들의 독특한 스타일에 맞춘 생산 정책 덕분에 계속 존재했다. 

쿠타야에서 제작된 박물관 소장품은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유물이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도로 18세기 후반에 제작되었다. 촛대에 있는 천사 인물이 관심을 끈다. 

일반적으로 계란 모양의 촛대는 체인이 달린 양초에 매달려 있다.





고대 아시아 박물관 (Eski Şark Eserler Müzesi) 전경


고대 아시아 박물관은 1883년 고고학 박물관을 건설한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 건축되었다.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가 복원 과정을 거쳐 1974년 재개관되었다. 

내부에는 수메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하타, 히타이트 문명의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네부카드네자르 왕 시대의 바빌론 이슈타르 문을 장식했던 사자와 수소의 상, 

히타이트의 수도였던 핫투샤에서 출토된 히타이트 이집트 간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이라는 카데쉬 조약은 인류사적 유물이다. 


오스만 제국 지역에서 수집한 이슬람 이전 시기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고대 바빌론의 행진 거리와 이슈타르 문(Ishtar Gate)을 장식했던 색색의 거대한 벽돌판 등이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벽돌판에는 사자와 용, 황소 등 실제 동물과 신화 속 동물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도자기 박물관에는 12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셀주크, 오스만의 도자기 등이 있는데, 

특히 16세기의 이즈닉 도자기를 눈여겨 볼만 하다.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아랍 반도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7만 5000여 개의 쐐기문자판도 소장하고 있다. 

계단 양쪽 아래에는 기원전 약 18세기 경 히타이트(Hittites)의 유물인 사자상이 있다.


이곳에는 그리스 이전에 터키를 지배했던 여러 왕조들의 유물과 주변 동양의 고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카데시 평화조약 (The Kadesh Peace Treaty) 문판


카데시 조약 – 인류 역사 최초의 평화조약이다.

아카디아어로 만들어진 점토판. 

아크릴판에 달려 있는 것이 실제 조약문이고

사진 윗 부분의 크게 보이는 것은 내용물을 볼 수 있게 만든 모조품이다.


카데시는 지금의 터키와 시리아 국경 인근에 있던 고대 도시다. 

카데시 전투 (Battle of Kadesh, Battle of Qadesh)는 기원전 1274년 5월 12일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이집트와 히타이트(Hittites)의 전투를 말한다.


이집트와 히타이트 모두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이 서로 다르다. 

이집트의 기록은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한 선전용으로 작성된 것임에 반해 

히타이트의 기록은 내부용으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 이집트 기록이 좀 더 과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단 이집트의 기록이라고 해서 이집트의 일방적인 승리만 기술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들의 실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기록하고 있다.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집트측과 히타이트측의 설명이 서로 다르며, 양쪽 모두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기록했다.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지만,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히타이트가 승리 내지는 우세한 상황에서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즉위한 지  4년째로 접어 들면서 이집트 북방의 국경지대인 시리아 북부를 침략하여 

히타이트의 속국인 아물(아무르)을 복속시켰다.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스는 마침내 아무르 탈취를 목표로 동맹국들의 군대를 집결시킨 후 시리아 북동부를 향해 진격했다.


람세스 2세 역시 히타이트에 맞서 진격하던 중 2명의 히타이트 첩자를 포획하게 되었고, 

그들로부터 히타이트군이 알레포에 거주한다는 정보를 얻어냈다. 

하지만, 이는 무와탈리스가 대규모 동맹군을 카데시 언덕 뒤쪽에 숨기고 

훨씬 북쪽의 알레포에 자신이 있다는 허위 정보를 흘렸던 것이다.


속임수에 빠진 람세스 2세는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카데시를 몰락시킬 생각으로 병력을 서둘러 카데시 쪽으로 진격시켰다. 

그의 부대는 오론테스 계곡 도로를 따라 줄지어 진군하게 되었다. 

이집트군은 각 수호신 이름을 새긴 관을 쓴 프타, 세트, 아몬, 라의 4개 군단으로 조직되었는데

왕은 제1사단인 아몬 사단과 함께 저녁 무렵 카데시에 도착해서 막사를 세웠다.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아몬 군단이 카데시에 도착했을 무렵, 

그들이 너무 강행군을 한 결과 후속 군단들과 상당히 거리가 벌어졌다. 

사로잡힌 2명의 히타이트 포로(정찰병)가 히타이트의 전술을 자백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히타이트 전차부대 2,500대가 강을 건너와 람세스 2세의 후속 라 사단을 기습하여 괴멸시켰으며, 

그 여세를 몰아 아몬 군대도 기습한 참이었다.


이집트군의 패배가 명백한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서 

일전에 복속시켰던 아무르의 지원군이 돌연 나타나 히타이트군을 물리쳤다. 

이집트군은 서둘러 재결집하여 히타이트의 전차 부대를 격파하려 했으나, 

그들은 이미 오론테스 강을 건너 자군의 보병 부대와 합류해버린 후였다. 


이후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무와탈리스는 휴전을 제안했다. 

람세스 2세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양군은 군대를 각기 고국으로 퇴각시켰다. 

카데시 전투에서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2세는 막강한 저력을 발휘했지만, 

결국 히타이트군보다 더 큰 타격을 입었다. 

많은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영토도 획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아무르는 후에 다시 히타이트의 속국이 되었다.  


 ‘철의 왕국’ 히타이트와 ‘태양의 왕국’ 이집트가 생사를 건 전쟁을 벌인 것이다. 

두 문명권의 맹주가 맞붙은 최초의 세계대전으로도 불린다. 양국은 16년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승자도 패자도 불분명한 지루한 싸움, 두 제국은 기원전 1274년 무렵 평화조약을 맺기에 이른다.


당시 조약문 원본이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집트 카르낙 신전 벽면에도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각기 조약문 1부씩을 나눠 가진 셈이다. 


주목할 대목은 조약문 세부다. 전쟁 재발 금지, 제3국의 침략에 대한 공동대응 방안 등을 적시했다. 

‘전쟁 중 도망간 병사가 본국에 송환돼도 엄벌을 받지 않으며 그 가족 또한 벌하지 않는다’는 부분도 선진적이다. 

공존을 향한 고대인의 절박한 증언이다. 제국은 사라졌어도 기록은 남았다. 

인간의 존재 이유인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기에 충분하다. 

조약이 타결된 장소가 지금은 화약 냄새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변했다는 게 아이러니지만 말이다.

 

카데시 조약의 바탕은 상호 신뢰와 존중. 

역사는 3300년 전에 이미 ‘도망간 병사가 눈물을 흘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카데시 전투 이후에 맺어진 평화조약은 기록상으로 남아 있는 인류 최초의 평화조약이라고 한다. 

전쟁에서의 승리나 패배로 한 쪽이 다른 쪽에 복종하는 조약이 아닌 

대등한 두 세력의 공존을 명시한 평화조약으로서 최초라는 뜻이다.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에서 당시 맺어진 조약의 내용이 담긴 설형문자 점토판이 발견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조약문 원본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가 되어 있으며, 

복사본은 국가 간 평화공존의 상징으로 국제연합 본부에 걸려있다.


카데시 조약문판


쐐기문자로 비문이 쓰여 있는 입상


쐐기문자는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라고도 불리는 고대 문자다.

 ‘설형(楔形)’이란 ‘쐐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그 글자의 모습이 마치 쐐기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쐐기’는 일종의 나무못인데, 나무를 V자 모양으로 깎아서 나무로 짠 물건의 틈새를 박아 연결 부분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데 쓰인다.


글자를 쓰기 위해서는 종이와 펜 등 필기도구가 필요하다. 

설형문자를 쓰는 데 종이 구실을 한 것은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이며, 펜 구실을 한 것은 갈대나 뼈와 같은 것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갈대 등의 끝을 다듬어 뾰족하게 만들어서 누르거나 새겨서 쓰면 점토판 위에 자국이 남게 되며 이것이 문자가 된 것이다. 

쓰기가 끝나면 점토판을 햇볕에 말려 보관했으며, 중요한 것들은 가마에 구웠는데 이렇게 하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또한 후대에는 석판이나 금속판이나 바위, 금속, 상아, 유리, 밀랍 등에 새긴 경우도 있다.

설형문자 최초의 문서는 BC 3000년대에 수메르어로 씌여졌다.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 3세(Shalmaneser III) 입상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에서 티그리스강 상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고대국가로서 

그 명칭은 중심 도시였던 아수르(Assur)시에서 유래했다.

바빌로니아와 같이 수메르 문명을 계승한 국가이다. 

샬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재위:BC 858 ~ BC 824년)는 신 아시리아 왕국 시대의 아시리아 왕이었다.


그는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왕자로 태어났다. 

기원전 858년에 즉위하여 부왕 대신에 대폭 강화되었던 아시리아를 다시 확대하는 다수의 원정을 행했다。

즉위 직후에 시리아 원정에 나서 아람계 국가 비트・아디니를 정복하였다.


이러한 아시리아의 팽창에 대하여 시리아 지방에 있는 여타의 제국은 위기감을 느끼고 반 아시리아의 동맹을 맺었다. 

샬만에세르 3세 자신이 남긴 비문에 의하면 다마스코 왕 하다드에세르, 하마테 왕 일프레니, 이스라엘 왕 아합 등 

12 왕이 이 동맹에 참가하였다.


기원전 853년에 카르가르의 싸움에 양자가 격돌하였다. 

샬만에세르 3세는 이 전투를 대승으로 기록하는데 실제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이 전투 후 샬만에세르 3세는 공격 목표를 바빌로니아로 바꾸어 현지의 칼데아 인등을 정복하였는데 

그 후 샬만에세르 3세는 다시 시리아 지방을 침공하였다.


그리하여 다마스코 왕 하닷에세르가 기원전 842년에 붕어하였는데 아시리아는 

그의 왕자 하자에르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여 다마스코를 공격하였다. 

다마스코의 완전정복은 불가능하였지만 이로 인해 시리아 지방에 대하여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 

다마스코, 이스라엘, 페니키아의 각 도시 국가에 공납을 부과하였다.


844년에 우라르투 왕국에 원정을 행했는데 우라르투와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반복하였다. 

다시 기원전 835년 메디아와도 전투하였는데 기원전832년에는 왕자의 아슈르・다인・아필을 군총사령관에 임용하여 그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러나 아슈르・다인・아필은 기원전 827년 돌연 반란을 일으켜 카르프(님로드)를 제외한 아시리아의 태반의 도시를 제압하였다. 

샬만에세르 3세는 반란의 진압에 성공하지 못하고 BC 824년 붕어하고 다른 왕자 샴시아다드 5세가 후사를 계승하여 반란을 진압하였다.


샬만에세르 3세는 카르프(님로드에 군사령부와 무기고를 포함한 요새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현재 샬만에세르 요새라 불리고 있다. 

이 요새의 옥좌에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조약을 체결한 광경의 부조가 있는데 이는 당시에 관한 매우 귀중한 정보다. 

이스라엘 왕 예후가 샬만에세르 3세에 평복하고 공물을 헌상하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생각하면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


가운데 부조가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2세

아슈르나시르팔 2세(Ashurnasirpal II, 재위: BC 883년 - BC 859년)는 신 아시리아왕국 시대의 왕이다. 

신도 카르프를 건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투쿨티닌우르타 2세의 왕자로 태어났다. 부왕의 대에 강화되었던 아시리아를 다시 강대국화 하였다. 

기원전 883년에 즉위한 후 17년 간에 14회의 원정을 행하였다고 한다. 

시리아 동부와、카르케미쉬에 진군한 것 외에도, 자그로스 산맥 방면에도 출병하였다. 

그는 정복한 영토의 통치방법으로 현지의 왕에 공납을 부과하지 않고 아시리아인의 총독을 파견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는 고대부터 아시리아의 수도였던 아슈르를 대신하는 신수도 카르프(님로드)를 건설하였다. 

이 도시의 유적에서는 그와 관련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아시리아식의 건축양식으로 유명한 셰두(사람 머리의 날개 달릴 황소)의 조각상 등을 설치했던 것으로 유명한 

최고의 궁전이 포함되어있다. 

이 궁정은 이후 사르곤 2세가 두르샤루킨에 천도하기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는 적이 얼마나 잔혹하였는가를 나타내는 문장과 부조를 남겼는데, 일설에는 다른 이들을 위압하기 위한 정치 선전이었다고 한다. 

사후 왕자인 샬만에세르 3세가 왕위를 이었다.


여러 부조들


예멘의 고대 도시 팀나 (Timna)에서 발견


'슈신을 위한 사랑 노래' 점토판


기원전 2037~2029년 경 쐐기문자로 적힌 이 시야말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랑의 시라는 판정을 받았다.

바빌로니아는 인류문명의 출발지라 부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속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아시리아-바빌로니아로 이어진 고대제국에 의해 형성됐다. 


히브리 성경의 노아 설화를 비롯한 무수한 이야기의 젖줄이 이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시작됐음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이들 문명권의 쐐기문자(설형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이 20세기 들어 대거 발굴, 해독되었다. 


기원전 20세기 무렵 수메르를 통치하던 슈신(또는 슈슈엔)의 시대 그와 결혼한 여인이 쓴 ‘슈신을 위한 사랑 노래’다. 

당시 수메르 왕은 대지 및 가축의 생산력을 풍부하게 하고자 태고의 여신인 이난나의 여사제 가운데 한 명과 매년 신성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간택된 여사제 중 한 명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시는 


‘신랑이여, 내 가슴속의 사랑하는 이여 / 

꿈같이 달콤한 그대의 아름다움이여 / 

사자여, 내 가슴속의 사랑하는 이여 / 

꿈같이 달콤한 그대의 아름다움이여’로 시작한다. 


1900년 발굴돼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점토판에 적힌 시에는 

‘나를 침실로 데려가주세요’ ‘당신을 어루만지게 해주세요’ 

‘우리 집에서 새벽까지 주무세요’ ‘나를 애무해주세요’ 같은 노골적인 유혹의 내용도 담겨 있다. 


함무라비 법전 (복사본)


이 태블릿은 학교와 법정에서 사용하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을 복사해 적었던 것으로 Nippur에서 발견되었다.

함무라비는 기원전 1792~1750년동안 고대 바빌로니아를 통치했던 왕이며, 함무라비 2년에 이 법전이 탄생했다. 

오리지널 태블릿은 2.23m의 섬록암 돌기둥에 새겨진 것으로, 루브르 미술관이 소장 중이다.


Yerkapı SPHINX - 13th century BC - Hittite Empire.


기원전 13 세기에 세워진 석회암 스핑크스는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인 보아스코이 (Boğazköy)의 성벽 위의 

Yerkapı (문자적으로 "지상 게이트")에서 발견되었다. 베를린 박물관에도 동일한 스핑크스가 있다. 

보호 목적으로 출입구에 위치한 4개의 스핑크스 중 하나이다. 많은 조각을 조립하여 완성되었다. 


나람 신(Naram-Sin) 왕의 돌 초상


이 돌 조각의 비문에 나람 신(Naram-Sin) 왕이라고 씌여 있다.

Diyarbakır 근처의 Pir Hüseyin에서 발견되었다. 


나람 신(Naram-Sin)은 기원전 2270년에서 2255년 사이의 아카드(Akkad) 제국의 왕이었던 

마니 쉬 투슈(Manishtushu) 의 아들로 태어났다 .

아카드 제국 네 번째 왕인 나람 신(Naram-Sin)은 기원전(紀元前) 2254년부터 2218년까지 37년 동안 아카드(Akkad)를 다스렸다.


위대한 정복군주의 손자답게 나람-신은 재위 기간 내내 여러 땅에서 일어난 반란(叛亂)을 진압하고 

제국의 변방에서 전쟁을 벌이며 아카드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했다.


나람-신(Naram-Sin)에서 신(Sin)은 셈 사람들이 믿던 달신(月神)의 이름이다.

셈 사람들은 신(Sin)을 수엔(Suen)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나람-신(Naram-Sin)은 나람-수엔(Naram-Suen)이라고도 부른다.


이집트 무덤 발견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체를 죽인 채로 영혼이 돌아오고 있다고 믿어졌다. 

내세에 대한 믿음은 매우 광범위하고 뿌리가 깊기 때문에 무덤 발견은 오늘날까지 이집트 유물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내세는 신체가 존재하는 경우에만 정상일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마사 바 및 암벽화 무덤과 같은 

기념비적인 무덤이나 모래에 파인 평범한 무덤에 묻혔다.


테베 (Thebes)시의 매장지인 데이 르 엘 바리 (Deir el-Bahri)에서는 나무로 된 석관이 발견되었다. 

주인은 테베의 군주 아문 신의 제사장과 제사장이었다.

석관의 내면과 외면은 얇은 석고층으로 칠해져 있고, 

내세와 신화적 장면에서 죽은 자를 보호할 수 있는 상징으로 종교적 텍스트로 장식되었다. 


미이라로 만들기 전에 추출된 내부 장기를 캐노픽 병에 넣었다. 

이 관 뚜껑에는 죽은 사람을 지키는 네 신의 머리가 있다. 

위는 팔콘이 달린 Imseti의 항아리에 저장되었다.

미라가 구슬 그물로 덮여 있었고, 나무 베개를 머리 아래에 놓고 밀짚으로 만든 구슬 바구니를 무덤 방에 놓았다.


해시계


11 개의 방사형 선으로 12 개의 동일한 세그먼트로 나뉘어 진 오목한 표면을 갖는 이 해시계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Mada'in Saleh에서 발견되었다. 

아람어 비문이 있으며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중앙 수직 막대의 그림자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다른 선으로 떨어지며 시간을 나타내준다.


이슈타르 문(Ishtar Gate)에서 발굴한 용과 오록스.


이슈타르의 문(아랍어: بوابة عشتار)은 바빌론 내성의 8번째 성문이었다. 

이는 기원전 575년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시에 의해 도시의 정북방, 왕궁에서 동쪽에 지어졌다. 

이 문은 도시를 감싸는 성벽을 이루는 일부였고, 성문은 매끄러운 푸른색 벽돌로 이루어졌다. 

동물과 신들이 성문에 조각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벽돌들로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슈타르의 문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하여 건립되었는데, 

당시는 네오-바빌로니아 제국의 최전성기였기 때문에 이같은 공사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정복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네브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 공사를 완료한 후, 이 성문을 이슈타르 여신에게 바쳤고, 

성문에는 각각 용, 황소, 사자를 새겼는데, 이는 마르둑, 아다드, 이슈타르 신을 경배하기 위해서 였다.


기록에 의하면 성문과 지붕은 모두 최고급 백향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성문의 벽돌들은 푸른 유약을 입혀 구웠는데, 

이는 고대에 매우 희귀하고 값비쌌던 보석 '라피스 라줄리'처럼 보이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설계는 햇빛에 비친 성문이 아름답게 빛나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 문을 통과하는 길은 120마리에 달하는 용, 황소, 사자가 황색과 검은색 벽돌들로 이루어진 벽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성문 그 자체에는 오직 신의 모습만 그려져 있었다. 

대축제 기간에는 고대의 신상들이 이 성문 아래를 통과하여 도시를 출입하였다.


이슈타르문을 장식하고 있는 시루슈(용)와 오룩스(황소)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에 등장하는 시루슈는 신들의 지배자인 마르두크의 상징이며 오룩스는 기후의 신 라만의 상징이다.

마르두크 (Marduk)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으로 위대한 도시 바빌론의 수호신이다.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왕 시대부터 바빌로니아의 여러 신 가운데 주신(主神)의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 수메르의 신 벨과 합쳐져 '벨 마르두크'로 숭배되었다.


전설에는 '에아'와 '엔릴'의 후계자로 악한 용 티아마트를 죽이고, 

티아마트의 시체를 이용하여 혼돈으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고 전해지며 상징 동물은 용이다. 

전통적으로 바빌로니아의 왕은 마르두크의 현신으로 마르두크 신앙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글쓰기와 지혜의 신인 나부(Nabu)는 이 마르두크의 아들이다.

구약성경 예레미야 (50:2)에 벨과 함께 잠깐 언급된다.


이슈타르 문 (Ishtar Gate) 장식


이슈타르 문은 바빌론 시의 성 외벽과 내벽을 연결하는 이중 문의 일부로, 이슈타르 여신에게 헌정된 것이다. 

테라코타와 돋을새김된 벽돌로 장식되었다. 소재는 신의 성스러운 동물인 사자와 수소이다. 

이 문의 대부분은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바빌론에서 발견된 Ishtar Gate의 사자와 꽃 무늬 테라코타 (BC 6세기)


바빌론에서 발견된 Ishtar Gate의 사자 테라코타 (BC 6세기)


고대 바빌론 행렬 거리의 말 부조 (BC 4세기)


이슈타르 문에 있던 용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된 이슈타르의 문


현재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위치한 이슈타르의 문은 1930년대에 만들어졌으며, 

이는 1900년대 초기에 바빌론에서 발굴한 벽돌들을 독일로 가져와 다시 재현한 것이다. 

이 문은 높이가 14m이고, 너비가 30m이다. 이 문을 발굴할 때, 14m에 달하는 성문의 기초도 함께 발견되었다.


'클라우디스 제임스 리치'는 바그다드에 거주하는 아마추어 영국인 고고학자였는데, 

고대 바빌론에 대해 알게 된 후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학자와 현장 고고학자로 둘다 활동하며, 고대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고, 1815년에 최초로 이에 관련된 책을 저술한다. 

그와 19세기의 학자들은 바빌론 유적에 있는 거대한 언덕이 고대의 왕궁이라고 생각했고, 

이는 독일인 고고학자 '로버트 콜더웨이'에 의해 진실로 판명되게 된다. 

로버트 콜더웨이는 전에도 독일 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고대 시리아 도시들을 발굴한 적이 있으며, 

빌론의 발굴은 1899년에 처음 시작하였다.


당시 영국 고고학계가 선호하던 발굴 방법은 땅에 터널을 뚫고 지지대를 설치하는 방법이었으나, 

이는 성과를 크게 내지 못하였고 오히려 진흙벽돌로 지어진 바빌론 유적들을 손상시키기만 했다. 

그리하여 나온 대안은, 무너져가는 건물들에 집착하지 말고 관련된 문헌과 자료들을 조사하자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정보들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콜더웨이의 조수 중 한 명은 고대 바빌론의 복원과 정보 수집에 큰 공을 세워 

주변에 작은 박물관을 세우고 그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 되기도 하였다.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된 이슈타르의 문


 이슈타르의 문(아랍어 : بوابة عشتار)은 바빌러 바빌론의 내부의 8번째 내성문이었다. 

이는 기원전 575년에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시에 의해 도시의 정북방, 왕궁에서의 동쪽에 지어졌다. 

바빌론 신화에 등장하는 이슈타르에게 헌정하는 이 문은 채유벽돌에 저부조로 

시루슈(혹은 무슈슈-Mušḫuššu)라는 용과 오록스를 장식했다. 

그리고 지붕과 대문은 삼나무로 제작하였으며, 문을 통해 대로가 연결되었다. 

양 옆으로는 약 120마리의 사자 저부조 장식을 하였다. 


이슈타르 문은 이슈타르를 포함한 아다드와 마르두크를 석상으로 새겨넣었다. 

이런 신들의 석상은 새해를 기념하는 종교적인 행사때 이용되곤 했다. 

본래 바빌론 성벽의 부분인 이슈타르의 문은 기원전 3세기 이전만 해도 

파로스 등대 대신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고려되고는 했다. 


이슈타르의 문의 발굴은 1902년에서 1914년까지 이루어졌으며, 

발굴이 완료될 당시 14m나 되는 문이 두 개가 있었다. 

독일의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되어 있는데, 이는 작은 문을 복원한 것이었다. 

뒤에 있는 큰 문은 너무 커서 적합하지 못하였으며, 이는 1930년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완공했다. 

이는 14 m 높이에 30 m의 너비다. 


이슈타르의 문과 사자가 꾸며진 대로에서 나오는 발굴물이나 장식들은 다른 박물관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이슈타르 문의 사자, 용, 황소 장식을 소장하여 관람할 수 있다. 

그리고 디트로이트 미술관은 용을 소장하고 있으며, 

스웨덴 고텐버그에 위치한 뢰스카 박물관에서는 용 장식 하나와 사자 장식 하나를 각각 소장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 뮌헨 주립 이집트 미술관,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카고 동양 미술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 박물관, 보스턴 미술관, 예일대학교 미술관은 각각 사자 장식을 소장하고 있다.


이라크에서 이슈타르의 문의 축소형 복원품은 사담 후세인 때 이루어졌으며, 

이라크 전쟁때 미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성문(成文).


이슈타르 성문에 대한 네브카드네자르 2세의 설명은 옆 성벽에 고대 아카드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15m의 높이와 10m의 너비를 자랑한다.

설명문은 이슈타르 성문의 건립 목적과 업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성문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 바빌론 유적 발굴 모습을 찍은 사진


이슈타르 성문과 그 앞 도로는 20세기 초에 바빌론에서 발굴되었으며, 

독일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당시 발굴된 벽돌들을 가지고 다시 복원하였다. 

이슈타르 문을 이루던 벽돌들은 다른 박물관에서도 전시되고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거대한 복원 프로젝트들 중 하나가 바로 이슈타르 문과 그 앞 도로의 복원인데, 

이는 발굴된 유리 벽돌 조각들을 모두 하나하나 다시 붙이고, 조심스레 운반하여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들로 이루어졌다. 

완전히 사라진 벽돌들을 대체하기 위해 특수 제작된 틀들을 만들어 당대와 똑같은 벽돌들을 생산해냈다. 

이슈타르 문은 사실 이중문인데, 현재 우리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더 작은 앞문이다. 

뒷문은 전시하기에는 너무 크기가 커 전시되지 못하고 창고 안에 있다. 

또한 이슈타르 문에 있던 동물 조각 벽돌들은 페르가몬 박물관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이라크 바빌론 유적에 있는 이슈타르의 문은 사담 후세인 정권 때 만들어진 것인데, 미완일 뿐더러 크기도 더 작다. 

이 문은 복원된 바빌론 궁전과 성벽과 함께 바빌론의 유적들을 지키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문은 당시 미국과의 갈등 속에서 이라크의 문명을 상기시키며 이라크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화시키기 위해 지어진 것인데, 

이라크 전쟁 때 미군의 공격으로 이 문 또한 파손되었다.


이슈타르의 문 앞에 있는 대로의 모델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문의 모델


바빌론에 복원된 이슈타르의 문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고대 동양박물관을 나와서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을 둘러본다. 

터키는 땅만 파면 고대 유물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물을 따로 보관하지 않고 뜰에 아무렇게나 두는데 

이것이 오늘날 하나의 석조 유물 정원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메두사 상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석조 유물 야외 전시장










Porphyry sarcophagi of Byzantine emperors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 앞에 있는 붉은 반암에는 그리스어로 larnax 라고 불리는 네 개의 제국 석관이 있다 . 

이것들은 모두 현재 사라진 성도 교회의 두 개의 돔형 영묘에서 나왔다 . 

오른쪽 열에는 콘스탄틴의 것으로 여겨지는 무덤의 조각이 있다. 

다음은 자신의 반암 무덤에 묻힌 황제들 (한 황후)의 목록이다. 

오늘날 이스탄불에는 8개의 반암 석관이 남아 있다.


Porphyry sarcophagi of Byzantine emperors


위의 무덤은 줄리안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보물을 찾는 파괴자에 의해 자부심을 잃었을 때 무덤이 손상 된 곳, 특히 모퉁이에서 장소를 볼 수 있다. 

델브루크 (Delbrueck) 한 학자는 이 반암 무덤이 알렉산드라에서 왔으며 원래 프톨레마이오스 왕 (Ptolemaic Kings) 

또는 이집트 왕비 (Queens of Egypt)의 매장에 사용되었다고 믿고 있다.


Tabnit 석관 (Tabnit sarcophagus in Diorite from the Sidon necropolis)


석관에는 이집트 상형문자와 페니키아 문자로 된 두 개의 분리되고 관련이없는 비문이 있다 . 

기원전 5세기 초에 만들어졌으며 1887년 오스만 함디 베이가 시돈 근처 아이야 폴리스에서 

알렉산더 석관 및 기타 관련 석관과 함께 발굴되었다 . 

Tabnit의 몸은 원래 상태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무덤 비석의 역할을 했던 돌 조각품. 


이것으로 이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알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시대, 그리고 히타이트와 시리아, 바빌론, 팔레스타인 지역과 트로이 유적 유물의 일부. 

이스탄불과 그 근교에서 발견된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 특히 석재조각이나 건축물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석관 부장품


고대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에서 주로 썼던 점토판 기록. 

대부분 증명서나 회의록, 영수증 등등.


로마 후기 여인의 석관 내부

저 유골의 주인은 석판 뚜껑에 새겨진 여자인 듯.


고대의 도자기 관


섬세하고 아름다운 코린트식 건축 양식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 바빌로니아와 시리아 등지의 옛 유물들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 바빌로니아와 시리아 등지의 옛 유물들


고대 이집트와 히타이트, 바빌로니아와 시리아 등지의 옛 유물들















히포드롬 광장 (Hippodrome Square) 뱀기둥의 뱀 머리 부분


오스만 제국 시대에 세밀화되어 뱀의 머리가 그려져 있으며, 적어도 17세기 말경까지 뱀의 머리가 있었다.

이 뱀 머리의 일부는 복원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델포이의 삼각대에 현존하고 있는 것은 토대 부분만 뱀기둥이라고 되어 있다.


히포드롬 광장 (Hippodrome Square)의 뱀기둥 도설


투구


키르클라렐리 주에서 발견된 고분. 서기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tumulus의 마스크가 달린 헬멧은 젊은이의 초상을 반영한다. 

마스크와 헬멧의 두 부분이 있으며 이마 위에 힌지가 연결되어 있다. 

전면 판에는 신화적인 장면이 있다. 오디세우스의 배를 박살낸 가장 끔찍한 바다 괴물 실라가 묘사되어 있다. 


게저 캘린더 (Gezer Calendar)


기원전 10 세기에 만들어져 게저 캘린더 (Gezer Calendar)라고 불리는 이 비문에는 년 월 일 이름과 수확 기간이 적혀 있다. 

히브리어 문장에서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


시누르 릴리프


서기 10 세기 비잔틴 시대 시무르는 늑대 머리와 꼬리를 가진 사자의 몸으로 묘사된다. 

이란에서 통치한 사산 사람들의 영향으로 비잔틴 예술에 들어간 이 인물은 직물, 석재 및 은 제품에도 널리 사용되는 신화적 인물이되었다.


실로암 비문


지하 터널에서 예루살렘의 실로암 수영장으로 물을 공급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페니키아 알파벳으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인 이 비문은 터널 왼쪽의 실로암 풀 끝 근처의 바위에서 잘렸다. 

길이가 다른 여섯 줄로 구성되어 있다.


비문에 구조가 묘사되어 있는 암석을 뚫고 나온 터널은 도시의 기혼샘에서 도시의 실로암 수영장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히스기야 왕 (기원전 725-697 년)에 명령에 의해 건축되었다. 


 팔미란 무덤 챔버


박물관을 위해 재생산 된 무덤 방은 적어도 219 명을 위한 부유한 팔미란 가족에 의해 지어졌다. 

원래 무덤은 팔미라의 무덤 골짜기에 있지만 박물관을 위해 모델로 만들어졌다. 

시체는 수직 및 수평으로 늘어선 서랍과 같은 무덤 구획에 배치되었다.

Hypogeum 또는 지하 무덤은 탑 무덤과 집 무덤 외에도 AD 1세기와 2세기에 Palmyrans가 선호하는 풍부한 기념비적인 무덤이었다.


Praefectus와 대제사장의 무덤 기념비


서기 1세기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무덤 기념비에서 터키 마르마라 지역의 

마르마라 에레알리시 (Marmara Ereğlisi)에서 발견된 기갑 티베리우스 플라비우스 (Tiberius Flavius)는 말의 중앙에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 2 명의 로마 군인이 있고 왼쪽에 3 명이 있다.


Tyche의 상태


기원전 2세기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기원전 4 세기의 유물 사본이다. 

풍성하게 장식된 이 유물은 Bolu의 Üskübü에서 발견되었다. 

Tyche 여신은 성벽을 나타내는 왕관을 쓰고 올리브 잎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녀는 다양한 과일로 가득찬 뿔과 부의 상징인 플루터스라는 아이를 왼팔에 안고 있다.


Tyche는 Oceanus의 딸로 그녀는 운명, 운, 성공의 여신이다. 

모든 도시에는 Tyche가 있다. 티체는 도시의 수호신이며 성벽 모양의 왕관으로 그려져 있다.





쇠사슬


이스탄불 앞바다 골드혼 해협 바다 속 해로에 설치되었던 쇠사슬

양안의 탑에서 체인을 당기면 배가 걸려 좌초하게 된다.

바닷속 체인이 수백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대부분의 전시실은 소규모 신전 또는 주거용 건축물로 이용되던 공간이다. 

다음 전시실에는 고대 리키아 기념물과 아나톨리아 건축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나톨리아와 트로이의 역사(Anatolia and Troy Through the Ages)’ 및 ‘이웃한 아나톨리아, 사이프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문화(Neighbouring Cultures of Anatolia, Cyprus, Syria and Palestine)’ 전시는 위층에서 진행된다. 

그리스 로마 이전의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해당 지역의 유물을 통해 조명하는 

‘이스탄불의 역사(İstanbul Through the Ages)’ 전시도 있다.





오케아노스 (고대 그리스어: Ὠκεανός Ōkeanós)


오케아노스는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서 대지를 둘러싼 거대한 강을 말하며 

이를 의인화한 신의 이름으로 티탄족의 일원인 포세이돈 이전의 2세대 바다의 신을 말하기도 한다. 

현대 영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에서 바다를 뜻하는 단어(Ocean)의 어원이 된 이름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구를 평평한 땅으로 상정했고 그 지구를 거대한 강이 둘러싸고 있다고 믿었다. 

티탄족 오케아노스는 프로토게노이인 우라노스와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상반신은 긴 수염을 한 인간의 모습이고 하반신은 비늘이 달린 물고기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오케아노스는 역시 티탄족의 일원인 아내 테튀스와의 사이에서 모든 바다와 강, 연못과 호수를 낳았으며 

오케아니스라고 부르는 3,000여 명의 물의 요정들, 님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오케아노스는 티탄족에 우두머리, 수장, 왕, 조상이라는 말이 있고 

아내 테튀스와 함께 티탄계의 1세대 왕과 여왕자리를 앉았다고 한다.


후기 히타이트의 더블 스핑크스 (B.C 8세기)



그리스, 로마 시대의 대리석 조각품들 - 살아 움직이다 굳은 거 같다.


Hermaphroditus 대리석상 : Hermes와 Aphrodite 사이의 아들로 양성을 모두 갖춘 신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테이드 (女像柱)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테이드 (女像柱)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에레크테이온의 카리아테이드 (女像柱) 이미지


Group of KORES and KOUROS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대리석상


아폴론 신 대리석상


아폴론 신 대리석상


아폴로 신과 그의 근육, 즉 영감의 원천을 묘사한 이 조각상은 고대 도시 밀레투스(Miletus)의 파우스티나(Faustina) 욕장에서 발견되었다.

Faustina는 로마 황제 Antoninus Pius의 딸이자 Marcus Aurelius 황제의 아내였다. 

그녀의 죽음 이후, 밀레투스의 유명한 목욕탕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조각상 그룹에서 빛과 지혜와 이성의 신인 아폴로는 근육질의 젊은이로 묘사된다. 

그는 받침대에 놓인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그의 몸은 우아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마치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현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거문고의 주둥이를 잡고 있다. 

이런 종류의 신의 묘사는 "아폴로 시타로에 두스"또는 "거미 아폴로 연주"로 알려져 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대리석상 (God of Sea)


Ancient Greek exhibition of the museum


Icon with relief Virgin Mary at prayer


Statue of Emperor Valentinian II


Statue of Alexander the Great


Puzur Ishtar, governor of Mari


아테나 여신상


다이아나 (아르테미스) 여신상. 옷 주름 하나하나가 섬세하다. 


토르소와 여러가지 조각상. 중간은 승리의 여신 니케, 맨 오른쪽은 역시 다이아나 여신 


사포(Sappho BC 612~)의 머리상


호메로스와 함께 BC 610~580년경 그리스 문학의 가장 초기에 레스보스(Lesbos)섬에서 활동한 유명한 여류 시인인 사포의 머리상

귀족집안 출신으로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그녀는 최초의 여류 시인이다. 

그녀의 시어는 세속적이고, 시구는 간결하고 직접적이면서도 회화적이지만 원초적인 감정의 힘을 결코 잃지 않았다. 

방대한 작품을 쓴 것으로 추정되나,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시는 28행 짜리 한 편 뿐이고, 

700여 행에 이르는 인용이나 단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사포와 관련하여 그녀의 시와 함께 동성애자를 일컽는 '레즈비언 Lesbian'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레즈비언은 사포가 태어난 레스보스(Lesbos) 섬의 사람이란 뜻. 

그래서 레스보스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아테네에서는 사포를 가리켜 

'몇 명의 여자에게 빠져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몰아 붙이기도 했고, 

그 시가 음란하다고 해서 후세에 기독교인들이 시집을 파기해 버려 지금은 몇 개의 시만이 전해내려 온다.


사랑의 시를 짓고 있던 사포는 어느 날 신전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칠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아프로디테를 찾아온 파온이란 늙고 추한 이방인 청년이 사포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너무나 황홀한 사포의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 보던 파온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신전에 왔는지 조차 잊어 버리고 아프로디테에게 마법을 청한다. 

젊고 잘생긴 청년의 모습으로 보이도록 하는 특별한 향을 부탁한 것. 

아프로디테는 안쓰러운 마음에 간절히 비는 청년의 청을 들어주었다.


며칠 후 신전으로 찾아온 사포를 본 파온은 그 향을 신전 한구석에 몰래 피워둔다. 

그리고 향로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본다. 

사포는 향기에 취해서 무의식 중 아프로디테의 마법에 걸려들었다. 

결국 사포는 파온이 지닌 본래의 추한 모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를 오랫동안 꿈꿔 온 이상적인 배우자로 생각하게 된다.


그때를 틈타 파온이 사포에게 다가가자 환각에 취한 사포는 그에게 얼굴을 기대고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미 비극적인 결말이 예고되고 있었다. 

한창 사랑을 고백하던 중 향로의 연기가 사라져 사포는 결국 파온의 정체를 알게 된다. 

사포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 그만 충격으로 실신해 버린다. 

나중에 정신을 차렸지만 사포는 이상하게 파온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거짓이 사라져 버리자 절망한 사포는 55세에 사랑을 노래하며 

'연인들의 투신 바위'라고 불리는 레우카스 절벽에서 몸을 날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마르시아스(Marsyas)


마르시아스(Marsyas) 상은 터키 중남부 고대도시 타르수스(Tarsus)에서 발견되었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으로 추정된다.


마르시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로,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스 신화에서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에게 음악 대결을 신청한다.

그는 피리로, 아폴론은 리라로 연주했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비겼다.

아폴론은 악기를 거꾸로 들고 연주해 보자고 했고, 여기에서 마르시아스가 패배한다.

그러자 아폴론은 마르시아스를 소나무에 묶어 두고 산채로 가죽을 벗긴다.


또 다른 이야기는 레아 키벨레와 연결되며, 프리기아의 케라이나이의 신화 기록가들은 

사행천(멘데레스 강)의 원천을 설명할 때 그의 이야기를 전하였다.


마르시아스는 계보 상으로 올림포스(헤라클레스와 에우보이아의 아들, 테스피오스의 딸), 

또는 오이아그로스, 히아그니스의 아들로 전해진다.

올림포스의 경우, 마르시아스의 아들이나 제자로도 전해진다.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the Great) 두부상


기원전 356 년에서 323 년 사이에 살았던 마케톤 왕 알렉산더 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20 세도 되지 않았다. 

33 세의 나이로 죽은 알렉산더 대왕은 단기간 동안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전파하여 헬레니즘 시대를 열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에서 인도까지 큰 제국을 세웠다. 

알렉산더가 정복한 도시들은 나중에 군사 기지가 문화 및 상업 중심지로 바뀌면서 

고대 그리스 문화를 인도로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알렉산더 대왕 시대는 고전 예술과 헬레니즘 예술 시대 사이에 대 전환기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두부상은 페르가몬 (베르 가마)의 아고라에서 발굴되었다.

이 두부상을 조각한 리시포스(Lysippos)는 알렉산더 대왕을 위해 일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유일한 조각가이기도 하다.

사자의 갈기처럼 흐트러진 곱슬머리, 두꺼운 눈썹과 둥근 눈, 이마의 깊은 주름 등 알렉산더 대왕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


비체의 봉분에 있던 투구


터키 키르클라렐리 지방의 비체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된 투구. 1세기 것으로 추정된다. 

젊은 남자의 모습을 본딴 투구이다. 투구의 이마 부분이 경첩으로 마스크와 연결되어 있다.

쿠구의 앞 부분에는 오디세우스의 배를 박살냈던 바다 괴문 실라의 모습이, 뺨 부분에는 전리품을 든 승리의 여신 니케가 새겨져 있다.


에페보스(Ephebos)의 모습


이것은 에페보스(Ephebos), 즉 십대 남성의 동상이다. 

아마도 그는 운동 선수로 방금 운동을 마친 후 직사각형의 긴 기둥에 대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의 작고 둥근 머리가 동상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눈이 크고 입술이 약간 열려 있으며 속눈썹이 진하다. 

신, 여신, 황제 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평범한 소년이 고대 시대에 조각상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발견된 독특한 고대 유물 중 하나이다. 아마도 체육관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던 듯하다. 


마차를 모는 포르피리오스상


이 상은 토카프 궁전의 제2정원에서 발견되었으며 5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은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 광장에 서 있던 기둥의 일부였다.

마차를 모는 포르피리오스가 각 면마다 새겨져 있다.


게제르 달력 (Gezer Calander)


이 석관에는 월별 이름과 수확 시기가 새겨져 있어 기원전 10세기 달력으로 추정된다. 

히브리어로 쓰인 것 중에 가장 오래된 것에 포함된다고.


고대 해시계


이 해시계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유적지 '마다인 살레'에서 발견되었다. 

12개의 방사형 선으로 분할되어 있으며, 고대 아람어가 새겨져 있다. 

중앙에 막대기를 수직으로 세워 두면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가 표시되고, 그 그림자의 위치를 보고 시간을 읽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s)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세계 5대 박물관에 꼽힐 정도로 중요 유물을 많이 가지고 있다. 

1881년 오스만 함디 (Osman Hamdi Bey) 관장으로 임명되어 건물을 신축, 확장하고 박물관으로 발전시켰다.


고고학 박물관,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고대 아시아박물관 등 세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백만 점에 달하는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스탄불 구시가지 구글 지도


톱카프궁전과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위 '고고학 박물관', 아래 왼쪽 '고대 동양 박물관', 아래 오른쪽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고고학박물관 (Archeology Museum), 고대아시아박물관(Ancient Eastern Works Museum)과 

에나멜 키오스크박물관(Enameled Kiosk Museum) 등 세 개의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 건물인 고고학 박물관은 화가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 1881년에 건축되었고, 1908년 오늘날의 박물관으로 완성되었다

이곳에는 이스탄불과 인근 지역 그리고 그리스, 로마 유물 등 고고학 자료들이 100만 점 이상 소장되어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알렉산더 석관(Alexander Sarcophagus), 비탄에 잠긴 여자 석관, 80만 점의 오스만투르크제국 시기의 동전 및

카데시전투현판 등 그리스·헬레니즘 및 로마시대 등 다양한 예술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고고학 박물관은 2개 층에서 전시하고 있는데, 지하층에는 알렉산더 석관(the Alexander Sarcophagus) 등 유명한 석관들을 비롯해

로마시대의 사포의 두상(The Head of Sappho), 헬레니즘시대의 마르시아스 상(The Statue of Marsyas) 등 

고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위층에는 이슬람과 비이슬람 지역의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998년에 문을 연 새로운 빌딩에 있는 ‘이스탄불 주변의 문화’ 전시 공간에는 주변 지역에서 출토된 

비티니아(Bithynia)와 비잔티움(Byzantium) 등 다양한 시대의 고고학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아나톨리아(Anatolia)와 트로이 유물, 시리아, 팔레스타인, 키프러스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새 빌딩 1층에 전시되어 있다. 


'고대 아시아박물관'은 1883년 오스만함디베이에 의해 건축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가 복원과정을 거쳐 1974년 재개관 되었다. 

고대 아시아 박물관에는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아랍 반도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7만 5000여 개의 쐐기문자판도 소장하고 있다.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은 1472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메드2세(Mehmed II)에 의해 건축되었고, 

이스탄불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시민건축양식을 잘 보여준다. 

1875년과 1891년에는 황제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1953년에 터키이슬람 예술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개관되었으며 이후 현재의 이스탄불고고학 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 

박물관 자체가 하나의 유적인 셈이며 이곳에는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셀주크와 

오스만제국 시대의 기와, 타일 장식, 도자기 등 예술품 2,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입구

귈하네 공원에서 톱카프궁전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정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정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정문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안내도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박물관 정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에 마주하는 건물이 고고학 박물관, 오른쪽에 마주하는 건물이 고대 동양박물관,

그리고 안쪽으로 에나멜 키오스크 박물관이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안뜰 맞은편에 인상적인 신고전주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상과 석관, 이스탄불 역사를 조명하는 유물들이 뒤섞여 보관되어 있다. 


시돈의 공동묘지와 주변 지역에서 발굴한 석관이 보관되어 있는 전시실이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석관은 1887년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가 시돈(오늘날 레바논의 Side)에서 발굴한 것이다. 

알렉산더의 석관(Alexander Sarcophagus)과 우는 여인의 석관(Mourning Women Sarcophagus)이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다음 전시실에서는 시리아와 레바논, 테살로니키, 에페수스의 석관을 볼 수 있다. 

죽음을 숭배했던 고대에 제작된 석관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어 좋다. 


그 다음 전시실에는 AD 140~270년 세밀하게 제작된 석관이 보관되어 있다. 

아나톨리아의 원주가 있는 석관(Columned Sarcophagi of Anatolia)도 이곳에 있다. 

전시실 다수는 소규모 신전 또는 주거용 건축물로 이용되던 공간이다. 

코니아(Konya)에서 가져온 시다마라 석관(Sidamara Sarcophagus)도 볼 수 있다.


다음 전시실에는 고대 리키아 기념물과 아나톨리아(Anatolia) 건축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나톨리아와 트로이의 역사(Anatolia and Troy Through the Ages)’ 및 ‘이웃한 아나톨리아, 사이프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문화(Neighbouring Cultures of Anatolia, Cyprus, Syria and Palestine)’ 전시는 위층에서 진행된다. 

그리스 로마 이전의 헬레니즘, 로마,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해당 지역의 유물을 통해 조명하는 

‘이스탄불의 역사(İstanbul Through the Ages)’ 전시도 볼 수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Istanbul Archaeology Museum)


화가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에 의해서 18810년에 건축되었고

1908년 오늘날의 박물관으로 완성된 고고학 박물관이다.


오스만 함디 베이(Osman Hamdi Bey 1842~1910)


본관의 로비에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설립자인 오스만 함디 베이의 흉상과 기념패가 있다.

오스만 함디 베이는 이스탄불과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미술을 하기로 결심하고 프랑스의 오리엔탈리즘 화가인 

장 레옹 제롬(Jean-Leon Gerome. 1824~1904)과 구스타브 블랑거(Gustave Boulanger, 1824-88) 밑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그의 스승이던 제롬과 블랑거를 주축으로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했는데

그 화풍을 수용해서 오스만 함디 베이는 터키 고유의 이미지를 몽환적인 분위기로 그렸다.


터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곳에 위치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동서양의 문화가 교류하는 교량 역할을 하며

18세기에 예술도 동서양이 만나 독특한 분위기의 터키 예술을 탄생 시켰다.

그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터키 근대 회화의 거장인 오스만 함디 베이의 화풍은 오리엔탈리즘의 세밀화에 속한다.


화가이면서 고고학자이기도 하였던 오스만 함디 베이는 파리 생활을 끝내고 터키로 돌아와

1881년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 초대 관장이 되었다.

1882년에는 미학 및 예술 기법을 가르쳐주는 미술 아카데미를(Academy of Fine Arts) 설립했다.


1884년에는 터키 유물을 해외로 밀반출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는데

이는 터키 유물 보존을 위한 법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19세기 유럽의 권력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을 밀수입했는데

오스만 함디 베이가 법률을 제정을 통해 밀반출을 막은 것이다.


그는 과학적 정보에 기반을 둔 터키의 첫 고고학 연구팀을 지휘하고

1887년 시리아 시돈(Sidon)의 왕실 지하묘실에서 발굴한 호화로운 석관은 세계적인 유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891년 그의 지도 아래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Istanbul Archeology Museum)이 공식적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

오스만 함디 베이는 박물관 및 아카데미 디렉터로 일하며

자신의 스승이었던 제롬과 블랑거의 화풍을 살려 작품 활동도 꾸준히 했다.


변호사와 모델 그리고 거북이 조련사로도 활동하며 다재다능했던 그는

터키 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화가이면서 뛰어난 고고학자로 추앙받고 있다.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들


알렉산더의 석관 (Alexander Sarcophagus) - B.C. 330년 경 제작. 


1887년 시리아의 시돈 왕실 지하묘실에서 출토한 호화로운 석관. 

'알렉산더의 석관'이라고 전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시돈왕이 된 아브달로니모스를 위해 만든 관으로 밝혀짐.


몸체가 두 덩어리인 커다란 펜테리콘 산 대리석으로 신전형으로 만들어졌으며, 보존상태가 좋고 아름다운 채색을 남기고 있다. 

몸체의 긴 측면 부조 가운데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을 한 조각이 있어 '알렉산더의 석관'으로 명명하였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유해를 모신 석관은 아니다. 

B.C. 332년 알렉산더에 의해서 시돈의 사트랍(satrap, 封侯)이 된 아브달로니모스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만든 관으로 밝혀짐.


뚜껑 양쪽 페디멘트 부분은 전투 장면을 나타내고 석관 4면은 장단(長短)으로 각각 전투와 수렵 장면을 나타낸다. 

부조는 환조(丸彫)에 가깝고 장식은 이오니아식이다. 그리스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조각이 새겨져 저부조로 장식된 기원전 4세기 말 헬레니즘 시기의 석제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이다.

놀라울만큼 잘 보존되어 있고 높은 심미학적 작품으로서 칭송을 받고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가장 뛰어난 소장품이다.


알렉산더의 석관은 두 개씩 짝을 이루는 장식이 새겨져 있는 4개의 사르코파구스 중 하나이며, 

1887년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에서 

그리스계 오스만인 오스만 함디 베이와 아르메니아계 오스만인 예르반트 보스칸에 의한 발굴 작업 중에 발견되었다. 


이수스(Issus) 전투가 끝나고 바로 알렉산드로스가 임명한 시돈의 왕 아브달로니모스의 석관으로서

카를 셰포트가 리시포스 양식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전기 양식임에 비추어 아브달로니모스가 죽기 이전의 것으로 증명되었다. 

발데마르 헤켈은 이 석관이 페르시아 귀족이자 바빌론 총독이던 마자에우스의 것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석관은 다색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펜텔리콘 대리석으로 그리스 신전 양식을 따 만들어졌다.

셰포트에 의하면 아티카 양식이 사용됨을 들어 이오니아인 조각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여기는 한편 

밀러는 시돈에서 작업된 로도스인 작업장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정했다.


석관의 긴쪽에 있는 조각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이수스(Issus) 전투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우는 걸 묘사했다. 

폴크마르 폰 그라에베는 나폴리의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와 견주었고, 

에레트리아의 필록세노스의 소실된 공통의 원안에서 두 작품이 전래되었다고 결론지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머리에 사자 가죽을 쓰고 말을 탄 채 페르시아 기병을 향해 창을 던지려는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폰 그라에베가 동의한 조각들의 “역사성”은 신화적 전투나 왕실의 사냥이기보다 덜 강조된 카를 셰폴트의 것으로 보이며, 

일부 학자들은 가운데에서 가까운 두 번째 말을 탄 마케도니아인 조각상이 알렉산더 대왕의 오랜 절친 헤파에스티온을 나타낸다고 믿는다. 

세번째 말을 탄 마케도니아인 조각상은 자주 페르디카스로 여겨진다.


반대편의 긴 면에서는 알렉산더 대왕과 마케도니아인들이 아브달로니모스와 페르시아인들과 함께 사자를 사냥하는 모습을 보인다.

짧은 면의 끝은 눈을 신화 속의 사자를 사냥하는 모습으로 향하게 하는데, 

한쪽 짧은 면은 아브달로니모스가 표범을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다른 짧은 면은 가자 전투같은 장면을 묘사하는데, 

이 페디먼트 위에 있는 쪽은 페르디카스의 죽음을 보여준다. 

지붕 위의 페디먼트는 교전 중에 아브달로니모스를 나타낸다.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부분


말을 물어 뜯는 사자, 그 사자와 싸우는 그리스 군인들의 모습이 생생하다. 

한 명은 도끼로, 또 한 명은 창으로 사자를 찌르고 있다. 

현재 창은 없지만 오른손은 확실히 창을 쥐고 있는 형상이다. 

이미 창 끝이 사자의 왼쪽 앞발을 찌른 흉터(붉은 원)가 있고, 사자의 뒷다리를 무는 사냥개의 모습 또한 용맹스럽다.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부분


이수스(Issus) 전투 (BC333)에서 페르시아군을 패퇴시키는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군. 

석관 맨 왼쪽에 있는, 사자 탈을 머리에 쓰고 말을 탄 사람이 알렉산더 대왕이다. 

창을 높이 치켜든 채 적을 찌르려 하고 있다. 

말은 앞발을 힘껏 들어올려 적을 향하고 있다. 

이 석관 면에만 18명의 사람과 6마리의 말을 등장시켜 치열한 격전을 치르는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1887년 알렉산더 석관의 발굴 장면


Ayaa 네크로폴리스 묘지 발굴의 횡단면. 

알렉산더 석관은 하단 가운데


알렉산더의 석관 짧은 면 중 하나의 색상 재구성

석관의 짧은 쪽 중 하나를 채색본으로 복원한 모습


알렉산더 석관에서 Achaemenid 기병대의 색 재건


알렉산더 석관에서 Achaemenid 보병의 색 재건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부분


아직도 석관 위쪽에는 흐릿하게나마 색감이 남아 있다.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알렉산더의 석관 (The Alexander Sarcophagus)


본래는 이처럼 대리석에 색을 입힌 모습이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빛깔이 바래어 완전히 탈색되다시피 변해버렸다. 

복원된 부조에는 창도 또렷이 표현되어 있다.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BC 350년 작품


고고학 박물관 알렉산더 석관 묘 바로 뒤에 전시돼 있는 또 하나의 걸작. 

인간의 슬픔을 가장 아름답고 비애스럽게 표현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BC 350년 작품 )


사랑하는 연인 시돈(Sidon)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도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픔에 잠기게 한다. 

사면의 조각에 섬세하게 전신으로 새겨진 여인들의 표정이 놀랍게도 각양각색으로 표현돼 있어 

하나하나 뜯어보려면 오랜 시간을 서 있어야 한다.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부분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부분


슬피 우는 여인들(Mourning Women) 부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석관


시다마라 석관(Sidamara Sarcophagus)

터키의 코니아(Konya) 지방에 있는 소아시아의 고대 도시 시다마라(Sidamara)에서 가져온 석관


시다마라 석관(Sidamara Sarcophagus)

터키의 코니아(Konya) 지방에 있는 소아시아의 고대 도시 시다마라(Sidamara)에서 가져온 석관


아나톨리아의 원주가 있는 석관(Columned Sarcophagi of Anatolia)


로마 석관에서 시다마라(Sidamara) 유형의 석관은 그림이 조각된 기둥으로 분리되어 

배경에 묘사된 작은 키오스크에 배치되는 건축틀로 조각되었다. 

키오스크에는 페디먼트 또는 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종종 반각으로 장식된 천장으로 덮여 있다.


아나톨리아의 원주가 있는 석관(Columned Sarcophagi of Anatolia)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 (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Lycian sarcophagus of Sidon in Parian marble from the Sidon necropolis)


레바논 시돈(Sidon) 인근의 네크로폴리스 (Necropolis)에서 발견된 석관


팔미란 무덤실


팔미란인들의 무덤실이다. 

실제 무덤은 시리아의 팔미라 무덤 계곡에 있고, 전시를 위해 박물관 내에 다시 만들어졌다. 

지하 가족 무덤은 1~2세기에 팔미란 상류층에서 사용되던 방식이었다.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상단부의 부조화 원본


Pediment and shafts of a temple


[KBS 영상] 세계 5대 고고학 박물관 (Archeology Museum)




하렘 (Harem) 입구는 제2 중정 서쪽, 정의의 탑(Tower of Justice) 아래에 있다.
토프카프 궁전을 방문한 이상 놓쳐서는 안되는 궁전의 하이라이트이다.




하렘(harem) 출입구


톱카프 궁전 제2 정원 한쪽에 있는 하렘의 입구 수레의 문.

오스만제국은 규모가 크고 관리가 잘된 하렘(harem)으로도 유명하다.


술탄은 왕비를 비롯해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모든 여성들 혹은 그들이 생활한 규방을 흔히 하렘이라 불렀다.
하렘은 술탄의 모후가 통제했는데, 모후 아래에 왕자를 생산한 왕비들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 후궁들과 젊은 여성들이 있었으며, 여성 노예도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술레이만 1세가 죽고 나서 제국이 흔들리면서 하렘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 하렘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또한 고립된 곳에서 생활했다.


하렘의 수장인 모후는 궁궐의 실제 관리자로서 하렘 여성들과 술탄의 관계를 통제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보낼 종교기금도 관리했다.


초기에는 코카서스 출신의 백인 환관들이 하렘을 수비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나일강 상류 출신의 흑인 환관들이 하렘을 지켰다.
흑인 환관들은 이스탄불로 실려 오는 도중에 거세되었다고 한다.


보통 궁궐 내의 후궁이나 가정의 내실을 가리킨다.
하렘은 금단(禁斷)의 장소를 의미하는 아랍어 하림(harīm)이 터키어풍으로 변한 말이다.


이슬람의 풍습 ·관습에는 아라비아의 것이 계승된 것이 많은데,
여성이 베일로 얼굴이나 기타 다른 부분을 덮는 풍습도 이슬람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하렘은 특히 이슬람시대부터 엄격하게 지켜져 남녀간의 풍기를 규제하였다.
《코란》에도 이슬람교도의 예언자(무함마드)의 집, 특히 아내들에 대한 수칙이 기록되어 있다.


예언자의 아내들에게 무언가 물을 경우에는 장막 뒤에서 해야 하고,
예언자의 아내들이 맨얼굴을 보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경우는 그들의 아버지나 자녀들,
형제 자매, 가까운 친척 및 같은 여신자들과 자신의 노예에게 뿐이다.


이것은 예언자의 아내들뿐만 아니라 이슬람사회 일반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의 여성들은 하렘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면서
가정이나 종교 행사에 참여하고 하마무(목욕탕)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피하였다.


하렘은 왕후귀족 ·부호의 가정에서 두드러졌는데, 환관으로 하여금 하렘의 여성을 돌보게 하거나 단속토록 했다.
환관은 대개 흑인이나 백인 노예였는데 거세수술(去勢手術)은 유대교도 또는 그리스도교도가 담당했다.


이러한 하렘의 풍습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방문한 유럽인이나

《천일야화(千一夜話)》 등의 작품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1909년 오스만제국의 술탄 압둘하미트 2세가 퇴위하자 하렘에 있던 여성들은

가족들에게 되돌아가고 하렘은 사실상 폐쇄되었다.

하렘(harem) 출입구. 톱카프 궁전 내 금남의 구역인 하렘.


술탄과 왕자를 제외한 그 어떤 남자의 출입도 허락되지 않았던 하렘은

술탄의 여자들과 어머니, 가까운 친족들만 지내는 곳이었다.


하렘에서는 새로 들어온 여인들의 교육을 담당 했고, 거세된 흑인 내시들이 시중을 들었다.
하렘에는 300개 이상의 방과 9개의 목욕탕, 모스크, 병원, 학교, 도서관, 부엌, 창고, 정원, 황제의 홀,

지하 감옥까지 갖춰져 있었고 300~500여 명이 살았다고 한다.


폐쇄적 삶을 사는 왕의 여인들의 공간으로 내부는 굉장히 화려했다고 한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공중목욕탕인 하맘은 수도꼭지까지 황금빛이었을 정도라고.


1909년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압둘하미트 2세가 퇴임하면서

자연스레 하렘도 폐쇄되었다고 한다.


하렘은 왕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다.
왕의 어머니도 이 곳에 살았고 왕의 간택을 받을 궁녀들도 여기 살았다.


오스만제국은 규모가 크고 관리가 잘된 하렘(harem)으로도 유명하다.

술탄은 왕비를 비롯해 많은 후궁을 두었는데,
모든 여성들 혹은 그들이 생활한 규방을 흔히 하렘이라 불렀다.


하렘은 술탄의 모후가 통제했는데, 모후 아래에 왕자를 생산한 왕비들이 있었고,
다시 그 아래에 후궁들과 젊은 여성들이 있었으며, 여성 노예도 있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술레이만 1세가 죽고 나서 제국이 흔들리면서 하렘은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 하렘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또한 고립된 곳에서 생활했다.


하렘의 수장인 모후는 궁궐의 실제 관리자로서 하렘 여성들과 술탄의 관계를 통제하고,
메카와 메디나에 보낼 종교기금도 관리했다.


초기에는 코카서스 출신의 백인 환관들이 하렘을 수비했으나 16세기 말에 이르러

나일강 상류 출신의 흑인 환관들이 하렘을 지켰다.
흑인 환관들은 이스탄불로 실려 오는 도중에 거세되었다고 한다.


The Gate of Carts entrance. 제2 중정에 위치한 하렘 입구.

원래 물자를 수송하거나 하렘의 여인들을 태운 마차가 드나들던 곳이다.


하렘(harem) 출입구. 톱카프 궁전 내 금남의 구역인 하렘.


보통 궁궐 내의 후궁이나 가정의 내실을 가리킨다.
하렘은 금단(禁斷)의 장소를 의미하는 아랍어 하림(harīm)이 터키어풍으로 변한 말이다.


이슬람의 풍습 ·관습에는 아라비아의 것이 계승된 것이 많은데,
여성이 베일로 얼굴이나 기타 다른 부분을 덮는 풍습도 이슬람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하렘은 특히 이슬람시대부터 엄격하게 지켜져 남녀간의 풍기를 규제하였다.

《코란》에도 이슬람교도의 예언자(무함마드)의 집, 특히 아내들에 대한 수칙이 기록되어 있다.


예언자의 아내들에게 무언가 물을 경우에는 장막 뒤에서 해야 하고,
예언자의 아내들이 맨얼굴을 보여도 죄가 되지 않는 경우는 그들의 아버지나 자녀들,
형제 자매, 가까운 친척 및 같은 여신자들과 자신의 노예에게 뿐이다.


이것은 예언자의 아내들뿐만 아니라 이슬람사회 일반에까지 미쳤다.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의 여성들은 하렘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면서
가정이나 종교 행사에 참여하고 하마무(목욕탕)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피하였다.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높은 담벼락 아래에 있는 하렘으로 내려가는 길


공간이 왠지 폐쇄적이고 답답해 보인다.

서양 사람들은 하렘을 매우 방탕하고 음란한 곳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왕의 여자가 될만한 수양을 기르기 위해 여자들을 교육하기도 했고

교육이 끝난 후 본인이 원하면 하렘을 나갈 수도 있었다.


하렘에 들어오는 여자들은 오스만제국인이 아니었는데

왕의 외척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입구에 있는 주방 겸 내시들이 일을 하던 공간.


창문 하나하나마다 창살로 덮여 있는 하렘 내부.


하렘 입구쪽에 여인들의 시중을 들던 내시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하렘 입구쪽 내시들의 공간 이슬람 양식 천장


내시들의 공간 이슬람 양식의 천장.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흑인 내시들이 주로 머물던 공간으로 그들의 주된 임무는 하렘 입구를 지키고, 출입하는 사람을 확인하고,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사람이 들어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었다고.


주변에 흑인 내시들의 기숙사와 왕자들의 학교가 있었고

내시들을 위한 교육시설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내시의 경우 중앙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아이들과 아바시니아(에티오피아의 옛이름) 출신의 어린이들 중에서
선발한 다음 엄격한 검증 과정을 거치고 교육을 받은 후 하렘에 배치되었다고.


내시의 뜰 (The Court of Eunuchs)





하렘(Harem)으로 들어가는 메인 게이트


하렘(Harem)으로 들어가는 메인 게이트


내시의 뜰을 지나면 하렘으로 가는 메인 게이트가 나온다.
하렘의 메인 게이트로 하렘 내 세 곳의 주요 장소와 연결되는 문이다.


아치가 있는 돔형 현관이라고 보면 되는데 왼쪽에 있는 문은 첩과 아내들이 있는 곳,
중앙의 문은 어머니가 지내는 곳, 오른쪽 문은 술탄의 개인 거처와 연결된다고.


이렇게 생긴 길은 황제와 황제 어머니, 황후만이 걸었다고 한다.


Hall of the Ablution Fountain


푸른 타일로 장식된 통로


푸른 타일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여기에도 사하다가 써 있다.


푸른 타일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İznik tiles decorate the interior



술탄만이 걸을 수 있었던 길.


하렘 복도 내부에 걸려 있는 호화찬란한 초대형 거울


The Golden Road


하렘 내부에서 메인 로드 역할을 한 황금의 길(Altın yol)의 모습.
이 길을 중심으로 좌우로 하렘 내 직급에 따라 여인들의 방이 배치되었으며,
하렘의 입구에는 환관장의 방이 있었다


The Courtyard of the Eunuchs


Courtyard of the Apartments of the Queen Mother (Valide Sultan Dairesi)
가운데 도로는 황제의 길


Courtyard of the Concubines


이제 후궁의 복도(Corridor of the Concubines)로.


이 복도의 돌 위에 빈 접시를 두면 내시들이 후궁과 겹치지 않는 시간대에 와서 치웠다고.

복도는 창이 작고 창살로 덮여 있어 어두운데다가 좁은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던 공간이었음이 조금은 실감이 난다.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과 어머니가 차를 마시는 테이블


Exhibit representing the Queen Mother and her attendants in her apartments


술탄과 어머니가 차를 마시는 테이블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첫 번째 방은 왕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이다.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이다.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술탄의 어머니인 '발리테'가 기거했던 곳.


안내문


술탄(왕)은 매일 아침 어머니의 방을 찾아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이때 어머니는 술탄에게 짝지어 줄 여자를 골라 차를 내어 오도록 시켰다고 한다.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여자를 요구하고 마음에 들면

그 여자가 계속 차를 내 왔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어필했단다.


화려한 천장 장식.
2층이 술탄의 어머니 침실인데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



Baths of the Sultan with gilded grill

술탄의 전용 목욕실


술탄의 방 (Imperial Hall).  술탄의 방으로 통하는 하렘의 복도를 지나면 화려한 방이 나온다.


정복자 메흐메트가 콘스탄티노플 정복 후 서거(1481년)할 때까지 이 궁전에 기거했으며
그 이후 술탄들은 이곳에 살다가 19세기에 보스포루스 해협 인근에 새로 건축한 아름다운 유럽식 궁전으로 이주했다.

술탄의 방 (Imperial Hall)


Imperial Hall with the throne of the sultan


각종 연회 및 축하연과 중요한 의식을 이곳에서 개최했다고 한다.
수세기에 걸친 보수 및 수리를 거쳐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술탄의 방 (Imperial Hall)




술탄의 방 (Imperial Hall) 화려한 천장 장식.





세면대


푸른색 타일로 꾸며진 술탄의 방 (Imperial Hall)





후궁들이 술탄의 방 (Imperial Hall) 연회를 숨어서 지켜보던 방


술탄의 방 (Imperial Hall)에 시계도 있다.


터키 관광지를 돌아 다니다 보면 멈춰진 시계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대부분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터키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가 죽은 시각이 9시 5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광지 시계를 거기에 맞춰 멈춰 있게 했다고 한다.


푸른 타일은 원래 터키의 지역 특산물이었다.


유럽 사람들도 이 푸른 타일에 매료되어 많이 사 가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네델란드 등에서 이 기술을 많이 따라 잡았다고 한다.
술탄의 방에 있는 파란 타일도 네델란드 산이라고 한다.

술탄의 방 (Imperial Hall) 거울
술탄의 방에는 큰 거울이 하나 걸려 있는데 거울에 반사되게 찍으면 돔까지 한 프레임에 찍을 수가 있다고 한다.

푸른 복도를 지나




다음 방 술탄 무라드 3세의 방 안내


다음 방은 술탄 무라드 3세의 방인데 방 주인보다 이 방을 만든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더 유명하다.
미마르 시난은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 활동한 건축가이며 미켈란젤로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아야 소피아가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미마르 시난의 보수 공사 때문이라고 한다.

그 외 술레마니에 모스크, 셀리미예 모스크 등을 건축하여 큰 돔돠 첨탑을 특색으로 하는 오스만 특유의 양식을 완성시켰다.


The Fruit Room with painted walls


술탄의 개인 처소와 전용 목욕탕인 하맘 사이에 위치한 임페리얼 홀은 하렘에서 두 번째로 큰 돔형 공간이며
톱카프 궁전에 남아 있는 문서와 그림 등을 통해서 유추해 봤을 때 오스만 제국의 12대 술탄인
술탄 무라드 3세 때인 158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Interior of the Circumcision Room






The fountain of the Privy Chamber of Murat III






Stained-glass windows decorate the interior


이 방은 술탄 무라드 3세가 공적 업무도 보고 사생활도 즐기던 곳인데 오스만 건축 중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한다.


아름답고 웅장한 돔.


술탄 무라드 3세 (Privy Room of Murad Ⅲ)의 방


술탄 무라드 3세의 개인 거처로 1579년에 당대 최고의 건축가 Sinan이 디자인 하고 건축했다고 한다.
16세기에 유행했던 이즈닉 타일로 덮여 있다.


Audience given by Ahmed III in the Audience Chamber, painting by Jean-Baptiste Vanmour (September 1727)


술탄 무라드 3세 (Privy Room of Murad Ⅲ)의 방


Ottoman "arma" symbol (military)


Photograph of the last Sultan Mehmed VI

오스만 투르크 마지막 술탄 메흐메드 6세


한때 유럽을 떨게 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도 황혼이 찾아왔다.
1299년 창건, 메메드 2세, 셀림 1세, 술레이만 1세를 거치며 지중해를 장악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16세기 후반 이후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동맹국 등 유럽 열강들에 의해 영토를 유린 당하며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8년 즉위한 메메드 6세(1861~1926)는 36명의 황제 중 마지막 황제로
제국의 종말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유럽 열강에 분노한 민족주의자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투르크 대국민회의'가
1922년 황제가 겸임하던 술탄(황제)과 칼리프(이슬람교 최고 지도자)를 분리하고 술탄제를 폐지함으로써 폐위됐다.


그의 폐위와 함께 623년 역사의 오스만투르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무스타파 케말은 다음해 터키 공화국을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메메드 6세는 말타로 추방됐다가 이탈리아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휴양지 산레모에서 66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황제 집안의 핏줄을 타고 났지만 그는 평범한 능력의 소유자였고 비범했다 해도
역사의 거대한 물결을 거스를 수 없었다.



메흐메트 6세


압둘 하미드 2세인 '붉은 술탄' 의 뒤를 이은 이름만인 술탄 자리는 이복 동생인 와히뎃딘(Vahideddin)이었다.
이 사람이 메흐메트 6세(Mehmed VI; 1861∼1926)이다.


아버지인 압둘 메지드 1세는 1861년 6월 38세 나이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35명의 자식을 두었었고,
마지막 술탄이 된 메흐메트 6세는 아버지가 죽기 4개월 전인 1861년 2월에 태어난 것이다.
메흐메트 6세는 한동아나 돌마바흐체 궁전에 살았으나, 이을드즈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케말의 투쟁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협상국은 오스만제국을 완전 해체하려고 전쟁 중에 비밀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1919년 5월 15일 협상국을 등에 업은 그리스 군은 '대 비잔틴 부활'을 내세워
에게해에 펼쳐진 옛날 그리스인들 비잔틴 제국의 재건을 시도했다.


아나톨리아 각 지역에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 영토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엔웨르 파샤의 '범튀라니즘'과도 통하는 사상이다.
그리스 군은 영국의 지원을 얻어 이즈미르에 상륙하여 점령지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 때 전쟁 영웅인 무스타팔 케말이라는 장군이 북부 지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취임인사를 하기 위하여 이을드즈 궁전으로 향했다.
압둘 하미드 2세가 세운 추밀원 2층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메흐메트 6세와 만난 것이다.


1919년 5월 16일 케말은 이을드즈 궁전을 뒤로하고, 흑해의 삼순항으로 떠났다.
케말이 탄 배가 이스탄불을 출발한 몇 시간 후, 메흐메트 6세는 경찰 측으로부터 무스타파 케발에 관한 보고서를 들었다.


케말이 아나톨리아의 혁명 지하 조직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출발한 케말에 대해 메흐메트 6세는 항만관리 당국에 체포령을 내렸다.


케말이 제9군 감찰관의 자격으로 삼순항에 상륙한 것은 5월 19일로 혁명은 이날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이 날은 10일 후인 5월 29일의 메흐메트의 정복자의 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화국의 기념일이 되었다.


삼순에 상륙한 날은 비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술탄은 체포령을 내렸으나 아무도 이것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 점령군은 술탄의 명령에는 따르지 않고, 그저 케말을 미행하는데 그쳤다.
케말은 터키군이 와해된 상태에서 연합국과 이스탄불 정부에게 투쟁을 선언하고,
민병대를 조직, 무장 투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종전 협상으로 이스탄불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협상국은 1920년 3월에는 점령지를 확대하고,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연합국의 괴뢰가 된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에 맞서 케말은 1920년 4월 앙카라(Ankara)에서 '대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이 의회는 술탄이 이교도의 손에 있다고 단정하고 외세를 축출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술탄의 축출과 투르크 제국의 멸망


1920년 8월 10일 세브르(Sevre) 조약을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강요하여 체결하였다.
내용은 오스만제국의 영토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히자즈는 독립시키고,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두고,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르메니아는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며,

그리스는 에게해의 섬들과 이즈미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이 실행되면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의 일부만 영토로 하게 되어 사실상 망국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이 가혹한 조약의 체결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으며 튀르크 국민의 술탄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대국민의회는 1921년 1월 기본법을 제정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였다.


국명은 투르키예(Turkiye, 영어로는 Turkey)로 하고 국가 운영은 집행위원회가 하도록 하였다.
그리스 군이 이즈미르를 거점으로 앙카라까지 진격해 오자

1921년 8월 케말이 지휘하는 민병대는 사카리아(Sakarya)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1922년 9월에는 '바다로 쓸어 넣기 작전'을 실시하여

그리스 군을 이즈미르에서 축출하고, 문자 그대로 바다로 쓸어 넣었다.


그리스 군 포로는 6만이 넘었다.

1922년 11월 1일 대국민회의는 술탄제도 폐지를 결의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는 11월 17일 돌마바체 궁전에서 영국 배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로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멸망했다.


The Courtyard of the Favou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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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side view of the Twin Kiosk


Open recess (iwan) of the Yerevan Kiosk


View towards Baghdad Kiosk


Terrace Kiosk


Tower of the Head Tutor / Chamber of the Chief Physician


Grand Kiosk


Terrace Mosque


Upper terrace with fountain, İftar bower and Baghdad Kiosk


Panoramic view of the Marmara Sea from the palace


2006. 3. 13. 톱카프 궁전 방문 인증샷.


톱카프 궁전 정원에서 바라보는 마르마라 해의 아름다운 광경

오른쪽 아래로는 톱카프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살짝 보인다.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톱카프 궁전 (Topkapi Palace)



참조 ;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80539496
https://blog.naver.com/ahnys0/22122958034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694&cid=43079&categoryId=4307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60465&cid=40942&categoryId=31600
https://ko.wikipedia.org/wiki/%ED%86%B1%EC%B9%B4%ED%94%84_%EA%B6%81%EC%A0%84

https://en.wikipedia.org/wiki/Topkap%C4%B1_Palace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w24001&logNo=221340043579

http://blog.naver.com/lsw24001/221340933281 

https://lonelyplanet.co.kr/guide/cities/istanbul/spots/topkai-palace#btn-mapClose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w24001&logNo=221340933281&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sw24001&logNo=221340043579
https://en.wikipedia.org/wiki/Topkap%C4%B1_Palace

https://blog.naver.com/ahslxj42/220985008995





지복의 문


‘바쉬스 싸데(Bâbüssaâde 또는 Bab-üs Saadet)’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III. Avlu)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이곳에서는 남성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 시대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한 보석관이 있다.


수없이 많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가 박힌 선물들이 즐비하다.
성물관(聖物館)에는 1517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가져왔다는 무함마드의 수염과 이빨,
그가 들었던 군기, 그의 발자국 주조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정복한 술탄 셀림 1세는 1516년 8월 칼리파직을 이양받음으로써 이스탄불이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칼리파란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인데, 이전에는 바그다드와 카이로가 이슬람 세계를 통치하는 주요 도시였다.


최근에는 이슬람 과학과 기술을 설명한 이슬람 과학관이 개설되었다.

도자기관에는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 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 명, 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


제4중정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오스만 고위 관리의 자제들도 입학하였다.


그들은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는 물론 꾸르안, 역사, 수학, 음악 등을 배웠다.
엄격한 체력 단련을 통해 기마술과 무기 다루기에 능했으며, 궁중 내 예의범절도 익혔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궁정학교 출신들은 주로 오스만 조정의 행정관리로 배치되었고,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였다.


지복의 문


디완(diwan)에서 나와 정원 끝에 보면 단층 건물의 입구처럼 생긴 제3의 문이 있다.
'바쉬스 싸데(Bab-üs Saadet)'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지복의 문 바로 뒤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지복의 문


뒤로는 '백인 내시의 정원'이라고 부르는 제3  정원을 건물들이 장방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이곳은 술탄의 사적 공간이었는데, 알현실 다음에 작은 도서관이 있고,
오른쪽 끝에 있는 방은 술탄의 보물창고이다.


Painting of Sultan Selim III holding audience in front of the Gate of Felicity

과거 이곳에서는 황제의 대관식이 열렸다.


제3 정원에 위치한 보물관은 톱카프 궁전 관람의 하이라이트다.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갑옷과 투구, 무기 등 호화로운 보석으로 장식된 물건들이 가득했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도 유명하다.
술탄과 그가 선택한 특정 인물들만 제한적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Arz Odası, the Audience Chamber


제3 정원


The Conqueror's Pavilion (Fatih Köşkü) houses the Imperial Treasury


제3중정에 위치한 정복자의 정자(Fatih Köşkü) 모습.
이 건물은 톱카프 궁전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1460-1462년 사이에 세워졌다.


현재는 보물관 1,2,3,4로 쓰이고 있는데 여름에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베란다를 개방하고 있다.
전망이 탁 트여서 매우 아름답다.


Hallway of the Conqueror's Pavilion


Main entrance to the Audience Chamber, with the small fountain of Suleiman I to the right, and the large gifts window to the left

Door to the Imperial Treasury (Hazine-i Âmire)


제3 정원



제3 정원


Library of Ahmet III / Enderun Library



이곳에는 남성 출입 금지구역으로 250여 개 의 방이 있고, 술탄은 비밀 통로를 통하여 마음에 드는 여자를 품었다고 한다.

제3 정원 보물 전시실 입구



톱카프 궁전 지복의 문을 들어서면 250여 개의 방 중에 보석을 저장하는 "보석방","성물관",

"도자기 관" 등이 있고 지금은 박물관 구실을 하고 있다.


보석관 진열품


이 보물창고에서 가장 큰 보석은 3.26킬로그램짜리 에메랄드 원석이란다.

이렇게 대단한 보석들이라면 그림자만 지나가도 경보가 울리는 삼엄한 분위기에서
현란한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뽐내야 할 것 같은데, 이 보물창고는 비교적 조용하다.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보석관 진열품.


보석관 진열품.


황금과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톱카프의 단검


술탄이 사용하던 왕좌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이곳의 백미는 무려 86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이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큰 것으로 주위에 49개의 큼직한 다이아몬드로 장식하고 있다.


이 다이아몬드는 '스푼 다이아몬드'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이 보석을 건진 어부가 세 개의 스푼과 맞바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궁전 키친 진열품


The Golden Way


골든 로드는 하렘에서 가장 길고 오래되고 중요한 통로.
안쪽의 궁정 마당으로부터 하렘을 분리시키는 목적의 아치형 도로로 골든 로드라는 이름은 도로의 모습에서 나온게 아니라
특별한 날 술탄이 이 길을 통과할 때 하렘의 주민들을 위해 금화를 뿌렸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렘(harem)의 모스크


화려하고 엄청난 규모의 다른 모스크에 비해 아담하면서도 소박하다.
하렘의 여인들은 주로 이교도 식민지에서 끌려오거나 조공으로 바쳐진 여인들이다.
이슬람 율법에서는 이슬람 교도들을 노예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렘(harem)의 모스크


국적과 종교가 제각각인 여인들이 하렘에 들어오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언어와 음악, 춤, 화장법 등을 배워 술탄을 즐겁게 하는 여인으로 거듭난다.


술탄의 개인 재산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은 술탄의 눈에 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고.
술탄의 눈에 띄어 아들을 낳게 되면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이 되고, 그의 아들이 술탄에 오르면
하렘의 최고 지위를 가진 발리데 술탄(Valide Sultan)이 되어 권력과 돈을 손에 쥐게 된다.


하렘(harem)의 모스크


오스만 제국에는 술탄의 장자 계승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누가 낳은 아들이든

능력만 인정되면 술탄이 될 수 있었고하렘 여인들의 권력을 향한 의지와 술탄을 차지하기 위한 몸부림은

우리나라의 장희빈이나 중국의 양귀비 저리가라 할 정도였다고.


실제로 하렘의 여인들 중 최초로 노예에서 발리데 술탄까지 올랐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쉴레이만 대제를 사로잡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록산나라고 한다.


제 4정원은 술탄과 가족들을 위한 휴식 공간이다.
이 곳에는 여러 개의 쾨시퀴(Köşkü, 일종의 정자)들이 있다.


Apartments of the Sultan's Favorites and the Mabeyn Corutyard
내시의 뜰과 달리 건물 벽 사이에 완전히 둘러쌓여 있지 않고 한쪽 면이 열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테라스


원래 술탄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남성을 죽인다고 한다.
자신의 형제에서부터 자식까지 위협이 될만하면 모두 죽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죽이지 않고 가두어 둔 채로 살았는데

그 감옥같지 않은 감옥을 새장이란 이름으로 불렀단다.


테라스


후에 술탄이 몸이 약해 자신의 후계가 걱정이 되어 형제들을 죽이지 않은데서부터 존속 살인이 끝났지만
갇힌 채로 세상 물정도 모른 채 궁중 교육만 받았던 왕족 남자들이 술탄이 되면서 결국 술탄의 세력 약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그 결과 술탄을 지키던 군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술탄을 죽이기까지 한 것이다.


이 곳에 있는 정자들은 오스만 제국이 여러 도시를 정복할 때마다 그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그래서 정자 이름이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 따 온 것이 많았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는 전망이 너무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는 아시아 지역이다.


무슨 ~ 정자


가운데 분수가 있다.


여긴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오른쪽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정면 작은정자 (Iftaree Pavilion)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내부


여러 정자들이 있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내부는 대부분 타일로 꾸며져 있다.


바그다드 정자 (Baghdad Kiosk) 내부



작은 정자 (Iftaree Pavilion)


이 테라스에 보이는 저 금색 지붕의 작은 정자는 라마단 기간에 술탄이 금식 후 첫 끼니인 이프타르를 먹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력 9월을 신성한 달이라고 여겨 일출에서 일몰 기간 동안 금식을 하고 기도를 드린다.
술탄은 라마단 기간 일몰 후 이곳에 와서 금식을 마치고 첫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작은 정자 (Iftaree Pavilion)에서 바라보는 풍경


Gate of Felicity


Imperial Council


Imperial Council


Imperial Council


Library of Ahmet III / Enderun Library


One of the hollow trees, in the Third Court



톱카프 궁전에서 바라보는 갈라타 타워


톱카프 궁전에서 바라보는 보스포러스 해협

아래로는 톱카프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보인다.


2006. 3. 13. 경관이 너무 좋아서 인증샷 한번 더.
오른쪽 아래로는 톱카프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살짝 보인다.


참조 ; https://ljhoi.blog.me/221363753799
https://blog.naver.com/ahnys0/221229580348
https://blog.naver.com/fightclub/221380539496
https://blog.naver.com/beryu1/110189481389

https://blog.naver.com/wrinklecat/155792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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