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 지도


필로파포스(Philopappos)는 고대 로마시대 집정관의 이름이다.
아테네인들은 관대한 정치를 베풀었던 그에게 감사와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가 죽은 후 추모탑을 세우고

이 언덕에 이름을 붙여'필로파포스 언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 추모탑과 거기서 바라보는 아테네의 아름다운 전경으로도 유명하지만
이곳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라고 전해지는 '소크라테스 감옥'이 위치해 있어서 더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플라톤(Plato),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를 이룩한 인물이다.


소크라테스의 생애를 추정할 수 있는 초창기 자료는 대부분

제자인 플라톤과 크세노폰(Xenophon)에게서 나왔다.


플라톤의 대화편 《테아이테토스(Theaetetos)》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 아테네에서 조각가인 아버지 소프로니코스(Sophroniscus)와

산파인 어머니 파이나레테(Phaenaret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을 가르치는 일 즉, 철학적 토론에 매진했는데,

남루한 옷차림으로 광장을 거니는 그에게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강의를 통해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누렸던 소피스트(Sophist)와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가르침의 대가로 돈을 받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뻐덕니, 주먹코에 왜소한 체격과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체력이 좋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느긋한 성격이었으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고,

부(富)에 연연하지않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크산티페(Xanthippe)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크세노폰은 《회고록(Memorabilia)》에서 어머니의 엄격함에 대해

불평하는 아들과 아들을 타이르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다루었다.


이를 근거로 후대 저작들에서 크산티페는 종종 잔소리 많은 악처로 묘사되는데

이는 과장된 측면이 크다.


소크라테스는 말년에 정치적 문제에 휩쓸렸다.
당시 아테네에는 기존 민주주의 세력과

스파르타의 법을 새로이 차용하고자 한 귀족주의 정파 간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었다.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하자 귀족주의 세력이 힘을 얻었으나
다시 세를 회복한 민주주의 정권은 소크라테스를 귀족주의의 본보기로 처형하고자 했다.


비록 현실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이론들은 민주주의를 비난하는 것처럼 보였고,
제자와 친구들 상당수가 귀족주의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플라톤은 대화편 《파이돈(Phaidon)》에서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나뉠 정도로

철학사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철학사상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러나 직접 남긴 저작이 없기 때문에 그의 고유한 사상을 명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의 학설은 제자들이 남긴 기록과 그 안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언행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되고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문답법이라는 독특한 교육방식과 재판과정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토론하는 것을 즐겼는데

일반적인 교사들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주고자 했던 것과는 달리 거꾸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경건하고 불경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신중함과 무모함이 어떻게 다른지,
우정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에 관해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답을 찾아 나가도록 유도하였다.


질의응답을 통한 지식의 추구라는 변증법 방식은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발전시켰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고자 했다.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고대 격언은 소크라테스를 통해 더욱 유명해졌다.


델포이 신탁은 소크라테스를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


이와 같은 인간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과 문답법을 이용한 내면적 탐구는
고대의 철학적 관점이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추구하였던 그는 ‘선’을 중시하여 토론 과정에서도 관련된 질문을 많이 던졌다.


또한 그는 옳은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행하게 된다고 생각하여 덕과 앎을 동일시하였다.
최선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참된 덕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의 추구는 스토아학파의 선구적인 모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었다.
특히 ‘현인(賢人)에 의한 통치’, ‘화려한 연설에 대한 비난’,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자각’,
‘덕과 앎의 일치’는 아테네의 민주주의 정부에 대한 위협으로 비춰졌다.


이후 플라톤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켜

이상적인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한편 일부 연구자들은 아름다움, 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는데서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의 '이데아'에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으나,

두 사상의 개연성에 비약적 측면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소개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갇힌 곳은 고대 아고라에 있다고 한다.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모 방송국 아나운서로 재직하다가 아테네로 유학을 와서

현지인과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가이드는 낭랑하고 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소크라테스의 인생과 철학을 감동깊게 해설한다.


소크라테스는 매일 아고라에서 시민과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대화를 통해 사람들의 영혼을 각성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테네가 전쟁 후 스파르타에게 항복한 이후 시민들은 변하게 된다.


스파르타의 지배는 8개월 만에 무너졌고 다시 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부패한 야심가들에게 눈엣가시였던 소크라테스는 불경죄로 몰려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 후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남긴 진술은 "악법도 법이다"


소크라테스의 감옥 내부


이곳은 고대 아테네에서 실제로 죄인을 가두는 감옥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불리는 것일 뿐,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고라의 감옥에서 죽었다고.

2006. 03.12 감옥 앞에서 인증샷


필로파포스(Philopappos) 추모비


기원전 2세기에 건설된 필로파포스 추모비는 약 12m 높이의 대리석 탑이다.
실제 이 추모탑 뒤편에는 필로파포스의 석관이 있었다고 하는데 파괴되었고,
지금의 모습은 1904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바라보는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에서 바라본 필로파포스 언덕


참조 ; https://spceo.blog.me/22113541474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385968&cid=43843&categoryId=4384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14187&cid=40942&categoryId=40465





하드리아누스 도서관(Hadrian's Library)


AD 131~132년에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가 세웠다.
아크로폴리스 북쪽, 로마시대의 아고라 바로 옆에 있다.


안뜰을 둘러싸듯 기둥이 늘어서 있고, 동쪽 회랑을 따라 나 있는 5개 방 중에서 가운데 방이 도서관이었다.
19세기 초 발굴 조사 이래 도서관이라 불려왔는데 실제로는 로마제국 공공광장(公共廣場)인 포룸(forum) 스타일에 가깝다.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전체 건물은 대규모의 광장에 가까운 직사각형 형태이며

높은 벽들로 둘러싸여 있는데, 주 입구는 서쪽에 있다.


서쪽 벽은 펜텔릭 대리석(Pentelic marble), 나머지 벽들은 석회석으로 만들어졌다.
벽 안쪽으로는 위로 트인 안뜰이 터키산 대리석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고

안뜰 중앙에는 기다란 수영장과 정원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발굴 유물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발굴 유물



파나티나이코 경기장(Panathinaiko Stadium)


고대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이 서 있던 부지에 세워졌으며 1896년 올림픽을 개최한 경기장.

세계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아테네에는 두 개의 올림픽 경기장이 있다.


새로움과 오래됨을 똑같이 껴안고 있는 이 도시의 눈부신 한복판에

번쩍이는 현대적 건물들과 나란히 오래된 고전적 건물이 서 있다.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었다는 문서상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76년으로 남아 있는데,
아마 경기는 이보다 여러 해 전부터 존재해 왔을 것이다.


서기 394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에 의해, 혹은 435년 그의 손자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이교도적인 행위라는 이유로 폐지되기 전까지 경기는 4년에 한 번씩 열렸다.


그러다가 1896년 올림픽 경기가 부활했고, 5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아테네의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새로운 경기장을 지을 장소로 선정되었다.


기원전 566년에 건축되기 시작한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이 경기장은

올림픽을 모델로 삼은 파나테나 경기가 개최되던 장소였다.

이 유적은 1870년에 발굴되었으며, 새로운 경기장은 1895년에 지어졌다.


조지 아베로프라는 부유한 사업가가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으며,
아나스타시오스 메탁사스와 에른스트 질러라는 건축가들이 건축을 맡았다.
옛 경기장의 설계를 충실히 따랐으나, 8만 명의 관중이 입장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해 아테네 북동쪽에 있는 펜텔리콘산(山)의 대리석이 고갈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1896년 4월에 치러진 제1회 올림픽경기대회 때문이다.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1895년 경기장을 완공하고,

이듬해 5만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곳에서 제1회 올림픽이 열렸다.


1896년 하계 올림픽은 재정이 충분하지 못했음에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올림픽 경기가 자신이 출생한 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2004년 여름이 되어서였다.
2004년 올림픽을 위해 새로운 경기장 하나가 다시 지어졌으며, 경기는 역시 성공리에 치러졌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Panathinaiko Stadium)


1896년의 경기장은 2004년 올림픽 경기 동안에도 양궁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은 스포츠와 관련된 다른 행사를 개최하는 데에 쓰인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칼리마르마로(Kallimarmaro) 또는 고대 대리석경기장으로도 불린다.
칼리마르마로는 그리스어(語)로 '질 좋은 대리석'을 뜻한다.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고대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파나티니언 경기와 아테네의 수호신이자

전쟁과 지성의 여신인 아테나(Athēna)를 찬양하기 위한 축제경기가 열렸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중요한 역사적인 건물로,
아테네 시의 오래된 과거와 현대적인 새로운 모습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을 배경으로 가이드와 인증샷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 방송국 어나운서로 재직하다가 아테네로 유학 중에

그리스의 역사와 철학에 반해서 계속 눌러 앉았다고.

아테네의 역사와 철학에 무척 해박할 뿐더러 목소리가 낭랑하고 맑았다.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기록이 새겨져 있다.


2004년 올림픽 경기에서는 양궁 경기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 여행-아테네] 올림픽의 시작 그리스 아테네 / Panathenaic




참조 ; https://blog.naver.com/hakkkkk/221356489277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890&cid=40942&categoryId=3374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575&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28214&cid=40942&categoryId=31952

https://blog.naver.com/nasci/220798659226





Roman Agora (로만 아고라)를 나와서 케라메이코스(Kerameikos)로 이동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케라메이코스(Kerameikos)는 ‘도공구(陶工區)’이라는 뜻이다.

아테네의 서북 디필론(이중문) 밖에 있으며, 여기와 접하거나 또는 일부가 이와 겹쳐서

미케네 시대 이래의 묘지가 있었고 수많은 분묘, 부조, 묘비가 잔존했었다.


디필론에서 시작되는 페이라이에우스(현대명 피레우스)로 향하는 길과 이와 병행해서
성문에서 시작되어 에레우시스로 향하는 도로가 다같이 케라메이코스를 횡단한다.


묘지로서의 사용은 적어도 B.C 12세기 경까지로 소급되며,
특히 B.C. 6세기 이후는 아테네의 부유한 시민 및 공인의 묘지로서 많은 귀인, 전몰자 등이 묻혔다.

근래에 행해진 독일조사대의 발굴에 의해서 많은 도기가 발견되었다.


특히 미케네 말기부터 원(原, 프로토) 기하학적 양식기로 연결되는 도기유품의 발굴은,
선사에서부터 역사시대의 연속을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중요시된다.
그 대부분은 케라메이코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목에 있는 ‘무덤의 거리’ 입구와 덱실레오스(Dexileos)의 묘비석


왼쪽 언덕으로 넓게 가족묘가 몰려있다. 아직까지 유명한 묘들이 상당수 남아있다.
다만 여기에 설치된 묘비석과 유물들은 대부분 복제품으로 진품은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들 가운에 가장 앞에 위치하여 눈에 띄는 것이 말을 탄 청년상이다.
묘비에 조각된 상은 무덤의 주인공의 직업과 출신 배경, 죽음의 원인 등을 짐작하게 해준다.
망자 한명을 조각한 경우도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는 주로 가족을 함께 조각하기도 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아테네 전사 덱실레오스(Dexileos)다.
그는 BC 394년 코린토스 전쟁 때 스파르타 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원래 청동으로 만들어져 부착되어 있었다는 창과 말고삐가 소실된 점이 아쉽다.


말을 타고 돌진하여 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부조함으로써

그의 가족은 덱실레오스의 용맹을 오래도록 후손에게 기억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현장에 설치된 이 말을 탄 청년상은 복제품이다.

오른쪽으로 묘비석 상단에 조성된 황소상이 보이는데 역시 야외의 현장에 있는 황소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덱실레오스(Dexileos) 묘비석 말을 탄 청년상 진품


곧게 선 갈기와 앞발을 높이 쳐들어 적을 짓밟는 말의 기세와, 쓰러진 적을 창으로 제압하는 청년의 자세가

휘날리는 망토와 어울려 더욱 역동적으로 보인다.
쓰러진 적이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다.


콜리톤의 디오니시오스 장례 기념물 황소상


헤게소의 묘비 맞은 편에는 황소 대리석 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진 장례 기념물이다. 
콜리톤은 기원전 345년 기둥 위에 황소 대리석 상을 올려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이름을 날리던 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디오니소스여, 당신은 생전에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을 했고,

이제는 우리 모두 언젠가는 가야 할 페르세포네의 영호(명부)에서 살고 있습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묘비석 황소상 진품


이 조각상 역시 복제품이고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케라미코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묘비석 여인상 진품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두 자매의 묘비 부조이다.

데메트리아(Demetria)와 팜필레(Pamphile) 자매다.
BC 325-310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에서는 부유한 이들의 묘비 장식이 점점 화려해지자 4세기 말에 데메트리오tm(Demetrios)가

묘비의 규모와 양식을 검소하게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묘비는 이 법 제정 이전의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안내판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전경. 뒤쪽으로 아테네 고대 성벽이 보인다.


우리가 죽으면 갈 곳은 어디일까? 정말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기는 할까?

신실한 종교인에게 이는 금기된 불경스런 의문이다.

 
그래서 사후 세계의 인정여부는 종교적 믿음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모든 종교는 교리의 방식을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현세(現世)의 고통과 질곡의 삶을 넘어서
내세(來世)의 평화와 안녕으로 보상받고 징벌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문명이 시작된 이래 완전하게 풀지 못한 인간의 오랜 숙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고 나면, 어떤 사람도 주변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얻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과 호의를 주고받을 뿐이다.

죽은 자는 가장 나쁜 것을 받을 뿐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인생의 고뇌를 노래한 걸출한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의 ‘죽음 이후’란 시다.
그는 기원전 8세기 후반 에게 해 파로스 섬 태생으로 호메로스와 견줄 만한 명성을 누린 시인이다.


그는 트라케와 파로스의 식민지 전쟁 등 숱한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전사이기도 했다.
그는 죽음보다 현실의 삶이 소중하다고 노래했다.


그의 시가 그리스인에게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리스인의 죽음에 대한 사유방식의 일단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오디세이아'에도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후 귀향하는 과정에서 사후세계를 다녀오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저승세계에 산 채로 들어가, 지하세계의 그림자 영혼이 된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아이아스 등 많은 영웅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듣게 된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의 전우였던 아킬레우스를 만나 그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대가 여기 사자(死者)들 사이에서 강력한 통치자이니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라."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애절한 표정으로 이렇게 응답한다.
 "나는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死者)들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는 가난한 사람 밑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소이다." 


 아킬레우스의 말에서 망자(亡子)의 서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현실의 어떤 구차한 삶도 사후 세계의 어떠한 영광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인의 사생관(死生觀)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었다.
하데스(Hades)신이 주재하는 지하세계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은 자들의 세상이었다.
뱃사공 카론(Charon)에 의해 죽음의 강 스틱스(Styx)를 건너면 다시는 현세로 돌아올 수 없다고 믿었다.


케라미코스의 전체 평면도


신전의 오른쪽 길이 엘레우시스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이고, 왼쪽이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굵은 선의 평면도가 그려진 곳이 폼페이온(pompeion)이다.


성벽과 성문의 복원도


고대 아테네의 이 성벽은 전쟁으로 여러 차례 허물어졌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한다.
현재 케라미코스 유적지에 남아 있는 성벽은 고대 아테네의 것을 바탕으로

로마 통치 시대에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 신전이 있던 자리다.


그리스인의 매장풍습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장례식은 부유한 가문이 가족 구성원인 고인을 기리고

가문의 부와 명예를 과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장례 절차는 일련의 의식들로 구성되었는데 도기에 그려진 회화 장면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러한 장례가 어떠한 모습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이를테면 거대한 기념 항아리에는 두 가지 의식이 재현되어 있는데

하나는 프로테시스, 즉 의식용 침상에 시체를 누여서 사람들에게 공개하고

애도자들이 주변을 에워썬 채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애가를 부르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엑포라, 즉 애도자들에게 둘러사여서 묘지로 행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들 다음으로는 예식에 따라 고인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히고

마지막으로 화환으로 장식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후대(헬레니즘)에 와서 장례 절차에 스틱스 강을 건너는 배삯을 지불할 수 있도록

망자에게 동전을 주는 행위가 더해졌다.


묘지에서는 화장이나 매장이 행해지게 된다.

이때 종교 의식에 따라 도살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매장지들에서 말들의 뼈가 끊임없이 발견되어 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또한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후반에 밀티아데스의 아버지인 키몬의 장례식에서

그가 상으로 탄 암말들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포도주, 꿀과 물을 섞은 포도주, 우유 등의 헌주(눈물 역시 신에게 바치는 헌주로 여겨졌다)가 고인에게 바쳐졌고,
무덤 또는 무덤 근처에 파진 도랑에 선물이 놓였다.


그 밖의 절차로는 장례 연회와 죽은 이의 집을 정화하는 의식이 있었다.
유명한 디필론 암포라처럼 크고 화려하게 장식된 기념물이 죽은 이의 무덤 위에 세워지는 경우에는

그 가문의 부를 확실하게 과시하는 징표가 되었다.

뒷편에 보이는 나무 두 그루 앞이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 신전이 있던 자리다.


폼페이온(pompeion)이 있던 자리다. 기단만 남아 있다.


케라미코스 유적 한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은 폼페이온(The Pompeion)이었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주성문인 디필론과 신성문 사이에 있었다.


디필론과 신성문은 아테네로 입성하는 주 성문으로 다양한 조각 등으로 장식되었던 것 같다.
인근에서 발굴된 사자상, 스핑크스, 쿠로스 등이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폼페이온은 아테네의 최고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축제를 준비하는 곳이다.
가로 세로가 각각 70m, 30에 달했다고 하니 대단한 규모의 건물이다.


이곳에서 축제를 위한 준비물, 각종 제물과 도구들이 보관되었다.
이곳에서 아크로폴리스의 관문인 프로필라이아로 향하는 축제 행렬이 출발했다. 


하지만 기원전 86년에 로마가 아테네에 침공하여 폼페이온, 디필론, 신성문을 비롯한 주요 시설들을 대부분 파괴했다.
그들로서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노래하고 결속을 다지는 최고의 축제인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분쇄함으로써
아테네인들의 문화를 말살하고 저항의지를 꺾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헤게소의 묘비(사진 왼쪽). 코로이보스 가족의 묘역(사진 오른쪽 두 비석)


헤게소의 묘비. 기원전 400년경. 대리석. 높이 약 5피트(1.58미터) 아테네 국립 박물관 소장.


장례용 부조


이 부조는 기원전 4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여인 사이에서 두 남자가 장례식 만찬에 참여중이다.

발 아래의 배는 저승으로 가기 위해 스틱스 강을 건너는 여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배 안에는 죽은 이들을 인도하는 뱃사공 키론이 앉아 있다.



그리스인들은 죽은 후에 가게 될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곳이 현대 종교의 관념과 동일한 죄악에 대한 구원의 세계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현세주의자들이었다. 현실의 삶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론 미지의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엘레우시스(Eleusis)에 있는 데메테르 신전에서 비밀스런 종교의식

엘레우시스 비의(Eleusinian Mysteries)가 행해졌던 게 그 증거다.


엘레우시스는 아테네에서 서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아테네 영토에 속했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입문자들에게 영적인 해탈에 이르는 비법을 전수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


입문자는 비밀 엄수 서약을 해야 했고,

아테네가 비의를 주관하면서 비밀을 누설하는 자를 사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비스런 이 비교(秘敎)에 입문해서

“의식에 참석하기만 하면 어떤 행동을 하건 상관없이 불멸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했다.

즉 비교는 개인의 구원을 목적으로 했다.”


모든 종교의 기원이 구원에 대한 약속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다.
비의 참가자들이 어떻게 구원을 보장받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참가자들이 “엘레우시스 비의를 통해 우리들은 삶의 시작에 대해 배웠고,
현생을 행복하게 사는 힘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했던 것을 보면, 이들이 비의를 통해 어느 정도 영적인 위안을 얻었음에 틀림없다.


엘레우시스 비의(秘儀)는 아테네로부터 인정받고 보호를 받는 혜택을 누렸다.
매년 9월에는 대규모 의식이 거행되었다.

아테네에서 엘레우시스에 이르는 길은 ‘신성한 길(The sacred Way)’이라 불렸다.


강위 아치형 통로 오른쪽에 신성문이 있었다.


아테네 성벽의 15개의 문 중 케라미코스(Keramikos)에 인접한 디필론(Dipylon) 성문과 신성문(Sacred Gate)이 있었다.
신성문과 연결된 ‘신성한 길’, 즉 ‘히에라 호로스(Hiera Hodos)’에서 출발하여 엘레우시스까지 이르는 20km의 길은
매년 9월이면 비의에 참가하려는 아테네인들의 신성한 행렬로 붐볐을 것이다.


케라미코스는 공동묘지였지만, 중요한 건축물도 몇몇 있었다.
엘레우시스로 이어지는 ‘신성한 길’과 피레우스 항구로 가는 길의 출발지점인 삼각지에

트리토파트레이온(tritopatreion)신전이 있었다.


아테네 시가지를 떠나는 마지막 신전이자, 아테네 시가지로 입성하는 첫 신전이었다.

신전의 정확한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테네의 번영과 아테네인의 축복을 빌지 않았을까? 


 아테네의 관문인 피레우스 항으로 가는 길은 바로 아테네가 에게 해로 뻗어가는 번영의 길이었고,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은 사후 세계의 축복을 기원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물품의 수출입이 피레우스 항구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아테네에서 상업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길이었던 셈이다.


‘신성한 길’ 역시 메가라, 코린트, 델피, 펠로폰네소스로 향하는 길이니

그리스 본토와 소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케라미코스는 바로 두 길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에 위치했다.


아치 가까운 쪽에 에리다노스 강이 복개되어 있다.


아치형 문 사이 가운데로 에리다노스(Eridanos) 강이 흐른다.

우리나라의 작은 개천 정도에 비교된다.

강의 오른쪽에 ‘신성한 길’이 위치하고, 아치 통로 오른쪽에 신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죽음은 남은 자에게 더욱 슬픈 일이다.
케라미코스에 조성된 숱한 망자의 무덤은 말이 없지만,

묘비석마다 새겨진 다양한 부조 속에 망자가 생전에 가족과 나누던 정겨웠던 장면들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애끓는 슬픔과 허망함,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진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망자의 기일(忌日)이 되면 케라미코스를 방문하여 꽃을 바치고,

묘비에 새겨진 망자의 모습을 쓰다듬으며 다감했던 추억들을 되새겼으리라.


몇몇 묘비석들은 망자와의 이별의 슬픔을 짧은 글귀의 비문으로 덧붙이고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암파레테(Ampharete)의 묘비도 그 중의 하나다.


"나는 여기에서 내 딸의 사랑스런 자식을 안고 있다.

우리가 살아서 태양 빛을 바라볼 때, 나는 이 아이를 무릎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죽어서 역시 죽은 그 손자를 안고 있다."


손자를 애지중지하던 할머니의 슬픔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할머니가 오른손에 살아있는 새를 쥐고 아이를 어르고 있는 모습이 생생하다.
아버지가 딸을 보내는 슬픔이 잔잔하게 담긴 묘비 부조도 인상적이다.


“여기 아리스톤(Ariston)과 로디라(Rhodilla)의 딸 아리스틸라(Aristylla)가 잠들어 있도다.

너는 우리에게 너무나 훌륭한 자식이었다. 사랑하는 딸아!”


이별의 슬픔이 깃든 딸의 모습에 비해 슬픔을 안으로 삼키며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딸의 손을 지그시 잡은 아버지의 모습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케라미코스는 국립묘지답게 숱한 전투에서 전사한 아테네의 청년들이 수없이 많이 묻혔다.
하지만 용사들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묘비 장식에서 뚜렷한 걸작품 몇 기가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무덤 감실(naiskos)에 조각된 아테네 전사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묘비가 대표적이다.  


 왼손에 방패를 들고 소실된 오른손에 창을 들었을 것이다.

왼발과 오른발을 땅이 파일 듯 굳게 딛고 있고,

 발을 벌리고 버티고 선 품새가 쉽게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굳건해 보인다.


더구나 상체와 하체의 근육과 핏줄이 팽팽하게 표출되어

곧바로 적과 육박전이라도 벌이려는 상황을 묘사한 듯 긴장감을 준다.


얼굴 표정의 결연함도 압권이다.

조각의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하듯 감실에 조각가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것도 이채롭다.


아리스토나우테스(Aristonautes)의 용맹한 모습을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만든 이는 조각가 스코파스(Skopas)다.

죽은 자들의 슬픔에 산 자들이 언제까지나 매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른쪽으로 바라보며 케라미코스 옆으로 난 넓은 길을 따라

5 분여 정도 걸어가면 아고라쪽으로 가는 길에 늘어선 벼룩시장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궁색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의 거래가 활발하다.

고대 아테네 시절에도 이랬으리라. 케라미코스 바로 옆이 아고라였다.

시장의 시끌벅적한 활력이 케라미코스의 우울과 슬픔,

좌절의 분위기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드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가장 치열한 현세의 공간 옆에 망자들의 묘지를 둔 것도 아테네인들의 또 다른 지혜가 아닐까? 



2006. 03.11 케라미코스(Keramikos) 방문 기념 인증샷


케라메이코스 고고학 박물관 (Archaeoloical Museum of Keramekos)


케라미코스 박물관 입구.


박물관 옆에 진열된 석관과 무덤 장식물들.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황소상 진품


이 무덤의 주인공은 사모스 섬 출신의 알피노스(Alphinos)의 아들 디오니소스(Dionysios)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중엽 헤라 신전(Heraion)에서 보물지기로 봉직한 것 같다.


그는 케라미코스 인근인 콜리토스(Kollytos) 구에 살았고 미혼이었다.
백색의 대리석으로 조각된 힘이 넘치는 황소의 야성미가 물씬 풍기는 걸작품이다.


이중섭의 ‘황소’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런 석우(石牛) 작품은 신전이나 묘역에 자주 조성되는 양식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된 오랜 석우숭배(石牛崇拜)의 관념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여전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정도의 훌륭한 거대 조상을 봉헌 받은 것을 보면 디오니소스가 헤라 신전에서 꽤 중요한 소임을 맡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의 가문이 매우 부유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황소상 진품


케라메이코스(Kerameikos) 입구 묘비석 기단 위에 설치된 여인상의 진품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게 조각된 두 자매의 묘비 부조이다. 데메트리아(Demetria)와 팜필레(Pamphile) 자매다.
BC 325-310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에서는 부유한 이들의 묘비 장식이 점점 화려해지자 4세기 말에

데메트리오tm(Demetrios)가 묘비의 규모와 양식을 검소하게 제한하는 법을 만들기도 했다.
이 묘비는 이 법 제정 이전의 마지막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


묘비를 장식한 큰 물동이 루트로포로스(loutrophoros)이다.
결혼식 전날 밤 신랑과 신부의 목욕 의식에 루트로포로스를 사용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죽은 사람의 무덤에 올려놓는 장식으로 널리 쓰였다.

묘비석은 인물부조 식, 오벨리스크 식, 화병장식 등으로 다양하다.



‘프로크세노스의(딸 아니면 처) 헤게소(Hegeso)’로 알려진 묘비석.


‘무덤의 거리’입구 쪽에 있다. BC400년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여인의 자태가 아름답게 조각되었다. 의자에 앉은 이가 망자(亡子)인 헤게소이다.


머리를 우아하고 세련되게 손질했고 옷맵시도 훌륭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의 여인으로 보인다.
앞에 선 시녀가 내민 상자에서 보석을 고르는 장면이다.




돌이 아니라 얇은 천으로 만든듯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신성문 지역에서 발굴된 쿠로스(Kouros) 석조상.


묘비석 상단에 조상된 스핑크스(Sphinx) 상. BC 560-550년 경 작품. 신성문 지역에서 발굴.


신성문의 사자상. BC 590-580 사이 작품으로 추정.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게 조상된 숫사자상이다.
페르시아 전쟁 통에 용케 땅에 묻혔다가 신성문 구역에서 발굴되었다.




2200 여 년 전의 성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작품










참고 ; http://www.dailian.co.kr/news/view/438092
https://blog.naver.com/lsw24001/22133656760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4022&cid=42635&categoryId=42635

https://blog.naver.com/mjahn21/60058724881





로만 아고라 (Roman Agora)


로만 아고라는 로마시대 초기(기원전 1세기~ 서기 2세기)에 로마인들이 세운 아고라로
시장의 기능으로 사용했으며 주택가에 둘러싸여 규모는 아담했다.
당시 폴리스 시민들이 아고라 안에서 정치 문화 사회 등의 문제를 토론했다고 한다.

로만 아고라 입구


로만 아고라


로만 아고라


로만 아고라


로만 아고라


로만 아고라

돌 틈 사이 그늘에서 쉬고 있는 고양이가 보인다.


로만 아고라


로만 아고라


바람의 탑(Tower of the Winds)


로만 아고라의 끝에는 팔각형으로 만들어진 바람신의 탑(Tower of the Winds)이 자리하고 있는데
서기 1세기 중엽에 천문학자 안드로니코스가 세운 것으로 해시계, 물시계, 풍항계의 역할을 했다.


탑의 8면은 정확하게 동서남북과 북서, 북동, 남동, 남서의 8 방위를 나타내고 있으며
각 면의 위에는 해당 방위를 상징하는 바람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한때는 기독교 교회와 투르크의 이슬람 수도원으로도 사용되었다는 바람의 탑은
아테네 신전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그래로 남아 있는 곳이다.
뒤로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바람의 탑


2006. 03.11 인증샷


참고 ; https://blog.naver.com/rabtle/220788503657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45960&memberNo=1012&vType=VERTICAL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주랑(柱廊)은 말 그대로 기둥이 세워져 있는 긴 복도를 뜻하는데
아탈로스 주랑은 길이가 120m, 너비가 20m에 이르는 건축물로 원래 이 건축물은

상업용도로 세워져서 안에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아탈로스 주랑은 아탈로스왕과 아폴로니스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탈로스 2세가 페르가몬 왕으로

기원전 159년부터 138년까지 통치하던 시기인 기원전 150년경에 세워서 아테네에 기증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아테네 시민들의 사교, 만남의 장으로 활용되다가

서기 267년에 파괴되었고 잔해는 로마의 성벽과 요새에 파묻혔다.
주랑의 복원은 John Travlos의 지휘아래 1953년에서 1956년 사이에 이뤄졌다.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은 아크로폴리스 북쪽에 있는 고대 아고라(아테네 아고라)의 동쪽 끝에 있다.
2층 건물로 고대 그리스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건축물이다.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주랑의 안쪽 공간에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어 아탈로스 주랑 박물관 또는 아고라 박물관이라고도 부른다.
아고라 일대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는데

그리스 신화속 인물들의 조각상, 도자기,도편, 항아리, 주화, 장신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아탈로스 주랑(Stoa of Attalos)


고대 아고라

아탈로스 주랑을 끝으로 고대 아고라를 나온다.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보이는데 역시 멋지다.


고대 아고라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참고 ; https://blog.naver.com/rabtle/220788503657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45960&memberNo=1012&vType=VERTICAL




고대 아고라 (Ancient Agora)


고대 아고라(Ancient Agora)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있던 아고라를 말하며

아크로폴리스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 아고라는 시장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고대에는 단순히 시장만이 아니라

정치, 종교, 문화시설까지 총망라된 공간을 의미한다.


곧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이 소통되는 광장으로 아테네의 전성기에 아테네 시민들은

이곳에 모여 중요한 정치사안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이곳에서 시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고 한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 신들을 모시던 신전, 회의장으로 쓰이던 볼레우테리온, 법정 등의 시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건물은 물론 기둥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바닥, 기초만이 그 옛날의 영광을 대변하고 있다.


고대 아고라의 서쪽에는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 테세우스를 기리는 테세이온 신전이

그 모양을 거의 온전히 보전하고 있다.


그러나 발굴 결과 이 신전은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신)의 신전으로 밝혀졌다.
고대 아고라의 동쪽에는 아탈로스 주랑이 있는데 이 건물은 상점 역할을 했었던 것을 현대에 들어서서 복원하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바라본 고대 아고라


아레오 파고스 언덕을 내려와 고대 아고라로 들어선다


아레오 파고스 언덕


아레오파고스(아레이오스 파고스)는 '아레스의 언덕'이다.

그 유래는 그리스 신화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아테네 인근 숲속에서 할리로티오스가 알키페를 겁탈했다.
알키페는 전쟁신 아레스와 아테네 왕 케크롭스의 딸 아글라우로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딸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온 아레스는 할리로티오스를 때려 죽였다.


할리로티오스는 포세이돈과 요정 에우리테의 아들이다.
포세이돈은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 아레스를 아테네 법정에 고소했다.


아테네의 언덕에 올림푸스 신들이 모여 이 재판을 진행했다.

신들은 아레스의 살인을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이때부터 이 언덕은 아레이오스 파고스(아레스의 언덕)로 불리게 되었다.
아테네 사람들도 이곳에서 살인죄 등의 많은 재판을 열었다.
오레스테스가 모친 살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곳도 이곳이라고 한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고대 아고라로. 


아레오파고스는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모나스티라키 역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면

오른쪽이 아레스의 언덕이고 왼쪽이 아크로폴리스로 가는 길이다.


아테네 안내책자에는 이곳이 마르스 힐(Mars Hill)로 나와 있다.
Mars(마르스)는 로마신화의 전쟁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레스 신에 해당한다.


아레오파고스는 고대에 재판이 열리던 곳이었다.

오늘날 그리스의 대법원 명칭이 바로 아레오파고스다.


그래서 명칭의 혼동을 피해서 이곳을 Mars Hill로 표기한 모양이다.
이곳은 출입구도 따로 없고 당연히 표도 필요없다.


이곳은 또한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선교하기 위해 활동한 초창기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언덕은 올라가는 길도 미끄럽고 언덕 위도 바위가 매우 미끄럽다. 바람도 무척 세게 분다.


아레오파고스 바로 북쪽 아래에는 고대 아고라가 펼쳐져 있다.
아고라의 동쪽 끝에는 아탈로스 주랑이, 왼쪽 둔덕에는 테세이온 신전이 있다.
멀리 북동쪽으로는 리카비토스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사도 바울의 행적 <사도행전> 17장 22절 ~ 31절을 새긴 동판 앞에서 인증샷


서기 51년 사도 바울이 로마 지배하에 있던 아테네에 와서 최초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곳이다.

그는 드로아(터키 트로이 근처)에서 환상을 보았다.


꿈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바울은 유럽행을 택했다. 베뢰아에선 홀로 배로 타고 아테네로 갔다.


바울은 아테네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다. 그는 회당과 아고라에서 토론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바울과 논쟁하고는 “이 떠버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했다.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파고스로 데리고 가서

“당신이 말하는 새 가르침이란 무엇이오? 우리에겐 낯서니 말해보시오”라고 말했다.

최고법정의 역할을 했던 이곳,

아레오파고스에서 사도 바울은 '미지의 신에 관하여'라는 설교를 했다.


사도 바울이 아레오파고스 언덕 정상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새로운 종교를 가르침으로써

몇몇 아테네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알려진다.
개종한 사람들 중에는 아레오파고스회 관원 디오누시오도 있었다.


사도 바울의 행적을 새긴 <사도행전> 동판 앞에서 인증샷


바울로는 아레오파고 법정에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가 아테네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 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 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 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 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 온 세상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공동번역 사도행전 17장 22절 ~ 31절)


헤파이스토스 신전 (Temple of Hephaestus)


고대 아고라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눈에 확 들어온다.
신전의 모습이 주변의 현대적인 건물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고대 아고라에 들어서서 올려다 보는 아크로폴리스


고대 아고라와 주요 건축물


고대 그리스에서 아고라는 전체 시민이 모이는 정치의 공간이었으며, 아테네인들의 경제활동의 중심지였고,

아테네 시민의 여론을 모으는 공동의 광장이며, 또한 다양한 신들의 거주지였다.


고대 아고라와 주요 건축물


아고라의 서쪽 구역은 주로 정치적인 성격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바실레우스 주랑, 협의회관, 톨로스, 장군단, 법정 등이 그렇다.


아고라의 동쪽 구역은 아탈로스 주랑에서 처럼 많은 아테네 시민의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테네 곳곳에 헤파이스토스 신전, 아폴론 신전, 제우스 신전, 12신전 등의 신전 터 등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들의 신앙의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협의회관과 메트로온


협의회관은 500인 협의회가 정기적인 회의를 열며 업무를 보던 곳이다.
협의회의 의원은 아테네의 10개 부족에서 각각 50명식 추첨으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협의회는 민회를 소집하고 민회에서 논의할 문제를 미리 협의하고 또 민회의 일정을 주관했다.
협의회의 회의 기록이나 다른 공식 문서들은 협의회관 바로 옆에 있는 메트로온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바실레우스 주랑
이 곳은 당시의 왕궁에 해당하는 건물로, 최고집행관 바실레우스가 거처하면서 집무를 보는 곳이다.


                                   

                                                                                         메트로온 터


협의회관 터와 입구(아고라에서 볼 때 메트로온 뒤 건물인 것 같음)


시조 영웅들의 대좌


메트로온 건너편에는 좁고 기다란 대좌가 있던 흔적이 있다.

이 대좌 위에는 아테네 10개 부족의 시조 영웅들을 묘사한 청동 상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인들은 각 부족의 시조 영웅들의 상을 아테네 시민이 오가는 아고라에 설치함으로써,

각 부족의 소속감을 높이고 연대감을 강화하려고 했을 것이다.


장군단 본부 터(오른쪽 아래 둥근 모양의 건물)


장군단 본부는 아테네의 군사적 지도자인 장군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곳이다.
장군은 10인의 장군단으로 구성되었으며, 연임 제한도 없었다고 한다.


장군단 본부 터


감옥터


장군단 본부 터에서 남서쪽으로 좀 더 걸어가면 감옥터가 나온다.
우리 일행은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투옥되어 있었던 감옥터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아고라는 지금도 발굴 중인지, 그 발굴 현장을 잠시 지켜본 후 돌아섰다.


필로파포스(Philopappos) 언덕에 소크라테스의 감옥이라고 하는 유적지가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거기에서 갇힌 것이 아니라 이 근처 감옥에 투옥되었고 이곳에서 사형당한 것이라고 한다.


아고라의 시민 법정 터


이 시민법정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아마도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일 것이다.
재판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저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일 것이다.


플라톤은 당시 방청석에서 스승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고, 그를 구명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법정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재판 과정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고, 
그에 자신의 예술가적인 창의력을 발휘하여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저술했다.


플라톤은 이 책을 통하여 소크라테스

사건의 본질과 소크라테스의 참모습과 그의 정신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고대 아고라 (Ancient Agora)
멀리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살짝 보인다.


해신과 거인상
아그리파 음악당 현관에 있던 반인반어의 해신 트리톤과 거인상들이 남겨진 터.


해신과 거인상. 세 개의 조각상만 남아 있다.


고대 아고라


지금은 그냥 너른 공터로 보이지만, 원래는 스토아와 신전, 도서관과 음악당,

제단과 기념물 등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에도 아고라 중심에 아고라음악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으로 로마시대를 대표하는 문화공간 역할을 했지만

현재는 음악당 입구를 형성하던 벽면과 그곳에 서 있던 세 개 조각상만이 남아있다.


누구라도 여기 올라가서 얘기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도 여기에서 연설을 많이 했다고.

원래 돌 높이는 1미터 정도로 훨씬 높았다고 한다.


아포스툴루(Apostles) 교회


고대 아고라에 들어서자마자  언덕 높은 곳에 성 아포스톨루 교회(성 사도교회)가 보인다.
아포스툴루(Apostles) 교회는 바울이 아고라 전도를 기념하여 1000년 경에 세워진 비잔틴 양식의 교회로
실내에는 17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다고 한다.


헤파이스토스 신전 (Temple of Hephaestus)


헤파이스토스 신전 (Temple of Hephaestus)


신전의 동쪽 박공벽에는 켄타우로스와의 전쟁이 묘사되었고,

서쪽 박공벽에는 트로이 전쟁이 묘사되어 있다.


나아가 신전 외부의 메토프에는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업적이 묘사되어 있으며,
내부의 프리즈에도 테세우스의 업적이 묘사되어 있다.


헤파이스토스 신전 (Temple of Hephaestus) 안내석


헤파이스토스 신전


헤파이스토스 신전


헤파이스토스 신전 부분


헤파이스토스 신전 부분


헤파이스토스 신전 부분


헤파이스토스 신전 부분



[그리스 여행-아테네] 사도바울 성지, 아레오파고스 언덕/Arios Pagos/Hill/Apostle Paul/Shrine




[그리스 여행-아테네] 프닉스 언덕, ‘아고라’/Pnyx/ Agora/Hill/Arios




참고 ; https://blog.naver.com/rabtle/220788503657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45960&memberNo=1012&vType=VERTICAL

https://blog.naver.com/mjahn21/60058778706

https://blog.naver.com/mjahn21/60058782458






제우스 신전 (Temple of Zeus)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그리스 신화의 최고 신인 제우스를 기리는 신전으로 코린트식 기법으로 지어졌다.


‘올림피에이온(Olympieion)’이라고도 한다.
아테네 중심지에 있는 거대한 신전 유적으로 신들의 왕인 제우스에게 바쳐졌던 신전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독재적인 참주(僭主)가 국가를 지배하던 시기인 BC 6세기에
아테네의 정치가인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BC 600~?BC 527)가 짓기 시작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650여 년 후인 AD 2세기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재위 117∼138) 때에야 완공되었다.


로마시대에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으로 유명했지만 3세기경에는 이방인들의 침략으로 약탈당했다.
이후 복원되지 못했으며 로마시대가 끝난 후 수세기 동안 신전 석재가 파내져 아테네 밖의 다른 건물들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 
 

제우스 신전과 아테네 시가지


그리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신전으로 기원전 6세기 경에 건립을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700년이 걸렸다.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은 고트족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84개 돌기둥 가운데
현재는 15개만이 남아 있는 코린트 양식의 건축물로 그리스 최대의 신전이다.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한때는 규모 면에서 그리스 여느 신전들보다 웅장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과거의 그 융성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많이 파괴되어 있다.

왼쪽 중앙에 근대 올림픽의 산실인 판아테나이코스 경기장이 살짝 보인다.


제우스 신전과 맨 앞에 하드라리안의 문이 살짝 보인다.


제우스 신전 가는 길에 국립정원(National Gardens)을 지나게 된다.


제우스 신전 가는 길에 국립정원


길 옆에 있는 하드라리안의 문


제우스 신전 건축을 기념하기 위해서 지어진 하드리안의 문
로마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황제 시절에 완공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하드라리안의 문


제우스 신전


제우스 신전


멀리 아크로폴리스가 살짝 보인다.



제우스 신전에서 보이는 아크로폴리스


지금도 발굴, 보수 중인 제우스 신전


지금도 발굴, 보수 중인 제우스 신전


로마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황제

참고로 로마 하드리아누스(Aelius Hadrianus) 황제에 대해서 알아본다.


로마 전성기에 해당하는 오현제 시기의 로마 황제들에서
오현제는 네르바, 트리야누스, 하드리아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이다.

오현제 중 트라야누스 황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왕후의 총애를 받고 있던 하드리아누스가 황제를 계승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크라야누스 사촌의 아들이었고 부인도 황제의 친족이었다.


21년 재위 기간 동안 12년을 로마제국 이곳저곳을 여행하였다.
로마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였고 예술분야에 조예 또한 깊었으며

여행을 좋아하여 5년간 로마를 떠나 있기도 했다.

안티노우스(Antinous)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사랑했던 안티노우스. 이 청년은 나일강에서 익사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티노우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왕비가 있었지만 동성애에 빠진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금화



천사의 성.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


그리스 - 제우스 신전 (EBS 동영상)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45274&cid=51670&categoryId=51672


참고 ; https://blog.naver.com/slds2/221383569835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279887&cid=40942&categoryId=31604
https://blog.naver.com/hakkkkk/221342685333




불르 게이트와 아테네 시내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있는 문으로 들어서면 아테나 니케 신전(Athena Nike)이 있다.
이 문은 3세기에 로마인들이 방어를 위해 세운 문이다.


니케 신전과 프로필라이온(오른쪽)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세 곳의 신전 가운데 나머지 하나는

서남쪽 끝에 자리한 아테나 니케(Athena Nike) 신전이다.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모신 신전으로, 파르테논이나 에레크테이온 신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흥미로운 사연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니케 신전이 처음 설계될 당시,

델로스 동맹에 참여한 아네테를 비롯한 여러 도시 국가와 페르시아는 전쟁 중이었다.


그래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니케 신전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사가 끝났을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테네의 승리를 기원하는 신전이 되고 말았다.


니케 신전은 에레크테이온 신전과 더불어 이오니아 양식을 대표하는 신전이다.
이오니아 양식은 원래 에게 해 연안에 살았던 이오니아인들이 사용하던 건축 양식으로

도리아 양식의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여성적이고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특징을 보여 주듯 니케 신전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하나같이 부드럽다.
그리고 기둥과 지붕 사이의 프리즈에 새겨진 조각도 파르테논 신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것을 알 수 있다.


니케 여신은 승리를 가져다주는 천사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승리의 천사가 아테네를 떠나면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낀 나머지 천사의 날개를 잘라 숨겨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프로필라이온(propylaion)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크로폴리스에 가려면 서쪽 통로를 따라 이동해야 한다.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세 방향은 모두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서쪽 통로를 따라 불규칙적인 바위를 절묘하게 이용해 만든 대리석 계단을 지나면

아크로폴리스의 출입문인 프로필라이온이 나온다.
프로필라이온은 웅장함과 우아함이 조화를 이룬 멋진 출입문이다.


프로필라이온(propylaion)


프로필라이온(propylaion)의 거대한 기둥


에레크데테이온(Erechtheion) 신전


이오니아식의 대표적인 신전으로서 파르테논과 같이 아크로폴리스 구릉 위에 있으며
B.C. 421년 건축가 필로클레스(Philokles)의 지도하에 기공되어 B.C. 393년경에 완성된 것이다.


이 건축은 아테네 최성기의 최후의 걸작이라 하겠다.
이 신전은 포세이돈 에레크테우스(Poseidon Erechteus)를 주신(主神)으로 하고

그 외의 제신(諸神)을 위하여 건축된 것으로, 그 평면은 매우 복잡하다.


동쪽면에 이오니아식 기둥이 6개 서 있는 전주랑실(前柱廊室)이 있고 북쪽면에 4개의 기둥을 세운 전주랑실이 있으며,
남쪽면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여신상주(女神像柱)가 있는 전주랑실이 있었다.


이 신전이 특별히 다른 형식을 가진 것은 서로 다른 신을 제사하는 3전을 집합하여 만든 까닭이라 하겠다.
북쪽면 전주랑실의 이오닉 오더는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많은 조각장식을 하였으며,
색석·유리 등이 감입되었고 청동의 장식을 붙였다.


이 신전의 입면구성에는 많은 고심을 하였다고 하며, 동·북·서측의 건축 외관의 변화를 조화시키기 위하여
장식과 스타일(style)의 통일로 디자인의 효과를 얻었다고 생각된다.
이 신전의 디테일(detail)과 장식의 아름다움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6명의 여인상 기둥, 에레크테이온 신전


고대 그리스에서는 한 지역에 여러 신을 모시는 일이 많았는데,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에는 처음부터 3명의 신을 위한 3개의 신전 건물을 지을 예정이었다.


동쪽에는 아테나 신을, 서쪽에는 포세이돈과 헤파이스토스 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신전을 다 짓고 보니 전체적으로 하나의 신전처럼 보여서 세 신전을 분리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신전의 이름은 아테네의 전설적인 왕으로 전해 내려오는

에레크테우스의 이름을 따서 에레크테이온으로 지었다.


세 신전이 모여 하나의 신전이 된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건축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신전으로 유명하다.


그중 하나가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여인 형상을 한 6개의 기둥인데,

그리스의 어느 신전에서도 볼 수 없는 형태를 갖고 있다.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으로 사용된 여인상을 ‘카리아티드’라고 한다.
6명의 여인들은 똑바로 서 있는 딱딱한 자세를 하고 있는데도

부드럽고 섬세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여인들에 관한 여러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어떤 학자는 6명의 여인이 귀족의 딸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는 노예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뒷이야기가 많이 인정되는 편이다.


6명의 여인상 기둥


이 여인상을 자세히 감상하려면 에레크테이온 신전에 가는 것보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가는 것이 더 낫다.
신전에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막아 놓은 데다가 현재 신전에 있는 조각은 모두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진짜 조각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각 방향마다 공간과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인위적으로 높이를 조절하지 않고 암벽 지형을 그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또 에레크테이온 신전의 건물들은 기둥을 비롯한 문간, 창문, 신전의 크기까지 똑같은 것이 없다.

이렇게 자유롭고 다양한 모습을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조화로운 모습의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그리스 문화의 뿌리인 포용성과 융합성을 잘 보여 주는 대표적인 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조감도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 진품

얇은 천으로 지어서 여인의 몸에 입힌 듯 하늘하늘한 느낌으로 와 닿는다.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 진품 뒷태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는 조각상 진품 부분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기둥


에레크데테이온 신전


디오니소스 극장(Theater of Dionysos) 전경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때 지어진 고대 아테네의 극장으로서 드라마 예술의 근원지였으며,
소실되었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 예술가이자 집정관인 리코우르고스(Lykourgos)에 의해 복구되었다.


이후에는 확장 공사를 통해 검투장으로 사용하였는데,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이곳에서 매년 디오니소스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디오니소스(Dionysos) 극장


디오니소스(Dionysos) 극장


극예술의 탄생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주변에는 두 개의 극장이 있다. 하나는 '오데온'이라 불리며 로마인들에 의해 지어졌다.


더 유서 깊고 중요한 다른 하나가 바로 디오니소스 극장이다.

우리가 서구 세계에서 알고 있는 개념의 '연극'은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했으며,
따라서 극예술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이 극장을 반드시 방문해 보아야 한다.


디오니소스는 연극과 포도주를 관장하는 그리스의 신이다.
그는 미스터리로 싸여 있으며, 그를 추종하는 여성들 –

'박칸트'(디오니소스의 로마식 이름, '바쿠스'에서 유래)라 불렸으며 에우리피데스의 희극 『박카이』에 강력하게 묘사된 –

은 그의 지배를 받을 때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거친 여성들로 알려져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기원전 5세기의 뛰어난 극작가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등
오늘날 서양 연극의 창시자라 알려진 희곡 작가들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그 이후로 이 극장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 의해 개조되고 증축되어 왔다.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절벽에 위치한 디오니소스 극장은 돌로 지은 최초의 극장이었다.
최대 1만 7천 명의 관객이 앉을 수 있었던 이 극장은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연극 경연 대회였던

'디오니시아'를 개최하기에 이상적인 장소였는데, 이 대회는 세 부류의 연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스 희극, 비극, 사티로스극이었다.


4세기 중반까지는 나무로 된 벤치에 대부분의 관객들이 앉았으나,
이후 더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도록 돌로 된 관람석이 도입되었다.


무대는 전통적인 그리스 방식에 따라 배치되어 오케스트라, 즉 코러스가 공연되는 장소가 무대 앞에 있었다.
이 극장은 원형 극장으로, 열려 있는 무대는 점점 높아지는 타원형 구역 안에 위치했다.


매우 탁월한 음향 효과를 제공해 주었던 이러한 설계는 고대 그리스 전역에 생겨난 다른 극장의 원형이 되었다.
4세기 이후 극장은 사용되지 않았으나, 뛰어난 가수였던 네로 황제가 대규모 개조 작업을 펼쳤다는 증거가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 안내석


디오니소스 조각상


디오니소스 조각상


디오니소스 조각상 해설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바라본 아크로폴리스 성벽


디오니소스 극장 안내석


그늘을 찾아서 잠깐 인증샷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극장


아크로폴리스의 가파른 낭떠러지 아래에는 두 개의 극장 유적지가 있다.
한 곳은 파르테논 신전 절벽 아래 자리한 디오니소스 극장이고

다른 한 곳은 니케 신전 아래 세워진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이다.


아테네 극장을 대표하는 두 극장은 자연 환경을 최대한 활용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경사가 가파른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쪽에 세워져 있다.


관중석이나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는 지형이 높은 곳에,

연설자나 배우들이 서는 장소는 낮은 곳에 설치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예술회관이나 영화관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극장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지금 남아 있는 고대 극장 중 가장 아름다운 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아크로폴리스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는 로마시대에 지어진 극장으로

1955년에 복원하여 현재 야외 콘서트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헤로데스라는 사람이 아테네에 기증한 것으로 실제로 극장이 건설된 시기는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한 이후라서 로마 극장이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은 지금도 여름이면 세계적인 악단과 예술가들이 찾아와

오페라, 연극, 음악 공연을 펼치고 있어 누구나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를 벗 삼아 멋진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종교적 중심일 뿐만 아니라 문화와 삶의 중심이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은 기원전 161년에 건설되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음악당으로서 5,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 극장 입구


헤로데스 아티쿠스(BC 101년 ~ BC 178년)는 고대 그리스의 변론가이며, 고대 제일의 대부호의 아들이다.
변론술에 뛰어나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제의 지우(知遇)를 얻었으며, 이후 여러 대의 황제를 받들게 되었다.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비롯해서 많은 유명인의 스승이었다.
그는 아테네의 고건축을 수복시키고, 아테네나 코린토스에 오디온을 설치,

델포이에 경기장을 기증하는 등 그리스 말기의 학예보호에 진력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뒤가 바로 아레오 파고스(Arios Pagos) 언덕이다.



[그리스 여행-아테네]도시의 보물들/Acropolis/Nike/Erechtheion/Parthenon/Arios




참고 ; https://blog.naver.com/hakkkkk/221342685333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82345&cid=47318&categoryId=47318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0580&cid=43081&categoryId=43081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2393&cid=42692&categoryId=4269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69254&cid=42636&categoryId=42636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45268&cid=51670&categoryId=5167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25515&cid=51339&categoryId=51339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65293&cid=42864&categoryId=50859





2006. 3. 12.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조영(造營)은 조각가 페이디아스의 총감독하에, 설계는 익티노스, 공사는 칼리크라테스의 손으로 진행되어

BC 447년에 기공하여, BC 438년에 완성하였다.


플랜은 정면 8주식(柱式)의 직사각형 주주당(周柱堂:30.87×69.51m)이며,

내부는 동서로 나뉘어 동쪽에 전면 6주의 프로나오스[前室]를 두고 3면을 열주로 둘러싼 나오스[本殿]가 있고,

서쪽에는 오피스토도모스[後室]에 이어져 파르테논(처녀의 실)이라 부르는 보고(寶庫)가 있다.


본전에는 페이디아스가 금과 상아로 만든 높이 12 m에 이르는

본존(本尊)인 아테나 파르테노스(처녀 아테나)상이 안치되어 있다.


신전의 장식 조각에는 동 ·서 양박공(兩牔栱)에 여신 아테나를 칭송하는 대군상조각을 배치하고
상부 4면 외벽에는 ‘라피타이족과 켄타우로스족의 싸움’을 비롯하여,

네 가지 신화에 의한 태고(太古)의 전쟁이 도합 92면의 메토프(작은 벽)에 부조되어 있다.

2006. 3. 12.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본전 외벽 상부 4면에는 길이 163 m에 이르는 도리스식 대(大)프리즈 장식(현존 130 m)이 있다.
이 프리즈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장대한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것이며,

인물은 신들을 합쳐 총수 360여 명, 말 219필을 헤아린다.


그 귀중한 잔존부분 가운데 아직도 건축에 남아 있는 일부와 아크로폴리스미술관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조각은 영국의 수집가인 토마스 엘긴경이 수집하여 '엘긴마블스'라는 컬렉션으로 대영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들 대조각군은 거장 페이디아스가 직접 지도하여 아르카메네스 등 뛰어난 조각가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신전의 안정된 비례와 장중함은 고전시대 그리스 정신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신전은 지금도 산성비에 노출되어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자리잡고 있는 아름답지만 폐허에 가까운 파르테논 신전은 기구한 시절을 지나왔다.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으로 지어진 이곳은 비잔틴 제국이 통치할 때는 동방정교의 교회가 되었다가,
십자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가톨릭 교회가 되기도 했다.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할 때는 모스크가 되기도 하였으나,

성격이야 어찌되었건 비교적 잘 보존된 셈이었다.


하지만 1687년 베네치아공화국이 아테네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했을 때

파르테논 신전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탄약고로 사용하던 파르테논 신전에 베네치아 군의 구포탄이 날아들어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이어진 베네치아군의 약탈, 영국의 엘진의 유물 반출 등을 통해 파르테논 신전은 되돌릴 수 없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현재 파르테논 신전의 적은 ‘산성비’다.

파르테논 신전을 구성하고 있는 석회석, 대리석은 탄산칼슘을 주성분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산에 녹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아테네가 대도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공해에 의한 그리스 고대유물들의

침식 현상이 본격적인 문제로 대두된 것은 1970년대.

그리스 문화부에서는 에렉테이온의 여상주와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 등에서 심각한 훼손의 흔적을 발견했다.


1990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아테네 시가 본격적인 오염 규제정책을 발표하면서 피해는 줄어들고 있지만,
공해에 노출된 파르테논 신전으로서는 공해자체를 현격히 줄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보호방책이 없다.
다행히 시끄럽고 공해로 가득차 있기로 유명한 아테네도 최근들어 상당한 개선을 보이고 있다고.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 495회.
그리스의 대표 건축물. 유네스코 심벌마크로 사용될 만큼 인류의 대표적 건축물.

그리스 건축물의 각 부분별 명칭


파르테논 신전의 동-서쪽에서 보이는 9대 4의 비율.
이 비율은 위에서 보거나, 남-북쪽으로 보았을 때에도 같은 비율을 보인다.


그리스 고전 건축의 최고봉


파르테논 신전이 그리스 고전 건축의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로 찬미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건축 자재의 대부분이 최고급 백대리석이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건축의 기본이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대들보와 기단, 기둥 등 신전을 구성하는 소재들이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신전을 지탱하고 있는 기단부의 바닥 부분은 미묘한 굴곡이 있는 컵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닥의 가운데 부분은 모서리 쪽보다 17센티미터가 높다.


눈으로 식별하기는 어렵지만 엔타블레이처(기둥 위의 대들보 부분)도

중앙 쪽이 6센티미터 더 높아서 완만한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신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의 직경은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정면 중앙부 하단의 직경이 1.9미터인 것에 비해 테두리 쪽에 있는 기둥의 직경은 1.94미터이다.
이처럼 신전 전체는 미묘한 곡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르테논 신전처럼 곡선을 주조로 한 건축은

오늘날처럼 건축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상당히 구현하기 힘든 기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인들은 왜 신전을 곡선으로 만들었을까?

첫째는 시각 효과를 들 수 있다. 신전 곳곳을 곡선으로 만듦으로써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건축물은 예술품이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건축가는 예술가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건축과 동시에 조각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신들에게 바치는 최고의 작품이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최고의 자재와 최고의 인재를 동원해 신전을 건설했던 것이다.

파르테논 신전 프리즈


외벽 상부 프리즈에는 아테나에게 바치는 파나테나이아의 대제(大祭)를 부조한 장식이 있으며,
인물 360여 명, 말 219필이 부조되어 있다.

신전 동쪽 메토프와 박공벽의 모습.


박공벽에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말이 새겨져 있고(위), 메토프에는 희미하지만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아레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전 내부 프리즈 : 판아테나이아 제전 행렬


신전 내부의 프리즈는 세로 1m, 가로 총길이 160m에 이르는며,
하나의 연속된 띠 속에 아테네에서 열린 판아테나이아 제전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내에 묘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스 고전기(B.C. 4세기~B.C. 5세기)의 최고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파르테논 신전은

B.C. 48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페르시아 군의 침공으로 한 차례 중단되었다.


B.C. 480년 가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1세는

마라톤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아테네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은 당시 건설 중이던 파르테논 신전을 파괴해버렸다.
이때 파괴된 신전을 구파르테논 신전이라고 부른다.


그후 그리스 군은 살라미스 해전(B.C. 480년)과 플라타이아이 전투(B.C. 479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테네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B.C. 447년, 신전 건설이 재개되어 당시 그리스의 저명한 건축가들이었던

페이디아스와 익티노스, 칼리크라테스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페이디아스는 신전 내 아테나 상과 신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부조들을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파르테논 신전은 B.C. 447년부터 B.C. 432년까지 약 15년간의 재공사 끝에 완성될 수 있었다.


그후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의 중심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동하고,

기독교가 보급되면서 성 마리아 교회로 전용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아테네를 지배한 15세기에는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모스크로 개조되기도 했다.

아테나 여신의 탄생을 표현한 조각 중 디오니소스의 조각


1687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군과 베네치아 군과의 전투로 신전의 일부가 파괴되는 일도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파르테논 신전에는 건설 당시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전쟁의 참화를 견뎌온 파르테논 신전도 약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1801년 영국이 당시 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스만 투르크를 통해 신전의 대부분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때의 약탈을 진두지휘했던 엘긴 경은 후에 같은 나라의 시인 바이런으로부터

'약탈자'라고 매도당했을 만큼 철저하게 신전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리고 1981년에는 지진이 발생해 기둥 상부가 떨어져 나가는 피해를 입었으며,

최근에는 산성비로 인해 아름다운 대리석이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그리스 정부는 인류의 유산인 파르테논 신전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수리와 복원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신전 동쪽 박공벽의 모습. 아크로폴리스 박물관 소장.


중앙에는 제우스가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오른쪽에 무장한 채로 아테나가 서 있다.
그리고 그 두 신 사이로 승리의 여신 니케가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전 메토프의 묘사 : 그리스의 투쟁과 영광
파르테논 신전의 외벽을 장식한 메토프는 신전 4면에 총 9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서면에 각각 14개, 남북면에 각각 32개의 메토프가 배치되어 있었다.


동쪽 메토프 : 신과 거인들의 싸움
서쪽 메토프 : 아테네인과 아마조네스의 싸움
남쪽 메토프 : 인간과 켄타우로스의 싸움
북쪽 메토프 : 트로이 전쟁


신전 내부 프리즈의 내용.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조품.


아테나의 신상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안치되어 있었던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신상은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만들었다.
그 높이가 무려 12m 였다고 한다. 현재 신상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묘조품이 아테네 국립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투구 : 중앙에는 스핑크스, 좌우에는 그리핀의 상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손 : 승리의 여신 니케 상
왼손 : 창과 방패. 창 옆에는 뱀 1마리가 몸을 도사린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갑옷 : 상반신 갑옷 가운데에는 메두사의 얼굴이 달려 있다.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묘사본.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페이디아스가 만든 원작에 비해 예술성은 떨어지지만,
파르테논 신전에 안치되어 있었을 원작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라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 동쪽 지붕에 있던 세 여신의 조각. 영국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파르테논신전 원주기둥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신전.


BC 479년에 페르시아인이 파괴한 옛 신전 자리에 아테네인이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나에게 바친 것으로서
도리스식 신전의 극치를 나타내는 걸작이다.


[그리스 여행-아테네] 세계문화유산 1호, 프레테논 신전/Parthenon/Temple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건축 과정 조감도 입체 영상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4329&cid=40942&categoryId=3308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11209&cid=42664&categoryId=42664

https://blog.naver.com/mjahn21/60058890366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5663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그곳의 기념물은 고전주의의 정신과 문명의 보편성을 상징하며,
고대 그리스가 세계에 남긴 가장 위대한 건축과 예술의 복합체로서 칭송받고 있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민주주의를 성립시키면서
고대의 도시 국가 사이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세워진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아크로폴리스 신전 입구인 프로필라이온 그리고 아테나 니케 신전 등이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사람들은 신화와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그리스를 서양 문명이 태어난 고향이라고 말한다.
아폴론이 태어난 델로스 섬과 제우스가 살았던 델포이, 포세이돈의 신전이 있던 수니온 곶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 살던 매력적인 유적지와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를 찾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는 오늘날 서양 문명의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장소이다.
서양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 정치, 문화가 태어난 곳으로

다채로운 문명의 흔적들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리스어로 ‘아크로’는 높은 곳, ‘폴리스’는 도시 국가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아크로폴리스란 높은 언덕에 세워진 도시를 말한다.

이름대로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지역은 기원전 1500년경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출입구로 사용하는 서쪽을 제외한 동, 남, 북쪽이 60~70m에 이르는 거대한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적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800년경부터 아크로폴리스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수호 여신 아테나를 비롯하여 여러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전과 여러 건물을 지으면서 신성한 장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약 300년 동안 신성시되었던 아크로폴리스는 기원전 480년에 일어난 페르시아 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성벽을 다시 세웠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테네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아크로폴리스를 다시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수많은 건축가, 예술가, 철학자, 장인을 아테네로 불러 모아 커다란 신전을 건설하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는 3곳의 신전과 입구에 해당하는 프로필라이온, 그리고 2개의 극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모형


아크로폴리스 전경


아크로폴리스 전경


아크로폴리스 전경


2006. 3. 12. 아크로폴리스를 배경으로 인증샷




아크로폴리스의 전망대


아크로폴리스 전망대에서 아테네 유적지와 시내를 배경으로


2006. 3. 12. 아크로폴리스 전망대에서 아테네 유적지와 시내를 배경으로


아레오 파고스(Arios Pagos) 언덕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82345&cid=47318&categoryId=47318
https://www.tripadvisor.co.kr/Attraction_Review-g189400-d735521-Reviews-Acropolis_Museum-Athens_Attic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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