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9년 08월 21일

[가신이의발자취] 가정 아끼듯 학생 사랑하신 ‘나의 선생님’

김찬국 전 상지대 총장
» ‘고무줄팬티 통신’
선생님은 제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만나 뵌 분이십니다. 첫 만남부터 환한 얼굴에 다정다감함이 온 몸에서 배어 넘쳐흐르는 인상입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때로는 시대의 예언자로 단호하십니다. 수업 중에는 결석한 이들의 사정을 일일이 확인하고 안부를 위해서 함께 기도합니다. 빈틈없이 엄격하고 철두철미하게 가르치십니다. 영어시간도 아닌 ‘구약개론’ 시간에 느닷없이 시사잡지 <타임>을 구입해서 서너 장씩 번역해 오라고 하십니다. 한 달이 멀다하고 과제로 200자 원고지에 리포트를 작성해 오라 하십니다.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를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원고지 쓰는 법에서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검토하고 빨간색 펜으로 수정, 지적해서 학점을 달아 되돌려 주십니다. 두 달 남짓 지나서는 신입생들을 모두 선생님 댁으로 초청하여 성창운(윤순) 사모님과 가족을 일일이 소개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장래의 가정 분위기를 현장에서 체험하며 배우도록 하십니다. 휴교령 등으로 등교를 할 수 없을 때에도 당신 수업만큼은 댁으로 학생들을 모아서 꼭 마무리를 하십니다. 그러니만큼 입학해서 한 학기만 지나면 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고 성내운 교수님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신 사모님을 비롯해서 딸 성혜, 아들 창규, 홍규, 은규 등 온 가족과 학생들이 함께 허물없어집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제 수업반에서만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매 학기마다 매 년마다 선생님은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듯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함께 어울리게 하십니다. 선생님께 한 학기만이라도 수업을 받아 본 학생들이라면 아마도 이 분위기, 이 광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은 비단 수업을 받은 제자에 그치지 않습니다. 섬기시는 교회에서, 이웃에서, 사회에서, 선생님이 가고 머무시는 모든 곳에서 뵐 수 있는 모습입니다.

1974년 연세대 신과대학장 재직 때 서슬퍼런 긴급조치법 1호와 4호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됐던 군사독재시절, 유일하게 내보내고 들어올 수 있는 빨랫감 팬티 속 고무줄에 소식을 적어 선생님과 사모님께서 10여 개월 동안 비밀리에 주고받은 ‘고무줄팬티 통신’(사진)은 애절한 사연과 함께 소중한 유물로 남을 것입니다. 7년 6개월 해직되어 계신 동안에도 어려운 출판사를 돕고 좋은 책을 보급하고 더불어 돈을 모아 양심수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넣어 주시기 위해서 그 연세에 커다란 가죽 가방 가득히 책을 넣어 메고는 모임이 있을 적마다 부지런하게 팔러 다니시던 모습하며, 제게 주례를 서 주시고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제 아내를 찾아 어려운 살림에도 87년 당시 적지 않은 거금 30만원을 손에 꼬옥 쥐어 주시면서 다른 데 쓰지 말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시던 선생님,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늘 사랑이 넘치시던 선생님, 참으로 인자하고 아름답고 거룩하신 선생님, 인간이 하나님일 수 있다면 세상에서 딱 꼽을 수 있는 주 하나님이신 선생님. 이 글을 쓰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까닭은 선생님께 어린 추억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문일 겁니다. 아니 이 땅에서 다시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뵐 수가 없어서 입니다.

김찬국 선생님~!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평안하시고 세상에 남아 있는 저희를 생전에서처럼 부디 잊지 말고 살펴주옵소서.

 

불초 제자 최민화 올림 / 전 환경관리공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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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

 

     잔상(殘想)    -계훈제 선생님 영전에 부쳐-

                                      최 민 화

     Ⅰ.


  1978년 늦여름인가,

나는 원효로 함석헌 선생님을 찾아 뵈었다. 

기억을 더듬고 가다듬고 해도 별로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는 아니었던 듯싶다.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다가 결혼을 앞두고, 이런저런 형편과 사정으로,

박선균 목사님께 ‘틈나는 대로 열심을 다해서 도와 드리겠다’는 다짐을 덧붙여서

다시 떠넘겨(?)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월간지를 펴내면서, 원고를 청탁하고 채근하고 마감해서

인쇄소에 넘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일’이다. 

 

글을 쓰는 ‘일’ 자체가 거의 모든 분들에게 있어서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키는 상태에서라야 생겨나는 창조물일 터인데,

그런 과정을 시간에 쫓기고 다투어서, 부탁하고 채근하고 재촉하는 ‘일’이야말로

피를 말리지 않고 해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원고료도 변변치 않거나 아예 맨입으로인 처지에……

 

 〈씨알의 소리〉 편집일을 맡아 하는 동안

나는 피말리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 ‘노하우’는 그 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소중한 기반이 되고,

무형의 자산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유별나게 기발하거나 희세지재(稀世之才)한 것도 아니다. 

굳이 비장해서 혼자만 감추어 두어야 할 일도 아니고,

세상에 드러내서 자랑삼을 꺼리도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닐 ‘노하우’를 털어 놓자면 이렇다.

 

  ‘상대방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피를 말려라!’

  ‘필자의 신경을 긴장시키고, 영혼을 몰입시켜라’

  ‘자신은 절대로 피마르지 말고, 염체불구해서 필자의 신경과 영혼을 잔인하게 조정하고 통제하라’

 

  원고를 받아들고서부터는 긴장이 풀어지고,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게 될 초긴장을 가다듬기 위해서 차라리 안식하는 과정이다. 

 

교정 교열을 마치고 모든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면,

마치 만삭이 되어 입원한 아내를 산모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남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다.

 

이 때에 이르르면 ‘괜찮으냐?’는 염려와 걱정에서부터

‘나오게 되느냐?’ ‘언제 나오느냐?’는 기다림과 초조가 〈씨알의 소리〉 주변을 맴돈다. 

 

그러다가 지친 분들이 제본소로 달려 나와 막 태어나는 〈씨알의 소리〉를

담고, 싸고, 묶고, 운반하고, 발송하는 일을 감격에 겨워 함께 해 낸다.


  그 날 함 선생님의 표정은 여늬 때와 뭔가 좀 다르셨다.

약간 상기되어 흥분하신 것 같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시기도 하고, 

‘허……참!’ 하시기도 하고, ‘생각’이 많으신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시는지 그랬다. 

 

좋은 일인 것 같기도 하고,

심정을 상하신 일 같기도 하고, 곁에서 느끼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으세요?”하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들으셨는지 마셨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계속하신다.

 

  “허…참! ……이거 원 …… 허…참!”

 

  나 역시 곁에서 계속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나 깊은 ‘생각’이 있으신 것이리라 여겨지고,

혹시 내가 곁에 있어서 거추장스러운게 아니신가, 해서 자리를 물리려 했다.

 

  “저기 가 있겠습……"

 

하고 외채로 떨어져 있는 〈씨알의 소리〉 사무실을 향해서 몸짓을 돌리려 하자,

선생님은 때 맞추듯 ‘허……참!’ 하시고는 ‘이거……어떡허지?' 하면서

밑도끝도 없이 나의 의견을 묻는 말씀이시다.

 

  “무언데요?……”

한동안 도대체가 영문을 알 길 없어 하는데

 

  “허…참!……아 글쎄……”

하면서 계속 뜸을 들이신다

 

  “허……저…계 선생 얘기 들어 본 적 있어?"

 

순간 나는 ‘계훈제 선생님 신변에 무슨 일이 닥쳤나’ 하고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처럼 함 선생님께서 심각하고 중차대하게 여기시는 소식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뭐하고 다니느냐는 핀잔은 아니실까? 하는 자책감이 뒤엉켰다.

 

  “계 선생님께서 또 잡혀 가셨어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함 선생님께 여쭈었다.

 

  “허!……그게 아니고 ……계 선생이……혼례를 올리신대”

 

느닷없고 뜬금없는 말씀에 순간 내 머리 속은 청천벽력으로 뒤죽박죽이고,

어안이 벙벙하면서 혼란스러워진다.

 

  “어?……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천하의 중앙정보부를 따돌리고,

물샐 틈 없는 감시망을 뚫고,

소리소문 없이 혼례를 올리시기까지 이르른다는 게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제 하에서 김구, 박헌영 등 많은 분들이 치열한 운동을 벌이면서도,

가정을 꾸리고 안식처를 구했다.

 

하지만 그 일은 감시 지역을 벗어나 있거나,

감시망을 피해서 철저하게 잠적한 상태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도대체 복장이나 외모가 남다르신 데다가 백주에 드러내서 활동할 일 다 하시고,

야밤에 비밀하게 결사할 일 다 하시면서,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럴 수가 있는가?

 

  뜸뜸이 이어지는 함 선생님의 말씀인즉슨 방금 계 선생님께서 다녀가셨단다. 

동거하신 지도 10 년 여가 되었단다. 

 

초등학교 4학년 되는 아들도 있으시단다. 

사모님은 화가이신데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집안이란다. 

 

그러저러해서 그동안 사모님 집안을 위해서도 그렇고,

드러낼 수가 없는 형편이시었단다. 

 

그런데 아들이 커 가면서 사리분별할 나이에 접어드는데,

언제까지 세상 모르게 숨고 묻어 두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우선 함 선생님께 먼저 이실직고해서 아뢰고,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 가까운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 세상에 드러내는 시늉이나 갖추고 싶으시다는 거다.

 

  뜸뜸이 말씀을 이어가시는 함 선생님의 표정과 분위기는 참으로 묘했다. 

 

‘세상에, 그런 일을 나에게까지 이제껏 감쪽같이 속이다니’ 하며 못내 서운한 듯도 하시고,

‘그 오랜 세월 무서운 감시망을 피해서 내외분 모두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겠나,

참으로 무서운 분들이구먼’

하며 안쓰럽고 경외하는 표정이기도 하시다. 

 

그러다가도 ‘평생을 혼자 될 줄로 알았는데,

장성하는 아들까지 있다니’하며 대견하고 감격해 하시는 듯도 하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시네요”

  나 역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얼떨떨한 상태인 채로 두서도 없는 말씀을 드리자,

 

  “…그렇지?……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구먼……”

하신다.

 

 

     Ⅱ.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소리’ 소문으로 번졌다. 

 

아예 집안 일을 가지고 떳떳하게 자랑삼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야말로 겸손하기 이를데 없어 몸둘 바를 몰라 하고,

하염없이 부끄러움을 타면서, 차라리 그냥 묻어 두었으면……

하고 바라시던 계 선생님의 심정은 이미 아랑곳없다. 

 

 ‘몇 분만 모셔서 조촐하게’가 뭐냐고 난리들이다. 

혼례식 자체가 집안과 개인사를 넘어선 시대적 사건이요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한판 크게 벌려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박정희 유신정권이 말기 증상에 단말적 기승을 부리기로서니,

관혼상제의 풍속까지야 못하게 막겠느냐는 거다.

 

  시공을 넘어 요즈음 같은 분위기에서라면

모든 언론과 잡지에서마다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순애보로 불꽃튀는 취재 경쟁을 벌이고 난리를 치면서,

텔레비전 뉴스로도 특종감이겠지만,

얼어붙을대로 얼어붙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는

두 분의 혼례를 알리는 청첩장을 띄울 엄두조차 감히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그 해 초겨울,

이미 해가 떨어져 컴컴한 야밤에,

비밀리 마련한 도심 한복판 중국음식점 아서원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살피며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종교계, 학계, 법조계, 문화 예술인, 언론인, 노동 운동가, 청년 운동가 등등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며 계 선생님과 뜻을 같이 하는 분들로

장내는 삽시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고 은 시인의 비장한 감동과 감격어린 시 낭송이 이어지고,

청년 문화패의 사물놀이로 한바탕 소란이 일면서 분위기는 한껏 절정에 달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정보 기관에서는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안절부절 야단이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선우와 청년 풍물문화패는

역사적인 혼례식의 제물이 되기를 기꺼이 각오하고 자처하듯,

한꺼번에 엮어져 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돌이켜 보면,

장례식으로는 일제 치하  3.1 독립 운동을 촉발하게 된 고종 황제의 국장에서부터

민족 사회에 큰 관심과 영향을 불러일으킨 일이 연이어 있어 오다시피 했지만,

축복받아야 마땅할 혼례식으로 감시망을 뚫고,

감시 병력에 첩첩이 둘러 싸인 채, 기습 작전을 감행하듯,

세상 떠들썩하게 야단을 불러일으킨 적은 없지 싶고,

그때까지 보고 들은적 없다. 

 

뿐만 아니라

이 혼례식은 한 가정과 한 때의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서 치루어진

‘기억될 추억’에 머무르지 않고,

곧 이어서 다가올 앞날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로부터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 유신 통치 시대를 마감하고,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한다는 열망은

재야 민주화 운동권뿐만 아니라 전국민적 합의에 달했다. 

 

하지만 시국은 어수선했고,

국가의 운명이 어디로 튈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비상계엄령이 발동되고 정국은 숨막히는 공포로 주눅든다.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박 정권 이래로 구축해 놓은 제단을 싹 쓸어버리고,

누군가를 살육해서 희생 제물로 삼을 것만 같은 분위기다.

 

  누군가가 쓴잔을 받아 마셔야 할 것 같고,

누군가는 피하려고 해도 받아 마실 수밖에 없을 운명일 것 같다. 

 

일부에서는 그러니만큼 차라리 어둠의 세력이 쳐놓은 장막으로

당당하게 몸을 던져 뛰어들 양심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몸서리치는 공포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판 승부를 겨루어야 한다고 했다.

 

  여러 계층과 분야에서 민주화를 위해 관심을 갖고 행동해 온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의논하고, 힘을 모으고, 승부수를 짜내는 동안,

10여 개월 전에 치루었던 계훈제 선생님의 성공적(?) 혼례 행사는

소중한 귀감이 되고, 방법이 되고, 전술 전략이 되었다.

충분한 훈련이고 실전 경험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 혼례 행사는

소위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다시 살아나고 이어진다. 

 

어두컴컴한 밤중에 치루던 것을 백주 대낮으로 옮기고,

비밀하게 음식점을 빌려 치루던 것을 명동 한복판 YWCA 대강당으로 옮겼다.

 

계훈제 선생님 역으로는 당시 민주청년협의회 홍성엽이 맡고,

김진주 사모님 역으로는 윤정민이라 하여 가상의 인물을 설정했다. 

 

등장하는 하객들도 이 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분들이,

기척을 살피고 발소리를 죽이며 삼삼오오 삽시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장면도 같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 기관에서 이리뛰고 저리뛰며 일대에 병력을 배치해서

첩첩이 에워싸고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장면도 같다.

 

  하지만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과 배경과 역할은 전혀 달랐다. 

 

인물로는 정보기관원이 아니라 비상계엄군이 맡고,

배경으로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위 신군부 세력이 맡았다.

역할은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연행하고 무지막지하게 다루는 것이었다.

 

  식순을 진행하자마자 단상 쪽에서부터 의자 내던지는 소리와

비명소리로 소란이 일더니, 대회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었다. 

 

무장한 계엄군들이 쏟아져 들이닥치면서 참석자들을 마구 끌어내고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짙은 안개에 쌓인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비상계엄군은 함 선생님을 비롯해서

목사님과 교수와 문화예술인, 청년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끌어갔다. 

 

끌려간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군화발과 5파운드 몽둥이로,

갖은 고문과 능욕으로 처참하게 수모를 당했다. 

 

함 선생님 역시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 치하에서도 들어본 적 없던 수모를 적잖이 당하셨다. 

 

그리고는 소위 ‘명동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이라 이름하여

140여명이 구속 구금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다시금 돌이켜 보면,

계훈제 선생님과 김진주 사모님의 혼례식은,

약력과 활동 경력 등 모든 기록에서 드러나지 않고 겸손하게 숨어 있어 흔적없이 빠져 있지만,

이르르게 되기까지 저간의 사정도 그러려니와 행사 자체가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 사회 운동에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길이 기억되어서 마땅할 일이다.

 

 

     Ⅲ.


  계훈제 선생님!

 

  선생님은 1921년 평북 선천에서 출생하시고

경성제대에 다니시면서 일제의 학병을 거부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신다.

 

해방 직후 민족사회의 혼란기에 서울대학교 학생회장으로 반탁운동을 주도하시고,

이후부터서는 학생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또한 사회운동과 민족통일운동으로 평생을 한치의 틈도 없이

투쟁의 역사, 저항의 역사 현장 한 복판에서 올곧게 보내오신다.

 

전국에 지명 수배되어 도피 생활도 하시고,

몇 차례씩 구속되어 감옥살이도 하신다.

 

  하지만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어언 30년 여를

올곧지 못하게 허둥거려 온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

투쟁의 한 복판에 서 계신 모습,

오른 손을 치켜들고 주의 주장을 외치시는 모습보다는,

자꾸만 선생님의 인간적인 면모가 선하게 떠올라 눈에 어리고, 눈시울을 가린다.

 

  연세가 드실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더 심해지는 듯한 겸손하신 모습, 

겸연쩍어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며 허둥대는듯한 천진난만하신 표정,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국민복장에 흰 고무신,

일찌기 폐를 잃어 비스듬히 기울어지신 어깨,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손을 비비거나 손을 내밀어 불을 쬐이거나,

손을 입가에 대고 녹이거나 하는 법 없으시고,

아무리 덥다고 국민복 단추 두어개 쯤 풀어 제치고 부채질하는 법 없으신모범생도 같은 품성,

 

사람의 심성이 제아무리 맑을 수 있고,

감성이 제아무리 고울 수 있다고 한들 어찌 그러실 수 있을까? 

반듯하고 올곧기는 또 어떠시고…….

 

 

  김진주 사모님께!

 

  사모님,

 

이제 계 선생님께서 이승의 생을 마감하시고 함 선생님 곁으로 가셨네요.

함 선생님께서도 아주 반가이 맞아 주실 꺼예요.

 

함 선생님 먼저 가 계신 동안,

복잡다단하게 얼키고 설켜서 처신이 만만치 않던 세상살이에,

드러내 놓지 못할 몸 고생, 마음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느냐고 위로해 주실 꺼예요.

뜨겁게 뜨겁게 안아 주시고 등을 두드려 주실 꺼예요.

 

생전에 늘 마음과 뜻을 같이 하시던 장준하 선생님, 문익환 목사님,

안병무 박사님, 장기려 박사님과도 반가움에 겨워 그러실 거구요.

 

모두들 사모님의 안부를 물으시고

참으로 그렇게 고마워 하실 수가 없을 꺼예요.

 

  함 선생님은 계 선생님이 사모님과 혼례를 올리겠다는 저간의 사정을 들으시고,

충격과 감격으로 눈시울을 붉히셨어요.

 

흥분을 삭이지 못하시고,어찌할 바를 몰라 하셨어요.

고금동서에 이런 기상천외한 드라마가 다 있나 하셨어요.

예단을 마련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정성스레 준비해서 보내셨어요.

 

여곤이가 의학도로 훌륭하게 다 커서 이제 장가갈 나이가 꽉 찼다는 기별을 들으시면

아마도 천상에 없이 기뻐하실 꺼예요.

 

혹시 〈씨알의 소리〉가 다시 복간되었다는 소식까지 전해들으신다면

더없이 기뻐하실 꺼구요.

 

  함 선생님은 이제 사모님을 염려하고 걱정하실 꺼예요.

계 선생님과 천상에서 평안하게 함께 지낼 테니까 슬픔에서 빨리 딛고 일어서시라 하실 꺼예요.

어쩌면 함 선생님은 계 선생님보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신 줄로 여기실 지도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사모님!

빨리 일어나셔서 문익환 목사 사모님이신 박용길 장로님이랑 안병무 박사 사모님이신 박영숙 선생님,

장준하 선생 사모님과 함께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며 오래오래 사세요.

장기려 박사 사모님은 평양에 계시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요.

 

그러셔야 두 번씩 강제 죽임을 당하고서 네 번째로 마침 마악 꿈틀이고 일어서려는

저희 〈씨알의 소리〉 식구들도 ‘생각’을 더욱 가다듬게 될 거 아니겠어요?

 

사모님들께서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며 건강하게 살아가시는 소중한 삶을 귀감 삼아서

저희도 크신 뜻을 깨우치고 다짐하며 이어받아가게 될 거구요.

 

  사모님!

 

사모님께서도 그러셨지만,

계 선생님께서는 생전에 불초를 볼 적마다,

무엇보다 먼저 위암 수술을 받은 안사람 건강이 어떠냐고 늘 염려하시면서 따뜻한 안부를 주셨잖아요.

 

괜찮습니다.

수원에서 함께 일을 보다가 선생님 비보를 받고 급히 빈소를 찾아 뵙게 되었어요.

 

한없이 선하고 인자한 표정이신 선생님의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리를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마악 다시 태어난 〈씨알의 소리〉에서 원고 청탁을 받고,

주저주저하다가 이렇게 두서도 없이,

잔머리에 떠오르는 자잘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미천한 글을 올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드러내서 자랑삼을 것도 아니라고 여기실 일들을,

그래서 굳이 묻어 두고 계신 일들을

이렇게 들추고 밝혀서 씻지 못할 누를 끼치는 건 아닌지 하는 조심과 배려도 없이,

촉박한 시간에 쫓기어서 소홀하기 짝이 없는 글을 올리게 됨을

부디 용서하시고 넓으신 아량으로 양해해 주세요.

 

  사모님!

 

이제 세상에서 마무리하셔야 할 일들도 많은데,

더는 깊이 상심하지 마시고, 다시금 건강하게 일어나세요.

계 선생님께서 못 다하고 가신 몫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고요.……

 

  안녕히 계십시오.

 

   불초    최 민 화 드림.  (전 씨알의 소리 편집장) / 씨알의 소리 제147호 (1999년 3.4월호)

 


 

    환경관리공단을 떠나며 3년 여 동안이라는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공직생활의 임기를 마치고 이제 정든 공단을 떠납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무모하게 받아든 직분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저로서는 환경 전문기술 분야에 문외한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직 생활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생소한 저와 함께 임직을 원만하게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감사실 직원들께 이 자리를 빌어 우선 먼저 깊은 신뢰와 고마움을 전합니다. 더불어서 처실장 님과 팀장 님들을 비롯한 모든 직원들 그리고 이사장 님을 비롯한 임원 님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저는 평소에 우리 사회가 보다 정의롭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가치를 구현해 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 왔습니다. 제가 취임했을 적엔 감사라는 직분에 우선적으로 적응함은 물론이고 전문성을 배우고 익혀서 남들 못지않은 업적을 남기거나 능력을 발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마는 그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공공기관이 취해야 할 자세와 역할을 새기고 직원 여러분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도록 자세를 가다듬어 왔습니다. 하지만 막상 직분을 마치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채 열정을 다 쏟지 못하고 정성도 부족했던 것들이 참으로 아쉽고 미흡하게 남아 있습니다. 저는 우리 공단을 일터로 삼아서 섬겨 온 경험을 잊지 못할 겁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걸쳐 오지 중에 오지에 산재해 있는 환경시설공사 현장에서 묵묵하게 일하는 직원 여러분과 한나절 하룻밤이나마 함께 했던 일들... 가정과 친인척 주변 관리는 돌볼 겨를없이 오로지 공단 업무와 자기관리에 온몸을 내던져 헌신하는 모습들... 이런 임직원 여러분과의 만남은 제게 매우 의미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전문성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미흡한 처신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해 했을 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그러이 보아주시고 음으로 양으로 격려를 주신 분들께 이 시간을 빌어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다시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쉽고 미흡한 흔적을 남기고 임기를 마치는 마당에서 저는 여러분께 감히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정치사회적으로 암울한 시기였던 70년 ~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그야말로 생명과 재산을 바치고 온 몸을 내던져 저항한 일들로 말미암아 미처 이룰 수 없었습니다마는 여러분은 이제 맡은 바 직분은 물론이거니와 기술과 전문성을 한껏 키워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발전하는 만큼 우리 공단도 발전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술과 전문성이 성장하는 만큼 우리 국가도, 국민도 그만큼 커집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역량이 커져야 우리 공단도, 국가도 경쟁력을 갖게 됩니다. 보다 더 지혜롭고 소신있고 헌신적인 환경관리공단인이 되도록 노력해 주십시요. 그래야만이 여러분 자신에게 뿐만아니라 우리 공단에도 마침내는 국가와 우리 민족에도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새로 오신 정선순 감사님은 저와 함께 30여 년 동안 이 땅의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 그리고 노동운동의 선봉에 서서 헌신해 오신 분입니다. 아마도 제가 부족하고 소홀해서 아쉬움과 미련으로 남겨 둔 일들을 잘 해결해 나가실 분이라 믿어서 든든하고 홀가분하게 떠납니다마는 여러분께서 제게 가져 주셨던 것보다 더 큰 관심과 격려 그리고 배려와 안내를 신임 정선순 감사님께 베풀어 주시기를 각별하게 부탁드립니다. 우리 환경관리공단 여러분과 함께 했던 지난 3 년 여 동안이야말로 제게는 참으로 뜻 깊고 자랑스런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계속 섬기실 우리 공단과 가정과 주변 두루두루에 건강과 평화 그리고 발전과 희망이 늘 함께하시길 빌어마지않습니다. 감사합니다 ~ ~ 2007년 8월 최민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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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혁신, 그리고 명상에 대한 소고(少考)

 

 

 1. 요가 수행

 

나는 70 ~ 80 년대 여섯차례에 걸쳐
유치장과 교도소에서 수형생활을 한 바 있다.

 

그때마다 갑자기 뒤바뀌어버린 환경,
불안과 두려움의 나락으로 떨어진 엄청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나는 곧바로 요가를 시작했다.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요가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두 시간 여 그리고 저녁에는 취침 전까지 세 시간 여 동안
요가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1974 년 내가 요가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마땅한 요가책이 나와 있지 않아서
나는 일본에서 출판된 책을 교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해방 후 반일 교육의 영향으로
일본어를 제 2 외국어 선택 과목에서도 배제하고 있을 때여서
요가책의 내용을 터득하기 위해 나는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해야 했다.

 

특히 생체학에 관련된 용어들이 많아 애를 먹었다.
덕분에 일본어는 신문을 대충 이해할만할 정도로 배우게 되었지만...

 

요가 중의 요가 모든 체위 동작 중의 왕이라고 하는 물구나무서기를
나는 딱딱한 마루바닥에서 머리를 대고 얼마든지 오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요가의 이론과 실습을
내가 구속되어 있던 기간을 통산하면 5 년 여 동안 전공한 셈이다.
 
요가에서는 변화와 균형과 안정을 3 대 원칙으로 삼고 있다.
즉 변화를 꾀하고 균형을 유지하면서 안정되게 생활하는 것이다.
이렇듯 요가에서는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변화를 중시한다.


사람의 몸일 경우에는 먹은 것을 배설하는 흐름이 곧 변화다.

정지해서는 안 된다.
버릇이나 습관은 변화가 아니라 정지다.

 

계절이 변하듯 자연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인간의 감정도 싫건 좋건 변한다.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환경도 항상 유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균형은 어는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부분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람의 몸에서 긴장과 이완, 좌측과 우측,
산성과 알칼리성의 균형을 요가에서는 매우 중요시한다.

 

요가 수행의 대부분은 치우침을 수정하고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안정은 불안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걸맞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나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가 바로 안정이다.


음식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양식이 된다고 자기에게도 좋은 음식이라고 할 수 없다.

체조와 훈련에 있어서도 자기 신체에 맞지 않는 것은 무리이며
부질없고 불안정한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자기 자신에게 알맞은 것인가 하는 것은
훈련하면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러한 변화와 균형과 안정을 3 대 원칙으로 해서
요가는 몸을 통일하고 마음을 통일하며
몸과 마음을 조화시키는 호흡식을 결론으로 삼는다.

 

요가라고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불상처럼 앉아 있거나 온 몸을 곡예사처럼 꼬고 있는 자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체위 훈련은 모두
몸과 마음과 호흡을 조절하기 위한 방법이요 수단이다.

 

앉음새가 바르지 못하면 허리가 아프다.
요가에서는 바르지 못한 앉음새를 바로 잡는다.

 

비정상적인 식생활은 병의 원인이 된다.
요가에서는 비정상적인 식생활을 바로 잡는다.

또한 바르지 못한 행동을 고친다.

 

눈에 보이는 신체 활동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활동,
의식할 수 있는 자신과 무의식적인 자신의 활동,
이 모든 것을 조화하고 통일해서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요가 수행의 목표이다.


 

2. 단전과 호흡

 

사람의 몸은 근육과 뼈와 내장으로 구성된다.
이 세 부분의 관계가 원활하면 바른 자세 바른 동작이 된다.

 

협력 방식에 이상이 있으면 이상한 동작이 유발된다.
이 세 부분의 협력은 각자의 특질을 살려 나갈 때 안정을 취한다.
즉 근육은 부드럽고 뼈는 단단하며 내장은 신축성을 마음껏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근육에는 이완되는 것과 수축되는 것이 있는데
각자의 활동이 강할수록 유연성이 풍부해진다.

 

따라서 근육을 이완시키고 수축시키는 자극이 필요하다.
하지만 근육에는 수축되는 자극이 많으므로
보통 동작에서는 이완시키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바른 동작 바른 자세를 가지려면 단전의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단전이란 역학으로나 생리학으로나 몸의 중심점이 되는 곳이다.

 

요추와 항문과 배꼽을 연결한 삼각형의 중심이 단전이다.
그러니까 배꼽 밑으로 5 cm 쯤의 안쪽에 위치해 있다.

 

생리학적으로 말하면 단전은 자율신경과 체액의 균형을 이루는 중심이 된다.
이 단전에만 힘을 넣고 딴 곳에서는 힘을 빼야 한다.

이런 상태가 될 때 심신의 능력이 최고로 발휘된다.


단전의 활동을 강화하려면 상반신의 힘을 빼고
하반신에 힘이 모이도록 하면서 항문을 오무린다.

 

가슴을 펴고 엄지발가락과 오금에 힘을 준다. 

어깨와 목, 손에서는 힘을 뺀다.
목의 근육을 반듯하게 하고 깊숙히 호흡한다.

 

사람이 죽으면 항문이 열린다.
항문이 오무라져 있는지 아닌지를 보고 생사를 구분하기도 한다.

 

물에 빠져 생사지경에 처했을 때 항문을 오무리고 있으면 구조되는 수도 있다.
항문을 오무리면 몸의 안정력이 높아 진다.

 

인간은 먹지 않고 물만 마셔도 50 일이고 60 일이고 살 수 있지만 호
흡은 단 5 분만 멈추면 죽는다.

그러므로 호흡은 인간의 생명 그 자체다.

요가에서는 호흡을 매우 중요시한다.


단전호흡은 요가의 근본이다.
모든 체위 동작도 호흡과 연결하고 일치해야 한다.

 

사람의 피부는 외부의 공격 즉 벌레에 물린다거나 접촉에 의해서 상처가 생기면
긁기도 하고 씻기도 하면서 스스로 조절할 수가 있지만
뼈와 근육과 장기 등은 요가의 호흡과 체위 훈련을 통해서라야 조절할 수 있다.

 


3. 명상과 정신 통일

 

요가 수행의 진수는 명상이다.
명상의 의미는 넓고 깊고 높고 거룩하게 느끼고 생각하며 진실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회생활 가운데서건 사이버상에서건
어떤 사람과 우연히 만났다고 하자.

 

일반적으로는 단지 그 때, 그 곳에서,
그 사람과 만났다는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될 뿐이지만
명상을 통해서는 우주 만물 가운데 이 지구상에서,
한반도에서, 멀리 조상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아무리 사소한 인연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이라 여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나 나 자신이나 선조 대대로 내려오면서
어느 조상 한 분이 원해서건 아니건 다른 분과 혼인했더라면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 때, 그 곳에서, 그 사람을 만날 수도 없을 것이란 얘기다.

 

우주 만물... 지구상의 시간과 공간...
모든 환경이 한치도 틀림없이 일치하고
빈틈없는 질서로 선택되어서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란 의미다.
 
명상은 요가의 근본 훈련이요
요가는 바로 명상 행법을 위하고 명상을 뜻하는 말이다.

 

명상은 주의 집중과 의식 집중 훈련에서부터 시작한다.


주의와 의식 집중을 위해서는 여유가 있고 편안할 것과 호흡이 고르고 깊을 것
그리고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기 쉬운 상태일 것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 감각이나 사고 활동이 강해 진다.


이를테면 사람이 드러누어서 마음이 느긋하고 편안할 때는
주위에 조그마한 소리도 크게 들린다.

 

감동한다든지 놀란다든지 흥미로운 사건을 접한다든지 절박한 상황 등등에서는
자연히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게 된다

.
따라서 그런 조건을 의식적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한 방법이다.

주의 집중법은 몸을 통한 통일 훈련법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뭔가 한가지 소리에 매달려 그 소리에 집중한다.
 
나는 감옥에서 명상에 들어 갈 때 어떤 날은 풀벌레 소리에,
어떤 날은 하수구로 흐르는 물소리에,
어떤 날은 빗소리에 바람소리에 매달려 집중하곤 했다.

 

단전 호흡을 하면서 한 소리만 집중해서 듣고 있으면
그 소리의 리듬과 음색과 변화의 흐름이 느껴지곤 한다.

 

처음에는 소리를 붙잡고 소리에 매달리면서 집중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무의식의 세계 명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요가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음(音),
즉 소리에 집중하는 방법이 있다.

때로는 스스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스스로 소리를 낼 때 숨을 오래 내쉴 수 있는 한 길게 내쉰다.

처음에는 가만히 소리를 내고 이 소리에 집중하지만
나중에는 소리를 멈추어도 마음 속에서 계속 소리를 내게 되고
그 소리에 따라 주의를 집중하게 된다.

 

요가에서 소리로 주의 집중하는 방법을 근거로
불가에서는 '음 ~ ~ ~' 하는 수행법이 있다.

 

의식 집중법은 마음을 통한 훈련법이다.
여기서는 추상적인 관념에 집중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 '무(無)란 무엇인가?'
'명상이란 무엇인가?' 등등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문제에 생각을 집중한다.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생각에 생각을 집중함으로써
생각하는 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긴장과 이완이 가장 균형잡힌 상태가 곧
가장 안정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4. 선정과 무심

 

명상 훈련에는 몇 가지 수행법이 있다.
그 중 선정행법에는 눈을 감고 하는 경우와 실눈을 뜨고 하는 경우,
눈을 크게 뜨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주로 눈을 감고 수행했다.

 

좌선하고 턱을 끌어 당긴 상태에서 단전 호흡을 하고
조용히 눈을 감은 다음 눈알을 양쪽으로 끌어 모은다.

그리고는 머리털이 머리 위로 힘껏 뻗쳐 올라가는 기분이 되게 한다.

 
즉 자기 머리 꼭대기로 하늘을 떠받치는 기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을 좌우로 넓게 벌려서 위로 치켜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내밀듯이 하면서 뻗쳐 준다.

 

이렇게 하면 자연히 단전에 힘이 집중되고 항문이 조여 진다.
등뼈가 펴지고 동시에 힘이 집중되면서 가슴에서 위의 힘이 빠져 나간다.

 

단전이 모든 균형의 통일점이므로 여기에 집중되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몸의 안정력이 높아 지고 뇌의 안정도 높아 진다.

 

이렇게 해서 몸의 수행이 그대로 마음의 수양으로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힘이 빠지면서 무심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무심(無心)이란 이것에나 저것에나 구애받지 않는 상태...
즉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상태에서 사물을 대하는 마음이다.

 

이 무심의 상태를 자연의 마음이라고 하는데
요가에서는 이 마음의 상태를 바른 마음이라고 본다.

 

우리는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으로 에고(ego) 즉 자기 중심, 자기 본위로 되기 쉬운데
요가에서는 이 에고가 악을 만드는 근본이라고 본다.

 

무심은 자기 마음을 버리는 훈련이다.
무심에 이르기 위해 무조건 남에게 봉사하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조건이 붙은 마음을 사욕이라고 한다.
이 사욕에서 불평, 불만, 분노, 저주, 증오 같은 것이 생기고
무리한 생각도 생기므로 사욕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본다.

 

조건을 붙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은 마음이 무심이다.
이처럼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마음이 가장 활발해 지는 것이다.

 


5. 무심을 넘어 기쁨으로

 

명상에는 이밖에도 삼매와 불성계발, 법열 행법 등이 있다.
삼매(三昧)란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즉 자기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한마음 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대립이나 갈등,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나'와 '너'가 함께 살고 서로 살리는 세계다.

 

이를테면 인생을 오랜 세월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아 온 할머니 할아버지...
행복한 부부 관계가 곧 삼매의 관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쩌면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긴장과 경계,
갈등을 넘어서서 몸과 마음을 일치할 수 있는 상태가 곧 삼매의 경지다.

 

하지만 모든 인간 세계를 대상으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
이 삼매가 자기 마음에 실현되는 것이고
모든 이들의 마음을 바르게 받아들일 때
'사랑'도 이루어 지는 것이다.

 

'나'와 '너'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그럴 때 삼매의 세계,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사랑의 세상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의 상태가 그대로 자기의 마음으로 될 때
비로소 진실한 일이 되고 일하는 기쁨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이 곧 깨달음이고 불성(佛性)이다.

 

불성이란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선택해서 부여된 특성이라고 요가에서는 말한다.
불성은 변화하고 진화하는 원동력이고 사물을 성화(聖化)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비단 요가나 불교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원리와도 일치할 수 있겠는데
마음을 성화함으로써 인격자가 될 수 있고 석가의 마음, 예수의 마음이 됨으로써
참다운 감사와 기쁨이 생기고 예배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알기 쉽게 풀면 물이 물이라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라 목마른 짐승도 그 본질을 알 수 있다.

 

이 물을 자연이랄지 신의 사랑이랄지 하느님의 은혜로 받아들이는
'거룩한 마음'이 곧 요가에서 말하는 불성이다.

 

이와같은 '거룩한 마음'에서 바른 사고와 행동 방식이 나오고
올바른 해결 방법이 나오는 것이다.

 

진실을 알고 감사하게 예배하는 '거룩한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기쁨 즉 법열(法悅)이 생긴다.

명상에서는 이 법열의 경지 즉 기쁨의 경지를 최고 목표로 한다.


요가에서는 '내 안에 신이 있다. 그 신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깨달음을 얻고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신 즉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기쁨 즉 법열을 맛볼 수 있다.

 

이 기쁨의 경지, 법열 즉 니르바나(nirvana)의 경지가
요가의 가르침이요 목표이며 참 모습인 것이다.

 

다시금 풀어 보면 삼매의 단계는 흔히 독서삼매에 빠진다는 말처럼
글쓴이의 마음과 정신 세계가 읽는 이의 마음과 정신 세계와
하나되고 통일되는 경지를 일컫는다.

 

철학적으로 풀면 어머니가 자식을 대하듯
아무런 조건없이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의 마음으로 하나되게 하고 통일되게 하는
'아가페적 사랑'과 통한다.

 

여기에서 어머니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자식을 대하듯이 하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도 서로에게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삼매의 세계가 완성되는 것이고 기독교적 사랑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불성계발은 어머니가 지금 이 세상에는 없지만
자식이 어쩌면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보다도 더 이 세상 모든 것을
어머니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룩한 마음'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듯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하느님의 성령이 역사하심을 보는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이다.


마지막 법열의 단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 즉  천국의 세계다.

 


6. 변화와 혁신에 대한 소고

 

70 ~ 80 년대 시국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서 생활했던 분들이 대개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이밖에도 책을 읽고 공부하는데 몰두했다.

 

외국어를 연마하고 역사와 문학, 신학 등을 공부하면서 하루하루를 채웠다.
특별히 오랜 시간에 걸쳐 정독을 필요로 하는 저작들을 공부하기에는
오히려 더없이 좋은 환경이기도 했다.

 

갑자기 뒤바뀌어버린 환경,
서 있어도 한 방, 앉아 있어도 한 방, 누어 있어도 한 방에 가득찬다는
0.7 평짜리 독방에 갇혀서 절망과 불안으로 나날을 보낼 수는 결코 없었다. 

 

두려움을 이겨내면 새 삶을 얻을 수 있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과 경계심을 버리고 변화를 꾀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인류사회 전체가
가히 폭발적이라하리만큼 큰 폭으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변화는 이제 일상적인 생활이 되고 있다.
변화는 곧 삶이다.


변화하지 않고 정체되는 것은 곧 죽음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변화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요가 수행의 목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변화해야지만이 바르지 못한 행동을 고치고
눈에 보이는 신체 활동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활동,
의식할 수 있는 자신과 무의식적인 자신의 활동,
이 모든 것을 조화하고 통일해서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활기찬 마음으로 희망찬 마음으로 변화를 즐기고 만끽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몸에는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꼭 고쳐야 할 바르지 못한 버릇이나 습관이 있듯이
변화와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도 장애 요인이 있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변화와 혁신을 추진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무관심과 저항이다.

 

따라서 저항의 원인과 내용을 충분히 깨닫고 변화와 혁신을 추진할 때
그런만큼 실패를 방지하고 성공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환경관리공단의 경우
나름대로 변화와 혁신에 대한 무관심과 저항의 내용을 파악해 본 바로는
우선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고 잘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다.

 

나 역시 임직원과 함께 참여해서 강의도 듣고 심도있는 토론도 하곤 했지만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어렵고 추상적인 전문 용어나 외래어를 사용하면서
강의하고 설명할 때는 듣고 나서 명쾌하고 알기 쉽게 정리되지를 않고
오히려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워 오리무중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다음은 우리 공단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현상으로
변화와 혁신으로 인해서 개인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지를
분명하게 확신하지 못할 때 저항하게 된다.

 

특히 현재의 상태에 만족해서 안주하려고 하는 직원들은
변화에 따른 기득권의 상실을 우려해서 매우 배타적으로 저항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처실별 부팀별 사이의 경쟁과 이해 득실,
갈등 등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저항도 있다.

 

이런 경우 양쪽의 힘겨루기와 무사안일, 보신주의 등으로 말미암아
현장에서 업무에 큰 차질을 빗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공단의 경우 건설 현장을 예로들면
현장에서는 안전사고와 품질, 공기 단축 등 고유 업무에 집중하기도 벅찬데
지원 업무 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재정이 낭비되고
공기가 지연되는 등으로 고객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신뢰를 잃는 경우가 없지 않다.
 
위에서 대강 살펴본 것 외에도 변화와 혁신에 대한 무관심과 저항 요소는
우리 공단 임직원 모두가 보다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파악하고 정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우리 공단 임직원 모두가 이러한 요인들을
적극적으로 파악해서 치유할 수 있어야지만이 건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희망찬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기왕에 요가와 명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족을 달자면
변화와 혁신은 우리의 목표가 결코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앞서도 말했듯이 희망찬 미래에 있다.
변화와 혁신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필수 조건에 불과할 따름이다.

 

희망찬 미래란 변화와 혁신의 바탕 위에서 균형과 안정을 취하고
몸과 마음을 조화시켜서 자유로운 경지에 닿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불평과 불만, 분노와 저주와 증오 등 자기중심적 에고(ego)를 버리고,
우리 공단 임직원 모두가 평화롭고 안정된 마음을 간직한 채
서로가 서로를 하나되게 하고 통일되게 하는 사랑의 세상을 이루어서
마침내는 우리 공단을 그야말로 환희의 세계, 하느님의 나라로 세우는 것이리라.     


2006년 6월 환경관리공단 사보


















 
공단소식 > 권두언




이제껏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내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냐고 할 때 나는 주저 없이 함석헌 선생을 꼽는다.

함석헌 선생은 구한말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이 점점 기울어 가는 1901년에 출생하여 나라가 일제에 강점 당하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가 3 . 1 독립운동 만세 사건에 가담하여 쫓겨나고 정주의 오산고보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치하에서 두 차례에 걸쳐 2년 여 동안 옥고를 치루고 해방 후 소련군에 의해 다시 두 차례 옥고를 치루었다. 분단 이후 남한 정부에서 수시로 가택 수색을 당하고 연행과 고문 조사를 당하다가 88세를 일기로 1989년에 서거하셨다.

함석헌 선생이 생전에 남긴 저서와 역서 강연록 등은 무려 100 여 권에 달한다.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사상가로 역사가로, 시인 종교인 언론인으로, 연사로 투사로 평화운동가로 아마도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넓은 분야에 두루두루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아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후 한 동아리 모임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수염, 거기에다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차리고 연단 위에 곱상히 서 계신 함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후 나는 뜻을 같이 할 학생들과 함 선생님을 모시고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어 5년 여 동안 매주마다 함께 공부했다.

그의 사상은 폭이 너무 넓고 깊어서 미처 헤아릴 길이 없다. 그가 이미 삼십대에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그는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했다. 오천 년 역사를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라고 하자니 왜곡이고 외세에 짓밟혀 온 치욕의 역사라 하자니 오천 년을 단일 민족으로 버티어 온 그 의미를 해석할 길이 없어 고난의 역사라 했다.

강한 자에게 유린당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고난이라 했다. 강도에게 농락 당하거나 강탈당하는 것을 치욕이요 패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힘있는 자의 논리요 강도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못나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강탈한 저 일본 무리들이 날강도들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의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역사적 관점이 왕조를 위시한 지배 계급 중심 사관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우리 역사의 혼은 왕권을 감싸고도는 지배 계층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했다. 오히려 지배 계층에 의해서 역도(逆徒), 역적(逆賊)으로 몰린 이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역사의 숨결이요 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역사를 지배해 온 계층을 매섭게 비판한 반면 우리 역사에서 반역자로 처단된 묘청, 홍경래, 동학 그리고 지배층을 위해서 충성했으면서도 역적로 몰린 이순신이나 임경업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역사의 참 주인은 씨알이라고 보았다. 즉 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씨알과 그 무리인 민중이 바로 이 역사를 지키는 담지자라는 것이다.

1928년부터 함 선생님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와 수신(도덕)을 가르치셨다. 그 당시 학생들이 교사에게 불만을 품고 교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피하고 함 선생님만이 혼자 교무실에 남아 있게 되었다. 흥분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함 선생님께 손찌검을 해댔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계셨다. 후에 학생들이 함 선생님을 찾아가서 본의 아니게 큰 죄를 범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선생님은 그때 왜 손으로 눈을 가리웠습니까? " 하고 여쭈니 함 선생님은 "그때 내가 눈을 뜨고 학생들을 봤다면 서로가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나... 차라리 안 보고 누가 누군지 모르는 게 편하지... 괜찮아." 하면서 기꺼이 용서해 주셨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동서고금에 걸쳐 숫한 예화와 실화가 있어 왔지만 참 스승의 모습을 이처럼 생생하고도 역동적으로 보여 준 사례는 없지 싶고 나 역시 이때까지 보고들은 적 없다. 참으로 두고두고 귀감 삼아서 마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1976년 6월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고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게 되었다. 4.19 혁명 10돌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창간된 <씨알의 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의 지성사를 대표하던 종합 월간지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로 유신 독재 권력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시동이요 보루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일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이미 40여 년을 하루 1식으로 마감하며 지내온 함석헌 선생의 몸에 익은 습관과 일상 생활, 삶의 모습, 셈의 기준 등등 모든 것과 만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그 맑은 정신과 인간성, 체질과 버릇까지 닮으려고 애썼다.

"오늘이 내가 난 지 2만 8천 번째 되는 날이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 날이 되는 게... 1년을 생일로 셈하면 예순 번도 되고 여든 번도 되지만 ...... 만 날은 평생에 두 번이나 세 번밖에 안 오는 거고, 천 날이라야 이 삼십 번 정도 오는 거니까 일 년을 생일로 셈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지......"

이렇듯 함 선생님은 하루를 기준으로 삶을 셈한다. 함 선생님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탁상일기에는 날짜와 요일을 인쇄해 놓은 헤드라인 빈 공간에 매일매일 "... 27,998 27,999 28,000 28,001..."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탁상일기는 지금도 함 선생님의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그 날의 몫으로 온전히 치루려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참' 사람이다. 그는 거짓은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만악의 근원이라 했다. 선생은 항상 '겸허'한 분이다. 그는 언제나 겸손한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았다. 언변과 학식과 덕망으로 볼 때, 그는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출중한 분이었지만 결코 자만한 적 없다. 오만하거나 권위주의적인 모습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선생은 '사랑'의 사람이다. 선생은 내게 유신 독재 권력과 대항해서 싸우더라도 자연인 박정희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주셨다. 미움은 곧 사악한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선생은 내게 강조해 마지않았다.

높디높고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에 떠도는 새하얀 구름을 바라보면서 겨레의 참 스승 함석헌 선생의 얼을 더듬다 보니 새삼 생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고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면서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이 물밀 듯 스며든다.


감사 최민화
 


 

들녘같은 사람 / 고은 (시인) 

 

 

나는 1970년대 이래

역대 독재 체제와의 싸움을 통해서

그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동시대인의 한 사람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민주화 운동 참여자의 희생과 온갖 시련도

나 자신의 자그마한 고행과 더불어 얼마든지 증언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런 동지들과의 연대와 합치를 통해서

그 인간적인 미덕에 대해 한없는 매혹을 체험한 바도 없지 않다.

 

최민화 씨는 74년 이래 변함없는 이 세상의 후배로서

변함없는 친밀성을 나누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일찌기 함석헌 선생의 각별한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선배에 대한 겸손과 동지에 대한 원만

그리고 후배들에게 대해

들녘과도 같은 덕성을 발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실로 풍운이 긴박한 개인 생활의 난관을 이겨내 왔다.

나는 그의 딸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와 격의없이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왔다.

 

이런 최민화 씨가 지난 날의 아슬아슬한 고행과

그 극복 과정을 기록한 책을 내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그의 어제, 오늘 내일의 영광을 기원하는 바이다.

 

 1996년 3월 <우리는 하나> (최민화 저 / 현암사 간)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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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이 그리웠던 계절 / 지성평 (환경관리공단)

ㅡ 최민화 감사님을 보내며

 

 

길가에 백일홍 꽃잎이    
빗방울에 흩어 내리던 어느 날

 

기약 없이 떠나보내야 할 그를 위해

선물을 사고 행사장을 준비하고
삼삼오오 모여들고

 

그대는 이별의 슬픔을 가슴에 묻은 채

그 환한 미소로
못다 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낯선 선창가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한 사내를 볼 것이다.

 




최 민 화 ㅡ 치열하게 다정한 군자(君子) / 김정환



- 1 -


참 온화한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1983 년 민청련을 창립하기 위해
열 두 명인가가 모였을 때다.


난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또 투사 정신으로 보나
한데 어울릴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민주화 운동의 신화였고
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되는
일개 문사였다.


참으로 어둠이 너무도 위세당당하고
그게 어느새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때다.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살을 당한 그 경악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우리의 전신을 휘감고 덜덜 떨게 만들면서
우리를 집요하게 길들이던 때다.


회의가 진행되고 나는 오래지 않아
내 본분을 알게 되었다.


난... 이를테면 글깨나 쓰는
서기로 불려 온 셈이었다.


당연하지......
난... 투사는 아니니까......


나는 무척 안심하면서
아주 비겁하고 편안하게


가장된 겸손으로
내 비겁을 감싸면서


쟁쟁한 선배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회의는 당연히 갑론을박이었다.
공개 운동이라니 !


야수가 휘두르는 철권에
계란같은 머리를
스스로 들이미는 일 아닌가...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의 본분을
포기할 것인가...


회의 분위기는
자못 험악해 졌다.


그런데 쉬쉬하며 험악해 질수록
암담해 지기 마련인
그 당시 회의 모양새의 한 귀퉁이가
이상하게도 밝은 거다.


그게...
그가 실실 흘리는 웃음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의사를 말했으되
상대방의 의견 중
장점을 키워 주는 방식으로 말했다.
내내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


아... 저것... 저게 뭐지?...
그때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상대방의 장점을 제 것으로
제 온화함으로 바꾸어 내면서
자신을 보충하고


그렇게 완성된 자신의 의견을 겸손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추진하는 능력!


그것은 민주화 운동을 추구하는 데
가장 필요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가장 드문 능력이다.


고생은 흔히
사람을 그악스럽고
완전한 권위주의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역사상 모든 혁명가는
사랑으로 시작하였으되


편협한 아집과 증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저게 뭐지?
아... 저런 사람도
우리나라에서 가능하구나!


나는 그때
비로소 내가...


나도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그의 웃음이


얼마나 크고 간절한 위력을 발휘할 것인지
그때는 내가 다 깨닫지 못했다.



- 2 -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고
누구는 그에 못지 않은 정치적 명망가로 되고


심지어 대학 총학생회장조차
신문지상에 스타로 부상하는 동안 내내
그가 맡은 일은 허다한 단체의 재정.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80 년대에 숱한 운동 단체들이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갖고


때론 부딪치고 때론 격려하면서
명멸해 갔다.


그 단체들이 왜
똑같은 정치적 지향점을 갖지 않았는가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을까?


그 숱한 단체 중
그의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은 단체는
손꼽을 정도다.


따스한 격려를 받지 않은 단체 관계자는
아마 거의 없을 게다.


그는 단순한 통합론자인가?
아니다.


그는 분열을
스스로 제 가슴에 상처로 품고


그 상처가
비단 아물 뿐 아니라


더 질 높은
총체적인 육(肉)의 정신으로 재생되기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가 아무리 어린 후배라도
누구한테 이래라 저래라
왈가왈부하는 적은 드물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나서
' 아, 내가 좀 더 잘해야겠구나'
라고 깨닫지 않는 경우 또한 드물었다.


- 3 -


그와 같은 시기에
똑같은 연세대를 다녔을 강은교 시인의 시에


" 그가 돌아오고
 식구들은 이제 안심한다 "


라는 명구절이 있다.
최민화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세상에 제 살 베어 주며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살찌운 한 넉넉한 사내가


저 하나 믿고 가정을 꾸리다가
쇠꼬챙이 몸 위암 3 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내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소원을
또 어떻게 들어 주었는가


그리고
그의 정성이


어떻게 아내를
이 땅에
다시 서게 했는가


그러는 동안
아내는 또 얼마나 눈물겨웠는가에 대해서는


이 책에 담긴 그의 육성이 너무도 절절해서
남이 보태봐야 췌언이거나 중언부언
아니면 한갓 미사여구에 불과할 게다.


다만 우리는
가장 찬란한 빛을 이루는 것은
순정한 한 방울의 눈물이라는 것을


그의 가족사 앞장에
미리 적어 두면 되리라.


그러나 안심하는 것은
그의 가족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되도록이면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일단 안심한다.


그가 괜찮다는 것은
최소한 우리의 주변이


그가 돌봐 주고 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괜찮다는 뜻이고


그가 싱긋 웃으면
아직은 괜찮다는 뜻이고


의미심장하게 웃으면
잘 될 것 같다는 뜻이고


예의 그 실실 웃는 웃음을 흘리면
잘 될 것이 틀림없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그가 있어야 안심한다.


마음놓고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취해서 정신을 잃고 뻗거나
횡설수설하거나
심지어 폭언을 일삼는 선배 후배조차


그가 그냥 두고 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팔잔가?
어쨋거나, 그래서...


그를 고대하며
그가 와야만 안심하는 경우는
무엇보다 장례식 때다.


어깨를 함께 결으며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갔던
동지들의 죽음을 맞는 일은


경악스럽고 한꺼번에 깜깜절벽이
가슴에 들어 차는 경험이다.


옥중에 있는 동료의 부모가
세상을 뜨는 일은


안타깝고
무엇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전자의 경우
너무 충격적이라
슬픔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후자의 경우는
주먹만한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막막하기는
모두 마찬가지다.


이럴 때 우리들은
최민화가 와야 안심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만큼은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굉장히 엄혹한 표정이
대신 들어선다.


모두가 다
슬픔에 탐닉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장례 절차를 짜야 하고
장지를 잡아야 하고
문상객 접대 준비를 해야 하고
당장 영정부터 모셔야 할 것 아닌가.


그는 호통치고
우리는 슬픔을 다스리며


산 자와 죽은 자의 할 일을
비로소 구분하게 된다.


암담했던 시절
문인들이 앞장서는 일에는 소설가 이호철이
장례식에는 소설가 이문구가 필요했다.


이호철이 앞장서지 않으면
아무도 앞장서지 않았고


이문구가 없으면
장례 절차가 꾸려지지 않았다.


최민화는
그 둘을 합한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민주화 운동권 출신의
김근태나 장기표 정도의 명망가는 아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그 자신이 누구보다 원했고


그렇게 일을 추진했고
그의 뜻대로 되어 왔다.


그들은 그가
그리도 끔찍하게 위하는 선배며


그가 원했던 것은
그 둘의 배경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본의 아니게
배경에 머무르지 않았다.


토대로 되었던 것이다.



- 4 -


나는 지금
그의 사진을 앞에 두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다.


그의 얼굴이 온화하다고 해서
그가 역경을 겪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겪었고
가장 온화한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게 얼마나 격동적이고
서사적인 과정을 겪었을 것인지를
애써 상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민주화 운동을 괴롭히던
가장 근본적인 모순...


적을 미워하다가
적을 닮아 버리는 모순을 극복했다.


아~~~! 그랬던가...


그가...
이제까지 내 곁에 있었던가...


아~~~ 형...
정말...
형님도...


형님이 이제 나서야 하겠습니까?
아비규환의 정치판이
형님을 기어이 부릅디까?


그 상처는 어찌하시려구요...


이제까지 주욱 그래 왔으니
이번에도 형님 말이
맞을 테지요마는......


그의 표현대로
그는 이제 전방에 있고
나는 후방에 있다.


후방에 있으면
전투에 지친 고단한 사람들이


이따금씩 와서
위로해 달란다.


그때 우린
의견 차이도 접어 두고


춥고 배고프지만
똘똘 뭉쳤던 옛날이 더 좋았다며


이상이 정치판에 농락당하는 것에 대해
가끔


눈물도 그렁그렁대고
그런다.


그것은 내게
참으로 죄송하고
행복한 경험이다.


최민화...


이제 배경이자 토대였던 그가
우리 앞에
빛 한가운데 섰다.


그러나 난 오늘도 유독
그의 품에 안겨서


울고 싶다.



▲ 김정환(金正煥)


195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시 "마포 강변동네에서" 등으로 등단.
1982년 첫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 이후 <황색예수전> <사랑, 파티> 등
20 여 권의 시와 소설, 평론집을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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