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단소식 > 권두언




이제껏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내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냐고 할 때 나는 주저 없이 함석헌 선생을 꼽는다.

함석헌 선생은 구한말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국운이 점점 기울어 가는 1901년에 출생하여 나라가 일제에 강점 당하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평양고보에 다니다가 3 . 1 독립운동 만세 사건에 가담하여 쫓겨나고 정주의 오산고보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치하에서 두 차례에 걸쳐 2년 여 동안 옥고를 치루고 해방 후 소련군에 의해 다시 두 차례 옥고를 치루었다. 분단 이후 남한 정부에서 수시로 가택 수색을 당하고 연행과 고문 조사를 당하다가 88세를 일기로 1989년에 서거하셨다.

함석헌 선생이 생전에 남긴 저서와 역서 강연록 등은 무려 100 여 권에 달한다.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사상가로 역사가로, 시인 종교인 언론인으로, 연사로 투사로 평화운동가로 아마도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넓은 분야에 두루두루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아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후 한 동아리 모임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 하얀 얼굴 하얀 장발머리에 하얀 수염, 거기에다 하얀 한복을 단정하게 차리고 연단 위에 곱상히 서 계신 함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 후 나는 뜻을 같이 할 학생들과 함 선생님을 모시고 '간디사상연구모임'을 만들어 5년 여 동안 매주마다 함께 공부했다.

그의 사상은 폭이 너무 넓고 깊어서 미처 헤아릴 길이 없다. 그가 이미 삼십대에 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그는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 했다. 오천 년 역사를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라고 하자니 왜곡이고 외세에 짓밟혀 온 치욕의 역사라 하자니 오천 년을 단일 민족으로 버티어 온 그 의미를 해석할 길이 없어 고난의 역사라 했다.

강한 자에게 유린당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고난이라 했다. 강도에게 농락 당하거나 강탈당하는 것을 치욕이요 패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힘있는 자의 논리요 강도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못나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강탈한 저 일본 무리들이 날강도들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의 역사를 거꾸로 뒤집어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역사적 관점이 왕조를 위시한 지배 계급 중심 사관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우리 역사의 혼은 왕권을 감싸고도는 지배 계층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했다. 오히려 지배 계층에 의해서 역도(逆徒), 역적(逆賊)으로 몰린 이들이야말로 바로 우리 역사의 숨결이요 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역사를 지배해 온 계층을 매섭게 비판한 반면 우리 역사에서 반역자로 처단된 묘청, 홍경래, 동학 그리고 지배층을 위해서 충성했으면서도 역적로 몰린 이순신이나 임경업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역사의 참 주인은 씨알이라고 보았다. 즉 참 때묻지 않은 순수한 씨알과 그 무리인 민중이 바로 이 역사를 지키는 담지자라는 것이다.

1928년부터 함 선생님은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역사와 수신(도덕)을 가르치셨다. 그 당시 학생들이 교사에게 불만을 품고 교무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피하고 함 선생님만이 혼자 교무실에 남아 있게 되었다. 흥분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함 선생님께 손찌검을 해댔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계셨다. 후에 학생들이 함 선생님을 찾아가서 본의 아니게 큰 죄를 범했으니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선생님은 그때 왜 손으로 눈을 가리웠습니까? " 하고 여쭈니 함 선생님은 "그때 내가 눈을 뜨고 학생들을 봤다면 서로가 두고두고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나... 차라리 안 보고 누가 누군지 모르는 게 편하지... 괜찮아." 하면서 기꺼이 용서해 주셨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동서고금에 걸쳐 숫한 예화와 실화가 있어 왔지만 참 스승의 모습을 이처럼 생생하고도 역동적으로 보여 준 사례는 없지 싶고 나 역시 이때까지 보고들은 적 없다. 참으로 두고두고 귀감 삼아서 마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1976년 6월 나는 함석헌 선생님의 부르심을 받고 월간 <씨알의 소리> 편집장을 맡게 되었다. 4.19 혁명 10돌이 되는 날을 기념해서 창간된 <씨알의 소리>는 50년대와 60년대 우리나라의 지성사를 대표하던 종합 월간지 <사상계>가 강제 폐간된 이후로 유신 독재 권력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고 당당한 양심으로 저항하는 시동이요 보루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일을 조금이라도 게을리 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 이미 40여 년을 하루 1식으로 마감하며 지내온 함석헌 선생의 몸에 익은 습관과 일상 생활, 삶의 모습, 셈의 기준 등등 모든 것과 만날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그 맑은 정신과 인간성, 체질과 버릇까지 닮으려고 애썼다.

"오늘이 내가 난 지 2만 8천 번째 되는 날이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 날이 되는 게... 1년을 생일로 셈하면 예순 번도 되고 여든 번도 되지만 ...... 만 날은 평생에 두 번이나 세 번밖에 안 오는 거고, 천 날이라야 이 삼십 번 정도 오는 거니까 일 년을 생일로 셈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다면 있는 거지......"

이렇듯 함 선생님은 하루를 기준으로 삶을 셈한다. 함 선생님의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탁상일기에는 날짜와 요일을 인쇄해 놓은 헤드라인 빈 공간에 매일매일 "... 27,998 27,999 28,000 28,001..." 이렇게 적혀 있다. 이 탁상일기는 지금도 함 선생님의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그 날의 몫으로 온전히 치루려는 마음의 자세일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참' 사람이다. 그는 거짓은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만악의 근원이라 했다. 선생은 항상 '겸허'한 분이다. 그는 언제나 겸손한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았다. 언변과 학식과 덕망으로 볼 때, 그는 20세기 한국 사회에서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출중한 분이었지만 결코 자만한 적 없다. 오만하거나 권위주의적인 모습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선생은 '사랑'의 사람이다. 선생은 내게 유신 독재 권력과 대항해서 싸우더라도 자연인 박정희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를 주셨다. 미움은 곧 사악한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선생은 내게 강조해 마지않았다.

높디높고 푸르디푸른 가을 하늘에 떠도는 새하얀 구름을 바라보면서 겨레의 참 스승 함석헌 선생의 얼을 더듬다 보니 새삼 생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고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게 맴돌면서 그리움이 가슴 속 깊이 물밀 듯 스며든다.


감사 최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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