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동문회보 / 이달의 여동문

박정희 (신학 72입) 대전 변동중학교 교장

 

도자기를 빚는 마음으로 교육 한 길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 양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한 학생 한 학생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그런 교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학과를 졸업하고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한 뒤 1981년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처음 교단에 섰을 때 박정희 동문의 각오는 남달랐다. 특히 학교에서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1984년 12월 시골의 한 병원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의 인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산 끝에 산모는 정신을 잃었고 아이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이후 아들은 잠을 거의 자지 않고 젖을 삼키지 못해 애를 태우더니 목을 가누는 것도, 뒤집는 것도, 일어서는 것도 유난히 더뎠다.
세 살 무렵 의사로부터 뇌성마비 판정을 받았다. 커갈수록 점점 더 뒤처지는 아들에게 조바심을 내며 “똑바로 걷지 너는 왜 자꾸 넘어지니”, “침 좀 흘리지 마라”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한동안 직장을 그만둘까 고민했으나 일을 포기하고 아이에게 매달린다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장애가 있는 아들과 사는 것을 힘겨워하던 남편은 아들이 일곱 살 무렵 영영 떠나버렸다. 그는 위자료나 양육비 대신 친권을 챙겼다.
“아이가 밤에 잠을 안 자고 설치는 경우가 많아서 밤새 시달리다 아침 7시30분에 집을 나서 아이를 스쿨버스에 태워주고 출근했죠. 친정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셨지만 그래도 그 무렵 하루가 48시간이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를 만큼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쉼, 여유, 위안, 안식, 평안 이런 단어들이었어요.”
한동안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에 우울증에 빠졌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도자기를 접하고 활력을 되찾았다. 주말마다 흙을 주무르고 두드리고 빚다 보면 현실 세계의 절망감과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성취감도 컸다. 대전교원미술전 공예부문 1등급 상과 전국백제토기물레경연대회 은상을 수상했고, ‘정신지체 학생의 작업기능 신장을 위한 생활도자기 만들기 지도자료’로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을 받았다. 다시 공부를 시작해 침례신학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도예 활동을 통한 집단상담이 장애아 어머니의 양육 스트레스 및 자기 효능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썼다.
“특수학교에 근무할 때 장애아들에게 도자기 수업을 했는데, 평소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이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에는 가만히 앉아서 흙을 만지더군요. 부드럽고 촉촉한 흙을 만지며 원하는 모양을 만들고 불에 구워 작품이 완성될 때 아이들은 성취감을 느끼죠. 작년부터 자폐아와 가족들에게 도자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자폐아들이 도자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면서 대인관계와 사회적응력을 키우고, 부모들도 자녀를 더 이해하게 되고 양육 스트레스도 풀 수 있지요.”
박정희 동문은 2013년 7월 도자기를 시작한 지 14년 만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올 11월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 지난 해에는 교장으로 승진해 교육자로서 도예가로서 모두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 한때 눈물과 한숨이 서렸던 그의 도자기에 지금은 사랑과 기쁨이 넘친다.
“여전히 일상생활을 스스로 하지 못해 옷을 입히고 양치질을 해줘야 하지만 아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요. 아들의 순수하고 천진한 미소가 나를 정화시키고 아름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김현미(신방 86입) 동아일보사 주간동아 팀장


원본 http://www.yonsein.net/ebook/dong/1505/201505.pdf    13 of 24

인용 http://blog.daum.net/choemh/16140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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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라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있었다 .
개학 날 담임을 맡은 5학년 반 아이들 앞에 선 그녀는

아이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하였다 .

 

그 것은 아이들을 둘러보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


그러나 바로 첫 줄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는 작은 남자 아이 ,

철수가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


K 선생은 그 전부터 철수를 지켜보며
철수가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옷도 단정치 못하며 , 잘 씻지도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때로는 철수를 보면 기분이 불쾌할 때도 있었다 .

 

결국은 철수가 낸 시험지에 큰 X 표시를 하고

위에 커다란 ㅇ 빵점을 써넣는 것이 즐겁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렀다 .

 

그런데 K 선생님이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의 지난 학년의 생활기록부를 다 보도록 되어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철수것을 마지막으로 미뤄두었다 .
그러다 마지막으로 철수의 생활기록부를 보고는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다 .

 

철수의 1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잘 웃고 밝은 아이임 .

깔끔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절이 바름 .
함께 있으면 즐거운 아이임 . ”


2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렇게 써 있었다 .

“ 반 친구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학생으로 ,

어머니가 불치병을 앓고 있음 .
가정생활이 어려울 것으로 보임 . ”

 

3학년 담임선생님의 기록은 이러 하였다 .
“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고생을 많이 함 .
최선을 다하지만 아버지가 별로 관심이 없음 .

어떤 조치가 없으면 곧 가정생활이 학교 생활에 까지 영향을 미칠 것임 . ”


철수의 4학년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썼다 .

“ 내성적이고 학교에 관심이 없음 .
친구가 많지 않고 , 수업시간에 잠을 자기도 함 . ”


여기까지 읽은 K 선생은 비로소 철수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뒤 늦게 깨달아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
반 아이들이 화려한 종이와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져왔는데 ,

철수의 선물만 식료품 봉투의 두꺼운 갈색 종이로 어설프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더욱 마음이 부끄러워졌다 .

 

K 선생은 애써 다른 선물을 제쳐두고 철수의 선물부터 포장을 뜯었다 .

알이 몇 개 빠진 가짜 다이아몬드 팔찌와 사분의 일만 차 있는 향수병이 나오자 ,

아이들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러나 그녀가 팔찌를 손목에 차며

와아!! 정말 예쁘구나~ 감탄하고 ,
향수를 손목에 조금 뿌리자 아이들의 웃음이 잦아들었다 .


철수는 그날 방과 후에 남아서 이렇게 말했다 .

“ 선생님 , 오늘은 선생님에게서 꼭 우리 엄마에게서 나던 향기가 났어요 . ”

 

그녀는 아이들이 돌아간 후 한 시간 넘게 울었다 .
바로 그날부터 그녀는 읽기 , 쓰기 , 국어 , 산수 가르치기를 그만두었다 .

그리고 아이들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K 선생은 철수를 특별히 대했다 .

철수에게 공부를 가르쳐줄 때면 철수의 눈빛이 살아나는 듯했다 .
그녀가 격려하면 할수록 철수는 더 빨리 반응하였다 .

 

그 해 말이 되자 철수는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겠다는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가장 귀여워 하는 학생이 되었다 .


1 년 후에 그녀는 교무실 문 아래에서 철수가 쓴 쪽지를 발견 했다 .

거기에는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교사였다고 쓰여져 있었다 .


그로부터 6 년이 흘러 그녀는 철수에게서 또 쪽지를 받았다 .

고교를 반에서 2등으로 졸업했다고 쓰여 있었고 ,

아직도 그녀가 자기 평생 최고의 선생님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쓰여 있었다 .

 

4 년이 더 흘러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이번에는 대학 졸업 후에 공부를 더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쓰여져 있었다 .

이번에도 그녀가 철수에겐평생 최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

하지만 이번에는 철수를 나타내는 이름이 조금 더 길었다 .
편지에는 ‘ Dr. 박철수 박사 ’ 라고 사인 Sign 되어 있었다 .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
그해 봄에 또 한 통의 편지가 왔다 .
철수는 여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

아버지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으며 ,

K 선생님에게 신랑의 어머니가 앉는 자리에 앉아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

그녀는 기꺼이 좋다고 화답했다 .


그런 다음 어찌 되었을까 ?

그녀는 가짜 다이아몬드가 몇 개 빠진 그 팔찌를 차고 ,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크리스마스에 어머니가 뿌렸었다는 그 향수를 뿌렸다 .

 

이들이 서로 포옹하고 난 뒤 이제 어엿한 의사가 된 박철수는 K 선생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

" 선생님 , 절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셔서 ,

그리고 제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K 선생은 또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
“ 철수 너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구나 !
내가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너란다 .

내가 널 만나기전 까지는 제대로 가르치는 법을 전혀 몰랐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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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 아니 이 이야기가 꼭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

누군가를 믿어주고 칭찬해준다면 어른일지라도 분명 큰 일을 해내리라 믿습니다 .

 

내 입술이라고 상대방을 내 잣대로 판단해 배우자를 , 자녀들을 ,

또는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지는 않았는지 ?

K 선생님을 보며 ,다시 한번 나를 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

 

" 격려는 귀로 먹는 보약이다 ! "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

 

우리 모두 이 시간이후부터는 남의 말을 좋게 하십시다 .
상대를 좀 더 이해하고 격려하고 북돋우고 칭찬해 주십시요

아울러.. K. 선생님께선 저히 초등학교 선생님이 셧 습니다.

올해 70순을 바라보고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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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동지'를 꿈꾸며...(김진숙지도위원 편지글)

http://bsnodong.tistory.com/m/post/30

 

 

집회도 없고 수련회도 없는 휴일은 외려 잠이 일찍 깨요.
아무 일도 없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언제부터 저는 평화가 실감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 걸까요.

아무 일도 없는 이상한 토요일.
아니나 다를까. 텔레비전 화면에 뉴스속보가 뜨는군요.


“노무현 전 대통령 뇌출혈로 입원”


검찰조사가 시작되면 입원으로 시작해서

휠체어나 마스크가 구명보트처럼 등장하는 꼴을 늘 봐오긴 했습니다만
당신은 그런 쇼를 할 사람은 아닌지라 스트레스가 어지간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10 여분 후 “노무현 전대통령 사망한 듯”이라는 자막이 뜨고

그제서야 뒹굴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나날이 일구 우일구하기 여념없는 시시껍절한 방송이 중단되고 속보가 이어지더군요.
경호원, 사저뒤편, 부엉이 바위, 세영병원, 양산부산대병원, 심폐소생술, 열상 따위의

일상과 밀접하지 않은 단어들이 바퀴벌레처럼 툭툭 튀어나와 소름을 돋게 했습니다.
정신적 공황상태까진 아니었지만 불면 탓으로 약간 멍한 채로 이틀을 보냈고

월요일 아침 부산역까지 가긴 했으나 조문은 못하고 역 광장을 몇 바퀴 빙빙 돌다 왔습니다.

선뜻 신발을 벗고 절을 하는 문상객들의 거리낌없는 몸놀림이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잠이 안오대요.


다음 날 다시 부산역엘 갔습니다.
역 광장을 또 빙빙 돌다가 그냥 돌아가면 다시 닥칠 불면의 밤이 성가셔
문상객들의 뒤에 얼른 붙어 섰습니다.
방명록에 몇 줄 쓰기도 했습니다. 잠을 자야하니까.


“오랜 세월 동지였고 짧은 시간 적이었습니다.
90년 변호사 접견 오셨을 때처럼
봉하마을 어딘가에 앉아 각자의 위치가 만들어 낸
그동안의 원망과 미움들을 두런두런 털어낼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곧..
고맙고 죄송합니다.“
 
90년. 제가 첫 징역을 살 때였습니다.
접견을 오셨었지요.
보통 변호사 접견은 재판 전날 와서(사실 재판 전날도 안 오는 변호사도 많습디다만)
재판절차를 일러주고 이빨도 맞추고 하는데 재판날짜와는 아무 상관없는 시기였던지라
많이 의아했던 만큼 20년 전인데도 이리 생생하네요.


접견실에 먼저 오셔서 기다리시더군요.
보통은 재소자들이 한 시간 이상씩 주리를 틀면서 기다리는데.
요샌 교도소 반찬이 뭐가 나오냔 얘기, 여사에선 뭐하고 노냐는 얘기,

변호사가 해주던 징역살이 얘기, 남사에선 뭐하고 논다는 얘기,
법무부 시계도 가니까 재밌는 놀이를 많이 개발해서 징역을 잘 깨라는 얘기.
변호사가 접견을 와선 재판이야긴 한마디도 없이 노닥거리기만 하다

그 더디기로 유명한 법무부시계가 세상에 한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가야겠네” 일어서시길래 하도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왜 오셨어요?”
“진숙씨 징역살이 힘들까봐 놀아 줄라고 왔지요”

 

그리고 당신은 정치권으로 갔고,
정치권으로 갔다는 건 권력을 탐하는 변절로 규정하는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었으니
변호사 비용을 거침없이 떼먹고도 사기꾼의 돈을 떼먹은 것 마냥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직하면 갚으마. 유전 발견하면 갚으마.

보물선 찾는대로 갚으마. 막연한 약속이 선임비였던 시절이었으니.
그게 인권변호사의 당연한 책무였으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상실감이었어요.

 

그 시절 당신은 우리들의 유일한 빽이었는데.
공돌이 공순이 편을 들어주는 가장 직책 높은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있어 우린 수갑을 차고도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때 직감적으로 생각했어요.
이제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겠구나.
재판장 앞에서 수갑을 찬 채 잔뜩 주눅 든 우리를 향해, “피고인은 무죕니다.”
외쳐 줄 사람이 이젠 없겠구나.
이제 재판에서 지더라도 찾아가 울 데도 없겠구나.
노동자들이 그들의 부엉이바위인 크레인 위에 올라갈 때 따라 올라가지도 않겠구나.

 

그리고 당신을 잊었습니다.

용감해서가 아니라 아무도 없어서 혼자 진행했던 1심 재판에서 당연히 지고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왜 항소를 안했어요?” 라는 질문에 “항소가 뭔데요?” 라고 되묻던 저에게
“노동자가 항소를 알면 그건 노동자가 아니지.” 하던 말도 잊었고,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함께 했던 소모임도 잊었고,
군사정권 시절 해고된 노동자의 그 막막한 눈빛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유일하게 내 얘기를 그대로 들어주던 무료법률 상담소도 잊었고,
어느 날은 밤에 오라 길래 밤에 찾아갔더니 그날이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기일이라고
변호사 사무실 구석에 조촐한 제상을 차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유령들처럼 절을 하던
그 뭉클하던 밤도 잊었고,
함께 같은 거리를 달리던 6월 항쟁도 잊었고,
최루탄 가루가 싸락눈처럼 내린 범냇골 국민운동본부 옥상에서 막걸리를 나누던 걸판지던 뒤풀이도 잊었습니다.

 

그리고 침례병원이 초량에 있을 때였습니다.

노동조합 조합원 교육에 초청을 받았는데 앞 시간 강사가 당신이었더군요.
당신은 내려오고 나는 올라가던 계단에서 마주쳤습니다.
난 참 어색하기가 짝이 없습디다.
그냥 모른 척 할라고 했습니다만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지요?”
굳이 손까지 내미시더군요.
그때 대답을 했거나 웃기라도 좀 했으면 지금 잠을 이루기가 좀 쉬웠을까요.
 
그리고 당신이 출마한 대선에서 전 4번을 찍었습니다.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고민하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외포리를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1번을 벗어난 적이 없는
큰언니가 전화를 했더군요.


“이 노무헤니가 그 노무헤니지? 니 벤호사. 그 사람 찍었다.

너 인쟈 깜빵 안가지? 복직두 되갓지?”

 

얼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제가 왜 “내 변호사”를 놔두고 4번을 찍었는지 우리 큰언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거예요.
2번과 4번의 극심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도 이리 막막한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그 미세한 차이를 설명하는 일은 저의 재주로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기뻐서 우는 사람도 있습디다만

이회차이가 당선된 거보다 노무혀이가 당선된 게 노동자들에게는 더 힘들 거라고 떠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고립은 깊어졌고 고착화되었습니다.


김영삼이가 당선되었을 때 운동권이 1/3이 떨어져 나갔고,

DJ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른바 재야가 사라졌고,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서는 그야말로 오롯이 노동자들만 남았습니다.


한 사업장에서 수천 명이 한꺼번에 해고될 때 그 무지막지한 자본을 향해 호통쳐주는 어른 하나 없습디다.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거리로 나설 때 역성들어주기는커녕 죄 우리만 나무랍디다.


그거 아세요.

당신은 조중동이랑 열심히 싸우셨습니다만 우리에겐 조중동이랑 한편처럼 보인 거.

 

 “야~ 기분좋다!” 시며 봉하로 가셨을 때 오리농법보다 더 중요한 일은 농민들의 삶의 실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왜 목숨 걸고 한미 FTA를 반대했는지.
그리고 전용철, 홍덕표 그들의 죽음에 당신이 늦게나마 사과를 하면 참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봉하마을을 갔을까요. 아마 갔겠지요.
그리고.. 김 주익 얘기도 했을까요. 아마 그 얘긴 못했을 거예요.
말로 꺼내긴 크나큰 상처였으니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 말씀.


유난히 노동자들에겐 가혹하셨습니다.
2003년도 한진중공업에서 저는 한꺼번에 두 명의 지기이자 동지를 잃었습니다.
김 주익은 600여명 조합원의 명퇴에 맞서 2년을 싸웠고 노사가 합의를 했고
그 합의를 회사가 번복을 했고 그래서 크레인에 올라갔고 그 크레인 위에 129일을 매달려 있다가
아시다시피 목을 맸습니다.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그런 시대는 정말 지났을까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에게 종종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조각인 것을..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게 아니라 당신을 넘어서고 싶었습니다.
착한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지배가 없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시대에 그 꿈은 가장 허황되고 지리멸렬해졌습니다.
때론 우리가 품은 꿈이 너무 초라했고 궁색했습니다.


당신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짤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으로 격상됐고 그들은 언론과 자본은 물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조차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이기주의를 꾸짖으십디다만 동료가 수백 명씩 짤리는 걸 목격한 노동자가

비정규직에게 내밀 손이 남아 있겠습니까.
저 살아남는데 써야지.

 

징역을 살 때 만난 사형수가 있었어요.

이 여잔 영치금이 한 푼도 없는 개털이었는데
새로 신입이 들어오면 아주 불쌍한 표정으로 샴푸나 속옷을 사달라는 거예요.
출소한 사람들이 쓰다만 물건들도 다 그 여자 차지였죠.
언제 죽을지 모를 사람이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는 게 도덕의 눈으로 보자면 참 추접스럽습디다.
그 여자 집행되고 보니 샴푸나 속옷 나부랭이가 구석구석에서 쏟아져 나옵디다.
백분의 일도 못쓰고 죽었죠. 생에 대한 나름의 집착이었던 거죠.
샴푸 생길 때마다 빌었겠죠. 이거 다 쓰고 죽자.


정규직 노동자들은 삶의 벼랑에서 그런 심정으로 잔업하고 철야를 합니다.
얼마가 남았을지 모를 정규직의 삶을 그딴 식으로 저축하면서.


그 무렵쯤이었을 거예요.
변호사비용을 이제 그만 갚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당신의 시혜나 은전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건.
적이 될 거라면 호적수이고 싶었습니다.
실력도 한참 모자라고 열정도 전만 못하고 진정성마저 잃어 그리 되진 못했습니다.
그게 참 부끄러워요.


똑똑한 사람들은 다 떠나 우리를 속속들이 아는 가장 무서운 적이 되었고

남은 자들은 동네북이 되어 초딩들마저 두들겨대고 천덕꾸러기가 되어

크레인엘 올라가고 굴뚝엘 기어 올라가도 언놈 하나 눈길주는 놈이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고등학교 밖에 못나온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입 달린 사람은 죄다 침이 마릅디다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저 같은 노동자들은 당신의 시대에 대부분 절감해야 할 원가가 되어
구조조정 당했고 효율화를 위해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차라리 군사독재 시절엔 대드는 노동자만 짤렸으나 당신의 시대엔 남녀노소가 짤렸습니다.
서민의 벗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부자와 빈자의 간극은 훨씬 더 까마득해졌습니다.
당신이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24년의 세월 동안

전 아직 복직도 못한 해고노동자로 찌질한 50대가 됐습니다.


생각해보니 짧은 시간 동지였고 오랜 세월 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뜨겁고 바른.
만고 씰데없는 소립디다만 그래서 대통령 같은 거 하지 말았으면 참 좋았겠단 생각
지금도 해요.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으로 떠돌던 예감이 당신의 죽음으로 확연해집니다.
한 시대가 갔다는..

이제 상고출신이 변호사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양양한 가도가 보이고 그 길을 편하게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의 있습니다!”
외칠 때, 그 외침에 뒤돌아보는 사람도 이제 더는 없을지도 몰라요.

 

만 명이 울어주면 천국에 간다했던가요.
천국에 가셨을 거라 믿어요. 진심으로.


김주익 곽재규 배달호 김동윤 최복남 이용석 이해남 이현중 정해진 하중근 박수일 허세욱..
당신의 시대에, 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서러움으로 억울함으로 목 놓아 울었던
죽음들입니다.

당신처럼 벼랑 끝에 내몰렸던..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죽음을 당신이 이해해주길 바란 적이 있었어요.
하도 야속해서. 노동자의 삶을 안다는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나 너무 미워서.
아무리 야속하고 미워도 그런 바람은 품지 말걸 그랬다 싶어요.
애증도 부질없어 졌습니다.

언젠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말들이 기형도의 시처럼
떠돌다 때때로 부딪히겠지요.


이제 변호사비용은 영원히 안 갚아도 되게 생겼습니다.
다음 생에 오실 땐, 너무 똑똑하게 오지 마시구려.
사법시험 같은 것도 합격하지 마시구요.

그냥 태생대로 기름밥 먹는 노동자로 만났으면 해요.


저는 당신에게 변절이라 손가락질 할 일 없이,

당신은 절더러 경직되었다거니 세상을 모른다거니 한심해 할 일 없이.

떠날 일도 보낼 일도 없이 그냥 내내 동지로.
그래서 언젠가 하셨던 말씀대로 자본가가 지는 해라면 노동자는 뜨는 해다.
그 멋진 말씀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 남다른 정의감 그대로 만날 수 있길.
다시는 미워할 일도 상처 받을 일도 이렇게 미어질 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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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버신부의 1910년대 대한민국 사진◈  






차 한국방문 1925년 5월14일 ~ 10월2일

베버 신부는 한국에 대해
"내가 그렇게도 빨리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나라였다." 라고
고백 했습니다. 1925년 촬영된 영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는
한국에 대한 한 독일인 선교사의 지극한 사랑과 연민의 기록입니다.

베버 신부는 직접 영화에 출연해 당시 영화를 보는 독일인 관객들을 위해
칠판에 지도를 그려가며 한국을 유럽의 이탈리아 반도와 비교해서 묘사
하기도 했습니다.
 

 1925년 수도 서울 시가지의 모습 



혜화문(동소문) 태조 1397년 건립, 일제강점기 전차공사 중 헐렸다.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북한산의 모습


1925년 서울 도성 성곽 모습

베버 신부는 서울이 오목한 분지이고 희고 단단한 성곽이 능선을 따라서
산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산을 구름속에 솟아 있는 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서울의 마을들이 주로 산 밑에 모여 있는 것을 주목 했습니다.
그리고 쌀을 좀 더 많이 재배하기 위해서 넓고 좋은 땅은 농토로 삼았고
집은 비좁은 산 비탈에 잡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인들은
"자연과 더불어 살며 하루 종일 자연과 함께하다가 석양을 뒤로 하고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고, 자연을 정복하기 보다
그 찬란함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고 생각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문화를 존경했습니다.
독일 민족이 아직 숲에서 뛰어 다닐 때 한국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 여겼습니다. 그에게 감동을 주었던 한국 '문화' 그 중에 하나는
'효도' 입니다. 천년 이상 지속된 유교전통에 따라 복종과 순종 그리고
권위에 대한 인정은 한국인들이 태어나면서 배워오고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조상과 어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은
그를 사로 잡았습니다.





















 


베베 신부는 한국의 농경 문화에 주목하면서
특히 품앗이라는 노동 형태에 매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 어디어서도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공동체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성숙된 공동체문화'

이는 카톨릭 공동체에 거대한 뿌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버 신부는 일본의 신민지 폭력성 앞에서 아름답고 고귀한
한국의 공동체 문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6•25 전쟁 때 완전히 불에 타 사라지고
지금은 축대, 비석 등만 남아 있다.


1925년 금강산 장안사 승려들의 모습


1925년 금강산 장안사 대웅전

베버 신부 일행은 1925년 6월초 약 열흔간의 일정으로 금강산을 여행합니다. 
그리고 금강산 장안사의 가람의 배치와 명칭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화려한 장식을 보고 마치 마법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제단을 덮고 있는 우아한 지붕, 그것은 수없이 많은 붉은 나무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력적으로 짜 맞춘 것입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의 사찰이야말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비록 한국이 유교 국가였지만 민중의 삶에는 불교 문화가
훨신 강력한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한국의 역사에서
역사와 민중의 편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베버 신부는 한국을 떠나면서
그는 "1911년에는 내가 그리도 빨리 사랑에 빠졌던 한국과 이별할 때
작별의 아픈 마음으로 '대한만세'를 불렀다.
그로부터 10년이 넘게 지나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국과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져오게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예술가였고, 문학가였으며 겸손한 목자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
그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956년 영원한 안식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사랑과 연민의
기록은 먼 세월을 돌아 우리의 곁에 와 있습니다.


역사스페셜

만주대탐사 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

 

 

1908년 중국 청나라 선통황제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역사에 마지막 형제였다. 중국 혁명 후 그는 친일 전범자로 법정에 선다(1959년 중국 푸순 전범 재판소). 황제의 본명은 아이신줘러 푸이였다. 아이신줘러, 아이신줘러.

 

아이신줘러. 즉 애신각나. 이것은 청 황실의 성씨입니다. 성이 꽤 길죠. 그런데 이 아이신줘러에는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 동북아를 꿰뚫는 역사의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골타와 누르하치, 이 이름들을 기억하십니까? 아골타는 여진족으로 1115년 금나라를 세운 금 태조이고요, 누르하치는 또한 여진족으로 후금, 그러니까 청나라를 세운 청 태조입니다. 오늘 우린 그동안 북방 오랑캐 정도로만 여겨져 왔던 여진족 혹은 만주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 역사 속의 비밀을 풀어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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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은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가 발달했던 송나라의 수도였다. 천백 년 대, 카이펑은 인구 50만의 국제 도시였다. 로마나 유럽의 도시들이 인구 4, 5만의 불과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국제도시 카이펑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청명상하도. 당대 최고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화려한 카이펑 시가를 그려 송황제 휘종에게 바친 중국의 보물이다. 넘치는 물산과 활기찬 수도 카이펑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광적으로 예술을 사랑했던 휘종 황제 후원아래 문인 예술가들은 절정의 중국 문화를 표현했다. 그러나 카이펑의 치욕적인 한족의 역사가 서려 있다. 천백 년대, 중국 송나라는 북방민족 거란이 세운 요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만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고 만주에 살던 여진족도 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 중 거란족에 직접 지배를 받던 여진족을 숙여진이라 하고 송화강 동쪽에 거주하며 거란의 간접 통치를 받던 여진족을 생여진이라 했다. 중국 하얼빈 인근 송화강 유역에서 유목과 농경을 하던 완안 여진족도 거란의 간접 지배를 받던 생여진 중 하나였다.

 

 

일찍부터 북방에선 ‘여진족이 일만 명 뭉치면 대적하지 말라’고 한 말이 있었다. 그래서 거란족은 철저히 여진족을 뭉치지 못하게 경계했다. 그러나 완안 여진족은 거란의 통제속에서도 서서히 힘을 결집하고 있었다. 1114년 일 만의 여진족이 요나라 십만 대군을 하얼빈 인근 출하점에서 대파하는 사건이 벌어진다(1114년 팔리성 전투). 하루 밤새 만주의 질서는 뒤집어졌다. 출하점 전투의 주역은 바로 완안 여진의 지도자 아골타였다. 1115년 아골타는 곧바로 금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아골타는 한족의 북방 저지선인 만리장성을 넘어 바람처럼 남진한다. 금나라 군대는 순식간에 황하를 건너 한족의 나라인 송의 수도 카이펑으로 밀려들었다. 놀란 송황제 휘종은 화친을 제의하지만 끝내 수도 카이펑은 금군에 점령당한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의 심장부인 중원을 이민족에게 내주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1127년 송나라 수도 카이펑 함락).

 

 

 

정강지변(靖康之變). 휘종과 흠종 부자는 여진족의 포로가 되는 참담한 신세가 됐다. 이것이 한족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정강의 변이다.

 

왕우량 교수 / 중국 다렌대학

"1127년의 정강지변은 중국역사상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방민족, 즉 중국동북지방의 여진족, 작은 민족이 요국을 멸망시킨 후 다시 중국역사상 강대한 왕조인 송 왕조를 멸망시킨 사건입니다. 이때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의 통치자가 되고 북방민족이 북경을 기초로 정치통치 중심이 되는 기반을 닦습니다."

 

 

한족의 심장부를 점령한 여진 추장 아골타.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황실 성을 완안씨로 정한다. 금태조 아골타의 정식 이름은 완안 아골타다. 송을 정벌할 때 금나라 군부의 핵심 인물은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完顔兀朮)이었다. 황제가 이민족에게 잡혀간 충격 때문에 정강의 변은 중국에서 영화나 드라마(‘팔천리로의 雲月’)에 단골 소재가 됐다. 완안올출도 주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진우주. 그런데 아골타의 아들 완안올출을 진우주 즉 우리말로 김올출로 부른다. 완안올출을 왜 김올출이라 부를까? 금나라 왕자의 성이 완안이 아니고 왜 김씨일까? 중국 서부 깊숙한 곳 감숙성의 경안현엔 뜻밖에도 완안 성씨의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직계조상이 금태조 아골타의 넷째아들 완안올출 즉 김올출이라 했다. 왜 금황족의 후손들이 만주와 정반대의 땅인 이곳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가족공동체를 유지하며 척박한 환경 때문에 밭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현대식 집을 짓긴 했지만 감숙지방의 전통적인 주거 형식인 토굴생활도 병행하고 있었다. 오지의 정체를 숨긴 채 오천 여명의 완안씨들은 씨족 공동체를 이뤄 팔백여년동안 이어오고 있었다. 이들은 천백사십년대에 김올출 즉 완안올출의 아들이 금황실 내부 정쟁에 휘말려 살해되자 이곳으로 탈출했다고 한다.

 

 

역대 금황실의 황제와 형제들을 그린 선인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완안 청베이 / 완안 올출 후손

"김올출은 금희종이 즉위하도록 돕고 해령왕을 배척했습니다. 희종이 황제가 되었지만 해령왕이 희종을 살해합니다. 해령왕은 희종을 죽인 후 김올출의 후손을 죽이려합니다. 김올출의 아들 완안헝은 해령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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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도 완안올출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김올출이라 부른다. 명절이면 전부족이 모여 제사을 지내는 완안씨 사당엔 역대 황제와 자신들의 선조인 완안올출의 비가 있었다. 완안올출의 비에도 역시 김올출이라는 이름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왜 자신들 선조의 성을 완안씨라 하지 않고 金씨라 부를까?

 

완안 청베이 / 완안 올출 후손

"학술계에서는 아직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김올출의 성은 금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성이 김이고 이름이 올출입니다."

 

후손들도 오래전부터 그냥 김올출이라 불러 왔을 뿐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만주에서 감숙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기나긴 역사의 비밀이 ‘쇠 금’자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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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주. 즉 김올출. 중국 금나라의 왕자가 김씨 성이라고 하니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김씨 성은 우리나라에서야 가장 흔한 성씨입니다만 중국에선 대단히 드문 성입니다.

 

 

 

중국 대륙에는 워낙 많은 왕조들이 흥하고 망해서 상당히 헷갈립니다. 잠시 중국과 만주의 역사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30여년 후인 698년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옛 고구려 땅에 발해를 건국합니다. 그러다가 926년 거란족이 이 발해를 멸망시키는데요. 거란족이 요즘 우리가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볼 수 있는 요나라를 세운 사람들입니다. 이때 여진족은 요동에서 살고 있었는데요. 아골타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요나라를 멸망시킵니다. 그리고 금나라는 곧바로 한족의 나라인 송을 침략해 중원 대륙을 초토해 시키는데요.

 

이 한족의 본거지인 중원대륙은 이때부터 북방 이민족들에 의해 농락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아골타의 선조들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람들입니다.

 

 

 

강화도 마니산. 이곳엔 오래 전부터 우리 민족의 뿌리와 정기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곤 했다. 이 개천각은 민족운동가였던 이유립 선생이 설립해 24분의 우리나라 위인을 모시고 있다. 환웅천제, 치우천황, 단군왕검, 고주몽, 대조영 등을 모시고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엔 금태조 아골타가 모셔져 있다. 여진족인 아골타가 왜 우리나라 위인들과 나란히 모셔져 있을까?

 

 

구한말 역사학자이자, 민족주의자였던 박은식 선생은 금태조 아골타를 꿈에서 만났다는 ‘몽배금태조’라는 글을 남겼다. 그런데 이글에서 대금국 태조 황제는 우리 평주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역사학자가 왜 이런 주장을 했을까?

 

 

중국 하얼빈 근교에 아청시는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령부가 있던 곳이다. 제국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여진족 아골타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아청엔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런데 여진족의 전통가옥이 눈에 익다. 짚을 섞어 쌓은 흙벽과 가로지른 석까래는 우리나라 옛 시골집의 구조를 닮았다. 한켠엔 볏짚으로 이은 행랑채와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텃밭도 있다.

 

한족들의 가옥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구조다. 집 내부는 우리와 같이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가시간이면 모여서 전통방식의 겨루기를 즐긴다. 그것은 씨름이었다. 경기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씨름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 또한 한족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놀이다. 옛날 우리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말도 문자도 잃어버리고 이젠 만족이라 불리는 여진족의 후예들. 이들의 조상인 금태조 아골타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베이징의 수도 도서관은 중국 최대의 도서관이다. 특히 이곳의 고문헌 자료실엔 각종 고서들이 보관돼 있다. 그런데 사서 중에 금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이란 책을 볼 수 있었다. 여진족 금나라에 쫓기던 송은 양자강 건너 항적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포로도 잡혀간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금에 홍우를 파견했다. 송막기문은 남송의 홍우가 10년 동안 금나라에 머물며 기록한 당대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런데 송의 사신 홍우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여진 추장은 신라사람’. 뿐만이 아니다.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엔 자신들의 황실 뿌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형 아고네는 고려에 남고 둘째인 금해 시조와 동생 보할리는 여진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 이름은 함보였다.

 

신라와 고려인이란 차이는 있지만, 두 사서 모두 금의 선조가 한반도에서 넘어온 것으로 기록했다. 아골타는 1068년생이다. 8대조 함보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략 9백년대 초반이 된다.

 

왕우량 교수 / 중국다렌대학

"한푸는 고려에서 왔다고 말하거나 고려 전의 신라에서 왔다고 말해도 무관할 것 같습니다. 왕건이 이미 고려를 세웠고 신라는 멸망한 시기로 조선반도는 동란의 시기였습니다. 여기서 왜 함보가 이동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록으로 봐서 한 사람만 왔을 리 없습니다. 분명히 가족 또는 자신의 씨족이나 부락을 데리고 왔을 겁니다. 이것이 민족의 이동이었습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격동하는 정세 속에 한 무리의 세력이 한반도에서 만주로 이동한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중국 수도 도서관 고(故)문헌실에선 금나라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을 속속 확인할 수 있었다.

 

 

흠정 만주 원류고는 1600년대 초반 여진족이 세운 또 하나의 나라 청나라의 공식 역사서다. 이 책엔 금의 국호에 대한 설명이 있다. 금은 신라 김씨에서 유래했고 국호도 이를 딴 것이며 그 외의 주장은 근거 없다고 단호하게 정리했다.

 

김위현 명예교수 / 명지대 사학과

"지금 새로운 주장이 아니고 이미 9백여 년 전에 정사에 나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한반도에서 넘어갔던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기다 아니다’ 하는 논란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북만주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중국 대륙을 제패했던 여진의 영웅 아골타. 그의 8대조는 고려 초의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이었다. 천년 넘는 역사의 저편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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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같은 이야기만 엄연히 중국 정사에 기록돼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겠죠. 이 내용은 앞서 본 송막기문, 금사, 흠정만주원류고 뿐만 아니라 금지(金志), 삼조북맹회록(三朝北盟會編) 등에도 줄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민족으로는 최초로 중국대륙을 장악하고 한족 황제를 포로로 잡았던 여진족. 그들의 선조는 한반도로부터 왔고 그들의 성씨는 김씨였다, 어떻습니까? 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는데요. 금태조 아골타의 선조인 의문의 사나이 김함보. 그는 과연 누구일까요.

 

 

신라의 왕릉은 모두 신라 수도였던 경주에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신라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무덤만이 이곳 경기도 연천에 있다. 왜 신라 왕릉이 경기도에 있을까? 후삼국 말기 고려의 압박에 경순왕은 신라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기로 한다. 그러나 마의태자는 천년 사직을 고려에 넘기는 것에 대해 결사반대했다.

 

"왕자는 울면서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9년

 

 

그렇게 신라 천년 사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엔 특이한 지명이 있다. ‘다물’. 다물은 빼앗긴 나라의 광복을 뜻한다. 이곳 강원도엔 무슨 나라가 있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금강산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마의태자의 행적에 의문을 품게 하는 유적들이 이곳 인제에 있다. 왜 마의태자 유적비가 여기 있을까?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엔 수백 년 된 대왕각이란 사당이 있다. 매년 김부리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대왕각엔 마의태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인제 인근 곳곳에 남아 있는 마의태자 관련 유적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신라인들이 고려에 저항했음을 보여 준다.

 

박성수 교수 / 한국학 중앙연구원

"천년이나 되는 신라가 아무 저항 없이 망했다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신라의 화랑들이 그대로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의태자가 반대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반대해 가지고 신라의 저항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원도 인제 유적들이 있죠."

 

 

고려에 항전하던 일단의 반 고려세력들. 그들과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된 김함보는 어떤 관계일까? 고려사에는 금의 시조에 대한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혹자는 평주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금의 선조라고도 한다.”

 

 

그런데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과 같은 이름이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1636년 김세렴이 일본 통신사로 다녀오면서 남긴 <해사록>이란 책엔 놀라운 기록이 나온다. 경주에 들린 감회를 쓴 대목이다. 조선 유학자가 여진족 아골타를 경순왕의 외손이자,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의 후손이라 했다.

 

 

 

아골타의 선조 함보는 김씨인데 왜 권행의 후손이라 했을까? 서기 930년 고려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은 안동 병산에서 대혈투를 벌인다. 이때 안동의 권행과 김선평, 장장필, 세 사람이 왕건을 도와서 고려군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왕건은 이 세 사람에게 태사의 직위를 내리고 김행에겐 권씨를 하사했다. 이로써 김행은 안동 권씨 시조인 태사공 권행이 됐던 것이다. 고려사에 나오는 김행이 안동의 김행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권행은 본래 경주 김씨였다. 그런데 태사라는 최고의 직위를 받은 권행과 그의 후손들은 이후 백년 넘게 고려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

 

박성수 교수

"'신라에 대한 충성심, 후백제의 공격을 막고 어디까지나 신라를 위해 싸운 것이지 왕건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그가 왕건의 벼슬을 하지 않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함보는 누구인지 명확치 않지만, 그는 김씨 출신의 신라 광복군으로 추정되며 그가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선조임은 명확해졌다.

 

김위현 교수

"김함보는 신라 왕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신라가 망하고 김함보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반고려 세력들이 동해안을 거쳐서 두만강을 건너가지고 여진 지역에 옮겨 간 것으로 추론이 됩니다."

 

격동의 시기 망국의 한을 품고 북으로 올라간 김함보와 그의 무리들. 그들에겐 새로운 땅, 드넓은 만주 벌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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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 김함보의 후손들이 만주를 통일하고 나아가 한족의 본거지인 중국대륙을 장악했다. 이 북방민족인 만주에 중국이 흡수된 형국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여진족은 읍루, 말갈, 물길, 숙신, 주신, 여직, 여진 그리고 만주족으로 등장합니다. 부여와 고구려, 발해의 주요한 구성원들이었고 우려 역사에 한 축을 이루던 사람들이 바로 여진족입니다.

 

이 금사에 따르면 김함보가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갈 당시 여진의 각 부족들 사이에서는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함보가 우마변상법이라고 하는 일종의 성문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내자, 그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죠. 이 이후 그의 후손들은 완안 여진뿐만이 아니라 전체 여진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7세손의 이르러서는 영토가 간도에까지 확대되죠. 그리고 1102년엔 고려로 사신을 보냅니다. 그런데 아골타가 이 여진족의 지도자가 되기 직전 고려와 대충돌이 일어납니다.

 

 

 

1107년 12월. 윤관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 17만 명은 여진 정벌에 나선다. 고려군의 상대는 김함보의 후손들이었다. 김함보가 여진족의 지도자가 된 지 150여년 후 팽창하던 여진족은 함경도 인근에서 고려와 잦은 충돌을 벌인다. 이 그림은 윤관이 여진을 정벌하고 북경비를 세운 장면이다.

 

 

 

윤관 장군은 이 전쟁에서 동북 9성을 확보하고 최북단인 공험진에 북경비를 세웠다. 고려의 북쪽 국경선인 공험진은 어디였을까? 일제강점기 때부터 공험진의 위치는 함경남도 일대도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윤관이 국경비를 세운 공험진은 함경도 종성에서 북으로 7백리 지점이라고 돼 있다. 세종 때 실측한 이 지도(‘조선국회도’를 말함.)를 보더라도 공험진은 함경북도 종성의 북쪽이고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공험진 비는 이곳 중국 지린성 옌지시 인근에서 발견됐다는 기록만 전해져 올 뿐 행방은 알 수 없다. 조선국회도와 북관유적도 등을 종합해 볼 때 공험진은 이곳으로 추정된다. 여진은 자신들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던 간도지방을 고려에 빼긴 것이다.

 

 

 

다급해진 여진은 고려의 동북 9성을 돌려달라는 서신을 보낸다. 당시 여진 추장은 아골타의 형 오아속이었다. “일찍이 우리 선조(여진)가 대방 즉 고려로부터 나왔으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고려사 예종 4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부르고 있다. 1115년 금 황제가 된 아골타도 여진과 고려는 형제지간이고 역시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했다. 금나라에게 고려는 선조들이 나온 부모의 나라였던 것이다.

 

왕우량 교수

"동일한 언어, 동일한 지역, 동일한 문화가 있습니다. 이 각도에서 보면 고려와 여진 사이의 전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을 겁니다. 물론 전쟁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 할 수 없었습니다만 그들은 거란이나 몽고와 다릅니다. 거란과 몽고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민족 공동체입니다. 그들에게는 혈연상, 역사상의 유대관계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여진인과 조선반도의 신라인 나중의 고려인은 민족공동체가 되었습니다. "

 

 

금나라 오경 중 하나인 동경성이 있었던 요양. 이곳에서 1985년 우연히 한 점의 비가 발견됐다. 비명은 덕망 높았던 한 스님의 일대기였다. 비가 제작된 것은 1190년, 스님의 성은 고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인공이 발해인이라고 기록돼 있다. 1190년이면 발해가 망한지 무려 260년이 지난 시점인데, 아직도 발해인이다. 여진과 발해는 어떤 사이였을까?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건국했던 발해는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에게 멸망했고 발해인은 집단으로 거란의 동경과 상경 등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3백만 발해인들은 끈질긴 광복운동을 벌였다. 거란의 수도 인근에서 발생한 발해인의 반란이 2년 동안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발해인과 여진족 사이엔 반 거란이란 연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여진인과 발해인은 원래 한 집안이다.” 아골타는 거란에 맞서 봉기할 때 여진과 발해는 고구려와 발해의 후예로 한 집안임을 주장해 발해유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김위현

"발해, 여진 동일가라는 그런 말이 먹혀들어 갔다고 하는 것은 이미 여진과 발해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는 민족적으로 친연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먹혀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 베이징은 송나라 때까지만 해도 한족에겐 변방에 불과했다. 여진족은 중원을 장악한 후, 이곳에 대규모 신도시를 만들었다. 북경은 이후 중국의 중심지가 됐다.

 

 

이 박물관의 지하엔 금나라 때 건설한 대규모 수로 시설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인공으로 수로를 파서 물길을 연결한 것이다.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나무로 만든 수문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베이징의 명소인 북해공원도 이때 완성된 정원이다. 당시 베이징 건설의 총 책임자는 장호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으로 사대에 걸쳐 황제 신임을 받았던 발해 유민이었다. 장호 뿐 아니라 수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했다. 대제국을 운영했던 발해인들에 대한 금나라의 신뢰는 단순히 혈연적인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성호 / 동양사학회, 금사 연구

"대제국을 건설, 운영해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금이 건국을 하고 국가체제를 확장 그리고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그들의 경험이 상당히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금은 이러한 발해인들을 중용해서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활용했던 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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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은 금나라 5대 도시였기 때문에 수많은 금나라 시대의 금석문이 남아 있다. 요양박물관 별관에 늘어선 금대의 비들 속에는 특별한 비가 한 점 있다. ‘통혜원명 대사 탑명’으로 불리는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로 역시 발해인이었다.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이다.

 

 

 

그녀의 아들 정국공은 나중에 금 황제가 되는데 이가 바로 금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 황제였다. 4대 황제 혜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였다. 금나라 건국 후 많은 발해 여인들은 금 황실로 시집을 갔다. 이로써 발해인들은 금나라의 고위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 잡았다. 금나라는 발해인과 여진족, 연합정권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김위현

"따라서 금나라는 발해 후손의 왕비족과 그 다음에 신라 후예인 왕족, 이게 합해져서 금나라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낳았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 역사에 한 자리 매김을 해도 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금 황실의 선조가 신라 출신이었고 국가의 지배층은 발해유민, 그리고 고려와의 우호적 관계. 여진족 금나라는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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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만주의 역사는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 그리고 신라의 후예와 발해유민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가 되는데 이는 중국의 역사와는 상충되고 우리의 역사와는 맥락이 이어지는군요. 이렇게 만주와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금나라는 또 다른 북방민족인 몽골족의 원나라에 중원을 내주고 만주로 사라집니다. 북방민족인 금나라와 원나라의 삼백년 지배를 받았던 한족이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해서 중국대륙을 지배함으로써 한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여진족이 1616년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무너뜨리므로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되죠. 이것이 바로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입니다.

 

 

제작진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과 관련된 뜻밖의 사람을 북경에서 만날 수 있었다. 북경 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그녀는 자신을 청 건륭황제의 7대손이라고 소개했다. 집안인 증조부의 사진을 비롯해 건륭제 후손들의 글씨 등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여진족의 후예들이 세운 중국 마지막 왕조 청나라 제6대 황제 건륭제는 60여 년 동안이나 재위한 황제로 유명하다.

 

 

건륭제는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까지 장악했다. 지금의 중국 영역은 청 건륭황제가 이룬 것이다. 한족의 나라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만주족이 세운 청 황실의 성은 아이신줘러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성이 김씨라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김괄(金适)이었다.

 

김괄 / 청 건륭제 7대손

"제 할아버지 성함은 헝쉬입니다. 아이신 줘러 헝쉬요. 헝 항렬입니다. 그는 당시에 직업을 구하거나 학교를 다닐 때 김광평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김계종이고 우리는 그걸 따랐습니다. 저는 김씨입니다."

 

 

 

누루하치는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후 랴오닝 성 심양을 수도로 정한다. 이곳 심양 광장엔 청태조 누르하치부터 마지막 황제 푸이까지 역대 청조 황제의 12사람의 좌상이 놓여 있다. 청태조의 이름은 애신각라 노이합적(愛新覺羅 努爾哈赤) 즉 아이신줘러 누르하치. 청황실의 성은 한자로 애신각라다. 고

 

 

그런데 왜 청황실의 후손인 김괄 교수는 자신의 성을 김씨로 할까? 청나라의 역사서인 만주실록엔 청황실과 만주족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나온다. 자신들은 하늘의 딸인 불고륜(佛庫倫)의 후손들이며 성은 애신 즉 만주어로 ‘아이신’이라는 것이다. 아이신을 한자어로 표기하다보니 애신이 됐고 만주어 아이신의 원래 뜻은 금이다. 각라는 만주어 줘러를 한자로 차음 표시한 것이다. 뜻은 겨레, 성, 씨족 등과 같고 성씨에 붙는다.

 

김괄

"황족 안에서 우리 성은 아이신 줘러(애신각라)입니다. 아이신 줘러(애신각라)는 만주어이고, 한어로 바꾸면 금이 됩니다."

 

 

청 황실의 성, 애신각라 즉 아이신 줘러는 금 부족들, 김씨들 또는 김씨 집안을 뜻한다. 금을 성으로 삼는 여진족의 후예, 만주족들. 아이신 줘러 푸이는 금 푸이다.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보자.

 

“숲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금 궤짝이 매달린 나무 밑에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 궤짝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고 그 밑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금궤 속에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성을 김(금)씨로 하였다.” - 삼국사기 탈해 이사금 9년

 

 

신라왕 성인 경주 김씨와 신라인의 후예 금 황실. 그 금나라의 후신인 청 황실. 그들은 금을 뜻하는 김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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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신해혁명과 함께 청나라는 무너지고 맙니다. 이때 중국인들이 내세웠던 구호가 멸만흥한, 그러니까 만주족이 세운 나라를 타도하고 한족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얘기입니다. 결국 이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한족들은 만주와 중국이 혈연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전혀 다르다는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국은 수천 년의 한족중심 사관을 벌이고 다민족 통일 국가론이라는 사관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즉 중국 역사는 한족이 이민족의 항쟁한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민족이 중국이라는 통일된 국가를 이루는 과정이란 겁니다. 이는 만주와 우리 역사에서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요. 이민족인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그리고 금나라와의 전쟁도 모두 중국 내부의 갈등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진족의 역사를 돌아본 것은 단순히 신라인의 후예가 금제국을 건설했다는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역사전쟁, 즉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황된 역사관인가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항저우의 명소인 악왕묘. 항우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충장으로 불리는 악비(岳飛, 1103~1141)의 사당이다. 송 멸망 후 양자강 너머에 들어선 남송, 그러나 금나라 군의 공격은 매서웠고 남송은 위기에 빠진다. 이때 금군을 막아선 사람이 악비장군이었다. 악비는 악가군을 이끌고 곳곳에서 금군을 저지했다. 그래서 산은 흔들어도 악가군은 흔들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비는 한족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았다.

 

 

항저우의 송성가무쇼는 상해에서 서커스와 함께 중국인들이 꼭 보고 싶어 하는 양대 공연이다. 이 송성가무쇼의 하이라이트는 악비장군의 무용담 장면이다.

 

 

900년 가까이 악비는 중국의 민족지광으로 불리며 한족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런데 악비의 무덤엔 무덤보다 더 사람이 몰리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발가벗겨져 무릎이 꿇린 진회 부부의 동상 앞이다. 진회는 남송의 대신으로 부인과 함께 악비장군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람객들은 이들에게 침을 뱉고 때리는 것을 악비의 한을 달랜다.

 

예 샤오타오

 

"송나라 이후부터 중국인은 이름에 회(檜)자를 쓰지 않습니다. 진회(秦檜), 진회 그자를 이제 쓰지 않습니다. 그 글자를 쓰면 이름에 쓰면 진회가 생각나니까요."

 

 

중국인들은 아침 식사용으로 유자고라는 음식을 즐겨 먹는다. 그런데 이 유자고에도 악비의 원혼을 달래는 전설이 담겨 있다. 유자고는 밀가루 반죽을 한 다음 두 개를 꼬아 기름에 튀겨 만드는 간단한 음식이다. 그런데 이 유자고가 악비를 독살한 진회부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악비에 대한 한족들의 사랑은 이처럼 크고 깊다. 그런데 2002년 중국 당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악비가 더 이상 민족의 영웅이 아니라는 고등중학교 역사대강을 발표한다.

 

왜 중국은 민족의 영웅 악비를 갑자기 격하시키려는 것일까?

 

왕우량 교수

 

"우리는 과거에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만을 강조했습니다. 소수민족의 역사에 대해서는 충분히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민족영웅 부분이요. 우리가 악비를 민족영웅이라고 한다면 김올출 즉 여진족의 영웅은 영웅이 아니라 변변치 못한 인간이 되는 거죠. 아니면 침략자거나. 그렇게 되면 모순이 생기는 거죠."

 

 

시안을 중심으로 한 황하 문명권에서 일어난 한족들은 전통적으로 한족 외의 민족들은 오랑캐인 이민족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만주의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의 역사관에서는 민족의 영웅 악비가 중국 통일의 장애물이다. 어제의 민중 영웅이 오늘은 반통일 인물로 전락한 것이다.

 

김위현 교수

 

"여태까지 적국으로 보던 북방계 나라들, 이걸 자기 국사로 포괄하려다 보니까 거기에 딜레마가 생긴 겁니다. 자기네 민족의 영웅으로 받들던 악비를, 금나라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시키려 하다 보니까 할 수 없어서 부득이 수천 년 내려오던 영웅을 추락시키고 그렇게 까지 하면서 금나라 역사를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그 궁색함을 보면 동북공정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중원을 빼앗기고 황제가 포로가 되는 치욕을 한족들에게 안겨준 이민족의 나라 금나라, 더구나 금태조 아골타의 시조가 신라 후손이라는 것은 중국의 야심찬 동북공정의 역사관을 근본부터 흔드는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 버려진 역사, 만주. 그곳은 이제 치열한 역사전쟁으로 부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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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명확하게 역사에 나와 있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의식 속에 한족은 우수하고 흉노, 여진 등은 북방 오랑캐라는 소중화사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역사는 흥미롭고 놀라운 과거지만, 옛날이야기는 아닙니다.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格) 격의 역사 해석은 역사를 민족 간의 갈등요인으로 만듭니다. 반면, 역사에 대한 무관심은 단순히 우리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동북공정, 우리가 중국의 동북공정을 그냥 지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정강지변(靖康之變)

 

이 사건은 1126년 금(金)이 송(宋)의 개봉을 함락시키고 휘종과 그의 아들 흠종을 만주로 납치해 간 사건을 말합니다. 정강의 변의 결과 북송은 공식적으로 끝이나고 남송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건은 연운 16주를 차지하고 있던 요나라를 금과 송이 협공하기로 한 조약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여진인이 금을 건설하여 요를 위협하고 있다는 정보는 요나라의 망명자를 통해 송에게도 전달됩니다. 송 조정에선 이 신흥국과 연합하여 요를 양쪽에서 협공함으로써 숙원인 연운십육주를 탈환할 수 있겠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금과 동맹을 맺는데, 이를 '송금해상의 맹'(宋金海上의 盟)이라고 합니다. 해상에서 조약이 맺어진 이유는 송과 금 사이에 요가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피해서 바다(발해만)를 통해 사신이 오고 갔기 때문입니다.

 

조 약은 송측에서 지금까지 요에게 지급하고 있던 세폐를 전액 금나라에 주는 대신, 협공시에 하북지방은 송측이 공략하고 금은 이 곳에 진둔하지 않기로 합니다. 이리하여 양측의 군대는 남북 양면에서 요를 공격하기 시작하여 금군(金軍)은 애초 송과 약속했던 요의 영토를 거의 점령합니다. 반면 송측에서는 요의 연경(燕京, 현재의 北京)을 공격했다가 대패합니다. 그래서 송은 금에 원조를 요청하여 1122년 결국 연경도 금의 군대에 의해 함락됩니다. 요의 황실은 몽골로 도망을 가구요.

 

애시당초 약속과 달리 송이 연경을 공략하지 못했으므로, 금에게 전쟁에 든 비용과 보상금을 요구합니다. 이에 송과 금 사이에 배상금계약이 체결되자 금은 연경을 철저히 약탈한 다음 관리와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 북으로 귀환합니다. 요가 멸망한 후 송과 금은 직접 대결하게 됩니다. 송은 배상금을 금에게 주는 조건으로 연경을 손에 넣었지만 좀처럼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차례 금을 도발하기도 합니다. 금에 복속된 요의 장수가 금의 영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선동하고 원조하기도 했으며, 나아가 요의 멸망직전에 음산산맥으로 도주한 천조제(天祚帝)와 은밀히 연락하여 금에 대한 협공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이 러한 배신 행위에 금의 대군은 재차 연경을 점령하고 파죽의 기세로 남하하여 개봉을 위협합니다. 이 보고에 두려워진 휘종은 황제자리를 아들 흠종에게 양위하고 황급히 남쪽으로 피난합니다. 조정에선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다투는 가운데 흠종은 어찌해야좋을지 몰라 우왕좌왕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금의 대군이 개봉을 포위하고 배상금 액수를 올릴 것, 산서의 중산(中山), 하간(河間), 태원(太原) 3개 진(鎭)을 할양할 것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웁니다. 송이 우선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 요구를 수용하니 금의 군대는 일단 포위망을 풀고 북으로 돌아갑니다.

 

금군이 돌아간 후 송에서는 주전파가 조정을 장악하여 휘종을 다시 수도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3개의 진(鎭_ 할양의 약속을 거부한 후 금의 치하에 있는 거란인 들에게 모반을 부추겨 금 내부를 교란하는 계획을 추진합니다. 배반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습니다. 거듭된 배반에 노한 금은 재차 군사행동을 하고 개봉을 포위한 다음 40일간의 공성전으로 마침내 함락시킵니다. 그 두 휘종 및 흠종을 위시하여 황족과 궁녀, 관료, 기술자 등 3천 여명을 포로로 잡아 북방으로 이주시켰고, 휘종이 돈을 쏟아 수집한 서화와 골동품 및 궁중의 온갖 재보(財寶)를 남김없이 북으로 가져갑니다. 이로써 송은 일단 멸망합니다. 이 사건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강의 변'이라고 합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ssaumjil/LnOm/964518?docid=3652541031&q=%C1%A4%B0%AD%C0%C7%20%BA%AF&re=1

 

 

* 글의 저작권과 이미지는 KBS 역사스페셜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업적인 용도는 사용을 금합니다.

 

 

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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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 만주대탐사 1부

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만주는 이제 우리에게 잃어버린 땅입니다. 하지만 만주는 잃어버린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던 땅이기도 하죠. 이 만주 벌판 한가운데에를 흐르는 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요하입니다. 최근 들어 이 요하 일대에서 고대유적들이 발견되면서 세계적으로 역사가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세계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이른 시기에 유적과 유물들이 나오고 있는 것인데요. 주목할 만한 것은 이곳에서 우리민족의 흔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간 수수께끼 같았던 우리민족의 기원에 대한 단서를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린 자동차로만 장장 4000km를 달려서 만주벌판 요하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아직 국가도 국경도 없던 시기, 우리 민족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었을까? 드넓은 땅 만주.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됐지만 그곳엔 우리 선조들의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다. 내몽고 자치구 적봉 시에 있는 홍산. 붉은 산이란 뜻이다. 이 붉은 바위와 황토 속엔 수천 년 전 고대 문명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1984년 중국 고고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오천 년 전의 여신상이 발견된 것이다. 여신은 단호한 시선으로 후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 세계로 타전된 이 발굴 소식은 새로운 문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신점산 / 前 요녕성 문물고고학연구소장

“이곳은 중국 고대 문명 중에서 가장 이르고 선진적인 곳입니다. 시대가 아주 이르죠. 중국 고대문명은 세계적인 인도문명, 이집트 문명과 같습니다. 매우 이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홍산 문화를 정점으로 화려한 꽃을 피웠던 문명은 요하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어 일명 요하문명이라 불린다. 세계 4대 문명 중 탄생이 가장 늦었던 중국 문명은 이로써 단숨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발상지로 발돋움 하고 있다. 30여 년 동안 요하 문명을 연구해 온 이형구 교수는 이곳이 중화 민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3주일의 준비 작업을 거쳐 2주일 동안 이루어지는 이번 탐사는 요하문명의 발굴 현장을 샅샅이 뒤지는 4000km의 대장정이었다.

 

 

 

만주벌판 서쪽을 달리는 요하. 지금은 수량이 많이 줄었지만 이 강은 요하문명을 잉태한 문명의 젖줄이었다. 여신상이 발견된 우하량은 요하 문명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소다. 신전을 비롯해 기원전 3500년 시기에 홍산 문화 유적이 집중된 곳이다. 2006년에 새로 만든 이 여신묘의 표지석은 중국에선 이례적으로 영문표기까지 하고 있어 국제적인 위상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정작 여신묘의 입장은 강한 제재를 받았다.

 

보호시설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일정 방문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신묘은 우하량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여신상이 발굴된 것은 홍산 문화 발굴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이형구 교수 / 선문대학교

“예, 그런 당시 홍산인들의 얼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엄청난 수확이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 지금으로부터 5500년에 이런 여신을 모신 신전(神殿)이 발견됐다는 것은 대단히 큰 사건이면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곳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십 개의 조각이 함께 발견됐는데 이는 예닐곱 개의 몸통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조각은 사람 크기이거나 두, 세배 큰 경우도 있었다.

 

 

 

5500년 전 반 지하식 건물이었던 여신 묘엔 각 방마다 크기가 다른 여신상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통제를 받긴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한 시간을 설득한 뒤에야 어렵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원형 및 사각형 모양의 거대한 돌무지, 이 수수께끼 같은 유적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변이 20미터에 이르는 이 건축물은 3단으로 쌓아 올린 돌무지무덤, 적석총이다.

 

“지금 3단이 보입니다. 3단으로 쌓아올리고 또 쌓아 올린 이번 방법.”

 

 

 

 

이런 계단식 적석총은 중원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묘제다. 바로 옆에선 27기의 석관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돼 중국학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이런 석관묘를 쓰는 묘제가 한반도나 요동반도, 시베리아와 같은 이런 북방벨트를 따라서 분포하고 있는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묘제가 함경도로부터 제주도까지 심지어 일본까지 이런 석관묘가 발견되고 있는데 요기에서 보는 석관묘는 시베리아보다 2천년 정도 앞선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동안 적석총의 기원이 시베리아란 학설을 뒤집어 버릴 만한 엄청난 발견이었다. 무덤은 4각형, 제단은 원형으로 만들었다. 거의 허물어지고 윤곽만 남은 제단의 둘레에선 대량으로 토기 편이 발견됐다. 이곳은 무슨 용도로 사용되던 것일까?

 

 

 

흙으로 다지고 돌을 쌓아올려 만든 3단의 원형 제단을 위아래가 모두 튀인 토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과 소통하고 싶었던 홍산 인들의 종교의식이었다. 기원전 3500년 거대한 적석총과 신전, 제단을 만들어 냈던 홍산 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실하 교수 / 항공대 교양학부

“그 우하량 지역은 홍산 문화 전체에서 가장 중심적인 성소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신 묘와 천제 재단 터와 거대 적석총을 갖추고 있는 삼위일체의 구조라는 것은 이미 우하량을 짓는 이 시기에는 최소한 ‘초기국가단계’나 혹은 ‘초기문명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굉장히 중요한 유적입니다.”

 

황하문명보다 천년 이상 앞선 홍산 문화는 오천 년 전 이미 초기국가단계로의 진입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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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량은 어쩌면 홍산인들의 성지였을지도 모릅니다. 우하량 전역에서 주거지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무덤과 제단과 신전들만 발굴이 됐기 때문이죠. 대체로 학자들은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성지가 건설되려면 ‘강력한 권력자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홍산인들이 기원전 3500년에 이미 초기국가단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습니다. 만주지역에 중원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 왔다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이 도전을 받았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새로운 문명의 출현 앞에서 그러면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요하 문명의 출현은 중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부터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되고 더 발달된 문화가 만리장성 이북지역에서 발굴됐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 이곳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은 총 길이 2700km에 이르는 거대한 경계성이다. 예로부터 중국은 만리장성을 중원과 변방을 가르는 북방한계선으로 인식시켜왔다.

 

이형구 교수

“중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 만리장성을 쌓아 놓고 만리장성 이남은 중화문화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만리장성 이북을 오랑캐의 소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만리장성 북쪽에서 많은 고대문명의 유적지, 유물이 쏟아져 나오니까 중국 사람들은 이제 와서 이것을 중화문명의 시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모순이고 견강부회죠.”

 

 

 

만리장성 이북 오랑캐 땅이라고 여겨왔던 지역에서 중원보다 훨씬 더 선진적인 문명이 발견되자, 중국은 큰 충격에 빠졌다. 중국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화문명의 기원이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이라는 이른바 다기원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은 오랫동안 황하문명을 중하문명의 기원지로 보았지만 1970년 들어서는 장강문명, 그리고 최근엔 요하문명을 시원지로 삼고 있다. 이렇게 되면 중화문명사는 천년이나 앞당겨 진다.

 

 

 

중국 고고학계 대부 쑤빙치(1909~1997)는 한 발 더 나아가 전설 속의 인물을 끌어들여 고고학적 성과와 연결시켰다. 중국의 건국신화와 나오는 전설의 제왕이 유하문명의 꽃 홍산 문화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 전설의 제왕이 바로 황제다. 황제는 중국의 신화적 인물이지만 이젠 역사적 인물로 완전히 탈바꿈해 있다. 북경인근 황제의 성이라 불리는 곳에 중국인들의 시조를 모시는 사원이 있다.

 

 

1997년에 건립된 중화삼조당. 이름 그대로 세 명의 시조를 모신 곳이다. 그 한 가운데가 바로 황제. 중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황제와 염제를 자신들의 시조로 모셨는데 최근 여기에 슬며시 치우가 끼어들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왕인첸 / 중화삼조당 안내원

"염제와 황제는 우리 한족의 조상을 대표합니다. 치우는 중국 내 소수 민족의 조상을 대표합니다. 염제, 황제, 치우를 한 곳에 놓은 것은 중화 56개 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한 것입니다. 문화의 융합은 56개 민족의 통합을 말합니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치우는 황제와 맞서 싸웠던 인물로 그 성격이 포악하다며 부정적으로 묘사돼 왔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자신들의 시조로 편입해 놓은 것이다. 삼조당 내부의 벽화, 자신들의 조상과 치열한 싸움을 벌인 치우를 또 한 명의 조상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현재 중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이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란 틀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실하 교수 / 항공대 교양학부

"예전의 황제의 영역은 만리장성을 넘어가 본 적이 없습니다. 만리장성 너머에서 요하 문명 전체 지역을 신화시절부터 여기가 바로 황제의 땅이였다는 논리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황제의 땅이었던 요하 지역에서 중국문명이 최초로 꽃피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이어서 황하와 장강에서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 다기원론으로 가는데 실질적인 기원을 요하로 삼고 있는 게 현재 재편 작업에 가장 핵심적인 논리 중에 하나입니다."

 

중국으로선 요하문명을 중국 역사로 끌어 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심양의 요녕성 박물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가장 분비는 곳은 박물관 3층, 이곳에선 4년째 요하 문명전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중국 문명의 시원을 요하문명으로 정하고 이를 황제가 주도했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전설과 고고학적 성과를 끼어 맞춰 황제를 홍산문화의 대표로 등록하므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 역사에 넣어버리는 소위 동북공정의 핵심이다.

 

우실하 교수

“동북공정은 고구려만의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것은 동북아시아 전체 역사에 대한 재편 작업에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장성이북 만주 지역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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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제 그들의 자부심이었던 황하 문명과 만리장성을 넘어 요하문명을 그들 문화의 원형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구에 우리나라의 참여가 극히 제한돼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중국 측의 주장을 마냥 수긍할 수만은 없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또 우리 국내의 언론과 학계가 접촉할 수 있는 방법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또 무엇보다 앞서 보셨던 것처럼 요하문화와 중원의 문화는 이질적인 면들이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 그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요?

 

 

 

요하문명의 서광은 홍산문화보다 수천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천년에 탄생한 사해유적이 바로 요하문명의 시작이다. 중화제인촌이라고 불리는 사해 유적은 중국 영토 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적을 빛나게 하는 요소는 바로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이 형상물이다.

 

리징옌 / 사해박물관

"이것은 용(龍) 모양의 돌무더기입니다. 크고 작은 돌들을 용의 형태로 늘어놓은 것입니다. 용의 전체 길이는 19.7m입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연도가 가장 이르고 형태가 가장 큰 용입니다. 현재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기존의 발견된 용 형상보다 무려 2천년이 앞서는 것이다. 중국 용 신앙의 원형마저 이곳 요하 지역에서 나타나자 중국 학계엔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었다. 마을은 57개의 주거지가 용(龍)형상 주변을 감싸는 형태로 배치돼 있었다. 돌로 만든 각종 농기구가 출토 돼 이미 농경생활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주목할 점은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형구 교수 / 선문대 역사학과

“중국인으로서는 그러니까 중국의 가장 이른 취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취락에서 나온 토기들을 보면 빗살무늬, 우리가 쓰고 있는 빗살무늬가 나오고 있단 말이죠.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빗살무늬와 이 빗살무늬가 너무 유사합니다. 하는 방법(제작방법)이라든가 태토라든가 그런 것을 보면 야, 과연 우리 빗살무늬토기 쓰는 사람들과 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뭔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까?”

 

 

 

빗살무늬토기는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북방루트를 통해 발견되는 유물이다. 한반도와 요하 유역에선 대부분 발견되지만 황하유역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는 기원전 6천년 당시부터 만주지역은 중원과 관계없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음 알려준다. 사해에서 100km 떨어진 내몽구 자치구의 흥륭와 유적(興隆窪, BC 6000)은 중국 최초의 마을 자리를 놓고 사해 유적과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8000년 전 부락입니다.”

“(중국) 최초의 부락이군요.”

“예, 최초입니다.”

 

 

 

 

마치 계획도시처럼 조성된 이곳은 주거지가 일렬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돼 있었다. 사람과 돼지가 함께 묻힌 순장의 흔적도 발견됐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옥이였다. 인류가 사용한 그리고 가공한 최초의 옥이다. 저명한 옥기 전문가 북경대 조조홍 교수는 수년 동안의 조사 끝에 흥륭와 옥이 압록강 부근 수암산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색깔과 경도 모두가 정확히 일치했다.

 

조조홍 교수 / 북경대 고고학

“함께 비교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옥 재료가 북방의 것이라는 겁니다. 모든 옥이 수암 옥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수암 옥이 분명합니다.”

 

 

 

수암은 흥륭와에서 450km 거리다. 더 놀라운 것은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에서 거의 똑같은 옥 귀걸이가 나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이 지역들이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최광식 /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중국에서는 보통 중국문명의 시대가 황하문명으로 보다가 요하에서 황하문명보다 더 빠른 시기의 문명이 나오니까 중국문명으로 자꾸 관련시키려고 하죠. 그런데 사실 여기서 나온 문명을 보면 우리 문명의 시원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암각화라고 할 수 있죠.”

 

국립중앙박물관에 최광식 전 관장은 두 차례에 걸친 요하문명지역 답사를 통해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한국형 암각화를 요하 일대에서 다수 찾아냈다.

 

 

 

각노영자(閣老營子)의 암각화는 함안 도항리의 동심원 문양과 일치하고 상기방영자(上機房營子) 암각화는 포항 칠포리에 검파형과 비슷하며 지가영자(遲家營子)의 연속된 마름모는 천전리 암각화를 그대로 빼닮았다. 한반도를 제외하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한국형 암각화가 대륙 깊숙한 곳에서 고개를 내민 것이다.

 

최광식

“중국에는 이런 암각화가 없습니다. 검파형이라든지 방패형이라는게 이게 한반도에는 나타난단 말이죠. 그러니까 결국 상고시기의 어떤 정신세계의 신앙, 제의 같은 것들이 분명히 이쪽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기원전 6천년 문명의 서곡을 울렸던 요하 문명은 처음부터 중원과는 이질적인 문명이었던 반면 만주와 한반도는 같은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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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요하문명이란 요하가 둘러싸고 있는 지역에서 발생한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를 거치는 고대문명을 말합니다. 이 기간은 수천 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요. 기원전 6천년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소하서를 시작으로 사해와 흥륭와에서 요하문명의 새벽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4500년 무렵에는 요하문명의 꽃이라 불리는 홍산문화가 시작되고 기원전 3천년 이후에는 하가점 문하로 계승되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이 이어지게 되는데요. 이것이 바로 요하문명입니다.

 

우린 이번 탐사를 통해서 기원전 6천년 당시부터 만주지역은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반도와는 대단히 연관성이 깊은 유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해나 흥륭와는 서곡에 불과합니다. 수천 년간 가려져 있었던 역사의 베일이 벗겨질 때마다 역사적 상식들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해와 흥륭와로 시작된 요하문명은 홍산문화기에 와서 화려한 꽃을 피운다. 우하량 적석총에서 발견된 유골. 머리 옆에 낯선 물건이 놓여 있었다. 바로 옥이었다. 옥은 형태와 용도에 따라 유골에 배치됐으며 사해, 흥륭와 시기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다양해졌다. 한 무덤에선 무려 20점의 옥기가 나오기도 했다.

 

조조홍

“고분 안에 부장된 것들은 주로 옥이었다. 일반적으로 도기는 보이지 않는다. 후에 곽대순 선생은 이런 현상을 ‘유옥위장(唯玉爲葬)’이라 했다. 우리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고대 홍산인들은 옥을 숭배했다. 옥을 매우 중요시 여겼기 때문에 중요한 부장품이 된 것이다.”

 

홍산인들은 왜 옥을 숭배했을까? 조조홍 교수는 부장품으로 사용된 옥의 모양이나 위치로 보아 종교 혹은 권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주장을 한다. 홍산인들에게 옥은 영혼불멸의 상징, 하늘과 소통하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아직 철기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대, 홍산인들은 어떻게 옥기를 만들었을까? 지금은 현대화된 기계로 가공을 하지만 옥을 가공하기 위해선 여전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래서 옥은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는데 한 직원의 목걸이는 우리 돈으로 1억 원을 훌쩍 넘는 고가품이라고 한다.

 

40년 경력의 장인 진량위씨는 홍산옥을 만들기 위해선 지금 기술로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량위 옥 장인/경력40년

“최소한 3가지 제조 절차가 필요합니다. 쪼는 것이 첫 번째이고 가는 것이 두 번째이고 광택을 입히는 것이 세 번째 절차입니다. 이 절차를 밟는데 10여일 정도 걸립니다.”

 

그런다면 5천 년 전에는 얼마나 걸렸을까?

 

“문지를 수 밖에 없겠죠.”

“(홍산문화시대) 가공법으로 만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몇 년은 걸리지 않겠어요? 1, 2년은 걸리겠죠.”

 

 

 

홍산인들이 어떻게 옥을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이지만 분명한 것은 매우 오랜 작업 시간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우실하

“굉장히 중요한 의기라는 것이죠. 일반인들이 뭐, 석기처럼 이렇게 상용할 수 있고 항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의기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의기들이 굉장히 많이 발굴된다는 것은 결국 그 문명 단계에서는 옥기를 만드는 전문 장인집단이 기능적으로 분화돼 있다는 점입니다.”

 

세련된 옥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전문 장인. 또 그중 최고품을 소유하며 신께 제사지내는 권력자의 존재. 홍산문화 시기엔 권력과 신분이 이미 분화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조홍

“위치, 권력, 재산에 차이가 있었던 거죠. 명확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비교적 복잡한 사회’라고 합니다. 곧 문명에 진입할 단계에 있었던 거죠.”

 

 

 

문명 단계에 진입한 홍산문화는 후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현지인들도 잘 가지 않는 곳, 적봉시 성자산에 홍산인들의 후예가 남기 흔적이 있다. 수천년에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성곽. 기원전 2천년 경으로 세워진 이 성은 홍산문화를 계승한 하가점 하층문화의 일부로 확인된 건물 터만 232개에 이른다.

 

“구조로 봤을 때 성자산성은 외성과 내성을 겸한 성입니다. 외성은 적을 방어하는 성이고 내성은 아마 신성시 하는 무슨 신전이나 제사하는 곳으로 보입니다.”

 

기원전 2천년 경이 되면 유하문명 지역엔 수많은 성들이 건축되기 시작한다.

 

복기대 교수 / 국제 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국학과

“요서지역에서는 이미 70개 넘는 성들이 발견되었습니다. 70개 넘는 성들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들이 살았을 때는 분명히 제도 즉 시스템이 갖춰졌을 것입니다. 그 시스템이 갖춰진 사회를 국가라고 부르는데 그 국가가 과연 어느 나라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죠(∴ 70개 이상의 성을 관리하던 국가 체제). 그런데 중국이나 한국이나 사서를 검토를 해봤을 때 그 지역은 고조선밖에 없습니다(∴ 한·중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요서지역의 유일한 국가는 고조선).”

 

 

 

기원전 2천년 경 요서 지역을 터전으로 국가란 체계를 갖출 수 있는 세력은 고조선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엔 우리 민족의 첫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나오는데 그 건국 연대를 기원전 2333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환웅이 웅녀를 만나 단군을 낳고 그 단군이 나라를 개국했다고 돼 있다. 이 신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해보면 고조선 개국 세력이 곰 토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하량의 여신녀에서는 흙으로 만든 동물상도 함께 발견됐는데 새를 형상화 한 소조상과 함께 곰발이 출토됐다. 남쪽 방에선 곰 턱뼈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형구 교수

“이와 같은 사실은 홍산인들이 여신뿐만 아니라 곰에게도 제사 지냈던 사실을 나타내는 겁니다. 바로 이것은 홍산인들이 곰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이 묘에 안치된 인골은 다리를 교차하고 있어 하늘과 교류하는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가슴에 놓여 있는 옥은 곰을 형상화 한 것이다. 홍산문화의 옥기 가운데 가장 많이 발견되는 웅룡(熊龍). 곰을 숭배하던 홍산인들이 그들의 터전에서 세운 나라는 고조선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현재의 요하 지역 일대엔 개발이 지연되고 있어 비만 오면 침수되기 일쑤다. 교통의 중심지 조양(朝陽). 중국역사상 한족과 북방 민족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조양 일대에서는 비파형 동검이 대거 출토돼 고조선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십이대영자 유적에서 다양한 청동장식 유적들과 함께 고조선의 대표 유물 비파형 동검이 발굴됐다. 비파형 동검은 시기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비파형으로 이뤄진 검몸체와 손잡이 검자루맞추개 등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는 특징은 일정하게 유지된다. 검 손잡이 부분을 조립식으로 구성한 것이다. 기원전 10세기 무렵 동아시아에서의 종족과 문화를 구별 짓는 기준이 바로 청동검이었던 것이다.

 

복기대 교수

“고조선 지역에서는 비파형 동검이라고 하는 검이 발전을 하게 되고 고조선의 이웃지역에는 주나라 같은 경우에는 직인검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 비파형 동검은 계속해서 한반도까지 그 고조선 전체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시종일간 끝까지 나타나는 그런 형태고 주나라 지역에서 나오는 직인검 있죠. 직인검은 꼭 시종일관 꼭 그 지역에서 계속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면 고조선 지역에 나타난 비파형 동검은 지역적인 즉 고조선 특색을 끝까지 보유한 가장 특색 있는 청동기가 될 것이라 봅니다.”

 

 

 

요나라에서 수도였던 영성(榮成). 이곳에 위치한 초원 청동기 박물관은 이 일대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을 전문적으로 수집, 전시하고 있다. 지금은 다른 유물로 대체돼 있지만 한 때 북한과 중국의 공동조사에서 출토된 청동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1963년부터 3년 동안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아서’란 주제로 이 일대에서 합동 발굴 조사를 벌인 것이다.

 

이형구 교수

"북한과 중국은 1963년부터 3년 동안이나 중국 동북 지방의 고조선 유적을 합동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 고조선 영역에 대해서 일체 함구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 정부가 고조선의 영역을 요서지역까지 만리장성까지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합의 하에 3년에 걸쳐 이뤄진 조사 지역은 요하문명의 터전을 그대로 포함하고 있어 당시 중국도 이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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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선사 문명은 시베리아에서 전래된 것으로 그간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요하지역의 문명들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보다 훨씬 더 빠르고 발전된 문명이 요하 서쪽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어렵게 됐습니다. 물론 우리 민족의 기원을 요하 한 지역에만 둘 수는 없겠죠. 하지만 최소한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이 오늘날 우리 민족을 구성하는 한 원류가 됐다는 것은 매우 일리 있는 지적으로 들립니다.

 

 

 

성자산에서 100km 떨어진 곳엔 고대인들의 또 다른 신비로운 공간이 있다. 2007년 발굴이 완료된 삼좌점 산성(적봉시). 성벽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내부엔 돌을 둥글게 쌓아 올린 건물 터가 수십 군데 있다.

 

쉬즈펑 교수 / 적봉대 고고학

"둥근 제단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것이고 사각 제단은 땅에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땅 위로 지어진 것도 있고 땅 아래로 지어진 것도 있습니다. 하늘에 빌고 땅에 빌고 태양신, 달의 신에게 빌었습니다."

 

 

 

내부가 원형과 사각형 제단으로 가득 채워진 이 성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치다. 5미터 거리로 배열된 치는 어림잡아 13개나 된다.

 

 

 

치는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집안시의 고구려 성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앞으로 돌출한 치는 고구려의 군사 작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국내성의 단면도는 치의 형태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최광식

“그 삼좌점 유적에 보면 치 같은 것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청동기 시대, 하가점 하층문화단계거든요. 그러니까 이미 그 시기에 고구려 치와 같은 그런 시설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결국 치라는 것은 고구려 성의 특징인데 이미 이 시기부터 나타났다는 것은 고구려 성과도 이 지역 삼좌점에 이런 성 축조시설, 구조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고구려와 같은 축성 방식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우리 민족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중국 길림대의 주홍 교수는 하가점 하층 문화에서 나온 134기 인골의 체질 인류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연구결과 크게 두 개 종족으로 나눠졌는데 요하문명 일대에 고(高) 동북형이 3분의 2이상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기대 교수

“중국 사람보다는 한국 사람이 더 훨씬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 유적지들을 조사해 봤을 때 60%이상의 고대 주민들이 한국 사람들과 친연성이 있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본다고 하면 요서 지역의 고대 문화는 한국 선조들이 한국 계통들이 건설한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가점 하층 문화 시기 거대한 성을 세우고 대륙을 호령하던 국가는 고조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광활한 대륙을 누비던 고조선의 영역은 어디까지 이르렀을까? 만리장성 바로 앞에 있는 건창현의 동대장자 마을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왠지 낯익은 돌담이 눈길을 끄는 곳, 이곳에서 특이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됐다.

 

“제일 좋은 칼은 손잡이 앞뒤가 황금으로 되어 있었어요. 다른 무덤의 칼은 비교적 짧았어요.”

“주로 청동검이었나요?”

“다 청동검이었어요. 청동검은 굉장히 날카로웠어요.”

 

 

 

 

30여개의 묘가 한꺼번에 발견된 이곳에선 연나라의 청동기가 대거 출토됐다. 흥미로운 건 무덤이 적석총이라는 것과 황금으로 장식된 비파형 청동검이 출토됐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적석총과 청동검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형구 교수는 이 무덤을 고조선의 영역을 침입한 연나라 장수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형구 교수

“연나라 장수가 고조선 땅을 쳐들어 와서 이곳에 정착하면서 고조선 문화를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중국 사서들에서 보이는 기록들하고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고조선의 강역이 이곳 연산까지 이르렀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춘추시대 연나라 장수 진개가 5만 병력으로 조선 땅 2000리를 진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형구 교수는 동대장자 유적의 수수께끼가 이 기록을 참고한다면 진개 공격 이전에 이 땅이 고조선의 영역이었음을 반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강역은 이곳 만리장성 바로 앞 연산산맥까지 이르게 된다. 만리장성 앞에 있는 연산. 그것은 고조선과 중국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이번 탐사의 마지막 일정은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거대 적석총. 아직 지표 조사만 이뤄져 흙에 덮여 있지만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적석총이다.

 

“이런 돌과 자갈과 흙을 같이 다진 것이죠. 석축 안에 내부에 그렇게 다져 올라가고 저쪽에선 2층 구조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런 적석총은 외벽은 석축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쌓아 올린 것인데 마치 유럽에서 보는 큰 피라미드와 같은 것입니다.”

 

 

 

가로 세로 6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적석총. 요하 문명 일대에서 발견되는 가장 큰 적석총이면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천년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 적석총은 장군총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집안시 일대는 이런 형태의 적석총이 수천기가 분포돼 있다. 적석총은 한반도와 요서 일대에 집중 분포하는 지역적 특색이 매우 강한 유적이다.

 

우실하 교수

“결국 그것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문화인데 그 문화는 한반도로 해서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의 시원 문명임과 동시에 주요한 세력들은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 가장 중심적인 문화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이형구 교수

“중국은 요하 일대의 고대 문명을 요하 문명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시원지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히 우리 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고 그 지역 범위도 요하를 훨씬 벗어나서 요동반도와 한반도까지 이르는 이른바 발해연안벨트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을 요하문명이라고 한정해서 부르는 것보다는 발해연안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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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는 이제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역사마저 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장장 4천 킬로미터에 달했던 만주 대탐사. 우린 그곳에서 수천 년 전 우리 민족의 원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감춰졌던 역사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우리 민족의 고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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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책을 벗 삼아
글쓴이 : 문화재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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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1주기 강우일 주교 강론

 

오늘 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았다.
 
세월호는 출항해서는 안 될 배였다.
1년 전 그날 인천항은 악천후였고, 가시거리는 800미터밖에 안 되었다.
그 때 출항한 배는 세월호 단 한 척뿐이었다.
그리고 출항 당시 세월호는 규정된 물량의 약 2배를 과적했고, 엄청난 화물들을 고정하지도 않고 적재했다.
그리고 화물을 더 싣기 위해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배 밑바닥의 평형수를 절반 이상 빼버렸다. 출항 전에 인천항 운항관리자는 배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않고 안전점검 보고서에 ‘양호’라고 기재하고 출항허가를 내주었다.
심각한 기상악화가 풀리지 않아 단원고 아이들은 세월호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아이들을 다시 태우고 돌아올 버스가 인천항으로 출발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세월호는 왜 무리한 출항을 했을까? 누가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 아무것도 밝혀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왜 갑자기 세월호가 침몰했는지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검찰은 침몰 원인으로 급변침을 지목하며 ‘조타미숙으로 선체가 크게 기울었으며, 과적 및 고정 불량과 평형수 부족으로 복원력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급변침은 사고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라고 한다.
세월호가 왜 급하게 방향을 틀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7천 톤이나 되는 세월호가 100여분 만에 완전 침몰했고 선체가 1초에 14도나 기울어졌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침몰과 변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세월호에서 자기 발로 나온 사람 말고는 해경이 들어가서 구조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호는 사고 후 1시간 동안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라고 하는 안내방송 외에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침몰 당시 아이들은 유리창을 두드리며 구조 요청을 했지만, 해경은 선실 유리창을 깰 생각도 안 했고, 탈출 안내도 하지 않다가 10시17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한 후 47분 만에 현장에 있던 해경 헬기와 선박, 잠수부는 돌연 일시에 철수했다.
후에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잠수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경이 “언딘”의 작업을 위해 철수를 요구했다.’ 고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해역 근처에 있었던 4만톤 급의 미 함정의 지원도 거부했다.
해군참모총장이 두 번이나 통영함 출동을 명했는데도 해경이 해군함정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리고 일본 해상보안청의 구조협력 제안도 거절했다.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사고의 원인과 경과를 분석해 줄 전문가들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떤 언론사에 따르면 세월호 문제를 제기해 온 전문가들이 4월21일부터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 시작했다고 한다.
익명의 대학교수는 인터뷰에서 ‘압력이 들어온다. 주로 정보 부처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4월22일 방송통신위원회는 ‘세월호 관련 재난상황반 운영계획’이라는 문건을 통해 방송사 조정 통제 및 대응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세월호는 국내 여객선 중 유일하게 해양 사고 발생 시 국정원에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국정원은 4월16일 오전 9시10분, 청해진해운 사장 등으로부터 사고 문자 메시지를 받았고, 9시28분에 해경상황실에 전화해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세월호 내부에서 발견된 자료에 의하면 국정원은 세월호에 99가지의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왜 민간 여객선이 배의 시설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그리고 선원들의 수당이나 휴가까지 국정원 지시를 받아야 했는지 아무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한국 주교단이 함께 로마를 방문하고 프란치스코 교종을 뵈었다.
5년마다 한 번 하도록 되어 있는 정기 행사다.
그 때 교종께서 우리에게 제일 처음 던지신 질문이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였다.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정부가 세월호 진상을 조사하겠다고 조사위원회 조직은 구성했는데 실제로 조사는 전혀 한 발자국도 진척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교종께서는 아직 세월호 가족들의 비통함이 잊을 수가 없고 가슴 속에 가라앉아 있다고 하셨다.
 
세월호 참사 한 달 후인 5월16일 대통령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분명히 ‘특별법은 만들어야 하고, 검경수사 외에 특검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낱낱이 조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위원회는 한 발자국도 못 내딛고 있고,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의 독립적 진실규명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발표했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고를 유발한 원인 제공 기관들인 한국해운조합, 지방항만청, 한국선급, 선박안전기술공단과 직접 연결된 상부 기관이다.
간단히 말하면 직접 사건의 피고가 되거나 피고와 아주 가까운 부서다.
피고 신분의 공무원이 세월호 진상 규명의 실무 전체를 책임 조정하는 역할을 맡도록 하는 시행령은 진실 규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피고의 한 가족에게 판결을 내리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 정부는 희생자 가족에게 보상비는 몇 억 원씩 줄 것이라고 흘리며 돈다발을 자꾸 펄럭이며 마치 유가족들이 돈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처럼 국민 여론을 오도한다.
이것은 유가족들에 대한 인격모독이다.
대통령이 눈물 흘리며 한 약속을 이런 식으로 변형하고 왜곡하면 국민은 국가를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한다.
어떤 이들은 광화문 광장에 기한도 없이 농성하고 노숙하고 있는 가족들, 시민단체 사람들의 존재가 불편하고 피곤하고 혐오스럽게 느낀다.
언제까지 세월호 문제에 붙잡혀 있을 것인가, 나라 경제도 불황이고 민생 문제도 산적한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강도 만나서 얻어맞아 초죽음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웃을 보고도 내 갈 길이 바쁘다며 길 건너편으로 돌아서 지나가버리는 레위인이나 사제와 다를 바 없다.
이웃 형제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는 오늘의 메마른 우리 영혼이 서글프다.
형제의 신음 소리가 전혀 우리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콩크리트 벽 같은 불통의 우리 마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304명이나 되는 이웃 형제와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사건의 충격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 오늘의 개인주의적 문화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국가기관이 외면하고 밝히려 하지 않는 의혹 가득한 사건을 그냥 잊고 덮어버리자고 하는 것은 우리 몸에 돋아난 종기의 뿌리를 도려내지 않고 겉에 붕대만 감고 말자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종기는 속에서 더 곪아서 뼈 속까지 썩어 들어가고 나중에는 세월호보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의 비극을 잊으려하기보다는 도리어 거듭 상기해야 한다.
희생자들의 고통과 참담한 최후를 기억해야 다시는 그런 참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강한 의지와 회심을 열매 맺을 수 있다.
세월호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자꾸 상기하여 질문하고 밝히려고 해야 진실한 원인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사악한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고 거기 머물고 있는 가족들과 연대하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나누고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걸린 몹쓸 개인주의의 염병에서 치유될 수 있다.
상처는 회피하고 어설프게 봉합해서는 속에서 갈수록 더 곪아간다.
 
우리는 오늘 성체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해내야 하겠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가족들의 상처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리고 동시에 이런 참혹한 비극을 직접 초래한 사람들이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유가족들과 국민에게 용서를 청할 용기를 내도록 기도하자.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 치셨다.
우리는 오늘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불의와 의혹과 고통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살아있는 증언을 하도록 초대 받고 있다.

 

 

차 례

. 개요

1. 조사목적 1

2. 사건개요 및 의혹사항 1

가. 인혁당사건 1

나. 민청학련사건 2

다. 인혁당재건위사건 2

. 조사내용 3

1. 자료 조사 및 분석 3

가. 국정원 보유자료 3

나. 타기관 보유자료 4

다. 일반자료 4

2. 관련인물 면담조사 내용 5

가. 사건 당시 중정직원 5

나. 사건 관련자 5

다. 사건 당시 관련 국가기관 직원 5

라. 기타 5

. 조사결과 7

1. 인혁당사건(64년) 7

가. 시대적 배경 7

나. 사건개요 8

다. 주요 관련자 활동내용 12

라. 의혹사항 13

마. 조사결과 14

1) 수사착수 경위 14

2) 소위 ‘인혁당’의 실재 여부 14

가) 당명 및 강령․규약 논의 14

나) 판단 21

3) ‘북한의 지령’에 의한 조직결성 및 활동 여부 23

가) ‘남파간첩 김영춘’ 부분에 대해 23

나) ‘김상한 월북’ 부분에 대해 26

다) ‘김배영 월북’ 부분에 대해 30

라) ‘북괴의 인혁당을 통한 일회담반대 학생데모 지령’ 여부 33

마) 판단 35

4)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여부 37

가) 물․전기 고문, 구타, 위협 등 강압수사 여부 37

나) 판단 43

마. 소결 45


2. 민청학련사건 46

가. 시대적 배경 46

나. 사건개요 49

다. 쟁점사항 53

1) 민청학련의 실재 여부 53

2) 조직의 성격 54

3) 조직체계와 활동 55

4) 「인혁당재건위」와의 관계 55

5) 조총련과의 연계성 56

6)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의 인권침해 56

라. 조사결과 56

1) 민청학련의 실재 여부 56

2) 조직의 성격 61

3) 「인혁당재건위」와의 관계 75

4) 일본인 및 조총련과의 연계성 82

5)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의 인권침해 89

마. 소결 96


3. 인혁당재건위사건 98

가. 시대적 배경 98

나. 사건개요 101

다. 의혹사항 104

1) 조직결성 104

2) 수사과정 105

3) 사형집행 107

라. 조사결과 108

1) 활동내용 및 조직결성 여부 108

가) 중정의 수사착수 경위 108

나) 「인혁당 재건위」 명칭 정립과정 110

다) 활동 내용 및 성격 114

라) 조직결성 여부 123

마) 조직 수준 129

2) 수사과정 133

가) 수사체계 133

나) 검찰관 조사의 임의성 문제 136

다)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138

3) 사형집행 154

가) 전격적 사형집행 경위 154

나) 최후진술(유언) 조작 158

다) 시신탈취 및 강제 이송 162

마. 소결 163


4. 유신체제와 군사법정 165

가. 군사법정의 구성 165

나. 유신헌법 하 군사법정의 문제점 168

다. 민청학련․인혁당재건위 사건과 군사법정 169

1) 쟁점 및 의혹사항 169

2) 조사결과 170

가) 피고인 방어권 침해 170

나) 공판조서 변조 174

라. 소결 182

. 결론 및 의견 182

1. 결론 182

2. 의견 185



. 개요

1. 조사목적

o 「국정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인민혁명당’ 및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하여 왔는데

- 이 사건들은 박정희정권이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서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와 반공이데올로기를 활용, 정치적 반대세력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고 인권을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들로 거론되어 온 사건임

o 이번 조사를 통해 은폐되고 왜곡되어 온 사실을 바로 잡음은 물론, 나아가 밝혀진 진실에 합당한 사후 시정조치를 강구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으므로

- 「진실위」는 지난날 야기된 권력남용과 부당한 행위들에 대한 지속적인 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 잘못된 과거를 청산함으로써

- 국정원이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함께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여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모범적인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함


2. 사건개요 및 의혹사항

가. 인혁당사건(1964년)

o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던 중

- 1964.8.14 중정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하였고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는 ‘북괴의 지령’으로 인혁당 관련자들이 ‘배후조종’했다고 발표한 사건으로

o 발표 직후, 당시 국회 차원에서도 ‘박정희 정권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고문수사로 사건을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음

나. 민청학련사건

o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국가변란 기도사건’은

- 1974.4.3을 기하여 유신체제에 반대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유신헌법 철폐․중앙정보부 폐지, 구속인사 석방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시도한 사건으로

- 1974.4.25 중앙정보부는 同 사건에 대해 ‘민청학련’이 조총련․인혁당과 결탁, 국가변란을 기도하였다고 발표, 1,034명 검거 중 민청학련 관련자 57명 구속, 인혁당재건위 관련자 24명 구속, 재야인사 7명 구속하는 등

o 반유신 학생데모를 ‘국가변란을 기도한 반국가단체’ 사건으로 확대․과장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어 온 사건임

다. 인혁당재건위사건

o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사건’은

- 1974.4.25 중정이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하면서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발표한 후

- 195.27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서도원, 도예종 등이 1969년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하고

- 1975.4.8 관련자 7명은 사형, 8명은 무기징역, 6명은 징역 20년형이 확정된 후, 민청학련 관련자 여정남을 포함한 8명이 형 확정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사건임


Ⅱ. 조사내용

1. 자료조사 및 분석

가. 국정원 보유자료 : 459건 67,223쪽

o 인혁당사건, 민청학련사건,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사항이 포함된 각종 보고서, 수사 및 공판 기록 일부, 기타 참고자료 등 459건 67,223쪽을 면밀분

o 인혁당사건과 관련 「김상한 월북사건 진상조사 보고」등 관련 문서가 발견돼 1964년 8월 14일 발표문에서 등장하는 ‘남파간첩 김영춘’에 대한 의혹 해소에 참고할 수 있었고

o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해서는 「수사초점」,「수사지침」 등의 문서가 발견돼 ‘조총련과 일본공산당의 민청학련 배후조종’이라는 의혹해소에 도움이 되었으며

o 인혁당재건위사건과 관련해서도 「인혁당사건 공판조서 변조 내사결과보고」라는 문서가 발견돼 ‘공판조서 변조’ 의혹해소에 참고가 되었음

o 그러나 사건과 관련하여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문서 중 극히 일부 자료들만 존안돼 있어 이들 사건과 관련한 정권 및 중앙정보부 수뇌부의 의도 및 개입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음

나. 타기관 보유자료 : 문서 164건 45,968쪽, 녹화테이프 25개

o 국가기록원 자료으로

-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 ‘장석구사건기록’ 등 80건 22,165쪽, 참고인 조사 녹화테이프 25개

- 기타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료 24건 2,214쪽

- 특히 관련자들의 조사 녹화테이프들은 관련자 진술의 일관성을 판단하는데 참고가 되었음

o 서울지검 기록으로 ‘인혁당사건기록’, ‘김배영사건기록’ 등 51건 20,064쪽

o 국방부 기록으로 ‘불온유인물 사본’ 등 6건 1,481쪽

o 국회 기록으로 국정감사회의록 등 50쪽

- 1964년 인혁당사건 관련자에 대한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의혹에 대해 당시 국회국정감사반의 활동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 고문의혹을 판단하는데 참고할 수 있었음

o 기타 법무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의견서 7쪽 검토

다. 일반자료 : 82건(권) 6,490쪽

o 「사법살인」등 관련책자 14권 4800쪽, 월․주간지 25건 800쪽, 신문 및 방송자료 43건 120여쪽, 관련 논문 10건 500쪽 등 기타자료 600쪽 등 공개되어 있는 일반자료에 나타난 각종 의혹 및 주장을 검토하여

o 그동안 사회적으로 제기된 사건관련 의혹사항과 그 근거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들로서 국가기관의 자료들에 비추어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음

2. 관련인물 면담조사 내용

가. 사건 당시 중정직원

o 이용택, 윤종원 등 8명

나. 사건 관련자

o 전창일, 유인태 등 18명

다. 사건 당시 관련 국가기관 직원

o 전재팔, 조규철, 문상익 등 19명

라. 기타

o 김정강 등 3명

면담조사 상황

구분

성명

면담일시

관련성

비고

사건 관련자

이철

05.10.29

재건위사건 관련자

유인태

05.10.13

재건위사건 관련자

이영교

05.5.16

하재완의 처

외15명

중정 직원

윤종원

05.10.6

재건사건 담당팀장(74년)

이용택

05.9.22

수사과장(64년), 6국장(74년)

외 6명

경찰

손중덕

05.9.28

재건위사건 수사

박재명

05.9.29

신홍수

05.9.29

이덕삼

05.9.29

임찬욱

05.9.28

나갑열

05.10.14

전재팔

05.11.2

교도관

이강준

05.10.5

서울구치소 명적과

외 7명

검찰

장원찬

05.9.22

인혁당사건 최초 담당검사

전화면담

정태균

05.10.7

고문사건 수사검사(64년)

군법회의

조규철

05.10.6

공판조서 작성 서기

국회

문상익

05.9.28

국회법사위 전문위원(64년)

기타

김정강

05.9.7

‘불꽃회사건’ 관련자

외 2명







. 조사결과

1. 인민혁명당사건(64년)

가. 시대적 배경

o 1961년 5ㆍ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원대복귀를 약속한 이른바 혁명공약과는 달리 1963.10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됨

o 일본의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려던 박정희 정권에게 한일회담은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으나

- 대학생들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를 정권 차원의 이해 때문에 졸속으로 처리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을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비판하면서 정권퇴진을 요구했음

o 1964.5.20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당시 박정희가 표방하던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르며 시위를 벌였는데

- 정부는 이를 체제전복 기도로 간주하고 학생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담당판사가 영장청구를 기각하자

-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지는 등 정국의 긴장감은 높아져 갔음

o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돼가면서 국민적 공감을 얻었고 서울 중심에서 경찰이 진압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서 위기에 몰리자

- 학생시위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1960.4을 경험한 박정희 정권은 1964.6.3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시 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음

o 한편 인혁당 사건이 발발한 1964년 여름은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제정하려던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둘러싸고 정부와 언론 사이에 첨예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던 상황이었음

o 정권이 위기에 몰릴 정도로 대학생들의 데모가 거세지면 정권은 학생데모의 확산을 차단하고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기 위해 공산당 내지는 불순세력의 배후조종이란 카드를 빼들곤 했는데

- 1964.7.6 치안당국은 “선량한 학생을 충동시켜 국가전복을 책동했”다는 혐의로 서울대생 김정강과 前 민족자주통일협의회조사위원장 도예종을 수배했고

- 1964.7.18 양찬우 내무장관은 학생데모의 배후는 김정강 등이 조직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집결체 불꽃회이며 불꽃회는 “공산주의 사회실현에 일조가 됨을 종국의 목표”로 하는 단체라고 밝혔음

o 1964년의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은 이와 같이 6ㆍ3사태라는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 속에서 학생데모의 배후를 밝히는 과정에서 발발한 공안사건임

나. 사건개요

o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사건은

-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학생은 물론 전국민적으로 확대되면서 군사정권에 대한 근본적인 반대로서 정권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자 박정희정권은 1964.6.3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위기에 직면하고 있던 중

- 1964.8.14 중앙정보부(이하 중정)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하여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수배 중에 있다고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음

o 이 발표에 따르면1)

- 인혁당은 1962.1 우동읍의 집에서 남파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우동읍(본명 우홍선), 김배영, 도예종 등이 창당발기인 모임을 갖고

-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및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북괴로동당’ 강령․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신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한 후

- 1962.5 중순 북괴간첩 김영춘은 인혁당의 조직확대 공작 및 투쟁목표 등 제임무를 도예종, 우동읍에게 일임하고 월북하여 ‘북괴 중앙당’에 인혁당 창당결과를 보고했고

- 우동읍은 1962.10 교양위원인 김배영을 당 자금 수령차 일본을 경유 월북시켰으며

- 도예종은 전국조직을 담당 1963.12 중앙상임위원회 중앙당대회 중앙당위원회를 개최하는 등 조직을 완료하고 전국의 일반 당부와 특수부 조직에 착수하여 박현채 등 50여명을 포섭하고 전국의 군․면당과 직장 내에 세포조직을 부식하여 오던 중

- 1964.2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당중앙상무위원인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반대시위를 4․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하고, 전국학생조직을 정비․강화하고 데모주도 학생을 포섭하였으며

- 중앙당 데모지도부는 데모의 방향과 구호를 통일하도록 전국학생 조직에 지령함과 동시에 현정권이 타도될 때까지 학생데모를 조종함으로써 북괴가 주장하는 노선에 따라 남북평화통일을 성취할 것을 목표로 투쟁하였으나

- 6․3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그들의 죄상과 당 조직이 폭로될까 우려한 나머지 학생데모 주동자와 일체의 연락을 끊고 지하로 잠복하여 기회를 노리던 중 검거되었다는 것임

o 이렇게 발표된 인혁당사건은 1964.8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된 후

-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를 비롯한 김병리, 장원찬, 최대현 검사는 20여 일 간의 수사 끝에 1964.9.5(구속기간 만료일) 증거 불충분으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자

- 신직수 검찰총장은 당직검사(정명래)를 통해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반국가단체) 혐의로 기소했고, 이용훈, 김병리, 장원찬 검사는 ‘인혁당’ 사건 기소에 반발하며 사표를 제출했고2)

o 국회는 1964.9.9 민복기 법무부장관을 불러3)

- 박한상 의원이 “인혁당 사건은 6․3 계엄사태를 합리화하기 위한 조작이 아니냐”는 등 기소경위를 추궁하자

- 법무장관은 사건이 중대하고 여러 가지 의심할만한 점이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받아보라고 해서 기소한 것이라고 해

o 인혁당사건에 대한 의혹이 정치사회적으로 제기되던 9.12 한국인권옹호협회 회장 박한상 변호사는 인혁당사건에 관련돼 구속기소 된 26명 대부분이 중정에서 발가벗긴 채 물․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해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는데4)

- 9.15 신직수 검찰총장은 고문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진상을 조사해 고문사실이 드러나면 관련자 전원을 엄벌할 방침이라고 밝혔고5)

- 서울지검 형사 4부 정태균 부장검사가 16일부터 서울교도소를 방문하여 26명의 피고인들을 면접하고 구체적인 방법, 고문자들의 인상 등에 대해 수사를 진행했다고 보도됐으며6)

-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반은 9.15 서울교도소로 출장, 박한상 변호사가 만난 피의자들을 제외한 14명의 진술을 듣고 이들도 대체로 같은 방법의 고문을 받았다고 밝혔음7)

o 한편 검찰은 재수사를 통해

- 26명중 14명에 대해서는 공소를 취하, 석방하고 12명은 당초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구성죄를 적용한 공소장을 변경하여 반공법 제4조1항(반국가단체의 찬양․고무) 위반 혐의로 10.16 재기소했음8)

o 결국 사법부는 인혁당사건에 대해

- 1965.1.20 1심에서 피고 13명 중 도예종은 징역 3년, 양춘우는 징역 2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11명은 무죄 판결했고

- 1965.6.29 항소심 선고공판에서는 1심 판결을 취소하고 도예종에게 징역 3년, 박현채 등 6명에게 징역 1년, 이재문 등 6명에게 징역 1년․집행유예 3년 등 전원 유죄 판결했으며, 1965.9.21 대법원은 항소심 형량을 그대로 확정했음

o 그러나 10년이 지난 1974년 중정에 의해 인혁당재건위사건이 발표된 후

- 1975.2.24 황산덕 법무장관은 ‘정부의 법적 견해를 대변하는 법무부장관의 입장에서 인혁당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견해와 방침을 밝힌다’고 전제하고

- ‘인혁당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북괴간첩 김상한이 1962.1 조직한 지하당으로 김은 그 후 1962.5 사업보고와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월북, 당시 재정책이었던 김배영이 새로운 지령을 받고 공작금을 수령하기 위해 월북했다’고 발표함으로써9)

o 1965.9.21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정의 발표문 내용 그대로 국민들에게 인식된 사건임

성명

학력

활동내용(년도)

도예종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영주 교육감 당선(56)

․4․19 후 민민청 경북연맹 간사장(61)

․민자통 중앙상무집행위원회 조직부책(61)

박현채

서울대

경제학과(석사)

․한국농업연구소 연구위원(63)

․국학대학, 서울 상대, 농협대학 강사

정도영

서울대

사학과 중퇴

․경북 오상중학교 교원, 미군부대 통역(50)

․합동통신사 기자

김영광

․대위로 예편(56), 4․19 후 통민청 중앙간사장

․민족일보사 기자, 원륭건설 사원(62)

김금수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민민청 중앙간사장(61)

․운수업 자영(63)

다. 주요 관련자 활동내용10)

성명

학력

활동내용(년도)

임창순

․경북중 교사, 대구사범 강사,

․성균관대 부교수, 태동고전연구소 주간

김한덕

동국대

법학과 중퇴

․경산 가야 중학교 강사

․사회대중당, 민자통 부산진구 조직위원

김병태

중앙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한국농업문제 연구위원

․중앙대, 한양대, 농업대학 강사

․국제연합식량 농업기구 경제과 위원

김경희

서울대

사학과 졸업

․민중서관 사원

전무배

서울대

사학과 졸업

․민족일보사 기자(61)

․서울신문사 기자(63)

박중기

건국대

정치과 중퇴

․민민청 간사장, 민통련 청년부장

․한국여론사 취재부장(64)

양춘우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신진회 학술간사

․통민청 발기인

라. 의혹사항

o ‘인혁당사건’은 박정희정권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전국민적 저항에 직면했던 시점에 발표됨으로써 당시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왔음

o 지금가지 제기된 의혹사항은

- 첫째, 당명과 강령․규약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인민혁명당’의 조직결성 여부

- 둘째, 소위 ‘인민혁명당’이 남파된 간첩에 의해 조직된 후 창당결과를 북에 보고하기 위해 남파간첩을 월북시키고 당자금을 수령하기 위해 김배영을 일본을 경유 월북시켰는가의 여부

- 셋째, 1964.2 ‘북괴의 지령’으로 인혁당관련자들이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배후조종했는가의 여부

- 넷째, 수사과정에서의 인권침해 행위 여부 등임

o 요컨대 당시 혁신계 인사들의 모임과 활동을 ‘북한의 지령으로 조직된 인민혁명당이 국가변란을 기도’한 것으로 과장․왜곡함으로써, 반공이데올로기를 자극해 ‘굴욕적 한일회담’으로 인한 박정희정권에 대한 전국민적 저항을 잠재우고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려 했던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고 할 것임

마. 조사결과

1) 수사착수 경위

o 6․3 학생데모 관련자를 수사하던 중

- 서울대 학생조직 ‘불꽃회’ 창설자인 김정강의 노트와 수첩에 김정강이 접촉한 인물로 도예종과 김금수가 기록돼 있어 이들을 검거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되었음

2) 소위 ‘인혁당’의 실재 여부

가) 당명 및 강령․규약 논의

o 관련자들은 당시 중정에서

- 당명에 대해

김금수․김영광 등 처음 검거된 피의자들이 인혁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을 진술11)

도예종 등 여타 피의자들은 1962.1 모임부터 당명 논의한 결과 ‘인민혁명당’이 제기되었으며, 이후 1962.8 모임 등을 통해 이에 합의한 것으로 진술했고

* 도예종은 1회 진술서(7.30)에서 ‘당명은 결정된 것이 없고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면 당시의 총의에 의해 정하기로 하고 출발’했다고 진술했고 3회 진술서(8.1)에서는 1962.5 우동읍에게 ‘인민혁명당으로 호칭하기로 한다’고 들었다고 진술

늦게 검거된 양춘우는 1962.8 모임에서 합법화에 대비한 당명 논의 결과 이견이 많았으나 대체로 ‘인민혁명당’이 지배적 견해였다고 진술12)

불기소처분으로 풀려난 남윤호는 ‘인민혁명당’ 가입관련 김영광으로부터 지하조직이라는 설명을 듣고 불안했으나 당시로서는 체면상 물러설 수 없어 가입했다고 진술13)

․‘중앙당 조직위원’으로 발표된 박현채는 1964.8.5 작성한 4회 피의자신문조서에서 ‘당명을 확인한 바 없고 상부에서 지칭한 바 없어 모르고 있다’고 진술했음

- 강령․규약에 대해

김금수, 도예종, 김영광 등은 검거 초기 작성한 진술서에서 강령․규약 내용을 진술했고 뒤늦게 검거된 양춘우도 진술했으며14)

* 양춘우는 「진실위」 면담조사시(05.10.7) 중정에서 진술한 강령․규약에 대해 당시 도예종 등과 논의하였던 내용과 평소 본인이 생각했던 것을 혼합하였으며 취조과정에서 수사관들이 본인이 체포되기 전에 검거된 관련자들이 말한 강령내용이라고 제시한 것을 부분적으로 진술했다고 했음

핵심인사를 제외한 1964년에 참여한 학생 등은 강령․규약에 대해 구두로 전해 들었다고 진술

- 한편, 강령․규약 등을 기록한 문건과 관련

도예종은 중정진술에서 일부 관련자들에게 교육용으로 강령․약 등이 담긴 문건을 회람시켰고, 6.3 계엄령 후 소각토록 지했다고 진술

* 도예종은 학생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지명수배(7.7)되자 도피하면서 어떤 여고생에게 자신의 문건을 소각하도록 지시했고, 여고생도 이를 인정했으나 도예종은 검찰조사시 이를 부인

- 관련자들은 중앙정보부 조사과정에서 당명과 강령․규약 등이 실재하는 것처럼 진술했으나

o 관련자들 대부분은 당시 검찰조사시15)

- 1962.1 여러 명칭 중 하나로 ‘인민혁명당’이 제시된 사실이 있으나 공식적으로 당명을 채택한 바 없고 강령․규약에 대해서는 계속 검토한바 있으나 최종 채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 서클에 가입하고 활동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정당 합법화에 대비한 활동이었다고 진술하고 있음

o 공판조서에 따르면

- 민민청과 통민청의 주요 인물인 김금수, 우홍선, 김영광 등은 1961.9과 동년 12월 사이 여러 차례 만나면서

․민정이양 후 정치활동이 허용될 것에 대비하여 양심적인 청년들이 지식을 넓힐 수 있는 서클 조직의 필요성에 공감했으나

․시기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구체적인 운영방법과 형태 등에서 참여자들이 다른 의견을 보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음

- 그러던 중 1962.1 우홍선 집에서 우홍선, 김영광, 허작, 서상호, 차재윤, 김배영, 김상한이 모여 서클조직에 관해 논의

․명칭, 강령․규약, 역할분담에 대한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결정하지는 못했고 서클을 만든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으며

․‘인민혁명당’은 이 자리에서 제시된 여러 명칭 중에 하나였음

- 1962.8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도예종, 양춘우, 김영광, 김한덕, 김배영, 우동읍, 허작, 차재윤, 조만호가 모여 서클의 조직과 운영방법, 강령․규약에 대하여 논의했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 1963.5 하순경 수유리에서 도예종, 김영광, 정도영, 우홍선 등은 서클운영 방침, 강령․규약에 관해 논의하였으나 결론짓지 못했으며

․이 자리에서 정도영은 ‘혁신정당의 합법화가 빨리 되지 않으면 이 서클도 해체하자’는 의견도 제기했음

o 한편, 당명과 강령․규약의 공식적인 채택 여부에 대해

- 서울형사지방법원(64고13663, 16042, 65고369)은

․정당활동의 허용에 대비해 과거 혁신계열에 속했던 사람들을 서클형식으로 규합하고 장차 합법적으로 결성될 정당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조직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합의하고

1962.8 모임에서 앞으로 정당활동 등이 허용되면 정당의 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하여 논의가 있게 되자 여러 의견 중 대체로 인민혁명당으로 하자는 것에 합의 되었고

․강령은 도예종, 양춘우, 김배영에 초안을 작성시키기로 합의 후 이들이 강령을 기초하였다고 판시

- 당시 서울고등법원(63노69)과 대법원(65고505)은

1963.5경과 1964.6경 사이에 수시로 각처에서 개별적으로 또는 수명씩 밀회하여 상호간에 장차 피고인 등이 이룩할 혁신정당의 기본이념 및 기초적 강령 등을 토론 또는 심의’했고

․‘피고인 양춘우 증인 서상호 등의 검찰에서의 인민혁명당이란 당명이 결정되고 그 창당이 되어 그 강령․규약이 심의․통과되었다는 지의 진술 등은 위에 내세운 각 증거들에 대비하여 믿을 수 없고 달리 위 인정을 뒤집을 만한 자료가 없다’고 판시해

령․규약에 대한 토론 또는 심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것이 심의․통과되고 당명이 결정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음16)

o 당시 기소를 거부했던 장원찬 검사는

- 도예종은 ‘당을 만들려면 경계심을 일으키지 않는 이름을 썼을 것’이며 ‘설사 북한의 돈을 받아서 만들었더라도 혁명과인민이란 표현을 어떻게 사용합니까’라며 강력히 부인했고

-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의 인민혁명당 이야기가 오르내렸을 수는 있었겠지만 인혁당을 만들려고, 혹은 만들었다고는 심증조차 생기지 않았다고 밝혔음17)

o 인혁당사건 관련자

- 조만호(1964년 당시 불기소 처분)는 1974년 ‘인혁당재건위’ 관련자로 구치소에 구금 중 변호사와 접견시 인혁당원으로 임시 가입했으나 금방 나왔다고 진술18)

- 김영광은 「진실위」 전화면담시(05.10.5)

․‘인혁당’ 관련자들은 통민청과 민민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로 당시 순수하게 진보 혁신적인 활동을 목표로 했던 사람이 있었고, 좀 과격하게 黨을 지향했던 사람도 있었던 것 같으며 나중에 어떤 계기로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고 진술

- 양춘우는 「진실위」 면담조사시(05.10.6)

․소위 인혁당은 외형상 조직체계를 갖춘 정당조직이 아니라 정당 이전의 준비단계․추진단계의 형태로 조직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단계였지 갖춰진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고

이러한 혁신정당 준비단계로서의 ‘무브먼트’는 일종의 서클 형태로 참여자 각자의 입장과 역할에 따라 그 조직 형태는 다르게 해석 될 수 있고, 비합법 조직은 일반적인 정형이 없으며

․(조사관의 ‘무브먼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요구에 대해) 당시 ‘인혁당’ 성격은 한마디로 ‘혁신정당을 지향하는 비합법조직’이라고 정의했음

- 김금수는 「진실위」 면담조사시(05.10.12)

․중정에서의 조사과정에서 진술하였던 ‘인혁당’ 강령․규약 등은 평소 자신이 생각했고 혁신계 인물들과 일반적으로 논의했던 것을 이야기한 것이고

․당시 도예종이 주었다는 강령․규약 문건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이에 대해 전혀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진술

- 김경희 또한 「진실위」 면담조사시(05.9.14) 강령․규약에 대해서는 본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음

- 반면 당시 사건수사를 담당했던 중정 직원 이용택․윤종원은 「진실위」 면담조사시(각각 05.9.21, 10.16)

․당시 수사과정에서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인혁당’이란 지하 전위조직의 당명․강령․규약이 노출된 것이었고, 명백한 정황증거가 있다고 판단하여 송치한 것으로 진술

- 당시 공안부 검사 장원찬은 「진실위」 전화면담시(05.9.22)기소를 거부한 것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지 수사에 오류가 있다거나 사건내용이 조작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음

* 장원찬은 정보부 발표대로 그들이 북쪽의 지령을 받고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혐의를 찾을 수 없었고 피의자 모두가 ‘인혁당’이란 단어 자체를 전에 들어본 적이 없으며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며 강력히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물증도 전혀 없었다고 말한바 있다고 보도되었음19)

나) 판단

o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당명 논의 과정을 보면

- 1962.1 우홍선 집에서의 모임과 1962.8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모임에서 언급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활동한 도예종, 우홍선, 김영광의 당시 진술 내용을 살펴보면, 1962.1 모임에서 여러 가지 이름이 제시되었고 ‘인민혁명당’은 제시된 이름 중에 하나였는데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 일관된 진술이고

- 공판조서에 따르면 1962.8 모임 이후 서클에 참여한 임창순, 이재문, 박현채, 정도영, 김병태 등도 당명을 알고 있지 못하고 당명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바 없다는 진술이며

- 1962.8 이후 당명에 대해 논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거나 당명이 공식적으로 합의되어 채택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음

o 강령․규약 논의과정을 보면

- 1962.1 모임에서 강령․규약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논의되지 않았고 1962.8 모임에서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했으며

- 1963.5 도예종, 김영광, 우홍선, 정도영 등이 모여 서클운영 방침과 강령․규약의 초안을 논의했으나 결론짓지 못하고 ‘해체’까지 거론하는 등 당시 활동에 대한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 1964.3 도예종은 강령․규약의 초안을 가지고 양춘우 등과 논의하는 등 오랜 기간 동안 논의를 거듭한 것으로 보이나

- 이후의 논의과정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는 진술이나 다른 자료가 없고, 공판조서에 따르면 관련자들은 강령․규약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채택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

o 또 당시 사법부도 당명과 강령․규약의 토론․심의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합의․채택한 것은 증명되지 않는다고 판시

o 따라서 소위 ‘인혁당’은

- 혁신계의 인물들이 5․16 군사쿠데타로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자 장차 혁신정당활동이 합법화 될 것에 대비해 동지 규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혁신계의 통합을 위해 논의하고 활동한 형태가 드러난 것으로

* 일부에서는 소위 ‘인혁당’은 관련자들이 주장하는 순수한 학술적 연구단체가 아니라 조직 구성 및 강령․규약, 활동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북한의 평화통일방안에 동조․표방하는 지휘체계를 갖춘 단체(서클)성격의 비합법 지하조직으로서의 실체를 갖춘 것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음

- 「진실위」는 이상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세칭 ‘인혁당’이 공식적인 당명과 강령․규약을 채택하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黨 수준의 반국가단체는 아닌 것으로 판단

3) ‘북한의 지령’ 의한 조직결성 및 활동 여부

가) ‘남파간첩 김영춘’ 부분에 대해

【 조사 내용 】

o 발표문에 따르면 ‘김영춘’은 1962.1 ‘창당발기인회’의 사회를 보고 1962.5 ‘인혁당 창당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월북한 인물로

- 1964년 중정이 작성한 「인민혁명당 조직체계」등의 문서에 1962.1 모임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고 1962.5에 월북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 인물은 ‘김상한’이고

- 1964년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변경신청서」에도 ‘위원장 김상한’이라고 제시되었으며

- 1981년 이후 중정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인혁당 사건의 개요」에는 ‘61. 가을 김상한이 남조선내 비밀지하당 구축과 통일전선공작 임무를 띠고 남파된 후, 1962.5 인혁당 조직 및 사업보고 차 입북’했다고 기록돼 있어

- 발표문에 등장하는 ‘김영춘’을 ‘김상한’으로 판단하는데 무리 없음

o 한편 당시 중정이 가명으로 발표한 것에 대해

- 김형욱 당시 중정 부장은 회고록에서 ‘나는 김배영이 머지않아 다시 남하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김배영이 아니라 김영춘이란 가명으로 발표해 두고 예의 귀추를 주목’하고 있었다고 했고20)

- 이용택 당시 수사과장은 「진실위」 면담조사시(05.9.21)

사건 발표 당시 인혁당 핵심 가담자인 김배영이 일본을 거쳐 월북한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명을 그대로 공개해 버리면 향후 북한에서 남파치 않을 가능성이 있어 가명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했고21)

․‘발표당시 인혁당 초대위원장을 김某로 발표하였는데, 당시에 김某가 김상한이란 사실을 알았음에도 이것 또한 나중에 남파되어 가능성에 대비하여 실명을 공개하지 않은 것’이라고 진술

- 가명을 사용해 발표한 사실과 이것은 ‘월북 후 남하할 때를 대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는 점이 확인됨

o 다음으로 김상한이 ‘남파간첩’이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 살펴보면

- 1964.8.14 사건발표 전 중정에서는 김상한에 대해 신원조사를 진행 중에 있었으며 8.15 부산지부로부터 자세한 인적사항을 보고 받았고 8.18 최종 확인했으나22)

- 당시 중정이 작성한 다른 기록에서도 김상한이 ‘남파간첩’이라고 판단할 만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

- 이용택 당시 수사과장은 「진실위」 면담조사시(05.9.21) 이부분에 대해 수사 실무진에서는 김영춘을 ‘남파간첩’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당시 주로 언론인 출신이 맡고 있던 ‘부장 공보관이 발표문을 수정하는 단계’에서 다소 확대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진술해

- 당시 중정은 ‘김상한이 남파간첩’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같이 발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

【 판 단 】

o 발표문의 ‘남파간첩 김영춘’은 김상한으로서 월북 후 다시 남하할 가능성에 대비해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 김상한이 ‘남파간첩’이라는 것은 발표 당시 중정도 확인하지 못했던 사항으로서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름

나) ‘김상한 월북’ 부분에 대해

【 조사 내용 】

o 1964.8.14 중정의 발표문에 김상한(발표문 김영춘)은 1962.5 중순 인민혁명당의 조직확대 공작 및 투쟁목표에 의한 제임무를 도예종, 우동읍에게 일임 후 월북하여 북괴 중앙당에 인민혁명당 창당결과를 보고하고 비밀조직연락선을 연결했다고 함

o 이와 관련, 1964.8.20경 중정에서 작성한 「김상한에 대한 대북공작 상황보고」등에 의하면 김상한은 1962.5경 육군첩보부대의 북파공작원으로 선발돼 훈련을 받은 후 1962.7.12 북파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구체인 내용을 보면

- 물색 동기 및 목적으로

․‘과거 좌익활동 경력소지자로서 북파 후 북괴에서 신뢰를 득할 수 있는 자를 물색 중, 사회대중당에서 활동하다 지명수배로 도피 중에 있고 생활난으로 고생하고 있는 교수출신 김상한의 개인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월북시키면 공작성과거양이 기대’된다고 기록돼 있고

- 공작목표로

․‘적으로부터 고첩으로 선정되어 남파되기를 요청, 남파 불가능시는 북한에서 인물을 선정 남파’시키는 등 두 개의 목표를 선정하고

- 위장구실로

․자진월북과 좌익 또는 혁신계 활동경력을 주장하고 ‘관련인물들과 서클을 조직해 민정이양 후 정치활동 재개시 활동을 대비하고자 했다’며 신뢰를 얻고

․‘남파시는 지도원을 동행시켜 주어 서클지도를 요망하도록 요청하여 불가하다면 북한에서 영주할 의사를 개진하되 남한정부기관의 공작원임을 일절 기밀에 보하도록 한다’고 기록돼 있으며

- 공작지령으로

․공작기간은 ‘월북하여 북괴에서 신뢰를 득하고 남파시까지’이고, ‘남파 불가능시는 영주를 희망하고 월북자를 포섭하여 남파시켜 일선 정당에서 활동하라’고 기록

․부차적 임무로 ‘간부인물 명단, 첩보정책 변경유무 등’을 제기

o 이와 관련해 관련자

- 이○○(김상한 북파공작 담당 팀장, 당시 중정 직원)은 중정 피의자 신문조서(64.9.1)에서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인민혁명당 사건이 공개 발표되고 또 오늘 인민혁명당이 본인에게 물색된 1962.5 이전에 창당되었고 김상한 자신이 초대위원장에 있었다는 사실 등을 생각해 볼 때

자기 이외의 혁신세력을 월북시켰다가 넘어 오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면 불안하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김상한 자신이 넘어가야겠다고 하는 애국적으로 나오던 태도가 즉 자기 목적수행을 위하여 월북하려는 위장구실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고

․신원조사에서는 규명되지 않았으나 당시 김상한은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활동하겠다고 하기에 그 약점을 이용한다는 것이 오히려 속았다고 진술하고 있음

- 김○○(김상한 북파공작 담당 과장)은 중정에서 1964.9.1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김상한과 같은 조건을 가진 자를 포섭 조종하여 완전히 우리 사람을 만들고 가족들에 대한 생활비 등으로 도와준다면 자진 월북자로 가장하여 임무수행 될 것이라고 착안하여 채용했고

․김상한은 이번 기회에 과거의 모든 잘못을 반성하고 남한정부를 위해 노력할 의지도 있다고 들었고, 그렇다면 북괴의 비위에 맞게 위장술을 잘 쓸 수 있을 것이고 남한에 처자를 둔만큼 돌아 올 의욕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고 진술

o 한편 당시 김상한의 월북사실을 알고 있었던 ‘인혁당사건’ 관련자

- 김영광은 중정 조사시

1962.5경 김상한이 사무실에 찾아와 신상관계로 탈퇴하겠다고 말하고 간 뒤 우홍선에게 알아보라고 말했고

․1주일이 지나서 김상한이 다시 찾아와 탈퇴이유를 물었더니 ?미군관계 특수 기관원으로서 이북에 갔다 오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안갈 수 없게 되었고 미군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했으며

1962.5경 도예종, 우홍선과 만났을 때 우홍선이 김상한이 다시 내려와 찾아오면 큰일이라고 걱정하니 도예종이 ‘지금까지의 조직을 백지화 하자’고 했고

1962.8 모임에서 참석자들이 김상한에 대해 묻자 도예종과 우홍선이 밝힐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고 진술

- 우홍선은 1965년 검찰조사시

․김영광으로부터 김상한 월북에 대한 얘기를 듣고 1962.5 도예종, 김영광과 모였을 때 ‘김상한이 다시 월남하면 이중간첩으로 내려 올 것인데 절대로 만나서는 안된다’고 말했다고 진술

- 한편 김영광과 도예종은 중정에서 1964.8.9 실시한 대질조사에서

․도예종이 1962.5 모임에서 ‘김상한이 월북할 때 당의 활동상황과 과업문제를 가져가겠다는데, 개인적으로 월북하는데 어떻게 줄 수 있느냐’고 말하고 우홍선이 위원장을 맡기로 했다고 진술하자

․김영광은 도예종의 말이 맞다고 진술

o 인혁당사건과 우홍선의 공소장과 판결문에 김상한의 월북사실과 경위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당시 ‘김상한 월북사건’을 담당한 중정 수사관 오○○은 공판에 출석해 증언했으나 구체적으로 사실을 확인해 주지 않았음

【 판 단 】

o 김상한이 1962.7.12 육군첩보부대 북파공작원의 임무수행을 위해 월북했다는 점은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사실이고

o 반면 ‘인혁당 창당결과 보고’라는 목적수행을 위해 육군첩보부대의 공작원으로 위장했다는 점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진술이나 자료로서 입증된다고 보기 어려움으로

o 결론적으로 ‘김상한의 월북’에 대한 발표문의 내용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의 모든 사실들이 1964.8.14 이후에 확인된 것이라는 점에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발표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임

다) ‘김배영 월북’ 부분에 대해

【 조사 내용 】

o 1964.8.14 중정의 인혁당사건 발표문에 따르면 우홍선이 김배영을 ‘약정된 암호방식에 의하여 당자금 수령차 1962.10 일본을 경유 월북시켰다’고 되어 있음

o 이와 관련해 김배영이 1967.10 ‘남파간첩’으로 검거된 후 작성된 「북괴간첩 김배영에 대한 수사 중간보고(67.10.28)」와 「신문조서(68.2.5)」를 검토해 보면

- 김배영은 ‘활동자금난에 봉착하자 일본에서 조총련계 활동을 하고 있는 실형 김배준을 통해 조달할 것을 구상하고 있던 중, 도예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여 조총련계 박모(일본명 木泉勝)를 접선’하였고

- 1962.10부터 1964.10까지 김배준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자주 왕래하던 박씨(명불상)를 김배준에게 소개 받고 친하게 되어 한국에서 밀항한 사실을 알리게 된 후 박씨가 조총련에서 활동하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 1964.8 인혁당사건이 발표되고 일본경시청에서 수배하자 이를 박씨에게 알리고 구원을 요청, 박씨가 소개한 조총련계 사람 집에 거주’하던 중, 1964.11 월북하게 되었다고 함

o 김배영의 공판조서와 항소이유서를 살펴보면

- 1962.9 도예종이 ‘도일을 추진하고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말한 적이 있으나 도예종이 학술연구단체의 자금마련을 위해 일본에 가야한다고 말한 것은 아니며

- 그 후 도예종이 쪽지를 전해 달라고 해서 기하라(木原一夫)에게 전한 것은 사실이나 내용은 모르며 전해 달라고 해서 받았을 뿐이고, 일본에 가서 만난 실형 김배준은 조총련계가 아니며

- 일본에 간 것은 생활이 곤란했고 혁신계에 가담했다고 해서 취직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고

- 북한에 가게 된 것은 1964.8경 한국일보를 통해 자신이 수배 받고 있다는 사실과 일본경시청에서 자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일본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고 있음

o 김배영사건과 관련해 서울형사지방법원은 판결문(1968.4.27)에서

- 김배영이 도예종의 ‘밀서를 수령’해 일본에 있는 기하라(木原一夫)에게 전달한 사실을 인정했으나

- ‘인혁당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밀항할 것을 모의’했다는 부분과 김배준이 ‘조총련계’라는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았음

o 한편, 1964.9.21 중정이 작성한 「업무연락」에 의하면

- 중정이 김배영의 소재를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1964.8.7 이전으로 보이고 이 문서에서 요청하고 있는 ‘조사사항’을 보면

- ‘김배준의 조총련 지위 및 활동상황(북괴와의 관계), 김배영의 소재, 인혁당과 북괴 및 조총련과의 관계, 북한 내왕사실 유무’ 라고 기록돼 있어 적어도 1964.9.21까지는 김배영의 소재와 북한 내왕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임

【 판 단 】

o 김배영은 1962년 일본에 있는 실형 김배준에게 갈 계획을 가지고 있던 중 도예종으로부터 기하라(木原一夫)에게 쪽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본에 도착하여 전해 주었고23)

o 김배준의 피혁가공업을 도와주며 일본에 거주 중 1964.8 인혁당사건으로 일본 경시청에서 수배하자 1964.11 월북한 것으로

o 김배영이 ‘당자금 수령차’ 일본에 갔다고 단정할 만한 구체적 진술 또는 자료가 없을 뿐 아니라 도예종이나 우홍선의 지시 혹은 ‘인혁당’ 차원의 결정으로 김배영이 일본에 갔다고 할 수 없고

o 김배영이 월북한 이유가 인혁당사건 발표로 인한 일본 경시청의 수배이고 그 시점이 1964.11로서 중정의 인혁당사건 발표일인 1964.8.14 당시에는 월북하지 않고 일본에 거주 중이었으며

o 당시 중정은 1964.9.21까지 김배영의 소재를 확인하고 있지 못했다는 점들을 고려하면

o 우홍선이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장 대리의 자격으로 약정된 암호방식에 의하여 당자금 수령차 김배영을 일본을 경유 월북’시켰다는 1964.8.14 발표문의 내용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단됨

라) ‘북한의 인혁당을 통한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 지령’ 여부

【 조사 내용 】

o 1964.8.14 중정은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1964.2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한일회담반대를 4․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하고 학생데모를 조종’했다고 발표

o 전국민적으로 확산되던 한일회담반대 데모의 배후에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 있다고 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조작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제기

o 이와 관련해 당시 중정이 핵심적으로 활동한 학생으로 지목한 오병철은24)

- 1963년 말경 김금수 등과 민족문제, 민족자본형성문제, 농촌진흥문제 등을 연구하는 서클형성에 관해 이야기한 후, 박종열, 서정복 등을 만나 위와 같은 문제 등의 토론․연구하는 서클을 만들자고 말한 일이 있으나

- 이것은 서클조직의 준비로 의견교환에 불과했으며 구체적으로 서클조직에 착수한 사실은 없고

- 서정복과 3.24 학생데모는 ‘애국적’이고 ‘학생들의 애국충정이 반영되도록 질서를 잡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한 후, 김경희와 박현채 등을 만나 이와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했으며

- 학생데모가 전국에 파급된 것은 대일굴욕외교에 대해 학생들이 의분에 못 이겨 한 행동이지 어떠한 세력의 지령이나 선동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고

- 6.3 계엄령이 선포된 후 박현채로부터 서클활동이 위험하니까 행동을 중지하라는 지령을 받은 사실 없다고 진술

* 오병철은 중정의 5회 진술서(7.31)에서 1964.3.26경 김경희로부터“3.24 데모가 일어났는데 왜 일찍 보고를 않는가”라고 말하면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정당한 데모를 할 수 있는 대로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으나 공판시(1965.1.8) 이를 부인

o 또 박현채는25)

- 오병철을 통해 학생데모에 대해 데모를 억제하라, 4․19를 기하여 각 대학연합전선을 형성해 전국적으로 일제봉기토록 하라는 등 지시한 바 없고 학생서클 구성에 대해서는 함께 논의했으며26)

- 6․3 계엄령이 선포된 후에는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삼가는 것이 좋다’고 말한 바 있다고 진술27)

o 박현채, 김병태, 정도영 등은 서로 만나서 3․24와 5․20 학생데모의 과격성과 한일회담에 대한 정부의 저자세를 비판했다고 진술28)

o 한편 당시 중정의 수사기록에서도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와 관련해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았다고 볼 만 한 구체적 증거는 발견할 수 없고

* 김정강은 중정 신문조서(1964.8.1)에서 1964.3 도예종이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명령하지는 않았으나 종용한 적은 있다고 진술

o 검찰은 오병철, 서정복 등 ‘인혁당’사건 학생관련자들의 공소장을 변경 공소취하했으며29) 사법부는 판결문에서 위 혐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

【 판 단 】

o 김금수, 박현채 등이 학생이던 오병철을 만나면서 학생서클 구성을 시도하고 당시 국민적 관심사였던 한일회담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눈 것으로 확인되나

o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와 관련해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아 배후조종했다’고 볼 만한 구체적인 증거 또는 일관된 진술과 자료가 없어

o 1964년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가 전적으로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조종’으로 전개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더구나 이것이 ‘북괴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도 볼 수 없음

마) 판단

o 1964.8.14 중정의 인혁당사건 발표문에 등장하는 ‘남파간첩 김영춘’은 김상한으로서 ‘남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명으로 발표한 것이고 실제로 김상한이 ‘남파간첩’이라는 것은 발표 당시에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며

o 김상한은 1962.7 육군첩보부대 북파공작원으로서의 임무를 가지고 월북

- ‘인혁당 창당결과보고’라는 목적수행을 위해 육군첩보부대 북파공작원으로 위장했다는 주장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당시 중정조사시 관련자들의 진술로 볼 때 김상한의 월북은 개인적인 결정으로 사후에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에게 추인되거나 합의된 바 없고, 당시 재판에서도 인정되지 않은 부분으로

- 발표된 ‘남파간첩 김영춘(김상한)’과 그의 ‘월북목적’은 확인되지 않은 것이며

o 김배영의 월북이유가 ‘인혁당사건’으로 인한 일본 경시청의 수배이고 월북시점이 사건이 발표된 이후이며 64.9.21까지 중정이 김배영의 소재와 북한 내왕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들로 볼 때, 김배영과 관련된 당시 발표문의 내용도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고

o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와 관련

-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에게 ‘북괴의 지령’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고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학생서클 구성을 위해 당시 학생들과 만났으나 학생데모의 전개양상에 대해 우려했던 점과 위 오병철의 관련 진술로 볼 때

-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가 전적으로 ‘북괴의 지령’을 받고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조종’해 발생․확대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됨

4)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여부

가) 물․전기 고문, 구타, 위협 등 강압수사 여부

o 인혁당사건’ 담당검사의 ‘기소거부 파동’으로 사건의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던 1964.9.12 한국인권옹호협회 박한상 변호사(당시 민정당 국회의원)는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이 고문30)을 받았다고 발표했고

o ‘인혁당사건’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중정이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반이 서울구치소에 방문 관련자들의 진술을 듣고 신직수 검찰총장이 진상조사방침을 밝힌 바 있음

o 당시 박한상 변호사의 발표에 따르면31)

- 한국인권옹호협회가 9.11부터 12까지 서울구치소에서 인혁당 피의자들을 면담한 결과 대부분이 발가벗긴 상태로 전기․물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고 도예종, 정도영, 전무배, 김경희, 임창순, 김영한의 고문, 구타, 협박 과정을 구체적으로 소개

o 당시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32)

- 신직수 검찰총장은 1964.9.15 ‘고문사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조사결과 고문의혹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관련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엄벌할 것’이라며 진상조사방침을 밝히고 수사에 착수하여

- 형사부 정태균 부장 검사가 64.9.16부터 17까지 서울구치소에 출장, 피의자 26명 전원을 개별 면담하여 고문의 구체적 방법, 고문자들의 인상에 대해 조사하고

- 중병 상태에서만 들어가는 병감의 도예종 병실일지 조사, 전문의의 상처 진단서 작성, 당시 수사관들의 리스트 작성 등을 진행했으며

* 검찰은 도예종이 교도소에 온 후 병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교도소에 따르면 병감은 중환자가 아니면 입실하지 않는다고 밝혔음

- 외상이 있는지 확인한 결과 큰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으나 이 중에는 아직까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자와 옆구리가 아픈 자가 발견되었고

- 허작의 경우 수사기관에서 조사받을 때 고문이 두려워 자기의 안경알로 성기를 잘라 자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진술로 확인하고 관련자들은 취조관이 아닌 행동대원이 고문을 했다고 일치되게 진술했으며

- 구속기소 된 바 있는 26명 중 14명을 공소취하 한 것은 중정 수사기록에 임의성이 없어 이것을 백지화하여 모든 것을 새롭게 수사한 끝에 밝혀져 취한 조치라고 밝혔음

* 태균 변호사는 「진실위」 전화면담(05.10.7)시 사건담당 사실을 부인하고 자신이 사건을 담당했다는 당시 신문기사를 誤報라고 진술

o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반은 9.15 서울구치소에서 박한상 변호사가 만난 이외의 14명을 중심으로 진술을 듣고 이들도 대체로 신문에 보도된 내용과 같은 고문을 받았다고 발표한 바 있음33)

o 제45회 국회법사위 회의록(1964.10.21) 제10호 기록에 따르면

- 박중기, 박상홍, 김한덕의 경우 우측 다리 관절부 부근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하는 상처가 발견되었고

- 도혁택, 황건의 경우 구타와 전기고문, 남윤호의 경우 집단구타를 당했으나 하일민은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 도예종 이하 26명 중 20여명을 조사한 바 거의가 전기 또는 물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o 제45회 국회 법사위 회의록(1964.11.13) 제21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전문위원 문상익은

- 중앙정보부가 인민혁명당사건 피의자 등에 대하여 고문을 하였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으므로 동 피의자 등에 대한 증언녹취를 통하여 진실여부를 감사한 바

- 전무배외 20여명의 피의자 등은 모두 전기고문, 물고문 등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진술할 뿐만 아니라

- 고문의 결과 생겼다고 인정할 수 있는 상처도 목견할 수 있는 점 등으로 보아 동 고문의 혐의가 농후하다고 보고했음

* 검사 신문시 도예종, 강무갑, 도혁택은 중정 진술서가 고문에 의한 허위라고 주장했고 정도영, 김한덕 등은 위협과 강요에 의해 중정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고 했음

o 한편 사건 관련자 김규철은 「진실위」 면담조사시(05.9.27)

- 인혁당 총무위원이라 발표된 제일은행원 이종배(일명 이상배)는 1964년 7월 성북서 2층34)에서 투신하였는데

- 이종배는 당시 수배 중인 도예종의 은신처를 알고 있던 인물로 도예종을 검거하기 위해 심한 고문을 당했고

- 이날은 도예종이 은신하고 있는 곳에 수사진과 함께 다녀온 뒤 도예종 검거에 실패한 수사관들로부터 다시 심한 고문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투신한 것이며

- 그 결과 이종배는 척추골절상이라는 중상을 입고 전신마비의 중증 장애인이 되어 재활치료를 받았으나, 1970년 고문의 장애로부터 회복될 수 없음을 비관하여 자살하였다고 진술

o 반면, 중정은 인혁당사건이 국회에서 논란이 일자 ‘인혁당사건 국정감사 대비 시나리오’를 만들었는데 이에 따르면

- 인혁당 사건 수사 착수와 동시에 검찰로부터 휘를 받아 함께 수사하였기 때문에 검찰의 지휘를 받는 입장에서 함부로 고문을 자행할 수가 없었다고 반박 논리를 준비했고

- 당시 사회분위기는 한․일회담 반대학생데모의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6.3사태를 계기로 안정화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공안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할 필요성이 없었던 상황이라고 주장

* 당시 중정 수사관 오○○ 등은 1964.9.4 검찰에 출석해 사건의 실체에 허위가 없고 고문은 일절 없었다는 확인서를 제출했음

o 중정부장 김형욱은 1964.9 국회 내무위 국정감사에서 고문여부에 대해

- 한 사람(허작)은 2시간 만에 자기 진술을 다하고 변소에 가서 안경을 가지고 자살을 기도, 고문할 시간 여유가 없었으며

- 고문을 피하려고 2층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기도한 사람이 있다는 데 2층에서 고문할 경우 소리를 지르면 밖으로 다 들리고 지하실이 있는데 굳이 2층에서 고문할 필요가 없으며

-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약점을 얘기하자 그 비밀만 지켜달라고 하면서 모두 진술했으며

- 폐가 나쁜 사람(정도영)은 고문하면 바로 죽을 수도 있는데 고문자체를 할 수 없다고 고문사실을 부인

* 도예종이 병감에 입감된 것에 대해 도예종이 위장이 나빠, 특별히 음식을 따로 제공해 주었고 위장치료를 위해 병감에 입감하도록 배려했다고 주장

o 또 중정 관련자 이용택 당시 수사과장과 윤종원 수사관은 「진실위」 면담조사시(각각 05.9.21과 10.6)

- 1964년에는 남산에 있던 미군이 사용하던 원형 콘센트 막사 2개동(개당 100평)과 동대문운동장 근처에 있던 고양군청이 철수하고 비어있던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 피의자들을 사무실 여기저기서 조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크게 신문해도 옆 팀에서 진술내용을 못 알아듣고, 이로 인해 수사관끼리 다툼이 있기도 하는 등 고문은 생각해 볼 수도 없고

- 추궁과정에서 고성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 당시 5국 물이 대로변에 있어 길가의 행인들에게 다 들리기 때문에 고문을 할 수가 없었다고 주장했음

o 이와 관련 법원은 도예종․양춘우의 고문주장에 대해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고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 작성시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므로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한 판결에 문제없다고 판시35)

o 사건을 담당한 검사 장원찬은

- 의문사위 조사시 도예종이 웃통을 벗어 보여 주었는데 몸통에 지지고 멍든 상처가 남아 있었으며, 송치되기 전 정보부에서 고문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진술했고

- 또 「진실위」 전화면담 조사시

․고문, 고문하는데 그 범주를 정하기도 어렵고 수사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던 것에 대해 문제를 삼으면 역사가 무너지며 지금도 세상 어디에선가는 억울한 일이 진행되고 있고

․수사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는지, 사건내용이 조작인지는 법원에서 최종판단하는 것인데 약간의 강압 흔적이 있었다고 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고 진술

나) 판단

o 박한상의 발표에 따른 언론의 보도,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반의 조사 내용에 대한 보도, 제45회 국회법사위 회의록 10호와 21호 기록, 「진실위」 면담내용들에서 확인되는 물․전기고문, 구타, 위협 등 강압수사에 대한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되며

o 고문수사가 문제되자 유례없이 신속하게 검찰이 수사에 나서

- 도예종이 중환자만 입실하는 병감에서 치료받은 사실, 큰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귀와 옆구리에 이상이 있는 사람 확인, 허작이 고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해한 사실, 고문한 사람이 행동대원이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하고

- 피고인들의 상처 진단서와 수사관들의 명단을 작성했으며

o 국회 법사위의 회의록(1964.11.13)에 “고문의 결과 생겼다고 인정할 수 있는 상처도 목견할 수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고문의 혐의가 농후”하다고 기록되어 있고

o 특히 검찰과 국회의 조사 시점이 1964.9.15일 이후로

- 사건이 송치된 1개월 후이고 관련자들이 중정에서 조사받던 시점으로 보면 1개월 반 가까이 지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 위와 같이 신체에 외상과 이상이 일부 발견되는 점은 관련자들의 물․전기고문과 구타 등 인권침해 행위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o 더구나 당시 ‘고문문제’로 궁지에 몰려 있던 수사기관이 ‘수사한다’고 공언하고 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문이 없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고36)

o 장원찬의 의문사위 진술내용과 「진실위」 전화면담에서 ‘수사과정에서 무리가 있었던 것에 대해 문제를 삼으면 역사가 무너지며, 약간의 강압흔적이 있었다고 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밝혀 당시의 ‘무리한 수사’를 인정하고 있는 등

o 중정의 물․전기고문, 구타, 강압수사를 주장하는 진술 또는 자료들은 대부분 구체적이고 일관됨37)

o 한편 당시 중정 관련자 이용택과 윤종원이

- 당시 수사국의 위치(대로변 주변)와 구성(콘센트 건물과 2층 건물)을 고문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나

- 중정의 물․전기고문, 구타, 강압수사를 주장하는 진술 또는 자료들에 대비하여 설득력이 없고 구체적이지 못해 위 진술만으로 중정의 물․전기고문, 구타, 강압수사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음

o 따라서 관련자들의 진술과 정확히 일치하는 형태와 정도의 물․전기고문, 구타, 강압수사가 이뤄졌다고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중정이 수사하는 과정에서 관련자들이 증언하는 형태의 고문․구타․위협 등 인권침해 행위가 관련자 각각에 따라 차별적으로 행사되었다고 판단하기에 무리가 없다고 할 것임

마. 소결

o 소위 ‘인혁당사건’은

- 5․16 군사쿠데타로 ‘군사혁명 포고령 제4호’38)가 발포되면서 정당․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군사혁명재판’을 통해 대대적으로 혁신계가 처벌되는 등 혁신계 활동이 억압되고 정치활동공간에서 배제되는 정치사회적 조건 속에서

- 혁신계의 주요 인물들이 혁신계의 활동을 평가하고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면서 민정이양 이후 혁신정당의 활동이 합법화될 시기에 대비해 혁신계 규합과 통합논의를 시작

- 구성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활동방식과 통합형태에 대한 논의를 거쳐 ‘서클’ 수준의 활동방식과 통합형태를 갖추어 가는 과정이 드러난 것이라고 판단됨

o 그러나 ‘혁명공약’ 6항에서 밝힌 ‘민정이양’의 약속을 저버리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1964.5.20 서울시내의 대학생들이 군사쿠데타 타도투쟁을 선언하는 등 한일회담반대 시위가 군사정권의 본질적인 문제제기로 확대되어 전국민적으로 확산되자

- 6.3 일체의 시위금지와 언론․출판의 사전검열, 모든 학교의 휴교를 명령하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잠재우는 등 정권의 반대세력의 활동을 억압하고 있던 중

- 8.14 정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하였고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가 ‘북괴의 지령’으로 인혁당 관련자들이 ‘배후조종’한 것이라고 발표했음

o 조사결과, 당시 발표문 내용은 대부분 확인되지 않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과 다른 것이었으며, 많은 관련자들은 중정의 수사과정에서 물․전기 고문 및 구타 등의 강압수사를 받은 것으로 판단됨


2.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사건

가. 시대적 배경

o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위기감 고조

- 박정희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자 1971.10.15 위수령을 발동하고 10.19에는 ‘학원질서 확립에 관한 대통령의 특별명령’을 공포

- 1971.12.6 비상사태 선포, 12.27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공포

- ‘닉슨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한편, 주한미군 감축을 발표하자 박정희 정권은 안보위기를 느끼고 위기극복을 위한 강력한 권위주의체제를 선택

o 유신체제의 등장

- 1972.10.17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비상조치를 통하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의 정치활동을 금지 시킨 후, 비상국무회의가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여 ‘유신헌법’을 제정

- 1972.12.27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국민투표로 ‘유신헌법’ 가‘유신헌법’제정에 의해 3권 분립이 무너지고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 강화되는 등 박대통령의 장기집권 체제 성립

- 1973.1.19 비상각의에서 사법관계 5개 법률을 개정하여 구속적부제도와 법원의 위헌심사권을 없애고, 법관의 임명 보직권을 대통이 갖고, 긴급구속을 확대 강화39)

- 1973.3.24 대법원 판사 15명 중 9명이 재임명에서 탈락됨

o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

- 1973.8.8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뒤 대학가에서 동 사건 규명 및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번져나가자, 민관식 문교부장관“학업에 전념해야 할 학생이 본분을 일탈하는 것을 용납지 않겠다”고 경고

- 1973.10.2. 서울 문리대생 300여명은 유신 이후 전국 대학가에서 최초로 유신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학생시위를 단행

- 정부는 학생 21명을 구속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통해 시위의 확산을 막으려 했으나, 학생시위는 10월 4일 서울법대, 10월 5일 서울상대 등을 거쳐 전국적으로 전개됨

- 1973.11.12. CBS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 결의문 채택을 시발로,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문화방송, 중앙일보 등 주요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이 모두 언론자유 수호를 선언하며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학생데모를 보도하기 시작

- 1973.12.24. 함석헌, 장준하, 백기완 등 재야인사 30여명은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구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 시작

- 1974년 3월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경북대학교를 필두로 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됨

o 유신정권의 대응

- 1973.12.26 김종필 총리가 전국 TV와 라디오 특별방송을 통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

- 1973.12.29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유신체제를 부정하일체의 불온 언동과 소위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경고

- ‘개헌청원운동본부’ 발족과 관련 박대통령은 “10월 유신에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하면서 개헌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담화문 발표

- 1974.1.8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반대 운동 제압을 위해 긴급조치 제1 (개헌논의 금지) 및 제2호(비상군법회의 창설) 선포하면서 긴급조치 선포와 관련한 담화문 발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이를 어기는 자뿐 아니라, 이 조치를 비방한 자까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으며

․긴급조치 1호의 6항은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고 규정

․긴급조치 2호는 이에 따라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

- 긴급조치 선포로 언론의 자유가 제한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편집국장이나 방송국장을 소집하여 사회불안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기사를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4개항의 협조사항 요청40)

나. 사건 개요

o 1973.10.2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최초의 반유신 시위를 벌이자 학원가에서 동 시위를 계기로 반유신 운동이 불붙기 시작하였으며41)

o 1974.3 신학기 시작과 더불어 경북대를 필두로 학생시위가 전개되고

o 1974.4.3 오전 10시, 11시를 기해 서울대․이화여대․성균관대 등 서울시내 각 대학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의로 ‘민중․민족․민주선언’(일명 삼민 선언), ‘민중의 소리’ 등의 유인물을 배포하며 일부 시위가 전개되자

o 1974.4.3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42)

-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배후 조종 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 합법을 가장, 정체를 위장하고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하여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인민혁명’의 수행을 기도하고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1.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諸단체(이하 ‘단체’라고 한다)를 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 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 도서, 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 제작, 소지, 배포, 전시 또는 판매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제1항, 제2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또는 선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이 조치 선포 전에 제 1항 내지 제 3항에서 금한 행위를 한 자는 1974년 4월 8일까지 그 행위 내용의 전부를 수사, 정보기관에 출석하여 숨김없이 고지하여야 한다. 위 기간 내에 출석, 고지한 행위에 대하여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5. 학생의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관계자 지도감독하의 정상적 수업, 연구 활동을 제외한 학교 내외의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집단적 행위를 금한다.

6. 이 조치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10. 비상군법회의 검찰관은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하여 소추를 하지 아니할 때에도 압수한 서류 또는 물품의 국고 귀속을 명할 수 있다. 勐ҰҰϼː돬̜

7. 문교부장관은 대통령 긴급조치를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 결사 또는 학생단체의 해산 또는 조치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처분에 따르는 제반조치는 따로 문교부장관이 정한다.

8. 제 1항 내지 제6항에 위반한 자, 제 7항에 의한 문교부장관의 처분에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기징역에 처하는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제 1지 제 3항, 제 5항, 제 6항 위반의 경우에는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음모한 자도 처벌한다.

9.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10. 비상군법회의 검찰관은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하여 소추를 하지 아니할 때에도 압수한 서류 또는 물품의 국고 귀속을 명할 수 있다.

11. 군지역 사령관은 서울특별시장, 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 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해야 한다.

이 조치는 1974년 4월 3일 22시부터 시행한다.

o 1974.4.25 중정(부장 : 신직수)은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 발표시43)

-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인 공산당원 및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 1974.4.3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한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했다고 발표함

o 1974.5.27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 추가 발표하면서44)

- 민청학련」사건은 이철․유인태 등 평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있던 몇몇 불순학생이 핵심이 되어 작년 12월경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봉기를 획책하였으며

- 도원․도예종 등을 중심으로 한「인민혁명당」계 지하공산세력․재일 조총련계열․과거 불순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조영래 등 용공불순세력, 일부 종교인 등 반정부세력과 결탁하여

- 연합전선을 형성, 유혈 혁명으로 정부를 전복, 공산정권을 수립코자 한 국가변란기도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 「민청학련」사건 관련자 32명에 대해 긴급조치 제1․4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및 내란예비음모 선동 혐의로 기소하였음45)

o 1974.7.13 비상보통군법회의(재판장: 박현식)는 관련자 32명에 대해 유인태․이철 등 7명 사형,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 선고하였으며46)

o 1974.9.7 비상고등군법회의(재판장: 이세호 대장)는 피고인들의 항소를 기각하였고

o 1975.4.8. 대법원은 피고인측 주장에 대해 ‘이유 없다’며 상고를각하고 「민청학련」사건관련자들의 형량을 최종 확정하였음

사건 일지

1973.10.2 서울문리대 학생 300여명 선언문을 발표하며 반유신시위

1973.10.4,5 서울대 법대, 상대 반유신시위

1973.11.5 지식인 15인 시국선언 발표, 경북대학교 학생 300여명 반유신시위, 서울대 사대생 동맹휴학

1973.11.7~ 12.7 서울대 공대 등 단과대별 시위 및 시국선언문 발표, 이화여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숭전대, 서강대, 동국대, 한양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수도여사대, 경희대, 영남대, 상명여사대, 경북대, 효성여대 등 전국 각 대학에서 반유신 시위 전개

1973.10.23~11.30 경향신문을 필두로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독교방송국, 문화방송국, 중앙일보 등 언론자유수호운동 전개

1973.12.24.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등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발족, 백만인 서명운동 전

1973.1.8. 대통령긴급조치 1, 2호 선포

1974.1.21. 도시산업선교회 소속 교역자 긴급조치와 유신체제 비판 성명서 발표

1974.1.24. 고영하 등 연대생 7명 대학 강당에서 긴급조치 철회 토론회 진행

1974.1.27. 문인 61명 시국선언 발표 개헌서명운동 전개

1974.3.21. 경북대 반유신 시위

1974.4.3. 서울대 의대, 문리대, 성균관대, 고대, 서울여대, 감신대, 명지대 등 시위

1974.4.5. 정윤광, 강구철, 정찬용 등 긴급조치 4호 반박문 작성 및 배포

다. 쟁점 사항

1) 「민청학련」의 실재 여부

o 수사기관 및 재판부는 「민청학련」은 74.4.3 기해 전국적인 반정부 데모를 전개하기 위한 조직으로 통일된 목적수행을 위해 결성된 법률상 단체라고 판단47)

o 「민청학련」관련자들은

- 조직의 결성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민청학련」결성을 관련자들이 인정하고 조직체계를 갖고 있었다는 구체적 물증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 중정 및 검찰부에서 제출한 증거는 출판서적․반독재구국선언문․관련자들의 진술 등이 전부이고

- 명칭은 단지 유인물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붙인 것이며, 조직의 실체는 반유신 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기구적 성격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함

2) 조직의 성격

o 수사기관 및 재판부는

- 「민청학련」이 폭력혁명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국가 건설을 기도한 반국가단체라고 판단하면서

- 유인물 및 선동내용이 북한방송 및 간첩지령과 일치하고 있어 단순한 학생운동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48)

o 「민청학련」관련자들은

- 유인물 및 주장내용이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내용으로 북한의 각종 구호와 비슷하다는 것으로는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것은 설득력이 빈약한데다

- 화염병 제작 시도만으로 폭력혁명을 주장하고, 학생들이 부르 노래를 친북용공으로 규정했으며

- 민청학련의 실제 활동내용은 폭압적인 유신 1인 독재체제에 반대하여 전국동시 다발 시위를 전개하기 위한 것일 뿐이며, 정부전복 및 노농정권 수립 등의 반국가단체성을 부인

3) 조직체계와 활동

o 수사기관 및 재판부는 일관되게

- 1973.12월 초순경 모임에서 「10․2 데모」는 산발적․비조직적이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평가한 후, 향후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모의하였으며

-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1974.1.21 서울의대, 3.21 경북대, 3.28 서강대, 4.1 연세대 및 4.3 총봉기로 국가변란을 기도하다 좌절된 것으로 판단하였음

o 「민청학련」관련자들은

- 「민청학련」 조직은 반유신 투쟁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기구적 성격에 불과하고, 정부를 전복할 만한 체계나 하부조직이 없었다는 입장

4) 「인혁당 재건위」와의 관계

o 수사기관 및 재판부는

- 도예종․서도원 등이 서울을 거점으로 전국적인 학생 조직을 결성해 민중봉기에 점화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 여정남을 포섭,「민청학련」구성과 활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거사자금을 지원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판단

o「민청학련」관련자들은

- 여정남이 서울지역 학생운동 지도부와 접촉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정남이「민청학련」지도부를 지도․조종한 관계가 아니고

- 전국 동시다발 유신반대 시위 준비과정에서 전국 각 대학의 학생운동 리더들이 만나 유신반대 활동을 준비하였다고 주장

5) 조총련과의 연계성

o 수사기관 및 재판부는 일본인 다찌가와․하야가와가 조총련 비밀조직원인 곽동의의 지령을 받아, 이철, 유인태 등「민청학련」지도부 접촉, 폭력혁명을 선동하고 금품 제공 등의 활동을 했다고 판단

o 사건 관련자들은

- 다찌가와는 곽동의와 1973.9 「김대중 선생구출위원회」사무실에서 만났으며 기자와 취재협력자의 관계에 불과하였고

- 이철, 유인태 등은 두 일본인이 신학기 학원가의 투쟁계획에 대해 취재요청을 해와 인터뷰에 응한 것에 불과함에도, 조OO의 거짓 자백으로 폭력혁명을 사주하고 거사자금을 받은 것으로 각색되었다고 주장

6) 수사 및 재판과정상의 인권침해

o「민청학련」관련자들은 수사 및 재판의 전 과정에서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있었다고 주장해 왔음

라. 조사 결과

1) 「민청학련」의 실재 여부

【 수사기관 및 재판부 】

o 1974.4.25 중앙정보부(부장 신직수)는

-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인혁당 재건위」조직과 재일 총련계, 국내 좌파․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4.3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폭력 으로 정부를 전복하고「민족지도부」등 과도단계를 거쳐 공산 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국가변란 기도 사건’이라고 발표

o 검찰의 공소내용에 의하면 1974.3.29 경기도 양주에서 김병곤이 오성숙․강박인 등 타 대학 대표자들을 만나 명칭 결정 사실을 전달

o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1심 16차 공판(1974.7.9)에서

- 피고인들이 「민청학련」이란 4.3 데모를 추진한 의사의 주체임을 법정에서 스스로 시인하고 있고, 조직은 6개 도시 24개 대학과 10여개의 고등학교로 연결되고 있으며

- 뚜렷한 명분을 내걸고 각자 임무까지 결정해 유형적 결합을 이루었다면 명칭이 무엇이었든 단체라 아니할 수 없다며 「민청학련」의 단체성을 논고

o 대법원은

-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에서 말하는 결사는 2인 이상이 결합되면 족하고, 공동목적이 있어야 하나 공동목적이 존재한 이상 그것이 결사의 유일한 목적임은 요하지 않으며

- 결사에 있어 지속성이라 함은 사실상 지속하여야 함을 요하지 않고 지속시킬 의도에서 결합한 이상 결사에 해당된다며

- 단체를 원심이 적법한 증거에 의해 단체로 인정한 점에 있어 법리 오해나 채증법칙의 위배를 찾아볼 수 없다고 판시

【 민청학련 관련자 】

o 명칭 사용 배경과 관련

- 1974.3.6. 유인태의 집에서 서중석, 유인태, 나병식, 정문화, 이철 등이 참석하여 역할분담 및 투쟁계획을 논의하면서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49)

- 그러나 1974.3.27 서울 삼양동 김병곤의 방에서 이철․김병곤․ 정문화․황인성이 모여 유인물의 신뢰도 및 대중적 설득력을 갖기 위해 유인물에 사용할 명칭의 필요성을 느끼고

- 당시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시한 ‘민주회복전국학생연맹’, ‘반파쇼민주학생연맹’(김병곤),‘반독재전국민주학생연맹’(정문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황인성)을 놓고 황인성이 제안한 명칭으로 결정

o 서중석(1심 8차, 1974.6.24), 임규영 등은 공판 시 민청학련 명칭을 중정에서 처음 들었다고 진술

o 단체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는

- 정문화는 「민청학련」은 유인물에 붙이기 위한 명칭으로, 실재한 단체는 아니며 강령이나 규약도 없었다고 진술50)

- 송무호는 9차 공판에서 연세대에서는 ‘민청학련’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유인물을 제작 배포하기로 하였다고 진술

- 이철은

10․2 투쟁」을 계기로 전국적 반유신 투쟁을 조직하기 위 학생운동 내부의 논의는 1973.12경 일단락을 맺었는데 이것은 엄밀한 조직적 역할 분담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 “우리는 반정부이나 반국가는 아니다. 더구나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일은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으나 빨갱이라는 누명만은 씌우지 말아 달라”51)고 진

각자의 인간관계를 총동원하여 폭압통치에 대항하기 위해 전국적 투쟁의지를 확인하고 전국투쟁의 연대조직 결성에 대한 필요성을 제창했을 뿐이다.52)

o 반면, 핵심 관련자들은 면담조사에서는

- 인태는 2005.10.13 면담시 「민청학련」이란 중정에서 조작한 것으로 조직을 만든 일이 없었으며, 약간의 역할분담으로 동시 다발적 데모를 해보자는 뜻으로 모인 것이 전부였다고 주장

- 안양로는 2005.10.14 면담에서, 조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과제인 유신 철폐를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을 결의한 수준이었다고 주

- 서중석은 「진실위」면담조사시(05.09.28)

․「민청학련」활동을 위한 논의에서 단체 결성 및 북한과의 연계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유신정권에 탄압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정희 정권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반국가단체로 몰기 위해 키우는 작업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였으

체명 및 구체적인 연결방법 등을 아예 만들지 않고, 상부 지등은 없으며, 화염병 등은 제작해 봐야 별로 쓸데가 없으 만들지 않아야한다는 3개 사항을 강조

한편 서중석은 1974.3.7 유인태의 집 회합에서, 이미 전국적인 조직체계와 사회 각 계층과의 연락방법 등이 완비되었다’고 했고

- 나병식도 「진실위」면담조사시(05.10.14) 1974.3.7 역할 분담을 하는 등 민청학련 명칭을 쓰기 전부터 실체적 조직은 갖추어 졌다’고 진술

【 판 단 】

o「민청학련」의 지도부로 분류되었던 이철, 유인태, 황인성, 이강철등의 주장을 종합해 볼 때,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은 대중적 설득력과 유인물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되었

- 또한 각 대학들이 동일한 명칭으로 유인물을 제작․배포하지 않는 등53)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은 유신반대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민족민주민중선언문’등 일부 유인물에서만 사용한 명칭임

o 「민청학련」이란 조직은 반유신 민주화투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투쟁기구’적 성격으로 정부전을 수행할 만한 하부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 조직에 관련되는 규약, 강령, 조직체계 등이 없었으며

- 「민청학련」은 조직체계를 가지고 움직인 조직이라기 보다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학생운동 주도세력들이 1974.4.3 전국 동다발 유신반대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편의적․일시적․임의적으로 사용했던 명칭에 불과하다고 판단

2) 조직의 성격

【 수사기관 및 재판부 발표 】

o 중정은「민청학련」의 활동은 반정부 활동을 넘어서 ‘노농정권’ 등 자유민주주제를 부정하는 폭력혁명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민족지도부 등 과도단계를 거쳐 공산국가 건설을 기도했다고 발표

o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 투쟁목표가 정부 전복 후 공산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경제질서의 확립에 있었다면 국가변란의 목적을 배제할 수 없다며

- 그 논고로서 ① 북한의 선전구호를 인용한 유인물 ② 저지선 돌파를 위한 화염병․각목 제작 기도 ③ 정부 전복 후 ‘민족지도부’ 구상 ④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정치․경제체제로 이행을 적시했고

- 유인물의 용어들이 북한의 상용용어이며 각종 구호는 북한 간첩에 대한 지령사항과 상호연관성 있는 것54)로 판단하면서 북한방송청취와 관련한 수사를 통하여 북한과의 연관성을 주장55)

「민청학련」 구호

북한 방송

일시

독재정권 물러가라

독재를 타도하라, 박정권을 타도하라

73.10.9,

74.3.27

폭력정치의 원인 중앙정보부 해체

정보폭력정치의 총본산 중앙정보부 해체

73.10.9,

74.2.4

유신헌법 폐기

유신체제 폐기, 유신독재 타도

73.10.9,

74.2.14,

1․8 긴급조치 철폐

민주를 우롱하는 긴급조치 즉각 철회

74.2.22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 즉각 석방

체포․구금된 학우들의 석방을 위해 견결히 싸워야 한다

73.12.2

74.3.20

대일 예속경제 청산

박정권은 나라의 경제명맥을 일본에 바치는 매국행위와 굴욕외교를 당장 중지하라

73.12.14,

74.2.21

지식인은 민중의 길잡이로서 투쟁의 선봉에 나서라

지식인은 민주수호 투쟁에 참여해 민족의 지성이 건재함을 과시하라

73.10.8

언론인들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라

언론인은 문필활동으로 언론봉쇄 정책을 짓부시고 식민지 통치제도를 고발하라

73.10.13

종교인은 순교자의 결단으로 민주투쟁의 깃발을 들라

종교인들에게 유신체제 반대투쟁 호소문 발송

74.2.16

임금 인상, 노동악법 철폐,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최저생활비 보장, 노동자 권익보호를 위한 적극 투쟁, 자유로운 노조활동 보장

73.11.22,

74.1.5

남북통일 사탕발림 영구집권 최후수단

박 도당은 남북대화를 영구집권 수단으로 악용

74.2.7

o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이 원심과 1심 판결이 증거없이 사실을 인정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 국보법 위반 및 내란 예비 음모에 대한 판단을 한다’며 검찰 신문조서를 적시하고 있는데

- 기본질서의 파괴를 비합법적 무력투쟁에 의해 성취해야 한다는 것은 소신이었고 방법만은 공산주의 이론에 찬동56)

- 화염병․각목 등으로 유혈사태를 유발해 정부타도후 과도적 통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를 결성57)

- (민청학련은) 현 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므로 반국가단체라고 생각58)

- 화염병 등을 사용, 국가기관을 강점하고 유혈사태를 야기시켜 정부를 전복하자는 방법론에 찬동59) 등을 들며 검찰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

o 최종적으로 대법원은

- 국헌문란 또는 국가변란 목적의 유무, 반국가단체 존재 인식의 유무 등은 사실인정의 범주에 속하는 사항으로서

- 사실심 심판관의 전권인 증거의 취사와 사실 인정이 적법절차와 자유심증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법률심에서 다툴 수 없다고 판시하면서 사실심인 하급심의 판단을 인정

o 검찰은 「민청학련」에서 살포한 13곡의 노래 가사 중「날아가는 까마귀야」라는 혁명가는 단어 1개만을 바꾸어 썼을 뿐 북한이 제창하는 노래라고 주장

o 한편,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공판 과정에서

- 유근일은 11차 공판에서 1974.3.9 이철, 유인태 등과 만나 외신 보중 한국 학생들의 데모 이슈가 불투명하여 잘못하면 용공분자로 몰린다는 등 노파심에서 이야기를 해주었고

자유민주주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입장을 밝힐 목적으로 원로들을 지지하라고 입장을 밝혔으며

그때 김수환, 한경직, 천관우, 김재주, 박순천 등 이름을 대면서 명칭을 붙인다는 것이 ‘민족지도자’라고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

- 유근일은 상고이유서에서 ‘본 피고인의 소위 범죄사실이란 나병식이 중앙정보부에서 고문과 구타와 기망에 의해 본의 아닌 허위진술서를 작성한 것을 토대로 하여 본 피고인 역시 수사관의 묵시적 명시적 협박에 의하여 강제로 작성되었다’고 주장

- 1974.3.13 박형규 목사에게 정부타도후 과도체제로 민족지도부 구성 취지의 이야기를 듣고 3.16 서중석에게 전달60)(나병식)

* 나병식은 05.10.11 면담시 유근일과‘민족지도부’얘기를 했다고 확인, 반면 유인태는 05.10.13 면담시 유근일 등이‘사회 원로들이 잘 중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와전되어 민족지도부․과도정부 등으로 작성되었다고 주장

o 김지하에게 민중봉기를 유도하여 정부를 전복할 계획이라면서 자금지원을 해달라고 요청61)(이철)

- 이철은 ‘개인적으로 정부 전복이 가능하다면 바라는 바’62) 라면서도 노농 정권 수립 등은 얘기한 적이 없고, 과도기적 통치기구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은 없다 진술63)

- 6차 공판에서 이철은 과도기적 정부수립을 한다거나 노동자 농민 등 무산대중을 위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은 없고 ‘민족지도부’ 이야기는 중정에서 처음 들었다고 진

- 이철은 검찰조사시 혁명은 불가피하다고 소신있게 이야기 했다. 정부나 중요기관의 전복은 물러가게 한다는 뜻이었다64)

- 김효순은 1974.3.23 이근성과 만나 데모를 벌여서 행정을 마비시켜 전복하는 방법을 바란다고 했다. 검찰조사시 내가 바라는 사회가 공산주의라는 생각없는 말을 한 적이 있다65)고 진술

o 공판정 진술시 나병식은 1974.2.하순경 서상섭의 셋방에서 라디오 다이알을 돌려 북한방송을 틀었으나, 방송내용은 듣지 않았고 신문지상에 「통혁당 목소리 방송」이 있다고 해서 서울에서도 잡히는가 하고 틀어봤는데 안 들렸다고 주장

o 김효순은「통혁당 목소리 방송」을 3회 청취했으나 식별이 어려 몇 마디만 들었다고 주장

o 변호인들은 국가보안법 제1조의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할 목적이 없었으므로 본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변론

【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진술 】

o 유인태는 05.10.13 면담시 종교계나 학계 등 재야 및 「인혁당재건위」에서도 나름대로 「10.2 데모」가 저항의 불길을 일으킨 이후에 각계에서 자발적으로 데모의 움직임을 보인 것이지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무슨 조직적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o 유근일 등의 경우 “내년 봄에 나라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질 것 같은데, 원로급들이 나서서 중간에서 잘 중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는 뜻의 말이 와전되어 「민족지도부」니 과도정부니 하는 식으로 작성되어 한 일도 없이 큰 피해를 보았다고 진술

o 이철은 05.10.29 면담시 기독교계통에서「민족지도부」운운하는 말이 나와 중정에서 이에 대해 ‘과도체제’라는 빌미로 사용하였는데 이상주의자들의 낭만적인 ‘막걸리’수준의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

o 서중석은 05.9.28 면담시 「과도체제」 내지 「10인지도부」등 용어는 학생들 3 - 4명이 모였을 때는 우리의 단체명도 만들지 않을 정도의 보안 속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 다만 조영래․이현배 등 선배들이 “어른들도 잘 뛰고 있으니 너희들이 잘만 뛰면 우리가 할 것”이라며 대화 중에 공상적으로 그런 용어들이 나온 적은 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유신독재하에서 거사에 참여할 학생수 등을 예상할 때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여겼다고 진술

o 안양로는 05.10.14 면담시 당시 박정희 정권의 굴복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하는 내용으로 민족지도부 운운 내용의 대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나 구체적이지는 않았다고 진술

【 판 단 】

o 당시의 유신헌법에 의한 긴급조치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법정 최고형으로 사형까지 명시하였고, 군법회의에 의한 재판을 규정,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진행

- 사법부는 사건 당사자들의 부인에도 불구, 당시 법체계하에서 민청학련이 반국가단체임을 최종 확인하였으나

o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1974.4.3전후 5개월간 유신반대 전국동시다발 시위 준비와 각 대학별 시위를 전개한 사실 이외에

- 공소장 및 검찰의견 상의 ‘공산화’를 위한 활동내지 결의를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유인물 내용 및 피의자들의 진술조서 등을 통한 유추해석을 제외하고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 주동자들이 「민청학련」데모만으로 정부전복이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유신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한다는 등 단순한 내심적 목적 또는 이와 유사한 논의정도에 그친 상태였음을 확인하였고

- 특히 정부를 참칭한다거나 주동자들의 정권탈취 등 적극적 의사가 없는 상황으로 특히 최고 리더격인 이철, 유인태 등은 ‘민족지도부’에 대해 모르고 있는 등 ‘반국가단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판단됨

o 한편, 중정 수사상황보고(92보, 74.4.21)의 「수사초점」에 의하면 유신체제에 도하는 집단에 대해 반공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용공성, 반국가단체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이미 정해진 방향에 따라 수사를 진행한 것으로 보여짐

수사상황보고 - 수사초점 주요내용

1. 관련자(특히 주동자)는 공산주의 사상의 보지자임을 입증하고 2.들이 작성, 배포한 유인물의 작성 경위와 초안을 무엇을 보고 만들었느것을 추궁하여 공산주의자임을 입증 3. 조직체계 전모를 규명, 발본색원 할 것 등을 중심으로 수사




o「민청학련」 사건관련자들은 각종 유인물의 내용 및 조직활동압적인 1인 독재 유신헌법 철폐를 통한 민주주의 쟁취와 노동악법철폐, 부정부패 해소, 구속인사 석방 등의 국민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고

o 북한방송청취 부분 및 각종 구호가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당국의 발표는 박정희 정권이 사회적 위기감 조성과 함께 사건 주모자들에 대한 처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방편으로 한 측면도 있으며

* 「민청학련」관련자들은 북한방송 청취와 관련하여 일부 관련자들은 신문매체에 의한 보도가 완전히 통제된 상황에서 국내정세 파악을 위해 청취하였다고 주

o 그 당시 학생들이 부르던 “까마귀야 시체보고 우지마라”등 노래를 친북용공으로 규정한 내용은

- 일제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하면서 부르던 노래66)였으며, 가사의 내용은 독재정권의 부패상과 비리를 의미하는 것임

□ 활동 및 목표

【 수사기관 적시 활동 내용 】

o 1973.「10.2 데모」에 고무된 운동권 학생들은 ‘유신정권 전복은 학생들의 힘으로 밖에 성사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 이철․유인태 등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여정남 등 경북대학 운동권 등 전국적 학생망을 구축해 나가면서 유신정권 전복을 위한 구체적 세력 규합을 모색

o 1974.1 이후 이철, 유인태 등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삼양동 자취방」에서 전국 각 대학과의 연락망을 구성하고 전국적인 정세를 파악, 조직체계를 완비해 나감

o 1974.3.7을 전후하여 1선, 2선 및 각 대학 조직책과 유인물 작성책 등을 선정하는 등 조직결성을 완료

o 1974.3.27경 경기 양주에서 황인성이 제안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단체의 명칭으로 결정하고 4.3을 거사일로 결정

o 북한의 주장과 유사한 혁명선동적인 유인물 10여만장을 제작, 배포 및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한 화염병 및 각목 사용 등을 연구

- 조직원 상호간의 회합․연락은 점조직으로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고 접선

- 시간․장소․관계자명에 관한 암호사용 등 비밀 지하활동 전


〈 규모 및 인원 등(1974.5.16 현재)67)

- 활동자금 출처 및 총액

윤보선 1명 400,000원

․ 종교계 인사 지학순 등 5명 1,345,000원

․ 혁신계 인사 고인순 등 8명 2,773,000원

․ 학생자체조달 김병곤 등 21명 662,000원

․ 기타 선경물산사원 김형관 등 8명 111,500원 총계 : 5,291,500원

- 인원

․ 총관련자 1,034명(검거 745명, 고지자 266명, 수배중 23명)

* 구속 230명, 불구속 23명

․ 계열별 인원(총 67명, 57명 구속)

․ 인혁당재건단체 24명(21명 구속)

․ 일본인 기자 등 조총련계선 3명(2명 구속)

․ 반정부 인사 11명(7명 구속)



















【 수사과정에서의 관련자 진술 】

o 정문화(서울대내 조직책)는 1974.3.7 총지휘 이철, 기독교책 나병식, 서울대책 정문화, 서울시내 대학책 김병곤, 지방대학책 황인성 등의 역할 분담 결정 내용 진술(1974.4.9)

o 9차 공판에서 안양로는 내가 2선 조직을 맡았다는 말은 터무니없다고 진술

* 이철은 1974.4.24일 체포된 후 4.25 신문에서 동 내용이 사실임을 진술했으나 안양로는 05.10.14 면담시 1선․2선․지휘부 등 역할분담 사실을 부인

o 김병곤(서울시내 대학책)은

- 민중․민족․민주선언(이 철 초안, 1만부), 지식인과 종교인에게 드리는 글(정문화 초안) 등 2만부, 민중의 소리(김병곤 초안) 1만부 등을 인쇄키로 결정했다고 진술(1974.4.9)

o 이철은 공판시 유신체제 타도가 목적이었다고 진술하면서 목표에 정부 전복은 없었고 데모 목적은 민생고 해결, 민주회복, 학원자유 수호, 유신헌법 폐지 관철이었고68)

- 3․4월에 벌이는 데모의 요소는 정부 타도였으나 구체적 목표는 없었다69) 고 진술

o 유인태도 ‘최종목표는 유신철폐 등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고 관철이 안 될 때는 정부는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 “기소장에는 국가변란, 정부전복, 노동정권 수립이라말이 자주 나오지만 웃기는 소리다. 당국에 경각심을 주기위모를 계획한 일은 있으나 정부가 학생데모로 전복되리라고생각조차 안했다. 이 점은 당국이 더 잘 알 것이 아닌가?”라고 반

- 유신헌법 철폐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에 주안점을 두면서 민족주내지 민주주의를 이상적인 사회상으로 보면서 스웨덴, 노르웨이같은 사회민주주의 제도를 대안으로 생각70)한 바 있다고

o 나병식은 3차(74.6.18) 공판에서 정부주요기관을 강점하고 화염병 등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고 진술

o 9차 공판과정에서 강구철은 변호인의 질문에 유신독재체제를 반대한 것이지 대한민국 헌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고 진술

o 12차 공판에서 정화영은 내가 계획한 데모의 목적은 ‘유신헌법’ 폐기를 정부가 관철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고

- 화염병, 몽둥이, 각목 등을 사용하자는 논의를 한 사실이 없으며 평화적인 데모를 하려고 했다고 진술

o 황인성(각 지방대학 조직 담당)은

- 1974.2.22 유인태 집에서 서울 각 대학 및 영남은 경북대, 호남은 전남대가 주축이 되어 전국적 데모를 모의했고(1974.4.16)

- 1974.3.27 서울 삼양동 셋방에서 이철․정문화․김병곤 등과 회합, 거사일자를 4.3로 결정했다고 진술(1974.4.9)

- 4차 공판에서 데모의 이슈로는 「유신헌법」 폐지, 민주헌정질서 회복, 서민생활 안정 등을 내세울 것을 합의하였다고 진술

【 관련자 회고록 및 면담 내용 】

o 이철은 ‘민청학련 사건에서 사형수가 되기까지’(『사법살인』, 천주교인권위) 라는 회고글에서 민청학련의 결성 과정과 활동 내용 등을 기술

- 우선 「민청학련」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각 그룹을 보면

학생운동권 선배그룹(3선개헌 반대운동시 강제징집후 복학한 이들로 서중석․유인태․안양로․정윤광․이철 등)과 70․71학번을 주축으로 한 후배그룹으로 나뉘며

이외 종교계(지학순 주교 등), 졸업생 선배(김지하․이현배․장기표 등), 정계(윤보선 등), 재야(함석헌․장준하․백기완 등), 문학계와 학계(김동길․김찬국․백낙청 등)로 크게 분류

- 10․2 투쟁을 계기로 전국적 반유신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학생운동 내부의 논의는 1973.12경 일단락

이철과 김효순이 서울대내 단과대, 조영래․이현배 등이 재야원로, 유인태가 전국 각 대학을 연결하고

지방으로는 이 철과 유인태가 전남대, 최국신을 통해 전북대, 안양로를 통해 충남대, 여정남을 통해 경북대 등을 연결

- 1974.1 전국 투쟁조직을 서울대(문리대․법대․상대), 서울(서울대․고대․연대), 전국(서울․대구․광주)의 3․3․3원칙 합의

- 투쟁계획이 확정된 것은 1974.3 하순경 경기도 양주군의 모임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을 결정

- 1974년 신학기 투쟁이 실패하고 있었지만 4.3 예정대로 투쟁을 결행하기로 했고, 4.3 서울대․성대․이대․고대 등이 시위를 전개

o 한편, 나병식은 05.10.11 면담에서 당시 고문은 받았으나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은 없었다며 조서에 기재된 내용은 모두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고 언급

* 나병식은 1974.3.7 유인태의 집에서 서중석 등 4-5명이 만나 역할분담을 하였으며 민청학련이란 명칭을 쓰기 전부터 역할분담은 이루어져 있었다고 진술

【 판 단 】

o 「민청학련」은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기보다는 전국 각 대학학생운동 세력이 긴급조치 철폐, 유신헌법 폐기, 민주화 쟁취를 위해 전국동시다발 시위를 전개하여 유신체제 타도투쟁을 벌여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 당시 전국학술토론회 등을 통해 알고 있던 학생운동 진영이 효과적인 유신반대 운동을 전개하려고 연락체계를 구성하여 활동한 것임

o 사건 관련자들은 유신헌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거리가 멀다고 인식 하였고

-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구호로서 ‘격문’ ‘민족․민주․민중선언문’ ‘지식인․언론인․종교인에게 드리는 글’등 유인물, 진술내용만으로는 사건관련자들의 최종목표가 ‘노농정권 수립’으로 추론하기 어려우며

- 「민청학련」의 최종목표는 ‘노농정권 수립을 통한 사회주의 정부건설’에 있다기보다는 유신정권 타도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이었고

-「4․3 유신반대시위」준비 모임은 폭력혁명을 통한 인민혁명하려 하였다기 보다는 박정희 정권의 폭압정치에 항거하위한 방법으로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통하여 민주회복을 구현하려고 한 것이라고 판단됨

o 박정희 정권 폭압통치의 폭력성에 비해, 데모 저지선을 뚫고 자신들의 의견을 알리기 위한 방편으로 화염병 제작 시도를 한 것 등은 폭력의 정도가 약한 것으로 보임

o 중정 수사상황보고(92보, 74.4.21)의 「수사초점」에 의하면「민청학련」 관련자들의 이적성을 부각하기 위한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등

- 수사이전에 이미 발표된 대통령의 담화문 내용과 수사결과가 일치되도록 만드는 전형적인 짜맞추기 수사가 진행된 것으로 판단

수사상황보고 주요내용

- 투쟁방법과 목표를 북한의 대남적화 통일 전략전술인 인민민주주의 혁명 완수 를 위해 민족통일전선술에 따라 우리정부를 폭력으로 타도하고 과도정부를 거 쳐 종국에 가서는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 내용 조사

- 배후관계에 있어 간첩의 지령에 의한 것이다. 재일조총련의 지령이다. 국내혁신 계의 조종 하에 움직이고 있다. 북괴대남방송을 청취하고 그대로 행동했다 하 여 친북용공으로 규정하기 위한 방향으로 수사

o 1974.4.3. 박정희 정권은 “소위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으로 불순세력의 배후조종하에 그들과 결탁하여 ‘인민혁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내용의 특별담화문 발표

- 박정희는 관계당국의 수사가 있기도 전에 학생들이 ‘인민혁명’을 하려한다는 결론내리고, 재야 및 혁신계를 학생운동의 배후로 만들어 유신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

o 1974.4.5. 문공부에서 발행한 “국가변란획책 전국청년학생총연맹의 불온상”제하의 책자 내용에 사건 관련 자료, 사건내용 등이 총망라되어 있고

- 중정의 자료 중 ‘3․30조치’라는 문서가 존재하는 것 등으로 볼 때, 1974.4.3. 긴급조치 4호 관련 박정희 담화문 발표 전부터 사건인지를 통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었음

3) 「인혁당 재건위」와의 관계

o 수사기관71) 및 사법부에서는

-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은 71.4경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포지한 당시 경북대 정외과 4년에 재학 중인 여정남을 포섭

- 서울을 거점으로 하여 전국적인 학생 조직을 결성해 민중봉기 점화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 민자통 경희대 위원장 이수병과 전인민혁명 당원 김용원에게 인계

- 이들은 다시 이철, 유인태, 안양로 등에게 여정남을 소개함으로써 전국민주청년총연맹 구성과 활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거사자금을 지원하는 등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고 진술

o 중정조사에서 나타난 여정남의 활동을 보면

- 1974.4.18 중정 조사에서

김용원․이수병 등의 지령을 받아 이철․유인태 등과 민족적 연합전선 형성, 독재정부 타도, 노동자․농민을 위한 진보적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자는 등을 모의하고

김용원으로부터 18만원을 수령해 학생조직에 전달했고, 도피중 1974.4.15경 김용원의 지시로 이 철과의 접촉을 단절했다고 진술

- 1974.4.25 중정 조사에서는

하재완으로부터 북한 평양방송의 맑스주의 방송대학 강좌 청취는 물론 공산주의 국가건설을 위한 3단계 혁명론을 교양받고

* 학생데모로 4.19와 같은 사태 조성 → 과도정부형태의 사태수습위 구성 → 노동자․농민 세력을 규합, 사회주의 혁명 완수

전국적 학생조직을 형성․강화하라는 하재완․이재문․서도원의 령에 따라 1973.9-1974.4간 서울대 이철․유인태, 경북대 이강철․정화영․임규영 등을 포섭 조정하여

사상이념을 교양지도하는 한편, 이들로 하여금 민청학련을 구성하고 학생데모를 일으켜 민중의 자연발생적 참여로 전국규모의 데모를 유발하라고 지령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

- 검찰 공소장에서는 여정남이 인혁당 재건위와 민청학련간 연계와 민청학련내 각 지방대학 연계 역할 정황을 적시하고 있는데

여정남은 이철․유인태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직 준비 상황 및 거사계획 등을 파악, 격려했고

․이수병․김용원 등 소위 ‘인혁당 재건을 위한 서울지도부’ 인사들에게 거사준비 상황을 수시 보고하고 거사자금을 지원받아 이철․유인태 등에게 전달했으며

하재완․서도원 등 대구 인사들에게 학생운동 지도자 및 서울 지도부 인사들과의 접촉 및 활동내용을 보고

- 한편, 하재완은 여정남과 관련 중정 조사시72)

․1973.10 자택에서 서도원을 접선, 대구 지방만의 산발적인 학생데모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으니 여정남을 서울로 보내서 서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학생조직을 확대하자고 합의

서울대와의 연결방법은 삼락일어학원 강사 이수병에게 여정남 학원 청강생으로 가장, 접선케 하라는 지시를 받고 1973.12하순 여정남을 상경시켜 이수병과 접선시켰다고 진술

【 ‘민청학련’ 관련자 증언 】

o 여정남의 인혁당 배후조종 문제로 수사 초기 이철, 유인태가 여정남을 조종했다는 진술서 요구에 대해 “선배를 어떻게 조종하느냐”고 항의하자 이후 이철 등이 여정남의 배후조종을 받은 것으로 변경

- 너희 서울대 애들이 다 해 놓고 뭔 얘기냐”며 추궁하던 것을 여정남의 배후조종을 받았다는 진술로 바꾸어 “나이한참 위고 하니 너희들이 지도받은 것으로 하자”는 선에서 수사 종결73)

- 유인태는 「진실위」면담조사시(05.10.14) 「민청학련」의 이른바 배후세력에 대해「통혁당 사건」의 영향으로 선배들의 관여를 경계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 「민청학련」 자체가 상하부 조직체계나 연대틀을 체계적으로 갖춘 실체적 운동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배후세력에 대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며

1974년 봄 여정남을 제외하고 「인혁당 사건」관련자를 만난 적이 없고, 여정남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일도 없으며

중정의 처음 조사는 여정남에게 지시를 내린 것으로 되었는데, 그 후 1974.4.19~20경부터는 여정남이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꾸며졌고

여정남은 이론적인 사람은 아니며 같이 세미나를 한 적도 없고, ‘인혁당’ 관련자 가운데 1-2명 정도가 사회주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정남은 공산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는 식으로 사건을 만들기 위해 조작했다는 것이 진실임

- 이철은

여정남에게 교양을 받거나 조직, 시위와 관련하여 지시를 받은 일도 일체 없고, 경북대 출신인 여정남이 서울에서 나나 다른 서울대 학생들을 지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74)

․ 인혁당이나 혁신계 인사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여정남도 우리들에게 지시를 할 입장도 아니었고 실제로 지시를 한 일이 없음

- 서중석은

인혁당재건위」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고 다만 이현배와 수 접촉시 “서울과 경북지역의 선배그룹들도 움직이고 있다”는 일반적인 말만 들은 적은 있지만75)

인혁당재건위」가 있었다손 치더라도 우리 학들에게 영향력미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10.2 데모」때에도 여러 곳에서 선이 들어왔지만 혼선만 빚어졌기 때문에 ‘학생들의 주도하에 학생들이 책임진다’는 대원칙을 세웠고

엘리트 의식을 포지한 서울대가 데모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경북지역이 주도적으로 데모를 조종한다는 것은 있수 없는 일임

- 나병식은76)

․ ‘인혁당 재건위’사건과 관련해 혁신계들은 개인적로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었겠지만 조직적으로 결합할 수 없는 조건으로 ‘민청학련’ 사건은 학생과 재야 중심으로 반유신 활동을 벌인 것이라고 하면서도

․ 당시 고문은 받았으나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은 없었으며 조서에 기재된 내용은 모두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고 언급

- 안양로는

1969년부터 서울 문리대, 경북대, 고려대, 연세대 등 써클 연합회에서 전국 학술토론회를 진행하여왔는데 고려대 한맥회에서 주최한 학술토론회에서 여정남을 만났고

여정남은 민주화운동의 헌신적 선배로 인식하였으며 서로 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77)고 언급

o 당시 수사관들의 의문사위원회 면담진술에서

- 중정 6국 계장 윤종원은

․ 여정남의 진술내용 이외에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의 연계성을 입증할 증거는 없다

․「민청학련」은 유인태가 총괄기획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리드하여 인혁당 재건위에서 배후조종하기는 어려웠다

- 사건 수사관인 손중덕은

․ 의문사위원회 진술 당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것은 아니고78)

우리들은 중정에서 인혁당이 「민청학련」을 배후조종 했다는 발표반발을 했으며 우리는 이 사건을 순수 대공사건으로 다루었다고 하였으나

* 본 위원회 면담시, 의문사위원회에서 그런 의미로 진술하지 않았다고 주장

- 당시 수사관인 임찬욱은 여정남이 여러 학생을 만나서 어느 정도 관계가 있었것으로 생각하지만 학생 한 명을 통해서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진술함

【 판 단 】

o 당시의 문건과 이철, 유인태 등 「민청학련」의 핵심관련자들에 대한 면담조사를 통해 판단할 때, 이들은 여정남의 배후에 「인혁당 재건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 아니라

- 「인혁당 재건위」관련자들에 대해 개인적으로라도 면식이 없는 것으로 확인

- ‘학생들의 힘에 의한 학생들의 책임으로’, 내지 ‘주도권은 서울․서울대․서울대 문리대에 있다’는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

- 「민청학련」측은 공소내용과 같이 서도원, 도예종 등에 의한 「민청학련」 배후 조종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전혀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

o 여정남과의 관계는 최소한 이철, 유인태 등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교류를 가지고 유신반대 전국동시다발 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확인되나

- 여정남의 활동과는 별도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민청학련」에 대한 개인적 활동내용 내지 동 활동을 목적으로 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상호간의 활동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의 배후로서 조직적이고도 구체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확증은 당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진술조서 등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음

4) 일본인 및「조총련」과의 연계성

【 수사기관 및 재판부 】

o 중앙정보부는 1974.4.25「민청학련」 사건 발표시

- 일본 좌익계의 교내 자치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다찌가와가 조총련의 비밀조직원으로 재일 민단원을 자칭하고 있는 곽동의의 원조아래 우리나라에 수차 드나들면서

- 1966년 이후 일본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던 하야가와와 더불어 폭력혁명을 선동․금품제공 등의 활동을 했다고 발표

o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도 검찰관 진술(1974.7.9)에서

- 1973.12.25~26 양일간 접촉에서 이철․유인태는 현 정부를 전복시키고자 전국적인 학생조직을 통해 투쟁한다고 하였고

- 일본인들은 이철․유인태가 공산주의자로서 이들이 수립하고자 하는 국가가 공산주의 정권이라고 단정하였다고 적시

* 1974.7.13 두 일본인에게 징역 20년 선고, 1975.2.17 형집행 정지 후 강제출국

【 사건 당사자 신문시 진술 】

o 조OO(이철의 경기중 4년 후배)는 1974.5.1 증인신문에서

- 이철․유인태는 다찌가와와 회합시 ‘우리의 목적은 현제도를 무너뜨리고 노농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 다찌가와가 ‘그렇다면 공산주의의 실현을 말하는 것으로 찬성하는 데 과연 가능하겠느냐’라고 묻자 ‘전국 학생들을 조직해 일제히 봉기하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고 진술

o 당시 중앙정보부의 수사상황보고에 첨부된 「민청학련 사건 관련 일본인에 대한 수사지침」이라는 문건에 의하면

- “초기수사단계에서 조서에 올린 사항으로서 범죄요건에 배치되거나 일본인의 관여사실을 부정하게 될 자료로 쓰일 수 있는 부분, 전후 모순되는 부분 삭제”하라고 하고

- “조서를 정리할 때 경력, 모의과정, 목표배후, 자금, 활동, 조직 등 상황은 지난번 부장님의 ‘수사상황발표문’을 참조하여 거기에 맞도록 체제를 갖추어 정비”하고

- “太刀川(다찌가와), 早川(하야가와) 등이 7,500원을 유인태에게 준 것을 ‘취재에 대한 사례비조로 7,500원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진실에 반하는 것이니 ‘폭력혁명을 위하여 애쓰고 있는데 자금이 없어 라면으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고 교통비도 없다는 사정을 말했더니 나도 같은 사상이라면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되어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한다. 적은 돈이지만 폭력혁명을 수행하는 자금에 보태어 쓰라고 하면서 주기에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되풀이 하여 早川(하야가와)과 함께 전하여 주기에 마지못하여 받았습니다’라고 표현키로 하고”

- “같은 사상이라고 한 것은 정부타도에 공감한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와 같은 표현은 내란 선동의 표현으로는 되지 않으니 太刀川(다찌가와), 早川(하야가와)는 돈 7,500원을 주면서 “우리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학생이 주동하는 폭력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 정권이 지배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등 선동하는 것은 뚜렷이 표시하도록 했다.

- 또한 당시 통역으로 참여한 조00은 이 사건이 종결된 후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특채되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참고인 진술조서를 완벽하게 작성하여 증거보전 신청을 하여 조서의 증거능력을 굳히기로 하였음”이라며 중앙정보부는 그의 “진술조서에 반드시 나타나야 할 점”으로

(1) 太刀川(다찌가와), 早川(하야가와) 등 두 일본인이 이철, 유인태에게 기자로서 인터뷰한 것이 아니고 폭력혁명을 선동, 사주, 방조하였다는 점

(2) 太刀川(다찌가와), 早川(하야가와)는 물론이고 이철, 유인태가 공산주의였다는

(3) 太刀川(다찌가와), 早川(하야가와) 등이 이철, 유인태 등 학생운동자들을 만나기 위하여 집요하게 조직휘와 접근한 상황

(4) 太刀川(다찌가와)가 이철, 유인태 등에게 농촌계몽을 가장한 농촌침투, 사회사업을 위한 농촌계몽의 방법을 쓰는 것이 당국에 발견되지 않고 좋을 것이라고 하는 등으로 반정부 투쟁방법을 소상히 교시하였고 이철, 유인태 등이 이에 적극 찬동하였다라고 하는 등 사항에 대한 진술을 완전히 수록함으로써 太刀川(다찌가와), 早川(하야가와) 등이 정부전복을 위한 내란음모를 하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보전을 확보하도록” 지시하는 등

- 일본인들의 진술을 어떤 방식으로 삭제, 왜곡하고 중앙정보부에 협조적인 통역으로부터 어떤 진술을 받아내어 내란음모의 증거로 삼을 것인가를 상세히 지시하였고

- 중앙정보부가 조총련 비밀조직원으로 지목한 곽동의는 당시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던 김대중 구출운동의 핵심인물로서, 곽동의와 다찌가와는 서로의 관계가 취재원과 기자 이상의 관계가 아니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음

- 조○○의 진술은 1974.4.29(100보)자 중앙정보부 수사상황보고에 첨부되어 있는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중정이 이철․유인태 등과 두 일본인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려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음

o 이철은 동일 증인신문에서

- 회합시 다찌가와가 ‘한국에 가서 학생지도자를 만나 격려하라는 곽동의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다’고 말했으며

- 유인태가 ‘정부가 학생데모를 무력으로 제압할 경우 싸울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북으로부터 받아들일 의향이 있느냐’고 물어보며 주선해 보겠다는 의향을 표명하였다고 진술

o 유인태의 경우

- 1973.12.28 다찌가와와 인터뷰시 이철이 가능하다면 무장까지 하면 좋겠다고 언급했으나 자신이 삭제를 요청했으며

- 다찌가와로 부터 ‘바라는 이상사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서독의 사회민주주의 같은 것이라고 했다고 진술79)

* 이때 이철은 능력대로 일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사회라야 한다고 첨언

- 또한 다찌가와가 ‘이북방송이 남한의 현실을 정확히 보도하고 있으니 정보 입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했고

- 1974.4.2 다찌가와가 유인물 제공을 요청했으나 ‘각 대학별로 두사람 정도밖에 모르는 것을 미리 줄 수 없으니 내일 오후에 주겠다’고 약속하고 다음날 7매를 전달했다고 진술80)

o 하야가와는 다찌가와의 확실한 정체는 모르나, 곽동의의 지령으로 데모 선동을 위해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진술81)

o 한편, 이철은 변호사 면담과 공판시 검찰관․변호사 신문 등에

- 일본인과 관련 외교적 문제가 있는데 17일 공판할 때 검찰 범대로 진술 나중에 사실대로 밝히자고 했고

- ‘다찌가와 등이 무기는 이북에서 받는가 하기에 그렇지 않다. 일본을 통해서도 받지 않겠다’고 진술82)했으며

- ‘다찌가와가 이북으로부터 무기를 받아들이겠느냐고 해서 학생운동의 함정이라고 했더니 원한다면 일본을 통해 받아주겠다며 일본 공산당 학생과의 연락을 제의했다’고 진술83)했고

- 이북방송 청취얘기는 다찌가와가 어떻게 정보를 입수하느냐고 해서 어떤 사람이 이북방송을 들어 그것을 통해 안다고 했다고 진술84)

o 유인태도 다찌가와가 한국사정은 이북에서 정확하게 보도한다고 하며 북한방송 청취를 권유했고, 이북으로부터 무기 구입의사를 묻자 이철이 그 점이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 했다고 진술85)

【 곽동의 면담조사(05.8.18) 】

o 다찌가와는 김대중에 대한 취재 문제로 안면 정도 있는 사이로 한국에 가서 취재를 해 보라는 등의 주문은 한 적이 없고

o 당시 다찌가와는 이철․유인태 등의 이름을 대면서 이들이 학생운동의 리더인데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으며

o 사건 당시 일본인 구속과 관련, 일본 TBS 방송에 출연해 이철․유인태의 이름을 아는 정도로 일상적 취재에 응한 것이며, 지시를 내리거나 한 적은 전혀 없다고 답변했다고 주장

【 민청학련 관련자 주장】

o 이철, 유인태 주장

- 「조총련」국제공산당을 배후로 끌어들이는데 이된 다찌가와와 하야가와에게 자금을 받고 폭력혁명을 사주 받았다는 진술을 강요받았으나

- 두 일본인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가들을 우호적으로 취하는 외국인 기자로, 신학기 학원가의 투쟁계획에 대해 취재요청을 해와 어머니가 재일교포인 조○○의 통역으로 유인태와 이철을 인터뷰했는데

- 이것은 조○○의 거짓 자백으로 인해, 우리가 두 일본인으로부터 폭력혁명을 사주 받았으며 자금을 받았다는 것으로 각색되었고

- 두 일본인은 일본공산당 내지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자들로 규되고 「민청학련」의 배후라는 혐의로 구속됨으로써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것이라고 주장

o 유인태는

- 기자와 취재원으로서의 대화 외에 아무 말도 없었고, 다찌가와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다찌가와의 사상이나 성향을 파악할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하면서도

* 다찌가와는 1993.11.3 「민청학련」계승사업회 결성식에서 당시 유인태를 만나 4.3프로그램을 취재하고 라면을 먹으면서 고생한다는 얘기에 동정과 공감이 가 7,500원을 준 것이 나중에 7만 5천원으로 변했고 그 성격도 공작금으로 변해 북한과 연결되었다는 각본이 만들어 졌다고 주장

- 회고록에서 ‘일본인들이 데모 무력진압에 대비해 무장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무기구입 주선을 얘기하기도 했으나 영향을 받거나 지원받은 것은 없었다고 주장86)

* 그러나 동인은 05.10.13 면담에서는 당시 송종의 검사 등이 반일 감정 등을 들며 회유하여 애국적 차원에서 무기부분을 진술했다며 모두 조작이라고 주장

【 판 단 】

o 일본인들이 유인태 등과의 접촉과정에서 ‘무장’ 운운하는 발언을 한 사실은 있지만, 중앙정보부가 조총련이나 일본공산당이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한 발표는 전혀 신뢰할 수 없으며 근거가 없이 조작된 것으로 판단되고

- 이철의 변호인 황인철과 접견기록에 일본인과 관련 외교적 문제가 있는데 17일 공판할 때 검찰 범대로 진술한 후 나중에 사실대로 밝히자고 황인철 변호사가 말한 사실로 보아 당시에도 일본인과 관련한 부분은 정치적 고려를 한 것으로 보여짐

- 곽동의87)의 지시에 의해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다찌가와의 력선동을 했다는 구체적인 연결점을 파악하기 힘든 상황인데

- 공소장상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기자와 취재원으로서 만남 및 대화내용만으로, 곽동의를 통해「조총련」이 「민청학련」의 배후조종했다라고 지목하기에는 제반증거 및 정황적으로도 무리가 있다고 판단됨

5)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의 인권침해

(가)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o 정문화는 1차 공판정에서

- 중정에서 1달 정도 수사를 했는데 잠을 안 재워서 정신적인 고통이 많았고

- 매도 많이 맞고 물도 많이 먹었다. 검찰에서는 자유분위기였으나 중정에서 넘어와서 심리적 압박을 갖고 있었다라고 진술

o 이근성은 1차 공판정에서

- 중정에서 몸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진술

o 또한 상고이유서에, 신문할 때 언제나 정보부원이 동석하였고 검찰관 신문에 대하여 부인하면 정보부에 다시 되돌려 보내겠다고 위협하기도 하고(정윤광의 경우) 또한 실제로 정보부에 되돌려 보내 고문을 받게 하기도 하였음(서중석, 김효순의 경우)

o 상고이유서에서 황인성은 각 조서의 작성과정은 공갈, 불면, 매질, 고문 등의 강제수단에 의한 조작이라고 주장

o 피고인 등은 사법경찰관서에서 조사시 심한 고문을 당했거나 위계에 넘어가서 사실이나 본의 아닌 진술을 강요당했고

- 검찰관의 조사단계에서도 그러한 공포 분위기가 계속되었으며

- 민청학련 사건관련자들은 구타 송치 기관원의 입회 등의 방법으로 자유로운 진술을 하지 못했으며 불러주는 대로 자필 진술서 작성하였다고 주장

o 검찰은

- 피의자들이 수갑도 풀고 담배와 다과도 제공받으면서 극히 부드럽고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조사를 받았다며 신문조서 작성시 전혀 인권 침해가 없었다고 주장88)

o 피고인 공판정 진술

- 이철은 검찰관이 “조사할 때 고문을 받았으냐”는 질문에 그런일 없다. 아주 극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언급

- 법무사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등 피고인 전원에게 “검찰관 앞에서 조사 받을 때 폭행이나 협박을 받음이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았나”라고 묻자 피고인 공히 ‘예’라고 답

o 피고인 증인신문시 진술(검찰, 변호인 동석)

- 정찬용, 박형규, 유홍준 등 10여명 공히 검찰앞에서 자유로이 진술했다고 진술

o 사건관련자들의 고문 주장

- 1974.3.28․29 검거된 학생들이 많은 고문을 당함89)

- 서중석은 「진실위」면담조사시(05. 9.28)

․ 수사초기 이철․유인태 등이 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타 피의자들이 진술한 부분들에 대한 확작업의 중심이 나였기 때문에 취조관 4 - 5명으로부터 많은 가혹행위를 받았는데

․ 지금 생각해보면 중앙정보부가 수준에 맞추어 고문을 했다고 여겨지며 잠안재우기(7일여간)․손가락 비틀기․슬리퍼로 뺨때리기 등 육체적 고문을 당하였는바

선배들로부터 “맞을 때에 등짝을 맞으면 아무리 맞아도 후유증이 없다”. “잠을 재우지 않더라도 순간순간 눈을 감고 잠을 취하라”는 등 조언을 일찍부터 들어왔기 때문에 그대로 했고

전문적으로 나를 취조하던 수사관은 3-4회에 걸쳐 교체되었으며, 6국 지하층에서 발가벗겨져 물을 붓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는 물고문은 2회(1회 3분가량 소요) 당했는데

․ 취조관은 전국데모 및 ‘민족지도부’ 구성 문제와 화염병 투척을 통한 중앙청 장악과 정부전복, 그리고 이철, 유인태 등 관련자들의 은신처 및 음모내용 등에 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사하였으

수사말기에는 내가 끝까지 부인으로 일관하자 지하방에 비치손목의 1/3 굵기의 쇠가 섞인 밧줄로 나를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전기고문도 해야겠다”면서 협박하였으나, 당시 이미 이철․유인태가 체포된 후라서 그런지 조사의 혼선을 피해 그냥 넘어간 적도 있음

검찰 조사시에는 담당 검사인 문호철로부터 슬리퍼로 뺨을 맞적이 있고 “다시 중정으로 보내야 되겠다”면서 차에다 태웠다가 도로 돌아왔는지, 아니면 중정까지 갔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진술

- 안양로는 면담조사시(05.10.14)

․ 물․전기고문은 당하지 않았지수사 각본에 의하여 원하는 진술내용을 해주지 않을 때 몇 일을 잠을 재우지 않고 야전 침대목 등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진술

o 또한 대법원은 검찰 신문조서의 임의성 문제와 관련

- 유죄의 증거로 인용된 것은 검찰관의 피의자 신문조서와 증거물 뿐 이라며 중정 등의 피의자 신문조서․진술서 등을 배제했고

- 피고인들이 공판정에서 고문 등이 없었고 피의자 신문조서․진술서 등의 성립의 진정도 인정하였음을 들어 증거능력을 인정

【 판 단 】

o 「민청학련」 사건 수사과정에서 당시 수사관행화 된 가혹행위 등이 폭넓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판단되는데

- 관련자들을 면담한 결과 가혹행위(구타, 잠 안재우기 등)가 피의자의 진술 부인 및 여타관련자들에 대한 부인, 공소 내용 중 이적성 내지 주의적 사상과 활동 규명을 위한 무리한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이루어 졌다고 일관되게 주장

- 당시 교도관들의 진술은 중립적인 당사자로서의 진술로서 피고인들에 대한 강압수사가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을 개연성을 입증할 근거가 될 수 있고

- 가혹행위가 자행되는 현장은 가족 및 변호인의 접견권이 금지되는 정보부 건물이었다는 점도 가혹행위 실행의 개연성을 높여줌

- 당시 폭압적 유신체제 하에서 정보기관들이 광범위한 강압수사관행이 있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사실이라는 점도 고려

o 다만, 가혹행위의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중정 수사관들과 경찰들의 경우 본 위원회 면담과정에서 일관되게 고문 사실을 부인

(나) 피고인의 방어권 침해(면회 및 변호인 조력 금등)

o 사건 관련자 및 교도관들은 의문사위원회와 본 위원회 면담과정에서 당시 공판정에서 사실관계 대하여 ‘예, 아니오’ 형식으로 답변토록 강요당하고, 헌병들이 도열해 있는 상황하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재판을 진행하였다고 주장

o「민청학련」사건 관련 김지하 피고인 11명을 변론하던 강신옥 변호사는 법정에서

- 법은 정치의 시녀이며 권력의 시녀이다. 검찰관이 애국학생을 내란죄,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사형에서 무기를 구형하는 것은 사법살인 행위이고

- 직업상 변호인석에는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들과 뜻을이 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

-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좋으며 악법과 정당하지 않은 법에 대하여는 저항할 수도 있다며

- 그 악법을 적용하여 다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의 변론을 하였다는 혐의로 구속90)

* 강 변호사는 1974.9 1심에서 징역 10년․자격정지 10년, 2심에서 항소기각 판결을 받고 대법원 형이 확정되었다가 1988.3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음

o 한편, 1974.10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시로 자리가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가족 중 한사람에게만 방청이 허락되었고

- 1974.10 김종필 총리는 국회에 출석 “외신기자들의 경우 재내용을 잘못 이해해 보도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등 방청이 불허됨

o 재판부는 재판정 협소를 이유로 변호사 13명, 국방부 출입기자단, 주한일본대사관 일등 서기관 手島堅持, 사건 관련자 가족 등 50여명 등 소수인원만 공판을 방청토록 조치하였음(인혁당 구속자 가족 공판조서 변조 등 사실에 대한 내사결과보고 1977.12)

* 군법회의 서기 조규철은 본 위원회 면담에서 당시 공판정의 인원수용 능력에 따라 방청객이나 기자 등의 출입을 어느 정도 통제한 것은 사실이라고 진술

o 중정 수사상황보고91)에 의하면 1974.4.26 비상보통군법회의 관할관으로부터 서울구치소에 구속중인 피의자 47명에 대하여 군법회의법 제 245조 및 131조에 의거 가족, 변호인, 기타 일체의 접견 금지 결정을 받아 서울 구치소장게 시행토록 조치했고

- 이용택 6국장이 1974.4.26 17:30-18:30 서울구치소를 방문하여 수용자들의 분리수용현황(감방교환 등), 금지조치(접견․차입․통모 등)이행상태 등을 점검

- 1974.4.27부터 6국 수사관 2명을 서울구치소에 고정 배치하여 피의자 감방분리 수용, 접견 및 물품 등 차입금지, 건강․급식상태․통모 및 기타사고(자해 등)등에 대한 조정․감독 활동을 함

o 윤종원은 의문사위원회에서 이용택 국장이 피의자들에 대한 접견을 금지시켰다고 진술

- 당시 수사관 나OO은 의문사위원회에서 중정은 피고인에게 변호사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고지하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변호사가 중정 6국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고 진

- 이OO(접견영치과 교도관)는 사상범의 경우에는 검찰이나 중정에서 면회금지 등을 결정하여 통보하면 지시에 따라 면회금지 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증언

o 재판정의 방청인 제한 주장 당시 재판정이 협소함에 따라 부득이 가족과 국방부 출입기자단 등 50여명으로 제한하였을 뿐 공개재판으로 심리가 진행되었음

o 재판정에서 증인채택 및 반대신문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부분 또한 재판자의 재량권 행사로 인정

【 판 단 】

o 중정은 군법회의법을 근거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접견 금지 명령을 내려 가족, 변호인 접견권 등 피고자의 방어권을 침해함

o 재판과정은 자유심증주의 남용, 진술기회 제한, 가족의 접견금지, 외신기자 법정취재 금지, 공포분위기 조성 등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만한 여러 문제들이 발

- 검찰과 재판관들은 피고인의 발언을 수시로 제지하여 재판의 공정이 의심받을 수 있는 부분 여지가 있음

- 방청제한은 재판정의 수용규모, 질서 유지를 감안한 부득이한 조치인 것으로 판단됨

마. 소 결

o 1974.4.5. 문공부에서 발행된 “국가변란획책 전국청년학생총연맹의 불온상”제하의 책자에 당시 유인물, 사건 내용 등 수록되었고

- 중정의 3․30조치라는 수사상황보고 등이 있는 것을 볼 때 1974.4.3 박정희 담화문 발표 전부터 관련 사건을 인지, 사건 수사를 진행한 것으로 판단되며

o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은 전국 동시다발 시위의 필요성과 유인물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였고

- 「민청학련」은 조직이 실재하였다기 보다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학생운동 주도세력들이 1974.4.3 전국동시다발 유신반대시위를 위한 준비모임으로 판단됨

o 유신헌법과 동법에 의한 긴급조치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법정 최고형으로 징역 5년 이상 사형까지 명시하였고, 비상군법회의에 의한 재판을 규정

- 사법부는 사건 관련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당시 법체계하에 「민청학련」이 반국가단체임을 최종 확인하였으나

o 「민청학련」의 최종목표는 노농정권 수립을 통한 사회주의 정부건설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유신정권 타도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에 목표를 두었고

o 「인혁당 재건위」와의 관계는 여정남과의 일정한 관계가 있지만 「인혁당 재건위」가 「민청학련」 배후로서 조직적이고도 구체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확증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진술조서 등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o 조총련과의 관계는 곽동의의 지시에 의한 다찌가와의 폭력선동이라는 구체적인 연결점이 없고, 기자와 취재원과의 만남과 대화내용만으로 조총련을 ‘민청학련’의 배후라고 지목하기는 어렵고

o 「민청학련」 사건 수사과정에서 광범위한 가혹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 수사과정에서 가족, 변호인, 기타 일체의 접견 금지조치를 통하여 피고인의 권리 행사에 제약을 받았음이 확인됨

o 소위 「민청학련」 사건은 폭압적인 유신정권에 반대하여 전국동시다발 시위를 준비하고, ‘민족민주민중선언문’등의 유인물을 제작 배포한 유신반대를 위한 활동으로써 이를 당시 박정희 정권이 반국가용공단체로 규정하여 학생운동을 탄압한 사건임

3. 인혁당재건위사건

가. 시대적 배경

o 1971년 선거와 정권의 정치적 위기감 고조

- 1971.4.27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비록 선거에서는 졌지만 43.5%의 득표율로 서울에서만 58%의 지지를 얻어 39%를 얻는데 그친 박정희 후보를 압도

- 5.25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44석에서 89석으로 의석이 증가한 반면, 공화당은 이효상․박준규 등 주요 당직자들이 대거 낙선하는 등 서울 이외의 주요 도시에서 苦戰

- 1971년의 양대 선거는 박정희에게 선거라는 절차적 정당성 확보 기제에 대한 불신과 함께 자신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과 지지철회를 확인시켜줌으로써 유신으로 나아가는 결정적 계기

o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 1972.7.4 이후락 중정부장과 김영주 노동당조직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원칙」이 포함된 합의문 발표

-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이후락이 1972.5.2-5.5간 북한을 방문 김영주․ 김일성과 회담하였고, 박성철은 5.29-6.1 서울을 방문, 이후락․ 박정희와 회담을 가져 7개항의 공동선언문에 합의

- 7․4남북공동성명은 5․16 쿠데타 이후 인혁당․통혁당 사건 등 정권의 탄압으로 잠잠하던 혁신계 인사들이 다시 한번 “민주주의와 통일운동”을 매개로 활동을 재개하는 계기로 삼고자 함

o 7․4남북공동성명의 정치적 활용

- 박정희정권은 국제적 데탕트무드에서 국내의 정치적 도전과 압력 밀려 남북대화를 추진하되,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적 조치를 취함(계엄령․유신개헌․긴급조치 등)

-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얼마 후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통해 국내정치의 위기상황을 돌파했고, 김일성은 1972.12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여 지배체제 강화

o 유신체제의 등장

- 1972.10.17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가운데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 언론․출판․방송의 사전검열, 대학의 휴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 박정희정권은 국가주의와 반공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국민총화론민족주체론․한국적 민주주의 등의 수사를 통해 유신체제 수립을 정당화하면서 폭압적 지배체제 구축

o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

- 최소한의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마저 부정하는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1973.8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외에 박정권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목소리 고조

- 1973.10.2 서울 문리대 반유신 시위 촉발 이후 각 대학과 고등학교, 종교계, 재야, 언론계 등을 중심으로 반유신 시위 본격화

- 정치인․언론인․교수․종교인․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유신헌법 폐지를 위한 100만인 개헌서명운동 전개

o 긴급조치 선포

- 1974년은 유신체제 출범 2년째로서 1.8 광주에서는 전남대생 1천여 명이 개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등 학원가의 반유신 시위가 잇따르자 1․8 긴급조치 1호(개헌논의 금지)와 2호(비상군법회의 설치) 선포

- 1974.4.3 민청학련 주도로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에서 일제히 반정부시위가 전개되면서 4.3 22:00부로 긴급조치 제4호를 통해 민청학련과 관련된 모든 활동 불법으로 규정

※ 당시 시위 주도 학생들은 19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과 1971년 교련반대투쟁을 주도하거나 1973년 10월의 문리대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로 74년 시위 당시에는 각 대학간․지역간 연계 구축을 시도

- 민청학련의 ‘4․3시위’가 발생하자마자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이를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려는 시도로 규정하고 곧바로 긴급조치 4호를 선포

o 혁신계의 활동 재개

- 1973.10.2 서울대 문리대 시위는 72년 국가비상사태 선포 이후 일시적 잠복상태에 있던 민주화운동에 물꼬를 텄던 사건으로

이 사건이 발생하던 당시 혁신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신중론과 즉각투쟁론 간의 논쟁이 있었는데, 신중론은 운동의 방향을 학생운동에서 노동현 쪽으로 전환시키려 했고, 즉각투쟁론은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계기로 촉발된 유신반대투쟁을 유신헌법철폐 및 개헌운동으로 확산시키려 함

- 당시 혁신계 인사들은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유신철폐, 개헌운동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던 인사들로서

- 공식적으로 통일촉진협의회를 통한 통일운동에 동참했고, 유신헌법 개정청원운동 등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과의 연계 형성 및 지원을 수행

o 혁신계 내부의 논쟁

-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과 유신체제의 등장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놓고 혁신계 내부에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 유신체제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은 통일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사변적 사건’으로서 혁신세력을 하나로 재규합하여 통일운동을 가속화함과 동시에 정권의 비민주성을 비판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한 입장과

- 7․4 남북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의 등장이 보여주듯 정권의 군부파쇼적 성격은 전혀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정세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관망하되 성급한 조직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 병존

나. 사건개요

□ 사건 수사발표

o 1974.4.3 대통령 박정희는 특별담화에서92)

-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反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을 우리 사회 일각에 형성하고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

- 적화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불법 활동이 대두되고 있음에 이 같은 불순요인을 발본색원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을 공고히 다지고자 한다며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

o 1974.4.25 중정 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발표에서93)

- 민청학련은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국내 좌파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 1974.4.3을 기해 현 정부를 전복하려한 불순 반정부 세력으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했다고 발표

o 이어진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에서 신직수는94)

- 민청학련의 배후인물들은 모두 공산주의자이거나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경력이 있고, 이들은 학생들에게 투쟁방법을 알려주고 거사자금을 제공했다고 언급

□ 군법회의 재판결과

o 1974.5.27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이하, 검찰부)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주동이 된 국가변란기도사건」 추가 발표에서95)

- 서도원, 도예종 등은 1969년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잔재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대구 및 서울에서 반정부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사주했다고 발표

검찰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조직을 ‘인혁당 계열’에서 ‘인혁당 재건위’로 변경

-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하여 23명을 국가보안법․반공법․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

o 1974.7.8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1명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 등 7명에게 사형, 김한덕 등 8명에게 무기징역, 나머지 6명에게 징역 20년을 각각 구형

o 1974.7.11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부는 ‘인혁당 재건위’ 피고인 21명에 대한 선고공판을 통해, 서도원 등 7명은 사형, 8명은 무기징역, 6명은 징역 20년형을 선고했으며 관련자들은 항소

* 여정남은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음

o 1974.9.7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부는 항소심에서 사실심리를 생략한 채 서도원․도예종 등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항소를 기각

o 1975.4.8 대법원 전원 합의체는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하고 서도원 등 8명 사형, 이성재 등 8명 무기징역, 김종대 등 4명 징역 20년, 황현승 등 3명은 징역 15년 형량을 확정

□ 형집행 및 재심 청구

o 1975.4.9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8명에 대해 사형확정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75년 4월 9일을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

o 1982.3.3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 등 7명은 20년형으로 감형되고, 8명은 형집행 정지로 석방

* 1982.12.24 전창일 등 사건관련자 전원 특별사면으로 잔형이 면제되어 형집행 정지로 석방

o 02.9.16 의문사위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 수사기록과 공판조서의 변조가 있었다고 발표

o 02.12.10 사형수 8명의 유가족들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재심 청구

다. 의혹사항

1) 조직결성

‘인혁당 재건위’ 실재 여부

o ‘인혁당 재건위’ 실재여부와 관련하여

- 재판과정에서 관련자들의 반국가단체 결성 및 국가전복기도를 위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조직명, 강령 및 규약, 조직체계, 조직활동 관련 물증이 제시되지 않았으며

- 반국가단체로서 ‘인혁당 재건위’의 결성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는 관련자들의 진술이 유일한데, 이는 고문을 통해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됨

‘인혁당 재건위’의 민청학련 배후조종 여부

o 박대통령은 4.3 특별담화에서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를 인민혁명의 수행을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 단계적 지하조직으로 규정했으며

o 황산덕 법무장관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견해와 방침」을 밝히면서96)

- 인혁당 재건위’가 1972년 7․4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그 지하활동을 더욱 강화해 왔으며 1973.10 이후 사회일각에 동요가 있자

-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사건이라고 발표

o 이에 대해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 민청학련 자체가 상하부 조직체계나 연대틀을 갖춘 운동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배후세력에 대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며

- 4․3시위는 “학생들의 주도 하에 학생들이 책임진다”는 대원칙 하에서 준비했기 때문에 ‘인혁당 재건위’가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주장

‘인혁당 재건위’의 국가변란 기도 여부

o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은 민청학련의 배후로서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 이들의 활동은 단순한 反정부운동일 수는 있어도 폭력혁명을 통해 국가변란(정부전복)을 기도했다는 중정의 발표는 억측이며

- 공판과정에서 드러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활동내용은 반공법에 저촉되는 부분은 있을지라도 사형이라는 극형을 당할 정도의 중범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 제기

2) 수사과정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체계와 중정의 역할

o 긴급조치 하의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는

- 중정이 전체 사건을 지휘․조정하는 가운데 경찰․보안사 등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본부장 김재규 중정 차장)에서 담당

-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는 경북도경 파견경찰과 중정이 담당했음에도 당시 사건 수사서류(진술서, 피의자신문조서)가 경찰 명의로만 작성되어

- 당시 중정이 1964년 인혁당 사건처럼 고문 등의 문제가 불거질 경우 수사의 책임을 경찰에 떠넘기려 했다는 의혹 제기

o 1974.5.24-25 이후 진술서와 피의자 신문조서에는 수사 초기 등장하지 않던 ‘인혁당 재건단체’, ‘공산비밀조직’이라는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 이는 수사방향과 목표를 미리 정해놓고 강압적인 수단(고문 등)으로 피의자들의 진술을 확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 당시 수사경찰 이덕삼은 중정의 윤종원으로부터 ‘물건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하여 의혹이 증폭

수사과정에서의 고문 등 가혹행위 여부

o 중정 수사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 도예종․하재완․이수병․여정남․전창일 등 피의자들은 중정 수사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 당시 구치소 교도관은 하재완의 탈장 및 멍 자국, 하재완․우홍선김용원 등이 조사를 받고 서울구치소로 복귀할 때 업혀서 들어오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증언

- 의문사위는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물고문․전기고문․몽둥이찜질․통닭구이 등)이 중정 조사과정에서 수시로 자행되었다고 발표

o 피의자들의 진술을 얻어내기 위해 중정에서는 구타․물고문․전기고문 육체적인 고문이 자행되었고, 검찰 조사과정에서는 “중정에 되돌려 보내겠다”는 등 정신적 위협을 가하는 등 수사과정에서 고문 및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는 의혹 제기

3) 사형집행

전격적인 사형집행 이유

o 대법원 확정판결 후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사형집행이 통상 수년이 경과한 후 이뤄지는 관례를 깬 것으로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 공판조서 변조 의혹 등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피고인들의 재심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

o 이용택은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 전격적인 사형집행이 박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의혹 증폭

최후진술(유언) 조작 여부

o 사형수 유가족들은 최후진술(유언) 조작 의혹을 제기했는데

- 이정숙(이수병 처)은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내용은 당시 가톨릭에서 구명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이라고 주장

- 신동숙은 도예종이 교수형을 당하면서 “적화통일 만세”라고 외쳤다는 것에 대해, 그 말은 북한에서 쓰는 말이 아니고 중정에서 쓰는 말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당치 않다고 말하는 등 최후진술의 조작을 주장

고문흔적 은폐를 위한 시신 탈취 여부

o 사형집행 다음날인 1975.4.10 경찰은 송상진․여정남의 시신을 홍제동 벽제화장터에서 직접 화장시켰는데 이는 시신에 남아 있던 고문 흔적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의혹 제기


라. 조사결과

1) 활동 및 조직결성 여부

가) 중정의 수사착수 경위

o 중정은 유인태․정화영 등 민청학련 주모자들의 진술에 의해 서도원여정남․이수병 등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들이 배후조종하였음을 인지하고 수사에 착수(유인태 수사상황보고, 74.4.16; 여정남 수사상황보고, 74.4.18)

o 여정남 검거 후 5일이 지나기 전에 이수병․도예종 등의 진술에 따라 관련자 신원을 대부분 확인, 검거하는 등 수사가 급진전(서도원 수사상황보고, 74.4.20; 도예종 수사상황보고, 74.4.20)

<중정의 「수사상황보고서」 관련 내용 요약>

o 1974.4.14, 23:40 검거된 민청학련 유인태는

- 경북대 학술토론회(71.4)를 계기로 안면이 있던 여정남이 74.1-3월간 시위준비상황을 묻고 격려하는 등 관심을 표명하여 오더니

- 74.3.27에는 시위경험이 많다면서 서울․경북대간 시위 이슈․구호가 일치되지 않으면 자신이 해결하겠으니 학생데모 조종상 문제는 자신과 상의하라고 제의하였고

* 유인태 진술을 계기로 여정남이 민청학련 배후 인물로 대두

o 4.17 15:00, 이강철 접선 장소에서 검거된 여정남은

- 이수병․김용원으로부터 민족적 연합전선 형성․독재정부 타도․노동자․농민을 위한 사회민주주의 정부수립 등을 지도 받았으며

- 김용원으로부터 자금 18만원을 지원받아 학생조직에 사용하였다고 진술하여 이들을 긴급 수배

o 이수병은 4.18 15:00 검거된 후 도예종․서도원이 자신과 여정남의 배후임을 진술

o 여정남은

- 대구에서 정만진의 소개로 하재완집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하재완과 이재문의 교양을 받았고

- 이들의 지시에 따라 학생데모를 전국화 하는 등 정부 타도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고 진술

o 또한 이수병은 1973.12경 서도원으로부터 現정부 타도 투쟁방법으로 학생 이용문제를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는 한편 상경한 여정남(하재완 소개)을 김용원에게 인계하였음을 시인

* 여정남 배후를 하재완․이재문 등으로 확대, 4.20 이들을 지명수배

o 4.20 검거된 도예종은

- 1973.10 서도원․이수병과 함께 과거 혁신계 인사를 결속, 혁신정당 구성 및 대학가 반정부 데모를 조직화하기로 협의하였고

- 서도원으로부터 인혁당 동지․동조자 포섭 추진 및 경북대생 상경 추진계획을 득문했다고 언급

* 중정, 민청학련 사건 1차 발표(4.25), 배후로 인혁당계를 지목

o 4.28 이수병(4.20, 진술서 제2회)․여정남 (4.25 수사상황보고) 진술 내용을 바탕으로 지명수배(4.20)된 하재완을 검거

* 하재완 진술에 따라 전재권․임구호․이태환․조만호․나경일 등을 수배(5.2 대구 경찰의 범죄인지 보고)

o 5.1 이수병 진술에 의해 혁신계 ‘비밀지하망 조직 재건준비 위원회’ 관련자로 전창일 등 10명을 긴급수배


나) 「인혁당 재건위」 명칭 정립 과정

□ ‘인혁당 재건’의 최초 등장 시점

o 박대통령은 1974.4.3 특별담화에서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등의 표현을 사용

o ‘인혁당 재건’이란 용어가 처음 언급되는 것은 도예종 진술서인데

- 도예종은 “꼭 인혁당을 재건해야 되느냐, 이미 무섭게 알려진 어마어마한 정당이 아니고…과거 조직생활을 같이한 인혁의 인사를 한번 만나보자”고 했고(진술서 제4회, 74.4.22)

도예종은 4월 22일 하루 동안 무려 5회에 걸쳐 자필 진술서를 작성

- 또한 “본인이 생각한 것은 우선 내가 아는 내 둘레에 있는 친구들(과거 혁신계)을 만나보는 작업, 그 다음은 어떤 식의 서클이라도 형성하여 그 다음 단계인 혁신정당의 결성이란 순서를 생각”했다고 진술(진술서 제4회, 74.4.22)

□ 조직명칭의 변화과정

o 1974.5.3 수사상황보고에 ‘공산지하당 재건준비위’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하는데(수사상황보고 제104보)

- 공산지하망 재건준비위 구성혐의로 74.5.2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 문호철 검사의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공산지하당 재건위사건 관련자 우홍선과 박중기를 구속했고

- 74.5.3 수사상황보고에는 동일 날짜의 보고서임에도 불구하고 공산지하망 재건준비위공산지하당 재건위사건 등 명칭을 혼용

o 1974.5.6 수사상황보고에 따르면(수사상황보고 제107보)

- 송상진은 용공지하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전재권․서도원․유한종 등과 경북 각지의 산을 등산하면서 인혁당 재건 모의했으며

- 전창일․김종대 수사상황보고에서도 이들을 용공지하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로 표기

o 1974.5.9 민청학련사건 송치기록 검토 보고서에 의하면(수사상황보고 제110보, 74.5.9)

- 용공지하당 재건위 사건(김종대 수사상황보고), 민청 지하당 재건위 사건(강창덕 수사상황보고), 용공지하당 재건위 사건(나경일 수사상황보고)으로 혼용

o 1974.5.16 유진곤에 대한 수사상황보고에서 조직의 실체가 ‘인혁당 재건위’로 표기되기 시작

* 이수병의 소개로 전 인혁당원이며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서울지도부 학원담당 김종대 등을 접촉(수사상황보고 제118보)

o 이후에도 중정에서는 조직 명칭을 혼용하고 있는데

- 5.17 검찰에 보내는 송치 의견에 “혁신계의 지하조직을 재건” 또는 “인혁당을 재건해야” 등으로 표기하였으며

- 5.23 우홍선의 ‘가칭 인혁당 재건위’란 진술을 계기로 피의자들에게 ‘가칭 인혁당 재건위’라는 진술을 받아 5.25 추송하였음

o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도 사건 발표(5.27)시 사건체계도에 ‘인혁당 재건위’라고 했음에도 불구, 기소시에는 서울․경북 지도부로 지칭하는 등 조직명칭에 대해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음

o 대법원도 판결문에서 이들을 인혁당 재건을 위한 反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인혁당 재건 단체’로 약칭하여 사용한다고 특정하였음

<인혁당 재건(위) 명칭 변화과정 요약>

■ 74.4.3 박대통령 특별담화 : ‘인민혁명’ 언급

■ 74.4.22 도예종 진술서 : 인혁당 재건(진술서 제4회)

■ 74.4.25 수사상황발표 : 前 인혁당 출신 혁신계 인사

■ 74.5.1 이수병 진술서 : 혁신계 비밀지하망조직 재건준비위원회

■ 74.5.5 이재형수사상황보고 : 용공지하당 재건위 사건

■ 74.5.15-6 유진곤수사상황보고 : 인혁당재건준비위/인혁당재건위

■ 74.5.17 1차송치서 : 혁신정당재건준비위원회’(이수병 피신 제7회), 인혁당을 재건하기 위한 지하조직(우홍선 진술서 제3회)

■ 74.5.25 추송서 : 假稱 인혁당 재건위, 인혁당 형태의 재건위

■ 74.5.27 비상군재 발표 : 인혁당계 공산세력(발표문), 인혁당 재건위(사건체계도)

■ 74.5.27 검찰 공소장 :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 지하조직

■ 75.4.8 대법원 판결문 : 인혁당 재건단체

□ 명칭변화의 의미(평가)

o 관련자 수사자료와 중정의 수사상황보고를 종합해 볼 때

- ‘인혁당 재건’이란 용어는 도예종의 1974.4.22 진술서(제4회)에서 처음 등장했지만, 중정은 민청학련 배후를 前인혁당 출신 혁신계 인사들로 지목한 채 4.25 수사상황발표를 했고

- 1974.4.25 수사상황발표 이전까지 사건의 중심이 민청학련이었던 관계로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실체에 대해 인지하거나 ‘인혁당 재건위’로 사건을 조작하려는 의도를 확인할 수는 없었음

o 윤종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수사는(윤종원 면담결과, 05.10.6)

- 여정남이 마음을 열어 4.18 민청학련과의 연계 부분, 서도원 등에게 사상교양을 받은 사실, 상경 후 이수병․김용원의 지도를 받은 사실 등에 대한 진술을 통해서였다고 주장하였음

* 여정남의 진술로 74.4.18 14:50 이수병․김용원 검거(검거상황, 74.4.18)

o 1974.5.8 검찰부의 검사들이 중정에 파견되면서 용공지하당 재건위, 용공지하당 재건준비위 등의 명칭이 등장하였고, 5.16 이후 ‘인혁당 재건위’라는 명칭으로 표기되기 시작

- 조직명칭이 용공지하당 재건준비위→용공지하당 재건위→인혁당 재건위로 변경되었고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경북지도부와 서울지도부 중심의 국가변란을 위한 조직사건으로 정리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는 중정의 주도하에서 경찰, 보안사 등의 지원을 받았지만 체계적이지 못한 채 다분히 임기응변적이었는데

- 1차 수사기관인 중정에 검찰부의 검찰관들이 조기에 투입되면서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 중정이 제기한 혐의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빈약하여 다분히 임기응변적인 수사였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음

다) 활동 내용 및 성격

70년대 혁신계 인사들의 활동 내용

□ 공개자료 및 면담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 대부분은

- 4․19 당시 혁신계 활동에 종사했고, 1964년에는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을 전개하다 소위 인혁당사건에 연루되어 獄苦를 치른 전력이 있으며

- 1967년에는 재야 대통령 단일후보 운동, 1969년에는 삼선개헌 반대운동, 1971년에는 김대중후보 지지운동 및 공정선거 감시운동, 유신 이후에는 유신반대운동을 전개

o 대구 지역에서는

- 1969년 서도원․도예종․하재완․전재권․이태환․강창덕․나경일임구호․이재형․여정남 등 다수가 삼선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 삼선개헌 이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가 구성되어 경북 민수협에서는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전재권 등이 운영으로, 강창덕은 총무위원장, 이재문은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 정만진․임구호는 대구․경북지역 민주수호청년협의회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며, 이외에도 여정남․나경일 등도 경북 민수협에서 활동했음

- 또한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들은 대통령후보 단일화운동, 민수협 경북협의회를 중심으로 3선 개헌 저지운동, 반유신운동, 경북대 학생운동활동가 지원 활동 전개하였음

o 서울 지역에서는

- 우홍선․이수병․이성재 등은 서울에서 ‘민족통일촉진회’라는 공개 통일운동 단체에 관여하여 평화통일운동과 유신반대운동을 전개했고

민족통일촉진회는 5․16 쿠데타에 의해 구속된 혁신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60년대 후반에 조직된 통일운동단체로서 박정희의 삼선개헌 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혁신계 인사들의 운동참여를 독려

- 여정남은 4.19와 같은 국면조성을 위해 이철․유인태 등이 관련된 1974년 3, 4월 학생시위 관련 활동에 동참하였음

o 또한 서울지역 혁신계 인사인

- 이수병․우홍선 등은 7․4남북공동성명과 유신체제 등장 이후 혁신세력의 재규합이 시급하기 때문에 각 지방 혁신세력과 연대를 모색했으며

- 이성재․우홍선․전창일․이수병 등이 수시로 만나 국제정세, 학생 시위 상황, 혁신계의 활동 전망 등을 토론하였음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전창일에 따르면(2005.9.29 면담)

- 7․4 남북공동성명은 잠재되어 있던 혁신계 인사들의 활동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 당시 남북공동성명과 유신헌법을 둘러싸고 혁신계 내부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는데

- 일부에서는 유신헌법과 관련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준은 아니라는 비판적 의견도 있었지만

-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서는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국민에게 널리 알려 유신헌법을 철폐시키는 국민운동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취지에서 모임을 결성했다고 진술하였음

□ 수사․재판 자료상의 활동내용

o 도예종은 혁신계 결집과 관련

- 서도원․송상진과 자신의 집에서 자주 만났고 서울 출장시 우홍선․ 이수병을 만나97) 의견교환 및 혁신계 세력규합에 대해 합의하는 등 비밀 지하조직 결성을 위해 활동98)

* 서도원은 항소이유서에서“72.9 이수병에게 7.4남북공동성명 후 4.19후와 같이 혁신계 활동이 용납되지 않겠는가 말한 적이 있다”며 혁신계 규합활동 암시

o 소위 ‘경북지도부’ 구성원들은 임무 분담에 따라 활동했는데

- 하재완은 조직원 교양자료로 활용할 목적으로 송상진과 함께 북한방송 녹취서를 만들어 혁신계 인사들에게 열람시키며 세력을 규합했으며

* 이에 따라 하재완은 정만진(70.9)․조만호(72.10)․이재형(72.10)․임구호(73.3) 등을 규합(하재완 검찰 진술조서, 74.6.9)

- 강창덕․나경일․이재문 등은 73.11중순-12월 중순간, 동조세력 규합을 위해 분야를 나눠 활동

* 이재문은 학원, 나경일은 노조, 강창덕은 정치․경제․언론계를 맡기로 합의(강창덕은 의문사위 및 「진실위」 면담시 동 내용 인정)

- 송상진은 여정남을 지원하기 위해 전재권․태환등으로부터 총 113,000원을 모금, 여정남에게 전달했고

- 여정남은 73.12 하재완의 지시로 상경, 이수병․김용원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이철․유인태 등과 전국적 학생 데모 조직화 활동 전개

o 또한 서울지역의 경우 이수병은 서도원의 지시에 따라

- 1973.10초 이성재․전창일․우홍선 등과 접촉, 7.4 공동성명에 따른 해빙 분위기를 맞아 지하조직을 결성, 합법적 정당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조직을 확장키로 합의하고

- 박중기․김용원․김정태․김달수․유진권․이창복․황현승․김한덕 등을 구성원으로 규합하는 한편 국제정세 및 학생 데모상황, 혁신계 활동 전망 등을 토론(이수병 진술서 6회, 74.5.4)

- 특히 이들은 조직결성시 조직의 명칭․체계․규약 등 문안은 비밀을 위해 남기지 않고, 규합 대상은 각자 독자 추진하되 점 조직을 고수한다는 등 조직운영 원칙에 합의(공소장)

* 우홍선도 혁신세력을 재규합 인혁당을 재건하기 위해 73.10초순 이성재․이수병전창일 등과 함께 지하조직을 결성하였다고 진술(진술서 제3회, 74.5.12)

- 우홍선은 조직확대 및 합법적 동지 규합을 위해 김한덕에게 비밀지하조직(인혁당 재건위)에 가입할 것통촉에 들어갈 것을 권유

* 우홍선은 1심 공판(74.6.19) 변호인 심문시 동 사실 인정

- 또한 이들은 서울 충무로에 지압교실로 위장한 사무실을 내고 학생들의 전국적인 연대투쟁을 지원(학생운동은 이수병․김용원이 맡음)하였고, 여정남 지원을 위해 극비리에 모금활동도 전개99)

o 한편 관련자 대부분은 중정․검찰에서

- 자신들은 자주통일을 염원하는 민족주의자․민주사회주의자 라면서 유신체제 타도 활동을 전개했다고 하면서도

- 수사과정에서 하재완 노트 탐독과 정부타도 및 체제 전복을 위해 여정남에게 3단계 혁명론을 교양시키고 활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민중봉기를 추진했음도 시인100)


□ 혁신계 활동 평가

o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된 혁신계 인사들의 활동이 反박정희 활동 내지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반대활동에 종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체제전복이나 국가전복기도 행위로 볼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음

o 다만, 당시 중정 수사관들은 관련자들 중 일부가 북한 방송을 청취하기도 했으며 학생시위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연결을 가졌고, 뒷날 발간된 김세원의 자서전, 이수병의 전기 등에 서술된 바와 같이, 용공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수사과정에서 집중적으로 추궁했었다고 주장

학생운동과의 연계

□ 인혁당재건위 주요인물의 학생운동권 연계성(공소장 중심)

o 서도원은

- 1970.8 하재완의 소개로 여정남을 접촉, 이재문․송상진 등과 상의하여 학생운동이 잘 되도록 하라고 격려하고

- 1971.4-74.3 경북대 시위에 사용할 반독재구국선언문 등 유인물 3종을 초안 작성 후 하재완․여정남에게 제공

o 하재완은

- 1969.7 여정남을 가정교사로 채용시킨 후 이재문은 사상이론 교양,하재완은 학생운동의 기술문제를 담당하여 분담 지도했고

- 1970.8 서도원을 하재완 자택으로 초청하고 여정남을 경북대 생운동을 주도하는 학생이라고 소개하고 지도교양을 부탁했으며

- 1971.4-74.3 서도원에게 반독재구국선언문 등 유인물 2종을 작성 의뢰 후 이를 여정남에게 제공하고

- 또한 1971.11경 서도원, 하재완, 여정남 등 3인이 만나 전태일 추도식의 추도사를 서도원의 주도하에 공동으로 작성함

o 이수병은

- 1974.1.5 김용원에게 3-4월 위기설에 국민이 동요되고 있으니 개학기를 맞아 전국적인 데모를 유발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유능한 학생 상경시 지도를 부탁하고

- 1974.3.22 김종대를 만나 경북대 반독재구국투위명의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 1부를 제공

- 1974.4.6 야자수다방에서 김용원을 만나 민청학련 명의 민중민족민주선언문 1부, 민중의 소리 1부, 지식인․언론인에게 드리는 글 1부 등 3종의 유인물을 수령한 후 익일 김종대에게 제공했음

o 김용원은

- 1973.11초순 황현승, 이창복, 김종대, 유인곤 등과 접촉, 정세토론과 함께 학생데모를 성공적으로 유도하기로 합의했고

- 1974.3.20 여정남을 만나 경북대학교에서 3.18 데모를 계획했다가 사전정보 누설로 실패하고 3.21에 실행키로 했다는 보고와 함께

- 1974.3-74.4 여정남으로부터 제공받은 경북대 학생데모계획을 보고하면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 및 민청학련 명의 유인물 3종을 이수병에게 제공

- 1974.3.22 이창복, 황현승 등과 만나 경북대 학생데모에 관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 각 1부씩을 제공함

□ 학생운동과의 연계에 대한 평가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과 학생운동과의 관계는

- 경북지역 혁신계 인사인 서도원, 하재완 등은 여정남을 통해 경북대학교 학생운동에 일정하게 영향력을 미쳤고

- 서도원, 하재완 등이 여정남을 이수병에게 보내 서울지역 학생운동과의 횡적인 연대를 시도했음

o 민청학련과의 관계

- 민청학련 주도 학생들과 여정남이 몇 차례 교류와 접촉을 유지했지만 여정남이 민청학련 주도 학생들을 배후조종했다고 볼 수 있는 확실한 정황과 증거는 확인하지 못했음

윤종원은 여정남이 상경하여 이수병, 김용원을 만나 자금지원을 받아가며 학생들과 접촉한 상황 등을 자연스럽게 진술하여 전모를 파악하였으나 “여정남의 진술내용 이외에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의 연계성을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고 진술(윤종원 진실위 면담결과, 2005.10.6)

- 김용원이 여정남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했지만 액수(185,000원)나 4․3시위 주도 학생들과 여정남과의 관계상 이를 배후조종의 근거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음

하재완․송상진의 북한방송 청취․수록

□ 공소장의 범죄사실 요약

o 1972.2부터 20여일간 하재완은 송상진과 동지규합의 교양자료를 제공 목적으로 북한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 보고문을 청취 수록했는데

- 하재완은 장남 하종배의 공부방에서 매일 05:00-06:30, 17:00- 18:30 2회씩 반복 방송되는 평양방송을 청취, “김일성의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문” 전체를 수록했고

- 1972.2-4 송상진은 매일 05:00-06:30과 17:00- 18:30 2회 반복으로 평양에서 방송되는 김일성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문”을 청취하여 노트에 필기 후 하재완에게 제공했음

o 하재완은 동 보고문 중

-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하여”라는 제하의 내용 중 남조선 혁명은 어디까지나 남조선 인민이 주가 되어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자신에게 주는 지령으로 받아들이고

- 반국가 단체의 목적수행을 위하여 송상진과 같이 대학노트에 수록한 후 이를 서도원․이재문․여정남․조만호․강창덕 등에게 대여함

o 1972.10초 서도원은 하재완에게 동 보고문을 수록한 노트 1권을 서울에 보내 교양할 사람이 있다고 제공받아

- 서울 응암동 이수병 家에서 동인에게 열람 후 동지들의 교양자료로 활용하라고 하면서 하재완으로부터 입수한 북한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김일성이 행한 보고문을 전달했고

- 서도원으로부터 하재완 노트를 수령한 이수병은 이후 김종대․ 김용원 등에게 전달, 회람시킴

o 송상진 역시 남조선 혁명은 어디까지나 남조선 인민이 주가 되어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북한이 남한의 동조세력에게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활동하라고 지령한다는 것으로 인식함101)

□ 판단

o 하재완․송상진․이수병의 평양방송 청취 및 하재완․송상진의 방송내용 녹취 사실은 당시 피의자들의 진술과 압수물품으로 제시된 이른바 ‘하재완 노트’를 통해 확인

o 하재완․송상진의 평양방송 김일성 보고내용 청취 및 방송내용 녹취․수록은

- 실정법인 반공법에 저촉되는 행위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사형에 처할 정도의 중범죄에 해당한다고는 볼 수 없고

* 하재완은 군 특무대 복무시 북한방송 청취․수록 임무를 담당한 바 있어 북한방송 청취․수록은 익숙한 행위임

- 북한 인민과 노동당원을 대상으로 김일성이 행한 연설문의 내용을 남한 내의 자생적인 혁신계 인사가 지령으로 간주했다는 주장은 과도한 해석이며

-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수록한 노트→북한의 지령수수→대북연계→용공지하당 결성 등의 성격규정에서 볼 수 있듯 최초 사실을 과장하여 여론공세용으로 활용

라) 조직결성여부

‘인혁당 재건위’ 결성 경위(공소장 및 판결문)

□ 소위 ‘경북지도부’

o 1970.8 하재완의 집에서 이재문, 송상진 등 3인이 접선, 하재완의 주재 하에 회합한 자리에서 가칭 ‘인혁당 재건위’를 구성키로 하고 우선 경북지도부를 결성함(하재완 추송서, 74.5.25)

o 1971.1 하재완은 서도원에게 가칭 ‘인혁당 재건위’ 결성 사실을 하고 서도원을 지도위원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이재문 교양지도책, 하재완 조직책, 송상진 자금조달책, 여정남 학원조종책으로 분담함

□ 소위 ‘서울지도부’

o 1973.10초 서울 충무로 1가 소재 지다방에서 이수병, 우홍선, 전창일, 이성재 4인이 만나

- 가칭 ‘인혁당 재건위’를 구성한다는 원칙 하에 우선 서울 4인 지도부를 결성하기로 합의하고

- 도예종, 서도원을 지도위원으로 추대할 것 등을 합의․결정하는 등 서울지도부를 구성함

o 지하비밀조직을 재건함에 있어 그 방법으로서

- 명칭은 가칭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서울지도부로 결정하고, 조직은 혁신계와 前인혁당원을 중심으로 이념이 같은 사람을 포섭하며

- 조직은 점조직을 원칙으로 상호연락을 중단하며, 4인 지도부에서 조종․운영하고, 지도위원으로 도예종․서도원을 추대․합의했고

- 정기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 10시로 정하고 연령순에 의하여 소집책이 되어 4인을 소집․사회를 담당 등의 내용을 합의 결정함

o 1973.12 중순 이수병은 도예종을 만나 서울의 4인 지도부 결성상황과 서도원․도예종의 지도위원 추대사실을 보고함

□ 소위 ‘서울지도부와 같은 조직’

o 1973.8 김용원은 야자수다방에서 이수병과 만나 사상적 이념을 같이 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비밀조직을 구성하자고 합의함

o 1973.11초 김용원의 집에서 73.8부터 10여회에 걸쳐 황현승(광신상고교사), 이창복(前국민대 강사), 김종대(삼락일어학원장) 등을 만나 교양함

o 1973.11초순 김용원은 황현승, 이창복, 김종대, 유진곤 등 4인과 회합하여 서울지도부와 같은 조직을 구성(김용원 공소장)했는데

- 조직활동의 비밀유지를 위해 1조에 김달수, 유진곤, 박중기, 2조에 김용원, 황현승, 이창복, 3조에 김용원, 김종대, 이창복 등 3인씩 나누어 회합키로 하고

- 월 1회씩 각기 사정을 참작 시기와 장소를 정하여 회합토록 결정함

‘인혁당 재건위’ 조직 개요

□ 대법원의 조직성격 규정

o 대법원에서는 ‘인혁당 재건위’가 아닌 ‘인혁당 재건단체’로 배후조직의 성격을 규정하였고

경북지도부

서울지도부

서울지도부와 같은 조직

결성일자

1970.8

1973.10초

1973.11초

주도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참여자

이재문,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전창일, 이성재

황현승, 이창복

김종대, 유진곤

조직체계

지도위원: 서도원, 도예종

조 직 책: 하재완

교 양 책: 이재문

자금조달책: 송상진

학원조종책: 여정남

지도위원:서도원, 도예종

4인지도부:이수병, 우홍선, 전창일, 이성재

*체계․명칭․규약 등은 갖지 않으며 점조직 운영

1조:김달수, 유진곤, 박중기

2조:김용원, 황현승, 이창복

3조:김용원, 김종대, 이창복

*보안상 조직명칭이 없으며 상호 모르게 운영

o 2심 재판부는 ‘도예종 등은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경북지도부와 서울지도부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하여 각 조직의 책임자, 연락책임자, 자금조달책임자, 학원조종책임자 등을 정하는 등 부서를 결정한 후 빈번히 회합하면서 그 실행방법을 모의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시함

o 또한 인혁당 재건단체는 도예종․서도원 2인의 지도위원과 이수병․이성재․우홍선․전창일 등 4인의 지도요원이 조직활동을 주도하는 3개의 단위 조직으로 구성되었다고 판단함

□ 재건위 사건 피고인들의 공소사실 반론

o 상당수 피고인들은 공판과정에서 중정 및 검찰에서 작성된 조직결성관련 공소사실을 고문에 의해 ‘허위로 작성된 것’이라고 부인함

o 경북지도부 결성과 관련

- 1973.10 도예종은 서도원과 만난 사실은 인정하고 있으나 “공산주의 국가 건설하자느니 현 정권을 타도한다는 등의 정치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고 공소사실 부인(도예종 공판조서, 74.6.19)

* 도예종이 요통으로 누워 있을 때 주변 인사들의 권유로 침을 맞기 위해 서도원을 접촉했다고 주장

- 서도원은 “4․19와 같은 조직적인 학생데모를 하여 민중의 호응을 얻어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 철폐를 위하여 투쟁”한 사실만 인정하고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의 필요성과 결성지령을 한 사실 부정함(서도원 공판조서, 74.6.19)102)

- 하재완은 72.2-3간 북한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 보고문을 청취 수록한 사실 및 송상진과 함께 수록문을 만든 사실 등에 대해 인정하였음(하재완 공판조서, 74.6.19)

- 송상진은 공판과정에서(송상진 공판조서, 74.6.19)

변호인 심문시?8․15등산회?를 조직한 사실과 도예종․하재완․ 도원 등과 자주 만난 사실은 인정했지만, 인민혁명당을 재건하여 대정부투쟁을 위한 전열을 정비하자고 도예종 등과 논의한 사실은 부인103)

1972.2-4간 자택에서 평양방송을 청취한 사실과 그 목적이 북한에 대한 교양을 높이기 위하여 방송내용을 정리한 사실을 인정함

o 서울지도부 결성과 관련하여

- 이수병은 검찰관 신문시(이수병 공판 조서, 74.6.19)

․1972.9 야자수다방에서 서도원으로부터 인혁당 재건을 위한 서울지도부 구성 지령을 받은 사실 부정한 반면

․1973.10초 지다방에서 우홍선, 이성재, 전창일 등과 만나 “혁신계 동지들을 규합, 과거 인혁당과 같은 통일적 조직을 구성 대정부 투쟁에 합의하고 4인 지도부를 조직․구성”한 사실은 인정

항소이유서에서 “인혁당 재건과 같은 일은 입 밖에 낸 일도 없으며, 서도원․도예종을 추대한 일도 없으며, 소위 ‘4인 지도부’란 조직도 전혀 상상한 일조차 없다”고 부인(이수병 항소이유서)

- 우홍선은 1973.10 충무로 지다방에서 이수병, 전창일, 이성재 등과 회합하여 소위 서울지도부 구성을 모의했다는 공소사실에 대해 “만나 회합한 사실은 있으나 정치적인 발언과 공산주의 국가건설 등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고 부인(우홍선 공판조서, 74.6.19)

- 도예종․서도원 등은 검찰관 심문시 서울지도부의 지도위원에 취임을 승낙하였다고 인정하였으나 변호인 반대심문시 동 사실을 부인(도예종․서도원 공판조서, 74.6.19)104)

- 도예종은 1973.12 중순 이수병으로부터 “서울지도부를 지난 10월 구성”하고 지도위원으로 취임을 승낙하는 등 반국가단체를 구하고 그 간부가 되어 내란을 모의한 사실을 부인하였음(도예종 공판조서, 74.6.19)

o 서울지도부와 같은 조직과 관련

- 이수병은 1973.4-7 김용원과 만나 “혁명역량 구축을 위해 흩어진 혁명인사들을 포섭․규합하여 인혁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조직을 들어야 되겠다고 합의”한 사실을 부정하였으며(이수병 공판조서, 74.6.19)

- 김용원은 공판과정에서(김용원 공판조서, 74.6.19)

․“이수병은 자주 만났으며 생활주변 이야기와 학원이야기 등은 한 사실이 있으나 전시의 진술은 검찰에서 허위 진술한 것”이라며 공산비밀지하조직 결성 지령 수수 사실을 부정

구성원들이 동시회합을 피하고 친분관계를 고려해 3인씩 나누어 월 1회씩 회합했다는 공소사실에 대해 “자주 친분 있는 사람과 만난 사실은 있으나 공산주의 혁명이라든지 민중봉기와 같은 내용의 회합을 갖지는 않았다”고 주장함

□ 공소사실에 대한 판단

o 중정과 검찰부의 공소사실에 대해 피고인들은 대부분 부정하였는데

- 인혁당 재건위 결성 사실을 입증해 줄 수 있는 근거는 중정과 검찰부에서 작성한 피고인들의 진술이 유일하고

- 검찰부에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물품목록에도 조직결성 사실을 직접 인정해줄 증거가 없고

- ‘인혁당 재건위’ 조직결성과 관련성이 떨어지는 하재완․송상진의 북한방송 청취 노트, 민주수호협의회 자료, 서도원이 초안․작성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 등의 유인물을 제시함

o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서로 만나 국내외 정세와 통일문제를 토론하는 모임을 만들었지만 지하당이나 ‘인혁당 재건위’(혹은 재건단체)를 결성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음

이수병은 진술서에서 “저는 인민혁명당 사건에 관여한 바 있는 도예종, 김용원 등과 같이…접촉, 모의 활동한 사실이 있으나 당 그 자체를 중심으로 모의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진술서 제3회, 74.4.26)함

마) 조직 수준

‘인혁당 재건위’(재건준비위, 재건단체)

o 인혁당 재건위에 대한 검찰부의 기소내용은

- 조직수준을 서울지도부와 경북지도부로 이원화되어 국가전복을 기도한 용공지하당인 인혁당 재건을 위한 비밀조직으로 규정함

o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 지하 전위당 수준은 아니더라도 혁신계 인사들의 합법적인 정치활동이 일체 불허되는 상황에서

- 정세토론을 위한 서클과 같은 일정한 모임을 만들었던 것은 수사자료와 관련자의 면담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되고 있음

□ 판단

o 1974년 사건 당시 혁신계들의 모임이 인혁당 재건위라는 주장은

- 우선 재건의 대상으로서 인혁당이 실재했는가, 실재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혁신계가 인혁당 재건을 시도했다는 재건활동의 근거 및 증거가 필요하나

- 혁신계 인사들이 정세토론을 위한 서클을 결성했다는 사실 이외에 체제전복이나 국가번복기도를 위한 인혁당 재건위 내지 재건단체를 결성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근거를 찾을 수 없

혁신세력의 정세토론을 위한 서클

□ 공개자료

o 김세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2차 인혁당 사건은 결코 당이란 조직을 만들지는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전제하면서(?비트?)

- 이는 당이란 형식적 명칭을 보안상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를 예비적 조직으로 위상 지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함105)

o 임구호 역시 서도원․도예종을 중심으로 한 그룹이 일정 수준의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 창당을 위한 당명이나 강령은 없었으며 입당원서나 자격을 정한 규칙 등도 전혀 없었다고 주장함

o 전창일은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7․4남북공동성명 이후 통일에 대한 기대감과 유신체제에 대해 토론하기 위한 자발적이고 임의적인 서클 수준이라고 주장함

o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정화영은106)

- 당시 대구지역 혁신계 인사들이 민주수호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주화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혁당 재건위와 같은 지하조직을 결성한 바는 없으며

- 전국 각지의 혁신계 인사들이 개인적인 인맥관계로 연결되어 정세에 대한 인식과 의견을 교환하는 수준에 불과했다고 주장

□ 수사자료

o 당시 혁신계 인사들은 당 수준의 조직형태에 대해

- 1964년 인혁당 사건과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 등으로 인해 탄압에 대한 두려움과 실현가능성에 대한 거부감을 동시에 포지했고

- 1974년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 역시 인혁당을 재건하려 했다기보다는 유신체제라는 엄혹한 시기에 활동 가능한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논의한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음

- 이수병은 74년의 정세와 관련하여 “몇 사람의 의도적 투쟁에 의해서 소위 결정적 투쟁으로 이끌어 갈 수는 없다”고 보았고(진술서 제2회, 74.4.20)

또한 “4월이 되자 곧 데모가 있을 것 같다고 하기에 우리는 계기 없는 데모, 자연발생성이 아닌 데모를 걱정하기 시작”했다고 진술(이수병 진술서 제2회, 74.4.20)

- 김용원 역시 “3월에 데모를 일으키겠다는 것을 이수병과 토론하여 우리 혁신계가 분산되어 학생데모를 뒷받침할 힘이 없으니 시기가 아니”라고 보았음(피의자 신문조서 제2회, 74.4.27)

o 도예종의 입장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 도예종은 1964년 인혁당 사건의 오류를 자기비판하면서 인혁당이라는 당명의 채택, 정당조직 형성, 너무 많은 사람을 포섭하려 했던 판단착오 등을 오류로 지적하고(진술서 제4회, 74.4.22)

- 꼭 정당조직이 아니더라도 서클로서 얼마든지 이를 대치할 수 있다고 보았음107)

□ 조직결성 여부에 대한 판단

o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일정하게 혁신계 인사들간의 접촉과 토의활동이 존재했지만

- 반국가단체로 특정할만한 조직을 결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면 강령, 규약, 조직문서 등의 증거가 필요하나 그러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음

- 1970.3.24 중정의 내사보고서에 언급된 것처럼 집중 감시대상이었던 혁신계 인사들에 대한 내사결과 특이사항이 없었고

- 검찰부에서 제출한 증거목록에는 라디오, 출판 서적, 학생들의 선언문,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관련자료, 하재완과 송상진이 작성한 방송청취노트에 불과함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은 지하전위조직의 결성사실은 부인하지만, 정세토론을 위한 서클 결성사실은 인정함

- 그러나 1974년 당시 중정, 검찰, 사법부는 혁신계 인사들의 반정부 투쟁을 국가전복기도로, 정세를 논의하기 위한 서클 수준의 소모임을 반국가단체로 부당하게 규정한 측면이 있음

o 따라서 당시 혁신계가 결성한 조직의 수준은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유신체제의 등장을 전후하여 정세인식과 통일운동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한 서클수준으로 판단됨

2) 수사과정

가) 수사체계

□ 법적 근거

o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 제10항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 수사 및 보안업무를 조정․감독한다”는 규정에 의해서 중정에서 수사를 총괄 지휘

o 중정의 지휘 하에 군․경을 망라한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수사

※ 당시 중정에는 헌병 21명, 경찰관 38명이 민청학련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를 위해 파견근무(수사상황보고 제125보, 74.5.27)

□ 중정 수사상황

o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조사는 파견 경찰들이 담당했는데

- 민청학련 사건은 서울 시경 소속 경찰들이 조사에 참여했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최초 조직사건 혐의를 인지한 경북도경 소속 파견경찰 7명이 수사 전담

- 구속영장 발부와 사건 송치 및 의견서 작성은 서울시경 소속 파견경찰(총경 이○○)이 담당

※ 이에 대해 이용택은 중정이 수사를 주도하면서 대공수사 경험이 많은 경찰인력이 주로 피의자 신문을 담당했지만 경찰이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의 모든 신문조서를 작성했다고 하는 것은 의문이라고 답변(이용택 면담결과, 2005.9.22)

- 검찰관 수사는 검찰부에서 전담을 했으나 문호철․이재명 검사가 검찰부에서 중정으로 파견되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검토

□ 검찰 수사상황

o 검찰관 수사 역시 중정 6국에서 대부분 진행

- 1974.5.8-11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장 대령 김기형 외 검찰관 11명이 민청학련 관련 사건 피의자 78명에 대한 조사기록을 8개조로 분담하여 검토(수사상황보고 제112보, 74.5.11)

- 1974.5.11-12 2일간에 걸쳐서 중정 5국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관 문호철 검사 외 10명이 민청학련 관련 피의자 서도원 등 68명에 대한 의견서 초안 검토를 완료하고 74.5.12 16:00부터 의견서 인쇄작업을 진행(수사상황보고 제114보, 74.5.13)

- 1974.5.27 검찰부에서 구속기소한 54명중 도예종 등 23명에 대하여는 5.28 10:00 중정과 검찰부 간에 5.28-6.3까지 공소보완 수사키로 합의하고 수사에 착수(수사상황보고 제127보, 74.5.29)

o 중정 수사계장이었던 윤종원에 따르면(윤종원 면담결과, 2005.10.6)

- 김○○ 수사과장 주재 하에 수사과장실이나 보안차장보실에서 그동안 진술 받은 범죄사실 등을 논의한 적은 있으나

- 인혁당 재건위 관련 수사는 경북도경이 주도했고, 일일수사상황을 경찰 내 상급자에게 보고하고 취합하는 과정은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

o 경북도경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를 주도하고, 수사 장소가 주로 서울중부서 등으로 기재된 이유는(윤종원 면담결과, 2005.10.6)

- 긴급조치 위반사건(4호)은 중정에 수사권이 없어서 경찰이 주도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의 규모가 전국적이어서 수사효율을 위해 주요 피의자들을 중정에 모아 조사했고

- 경찰 주도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피의자들을 유치했던 중부서 등을 조사장소로 기재할 수밖에 없었고

- 의서도 경찰 명의로 이루어졌고, 중정에서 사건 전반을 개입하거나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각의 의견서 내용이 많은 부분 허술하였다고 진술

□ 판단

o 중정 내부자료, 관련자 진술 등을 고려할 때 당시 중정 6국에서 조사한 것은 확실하며

- 중정 직원은 민청학련, 파견경찰은 인혁당 재건위 조사를 맡도록 역할을 분담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 수사장소 임의기재와 관련 중정직원, 경찰 공히 이유를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어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미흡하지만,

- 중정 관계자들이 수사를 조정․감독했음을 시인하고 있어 사건조작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를 찾을 수는 없었음

* 다만, 긴급조치 하에서 수사권이 없는 중정이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관련 수사를 진행하면서 수사장소를 중부경찰서 등으로 임의 기재한 것으로 추론

나) 검찰관 조사의 임의성 문제

□ 조사 내용

o 의문사위 면담조사에서 사건 관련자들의 경우

- 수사경찰이 검찰조사 때 입회하여 부인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거나 (전창일, 이재형, 나경일, 황현승, 김한덕), 혐의를 부인하면 지하 보일러실로 끌고 가서 협박했으며(김종대, 이창복, 강창덕),

- 서울구치소에서 수사관 없이 조사를 하다가 부인하면 다음 날 중정으로 돌려보내서 고문(이강철, 정만진) 혹은 협박(임구호)을 받은 후 다시 검찰관 조서가 작성되었다고 주장

o 유곤 변호인 함정호, 김종대 변호인 박승서 또한 재판정에서 고인들이 검찰관 앞에서 부인을 하면 정보부로 되돌려져서 문을 받는 공포분위기 아래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진술(의문사위 장석구사건 보고서)

o 당시 검찰수사에 입회한 서기 중

- 이상대는 의문사위에서 문호철 검사가 조사를 할 때 수사경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으며 수사팀장인 윤종원과 수시로 전화를 했다고 주장하였으나

- 김강진과 김태근은 검찰관이 사실 확인 차원에서 수사경찰을 잠깐 부르는 경우는 있었으나, 조사실에는 검찰관과 피의자, 본인 등 세 명만 있었으며 중정 수사관이나 경찰은 전혀 보지 못했다고 주장

o 또한 당시 인혁당 재건위 수사 검찰관이었던 이원무와 전세봉은 의문사위와 「진실위」 면담에서

- 중정에서 조사시 중정이나 수사경찰이 입회하지 않았다고 주장

o 당시 성북서 파견경찰 나갑열은

- 의문사위 조사에서 검찰조사가 중정에서 이루어졌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팀이 함께 조사를 했으며 그 목적은 피의자가 혐의내용을 부인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진술하였으나

- 「진실위」 면담시 검찰과 경북도경 수사팀이 함께 수사했다는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검찰과 경북도경이 담당했다는 내용이었으며

- 검찰관 조사시 수사경찰이 입회한 것을 본 적은 없다면서 의문사위 면담내용이 발언취지와 다르게 기재되었다고 주장

o 한편 경북도경 파견경찰 이덕삼은 의문사위에서 검찰관 조사에 입회하여 피의자가 시인하는 것을 들었다고 진술

* 「진실위」면담시에는 의문사위 진술내용을 부인하였음

□ 판단

o 검찰관 조사시 수사관이 입회했다는 주장에 대해

- 당시 검찰서기 김강진 등이 중정 수사관의 입회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피의자검찰서기․수사경찰 등 다수가 입회사실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검찰관 조사시 중정 수사관 입회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음

다) 수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 고문의 정의 및 관련 법률

o 고문이란 정보나 자백을 얻을 목적으로 위협, 제지, 징벌과 같은 잔인한 수단을 동원하여 심각한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행위(UNCAT)

※ 고문의 정의는 1975년 12월 9일 유엔총회에서 채택한 고문 및 기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나 형벌 방지에 관한 선언 제1조에 규정

o 고문과 관련한 법률

- 유신헌법 제10조(1972. 12. 27. 헌법 제8호) 2항 :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 형법 제125조(폭행, 가혹행위) : 재판, 검찰, 경찰 기타 인신구속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형사피의자 또는 기타 사람에 대하여 폭행 또는 가혹한 행위를 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 고문여부의 판단 기준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당시의 고문을 구체적으로 검증하기가 쉽지 않은데

- 사건이 발생한지 이미 30년이 지났고, 핵심 피해자 8명이 상고 기각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 중정이 수사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가해자의 자기고백 없이 당시의 고문 여부를 검증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음

o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고문 여부를 물리적으로 검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문 여부는 세 가지 기준에 부합하는가를 중심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 막연하게 고문을 받았다는 진술보다는 고문 주체, 장소, 방법, 후유증 등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는가(‘진술의 구체성’)

- 고문 현장 및 고문으로 생긴 상처 목격, 고문 가해자들로부터의 득문한 사실 등 피해자가 고문을 받았다고 충분히 인정할만한 ‘개연성’이 존재하는가 등의 기준임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중정 등 정보기관에서 자행한 ‘고문수사의 관행’ 역시 고려 필요

□ 인혁당 관련자들의 고문 주장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과정에서 당시 현장 수사를 주도한 중정이 피의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는 의혹 제기

-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 당시 중정이 고문을 가했다는 주장 피의자들을 비롯하여 피의자 가족, 변호인, 교도관, 파견경찰, 서울구치소 수감자 등에 의해 광범위하게 제기됨

o 한편 당시 중정에는 고문금지에 대한 지휘부의 단호한 지시가 내려졌는데

- 1973.10 서울대 최종길 교수 사망사건과 감찰실에 의한 민간인 조사․고문사건(청와대 특별조사) 등으로 인해

- 부장 특별지시에 의거 감찰실 주관으로 수사기능부서에 대한 특별 점검활동을 실시하고 수사관으로부터 각서를 받는 등 고문근절을 강력 지시108)

【공판조서의 고문 관련 진술】

피고인

일시

고 문 주 장

김용원

74.6.19

■ (검찰에서는) 부득이 허위 진술한 것입니다.

검찰관에게 조사를 받을 때 일부를 부인하려고 하니 수사기관으로 돌려보내겠다고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김종대

74.6.24

■ (검찰에서는) 장소가 장소이기 때문에 허위로 진술

김한덕

74.6.24

중앙정보부 수사국에서 조사 받은 것은 자의가 아니다. 검찰관에게는 허위 진술을 했다.

도예종

74.6.19

■ (검찰관에게는) 무형적인 위압감 때문에 공소장과 같은 내용을 진술했습니다.

서도원

74.6.19

검찰관 앞에서도 사실대로 진술할 수 없는 줄로 알고 검찰관 물음에 그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이재형

74.6.24

■ (공소사실은) 불기피한 사실로 허위 진술을 하였습니다.

하재완

74.6.19

■ 검찰에서 조사할 때는…할 수 없이 사실이 아닌 것을 허위 진술하였습니다.

황현승

74.6.24

검찰관에게 진술을 할 때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진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허위진술입니다.

o 공판과정에서 피고인들은 검찰에서의 진술이 무형적 위압감과 중정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위협에 의해 허위로 진술된 것임을 주장

o 공판조서 내용은 고문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진술은 없으나 고문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검찰 조사 당시 피의자들에게 정신적 위협(위압감, 협박 등)을 가하는 고문이 있었음을 시사

사형수 8인의 고문 주장(항소․상고 이유서)】

피고인

내 용

도예종

<항소이유서>

공소장 1-6번까지의 범죄사실은 허위조작되었으며 검사조서 작성시 4.20-25 철야취조를 받고 4-5일에 걸쳐 고문당함(311호실)

<상고이유서>

74.4.20-6.8(50일간) 중정 조사에서 4-5차에 걸쳐 고문을 당함(6국 311호)

■ 중정 취조시에 협심증까지 일으켜 수차 졸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때 중정에서 사준 외제응급 협심증 치료제인 설하정, 리트로그리셀린정을 먹고 회복이 되었는데 약을 현재 보관하고 있다.

서도원

<상고이유서>

경찰관 및 검찰관 작성의 조서 및 자필진술서는 고문과 협박 하에서 강요에 의해 작성, 증거능력이 없음

이수병

<항소이유서>

■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문과 일주일에 걸친 주야 연속심문 등 위협과 회유를 겸한 정신적 위축으로 자유롭게 진술할 수 없었음

<상고이유서>

간첩과의 관계를 추궁하려 무턱대고 가해지는 목불인견의 고문을 당했다.

■ 고문과 협박 속에서 수사관과 검찰관이 동일 장소에서 조서가 작성되었고 조작된 줄 알면서도 바보처럼 제 손으로 무인을 찍어야만 했음

김용원

<상고이유서>

■ 중정조서와 진술서는 심한 몽둥이질과 전기고문, 물고문을 통해서 꾸며진 것이며 취조관이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 폭력으로 무인

중정에서 몽둥이질을 해서 왼쪽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음

하재완

<항소이유서>

공소내용 대부분 장기간에 걸친 혹독한 고문과 협박 등으로 사전에 작성된 각본에 의한 것임

<상고이유서>

4.28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이 되었으며, 탈홍이 되고, 폐농양이 생겨 취조관이 시키는 대로 조서가 작성

우홍선

<항소이유서>

6.25 전투 중 부상을 입어 반불구자로 후송되었고 생혈이 심해 전신이 약화되어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음

<상고이유서>

경찰관 및 검찰관 작성 조서 및 진술서는 중정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강요되어 불가항력으로 허위 진술한 것임

피고인

내 용

송상진

<항소이유서>

수사는 오로지 피고인의 의사를 물어서가 아니고 청사진에 본을 박아 놓고 강요 필기 무인케 한 것이다

<상고이유서>

4.28구속되어 4.30부터 본인의 소신을 적으라고 하여 몇 가지를 적은 후 오후부터 고문이 시작

6.7 21시경부터 중정 지하실에서 김상희수사관으로부터 고문하겠다는 협박 하에 인혁당재건에 대한 조직을 부르는 대로 쓴 것임

여정남

<항소이유서>

취조과정 중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계속되는 전기, 물고문, 심한 매질 등으로 인한 극도의 쇠약한 몸으로 주사를 맞아가며 재판에 임했다

<상고이유서>

o 시종일관 고문, 공갈, 협박으로 강제 조작 허위 진술된 기록임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일부 피고인들은 항소 및 상고이유서를 통1심 공판과정에서 진술하지 못했던 수사과정에서의 육체적 고통 당했던 고문사실을 주장

- 항소 및 상고이유서에서 구타, 물고문, 전기고문 등 다양한 고문유형이 등장하고 있고 도예종, 김용원, 하재완, 송상진, 여정남 등은 고문일시, 고문방법, 고문으로 인한 상처 및 후유증, 고문수사관 이름 등을 구체적으로 진술

【‘인혁당 재건위’ 사건 생존자들의 고문 관련 주장】

피고인

내 용

황현승

<상고이유서>

검찰관 작성의 기타 조서는 피고인이 가혹한 고문을 받은 중앙정보부 옥내에서 정보부 수사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위협과 강압에 의해 작성

김종대

<항소이유서>

5.2 혹독한 고문 때문에 허위 진술한 것이 범죄사실이 되었음

<상고이유서>

검찰관 작성의 조서는 중앙정보부 옥내에서 더구나 수사관이 동석한 자리에서 위협과 강압으로 작성

전창일

<항소이유서>

조서내용을 부인했다하여 검찰관이 없는 사이에 또다시 악몽 같은 공포의 지하실에 끌려 내려가서 고문을 받았음

「진실위」 면담시에는 무차별 구타가 아니라 엎드린 채 엉덩이를 맞았다고 진술

피고인

내 용

임구호

<항소이유서>

■ 하재완 노트 관련 신체적 정신적 고통과 압박을 가하였음

<상고이유서>

검찰 측 조서는 74.5.25이후 작성된 것으로 이는 구속기간 장기화, 고문, 폭행, 협박, 기망 등 불법행위에 견디지 못하여 작성된 것임

이창복

<항소이유서>

5.3부터 7월초순간의 사법경찰관 작성 조서 및 검찰관 작성 공소장 및 진술서는 인간으로서는 감내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과 회유에 의해 작성됨

<상고이유서>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비명소리가 나면 인혁당재건 서울지부부원이 되고 또 한번의 비명소리에 조직 확대가 이루어지고 간헐적인 비명소리에 결국 대역죄가 나왔다.

유진곤

<항소이유서>

■ 일자미상경 운운하면서 범죄사실을 기재한 것은 허위 조작이며 고문 및 위협에 의한 강요로 시인한 것임

<상고이유서>

공소사실 모두 인정할 수 없고 수사기관의 허위 조작에 의해 작성한 것을 고문, 구타, 위협에 의한 강요로 시인케 한 것이며 모두 날조된 것

김한덕

<항소이유서>

■ 10년 전의 전과(인혁당)가 밝혀지자 갖은 고문(물, 전기 등)을 자행하고 공소사실을 강압적으로 허위 조작

<상고이유서>

죽음을 면하고 싶거든 부르는 대로 쓰라고 강요하였고 그 죽음의 고문은 물과 전기 몽둥이 등이었음

정만진

<항소이유서>

물고문과 구타를 어떻게 당했는지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으며 구치소에서 피소변을 5일간 누는 등 무자비한 고문을 당함

5.17 정보부에 보내 검사에게 조서대로 시인하지 않았다고 지하실에서 3시간 동안 갖가지 고문을 당하고 전기고문기를 옆에 놓고 손목을 묶고 고문

<상고이유서>

하재완 노트관련 무조건 노트를 보았다고 시인하라면서 지하실에서 물고문과 구타를 어떻게 당했든지 몇 번이고 정신을 잃었음

강창덕

<항소이유서>

검찰관 조사 받을 때 정보부 취조관들이 입회도 하고, 검찰심문에 순종치 않으면 지하고문실에 끌고 가서 뼈다귀를 훑어버린다고 위협

<상고이유서>

74.5.6 대구 남부경찰서에서 수건으로 두 눈을 가리고 수갑으로 손과 발을 묶고 경찰봉으로 전신을 구타한 후 긴 벤치에 눕히고 물고문을 하여 정신을 혼수상태에 빠뜨린 후 자백하라고 진술을 강요

o 황현승(전기고문), 전창일(구타․전기고문), 임구호(구타), 유진곤(구타), 김한덕(물고문․전기고문), 정만진(구타․물고문), 강창덕(구타) 등이 구체적인 고문유형을 진술

- 전창일, 이재형, 정만진, 강창덕 등은 고문의 상처 및 후유증을 진술하고 있는데

- ‘인혁당 재건위’ 사건 생존자들은 가혹한 고문을 통해 작성된 중정 및 검찰에서의 조서가 조작임을 일관되게 주장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변호인 접견 기록】

성명

변호대상

접견내용

황규룡

도예종변호인

■ 변호사 : 고문당한 일이 있습니까?

■ 도예종 : (씩 웃으면서) 대우 잘 받았지요.

■ 변호사 : 2심이 중요하니 하고 싶은 이야기 다 하세요.

■ 도예종 : 검사조서 작성 시에 많은 고문을 당했는데 항소이유서에 했습니다.

김종길

우홍선변호인

■ 변호사 : 몸은 괜찮으신지요?

■ 우홍선 : 몸은 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매를 맞아 하지부정증이라고 진단을 받아 누워 있어도 좋다고 하며 몹시 아픕니다.

■ 변호사 : 구속된 경위

■ 피고인 : 검사조서도 정보부에서 몽둥이찜질을 해가며 작성했기 때문에 임의진술 아닌 강제진술인데 증거가 안 된다고 좀 어렵겠지요.

김종길

전창일변호인

■ 변호사 : 자술서를 썼는가요?

■ 전창일 : 자술서가 아닙니다. 수사관이 부른 대로 쓰지 않으면 지하실로 내려가 고문하고 하여 수사관이 쓰라는 대로 쓴 것입니다.

윤의준

김용원변호인

■ 변호사 : 뭐 내일 공판시 변호인이 물어볼 사항 있어요?

■ 김용원 :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과 관련된 것을 자세히 물어 주세요. 인혁당 지도부 사항에 대해서 물어 주세요. 정보부에서는 고문에 의한 것이에요.

함정호

유진곤변호인

■ 변호사 : (기소장을 내어 보이며) 읽어보세요

■ 유진곤 : 조사관이 몽둥이로 때려 전부 기소장을 날조한 것입니다

o 도예종․우홍선․전창일․김용원 등은 변호인과의 접견시 중정 수사과정에서 자신들이 고문을 당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 이러한 내용은 항소 및 상고이유서 작성과정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됨

* 이들 대부분은 고문에 대한 진술로 몽둥이에 의한 구타 사실만을 진술하고 있음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들의 주장】

목격․득문장소

배수자

(서도원 처)

변호인 접견시

서도원이 “이렇게 당했다”면서 무릎에 남아 있는 고문 자국을 보여줌

신동숙

(도예종 처)

재판정 진술

■ 3일 동안 잠을 못자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

■ 밤잠 안재우고 고문을 했다

이영교

(하재완 처)

재판정 진술

지하실에 갇힌 채 3일 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심한 고문을 해서 항문도 빠지고 탈장 1)

■ 고문을 받아서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

구두선

(이태환 처)

재판정 진술

■ 그 놈들은 백정이다

하도 심하게 전기고문을 하여서 엄지발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정점매

(전재권 처)

재판정 진술

■ 고문을 많이 받아서 육신이 아프다

추국향

(정만진 처)

항소․상고이유서

남편이 구타를 많이 당했고 물고문도 심하게 당했다고 기록한 글을 보았다

* 공판조서에서는 확인되지 않았음109)



【교도관 진술내용(의문사위 조사)】

이정희

(하재완 사방 담당 교도관)

■ 하재완이 고문으로 탈장되었다는 얘기를 했고, 아랫배가 불룩한 채로 정상적으로 걷지 못했으며, 의무과로 치료받으러 갈 때도 부축을 해서 걸어 나간 것 같음

하재완과 우홍선이 조사를 받고 새벽에 업혀 돌아올 때가 여러 차례 있었고

우홍선은 아프다고 해서 의무과 진찰을 여러 차례 받았고 몸이 아파서 사방에 자주 누워 있었음

전병용

(보안과 교도관)

■ 유진곤은 손과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 김용원은 맥이 풀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

하재완은 탈장이 되었고, 물고문에 의한 폐농양증으로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배어 나옴

이택모

(보안분실장)

하재완은 고문을 받아서 탈장이 되었고, 전기고문을 받아서 경련을 일으킴

■ 김용원은 항상 멍하고 눈에 초점이 없는 모습이었음

김상규

(영치과교도관)

출장가거나 복귀할 때 소제들에게 업히거나 부축 받은 사람들이 있었음

박형식

(보안과교도관)

직접 상처를 봤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들이 고문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함

송흔규

(보안과교도관)

교도관들의 부축을 받고 오는 사람 많았음(인혁당 관련자들인지는 불확실)

임창대

(보안과교도관)

새벽 2-3시 정도 복귀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주 피곤한 모습이었음(이재형)

o 교도관들은 의문사위 진술에서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하재완 탈장, 유진곤 손목 붕대, 우홍선 와허증, 김용원 몽롱한 눈빛 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진술하였는데

- 교도관들의 진술은 고문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닌(이해당사자가 아닌) 목격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이고 신빙성이 높다고 볼 수 있음110)

o 다만, 일부 교도관들이 고문흔적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교도관 이정희․전병용 등 고문에 대해 언급

【파견경찰 및 검찰서기 의문사위 진술내용】

신홍수

(파견경찰)

■ 당시 중정에서 고문을 많이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음

■ 고문은 아마 윤종원의 부하들이 했을 것임

피의자 신문조서나 진술서를 작성할 때 별로 저항하지 않았고, 중정 사람들이 고문을 하는 등 따로 처리하는 것 같음

이덕삼

(파견경찰)

윤계장, 박수사관, 김사무관 등 고문하는 팀이 따로 있었음

6국 지하보일러실에서 고문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물고문 장면을 목격

고문은 중정 수사관이 주도했고, 경북도경 수사관들은 중정 직원의 지시에 따라 보조

전재팔

(성북서 파견경찰)

대구팀 4명이 피의자를 전기고문하고 있었음

전기고문 장소는 6국 건물 밖 남산방향으로 들어간 곳으로 기억함

■ 박재명의 얼굴이 낯이 익음

■ 손잡이를 돌리고 나서 피의자에게 물어보고 수사관이 기대하는 얘기가 나오지 않으면 또 손잡이를 돌렸음

나갑열

(영등포서 파견경찰)

전창일과 대화도중 대구팀에 전기고문 기술자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고 당시 중정에서 고문하는 관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

이상대

(검사서기)

피의자들 모두가 풀이 죽어 있었고 문검사가 질문을 하면 부인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으며 아마 고문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함


o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로부터 가해자로 지목된 경북도경 파견경찰들은 고문사실을 부인하면서 고문은 중정 수사관이 전담했다고 주장하고

- 서울 성북서 파견경찰 전재팔은 경북도경의 파견경찰 4명이 피의자를 전기고문한 사실을 증언했는데, 특히 박재명의 얼굴이 낯이 익다고 진술하면서

- 특히 황현승을 조사하던 6국 보일러실에서 목격한 전기고문 사실을 진술했는데, 군용전화기 손잡이를 돌려 전기고문을 실시했다고 증언(전재팔 면담 2005.11.2)

【「진실위」 면담결과】

면담일자

면 담 내 용

송종의

(검사)

05.10.6

자신이 검찰로 송치 받은 피의자들 중에서 상처가 있던지 고문으로 의심될 만한 사람은 없었음

검찰 수사과정에서도 피의자 및 변호인 등이 그러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음

이용택

(중정6국장)

05.9.22

■ 하재완이 고문에 의해 탈장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 탈장 당한 사람이 병원을 안가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음

中情 조사실에 물고문을 하기위한 욕조가 있었다는 주장

- 3층 건물 전체에 화장실의 세면대 외에 욕조는 없었음

윤종원

(중정 계장)

05.10.6

남산 6국 건물 1층에서 조사를 했는데 그 사방이 다 민가여서 큰 소리라도 나면 다 들리는 곳이었고, 보일러실은 매우 협소한 장소이고 욕조 같은 것도 없음

이희원

(의무과교도관)

05.10.17

도예종은 평소 몸이 약해서 관구부장․교도관 등과 함께 의무실을 자주 찾아와 의무관이 처방을 해주었는데 본인 기억으로는 소화불량에 대한 처방이었음

이정희

(보안과교도관)

05.10.17

하재완은 독방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탈장 때문에 치료가 잦았고, 새벽에도 조사를 받기 위해 연출되기도 하고 밤늦게 들어온 적도 있었으며 중정에서 직접 구치소로 와 2층 접견실에서 조사를 하기도 했음

하재완 고문과 관련한 얘기를 하거나 멍 자국을 본 적은 없었으나 하재완은 몸이 불편해 사방에 누워 있었음

하지부정증이라는 말을 모르겠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음

이강준

(명적과교도관)

05.10.5

재건위 관련자들이 고문당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중정에서 심하게 고문당해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면 구치소에 소문이 쫙 났을 것임

박형식

(보안과교도관)

05.10.18

■ ‘인혁당 재건위’ 재소자들과 고문 관련 대화를 나누거나 상처를 본 적은 없었음

손중덕

(경북도경

파견경찰)

05.9.28

■ 하재완 탈장에 대해

- 하재완은 “서울에서 포경수술을 했다”고 하기에 부위를 보았는데 고환은 짝고환이더라

- 하재완이 고문당해 탈장되었다고 주장하고 윤계장도 고문 여부를 다그치기에 병원진료 기록과 소견서를 건네줌

지하실은 보일러실로 이용하고 있고 매우 협소했던 곳이라 지하실에서 고문은커녕 조사 한번 하지 않았음

박재명

(경북도경

파견경찰)

05.9.29

중정 6국 지하실은 큼지막한 보일러 기계가 꽉 차 있었던 곳인데 그곳까지 내려가 조사할 일도 없었고 고문은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음

신홍수

(경북도경

파견경찰)

05.9.29

지하실에 내려간 적이 없으며, 파견 나온 상황에서 무슨 고문을 했겠는가?

면담일자

면 담 내 용

이덕삼

(경북도경

파견경찰)

05.9.29

■ 정만진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조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뺨 한번 때리지 않았음

6국에서는 2-3층 일반 사무실에서 조사하였음. 보일러실에서 조사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음

■ 물고문은 본적도 없고 그런 이야기를 한 사실도 없음. 조사 중에 제일 심한 고문이 잠 안 재우는 정도였음.

임찬욱

(경북도경

파견경찰)

05.9.28

■ 6국 건물 지하 조사실을 가보거나 본 사실이 없음

- 고문에 사용한다는 전화기를 본 기억이 없고

- 하재완이 탈장되었다면 병원에 다니거나 의사 검진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그러한 사실이 없었음


o 당시 담당검사 송종의를 비롯하여, 중정의 이용택․윤종원, 파견경찰 손중덕․박명․신홍수 등은 의문사위 진술내용과 달리 고문수사에 대한 주장을 부정

* 특히 이정희 등 교도관들은 의문사위 면담조사에서 고문상처 및 후유증 목격했다는 진술을 부인 혹은 번복

o 대표적인 고문사례로 거론되던 하재완의 “탈장” 및 우홍선의 “하지부정증”과 관련해서도

- 재완은 검거(4.28)되기 전인 1974.4.16 포경수술시 탈장증세가 있어 의사의 수술을 권유받고도 거절한 사실이 있고(국방부 국회 답변자료)

- 우홍선은 ?6.25 전쟁 중 부상을 입어 반불구자로 호송되었고 생혈이 상해 전신이 약화되어 지금까지 고통 받고 있다?고 호소(항소이유서)

o 또한 전창일의 경우, 고문당한 사실을 변호사 접견기록․항소 이유서와 의문사위 면담(무차별 구타, 물․전기고문을 당함) 등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나

- 시간이 경과될수록 고문의 강도가 높아가고 정황이 구체화되고 있는 데다, 몇몇 부분에서 진술내용이 상

o 당시 파견경찰 중 전재팔만이 이전의 진술(황현승 전기고문 목격)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으나

- 황현승은 02년 의문사위 조사에서 1974.5.7과 5.13 피의자 신문조서(총 2회)를 작성하면서 5.7경 하루만 박재명과 노량진 파견경찰로부터 집중적으로 물,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 파견경찰 전재팔은 02.9 의문사위 조사에서 5.13 황현승의 2피의자신문조서 작성시 입회하여 경북경찰 4명이 전기고문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고문일자와 고문주체, 고문장소 등은 상이

o 경북도경 파견경찰들은 의문사위에서의 “중정에서 고문을 주도하고 자신들은 보조했다”고 진술했으나 「진실위」 면담에서는 이를 부인

*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대부분은 고문주체를 파견 나온 경북도경으로 지목

□ 고문여부의 판단

o 고문 관련 진술의 일관성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피의자들은 항소 및 상고이유서 등을 통해 중정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사실을 일관되게 주장

※ 항소 및 상고 이유서에서 거의 모든 관련자들이 중정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사실을 폭로하고 있는데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심한 몽둥이질(구타),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주장

- 다만, 공판과정에서는 검찰에서 고문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진술한 것은 중정 수사과정으로 질문을 특정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판단됨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판과정에서 피고인들은 ‘검찰에서는 불가피하게 혹은 부득이하게 진술했다’며 중정에서의 고문을 암시

- 중정 수사과정에서의 고문 주장은 재건위 사건 관련 사형수, 생존자, 가족, 변호인, 파견 경찰, 구치소 교도관, 검찰 서기 등에 의해 광범위하게 제기

o 중정 수사 당시 고문에 대한 구체적 진술

- 도예종은 “중정 취조시에 협심증까지 일으켜 수차 졸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때 중정에서 사준 외제응급 협심증 치료제인 설하정, 리트로그리셀린정을 먹고 회복이 되었는데 약을 현재 보관하고 있다”는 등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을 구체적으로 진술(상고이유서)

- 김용원은 “중정에서 진술서를 수사관들이 꾸민 원본을 베껴 쓰라고 하여 거부했더니 몽둥이질을 해서 왼쪽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고 주장(상고이유서)

한 “시인해라, 재판은 우리가 하는 것이다. 부인하면 재판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처치해 버리겠다” 등 당시 수사관의 발언을 구체적으로 언급(상고이유서)

- 하재완은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이 되었으며, 탈홍이 되고, 폐농양이 생겨 취조관이 시키는 대로 조서가 작성되었다”고 진술(상고이유서)

이택모(당시 서울구치소 보안분실장)은 “하재완은 고문을 받아서 탈장이 되었고, 전기고문을 받아서 경련을 일으켰다”고 하재완의 진술을 확인해줌(의문사위 진술조서)

- 우홍선은 중정에서 작성된 진술서 및 피의자 신문조서는 중정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강요되어 불가항력으로 허위 진술한 것으로서 “서울 구치소 처방전(와허증에 대한 구치소 처방전)”은 고문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진술(상고이유서)

- 송상진은 중정에서의 수사가 피의자의 의사를 물어서가 아니라 각본에 따라 고문, 협박 및 공포 속에서 강제로 필기 무인케 한 것으로서 임의성이 없는 진술이라고 주장(항소․상고이유서)

※ 송상진은 고문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4.28 구속되어 ‘4.30부터’ 본인의 소신을 적으라고 하여 몇 가지를 적은 후 오후부터 고문이 시작”되었으며, “‘6.7 21시경부터’ 중정 지하실에서 ‘김상희 수사관’으로부터 고문하겠다는 협박 하에” 진술서를 작성했다고 주장(상고이유서)

- 여정남은 장기간에 걸친 취조 과정에서 잠 안재우기 고문과 구타․전기고문․물고문 등 각종 고문이 본인에게 가해졌으며, 극도의 쇠약한 몸으로 주사를 맞아가며 재판에 임했다고 주장

※ 여정남은 ‘노동당 사업총화 보고문’을 보지도 않았는데, 공갈 협박과 심한 매질에 시인해야만 했다(항소이유서)

- 전창일은 당시 중정 밀실에서 행해진 가혹한 물고문․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몽둥이찜질 등 온갖 비인간적 만행으로 하재완은 탈장이 되고 항문이 빠지며 폐종양에 시달렸고, 서도원․이수병․김용원은 혼절한 채 업혀 나오고 업혀 들어오는 참담한 상황이 계속되었다고 주장(?말?, 1994.5)

o 고문 실행의 개연성

-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의 진술은 이해 당사자가 아닌 중립적인 인사들의 진술로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

※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인 이정희는 하재완의 탈장․멍 자국, 우홍선의 고문으로 인한 와허증 등을 증언했고, 전병용은 유진곤 손과 목의 붕대, 김용원의 맥이 풀린 상태, 하재완의 탈장 및 폐농양증․복부 출혈 등을 상세하게 증언

- 당시 중정에서의 수사과정에 참여했던 파견경찰들의 고문 사실 인정 역시 중정의 조직적인 고문이 있었음을 뒷받침

경북도경 파견경찰이었던 신홍수는 중정 윤종원 부하들의 고문사실을 증언했고, 이덕삼은 중정 6국 지하보일러실에서의 고문 사실을 증언했으며, 전재팔은 경북도경 파견경찰 4명이 전기고문 했던 사실을 증언(경북도경 파견경찰 박재명 지목)

- 주로 고문이 자행되는 현장은 가족 및 변호인의 접견이 부정되는 정보부 건물이었다는 점도 고문 실행의 개연성을 높여줌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과정에서 고문․강압수사 등 폭넓은 인권침해가 이루어졌는데

- 고문의 가해자로 지목되고 있는 중정 관련자들과 경북도경 파견경찰들은 본 위원회 면담과정에서 고문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고문 관련 주장은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고, 구체적인 고문상황과 방법, 때로는 주체(박재명 등)를 지목하고 있으며,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교도관, 파견경찰, 검찰 서기 등이 고문 사실을 부분적으로 확인해줌으로써 중정에서의 고문 실행의 개연성을 뒷받침

-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사형수 및 생존자), 관련자 가족, 변호인, 파견경찰, 이해당사자가 아닌 교도관 및 검찰 서기 등 중정에서의 고문사실에 대한 증언은 구체적임

의문사위는 장석구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서 고문(물고문, 전기고문, 몽둥이찜질, 통닭구이 등)은 중정과 검찰의 조사에서 수시로 자행되었던 것으로 결론 내림

- 당시 폭압적인 유신체제 하에서 정보․수사기관들이 광범위한 고문수사관행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전 사회적으로 공인된 사실이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음

3) 사형집행

가) 전격적 사형집행 경위

□ 법률적 근거

o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1974.4.3)

-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제9항)

o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1974.1.8)

- 이 긴급조치에 정하지 않은 사항은 군법회의법을 준용한다(제8항).

o 군법회의법(1973.10.10 법률 제2630)

- 제494조(집행지휘) 재판의 집행은 그 재판을 한 군법회의의 검찰관이 지휘한다.

- 제497조(사형의 집행) 사형은 국방부장관의 명령에 의하여 집행한다.

- 제499조(사형집행명령의 기간)

사형집행의 명령은 판결이 확정된 날로부터 6월 이내에 사하여 한다.

․상소권회복의 청구, 재심의 청구 또는 비상상고의 신청이 있는 때에는 그 절차가 종료할 때까지의 기간은 전항의 기간에 산입하지 아니한다.

․제500조(사형집행의 시기) 국방부장관이 사형의 집행을 명한 때에는 5일 이내에 집행하여야 한다.

□ 의혹 내용

o 대법원 확정판결 직후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자

- 대법원 확정판결 이전에 이미 ‘인혁당 재건위’ 관련 사형수 8명에 대한 사형집행 준비가 이루어졌다는 의혹 제기

- 유인태에 따르면, 1975.4.8 12시에서 13시 사이에 10분가량 운동을 하면서 김용원과 대화를 나눴는데 “오늘 오전에 수정을 미제 수정으로 바꿨다. 아무래도 내일 처형당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득문

- 정판결 후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통상 수년이 경과한 후 집행되는 관행을 깬 전격적인 것이었고

-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 고문에 의한 조작, 공판조서 변조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8시간 만에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피고인들의 재심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

군법회의법 제499조 2항은 “상소권회복의 청구, 재심의 청구 또는 비상상고의 신청이 있는 때에는 그 절차가 종료할 때까지의 기간은 전항의 기간에 산입하지 아니한다”고 규정(군법회의법<1973.10.10 법률 제2630호>)

o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사형집행까지의 과정

- 1975.4.8 10시 대법원(재판장 민복기)은 피고인 및 변호사조차 출석하지 않은 채 준비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후 상고를 기각

- 대법원의 상고 기각결정이 내려지자 국방부 장관 서종철은 「사형집행명령서」를 작성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로 송부

-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가 서울구치소에 「사형수의 심신상황」을 조회하자 서울구치소는 의사의 「진단서」(사형수 8명 이상무)를 회신

- 1975.4.9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담당 송종의)는 「형집행지휘」를 서울구치소에 송부

- 1975.4.9 04:55 형확정 18시간 만에 서도원을 시작으로 사형 집행이 진행되어 08:50 도예종을 끝으로 형집행 종료


1975.4.8

10:00~?

대법원 확정 판결

(재판장 민복기)

⇙ ⇘

1975.4.8

국방부장관 사형집행명령서

대검찰청

刑선고통지

⇘ ⇙

1975.4.8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

사형수의 心身狀況 조회

1975.4.8.

서울구치소

진단서

1975.4.9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

刑집행지휘

1975.4.9

04:55~08:50

서울구치소 사형집행(8명)

서도원(始)→도예종(終)

1975.4.9-10

시신 인도 및 강제 火葬

□ 조사 내용

o 당시 중정 6국장 이용택은 전격적인 사형집행 이유에 대해

-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국방부에 전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월간중앙, 89 2월호)하였다고 보도되었으나

- 05년 「진실위」 면담에서는 월간중앙 기사에 대해 “당시 사형 집행은 대통령의 최종허가가 있어야 집행된다”는 말을 기자가 나름대로 만들어 보도한 것이라고 주장

o 당시 교도관들은 의문사위 면담에서 사형수들이 살아 있으면 고문 등 문제가 제기되고 시끄러운 일이 생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

□ 판 단

o 전격적인 사형집행 경위 관련

- 대통령의 지시로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줄 문서나 증언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 1975.2.21 박정희는 문공부 순시에서 “합법적인 정부를 뒤집어엎으려 했다면 내란음모죄가 되고 내란음모죄는 어느 나라 법에서든지 극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는 등 스피커 없는 뒷좌석 까지 들릴 정도로 격앙된 발언 태도를 보였음(조선일보, 75.2.22; 중앙일보, 75.2.22)

- 이용택은 “통치권자나 집권세력에서 상당히 위험하다고 여겨 이 불씨를 빨리 제거를 해야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고 “큰 사건의 판결이 났으니 법무부장관이 빨리 보고하자 조기 행하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언급(이용택 면담결과, 05.9.22)

- 교도관 김용표 역시 “사형 전날 퇴근도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고 언급(김용표 면담결과, 05.10.18)

o 따라서 권력 최상층부의 사전 지시에 의해 사형준비는 물론 집행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나) 최후진술(유언) 조작

□ 의혹 내용

o 사형수들은 사형장에서 최후진술을 할 수 있고, 사형수의 최후진술은 사형집행명령부 비고란에 기재되는데

* 유언보다는 사형집행명령부 상의 최후진술이 정확한 명칭

- 도예종의 경우 “조국이 하루 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다”고 기록되어 있고

- ‘인혁당 재건위’ 관련 사형수 8명의 ‘최후진술’란 맨 아래에는 모두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라고 기록

사형수

집행일시

최 후 진 술

1

서도원

1975.4.9

04:55-05:15

■ 10세 막내가 보고 싶다

■ 통일된 조국을 염원한다

■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2

김용원

1975.4.9

05:30-05:50

가족 생계비가 걱정되니 학교에서 지급될 것이 있으면 받도록 조치 바람

■ 자식에게 공부 열심 부탁

■ 가족에게 돌보지 못해 죄송하다

여동생을 사랑하고 이웃간에 화목하게 지내주기 바란다

■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3

이수병

1975.4.9

06:05-06:25

■ 가족 얼굴 한번 보고 싶다

■ 더할 말 없다

■ 종교의식 거부한다

사형수

집행일시

최 후 진 술

4

우홍선

1975.4.9

06:35-06:55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쉽다

■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5

송상진

1975.4.9

07:02-07:22

빛을 보지 못하고 죽는 내 생애가 가련하다

가장으로서 할일 못하고 죽는 것이 부끄럽다

■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6

여정남

1975.4.9

07:35-07:55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일찍 죽는 것이 억울하다

■ 재소 중 소장 이하 전 교도관에게 신세 많이 끼쳐 죄송하다

■ 담배 한대만 피고 싶다(허락)

■ 물 한잔 마시게 해주면 좋겠다(허락)

■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7

하재완

1975.4.9

08:05-08:25

■ 하고 싶은 말이 없다

■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8

도예종

1975.4.9

08:30-08:50

조국이 하루 속히 적화통일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종교의식을 거부한다


o 사형수 유가족들은 최후진술의 조작 의혹을 제기했는데

- 이수병의 처 이정숙은 시신을 인수할 때 받은 ‘유언’이 원본이 아니고 16절지 종이에 각각 한 장씩 정리한 것이며,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내용은 당시 가톨릭에서 구명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변조한 것이라고 주장

- 도예종의 처 신동숙은 남편이 교수형을 당하면서 “적화통일 만세”라고 외쳤다는 것에 대해 그 말은 중정에서 쓰는 말로 남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당치 않다고 주장

□ 조사 내용

o 당시 사형장면을 목격했던 교도관들에 대한 면담결과(의문사위 장석구 사건기록)

- 김판근에 따르면, 도예종은 “통일을 못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단 한마디만 했으며, ‘적화통일’이란 표현은 사용한 일이 없고,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말도 들은 바 없다고 진술

- 사형장에 입회했던 이정희․안종율․김용표는 8명의 사형수들이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수명을 단축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맞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거나 들은 일이 없다고 진술

- 사형집행명령부를 작성한 이강준은 공산주의자가 ‘일’이라 하면 화통일이라고 생각해 기재”했지만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종교의식을 거부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진술

o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에 대한 위원회 재면담에서(교도관 5인 면담결과, 05.10.18)

- 노병한(당시 명적과장)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족들에게 유언을 통보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 사형수 가족들에게 유언을 통보치 않았으며

- 최형식(교도관, 사형집행 입회) 역시 “사형 집행 후 소장실에서 간부들이 모여 유언내용을 가족에게 통보할 것인가를 협의”했는데 “인혁당 재건위 관련 사형수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유언내용을 가족에게 통보한 기억이 없다”고 진술

o 의문사위 조사 당시 종교의식 거부 및 최후진술의 허위조작을 우회적으로 인정했던 이강준은(이강준 면담결과, 05.10.5)

- 의문사위 진술과는 달리 당시 “사형수 거의 대부분이 종교의식을 거부했다”고 진술한데 이어

- “사형수들을 상대하면서 양심상 유언을 임의로 조작하거나 의역할 수는 없고, 액면 그대로 유언내용을 적었다”고 진술 번복

이강준은 사형수 도예종의 ‘적화통일 운운’ 유언에 대해 도예종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유언을 내 임의로 쓴 사실은 없고, 도예종이 분명 적화통일이라고 했을 것”이라고 답변

□ 최후진술 조작 의혹에 대한 판단

o 사형집행명령부를 작성한 이강준은

- 의문사위 진술조서에서 최후진술 조작을 우회적으로 인정했지만 본 위원회 면담에서 “유언을 임의로 조작하지 않았다”며 기존의 진술을 번복하였지만

- 도예종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도예종이 분명히 적화통일이라고 말했다고 진술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

이강준은 의문사위 진술조서에서 “도예종 이름은 들은 것 같다”고 진술 바 있음(의문사위 이강준 진술조서)

o 사형수들의 최후진술은 사실과 다르게 기재된 바

- 최후진술이 사형수들의 실제 진술과 다르게 기재된 의도나 목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 최후진술 조작 의도 유무와 상관없이 조작된 최후진술이 언론에 공개되어 인혁당과 북한의 관련성을 부각시키는 등 여론공세의 근거로 활용

도예종이 “조국의 적화통일을 기원한다”는 등 사실과 다른 최후진술 내용이 당시 언론에 주요하게 보도됨으로써 처형의 정당성을 홍보하려 함(중앙일보, 75.4.10; 조선일보, 75.4.11)

다) 시신 탈취 및 강제 이송

□ 의혹 내용

o 경찰은 고문은폐를 위해

- 사형집행 다음날인 1975.4.10 경찰은 송상진․여정남의 시신을 홍제동 벽제화장터에서 가족들이 동의 없이 직접 화장시켰는데

- 이는 시체에 남아 있던 고문 흔적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의혹 제기

o 유가족들 역시 동일한 의혹을 제기했는데

- 김진생(송상진 처)은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서 벽제 화장터에서 바로 화장을 시켜서 시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이소선씨가 남편의 관을 열어 보았는데,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고 주장

- 배수자(서도원 처)는 원래 함세웅 신부가 있는 응암동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지내려고 했는데 남편의 관을 실은 차가 창녕까지 갔으며

- 이정숙(이수병 처)은 함세웅신부와 함께 남편의 시신을 살펴보니 손톱, 발톱, 발뒤꿈치와 등에서 시커멓게 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고문 흔적을 발견했다고 주장

* 함세웅 신부는 이수병의 시신사진을 흑백으로 촬영 언론에 공개

□ 판 단

o 고문은폐를 위한 시신탈취

- 사건 수사가 종료 된지 수개월이 지난 상태에서 고문으로 인한 상처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탈취하고 강제로 화장했다는 주장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음

- 이수병 시신사진 및 송상진 시신의 상처흔적 등은 교수형 시신에서 발견되는 시반(屍斑)현상일 가능성이 높으며

o 송상진․여정남 시신의 강제 火葬

- 송상진․여정남의 시신이 강제로 화장처리된 것은 응암동 성당 등에서 천주교 장례를 치를 경우 전격적 사형집행을 계기로 국민의 분노가 표출되는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는데

- 국가기관(경찰)이 가족의 의사에 반해 크레인까지 동원하며 시신의 화장 처리를 강행한 것은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는 비인도적 행위임

* 4.10 경찰은 연미사를 올리기 위해 응암동 성당으로 향하던 송상진의 유가족들과 4시간 20분 동안 승강이를 벌이다 크레인을 동원하여 영구차를 벽제화장장으로 강제 이송 후 火葬 처리(조선일보, 75.4.11)

마. 소결

o ‘인혁당 재건위’ 조직결성 여부와 관련

- ‘인혁당 재건위’의 조직결성을 뒷받침할 물증이 부족하고 지역지도부 간의 위상 및 관계를 설명하지 못해 인혁당을 재건하고 민중봉기를 통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는 증명 불가능

- 다만, 당시 혁신계 인사들이 국내외 정세토론과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서클 형태의 모임을 가졌음은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

- ‘인혁당 재건위’가 북한과 연계되었다는 중정의 주장의 증거는 하재완 노트 정도이고 평양방송의 내용을 지령으로 인식했다는 주장 역시 과도한 해석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수사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고문․강압수사 등 관행적이고 폭넓은 인권침해가 자행되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고

- 다만, 중정이 초기부터 ‘인혁당 재건위’를 인지하고 조직사건을 만들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 74.4.3 대통령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하에 인민혁명을 수행하려 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으나

- 초기에 행해진 중정의 수사는 다분히 임기응변적이어서 수사 종결시까지 ‘혐의와 증거의 불일치’를 극복하지 못함

o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것과 관련

-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 집행명령을 내리라는 대통령의 지시가 이미 전달되어 있었다는 의혹이 증언을 통해 제기되었고

- 조작된 최후진술이 사형수들의 용공성 부각 등 언론의 여론조작에 동원되었고

- 경찰이 송상진 등 시신을 탈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신에 남아 있던 고문흔적 때문이라기보다는 장례미사 과정에서 발생할 항의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임

4. 유신체제와 군사법정

가. 군사법정의 구성

□ 법률적 근거

o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1974.1.8)

-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거 비상군법회의(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설치

- 비상군법회의는 대통령긴급조치를 위반한 자가 범한 일체의 범죄를 관할․심판

- 비상군법회의 재판관과 검찰관은 국방부장관과 법무부장관의 의견을 들어 대통령이 임명

- 중정은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수사 및 보안업무를 조정․감독함

□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o 유신헌법 제정 이후는 긴급조치의 시대로서

- 제1호 발표 이래 제9호까지 발포되었는데, 긴급조치를 통해 유신체제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용납하지 않고, 그런 비판이 있으면 사형까지 처하게 하는 조치였음

- 74.1.8 발포된 긴급조치 제1호 및 제2호는 개헌주장, 비방, 유언비어에 대해 영장 없이 체포하고 15년 이하의 형을 부과

- 경제안정을 명목으로 긴급조치 제3호에 이어 74.4.3 긴급조치 제4호가 발동되어 민청학련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됨

o 긴급조치 제4호는(1974.4.3)

- 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회합․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도화․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 또는 판매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군사법원의 구성

o 긴급조치에 의거 민청학련 사건과 소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부 구성

o 긴급조치 제2호에 따라 군사법원이 구성되었는데

-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로 나뉘어 보통군법회의는 3개의 심판부, 고등군법회의는 1개의 심판부로 구성

-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부 심판관은 박희동 중장, 제2부 심판관은 박현식 중장, 제3부 심판관은 유병현 중장이었고, 비상고등군법회의 심판관은 이세호 대장이었음

-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부 구성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7.11)

■ 재판장 육군중장 박현식 ■ 심판관 육군소장 이희성

■ 심판관 판 사 권종근 ■ 심판관 검 사 김진석

■ 법무사 육군중령 신복현

-

․민청학련 사건(1974.7.13)

■ 재판장 육군중장 박희동 ■ 심판관 육군소장 신현수

■ 심판관 판 사 박천식 ■ 심판관 검 사 김태원

■ 법무사 육군중령 김영범

- 비상고등군법회의 재판부(1974.9.7)

■ 재판장 대장 이세호 ■ 심판관 소장 윤성민

■ 심판관 소장 차규헌 ■ 심판관 소장 문영국

■ 심판관 판사 문영극 ■ 심판관 판사 박정근

■ 심판관 검사 정태균 ■ 법무사 대령 이진우

- 대법원 재판부(1975.4.8)

■ 대법원판사 민복기(재판장) ■ 대법원판사 홍순엽

■ 대법원판사 이영섭 ■ 대법원판사 주재황

■ 대법원판사 김영세 ■ 대법원판사 민문기

■ 대법원판사 양병호 ■ 대법원판사 한환진

■ 대법원판사 임항준 ■ 대법원판사 안병수

■ 대법원판사 김윤행 ■ 대법원판사 이일규

나. 유신헌법 하 군사법정의 문제점

o 유신헌법의 문제점

- 유신헌법은 헌법 이론상 자유민주주의를 정지하고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를 채택한 점에서 헌법의 동질성을 파괴하여 헌법 개정의 한계를 초월한 악법임

- 특히 긴급조치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박탈할 수 있게 규정한 점에서 그 불법성은 명백함

- 국가긴급권의 본질상 기본권 제한은 그 목적일 수 없고,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에 그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신헌법 하의 긴급조치는 기본권제한을 목적으로 하는 오용된 국가긴급권의 발동임

o 당시 대법원은

- 헌법상 명문의 규정 유무에 관계없이 저항권의 행사는 불가피하나 대법원은 이러한 긴급조치의 위법성과 저항권을 인정하지 않음

- 수사 및 재판과정은 명백하게 당시의 실정법을 위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음

o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판의 절차상 문제로는

- 공판이 있기 2, 3일전까지도 변호인들은 진술서의 사본을 접할 수 없었고, 검찰 측이 가지고 있는 진술서 사본만을 볼 수 있었음

- 검찰 측이 신청한 증인들에 대한 변호인들의 반대신문이 허용되지 않았음

- 검찰 측 증인들은 변호인들이 가택 연금상태로 법정에 없는 상태에서 증언함

-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 상태에서 진행되었고, 외신기자의 방청은 금지되었음(1심과 2심)

- 증거는 고문을 통해 조작한 것들이었으나 재판부는 피고인 측의 주장을 완전히 부정하였음

- 재판부는 공식적인 재판기록의 공개를 거부했고, 공판조서는 변조되었음

- 피고인들은 “접견금지”로 분류되어 수감 중 가족의 면회를 금지 당했고, 변호인들의 면회도 불법적으로 제한되었음

다. 민청학련․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군사법정

1) 쟁점 및 의혹사항

피고인들의 방어권 보장 여부

o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변호사들은

- 군사법정의 심리절차가 위법했으며, 채증 법칙을 위반한 만큼 위법한 재판이었고

- 피고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을 여러 차례 재판부에 신청했지만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 검찰은 물론 재판관들도 피고의 발언을 수시로 제지하여 피고인들의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주장

o 사건 관련자 및 교도관들은

- 당시 공판정에서 사실관계에 대하여 ‘예, 아니오’ 형식으로 답변토록 강요하고

- 헌병들이 도열해 있는 상황 하의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고 주장

공판조서 변조 여부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유가족 및 변호인들은

- 당시 변호인들은 공판조서(이수병 등) 중 피고인의 진술내용과 상이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 “×” 표시를 하여 공판조서 내용과 피고인 진술내용의 상이점 주장

- 하재완․도예종․이수병․우홍선 등의 유가족 역시 남편들이 법정에서 분명히 부인한 공소사실의 내용 등이 공판조서에 시인한 것으로 기재되었다며 공판조서의 변조 주장

2) 조사결과

가) 피고인 방어권 침해

□ 관련자 및 시민단체 주장내용

o 군법회의법 제340조는

- 피고인 또는 변호인에게 반증의 조사신청 기타의 방법으로 증거의 증명력을 다툼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적당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당사자주의적 소송형태 채용했으므로

- 방어 입장에 있는 피고인에게 충분히 증명력을 다툴 권리 즉 반대신문의 기회를 주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규정으로서 반대신문의 실질적인 권리를 배제하는 경우에는 위 법령 위반임을 주장

o 당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담당 변호인들도

- 군사법정의 심리절차가 위법했으며, 채증법칙을 위반한 만큼 위법한 재판이었고

- 피고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을 여러 차례 재판부에 신청했지만 한 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검찰관은 물론 재판관들도 피고인들의 발언을 수시로 제지하였다고 주장하였음

* 피고인이었던 임구호는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직후 검찰관실로 불려가 문호철, 이규명 검사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

□ 조사 내용

o 민청학련 사건 관련 김지하 피고인 11명을 변론하던 강신옥 변호사가 법정에서

- 법은 정치의 시녀이며 권력의 시녀이다. 검찰관이 애국학생을 란죄,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사형에서 무기를 구형하는 것은 사법살인 행위이고

- 직업상 변호인석에는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 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

-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좋으며 악법과 정당하지 않은 법에 대하여는 저항할 수도 있다며

- 그 악법을 적용하여 다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의 변론을 하였다는 혐의로 구속111)

* 강변호사는 74.9 1심에서 징역 10년․자격정지 10년, 2심에서 항소기각 판결을 받고 대법원 형이 확정되었다가 88.3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음

o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시로 자리가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가족 중 한사람에게만 방청이 허락되었는데

- 74. 10 김종필 총리는 국회에 출석 “외신기자들의 경우 재내용을 잘못 이해해 보도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등 방청 불허를 정당화

o 당시 중정은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구속 피의자들에 대한 접견금지조치를 내렸는데(수사상황보고 제45호)

- 군법회의법 제245조 및 제131조와 긴급조치 규정에 의거, 가족, 변호인, 기타 일체의 접근 금지결정을 받아 서울 구치소장에게 시행토록 조치했고

- 이용택 6국장이 74.4.26 17:30-18:30 서울구치소를 방문하여 수용자들의 분리수용현황(감방교환 등), 금지조치(접견․차입․통모 등) 이행상태 등을 점검하고

- 74.4.27부터 6국 수사관 2명을 서울구치소에 고정 배치하여 피의자들에 대한 감방분리 수용배치, 접근 및 물품 등 차입 금지와 감시, 통모에 대한 감시․감독 활동함

o 한편 재판부는 재판정 협소를 이유로 변호사 13명, 국방부 출입 기자단, 주한일본대사관 일등 서기관 手島堅持, 인혁당사건 관련자 가족 등 50여명 등 소수인원만 공판을 방청토록 조치하였음(인혁당 구속자 가족 공판조서 변조 등 사실에 대한 내사 결과보고 77.12)

군법회의 서기 조규철은 공판정의 인원수용 능력에 따라 (좌석이 약 50여석으로 기억) 방청객이나 기자 등의 출입을 어느 정도 통제한 것은 사실이라고 진술(05.10.6 면담)

o 가족 및 변호인 접견금지조치도 엄격히 이행되었는데

- 황현승, 나경일 등은 대법원 재판 이전에 변호인 접견을 하지 못했고

- 전창일은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 일주일 전에서야 김종길 변호사를 접견했으며

- 구두선, 정점매 등 역시 대법원 판결이 확정된 후에야 가족들과의 면회가 허용되었다고 진술함

o 서울 구치소에 수감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의 신분장에는 “접견금지”라고 도장이 찍혀 있어

- 가족들의 면회가 금지되었고, 형이 확정된 후 교도관 등이 중정 담당관에게 전화해 면회를 허용하겠다고 말한 후 면회를 허락해 주었음(이두범 서울구치소 교도관 진술)

o 재판정의 방청인 제한에 대한 주장은

- 당시 재판정이 협소함에 따라 부득이 가족과 국방부 출입기자단 등 50여명으로 제한하였을 뿐 공개재판으로 심리가 진행되었음

□ 판 단

o 공판과정은

- 피고인의 반대신문의 기회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았고, 피고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인신청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등 당시의 군법회의법 제340조의 규정마저도 준수하지 않았으며

- 검찰관과 재판관들은 피고인의 발언마저 수시로 제지하여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는 부분이 상당하였고

-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판은 피고인들의 진술기회 제한, 가족 접견금지 등 피고인들의 방어권을 심각하게 침해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음

나) 공판조서 변조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변호인 김종길은

- 1974.9말 항소이유서를 작성할 당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피고인 전창일, 우홍선, 김한덕, 이성재, 강창덕 등의 공판조서를 열람한 결과

- 피고인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과 공판조서가 다르게 작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 1974.10 중순 사무실을 내방한 전창일의 처 임인영, 우홍선의 처 강순희 등에게 “공판조서의 기재내용이 피고인의 진술내용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함

※ 김종길을 조사한 1977년 중앙정보부 문건 「인혁당사건 공판조서 변조 발설자 조사」에 따르면 이는 ‘무죄의 핵심의 반영이 아니고 접촉과정 및 정황기록의 충분한 반영’이라 되어 있는데, 이는 피고인들의 법정진술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공판조서에 반영이 안 되고, 반국가단체 결성의 증거로 활용될 수 있는 상호 접촉과정이나 정황 등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는 뜻임

o 이수병, 김용원의 변호인 조승각은

- 1975.2 초순 이수병․김용원 등의 진술이 기재된 공판조서 열람을 대법원에 신청하여 타자로 된 공판조서 등본 1통을 교부받아 검토한 결과

- 많은 부분이 자신이 공판정에서 직접 들은 피고인의 진술과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 1975.2 중순 경 사무실을 방문한 이수병의 처 이정숙, 김용원의 처 유승옥에게 사실과 다르게 작성된 공판조서의 예로 1심 2회 공판조서 401, 402, 403, 405쪽 이수병 진술 중 피고인의 진술과 정반대로 작성된 공판조서 부분에 흑색볼펜으로 “___”와 “X"로 표시하여 피고인 가족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음

<조승각 변호사가 표기한 공판조서 변조 부분>

이수병, 김용원 등이 공산주의국가건설을 목적으로 공산비밀조직을 구성 하자는 회합하여 결의하지 않았는데 결의한 양 기재된 부분(401항 1-4행)

비밀조직은 구성치 않았다고 부인한 것을 시인한 양 기재된 부분(401항 13행)

이성재가 전창일과 혁신세력구성에 합의치 않은 것을 합의한 양 기재된 부분(402항 4행)

4인지도부(대정부투쟁목적)조직구성을 부인한 것을 시인한양 기재된 부분 (403항 2-3행)

도예종 서도원이 지도위원에 추대되지 않은 것을 추대된 양 기재된 부분 (403항 7행)

공산지하비밀조직 구성모의를 부인한 것을 시인한 양 기재된 부분(405항 5행)

동 목적을 위하여 3인식 회합을 결의치 않은 것을 결의한 양 기재된 부 분(405항 11행)

o 1975.2.24「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인혁당 사건의 진상을 밝힌다’ 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112)

- 피고인에 대한 접견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어 가족조차 구속 이래 한번의 접견도 허락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 법률상 보장되어 있는 형사기록․재판기록 열람에 대한 거부는 가족들이 주장하는 재판기록 변조를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함

o 공판조서 변조 문제와 관련하여 유가족들이 제기하는 주요 의혹을 살펴보면

- 당시 재판을 지켜 본 부인들은 “남편들이 분명히 법정에서 피의사실을 부인했는데, 나중에 공판조서를 보니까 대부분의 피의사실을 시인한 것처럼 전혀 다르게 작성되어 있었다”고 증언

- 전창일의 부인 임인영은 중정 수사관이 “당신 남편이 법정에서 모든 것을 시인했는데 왜 죄가 없다고 하느냐”며 공판기록을 펼쳐 보여주었는데 남편이 부인한 것이 모두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증언113)

o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장석구사건」 조사과정에서

- 당시 민청학련 사건 변호인이었던 한승헌은 “피고인들은 1심 재판 때에도…모두가 검찰관과 수사관이 작성한 조서 및 자필진술서의 내용을 부인”했다고 진술했고

- 박승서(김종대 변호인) 또한 “김종대를 비롯한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인혁당’은 물론 어떠한 이름의 조직을 결성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던 것은 분명이 기억이 납니다”라고 진술하여 공판과정에서 피고인들이 반국가단체 결성을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는 공판조서의 신뢰성을 부인했고

- 함정호(유진곤 변호인)는 이수병이 전재권 가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을 구성하라는 지령을 모의 여부에 대해 “네, 만나 모의한 바 있습니다”라는 공판조서의 기재에 대해 “그렇게 인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라고 진술

또한 함정호는 “하재완 등 일부 피고인이 북한 방송을 청취 수록한 것은 피고인들도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인혁당은 물론 어떤 조직을 만들어서 유혈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피고인 모두가 부정하였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라고 진술함

- 김광식(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은 재판정에서 지하 비밀당을 만들어서 국가를 변란시키고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검찰의 공소내용을 시인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고 진술함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러한 진술과 다른 조사내용을 종합하여 공판조서가 허위로 작성되었다고 결론지음

o 「진실위」에서 당시 비상보통군법회의 서기 조규철(68세)을 면담한 결과(조규철 면담결과, 05.10.6)

- 공판조서는 검찰관 및 변호인의 심문 및 이에 대한 피고인 답변 등을 김권욱 상사(비상보통군법회의 서기, ‘인혁당 재건위’ 사건 담당)와 함께 조서용지 등에 기록하였다가 공판이 끝난 후 사무실 등에서 기록내용을 서로 비교해 가며 정리한 후 주로 자신이 공판조서를 작성했는데

- 물리적으로 전 내용을 다 기록할 수 없어 검찰관의 심문 내용은 공소장을 참조하였으며 피고인의 답변여하에 따라 ○(是認) 또는 △(否認)등의 약호를 사용하여 기록하였으며 나머지 진술은 직접 기록

- 공판조서가 작성된 후 同 조서를 심판부장인 김영범 소령에게 보고했고 동인이 검토 후 서명

o 조규철이 진술한 공판조서의 작성방식에 따르면 공판조서는 녹취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 아니며, 법정에서의 검찰관의 질문과 피고인의 진술이 오고간 문답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했음을 인정한 것으로

- 비록 조규철은 “공판정에서의 검사나 변호인의 심문 내용이나 피고인 답변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공판조서는 있는 사실에 입각하여 작성하였으며 공판조서를 허위로 조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으나(조규철 면담결과, 2005.10.6)

- 비상군법회의의 공판조서가 설령 조규철의 주장대로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들의 주장처럼 피고인의 발언과 일치하지 않고, 때로 정반대로 기재되거나,

- 중심적인 내용은 생략된 채 진술이 요약되어 기재됨으로써 서기의 자의적인 판단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임

o 「진실위」는 공판조서 변조 의혹과 관련하여 중정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가 공판조서의 허위작성을 지시한 직접적인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했으나

- 당시 수십 명의 피고인이 한꺼번에 재판을 받아야 했기에 입회서기의 업무량이 과중하여 공판조서 작성에서 실수가 발생할 소지가 높았음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 공판조서에서 피고인들의 진술과 다르게 작성된 범위가 지나치게 넓고, 또한 반국가단체 구성과 관련된 핵심적인 내용을 기록하는 대목에서 실제 답변과 다르게 기재되었다는 점에서 공판조서가 사실과 다르게 작성되었다는 점이 단순한 실수나 착오로 보이지는 않음

o 한편 중정은 1977년 11월 21일 “세칭 인혁당 사건 15명 아내 일동”의 명의로 공판조서의 변조 등을 이유로 청와대에 재심탄원서가 제출되자 구속자 가족 대표 임인영 등과 김종길․조승각 변호사 등을 조사하였는데

- 연행조사의 목적은 이들이 향후 다시는 이런 주장을 펴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으며

- 조사결과 보고서(「인혁당사건 공판조서 변조 발설자 조사」, 1977년 12월 29일)에는 청와대에 보낸 재심탄원서와 함께 조승각 변호사가 직접 변조 부분을 밑줄과 X 표 등으로 표시한 공판조서 복사본이 첨부됨

- 인혁당사건 공판조서 변조 발설자 조사」의 내용을 보면 조승각․ 김종길 변호사는 중정의 강요로 공판조서가 변조된 것은 아니라는 진술서를 작성하였지만, 진술서의 내용에서는 공판조서가 실제 답변과 다르게 작성된 부분이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음

- 중앙정보부의 1977년 조사보고서는 공판조서가 ‘변조’된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그 내용은 실제답변과 다르게 기재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

- 법정 변론을 이유로 변호사가 구속되기까지 하는 엄혹한 유신시대의 긴급조치 아래서, 변호사가 당국에 의해 공판조서가 사실과 다르게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공판조서에 표시하여 가족들에게 배포하고, 나중에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도 사실과 다르게 작성되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는 점은 공판조서가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을 보여줌

- 두 변호사가 공판조서가 실제답변과 다르게 작성되었다고 지적한 부분은 “공산주의국가건설을 목적으로 공산비밀조직을 구성하자는 회합결의를 한 사실” 등 반국가단체 결성과 관련하여 유일한 증거로 제출된 피고인들의 자백과 관련된 부분으로

- 반국가단체 결성의 증거가 피고인들의 자백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1심 공판조서를 인용하여 피고인들이 검찰에서 행한 진술의 임의성을 인정함

- 대법원 판결문 74 - 77 쪽의 <4. 피고인 이수병에 대한 부분> 항목에 인용하고 있는 내용 중

(나) 동 공판조서 제 402면 내지 403면에는

문 : 피고인 등이 모여 어떠한 조직과 결의를 하였는가?

답 : 네, 혁신계 동지들을 규합, 과거 인혁당과 같은 통일적 조직을 구성, 대정부 투쟁에 합의하고 4인지도부를 조직구성한 활동상황을 조정 한다 등을 합의하였습니다.

(다) 동 공판조서 제 405면에는

문 : 피고인은 상피고인 황현승, 이창복, 김종대, 유진곤 등 5인과 같이 목적달성을 북조선에 의존치 말고, 우리들끼리 이념을 같이하는 동조세력을 규합하여 학생데모 등 제반 목적달성을 꾀하고, 월 1회 씩 1조에 김달수, 유진곤, 박중기, 2조에 김용원, 황현승, 이창복, 3조에 김용원, 김종대, 이창복 등으로 3인 씩 나누어 각기 회합하자는 결의를 한 사실이 있는가.

답 : 네, 그런 사실은 있으나 누구를 꼬집어서 각조로 편성한 것은 아닙니다.

o 이상의 부분은 바로 조승각 변호사가 공판조서가 사실과 다르게 작성되었다고 지적한 부분으로서

- 이는 실제 답변과 정반대로 작성된 공판조서가 대법원에서의 사형 확정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임

□ 판 단

o 공판조서는 피해자 유가족들의 주장처럼 실제 답변내용과 일치하지 않게 작성되었는데

-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같은 공안사건은 피고인의 진술에 대한 판단과 해석이 특히 중요한데

- 진술의 임의성 여부를 판단하는 진술이 동그라미, 세모와 같은 단순화된 기호로 분류된 후 서기에 의해 실제 진술과 다르게 기재된 것은 심각한 문제

o 공판조서 변조 의혹과 관련하여

- 대법원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의 진술의 임의성을 판단할 때 1심 공판조서를 인용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 변조된 공판조서가 사형판결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고

- 공판조서 변조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변호사(조승각, 김종길) 및 관련자 가족(임인영 등 15명)을 중정에서 연행 조사하는 등 중정이 권한을 남용한 측면과

- 8명이 사형된 공안사건의 공판조서가 피고인의 실제 진술(조직결성 및 진술의 임의성 등 관련)과 다르게 기재되는 결과를 초래한 책임은 당시 재판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음

라. 소결

o 관련자들을 부당한 군사법정에서 강압적인 수단으로 정권의 요구에 따라 처단한 것은 무엇보다 가장 용납될 수 없는 국가폭력행위임

o 공판과정에서

- 피고인의 반대신문 차단, 피고인들의 증인신청 기각, 발언 저지 등 재판의 공정성을 의심할 수 있는 조치가 있었고

- 공판조서는 실제 진술내용과 다르게 조작되었고

- 당시 중정은 군법회의법을 근거로 피의자들에 대한 접견금지명령을 내려 피의자의 가족 및 변호인 접견권을 침해함


Ⅳ. 결론 및 의견

1. 결론

o 1964년의 「인혁당사건」과 1974년의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각각 민정 이양 직후와 유신체제 출범 직후에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가운데 발생한 대형 공안사건으로서

o 다양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여러 활동들 가운데 가장 치열하거나 또는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한 경우에 북한과 직접 연결되거나 조총련 등 국외공산계열의 배후조종을 받는 반국가단체로 몰고 간 사건들이었음

o 이들 사건은 학생데모로 인한 정권의 위기상황 속에서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 또는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사건의 실체가 매우 과장된 채 발표되었고

o 일단 대통령이나 부장의 발표에서 규정된 인혁당이나 민청학련의 성격은 그대로 수사지침이 되어 짜맞추기가 진행되어 이들 단체를 무리하게 반국가단체로 만들어간 것임

o 이 과정에서 불리한 진술을 강요하는 과정이나 핵심인물들의 소재를 찾기 위해 종종 고문이나 가혹행위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o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의 경우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주장하다가 사표를 쓸 정도로 파문이 컸으나, 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의 신직수 검찰총장 등 검찰 수뇌부가 기소를 강행한 사건으로 검찰의 독립성이 정권과 중앙정보부에 의해 중대하게 훼손당하는 전기를 이룬 사건이고

o 민청학련 사건은 순수한 반정부데모를 대통령이 직접 나서 공산주의자들의 배후조종을 받는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하여 1천여명을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였으며 7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수십 명을 무기와 10년 이상의 장기형에 처한 대한민국 최대의 학생운동 탄압사건이며

o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거센 저항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이 학생데모의 배후에 북과 연결된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이용한 사건으로, 대법원의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8명의 사형을 집행하여 국내외로부터 ‘사법살인’이란 비판을 듣게 된 최악의 공안사건임

o 결국 국가보안법 상의 반국가단체의 개념을 서클 수준의 조직에까지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1980년대 국가보안법으로 수많은 조직사건들을 만들어 내 민주화운동탄압이 가능하도록 한 역할을 했음

o 또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의 경우, 긴급조치에 따라 다수의 시민과 학생들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되어 군법회의에서 1심과 2심 재판을 받았는데, 이는 당사자의 인권을 중대하게 침해하였을 뿐 아니라, 사법부의 독립성 역시 중대하게 침해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음

o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경우 북한방송을 녹취한 노트를 돌려 본 행위는 분명 당시의 실정법 위반이지만, 그 처벌은 반공법으로 엄격하게 의율한다 해도 최고 징역 1-2년 정도에 그치는 것이 마땅하다 할 것임

o 그럼에도 사건을 조작하여 8명씩이나 사형에 처한 행동은 분명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며, 이는 정당성을 결여한 독재정권의 유지를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을 위한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결론짓지 않을 수 없음

o 국가정보원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비롯하여 「민청학련 사건」, 1964년의 「인혁당사건」 등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 자행된 권력의 오용과 남용으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가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리는 바이다.

2. 의견

o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국가 차원의 적절한 배상과 보상이 국정원과 다른 국가기관의 책임 하에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임

o 대한민국이 인권과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형사소송과 관련된 헌법적 권리가 어떤 일이 있어도 침해받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국가안보의 이름 아래 국가보안법이 시민들의 헌법적 권리를 중대하게 침해해 왔는데, 이제 잘못된 과거와 결별하려는 국민적 차원의 결단이 필요함

o 「인혁당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중앙정보부의 책임 아래 수사가 진행된 사건이지만, 정권 차원의 위기 상황에서 중앙정보부 윗선에서 사건의 성격이 규정되고 수사의 방향이 미리 결정․지시됨으로써 국가최고정보기관으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중대하게 침해된 사건이기도 했다. 국가최고정보기관이 국가 차원이 아닌 정권 차원의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국정원 안팎의 개혁이 필요함

o 「인혁당 재건위」 사건 등은 중앙정보부만이 처리한 사건이 아니라 국가 체계 전체가 가동되어 벌어진 일이다. 물론 그 국가체계 핵심과 정점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다는 점에서 중앙정보부는 절대적인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노트 한 권을 돌려 본 사람 8명을 사형에 처해 버리는 강압통치는 결코 하루 아침에 중앙정보부에 의해서만 구축된 것은 아니다. 증거의 부족, 고문 의혹, 심지어 공판조서의 변조 의혹 등 반드시 검증되어야 할 의혹들은 검찰과 사법체계에서 전혀 걸러지지 않았고, 언론 역시 자유언론 실천을 선언한 양심적인 언론인들을 몰아내 버리고 정권의 요구에 맞춰 위기의식을 부추겼다. 법과 상식과 양심, 그 어느 하나도 작동하지 않은 잘못된 국가운영의 총체적인 반성이 필요함



http://news.kbs.co.kr/tvnews/4321/2011/02/22497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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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딸과 아들이 앉았습니다. 아버지가 간첩혐의로 사형당할 당시 서른 한 살 새댁이었던 큰딸은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팔순넘은 백발노인이 됐습니다.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는 20여분간.. 가족들은 미동도 않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곤 무죄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방청석 여기저기선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아버지 죽산 조봉암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쓴채 사형당한 오욕의 세월을 지워 버리는데는 채 반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다신 정적을 없앤 이런일이 일어나선 안되겠죠. 정적을 없애는 이런..."

지난 59년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후 52년만에 지난 달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 받았습니다. 유족들은 지난 반세기동안 간첩의 후손이라는 멍에속에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죽산 조봉암 사건을 계기로 잘못된 사법 판단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들어 봤습니다.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벗은 뒤에도 죽산의 딸 조호정씨의 일과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백지에 반야심경을 한자 한자 적어나가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그리곤 집 근처 사찰로 가서 태워 버립니다,

<녹취> 조호정 : "나도 이제 80이 넘고 그러니까 나 가기전에 됐으면 좋겠다고 그 얘기밖에 다른게 없어요."

독립운동가로 제헌국회의원과 농림부 장관등을 지낸 죽산 조봉암은 1952년 제2대,,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80여만표와 200여만 표를 받으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59년 7월.사형당했습니다. 국가 변란 단체 결성과 간첩 혐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조봉암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 탄압으로 규정하자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고, 대법원이 50여년만에 판결을 뒤집으며 무죄를 선고한 것입니다.

<인터뷰>이동근(前 대법원 공보관) : "간첩죄는 증거가 부족해 무죄이고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아니므로 52년만에 종전 판결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았습니다."

당시 가족들은 아버지가 사형당했단 것도 몰랐습니다. 하얀 수의에 덮여 돌아온 아버지의 시신이 기억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소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구명 탄원서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녹취> 조호정 : "박사님.. 저희 아버님은 백번 고쳐죽어도 절대로 간첩이 될수 없습니다.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 내 조국인데 무엇이 부족해서 누구를 위해서 간첩 노릇을 하셨겠습니까?"

<인터뷰>조호정(83/죽산 조봉암의 맏딸) : "그렇게 험하게 가셨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 얼굴이 편안해. 아..이런 말 한번도 안 해봤는데..조금 미소짓고 가만히 있어..아유 참...그러고 끝이 나거예요."

장남 규호씨의 고통은 더 컸습니다. 당시 10살이었던 조규호씨는 간첩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혀 정상적인 직장 생활 조차 힘들었습니다. 감시의 눈초리는 삼엄했고 남들 다 가는 해외 여행은 비자가 나오지 않아 꿈도 꿀수 없었습니다.

<인터뷰>조규호(62/죽산 조봉암의 장남) : "얘기하면 뭐해...편안하게 할려고 그랬는데 본인이 아니면 모르지."

유족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생가터를 발굴하고 추모사업을 계획하고 있지만 역시 쉽지 않습니다.
강화도의 한 마을. 조봉암 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생가터는 알수 없습니다. 간첩 혐의로 사형됐기 때문에 행적을 알만한 사람 대부분이 언급 조차 꺼렸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김기헌(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장) : "죽산 선생이 이곳에 사셨다는 얘기를 들었다.물론 공부상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선생의 제적등본입니다. 등본에는 사형 당했다는 것만 표기돼 있을뿐 출생에 관한 기록은 전무합니다. 때문에 현재 생가터로 추측되고 있는 곳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인터뷰>이응식(강화읍장) : "세 군데 이사를 다니면서 다 조봉암 선생님이 사셨거던요. 첫번째 어느 자리든 택해서 생가로(지정해야하지 않나)"

대구에 있는 한 공원묘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묘를 위해 찾았습니다. 지난 1975년.소위 인혁당재건위사건 사형수들의 유가족들입니다.

<인터뷰>신동숙(82/故 도예종씨 부인) : "사형했다는 걸 알고 와서 그 소리 듣고 통곡 말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병원에 갔었어요."

성묘를 마친 85살의 강창덕옹은 개인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모셔둔 영정앞에서 또 한번 묵념을 올립니다.

<녹취>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애국 선열에게 간곡히 기원합니다. 첫째 영면하시고 명복을 빌고."

지난 74년 소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강창덕옹은 8년8개월의 옥고를 치른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인터뷰>강창덕(85/8년8개월 복역(인혁당 사건 관련)) : "왜 나도 안죽고 이렇게 사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자꾸 나고."

같은 무기수로 살다 풀려난 나경일씨는 대장암과 투병하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아들 문석씨는 아버지가 투병중에 수술을 받을때도 고문으로 착각할 정도로 심한 고문 후유증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아버님이 고문실로 착각하셨어요. 수술실을. 당시에 고문실이 조명이라든지 비슷했던가봐요. 그 악몽을 재연하고 계신거예요. 나쁜 놈들..나를 왜 여기 잡아 넣느냐. 참. 그때 아들로서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그렇게 강인한 분이 셨는데."

김진생 할머니는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간뒤 1년만에 유골로 돌아온 남편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83살 노인의 응어리가 녹아있는 알 듯 모를듯한 내용의 메모만이 당시 김 할머니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인터뷰>김진생(83/故 송상진씨 부인) : "(왜 이걸 쓰신거죠? 어머니) 뭐 한때 내가 이래저래 내 생각대로 이래 한게 있었지."

지난 1975년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한해전 반독재를 주도하던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하자 그 배후로 지목되면서 불거졌습니다. 관련자들은 당시 대법원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8명은 사형 판결을 받은 뒤 불과 18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가족들이 기록한 증언록에는 간첩 가족으로 한평생 살아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절절합니다.

<녹취> "수사관이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손가락을 비틀고 단단한 몽둥이로 발바닥,허벅지, 팔을 때렸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심하게 고문을 당해서 두 번인가 세 번정도 실신을 했습니다."

<인터뷰>김형태(사건 담당 변호사) : "피고인들이 신청한 증거들 그런 것도 받아줘야 되거든요. 근데 다 기각하고 그냥 항소심 같은데선 아무것도 안하고 결심을 해버려요."

당시 사형 선고를 내렸던 대법관들은 재판장이었던 민복기 대법원장. 주심이었던 이병호 판사를 비롯해 모두 13명. 이 가운데 이일규 판사만 사실 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판절차가 위법하다며 사형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을 냈고 나머지 12명은 모두 찬성했습니다.
지난 2007년. 이일규 판사는 타계를 앞둔 1년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녹취>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어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습니다."

인혁당이 배후로 지목됐던 민청학련 사건도 대학생과 일반인등 대규모 구속 사태를 불러 왔습니다. 지난 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후 1000여명의 위반자를 조사했고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한다는 혐의로 180명을 구속기소했습니다.

<인터뷰>이철(민청학련 관련 1심서 사형선고) : "아버지는 몸져 누우시고, 어머니는 고생하시다가 몸이 불편해지시고, 딸들은 행방불명이 되고, 형제는 뿔뿔이 흩어지고, 본인은 병들어 눕고, 이런 집안이 한 두곳이 아니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루돼 12년 형을 선고 받았던 최민화씨도 가족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등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인터뷰>최민화(민청학련 관련 1심서 12년 선고) : "“이 사회에 다시는 우리와 같은 그런 우여곡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되는 그런 세상은 이제 오지 않겠지라고 하는 그런 회한도 좀 있습니다."

1970년대를 뒤흔들었던 이들 사건은 지난 2005년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가 두 사건은 모두 조작됐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 판결과 배상 결정이 내려지면서 누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인터뷰>오승용(전남대 정치학 박사) : "국가는 단순히 피해자들에게 배상과 보상을 하는 것으로서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상처를 치유할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제공해줄 필요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인권의 최후보루인 사법부...그 성스러운 곳에서 내려진 잘못된 판결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영어의 몸이 됐습니다. 굳이 시계를 과거로 돌리지 않더라도 시대의 아픔은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유족들은 뒤늦게 국가를 상대로 배상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지만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며 이 문제는 인터뷰에서 빼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뷰>나문석(故 나경일씨(8년8개월 복역) 아들) : "그걸 보상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걸 많다고 얘기한다면 저는 당연히 안받아야 되는거죠. 그 대신 35년전에 우리 가족들의 삶으로 돌려달라는 거죠. 그거 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바라는게 뭐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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