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남산 중정 지하 취조실 해체
중앙정보부~안기부까지 시국사건 제조실
냉장고 문 달린 밀실서 물고문·전기고문
“국가폭력 상징, 없애지 말고 그대로 두자” 



     
서울 중구 예장동 4-1번지 옛 중앙정보부 6국(학원수사 담당)의 지하 취조실 벽을 16일 오후 공사 관계자들이 해체해 크레인으로 들어 옮기고 있다. 서울시는 이 공간을 ‘중앙정보부 6국’을 의미하는 ‘6’과 고문과 용공조작 등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의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6’으로 이름짓고 내년 8월까지 공사를 마칠 계획이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16일 죽음의 방이라고 불리었던 남산 중앙정보부 6국 지하실 문이 열렸다. 서울시가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을 국가폭력 역사를 기록하는 광장과 전시실로 만들기로 하면서 지하실도 원래의 모습을 남길 수 있도록 해체, 재설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날 고문과 폭력의 현장이었던 지하 취조실을 해체하는 과정이 공개됐다.
 

     
중정 6국 자리에 선 최민화씨 남은주 기자


“아무 것도 없고 책상 2개만 있었어. 그 사이에 철봉을 끼워서 사람을 거꾸로 매달고 얼굴에 물을 부었지.”

옛중앙정보부6국 해체 현장을 지켜보던 최민화(68)씨의 시간은 43년 전으로 돌아갔다. 1974년 3월28일 밤, 연세대 신학과 대학생이던 그는 눈이 가려진 채 6국으로 실려왔다. 민청학련 사건 피의자로 지목된 그가 쉽사리 배후를 대지 않자 4일째 되던 날 지하실로 끌려내려왔다. 그는 아직도 30㎡ 넓이의 지하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도가 있었던 넓은 방은 주로 물고문이나 통닭구이고문에 쓰였다. 통닭구이는 손과 발을 묶고 때리는 고문이었다. 또 지하실 한 켠엔 밀폐된 작은 방이 있고 여기 의자가 두개 있었는데 의자 하나는 피의자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꿈쩍하지 않도록 바닥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30여차례나 6국에 불려다닌 최민화씨는 80년대엔 남영동 대공분실까지 끌려가봤다. 최씨는 “남영동은 처음부터 고문수사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엉성하게 만들어진 폭력의 장소였다”고 회상했다.

2004년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에서 6국 출신 수사관은 “지하는 보일러와 기계실로 가득찬 곳이어서 고문이 이뤄질 여지가 없었다”며 고문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끌려 왔던 사람들은 이곳을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 때 지하실은 두개의 밀실을 갖춘 고문실로 사용됐다. 밀실마다 정육점 대형 냉장고에서 쓰는 것 같이 생긴, 안에선 열리지 않는 두꺼운 철문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각각 10㎡, 12㎡ 남짓한 두 개의 작은 방에서 인혁당 사건 피의자 허작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안경알을 깨서 자살하려고 했고, 다른 사람들도 탈장과 폐농양을 일으킬 때까지 짓이겨졌다.

서울시는 16일 두 밀실의 벽을 해체해 다른 곳으로 옮겼다가 내년 8월까지 고문·취조실의 기억을 간직한 전시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다. 전시관 ‘기억6’ 기획자 서해성씨는 “이 공간은 우리가 국가폭력을 어떻게 기억하고 남길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07032.html#csidx015feca170ba2f59983f4c7306c355d









'주진우의 현대사' 2화 - 인혁당, 법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지르다




조순제 녹취록과 사망원인?

국정농단의 주역, 최순실의 의붓오빠이자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 그는 사망하기 1년 전에 한나라단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MB 캠프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담긴 녹취록을 남기게 됩니다. 이를 조순제 녹취록이라고 하는데요. 녹취록의 내용도 궁금하지만 왜 그렇게 급작스럽게 사망했는가 하는 사망원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데, 원래 지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JTBC의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녹취록의 전문을 입수하여 공개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돈 다 냈어요", "돈은 철저히 최태민이 다 관리"

"10월 26일 후에 뭉텅이 돈이 왔으니까, 최순실도 돈 심부름을 꽤나 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순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구국선교회(구국봉사단)과 영남대, 육영재단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었으니,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아는 사람일텐데, 위 몇 마디의 말만으로도 어떻게 최순실, 최태민 일가가 돈을 그렇게 많이 축적할 수 있었는가의 시발점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총 19장으로 이뤄진 조순제 녹취록은 존재만으로도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내용은 최순실, 최태민, 조순제,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간의 20년의 관계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하는데요. 이 내용중에는 방송중에 공개하기 힘든 사생활까지도 담겨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최순실 사태와 관련해서 근본을 설명해줄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10.26 사태이후 뭉칫돈이 최태민 일가로 들어가게 되고, 돈 심부름을 여동생들이 했다"라고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10.26 사태는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서 살해당했던 날입니다.


<조순제가 2007년 한나라당에 제출되었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위증 진정서>


조순제가 "아버지 최태민의 지시로 박근혜 대통령의 업무 지원을 했는데, 자신의 의존도(조순제)가 컸다. 내가 박대통령이 얘기하면 한자 한획도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됐다."라는 말도 녹취록에 들어 있었는데, 녹취록을 남겼던 2007년도 한나라당 대선 경선과정에서 박근혜 후보가, 자신은 "조순제라는 인물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고, 배신감이 들었기 때문에 이 녹취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차례에 걸쳐서 "박근혜 후보는 절대 대통령이 되서는 안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최태민의 집인 역삼동에 자주 갔었고, 10.26사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 후에는 최순실과 급속도록 가까워졌다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최태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일명 부적절했던 관계를 폭로하였다고 합니다.


"아이고, 그 전부터도 둘은 아주 불가분의 관계라고 봐야지" "하여튼 자주 왔어요. 사람들 다 피하게 하고 눈에 안 띄게." "온다고 연락이 오면 다 피하고"

"둘이 들어갔다 하면 밥은 문간에 갖다놓으면 영감(최태민)이 갖고 들어가고"

"저 사람(최태민)은 여자라 하는 건 그냥 무사히 통과되는 경우를 본적이 없어. 아 대단하죠, 여자에 대해선."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 최태민에 대해서는 반감을 드러내는 말도 하였다고 하네요. 즉

"엉망이었던 사람이 본인의 엄마를 만나면서 인간이 되었다는" 


<정두언 회고록>


한편 정두언은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19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자신은 박근혜 대통령을 찍지 않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유신시절 의부 최태민이 국정농단의 실제 인물이었는지를 가려내는 것은 검증위으 몫입니다."라는 그의 글을 보니, 대를 이어 국정농단을 하고 있는 최씨일가, 최순실 씁쓸하네요.


<티비조선 "최순실 의붓오빠 조순제 녹취록 육성 녹음 동영상>


<그것이 알고 싶다 중에서>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과거 정두언의 19금 이야기가 언급 되었다고 합니다.


조웅 목사의 박근혜 마약 중독, 혼외 정사 의혹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

 

어제 주요 일간지와 방송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청와대가 구입한 약품 중 사용처가 이해하기 힘든 약품 목록을 공개했다. 미용, 안티 에이징 시술에 사용되는 주사제가 수백 개 있었고 불면증 치료를 위한 다량의 수면제, 국소 마취제, 수술 후 지혈제, 수면 내시경용 수면 마취제 등 피부과와 성형외과라도 차린 듯 구매 약품 목록은 의아함을 느끼게 했다. 이 약품 중 백미는 비아그라와 팔팔정이었는데 이 약품은 대표적인 남성 발기 부전증 치료제다. 청와대는 엉뚱하게도 비아그라와 팔팔정을 해외 순방 시 고산병 예방과 치료를 위해 구입했다고 해명했다. 고산병에 대해 전문의들은 5천미터 이상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고 비아그라와 팔팔정이 아니라 전문 고산병 예방 치료약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어제 청와대에서 구매한 약품 목록을 통해 다시 주목받는 주장이 있다. 조웅 목사라는 사람이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안되는 이유라며 박근혜의 숨은 비밀을 밝힌 인터뷰다. 그런데 당시에는 조웅 목사의 주장이 너무 황당하고 노골적이고 근거가 없다하여 박근혜 반대파조차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무시했었다. 근본도 알 수 없는 늙은이가 박근혜에 대한 반감이 끓어오르는 시국을 이용해 헛소리하는 것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조웅 목사의 당시 주장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의 주장 중 일부가 사실로 밝혀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웅 목사가 주장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인터뷰 주인공: 조웅(80세 ; 개명) 목사→박정희 때 5.16쿠데타를 주도한 장본인이며, 중앙정보부 창설멤버이다. 조 목사는 황태성 간첩 사건을 미 CIA에 제보하였다.
 
* 5.16쿠데타에 대한 제보가 방첩대(CIC)에 두 번 올라왔는데 조웅 목사가 당시 방첩대에 있으면서 박정희 김종필 체포를 막았다.
    
* 조웅 목사는 김종필을 한국 중앙정보부에서 몰아냈다.
  
* 박정희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잡아다가 분쇄기에 갈아 죽였다. 그 외에도 장준하 등 많은 사람을 암살하였고 조웅 목사도 신변의 위협을 받았는데 김형욱이 죽이지 말라고 카바해 주었고, 미 CIA의 보호를 받았다. 
 
* 박근혜는 평양에 가서 김정일과 독대했으며 독대시간은 4시간 30분. 만찬 시 마약을 탄 백두산산삼독사주를 마시고 불륜관계를 맺었다. 박근혜는 3박4일동안 김정일을 만났고. 김정일과 마약을 탄 백두산산삼독사주를 마시고 잤다. 
 
*박근혜가 평양에 갈 때 정윤회. 장자크구로아. 수행비서. 요렇게 넷이었다. 장자크구로아는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전용기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김정일이 응하였고 전용기를 타고 넷은 평양에 편하게 도착했다.    
 
* 박근혜는 평양에 갈 때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500억원(4,500만불)을 들고 갔다. 김일성 묘에 참배했고, 고려연방제를 창립하기로 했다. (조웅 목사는 2005년 박근혜를 외환관리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 장 자끄 꾸르와라는 주한 EU상공회의소 소장(EUCCK Secretary General)은 북한에서 7년 살았고, 박근혜의 북한 방문도 주선하였는데 북한 첩보원으로 본다.  
 
* 김정일은 박근혜, 정윤회, 수행비서, 장 자끄 꾸르와 4명을 위해 김정일 전용기를 중국 비행장으로 보냈다.

* 박근혜는 최태민과 15년간 동거하였고, 최태민은 늙어서 정력이 딸려 박근혜와 마약하고 성관계했고, 두 번 낙태했다. 조웅 목사는 박근혜 자궁을 조사하면 알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태민은 박근혜 재산 3,000억원을 빼먹었다. 
 
* 최태민 사후 최태민의 의붓딸 최순실의 남편인 정윤회(최태민의 의붓사위)와 16년간 마약하고 성관계했다.   
 
*  박근혜 박지만은 마약하고 불륜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폭로하여 박지만이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 박근혜, 박근영, 박지만 모두 마약했다.
 
* 최순실과 정윤회는 박근혜 때문에 법률상 이혼하였지만 동거하고 있고, 박근혜가 정윤회를 부르면 정윤회는 또 박근혜에게 가서 자는 관계이니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허수아비이며 정윤회가 실세로서 장관 등 인사를 정윤회가 전횡하고 있다.
 
* 조웅 목사는 박근혜를 검찰에 고발했는데 검찰에서는 조웅 목사만 조사하고 박근혜를 조사하지 않는다.  


아프리카TV BJ 등은 2013년 2월 23일 조웅 목사를 만나 다시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는 생방송으로 스트리밍되고 있었는데 현장을 급습한 형사에 의해 조웅 목사는 명예훼손 혐의로 체포된다. 이날 인터뷰는 아프리카 tv 아이디 '안단테사랑'의 강동진씨가 주최했고 미디어오늘도 동행했다. 인터뷰 장소는 사전에 공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체포 기소된 조웅 목사는 2013년 11월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명예훼손), 공용서류손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웅 목사에게 징역 1년6월을 선고 받았다.

https://youtu.be/3l2MBbDRedg

사건은 대법원으로 올라갔으나, 대법원 제2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박근혜 대통령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조웅 목사에 대해 징역 1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우연히도 대법원의 최종 판결 날짜는 2014년 5월 16일이었다. 



조웅 목사의 주장은 당시 미친 소리로 취급 받았고 조웅 목사를 인터뷰하는 아프리카TV의 BJ조차 조웅 목사의 주장에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조웅 목사가 급습한 형사에 의해 체포된 지 3년 8개월이 지난 2016년 10월, JTBC는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을 뒤에서 조정하며 국정을 농단했다는 주장과 함께 구체적인 증거인 태블릿PC를 제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JTBC의 보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순실에게 연설문 수정 등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초 사과 이후 한 달 가까이 매일 새로운 국정 농단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고 이제 모든 의혹은 사실에 기반한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행적은 광범위하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생활조차 현행법률을 위반하고 더 나아가 보통의 시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난잡함이 있는 게 아닌가 의혹을 낳고 있다. 

박근혜가 최순실 이름으로 혈액 조사를 한 것은 마약 성분 검출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게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고, 청와대가 구입한 주사제 중 "에토미데이트리푸로주"는 프로포폴과 유사한 작용을 하는데 수면내시경을 할 일이 없는 청와대에서 구입한 건 이상한 일이라고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면역제인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주"를 여러 차례 구매한 점도 마약이나 향정신성 의약품 혹은 약물 중독으로 인해 취약해진 면역력 보강을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매체도 있다. 심지어 백옥주사의 성분 중 하나인 "글루타치온"이 항마약 작용을 한다며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도 있다. 


조웅 목사의 말도 안되는 상상이 현실이 되고 있다. 조웅 목사의 목소리가 묻힌 이유는 한 가지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조웅 목사의 주장을 무시하거나 우스갯소리로 여겼고 그가 긴급 체포될 때 오히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체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조웅 목사와 같은 사람은 구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다. 아니, 조웅 목사의 주장 중 일부가 사실로 드러났다. 그리고 다른 주장들도 헛소리가 아니라 합리적 의심의 수준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왜 청와대는 그 많은 약품을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남성용 발기 부전 치료제를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수면내시경용 마취제를 구입했는가? 왜 청와대는 수백개의 미용 주사약을 구입했는가? 조웅 목사는 주장을 했으나 제시하지 못했던 근거가 지금 튀어나오고 있다. 좀 더 뒤져보면 더 많은 증거가 나올 것이다. 이런 증거는 모두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청와대는 검찰의 기소 내용에 대해 "상상과 추측의 사상누각"이라고 평했다. 조웅 목사의 주장에 대해 상상과 추측이라고 말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검찰은 99%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최순실의 이익을 위해 일하라고 지시한 녹취 파일도 있다고 말한다. 지시 문건도 있다고 한다. 주장이 아니라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천마디의 주장을 뒤집는 게 하나의 증거다. 


조웅 목사가 주장하는 내용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누군가 갖고 있을 것이다. 세계일보 전 사장이 말하는 대통령을 날려 버릴 수 있는 8가지 기사도 어쩌면 조웅 목사의 그것과 크게 차이 없을 지 모른다. 어떤 사건에 대해 목격자나 주변 사람의 증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변할 수 없는 증거다. 지난 10월 이후 박근혜 정부를 붕괴시키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주장이 아니라 그 주장을 확정하는 증거였다. JTBC가 태블릿PC와 같이 확고부동한 증거에 기반하여 고발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이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듯 박근혜 대통령이 끝까지 밝히지 않는 세월호 7시간, 혹시 마약이라도 한 게 아니냐는 추측도 이런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23/2015062390047.html


모든 미디어와 시민과 제보자가 함께 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최초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밝혀낼 수 있다. 모든 의혹에 대해 상식적 의심에 기초하여 추론해야 한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과 그 주변인, 최순실 일당이 결코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의혹은 범죄자에 대한 상식 수준에서 의심하고 추론해야 한다. 대통령이 주치의와 청와대 의료진을 두고 외부 약품을 사용한다는 게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이상할 일 없다. 대통령이 프로포폴이든 마약이든 향정신성 약품을 사용한다면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이상할 일 없다. 대통령이 국정 관련 자료를 외부인에게 건낸다면 이상하지만 범죄자라면 다 털어 먹기 위함이니 이상할 일 없다. 범죄자의 상식 수준으로 바라봐야지 일반인의 상식으로 바라보면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인물은 우리 상식 속의 대통령이 아니다. 검찰이 기소한 내용만 해도 이미 수십가지 범죄를 저질렀고 헌정을 유린하여 국민 대다수가 하야 혹은 탄핵되어야 한다고 불신하는 인물이다. 이런 인물의 범죄 의혹을 따질 때 일반인의 상식 수준에서 바라본다면 결코 증거를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말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상상한 것 그 이상의 범죄가 계속 드러날테니까.




한비자 / 나라가 망하는 10가지 징조


1. 법(法)을 소홀이 하고 음모와 계략에만 힘쓰며 국내정치는 어지럽게 두면서 나라 밖 외세(外勢)만을 의지하다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2. 선비들이 논쟁만 즐기며 상인들은 나라 밖에 재물을 쌓아두고 대신들은 개인적인 이권만을 취택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3. 군주가 누각이나 연못을 좋아하여 대형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고를 탕진(蕩盡)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4. 간연(間然)하는 자의 벼슬이 높고 낮은 것에 근거하여 의견(意見)을 듣고 여러 사람 말을 견주어 판단하지 않으며 듣기 좋은 말만하는 사람 의견만을 받아들여 참고(參考)를 삼으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5. 군주가 고집이 센 성격으로 간언은 듣지 않고 승부에 집착하여 제 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6. 다른 나라와의 동맹(同盟)만 믿고 이웃 적을 가볍게 생각하여 행동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7. 나라 안의 인재(人才)는 쓰지 않고 나라 밖에서 온 사람을 등용(登用)하여 오랫동안 낮은 벼슬을 참고 봉사한 사람 위에 세우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8. 군주가 대범하여 뉘우침이 없고 나라가 혼란해도 자신은 재능(才能)이 많다고 여기며 나라 안 상황에는 어두우면서 이웃적국을 경계하지 않아 반역세력(反逆勢力)이 강성하여 밖으로 적국(敵國)의 힘을 빌려 백성들은 착취하는데도 처벌하지 못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9. 세력가의 천거(薦居) 받은 사람은 등용되고, 나라에 공을 세운 지사(志士)는 내 쫓아 국가에 대한 공헌(公憲)은 무시되어 아는 사람만 등용되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10. 나라의 창고는 텅 비어 빛 더미에 있는데 권세자의 창고는 가득차고 백성들은 가난한데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이득을 얻어 반역(反逆)도가 득세하여 권력을 잡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


1. 한비자의 생애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왕(韓王) 안(安)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왕족이었지만 왕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였다. 이 같은 불행한 소년기를 가졌기에 일찍부터 학문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한나라는 전국7웅(秦, 楚, 燕, 齊, 韓, 魏, 趙) 중의 하나로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소국이었다. 한비(韓非:한비자의 본명)는 당대의 석학인 순자에게 배우기 위해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그를 찾아갔다. 순자는 조나라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자의 우두머리인 제주에 초빙되어 있었다.
한비는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동안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물론, 이곳에서 유가, 도가, 명가, 법가, 묵가 등 여러 학파의 학문을 두루 흡수, 비판하면서 부국강병의 설을 체계화했다. 그의 학설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면 국왕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말재주가 없어 자신의 뛰어난 문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문장을 모은 저서 [한비자]는 55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 한비자의 저서 중 [고분]과 [오두]를 우연히 진시황이 보게 되어 "이 책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때 이사가 진시황에게 "한비를 얻고 싶으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반드시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올 것이다"고 건의하자 예상대로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빌었다. 이때 한비는 진시황을 움직여 위험에 빠진 한나라를 구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한편 이사는 진시왕이 한비를 중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모함했으나, 진시황은 그의 인물됨을 아껴 투옥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옥에 갇힌 한비에게 이사는 독약을 보내 자살할 것을 강요하자, 한비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진시황을 만나볼 기회를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석방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그가 자살한 후였다. 이처럼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조국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어간 사상가로서, 중앙집권적 봉건 전제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이론을 집대성한 자이다.


2. 사상적 배경
법가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전환기적 사회변혁에 가장 잘 부합되고, 실시할 경우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군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사상이 발전한 지역은 주로 제나라와 한 겅 위 겅 조 삼진(三晋)지역이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발전한 법가사상은 주로 경제적 발전을 위한 부국정책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데 반해 한, 위, 조에서는 법가사상이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와 강병정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존의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제나라 법가학파의 정치사상은 그 중심이 경제에 있었다. 제나라의 관중이 지은 [관자(管子)]에 보면, 군주는 백성을 위해 경제적인 부강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농정책을 실시해야 하고, 또 검약한 생활과 물품의 원활한 수송으로 궁핍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공업과 상업은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국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위나라는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법치주의자들이 삼진에 많은 것은 바로 진(晋)의 분가와 분가된 3국의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진의 법가사상은 3파로 나뉘어지는데, "법치주의(法治主義)", "술치주의(術治主義)", "세치주의(勢治主義)"가 곧 이것이며, 이는 한비자에 의해 "법술(法術)"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자는 이사와 상앙으로, 이들은 법률을 제정하여 이를 근본으로 삼고 엄한 형벌과 큰상을 수단으로 하여 엄격히 백성을 통제하고 군권을 강화하여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이사는 위나라의 문후(文侯)를 섬겨 변법을 추진했고 상앙은 진나라 효공(孝公)을 도와 2차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여 진의 통일기반을 마련했다.
"술치주의"는 한나라 신불해(申不害)가 주장한 것으로 권모술수를 이용한 일종의 통치기술이다. 신하를 통솔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여 상벌을 가하고 임금을 두렵게 여김으로써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나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한나라 발전에 공을 세웠다. "세치주의"를 내세운 사람은 조나라 출신 신도(愼到)다. 신도는 군주의 절대적 세력이 곧 군주세력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군주의 덕행이나 재능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전국시대의 법가주의 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한비자가 죽은 지 15년 후에 전한의 사가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한비는 "형명(刑名)", "법술(法術)"을 좋아했는데 그 돌아감은 황로사상(黃老思想)에 근본한다. 이사와 더불어 함께 순자를 섬기었다"고 기록했다.
한비자는 한나라 공자(公子)로 진시황 때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순자의 제자로서 성악설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한비자는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를 배척하고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법치의 기본은 "엄형주의(嚴刑主義)"와 철저한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했다. 군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강한 나라이고 이를 위해서는 강한 군대(强兵)가 필요하고 부국을 위한 농업생산의 발전을 내세워 상업과 공업을 말업(末業)으로 억압했다. 한비자는 법치의 운영 방법으로 술치와 제치를 함께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즉,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法 , 術 , 勢'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했다.
한편 한비자는 "형명동참(刑名同參)"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신하들이 하는 말(名)과 실제의 공로(刑)를 비교하여, 서로 부합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어 신하들의 망언이나 악행을 방지하고 그 책임을 분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한비자의 "형명론(刑名論)"은 명가(名家)의 실재론(實在論)과 상통한다.


3. [한비자]의 내용
[한비자]는 한비의 저서로 처음 한자(韓子)라 불렀는데 당(唐)의 한유(韓兪도 한자(韓子)라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송대 이후 한비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총 55편으로 총 10만 어로 엮어져 있으며, 논문체 문답체 문장과 설화, 우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은 한비가 저술한 것이나 일부는 그의 후학들이 쓴 것도 있다. 55편 중 한비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비자의 사상은 "법술론"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법'이란 법령을 뜻하고, 이 법이야말로 국가통치의 근본이 된다고 강조했다. 법은 백성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며 아무리 평범한 군주라도 법의 운용만 잘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서 '술'이란 법을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술은 군주의 가슴에 품고 이것 저것을 비교하여 남 몰래 신하를 제어하는 것으로서, 술은 남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하의 말이 진실인가를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신하를 실험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말을 하여 속여도 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시험도 해본다. 이렇게 하여서 신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으며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비가 죽은 다음 전한(前漢) 중기(BC 2세기 말) 이전에 지금의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거의가 법의 지상(至上)을 강조하는데, 55편을 크게 나누면 다음과 같이 성질이 다른 6군(群)으로 나눌 수 있다.


① 한비의 자저(自著)로 추정되는 <오두(五蠹)> <현학(顯學)> <고분(孤憤)> 등이다. 이들 논저는 먼저 인간의 일반적 성질은 타산적이고 악에 기우는 것으로 설혹 친한 사이에 애정이 있다 해도 그것은 무력(無力)한 것이라 하였고, 따라서 정치를 논할 기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 세상은 경제적 원인에 의하여 끊임없이 변화진전하기 때문에 과거에 성립된 정책이 반드시 현세에 적용되지는 않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가(儒家)나 묵가(墨家)의 주장은 인간사회를 너무 좋도록 관찰하여 우연성에만 의존하는 공론(空論)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군주는 그러한 공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끊임없이 시세(時世)에 즉응(卽應)하는 법을 펴고, 관리들의 평소의 근태(勤怠)를 감독하여 상벌을 시행하고 농민과 병사를 아끼고 상공(商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군주는 측근·중신·유세가(遊說家)·학자·민중들에게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② 한비 일파의 강학(講學) ·토론으로 추정되는 편(編)으로, <난(難)> <난일(難一)∼난사(難四)> <난세(難勢)> <문변(問辨)> <문전(問田)> <정법(定法)> 등이 있다. 사상 내용은 한비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난세>와 <정법>으로, 유가의 덕치론(德治論)은 물론 법가(法家)에 속하는 신자(愼子) ·신자(申子) ·상자(商子)의 설까지도 비판하고 수정한다. 이 책을 법가학설의 집대성이라고 일컫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③ 한비 학파가 전한 설화집 <설림(說林)> <내외저설(內外儲說)> <십과(十過)> 등의 제편(諸編). 상고(上古)로부터의 설화 300가지 정도를 독특한 체계에 의하여 배열하고, 그들 이야기의 흥미를 통하여 법가사상을 선전하였다. 소화(笑話)의 유(類)도 섞여 있으나 고대 단편소설로서의 측면도 지닌다.
④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대(漢代)까지의 한비 후학(後學)들의 정론(政論)으로 추정되는 제편(諸編). 편수(編數)는 가장 많으며 그 중 <유도(有度)> <이병(二柄)> <팔간(八姦)> 등은 오래된 것이고, <심도(心度)> <제분(制分)> 등은 새로운 설이다. 후학들의 주장에서 한비의 사상은 현저하게 조직화되었고, 특히 군신통어(群臣統御:刑名參同)나 법의 운용(運用:法術)에 관한 술책이 세밀하게 고찰되었다. 그러나 군권강화(君權强化)와 엄벌주의를 주장하는 점만이 농후하고, 법의 최고 목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⑤ 도가(道家)의 영향을 받은 한비 후학들의 논저인 <주도(主道)> <양각(揚搉)> <해로(解老)> <유로(喩老)> 등의 4편. 유가의 덕치를 부정하고 법치를 제창한 법가는, 덕치와 법치를 모두 부정하는 도가와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육반(六反)> <충효> 등에서는 강력한 반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군주는 공평무사를 본지(本旨)로 하여 신하(臣下)에 대하여는 인간적 약점을 보이지 않는 심술(心術)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법가 중에도 도가의 허정(虛靜)의 설을 도입한 일파가 있다. 위의 4편은 이들 일파의 논저로서, 전(前) 편은 정론(政論)이고, 후 2편은 편명 그대로 《노자(老子)》의 주석(注釋) 또는 해설편이다.
⑥ 한비 학파 이외의 논저인 <초견진(初見秦)> <존한(存韓)> 등 2편 모두 한비의 사적(事蹟)에 결부시켜 책 첫머리에 편입되어 있으나 전자는 유세가의 작품이고, 후자는 한비의 작품을 모방한 상주문(上奏文)이 포함된 것으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한비와 그 학파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편견적인 인간관 위에 성립된 것으로 지적되며, 특히 유가로부터는 애정을 무시하는 냉혹하고도 잔인한 술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확실히 급소를 찌르는 적평(適評)이라 하겠으나, 그들이 유가·법가·명가(名家)·도가 등의 설을 집대성하여, 법을 독립된 고찰대상으로 삼고 일종의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의하여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수립함으로써 진 ·한의 법형제도(法刑制度)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점, 또 감상(感傷)을 뿌리친 그들의 간결한 산문이나 인간의 이면을 그린 설화가 고대문학의 한 전형을 이룬 점에 있어 커다란 문화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여러 가지 간행본이 있으나 절강서국(浙江書局)의 22자본(子本)이 좋은 간본이라고 한다.


[이병(二柄)]편
밝은 임금은 刑과 德 두 대의 손잡이를 잡고 신하를 다스려야 한다. 신하된 자는 벌을 두려워하고 상 타기를 기뻐하는 데 그 원리를 둔다. 여기서 벌이란 刑이요 상이란 德이다. 이 형과 덕의 두 개 손잡이만 있으면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 만약 군주가 상벌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지 않고 신하에게 맡기게 되면 백성은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를 만만히 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의 인심은 군주에게서 신하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두 개의 손잡이를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된다.


[비내(備內)]편
군주는 남을 믿어서는 안 된다. 남을 믿으면 자기가 남에게 눌린다. 신하는 위엄있는 기세에 눌려 부득이 명령에 따를 뿐이지 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하란 것은 언제나 군주에게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신하 위에 앉아 편안히 생각하기 때문에 군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군주가 아들과 아내를 덮어놓고 믿으면 뱃속 검은 신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들과 아내까지도 믿어서는 아니 되니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나라에서 조칙으로 태자를 봉하면 그 태자를 옹립한 자들은 임금이 일찍 죽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내란 원래 같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면 가까워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재난은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빨아내는 것은 육친의 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레를 갖기 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고분(孤憤)]편
중신(重臣)이란 군주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고 법을 무시하고 제 욕심을 채우며 국가의 재산으로 제 배를 채우고 군주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다. 그러므로 임금된 자는 중신의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곧 '術'이다. 한비자는 계속하여 '군주여 눈을 뜨라'고 힘 주어 강조한다. 군주의 눈을 가리는 중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고분]편에서 일깨우고 있다.


[설난(說難)]편
의견을 말하기 힘든 것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내 편의 의견에 맞추기 어려운 데 있다. 진언하는 자는 계획을 비밀히 진행시켜야 성공하며 비밀이 새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비밀히 계획하는 일에 말이 미치면 그 의견을 말한 이는 몸이 위태롭다. 진언할 때는 그 상대의 의견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오두], [십과(十過)]편


오두란 다섯 마리의 해충을 말한다. 나라를 좀먹는 다섯 마리의 해충과 같은 부류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옛 성현을 칭송하며 인의(仁義)를 빌어 차용해 쓰고 복장과 말을 꾸며하는 자.
(2) 거짓말을 꾸며 외국의 힘을 빌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유세가.
(3) 사재를 모아 유력자에게 아부하며 전사의 공로를 묵살하는 측근자.
(4) 무리를 모아 의협을 내세우며 그것으로서 이름을 얻으려 하며 국법을 어기는 협객.
(5) 변변치 못한 그릇을 만들어 팔아서 사치품을 사 모았다가 때를 보아 폭리를 얻고 농민이 애써 얻는 것과 같은 이익을 힘들이지 않고 한 순간 얻는 상인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십과란 임금이 몸을 망치는 열 가지의 잘못을 말한다.

(1) 조그만 업적을 세우는 데 정신을 잃는 것 
(2) 조그만 이익에 얽매이는 것 
(3) 감정이 나는 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 
(4) 음악에 빠지는 것
(5) 지나친 욕심 
(6) 여락(女樂)에 빠지는 것 
(7) 본거지를 비워놓고 놀러 다니는 것 
(8) 충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
(9) 외적인 힘에만 의지하는 것 
(10) 힘이 없는 주제에 남에게 무례하게 하는 것. 이상의 열 가지는 임금된 자가 범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4. 의의 및 영향
우리는 앞에서 유가와 도가 그리고 여기서 법가사상을 살펴보았다.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낭만적 자유주의가 어울리고, 중앙평야의 사람들은 공자와 후학들이 창도한 중용의 인도주의적 교리에 마음이 끌렸으며, 완고한 북방사람들은 법가의 이론과 실천에 집착했다. 법가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한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독창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부지런한 학자기질과 날카로운 사색가의 자질을 겸유했고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한비자의 사상은 관료제도를 통한 절대군주 정치와 신상필벌을 통한 엄격한 법의 시행, 그리고 속국의 경제적 자족 등의 특색을 지닌다. 크고 작은 모든 사회적 갈등의 궁극적 해소를 위해 한비자는 '절대국가의 공권력'의 창출을 요청했다. 그는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회를 모범 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상황을 직시하여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법제와 폭정을 구분하고 형벌로써 형벌을 없애자는 그의 주장은 뛰어난 점이 있다. 부역의 경감을 제창한 것도 빈민들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나 상벌만능을 고취시켜 윤리도덕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은 오류였다. 그리고 통일된 법령에 의해 학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인심을 억압한 것은 반문명적이었다. 군주는 최고 입법자이자 또한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공법(公法)"은 사실상 가장 큰 사법(私法)이었다. 그것은 결코 평등이 아니었으며 심각한 불평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제도에 대한 한비의 구상은 민중의 희망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그 주된 목적은 군주의 통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민중의 목숨은 완전히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러한 학설은 중국의 군주 전제제도의 기본형식을 구축했으며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공했다. 진나라의 정치가 법가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와 법가를 개조하여 양유음법(陽儒陰法)의 통치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유가로서 교화를 장악하고 법가로서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유가의 사상을 제창했으나 현실정치에는 법가의 제도를 실행했다.
이후로도 역대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를 계승하고 바꾸지 않았다. 비록 한비자의 이름은 아주 적게 취급되었고, 취급되었을 때도 계속 비판받았으나, 제왕통치와 강화에는 한비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막강하게 존재해왔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전제제도가 중국역사에 있어 반드시 지나가야만 되었던 길이었다면 이 멀고 긴 길을 가는데 한비자의 정치설계는 커다란 생명력과 재생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해보면 전국시대에 있어 제자백가가 나와 제각기 천하평정을 외쳤지만 결국은 한비자의 '형명법술(刑名法術)' 정치가 주효하여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을 일단 달성하게 된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가 아버지의 독립운동 경력을 숨겼던 이유 



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자랑스러운 항일 경력을 철저히 비밀로 간직해왔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에게도 그런 사실을 숨겼다. 비밀은 그의 나이 70에 이를 때까지 수십 년 간 이어졌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독립운동 전력을 왜 그렇게까지 숨겼을까. 그건 부친이 해방 후 권력을 잡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편에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국지사 안용봉(1912년생) 선생과 그의 아들 안인영(70·마산시 내서읍)씨의 이야기다.

안인영씨는 해방 후 2년이 되던 1947년 광복절 당시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해 창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광복 2주년 기념식장에 연사로 나온 아버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옷을 입고 계셨지요. 당시 35세셨던 아버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수많은 청중들을 향해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아직도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방은 맞았으되 이는 완전한 해방이 아닌 껍데기 해방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이 한 마디에 수많은 청중들이 떠나갈 듯 박수를 쳤지요.”


독립운동가 안용봉 선생.


당시는 이승만과 미국이 강행하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로 몰리던 분위기였다. 제주 4·3학살도 그래서 자행된 것이었다. 이듬해인 48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치러진다. 아들은 그 때의 상황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독립운동 경력이 ‘비밀’

“당시 창원 죽전 정미소에서 투표가 있었지요. 그 때 아버지께서 어린 저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아들아, 이 선거는 해서는 안 될 선거다. 우리만 선거하면 남과 북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걸 보면 얼마나 울분에 차셨으면 그러셨겠나 하는 생각이 지금 와서야 드는군요. 못난 아들이 지금에야 아버지의 큰 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백범 김구 선생도 당시의 단정 수립을 반대했다. 마산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이 47년 2월 7일을 기해 ‘구국투쟁’을 벌이면서까지 단정 반대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반대를 무릅쓰고 제주도와 여순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서 헤아릴 수 없는 대량학살을 자행한 끝에 집권한 이승만은 단정반대에 나섰던 인사들이 눈엣가시였다. 결국 백범은 의문의 암살을 당했고, 안용봉 선생과 같은 분들은 이승만 정권의 상시적인 감시를 받는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에 강제가입하게 된다.

이승만의 정치적 보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그들을 ‘적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를 붙여 아무런 재판절차도 없이 산골짜기로 끌고 가 모조리 죽여 버린 것이다. ‘골로 간다’는 말이 곧 죽음을 뜻하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독립운동가 안용봉 선생도 그렇게 하여 학살되었음은 물론이다.

애국지사 학살한 이승만 정권



안용봉 선생의 아들 안인영 씨.

일제는 항일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시켰지만 이승만처럼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정치적 반대자들을 죽인 것으로도 끝난 게 아니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까지 ‘연좌제’의 굴레를 씌워 감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자식들의 취직까지 철저히 제한했다.

60년 3·15와 4·19혁명으로 살인자 이승만이 물러나자 전국의 유족들이 진상규명운동에 나섰고, 당시 국회도 여기에 동참했지만, 이듬해 다시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그들 유족까지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다. 유족들이 발굴해 안장한 희생자의 무덤도 다시 파헤쳐 유골을 여기저기 흩어버렸다. 부관참시까지 자행했던 것이다.

이런 공포의 세월이다 보니 안인영씨가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자식에게도 숨겨왔던 건 당연했다. 당시의 희생자 유족들 대개가 이렇다.

보통 이들 유족은 정권에 대한 피해의식의 가역반응 때문인지, ‘보수·우익적 가치관’으로 무장해 있는 분들이 많다. 나이 70이 넘어 처음으로 선친의 비밀을 털어놓고 과거를 찾아 나선 안씨를 만났을 때도 기자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여가 지난 2006년 광복절을 앞두고, 학살된 지 56년 만에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포장을 받게 됐다는 통보를 받은 그는 기자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아버지의 역사를 찾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새롭게 쓰이고, 반드시 다시 정립돼야 한다는 사실을.”



당파 싸움과 외세 의존 등 악습, 깊은 인생관ㆍ높은 세계관 부족 때문

각성하고 백성이 '씨알' 되어 평화 일궈야


                지금 청소년층은 함석헌의 이름 석 자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삼사십년 전만해도 그의 명성은 세계적이었다.


그에 관한 세평이 크게 엇갈렸던 것도 사실이다. 동서양의 종교와 사상을 넘나드는 그의 사상적 폭과 깊이에 경외심을 가진 이들도 많았지만, 그의 도덕성을 문제 삼는 경우도 있었다.

함석헌은 스스로를 평해 ‘약한 사람’이라 했다. 내 눈에 비친 함석헌은 누구보다 민족을 사랑한 미래지향적 평화주의자였다. 함석헌(1901~1989)은 많은 글을 남겼고, 그 가운데는 명문도 많다. 요즘 내가 다시 읽은 것은, 1958년 8월 ‘사상계’에 실린 칼럼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였다. 최근에 일어난 ‘목침지뢰사건’과 ‘건국절’에 관한 설왕설래를 접하며, 나는 그 글에 빨려 들어갔다.

칼럼에서 함석헌은 1950년대 한국사회의 부조리, 집권층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문제 삼았다. 이승만 정권은 심기가 불편했던지 1958년 8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씌워 그를 구속했다. 사건을 담당한 20대의 젊은 형사가 예순 살에 가까운 함석헌의 뺨을 때리고 수염을 뽑아댔다. 그것은 필화였다. 집권층의 비위를 거스르기만 하면 일단 잡아넣고 보는 경찰의 과잉충성이 그때도 대단하였다. 그러자 정부를 비판하는 여론이 들끓었고, 함석헌은 석방되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함석헌의 칼럼에는 그만의 독특한 역사관이 서려 있다. 그는 한국인의 역사적 과제를 “생각하는 민족” 또는 “철학하는 백성”이 되는 데서 찾았다. “위대한 종교 없이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민족이 없다”며, 그는 깊은 성찰을 주문했다. 이 말을 가지고 그가 특정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그는 도리어 종교적 맹신을 경계하였다. 함석헌이 강조한 것은, 민족적 자아의 각성이었다. 이것이 “생각하는 백성”의 실체였다.

20세기 한국의 역사는 고달팠다. 19세기말부터 이 땅은 제국주의세력의 각축장이었고, 결국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식민지 지식인 함석헌의 고뇌는 거기서 비롯되었다. 본디 역사학도였던 함석헌은 젊은 시절부터 “우리역사”의 의미를 천착하였다. “인류 역사가 결국 고난의 역사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역사는 그 주연”이라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다. 나중에 이런 생각을 정리한 것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였다. ‘사상계’의 칼럼에서 그는 평소의 지론을 또 이야기했다.

함석헌은 우리역사의 고난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수백 년 동안 “당파 싸움”의 악습에 젖었다고 말했다. 둘째, 외세에 의존하는 폐단의 뿌리가 깊다고 했다. 셋째, 이 두 가지 문제점은 결국 “깊은 인생관, 높은 세계관”의 결여에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그의 견해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자신의 해석이었다. 그것도 20세기 한국사회가 겪은 고난에서 비롯된 함석헌의 주관적 평가였다.

신채호의 민족주의사관을 계승

“나라를 온통 들어 잿더미, 시체더미로 만들었던 6·25싸움이 일어난 지 여덟 돌이 되도록 우리는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를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린 함석헌의 변(辯)이다.

그는 6ㆍ25전쟁의 근본 원인을 알기 위해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하여 후대가 고구려의 상무적인 전통을 망각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했다. 7세기 이후 백제와 신라의 지도층이 외세 굴종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득세한 고려 후기의 역사도 잘못이지만, 친명파가 주도한 조선왕조의 건국은 애초부터 잘못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러한 함석헌의 역사적 관점은 신채호의 민족주의사관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런데 6ㆍ25전쟁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렇게 먼 세월을 소급해야 하는 것일까? 또, 한국사의 근본 성격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해석해도 좋을까? 그의 역사주의적 관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함부로 비판할 수도 없는 처지다. 함석헌의 역사적 사유, 그 저변을 20세기 한국의 슬픔과 눈물이 적시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를 뒤집는” 강대국들의 “고래 싸움”이 한반도라는 “가엾은 새우등을” 터뜨린 까닭을 알아내려고 그는 괴로워하였다. 결국 그는 이 민족을 “역사의 한길에 앉는 고난의 여왕”이라 정의했다. 자학적 표현 같지만, 우리는 함석헌의 깊은 시름을 통감한다.

우리 힘 약해 “참 해방” 얻지 못해

함석헌은 한국현대사의 문제점을 세 가지로 보았다. 첫째, 1945년의 해방은 “참 해방”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참 자유를 누리는 민족이 되었다면, 미국과 소련 두 세력이 압박을 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섰을 것”이라 했다.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를 비롯해 일부 학자들은 한반도 내부의 뿌리 깊은 갈등이 분단의 심층적 원인이라 말한다. 함석헌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쉬운 말로, 만만한데 말뚝질이지, 만만치 않다면 아무 놈도 감히 말뚝을 내 등에 꽂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약소민족이라서 외세에 휘둘리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어떻든 분단의 결과는 혹독한 현실로 이어졌다.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우리는 꼭두각시요 나라 없는 백성이라는 표현이 이승만 정권을 분노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이것이 역사적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을까.

근자에도 남북대화에는 평소 무관심한 최고위층이 중국과 통일문제를 상의하겠다고 말해, 뜻있는 시민들을 놀라게 했다. 또, 보수 세력은 ‘건국절’이니 ‘이승만 국부’론을 들먹이며 분단국가의 탄생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형편이다. 한 국가가 일어난 것이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제한적이었다. 나로서는 적어도 분단 문제가 평화적으로 극복될 때까지는 그 평가를 유보하겠다.

피, 땀으로 회개하고 새 출발하자

함석헌이 제기한 둘째 문제는 정권의 도덕성이었다. “이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말 권세욕이 아니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이 있다면, 같은 전쟁에도 좀 더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남북한은 상대를 헐뜯고 비난하는데 익숙하였다. “내 잘못”으로 전쟁이 터졌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제 정권을 유지하는 데 골몰했다. 때문에 많은 이은 6ㆍ25전쟁을 “정권 쥔 자들의 일로 알았지 국민의 일로 알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은 “서울을 절대 아니 버린다고 열 번 스무 번 공포하고 슬쩍 도망을 쳤으니 국민이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빨갱이”로 몰아댔다. 그 한심한 빨갱이 노름이 아직도 계속된다. 저들은 늘 분단 상황을 빌미로 삼았다. 이를 보다 못해 함석헌은 분단을 “목구멍에 걸려있는 불덩이”라 했고, 그 때문에 “밥을 먹을 수 없고, 숨을 쉴 수 없고, 말을 할 수도, 울 수도 없다”고 탄식했다. 문제는 그 분단이 흉악한 몰골 그대로 남아, 아직도 지뢰와 총성을 터뜨린다는 사실이다.

셋째, 그는 종교기관의 허위와 부패를 말하였다. “전쟁 중에 가장 보기 싫은 것은 종교단체들이었다. 피난을 시킨다면 제 교도만 하려 하고, 구호물자 나오면 서로 싸우고, 썩 잘 쓰는 것이 그것을 미끼로 교세 늘이려고나 하고, 그리고는 정부와 군대가 하는 일은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하였다. 본연의 사명은 실종되고, 세상 욕심에 눈먼 사람들이 종교기관을 장악해 외세와 정권에 아부하는 추태가 연출되었다는 지적이다. 그것이 지금이라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다.

이에 함석헌은 새 출발을 촉구했다. “밭에서, 광산에서, 쓴 물결 속에서, 부엌에서, 교실에서, 사무실에서 피로 땀으로 하는 회개”였다. 그의 말대로 생각하는 백성 ‘씨알’이 되어 평화의 새 땅을 일구는 것이 언제쯤 가능할까.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http://www.hankookilbo.com/v/fc220def7eb94026aecb4a3a49cbdc6e 




안녕하십니까? 저는 모 법원에서 영장 업무를 일부 담당하고 있는 현직 판사입니다. 불필요하게 주목받는 것을 피하고자 더 이상 구체적으로 신원을 밝히지 않는 무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례적인 글을 쓰는 것은 검사님들의 전화통화에 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검찰의 영장청구가 기각된 후에 기각결정을 한 판사에게 그와 관련해서 걸려오는 전화 말입니다. 파악하기로는 저나 제 주변뿐 아니라 다른 법원에서도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겪어온 일인 듯합니다.
물론 모든 검사님들이 그런 통화를 시도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전화를 거는 검사님도 아무 고민 없이 가볍게, 아니면 해당 판사에게 모종의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에서 그러실 리는 없습니다. 기각결정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거나 이후의 보완책이 막막할 경우에, 기각의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을 보완해야 영장을 발부받고 수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답답해하다가 많은 주저 끝에 어렵게 거시는 전화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철저한 수사로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는 검사님들의 열정과 성실함이 자리하고 있음을 압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드물게나마 꾸준히 반복되는 일이고 이제 말씀드릴 바와 같이 상당히 부정적인 효과를 내는 일인 이상 일각의 우발적 사건으로만 치부하고 마냥 눈감아드리기는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누구도 섣불리 튀는 행동을 하려 하지 않는 법원의 분위기 때문에 이제껏 방치된 면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도 누군가는 말해야 할 것 같아 주제넘지만 나서게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발부되는 순간, 영장이라는 문서는 수사기관의 막강한 무기가 되어 피의자나 주변인을 공격하는 데 쓰입니다. 법의 이름으로 대상자는 잡혀 가두어지고 행적을 낱낱이 공개당하며 생활이나 영업에 긴요한 물건들을 빼앗깁니다. 실질심사를 거치는 구속영장의 경우가 아니라면 발부의 정당성에 관해 한번 다투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대상자에게는 무척이나 가혹한 노릇입니다.
때문에 영장기록을 마주하는 판사는 매번 마음속에서 조심스레 저울을 듭니다. 저울의 한 쪽에는 공공의 이익을 놓습니다. 불법과 부정을 밝혀내고 척결하려는 공권력의 의지, 정의를 바로세우고 질서를 회복할 사회의 당위가 거기에 있습니다. 저울의 다른 한 쪽에는 개인의 권리를 놓습니다. 아직 유죄로 확정되지 않은 혐의를 근거로 침해당할 시민의 자유, 비밀, 그리고 재산이 놓입니다. 판사는 법률·판례 및 실무에서 통용되는 기준에 맞추어 저울의 균형점을 섬세하게 조정하고, 사건마다 저울에 달아서 열심히 눈금을 들여다봅니다. 청구가 법정요건을 갖추고 있음을 전제로 저울이 공공의 이익 쪽으로 기울 때, 비로소 판사는 무겁게 도장을 들어 영장에 찍습니다.
역시 잘 아시겠지만 이것은 판사가 내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키는 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법률로부터, 법률을 만든 국민으로부터 명받은 대로 따르는 일입니다. 저희는 그렇게 일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고, 그렇게 일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항상 그렇게 일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게 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이유를 찾아 배제해야 하고, 여의치 않다면 법복을 벗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판사입니다.
판사는 때로 영장 발부의 여러 기준들이 다 충족되지 못했다고 판단해 영장을 기각하기도 합니다. 검찰의 시각과 법원의 시각이 늘 일치할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검찰에서는 법률적 판단과 소신에 기초하여 기대를 품고 하신 청구인지라, 기각하는 판사의 마음 한편에는 일말의 미안함이나 불편함이 섞이게 마련입니다. 영장을 발부할 때 대상자에게 미안하거나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청구한 검사님으로부터 갑자기 전화를 받는 겁니다. 용건은 제각각이라 보통은 판단의 구체적 내용이나 근거 등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만 때로 차후의 수사방향에 관해 의견을 구하기도 하시고, 드물게는 노골적으로 항의를 하시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느 쪽이건 전화를 받은 판사들은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격언의 취지를 따라 공식적으로 판단을 밝히는 것 외에는 침묵하는 데 익숙한 판사들에게, 가끔 자신의 판단이 부정적인 여론에 부닥쳐 힘들지언정 그 누구로부터도 판단에 대한 추가설명을 대놓고 요구받는 적이 없는 판사들에게, 개별사건에서의 판단과 관련해서 그것도 외부에서 직접 걸려온 전화는 상황과 용건을 불문하고 이른바 불의타에 해당합니다. 추궁을 받는 듯 불쾌하기도 합니다. 혐의유무가 치열하게 다투어지는 사건에서 피의자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한 직후에 고소인이나 그 대리인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검사님의 기분에 비유하면 무리일까요?
하지만 전화를 받는 순간의 당혹감·불쾌감 때문에 공개서한까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바로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남아서 이후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판사가 다시 같은 사건에서, 또는 같은 검사님이 담당하시는 다른 사건에서 영장 발부여부를 판단할 때 당혹스럽고 불쾌했던 일이 떠올라 기각으로 향하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멈칫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영장 발부와 관련하여 어떤 식으로든 판사에게 접촉을 시도한 예가 없는 영장의 대상자와 달리 반대편 일방인 검찰에서만 영장 기각과 관련해서 이렇게 따로 접촉을 시도한다면, 이는 의도와 무관하게 결국 판사 마음속의 저울을 건드리는 효과를 내는 것입니다.
물론 기각의 취지나 근거가 불분명한 경우, 또는 판사가 지식·경험이 부족하거나 부당한 선입견을 가진 나머지 부당하게 기각을 하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진대 기각결정에 대한 불복수단도 마땅히 없는 현실에서 판사에게 질문마저 할 수 없다면 검찰이 결정의 실질적 이유를 확인하거나 법원의 독단·전횡을 견제할 방법이 전혀 없지 않느냐 하는 우려도 하실 법합니다.
하지만 그런 우려가 판사의 저울을 건드리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전화통화가 확인이나 견제를 위한 적법하고 적절한 수단일까요? 법률상 검찰은 영장 기각결정에 불복할 수 없는 대신 같은 영장을 무제한 재청구할 수 있고, 법원은 재청구된 영장의 발부 여부를 기각결정을 한 판사와 경력이 동등하거나 그보다 더 많은 다른 판사에게 맡기고 있으며, 심지어 약 10회에 이르는 재청구에까지 대비해서 미리 사무분담을 정해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해하신 기각사유를 보완하여 재청구를 하지 않고 이미 기각결정을 한 판사와 비공식적 접촉을 하셔야 할 필연적 이유가 뭘까요? '이런 영장이 기각되면 우리는 어떻게 수사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라 쓰고 항의라고 읽어야 할 듯합니다)이 수사기관 아닌 판사에게 합당할까요?
비록 영장에 대한 결정이 법률상 판결은 아닙니다만 엄연히 법원의 재판에 속합니다. 그 파급력이 본안판결의 그것에 비해 작다고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즉 영장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언동은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언동-예컨대 무죄판결 이후의 전화통화 등-과 마찬가지로 극히 삼갈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원의 재판이 신성불가침이라서가 아니라, 그 독립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이룬 기본적 합의들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판사들이 그러하듯 저도 매 판단의 내용과 근거를 충실히 밝혀 검사님들을 비롯한 관계인들에게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자, 판단기준을 객관화하고 일반의 상식에 부합하는 것으로 만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판사를 공론으로 따끔하게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부디 소임을 다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법질서를 세워주시기 바랍니다. 힘껏 박수 치겠습니다. 올바른 검찰, 강한 검찰로 자랑스럽게 서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그러니 부탁합니다. 집어 들던 수화기를 내려놓으시고, 판사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모두 건승하십시오.
 이 기고문은 필자의 개인적 사정에 따른 요청으로 부득이하게 익명으로 게재됐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이 사안은 판사와 검사 간에 종종 마찰을 빚는 대상이 되었지만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표면화시키기를 꺼려했던 사안이었던 만큼,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판단돼 익명 게재를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법률신문은 필자가 현직 판사로 재직하고 있는 사실을 명확히 확인, 가공인물이 아님을 밝힙니다. 아울러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침과 관련이 없음을 알립니다. <편집자 주>
https://m.lawtimes.co.kr/Legal-Opinion/Legal-Opinion-View?serial=85958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인터넷에 꽤 많은 펌글들이 검색이 되는 바, 처음 인터넷에 게재된 곳이 어디인지 출처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ㅡ 서울대 허성도 교수의 2010년 강연내용 개제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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