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아끼듯 학생 사랑하신 선생님 나의 선생님 / 최 민 화

 

김찬국 선생님은 내가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서 첫 번으로 만나 뵙게 된 분이고, 첫 번째로 강의를 듣게 된 분이고, 이 후 나의 삶에 음으로 양으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선생님은 강의 시간마다 우선 출석을 부르고 학생 하나하나 얼굴을 모두 확인하신다. 결석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 형편과 사정을 묻고 살피신다. 그런 연후 학생들의 안부를 위해 함께 기도드린다.

구약개론 시간에는 기도를 마친 다음 하루 한 학생씩 차례로 일어나 시편 23편을 영어로 외우게 하신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고 머리에 쥐가 날만큼 극심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한 치의 예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철두철미하고 엄격한 자세와 표정으로 학생들의 기를 여지없이 분쇄시켜 버리신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외울 수밖에. 나는 그 후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온 시편 23편을 지금껏 영어로 외우고 산다.

입학 후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선생님은 구약개론 시간에 느닷없이 영문 시사주간지 <TIME>을 구입해서 서너 페이지를 번역해 리포트로 제출하라신다. 그 당시는 복사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때여서 책을 직접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미루고 미루다가 마감일에 맞춰 대충대충 리포트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는데 선생님은 2주 쯤 후에 빨간색 볼펜으로 번역이 어설픈 내용을 일일이 지적해 놓으신 리포트를 내게 돌려 주셨다.

매주 월 수 금 제3교시가 수업 시간이면 중간시험이나 기말시험도 같은 시간에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생님 과목 시험만큼은 시험기간 마지막 날, 마지막 2 시간에 걸쳐 치르신다. 우선 주관식용 빈 시험지를 두 장씩 나누어 주시고 칠판에 시험문제를 적으신다. 2시간 동안 답안을 충분하게 적을 수 있도록 탁자 위에는 빈 시험지가 놓여있다. 시험이 끝나고 1주일 후에는 어김없이 학점을 적어 시험지를 돌려주신다. 그리고는 1주일 후에 재시험을 치루겠으니 학점에 이의가 있으면 재시험에 응하라고 하신다. 처음 중간시험에서 나는 애매하게 C학점을 받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또다시 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어서 재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그런데 아뿔싸! 재시험 문제가 중간시험 문제와 같은 거였다. 기말시험이 끝나고 나는 당연히 재시험을 치렀다.

중간고사 후 숨 쉴 겨를도 없이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구약개론 참고도서를 읽고 200자 원고지 30매 분량의 리포트를 제출하라 하신다. 나는 역시 마감 시간에 허둥지둥 리포트를 제출했다. 2주 쯤 후에 선생님은 내가 제출한 리포트 페이지마다 빨간색 볼펜으로 원고지 쓰는 법과 맞춤법을 꼼꼼히 지적해 놓고 내게 돌려 주셨다. 그리고는 바로잡아 다시 작성해서 제출하라신다. 다시 작성해서 제출한 원고지를 선생님은 또다시 빨간색 볼펜으로 띄어쓰기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지적해서 내게 돌려 주셨다. 훗날 나는 피치 못할 형편과 사정으로 시사 월간지 편집 일을 맡는 등 20년 가까이 출판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해 왔다. 70년대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었던 시기에 영문 시사주간지를 그때그때 살펴보는 습관과 원고지를 바르고 철저하게 작성하는 일은 바로 나의 직업이 되었던 것이다.

6월 중순 쯤 일까? 봄 학기 강의가 무르익어 갈 무렵 선생님은 수강생 모두를 댁으로 초청하여 성창운(윤순) 사모님과 가족을 일일이 소개하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장래의 가정 분위기를 현장에서 체험하며 배우도록 하신다. 그러니만큼 입학해서 한 학기만 지나면 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고 성내운 교수님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신 사모님을 비롯해서 당시 이화여고에 재학 중이던 딸 성혜, 서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아들 창규, 그리고 중학생 초등학생이던 홍규, 은규 등 온 가족과 학생들이 함께 허물없어진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은 비단 내가 수업 받고 있던 반에서 만의 일이 아니다. 매 학기마다 매 년마다 선생님은 가정을 아끼고 사랑하듯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함께 어울리게 하신다. 선생님께 한 학기만이라도 수업을 받아 본 학생들이라면 아마도 이 분위기, 이 광경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게다. 선생님의 이런 모습은 비단 수업을 받은 제자에 그치지 않고 섬기시는 교회에서, 이웃에서, 사회에서, 선생님이 가고 머무시는 모든 곳에서 뵐 수 있는 모습이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1972년에 복학하여 19743학년에 재학 중 43일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선생님은 그 해 연세대 신과대학장이셨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조사를 받으면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김찬국 선생님께서 교수님들과 함께, 학생들과 함께, 선생님의 가족과 함께 나와 고난당하고 있는 나의 동료들을 염려하고 걱정하시어 간곡히 기도하시리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생님께서 구속되어 서대문구치소로 들어오셨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선생님이 나로 인해서 구속되신 것이 아닌가 여기실 분들이 계실텐데 선생님의 구속 내용은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

선생님은 1973년 말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셨다.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유신정권은 197418일 유신헌법 비판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령했다. 하지만 새 학기를 앞두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유신운동의 기세가 더욱 강렬해지자 박 정권은 197443일 민청학련 관련자들에게 최고 사형까지 처벌하겠다는 긴급조치 4호를 발령했다. 선생님은 대통령긴급조치법 1호와 4호 위반, 국가내란 선동 혐의로 구속되어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확정되어 복역 중 1975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셨다.

가족의 면회조차 금지되었던 엄혹한 군사독재시절, 성윤순 사모님이 매일같이 서대문구치소를 찾아가 담장 안을 바라보며 선생님을 염려하며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있을 적에 선생님과 사모님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빨랫감을 넣어주고 내어주는 일이었다. 그 때 선생님은 빨랫감 팬티 속 고무줄에 깨알같이 글씨를 적어 무려 10여 개월 동안 비밀리에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름하여 고무줄팬티 통신은 그 애절한 사연과 함께 지금도 소중한 유물로 남아 장남 창규(산부인과 전문의)가 보관하고 있다.

 

 

 석방 후 연세대학교에서 76개월 해직되어 계신 동안에도 양성우의 겨울공화국 시집 등 그 당시 판매 금지된 책들을 선생님께서 커다란 가죽 가방 가득히 넣어 둘러메고는 모임이 있을 적마다 부지런하게 팔러 다니시던 모습이 지금도 내 눈에 선하다. 내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근무할 적인데 선생님께서 연구원 간행물을 주문하고 판매하는 량과 금액이 상당했다. 선생님은 좋은 책을 보급하고 어려운 필자나 출판사를 돕고 더불어 돈을 모아 감옥에 있는 양심수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넣어 주시기 위해서 구차스럽게 여길 수 있는 작은 일을 참으로 열심히 부지런하게 꽤 오랫동안 하셨다.

1978년 선생님은 나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 주셨고 이대입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나의 아내를 선생님과 사모님은 각별하게 챙겨 주셨다. 1987년에는 위암 투병 중이던 아내를 약국으로 방문하여 당시에 적지 않은 거금 30만 원을 아내 손에 꼬옥 쥐어 주시면서 다른데 쓰지 말고 꼭 맛있는 거 사먹으라셨다.

1990년 선생님께서 연세대학교에 복직되어 부총장으로 재직하실 때, 선생님은 내게 학교에 다시 복학하여 졸업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네 차례 실형을 사는 동안 학교에서 일곱 차례 제적을 당한 상태였다. 나는 다시 복학해서 학교를 졸업해야 할 필요성도 의미도 그다지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벌여 놓은 사업도 있고 아내의 병을 돌보아야 할 일도 있어서 학교 수업까지 병행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선생님께 간곡하게 형편과 생각을 말씀드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의 사정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3학년으로 복학하면 필요하게 될 2년 동안의 등록금을 대체할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정년퇴임하시기 전에 내가 졸업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시면서 막무가내로 강요하신다. 나는 선생님의 끈질긴 집념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여겨서 3학년에 복학하여 1992년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내가 새삼스럽게 졸업식장에 참석할 리 없을 것이라 지레 짐작하고 계셨는지 선생님은 내게 굳이 전화를 걸어, 내 아내와 어머니 아이들까지 데리고 졸업식장에 반드시 참석한 연후에 본관 건물 앞에서 만나 우리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야 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셨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지 22년 만에 졸업하게 된 일은 그 해 전국 모든 대학의 졸업 시즌에서 톱뉴스가 되어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몇몇 종합일간지에서는 특집 기사로 소개되었다.

선생님은 200981982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소천하신 후 사모님께서는 2011년 고 김찬국 교수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시고 마침내 2013113일 김찬국 교수님은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고 확정되셨다. 이로써 선생님께서는 1974년 이래 선한 싸움을 하다가 불법으로 구속 수감되고 실형을 언도 받은 후 전과자의 신분으로 경제적 사회적 핍박을 받아가며 광야를 떠돌던 생활을 포함하여 40여 년 만에, 소천하신 지 4년 여 만에 비로소 온전하게 당신의 신분과 권리를 되살릴 수 있게 되셨다.

김찬국 선생님~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늘 사랑이 넘치시던 선생님, 참으로 선하고 인자하고 거룩하신 선생님, 인간이 하나님일 수 있다면 세상에서 딱 꼽을 수 있는 주 하나님이신 선생님. 이 글을 쓰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까닭은 선생님께 어린 추억이 너무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문일 게다. 아니 이 땅에서 다시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뵐 수가 없어서 일게다.

김찬국 선생님~ !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평안하시고 세상에 남아 있는 저희를 생전에서처럼 부디 잊지 말고 살펴주옵소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