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독립운동가’ 김성근은 밀정이었나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비밀결사체 구국모험단 이끈 폭탄 전문가 김성근임시정부로부터

‘밀정’으로 의심받아 조선으로 피신… 이후 ‘조선총독부 협력’ 보도

 

50살 전후의 김성근. 국가보훈처 제공

 

1920년 4월29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오후 3시30분께였다. 조선인 밀집 주거지인 애인리(愛仁里) 24호에서 폭탄이 터졌다.1 한두 발이 아니었다. 다수의 폭탄 더미가 터진 듯 대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사건이 일어난 집은 물론이고 이웃 가옥들의 담장까지 무너졌다.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고 현장에 거주하던 일가족이 모두 부상을 입었다. 그뿐이랴. 폭발 사고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현장에 출동한 프랑스영사관 경찰부 소속 경관들이 잔해를 뒤지며 수색할 때 다시 한번 폭발이 일어났다. 경찰 3명이 다쳤는데 그중 한 사람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급진 독립운동’ 뛰어든 27살 유학생

 

사고가 일어난 곳은 조선인 김성근(金聲根)의 가옥임이 밝혀졌다. 아내 이선실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 경찰은 집주인의 소재를 찾았으나 이미 도주한 뒤였다. 사건 현장에선 잔류 폭탄 약간과 권총 한 자루가 발견됐다. 경찰은 현장 주변에서 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되는 혐의자를 8명이나 체포했다. 그중에는 김성근의 아내, 중국인 하녀 1명, 조선인 노파 1명, 조선인 남성 3명이 포함됐다. 애인리 일대에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고, 현장 인근의 모든 통행로는 차단됐다. 프랑스 경찰부에 고용된 베트남인 순경 여럿이 경계근무를 섰다.2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누군가 정치적 목적으로 폭탄을 투척했을까, 아니면 개인 원한을 풀려 앙갚음했을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불의의 사고가 난 것일까. 그랬다. 맨 후자였다. 구국모험단이라는 비밀결사의 단장 김성근이 동료 임득산(林得山)과 함께 폭탄을 제조하다가 잘못해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집 안에는 그간 제조한 폭탄이 비축돼 있었는데 그마저 함께 폭발하고 말았다.

 

김성근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27살 청년이었다. 원래 남경(난징) 금릉대학에 재학하던 유학생인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혁명적 기운이 고조되자 그에 공감해 상하이로 뛰쳐나온 참이었다. 그해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함경도 의원으로 선출됐고, 상임위원회 체계로는 군무위원회에 배속됐다. 임득산은 3·1운동 시기에 나타난 좀더 전형적인 유형의 망명 청년이었다. 평안북도 출신의 25살 청년으로서 창성군 3·1 시위에 가담한 이후,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비밀 연락과 독립자금 모금에 참여한 혁명가였다.

 

1919∼1920년 상하이에는 이런 조선인 청년이 넘쳤다. 1919년 3월 이전에 상하이 거주 조선인 수는 백수십 명 수준이었는데, 3·1운동 발발 뒤에는 프랑스 조계로 몰려든 망명자들 때문에 1919년 말에는 천수백 명으로 늘었다. 이 청년들은 제각기 활동 경험과 연고, 이념에 따라 크고 작은 비밀결사에 가담했다.

 

구국모험단도 그중 하나였다. 이 단체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모험 수단’을 표방하는 급진적인 독립운동 단체였다. 모험이란 무기나 폭탄 등을 사용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동 양식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체의 규약이 남아 있다. 거기에는 “본 단체의 단원들은 한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다” “폭탄으로 구국의 위임을 부담한다” 등 죽음을 무릅쓴 결연한 각오가 표명돼 있다.3

 

‘상해밀정사건’이라는 제목 아래 김성근의 밀정 사실을 보도한 신문기사. <동아일보> 1925년 9월27일치

 

뜨거운 의욕과 차가운 현실의 괴리

 

구국모험단이 발족한 시점은 1919년 6월12일이었다. 파리강화회의가 폐막하던 때였다. 수백만 군중의 참여를 이끌어낸 만세시위운동과 국제회의 대표 파견론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저물고 있었다. 테러를 수단으로 삼는 격렬한 운동론이 망명 청년들 사이에 호소력을 갖게 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경찰 추산에 따르면 단원 수는 약 40명이었다. 발족 당시 여운형이 단장으로 선출됐지만 머지않아 사임했다고 한다. 그 후임으로 단장에 취임한 이가 곧 김성근이다. 둘 사이에 남경 금릉대학 유학생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음이 주목된다.

 

구국모험단의 주요 활동은 의열투쟁을 위한 무기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조선 청년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교육하고 실제로 폭탄을 만들어 비축하는 것에 활동의 주안점을 두었다. 단체 발족과 동시에 3개월 과정의 폭탄제조법 강습소를 열었다. 강사로 영국인 1명과 중국 남방 광둥성 사람 1명을 초빙했다. 단원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제1회 강습은 1919년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 제2회는 그해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간 계속됐다. 수강생 수는 제1회 때는 20명, 제2회 때는 7명이었다.4 김성근은 제2회 수강생이었다.

 

3·1운동 3주년인 1922년 3월1일 김성근은 <독립신문>에 기고문을 실었다. ‘결심을 실행’이라는 글이었다. 길지 않으므로 직접 한번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부끄러움으로 제4회의 삼일절을 맞이합니다. 과거 오늘에 결심한 사업을 실현치 못함에 대하여 나는 어디까지든지 통절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과 새 복음을 준 오늘을 기쁨과 부끄럼으로 맞는 나는 최초의 대결심과 대용단을 한번 더 굳게 하여, 또한 맹렬하게 흥기하고 용감히 분투하여, 금년 안으로는 기어코 한반도를 진동하고 불천지를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백기로써 항복하게 하려 합니다.”

 

여전히 모험 행위를 투쟁 수단으로 삼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금년 안으로는 기어코 한반도를 진동하고 불천지를 만들어 적으로 하여금 백기로써 항복”케 하고 말겠다는 표현을 보라. 그가 생각하는 독립운동은 시종일관 의열투쟁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 전반적으로 과장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뿐 아니라 실현 불가능성이 점점 고조되고 있음을 본다. ‘금년 안으로 기어코’ 뭔가를 하겠다, 한반도를 진동하고 불천지를 만들겠다, 급기야는 일본이 항복하게 만들겠다고 한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진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허장성세가 느껴진다. 내면의 의욕은 활활 타오르는데, 객관적 현실은 그에 배치되는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이러한 불일치가 지속된다면 개인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이 초래될까.

 

독립운동계 중진이 무사히 석방된 까닭은

 

어느 때부터인가 김성근은 상하이 조선인들로부터 일본의 밀정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렇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일본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된 뒤부터 그랬다. 구국모험단 단장으로서 폭탄 제조의 전문가이자 독립운동계 중진인 김성근이니만큼 무사하기 어려웠다. 본국으로 압송돼 중형을 받기에 십상이었다. 그러나 어떤 까닭인지 김성근은 무사히 석방됐다. 그 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는 상하이 시내를 활보했다. 사람들은 미덥지 못하다고 수군거렸다.

 

김성근은 자신이 밀정으로 지목받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변명했다. 자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렇게 오해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영사관에 잡혀갔다가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까닭은 유력한 중국인들과의 친분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호했다. 중국인 유력자들의 주선으로 일본 총영사에게 선처를 호소했다는 말이었다.

 

위기가 닥쳤다. 1925년 8월께였다. 자기 집에 세들어 사는 신혼부부의 아내가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김성근이 밀정이라고 고발했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낱낱이 진술했고 구체적인 확증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가 고발을 결심한 까닭은 사적인 데 있었다. 김성근의 아내 이선실이 자기 남편과 부적절한 관계를 했는데, 그 정황을 아는 김성근이 이를 제지하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성근이 아내의 부적절한 관계를 묵과하는 이유는 자신의 밀정 정체가 폭로될까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임시정부 경무국 업무는 독립국의 경찰과 달랐다. 그 소임은 “왜적의 정탐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5 것이었다. 말하자면 정보기관이자 밀정 대책기구였다. 임시정부 경무국장직에 5년간 재임했던 김구의 말에 따르면, 범죄자 대책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훈계’ 아니면 ‘사형’이었다. 사안이 경미하다면 전자에 해당하겠지만, 김성근 같은 경우 후자에 해당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아도 김성근의 행동을 의심쩍게 주목해오던 임시정부 경무국이었다. 그 구성원들은 활동을 개시했다. 이러한 정황을 눈치챈 김성근은 종적을 감췄다.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자. 김성근이 말하기를, 어떤 친구가 어서 피하라고 밀통해줬다고 한다. 임시정부 경무국 내부에 그를 동정하는 친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어디로 숨을 것인가? 제때 피신하는 데 성공한 김성근은 서슴없이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으로 찾아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압박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니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영사관은 기꺼이 그를 받아들였다. 그에게 은신처와 조선 귀국의 편의를 제공했다. 김성근은 재산까지 살뜰히 챙길 수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가산과 집기를 모두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영사관의 알선으로 조선으로 출항하는 배에 탑승한 때는 1925년 9월12일이었다.6

 

경성에 도착한 뒤에도 김성근은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유로 처벌받지 않았다. 이따금 조선총독부에 출입한다는 근황이 언론에 보도됐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총독부 경무국 관계자와 함께 해외 독립운동 대응책을 협의했다.7

 

문책은커녕 서훈

 

김성근은 해방 이후까지 살았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사망 연월일은 1950년 2월5일이다. 향년 59살이었다. 죽을 때까지 일본영사관 경찰부의 밀정 노릇을 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묻는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사후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1963년 3월1일 독립유공자상훈심의회의에서 건국공로훈장 단장(短章)을 수여받았다. 오늘날 건국훈장 독립장에 해당하는 높은 훈격이었다.

 

김성근은 지금도 독립유공자로 등재돼 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최근 발간한 <독립운동인명사전>(독립기념관)에도 실려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그의 이름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구국모험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기림을 받고 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상하이시 치안국 경비대, ‘조서’, 1920년 4월29일.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3, 국사편찬위원회, 125쪽, 2008년.

2. 안창호, ‘일기’, 1920년 4월29일. <도산안창호전집> 제4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년.

3. 송민수, ‘상해 구국모험단의 조직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2, 178~179쪽, 2020년.

4. 警務局, ‘上海在住不逞鮮人의 行動’,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2), 19~20쪽, 1920년 6월.

5. 김구, <백범일지>(도진순 주해), 돌베개, 302쪽, 1997년.

6. ‘4각관계로 폭로된 상해밀정사건 3’, <동아일보> 1925년 9월27일치.

7. ‘문제의 인물 金聲根, 입경하자 경무국’, <동아일보> 1925년 9월28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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