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일본으로 인도되는 이동휘를 구하라

박진순의 행적으로 살펴본 연해주에서 출현한 최초의 사회주의자들

 

 

전로한족중앙총회 제1회 대회가 열린 장소(우수리스크). 이 대회에서 케렌스키 임시정부 지지 노선과 볼셰비키 지지 노선으로 나뉘는 현상이 나타났다. 임경석 제공

 

연해주 한인사회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발원지다. 그곳에서 어떻게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이 출현했는가? 이 물음의 답을 찾는 데 박진순의 행적이 도움된다. 그는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청년이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됐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재러시아 한인 정치 망명자들의 중심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습니다. 대한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비서로 일했습니다. 얼마 후 케렌스키 정부가 인터내셔널 활동을 문제 삼아 ‘독일 스파이’ 혐의로 이동휘 동무를 체포했습니다. (…) 나는 이동휘 동무와 가장 가까운 동료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반(半)합법 상태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 동무를 일본 정부에 넘기려는 것에 반대하는, 석방 캠페인을 이끌었습니다.” 1

 

혁명의 격정이 박진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문장이다. 1917년 러시아에서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린 혁명이 발발했다. 바로 2월혁명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폐위되고 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혁명은 수도 페트로그라드만이 아니라 전체 러시아를 휩쓸었다. 20살 청년 박진순도 이에 가담했다. 연해주 남부 농촌지대 한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교직을 사임하고 극동지방의 중심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나아갔다.

 

독일 스파이로 공격받은 레닌처럼

 

그는 대한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에 가담했다. 여기서 말하는 대한국민회란 어떤 단체일까? 러시아어 철자로 ‘대한국민회’(Дайхан-Гукмин-Хве)라고 똑똑히 기재한 것을 보면 고유명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단체의 실체를 밝히기가 쉽지 않다. 3·1운동 당시 북간도에서 설립된 같은 이름의 단체가 있긴 하다. 하지만 2년 뒤 일이므로 그와는 다른 단체일 것이다.

 

그렇다면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의 자치단체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그즈음 연해주 한인 이주민은 약 20만 명이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만 7600명이 살았다. 그중 4천 명이 신한촌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그들을 결속한 민회였을 가능성이 있다.2 혹은 비밀결사일 가능성도 있다. 모국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소수 구성원의 혁명적 민족주의 단체였다면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어느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어쨌든 연해주의 수도라 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박진순은 한인 기반의 혁명단체에 깊숙이 관여했음이 명백하다.

 

‘독일 스파이’ 혐의란 무엇인가? 이동휘가 그 혐의를 받아 부르주아 임시정부 관헌에게 체포됐다고 한다. 1917년 5~6월 일이다. 당시 러시아는 전시체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주요 참전국으로서 독일을 상대로 전쟁 수행 중이었다. ‘독일 스파이’ 혐의란 교전 중인 적대국과 내통한다는 것이었다. 그해 4월의 레닌을 연상하게 한다. 2월혁명이 발발하자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레닌은 독일 지원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페트로그라드에 귀환한 레닌은 유명한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전쟁 중단을 요구했다. 또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노선을 천명했다. 급진적인 반정부 운동을 지휘하는 레닌은 반대파에 의해서 독일 스파이로 공격받았다.

 

이동휘도 그랬다.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을 종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러시아-일본 동맹이 취소될 가능성이 열릴 터였다. 제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에 이동휘를 비롯한 반일운동 지도자 21명이 러시아 영외 추방령을 당했다.3 러일 동맹 파기는 연해주에서 한인들의 반일 독립운동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전제조건이었다.

 

박진순의 사진, 20대 후반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임경석 제공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다수파와 소비에트 분파

 

일본 정부는 수감된 이동휘에게 눈독을 들였다. 반일 독립운동의 지도자를 이번 기회에 포획하고자 했다. 일본대사관은 외교 루트를 통해서 이동휘의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다. 서쪽 방면의 대독일 전쟁에 전념하려면 동쪽 방면에서 일본과의 동맹을 굳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이동휘의 운명이 위기에 처했다. 아니, 이동휘로 대표되는 조선 독립운동의 전투적인 흐름이 위기에 처했다고 봐도 틀리지 않았다.

 

박진순이 나섰다. 이동휘의 일본 인도를 저지하기 위해, 더 나아가 이동휘를 석방시키기 위해 사회적 압력을 조직했다. 대한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부 비서라는 직위가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사회의 3인 대표단 일원으로 선발됐다. 러시아 중앙과 지방정부 요로와 협상하기 위해서였다. 협상 상대 파트너는 극동임시정부 루사노프 전권위원이었다. 케렌스키 중앙정부로부터 연해주 일원의 통치를 위임받은 요인이었다. 그러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이동휘의 석방은 10월혁명으로 정권이 다시 한번 뒤바뀐 뒤에야 이뤄졌다.

 

2월혁명의 방향을 둘러싸고 러시아 전역에서 갈등이 고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연해주 한인사회에서도 분열이 발생했다. 이 분열은 현지 한인 권익 옹호 기관인 전로한족중앙총회의 미래를 둘러싸고 표출됐다.

 

“러시아에서 최고의 한인 기관이던 전로한족중앙총회 내에서는 반소비에트적인 분자가 다수파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명세, 김야꼬프, 문창범 등의 입헌민주당·사회혁명당 계열의 정상배들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내에서 소비에트 권력과 볼셰비키의 강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소수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두 분파 사이의 투쟁은 10월혁명 이후 한층 첨예화됐습니다. 나는 소비에트 분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4

 

전로한족중앙총회는 1917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 시에서 결성된 러시아 한인의 권익단체였다. 차르 체제 붕괴 이후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됐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가한, 각지에서 온 대표자 96명은 분열됐다.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헌법제정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가 쟁점이었다.

 

‘두루미’라 불린 가난한 사람들

 

대표 파견을 주장하는 다수파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유력자층이었다. 대부분 러시아 국적을 가진 귀화인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유족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 으뜸 ‘원’자를 써 원호(元戶)라고 했다. 의식주 생활이 러시아화한 사람들이었다. 남녀가 서로 팔짱 끼고 걸어다니는 것이나, 부부 동반하여 슬라브정교회 성당에 예배 보러 가는 것이나 러시아인과 다름없었다. 러시아말로 대화를 나누는 것에 조금도 어색한 빛이 없었다. 결혼도 그들끼리만 했다.

 

이 세력의 지도자로 꼽히는 이는 최재형, 문창범, 한명세 등이다. 이 가운데 최재형과 문창범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될 당시 각각 재무부 총장, 교통부 총장에 선임될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비록 임시정부 보이콧을 주장하며 취임을 거절했지만 말이다. 한명세는 1920년 이후 볼셰비키 지지로 노선을 바꿔서 이른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수장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2월혁명 정세 속에서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다. 대독일 전쟁 정책을 지지함에 따라, 러일 동맹 유지 정책에도 호의적이었다.

 

대회장에는 헌법제정회의 대표 파견을 반대하고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정권 장악을 주장하는 대표자들이 있었다. 볼셰비키 정치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대회에서는 소수파였다. 박진순은 바로 이 대표자 그룹 일원이었다. 이 그룹에는 이동휘 석방 캠페인을 벌인 동료들이 포진했다.

 

이들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다수를 점하는 가난한 비귀화인을 대표했다. 비귀화인은 조선이나 북간도에서 건너간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니만큼 러시아말이 서툴렀다. 또 대체로 가난했다. 도시와 농촌에서 불안정한 하층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을 가리켜 남을 ‘여’자를 써 여호(餘戶)라고 했다. 여호층의 심리 속에는 모국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다. 그들은 독일과의 전쟁 지속 정책이 민중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고 세계 평화에도 저촉된다고 생각했다. 또 러시아와 일본의 동맹이 지속하는 것도 찬성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쟁 반대, 임시정부 반대를 표방하는 볼셰비키 노선에 공감했다. 한자어 표기에도 어렴풋이 드러나듯이 원호들은 비귀화인을 ‘레베지’(두루미)라고 부르며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5 외출할 때 흰옷을 입고 줄지어 가는 것이 마치 두루미 같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자신들에 비해 가난하고 야만적인 사람이라는 어감이 내포됐다.

 

대회장의 의석 분포는 대략 7 대 3으로 나뉘었다. 70%의 다수를 점한 원호 그룹은 헌법제정회의 대표 파견을 의결하고 러시아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했다. 소수파는 대회장을 탈퇴함에 따라 양쪽 갈등은 오래 지속됐다. 뒷날 독립운동사를 얼룩지게 한 상하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갈등, 상하이파 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의 분쟁이 이 대회장에 연원을 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 사회주의는 한인사회 계급투쟁의 소산

 

전로한족중앙총회 제1회 대회장을 탈퇴한 비귀화인 그룹은 독자 행동을 강화했다. 이동휘가 이끄는 한국 독립운동의 전투적 집단, 이동휘 석방 캠페인을 전개했던 동료들, 전로한족중앙총회 대회장에서 비귀화인을 대표한 사람들, 독일과의 전쟁 종결을 꾀하는 반전주의자들, 일본과의 동맹 파기를 희망하는 반일운동가들이 모였다. 이들의 공통된 사상적 기반은 마르크스주의였다. 활동 무대는 하바롭스크였다. 왜냐하면 그곳 지방정부를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 연립세력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두 갈래 사업을 준비했다. 하나는 독자적인 러시아 한인 최고기관을 설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 정당을 결성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 두 개의 준비위원회가 조직됐다. 하나는 ‘극동조선인혁명단체통합대회 준비위원회’였다. 이 위원회는 사료에 따라서 ‘아령한인총회’ ‘한족중앙총회’ 등의 이름으로도 나온다. 박진순은 이 준비위원회의 부의장으로 선임됐다. 다른 하나는 ‘한인사회당 창립대회 준비위원회’였다. 박진순은 이 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직위는 비서였다.

 

결국 한인사회당이 창립됐다. 1918년 4월 하바롭스크에서였다. 박진순은 제1회 대회에 출석한 창립당원일 뿐 아니라 강령작성위원으로서 당의 정강 정책을 수립하는 일에 참여했다. 이 정당은 볼셰비키 강령에 기반하여 성립한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회주의는 민족해방운동의 급진적 그룹 속에서 분화돼 나타났으며, 해외 한인사회의 계급투쟁 소산이었음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Автобиографические сведения в Интернациональную Контрольную Комиссию(이력서, 국제통제위원회 앞). 1928년 12월22일, с.2,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л.76-82об

2. <독립신문> 1919년 10월16일, 3면

3. 김슬기,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러시아 한인사회의 정치적 동향’,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2쪽

4.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Автобиография(自傳), 1937년 10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1

5. 李智澤, ‘시베리아의 3·1운동’, <월간중앙> 1971년 3월, 194쪽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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