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암살용 사제폭탄과 함께 등장한 이름 ‘의열단’

일본 경찰이 대경실색한 대규모 폭발물, 김원봉이 밝힌 사건의 진상

 

갸름한 술병 모양의 암살용 폭탄(위)과 대형 통조림 모양의 파괴용 폭탄(아래). 임경석 제공

 

의열단 사건이란 1923년 3월에 발각된 폭발물 비밀 반입 사건을 가리킨다. 언론매체에서는 으레 의열단 사건이라고 불렀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제2차 대암살·파괴 계획’이라고 지칭했다. 그것은 1920년 6월 ‘제1차 암살·파괴 계획’(일명 밀양 폭탄 사건)에 뒤이어, 의열단이 두 번째로 주도한 더욱 큰 규모의 의열투쟁 계획이었다.

 

김상옥 이어 또 폭파 계획 “끈기도 무섭다”

 

계획이 발각된 때는 1923년 3월15일이다. 김상옥 사건에 대한 총독부의 보도 금지가 해제된 날이기도 했다. 김상옥 사건이란 1월17일 삼판통(현재 서울 용산구 후암동)과 1월22일 효제동에서 벌어진 총격전을 아울러서 부르는 명칭인데, 두 달간 줄곧 보도가 금지됐다. 일본 경찰 간부 4명이 숨지거나 중상을 입은데다, 일본 경찰 수천 명이 동원돼 관련자 체포에 혈안이 됐던 사건이다. 그 보도 금지 조처가 이날 풀렸다. 일간신문들은 앞다퉈 호외를 발간했다. 대문짝만한 굵은 글자로 김상옥 사건의 전말을 전하는 기사와 사진을 내놓았다.

 

그 지면 한쪽에 이채로운 기사가 실렸다. ‘관공서 폭파 계획 발각’이라는 제목 아래 총독부 경무국의 또 다른 발표 내용이 자그맣게 게재됐다. 국경지대와 경성 시내에서 폭발물 수십 개와 권총, 탄환, 불온 유인물 등이 대량 압수됐고 관련자 다수가 체포됐다는 내용이었다. 의열단 사건에 관한 첫 보도였다.

 

비록 작은 기사였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컸다.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김상옥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또 다른 의열투쟁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의열투쟁 사건이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현실이 사람들에게 경외감마저 가져다줬다. 일간지의 한 편집기자는 “한 가지 사건이 겨우 끝나면 또 한 가지 사건이 뒤를 이어 일어나니, 경관의 괴로움도 많으려니와, 뒤를 이어 계속하여 일으키는 사람들의 끈기도 무섭다”고 논평했다.1 신문기사는 경성의 민심이 소란하고 흉흉하다고 전했다.

 

두 군데였다. 국경도시 신의주와 식민지 수도 경성, 두 도시에서 대규모 폭발물이 은닉됐음이 드러났다. 신의주경찰서는 3월14일 밤에, 경기도경찰부는 3월15일 새벽에 일제히 검거 작전에 착수했다. 그 결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를 올렸다. 폭탄 36개, 폭탄장치용 시계 6개, 권총 5자루, 실탄 155발, 뇌관 6개, ‘조선혁명선언’과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라고 제목을 단 불온 문서 900여 장을 압수했다. 또 연루 혐의자로 조선인 18명을 체포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폭탄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무려 36개였다. 경찰은 폭탄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전문가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폭발물은 용도에 따라 세 종류로 이뤄졌고, 각자 놀랄 만한 위력을 가졌음이 밝혀졌다.

 

의열단 사건의 세 주체 가운데 하나인 조선공산당(내지당) 지도자 김한. 임경석 제공

 

파괴용·방화용·암살용으로 분류된 폭탄

 

하나는 경찰의 이름 붙이기에 따르면 ‘파괴용’이었다. 대형 통조림처럼 생겼는데, 셋 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웠다. 무게가 3.06㎏이었다. 일본군이 쓰던 대정 10년도(1921년) 제작 ‘10년식 수류탄’이 530g이었으니, 그보다 6배나 무거웠다. 사람이 팔을 휘둘러 던지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미뤄보아 투척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부 충전재로 젤리그나이트(Gelignite)가 가득 들어 있었다. 조물조물 빚어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가소성 폭약으로, 폭발력이 강하고 외부 충격에 저항성이 뛰어난 맹렬한 폭약이었다.2 내부 바닥에는 기폭용 뇌관이 장치돼 있었다. 요컨대 대형 통조림 폭탄은 은밀한 곳에 숨겨놓았다가 도화선이나 전기 발화 기구 등을 써서 기폭시키는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철교나 건축물 폭파에 적합했다. 폭탄장치용 시계를 도화선에 연결해 예정된 시간에 폭발시킬 수도 있었다. 압수된 폭발물 가운데 2개가 이 유형에 속했다.

 

다른 하나는 ‘방화용’이었다. 외부에 발화용 돌출 장치가 있는 대추씨 모양의 폭탄인데 무게는 980g이었다. 이것은 곧바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완성도가 높았다. 감정을 맡은 폭약 전문가는 군용 수류탄과 매우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돌출부를 뽑아내거나 외부에 드러난 나선 장치에 힘을 가하면, 판자 모양의 격철이 회전하면서 내부에 있는 뇌관을 쳐서 발화시키는 장치가 내장돼 있었다. 그 폭발로 표면의 철갑이 다수의 파편이 되어 살상용으로 쓸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불길이 맹렬히 일어나서 주위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었다. 폭약 전문가는 이 폭탄이 고관의 마차나 자동차를 표적으로 삼아 투척하기에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 효력을 예상하자면, 폭발 위치에서 반지름 4~5m 이내의 사람은 확실히 살해할 수 있고, 22~23m 이내의 사람은 살해하거나 중상을 입히기에 충분했다.

 

마지막 하나는 ‘암살용’이었다. 갸름한 술병처럼 생겼는데, 모양만 다를 뿐 기계부 발화장치는 앞에서 말한 ‘방화용’과 동일했다. 무게는 850g으로 세 종류 폭탄 가운데 가장 가벼웠다. 몸통 부분에는 폭약을 채워넣었고, 잘록한 입구 모양의 약실 내에는 다량의 황린을 담았다. 황린이란 노란색을 띤 화학물질인데 독성이 강하고 공기 중에 발화하는 특성이 있다. 한번 폭발하면 강철 파편 조각과 함께 황린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장치였다. 황린이 인체에 조금이라도 닿으면 곧바로 발화해 뼛속까지 타들어가게끔 의도된 것이었다. 결국 인 중독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폭탄이었다.

 

일본 경찰은 대경실색했다. 이처럼 살상력 높은 폭탄을 범죄자들이 어떻게 획득할 수 있었을까? 폭약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 폭탄들은 어느 열강의 군용 기성품이 아니었다. 사제 폭발물이었다. 경찰은 체포된 혐의자들의 입을 통해 진실을 알려 했다. 하지만 속 시원히 진상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그저 유대계 러시아인 폭약 전문가가 중국 톈진 방면에서 제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이었다.

 

의열단 사건의 한 주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시당)의 내지부 위원이자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 황옥. 임경석 제공

 

자금은 소비에트러시아가, 제조는 헝가리 청년이

 

뒷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이 폭탄들을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술회했다. 해방 직후 작가 박태원과 한 수차례 인터뷰에서다. 성능 좋은 폭발물을 입수하는 건 의열투쟁을 성공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예컨대 1921년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사건이 김익상의 결사적인 모험 끝에 단행됐지만 겨우 회계과 마룻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고 사무실 집기를 부수는 데 그쳤음을 보라. 폭탄 성능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두 개를 던졌는데, 한 개는 불발이었다. 위력적인 폭탄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금과 기술이 필요했다. 자금 문제는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의 원조에 힘입어 해결할 수 있었다. 조선혁명자금 제2회분 26만원을 관장한 한형권의 결산보고서에 따르면, 4만6700원을 의열단에 지급했다고 한다.3 지방부 신문기자 월급이 40원, 사무관급 관료 월급이 50원 하던 때다. 오늘날 현금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3억원에 해당한다. 이 금액은 폭발물 전문가 고용비, 폭발물 재료비, 중간 연락거점 유지비, 운송비 등에 지출됐다.

 

기술 문제를 해결한 폭약 전문가는 헝가리 청년 ‘마쟈르’였다.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의 서양식 주택을 임차해 그곳에서 폭발물을 제조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마쟈르라고 불렸다는 점 외에 그의 신상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의열단 사건의 숨겨진 논점 가운데 하나는 주체 문제일 것이다. 강력한 폭발물을 국내에 반입해 암살과 파괴를 실행에 옮기려는 이 거창한 의열투쟁의 주도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다. 아니, 의열단 사건의 주도자는 그 단체의 리더인 김원봉이 아닌가, 그 외에 달리 주도세력을 설정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의열단 단독 주도론의 기원은 사건 발발 당시 일본 경찰의 관점에서 연유한다. 경찰 당국은 이 사건을 가리켜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열단이 러시아공산당에서 자금을 받아서 대관을 암살하고 관공서를 파괴함으로써 조선을 적화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한 음모”라고 간주했다.4 또 경찰과는 정반대 입장에서 작성된 기록 <약산과 의열단>도 마찬가지다. 그 사건은 의열단의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이며 시종일관 김원봉 단장의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이뤄진 것으로 묘사됐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건 가담자들은 의열단원이거나 개인적 협력자들로 이해된다. 무산자동맹회장 김한, 경기도경찰부 소속 경부 황옥 등의 가담이 개인적 협력의 두드러진 사례로 간주된다.

 

두 공산당 주요 간부들 참여 의미는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의열단 사건의 피고인은 18명이었는데, 이 중에서 몇몇 사람은 의열단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단체의 구성원이었음이 확인된다. 황옥은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부의 위원이었고, 장건상은 이시당의 최고 간부인 중앙위원이었다. 김시현과 권정필은 이시당의 국내 활동을 위해 1922년 3~5월 잠입한 당원이었다. 말하자면 의열단 사건 가담자 가운데 적어도 4명은 이시당의 간부이거나 중요 당원이었음이 뚜렷하다.

 

김한의 협력도 개인적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망명자 중심의 양대 고려공산당(상하이파, 이르쿠츠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일명 내지당, 중립당)의 간부였다. 단지 간부의 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아쉬움이 느껴지는 영향력 있는 간부였다. 1922년 당시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이끄는 양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요컨대 1923년 의열단 사건을 의열단이 단독으로 이끌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배치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의열단과 더불어 두 공산당(이시당, 내지당)이 ‘제2차 암살·파괴 계획’의 공동 주도세력이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휴지통’, <동아일보> 1923년 3월16일

2. 明石東次郞 외, ‘爆彈鑑定書’, 1923년 3월21일. <정보(경찰부의 1부)>, 경성지방법원검사국, 1923년(아세아문제연구소 희귀문헌 29)

3. 조철행, ‘국민대표회 개최 과정과 참가 대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1, 44쪽, 2009년

4. ‘의열단사건 내용발표’, <동아일보> 1923년 4월12일 호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