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우물 속 주검을 둘러싼 교활한 각본

‘살모사건’으로 불렸던 송하살인사건,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만들기 위한 일제의 계략

1931년 성진농민조합의 메이데이 기념사진. 구성원 가운데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 점이 이채롭다. 임경석 제공

 

이른 아침 동네 우물에서 주검이 발견됐다. 1932년 5월23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에서였다. 170가구쯤 있는 큰 동네였다. 철길 건너 송상마을까지 합하면 300가구가 넘는 번성한 농촌 마을이었다. “성진농민조합운동의 가장 강력한 근거지요, 검거 바람이 그칠 줄 모르는” 동네로 이름난 곳이었다.

 

주검을 발견한 사람은 이웃집 아낙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코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뜨린 여성은 으레 듣던 출렁하는 물소리가 아니라 둔탁한 충돌음을 들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우물 속을 내려다봤으나,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우물 귀틀 안에 얼굴을 박은 채 한참 동안 내려다보려니까, 그제야 희멀끔한 것이 시선에 들어왔다. 머리칼이 쭈뼛이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1

 

성진농민조합 검거에서 아들 구하려

 

주검의 주인공은 동네 주민인 농부 허간씨의 아내 김씨였다. 54살의 초로에 접어든, 평범한 농촌 여성이었다. 남편도 있고 다 자란 아들딸을 거느린 유복한 가정의 안주인이었다. 집에는 28살 아들 허철봉을 비롯해서 큰딸 허어금(19)과 작은딸 허주화(17)가 함께 거주했다. 김씨 부인은 조선 여느 집안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특히 아들 사랑이 지극했다.

 

아들 허철봉은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다. 20살이 되자 청년운동에 참여했고, 민족통일전선 단체인 신간회 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머지않아 면 단위 조직의 간부로 성장했다. 1928년 3월11일 열린 성진청년동맹 학중면 지부 설립대회에 참석해 집행위원 24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이듬해 12월24~25일 신간회 성진지회 제4회 대회에서 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될 만큼 비중이 커졌다. 군 단위 운동단체의 간부 반열에 이름이 오른 것이다. 1931년 사회운동이 농민조합 중심으로 개편될 때도 허철봉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다. 5월30일 성진농민조합 창립대회에서 집행위원 20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성진농민조합은 조합원 수만도 2천 명에 이르는 큰 단체였다. 지부 조직이 14개고, 기층 세포단체인 반의 수가 45개였다.2 1930년대 격렬한 함경도 농민운동을 대표하는 유명한 농민조합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씨 부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그해 12월 말 어느 새벽이다. 아들 허철봉이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덜컥 체포되고 말았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눈이 펑펑 퍼붓는 날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 5시께 패검(차는 칼) 소리를 요란스레 쩔렁거리며 정복 경찰대 30명이 송하마을을 습격했다.3 이날 청년 30여 명이 체포됐고 그 속에 허철봉이 포함됐다. 검거는 계속됐다. 이른바 ‘성진농민조합 제1차 사건’이다. 1931년 9월에 개시된 검거가 해가 바뀐 뒤에도 계속됐다. 성진군 전역에서 젊은이 700여 명이 체포됐다.

 

김씨 부인은 노심초사했다. 아들의 석방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면 주재소와 읍내 경찰서를 연거푸 찾아다녔고, 경찰에 선이 닿는 사람을 만나려고 노력했다. 어머니의 노력 덕분일까? 허철봉은 성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됐다. 여전히 갇혀 있는 다른 수감자의 처지에 비하면 이례적인 조치다. 1932년 5월 초순의 일이다.

 

소설 <설봉산>(1958년 재판)의 마지막 페이지, 탈고 날짜 ‘1955.11.5.’가 기재돼 있다. 임경석 제공

 

일제 경찰은 “딸들이 살해했다”

 

경찰은 김씨 부인 죽음을 살인으로 간주했다. 경찰이 타살로 보는 관점은 사건 당일이 아니라 그 이튿날에야 수립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일 오전 현장에 나타난 주재소 순사는 이 사건을 심드렁하게 대했다. 그런데 하루 만에 태도가 바뀌었다. 이튿날 경찰은 주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주검은 면 주재소를 거쳐 읍내에 있는 성진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의 검시 소견을 얻으려는 목적이다. 시신 이송 과정에 성진경찰서 고등계가 개입했음을 시사한다. 의사는 경찰의 요구에 호응했다. 육안 검시에 더해 해부까지 했다. 그 결과 주검의 옆구리와 후두부에 타박상이 있고 그것이 치명상이라는 검시 소견을 냈다.

 

경찰은 이 소견을 근거로 주검이 타살의 결과라고 못박았다. 남은 문제는, 누가 왜 죽였느냐를 밝히는 것이었다. 경찰은 가족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허어금, 허주화 두 딸이 혐의를 받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두 자매가 힘을 합해서 곤봉과 기타 흉기로 어머니 김씨를 난타해 기절시킨 뒤, 부엌에 들여다 눕혔다. 그곳에서도 난타를 그치지 않아 결국 22일 밤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 뒤 범죄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주검을 동네 우물 속에 버렸다고 했다.4

 

왜 죽였는가. 경찰 조사에 따르면 김씨 부인이 아들의 석방을 위해 농민조합의 비밀을 경찰에게 누설했음이 알려졌기 때문이란다. 피신 중이던 다른 농민조합 간부의 체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철봉은 어머니의 행위를 비난했고, 동지들에게 차마 얼굴을 들고 대할 수 없다며 집을 떠나버렸다. 5월17일 일이다. 그 뒤 어머니와 두 딸의 갈등이 깊어졌다. 딸들은 오빠를 동정하고, 어머니를 비난했다. 경찰 취조에 따르면, 갈등은 언쟁에 머물지 않고 폭행 양상으로 번졌으며 급기야 살인사건으로 나아갔다.

 

자매는 살해 혐의를 부인했다. 어머니와 갈등을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폭행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했다. 어머니는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처가 왜 났는지는 자신들도 모르고, 아마 투신 중에 부딪쳐서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자매는 법정 심문에서도 일관되게 그와 같이 진술했다.

 

그러나 총독부 판사는 자매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의 유죄를 인정했다. 그리하여 두 자매는 청진지방법원 공판에서 각각 징역 10년형과 7년형을 선고받았다. 살인사건치고 형량이 매우 낮다는 여론 때문이었을까. 경성복심법원에서 행한 공소(항소) 재판에서는 자매의 형량이 더 늘었다. 큰딸에게는 징역 15년형, 작은딸에게는 징역 10년형이 선고됐다.

 

해방 전 함경북도 성진군 지도. 붉은 점 찍은 곳이 성진군 학중면 송하마을이다. 임경석 제공

 

농민운동 추락시킬 호재

 

송하살인사건은 농민운동의 위신을 추락시킬 수 있는 호재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밀정이라고 어머니를 때려죽이는 것이 주의상으로 보아 옳은 일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저주받을 죄’ ‘뱀같이 쌀쌀한 태도’ ‘동정할 길이 없는 대죄악’ ‘저주하는 분노성’ ‘말세가 된 세상’ 등의 수사로 농민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혐오를 부추겼다.5

 

사건 자체가 갖는 센세이션 때문일까. 다른 신문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논조를 보였다. 언론 보도는 이 사건을 ‘살모사건’이라고 불렀다. 두 자매는 어머니를 살해한 악녀로 지목받았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고 사회적으로 고립됐다. 형기를 다 마치고 출소했다면 큰딸 허어금은 34살에, 작은딸 허주화는 27살에 세상에 다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후 삶이 어떠했는지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경찰과 재판부의 시선이 아닌, 농민운동 쪽 기록은 없을까? 송하살인사건의 진실을 보여주는 자료 말이다. 다행히 있다. 허성택이 1936년에 작성한 성진농민조합 활동에 관한 자전적 기록이다. 허성택은 성진에서 나고 자랐으며, 1931~1933년 성진농민조합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뒷날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했다. 그에 따르면 “송하스파이사건 검속자 구원으로 각 동에서 구조사업”을 행했다.6 ‘송하스파이사건’이란 곧 송하살인사건을, ‘검속자’란 허어금과 허주화 자매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성진군의 여러 마을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구조사업을 수행했다고 한다. 이 기록 안에 두 자매에 대한 비난의 함의는 없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또 있다. 작가 한설야가 집필한 <설봉산>이라는 장편소설을 주목할 만하다. 1956년 북한에서 간행된 이 작품은 일제하 성진농민조합운동을 소재로 다뤘다. 특히 송하살인사건 관련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 형식을 띠고 사건이 일어난 지 2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나왔음에 유의해야 한다. 다만 일정한 조건하에선 사실을 반영한다고 봐도 좋으리라. 왜냐하면 작가가 집필에 앞서 성진농민조합운동 자료를 조사하고 참가자들의 증언을 널리 청취했기 때문이다. <설봉산> 내용에서 경찰 자료와 신문 보도 등으로 교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실로 간주해도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이런 정보다. 김씨 부인은 자살하기 며칠 전 농민조합 사문위원회에 출석했다. 마을 뒤 산중에 구축한 대형 토굴에서였다. 50~60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그 자리에 여러 마을의 농민조합 간부와 열성자들이 모였다. 불을 켜지 않아서 서로 얼굴도 볼 수 없고, 어디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알기 어렵게 만든 조건에서 문답이 이뤄졌다. 농민조합 간부를 하나 잡아주면 아들을 석방해준다는 약속을 받은 일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 사실을 끝내 부인했다.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성진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은 교활한 취조 전략을 구사했음이 드러났다. 그들의 첫 노림수는 농민조합을 집단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이었다. 김씨 부인의 밀정 행위를 알아챈 조합원들이 작당해 그를 타살했다는 각본을 짰다는 것이다. 그러나 딸들은 끝내 이 각본에 응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문해도 바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부득이 차선의 계책을 택했다. 딸들을 살해범으로 만드는 길이었다. 요컨대 허씨 자매는 스스로 오욕을 짊어질지언정 무고한 농민조합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결단코 거절했던 것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한설야, <설봉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355쪽, 1958년(재판). 이 자료를 성균관대 김성수 교수에게서 받았다. 감사드린다.

2. ‘성진농민조합 사건 81명, 10일 송국’, <동아일보> 1932년 9월14일

3. ‘경관과 지주협력 50여 촌민 검거’, <조선일보> 1932년 1월3일

4. ‘친모 살해한 양 자매, 控訴公判 금일 개정’, <동아일보> 1932년 11월15일

5. <매일신보> 1932년 11월19일

6. 김일수, <연역(이력서)>, 6쪽, 1936년 4월3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40 л.12-20о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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