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키맨’ 홍도, 베일 속 불꽃같은 삶

초기 사회주의 운동사 의문점 열쇠 쥔 홍진의,

1935년 러시아에서 반혁명 활동 체포 뒤 기록 찾을 수 없어…

해방 뒤 61년 만인 2006년 애국장 받아

 

홍도의 사진, 1921년(27살)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 활동하던 시기.

 

노년기의 김철수는 국내 첫 사회주의 단체에 대해 구술 기록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3·1운동 다음해인 1920년 가을에 사회혁명당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우리 조선 안에 공산주의 비밀결사로는 처음” 조직된 것이었다. 절대 비밀이었다. 어지간한 동지는 다 떼어내버렸다. 3·1운동에 헌신한 이 중에서도 결심이나 각오가 평균보다 약간 더한 수준의 동지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만 들였다. 죽음마저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하는 동지들만 규합했다.

 

김철수 회고담 “오직 사생을 같이할 사람들의 앞자리”

 

구성원은 열대여섯 명이었다. 김철수는 기억을 더듬어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밝혔다. 그중 앞자리에 호명한 한 사람에게 눈길이 간다. “저 홍진이라고, 시베리아에서 죽었어. 홍도라고 별명을” 불렀다고 한다.1

 

‘홍진이’라고 적은 것은 구술을 녹취한 사람의 착오였다. 김철수가 의도한 발음은 ‘홍진의’였다. 기록에 따라서는 더러 홍진의(洪鎭義)라고도 표기됐지만, 그의 본명은 ‘홍진의(洪震義)’이다. 동지들 사이에서는 홍도(洪濤)라는 가명으로 즐겨 불렀다. 본명은 아버지가 지었으므로 자식의 의중이 실리지 않는다. 하지만 가명은 자신이 직접 지으므로, 그의 내면 의식이 담기기 마련이다. ‘큰물 홍’ ‘큰 물결 도’라는 글자를 선택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일제의 식민통치 체제를 쓸어버리는 대혁명의 큰 파도를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그 큰 물결이 되려 했다.

 

김철수의 회고담에 따르면, 홍도의 역할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국외 연락이었다. 비밀 사명을 띠고서 “홍도라고 하는 사람이 상해를 갔다 왔”다고 한다. 국외의 한인사회당과 연락해 전국 규모의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한다는 사명을 띠고서 왕래했다는 말이다.

 

김철수의 회고담을 다른 관점의 자료로 검사할 가능성은 없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홍도가 작성한 자필 이력서가 남아 있다. 그 속에 홍도 자신의 시선으로 본 전후 사정이 적혀 있다. 왜 중국 상하이에 왕래했는지, 그 의미를 뚜렷이 보여준다.

 

“1919년 2월에 다시 내지에 들어가서 내외지간의 연락 급 3·1운동에 직접 노력하다가, 체포를 피키 위하여 이해(그해) 5월에 다시 상해에 망명함. 1919년 9월에 해삼(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이곳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가하였으며, 또 입당하였음. 1920년 6월에 한인사회당의 사명을 가지고 비밀히 내지에 들어가서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에 대하여 일하다.”2

 

1919년 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1년4개월 동안의 행적을 썼다. 인용문에서 말하는 ‘내지’란 바로 조선 국내를 가리킨다. 국경을 넘어다니면서 참으로 분주하게 투쟁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1930년 작성된 홍도의 이력서 러시아어 번역본 첫 페이지.

 

한자, 러시아어 등 3개 언어로 쓰인 홍도의 1930년 3월20일치 자필 서명.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 연대의 매개 역할

 

이 기록에는 기왕에 어느 역사책이나 논문에서도 밝힌 적이 없는 미지의 중요 사실이 포함돼 있다. 홍도가 1919년 한인사회당 제2차 당대회에 참석했고, 또 한인사회당 내지부 조직을 위해서 국내로 다시 잠입했다는 진술에 유의하자. 초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한 비밀을 드러내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회는 독립운동사상 전환점이 되는 결정을 여럿 채택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3인 대표단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파견해 코민테른(국제공산당)에 가입하게 한 점, 책임비서 이동휘 등을 중국 상하이로 파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게 한 점, 활동의 중점을 조선 내지에 두려고 노력한 점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주의할 점은 세 번째 사안이다. 종래에는 이 결정 사항이 어떻게 실행에 옮겨졌는지 알지 못했으나, 이제 홍도의 기록을 통해 실마리를 얻게 됐다. 서울 복판에 한인사회당의 내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홍도가 직접 파견됐다고 한다. 김철수가 회고한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결사 사회혁명당이 곧 한인사회당 내지부의 위상을 가짐을 시사한다.

 

이로 인해 초창기 사회주의운동사의 큰 의문점이 해소됐다. 1921년 5월 상하이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대의원을 파견한 두 개의 단체, 한인사회당과 사회혁명당이 어떻게 연대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회혁명당은 성립 당초부터 한인사회당과 연계했을 뿐 아니라 그 내지부라는 조직 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를 매개하고 실행에 옮긴 이가 바로 홍도였다.

 

홍도의 자필 이력서는 역사학자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흥미롭기 짝이 없다.

 

그는 20살 되던 1914년 서울에서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비밀결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쉼 없이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배달모듬, 신아동맹단, 신한청년당, 한인사회당,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적기단, 조선공산당. 이것이 그가 가담했던 비밀결사 목록이다.

 

이 단체들의 근거지는 러시아를 포함해 동아시아 4개국에 널리 분포했다. 홍도의 동선을 뒤따라가보자. 함경남도 함흥(보통학교), 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 배달모듬), 도쿄(메이지대학, 신아동맹단), 상하이(신한청년당), 서울(3·1운동), 상하이(임시의정원), 블라디보스토크(한인사회당), 서울(사회혁명당), 상하이(고려공산당), 모스크바(국제당 파견 대표), 베르흐네우딘스크(고려공산당 연합 당대회), 상하이(국민대표회), 함흥(노동동무회), 서울(적기단 사건, 서대문형무소), 함흥(조선공산당, 함흥농민조합), 블라디보스토크(망명) 등의 도시가 줄을 잇는다. 어지러울 정도다. 그가 불꽃같은 삶을 영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출옥 후 조선공산당 최고위 간부 대열에

 

30살 되던 해에 홍도는 시련을 겪었다. 1924년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북간도에 본부를 둔 비밀단체 적기단에 연루된 혐의였다. 함흥의 부호 고형선에게서 거액의 군자금을 받아낸 적기단원 이정호를 후원했다는 죄목이었다. 불행한 일이었지만, 다행스러운 점도 있었다. 상하이파 공산당의 비밀 당원이던 홍도는 일본 경찰의 가혹한 취조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당 조직의 노출을 막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홍도는 감옥살이를 겪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서 1927년 8월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 뒤 얼마 안 돼 홍도는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1927년 12월 비밀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제3차 당대회에서 중앙간부 9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3 당의 최고위 간부 대열에 올랐다. 그는 합법 운동 내에도 거점을 구축했다. 고향인 함흥으로 되돌아가 현지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함흥농민조합 위원장에 취임했고, 신간회 함흥지회에서도 위원으로 선출됐다. 합법·비합법 양 방면으로 국내 사회운동에 뿌리를 내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출옥 1년 만에 홍도는 다시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 이번에는 공산당 조직 자체가 노출됐다. 1928년 4월부터 몇몇 당 간부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수사망이 조여들었다. 수사망을 피해가며 비밀조직을 지휘하던 홍도는 부득이 그해 7월에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소비에트러시아였다. 8월1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는 환대받았다. 한글신문 <선봉>의 기자로 일한 데 뒤이어,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혁명 이론과 전술을 본격적으로 연수할 기회를 가졌다.

 

다시 김철수 노인의 회고담에 주목해보자. 그는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노라 말했다. 도대체 소비에트러시아로 망명한 홍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홍도의 러시아 망명 사실은 조선 국내의 지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1932년 3월 서울에서 간행된 월간지 <동광>에는 망명자 홍도의 안부를 묻는 기사가 실렸다.

 

“러시아에는 조선의 선배인 이동휘씨도 있거니와, 청년 활동가로서도 상당한 인재가 집중되어 있으니, 필자가 아는 이름만 얼른 열거하여 보면 윤해, 박진순, 주종건, 홍진의(홍도) 등 제씨가 그것이다. …앞으로 세계전쟁이 인다면 그것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소위 세계혁명에 대하여는 일대 호기회일 것이므로, 동양 방면에 대한 재러시아 동포의 활동이 상당히 유력시될 것을 넉넉히 추측할 수 있다.”4

 

적기단 사건으로 3년 복역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홍도. 1927년 8월.

 

기대 속에 러시아 망명, 반혁명 활동 혐의로 체포

 

러시아에 망명한 사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홍진의(홍도)의 이름이 거론됐다. 이들 망명자에게 거는 국내 지인들의 기대는 컸다. 앞으로 자본주의 열강의 모순이 격화돼 세계대전이 도래한다면, 세계적 범위의 혁명적 위기가 고조될 것이다. 러시아는 세계혁명의 참모부를 자임했으므로, 그때는 소비에트러시아에 망명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역할이 강력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렇게 기대하고 있음을 본다.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1935년 12월 홍도가 연해주 포시에트 지구 우스치시디미 마을에 거주할 때였다. 두만강 건너 조선~러시아 국경선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웃 마을 베르흐네시디미에 있는 트랙터정비소 정치부 보조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달 19일 홍도는 비밀경찰 기구인 내무인민위원부 요원들에게 체포됐다. 반혁명 활동 혐의였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 국가폭력이 맹렬하던 때였다. 홍도는 항변이나 해명도 변변히 하지 못한 채 취조를 받았다. 그리하여 체포된 지 11개월 만에 내무인민위원부 처분으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5

 

그 뒤 홍도의 삶에 관한 정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베리아 깊은 곳 케메로보 수용소에서 복역했다는 기록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형기를 무사히 마쳤다면 아마 1940년 12월에는 출옥했을 텐데, 과연 그러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홍도가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는 김철수의 증언은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아마 사실일 것만 같다.

 

그에게 들씌워진 반혁명 혐의는 근거 없는 것이었다. 홍도는 스탈린 사후 소련 정부에 의해 무혐의로 인정받았다. 1955년 10월 범죄구성요건 부재로 판정받아 복권됐다. 그의 조국에서는 훨씬 더 늦게야 명예가 회복됐다.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던 한국 정부는 마침내 해방된 지 61년이 지나서야 태도를 바꿨다. 한국 정부는 2006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 애국장을 수여했다.

 

글·사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지운 김철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년

2. 洪濤(Мальцев), ‘리력서’, 1930년 3월20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384 л.25-26

3. 김영만·김철수, ‘중앙집행위원 명부’ 1928년 2월24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55 л.9

4. ‘國際波瀾에 부대끼는 海外同胞의 安否’, <동광> 제31호, 1932년 3월

5. ‘홍도 Хон До, 말리체프 Мальцев’, <스탈린시대 정치탄압 고려인 희생자들 (인명편2)>,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 제47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601쪽,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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