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봄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나는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총선을 치르느라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그때, 연락이 왔다.

일본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다.

한일관계의 미래 청사진을 논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동안 의원연맹 등의 이름으로 긴밀히 연계하던 한국 정치인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물갈이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식 초청자는 일본 외무성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초청자는 자민당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집권 여당으로서 새로운 차원의 한일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 방문은 유쾌하지 않았다.

하루 대여섯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는 자민당사, 총리 관저 혹은 음식점을 오가며 일본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과 대화했다.

자민당에 있는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을 5~6명씩 그룹을 지어 만나고 대화했다.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며, 동북아 공동번영의 길을 외면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 중국 모두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다”

“한일 FTA와 더불어 한중 FTA 그리고 한일중 공동 FTA로 나아가자. EU에 맞먹는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비전을 그리자”

“한중일의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 공동체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일본의 내부 정치를 위해 북한 문제를 활용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별무소득이었다.

자민당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해 낯설어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과 중국을 배제하고 주변화 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공식적인 일정은 자민당의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일정은 민주당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는 일로 꽉 짰다.

하토야마 대표, 간 나오토 간사장을 비롯해 얼추 열댓 명의 민주당 지도자들과 토론도 했다.

허름한 맥주 집에서, 어떤 의전도 없이 이뤄지는 단촐한 대화였다.


민주당 의원들과의 대화는 좋았다.

함께 나눠 갖고 있는 공동인식은 소중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끼치고 있는 해악에 대해 같이 걱정했다.

 

동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을 현해탄 너머 일본에서 만나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나와 하토야마 대표의 의견은 거의 일치했다.

당시 민주당의 지도자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 우리는 언제 집권할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전해오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우리가 손잡고 일하면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

“다음에는 일본도, 우리도 모두 집권당이 되어 만나자”고 굳은 악수를 나눴다.


5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세계정세는 상당히 변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은 금융위기와 ‘빈익빈 부익부’라는 흉물스러운 본질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제 미국이 추구하고 한국은 물론 일본에게도 강제하였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준비할 시점이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동아시아의 새로운 동반 성장 전략을 본격화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미국 네오콘의 몰락으로 동북아 평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구상도 날개를 펼 수 있는 시절이 찾아왔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은 집권당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민주당이 집권을 했다.

얼마 전까지 공고한 것처럼 보였던 한미일 냉전 삼각동맹 가운데 두 축이 무너진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도 ‘대화할 수 있는 정권’ ‘미래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평화냐? 대결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미국과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두 당 모두 대결적 관계가 아닌 평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와 동아시아 건설을 위한 의사가 있다고 기대하고 싶다.


지금만큼 좋은 시기가 없었다.

한반도와 일본, 미국, 중국이 공동으로 냉전적 관계가 아닌 평화번영의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정권재창출에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생겨 버렸다.


우리의 이러한 부족함과 잘못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경제공동체의 꿈은 결코 미룰 수 없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3년 반만 기다려 달라.

우리는 다시 일어 설 것이다.

이 김근태도 그 일을 위해 다시 온 몸을 불사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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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인에게 직접 고문을 가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용모, 언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아직도 이 고문자들에게 갖고 있는 두려움, 그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겠지요.

그리고 고문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보낸 준 약간의 따스함.

본인에게 너무가 가혹한 고문을 하면서 흘렸던 그 눈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구원의 가냘픈 빛이기조차 했습니다.

이것도 여러가지를 밝히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습니다.

본인이 이 고문자들을 이제는 미워하지 않거나 용서를 했거나 해서는 물론 아닙니다.

아니 용서를 거론하는 것은 명백히 거짓되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항의하고 규탄하고 고발합니다.

이 참혹한 고문행위를 결정하고 지시한 그 사람들, 사실 초점이 여기에 모아지도록하기 위해,

그러고도 철면피하게 감행하는 은폐행위를 조장하는 자들을 규탄하기 위해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시점에 다다른 거 같습니다.

85년 9월 4일 오전 9시경 본인은 남영동 5층 15호실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문을 지휘하고 감행한 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과  과장(일명 사장)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경정        백남은
1과       ?                  경감(?)   고문담당전문가
1과     상무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경장        최상남
1과     부장               경장        박병선

1과     부장               경장           ?

고문의 직접적 지휘는 전무 김수현과 전무 백남은이 담당했으며 앞 사람이 주 신문관이며 뒤 사람이 부 신문관이었습니다.

김수현에게는 구성요건, 특히 국가보안법 구성요건의 그물망 내로 몰아넣고

구속의 근거와 공소제기 및 유지의 증거를 획득해 내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백남은에게는 민주화운동, 특히 재야운동권에 대한 정보를 고문을 통해서 한꺼번에 손쉽게 뽑아내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값싸게 말입니다.

앞에서 장의사집 둘째 주인이라고 언급한 자가 바로 고문기술자로서 건장하고 불량배 냄새가 나는데,

대부분 이 사람이 고문을 직접 감행했습니다.

 

김영두는 대표적으로 고문보조를 했으며 진술조서 작성, 집시법 관계조사 등을 담당했습니다.

나머지는 하수인들로서 고문 보조역할을 담당했고 자술서에 쓸 문장을 본인에게 불러 주는 일, 그리고 방을 지켰던 것입니다.


머리를 쳐박히고서 끌려가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그 날은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본인은 잠이 덜 깬 채로 혼란에 빠져 끌려갔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긴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꿰어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일곱차례의 유치장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금 2년 동안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만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아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뒤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로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거리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의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해지거나 추하게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유행가 곡조가 입속을 맴 돌다 사라지더군요.

 

사방은 껌껌한데 경찰 10명이 둘러싸고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목을 곧추세우고 그래도 하늘 한 번 쳐다보았지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오기를 세워야 했습니다.

잠과 휴식, 그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은 모두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뿌옇게 탈색된 꿈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뒷자서 가운데 올라탔습니다.

왼쪽에서 최상남이, 오른쪽에는 김영두가 앉았습니다.

 

최상남이 점퍼를 벗어 내 머리를 감싸고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 채 머리를 짓누르더군요.

김영두는 키 188cm, 몸무게 95kg쯤 나가는 거한한데 그 체격이 나를 짓눌러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왜소해지고 허망해지던지, 나는 저항을 할까도 행각해 봤지만 허둥지둥 해질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경우에는 반드시 저항을 했고 싸움이 붙었습니다.

늘 그랬거든요. 한번도 맥없이 강제로 끌려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안되더군요.

분위기가 얼마간 다른 것도 있었지만 일단 구류를 살고 나가는 날이어서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간 기가 꺾였습니다.

반쯤 거리를 둔 채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에 대해서 바쁘게 머리를 굴리기도 했구요.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을 세우고 대응 태세를 갖추겠다고 행각하면서 저항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몹시 씁쓰름했습니다.

이것은 패퇴의 보호, 허약함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텐데...하고 말입니다.

이리저리 굴려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그래 부딪치는 거다. 정치군부가 늘 벌여 오던 것이니까 온몸으로 부딪치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을 하고 또다시 다짐했습니다.

30~40여분쯤으로 느껴지더군요.

차에서 내려 점퍼를 덮어쓴 채 건물 입구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비좁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누군가 사방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엘리베이터일 것으로도 생각되었습니다.


박살나 버리는 진술거부권-칠성대 위에 올라가기까지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방으로 끌려갔습니다.

겉으로는 주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니까 덮어씌운 점퍼를 치우더군요.

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연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생기도 없고 시들어버리는 듯하면서도 이 모두가 비현실적으로, 그냥 일정한 거리 밖에 널려져 있는 듯했습니다.

 

협박자들, 아직은 고문자가 아니었던 이 사람들은 그냥 어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듯하더군요.

무슨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더군요.

백남은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 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했으나, 몰려서이기도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구요.

아직 한창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느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거부를 잘한다지, 여기서도 할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습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몸으로 견딜 수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했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이 씹어뱉는 반말 짓거리, 그것이 역시 속을 뒤집어 놨습니다.

지난 2년간 못 들어보다 경멸조 인사에 부아가 솟았습니다.

늘 이 반말 짓거리로부터 왜소해지게 되고 졸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김수현이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하더군요. 거절했습니다.

주춤주춤 밀려서 얼결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비통한 심정이 되더군요.

 

뒤이어 백남은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정말 버틸 거야" 여기서도 진술거부가 통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이에 대해 "끝까지 버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더군요.

그것은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면서도 한편 더욱 공허해지기도 했구요.

하지만 '설마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돼지'라는 무너져가는 듯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세우려는 안간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백남은은 "좋다, 해보자. 우리는 너를 까부술 것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논리적으로 앞뒤 아귀가 맞춰져서 사고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생각이, 장면이 떠오르고 또 중복된 채 다가왔습니다.

필름 한 커트에 여러 장면이 겹쳐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짧은 순간에 정말 수많은 영상이 닥쳐오고 사라지고, 또 다가오고 쉴 새 없이 돌아갔습니다.

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러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요,

 

피카소의 청색지대, 비쩍 마른 악사 그림이 가물거리기도 하더군요.

헐벗고 굶주린 어느 병자일 것 같은 물골로 어정쩡하게 서서 말입니다.

사실 나는 평상시 미사에서 자주 읊조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에

은밀한 거부감을 가지고 무시해 버렸었는데 이 순간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이 협박자들은 넓은 밴드 - 신축성 있는 -로 눈을 가려 버렸습니다.

 

짙은 회색빛으로 앞이 차단당했습니다.

외부의 지시와 명령에 굴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아득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으로 고문을 받았다고 널리 알려진 그 학생들의 절망감과 외로음이 찌르르 핏줄을 울리더군요.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 유태인의 얼굴이 내 형제처럼, 아주 잘 아는 얼굴처럼 클로스 업 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볼 때,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느꼈던 그런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심장을 쿡 찌르는 동통과 더불어 그 유태인들의 눈물이, 아우성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던 그 소경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협박자들의 손에 이끌려 방 한 가운데를 어기적어기적 거리고 나아갔습니다.

방바닥이 쑥 꺼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또 꺼지고 올라오고 했지요.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도 '아주 작은 물방울이 되어 쓰러져 어릴 수는 없을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하는 심정이 되었구요.

그러나 아직 나는 답답했습니다.

이렇게 거꾸러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고문을 정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의 협박일 뿐이다.

그런 빈 협박에 내가 굴복할 줄 아느냐,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속셈을 다시 확인하면서

고문대, 칠성대에 마침내 다다랐습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이름으로 공개된 DJ 대통령의 어느 날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71년 국회의원 선거 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가슴이 칼로 베인 것처럼 아팠다.

지팡이, 절룩거리는 DJ에 대한 무서운 조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증오와 적개심에 번득이는 야유가 몸서리치게 몸을 덮치는 느낌이었다.

 

지금 그 ‘지팡이’는 오히려 그리움과 어떤 의지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정치인이었을 때, 특히 90년대 대선 후보로 나섰을 때, 상당수의 언론은 절룩거리는 김대중 선생을 비웃었다.

그렇게 절룩거리기 때문에 대통령 될 자격이 없다고 궤변을 늘어 놨다.

 

다리를 절게 된 것은, 대선후보 유세기간 도중, 무안에서 덤프 트럭의 기습에 의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직접 실행했거나, 아니면 기획·지시하고 다른 팀이 실행했을 거라는 건 모두가 짐작하는 일이다.

 

무안사건이 있은 지 2년여 후에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선생은 납치당했다.

꽁꽁 묶어서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박정희-이후락-중정 책임자, 주일 한국대사·공사들이 주모자, 주동자, 공범들이었다.

 

1996년 가을 쯤 이었다.

연말에 미국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병원에 가서 수술 받기로 일정이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직감으로 다가왔다.

 

먼저 지금 이대로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 않으시냐고 직접 질문을 드렸다.

“그렇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반대한다.”고 분명하고 강력하게 말씀을 드렸다.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조병옥 박사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병 고치러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그때 국민의 절망과 통곡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시대가 달라져서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둘째, 다리가 불편하신 것은 교통사고를 빙자하여, 살해하려고 했던 추악한 음모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저들은 선생님 절룩거리는 것을 비웃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도덕하고, 적반하장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못 견뎌서 수술하시는 것은 저들에게, 저들의 말도 안 되는 선동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안됩니다. 가시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장애인들이 생각납니다.

장애인들의 90%가 후천성이랍니다.

병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반은 산업재해와 교통사고 때문에 장애가 발생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술 받아서 나아지실 수 있겠지만, 다른 장애인들이 느끼게 될 모종의 ‘거리감’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결국 가시지 않았다.

물론 당신 스스로 결정하신 거지만, 내가 드린 말씀도 경청하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남겨진 일기에서 본 ‘아프다’고 하신 허벅지 관절, 그 구절이 내 가슴을 친다.

혹시 나 때문에 평생 그 허벅지 아픔을 짊어지시고 사신 것은 아닌가?

 

아니 이제 영면하셨기 때문에 그 허벅지의 아픔도 사라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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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소리

인간도살장, 이것은 지나친 표현일지 모릅니다.

누군가가 이를 과장된 것이라고 지적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수긍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누가 지나치게 소녀적이고 감상적인 용어표현이라고 비난한다면 맞서서 핏대를 올리면서 그렇지 않다고 나설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85년 9월 남영동 거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비록 설득력 없고 상투적인 표현일지라도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면 누구나 쉽게 알아듣겠지만 그야말로 가슴으로,

아니 온몸으로 그 고통과 공포에 발가벗긴 채 내던져졌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본인이 이렇게 얘기를 해도 저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어느 별의 우주해적단 악당들의 짓거리와 비슷하구만

하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남영동, 거기서 비명을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직접 고문을 당할 때는 극도로 혼란되어 있어 앞뒤가 뒤바뀌고 중복되어 버려서

어떤 면에서는 제대로 판별을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들었습니다.

그리고 견디지 못해 헛구역질을 해댔습니다.

9월 9일, 그러니까 내가 고문을 받았던 8일과 10일 사이, 그날 나는 하루종일 밤새워 대답하며 쓰고 베끼고 하였는데,

그 날 밤 내내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비명, 그 끔찍한 비명,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그 비명을 들었습니다.

그 비명들은, 사람들이 바뀌면서 계속되는 비명들은 절대로 송곳같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번쩍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돼지기름처럼 끈적끈적하고 비계처럼 미끄덩미끄덩한 것이었습니다.

살가죽에 달아붙은 그 비명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멱이 따진, 흐느껴 대는 낮고 음산한 울려 퍼짐이었습니다.

무슨 슬픔이나 비장한 느낌이 들기는 커녕 속이 완전히 뒤집히고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파고 들어오는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본인은 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비명 소리의 임자같은 운명이거나 더 지독한 처지에 빠져 있었음에도,

솔직히 얘기해서 어떤 종류의 연대의식이나 동정의 마음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이들이 학생들일 것이라는 것을, 더구나 나이가 아직 어린 사람들임이 틀림없다.....

마음속으로나마 위로와 격려의 말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야 한다고, 너무나 편한, 당연한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정말로 그게 안 되었습니다.

혹시 그 비명의 주인공들에게 동정하는 기색이나 비명, 지워질 수 없는 그 비명소리에 괴로워하는 것을

고문자나 신문자들이 발견하고 몰아치지나 않을까 싶어 태연한 척하려고 부단히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들켜서 이를 핑계 삼아 고문하지 않을까 싶어 전전긍긍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이젠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거의 잃어버렸구나 하면서 허탈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고, 할 수 없는 일이고, 오늘밤에는 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할 텐데, 아직 차례가 남은 사람이 많을까

어떨까에 대해 속을 태우면서 조바심을 쳤고 그러다가 날이 훤히 밝았을 때 '후~'하고 숨을 몰아쉬기까지 했습니다.

늠름하게 버티지 못하는 저 비명소리가 듣기싫기도 했고, 울면서 애걸복걸하는 것이 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미웠던 것은 이 구걸하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고문당하는 비명소리를 덮어쒸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크게 틀어놓은 그 라디오 소리,

그 라디오 속에서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남자, 여자 아나운서들의 그 수다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디오 소리 사이사이에 들리는 고문 기술자 - 장의사집 둘째 주인 - 의 고함과 심문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고

비명소리, 라디오 소리는 어쩐지 비현실적이고 무게라고는 하나도 나가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반면에 저 심문자, 고문자의 고함소리는 위엄 그 자체였으며 천근만근의 무게가 나갔습니다.

현실적이며 살아서 펄펄 뛰는 것이라곤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이날 고문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날이 희미하게 밝아옴을 확인하자 나는 버스나 택시운전기사 옆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소녀의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처럼

앞으로도 매일 '오늘도 무사히'가 되기를 빌면서 허리를 곧추세웠습니다.

 

그러면서 '25'시인가, 예전에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전개되었습니다.

인간들에 대한 집단적 파괴. 복수.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조그만 어느 시골에 하늘을 뒤덮으면서 나타난 폭격기는 민가에 새까맣게 폭탄을 투하했습니다.

그 동네는 초토화되고 어린이를 비롯한 남녀노소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 가버렸는데, 그때 영화는 한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떤 집 내부를 비추면서 죽어 넘어진 시체를, 어지럽게 파괴된 가재 도구를 보여주다가 갑자기 그곳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가지,

그것도 화려하고도 때깔 나는 왈츠연주곡을 틀어대는 라디오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때의 분노.절망.허무감이란...,

남영동에서 이날 밤을 새우고 새벽녘이 되었을 때까지 아주 생생하게 그 장면이 되살아났습니다.

분노, 아니 분노할 힘, 그것은 머리를 세우지 못하는, 오직 절망감과 허무함을 동반한 채였던 것입니다.

고문담당 기술자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두어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 고문을 가했던 사람들, 고문담당 기술자를 혹시 무슨 귀신, 악마나 도깨비처럼 연상할 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또 남영동을 본인이 인간도살장이라고 했다 해서 복마전으로 떠올릴 필요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고문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저주받은 무슨 표지가 얼굴에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표정이 일그러졌다거나

눈에 살기가 감도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약간 스스로 큰 체하고 가식적이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짓고자 하지만 이것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고,

별 뚜렷한 구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느 면에서는 똑똑하고 야무지며 또 겸손한 척도 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소, 장난기 어린 미소조차 짓기도 하며 한숨도 쉬는, 어디서나 부딪칠것 같은 그저 그런 경찰관들 중의 한 사람 한사람이었습니다.

결혼한 딸의 생활 걱정, 그 사위가 학생운동 출신 전과자여서 걱정이 된다고 얘기하는 사람조차 있었습니다.

군대 나간 아들에 대한 걱정, 대학진학을 눈앞에 둔 자제를 가진 어버이로서 당연히 부딪치는 조바심,

서민이면 누구나 안게 되는 살림살이 걱정, 박봉에 대한 불평등 종로나 명동의 어느 길거리에서도 부딪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저 끔직하고도 무서운 고문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 동료에게 고문을 가하고도 혼란에 빠지지 않을 지 모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의 저 태연함, 고문을 가하면서 짓는 야릇하고도 냉담한 미소에 질려버렸습니다.

그 철판같은 배짱과 강심장에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러고도 이 사람들이 견딜 수 있을까, 무슨 대단한 비밀이 감춰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만, 자기기만과 강제되는 타인기만의 조작된 제도위에 서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구속 또는 고문을 결정하고 방향을 결정짓고 대상을 선정하여 증오심을 키우고 확대시켜 나가면서

선전을 감행하는 사람이나 그룹은 저 어디 다른 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남영동 사람들은 제시되고 결정된 방향으로 자기들의 직무를, 아니 작업을 추진해 나가면 그뿐입니다.

이들은 예정되고 설정된 모종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단정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불온하고도 불순함,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획득해 내야 합니다.

만들어 내는 것조차 충동질 당하는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리 증오와 타도의 대상으로 본인은 설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미소, 때로 보이는 그 미소 그 자체야 나쁠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오직 표면적인 것일 뿐이고 사실 별 의미가 없으며,

자신들이 기정사실화 해버린 목표를 성취해 나가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밥 먹듯이 인간파괴행위를 저지르고도 '또라이'가 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 동료에게 적대하고 가혹한 고문과 능욕을 가하는 훌륭한 부업제도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인들이 떼를 지어 나치 국가였던 독일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글은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처럼 맹목적이고 잔인했다고 들었고 또 그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였던 독일인들이 자신들과 하등 다름이 없는 인간적 이상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묻혀 있는 병사들의 공동묘지를 방문했을 때의 충격은 참으로 컸다고 했습니다.

그 병사들의 묘비명에 쓰여있는 "여기 그 가족을 사랑했던 누구가 묻혀 있습니다"는 표현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오직 증오와 경멸 외에는 인간 상호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상상했던 이 독일인들이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발견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도화되고 조직된 인간파괴행위, 자기기만과 강제된 타인기만의 사회제도화는 인류를 언제나 맹목적 충동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저 나치나 파시스트 국가의 지나간 옛날 얘기가 아니고, 오늘 개명한 20세기 후반 이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노골적으로 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나 또 몇사람 개인들에게 한정된 문제가 아닌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공권력의 자의적 지배, 야만적 고문으로부터의 자유보호는 지난 수 백 년간 인류의 불요불굴한 노력과 투쟁의 결과였으며,

전 세계 모든 국가 헌법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85년 9월 남영동에서 겪은 저 끔찍한 사건, 그것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빛바랜 어떤 사진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어렸던 시절, 대청마루 윗벽에 걸려있던 사진틀 속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진 같이 누렇게 변색되어 버린 것입니다.

몇 개월 전의 이 사건으로 아직 신체적 휴우증과 흉터가 남아 있는데도

기억이 이렇게 아사무사하게 되는 것이 이상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식의 표면이 이렇게 되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찌보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조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버렸던 그 고통과 공포를 생생하게 머리에,

의식의 표면에 떠올려놓고서는 오늘의 내 생활을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이니까요.

이 상처를 우선 의식의 표면에서 지우려고 안간힘을 써왔던 것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이겠지요.

만일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아마 이을호씨처럼 본인도 지금쯤은 정신병원 어느 구석방에 쳐박혀져서

혼란의 수렁에 빠져 버렸을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적 혼란을 그냥 심리적으로 허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쉽게 몰아세워서는 안됩니다.

감당할 수 없었던 그 고통과 상처, 그로 인한 깊은 심리적 상처 - 어쩌면 죽음의 일부분이거나 그 그림자일지도 모릅니다 - 로부터

탈출은 무엇보다 우선하는 지상명령이니까요.

 

고통, 공포, 강제에 굴복한 자아가 그것을 거부하는 자아의 이 절망적 분열의 타개책은 우선 현실로부터 전면적인 후퇴를 하든지

- 정신착란 속으로 - 아니면 그것을 지워서 중압의 무게를 완화하는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 뿐인 것입니다.

 

본인에게 후자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을호씨와 같이 혼란,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지금도 늘 머리를 옭죄는 두통이 심하고 때로 균형감각에 이상이 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의식의 심층 저 아래에서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상처의 깊어감입니다.

맥을 놓고 멍하니 않아 있는 경우에 그리고 살포시 잠이 들거나 또는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 있을 때 바로 그 때마다

느글느글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남영동의 아픔이 덮쳐 오는 것입니다.

남영동의 그 고통과 공포, 상처는 수많은 필름에 찍혀서 본인의 심층 거기에 간직되어 있고,

조금만 방심하면 활동사진으로 핑핑 돌아가면서 나를 거꾸러뜨리려 엿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정말로 지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발버둥쳤습니다.

고통과 공포의 무게를 줄이려고 말입니다.

 

밤이 늦으면 기차바퀴 소리가 들리고 기적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습니다.

이건 당시 본인에게 큰 위안이었습니다.

 

바깥 세계를 그 기적소리에서, 기차바퀴 소리에서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절망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나를 밖의 세계와 연결시키는 끈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 기적소리는 나를 실어서, 내 영혼을 담아서 어린 시절 행복했던 그 시절로 되돌려 보내주곤 했었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뿐이었습니다.

잠시의 회상에 불과한 것이지요.

 

구멍이 숭숭 뚫린 방음벽 네모진 흰 벽이 그때마다 내 이마를 '탁!' 치면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소스라쳐 놀라면서 나는 더욱 왜소해져갔습니다.

 

이 남영동에 끌려온 이래 쉴 새 없이 작고 왜소해져서, 그곳 시멘트 바닥에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던 나는

짓밟히는 검불처럼 볼품도 무게도 없어져 갔던 것입니다.

어떻게 당해도 좋은, 그래도 마땅한, 마침내 공중으로 사라져 버릴 왜소함 그 자체였습니다.

 


민주주의와 평화의 길, 꿋꿋이 가겠습니다.


이제 분노한다는 표현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가슴 아픈 눈물도 흘릴 수가 없습니다.

 

시청 앞 분향소에서 슬픔에 겨운 시민들을 만나는 일이 이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당신에게 빚을 졌습니다.

 

말씀하실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민주주의!

죽음으로 다시 시작되는 민족화해의 길!

 

온 힘을 다해,
거꾸로 가는 역사를 막아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이루었던 민주세력의 대연합, 정권교체의 역사를 다시 이루어 내겠습니다.

그 길을 변함없이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김대중 대통령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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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2월 12일 총선거에서 정치군부는 국민의 민주화열망에 의해 일대 타격을 받았고,

이후 이른바 유화국면이 전면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치군부의 대응은 바로 이중적 대처였습니다.

얼굴마담의 위치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을 배치하여 대화와 화합을 외치면서

노동자, 청년학생등 민중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탄압을 강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로 나타났습니다.

'학원안정법' 제정기도는 단지 학생운동만이 아니라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을 겨냥한 정치군부의 민중운동탄압음모였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신민당 등 제도정치권은 물론 재야 등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단결하여

민중민주화운동 탄압 저지를 위해 공동대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정치군부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에 대한 범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그것을 철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군부의 탄압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방식으로 탄압이 시작된 것입니다.

민주운동단체의 핵심적 간부들을 구속하여 모든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연계를 막아내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군부는 민청련과 본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본인이 구류를 받고 있을 때라고 기억되는 7월 초,

민청련 상임위원회 김병곤씨와 기독교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씨가 구속되었습니다.

이들은 남영동에서 조사를 받고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가족과 면회를 하게 되자마자 이구동성으로 "근태형 괜찮으냐"고 물었으며

본인을 걱정했다는 말을 가족으로부터 들었습니다.

특히 황인하씨는 기독교 민중운동인사들에게 민청련과 본인을 지원할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구속, 민청련에 대한 탄압, 그것도 아마 대대적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인과 민청련에 대한 조치는 이미 정치적으로 결정된 것이었으며 다만 그 계기, 아니 어떤 꼬투리를 모으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사실 이때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약간의 마음준비를 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좀 비켜서 나갈 수는 없을 것인가' 그렇게 되면 참 좋겠는데....'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본인은 남영동을 하수인으로 하는 추측수사. 예견수사의 명백한 대상으로서, 목표로서 몰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본인의 구속은 시간문제였던 것입니다.

공개 지명수배

이로써 본인에 대한 구속집행이 카운트다운된 것은 공지의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사실 어떻게 할까 망설였습니다.

여하튼 85년 8월 10일 제5차 민청련 총회를 당시 삼엄한 조건 아래에서 무사히 치르고

대표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으며,

무엇보다 당시 전 국민을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던 이른바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의 유보 내지 철회,

즉 새로운 유신시대로 복귀기도 중지를 천만다행으로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학원안정법 제정강행을 밀고나가는 정치군부 앞에 본인은 자신의 안전문제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으며, 그

래서는 안 된다고 채찍질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류조치는 모든 국민에게 일종의 선물, 은혜처럼 다가왔습니다.

사실 이른바 학원안정법은 국민모두에 대한 노골적인 협박이었으며, 국민과 대결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벌써 숨막히는 갑갑함과 긴장, 불안이 몰아쳐 오고 있었는데, 그것을 중지한다니 이건 정말 다행한 일이고 고마운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정치군부는 대단히 유리한 정치적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런 유리한 분위기를 구속 선풍을 일으켜 깨뜨리고 오리혀 자신들에게 부담이 되는 짓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본인은 비교적 느긋할 수 있었고, 더구나 신문에 공공연히 수배를 해 놓고도 사실상 수사기관이 없었기에

'이제 괜찮은 것이다'는 결론조차 내렸던 것입니다.

피신하지 않은 이유

외적 분위기가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고 민주화운동 선상에서 공인으로서의 역할이 이제 어느 정도 축소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속되거나 노골적인 탄압대상으로부터 이제 멀어져 가기 시작할 것이라고 본인은 생각했고,

주변에 있는 동료들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이하게 생각한다'는 충고를 여러 사람한테 들었고,

특히 여러 통로를 통해 '다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끊이지 않게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피신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민주운동단체의 대표였던 사람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뭔가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피신으로 인한 긴장과 불안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며 정말 내키지도 않았습니다.

어려움은 오지 않을 것이며, 설사 온다 하더라도 김병곤씨나 황인하씨 경우처럼 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하고 오히려 마음을 깊게 하는 시기로 삼자는 은밀하면서도 야무진 계획조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본인이 당할 끔찍한 일이 앞에 있는 줄 알았다면, 선택은 너무나 분명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 자신을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저들은 본인을 핀으로 과녁에 고정시켜놓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소리없이 칼날을 갈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언제나 무엇이든지 감행할 채비를 갖추고 노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약간의 냄새가 나는 것으로 단정하고 평상시 키워왔던,

반드시 불온, 불손하고 거대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열망을 확인하는 작업에 돌입한 것입니다.

이 확인 작업을 위해서는 그 무엇을 해도 좋고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전태일 재단》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합니다.

 세상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태일과 그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에 해당하는 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전태일이 ‘전태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했던 절규를 이 사회를 향해,

우리의 양심을 향해 다시 또 다시 끊임없이 주장해 온 이소선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왜 회의와 흔들림이 없었겠습니까.

두려움도 고통도 작지 않았을 거구요.

 

그러나 정말로 이 소선 어머니는 아들 아니 참된 사람으로서 전태일의 외침,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그 말을 놓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태일 재단은 사실상 전태일-이소선 재단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이소선 어머니가 ( ) 괄호 속에 이미 들어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전태일은 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의 비전이고, 우리의 희망인 것입니다.

이른바 비정규직 보호법 소동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미 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직입니다.


직장 안정을 보장하는 것이 정상적인 정치·경제의 도리입니다.

또 이른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도 거꾸로 나갑니다.

100만 명 해고대란설이라든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의 유연성이라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비정규직 기간 제한은 사실상 폐지하자는 얘기입니다.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화하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최대의 노동유연성을 보장할테니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전태일이 역사 속에 갇혀져서는 안되는 상황입니다.


노동하는 사람의 자부심.

노동하는 사람의 아픔과 슬픔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 사회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것을 큰 소리로 강조하고 싶다.

이소선 어머니 그리고 장기표 이사장과 함께 외치고 싶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라고.

 

 

85년 2월 12일 총선 직후 모 정보기관의 간부와 직원으로부터 받은 경고,

그것은 민주화운동에서 본인의 역할에 대해 가해지는 노골적인 협박이었으며

동시에 개인적 차원에서는 우정있는 충고이기도 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민청련이 발행하는 기관지 '민주화의 길'이 학생들 손으로 너무 많이 들어간다.

특히 대학근처에 있는 서점을 통해서 광범위하게 배포되는데, 이것은 우려해야할 일이고 단속하기를 요청한다.
물론 민주화의 길'이 상당히 온건하고 합리적인 내용을 싣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결국 그것이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자극하는 것으로 상부는 판단하고 있으며,

그것을 더욱 굳혀나가고 있으니 곤란한 일이다.

실무자로서 다른 견해를 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이해해 달라.

자신들의 권능밖으로 번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달라.

두번째는 민청련 성명서, 선언문 내용이 점차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다,

창립선언문 비해 근래 나오는 성명서는 곤란할 정도이다.

특히 때때로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 가지만,

이것이 불순세력들에 의해서 이용당할 우려가 있음을 꼭 이기억해 달라.

셋째로 민청련과 본인이 노동문제에 너무 자주 그리고 깊이 개입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것도 곤란한 일이다.

자중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인은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에 답변하였습니다.

"우선 '민주화의 길'이 학생들 손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바 있음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우리도 '길'이 학생들에게 많이 나가는 것에 대해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보는 사람이 많아 점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됨은 알지만 그 때문에 기관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은 끈질기고도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청련 회원의 거의 모두가 과거 학생운동 출신들이기 때문에 당국이 학생운동을 뒤에 조정하고 있지 않는가, 색안경을 쓰고

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 '길'이 그런 연계 및 조정의 끄트머리로 낙인찍히고 단정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고로 받아들이겠다.

그런데 몇가지는 환기시키고자 한다.

'길'의 내용에 대해 우리로서는 책임있게 그리고 실현가능한 관점에서 집필하고 편집한다.

즉 상대적으로 온건하고 합리적이라고 확신한다.

이 점에 대해 당신들은 동의할 것이라고 믿는다.

상부에 잘 납득시켜 달라.

탄압에 대해서 말하겠다.

정치적 탄압을 가해 오면 정말 우리는 그것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

누구도 탄압을 즐거움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오직 고통과 눈물이 있을 것이다.

탄압은 나아가서 국민내부에 또다시 집단적 갈등과 대결이 발행하는 불행을 가져올 텐데 우리 모두 노력하여 회피해야할 것이다.

학생운동 관계에 대해서 말하겠다.

당신들이 말한 대로 민청련 회원은 과거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인으로서, 책임있는 사회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학생운동을 뒤에서 조종하지 않나 하는 감시와 눈초리가 우리들 등 뒤를 따갑게 추적하고 있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이런 당신들의 의심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고자 한다.

이 자리에서 다시 확인하지만 민청련은 운동단체로서 학생운동에 개입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민청련 간부들도 학생운동에 연관되는 어떠한 역할을 절대로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민청련 내부에 엄존하는 누구도 범할 수 없는 금지사항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민청련의 안전을 위해서 정치적 탄압을 최대한 회피하고자 하는 비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그 누구든지 나이가 많고 적건 간에 학생의 신분을 갖게 되면

그 즉시 민청련 회원자격은 박탈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신들도 매우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학교를 따난 지 얼마 안되는 민청련회원으로서 어린 사람들의 경우 평회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혹시 학생운동과 모종의 관계를 갖거나 연루될 지 모르는 것에 대해 우리는 내부에서 '생활인 운동'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경고한다.

그러나 선후배 관계에서 개인적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책임질 일도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우리와 학생운동의 관계를 이렇게 정립한 것은 안전장치로서 방어조치로서 필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니 그보다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서 더욱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운동의 성과에 얹혀서 몇몇사람들의 이름이나 날리는 매명행위를 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래서는 안된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폭을 훨씬 넓혀야 하며, 특히 책임있는 생활인들이 민주화실현에 참여할 때만이 그것은 성취될 수 있다.

그 중요한 디딤돌로서 민청련 운동의 존립근거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대단히 중시한다. 따라서 단순한 의도로 위와 같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해 두고자 한다.

두 번째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 같다는 지적은 오해이며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낮춰 잡거나 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창립시에는 구속을 각오하고 몸을 던지는 상태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대단히 격렬하고 어떤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거칠기조차 했지만,

그 이후 우리는 상대적으로 여유를 갖고 임함에 따라 부드러운표현을 선택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당신들이 글 내용에 대해 한번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셋째로 미국 행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이 불순세력에 의해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말하겠다.

물론 당신들로서는 마땅히 거절할 일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발언이 민주화운동에대한 협박수단으로 매우 빈번하게

그리고 유효하게 사용되었으며 - 특히 저 암울한 유신 긴급조치 시대하에서 - 따라서 신경질적인 거부감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당신들은 때때로 우리들을 향해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하곤 했다.

미국의 인권운동단체나 우리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미국의 양심적 시민세력들과 협력하는 경우 가차없이 우리를 매도하면서도,

정치군부를 지원하는 미국 사람들이나 폭압적인 통치를 묵시적 또는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미행정부의 정책,

고압적인 경제, 무역정책 등에 - 예를 들면 덤핑규제등 - 굴종하는 당신들이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미국 행정부의 오류와 고압적 태도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 당신들은 늘 불순의 올가미를 씌우려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미국의 가치인 인간생명의 존엄성과 자유의 시련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를 위해서 결단하고 분투해 온 미국 시민들을 존경한다.

우리도 그 점에서 일치하여 겸허하게 배우고자 하며 민주화 실현을 통해 우리 사회 내부에도 그것을 확고하게 건설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미국의 행정부가 또는 인종주의적 편견과 우월감에 차 있는 일부 세력이

우리 사회에 지시. 명령하거나 일방적 영향력 행사를 하려 하거나 혹은 근거없는 비난을 하는 경우, 우리는 이를 거부한다.

또 폭압적인 정치군부에 대해 일방적인 두둔을 하거나 결과적으로 우리의 민주화실현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경우,

이 때 우리는 반드시 문제를 제기하여 앞으로도 제기할 것이다.

80년 5월 17일 직후 미국 권력의 고위직에 있던 여러 사람들,

예를 들면 글라이스틴. 위키. 위컴 등의 발언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 내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것은 분명하다.

또 미국 경제. 사회학자들의 발전이론대로 무역입국. 수출제일주의에 입각하여 그 동안 추진해 왔던 우리의 경제성장에

큰 부담과 고통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미국 행정부의 경제적 압력, 그것도 충격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로 접근하고 있는 그것이 아닌가.

이것은 우리 국민 내부에 실제로 큰 경악과 당혹감을 낳고 있음을 당신들도 잘 알 것이다.

우리는 미국과 미국 시민들과 우정과 대등함에 기초한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대해 충심으로 환영하며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바로 이를 위해서 잘못된 영향력 행사나 우리 사회이익의 일방적 희생이나 민주화 실현에 반대하는 정책을 미국이 취할 경우,

우리는 이를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할 것이며 그럼으로써만이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며 우정있는 관계를 건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만이 우리와 미국은 상호존경하는 훌륭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노동문제에 민청련이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몇 가지 말하겠다.

우선 민청련은 정치운동단체가 아니다.

우리는 때때로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정치군부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생활인, 사회인의 운동단체이기 때문에

인권문제나 민생문제를 가장 중심적인 우리의 운동과제로 파악하는 것은 당연하다.

민생문제 중 노동문제. 노동자 생활의 문제가 중요하므로 자연히 연관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또한 다른 민주화운동단체 특히 노동운동단체가 아직 없거나 제 역할을 못하는 시기에 민청련이 창립, 활동해온 것이

당신들 보기에 노동문제에 깊이 개입하는 것으로 보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천 기독교 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로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70년대 민주노조운동지도자, 활동가, 또는 평조합원을 비교적 잘 아는 편이다.

민청련 의장을 하기 바로 직전까지 노동상담 실무역할을 했던 것을 기억해 달라.

인간관계란 금방 단절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 나머지 관계가 줄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 개인적인 노동문제와 연관은 축소되지 않겠는가.

노동문제와 연관 또는 개입을 마치 불순한 것으로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데, 이것은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제발 이러지 말자."

대충 이러한 흐름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경고에 대해 사실상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되었습니다.

직접 말한 내용도 그렇지만 오늘 우리 사회를 파악하는 정치군부의 시각에 대해 우려했던 점이 사실로 나타났으며

본인이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시국강연회서 제안

“李정권 민간독재” 강력 비판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사진)이 9일 이명박 대통령을 강력 비판하며

 ‘국민불복종 운동’을 제안했다.

김 전 의장은 고려대·건국대 총학생회, 대안포럼준비위원회 등 주최로 고려대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검·경,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이 백주에 나서서 힘깨나 쓰고 활개치는 것을 방관·묵인하는 것은 민주주의자의 선택이 아니다.

이런 권력기관에서 요구하는 것은 거부하고 국민불복종 운동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교사 시국선언에 대한 정부의 처벌 방침, MBC 기소, 미네르바 구속, 4대강 정비사업 추진 등을 예로 들며

“국민이 소외되고 무시되는 정치·사회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 대통령을 향해 “아무리 비판하고 호소하고 대안을 제시해도 소용이 없다.

각계각층이 일어나 시국선언을 해도, 조·중·동에 의해 야유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항거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직격했다.

이어 “이 대통령과 기득권 세력, 특권적 수구언론의 결탁은 영락없는 민간독재의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김 전 의장은 그러면서 “우리에겐 새로운 꿈과 비전이 필요하다”며 “제2차 민주대연합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는 “우리는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라는 깃발을 들고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싸워 이겼다”면서

“이제 ‘민주적 시장경제를 국민의 힘으로’ 또는 ‘진짜 민주주의를 국민의 품으로’라는 깃발을 들자”고 강조했다.

<안홍욱기자 ah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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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강연문 전문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와 한국 사회


약간 복잡한 느낌을 갖고 오늘 이곳 ‘민족’ 고대에 왔다.

전에는 ‘특권’ 고대가 아니라 민족고대라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막걸리를 마시는 분위기가 너무 멋졌다.

너무 낭만적이었다.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이 생각난다.

이곳 고대 캠퍼스 건너편 종암동에 있던 서울대 상과대학에 다녔었다.

100명에서 150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했다.

가끔 고대생 1000명이 스크럼을 짜고, 우리 학교를 밀고 들어와 운동장을 돌았다.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힘도 났지만, 부럽기도 했고 샘이 나기도 했다. 그러니까 벌써 40여 년 전의 일이다.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부터 22년,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는 거의 30년, 4.19 혁명으로부터는 50년이 지났다.

우리는 6.25 한국전쟁의 살육과 폐허 위에서 7년이 지나자 민주화 투쟁을 본격화했다.

 우리는 수많은 좌절과 슬픔, 희생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깃발을 향해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이 21세기에 민주주의를 걱정하기 위해 우리는 여기에 모였다.

도대체 이 민주주의의 위기는 왜, 어디서 온 것인지 얘기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여기에 이렇게 모였다.

 솔직히 말하면 당혹스럽고, 황당하고 슬프다. 물론 분노도 같이 느낀다.

 
 내일은 노무현 대통령 49제다.

노무현 대통령을 땅에 묻고 작은 비석을 하나 세운다.

우리는 슬퍼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오랫동안 미안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혹시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나는 여러분을 기대한다.

나는 청년학생 여러분을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덥고 짜증나는 이 여름에 만사 제치고 여기로 왔다.

여러분은 88만원 세대의 후배세대로서, 아무리 무한경쟁을 해도 적절하고 괜찮은 일자리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게 공급이 수요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청년실업자가 쏟아지는데

모든 것이 “능력없는” 자신의 탓이라고 한탄하게 만드는 이 시대와 세태에 대해서 여러분은 “아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

아니 그동안 민주주의는 공기나 물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어쩌다가 민주주의 위기를 말하기 위해서 당혹스러워 하면서 여기에 모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희망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다시 민주주의의 희망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렇게 귀중하지만 아직 취약한 민주주의를, 꽉 막히고 탐욕스런 기득권 세력에게 그만 넘겨주고 만 우리의 무책임과 무능력을 뒤돌아보고,

반성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1. 오늘 우리 한국 민주주의는 명백하게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만 1년 전, 유모차를 밀면서 촛불집회에 찾아왔던, 젊은 엄마 43명에 대해 경찰은 소환장을 발부했다.

꼭 1년 전 일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들쑤시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대해 유족과 국민에게 사과하라고,

정국기조를 전환하라고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초·중·고등학교 교사 16,000명을 전원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교육부 내부 검토로 처벌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도, 청와대가 움직이니까 칼을 빼든 것이다.

또 현 정권과 가까운 교총이 성명서을 발표한 것은 그냥 넘어가고,

또 전체 교수들 중 도대체 몇 퍼센트냐 하면서 시비를 걸었던 시국선언한 교수들은 그냥 두면서,

권력자들 보기에 만만한 교사들만 징계하고 처벌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정상이 아니고, 위기인 것이다.


  또 있다.

MBC PD수첩 수사를 봐라. 담당 부장검사가 수사와 기소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다.

방영된지 1년이 지난 다음, 작가 개인의 이메일을 압수수색해서 거기서 개인 심정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앞 뒤 자르고, 짜깁기해서 범죄의 증거능력이 있는 것으로 발표하는 것은 한마디로 정신 나간 짓이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서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PD와 작가가 기소되었다는 이유로,

MBC 경영진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른바 무죄추정원칙을 사납게 짓밟아 버린 것이다.

그 난리를 펴고 미네르바는 구속되었다.

하지만 검찰은 무죄를 받은 것은 기억하지 않는 듯하다.

러고도 사과 한마디도 없는 이명박 정부에 정나미가 떨어진 미네르바는 이제 “이민을 가고 싶다”고 절규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또 있다.

국민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여전히 대운하는 맞는 사업이라고 하면서 다만 자신의 임기 중에

낙동강과 한강을 변경하지는 않겠다고 하는데서 지독한 앨리트주의의 모습이 번득이고 있다.

대운하 마지막 연결을 자신이 하지 않겠지만, 그 이전의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국민에 대한 일종의 도발을 선언하고, 감행하고 있다.

이것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는 교묘한 말장난이다.

자신이 ‘대운하‘라는 말은 양보할 테니까 실제 내용인 대운하 추진은국민이 양보하라는 것이다.

환경악화도 문제지만, 22조 아니 여기에 플러스α만큼 드는 비용은 몽땅 국민이 부담하게 되어 있다.


 이 정도면 그 가부를 국민투표에 부쳐야 마땅하다.

러나 질게 뻔한 것이어서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투표의 국자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소외되고, 무시되는 정치, 그런 사회는 이미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2. 이명박 대통령과 기득권 세력, 특권적 수구언론의 결탁은 영락없는 민간독재의 모습이다.

 

  그동안 우리가 민간독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딱 부러지게 규정하는 것을 주저했던 이유는

1년 반 전에 국민의 직접 선거로 당선시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론이나 우리 생활공간에서 대통령을 상당한 정도로 비판,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만사가 지나가고 있다.

잘못된 방향, 국민을 분열시키는 빈익빈 부익부 수많은 정책들, 진정성 없는 말과 수사들이 쌓여 정당성을 결정적으로 훼손시켰다.

그것이 이제 정통성에 대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용산참사는 국민의 생명을 빼앗아간 작은 광주학살이다.

그런데도 사과와 위로는 없다.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농성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도시테러리스트라는 딱지를 부쳤다.

감옥에 집어넣어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그 수사기록 2,500여 쪽은 피고인과 변호사들에게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경찰은 사람이 여섯 명이나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 건물모형을 갖고 아무 후회와 잘못도 없다는 듯이 공개적으로 진압훈련을 하고 있다.

 

 여러분, 이것이 민주사회인가, 이것이 공익의 대변자 검찰이고, 이것이 민중의 지팡이 경찰인가.

국민을 분열시키는 부자감세로 말미암아 올해 세수 감소만 12조이고, 2012년까지 대략 89조원이 된다고 추정하고 있다.

여기에다 건설재벌 돈벌이 시켜주는 ‘4대강 죽이기‘ 사업의 22조+α는 몽땅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임기 중에 재정파탄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외국의 투자가, 투기꾼들에 걸려들 가능성이 높은 이명박 정부로서는

그들의 이익추구를 위한 ‘과장’과 선동에 대해 속수무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럴 때 이들은 선진화라는 명분으로 온갖 공기업을 헐값으로 국외와 국내에 팔아넘길 가능성이 있다.

이런 처참한 상황을 막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적 위기나 고비에서는 늘 할머니를 찾아 나선다.

후보시절엔 욕쟁이 할머니를 만났다.

작년 촛불시위 뒤에는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아주머니를 만나 목도리를 매어 주었다.

또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와 조문정국의 긴장 뒤에는 이문동 떡볶이 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문동 재래시장을 방문했을 때 언론이 보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상인이 ‘대기업이 주도하는 슈퍼 슈퍼마켓이 골목골목을 밀고 들어오고 있다.

때문에 중소 슈퍼가게 다 죽는다’고 하자 이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해오던 대로 해서는 안된다. 인터넷 몰 같은 것을 시도해 봐야 한다.”

그리고 다른 자리에서 “규제해봐야 헌재가 위헌 판결을 내릴 것이다” 라며 헛수고일 뿐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믿기가 싫지만 사실일 것이다.

시장이 모든 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시장 만능주의가 다시 한 번 그러난 것이다.

그것이 이대통령의 경제철학이다.

 

 비정규직보호법을 이야기 하면서, 이대통령은 또 다시 비서민적 철학을 드러냈다.

비정규직 종사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보호할까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느닷없이 노동의 유연성이 중요하다고 훈시조로 이야기 했다.

그것은 비정규직보호법을 사실상 폐기 하라는 말이었다.

 

이러고도 국민의 대립과 갈등을 막을 수 있을까?

이러고도 친 서민 행보니 중도실용이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모순된 것이다.

이러한 서민행보는 속과 겉이 다른 진실성없는 연기일 뿐이다.

 

 그러나 문제가 심각한 것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부시처럼 자신의 철학, 자신의 정책이 맞다고,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아무리 비판하고 호소하고 또 대안을 제시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각계각층이 일어나 시국선언을 해도, 표적 정치보복으로 위협하고,

조중동에 의해 야유받던 노무현대통령이 죽음으로 항거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정말 소통이 안된다.

그래서 불통 1위인 것이다.

 

이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물론 다른 존재, 그리고 그 존재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반대인 것이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짓누르고 있다.

이것은 국민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것은 국민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3.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국민불복종운동을 제안한다.

 

 한 달 전, 저는 이대통령에게 보내는 긴급호소문을 작성했다.

그 호소문에서 노대통령 서거에 대한 사과와 국정기조 전환을 요구했다.

요구대로 안 될 수도 있지만, 이대통령에게 자신과 의견이, 이해관계가,

철학이 다른 국민이 다수 또는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을 현실로, 정치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대화하고 타협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가 되고 있다.

신에 이익되는 것은 법을 지키라고 하고,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비정규직보호법은 지키기 않으려고 한다.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는 100만 해고 대란설을 퍼뜨리고, 공기업에서 서둘러 해고하는 이 가증스런 모습에 나는 지독한 배반감을 느낀다.

비정규직 종사자들에 대한 직업안정성을 말 그대로 보호하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다.

앞에서는 제법 걱정하는 듯한, 하지만 뒤에서는 삿대질하면서 연극놀음을 하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다.


 내 감각으로는 국민이 크게 분열되었기 때문에, 정치도 정책추진도 그 무엇도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정규직보호법, 미디어관계법, 그리고 4대강 살리기를 놓고 국민투표를 부쳐야 이 난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거기에 신임여부를 걸 것이냐는 전적으로 이대통령의 몫이다.

 

나는 주장한다. 검‧경‧국정원‧국세청‧감사원이 백주에 나서서

힘깨나 쓰고 활개 치는 것을 방관하거나 묵인하는 것은 민주주의자의 선택이 아니다.

이런 권력기관에서 요구하는 것은 거부하고 국민불복종 운동을 제안한다.

먼저 할 수 있는 사람부터 결단하라.

무엇이 국민불복종운동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효과적인지 여러분이 지혜를 모아 주시기 바란다.


4. 우리에겐 새로운 꿈,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가 우리의 새로운 목표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을 국민의 손으로’라는 깃발은 실현되었지만 그것이 경제적, 사회적 민주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결국 지난 10년을 거치면서 그 누구라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낙관과 안심,

더불어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참여는 잠시 유보하자는 강요와 동의가 광범위해졌다.

그 결과,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지독한 양극화,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경쟁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적 시장경제’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실제적인 정치 참여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민주적 시장경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북유럽형 민주적 시장경제는 양극화를 줄이면서 경제성장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경제 사회 시스템이다.

패자부활전이 보장될 수 있다.

권력이 이미 시장에 넘어가 버렸다는 개탄은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 한탄이 나오지 않도록 민주적 시장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세워낼 수 있다.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에는 우리의 잘못은 전혀 없다.

그런데도 많은 부담과 비용을 지불하고 말았다.

그러고도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이른바 투자자와 투기꾼들에게 애걸복걸했다.

그러면서 초조와 불안에 시달렸다.

G-20에 끼는 영광은 누렸지만, 사태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이 국제 경제 시스템을 개선하고,

그 폐해를 극복하려고 하는지 의지도 없고 열정도 없어 보인다.

 정부당국이 국제투기꾼들의 부당한 이익 추구를 통제하고, 감시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토빈세 도입이나 공정한 국제금융감독기구를 설립해야 한다.

그리고 중장기적으로 달러와 함께 IMF SDR(국제통화기금 특별인출권)을 세계화폐로 사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

미국과 세계 경제기구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120% 개방했던 아이슬란드, 아일란드, 두바이가 망하지 않았는가?

 

 이들 못지않게 개방했고, 더욱이 ‘부시적인 미국’을 닮아가지 못해서 몸부림 치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대한민국을 재정위기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 ‘국제투기꾼’들의 과장된 선동으로 또 다른 성격의 IMF 위기에 다시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것을 막아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맞서 싸워 나갈 수 있어야 한다.


5. 새로운 제 2차 민주대연합 결성을 제안한다.

 

 우리는 ‘대통령은 국민의 손으로’라는 깃발을 들고,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싸워 이겼다.

그 때 국민운동본부가 있었다.

민주세력의 분열로 우리는 낙담하고 좌절했지만 국민과 역사는 의연히 다시 일어나 정권교체를 이루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 새로운 깃발을 들어야 한다.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더 높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적 시장경제를 국민의 힘으로’ 또는 ‘진짜 민주주의를 국민의 품으로’라는 깃발을 들자.

그리고 각종 조직의 대표와 개인적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제2의 민주대연합을 만들자.

 

 원칙은 분명하다.

연대와 협력이다.

여러 시민사회와 종교 지도자, 민주당, 민노당과 진보신당, 민노총과 전교조 등 모든 민주세력이 연대하고 협력해야 한다.

 

방침도 분명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강부자들과 함께 고통분담을 수락하고 국민을 더 이상 편 가르기로 분열키시지 않고 국민통합으로 나아갈 때까지

국민과 더불어 전심전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새로운 제2차 민주대연합은 경제적 민주화, 사회적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민생·민주 요구로부터 비롯된 투쟁현장, 광장에서 시작될 것이다.


청년 학생 여러분,

 

여러분이 새로운 민주대연합, 2차 민주대연합의 선발대가 되어 달라.

오늘이 그 출발선이 될 수 있도록 결심하는 날이 되도록 해달라.

그래서 여러분이 우리의 민주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를 실현하는 전위대가 되어달라. 희망이 되어 달라.

 

 청년 학생 여러분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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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부엉이바위로 내몰아서는 안됩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고 노무현 대통령님의 영전에 500만 명이 조문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인의 영정에 절하며 속울음을 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500만 명이 모두 고인의 열렬한 지지자라서 그랬을까요?

 

저는 국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에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임 대통령조차 정치보복의 대상이 되어버린 극단적인 상황,

조·중·동과 검찰에게 참을 수 없는 조롱과 야유를 받아야 했던 사람,

투신 말고 다른 탈출구를 선택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 사람,

이런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에서 서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겁니다.


끊임없이 구조조정과 해고의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

일자리는 없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조차 몽땅 비정규직인 상황,

국민의 80%가 생존 자체를 위협 받고 ‘실패자’로 매도되는 상황.

이런 상황에 내몰린 국민의 처지와

노무현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러웠고, 고인의 영전에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린 겁니다.

이런 국민의 마음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부엉이바위에 선 노무현 대통령님의 짙은 외로움이 바로 국민의 마음입니다.

그 외로움을 대통령님께서 부둥켜안으셔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아시는 것처럼 저는 이명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고, 정치철학도 매우 다릅니다.

살아 온 길도 물론 다릅니다.

 

지난 번 대통령 선거 때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명박 후보를 반대했고,

당신이 당선된다면 국민에게 불행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으로는 당신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마음으로부터 님을 대통령으로 인정한 것은

국민의 선택이 민주주의의 최종판결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정권교체를 두 번 이뤄야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최장집 교수의 충고,

‘한나라당 후보는 절대 안된다는 건 자기중심적’이라는  어느 서울대 전 총장의 충고,

선거 결과를 부정할 때 예견되는 혼돈적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지난 촛불집회 때 ‘국민을 섬기겠다’ ‘여러 생각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은 촛불이 꺼지는 순간, 돌변했습니다.

 

약속을 저버리고 검찰·경찰과 조·중·동을 동원해 국민의 입을 막았습니다.

저는 그런 대통령님의 비겁한 모습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은 ‘민간독재정권’이다”

“독재정권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님께서는 이런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경찰력과 수구언론의 힘으로 촛불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그때 끈 촛불을 국민들의 가슴 속에 다시 피워 올렸습니다.

이번에는 이 촛불을 어떻게 끄실 생각이십니까?



대통령님 주위에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청와대, 한나라당, 조·중·동 등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할 것입니다.

 

“여기서 밀리면 다 죽는다”

“그나마 있는 지지 세력도 사라지고, 이명박식 개혁의 동력이 사라진다”

“물러서는 것은 곧 정치적 죽음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대통령님께서는 다시 공권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대한문 앞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분향을 막았습니다.

시청 앞 서울광장을 경찰차로 봉쇄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진심으로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또다시 공안정국을 조성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생깁니다.

갈등과 대립, 투쟁이 광범위하게 시작될 것입니다.


민주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호소합니다.

대통령님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권입니다.

과거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독재와는 다른 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통령님께서 국민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공안통치의 유혹에 빠지면 무서운 재난이 우리를 덮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두렵습니다.


공안통치의 유혹을 떨쳐버리십시오.

이건 중도실용주의도 아닙니다.

 

지금 결단은 오직 이 대통령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이 대통령님 자신을 위해 결단해 주시길 호소합니다.


우리국민 모두가 그것을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유족과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대한문을 비롯해서 서울광장 등 그 어느곳에서든 추모분향이나 추모집회를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이른바 미디어 관련법 등 다수의 힘으로 관철시키려는 이른바 MB법들이 국민의 합의로 처리되도록 결단하여 주십시오.

더 이상 탐욕스런 조·중·동에 휘둘려서는 안 됩니다.


너무나 외로웠던 노무현 대통령의 마음,

너무나 서러운 국민들의 마음을 이명박 대통령께서 받아주셔야 합니다.

 

국민을 또다시 부엉이바위로 내몰아서는 안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9년 6월 2일

김근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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