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2000년대를 맞아 한 개인의 부하(負荷)로만 환원되기 어려운 역사의 책무를 감내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 천년이 열리고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전과 냉전으로 반세기 이상 대치ㆍ대결해온 남북이 정상회담을 통해 6ㆍ15선언을 채택하는 등 화해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여전히 원초적인 대결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수구정치세력과 정치권력화된 수구신문은 진보개혁진영을 적대시하였다. 그런가하면 IMF극복과정에서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구조는 빈부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노동자들은 실업과 극심한 생활고에 내몰렸다. 개혁세력이라는 집권 민주당은 여전히 20세기적 파당과 패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김근태의 대선경선 준비는 오래 전부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변형윤ㆍ고은 등 재야 인사와 당내에서는 이재정ㆍ장영달ㆍ임종석ㆍ이창복ㆍ김태홍ㆍ신기남 의원 등 쇄신파 의원 10여 명이 도왔다.

그는 우선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현장에서 살피기 위해 1999년 4월 14일부터 10일간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과거 여느 대권 주자들처럼 미국 조야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 정부지도자회의’ 한국대표로 초청된 것이다.

당시 김근태는 국민회의 전자정부구현정책기획단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방미 중 시애틀에서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와 점심을 함께하면서 전자정부구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방안 등에 의견을 나누었다.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동북아 정세와 남북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워싱턴에서는 한반도 핵대사를 지낸 로버트 갈루치 조지 워싱턴대 교수와 만나 ‘21세기 한반도문제’를 논의하였다.

김근태의 체미 기간 활동은 과거 어느 정치인보다 활발했다. 그의 위상에 따른 결과였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고, 특히 국민회의와 소원한 편인 미국 공화당쪽 인사들과도 폭넓게 만났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엘 고어 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앤드루 쿠오모 주택개발부장관 등과도 만나 양국의 현안을 심도 있게 나누었다. LA에서는 UCLA와 USC에서 강의하고 코리아 엑스포 개막식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김근태는 2001년 1월에 다시 미국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아들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정부 대표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1월 17일부터 10박 11일간 방미하게 되었다. 다른 대선 주자들이 자신의 후원회 참석 등에 비중을 둔데 비해 그는 워싱턴 에틀란틱 카운슬과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안보문제에 대해 강연하고, 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 공화당 행정부 출신 데이비드 드눈 교수, 컬럼비아 대학 레온 시걸박사 등을 차례로 만나 한국의 대북 정책방향 등을 설명했다.

또 데이비드 웅거 <뉴욕타임즈> 논설위원,
칼럼니스트인 플레리트 교수와 만나 미국 언론이 대북포용 정책을 지지하도록 촉구했다. 미주에서는 1997년에 변호사ㆍ종교인ㆍ미디어 전문가ㆍ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김근태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 방문길에서 김근태는 모든 일정을 영사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후원회의 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후원회 간부들은 민주ㆍ공화 양당의 뉴저지주 지사 후보가 앞다투어 김근태를 면담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뿌듯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후 미주지부 후원회는 한반도재단의 미주지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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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실린 사진들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강남 압구정에 위치한 갤러리 '눈(NOON)'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사진들로써
정해창 선생님의 1930년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사진 입니다.
당시 유리원판에 담긴 영상들을 구본창 선생님의 프린트 재현으로 볼 수 있었는데....
몇 점 안되는 작품이었지만 우리나라 사진史에 아주 희귀한 회고전으로 기록 되고 있습니다..
사라진 우리의 잔잔한 모습이어서 더욱 그러하고...

이 사진들의 시대적 배경은 1800년대 후반으로 짐작되는데 한국적인 토속미가 철철 흐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보다 한층 여유로운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원작자가 별다른 설명을 해두지 않아 각각의 사진이 어느 지역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시대 생활상을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유재 정해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풍경사진전(총 4회)을 개최한 분 입니다.
이화여대 동양미술사 교수역임과 사진예술 강의도 했다는데...
이러한 사진전을 통해 옛 시절로의 회귀하는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1929년 3월 28일자 조선일보는
최초의 사진 전람회인 정해창 예술사진전람회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년간 사진술을 연구하여 영리를 떠나서 예술사진을 제작하는 정해창씨는
그동안 박힌 자신닜는 사진 오십여점을 가지고 리제창씨외 여러 우인들의 후원으로
작품 전람회를 오는 29 일부터 시내 광화문 빌딩에서 개최한다는데
조선사람으로 예술사진 전람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요,
작품중에는 훌륭한 풍경화가 많다더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한국사단의 지보(至寶)

정해창은 학처럼 단아하고 기품있게 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세상의 엄청난
지각변동속에서도 한없이 자아를 성찰하고, 내면세계를 다지면서 초연한 삶을
살았었다. 우리나라가 온통 외래문화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사진을 통해서 진정 우리의 체질에 맞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실험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가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놓은 얼마간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머리를 통해 단순한 감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이 아닌 가슴
깊숙한곳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머금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가슴벅찬 감동이 밀려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의 사진은 인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위대한 사진가로
평가받는 경우라도 외국작가들의 사진에서는 어딘지 낯설고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감수성이나 미적감각이 그네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정해창의 사진은 현대사진에서 보여지는
형식과 색채의 현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려 더 강한 미적충격을
전해준다. 그가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 풍경, 오브제 등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대상을
사진으로 전환시키는데 있어 그가 사용한 모든 방법들과 시작(보는 방법)이 매우
독특한것이었고 또 한장 한장의 사진에 웅축되어 나타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이웃집 아낙네 오브제의 배치를 통한 상상력의 구현이라는 동떨어진
세계를 오가면서 그가 만든 사진들은 한국적인 미의 표현이 단순한 소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가의 미에 대한 의식과 이를 현실화시키는 능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예술사진 또는 예술로서의 사진이 다른 사회적 기능들과
더불어 사진의 한 분야로 존재했고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정해창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 가능성을 실현한 사진가로 손꼽힐 수 있다. 그
까닭은 예술에 대한 판단기준이나 사회적 요구가 시대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할
지라도 보다 근본적인 미적 충동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갖는 가치의
영속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사진은
사라져버린 전통 미의식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유로 정해창은 확실히 한국사진계의 보물로 여겨질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1966년에 나온 한 잡지의 글을 빌면 '사진가이며
사진이론가인 유재 정해창씨는 한국사단의 지보(至寶)'였다.


특이한 지적배경을 가진 사진가

정해창은 한국의 사진가로서는 보기드문 지적 배경과 수준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기 직전인 1907년 3월 서울 종로4가에서 출생한
정해창은 자를 하연(何涎), 호를 유재(悠哉)라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1922년 서울에서 보성중학을 수료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외국어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일본유학시절 어학을
공부하면서도 미술과 사진 등 시작예술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던 그는 동경의
전단화회(川端畵會)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으며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학을 연구하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사진의 추기시대,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이 사진의 질을 결정하기도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인화지
제조기술이나 특수인화법 등 화학에 관련된 사진의 문제를 연구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정해창이 사진가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정해창은 동양철학과 고고학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후일 그가 대학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고, 동양 미술과
고고학의 권위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어와 동양학을 연구하는 사이에 사진술을
습득한 것은 순전히 독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사진을 살펴보면 그가 공부했던 동양미술의 영향을 깊히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온 정해창은 종로의 본가에 근거를 두고
사진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그가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상업성에 목적을 둔초기의
영업사진시대가 지나고 순수한 표현방법으로서의 예술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해창이 자신의 전공과 별 관계가 없어보디는 사진작업에 매달린 것은 당시의
이러한 부누이기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도 믿어진다.
1929년 3월 정해창은 광화문에 있는 광화문빌딩2층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개인사진전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관객들의 호응도가 상당히
높았고 언론들의 반응 또한 꽤 컸던 것같다. 그 이후로 정해창은 대구, 광주,
진주 등을 도는 지방순회전시를 비롯해서 1939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전람회에 이르기가지 4회의 개인 전람회를 열었으며,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예술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그는 당시에 크게 유행했고, 사진가라면 누구나 참가했던 공모전 또는
콘테스트 등에 한번도 사진을 출품한일이 없었을 만큼 자신의 사진에 자신 감을
가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나 4번째 전람회를 끝으로 사진작업을 그 만두었다.
그는 말하기를"사진은 회화일 수 없었고 기계나 재료를 시험 검토해야하며
게다가 매일 촬영을 다녀야 함이 너무 바쁘고 벅차서 충분한 예술적 구상을 가질
시간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에" 중지했다고 한다. 사진작업에 전 시간을 바칠수
없는 개인적인 상황이 그늘 짓눌렀을 것이다.
정해창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가식적으 로
사진을 계속하고 허명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 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정해창의 네번째 전람회가 끝난 직후인 1940년 대부터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어 사진재료가 거의 고갈 되었다는 사실도 그가
사진작업을 중지한 이유의 하나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그는 대학에서 동양미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화여자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 했고(이때 그 학교에서 사진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양으로 사진예술을 강의했다고 한다.)6.25전쟁 후
덕성여대로 자리를 옮겨 동양미술사를 담당했었다. 1960년 우연히 다리를 다쳐
집안에 칩거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한국의 전통문화재(불상, 불화, 석등, 석탑,
사찰 등)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이때 그가 집필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한국
석비의 양식'이 있다. 이처럼 정해창은 사진작업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나
꾸준히 한국적인 미를 탐구했다.
그는 사진외에도 서예나 조각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1941년과 51년 두차례에
걸쳐 서예 개인전람회를 열었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사인(私印)도
조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학자적 기질과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가졌던
정해창은 한국사진의 큰 흔적을 남기고 1968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사진은 전쟁과 화재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현재 약
200여장의 유리원판이 남아서 우리에게 그의 사진계를 전해주고 있다.


잊혀진 미의식의 원형

정해창의 사진은 한마디로 '소박하고 평온한 한국미의 형상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미적감수성을 시각화했으며, 그 미적 감수성은
어느 외래 문화에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순수한 한국미의 원형이 그의 사진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세계각국의 예술작품을 보면 문화적 전통과 가치가
풍부한 나라일수록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의 경우도 그것이 만들어지기는 똑같지만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고 소화하는 사진가들의 의식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많은
차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앗제의 사진은 파리를 주로 찍어서가 아니라 그가
파리를 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지극히 프랑스 사람다운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생명 력을 유지하고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현대사진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도 그들의 사진이 독특한 일본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진기 뒤에는
항상 사진가가 서 있으며, 사진가의 의식은 자신의 환경과 역사적 경과를 통해
규정되고, 그 의식이 바로 사진으로 귀결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명제이다.
우리가 정해창의 사진을 평가할 때 간과해서 안될 점도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능에 접근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정해창은 고무인화법이나 브롬오일법 등의 특수한 이미지를 인화지에 옮기려는
인상주의 사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인화 제작한 당시의 사진이 소실되어 실제 그러한 사진을
제작했는가의 여부는 판별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선택과
접근방식에서 그의 미의식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가 사용했던
기술적방법은 아니다. 그가 남긴 유리원판들은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5"X7" 사진보다 약간 작은 가로 163mm, 세로 120mm의 크기이며, 일부는 5"X7"의
약 1/3 정도 크기밖엔 안된다. 그리고 그가 인화해서 전람회장에 걸었던
사진들은 대부분 전지나 4절 크기였고, 때로는 전지를 6장 또는 12장씩 연결해서
병풍처럼 만들기도 했다.
또 정해장이 주로 취급한 소재는 인물, 풍경, 인형등이 오브제들로 첫번째
개인전람회 때 전시한 사진들은 정물이나 인물을 찍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풍경사진들이었다.
두번째 전람회는 당시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진행된 지방순회전이었는데 첫회
때의 작품 10점과 인물 등을 찍은 사진 40점이 걸렸다고 한다. 또 세번째
전람회때는 정해창의 인간존재에 대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오브제를 통한
연출사진 50점이 전시되었다. 마지막 사진전람회였던 4회전에는 주로 풍경사진과
한국여인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여성인물사진들이 선보였다.
오늘날의 필름도 아닌 무겁고 감광도가 극히 낮았던 유리 원판을 갖고
작업했었고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했으리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사진에 몰두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정해창의 사진들 중 우리의 시선을 가장 강하게 붙잡아 매는 것은 평범한
여성들의 인물사진이다. 대부분 한복을 차려입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모습은 그네, 부채, 소나무 등과 어울려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하얀 한복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인의 모습(사진1)은 막연하게나마
우리들의 어머니가 젊었을 때 간직했을 고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좋은 사진에서 볼수 있는 풍부한 톤을 없지만, 오히려 톤의
단조로움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며, 김소월이나 조지훈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서정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조지훈이 '승무'에서 그렸던
하얀고깔의 여인을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한국여성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의 원형이 살아숨쉬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은 여인들의 시선이 카메라를 직접
응시하지 않고 사진밖의 어떤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즈넉한 여인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마음은 평온한 세계로 옮겨지면서 진한 여운이 남는다.
당당하지는 않지만 움츠려들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여인들의 모습에서는
생명력 있는 한국여인의 슬기가 발견된다. 단풍나무 아래서 안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사진3)에서 자식을 객지에 내보내고 눈물짓는 어머니의
애뜻한 정이 느껴지는 것은 비약일까.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정해창이 생각한
한국여성의 아름다움이요, 여성을 보는 방식(ways of seeing)이었다.
그가 여성을 보는 방식은 다른 사진가들과 비교 해서 볼 때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우리가 사진에서 흔히보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카메라의 렌즈에 시선을
고정한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사진은 말할것도 없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영업사진이나 현대의 패션사진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델이
되는 여성들의 시선이 결국 사진을 소유한 사람(대부분 남성)의 시선을 향하는
이러한 방식은 서구의 전통에 입각한 전형적인 보는 방법이다. 그것은 물론
서양사회에서 남성에 종속된 여성의 위치와 가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유명한 그의 저서'보는
방법(ways of seeing)'에서 주제로 다뤘고 증명해 낸 사실이 바로 이 문제였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서구의 전통적인 보는 방법이 아무런
비판과 검토도 없이 영업사진의 형태로 그대로 도입되었고, 우리는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소재문제가 아니라 그의 보는
방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정해창의
강한 서정성과 미의식은 일련의 풍경사진에서 잘 나타나다. 그의 풍경사진에서
사물을 관조하면서 유유자적하는 동양화가의 시선이 그대로 배어있다.

글.박주석/사진 비평가,한국사진사연구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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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

012/10/12 08:00 김삼웅

 

 

2006년 7월 10일 오전 영등포 열린우리당 당사에서 열린 상임고문단 회의에서 정대철 상임고문등이 김한길 원내대표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근태는 일관성이 있는 인물이다. 신념과 소신이 정해지면 외압이나 상황에 따라 표변하거나 말을 바꾼 적이 거의 없었다. 민주화운동을 할 때나 정치활동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당내 민주화와 국정 개혁을 위해서는 동교동계의 해체가 무엇보다 긴요하다고 믿었다. 다음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다. 인터뷰어 윤석진 차장은 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낮은 목소리로 ‘은인자중’하던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마침내 투사의 본색을 드러냈다.
이번 당ㆍ정ㆍ청 인사를 계기로 김 최고위원은 당을 무력화시키는 동교동계의 전횡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말한다. 김 최고위원의 이번 투쟁 목표는 동교동계 해체, 지금까지 동교동을 향한 공격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자칫 정치생명을 잃을지도 모를 모험적 투쟁에 김 최고위원이 먼저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들어본다.
(주석 23)

김근태는 “현실적으로 동교동계 해체가 가능하리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답변한다.

가능합니다. 내가 다소 과격하게 발언했는데, 동교동은 현재 민주당의 하나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동교동계가 민주당의 하나회라는 취지보다 동교동의 문제는 대통령께서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보좌해야 하는데, 그 언로를, 눈과 귀를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자기들끼리 비공식 모임과 테이블에서 의논한 것을 사후에 당ㆍ정ㆍ청에서 그런 방식으로 밀고가도록 한다는 것은 당ㆍ정ㆍ청의 책임있는 사람들 전부를 아주 깊은 소외감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이번 인사도 그렇구요. 그래서 내가 그들만의 잔치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중요한 위치에 배치된 사람들이 전부 동교동 사람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동교동 사람들에게 선택되지 않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기가 막힌 현실이죠. 그러니 동교동이 만나는 테이블과 그렇게 해서 의사가 결정되는 체계가 중단돼야죠. 사람들이 그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이 올 수 있어야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참으로 위험한 상황으로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주석 24)

김근태는 그러나 김 대통령이나 동교동계를 비판만 한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가장 앞서 방어에 나섰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 족벌보수신문과 한나라당이 일체가 되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하였다. 대부분의 여당의원들이 침묵할 때 김근태는 노무현 의원과 함께 거대 언론의 횡포에 맞섰다.

 


국세청은 2001년 6월 29일 오전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등 6개 언론사에 대해 탈세혐의로 검찰 고발 방침을 발표했다. 이주성 조사 2국장이 동아일보사 세무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2월 8일부터 중앙 언론사 23곳을 골라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김영삼 정부가 거대 신문사들의 탈세 혐의 등을 잡고도 조사 결과를 공개하지 않고 덮어두었다. 이로 인해 언론계 안팎에서는 오래 전부터 권ㆍ언 유착설이 나돌았다. 국세청 조사결과, 탈루 소득액 1조 3,594억 원과 법인세 등 5,056억 원이 드러났다. 이중 절반 이상이 조ㆍ중ㆍ동에서 나왔다. 증여세와 법인세 탈세, 공금횡령 등의 혐의로 언론사 사주들이 검찰에 고발 당하고 구속되었다. 2006년 6월 대법원은 세금포탈 혐의 등으로 이들에게 징역형(집행유예)과 거액의 벌금 추징을 선고했다.

보수수구 신문들은 유신ㆍ5공을 거치면서 거대 족벌기업으로 성장하고 독재권력과 유착했다. 그리고 민주인사, 민주정권 특히 김대중 정부에는 사사건건 비난하고 헐뜯었다. 세무조사 이후에는 ‘언론탄압’을 내세우며 시시비비 아닌 비비(非非)만을 일삼았다. 여당 소속 의원들은 거대 신문들에 찍힐까봐 몸을 사리고 침묵했다. 김근태는 달랐다. 그는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촉구하며 정치권의 간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000년 12월 8일, 종로 YMCA에서 국세청 앞으로 행진하는 <언론사 세무조사 촉구대회> 참가자들.

 

 

김근태 최고위원은 3일 기자 간담회에서 엄정하고 공정한 검찰수사를 위해 정치권 발언자제를 주장했다.
김 최고위원은 검찰수사에 대해 “국세청 조사보다 갈등을 유발할 수 있고 민감한 사안이다. 엄정하고 공정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영향력 있는 사람의 발언이 절제돼야한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 세무조사를 잘했다는 의견이 70%를 넘지만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의견도 50%가 넘는 점을 지적하며 “현재 국민들의 심리상태를 볼 때 우리사회는 국론분열의 위험성이 있다”며 검찰조사가 엄정하고 공정해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를 통해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얻어야 “검찰도 발전하고 오늘의 상황이 국민들의 공감 위에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날 정대철 최고위원의 ‘사주 구속 신중론ㆍ국정조사 수용’ 발언에 대해 “검찰수사가 종료된 후 국정조사를 검토할 수 있지만 그전까지 정치인의 발언은 사법행정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쳐 공정성과 신뢰성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최고위원은 “검찰 수사 후 사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가 최대의 고비”라며 “정치권에서 코멘트해선 안 된다. 검찰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정치권의 영향력 행사를 거듭 반대했다.

한나라당의 색깔론 공세에 대해 김 최고위원은 “한나라당 주장에 좌절감을 느낀다”며 “어떻게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과 세무조사가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 의심스럽고, 설혹 연결된다고 하더라도 사실적 근거 없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은 “색깔론은 군사독재적 수법”이라며 “색깔론을 통해 지역 분열주의를 자극하고 그에 동조하는 국민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퇴행적이며(야당측 주장인) ‘3김 극복’ 과도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주석 25)


주석
23> <월간중앙>, 2001년 10월호, 146쪽.
24> 앞의 책, 148~149쪽.
25> <내일신문>, 2001년 7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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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11 08:00 김삼웅

 

 

 

2002년 11월 7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김홍일 의원 후원회에는 민주당 동교동계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김근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면전에서 최고 권력자에게 간언은 여간해서 쉽지 않는 것은 고금이 다르지 않다.
지난 해 12월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 최고위원들의 청와대 회동에서 김근태 최고위원은 가장 먼저 발언했다. 그 핵심은 첫째, 당정의 핵심 포스트에 있는 사람들을 교체해야 한다. 둘째, 비공식 보고라인을 제거해야 한다. 셋째, 이러한 일을 늦출 경우 당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맨 마지막에 발언한 정동영 최고위원의 ‘권노갑 퇴진 발언’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을 뿐 김 최고위원의 발언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주석 18)

김근태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 대통령에게 간곡하게 개혁을 주문했다.
“대통령께서는 개혁이 성공해야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개혁이 중단되면 정권재창출은 물론이고 나라가 망하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가서는 개혁이 안 됩니다.” (주석 19)고 간언했다.

김근태는 청와대 회동에서 김대통령과 민주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변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개혁정책을 추진하려면 도덕적 신뢰라는 동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국무총리, 당대표, 비서실장 등 당과 행정부의 핵심인사와 운영방식의 전면적인 교체와 변화를 요구했다. 김근태는 이어서 대통령의 업무량이 너무 많아 격무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혼자서 어떻게 모든 일을 다합니까.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니까 업무량이 과도한 겁니다. 그렇다면 장관이라도 유능해야 하는데 DJP공조로 인재 풀은 적고 그나마 나머지도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등용하니까 일을 맡기고 논의할만한 장관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주석 20)

김근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 대통령과 핵심 측근들에게 개혁을 촉구했다.
반세기만의 정권교체로 수립된 DJ정권이 실패하면 정권재창출도, 민주주의의 발전도 어렵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동교동 실세그룹과 충돌하기 일쑤였다. 김대중이 동교동계 실세인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을 민주당 대표로 지명하자 김근태는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다음은 한 언론의 보도다.

“김근태 최고위원이 재야민주화운동 시절의 투사로 되돌아간 것 같다.”
민주당 김근태 최고위원이 한광옥 대표 지명에 반대하면서 동교동계를 향해 연일 적격탄을 퍼붓자 당내에선 “늦었지만 진짜 투사가 된 것 같다” “요즘 시대에 왠 민주투사냐” “투사로 나선 것은 좋지만 한 발 늦었다” 등 여러 갈래 평가가 나왔다. 재야시절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을 지내며 투옥됐던 김 최고위원은 9월 12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비장한 표정으로 “지난 날 민주화운동 할 때가 생각난다. 김근태가 투쟁하다가 고립되면 국민에게 알려달라”고 말했다.

김 최고위원이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자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 “동교동 해체 주장은 당을 해체하란 말이나 다름 없다”고 반박하면서 양측 갈등이 확산되었다. 당내 뿌리와 한 갈래 줄기 간의 싸움으로 비유되는 양측 대결은 미국의 테러 참사로 일단 잠복했지만 머지않아 다시 표면화할 것으로 보인다.
(주석 21)

 


2003년 2월, 청와대를 떠나 동교동으로 돌아오는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동교동계 인사들.

 

김근태의 ‘민주당개혁론’은 멈추지 않았다.
‘동교동계의 해체’까지 들고나왔다. 김대중이 고난을 받을 때 그와 함께해 온 동교동계가 집권 뒤 기득세력화 하면서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 김근태의 판단이었다.

대통령 임기 중반기에 권력의 핵심에 도전하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차기 대권 후보를 겨냥하는 처지에서 당내 최대 계보인 동교동계와 척지는 일은 정치적 자살골에 속하는 일이었다. 한 언론의 머리 부문이다.

최근 TV 토론회에 참가해 논리적이고 신사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혀 정치인으로서 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는 김근태 최고위원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비논리적이고 목소리만 큰 정치인과는 사뭇 다르다.

김 의원의 팬클럽은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선두주자에서 집권당의 차기 대권후보로 변한 그에게 기대하는 국민의 관심은 크다. 이 시대가 새로운 정치문화와 정치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김 위원은 잘 알고 있다.

지금 김 최고위원은 차기 대권의 중심에 서 있다. 자신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세계화를 잘 알고 있으며 책임감이 있는 정치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김 위원은 사실상 자신의 대선캠프인 한반도포럼의 지부 확장과 지구당원 상대 강연, 지역구민 직접 접촉 등을 통해 대중 속으로 다가가는 활동을 본격화하고 있다.

 


2006년 11월 2일 저녁 김대중 도서관 후원회 행사에서 김대중 전대통령과 참석인사들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최근 김 위원은 당내 특정계보인 ‘동교동계’의 해체를 거듭 공개요구하고 있다.
“당의 공적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위해선 비공식라인이 더 이상 작동돼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동교동계를 거론하며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하나회’가 있었듯이 민주주의 정권에서의 ‘하나회’가 돼선 안 된다”는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국민의 정부 탄생이 그들만의 잔치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독점과 전횡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김 위원은 이같은 상황이 시정되지 않으면 국민의 냉소와 패배주의가 심화되면서 민심 이반이 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주석 22)


주석
18> <대통령이 변해야 산다>, <신동아>, 2001년 7월호, 92쪽.
19> 앞과 같음.
20> 앞의 책, 94쪽.
21>
2001. 9. 27. 1990년.
22> <내외저널>, 2001년 10월호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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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10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대단히 청렴결백한 정치인이다. 그의 집을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은 다들 믿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3선 의원에 장관을 지낸 사람의 집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전세를 맴돌다가 1994년 도봉구 변두리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처음으로 장만했다. 저서 <남영동>과 <우리 가는 이 길은>, <열려진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등의 인세와 친척의 도움으로였다. 이 집은 모처럼 네 식구가 오랫동안 오순도순 살게 되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 집의 단촐한 부엌살림과 가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사람들은 도대체 집이 왜 이렇게 썰렁하게 텅 비어있냐고 놀린다. 집권당의 최고위원 집이라고 하면 외제 가구도 보이고 화장대도 있을법하지만 부인 인재근 여사와 김 의원은 그런 화려함을 한번도 경험하지도 또 원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조금 모이면 얼른 나누고 사는 두 사람, 이런 양심에 많은 사람들이 애정을 주는 것일게다.(…)

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가끔씩은 구멍난 양말을 신고서도 국사에 열심이고, 단벌신사임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넉넉한 모습을 본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노트나 만년필, 그가 소지하고 있는 모든 물건들은 우리 모두가 매일 쓰고 있는 물건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주석 14)

김근태는 국회의원 시절 세비와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는 성금으로 지구당을 관리하고 의정활동을 하였다. 대선 후보경선에 나섰을 때는 ‘GT클럽’이라는 자발적인 정치 후원과 팬클럽이 조직되어, 어느 정도 지원을 받게 되었다. 미약하지만 나름대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분들이 돼지저금통을 모아서 전달해주신 취지는, “김근태 너무 상처 받지 마라, 우리가 있다. 함께 가자” 이런 뜻이라고 본다.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꼭 옛날 군사독재 시절 데모하고 피신할 때 “우리집에 와서 숨어라”고 성원해주던 사람을 만난 것 같아 가슴에서 눈물이 난다. 물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정치자금을 대신할 만한 액수는 못 된다.

나는 정치자금을 정말 투명하게 해야 하고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 대해선 보상이 따르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재정 보조를 중앙당으로 하지 말고 국회의원들한테 해줘서 투명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국고보조를 그만큼 늘리는 매칭펀드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석 15)

정치인이 어느 정도 위상에 올라가면 계보를 거느리고 연구소를 차리고, 사조직을 하다보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그리되면 기업에서는 ‘보험금’이 들어오고, 상임위의 유관 기관에서는 후원금 뿐만 아니라 이런 저런 이권과 거래되기도 한다. ‘떡고물’을 만지다보면 차기와 노후를 위한 축재가 생기고 집이 넓어지면 가구도 차츰 외제로 바뀌게 된다.

김근태는 예외였다. 그는 동료 의원이나 언론인 그리고 유관기관장들과 어울려 골프치거나 고급 요정에 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신체 단련과 운동을 위해 골프를 하라는 주문이 많았지만, 끝내 골프채를 잡지 않았다.

아직 체력도 괜찮고 정신력도 버틸 만하다. “나이가 더 들면 도봉산이 가까우니 산에 오르겠다”고 하면 고등학교 때부터의 친구들이나 대학 때의 친구들은 나를 설득한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는 망설임이 있다. 골프장 건설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고, 골프장에서 뿌려대는 농약이 식수로 흘러들고 있다는 주장이 걸린다. 대중화됐다고는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들이 마음 편하게 골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토요일이나 일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여야 하는 것 또한 내 게으름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주저에 대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있는 어떤 친구들은 거리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내가 민주화운동을 할 때의 그 고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이질감도 느끼는 모양이다. 아니 분명히 말하건대 적대감 같은 것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결정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무거운 스트레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골프가 제일이라는 주장에 대해 나도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중산층ㆍ서민들의 정서와 우리 사회 지도층이 필요로 하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는 없을 것인가. 아직 그때는 오지 않고 있는 것인가. (주석 16)

김근태는 골프 대신 축구를 즐겼다. 새벽에 마을 학교 교정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차는 축구 말이다.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교정을 이리저리 뛰는 것을 즐겨한다. 끝난 뒤에는 ‘선수’들과 어울려 마을 어귀의 해장국집에 들러 푸짐하게 한 그릇을 비운다.

“나는 축구가 사람들이 만든 가장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이른 아침 한 경기를 뛰고 난 뒤, 땀 흐르는 등줄기를 스치는 서늘한 전율이 참으로 좋다.” (주석 17)

김근태의 ‘축구예찬’이다.

 



김근태는 영화도 축구못지 않게 좋아했다. “일상생활에 윤기를 더해주는 영화의 매력”을 즐겼다. 두고 두고 인상 깊었던 영화로는, 독특한 페미니즘 영화인 <안토니아스 라인>, 감동적인 음악영화 <캔사스 시티>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같은 영화다. 젊은 시절에 봤던 <내일을 향해 쏴라>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팅>, 그리고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잊지 못한다. 감동적인 국산영화는 <서편제>,
등이 있다.

형님들과 누님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책과 접하게 되고, 그래서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또 5년 여의 옥살이와 긴 수배 기간에 책을 항상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책은 박경리의 <토지>와 김지하의 <황토>, 김용택의 <섬진강>, 최영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든다.

김근태는 그림도 좋아하였다.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을 특히 좋아하여, 한때 그의 서가에는 복제품이 놓여 있었다.


주석
14> 박영숙, <주한 호주대사관 문화공보실장>, <푸른내일> 21호, 2001년 1월.
15> 김근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인물과 사상>2002년 7월호.
16> 김근태, <김미연과 봉숭아꽃>, <이코너미스트>, 1999년 11월 9일.
17> <내가 좋아하는 것들>, <희망은 힘이 세다>,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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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9 08:00 김삼웅

 

김근태는 몇 해 뒤 경기도 여주교도소에 복역 중인 이근안을 면회하였다.
2005년 음력 설 직전이다. 이 모 전의원의 면회를 갔다가 같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근안을 면회한 것이다. 이근안은 전국 수배령에도 그동안 용케 피신하다가 김근태 고문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 비로소 자수하여, 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여주교도소까지 갔다가 그냥 들어오면 옹졸한 사람, 국민대통합을 주장하면서도 막상 솔선수범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내키지 않았습니다.

내키지 않았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웠습니다.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 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 망설였습니다. 면회를 가야하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교도소 당국을 통해 이근안 씨의 의견을 물어달라고 했습니다. 본인이 동의하면 면회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주석 10)

고뇌하는 김근태의 모습이 역력하다. 감정과 이성,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제, 국민대통합의 슬로건과 끔찍했던 고문의 실상…. 심한 갈등 끝에 마침내 여주교도소로 그를 찾아갔다.

면회실로 들어서는 이근안 씨를 보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여전히 건장했지만 키가 나와 엇비슷했습니다. 고문당하고 욕먹고 그리고 소리 지르던 그때 그곳에서와는 엄청나게 달리….

이게 분명히 현실인데, 안심해도 되는지 약간 불안해지기도 했고…. 악수를 했습니다. 두 손을 잡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왔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눈과 마음은 다른 것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눈감을 때까지 사죄한다고 하고, 한참 있다가 무릎 꿇고 사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마음 속까지 흔쾌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날 받은 고문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개운해하지 않았던 것은 제 머리와 가슴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어떤 질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사죄가 사실일까? 남영동의 책임자였던 박처원 씨의 치사한 배신에 분노하고, 권력에 의해 토사구팽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 저 말속에 짐승처럼 능욕하고 고문했던 과거에 대한 진실한 참회가 과연 있는 것일까? 중형을 받을까봐 충분히 계산해서 나에 대한 고문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시점에서야 비로소 자수했던 저 사람의 저 말에 대해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주석 11)

김근태는 이근안의 면회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자칫 정치인의 쇼맨십으로 오해되는 것이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이 전의원을 면회했던 다른 의원에 의해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게 되고, 한바탕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김근태는 이를 대단히 곤혹스럽게 여겼다. “무엇보다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이같은 심경과 면회 사실을 <용서와 화해는 신의 영역…>이라는 짧은 글에 진솔하게 담았다.

끊임없이 의구심이 떠올랐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하는지, 또 어느 정도 흘리고 있는지, 저는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구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고, 기대에는 못미치더라도 사죄를 하고 있는 저것이 분명 현실이다. 저런 저 사람에게 더욱 진실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내 권리를 넘어서는 게 아닌가?”

어제 어느 목사님을 만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솔직히 조금 아쉽습니다. 그러나 이제 지나가고자 합니다. 정말로 넘어가고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습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진정으로 하늘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석 12)

‘용서’와 관련 국제적인 명저를 쓴 엘리스 칩톤은 <용서>의 서문 <용서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김근태의 심경을 헤아리면서 소개한다.

용서는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은 사람과 용서를 베푼 사람 모두를 치유한다.
옛말처럼, 받고자(get) 한다면 당신은 먼저 손을 내밀어 상대방에게 주어야(give) 한다.
이 경우 잊어버리고자(forget)한다면 당신은 먼저 용서해야(forgive)한다.
(주석 13)


주석
10> 김근태, <용서와 화해는 신의 영역…>, <일요일에 쓰는 편지>, 70쪽, 샛별D&P, 2007.
11> 앞의 책, 70~71쪽.
12> 앞의 책, 71쪽.
13> 엘리스 칩톤, 강미정 역 <용서>, 3쪽, 무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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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

012/10/08 08:00 김삼웅

 

 

 

김근태가 1991년 10월 중순에 가진 한 언론인터뷰가 보도되면서 정계와 시민사회에 뜨거운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에게 충격을 주고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이근안 전경감은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결과적으로는 어두웠던 군사독재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지난 고문사건의 진상을 고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면, 그 손을 맞잡을 용의가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용서는 가치 있는 덕목임에 틀림없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면 영광이 돌아온다.”(구약성서 잠언 19:1), “남을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신약성서 누가복음 6:37). 공자는 세상에 한 글자만 남긴다면 ‘용서할 서(恕)’자 라고 하였다.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 김근태는 자신의 육신을 끔찍하게 고문하고 영혼을 파괴한 이근안이 고문사건의 “진상을 고백하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 다음 화해의 악수를 청한다면” 이란 전제로 용서의 뜻을 밝혔다. 30자가 넘은 전제를 2자로 압축하면 ‘용서’가 된다. 언론은 거두절미 ‘용서’의 단어를 주제어로 삼았다.

고문의 피해자들, 폭력정권의 피해자와 그 희생자들은 김근태가 이근안을 ‘고문의 가해자이면서 군사독재의 피해자’ 라는 내용에도 심한 비판을 쏟아냈다. 김근태에게는 삼키기도 뱉기도 어려운 대목이었다.

이제 정치인이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두루뭉실하게 얘기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것이냐, 과거 정보기관의 윗선에 있었던 사람들이 대체로 처벌받지 않고 유야무야 지나갔기 때문에 그 하수인들만이 사법적 처벌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반인간적인 고문을 직접 가한 사람을 ‘피해자’ 라고까지 말하며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유발케 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조롱이고, 역사를 희화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이야기를, 잘 알려진 고문사건의 대표적인 경우인 내가 함으로써 다른 고문피해자들이나 가족들의 선택의 폭을 줄여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등의 비판을 받았다. (주석 8)

 

 


김근태는 심성이 선하고 부드러운 편이어서 진심으로 이근안을 용서하고자 했다. 그 역시 군사독재의 피해자란 것도 진정성 있는 말이었다. 다만 그가 먼저 용서를 빌고 참회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근안과 군사독재자들은 끝내 사죄하지 않았고, 정보기관의 ‘윗선’에 있던 자들도 전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그동안 고문의 피해자들은 대체로 용서를 하고자 하는데, 도리어 가해자들이 ‘시대상황’에 핑계를 대며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숨기려 들었다.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수감 중인 전두환ㆍ노태우를 풀어주었다. 선거과정에 대구에서는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고 국가예산을 지원하였다. 자신을 죽이려 한 가해자들을 용서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ㆍ노와 그 추종 세력은 사죄하지 않았고, 박정희기념관은 5ㆍ16쿠데타와 유신변란 따위를 미화하는, 박정희 우상화의 장으로 만들었다. 가해자들의 반성이 없는 ‘용서’의 뒤틀린 현상이라 하겠다.

뿐만이 아니다. 가해 세력에 대한 청산이 없으므로 하여 악의 뿌리와 가지가 번창하여 다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선량한 국민을 억압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용산참사와 민간인 사찰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그들은 민주체제를 역행하였다.

김근태의 고뇌에 찬 호소를 들어보자.

나는 간곡히 호소하고 싶다. 이분들의 깊은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십사하고 말이다. 이른바 남아공연방의 ‘만델라 모델’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제는 모두 화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만델라 모델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반인간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백하는 경우에는 기소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스스로 결단을 하고, 진실을 밝히는 노력을 할 때에만 화해와 화합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주석 9)


주석
8> 김근태, <내가 그에게 악수를 청한 까닭>, <희망은 힘이 세다>, 32~33쪽.
9> 앞의 책,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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