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순’이라는 코미디언이 있습니다.

특별한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마 전, 어떤 라디오 방송을 통해 황기순 씨 이야기를 듣고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황기순 씨는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 도박에 빠졌습니다.

필리핀인가 하는 곳에서 빈털터리 노숙자로 떠돌며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해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 황기순 씨가 요즘 방송에 나와 다시 ‘입담’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필리핀은 잊어주세요’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황기순 씨의 이름을 다시 발견한 것은 결재를 하면서 함께 올라온 보고서를 통해서였습니다.

지난 9월 8일, 바로 그 황기순 씨가 한국뇌성마비복지회를 방문해 휠체어 30대를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흘 동안 전국을 돌며 자선 콘서트를 해서 얻은 수익금이라고 합니다.

그 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황기순 씨에 대한 기사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도소를 방문해 재소자를 상대로 ‘눈물 나는’ 강연을 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곧 예쁜 학교 선생님과 결혼을 할 거라는 예쁜 소식도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사실, 저는 황기순 씨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품이 어떤지, 재능이 얼마나 많은지도 잘 모릅니다.

다만, 다시는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나락에 떨어졌던 한 사람이 돌아와

이제는 ‘이웃’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고마울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라고 말합니다.

‘무한경쟁의 정글’에 비유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한번 비정규직이 되면 영원히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고,

사업에 한번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쫓겨 난 사람은 제자리로 돌아가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결과는 참혹합니다.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직장인들은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합니다.

사업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노동조합은 타협 없는 외길 투쟁을 반복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이런 일들이 ‘무한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경쟁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말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국경 없는 글로벌 경쟁 시대에 너무 한가한 얘기를 한다는 타박을 들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가 꼭 행복하고 바람직한 것일까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외길 수순’인 걸까요?

‘패자부활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패자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패자들’에 대한 부담은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패자부활전이 없는 무한경쟁사회는 반짝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 뒷덜미를 붙잡고,

우리의 발길을 천근만근 무겁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마는 것입니다.

정부는 ‘사회안전망’ 즉, 한번 실패한 사람들이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게 보호할 수 있는

안전 그물망을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9월 26일 발표한 ‘희망한국 21-함께하는 복지’도 그런 대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번 실패한 사람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고, 실패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의 손을 맞잡아 주기 위해

2009년까지 8조 6천억 원이라는 재원을 투입할 생각입니다.

사실, 8조 6천억 원은 엄청난 돈입니다.

당장 그렇게 큰돈을 국민에게 부담하라고 요구하는 게 옳은 일인지 따져 묻는 목소리가 터져 나올지도 모릅니다.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낡고 구멍 난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다시 만드는 일은 한시가 급합니다.

한축으로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면서, 다른 한축으로 안전망을 수리하는 일에 당장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이른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시장만능주의’

또는 ‘시장경배사상’에 대해 분명한 재검토와 보완을 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가 건강한 발전의 길로 나아가는데 엄청난 장애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활력을 떨어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질서가 필요합니다. 세계화와 더불어 연대와 협력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소수의 ‘승자들’이 다수의 ‘패자들’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수많은 ‘패자들’이 다시 생산의 현장으로 돌아와 재기하고 또 성취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자살을 생각했던 황기순 씨가 동료들의 따뜻한 손길 덕분에 고국에 돌아와

이제는 어려운 이웃을 향해 다시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말입니다.

2005.9.27
김근태



 



여러분 모두 추석 잘 쇠셨는지요.

추석이 일요일이라 좀 아쉬웠죠?

 

이번 추석은 연휴가 짧아 교통 형편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귀향행렬은 어김없이 이어졌습니다.

그걸 지켜보며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저렇게 가고 있는 걸까요?

차가 막혀도 화내거나 핸들 돌리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도 그 길 끝에 어떤 뿌리와 추억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고향을 떠나 세상을 살아갈수록 간절히 구하게 되는 것은 평화입니다.

우리는 고향길을 통해 너와 내가 본래 하나였음을 확인하고자합니다.

고향길은 또한 집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돌아오는 길은 미래를 향한 에너지가 충만되어 있기도 합니다.

 

9.19 북핵 타결은 한민족의 승리이자 참여정부 외교원칙의 승리

 

이번 추석엔 보름달이 한반도를 똑바로 비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조마조마하게 했던 6자회담이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축하합니다. 함께 축하합시다.

 

이번 9.19 타결은 평화노선과 원칙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햇볕정책을 통해 실현된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한과 북한은 다시 하나되는 길로 전진하고 있습니다.

귀향길이 더딘 만큼 귀경길도 더딘 법이지만 우리는 꿋꿋이 하나됨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산 아래의 호수는 산빛을 띠고 하늘 아래의 호수는 하늘빛을 띤다고 합니다.

그만큼 철학과 방향과 원칙이 중요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번 추석날의 성취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철학이 일궈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봄 주한미군의 신속기동군화를 통한 동아시아에서의 즉 대만해협에서의 전략적 유연성에 대한 우려와 함께

‘동북아 균형자론’을 주창하면서 대통령 자신과 참여정부의 원칙이 본격적으로 천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수구 냉전 언론의 조롱에 가까운 음해와 일부 개혁진영의 회의 속에서도 꿋꿋이 길을 재촉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엔총회 연설과 뉴욕 코리아 소사이어티 만찬 연설, CNN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께서는 방향과 원칙을 과감하게 주장했습니다.

 

대통령의 뉴욕 연설은 짧았지만 저에겐 공감 그 자체였습니다.

힘과 경제력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강대국 중심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모습은

정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한․미 관계, 동북아 문제 그리고 북미관계 및 북핵문제에 대한 비전은 조심스러웠지만 당당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대한 외교적 방향을 제시하는 부분에선 참으로 긍지가 느껴졌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힘을 결집해야

 

이제 한반도와 동북아에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렸습니다.

남북정상회담과 평화번영정책으로 자리를 잡은 평화 분위기가

새로운 동북아 질서수립이라는 실천의 단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겐 할 일이 많습니다.

다자간 안보틀을 통한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합니다.

동북아 경제공동체, 문화 교류 확대를 통한 평화공동체 건설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갑시다.

 

함께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한반도 그리고 동아시아의 미래로 갑시다.

용기를 내서 말입니다.

2005.9.20
김근태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말과 월요일에는 지방을 다녀왔습니다.
주말에는 보건복지부 직원들과 함께 ‘오순절 평화의 마을’ 봉사활동을 다녀왔고, 월요일에는 부산에 있는 ‘혜성특수학교’를 다녀왔습니다.

두 곳을 방문해서 찍은 사진 몇 장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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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따라 ‘올챙이 송’을 부르며 춤을 춥니다.

그러나 가사도 모르고 춤은 서툴기만 해 금방 난처해집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소리 지르고 몸 흔들면서 신나했습니다.

저도 절로 신이 났습니다. ‘오순절 평화의 마을’은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엄마, 아빠가 되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정겨운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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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스러운가 봅니다. 정신 지체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혜성특수학교’에서 만난 이 청년은 반가워하면서도 수줍게 딴청만 피웁니다.

그 모습이 너무 예쁩니다. 장애인 정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으면서 자주 현장을 살피고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렵지만 시간을 만들어서 방문하고 돌아오면 마음에 뿌듯함과 든든함이 생깁니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말로 자원봉사를 권하곤 했는데, 이날도 돌아올 때는 어김없이 마음에 큰 선물 하나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2005.9.13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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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분께 책 한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시겠지만 ‘새로운 경제발전’을 위한 고민과 모색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자못 도발적이지요?

 

실타래처럼 엉켜 ‘난감하다’고 고민하고 있는 판국인데 ‘한국경제를 쾌도난마처럼 단칼에 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참으로 어지간한 배짱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페이지 넘기기 전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만찮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박정희 체제를 재평가하자’ ‘재벌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는 상당히 거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본래 의도는 그렇지 않겠지만 결국 ‘성장을 위해 억압이 불가피했다’는 수구 특권적 주장을

편들어 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각별한 경각심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와 국가가 관료적 자의에 기초한 ‘관치’는 줄여야 하지만

공공영역은 확대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세계화는 미국이 정치․경제․군사․언론 등의 이데올로기와 힘으로 강제하는 것으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메시지는 유혹적이었습니다.

 

80년대 후반 IMF 위기 이후, 재벌이 정부의 부당한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능시장주의(신자유주의)라는 신제품을 수입하고 주장한 것을 이해하면서도, 그 결과 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한국 경제가 성장 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는 밑줄 쳐가며 읽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IMF와 국민의 정부 이후 경제개혁을 강화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외국자본에 의한 영향력이 강화되고,

설비투자와 고용이 감소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신자유주의’ 그리고 ‘주주자본주의’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이 신자유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하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겁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의 개혁세력에게 묻습니다.

구체적인 성장정책이 뭐냐고. 분배는 분배대로 늘리되, 별도의 성장정책을 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한국 경제는 계속 성장해야 한다’ ‘개혁세력은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드는 생각은 “정말로 ‘국민경쟁력’을 제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 한 짐 짊어졌다’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 책이 민주정부가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정부가 사회정책과 산업정책의 양 측면에서 더욱 강력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의미 있게 경청할 생각입니다.

 

책임감을 느낍니다.


2005.9.6
김근태


 

 


장관실에 꼬마 손님 여럿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손님들 가운데 똘망똘망한 눈매를 가진 한 개구쟁이 녀석이 물었습니다.


“전두환 아저씨랑 친해요?”
갑작스런 질문에 처지가 궁색해졌습니다.


“글쎄, 친하지는 않고.... 서로 생각이 달라서 싸우곤 했지”
간신히 생각해낸 내 대답을 듣자 녀석의 눈매는 호기심으로 더 반짝였습니다.


“그럼, 싸워서 누가 이겼어요?”
“.......”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전두환 아저씨’가 화제라고 합니다.

드라마에도 나오고, 코미디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다보니 관심이 생긴 모양입니다.

 

황당한 질문을 한 이 꼬마 녀석은 아마도 마치 어떤 연예인을 만나서

자기가 좋아하는 다른 연예인 누구랑 친하냐는 식으로 질문을 한 것이겠지요.

 

제 사무실을 찾아온 꼬마 손님은 모두 아홉 명이었습니다.

연초에 도시락 배달 점검을 나갔다가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다’고 또렷하게 얘기하는 소녀를 만났는데,

할머니랑 둘이 어렵게 살면서도 예쁜 꿈을 키워가고 있는 그 소녀가 고마웠습니다.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낮은 목소리로 고민을 얘기하던 그 아이를 보고

‘그럼, 내가 친구해주겠다’고 덜컥 약속을 했고, ‘친구들과 함께 장관실로 놀러와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가 다시 연락을 한 것은 도시락 배달을 해야 하는 여름방학이 되고 나서였습니다.

여름철이라 도시락 배달 과정에서 생길지도 모르는 식중독 걱정을 하다가 그 소녀에게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그 소녀는 친구들을 몰고 언제 장관실에 갈 수 있을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녀석이 반 친구 일곱 명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제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아저씨, 영희(가명입니다)랑은 많이 친해요?”
다른 한 녀석이 또 뚱딴지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친해졌어요?”
“.......”

 

순간적으로 ‘위기다’ 싶었습니다.

‘김근태 아저씨랑 친하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 친구들을 끌고 왔을 ‘그 아이’의 표정이 몹시 굳어졌습니다.

결국 또 우물쭈물하고 말았습니다.

 

“응, 무슨 일을 하다가 만났어......”
이런 내 말에 그 소녀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요령부득의 대답이긴 했지만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행이었습니다.

남몰래 ‘후유’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내가 비밀을 잘 지키기만 하면 이 소녀와 나눈 우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었습니다.

짧지만 유쾌했던 ‘꼬마 손님들 맞이’는 그렇게 ‘비밀’ 하나를 묻어두고 끝이 났습니다.


2005.8.29
김근태

 




‘모수자천(毛遂自薦)’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모수(毛遂)’라는 선비 얘깁니다.

당시 조나라는 진나라의 침략을 받아 망국의 위험에 처해있었는데

모수(毛遂)라는 선비가 이웃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해오겠노라 자청해 나섰다고 합니다.

그러자 ‘선비는 겸손해야 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믿던 주위 사람들은 모수(毛遂)를 비웃었겠지요?

 

사정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즘도 모수와 같은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주위의 눈치나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지부도 이제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인재를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마케팅이나 사업기획, 인재육성, 법률, 통계, 정보화 등 분야에 대해 외부에 문호를 크게 열 생각입니다.

민간기업 혹은 연구소 등에서 일하는 분들 가운데 필요한 전문역량을 갖춘 분들을 찾아 모실 생각입니다.

경제부처를 비롯해 다른 부처의 공무원 가운데서도 국민통합에 관심이 있고 능력까지 있다고 판단되면

혜택을 부여해서라도 각별히 모실 생각입니다.

 

얼마 전부터 조심스럽게 직원들에게 말을 걸어보았습니다.

양극화와 저출산∙고령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건복지부의 역량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부 역량강화와 함께 외부에도 문호를 활짝 열어야 한다고 보는데 견해가 어떠냐?’고.

 

솔직히 직원들이 내켜하지 않을텐데 하며, 은근히 신경 쓰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복지부의 역할이 크게 늘어나면서 신규 인력 충원의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만

그 의도와는 달리 스스로 ‘무능력하다’고 자백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하며 직원들이 불만을 가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또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외부에 문호를 열면 그만큼 승진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모든 조직사회에서 이런 정책 방향을 실현해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승진’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보상이며,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은 덜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많은 직원들이 ‘외부에 문호를 열자’는 꼬드김을 크게 반대하지 않고 동의해주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민간 영역에 있는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모수’가 되어 주십시오.

‘모수’가 되겠다고 두 손 높이 들어 주십시오.

또 주위에 그런 분들이 있다면 ‘저기 모수가 있다’고 추천도 해 주십시오.

 

사실, 공직사회는 민간 기업에 비해 급여가 낮습니다.

그러나 대신 사명감과 명예를 보상으로 받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국민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해보겠다고 손들고 나설 분, 어디 없을까요?

 

2005.8.22
김근태

 




남북 축구 구경을 하고 싶었다.
또 왠지 가야만 할 것 같았다.

 

2 대 0 이 되자 옆에 나란히 앉아 박수치고 있는 북한 대표들이 신경쓰였다.
북한 선수가 슛한 것이 골대를 맞고 나오자 "아휴" 하는 아쉬움 소리가 스타디움을 흔들었다.


나도 그랬다.

스코어는 더 벌어졌다, 3 대 0 으로...

 

17일 우리는 사우디와, 북한은 바레인과 월드컵 최종예선전을 치룬다는데,

북한 선수들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축구를 좋아한다.
일요일 오전 내내 동네에서 조기축구를 한다.
이번 일요일에도 조기축구를 즐겼다.

 

"공"차는 것도 그렇지만, 골대 앞에서 슛은 정말로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는다.

튄 공을 잡으려고 볼 싸움 하다보면 상대방이 청,장년인 것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릴 때가 많다.

그래서 몇번인가 다쳤던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번 일요일도 만사 제치고 조기축구하러 운동장에 나갔다.

남-북 대표들도 친선과 협력을 속으로 다짐하며 그라운드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뛰고 달리고,공을 차기 시작하면 마음이 달라진다.


운동장 경기에서 적당히는 없다.
정말로 적당히 하면 시시해 진다.
눈뜨고 볼 수 없게 된다.

 

나는 궁금하다.

시합 전에 북측 김기남 대표와 나눴던 말에 대해서 지금도 그런 따뜻한 느낌을 갖고 있는지 그게 궁금하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내가 그렇게 인사하자
"통일은 됐어"라고 플랭카드로 운동장에 걸려있는 그 구호가 정말 좋다는 것이었다.

 

3 대 0으로 지고 나서도 계속 그런 마음이었을까.
16일 있을 여자 축구 이후에는 어떤 마음이 될까.


또 우리는 어떨까?

 

2005.8.15
김근태





‘X-파일’ 관련기사가 연일 언론 전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파일을 모두 공개하면 나라가 흔들릴’ 거라고도 하고,

‘그동안 힘깨나 쓴 사람치고 떳떳한 사람이 없을’ 거라는 수군거림도 있습니다.

불법 도청 테이프를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정치권은 물론 언론, 재벌, 검찰 등 우리 사회의 권력이란 권력은 모두 무대 전면에 나서서

한판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복잡한 셈법이 동원되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국민을 당혹케 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충격을 받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점일 것입니다.

하나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기관인 국정원이 공공연하고도 광범위하게 불법 도청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국가 공권력의 추한 타락상을 지켜보며 ‘국민의 힘으로 만든 민주국가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X-파일’에 담긴 사회 지도층의 적나라한 자기이해 추구 행태에 대한 분노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총체적 저급함과 부패를 지켜보며,

그동안 가졌던 최소한의 기대마저 밑둥부터 허물어지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하고 덜한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도청이 문제냐, 도청 내용이 문제냐’는 식의 논쟁 역시 지엽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번 사건으로 국민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고 가는 리더십 전반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사회 지도층이 스스로 우리 사회를 ‘불신의 나락’으로 이끌고 갔다는 신랄한 비판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저 역시 국민 여러분에게 사죄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끗한 정치,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저 자신이

정말 세상 물정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려 참으로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야만의 질서’를 넘어 ‘희망의 질서’를 꿈꿀 수 있을 정도는 된다고 했던 말씀들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제 가슴에 꽂힙니다.

 

반면, 오기도 생깁니다.

‘우리 사회가 여기서 전진을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이 치받고 올라옵니다.

어떻게 이룬 민주주의고, 어떻게 만든 민주정부입니까?

 

‘판도라의 상자’ 속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흉측한 괴물이고, 실제로 우리 주위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결국 그 괴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힘을 모아 그 괴물과 맞서 싸워야 하고, 싸워서 이겨내야만 우리 사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점도 명확합니다.

 

‘복차지계(覆車之戒)’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엎어진 앞 수레의 바퀴자국을 보고 뒷 수레가 경계한다’는 말입니다.

이번 ‘X-파일’사건을 한 번의 대소동쯤으로 넘긴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대책 없이 불행해질 것 입니다.

 

반면, 이 소동을 ‘상식이 통하는 사회’ ‘밀실에서 나누는 대화와 광장에서 나누는 대화를

최대한 근접 시키는 계기’로 만든다면 어쩌면 대반전의 모멘텀이 시작 될 수도 있을 것 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번 사건의 주체들 스스로 ‘인식과 행동의 일대전환’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손익계산을 앞세워 국민에게 떳떳하지 못한 해결방법을 도모하는 집단은 반드시 상응한 댓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국민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 사회를 희망으로 이끄는 길이고, 우리 사회의 리더십들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명예를 지키는 길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국민의 눈에는 ‘X-파일’을 널리 고발한 MBC의 이상호 기자를 먼저 수사하는 것 정말 어색하기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 속담에 ‘네 담이 아니면 내 쇠뿔이 빠졌겠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소가 담을 들이받아 뿔이 빠졌는데, 담 주인에게 소 뿔 값을 물어내라고 떼를 쓴다는 뜻입니다.

혹시 그렇게 보이지는 않을까요?

 

정말로 모든 의혹은 분명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어떤 명분과 이유, 법 논리도 진실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 국민적 신뢰와 자부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2005.8.9
김근태


 



"먹는 것 갖고 장난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부대찌개’라는 음식이 있지요.

 제가 즐겨 먹는 음식 가운데 하나인데˜. 여러분도 그럴 거라고 짐작합니다만,

‘부대찌개’라는 이름을 들으면 괜히 생채기에 손을 댄 것처럼 뜨끔해 지곤 합니다.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것’으로 만들어서 그런 이름이 붙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아픈 과거가 거기에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옛날, 웃어른을 만나면 ‘아침 식사 하셨습니까?’ ‘진지는 드셨는지요?’라고 인사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혹심했습니다.

그러니 일용할 음식을 앞에 두고 뭐라고 말하는 것은 ‘음식타박’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일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식품안전’에 대해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훨씬 느슨한 기준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느슨한 기준이 사회적 관습이 되고, 문화가 되어 어느 샌가 널리 퍼져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식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음식’을 단지 끼니를 잇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음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웰빙’ ‘유기농’ 열풍도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식품안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변화에 비해 우리 사회 전반의 관습과 시스템, 법규는 아직 충분하게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식품안전’을 위협하는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식품’과 ‘다른 공산품’은 상당히 다른 ‘생산물’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사회는 의외로 둔감합니다.


이제 몸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식품안전’에 대해 변화된 국민의 의식에 걸맞는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쩌면 ‘식품안전’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발전시키는 전제조건인지도 모릅니다.

 

7월 28일, 새로운 식품위생법과 시행령이 발효됐습니다.

‘위해식품’을 근절하기 위한 정부의 초강경 대책이 본격 시행되는 셈입니다.

 

새 법령은 우선,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은 식품을 제조․판매할 수 없도록 차단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안전성 평가를 통과하지 않은 식품의 제조․판매를 금지하고, 위해 ‘우려’가 있는 식품은 수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심각한 위해식품 제조․판매 사범에 대한 신고포상금을 30만원에서 1천만 원으로 대폭 인상해 내부고발을 유도하기로 했습니다.

 

위해식품을 만들거나 판매한 사람에 대한 처벌도 강화했습니다.

위해식품을 만들고 유통할 경우 반드시 최소 징역 1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는 것은 물론,

판매액의 2~5배를 벌금으로 부과하고, 향후 5년 동안 같은 영업을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위해식품 회수 책임도 영업자가 직접 지도록 하고, 위반 사실을 자기 부담으로 중앙 일간지에 공표하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위해식품을 원천봉쇄하는 한편, 죄질이 나쁜 위해식품업자는

다시는 식품산업에 참여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고하게 처벌함으로써 ‘위해식품을 추방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초강경 조치를 취하다보면 법 적용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음식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대부분 중소 자영업자이다보니

‘食파라치’의 먹잇감이 되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는 걱정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감안해 경미한 위반행위는 포상금 지급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또 농민, 음식점의 과대광고 역시 포상금 지급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새로운 법령의 시행경과를 저는 지금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에 최소한 ‘더 이상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수준의

합의를 이룰 수 있을 때까지 직접 확인하고 감독하겠습니다.

필요하면 또 다른 행정조치도 검토하겠습니다.

이번 기회를 반드시 ‘먹거리안전’을 지키는 전환점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국민적 자존심을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먹거리안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분명히 대처하겠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 제가 일하는 동안 최소한

‘먹거리에 대한 걱정’만큼은 덜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 힘을 모아 주시고, 좋은 아이디어도 보내 주시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2005.8.1
김근태


 



엄청나게 더운 날씨입니다.

올해는 좀 유별납니다. 숨이 턱턱 막힙니다.

앞으로도 한 달 넘게 이 더위와 맞서 싸울 생각을 하니 걱정이 앞섭니다.

 

여름은 저에게도 견디기 힘든 계절입니다.

특히 저와 함께 차를 타고 일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제가 에어컨 바람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고 에어컨 바람을 쐬면 몸이 으스스해지고 심하면 감기에 걸리기도 합니다.

체력은 약한 편이 아닌데(당장이라도 축구 한두 경기를 풀타임으로 뛸 수 있는 체력은 됩니다) 유독 호흡기 계통이 말썽입니다.

이젠 지나간 어두운 시대를 몸으로 맞서 버티느라 불가피하게 얻은 후유증인 셈이지요.

 

덕분에 저와 함께 차를 타고 일하는 친구들은 두 배 힘든 ‘여름나기’를 각오해야 합니다.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에어컨 대신 자동차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다닙니다.

금방 와이셔츠가 땀으로 젖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미안해지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름을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더운 날씨일수록 짜증나는 일이 있더라도 힘내서 떨쳐내시길 기원합니다.

‘아자 아자’ 하면서 말입니다.

 

이번 여름에 저도 답답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국민연금 문제입니다.

국민연금의 재정안정화를 위해 ‘제도개혁’을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 이미 오래 전부터 사회적 토론이 있었습니다.

 

각계 전문가들이 모여 안을 만들고 국회에 제출한지도 벌써 3년이 다돼갑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토론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모두 연금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개혁안에 대한 토론에는 쉽게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여야 지도부를 만나 ‘범국민 토론기구’를 구성하자고 제안하고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지만 아직도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국민의 지지를 먹고 사는 정치인의 입장에서 국민에게 ‘더 내고 덜 받자’고 호소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필요한 얘기라도 국민에게 부담을 더 감당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가 쉽겠습니까?

국민에게 미안하고 안쓰러워 말하기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

저도 정치인 출신인 만큼 각 당 지도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선거를 앞두면 더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번에 하지 않으면 적어도 앞으로 3년 정도는 그런 말조차 꺼낼 수 없게 됩니다.

 

내년부터 08년 4월까지 지방자치제 선거와 대통령 선거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가 줄지어 있습니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국민에게 어려운 얘기를 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올해 5개월이 연금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물론,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심각하다는 점이 행동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공통의 현상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인기 없는 연금제도’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 ‘인기 없는 줄 알면서도’ 연금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모두 재정안정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점이 최대의 고민입니다.

이 개혁과정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뤄낸 나라도 있고, 이뤄내지 못한 나라도 있습니다.

 

지난번 OECD 총회에서 확인한 일입니다만,

국민적 토론과 합의과정을 거쳐 연금개혁을 이뤄낸 나라가 국민통합을 이루고 안정적인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나라는 대부분 사회통합과 경제성장의 양 측면에서 정체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성숙한 토론을 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잘못한 일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어려운 사정은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직접 알려야 합니다.

각계의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국가와 국민의 ‘안전한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런 바탕에서 최선의 대안을 찾아내야만 국가전체와 국민 개개인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국민연금을 비롯해 양극화 문제 등 답답하고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이슈’를 너무 많이 안고 있어서 더 덥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그렇고, 노정갈등이 그렇습니다.

부동산대책과 대학입시제도에 대한 사회적 긴장도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원한 소나기 한줄기가 그립습니다.

한발도 진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터놓고 대화하는 ‘신선한’ 토론의 광장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답답한 이 상황을 타개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시원한 한줄기 소낙비 같은 토론을 함께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말입니다.

 

2005.7.25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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