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0일 밤 7시경부터 10시경까지 고문을 당했는데, 그것은 처음 당하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전기봉 고문인데 양쪽 발등에 무슨 장치를 하고 진동을 일으켜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고문을 직접 지휘한 것은 김영두이고, 그 뒤에서 김수현이 조정했습니다.

박병선, 최상남, 정현규, 경상북도 출신의 또 한 사람의 경찰관이 고문을 했습니다.

 

9월 8일을 고비로 백남은은 고문 지휘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맡아 김수현이 더욱 분명하게 주동적 임무를 맡아갔습니다.

9월 8일 밤 고문에서, 나중에 가서는 김수현이 직접 고문장치를 들고 전기고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10일, 이날의 고문은 여러가지 계산 하에 뒤에서 지시하고도 자신은 잘 몰랐던 것으로

예상치 못했던 바라고 얘기하며 마치 위로자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했습니다.

전기봉고문은 이렇습니다.

대단히 빠른 진동때문에 발등에는 심한 통증이 옵니다.

상처가 생기고 깊이 파이는 것 같은 느낌조차 옵니다.

피가 흐르는 기분도 듭니다.

그래도 이 전기봉고문은 받을 만하다고 할까, 상쾌하다고나 할까, 아니 양념 고문이었다고 할까요.

원체 심한 고문을 당해서 그런지 이 날 같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더구나 물고문도 이날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또 발뒤꿈치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반창고를 붙여 주고 발 밑에 수건을 접어 넣어 주기도 했습니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편 고마움조차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벼락 맞아 속이 다 타버린 고목처럼 깊이깊이 내상을 입히는 그런 전기고문이 아니고,

시커멓게 몰려오는 저 무서운 공포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발등 정도 좀 찢어지고 으깨진들 그것은 별 대수로운 것은 아니니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할까요, 인간적인 그런 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문을 시작하기 전에 심리적인 압박을 받기는 했지만 '괜찮게 고문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기조차 합니다.

고문 도구, 즉 눈가리개, 물주전자 등을 책상에 나열하면서 겁을 주더군요.

마음에 부담을 주려고 그렇게 했겠지요.

 

이것을 박병선이 했는데 의도를 알겠더군요.

쫄아 들게 하려는 것이지만 이것은 실제로 고문하지 않을 조짐일 수도 있고,

하더라도 심하게 가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징조임이 읽혀졌습니다.

대충 그런 성격의 고문이기도 했구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은 결코 하닙니다.

이 고문도 역시 괴로운 것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10일 전에는 잘 몰랐었고 또 당초 식사할 수 있는 마음도 아니었기 때문에 분간할 수 없었습니다.

고문자들은 9일부터 식사를 제대로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밥을 언제 주었는지, 준 적이 있었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겠구요, 10일, 저녁 식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9일 아침부터 쭉 주던 것을 안 주니 이상할 수 밖에요.

고문을 가할 경우에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날 알게 되었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기 때문에 - 속이 뒤집히게 하는 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물고문인데 -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문시 거의 틀림없이 속이 뒤집혀 토할 것이고, 토하는 경우 고문자들을 난처하게 만들 것이며

고문의 진행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에 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토할 때 기도가 막힌다든지, 그로 인한 불상사를 생각해서 안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밥을 안주면 고문이 임박한 것임은 아주 분명해졌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반복된 고문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고문자들은 9월 13일 이후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데, 밥을 안 주는 것과 고문을 가하는 것을 연관시켜 매우 잘 사용했습니다.

즉 고문자들이 뭔가 불만이 있으면 밥을 안 주고, 그러면 본인은 고문이 박두했음을,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고 파랗게 질리곤 했습니다.

이때 고문자들은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나는 덜덜 떨면서 시키는 대로 하구요.

고문, 그것은 마음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리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의 시점,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정말 사장급 이상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로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틀림없을 분위기로 전달되었습니다.

이날의 주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강제해 온 것의 암기 확인, 복습, 다음에 본인이 60년대 중, 후반 대학시절 학생운동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 왔는지에 대한 확인,

그리고 군대 제대 후부터 복학하였을 때의 동료 친구관계를 집중해서 캐물었고, 끝으로 73년도인가 74년도에 크리스찬 아카데미

-강원용목사가 원장인-에서 시행한 중간 집단교육-노동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고 몇 명의 봉급생활자들이 교육생으로 참여-에

참여했던 것과 그 교육과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복습암기에서는 욕을 먹고 나중에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학생운동에 대한 것은 워낙 먼 옛날인 20여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70년 9월 복학해서 72년 2월에 졸업할 때까지 교우관계에 대해서 처음에는 지나가는 것처럼 묻더니

나중에는 매우 심각하게 따지고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것은 13일의 고문으로 연장되기도 한 주제였습니다.

본인이 복학했을 때 상과대학 대학원에 제일교포 유학생으로 온 사람이 있었다면서 이 사람과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의 출신교인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한 해 늦게 상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지금은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가 되어 있는 누구인지를 통해서 이 제일교포 유학생 간첩과 연관 지으려는 공작이었습니다.

빛바랜 사진을 고문대 위에 묶어져 있는 본인의 얼굴에 들이대면서 인정하라고 아우성 쳤습니다.

물론 이 사진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서울대 교수로 있다는 그 동창이 누구인지, 또 진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이 되기도 합니다.

만일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로 있다는 본인의 고교동기가 실제로 있고, 그 친구와 교분이 있거나 깊어서 고문자들이 평범하게 물을 때

그 이름을 얘기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13일의 고문에서도 이것은 꽤 오랫동안 집요하게 추궁받았고, 이 10일은 고문자들이 깊이 꾀를 내어 살살 접근해 왔던 것입니다.

남영동고문자들은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의 한 부분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하였고,

이는 본인을 급진적인 분자로 단정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습니다.

73~74년 당시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노동조합총연맹에 교육생을 보내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하고,

이에 노총은 각 산별에 의뢰하여 노조 간부들을 중간 집단 교육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약간명의 중간 계층인 봉급생활자등도 참여했으며, 본인은 그런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교육의 강사는 강원용 목사, 이문영 교수, 박재봉 교수 등 여러 분이 있었습니다.

강의도 있고 토론, 사례발표, 노래 연극 등 여러가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앞으로 연도별 자기 일생 계획과 죽음을 맞이하게 될 시점,

그리고 무덤에 묻혔을 때 희망하는 묘비명에 대해서 써 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의 진행과 안내는 박재봉 교수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되고,

일단 작성이 완료된 후 노조간부들은 그것을 발표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당시 교육학생들은 일생계획수립에 대해 막연했으며, 더욱이 죽음과 죽을 때를 희망하는 시기와 묘비명에 대해서는

일정한 당혹과 동요, 부담감조차 없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에 대해서 박재봉 교수는 '여러분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른 나라 교육프로그램에서 따와 시도해 보는 것'

이라며 나름대로 의미있음을 설득했습니다.

본인도 이에 따라 시기(연도)별 일생계획표와 세상을 떠날 연도, 묘비명 등을 포함한 여러가지를 작성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대부분의 것은 보지 않고, 또 전체의 흐름과 당시 교육에 참여했던 것이 노동조합 간부 중심이었던 점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비위에 거슬리는 부분만 문제 삼아 화를 냈습니다.

물론 이 고문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지시하고 보고를 받고 자기들의 정치적 이익, 반사적 이익을 위해서는

무슨 짓도 감행하는 정치군부에게는 이것도 본인을 불온한 불순분자로 몰아버리는 하나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희망하는 결혼 연도 등을 - 당시 본인은 아직 미혼이기에 당연히 결혼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지요 - 빼 버리고 오직 세가지를 문제 삼았습니다.

첫째는 몇 년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 두 번째는 1988년에 남북민족통일,

세 번째는 2016년인가에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희망하는 묘비명으로 '여기에 사람 사랑하던 사람이 잠들다' 라는 것을 작성한 것입니다.


첫 번째는 기층 민중의 정당이고, 계급정당의 구상으로 당연히 불순한 것이 아닌가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렇게 보기로 결심한 사람들 눈에는 아주 훌륭한 몇 개의 문자로 된 증거겠지요.

당시 교육은 대부분 노동조합운동과 그를 통한 사회발전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합 간부들이 거의 전부이고, 이들이 교육 분위기를 잡아 나갔습니다.

 

조합원과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개선 뿐만 아니라,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에도 노동자들에게도 반드시 정치활동이 필요하다는 토의도 있었고, 조합 간부등의 토의, 종합결론도 있었습니다.

또 여러 교수님들 강의에서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는, 정치활동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되었습니다.

미국의 경우처럼 대통령 선거시 노동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천명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방법,

영국의 경우처럼 집권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소개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신 치하에서 유정회에 직능대표로 노동조합 간부를 보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두가 비판적이었으며,

노동조합의 정치참여 금지규정, 법률에 대해서는 특히 격한 이의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조합 간부들이 노동자들의 정당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생각을 표시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경우가 보다 바람직한 것으로 되었습니다.

본인은 대학 출신, 그 중에서도 좋은 학벌 등으로 그 교육에서는 뭔가 미안한, 부채의식도 없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동일화가 되지 못하는 것, 즉 소외감도 있었구요.

그런 분위기에서 노동자, 농민의 정당 설립이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조합간부 대다수 사람들의 일생계획표에도 등장했고 발표낭독도 되었다고 기억합니다.

이것을 앞뒤 다 자르고 이 몇 개의 문자를 들어 늘 그렇듯이 문제를 삼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남북통일이 왜 하필 88년도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내가 신통력이 있어 시점을 맞춘 것처럼 분개하고 괘씸해하며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73, 74년 당시 88년이 정권 임기와 관련 있을 것이라든지

하계 올림픽 연도가 될 것임을 이미 예측하고 고약한 장애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불순한 의도를 엿보게 할 수 있는 자의 음모라는 말인지 말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88년도는 우리 모두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며 민족통일은 모든 민족의 염원으로 어울려 짝짓기 참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1988년의 민족통일, 그것을 70년대 초에 기대하고 희망한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고문자들도 추궁했지만 본인의 면전에서는 논리적으로는 심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뻔한 일이어서 그랬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는 세상을 떠나는 시기와 묘비명 이름마저 유서에 써놓고 민주화 투쟁을 하는 악질 분자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이 희망한 것은 70살이 되어서 삶을 마치는 것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이는 장수고 어느 면에서는 천수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양식인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 무슨 비장한 결의인 것처럼,

음산하고도 어두운 음모인 것처럼 매도 당했습니다.

 

고문자들은 이를 무슨 대단한 일처럼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소위 남영동은 본인에 대한 불순한 배경의 중요한 기둥 중 하나로 의견서를 택한 것입니다.

최민화씨의 법정 증언에 의하면 본인은 이미 유서까지 써놓고 운동을 하는 것으로 고문자들은 말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포복졸도할 희극이 그렇게 무거운 부담으로 왔습니다.

이것이 범죄적 고문을 감행한 남영동 그곳에서 본인이 처했던 멍에였습니다.

이미 기정사실이 된 불순한 올가미에 온갖 것을 들어다 꿰어 맞추는, 남영동 제조공장이었지요.

6월 10일 고문은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고, 끝난 뒤에는 김수현으로부터 위로도 받았습니다.

고통이 심하고 고생이 되는 줄 잘 안다면서 고문대에서 내려오도록 부하 고문자들을 채근했습니다.

눈물이 핑 돌고 콧등이 시큰해졌습니다.

조금만 더 역성을 들어 주었으면 그 김수현 가슴에 기대어 엉엉 울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버렸을 것입니다.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종전과 더불어 풀려나온 어느 유태인 정신과 의사의 피맺힌 기록이 생각납니다.

원수, 악마였던 S.S고문 친위대가 나중에는 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경매의 존엄한 자로 군림하게 되는 절망적인 인간의 고백을 읽고 몸서리를 쳤었습니다.

 

인격의 와해, 인간의 허약함을 송두리째 폭로하는 것으로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분노하고 저주해야할 그 고문자들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첫 날 혹은 둘째 날부터는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이 박탈되었던 것입니다.

삶과 죽음의 열쇠를 갖고 있는 그 고문자들에게 모든 힘을 다하여 아양을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고문자들의 현장 지휘자인 김수현에게 10일날 위로를 받은 것, 그것은 당시 본인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따뜻한 라면을 대접 받고, 밤 12시가 되어 잠도 재워 주고, 이제 평화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문성근씨의 100만송이  국민의 명령 프로젝트 출범을 접하며

우선 축하합니다.

배우 문성근씨가 드디어 ‘100만송이 국민의 명령 프로젝트’, 즉 제3지대 야권단일정당운동을 가동했습니다.

스스로 야권 단일정당이라는 시대적 명령을 내리는 첫 번째 국민을 자처한 문성근 씨는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100만 민란의 주동자요 대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문 대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할 때 염화미소요, 이심전심이라 했습니다.

정말 마음이 찡해서 이렇게 김근태의 미소를 보냅니다.

 

문 대장의 제안서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저의 첫 느낌은 “아.......!!”였습니다.

야권단일정당이라는 시대적 대의를 느끼거나 확신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대의를 추진할 방법을 이토록 구체적이고 민주적으로 제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민주화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우리 국민에 대한 강고한 믿음 위에 지어진 이 멋진 대중운동에 거듭 찬사를 보냅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힘들고 험난할지도 모를 길을 문 대장이 먼저 나섰습니다.

솔직히 범야권단일정당이 정당의 문제이고 그래서 정치의 문제임에도 우리 정치권에서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 김근태 약속합니다.

범야권단일정당이라는 큰 흐름에 조응할 수 있는 정치의 길을 열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 둘 다 성공해 대한민국을 전혀 새롭게 창조할 수 있도록 분발하겠습니다.

 

아무리 미소일지라도 길면 민폐이므로 이만 짧게 미소 짓겠습니다.

사이버 촛불인 마우스 클릭으로 이루어지는 야권단일정당을 위한 100만 민란에서

문대장과 국민여러분이 반드시 승리하리라 믿습니다.

 

이 글을 읽는 국민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야권단일정당운동 사이버 촛불 들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참으로 좋은 배우를 가진 것 같습니다.

 

 2010년 8월 28일

김근태

9월 8일 일요일 오전 10시경. 지옥에서 온 나찰 같은 얼굴을 한 윤재호가 방에 들어섰습니다.

잠시 후 김수현, 빅남은, 김영두, 고문기술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 그리고 또 한 사람 허만조 등이 방을 꽉 메웠습니다.

윤재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본인 맞은 편에서 앉자마자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너 이 새끼, 배후를 안대?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처넣어서 폐기종을 만들어 죽여 버리겠다.

안 댈 거지?

그거(고문대) 들여와,

이 새끼 내가 직접 고문할게."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당황한 듯 하면서 모두 서 있었고

김수현, 백남은, 고문기술자들이 굽신거리며 "저희들이 하겠으니 나가시라"고 애원 겸 정중하게 말하더군요.

그 사이 정현규와 최상남이 고문대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이 때 그 고문대 구조를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윤재호는 분기탱천해서 나가고, 김수현과 백남은은 '상급자가 저러니 자기들로서는 도리가 없다' 히고,

고문기술자는 여러가지 협박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고문은 또 시작되었습니다.

주제는, 아니 메뉴라고 할까요.

배후, 정치적으로 아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불순한 모종의 배후,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나이 사십인데 누가 배후가 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신들이 말하듯이 민주화운동에서 책임있는 사람들 중 하나이고 오늘의 이 결과를 가져오게 한 역할을 해 냈는데,

내가 누구에게 조정을 당하겠느냐."

고문자들에게는 논리가 통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얘기했습니다.

이들은 상부의 상부인 정치군부가 정해 준 방향대로 결과를 얻어내도록 움직일 수도,

변경할 수도 없는 명령을 받고 그 임무를 완수해 내야했던 것입니다.

고문대 위에 묶어 놓고 그늘진 곳에 숨어 있는 배후, 공개운동 선상에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요구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미 당신들은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사무실, 집 전화를 도청했고 나를 미행해 오지 않았느나,

그러고도 이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며 항의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이 새끼 항복했다더니 아직 입이 살아서 움직이는구먼. 진짜 맛을 보여 주겠다.

남민전, 이재문이 어떻게 죽은 지 알아? 전노련 이태복 얘기 너도 들었을 거다.

이재문이는 여기서 당해서 이미 속이 부서져 감옥에서 병사한 거야, 너도 각오해" 하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 날은 남영동에서 받았던 고문 중 최악의 고통스런 날이었습니다.

가장 혹독하고 긴 고문을 받았습니다.

진부하고 희극적인 추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월북여부에 대한 추궁, 행적에 대한 추궁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짓거리입니다.

하지만 고문자들에게는 반드시 빼놓지 않는 과정이며 고문을 가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꺼리'가 됩니다.

정상 상태에서는 그 누가 이렇게 협박을 한다 해도 그것에 대해 인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허나 고문대 위에서 이는 참으로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옵니다.

결국 나는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고문자들은 좋아서 히히덕거리기조차 했습니다.

고문기술자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했으며 백남은이 추궁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월북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갔다고 했습니다.

백남은, 김수현 등은 폭소를 터뜨리면서 "그것은 여기서 취급했어, 우리가 잘 알아서 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추궁이 멈칫해졌습니다.

삼천포는 80년 광주사태 이후 몇 년도인가,

박계동씨가 정치군부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던 항구였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서 얘기했던 것입니다.

그것 이외에는 그럴 듯하게 말할 것조차도 없었지만,

다음은 본인의 형들 셋이 월북을 했고,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만났다는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결국 인정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간첩과 접선 인정은 본인에게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덮쳐 누르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의 고통을 우선 모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만일 고문을 당해보면

왜 죽음을 가져올 지 알면서도 인정하고 손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가를 적절하게 알게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하면서 증거를 강요하더군요.

돈을 받았느냐고 해서 1백만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74년도 쌍문동 집 근처에서 한번 만났고, 84년도에 역곡에서 한 번 만났다고 했습니다.

이 고문자들 참 좋아하더군요.

좋아서 미쳐 날뛰기 일보직전인 것 같았습니다.

김수현은 합리적 근거를 대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달밤에 먹이를 앞에 놓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털 빠진 승냥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만들어서 얘기를 하니까 고문자들이 거들어 주고 수정을 해 주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놓여진 본인과 고문자 사이에 협력과 토의 수정이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이렇게 하며 각본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백남은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평양이 부산이지?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고."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습니다.

반복해서 백남은이 얘기할 때 비로소 알아들었습니다.

백남은은 이어서 "그런 일 없지?" 라고 확인을 했고 "그런 일 없는 것은 우리가 알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날 지경으로 고마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틈에 용기를 내어서 "정말 그런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고마움과 안도에 떨리는 목소리로 서둘러서 반복하여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고 확인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나서더군요. "그러면 왜 만났다고 했는가, 고문에 못 이겨서 그랬다고 했는가" 라고 추궁하며

다시 강하게 전기고문을 시작하면서, "아냐, 간첩을 만났지?" 라고 요구해 댔습니다.

 

부정했지만 결국은 또 인정하게 되고요.

도대체 몇 번을 이렇게 왔다 갔다 하도록 고문하고 강요했는지 모릅니다.

거기다 또 '말이 왔다 갔다 한다' 고 고문을 해대고 말입니다.

아, 이처럼 눈물나는 희극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구나. 희극의 시대구나. 이 저주받을 희극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하여튼 월북과 간첩과 접선 얘기는 대충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후 필요할 때는 위협수단으로 사용했지만,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진지함을 고문자들은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실 고문자들에게 처음부터 느낀 것은 본인의 사건에 어떤 열성이나 뚜렷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무리를 하고 있다는 표정이나 몸짓이 전해져 왔습니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과정에서 '시기가 너무 빨랐다',

'아직 사건으로 만들 때가 아니었는데' 하면서 고문자의 누구누구는 '흥미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그들이, 그들의 지휘자인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물러설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보듯이 무리와 무모함을 더욱 강제하고, 그를 은폐하기 위해서 별별짓을 다하게 되는 것이지요.

8일 오후 1시 반경, 일단 오전 고문은 끝났습니다.

저녁 7시경에 또 전기고문이 시작되었으며 밤 12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악을 써 대고 고문기술자는 맞고함을 치고 김수현 등은 킥킥거리듯이

몸부림치는 나를 묶인 채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고문은 계속되었습니다.

역시 배후의 문제였습니다.

그늘에 가려진 사람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무척 곤경에 빠져 버렸습니다.

둘러댈 이름도 없는 것이니까요.

배후란 것은 없다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는 헛일이었고요.

 

결국 재야 운동권과 종교 운동권의 인사가 모두 배후라고 불면서 인정해 달라고 애걸복걸하였지만 고문자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것은 물고 들어가는 일일 뿐이라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들은 재야인사로 초점을 옮기더군요.

그 중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 이름을 계속 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줄줄이 대고 거절당하고, 또 대고.... 이렇게 반복하기를 십여차례 하다가 함세웅 신부와 권호경 목사, 두 사람으로 좁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본인과 고문자들의 협력과 타협, 그리고 조작 위에 세워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지요.

함 신부는 완전한 배후로서 결정됩니다.

함 신부는 해방신학의 대가이며 본인이 83년 9월 민청년 창립 이후 매달 한 번씩 한강 성당, 구의동 성당으로 찾아가

민주화운동을 의논했다는, 고문자들 말에 의한 한 권의 소설에 본인의 철저한 배후로 등장하게 됩니다.

권호경 목사는 반쯤 배후가 되어 두 달에 한 번 정도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여러가지 얘기를 나눈 것으로 되고,

이것과 관련해서는 반 권 분량의 소설이 만들어집니다.

 

이 두분에 대해서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담이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 이외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을호 씨와 문용식 씨의 배후로 찍혀서 지금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본인은 이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고문에 못 이겨서 강제자백을 한 것이겠지만, 그래서 이해를 충분히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이을호씨와 문용식씨를 미워했었고 참으로 서운해 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현실적 위험으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본인의 배후로 찍혀서 작성된 그 소설이 써먹힐 가능성은 있는 것이고,

아마 지금도 함 신부와 권 목사 두 분에게 부담과 위험이 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날 고문이 마무리될 즈음해서 이범영씨가 다시 거론되고 "민한당사, 미문화원 사건 조종을 했지?" 라고 강박하여

" 각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범영씨로부터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코미디이며, 나는 이 코미디에 등장하는 꼭두각시였던 것입니다.

이 날부터 복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4, 5, 6일 있었던 이을호,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 완전학습, 총정리가 고문대에 눕혀진 채 요구되었습니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잘 해내서 칭찬을 받고 고문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8일에 있었던 물고문, 그것은 4,5,6일에 자행한 것보다 지독했습니다.

그것은 세수 수건 대신 코와 입 위에 가제를 덮고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세수수건을 덮고 고문할 때에도 호흡은 완전 차단이었습니다.

공기가 끼어들 여지를 배제해 버리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 날 물고문의 중간, 한 번 입을 벌려서 고춧가루를 처넣었습니다.

곧 뱉어 버리긴 했지만, 입 속이 얼얼하고,

고문대 위 담요에 고여 있는 땀과 물 속에 떨어진 고춧가루 때문에 등 전체가 따갑기도 했습니다.

무슨 화학 약품이라고 겁주면서 가제 위에 한 웅큼을 집어다 놓고 물로 녹여서 입, 귀, 콧속으로 녹아들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세 번 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간 집찔한 것으로 보아서 소금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이는 심리적 압박으로 고문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기고문의 전류가 더 잘 통하도록

핏속의 전리도를 높이려는 이중적 계산이 내포된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이날의 고문은 잔인무도의 정점이었습니다.

목이 완전히 붓고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목이 쉬고....

연거푸 비명을 질러댔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팔꿈치와 발뒤꿈치는 이미 헤어져 상처가 어느 정도 깊어지기도 하고요.

 

이날 이후 고문자들은 팔과 발뒤꿈치 상처에 많은 신경을 쓰며 약을 사다가 먹이고, 바르고, 열심히 치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발뒤꿈치 상처가 특히 오래간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외용 살포제로 니라민산이라는 하얀 가루약, 수많은 항생제 복용, 옥시풀과 머큐로크롬 등으로 치료했습니다.

한편 목 아픈 데에도 무슨 약인가를 주어서 먹고 가라앉혔으나 쉰 목은 잘 낫지 않았습니다.

이 8일의 고문 이후에 나는 '저80년 5월의 광주사태가, 광주시민 대학살 같은 것이 85년 9월에 또다시 일어나고 있거나

반드시 정치군부에 의해서 감행될 예정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럴 수는 없는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예정된 정치적 사변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며

불순한 내란 소동의 주범 또는 배후로서 낙인 찍혀 공공연하게 선전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멍멍해지고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되기도 하고 나사가 풀려버려 드디어는 착란 상태,

광기를 보이게 될 운명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당시, 그래도 현실성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은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이었습니다.

이것은 전기고문을 받을 때마다 더욱 심해졌고 그 견딜 수 없는 두통만이 현실적이었습니다.

그 어디에도 구원이라는 것은 없었고 구원의 빛깔 비슷한 것 조차도 없었지요.

모든 것이 이미 고문 지옥으로부터, 나로부터, 멀리 저 멀리 사라져 가버렸습니다.

2010년 8월 6일 민주연대 주최 토론회

인사말씀

 

 

솔직히 충격이 컸다.

6.2 지자제 선거승리와 7.28 재․보궐 선거 패배 사이엔 간극이 정말로 컸다.

진짜 “너무한” 찜통더위 때문인지 심각한 느낌은 약해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민주진보세력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결단할 것은 결단하고, 양보, 타협할 것은 그렇게 해야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국민과 함께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파악하는 오늘의 상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명박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강부자’, ‘고소영’ 등 기득권 세력의 오만과 독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민심이반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둘째, 진실한 야권연대가 이뤄지면 국민은 적극 참여한다.

지자제 선거에서 그것은 입증 되었다.

선거 공학적으로 이뤄진 후보단일화는 모조리 실패했다.

은평과 충주가 그랬다.

또 지난 경기도지사 선거도 역시 그랬다.


나는 ‘범야권 단일연합정당’으로 가야한다고 확신한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시장만능주의’를 제외한 모든 세력은 여기에 대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협력하고, 경쟁할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이뤄 내야할 우리의 과업이다.

대타협이 있어야 한다. 가능할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진보적 ‘범야권 단일연합 정당 건설’이 중심의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또 ‘그것을 실현해 낼 동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그것을 실현시킬 의지와 능력이 있는 세력은 누구인가?’ 등이 활발하게 토의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확실한 복지국가로 갈 수 있어야 한다.

진보교육감 등에 대한 기대, 무상급식, 무상보육, 사교육 없는 세상 등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전면적 도입과 내실화,

양극화 문제의 극복방향 제시에 과감해야한다.

또한 유능할 수 있어야 한다.


요사이 동아시아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참으로 고통스럽다.

마치 20세기 초에 발생했던 청일전쟁, 러일전쟁 전야처럼 느껴진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잠재적, 전략적 갈등이 노골화 되고 있다.

그와 더불어 남북 간의 갈등도 더욱 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민주당 전당대회는 이와 별 관계가 없는 듯한 분위기다.


우선,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구조적으로 그렇고 또 요구가 넘쳐 난다.

그것을 외면하면 당선될 수가 없다.

정치자금, 즉 ‘돈’을 대줄 수 있는 사람을 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적나라한 권력정치, 패거리정치가 관철되고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일부 지역위원장들의 영향력이 크다.

일부로부터 받는 돈으로 대의원들이 서울로 오는 비용과 식사대접비용 등을 부담한다.

그리고 누구를 찍으라고 이른바 ‘오더’가 거기서 내려진다.


이것을 밝히고 여기에 개입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모처럼 어쩌다 한 번씩 하는 "우리끼리 잔치"인데 거기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른바 ‘자강론’을 좋아한다.


특단의 조처가 있어야 한다.

서울에 1만여 명이 모여서 큰 집회를 열어야할 필요가 지금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폐해가 너무 크다.

현역 국회의원, 지역위원장 등이 후보캠프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지역위원장이 누구를 찍으라는 이른바 ‘오더’를 내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선관위의 역할이 국민선거 수준에 이르도록 강화하는 것도 검토해 볼 일이다.

이런 일로 정치적 손해를 본적이 몇 번 된다.

그런데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이대로 전당대회가 치러지면 말과 주장은 뭐라고 해도, 진보적 ‘범야권단일연합정당’ 건설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지도부 권력이 자신의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절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깨어있는 시민’의 가슴 속 열정에, ‘행동하는 양심’들의 결단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인가?

길을 만들어야 한다.

그걸 시작하고 싶다.

 

2010년 8월 6일

김근태

 

 

 7.28 선거결과를 보고 국민들께 드리는 글


민주당은 참패했습니다.

높은 투표율 속에서도 참패했기에 그 어떤 변명도 불가능합니다.

오직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솔직히 쓰라립니다.

무엇보다 4대강의 유령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해석할 것 같아 당혹스럽습니다.

하지만 국민들께서 타당한 이유로 저희 민주당을 벌한 것을 받아들입니다.

바로 민주당의 기득권 안주와 오만입니다.

2012년 총선에서가 아니라 이번에 벌한 것을 그나마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선

“지금의 민주당과 야권구도로는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받아낼 수 없다.”

“쇄신 정도가 아니라 대변혁을 이뤄라.”

한마디로 진정한 시대정신과 새로운 정치구도를 찾아내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민주당에 전당대회가 있습니다.

전당대회가 지금까지의 흐름처럼 가서는 안 됩니다.

전당대회가 결국 국회의원의 공천권을 휘두르고, 그것을 기반으로 대권가도에 기득권을 쌓으려는 유력인사들 간의

경쟁과 이합집산으로 흘러간다면 국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곳엔 탐욕만 있을 뿐 희망과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당대회는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일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새로운 정치구도, “범야권단일정당” 건설을 위한 대토론과 대합의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역사를 꿈꾸는 모든 분들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4대강의 통곡, 민주주의의 통곡을 그냥 지나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고맙습니다.

2010년 7월 29일

김근태


9월 4일 오후 1시경 이후, 첫 번째 고문이 끝난 뒤 나는 대답하고 쓰고, 대답하고 쓰고 하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무엇인가 얘기했지만 도무지 기억해 낼 수도 없고 앞뒤가 서로 뒤바뀌어 버렸지만,

고문자들은 끝없이 묻고 또 묻고 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저녁 8시경 백남은이 다시 옷을 벗기고 눈을 가리개로 씌우라고 명령했습니다.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은 민첩하게 움직였고, 나는 또다시 고문대 위에 칭칭 묶여져 버렸습니다.

고문, 이것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서워지고 더욱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고문자들은 점점 크게 보이고 그럴 듯해 보입니다.

당당하고 의젓하게 보이기도 하구요.

물론 무조건 고문하는 것이지요.

요구사항은 없었고 묻지도않았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어떻게 되는 건지 합리적 사고나 대응 같은 것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어느만큼 학대와 능욕을 가하고 나면 고문자들은 반드시 뭔가를 제기하는 것이 있더군요.

이번에는
1) 폭력혁명주의자임을 자백하고
2)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음을 자백하고
3) 각 민주화운동 부문에서 움직이는 핵심적 인물을 대라.

김근태와 민청련이 제일 과격하고 제일 먼저 움직여서 오늘 같은 사태를 가져왔다.

우선 학생운동과 노동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을 대라.

당시 나는 이것이 얼마나 넌센스 같은 요구인지, 왜 이런 것을 요구하는지,

다음에는 무엇으로 연결시키려 하는지에 대해 따지고 생각해 볼 겨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것이 추상적인 협박이고 요구였지만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는 느껴지더군요.

여기서는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고문대 위에서 결심을 했습니다.

'이건 시인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얼마 동안은 사실 끈덕지게 버티었습니다.

허나 안 되더군요.

'이렇게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의 시인은 아니지 않은가'라는 고통에 못 이긴 굴복의 유혹이

머리를 쳐들더군요.

나는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배후가 이범영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사실 나로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누군가를 꼬집어서 얘기하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당시 이범영씨는 이미 경찰의 수배를 받아서 피신 중이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얘기해도 별 피해가 없으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물고문도 대략 5시간 걸렸습니다.

끝난 것이 5일 새벽 1시경이었으니까요.

9월 4일, 두번에 걸친 물고문.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인간적 주체성은 크게 동요되고 일관성 있는 인격은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외부에서 폭력적으로 강제되는 것에 무릎을 끓을 수 밖에 없음을 처절하게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 만화같은 현실에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주체성, 그것을 다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두꺼운 모직겨울점퍼, 검정색과 붉은색의 체크무늬점퍼를 남영동 그곳을 나올 때까지 줄곧 입고 있었습니다.

발뒤꿈치와 팔꿈치의 상처는 이미 하루의 고문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후 이 상처는 더욱 깊어갔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상처는 전혀 문제가 될 수도 없는 것이었지요.

사실은 별로 아프다고 느끼지 못했었으니까요.

그런 정도까지의 아픔은 수없이 많았어도 별 신경 쓸 만한 일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밤을 새우면서 무언가를 많이 대답했습니다.

전기고문과 그 보조로서의 물고문 - 세번째 고문

델시 상표의 사무용 가방을 들고 건장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운동화를 꺼내 신고서 뭔가 삐딱하니 꼬나보더군요.

거리 어느 구석에 있을 깡패, 젼형적인 어깨타입의 풍모였습니다.

눈은 불안정하고 뻐기면서 걷는 인간 백정 같았습니다.

몸무게는 거의 90kg에 육박할 것 같고 키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

'잃어버린 전설'에 나오는, 뒤뜰에서 식칼을 가는 그 누구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그래도 빛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눈동자에 어리는 장난기같은 그림자, 그것뿐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겠더군요.

그런 곳에는 반드시 있을 인간이지요.

말할 것도 없이 고문담당 기술자, 전담자인 것이지요.

"우리 형님은 훨씬 더 무서운데 지금 안 계셔서 다행인 줄 알아라.

그동안 장의사가 한가 했었는데 일감이 풍족하게 생겨서 살맛난다"고도 하고

"작업을 차근차근 해 나갈 터이니까 단단히 각오하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녁 8시 반부터 9월 6일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전기고문'이라고 하니까 고문담당자는 이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배터리고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뭐라해도 전기고문임이 틀림없지요.

5일 저녁 8시반경, 고문하기 전에 뭔가 자기들끼리 수군수군대더니 조용해졌습니다.

최상남은 본인에게 "잠을 전혀 못 자서 피곤할 것이다. 이 방의 불을 끌 수는 없고 대신 눈에 반창고를 붙여 줄 테니까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두라"고 하면서 양쪽 눈에 엑스(X)자로 모두 반창고를 붙였습니다.

 

이런 고마울 데가... 나는 콧등이 시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잠을 청해 볼 양으로 막 의자에 기대는 순간 고문자들이 떼거리로 몰려 들어오면서 소리를 버럭 질러댔습니다.

기습과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작전인 것처럼 인간 파괴의 수치심없는 작전인 것입니다.

전기고문 장치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했구요.

 

완전히 발가벗겨졌습니다.

팬티도 남김없이 날아가 버리고요.

이곳에서 무슨 수치심 그런 것을 여밀 계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팬티조차 벗겨지고 보니까 더욱 당황케 되면서 이제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남은 것이 있고 소극적 저항의 표시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팬티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칠성대 위에 또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습니다.

새끼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주전자로 머리에 물을 들어부었습니다.

 

그 때 물의 선뜩함은 귀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문 기술자는 뭔가 쉴 새 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을 했습니다.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팬티를 벗겼다고 했습니다.

우선 물고문부터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 강도는 물고문만 할 때보다 못했지만 공포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소스라쳐 놀라게 되고 머리를 힘껏 움직이게 되지요.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되어 몸에 땀이 나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강력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다시 약해지고, 가끔씩은 발등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희미한 자국으로 남아 있지만, 그래서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타 버리게 되었습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지켜보고 고문기술자가 직접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의 집행을 김영두에게 지시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한마디로 불고문이었습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입니다.

물고문과 불고문의 조화라고나 할까요.

그 상승효과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고문이 밑바닥에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 즉 불고문은 단근질해서 뜨거운 불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 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온 몸이 저리고 칙칙해져서 끈적끈적한 외마디를 계속 질러대게 되더군요.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끝까지 쑤셔댈 때마다 어두운 비명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몸의 각 부분은 해체되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직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비명뿐이었습니다.

 

몸 전체에 시퍼렇게 핏줄이 솟고, '헉헉' '꺼이꺼이' 목은 쉬어 가는데

이것은 멱이 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고 소리가,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고 강하고도 긴 전류를 흘려보내고, 끙끙대면서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 상태로 돌입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 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또 수시로 해야 됐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면서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됐습니다.

이을호씨의 시민민주혁명, 민족민주혁명, 민중민주혁명의 인정, 그것이었습니다.

고문대 위에서 거부란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나는 처음에는 저항을 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문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제 정말로 위험해지는 것 같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전기고문의 전류에 흔들리더니 여지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또한 이을호씨의 병력이 떠오르고, 본인이 계속 부인할 때 증거확보를 하기 위해

체포 범위를 비이성적으로 확대하는 이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을호씨의 자백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당시에는 은밀히 자신만만한 확신이 있어 결국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고문에 밀려서 씌여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구요.

인간으로서 저항할 수 없는 잔인한 강제에 굴복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합리화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아니 합리화라기보다 생명을 방어하기 위해 남은 단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묶여 고문을 받을 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고문자들의 요구 명령은 귀에 왕스피커를 들이대고 틀어대는 것처럼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아주 깊이 새겨집니다.

영원히 낫지 않는 상처를 입히면서 새겨지는 것입니다.

소름끼치는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면서 각인되는 이 고문자들의 요구에는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가 충전된 채 기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고 이들의 요구 지시를 거부하고자 할 때는 그 충전된 에너지의 저항과 동요에 부딪치게 되며,

고문시의 공포와 그 고통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무리하고 무모한 요구, 황당무계한 강제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 등 모든 수단을 강행케 되는 것입니다.

아! 그 라디오, 박살내 버릴 그 라디오를 펼쳐 내고, 그리고 무슨 노래도 있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라디오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으며 직접 다이얼을 맞추고 조정했습니다.

이들의 고문은 그냥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치밀하게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아마 끊임없이 경험을 통해서 배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문기술을 외국에서 도입했을 것입니다.

이날 본인이 고문대에서 미워하게 된 그 라디오, 그것도 일종의 심리적 고문이었습니다.

 

비전한반도포럼과 5ㆍ18연구소가 주최하고 김대중 평화센터가 후원하는 '행동하는 양심-김대중 사상 대강좌'에서 배포된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강연문입니다. 김근태 상임고문은 11월 3일. 전남대 용봉홀에서 한반도 위기와 민주세력의 책임이라는 주제로 강좌의 첫 번째 강의를 하였습니다. -사진출처 연합뉴스

 

한반도 위기와 민주세력의 책임*


김 근 태

 

1. 빈자리가 크다

 

상당히 추운 날씨다.

가을은 책 읽는 계절이라고 하지만, 올 가을은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을 모으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차가운 바람이 옷소매를 뚫고 들어오는 이 가을 녘에 서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떠나가신 것을 생각해 본다.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2. 절룩거리는 DJ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신 직후, 그 분의 일기가 소책자로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그 작은 책자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71년 국회의원 선거 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진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짤막한 문장이었다.

가슴이 짜안해졌다. 칼로 베인 것처럼 아팠다.

 

71년도 선거과정에서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김대중 후보를 살해하려는 음모가 있었다.

박정희 권력 측의 공작이었다.

아마도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깊게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두 명의 경호원이 목숨을 잃었고, DJ 후보는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 후 평생을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절룩거리게 되었다.

 

95년인가 96년인가에 김대중 총재는 미국 아무개 대학병원에 건너가서 수술을 받기로 하였다.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반대를 했다.

조병옥 박사가 미국 병원에 가서 수술 받다가 돌아 가셨다.

우리 국민에게 큰 충격이었다.

 

90년대는 개명한 세상이라 50년대와 다르다.

하지만, 마음 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김 총재께서 결정해서 안 가신 것이지만, 나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만일 미국에 건너가서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었다면, 일부 기득권 언론의 야유대상이 됐던 저 절룩거림,

그 허벅지 아픔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평생을….
이제 영면하셨으니, 그 아픔도 사라지지 않았을까.


3. DJ는 오늘을 3대 위기라고 규정,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준엄하게 선언

 

김대중 대통령은 오늘 우리 현상을 3대 위기라고 규정하였다.

민주위기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라고 선언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도 행동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악의 편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더 밀고 나가셨다. 이의 제기를 하고 연대하고, 집회·시위에 참여하고 할 것이 많다.

그러나 만일 정 할 것이 없다면 담벼락에 대고 이명박 정권의 억압과 탄압에 항의하라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라고 하셨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라는 말씀이셨다.


4. 그러나 다소 혼란스럽다.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한편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한 시민 500만 명이 있다.

2008년 여름,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던 촛불시민의 강력한 힘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친 서민 행보라는 몇 가지 이벤트가 있다.

중도실용 노선을 걸어가겠다는 주장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40%~50%까지 올라가는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혼란스럽다.

 

작년 이 맘 때, 또 다른 IMF 경제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공포심이 우리를 짓눌렀다.

그러나 지금 공포심은 대폭 약화됐다.

80% 국민이 이명박 대통령의 친 서민 행보에 진정성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경제를 잘 풀어 나가 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그 속에 거품처럼 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제발 우리 좀 살려 달라.

이 팍팍한 삶의 위기를 넘길 수 있게 해 달라는 마음이, 그런 마음이 촛불시민으로 나타나고,

40%~50% 지지도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촛불시민과 높은 국정지지도, 언뜻 다르게 보이는 이 둘은 시민과 국민의 간절한 마음 속에서는 하나이다.

누구든 잘해 달라는 것이다.


5. 분노의 조직화, 저강도 전략의 숨은 의도를 드러내야.

 

이명박 정권은 부익부 빈익빈 정치를 그냥 밀고 나가는 강자, 부자만을 위하는 정권이다.

더 이상의 양극화는 국민을 대대적으로 분열시켜 대립·갈등·투쟁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걱정과 우려에 대해 한나라당 정권은 수월성 이론과 성장의 과실이 흘러내린다는

‘흘러내림(Trickle Down)’이론을 갖고 정당화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하다.

 

용산참사에서, 쌍용자동차에서 권력은 서민과 노동자를 중산층과 분리 고립시킨다.

배제해서 왕따시키고 억압하고 탄압한다.

전면에 나서는 것은 검찰과 일부 기득권 언론 권력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기적으로 독대 보고를 받고 있는 국정원과 기무사는 정치권력의 모든 대치전선에 전면적으로 복귀했다.

지금은 다만 그것을 감추려 하고 있고, 꼬리가 들켜도 막무가내로 부인하고 있다.

이른바 저강도 전략을 펴서,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김제동, 손석희가 중도하차한 것은 부당하고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옛날 같이, 미운털 박히면 구속되기도 하던데 그러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생활에 쫓기고 있고, 억울하지만 하는 수 없지 않은가하며 사람들은 지나가거나 술자리에서 안주거리로 이야기하고 만다.

 

미네르바는 구속되고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다.

실형은 받지 않고, 또 폭행이나 고문도 받지 않았다.

지난 군사독재 시절 보다는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억압하고, 탄압한다.

그래서 분노가 잘 조직되지 않는다.

분노가 폭발했다가도 이 정권의 저강도 전략과 친 서민 행보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생각해 보자. 저들의 저강도 전략은 이미 미국 부시 정권이 사용했던 수법이다.

그것은 국민의 민주화 투쟁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효과적으로 비판자, 반대 세력에게 집중 타격을 가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분노와 항의의 폭 넓은 연대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우리는 이명박 정권의 교활한 저강도 전략을 국민에게 보여 드려야 한다.

그것은 민간독재의 전형적인 수법임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6. 10·28 재·보궐 선거는?

 

10·28 재·보궐 선거는 이명박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에 대한 국민적 심판이다.

10·28 재·보궐 선거는 한나라당의 무능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다.

바닥 민심은 빈익빈 부익부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맹렬하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반사이득을 민주당이 얻게 되었다.

 

민주당을 비롯한 민주개혁 세력에 대해 기대는 있다.

그러나 아직 믿음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민주당의 온전한 승리는 아니다.

만일 지금 이대로 가게 되면 앞으로의 대치전선에서 성공하는 것이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내년 지자제 선거에서 확고한 승리를 거두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단해야 한다.


7. 민주당의 혁신, 민주 개혁세력의 혁신을 밀고 나가야 한다.

혁신에 기초한 통합을 준비하고 성공시켜야 한다.

 

①. 투쟁성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미디어관계법 개정은 절차적 위법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른바 조·중·동 방송을 만들기 위한 미디어관계법은 재논의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절차다. “오프사이드이지만, 골인은 유효하다.”는 분노와 야유가 더 이상 번지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화주의도 아니다.

 

3천 페이지 수사기록을 공개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검찰에게 속수무책인 법원은 이미 국민의 사법부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법부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한낱 권력의 시녀일 뿐이다.

우리는 국민의 눈물이 있는 곳, 그 곳에서 투쟁의 깃발을 다시 올려야 한다.

 

②. 더욱 개혁적이어야 한다.

더 이상의 양극화는 안 된다.

이대로 가면 국민을 분열시켜 격렬하게 대립하게 될 것이다.

블레어 식이 아니라 오바마 식으로 개혁적으로 가야 한다.

민주적 시장경제와 토빈세 도입을 브라질처럼 진지하게 검토할 시기가 되었다.

이제 ‘경제·사회 시스템은 미국식이 아니라 스웨덴 식으로 가는 것이 맞다.’고 결정해야 한다.

 

③.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말씀하신 것처럼, 먼저 자기 몫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통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질 수 있다.

이번 재선거에서 노력했지만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

신뢰도 두텁게 만들지 못했다. 우리의 부족함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8. 행동하는 양심으로 반성하고 전진하자.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고, 하토야마가 일본 총리이다.

만일 정권 재창출에 성공해 민주 개혁세력이 지금 집권하고 있다면 한반도 분단체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동아시아 안보질서인 신 냉전체제를 평화협력 체제로 변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반도는 증오와 대립의 변방이 아니고,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역사적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우리 민주개혁 세력은 깊이 되돌아 봐야 한다.

죄책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시기에 우리는 왜 국민의 마음을 잃어 버렸는가?

우리가 잘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잘 못한 정치는 무엇이고, 또 정책은 무엇인가를 검토하고 정리해야 한다.

 

잘한 것은 계승하고, 한계나 오류는 고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새로운 비전은 무엇인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도 고민해야 할 것이다.


9.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열정이다.

 

지난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침략자인 이등박문을 살해한 지 100주년 되는 날이다.

내 친구 한 사람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만 통곡을 하고 말았다.

30대 초반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 얼마나 쓸쓸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눈물이 그냥 왈칵 쏟아지더라는 것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말씀이 생각난다.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광주시민의 가슴에 새롭고 뜨거운 열정이 모아지면 우리는 3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80년대 초에 민청련 활동을 통해 국면을 전환시켰던 것처럼, 광주시민이 함께 해 주신다면 제가 앞장서겠다.

광주시민 여러분과 함께라면 기꺼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투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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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 그래도 그것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약간 위안이 되더군요.

다 빼았기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남은 것이 있지 않은가 하는 심정이 되더군요.

완전히 벗겨져 버렸을 유태인들에 비하면 기가 꺾인 바가 없지 않지만, 나 비겁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칠성대 위에 걸터앉자 바로 눕혀 버리더군요.

여기서 저항은 앙탈로 전락하거나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임을 나는 이미 눈치 챘습니다.

이때는 칠성대를 볼 수 없었지만 나중에 직접 이 두 눈으로 사진 찍었습니다.

평생 잊지 않도록 깊숙이. 짙은 윤곽선으로 새겨 두었습니다.

그 칠성대, 이렇게 생겼습니다.

세면대보다 약간 높고 남자 팔뚝 굵기의 각목 4개가(어쩌면 5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키보다 약간 크게 길이로 펼쳐지고요,

앞부분은 경사져서 세면대에 착 밀착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위에 담요가 깔려 있구요.

사람이 눕혀지면 담요료 싼 다음에 그 바깥을 줄로 꽁꽁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담요로 몸을 감싸는 것은 몸에 상처가 날까봐 그러는 것입니다.

상처가 남겨진다면 그것은 곤란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으니까요.

 

고문당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님은 두말 할 나위 없습니다.

담요 바깥을 묶는 줄은 군대 허리띠 같은 것으로, 그것도 상처 자국이 남지 않도록 선택된 것이 분명합니다.

 

발목. 무릎 위. 허벅지. 배. 가슴 등 5군데를 묶습니다.

완전히 묶여서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머리를 웁직이지 못하면 곧 상처가 날 터이니까요.

고문의 증거로 남을 터 이구요.

 

하지만 머리의 반만 내지 2/3정도는 받쳐지지 않도록 해서 뒤로 젖혀지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고문할 때 효과적으로 고통을 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를 쓰고 움직이면 발목 아래 부분과 팔꿈치를 약간씩 비틀 수는 있었습니다. 물론 눈은 가린 채 이구요.

칠성대 위에 올려 눕혀진 나는 순식간에 완전히 결박되었습니다.

머리가 핑 하면서도 '자, 그래 견뎌보자, 견디는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닥쳐올 것이라고 각오했던 바가 아니냐.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고, 저 70년대 긴급조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던 그것이 오고 있는 것이다'

라고 속으로 되뇌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별 설득력이 없더군요. 목이 쉰 것만 같구요.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렇게 해. 결국 큰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고 말 것. 이건 너희들도 알고 있을 거야.

클라이막스에서 중지하게 될 거야. 틀림없이. 잎에 침이 마르도록 대화니, 화해니 말해온 것을 싹 지울 수는 없지.

오리발을 내밀어도 유분수지'하고 떠올리며,  여기에 매달리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썩은 동아줄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줄은 여지없이 뚝 끊어졌습니다. 협박자들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물고문으로 들어갔습니다.

백남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따라 얼굴에, 눈이 가려져 있는 내 얼굴에 수건이,

노란 세수수건이 덮어 씌어지고 세상은 희뿌옇게, 누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머리 양쪽으로 정현규와 최상남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힘을 주어 고정시키고

그 위에 수도꼭지를 틀어 샤워기 아가리에 물이 쏟아지도록 했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영두가 그 샤워 꼭지를 잡고 사정없이 얼굴에 물을 들이댔습니다.

그러는 한편 주전자에도 물을 담아 동시에 붓고 또 쏟아부었습니다.

처음에는 칼을 갈면서 견디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은 견딜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을 어떻게 몰아쉬고 또 안 쉬고 또 몰아쉬고요.

 

하지만 애당초 그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탁탁 막히고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안간힘일지도 모르는 그 순간이 덮쳐오는 것이었습니다.

신 냄새나는 짙은 껌껌함으로 뒤바뀌고 속은 메스꺼워지다가 완전히 뒤집히고 콧속에서는 노린내가 치솟고

물이 쏟아지는 그 속에서 불길이 솟고 콧속으로 불길이 솟고요.

온몸을 버둥거리고 혼신의 힘으로 뒤척거리니 칠성대도 기우뚱하였지요.

몸은 완전히 땀으로 젖어버리고 담요도 땀으로 물컹해졌습니다.

샤워기와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의 감촉, 물소리 그것은 공포가 되어 온 몸에 덮쳐오고 천근만근 무게로 짓눌러 왔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견디었는지, 아니 단 1분이라도 견디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게 죽음인가. 죽음의 형제인가. 아, 나는 결국 여기서 굴복하고 마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죽음의 길로 내몰리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아. 그럴 수는 없어. 견디는 거야'

몇 번 다짐할 만한 순간은 있었지만 그것은 오직 수초동안만 지속될 뿐이었습니다.

'그래 무슨 길이 있을거야. 진술 거부는 포기하자. 그리고 부딪쳐 보는 거야.'

생각이 바뀌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 고문자들은 아주 낮게 뭐라고 소곤거리면서 음산하게 웃음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도 그 웃음이 들려오고, 나는 그 웃음을 정말 죽이고 싶었습니다.

나는 진술거부 포기의사를 밝히고자 했지만 이것을 표현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었습니다.

온몸은 뒤채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고, 발가락과 발목을 비틀어도 뒤꿈치에 상처가 날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발견한 것이 고개를 약간 아래 위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표현이 가능한 유일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차디찬 거절이었습니다.

카랑카랑한 금속성의 거절뿐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반응만은 아주 또렷하게 피부로 오싹하게 전달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더 갔는지, 아니 시간 따위과는 관계없이 이제 발버둥질조차 기진하여 할 수 없게 되는구나 싶어지면서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꼈습니다.

오직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쏴' 하고 내리꽂히는 것만이 살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샤워기와 주전자를 치우고, 얼굴에 덮어 씌웠던 수건을 치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밑이 없는 천길 낭떠러지에서 계속 떨어져 내리다가 '아, 이것이 맨 밑바닥이었구나' 하는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구원이었습니다.

말을 하겠다고 진술거부하지 않겠다고 정말 서둘러서 외쳤습니다.

이에 대해 백남은은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물었으며, 본인은 "묻는 말에 뭐든지 대답하겠습니다"라고 기를 써서 대답했습니다.

"뭐, 묻는 말에 대답하겠다고? 필요없어, 아직 멀었구만.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항복이야, 다시 시작해."

대충 이런 내용의 지시를 백남은이 내렸습니다.

그 순간 바로 말을 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미 수건은 덮어 씌어지고 샤워기는 다시 맹렬하게 물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숨 막히는 답답함. 질식해 버릴 것 같은 공포, 그리고 아득하고 아득한 절망감... 그것 뿐이었습니다.

턱을 약간씩 아래 위로 움직이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게 되고 낭떠러지로 다시 곤두박질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은 정지하고 사라져 버리고, 허공에 날리는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오직 고문자들의 조소,

샤워기의 물소리, 온몸을 칭칭 묶인 상태에서 도무지 헛일인 비두발광, 그 셋뿐이었습니다.

물리적 시간, 감각적 시간, 그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고통의 철저한 관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항복하지, 그래도 진술 거부할 거야? 안 하지?" 하며 뭔가 촉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물론 나는 머리를 끄떡였습니다. 수건을 치우더군요. 아직은 살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속은 뒤집혀지고 수없이 올각질을 하게 되구요. 온몸은, 담요는 땀으로 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칠성대 위에서 다시 항복과 진술거부포기를 확인한 다음에 고문자들은 묶은 줄을 풀어주었습니다.

휘청거리며 의자에 앉았습니다.

멍청해져서 시키는 대로 옷을 주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참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벌써 시간은 오후가 된 것이었습니다.

대락 7시 반경부터 이 물고문이 시작되었는데 12시 반이 이미 지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계적 시간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짧은 순간 같기도 하고,

그런 모든 것을 넘어섰던 고통의 영원같기도 했던 이 첫 번째 물고문은 여하튼 5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당시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이 시간을 그래도 나는 기억에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2004년 봄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나는 공동선거대책위원장으로 총선을 치르느라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그때, 연락이 왔다.

일본을 방문해 달라는 것이다.

한일관계의 미래 청사진을 논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동안 의원연맹 등의 이름으로 긴밀히 연계하던 한국 정치인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물갈이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공식 초청자는 일본 외무성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초청자는 자민당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집권 여당으로서 새로운 차원의 한일관계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본 방문은 유쾌하지 않았다.

하루 대여섯 시간, 잠자는 시간 빼고는 자민당사, 총리 관저 혹은 음식점을 오가며 일본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과 대화했다.

자민당에 있는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을 5~6명씩 그룹을 지어 만나고 대화했다.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며, 동북아 공동번영의 길을 외면하는 것은 일본과 한국, 중국 모두의 국익에 반하는 것이다”

“한일 FTA와 더불어 한중 FTA 그리고 한일중 공동 FTA로 나아가자. EU에 맞먹는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비전을 그리자”

“한중일의 공동번영을 위한 경제 공동체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일본의 내부 정치를 위해 북한 문제를 활용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별무소득이었다.

자민당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체로 이런 나의 주장에 대해 낯설어 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한국이 하위 파트너로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과 중국을 배제하고 주변화 시키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벽에 대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공식적인 일정은 자민당의 정치 지도자들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일정은 민주당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는 일로 꽉 짰다.

하토야마 대표, 간 나오토 간사장을 비롯해 얼추 열댓 명의 민주당 지도자들과 토론도 했다.

허름한 맥주 집에서, 어떤 의전도 없이 이뤄지는 단촐한 대화였다.


민주당 의원들과의 대화는 좋았다.

함께 나눠 갖고 있는 공동인식은 소중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끼치고 있는 해악에 대해 같이 걱정했다.

 

동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을 현해탄 너머 일본에서 만나는 건 정말로 좋은 일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나와 하토야마 대표의 의견은 거의 일치했다.

당시 민주당의 지도자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아, 우리는 언제 집권할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움이 전해오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우리가 손잡고 일하면 한일 양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

“다음에는 일본도, 우리도 모두 집권당이 되어 만나자”고 굳은 악수를 나눴다.


5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세계정세는 상당히 변했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은 금융위기와 ‘빈익빈 부익부’라는 흉물스러운 본질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제 미국이 추구하고 한국은 물론 일본에게도 강제하였던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준비할 시점이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동아시아의 새로운 동반 성장 전략을 본격화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미국 네오콘의 몰락으로 동북아 평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구상도 날개를 펼 수 있는 시절이 찾아왔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은 집권당이 되었다.

미국에서도 민주당이 집권을 했다.

얼마 전까지 공고한 것처럼 보였던 한미일 냉전 삼각동맹 가운데 두 축이 무너진 것이다.

미국과 일본에도 ‘대화할 수 있는 정권’ ‘미래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지금 한반도는 ‘평화냐? 대결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런 중대한 시기에 미국과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두 당 모두 대결적 관계가 아닌 평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와 동아시아 건설을 위한 의사가 있다고 기대하고 싶다.


지금만큼 좋은 시기가 없었다.

한반도와 일본, 미국, 중국이 공동으로 냉전적 관계가 아닌 평화번영의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꿈을 꿀 수 있는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정권재창출에 성공하지 못함으로써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생겨 버렸다.


우리의 이러한 부족함과 잘못 때문에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하지만 감히 말하고 싶다.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경제공동체의 꿈은 결코 미룰 수 없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3년 반만 기다려 달라.

우리는 다시 일어 설 것이다.

이 김근태도 그 일을 위해 다시 온 몸을 불사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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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본인에게 직접 고문을 가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용모, 언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습니다.

 

아직도 이 고문자들에게 갖고 있는 두려움, 그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겠지요.

그리고 고문에 가담했던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이 보낸 준 약간의 따스함.

본인에게 너무가 가혹한 고문을 하면서 흘렸던 그 눈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구원의 가냘픈 빛이기조차 했습니다.

이것도 여러가지를 밝히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습니다.

본인이 이 고문자들을 이제는 미워하지 않거나 용서를 했거나 해서는 물론 아닙니다.

아니 용서를 거론하는 것은 명백히 거짓되며, 또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항의하고 규탄하고 고발합니다.

이 참혹한 고문행위를 결정하고 지시한 그 사람들, 사실 초점이 여기에 모아지도록하기 위해,

그러고도 철면피하게 감행하는 은폐행위를 조장하는 자들을 규탄하기 위해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시점에 다다른 거 같습니다.

85년 9월 4일 오전 9시경 본인은 남영동 5층 15호실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문을 지휘하고 감행한 자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과  과장(일명 사장)  총경        윤재호
1과     전무               경정        김수현
1과     전무               경정        백남은
1과       ?                  경감(?)   고문담당전문가
1과     상무               경위        김영두
1과     부장               경장        정현규
1과     부장               경장        최상남
1과     부장               경장        박병선

1과     부장               경장           ?

고문의 직접적 지휘는 전무 김수현과 전무 백남은이 담당했으며 앞 사람이 주 신문관이며 뒤 사람이 부 신문관이었습니다.

김수현에게는 구성요건, 특히 국가보안법 구성요건의 그물망 내로 몰아넣고

구속의 근거와 공소제기 및 유지의 증거를 획득해 내는 임무가 주어졌던 것입니다.

백남은에게는 민주화운동, 특히 재야운동권에 대한 정보를 고문을 통해서 한꺼번에 손쉽게 뽑아내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값싸게 말입니다.

앞에서 장의사집 둘째 주인이라고 언급한 자가 바로 고문기술자로서 건장하고 불량배 냄새가 나는데,

대부분 이 사람이 고문을 직접 감행했습니다.

 

김영두는 대표적으로 고문보조를 했으며 진술조서 작성, 집시법 관계조사 등을 담당했습니다.

나머지는 하수인들로서 고문 보조역할을 담당했고 자술서에 쓸 문장을 본인에게 불러 주는 일, 그리고 방을 지켰던 것입니다.


머리를 쳐박히고서 끌려가다

비가 내리는 새벽 5시 반, 그 날은 유난히 껌껌했습니다.

본인은 잠이 덜 깬 채로 혼란에 빠져 끌려갔습니다.

대략 남영동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헤아리긴 했지만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닌데 어째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아무리 꼽아봐도 가슴 속만 저려올 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혼란스러워지기만 하고.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어떤 의경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렇게 이른 새벽에 내보내주는구나.....,

고마움조차 느끼며 옷을 주섬주섬 꿰어입고 유치장을 나섰습니다.

 

지긋지긋했던 일곱차례의 유치장신세 또 체포, 연금, 이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은 남남이 될 수 있겠구나.

지금 2년 동안 민청련 의장으로서, 민주화운동 대열의 책임을 짊어진 사람으로서 가져야만 했던 외로움과 중압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오늘이다.

무엇보아 잠은 실컷 잘 수 있겠지.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소리에 마음을 실어서 흘려보낼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유치장 문을 나섰습니다.

몇 번 유치장 문을 뒤돌아보기도 하구요,

서부경찰서 유치장은 이번이 두 번째였습니다.

수사과 사무실을 지나 복도로 나서는 순간 스산한 어둠이 확 덮쳐 왔습니다.

7~8명의 정사복이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아찔하더군요. 다리도 후들후들거리고, 여러 번 체포당했었지만 이번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허를 찔린 것입니다.

마음도 몸도 모두 쭈글쭈글해지더군요.

이미 꿈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김근태 씨죠? 같이 가봐야겠소."

경상도 사투리의 거한이 내 앞을 막고 나섰습니다.

순간. '이건 구속이구나' 그쯤은 판단했습니다.

 

이 동행 요구에 강력하게 저항할까도 생각했지만 거기서의 저항은 결코 앙탈에 지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초라해지거나 추하게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소, 어딘지 가봅시다."

보호실 쪽으로 뚫린 좁은 복도를 지나 마당으로 나서니 거기 포니 자동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유행가 곡조가 입속을 맴 돌다 사라지더군요.

 

사방은 껌껌한데 경찰 10명이 둘러싸고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목을 곧추세우고 그래도 하늘 한 번 쳐다보았지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오기를 세워야 했습니다.

잠과 휴식, 그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은 모두 꿈이 되어 버렸습니다.

뿌옇게 탈색된 꿈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뒷자서 가운데 올라탔습니다.

왼쪽에서 최상남이, 오른쪽에는 김영두가 앉았습니다.

 

최상남이 점퍼를 벗어 내 머리를 감싸고 눈이 보이지 않도록 한 채 머리를 짓누르더군요.

김영두는 키 188cm, 몸무게 95kg쯤 나가는 거한한데 그 체격이 나를 짓눌러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왜소해지고 허망해지던지, 나는 저항을 할까도 행각해 봤지만 허둥지둥 해질뿐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경우에는 반드시 저항을 했고 싸움이 붙었습니다.

늘 그랬거든요. 한번도 맥없이 강제로 끌려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안되더군요.

분위기가 얼마간 다른 것도 있었지만 일단 구류를 살고 나가는 날이어서 그저 멍하니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간 기가 꺾였습니다.

반쯤 거리를 둔 채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뭘까에 대해서 바쁘게 머리를 굴리기도 했구요.

 

도착하기 전까지 마음을 세우고 대응 태세를 갖추겠다고 행각하면서 저항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몹시 씁쓰름했습니다.

이것은 패퇴의 보호, 허약함으로 충분히 해석할 수 있을텐데...하고 말입니다.

이리저리 굴려도 오리무중이었습니다.

'그래 부딪치는 거다. 정치군부가 늘 벌여 오던 것이니까 온몸으로 부딪치자.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을 하고 또다시 다짐했습니다.

30~40여분쯤으로 느껴지더군요.

차에서 내려 점퍼를 덮어쓴 채 건물 입구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비좁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누군가 사방에서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환히 들여다보이는 엘리베이터일 것으로도 생각되었습니다.


박살나 버리는 진술거부권-칠성대 위에 올라가기까지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방으로 끌려갔습니다.

겉으로는 주저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습니다.

 

방안에 들어서니까 덮어씌운 점퍼를 치우더군요.

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연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생기도 없고 시들어버리는 듯하면서도 이 모두가 비현실적으로, 그냥 일정한 거리 밖에 널려져 있는 듯했습니다.

 

협박자들, 아직은 고문자가 아니었던 이 사람들은 그냥 어떤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듯하더군요.

무슨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모습도 아니고 눈빛에도 오직 회색빛의 냉담함,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더군요.

백남은은 김영두, 정현규, 최상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내 옷을 벗기라고요.

처음에는 약간 저항을 했으나, 몰려서이기도 했지만 아직 살아남은 오기가 발동하여 스스로 옷을 벗었습니다.

팬티만 남기고 모두 벗었습니다.

 

초라함, 빈약함이 덮쳐오더군요. 추워지기도 하구요.

아직 한창 더운 여름이고 더구나 골방에 갇혀있어 절대로 추울 수가 없느데도,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가는데도 가슴의 한기가 온몸에 퍼져버렸습니다.

발가벗었을 때 오는 당황함과 이 한기가 뒤섞여 몸을 오그라들게 하더군요.

이 사람들 분주하게 들락날락했습니다.

6시 반쯤, 정리된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위험이 닥쳐오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김수현이 들어와서 "진술거부를 잘한다지, 여기서도 할거야? 경찰과는 달라."

이어 본인에게 "당신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가 아픈가?"라고 물었습니다.

"피로의 누적이다. 또 방금 구류살고 나오는 길이어서 더욱 그렇다. 민청련 대표직을 그만두어서 어디 휴양지로 가서

몇 달 쉬려고 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몸으로 견딜 수 있겠는가. 당신 많이 깨져야겠구먼" 했습니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 진술을 거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 사람들이 씹어뱉는 반말 짓거리, 그것이 역시 속을 뒤집어 놨습니다.

지난 2년간 못 들어보다 경멸조 인사에 부아가 솟았습니다.

늘 이 반말 짓거리로부터 왜소해지게 되고 졸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김수현이 무릎을 꿇고 앉으라고 명령하더군요. 거절했습니다.

주춤주춤 밀려서 얼결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비통한 심정이 되더군요.

 

뒤이어 백남은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정말 버틸 거야" 여기서도 진술거부가 통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이에 대해 "끝까지 버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소리가 갈라져 나더군요.

그것은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면서도 한편 더욱 공허해지기도 했구요.

하지만 '설마 너희들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안돼지'라는 무너져가는 듯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세우려는 안간힘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백남은은 "좋다, 해보자. 우리는 너를 까부술 것이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논리적으로 앞뒤 아귀가 맞춰져서 사고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여러 생각이, 장면이 떠오르고 또 중복된 채 다가왔습니다.

필름 한 커트에 여러 장면이 겹쳐서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짧은 순간에 정말 수많은 영상이 닥쳐오고 사라지고, 또 다가오고 쉴 새 없이 돌아갔습니다.

늦가을 초겨울 문턱에서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휘날려 올라가다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발자국에 밟혀서 바스러지는 것이 자주 어른거리기도 했고요,

 

피카소의 청색지대, 비쩍 마른 악사 그림이 가물거리기도 하더군요.

헐벗고 굶주린 어느 병자일 것 같은 물골로 어정쩡하게 서서 말입니다.

사실 나는 평상시 미사에서 자주 읊조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에

은밀한 거부감을 가지고 무시해 버렸었는데 이 순간에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이 협박자들은 넓은 밴드 - 신축성 있는 -로 눈을 가려 버렸습니다.

 

짙은 회색빛으로 앞이 차단당했습니다.

외부의 지시와 명령에 굴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아득함.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으로 고문을 받았다고 널리 알려진 그 학생들의 절망감과 외로음이 찌르르 핏줄을 울리더군요.

아우슈비츠 나치수용소에 갇혀 있던 그 유태인의 얼굴이 내 형제처럼, 아주 잘 아는 얼굴처럼 클로스 업 되었습니다.

사진에서 볼 때,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느꼈던 그런 연민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심장을 쿡 찌르는 동통과 더불어 그 유태인들의 눈물이, 아우성이 펼쳐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던 그 소경이 바로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 협박자들의 손에 이끌려 방 한 가운데를 어기적어기적 거리고 나아갔습니다.

방바닥이 쑥 꺼졌다가 다시 올라오고, 또 꺼지고 올라오고 했지요.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면서도 '아주 작은 물방울이 되어 쓰러져 어릴 수는 없을까,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하는 심정이 되었구요.

그러나 아직 나는 답답했습니다.

이렇게 거꾸러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고문을 정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의 협박일 뿐이다.

그런 빈 협박에 내가 굴복할 줄 아느냐,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속셈을 다시 확인하면서

고문대, 칠성대에 마침내 다다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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