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적

기적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남영동 야수들의 고문흔적은 전혀 반박의 여지없이 내 아내 아니 인재근,

다음에는 최정순, 김상철 변호인의 눈에 가슴에 사진 찍혀 버렸다.

9월 26일 오후 3시경 검찰청 건물에서.....

남영동 짐승들은 무거운 짐을 벗고 얼마간은 승리 비슷한 기분에 싸여 슬슬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돌아갔고.

이른바 검찰 공안부라는데서는 약간 들뜬 긴장 아니면 늦여름 나른한 식곤증에 졸리운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이를 칼날 끝으로 뚫어버린 것이다.

그 후 별별 짓을 다했지만 한번 들통난 것이 지워질 리 있겠는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 거기에 내가 잘 아는 인재근이 서 있었다.

못 본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죽음 저편에서 짓밟혀 버렸던 나는 인재근의 삶 옆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적응하고 이해하는 그런 시간은 필요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인재근의 눈에 물기가 핑 도는 그런 시간으로 충분했다.

이해와 사랑을 실은 눈빛이 나를

짓밟혀 극도로 왜소해진 나를 원상태로 되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은 나에게 부피를, 무게를 되돌려 주는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짓밟혀 짜부러져 평면이 되어버렸고 먼지처럼 왜소해진 나는 부피도, 무게도, 인간적 자존심까지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이 시선에 의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 결정적으로 다시 소생하기 시작해 버린 것이다.

포니 뒷자석 가운데 끼여서 서부역 앞을 지났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햇빛이 따사롭고 눈부셨다.

 

다시 다가온 이 햇빛, 푸른 하늘이 눈물이 나고 시간이 멈춰지는 것 같았다.

죽음의 세계로만 흐르던 시간이 멈춰서고, 분명히 멈추고 서서히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렸던 내 생명이 꿈틀거리면서 강요된 죽음의 영화필름, 헷갈린 내용이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인재근의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정치군부. 남영동 야수들이 심어놓은 내 가슴의 죽음은, 사탄은 소리를 지르면서 내 몸에서, 마음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쫄아서 그런지, 시선의 전류가 아직 약해서인지 혹시 내가 대담해서인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내가 당한 고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처참해 할까도 헤아려 봤고,

동시에 얘기를 듣는다 해도 절망적인 죽음의 정면 얼굴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등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나 개인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 관계된 것이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손목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쩨깍 귀청을 때리는 듯 했다.

서둘러야 했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구체적인 사실을 전해야 한다 하니까 오히려 말을 더듬게 되고, 앞뒤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헛바퀴가 돌아가고 구멍이 뚫어져 김이 새어 나가는 듯 싶기도 하고,

내가 말하고 있는 고문 사실의 그 무게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지, 내 처 얼굴에는 묘한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엄청나서인지 감정 이입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엿보였고,

주고받는 우리의 말과 표정이 서로 따로 노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전한 것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씩 열 번 당했다.

4일, 8일, 13일은 각각 두 번씩, 그리고 5일, 6일, 10일, 20일은 각각 한 번씩 당했다"고 말한 것이 고작이었도,

그것도 숨넘어가듯이 빠르게 해댔다.

이 말을 두어 번 반복한 다음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내 처에게 주었다.

여름이면 무좀이 생겨 성하게 되므로 몇 년 째 샌들을 신어 왔으며 85년 8월 24일 체포될 당시도 그러했다.

간신히 양말을 쭈그려 앉아서 벗었다.

그리고 발뒤꿈치 양쪽과 발등(새끼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윗부분), 양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온몸 다섯군데를 꼼짝 못하도록 묶이고, 전기고문, 물고문 받다가 못 견뎌 비두발광하다가 닳아서 찢어진 것이다.

그리고 양쪽 발뒤꿈치, 팔뒤꿈치가 똑같은 모양으로 상처가 났고,

발등 양쪽에 까맣게 탄 점들이 한 무더기씩 있는 것은 전기고문시 전류가 타서 생긴 것이다."

최대한으로 잘, 그리고 정확하게 전하려고 했지만,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무언가가 가로막혀서 내 의사가 전달되는 것인지 어떤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가위눌린 꿈속에서 진땀 흘리는 것과 유사했다.

 

말을 하려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고 소리를 치려해도 소용이 없고,

두꺼운 유리가 가로막혀져서 입이 벙긋벙긋 하는 것을 보면서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속 태우는 그대로였다.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나는 이 전부를, 이 부서져 쓰러졌던 죽음을 불과 몇 분 동안에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문받았던 얘기를 단순하게 묘사함으로써 깊고 깊게 패인 상처 그 전부를 알아듣기 바랐던 것이었다.

 

그러니 톱니바퀴가 서로 헛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 처를 기적처럼 만나서 내 처에게 요령있게 설명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이 분위기에서

나는 또 다시 깊은 소외감, 버림받은 서러움으로 생채기를 입었다.

그러나 서서히 톱니바퀴가 맞아들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팔꿈치는 피딱지가 져 있었지만, 발뒤꿈치는 그날 아침까지 피고름이 흘렀었다.

 

이것을 모두 내 처는 똑똑히 보았다.

검찰청 4층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 앉아 있었다.

나는 거듭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고, 내 처도 재삼재사 확인했다.

내 처는 그늘진 복도에 서 있어 미묘한 표정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멍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에서 맹렬하게 분노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더니 통곡하는 표정이 되고, 대기실 경찰이 저지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개로 걸어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 쪽문을 닫아 버리니까 또 다른 문으로 돌아오고, 내 처는 그 참혹함을 통째로 이해한 것 같았다.

 

내 처의 치 떨리느 분노로 흐들거리는 것이 나에게 전해 오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그 분노, 그 눈물이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메말라 버려 눈물 따위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내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도 있었구나, 아직 이 세상에 신음, 비명이야 수없이 질러대고

고통과 공포 속에서 울부짖음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지만, 남영동에서 진짜 눈물은 꼭 한 번 흘렸다.

그 이후 나에게서 눈물 같은 것은 사라져 버렸다.

9월 20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반국가단체로 민청련을 몰고 그렇게 피의신문 조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베끼고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그 혼란 중에서도 나는 이것의 현실적인 의미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합법을 가장한 살해를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저들은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온 것이었다.

 

나는 여기 남영동에서 정치군부의 하수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과정의 예비단계를 지나 그것의 확고한 단계로 떠밀려 간 것이었다.

죽음은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고문으로 이미 쓰러져 죽어 있던 나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합법을 가장하여 살해되는구나,

그렇게 하여 죽음을 완성시키는구나, 저들은.

나는 이때 슬퍼서 눈물울 흘렸다.

줄줄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덧씌워져 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눈물은 완전히 말라 버렸는데.....

그랬었는데 내 처의 떨리는 가슴이, 그 눈물이, 아니 창 밖으로 흐르는 푸른 하늘이 내 눈물을 되돌아오게 한 것이었다.

대기실 경찰들은 내 처를 저지하느라고 앞뒷문을 모두 닫아 버리더니 더운지 다시 문을 열어 제꼈다.

내 처는 뭐라고 말하고 사라지더니 잠시 후 아기를 업은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씨와 같이 나타났다.

대기실 입구에 서서 내 상처를 눈여겨보고 헤드라이트 같은 커다란 두 눈이 되는 최정순씨였다.

얼마 후 대기실을 나와 처의 부축을 받으면서 5층 김원치 검사 방 입구까지 같이 갔다.

김원치 검사 방에 들어가 얼마쯤 있으려니까 김상철 변호사가 들어왔다.

내 변호인임을 밝히면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기억을 해내서 말했다.

 

맞은편 자리에서 김원치 검사도 들었다.

김상철 변호인이 들어오기 전에도 고문받은 사실을 말하고, 상처를 김원치 검사에게 보여 주었음은 물론이다.

 

눈물샘이 터졌는지 김상철 변호사와 얘기하면서 나는 자꾸 콧등이 매캐해졌다.

목소리도 자꾸 떨려오고 연달아 아는 세 사람의 우리편, 좋은 나라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잃어버린 내 영토를 수복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검사 방을 나와 구치소로 가는 차를 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처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나는 용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부축하는 처에게 반복해서 고문 얘기를 했고 확실히 기억하도록 당부했다.

구치소로 가는 포니 자동차를 타기 직전 나는 웃어 보였다.

처에게 힘껏 웃어주고 나는 떠났다.

2. 기적

기적을 타고 내려왔다. 그것은.....,

남영동 야수들의 고문흔적은 전혀 반박의 여지없이 내 아내 아니 인재근,

다음에는 최정순, 김상철 변호인의 눈에 가슴에 사진 찍혀 버렸다.

9월 26일 오후 3시경 검찰청 건물에서.....

남영동 짐승들은 무거운 짐을 벗고 얼마간은 승리 비슷한 기분에 싸여 슬슬 휘파람이라도 불면서 돌아갔고.

이른바 검찰 공안부라는데서는 약간 들뜬 긴장 아니면 늦여름 나른한 식곤증에 졸리운 채 기다리고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이를 칼날 끝으로 뚫어버린 것이다.

그 후 별별 짓을 다했지만 한번 들통난 것이 지워질 리 있겠는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 아! 거기에 내가 잘 아는 인재근이 서 있었다.

못 본지 한 달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죽음 저편에서 짓밟혀 버렸던 나는 인재근의 삶 옆으로 도저히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적응하고 이해하는 그런 시간은 필요했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인재근의 눈에 물기가 핑 도는 그런 시간으로 충분했다.

이해와 사랑을 실은 눈빛이 나를

짓밟혀 극도로 왜소해진 나를 원상태로 되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은 나에게 부피를, 무게를 되돌려 주는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짓밟혀 짜부러져 평면이 되어버렸고 먼지처럼 왜소해진 나는 부피도, 무게도, 인간적 자존심까지 모두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이 시선에 의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가 결정적으로 다시 소생하기 시작해 버린 것이다.

포니 뒷자석 가운데 끼여서 서부역 앞을 지났다.

푸른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햇빛이 따사롭고 눈부셨다.

 

다시 다가온 이 햇빛, 푸른 하늘이 눈물이 나고 시간이 멈춰지는 것 같았다.

죽음의 세계로만 흐르던 시간이 멈춰서고, 분명히 멈추고 서서히 필름이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잃어버렸던 내 생명이 꿈틀거리면서 강요된 죽음의 영화필름, 헷갈린 내용이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인재근의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았다.

정치군부. 남영동 야수들이 심어놓은 내 가슴의 죽음은, 사탄은 소리를 지르면서 내 몸에서, 마음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쫄아서 그런지, 시선의 전류가 아직 약해서인지 혹시 내가 대담해서인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내가 당한 고문 얘기를 듣고 얼마나 처참해 할까도 헤아려 봤고,

동시에 얘기를 듣는다 해도 절망적인 죽음의 정면 얼굴을 상상할 수가 있을까 등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나 개인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 관계된 것이므로 말하기로 결정했다.

 

손목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쩨깍 귀청을 때리는 듯 했다.

서둘러야 했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구체적인 사실을 전해야 한다 하니까 오히려 말을 더듬게 되고, 앞뒤가 바뀌어 표현되었다.

 

헛바퀴가 돌아가고 구멍이 뚫어져 김이 새어 나가는 듯 싶기도 하고,

내가 말하고 있는 고문 사실의 그 무게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지, 내 처 얼굴에는 묘한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너무 엄청나서인지 감정 이입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엿보였고,

주고받는 우리의 말과 표정이 서로 따로 노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전한 것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씩 열 번 당했다.

4일, 8일, 13일은 각각 두 번씩, 그리고 5일, 6일, 10일, 20일은 각각 한 번씩 당했다"고 말한 것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숨넘어가듯이 빠르게 해댔다.

이 말을 두어 번 반복한 다음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서 내 처에게 주었다.

여름이면 무좀이 생겨 성하게 되므로 몇 년 째 샌들을 신어 왔으며 85년 8월 24일 체포될 당시도 그러했다.

간신히 양말을 쭈그려 앉아서 벗었다.

그리고 발뒤꿈치 양쪽과 발등(새끼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윗부분), 양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온몸 다섯군데를 꼼짝 못하도록 묶이고, 전기고문, 물고문 받다가 못 견뎌 비두발광하다가 닳아서 찢어진 것이다.

그리고 양쪽 발뒤꿈치, 팔뒤꿈치가 똑같은 모양으로 상처가 났고,

발등 양쪽에 까맣게 탄 점들이 한 무더기씩 있는 것은 전기고문시 전류가 타서 생긴 것이다."

최대한으로 잘, 그리고 정확하게 전하려고 했지만,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무언가가 가로막혀서 내 의사가 전달되는 것인지 어떤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가위눌린 꿈속에서 진땀 흘리는 것과 유사했다.

 

말을 하려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고 소리를 치려해도 소용이 없고,

두꺼운 유리가 가로막혀져서 입이 벙긋벙긋 하는 것을 보면서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속 태우는 그대로였다.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

나는 이 전부를, 이 부서져 쓰러졌던 죽음을 불과 몇 분 동안에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고문받았던 얘기를 단순하게 묘사함으로써 깊고 깊게 패인 상처 그 전부를 알아듣기 바랐던 것이었다.

 

그러니 톱니바퀴가 서로 헛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내 처를 기적처럼 만나서 내 처에게 요령있게 설명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한 이 분위기에서

나는 또 다시 깊은 소외감, 버림받은 서러움으로 생채기를 입었다.

그러나 서서히 톱니바퀴가 맞아들어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팔꿈치는 피딱지가 져 있었지만, 발뒤꿈치는 그날 아침까지 피고름이 흘렀었다.

 

이것을 모두 내 처는 똑똑히 보았다.

검찰청 4층에 있는 대기실로 들어가 앉아 있었다.

나는 거듭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고, 내 처도 재삼재사 확인했다.

내 처는 그늘진 복도에 서 있어 미묘한 표정을 보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멍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에서 맹렬하게 분노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것을,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러더니 통곡하는 표정이 되고, 대기실 경찰이 저지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내개로 걸어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 쪽문을 닫아 버리니까 또 다른 문으로 돌아오고, 내 처는 그 참혹함을 통째로 이해한 것 같았다.

 

내 처의 치 떨리는 분노로 흐들거리는 것이 나에게 전해 오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그 분노, 그 눈물이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완전히 메말라 버려 눈물 따위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내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내 편을 들어주는 친구도 있었구나, 아직 이 세상에 신음, 비명이야 수없이 질러대고

고통과 공포 속에서 울부짖음으로 제 정신이 아니었지만, 남영동에서 진짜 눈물은 꼭 한 번 흘렸다.

그 이후 나에게서 눈물 같은 것은 사라져 버렸다.

9월 20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반국가단체로 민청련을 몰고 그렇게 피의신문 조서를 작성하고, 그것을 베끼고 종착역에 도착한 것이다.

 

그 혼란 중에서도 나는 이것의 현실적인 의미를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합법을 가장한 살해를 성취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저들은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온 것이었다.

 

나는 여기 남영동에서 정치군부의 하수인들에 의해 살해되는 과정의 예비단계를 지나 그것의 확고한 단계로 떠밀려 간 것이었다.

죽음은 이렇게 오는 것이구나,

고문으로 이미 쓰러져 죽어 있던 나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합법을 가장하여 살해되는구나,

그렇게 하여 죽음을 완성시키는구나, 저들은.

나는 이때 슬퍼서 눈물울 흘렸다.

줄줄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이미 회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덧씌워져 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눈물은 완전히 말라 버렸는데.....

그랬었는데 내 처의 떨리는 가슴이, 그 눈물이, 아니 창 밖으로 흐르는 푸른 하늘이 내 눈물을 되돌아오게 한 것이었다.

대기실 경찰들은 내 처를 저지하느라고 앞뒷문을 모두 닫아 버리더니 더운지 다시 문을 열어 제꼈다.

내 처는 뭐라고 말하고 사라지더니 잠시 후 아기를 업은 이을호 씨의 처 최정순씨와 같이 나타났다.

대기실 입구에 서서 내 상처를 눈여겨보고 헤드라이트 같은 커다란 두 눈이 되는 최정순씨였다.

얼마 후 대기실을 나와 처의 부축을 받으면서 5층 김원치 검사 방 입구까지 같이 갔다.

김원치 검사 방에 들어가 얼마쯤 있으려니까 김상철 변호사가 들어왔다.

내 변호인임을 밝히면서 바로 옆 자리에 앉아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손을 마주 잡고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세히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발뒤꿈치, 발등, 팔꿈치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히 기억을 해내서 말했다.

 

맞은편 자리에서 김원치 검사도 들었다.

김상철 변호인이 들어오기 전에도 고문받은 사실을 말하고, 상처를 김원치 검사에게 보여 주었음은 물론이다.

 

눈물샘이 터졌는지 김상철 변호사와 얘기하면서 나는 자꾸 콧등이 매캐해졌다.

목소리도 자꾸 떨려오고 연달아 아는 세 사람의 우리편, 좋은 나라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잃어버린 내 영토를 수복해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검사 방을 나와 구치소로 가는 차를 타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처는 나를 부축해 주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나는 용기를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부축하는 처에게 반복해서 고문 얘기를 했고 확실히 기억하도록 당부했다.

구치소로 가는 포니 자동차를 타기 직전 나는 웃어 보였다.

처에게 힘껏 웃어주고 나는 떠났다.

ㅡ 진보개혁모임 창립대회 기념사



오늘 “대한국민”의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

짓밟히고 있다.

 

오늘 “대한국민”의 민생은 이명박 정권에 의해 외면되고, 경시되고 있다.

한마디로 민생은 심각하다.

위기이다.

 

수출을 위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고환율과 저금리가 계속 유지되는 한

이 정권 아래에서 물가대란은 막을 수 없다.

 

부자감세를 계속하고, 유류세의 탄력적용을 거부하는 한 유류가 급등으로 서민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부동산 가격하락을 막아야, 금융을, 그리고 경제가 망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런 토건철학이 권력집단의 마인드로 자리 잡고 있는 한, “전세대란”은 서민들 당신네들의 걱정거리일 뿐이다.

“주거”의 공공성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있어야 중·장기적으로 전세대란을 극복할 수 있다.

 

세계금융위기를 일으킨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시장강자중심주의,

벌거벗은 천민자본주의를 신성한 시장경제라고 주장하면서 빈익빈, 부익부를 격화시키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독재적이 아니라 이미 “민간독재”인 것이다.

이명박 정권은 빈익빈 부익부를 격화시켜 국민을 대립과 갈등케 만드는 국민분열 세력이다.

 

지금 우리는 크게 분노해야 할 때이다.

꼭 그때 그 처럼은 아니지만 다시 “운동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여기에, 우리는 모였다.

오늘 그 출발의 하나로 “진보개혁 모임”을 발족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 볼 것이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성찰을 국민 여러분께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야 국민 속에서 다시 부활 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고맙다. 마치겠다.

 

 

2011년 3월 8일

진보개혁모임 공동대표 김근태


 

늦었지만 리비아의 “카다피”에 대하여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교민 철수가 거의 완료되었다는 뉴스를 보고나서)

국민의 가슴에, 총질을 해대는 권력자는, 그가 누구든지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것은 이미 범죄이고 적법성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리비아의 카다피가 그에 해당된다.

카다피가 퇴진하도록 필요한 말과 조치를 우리는 강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리비아가 있는 북아프리카는 여기 한반도에 너무 멀고, 심리적 거리는 더 멀다.

또 우리가 어떤 말이나 행동을 취하더라도 카디피 퇴진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한편 우리의 리비아 수출에 지장을 줄 수 있고,

그곳에 진출해 있는 건설업체들에게 부담만 주게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계산은 필요하다.

그러나 북아프리카와 중동 이슬람지역에 불고 있는 민중들의 민주화 바람에 대해 결국 침묵하자는 얘기라면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상호 연관성과 의존성이 높아가고 있는 이 21세기 세계화시대에 걸맞지 않는 선택이다.

 

그것은 앞서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많은 희생과 대가를 지불해왔던 “대한국민”으로서 감히 하자고 할 수 없는 비겁한 외면이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일과 연관되어 있는 것 아닌가?


2011년 3월

 

13. 남영동을 떠나던 날

 


남영동에서 본인이 당하는 고문을 보면서, 그 고문을 거들었던 한 두사람이 보였던 그 눈물, 나는 그것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여기를 떠나라. 정말로 큰일 나겠다"며 그 사람들은 울먹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용기였을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존경과 연민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나에게 구원이었습니다. 빛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동력은 이런 사람들이 여기저기 최악의 곳에서조차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성의 절망적인 측면,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인간동료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악마적 측면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26일 오후 3시경 남영동 5층 15호실을 떠나기에 앞서 나는 김수현과 백남은을 찾았습니다.

잠시 책상을 사이에 두고 김수현과 마주 앉아 얘기했습니다.

별 의미있는 얘기는 없었으나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처참한 고문을 당하고 간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간다.

이러고도 속수무책인 것이 원통하다.

더구나 너무 끔찍하게 당해서 분노하기조차 두려운 것이 한스럽다.

떠나는 지금도 내놓고 욕 한 마디 할 수 없고, 그런 용기조차 생기지 않는 것이 말이다.

당신들, 이 저주받을 인간들, 악마같은 자들은 내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군림했으며

그에 아양조차 떨어야 했던 내게 이 끔찍한 지옥의 올마이티(Almighty)처럼 덮쳐 왔었다'

나는 그 자리를 일어나서 김수현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복잡한 감정을 갖고서.

그랬더니 김수현의 키가 점점 작아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고문실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었던 이 사람은 분명 나에게는 거인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나는 늘 의자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거나 고문대에 묶여 눕혀져 있었고

김수현은 선채로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더욱 육박해 오는 거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남영동을 떠나기 위해 일어서는 이 자리에서 구두를 신은 김수현은 나만한 키이거나 오히려 작게 보였습니다.

이처럼 '쪼그라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나는 늠름함에서 김수현에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김영두 등과도 악수를 했습니다.

 

그 고문기술자도 찾았으나 '없다'고만 하더군요.

포니차를 타기 직전에 백남은이 계단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이 사람도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똑바로 뚫어지게 바라보았습니다.

떠나는 이 마당에서만은 당당하고자 했습니다.

9월 4일부터 25일까지 나는 이런 눈초리로 이들을 한 번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기묘하게 열리는 남영동 대문, '열려라 참깨' 같이도 느껴지는 대문을 나서서

구치감으로 향하는 자동차 속에서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아, 이 낯익은 거리에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이구나, 이 햇빛 속으로.'

이것은 축복이었습니다.

회생일지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죽음 속에서의 돌아옴이었습니다.

검찰청 5층 계단에서 정말 뜻밖에도 본인의 처인 인재근 씨를 만났습니다.

울음이 복받쳐 올랐으나 나는 용케 참아냈습니다.

 

경찰 한 사람과 본인의 처가 계단을 부축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말했습니다. 불과 1분여 동안이었습니다.

 

그 고문은 나 개인에게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얘기했습니다.

고문얘기를 듣고 처가 괴로워할 것을 생각하면서 그만둘까도 했지만,

그럴 문제가 아니었고 도무지 원통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에 나는 말했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침착하게 말하면서 신고 있던 양말을 벗었습니다.

발뒤꿈치의 상처들과 발등의 시꺼멓게 탄 부분을 보여주었고, 팔꿈치의 상처도 보여주었습니다.

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같은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관례와는 다르게 늦은 오후에야 도착한 본인을 만날 수 있덨던 것은, 그리하여 정치군부의 고문과 그 은폐행위가

폭로되고 국내외적으로 맹렬한 비판을 불러일으키게된 이 만남은 본인에게는 영원한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사건의 개요

이 사건은 정치적 보복이며, 그 대상으로 본인이 찍힌 것입니다.

85년 5월, 학생들의 미문화원 사건으로 크게 충격을 받은 정치군부는 학생운동에 그리고 민주화운동에 복수를 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소위 '학원안정법' 제정기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권력 내부의 복잡한 전개도 문제였지만,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반대와 미국을 비롯한 여러나라의 회의적 반응 때문에 물러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타협과 양보를 생각하며 정치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군부는 오히려 수치나 치욕으로 강퍅하게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의한 표적으로, 희생양으로 본인이 선택되었습니다.

한편 '미문화원 농성사건' 이후 정치적 탄압에 몰린 학생들은 민청련 등 여러 재야 단체로 찾아와서

호소도 하고 압력을 가하면서 지원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학생들의 요구에 대해 '그 심정은 이해하지만, 특히 민청련이 개입해서 지원한다면 그 효과보다는

오히려 무거운 부담을 감당해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는 점을 민청련 간부들에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5월 29일쯤 청년학생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종로 2가에서 '광주사태 항의 국민대회'를 시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본인이 구류를 사는 6월 하순에 '민중민주화운동 탄압저지대회'가 서울대에서 열렸는데,

거기에 또 학생들의 강력한 참석 요구에 따라 민청련 상임위원장 김병곤씨가 참석했던 것이 하나의 분수령이었습니다.

 

맨 앞에서 얘기한 대로 5월 29일의 '국민대회'를 학생운동단체와 공동으로 개최한 것을 이유로

정치권력은 본인에 대한 구속을 결심했으리라 추측합니다.

다만 광주사태 문제로 구속하는 것이, 그로인해 발생할 정치적 쟁점이 싫었으리라고 믿어집니다.

이른바 '만민탄 대회' 등 계속되는 학생집회에 민청련 간부이자 학생운동의 선배들이 모여있는

민청련이 지원하는 모습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은 칼을 뽑았고 김병곤씨는 이렇게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병곤씨를 조사한 남영동은 상부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시 신문에도 발표됐듯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덮어 씌우려고 조사했지만 실패했습니다.

 

학생운동의 배후로 만드는 일도 별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본인과의 어떤 직접적 연결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

 

곤경에 몰린 남영동은 무엇인가 보여주어야할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권력의 정치적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85년 8월 '학원안정법' 제정기도 취소 이후 전개될지도 모르는 정치적 곤경을 타개할 수 있는 핑계거리로

본인이 선택되었으며,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무조건 극도로 잔인하게 고문을 가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여하튼 결과적으로 괜찮은 것을 획득하고 만들어만 낸다면

과정에 무리가 있다하더라도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자신했겠지요.

정치적으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계산이 여러 가지로 틀려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선 남영동에서 만든 그 각본이 너무 조잡하고 근거가 박약했던 점일 것입니다.

누구도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본인이 당한 고문이 공공연하게 알려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된 것이 권력의 계산과는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검찰에서 본인의 완강한 진술거부 또한 저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이에 권력은 '공소유지조차 힘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며 허둥지둥댔을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본인을 구속하고도 한달 정도나 그냥 있다가 본인의 묵비권 고수가 결정적인 것으로 보고

10월 2일에야 별안간 민청련 간부를 대대적으로 체포, 구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별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조사해 봐야 별 것 없었고 문제가 되었던 것에 대한 증거수집도 신통치 않았던 점이 명백합니다.

 

본인에 대한 혹심한 고문 얘기를 듣고 잡혀간 간부들은 최민화씨 말대로 얼어 있었는데,

고문은 커녕 폭행조차 당하지 않아서 고마움조차 느끼는 묘한 심리에 빠지게 만들어,

어떤 의미에서는 본인을 함정에 몰아넣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경우, 기적같은 만남을 방지하려고 송치되는 날 구치감을 거치지 않고 바로 검사실로 연행했으며,

또한 그날 당장 보통 관례와는 다르게 피의자 신문조서를 여러 간부들,

최민화, 김희상, 김종복 씨로부터 받아내어 본인에 대한 직.간접의 증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법된 사실은 아니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명백합니다.

남영동의 강박 상태로부터 회복하여 바르게 대처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입니다.

 

본인에 대한 경험,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기 위함이었겠지요.

따라서 세 사람에 대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는 임의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인에 대한 여러가지 탄압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계속 강행되어 나갔던 것입니다.

공소가 제기되었던 사실과도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 KBS-TV와 연합통신을 통하여

서울신문, 경향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실패한 탄압과 고문, 그것의 계속되는 은폐행위,

나아가서는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자 또다시 무모한 시도가 전개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소용없는 것들이 되었습니다.

 한낱 웃음거리로 또 하나의 80년대 희극물로 본 사건이 나타났을 뿐임은 이 시대가, 모든 국민이 알게 된 일이니까요.

- 민주당 지도부에게 보내는 편지

 

손학규 대표님을 비롯한 최고위원 여러분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런 와중에 어려운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스런 마음입니다.

그러나 무릅쓰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당 지도부가 통 큰 결단을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민주당이 통 큰 양보를 해야 할 때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4.27 재보궐 선거에서 전국적 승리를 하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물가급등, 끝나지 않는 구제역사태, 전세대란, 깊어가는 양극화 등

시급하고도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력을 얻기 위해서 정말로 통 큰 양보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지금의 지엽적이거나 낡은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는 한나라당 정권의 정책으로는

이 시급하고 절박한 민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엇나간 오만과 독선에 대한 실망과 반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40% 후반의 지지를 받는다고 하면서 헤매고 있는 저들을 죽비로 내리 칠 수 있도록 우리 야권이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선거에서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국민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무능하고 독선적인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겼다는 것이 정말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분당, 김해, 순천 등에서 적어도 한 곳은 비민주당 야권단일후보가 나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현실정치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운 고통도 받아들여야 할 운명입니다.

그래야 국민 속에서 부활이 가능할 것입니다.

 

연대, 연합특위에서 위원들 간에 의견교환이 있었다는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또 당내 여기저기서 얘기 된 것을 전해 듣기도 했습니다.

범야권 연대를 위해서, 장래의 가치연합, 정책연합, 그리고 조직통합 또는 연합을 위해,

마침 지금 공석이 되어있는 16개 지역위원회 위원장 선임을 보류하자는 의견이 건의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최고위원들이 소극적이거나 침묵을 지켰다는 말을 언론보도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국민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시대정신이 간곡하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百尺竿頭 進一步)의 심정으로 손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정치적 장래에 대한 미세한 계산을 멈추어야합니다.

결단하는 길 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입니다.

 

고심했습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결단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길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2011년 2월 16일

김근태 올림


 

 

 


기러기의 리더쉽

 

겨우살이를 위해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는 리더를 중심으로 "ㅅ"자 대형을 그리며 머나먼 여행을 합니다.

과학자들은 기러기떼들이 왜 그렇게 질서정연한 대열을 이루며 날아가는지를 연구하여 그 이유를 밝혀냈습니다.

 
가장 앞에 날아가는 리더의 날갯짓은 기류에 양력을 만들어
뒤에 따라오는 동료 기러기떼에게 영향을 주어 혼자 날 때보다 무려 71%를 더 쉽게 날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뒤에서 나는 기러기는 먼 길을 가는동안 끊임없이 울음소리를 내는데 이 울음소리는 앞에서 거센 바람을 가르며 힘들게 날아가는 리더에게 보내는 힘찬 응원의 함성입니다.
 

기러기는 40,000 Km의 머나먼 길을 옆에서 함께 날갯짓을 하는 동료를 의지하며 날아 갑니다.

만약 어느 기러기가 총에 맞았다거나 아프거나 지쳐서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면 곁에서 날던 동료 기러기 두 마리도 함께 대열에서 이탈해 지친 동료가 원기를 회복해서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또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동료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지키다가 무리로 다시 돌아 옵니다.


지금 우리는 기러기처럼 아주 멀고 험한 길을 날아가고 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험산과 폭풍이 드세게 밀려 드는 바다를 뚫고 날아가는 힘겨운 여정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당신의 리더십과 뜨거운 열정이 필요합니다.


나와 당신과 우리가 함께 날아가야 할 곳입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 영상 자료실 > 감동 플래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실밥이 뜯어진 운동화  (0) 2012.11.03
아버지는 누구인가?  (0) 2012.11.01
Paul Potts  (0) 2010.05.24
예술인가? 마술인가?...  (0) 2009.06.07
어머니  (0) 2009.02.18

12. 마지막 고문 - 열 번째 고문

9월 20일 저녁 8시경에서 10시 반경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습니다.

김수현, 김영두, 정현규, 박병선, 최상남과 또 한사람이 고문에 가담했습니다.

 

직접 전기고문도구를 든 것은 김수현이었습니다.

그동안 강제해온 것들, 특히 문용식의 N.D.R.과 C.D.R., P.D.R.에 대해서 고문으로 확인해 나갔습니다.

이을호의 C.D.R., N.D.R., P.D.R.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하고요.

 

박문식과 관계가 있었음을 자백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고문대 위에서 수없이 인정하고 암기하였음에도 또다시 반복됐습니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마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이것을 검찰이나 법정에서 부인할 경우의 심각한 두려움,

즉 강제당할 때의 그 고문을 기억시켜 당혹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고도의 심리적, 정신분석적 접근에 기초한 고문행위였다고 믿어집니다.

사실 지금도 고문 당시의 상세한 상황, 김수현이나 백남은의 말과 거동을 거스르는 경우에는 상당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필경 나중에 또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어떤 부분은 그냥 넘어간 부분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전과는 달리 20일에야 비로소 이른바 반국가단체결성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아니, 고문대 위에 있는 본인에게 지시, 명령을 해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요구선에서 한 단계 더 비약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완성된 것을 갖고 한번 더 왕창 고문하여 그것을 암기시키고,

손도장 찍게 하는 것이 능률적이고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런 단계를 거치는 것은 고문자들 나름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각 부분에 그럴 듯한 근거를 마련하고 관련된 사람들의 범위를 그어 나가며,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적 필요성, 활동성에 대응하는 신축성 여지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체결성 인정명령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은 김수현 당신이 스스로 얘기했다.

 

이른바 1월말의 최민화, 박우섭, 김희택, 천영초, 본인이 있었다고 만들어진 - 본인이 여러가지 필요성에서 만든 것인데 -

민청련 사무실의 모임을 얘기하면서

"이것은 당신이 배척받은 것이 분명한데 왜 자꾸 본인이 N.D.R.을 얘기했느냐고 했지 않은가.

그래놓고 이제와서 그것을 민청련의 공식지도이념으로 결정했었다고 자백하라니 아무래도 이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당신 스스로 얘기했던 것을 정면으로 뒤엎는 것이 아닌가" 라며 항변했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애당초 합리화, 논리화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고문대 위에서 버티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어서 결국에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단체결성명령의 항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본인을 처형하겠다는 노골적인 정치군부의 선언입니다.

공포와 고통을 못 견뎌 울부짖는 거야 고문대 위에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정말 슬퍼서 운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아, 내가 죽게 되는구나,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이구나.

그동안 고문대 위에서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었구나.

내 나이 마흔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구나.'

고문대에서 내려와 자리에 앉으니 그냥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멍하니 내버려 두었습니다.

 

바깥사회와 완전히 차단되었던 나는 정치적 사정이, 정치군부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본인의 생명말살을 절대로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각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고 단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끔찍한 고문, 말도 안되는 각본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그래, 죽을 수도 있다. 40년을 살아왔다.

유관순도, 윤동주도, 그리고 김주열도, 80년 광주의 숱한 선랑한 시민들도 그렇게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추하게 정치군부, 너희들에게 굽신거리지는 않겠다.

절대로 휘청거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본인도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없지 않지만,

사실 그때 정치군부의 방향은 이쪽으로 몰고 나가려는 유혹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탄압, 가혹한 탄압에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려 했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내용이 바뀌어지게 됩니다.

김희택씨가 얘기했다고 한 부분에서 처음에는 "일단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하라"는 것으로 본인이 기술하였는데,

여기를 "일단 민청련의 지도이념으로 하되 총선이 끝날 때까지 덮어두는 것으로 하자"고 바꿀 것에 본인은 항복했으며,

3월말 이른바 '작은 자리'의 교육내용 중에서 처음에는 본인이 N.D.R.을 단순히 설명한 것으로만 돼 있었는데,

이것이 민청련 지도이념으로서 확정되는 것으로 수정하도록 강요했고, 속절없이 그렇게 했으며,

8월 10일 5차 총회에서 그 N.D.R.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하여 채택했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의 요구대로 되었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열린 회의에 대해 약간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이을호씨의 자백에는 2월 중순경 민청련 사무실에 15,6명 정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여기서 본인이 N.D.R.을 설명했다고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수정하고자 했습니다.

평회원의 참석도 문제고 너무 여러사람과 관계되어 다치는 범위가 넓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월말 민청련 사무실에서 했다는 5명의 회의를 즉석에서 만들어 냈습니다.

또한 신뢰를 얻기 위해서 본인이 N.D.R.에 대한 설명을 마친 다음, 여덟 사람의 발언까지 제법 그럴 듯하게 기술했습니다.

고문자 특히 김수현은 이를 좋아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을호씨에게 강제하여 얻어 냈던 2월 민청련사무실에서 N.D.R. 설명이라는 것은 전혀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월 민청련 사무실, 2월 민청련 사무실, 3월 작은 자리, 그리고 또 고문자들이 요구하여 기독교회관 내 기독학생총연맹사무실과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까지 총 다섯 번의 설명 내지 발표기회가 있었던 것으로 남영동에서는 작성되었습니다.

검찰에서 2월과 기독교회관, 카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에서의 자리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본인이 1월 말을 만들어 낸 것은 위에서 얘기한 것, 그리고 공판에서 얘기한 이유 외에도 다음과 같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최민화, 김회택, 박우섭, 천영초 씨는 이런 조작된 사실을 충분히 반증해 낼 수 있을 것이며,

본인이 당했던 고문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줄 것이다'는

내 나름대로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김수현은 처음에는 별 주의를 하지 않다가 왜 N.D.R.이라는 주장을 1월말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와 이유를 말하라고 윽박질러 댔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라고요.

 

며칠을 쩔쩔매다가 "공판정에서 진술한 바 있는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 공천추천 의향과 그에 대한 고사에 대하여,

그리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눈치 채인 것에 대해 해명할 필요에서 그렇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개인적 처세의 교만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민주화운동 대열에서 그렇게 자신없는 태도로 활동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출세주의자로 비치지 않을까 조바심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회의원으로 발돋움하는 것으로 민청련 의장 자리를 이용할 의사가 없었고, 또 그렇게 비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것입니다.

 

김영삼 총재와 만난 것, 고사한 것에 대해 신의를 갖고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기로 약속했고,

또 그렇게 했기 때문에 이를 해명할 필요는 물론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어느 의미에서는 민청련 활동에 대한 인정으로, 대중적 인식이 넓어져 가는 것으로

본인을 비롯한 민청련 회원이 자부심조차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N.D.R.발상의 배경과 계기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남영동은 20일에 N.D.R.을 민청련 지도이념으로,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완결지었던 것입니다.

 

20일 이후는 이에 대한 서류정리, 진술서, 진술조서 작성 때문에 고문 받은 20일은 물론 거의 25일까지 내내 한잠도 못 잤습니다.

26일 새벽 3시 20분 용산경찰서 유치장에 이르러 눈을 붙일 때까지.

25일 새벽 5시 30분, 본인이 자그만 반란을 일으켜 김수현으로부터 10여 차례 한 20분간 집중폭행을 당했습니다.

참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끔찍스런 고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되었습니다.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 당했는데, 다른 경우 같았으면 크게 항의했을 그런 일이지만,

백 번을 그렇게 해도 난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문용식과의 관계, N.D.R.에 대해 다시 내가 부정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문용식씨가 무서웠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심정은 이해되지만

마치 물귀신처럼 아무나 무엇이거나 잡고 같이 익사하자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본인 말고는 반증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본인은 필사적이었습니다.

김수현은 "이 새끼, 벌써부터 법정투쟁을 준비하는 거야? 이런 새끼는 가만 둘 수 없어" 하면서

당시 본인이 입고 있던 겨울 모직점퍼를 벗긴 다음에 에어컨에 기대어 세운 채 가슴을 가격했습니다.

 

결국에는 이들에게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나는 자포자기하여 혼란에 빠져들지는 않았습니다.

가능한 경우 나는 다시 저항했던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존심의 불씨, 굴욕을 거부하는 불꽃이 완전히 꺼져 버렸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 한국경제 미래가 백척간두에 섰습니다.

'G20' 이라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호의 저 객실 한 구석에선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미FTA 밀실협상이 진행 중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번 서울행 목적이 G20 정상회의가 아니라 한미 FTA타결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게 부담을 주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정부는 밀실협상으로 이에 화답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협상에서 지난번 쇠고기협상에서처럼 덜컥 무리수를 놓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필 한미 쇠고기 협상의 주역이었던 민동석씨가 이 시점에 외교부 차관으로 컴백했다는 사실이 단지 우연일까요?

 

민동석 그가 누구입니까?

자신의 영달과 윗사람 눈치 보기 때문에 우리국민의 건강권과 우리나라의 검역주권을 포기했던 사람입니다.

그러고서도 “미국이 준 선물”이라고 뻔뻔스럽게 적반하장으로 나왔던 사람 아닙니까?


민주당 지도부와 당원동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길은 외통수입니다.

이대로 두면 이명박 정부는 한미FTA를 쇠고기 협상처럼 처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전면적 재협상을 당론으로 채택해야합니다.

투자자-국가 제소 조항, 네거티브 리스트 조항, 이른바 역진방지조항, 서비스․의약품 조항 등

각종 독소불평등 조항에 대해 전면적 재협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전면적 재협상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G20의장국답게 당당하게 미국과 협상하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만일 합의가 안 되면 이런 내용으로는 중단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에게 전면적 재협상을 하라고 하는 것은 마치 고양이 앞에 생선을 바치는 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미FTA를 지금대로 하라고 한대서 민동석 차관을 새롭게 등용한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미국이 준 선물”과는 다르게 협상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저들에게 맡기고 뒷북칠 일이 아닙니다.

민주당이 앞장서서 행동해야 합니다.

결연한 마음으로 국민과 함께 일어나서 반대하지 않으면 미국의 교만한 요구 앞에 속수무책이 될 것입니다.

물론 지난 참여정부시절 집권당으로서 추진했던 한미FTA를 이제와서 부정하는 것에 부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자기부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지난 과오를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은 물론 국민과 역사 앞에 더 부끄러운 일 아니겠습니까?

지난 97년 IMF 체제를 돌이켜 봅시다.
OECD 가입을 허락하는 대신 자본자유화, 외환자유화, 이른바 환율시장화라는 미국과 IMF의 강요를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경제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이 우리가 이뤄놓은 성과, 특히 경쟁력 있는 제조업과 “금모으기운동”에 나섰던 국민의 단합정신이 있었기에

파국의 길은 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경제와 서민생활은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IMF 위기를 통해서 우리 경제는 급속히 미국화 되었고, 미국의 금융자본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경제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으로의 제도화가 개혁의 이름으로 추진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경제시스템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한강의 기적’이라 일컫던 한국경제의 다이나믹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성장의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부유층과 서민의 양극화를 격화시켰습니다.

한국사회를 결정적으로 분열시켜 버렸습니다. 일자리를 없앴고, 있는 일자리의 절반은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불안과 공포의 사회, 패자부활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은 우리의 길이 아님이 분명해 졌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미 FTA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시기에 지지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집권시절 국내외 신자유의주의 세력의 압력과 영향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휘둘렸습니다.

미국식 양극화라는 덫에 걸려 정권을 교체당하고 말았습니다.

양극화 앞에서 좌절하고 분노한 서민과 중산층의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라는 비난 앞에서 우리는 초라해졌던 것 아닙니까.

진정한 반성은 진정한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말로만 반성한들 그 어떤 국민이 믿겠습니까.

우리 민주당이 민주· 개혁· 진보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이라면 반드시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한미FTA, 그것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고백해야 합니다.


이제 ‘진실의 순간’이 우리 앞에 왔습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시간도 없습니다.

국민과 역사의 요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합니다.

2010년 11월 2일
민주당 상임고문 김근태

 

내가 살고 있는 도봉구에 “가인(佳人)”초등학교라는 곳이 있다.
지역 주민 대부분께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 왜 그렇게 이름 지었는지 잘 모른다.
또 너무 어려운 말이어서 알고 싶은 호기심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지난 15여 년 동안 이 곳 도봉구에는 학교가 많이 지어졌다.
나는 사명감을 갖고 여기 창동에 사셨던 독립운동가들의 성함을 학교 이름으로 짓도록 노력했지만

성공한 것은 단 하나 “가인” 초등학교뿐이었다.

그것도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본명도 아닌 ‘호’를 따서 지은 누구도 잘 알 수 없는 이름일 뿐이었다.

우선 이곳을 관할하는 교육장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일제 치하 1930년대 중후반기 군국주의가 노골화되고, 민족독립운동을 하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수도였던 경성의 고등계 형사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나고자 이사해 온 곳이 여기 창동이었다.

경원선 출발역인 청량리에서 한 정거장인 이곳은 경성이 아니면서도 정보를 곧 전해들을 수 있는 안성맞춤 지역이었다.

한때는 도산 안창호, 위당 정인보, 임꺽정의 홍명희, 조선 무용가 최승희, 김병로 선생 등이 이곳에 모여 사셨다고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이곳 노인 어르신 일부에게만 알려져 있었다.

미국이나 서양처럼 사람 이름을 따서 학교, 거리, 건물 이름을 짓는 것에 익숙한 문화가 아닌데다

서양처럼 사람이름을 따서 기념하는 북한이 의식되기도 했던 모양이었다.

 

“안창호” 고등학교, “정인보”중학교라고 하면 전국의 많은 사람들의 귀에 쏘옥 들어갈 것이고,

재학생들에게도 그런 이름 자체만으로도 큰 가르침이 될 것이고, 경쟁력도 그만큼 높아지지 않겠느냐고 권고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이 말한 학생인권조례(안)과 그에 대한 교육부, 교육관료, 일부교사

그리고 오늘 한국의 특권적 지배계층의 반응을 보면서 지난 일이 떠오른다.

우선 나는 전혀 놀라지 않고 있다. 교육도 ‘시장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공교육, 사교육에 있어서의 우월적 위치를 계속 대를 이어 유지하려고 한다.

이들로서는 기본적으로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고 ‘훈육’되어야 할 ‘객체’로 규정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체벌을 금지하고 두발자유를 보장받는 교육의 주체로서 학생들이 인정받는 순간

혹시 권위주의적 시장주의 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이기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욕망 충족과 더불어 소통, 협력, 연대 없이는 심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

교육과정은 이 상호 충돌할 수 있는 근원적 욕구를 어떻게 이해하고 조정하고 상승시킬 수 있는지,

적어도 최악의 대립과 불행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인지 협동교육을 통해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학생들은 교육과정에서 사회와 국가의 도움을 받고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도움을 받는다해서 학생 개개인의 주체성이 훼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어떻게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체벌을 이른바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허용할 수 있겠는가.

또 의존적인 계층의 표시로 두발 규격화에 복종해야 한다고 우길 수 있겠는가.

시행령을 고쳐서 학생인권조례를 사실상 무력화 시키고자 하는 교육부는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교육의 선진화, 사회의 진정한 선진화를 방해하는 잘못된 권위주의적 선택이다.

2010년 10월

김근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