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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6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차기 집권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이으면서 긴 세월 옥중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구상해온 국가경영의 큰 뜻을 펴보고자 하였다. 당내 경선만 통과하면 본선에서는, 다수의 국민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하고 고루 잘 사는 사회를 꿈꾸어온 정직한 자신을 선택하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기로 했다.

김근태는 1월 24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반부패 대통령이 되겠다”며 당내 대선후보 경선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결코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며 “저에게 기회를 주면 반부패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고 국민ㆍ언론ㆍ검찰이 함께 하는 ‘깨끗한 손 운동’과 같은 범국민적인 부패와의 전쟁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김근태가 후보경선 출마선언에서 제시한 주요 정책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정치혁명의 이정표를 세우겠다.
대세론과 지역후보론은 낡은 정치행태다.
각 후보가 정책과 비전, 자질이 투명하게 검증되는 경선의 장에 당당하게 나설 것을 촉구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실천을 담보하는 리더십, 언행이 일치하는 진실된 리더십이 요구된다.
특권과 부정부패, 지역주의를 뿌리뽑고 깨끗한 사회, 경제도약, 한반도 평화정착을 이루겠다.


김근태는 출마 회견에서 “우리당 경선후보들이 돈 안 쓰는 선거를 실천하기 위해 이번 경선에서 얼마를 쓸 것인지를 공개하고 경선 후에도 지출내역을 함께 공개할 것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당내 특정계보가 후보경선에 간여하거나, (예비후보들이) 특정계보에  기대어 후보가 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에도 강력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쇄신과정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반대하다가 대통령이 총재직을 사임하자마자 이른바 차별화를 들고 나온다면 잘못된 태도”라고 비판했다.
(주석 4)

 

다음은 일문일답.

- 타 주자들이 경선비용 공개 제안을 수용안해도 혼자 할 의향이 있나.
△ 당 선관위와 지도부가 전향적으로 검토해주길 바란다. 함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 특정계보 경선 개입 반대는 동교동계를 지칭하는 것인가.
△ 대통령이 총재로 계실 때 특정계보는 하나만 존재했고 지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면 공정한 경선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다.

- 노무현 상임고문 등 개혁세력 연대문제에 대한 견해는.
△ 지금은 각 출마자가 자기의 비전, 정책, 열정으로 경쟁하는 게 오히려 큰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국민이 기대하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임하겠다.

- 내각제와 자민련과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 이 시점에서 내각제 개헌은 어렵고 정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바란다. 이회창 총재가 결심하면 시간은 충분하다. 자민련과의 연대는 긍정적이나 합당은 반대다. 정치적 거래로 규정될 가능성이 있으며 시너지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다.

- 8. 30 전당대회 때 권노갑 전 최고위원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했는데.
△ 도움 받았다고 인정한다. 액수 공개는 적절한 기회를 보겠다. 그분들(동교동계)의 지난날에 대해 평가하지만 거듭 태어나야한다.
(주석 5)


주석
4> <연합뉴스>, 2002년 1월 24일.
5>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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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5 08:00 김삼웅

 

 

 

김근태가 대선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개인적 야망때문만이 아니었다.
원내에 진출한 이래 동료 의원들과 언론, 국민은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고, 여론조사에서 ‘차기’ 유력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민주화운동 전력과 능력, 신사적인 의정활동이 드러난 것이다.

김근태는 1998년 8월, <신동아>가 실시한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에 선정되고, <뉴스피플>의 1999년 1월에 ‘가장 기대되고 호감가는 정치인’ 1위에 뽑혔으며, 4월에는 <일요신문>의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리더’ 1위에 올랐다. 같은 해 10월 27일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가 정치부 기자 202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정직성, 언행일치, 공정한 처신, 모범적 의정활동 등의 항목에서 압도적인 득표를 기록한 김근태를 백봉 신사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그는 네 차례나 이 상을 수상했다.

앞의 <신동아>가 ‘의원들이 뽑은 상대당의 우수의원’(설문응답 171명)에서 야당의원이 뽑은 우수 여당의원에 ‘실력 및 성실성’의 항목에서 김근태(8표)ㆍ조순형(6표)ㆍ정세균(4표), ‘매너’ 부문에서 김근태ㆍ김원길ㆍ강창희ㆍ이협ㆍ조순형ㆍ조순승 순위였다. 여당의원이 뽑은 우수 야당의원은 이미경ㆍ김기춘 등이 윗자리를 차지했다.

<시사저널>이 1999년 11월 실시한 ‘21세기 한국을 이끌어 갈 가장 적합한 정치인’의 여론조사는 김민석(1), 이회창(2), 이인제(3), 김근태(4), 노무현(5)의 순위로 선정되고, <한겨레21>이 2000년 5월 8일 국회의원 당선자 273명을 대상으로 ‘네티즌이 뽑은 16대 국회 예비스타’에는 김민석ㆍ임종석ㆍ추미애에 이어 4위에 올랐다. 2000년 6월 25일부터 4일간 사이버 정치증권 시장인 포스탁(www.posdaq.co.kr)이 시민 1,031명을 대상(복수응답 7,217표)를 상대로 실시한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20~30대 네티즌들은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후보 가운데 김근태 의원을 가장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근태가 894표(12.4%)로 최다득표를 하고, 한화갑 881표(12.2%), 이인제 829표(11.5%), 정동영 811표(11.2%), 박상천 849표(9.0%), 김민석 644표(8.9%), 추미애 507표(7.0%) 순이었다.

<뉴스피플>은 1999년 12월 16일치에 ‘21세기 한국을 이끌 뉴리더 21인’을 선정 발표했다.
이회창, 김대중, 이건희, 정몽준, 박원순, 김근태, 이인제, 정몽구, 김민석, 정명훈, 정주영 순이었다. 같은 무렵 <경향신문>이 조사한 국회 여야 의원을 통틀어 가장 진보적 의원에는 김근태(60), 이부영(31), 김문수(20), 김원웅(19), 임종석(19), 김민석(12), 이창복(11), 이재정(10), 이해찬(7)으로 김근태가 진보의 기수로 선정되었다.

 



 

대학교수들이 실시한 국회의원 299명 중 가장 진보성향의 국회의원에는 김근태가 압도적으로 1위에 뽑혔다. 지식인과 정치부 기자들은 그를 ‘차기 1순위’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뉴스메이커> 1999년 12월 9일치는 ‘차세대 지도자 집중분석 시리즈’를 싣고 김근태 국민회의 부총재를 ‘집중분석’했다. 이 기사는 ‘전문가들이 지적한 10대 장점과 10대 단점’을 제시했다.

전문가들이 지적한 10대 장점과 10대 단점

장점                           
1. 민주화의 희생자라는 인식
2. 재야 출신의 도덕성
3. 진보적이고 개혁적 이미지
4. 활발한 의정 활동(기초에 충실)
5. 인간적 친화력이 뛰어남
6.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음
7. 지역감정에서 자유스러움
8. 치밀하고 합리적인 성격
9. 부인 인재근씨의 지명도
10. 폭넓은 대인 관계

단점

1. 이미지가 가벼워 보임
2. 학자적 스타일
3. 행정 경험이 없음
4. 정치적 리더십이 검증되지 못함
5. 재야 출신 이미지
6. 대중적 인지도가 낮음
7. 정치적 지역 기반 취약
8. 국가적 정책 제시가 미흡
9. 당내 기반 취약
10. 3김 극복 결단력 부족

<뉴스메이커>는 또 역학자 마의천(六甲의 저자)의 김근태 ‘관상평’을 실어 세간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000년에는 제2의 성城 구축한다”

학변동오지상(鶴變冬烏之相), 두루미가 찬 겨울 까마귀로 변하여 소나무에 앉아 먹이를 노리는 형상이다.
얼굴이 긴 장안(長顔)에 눈빛이 야릇하여 심오함과 일을 도모함에 묘미가 있다. 이마가 직립해 학업 운은 있으나 이마 양옆 부위가 협소해 초년에 뜻을 펴지 못하는 불운이 있다.

자신의 웅지를 피려는 투자에 찬 기(氣)가 충족돼 있으나 신(神)이 부족해 40세 이전까지 몽유(夢遊)할 뿐이다. 얼굴이 바람 풍(風)자 형으로 인생 풍파는 거세지만 뼈가 곧고 면모가 청수해 그 뜻이 고원(高遠)하다.

눈썹이 양분해 형제 동기의 덕은 없으나, 어미 간문골이 둥그린 태를 이루고 있어 처자 덕은 있다. 얼굴 중심인 비량(鼻粱ㆍ콧등)이 틀어져 45세 이전에는 늪에 빠져 인생을 자탄한다. 그러나 법령선이 곧고 양 턱 부위가 힘있게 뻗어 노년은 평안하고 진취적이다.

45~46세부터 운명이 환희적 전환기를 맞는다. 눈동자가 붉고 흐린 듯하나 눈빛에 은광(隱光)이 나와 탁기(濁氣)를 만회하고 주위의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중적이고 이단적인 성격이 마음속 깊이 숨어 있다. 99년은 보이지 않는 고통이 따랐지만 기반을 닦고, 2000년 53~54세 운세는 강둑에 바늘구멍이 있어 배신의 통(通)이 있지만 제2의 성을 구축하는 성숙의 운력이다.

수지모야 무면수(誰知暮夜 無眠愁) 심해창파 자주망(深海滄波 自走忙) 수지북림 좌한구(須知北林 坐寒鳩) 갱위남류 금의맹(更爲南榴 錦衣甍).

긴 밤 잠 못 이루는 근심을 누가 알겠는가. 심해 창파 스스로 분주한 명이여.
모름지기 북림의 찬 비둘기는 알 것이다. 다시 남류의 호화스런 꾀꼬리가 될 것을.
(주석 2)

<대한매일>은 1999년 1월 7일치에서 ‘99년의 정치인 99인’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52.9%, 이회창 20.6%, 김종필 16.3%, 김민석 11.1%, 노무현 7.2%, 이인제 6.1%, 이해찬 4.7%, 김근태 4.2%, 조세형 4.2%, 강재섭 4%의 순으로 “99년 한국정치를 이끌어갈 가장 기대되거나 호감이 가는 정치인은 누구입니까”의 조사결과를 실었다.

<대한매일>의 주간 자매지 <뉴스피플>이 여론조사기관 한길리서치와 공동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반국민 6,000명과 각 분야 전문가 100명 씩을 조사대상으로 하였다.

<신동아>는 2001년 8월호에서 “한국의 21세기를 열어가는데 가장 적합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을 선정 발표했다. 중앙일간지와 방송기자 10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였다. 여야 구분 없이 3명까지 복수답변토록 한 조사결과 강재섭(1), 김근태(2), 이인제(3), 손학규(4), 김덕룡(5), 한화갑(6), 이부영(7), 노무현(8)의 순위로 나타났다.

정치개혁시민연대와 의회발전시민봉사단이 1999년 10월에 발표한 ‘98년 국정감사 모니터 활동결과’에서 김근태는 재경위의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선정되었다. 두 단체의 ‘상임위별 바람직한 의원’에도 김근태는 재경위의 대표로 뽑혔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김근태는 초선 시절부터 주목받는 정치인, 2000년대 한국을 이끌 정치 리더로 지목되었다. 여야의 쟁쟁한 다선 의원들을 제치고 상위권에 선정되고, 상임위와 국정감사 활동에서도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신동아>는 2001년 9월호에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의 인간탐구’에서 “김근태의 이상주의 이인화의 영웅주의”를 함께 실었다.

정치부 기자나 지식인 집단을 대상으로 한 ‘차세대 지도자’ 선정 조사에서 그가 몇 년 째 1위를 차지한 것은 반갑다. ‘믿어 줄 만한 가치’가 있는 정치인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또 민주화운동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성으로 해서 “괜찮은 사람이구나” 하는 인정을 받고 있다는 한 징표라는 분석 때문이다. 지도자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와 대중적 인지도를 일치시키는 일은 정치 전략적으로 해결할 문제이므로 필자의 영역 밖이다.(…)

더 개인적인 이유로 필자는 김근태가 정치인으로 꼭 성공하길 바란다. 김근태 같은 사람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나라 정치에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라는 인간적인 걱정 때문이다. 김근태는 그런 ‘희망의 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주석 3)


주석
2> <뉴스메이커>, 1999년 12월 9일.
3> <신동아>, 2001년 9월호, 3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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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4 08:00 김삼웅

 

 

김근태 의원과 부인 인씨가 후원의 밤에서 희망돼지모임 회원들에게 희망돼지 저금통을 전달받고 기뻐하고 있다. 사진은 오마이뉴스 이종호

 

김근태의 성실한 의정활동과 폭넓은 대내외 활동에도 대중적 인기는 크게 오르지 않았다. 어느 주간지가 “재목은 대통령감, 인지도는 시장감”(<시사저널>)이라고 뽑을만큼 다른 ‘잠룡’들에 비해 지지율이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의 책무’를 생각하면서 경선출마를 서둘렀다.

능력이나 인품과 대중성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의 정치풍토는 더욱 그런 편이다. 연꽃은 흙탕물에서도 곱게 피지만 흙탕물 못지 않는 한국 정계의 탁류에서 식견과 품성이 우수한 사람이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경우는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김근태는 당내 대선 경선을 앞두고 여러날 고심을 거듭했다.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 때에도 돈이 없어 쩔쩔맸던 터였다. 최고위원 경선이 지역주의와 돈이 당락을 좌우하는 것을 지켜보던 터라 고심은 더욱 짙었다.

김근태는 2001년 5월 작가 공지영과 가진 인터뷰에서 “나도 정치적으로 폭발할 기회가 온다”면서 대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긴 대담에서 공지영이 뽑은 발문에서 이즈음 김근태의 고뇌의 일단을 살피게 된다.

“정당 내부의 민주화를 이뤄야 합니다. 집권민주당 역시 이념과 정책과 역사성에서는 민주정당이지만 그 행태와 정책 실현의 과정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맹목적 지역주의, 그에 기초한 보수체제와의 연결고리를 혁파해야 합니다.”

“정치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져요. 높은 수준에서 보면 다 똑같이 보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나은 사회, 좀더 땀흘리는 사람이 공정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의원들에게는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고, 그것과 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준엄한 비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진보라는 것은 법치주의ㆍ법치사회를 만들고자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은 포용할 수 있어야 돼요. 포용이 아니면 적어도 더불어 함께할 수 있는 연합을 이룰 수 있어야 되지요.…자기 세력을 특별하게 규정하면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다 상대편으로 쫓아내는 결과로 나타나고, 그래서 소수화시키면서 어려움이 발생하죠.”

“저는 사회심리적으로 한국사회가 굉장히 위험하다고 봅니다. 미국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가면 한국 국민의 심리가 어떨까… 걱정되요. 국민통합은 지역주의 때문에 이뤄지지 않고, 정치참여는 불신 때문에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김대중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매우 좁습니다.”
(주석 1)

중국의 근대혁명을 주도한 문인 루쉰의 산문에 ‘불의 얼음’이란 대목이 나온다. 표면은 얼음처럼 차갑지만 그 안은 용암처럼 뜨겁게 분출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김근태를 여기에 대입하면 맞을 듯 하다.

김근태는 2002년 2월에 시작되는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후보를 뽑는 국민경선에 나서기로 했다. 1년 전 기존의 새정치국민회의를 확대 개편하여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고, 김근태는 상임고문에 추대되어 당의 중진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참이다.

김대중 정권에 이어 개혁진보세력이 다시 정권을 맡아서 민주화와 서민생계, 그리고 남북관계를 더욱 화해협력 체제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정신이라 믿었다. 보수세력이 반세기 이상 한국사회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빈부ㆍ지역ㆍ도농ㆍ남녀ㆍ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가져오고, 남북 대결을 불러온 파행성을 김대중의 5년 집권으로는 바로잡기 어렵다는 것이 김근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주석
1> <월간중앙>, 2001년 5월호, 136~148쪽, 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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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5장] 대선 경선출마와 좌절의 아픔

2012/10/1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2000년대를 맞아 한 개인의 부하(負荷)로만 환원되기 어려운 역사의 책무를 감내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 천년이 열리고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열전과 냉전으로 반세기 이상 대치ㆍ대결해온 남북이 정상회담을 통해 6ㆍ15선언을 채택하는 등 화해협력의 물꼬가 트였다.

하지만 국내 정치는 여전히 원초적인 대결과 갈등이 끊이지 않고, 수구정치세력과 정치권력화된 수구신문은 진보개혁진영을 적대시하였다. 그런가하면 IMF극복과정에서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 구조는 빈부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노동자들은 실업과 극심한 생활고에 내몰렸다. 개혁세력이라는 집권 민주당은 여전히 20세기적 파당과 패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김근태의 대선경선 준비는 오래 전부터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변형윤ㆍ고은 등 재야 인사와 당내에서는 이재정ㆍ장영달ㆍ임종석ㆍ이창복ㆍ김태홍ㆍ신기남 의원 등 쇄신파 의원 10여 명이 도왔다.

그는 우선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현장에서 살피기 위해 1999년 4월 14일부터 10일간 일정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과거 여느 대권 주자들처럼 미국 조야에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 정부지도자회의’ 한국대표로 초청된 것이다.

당시 김근태는 국민회의 전자정부구현정책기획단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방미 중 시애틀에서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와 점심을 함께하면서 전자정부구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방안 등에 의견을 나누었다.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동북아 정세와 남북관계”를 주제로 강연하고, 워싱턴에서는 한반도 핵대사를 지낸 로버트 갈루치 조지 워싱턴대 교수와 만나 ‘21세기 한반도문제’를 논의하였다.

김근태의 체미 기간 활동은 과거 어느 정치인보다 활발했다. 그의 위상에 따른 결과였다.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하고, 특히 국민회의와 소원한 편인 미국 공화당쪽 인사들과도 폭넓게 만났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엘 고어 부통령의 핵심 측근인 앤드루 쿠오모 주택개발부장관 등과도 만나 양국의 현안을 심도 있게 나누었다. LA에서는 UCLA와 USC에서 강의하고 코리아 엑스포 개막식에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김근태는 2001년 1월에 다시 미국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아들 부시 대통령 취임식에 정부 대표자격으로 참석하기 위해 1월 17일부터 10박 11일간 방미하게 되었다. 다른 대선 주자들이 자신의 후원회 참석 등에 비중을 둔데 비해 그는 워싱턴 에틀란틱 카운슬과 존스 홉킨스 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남북관계와 동북아의 안보문제에 대해 강연하고, 제임스 릴리 전 주한미국대사, 공화당 행정부 출신 데이비드 드눈 교수, 컬럼비아 대학 레온 시걸박사 등을 차례로 만나 한국의 대북 정책방향 등을 설명했다.

또 데이비드 웅거 <뉴욕타임즈> 논설위원,
칼럼니스트인 플레리트 교수와 만나 미국 언론이 대북포용 정책을 지지하도록 촉구했다. 미주에서는 1997년에 변호사ㆍ종교인ㆍ미디어 전문가ㆍ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김근태후원회가 구성되었다. 미국 방문길에서 김근태는 모든 일정을 영사관의 도움을 받지 않고 후원회의 지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후원회 간부들은 민주ㆍ공화 양당의 뉴저지주 지사 후보가 앞다투어 김근태를 면담하고자 하는 모습에서 뿌듯한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후 미주지부 후원회는 한반도재단의 미주지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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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실린 사진들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강남 압구정에 위치한 갤러리 '눈(NOON)'에서 개최한 전시회의 사진들로써
정해창 선생님의 1930년대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사진 입니다.
당시 유리원판에 담긴 영상들을 구본창 선생님의 프린트 재현으로 볼 수 있었는데....
몇 점 안되는 작품이었지만 우리나라 사진史에 아주 희귀한 회고전으로 기록 되고 있습니다..
사라진 우리의 잔잔한 모습이어서 더욱 그러하고...

이 사진들의 시대적 배경은 1800년대 후반으로 짐작되는데 한국적인 토속미가 철철 흐릅니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보다 한층 여유로운 조선시대 생활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원작자가 별다른 설명을 해두지 않아 각각의 사진이 어느 지역 어떤 모습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시대 생활상을 사진을 통해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유재 정해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풍경사진전(총 4회)을 개최한 분 입니다.
이화여대 동양미술사 교수역임과 사진예술 강의도 했다는데...
이러한 사진전을 통해 옛 시절로의 회귀하는것 또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1929년 3월 28일자 조선일보는
최초의 사진 전람회인 정해창 예술사진전람회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다년간 사진술을 연구하여 영리를 떠나서 예술사진을 제작하는 정해창씨는
그동안 박힌 자신닜는 사진 오십여점을 가지고 리제창씨외 여러 우인들의 후원으로
작품 전람회를 오는 29 일부터 시내 광화문 빌딩에서 개최한다는데
조선사람으로 예술사진 전람회를 열기는 이번이 처음이요,
작품중에는 훌륭한 풍경화가 많다더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한국사단의 지보(至寶)

정해창은 학처럼 단아하고 기품있게 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세상의 엄청난
지각변동속에서도 한없이 자아를 성찰하고, 내면세계를 다지면서 초연한 삶을
살았었다. 우리나라가 온통 외래문화의 홍수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는 사진을 통해서 진정 우리의 체질에 맞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실험하고
표현하려고 노력했었다. 그가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놓은 얼마간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머리를 통해 단순한 감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이 아닌 가슴
깊숙한곳에서 우러나오는 잔잔한 미소가 입가에 머금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가슴벅찬 감동이 밀려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의 사진은 인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위대한 사진가로
평가받는 경우라도 외국작가들의 사진에서는 어딘지 낯설고 어색함이 느껴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의 감수성이나 미적감각이 그네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정해창의 사진은 현대사진에서 보여지는
형식과 색채의 현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려 더 강한 미적충격을
전해준다. 그가 사진의 대상으로 삼았던 인물, 풍경, 오브제 등이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대상을
사진으로 전환시키는데 있어 그가 사용한 모든 방법들과 시작(보는 방법)이 매우
독특한것이었고 또 한장 한장의 사진에 웅축되어 나타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이웃집 아낙네 오브제의 배치를 통한 상상력의 구현이라는 동떨어진
세계를 오가면서 그가 만든 사진들은 한국적인 미의 표현이 단순한 소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진가의 미에 대한 의식과 이를 현실화시키는 능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예술사진 또는 예술로서의 사진이 다른 사회적 기능들과
더불어 사진의 한 분야로 존재했고 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정해창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 가능성을 실현한 사진가로 손꼽힐 수 있다. 그
까닭은 예술에 대한 판단기준이나 사회적 요구가 시대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할
지라도 보다 근본적인 미적 충동과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 갖는 가치의
영속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사진은
사라져버린 전통 미의식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깊은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유로 정해창은 확실히 한국사진계의 보물로 여겨질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1966년에 나온 한 잡지의 글을 빌면 '사진가이며
사진이론가인 유재 정해창씨는 한국사단의 지보(至寶)'였다.


특이한 지적배경을 가진 사진가

정해창은 한국의 사진가로서는 보기드문 지적 배경과 수준을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기 직전인 1907년 3월 서울 종로4가에서 출생한
정해창은 자를 하연(何涎), 호를 유재(悠哉)라 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았다.
1922년 서울에서 보성중학을 수료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외국어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일본유학시절 어학을
공부하면서도 미술과 사진 등 시작예술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던 그는 동경의
전단화회(川端畵會)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으며 동경예술사진학교
연구실에서 사진학을 연구하면서 사진을 시작했다. 사진의 추기시대, 기술적인
문제의 해결이 사진의 질을 결정하기도 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인화지
제조기술이나 특수인화법 등 화학에 관련된 사진의 문제를 연구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정해창이 사진가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공부를 마친 후 정해창은 동양철학과 고고학을 연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후일 그가 대학에서 동양미술사 교수로 재직했고, 동양 미술과
고고학의 권위자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지적 배경 때문에
가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독일어와 동양학을 연구하는 사이에 사진술을
습득한 것은 순전히 독학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남긴
사진을 살펴보면 그가 공부했던 동양미술의 영향을 깊히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온 정해창은 종로의 본가에 근거를 두고
사진창작에 몰두하게 된다.
그가 본격적인 사진작업을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에서는 상업성에 목적을 둔초기의
영업사진시대가 지나고 순수한 표현방법으로서의 예술사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해창이 자신의 전공과 별 관계가 없어보디는 사진작업에 매달린 것은 당시의
이러한 부누이기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도 믿어진다.
1929년 3월 정해창은 광화문에 있는 광화문빌딩2층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개인사진전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관객들의 호응도가 상당히
높았고 언론들의 반응 또한 꽤 컸던 것같다. 그 이후로 정해창은 대구, 광주,
진주 등을 도는 지방순회전시를 비롯해서 1939년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열린
전람회에 이르기가지 4회의 개인 전람회를 열었으며, 초창기 우리나라
사진예술을 주도해 나갔다.
특히 그는 당시에 크게 유행했고, 사진가라면 누구나 참가했던 공모전 또는
콘테스트 등에 한번도 사진을 출품한일이 없었을 만큼 자신의 사진에 자신 감을
가지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으나 4번째 전람회를 끝으로 사진작업을 그 만두었다.
그는 말하기를"사진은 회화일 수 없었고 기계나 재료를 시험 검토해야하며
게다가 매일 촬영을 다녀야 함이 너무 바쁘고 벅차서 충분한 예술적 구상을 가질
시간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에" 중지했다고 한다. 사진작업에 전 시간을 바칠수
없는 개인적인 상황이 그늘 짓눌렀을 것이다.
정해창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생각해 보면 그런 상황에서 가식적으 로
사진을 계속하고 허명을 남기는 것을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 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정해창의 네번째 전람회가 끝난 직후인 1940년 대부터는
일본의 대동아 전쟁이 시작되어 사진재료가 거의 고갈 되었다는 사실도 그가
사진작업을 중지한 이유의 하나로 유추해 볼 수 있다.
해방이 되면서 그는 대학에서 동양미술학을 강의하게 되었다.
처음에 이화여자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 했고(이때 그 학교에서 사진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교양으로 사진예술을 강의했다고 한다.)6.25전쟁 후
덕성여대로 자리를 옮겨 동양미술사를 담당했었다. 1960년 우연히 다리를 다쳐
집안에 칩거하게 된 그는 이때부터 한국의 전통문화재(불상, 불화, 석등, 석탑,
사찰 등)에 관한 연구에 전념했다. 이때 그가 집필한 대표적인 책으로는 '한국
석비의 양식'이 있다. 이처럼 정해창은 사진작업을 통해서나 학문을 통해서나
꾸준히 한국적인 미를 탐구했다.
그는 사진외에도 서예나 조각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1941년과 51년 두차례에
걸쳐 서예 개인전람회를 열었으며,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사인(私印)도
조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학자적 기질과 다재다능한 예술가로서의 능력을 가졌던
정해창은 한국사진의 큰 흔적을 남기고 1968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든 대부분의 사진은 전쟁과 화재를 거치면서 사라졌지만 현재 약
200여장의 유리원판이 남아서 우리에게 그의 사진계를 전해주고 있다.


잊혀진 미의식의 원형

정해창의 사진은 한마디로 '소박하고 평온한 한국미의 형상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자신의 미적감수성을 시각화했으며, 그 미적 감수성은
어느 외래 문화에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문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순수한 한국미의 원형이 그의 사진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세계각국의 예술작품을 보면 문화적 전통과 가치가
풍부한 나라일수록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의 경우도 그것이 만들어지기는 똑같지만 대상과
세계를 바라보고 소화하는 사진가들의 의식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많은
차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앗제의 사진은 파리를 주로 찍어서가 아니라 그가
파리를 보고 표현하는 방식이 지극히 프랑스 사람다운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생명 력을 유지하고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본의 현대사진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이유도 그들의 사진이 독특한 일본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진기 뒤에는
항상 사진가가 서 있으며, 사진가의 의식은 자신의 환경과 역사적 경과를 통해
규정되고, 그 의식이 바로 사진으로 귀결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명제이다.
우리가 정해창의 사진을 평가할 때 간과해서 안될 점도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그래서 기능에 접근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정해창은 고무인화법이나 브롬오일법 등의 특수한 이미지를 인화지에 옮기려는
인상주의 사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인화 제작한 당시의 사진이 소실되어 실제 그러한 사진을
제작했는가의 여부는 판별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대상의 선택과
접근방식에서 그의 미의식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가 사용했던
기술적방법은 아니다. 그가 남긴 유리원판들은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5"X7" 사진보다 약간 작은 가로 163mm, 세로 120mm의 크기이며, 일부는 5"X7"의
약 1/3 정도 크기밖엔 안된다. 그리고 그가 인화해서 전람회장에 걸었던
사진들은 대부분 전지나 4절 크기였고, 때로는 전지를 6장 또는 12장씩 연결해서
병풍처럼 만들기도 했다.
또 정해장이 주로 취급한 소재는 인물, 풍경, 인형등이 오브제들로 첫번째
개인전람회 때 전시한 사진들은 정물이나 인물을 찍은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풍경사진들이었다.
두번째 전람회는 당시 조선일보의 후원으로 진행된 지방순회전이었는데 첫회
때의 작품 10점과 인물 등을 찍은 사진 40점이 걸렸다고 한다. 또 세번째
전람회때는 정해창의 인간존재에 대한 의식세계를 엿볼 수 있는 오브제를 통한
연출사진 50점이 전시되었다. 마지막 사진전람회였던 4회전에는 주로 풍경사진과
한국여인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여성인물사진들이 선보였다.
오늘날의 필름도 아닌 무겁고 감광도가 극히 낮았던 유리 원판을 갖고
작업했었고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가 상당했으리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사진에 몰두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정해창의 사진들 중 우리의 시선을 가장 강하게 붙잡아 매는 것은 평범한
여성들의 인물사진이다. 대부분 한복을 차려입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한
여인들의 모습은 그네, 부채, 소나무 등과 어울려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하얀 한복에 하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여인의 모습(사진1)은 막연하게나마
우리들의 어머니가 젊었을 때 간직했을 고귀하고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좋은 사진에서 볼수 있는 풍부한 톤을 없지만, 오히려 톤의
단조로움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며, 김소월이나 조지훈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의 서정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조지훈이 '승무'에서 그렸던
하얀고깔의 여인을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한국여성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의 원형이 살아숨쉬는 느낌은 필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낄 수 있는 공통점은 여인들의 시선이 카메라를 직접
응시하지 않고 사진밖의 어떤 곳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즈넉한 여인의
시선을 따라 우리의 마음은 평온한 세계로 옮겨지면서 진한 여운이 남는다.
당당하지는 않지만 움츠려들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여인들의 모습에서는
생명력 있는 한국여인의 슬기가 발견된다. 단풍나무 아래서 안채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사진3)에서 자식을 객지에 내보내고 눈물짓는 어머니의
애뜻한 정이 느껴지는 것은 비약일까.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정해창이 생각한
한국여성의 아름다움이요, 여성을 보는 방식(ways of seeing)이었다.
그가 여성을 보는 방식은 다른 사진가들과 비교 해서 볼 때 매우 독특한
것이었다. 우리가 사진에서 흔히보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카메라의 렌즈에 시선을
고정한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사진은 말할것도 없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영업사진이나 현대의 패션사진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델이
되는 여성들의 시선이 결국 사진을 소유한 사람(대부분 남성)의 시선을 향하는
이러한 방식은 서구의 전통에 입각한 전형적인 보는 방법이다. 그것은 물론
서양사회에서 남성에 종속된 여성의 위치와 가치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유명한 그의 저서'보는
방법(ways of seeing)'에서 주제로 다뤘고 증명해 낸 사실이 바로 이 문제였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서구의 전통적인 보는 방법이 아무런
비판과 검토도 없이 영업사진의 형태로 그대로 도입되었고, 우리는 이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정해창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여성의 아름다움은 소재문제가 아니라 그의 보는
방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정해창의
강한 서정성과 미의식은 일련의 풍경사진에서 잘 나타나다. 그의 풍경사진에서
사물을 관조하면서 유유자적하는 동양화가의 시선이 그대로 배어있다.

글.박주석/사진 비평가,한국사진사연구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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