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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4장] 정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하다

2012/10/05 08:00 김삼웅

 

 

 

6월 항쟁이 군사독재 세력의 청산에는 실패했으나 대통령의 5년 단임제 헌법을 마련하는 등 민주화의 제도적 장치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이후 누구도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헌정을 짓밟으면서 장기집권을 획책하지는 못하였다.

국민의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특히 언론은 대선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기’를 거론하는 조급성을 보인다.
대선을 2년 쯤 앞두고 이에 대한 여론조사 등이 실시되고 ‘예상후보’가 나타난다. 김근태는 국내외의 언론에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되었다.

1998년 월간 <신동아> 8월호는 여론조사에서 정치부 기자 100명이 뽑은 ‘차세대 정치인 1위’로 김근태가 선정된 사실을 보도했다. 이회창ㆍ이인제 등 쟁쟁한 후보군을 제치고 ‘1위’에 뽑혔다. 기자들에게 술밥 사주고 명절 때에 촌지 주어서 나타난 결과가 아니었다.

같은 해 11월 3일,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 정부에 김근태를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한 사건의 구제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는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고 있었다.

1999년 1월호 <뉴스위크(일본편)>는 “21세기를 움직일 세계의 100인”에 김근태를 선정하였다. 각계의 유망한 인물들을 제치고 그를 선정한 <뉴스위크>의 안목은 대단했다.

같은 해 4월 아시아ㆍ태평양 지도자회의(FDL-AP)의 이사에 위촉되고, 5월에는 국민회의의 당 쇄신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당 쇄신위원장은 능력과 도덕성에서 ‘쇄신’된 인물이어야 했다. 같은 달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 겸임교수로 위촉되어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양대 뿐만 아니라 경향 각 대학에서 특강의 요청을 받고 정치현안과 자신의 역사관을 강의했다. 6월에는 군부쿠데타로 실종되었던 인도네시아가 44년 만에 총선거를 실시하면서, 국제적으로 저명인사들을 ‘국제선거감시단’으로 위촉하였다. 카터 전미국대통령 등이 함께 참여 했다.

김근태는 2000년 7월 13일 (사)한국여성유권자연맹으로부터 ‘남녀평등 정치인상’을 받았다.
오래 전부터 시민사회운동 과정에서 그리고 의정활동에서 성실하게 노력해온 것이 평가되었다. 그의 도봉구 비좁은 집에는 부인과 함께 나란히 문패가 걸렸다. 2001년 4월에 ‘한반도 평화와 경제발전 전략 연구재단’(한반도재단)을 창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국회외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더욱 익히게 된 문제들을 중심으로, 당내외 인사, 사계의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설립한 것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던 터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그동안 국제적으로 유일하게 남은 냉전지대 한반도가 어느 정도 해빙되어가고 있던 시점이다.

김근태는 한반도재단을 설립하면서 <희망의 한반도를 만드는 세 가지 키워드>를 천명하였다. ‘세 가지 키워드’로 평화ㆍ경제시스템ㆍ리더십을 제시한다. 다음은 주요 부문이다.

평화

지난 세기 내내 이룰 수 없는 꿈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지만, 이제는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 되었다. 또한 평화가 동아시아의 경제협력 방안과 연결될 때, 그 힘은 가히 폭발적일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평화에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존과 발전의 문제이기도 하다.

1970년 동서독 정상의 만남이 20세기 말 동구의 민주화와 개방으로 이어졌듯이 지난해 남북 정상의 만남은 21세기 한반도 평화의 시원(始原)이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협력 방안과 공동의 발전모델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과제라는 생각이다.

경제 시스템

지금은 세계화를 적극 수용하고, 정보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할 시점이다. 이제 우리가 핵심기술과 세계표준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제품은 살아남지 못할 만큼 세계화는 이미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우리의 유일한 길은 위기를 관리하면서 구조개혁을 지속하는 것 뿐이다.

또한 시장의 자율성을 확대해가면서, 정부 역할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기업의 투명성을 강화하고 정책의 예측성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경제의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경제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이 실패한다는 심정으로 공동의 전략과 목표를 세우고, 계획과 실행이 일치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우리는 다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리더십

새로운 시대는 그 시대 정신에 부응하는 새로운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도덕적 일관성, 민주적 포용력, 비전과 자질이 지도자의 덕목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바위처럼 굳세게 버티면서 국민과 함께, 국민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바로 국민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시대를 극복하고 민주적 리더십이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경제시스템의 변화에 걸맞는 ‘정치구조와 인식의 대전환’을 모색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강구하고자 한다. ‘더 많은 민주주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복무하는 리더십의 형성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한 사회의 리더십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선택된 지도자의 역량이, 그 사회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지 아니면 뒤로 물러서게 할 것인지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주석 1)


주석
1> 김근태, <한반도재단을 창립하며>, <희망은 힘이 세다>, 101~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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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10/04 08:00 김삼웅

 

 

'사랑의 집' 건설현장을 찾은 김근태 최고위원

 

2000년 4월 13일 제16대 총선이 실시되었다. 김근태는 선거구인 서울 도봉갑구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손쉽게 당선되었다. 유효표의 50.9%인 34.233표를 얻어 한나라당 후보를 크게 따돌렸다. 15대 (38.9%)보다 2% 포인트를 더 득표, 유권자들이 지난 4년 동안 의정활동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여당이면서도 다수당이 되지 못했다. 총의석 273석 중 한나라당 133, 민주당 115, 자유민주연합 17, 민주국민당 2석이었다.

김대중 정부와 공동정부를 구성한 김종필의 자민련이 내각제 개헌을 둘러싸고 분열하여 ‘2여 1야’의 후보난립이 주요 패인이 되었다. 민주국민당과 민주노동당(1.2%)은 정당 존립이 무너졌다.

민주당은 의석수에서는 약진했으나 다수당은 한나라당에 넘겨줘야 했다. 민주당 소속의원 4명이 자민련에 입당하는 ‘의원 꿔주기’ 형태로, 자민련이 간신히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DJP연대는 다시 복원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한 공동정부였다.

김근태는 15대와 16대 국회에서 두 차례 ‘백봉 신사상’을 받았다.
이 상의 첫 수상자가 된 것은 1999년 11월이었다. 독립운동가 출신 백봉 라용균 전의원을 기려 제정된 상이다. 육탄과 욕설로 뒤범벅이 된 국회를 ‘신사적’으로 운영하라는 취지에서 제정돼 ‘신사적인’ 의원에게 주어진다.

김근태는 1,2회 백봉 신사상을 받고, “연속 두 번의 ‘백봉 신사상’ 수상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솔직히 조금 과분한 영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 다른 의원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번 제2회 백봉 신사상 수상은 신사와 대중정치인이라는 문제를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주석 8)고 소회를 밝혔다.

여기에는 한국정치의 실상, 그리고 국회의 운영이 ‘신사’가 서식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의식이 깔렸다.

끊임없는 줄세우기와 편가르기, 계보만들기와 수에 의한 힘겨루기….
그래서 정책을 위한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지역 패권에 의지한 보스의 힘에 의한 독선과 오만이 리더십으로 인식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적 정치현실이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사와 정치인은 양립할 수 없다. 오랜 벗 하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백봉 신사상 계속 받으면 대중정치인으로는 낙제라는 얘기야!”

나는 이 말을 웃으며 받아넘겼지만, 옆구리에 뭔가가 걸리는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았다.
(주석 9)

 


술잔을 나누는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과 민주당 김근태 최고의원

 

김근태에게 ‘대중정치인과 신사’는 양립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대중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언론과 대중의 눈길을 끄는 발언과 적절한 쇼맨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이건 딱 질색이다. 점잖게, 신사적으로 하면 언론에 뜨지 않고, 대중의 관심을 받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신사적’ 또는 ‘영혼을 지키면서’의 심성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김근태의 딜레마는 여기가 근원인 셈이다. 강준만 교수의 뼈아픈 지적이다.

김 부총재의 경우 그런 쇼맨십이랄까 쇼에 대한 감각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김 부총재가 지나치게 신중하고 자기방어적이라는 평가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려는’ 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주석 10)

김근태가 재선에 성공하고 집권당의 지도부가 되면서 언론과 국민 중에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고, 이런 저런 주문이 따랐다. 역시 딜레마는 친화력은 좋은데 ‘대중성’이 모자란다는 지적이 많았다. 정치인이 큰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는 천성적으로 신사적이어서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시 강준만의 지적이다.

나는 김 부총재의 경우 친화력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건 그의 겸손과 성실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마냥 좋게만 보진 않는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용되는 ‘친화력’의 정체에 대해선 깊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기자들에게 술은 커녕 밥 한끼 사지 않아 욕을 먹는 정치인들이 적잖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 정치인은 아무리 능력이 탁월해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기자들로부터 욕먹게 마련이고 또 그런 부정적인 평가는 언론에 그대로 반영돼 대중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모든 걸 원칙대로 하려는 정치인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마련이다. 반면 능력과 윤리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있어도 술 잘 마시고 마당발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다. 물론 이건 비단 정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는 문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문화를 거스르면서 리더가 될 수는 없으니 이게 바로 딜레마라는 것이다.
(주석 11)

김근태는 ‘신사정치인’이 되었으나 ‘대중정치인’으로 성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대중성과 친화력, 쇼맨십이 부족했다. 그래선지 백봉 신사상의 의미를 바꾸었으면 하고 바랐다. 김근태가 바라는 ‘정치인상’이기도 하다.

백봉 신사상이 단지 점잖고 교양 있고 예의바른 정치인에게 주는 상에 머물지 않고, 시대정신이 살아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내가 속으로 암암리에 꿈꾸는 바람이다. (주석 12)


주석
8> 김근태, <정치인과 신사>, <국회보>, 2001년 1월호.
9> 앞과 같음.
10>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 제10권, 87~88쪽, 1999.
11> 앞의 책, 89쪽.
12> 앞의 책, <국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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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10/0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여당 의원으로서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과 처신의 신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1995년 정계에 입문하여 1년여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야당 의원 2년여 만에 집권당 국회의원과 부총재가 되었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이제는 그만한 위치에서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근태는 1999년 3월 장영달 의원과 이창복 전의원 등 현실정치에 뛰어든 운동권 출신 인사들과 재야의 교량 역할을 하기 위해 국민정치연구회(국정련)를 조직, 최고위원에 선임되었다. 나중에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로 확대되는 국청련에는 김근태의 정치철학과 비전을 지지하는 재야의 민주인사 다수가 참여하였다.

정치인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여 지도급 위치에 이르면 ‘연구소’ 이름의 사조직을 만드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김대중ㆍ김영삼도 70년대 초기부터 연구소를 통해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당권과 대선후보의 발판으로 삼았다. 여기에는 적지않은 자금이 필요했다. 정치자금을 만들 줄 모르는 김근태에게는 연구소의 운영이 쉽지 않았다. 참여자들의 회비로 충당하였다.

김근태와 그의 동지들이 1999년 3월 이전의 국민정치연구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을 창립한 것은 운동권 출신들의 폐쇄적인 모임에서 벗어나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이를 정치적 영역에서 실현하기 위해 참여형 대중 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민평련 조직은 이사장 이호웅 의원, 부이사장 최규성ㆍ홍미영ㆍ임종석 의원, 사무총장 문학진 의원, 산하조직인 민주평화아카데미 원장은 신병렬 의원, 민주평화연구소장은 유승희 의원, 정책실장은 민청련 시절의 오랜 동지 김찬이 맡았다.

민평련은 열린우리당 현역의원 32명과 당중앙위원 5명 등이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고, 이해찬ㆍ임채정ㆍ한명숙ㆍ장영달ㆍ이부영ㆍ이상수ㆍ함세웅ㆍ지선 스님 등이 상임고문으로 위촉되었다.

민평련은 김근태의 사조직이 아닌 ‘정치적 지향과 행보를 함께하는 재야 출신 인사들이 주도하는’ 진보개혁의 연구모임이었다. 정책이나 의제를 치열한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민주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지방선거 출마자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다. 부산ㆍ경북ㆍ대구 등 취약지에 지역조직을 결성하고 서울에도 구 단위 조직을 결성하였다.

김근태는 민평련 결성대회에서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주자들이 덩달아 ‘경제민주화’를 내세우고 있는데, 엄격히 따지면 ‘저작권’은 김근태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미 군정에서 문정관을 지내고 이승만과도 가까웠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정치의 특징을 ‘회오리바람형’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중앙의 상층부에서 일기 시작한 회오리바람이 일거에 정치지형을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서도 한국의 정치(정당) 구도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헌정 6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 10년이 되는 정당이 하나도 없을만큼 한국의 정당은 포말과 같은 운명이다. 이것은 여야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회오리바람형’ 정치변화는 여전하다.

1995년 9월 5일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2000년 1월 20일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각계의 전문가, 엘리트들을 대거 영입해 전국 정당과 개혁정당을 기치로 새천년민주당(민주당)을 창당했다. 신당은 민주주의, 시장경제, 생산적 복지의 3대원칙을 내걸었다. 당대표에 서영훈이 선출되고, 김근태는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김근태는 신당 창당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심란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정당이 뿌리박지 못한 채 포말정당의 신세를 안타까워 한 것이다.

신당이 창당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사에서는 멀리 있는 것 같다. 나는 신당이 지금 많은 욕심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과정에 충실한 것이 필요할 것이다. 신당이 정치권 내부의 타협이나 역할 조정에 충실하기보다는 새로운 미래에 중점을 두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새롭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국민에게 묻고,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따져보았으면 한다. 지금은 대안을 정치권 안에서 찾을 때가 아니고 미래와 국민으로부터 찾을 때이다. (주석 6)

김근태는 국회의원, 여당의 지도부가 되면서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의 마음으로 자성과 자계(自戒)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옷로비사건 등을 지켜보면서, 지도층의 도덕성 상실을 우려하였다.

오랜 민주화운동 그리고 수평적 정권교체의 성공, 그때 나는 감격과 함께 결심했었다. “이젠 의정활동에 전념하리라.” 민주화의 기틀은 마련되었으니 지금부터는 민주사회의 성숙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났다. 외환위기는 극복했지만 경제는 여전히 어렵다. 정치는 흔들리고 있다. 진정으로 국민에게 다가서는 정치, 믿음이 살아 있는 정치, 그래서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덕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주석 7)


주석
6> 김근태, <푸른 내일>, 제17호, 1999년 11월.
7> 김근태, <푸른 내일>, 제21호,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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