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간단한 역사

 러시아는 그 역사가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가 어려운 나라이다. 
러시아라는 이름 자체가 파생되어 나온 '루스(Rus)'라는 사람들은 
현재의 북서부 러시아에서 남하한 바이킹 부족들의 후예로 
슬라브 계열의 언어가 아니라 게르만 계열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9세기 후반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현재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인 키예프에 최초로 공국(公國)을 세웠다.

키예프의 뒤를 이어 교역 요충지나 넓고 비옥한 농지를 중심으로 
우랄 산맥 서쪽에는 '공(公, Prince)'이 통치하는 여러 개의 독립적인 공국이 세워졌고,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공국들 중에서 패권을 잡은 통치자는 '대공(大公, Grand Prince)'이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키예프 대공의 패권은 13세기에 류리크 왕조의 블라디미르 대공과 모스크바 대공에게 넘어갔다.

14세기에는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의 정복으로 러시아 전체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보다는 약화된 러시아를 노리고 자주 침공한 
게르만의 튜튼 기사단과 스웨덴으로 인해서 더 큰 괴로움을 받았던 약소국이었다. 
이러한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사람들은 두 사람의 난폭한 통치자들이었다

 

Tsar 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 1897. by Viktor Vasnetsov.  
oil on canvas. 247 × 132 cm. Tretyakov Gallery Room 26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 (Ivan Ⅳ 1530~1584)에게는 '광제(狂帝, the Terrible)' 
혹은 '뇌제(雷帝, the Awesome)'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반은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강력하고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전제주의적인 강력한 왕권을 세워 몽골 제국의 잔재인 
두 개의 작은 칸국을 정복했으며 태평양을 향한 동진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분노를 통제하지 못해서 

폭발적으로 난폭함을 드러내는 증상을 보이곤 했다.

 

Ivan the Terrible and His Son Ivan on November 16, 1581.  
아들 이반 이바노비치를 죽인 뒤 오열하는 이반뇌제. 1581년 11월 16일', 1885. 
by Ilya Repin. oil on canvas. 254 x 199 cm. Tretyakov Gallery Room 30  

이반의 비극은 아들의 죽음으로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며느리가 얇은 옷차림으로 나타나자 발작을 일으켜 
그녀를 때려 임신 중이던 아이를 유산하게 만들었다. 
이 처사에 대해 아들 젊은 이반이 항의하자 그는 다시 이성을 잃고 
들고 있던 왕홀로 아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젊은 이반은 치명상을 입었다. 
정신을 차린 차르는 아들을 껴안고 통곡했지만 젊은 이반은 사흘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반 뇌제도 그로부터 3년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것으로 9세기 중엽 
노브고르드(Novgord) 대공으로 시작된 류리크 왕조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이반 4세의 치세 이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마지막 승자가 바로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될 로마노프 가문이었다. 
이 새로운 왕조는 여러 세력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

수십 개의 동등한 명문가 중 하나였을 뿐인 로마노프 가는 
왕권 기반도 단단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 강국들인 독일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 , 폴란드, 스웨덴, 오스만튀르크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또한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분리주의자들과 높은 세금과 함께 갖가지 의무와 
지주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농민들의 거센 도전도 헤쳐 나가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사람이 바로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대제(the great)'의 칭호를 얻게 될 표트르 1세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 구글 지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는 러시아의 북서쪽에 있는 연방시로
네바(Neva)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에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이다.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고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도 불린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Petrograd)와 레닌그라드(Leningrad)로 불리기도 했다.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자 1924년 1월 26일 그를 기념하여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9월 6일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우리 민족에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세계 최초로 대학에서 한국어강좌가 개설된 곳이며, 
러시아 최초의 한국공사관이 설치된 도시이자 일본의 국권 강탈에 항거하며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비운의 생명을 마감한 
애국지사의 영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민영환을 최초의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도록 했다.

1896년 5월 민영환은 특사 사절단을 이끌고 최초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에 3개월 간 체류한 뒤 귀국했고, 3년이 지나서 
1899년 3월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겸임으로 이범진 공사가 임명되었다.


이후 1901년 3월 이범진 공사는 겸임을 해제하고 주러시아 상주 공사로 임명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했지만 1905년 11월 을사조약의 체결로 외교관 신분이 박탈되고
1910년 8월 29일 매국내각에 의한 한일합방이 발표되자 더 이상 구차한 생명을
부지할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자결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영상]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 : 독립운동가 이범진

 

[영상] 초대 러시아 이범진 공사 기념관 건립 ‘10년째 표류’ / KBS News

 

네바(Neva) 강

길이 740km. 너비 500∼1200m로 러시아 연방 북서쪽 라도가 호(湖)에서 
서쪽으로 흘러 하류에 큰 삼각주를 형성하고, 발트 해의 핀란드만(灣)으로 흘러들어간다.
12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는 결빙(結氷)하며, 해빙기의 수위상승은 작으나 북서계절풍에 의해 
서쪽으로 열린 만구(灣口)의 수위가 높아져 1924년에는 큰 수해를 입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강어귀에 발달된 면적 45.6 ㎢ 에 이르는 
커다란 삼각주 위에 발달된 항구로, 예로부터 발트 해(海) 제일의 무역항을 이루었다.
네바 강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크고 작은 2개의 네바 강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지점 주변에는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要塞)와 푸시킨 광장 · 에르미타주 미술관 등의 명소가 많으며, 
시내를 관류(貫流)하는 하천이기에 시민과 관광객에게 친근감을 준다.

네바강은 전 유로(全流路)가 항행이 가능할 뿐 아니라 백해(白海)∼발트해를 연결하고, 
모스크바~볼가강(江) 유역의 도시, 카스피해∼흑해를 잇는 중요한 수상교통로 구실을 한다.

 

표트르 대제(Peter I the Great)의 초상, 1838. by Paul Delaroche. oil on canvas. 130.6 x 97cm.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 대제가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1918년 수도는 다시 모스크바로 옮겨졌다. 
2010년 기준으로 5,000,000 명이 살고 있으며, 러시아에서는 수도 모스크바 다음으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모스크바에 이은 러시아의 대공업도시로 복잡한 정밀기계의 제조가 특색이다. 
선박, 터빈, 발전기, 디젤 엔진, 트랙터, 공작기계, 계기류(計器類), 각종 장치의 제조공장이 있고, 
화학공업(고무제품·과린산비료·화학합성 자재·염료·도료·향료), 섬유공업, 인쇄업 등도 성하다.

다수의 학술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이 있어 학술 ·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도심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레닌그라드주와는 분리된 연방시를 이루고 있으나, 레닌그라드주의 행정 중심 도시로 되어 있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핀란드 만 주위로 8~9세기부터 러시아인들이 정착했다. 
이 지역은 노브고로드 대공국에 귀속되었으나 습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으므로 버려진 땅이었으며 이후 15세기에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1611년에 한번 스웨덴이 이 지역을 차지한 적이 있었으나, 
표트르 1세가 북방전쟁에서 이 지역을 탈환하였다. 
이곳의 수비를 목적으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짓기 시작함으로써 
도시건설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표트르 1세는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장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이 요새 근처에 사도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짓게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새 도시를 짓기에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지만은 않았다. 
연 평균 기온은 4.2도에 일조량은 31일 정도이다. 
또 매년 한 번씩 홍수가 터져서 곤혹을 치른다. 
또 원래 습지였던 이 지역에 도시를 바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도시를 짓기 위해서는 석조 토대가 필요했는데, 
이 때문에 도시를 지을 때 돌을 쏟아부어 습지를 메울 필요가 있었다. 
물론 습지를 메우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이 필요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는 돌을 충당하기 위해 도시를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고 칙령을 내렸다. 
선박은 크기에 따라 30kg이상의 돌을 10~30개 가져와야 했으며, 
육로로 들어올 경우에는 15kg이상의 돌을 세 개씩 가져와야 했다. 
수많은 노예들이 습지를 돌로 메우는 데에 이용되었으며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이때 죽은 노예를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다. 
이 때는 석조 건축물을 짓는 것도 금지되었다. 
각종 물건들에도 세금이 붙었고 교회의 재산도 국가에 귀속시켜 버렸다. 
표트르 대제에 반하여 구 귀족 및 종교 세력의 편이었던 그의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는 1718년에 무자비하게 처형되고 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8세기 초반부터는 러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851년엔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기도 했다.(모스크바와 연결)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교통이 편리해짐으로써 이 도시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후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각종 러시아의 혁명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중심이 되었다.(피의 일요일, 3월 혁명, 11월 혁명) 
또 세계 2차대전 당시 1941년 8월부터 29개월 동안 독일군에 포위당한 상태로 
40만 명이 아사(餓死)당하면서까지 지켜낸 도시라고 하여 영웅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다가,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 지구와 관련 기념물군은 1990년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가 동양적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라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서부 유럽으로 가는 통로'라는 호칭에 맞게 많은 면에서 서양적인 특징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특히 18-19세기에 지어진 우아한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과 
에르미타쥐 박물관으로 인해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특히 강한 바람이 강물을 역류시키는 가을과 해빙하는 봄에 홍수가 많이 발생한다.

북위 60°의 고위도 지역이면서 온화한 해양성 기후를 보여, 남쪽의 모스크바보다 기온이 높다. 
연 평균기온은 4.6℃이며 추운 겨울에는 -40℃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연강수량은 약 584㎜로 여름에 비가 많이 내린다. 
북극권에 가까워 겨울에는 밤이 길지만 6∼7월 초여름에는 백야(白夜)가 계속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는 1703년 러시아 표트르 대제가 
네바강 하구에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요새를 세움으로 시작되었다. 
표트르는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라 하였고, 많은 귀족과 상인들이 
새 수도로 이주해 왔으며 그들이 살 집과 궁전, 정부 관청 등이 신속하게 건설되었다.
19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교통 · 통신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산업 도시로서 본격적인 성장을 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1810년 마린스키 운하가 새로 건설되고 1811년 티흐빈 운하가 보수되는 등 
내륙 수로망과 연결 운하가 정비되었으며 1813년 러시아 최초의 증기선이 건조되었다.
1837년 차르스코예셀로(지금의 푸슈킨시)와 여름 궁전 사이에 
러시아 최초의 철도가 건설되었고, 185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 모스크바 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1861∼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를 잇는 철도 노선이 완성되는 등 
이 도시를 중심으로 러시아 내륙과 유럽을 연결하는 철도망이 건설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한편 정치 ·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혁명 운동의 무대이기도 하였다.
1825년 농노제와 전제 정치의 폐지를 주장한 데카브리스트 봉기를 시작으로 
노동자들의 혁명적 활동과 저항이 전개되었는데, 1905년 1월 
15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1905년 1월 9일에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상황은 혁명으로 발전하여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917년 10월 혁명 때 볼셰비키 노동자와 병사들은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였으며 1918년 3월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1941년 8월부터 1944년 1월까지 872일간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66만 명의 희생자를 내기도 한 도시이다.
그 후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1991년 옛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되찾았으며,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하기도 한다.

 

러시아 제국 - 로마노프 왕조의 간략한 계보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와 로마노프 왕조 흥망성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표트르 1세 (대제) (1682-1725)
- 큰형 페도르 3세, 둘째 형 지체 장애인인 이반 5세, 이복누이 소피야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딸 안나 페트로브나, 딸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 예카테리나 1세 (1725-1727) - 표트르 1세의 둘째부인 (리투아니아 출신)
• 표트르 2세 (1727-1730) - 표트르 1세의 손자
아버지 알렉세이는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가 할아버지인 표트르 1세에 의해 처형됨

• 안나 이바노브나 (1730-1740)
- 표트르 1세의의 둘째형인 이반 5세의 네째딸

​• 이반 6세 (1740-1741) 
- 안나 여제의 이질녀인 메클렌부르크의 공녀 안나 레오폴도브나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안톤 울리히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이반 5세의 외외증손자. 
1740년 10월 17일 안나의 유언에 따라 러시아의 황제로 선포되었다

​• 옐리자베타 (1741-1762) -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이다.
1741년 11월 25일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32세의 나이로 러시아의 황제가 되는데 이로써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 표트르 3세 (1762) -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로 
이모인 러시아 제국의 여제 옐리자베타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 예카테리나 2세 (대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1762-1796)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을 했다.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 파벨 1세 (1796-1801) -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전제정치로 살해된다.
• 알렉산드르 1세 (1801-1825) - 파벨 1세의 첫째 아들. 햄릿 같은 성격의 소유자.

• 니콜라이 1세 (1825-1855) - 파벨 1세의 둘째 아들. 결단력의 소유자,
유럽의 헌병. 크리미아 전쟁(영국, 프랑스, 터키, 오스트리아, 독일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

​• 알렉산드르 2세 (1855-1881) - 니콜라이 1세의 아들. 농노제 폐지, 행정 개혁. 암살 당한다.
• 알렉산드르 3세 (1881-1894) -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아들. 반동정치
• 니콜라이 2세 (1894-1917) - 알렉산드르 3세의 맏아들. 반동정치 계승. 혁명세력 등장 후 처형당한다.

 

황태자 시절의 어린 표트르

표트르 대제 (Peter I the Great 1672~1725)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로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루스 차르국을 러시아 제국으로 건립했다.
표트르는 1672년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Alexey Mikhailovich 1629~1676)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야 키릴로브나 나리시키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황태자 시절의 어린 표트르

표트르가 4살 때에 알렉세이 황제가 승하하자 

이복형 표도르 3세 (Fyodor Ⅲ)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때에 그는 어머니 나탈리야(Nataliya Narshkina)와 함께 왕궁에서 나와 
모스크바의 외국인 거주지 부근에서 살았고 

그리 오래는 아니지만 백해 연안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차르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왕궁으로 옮기지 않고 줄곧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다.

표도르 3세는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6년 만에 저승으로 갔다. 
이에 표트르 1세가 차기 황제로 낙점되었으나 이에 반대한 

이복누이 소피아 알렉세예브나가 최정예 근위대라고 할 수 있는 

스트렐치(Streltsy)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복형 이반 5세와 표트르 1세가 공동 황제에 오르고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것으로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표트르는 이복누이 소피야 공주가 주동한 쿠데타로 

표트르를 지지한 귀족들도 숙청된 탓에 실권을 잃었다.

소피아의 눈을 피하기 위해 표트르의 어머니는 

표트르를 시골 마을로 보내서 키우게 했다. 
그런데 이 마을이 마침 러시아에 일하러 온 유럽 상인들과 

기술자들의 정착촌과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표트르는 

그들과 가까이 지내며 당시 최신의 기술들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표트르가 흥미있어 한 것은 서구식 군대 전술, 항해술, 조선술, 포술 등이었으며, 
배운 것을 실천해보기 위해 또래의 귀족 자제들을 모아 '놀이 군대'를 만들어 놀면서 
자연스럽게 최신 군사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12살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말에 편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벌써 십여 가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술을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러시아 대귀족의 딸인 

세 살 위의 예브도키야 로푸히나(Eudoxia Lopukhina)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표트르의 어머니 나탈리야가 실질적인 

권력자인 소피아를 상대로 거둔 정치적인 승리였다. 
이때부터 표트르는 러시아 전통에 따라 

성년의 시기를 맞이했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소년병들과 군인놀이를 하거나 기계를 관찰하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소피아는 당시 최정예 근위대 스트렐치(Streltsy)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크림 전쟁에 개입해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인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권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누나 소피아는 

스트렐치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시도했다. 
소피아는 이미 한 번 쿠데타에 성공해서 병약한 이반을 표트르와 함께 

차르로 세우고 자신이 직접 정권을 장악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스트렐치도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아 

수백 명 정도가 쿠데타에 가담했을 뿐이었다. 
여기에다 스트렐치 내부에서 표트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은밀하게 쿠데타 계획을 표트르에게 알렸다.

 

Tsarevna Sophia Alexeevna in the Novodevitchy Convent. 1879. 
by Ilya Repin. oil on canvas. 145 x 202 cm. Tretyakov Gallery Room 29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감금된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황녀. 
창 밖에 교수형 당한 소피아의 측근들 시신이 보인다.

표트르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소피아는 쿠데타의 불발로 실각했다. 
소피아는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엄중한 감시를 받으면서 남은 평생을 베일에 갇혀 살게 되었다. 
이는 반란이라기보다는 당시 청나라 및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패하자 
소피아에 대한 귀족들의 여론이 나빠지고 국면 전환용으로 벌인 사건이 커진 것이다. 
또한 표트르가 소피아의 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었던 데는, 
서유럽 출신자들로 만든 용병대의 대장인 고든과 표트르의 두터운 친분 덕분에 
최정예 부대인 용병대가 표트르 편을 든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표트르가 권력을 잡지는 못했다. 
열일곱 살의 표트르 대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어머니인 나탈리야(Nataliya)였다. 
표트르는 여전히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외국인 거주 지역을 들락거리면서 분주한 일과를 보냈다.

표트르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 시기는 어머니 나탈리야가 사망한 1696년 1월이었다. 
이즈음에 표트르와 로푸키나(Lopukhina)의 결혼도 그리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고 끝장났다. 
그들은 결혼 이듬해 후계자인 알렉세이(Alexei Petrovich)를 낳았지만 
두 사람의 개성은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 
표트르와 달리 로푸키나는 전형적인 대귀족의 취향을 고수했다. 
표트르는 로푸키나에게 그녀의 직위와 신분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수녀원에 집어넣어 버렸다.

사실 이런 일 때문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황제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섭정이자 제위 찬탈자인 

소피아의 권한으로 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논리였다. 
표트르와 함께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 5세는 

표트르와 관계가 우호적이어서 실권은 표트르에게 넘겨주었으나 
쫒겨나지 않고 명목상의 차르 자리를 계속 유지한 채 살다가 곧 병사했다.
이반이 1696년에 죽자 그 때부터 표트르는 명실공히 유일한 절대 통치자가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린 초상화 (Godfrey Kneller 그림) 

1695년 오스만 제국과 재개된 아조프 전쟁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군이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오스만군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속되었지만 

쉽사리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함대를 이용하여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함대를 갖고 있지 않은 루스(Rus) 차르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 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르는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하게 되었다. 
표트르는 아조프에서 철군한 다음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시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 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표트르는 빠른 속도로 함대를 만들기 시작해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어설픈 전함을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해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해 다시 아조프를 공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조직된 이 함대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선박들로 이루어졌지만 
규모 면에서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일단 아조프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튀르크의 수송선단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했다.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트르의 형 이반 5세가 죽었다. 
이 때부터 표트르는 루스(Rus) 차르국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 목수들과 함께 선박 건조 일을 하는 표트르 대제를 묘사한 그림

1698년, 표트르는 서유럽에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지중해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사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러시아 혼자 상대하기에는 벅찼다. 
그는 한 세기 전에 오스만튀르크의 서방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던 
유럽 국가들의 대 튀르크 동맹을 다시 한 번 결성하려고 했다.
그리고 서유럽에서 기술이나 사회정책도 배워 오라는 뜻으로 

젊은 귀족들도 대거 포함시켰는데, 표트르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숨기고 

'표트르 미하일로프(Pyotr Mikhailov)'라는 가명으로 슬쩍 끼어들었다.

수백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개월에 걸쳐 인접국 폴란드, 튀르크와 대치 중인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나라를 순방할 계획으로 출발했다. 
이 대사절단은 스웨덴이 점령하고 있는 발트 해 연안을 따라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이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팀으로 나누어져 활동했는데 
표트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조선소였던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 조선소에서 직접 선박 건조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분을 계속 위장하는 데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일단 그는 키가 2m (203cm)가 넘는 장신인데다 커다란 눈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고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차르 - 목수상. 

 

신분을 숨기고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배를 직접 만들고 있는 표트르 대제.
이 조형물은 네덜란드가 러시아 해군 창설 3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한 것이다. 
황제는 청년시절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한 적이 있다.

프로이센에서는 포병 부사관 코스프레를 하고 대포 조작 기술을 배웠고, 
네덜란드의 조선소에서는 목수 코스프레를 하고 손수 배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영국에서는 수학, 기하학을 배우고 해군 체험도 하면서 명예 제독의 지위도 얻었다. 
그리니치 천문대도 방문하고 뉴턴의 연구에 대하여 듣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의학이나 해부학까지 수강했는데, 수강 중 시체를 보고 토한 자들을 
크게 문책하며 시체를 씹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거기다 시체 해부하는 것까지 참관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는 지금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이 서 있다.

그런데 사절단이건 방문한 나라 사람들이건 다들 '표트르' 미하일로프가 
코스프레 중인 표트르 1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단 키부터가 장신 수준이 아니라 2m가 넘는 거인이기 때문에 무척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단지 당사자가 열심히 코스프레를 하니 장단을 맞춰줬을 뿐. 
또 아무리 코스프레에 맞춰줘도 일국의 황제를 포병 부사관이나 
목수처럼 굴릴 수는 없으니 일반 귀족의 예로 대우해줬다고 한다. 

그리고 자국을 방문 중인 외국 황제의 신변에 위협이 가거나 스캔들이라도 터지면 
정말 난리가 날 테니 표트르가 방문하는 나라의 군주들은 
다들 노심초사하며 호위를 겹겹이 붙였다고 한다. 
거기에 표트르 또한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악동이라 
각 나라에서는 제발 러시아 황제가 자기 나라에 오지 말아주십사 했다고 한다. 
유학 동안에 표트르 1세는 러시아를 서유럽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생각을 다지게 되었고 바다에 집착하게 되었다.

 

Morning of the Strelets’ Execution.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1881.  
by Vasili Surikov. oil on canvas. 379 x 218 cm. Tretyakov Gallery Room 28  

유학 중간에 소피아의 잔당들인 스트렐치(Streltsy) 일부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는 14개월 만에 급히 러시아로 돌아와야 했다. 
이 쿠테타는 그가 없는 사이에 손쉽게 진압되었지만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에 가담한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 두도록 했다. 
스트렐치는 러시아의 최고 정예부대였으나 수십 년 동안 정치 문제에 간섭해 오면서 
러시아 정치의 고질병을 만들어 냈다. 
표트르는 그동안 군권을 움켜쥐고 정사를 농단하던 스트렐치를 해산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남자들이 수염을 깎는 모습

표트르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 하는데 치중했는데
이는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러시아 전통의상인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라고 했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기고 수염을 깎도록 했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혁하기 위해 유럽의 여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프로이센을 모델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 (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외국식 전통복 차림의 표토르

표트르는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해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했다. 
젊은이들은 유럽으로 유학 보내서 서유럽의 학문을 익히게 했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바다로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이 필요했던 표트르는 

1700년  스웨덴의 칼 12세에 대항해 덴마크, 폴란드가 맺은 

동맹에 참가하여 스웨덴과 대 북방전쟁에 돌입했다. 

 

폴타바 전투에서 - 표트르 대제는 전쟁에서 직접 진두지휘하는 걸 좋아했다.

1700년 러시아군은 나르바 전투에서 패하였다. 
스웨덴군은 약 1만~1만 2천명, 러시아군은 약 3만 7천명이었는데, 
스웨덴은 질적으로 크게 우세했고 사령관인 표트르 1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공격했다. 
거기다 눈보라가 스웨덴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불자 그를 이용해 기동을 은폐하고, 
러시아군을 세 토막낸 다음 각개격파하고, 패주하던 러시아군이 강가에 몰렸는데 
다리가 무너지는 등의 요소들이 작용해 스웨덴군은 6백여 명이 전사했지만 
러시아군은 9천여 명이 전사하고 2만 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당했다. 
거기다 대포 2백여 문과 수만 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양의 장비를 빼앗겼다. 

스웨덴군은 나르바 요새에서 러시아군에 포위당했을 때, 
러시아군이 준비가 미흡하고 포병이 약하고 탄약이 부족한 것을 알아채었기에 
질적 우세를 확신했고 전투 도중에 러시아군에게 고용된 외국인 장교들이 
러시아군 총사령관 드 크로아 공작과 함께 항복까지 해버렸다. 
이후 칼 12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군을 돌려 러시아는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전역에 있는 교회의 종 1/3을 녹여 대포를 만들고 
교회와 상인들로부터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여 서유럽제 신형 머스켓 
수만 정을 사들이는 등 철저히 복수의 칼을 갈았다.
이후에는 폴란드 연합군과의 작전으로 벌어진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칼 12세는 스웨덴으로의 퇴로마저 끊겨서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따라 

1710년 오스만 제국은 루스 차르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표트르 대제는 1710년 무리하게 몰다비아 원정을 계획하고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왈라키아(루마니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트 강변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칼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696년 아조프 요새를 강습하여 함락하는 러시아 최초의 해군과 표트르 대제

그러나 칼 12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 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7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고 불리며 두려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항코 해전(1714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원해 핀란드를 강타했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숙적 칼 12세도 1718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사했고,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은 칼 12세의 처남 프레드리크 1세는 러시아에 강화를 요청해 
1721년에 대북방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위해 명상하는 표트르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진행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의 착수

이 과정에서 네바강 하구 삼각주에 있는 섬에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를 지었고, 
그 도시를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지정했다. 
1712년 이 도시는 결국 완공되어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는데, 
이 도시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후 러시아의 귀족들과 백성들을 강제로 여기에다 이주시켰다. 
그러나 늪지대 위에 도시를 만드는 일이라 많은 노동자들이 폐렴과 결핵 등 전염병으로 죽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은 춥고 습한 지역이라 건설이 어렵다보니 

다들 건설작업 하기를 꺼려서 표트르 대제는 강제노동으로 이를 해결했다. 
매년 3만 명의 농민들이 끌려와서 일해야 했고 추위와 강풍, 물과 진흙탕이 
무릎까지 차오르는 작업환경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혹자는 이를 두고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평했다.

토목 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져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했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 중에는 표트르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정 러시아(Russian Empire)를 선포하는 표트르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1721년 11월 2일 표트르 1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귀족들로부터 "전 러시아의 황제(Emperor All-Russian)"

칭호를 받았고, 그와 동시에 옛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 (제정 러시아 Russian Empire)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네덜란드 공화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러시아가 제국을 칭하자마자 

가장 먼저 이를 승인했고, 1723년 스웨덴 왕국이, 1739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1742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1745년에는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이, 마지막으로 1764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승인을 하면서 러시아는 이로서 완전한 황제국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Peter the Great Interrogating the Tsarevich Alexei Petrovich at Peterhof, 1871. 
by Nikolai Gh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Room 31 
표트르 1세 대제께서 황제의 궁전 페테르호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하지만 표트르 1세는 후계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표트르 1세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는데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는 

아버지 표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유럽에 팔아넘긴다고 생각해 

그의 개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불만을 가졌다. 
또 표트르가 귀족의 딸인 어머니 에우도키아를 소박놓고 하녀 출신인 정부 
마르타 헬레나 스코브론스카 (예카테리나 1세)와 놀아난 것도 한 원인이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가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계속 흘러나왔다. 
결국 알렉세이는 이 소문 때문에 정부(情婦)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나폴리로 망명했다.
이에 표트르 1세는 정부(情婦)를 구슬려서 알렉세이에게 편지를 보내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했으나 알렉세이가 

돌아오자마자 체포한 다음 법원에 알렉세이의 처분을 맡겼다. 


이때 실질적인 납치 음모를 꾸민 주인공이 

톨스토이 백작으로, 작가 톨스토이의 직계 조상이다. 
납치 사건의 실질적 가담자인 정부(情婦)는 

다른 귀족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한다. 
1718년 재판소는 알렉세이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알렉세이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Portrait of Peter I on Deathbed, 1725, by Ivan Nikitin. Oil on Canvas,

36.6 x 54.4 cm. The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영면하는 표트르. 표트르 대제의 궁정화가였던 이반 니키틴(Ivan Nikitin 1690~1741)의 작품

1725년 2월 8일표트르 1세는 자신이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최후를 맞았는데, 사인은 요로결석이었다. 
평소에 술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도시 건설 공사장을 순시 중 인부들이 

네바 강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다가 폐렴에 걸린 것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하지만, 이는 일종의 설화일 뿐 신빙성은 희박하다.

제위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 (뒷날의 표트르 2세)가 상속받아야 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표트르는 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를 제위 계승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제위 계승권을 부인하는 러시아 전통에도 맞지 않았고, 
발트해 지방의 독일계 평민인 예카테리나 황후의 혈통도 

문제가 되었으나 표트르는 강권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예카테리나 1세 알렉세예브나

예카테리나는 본명이 '마르타 엘레나 스코브론스카(Martha Elena Scowronska)'로, 
에스토니아 인인데다 러시아 정교도가 아니라 루터파 신교도였다. 
열일곱 살의 나이에 스웨덴 군인과 결혼한 그녀는 결혼 직후 

러시아 군이 스웨덴 점령지 잉그리아를 정복하면서 포로로 잡혔으며 

여러 명의 장군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표트르에게 보내졌다. 
그녀는 비록 비천한 신분이었고 교육도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선량한 품성과 진한 모성애를 가지고 있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건설 현장에 그리 크지 않은 

목조 건물을 짓고 일반인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다. 
또한 생활 여건도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다. 
마르타는 아이를 여러 명 낳았지만 모두 유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표트르와 마르타는 이것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부부 생활을 한 데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하고 멘시코프 부부만 증인으로 참석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귀환한 이후에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 마르타는 예카테리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도로 개종했다. 
그녀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표트르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었다. 
표트르는 모두 열다섯 명의 합법적인 자녀들을 낳았지만 그들 중에서 
아버지보다 오래 산 아이는 예카테리나가 비밀 결혼식 이후에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 안나(Anna Petrova)와 옐리자베타(Yelizaveta)뿐이었다.

1722년에 표트르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어두운 그림자를 감지하고,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해 차르가 스스로 

후계자를 결정하도록 하는 왕위 계승법을 제정했다. 
표트르의 건강은 1723년 겨울부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다음 해 여름 예카테리나를 공동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났다. 
그는 그 시기에 방광에 이상이 생겨서 몹시 고통스러워했으며 

목숨을 건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불과 여섯 달 후에 닥친 두 번째의 위기는 극복하지 못했다. 
1725년 2월 새벽에 급작스럽게 사망한 표트르는 

후계자를 명확하게 지정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 그는 후계자 문제를 문서로 남기기 위해서 

애를 쓰다 기력이 떨어져 결국 마무리하지 못하고 큰딸 안나를 

불러달라는 부탁을 했으나 그녀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

예카테리나 1세는 차기 황제로 즉위했고 몇 년 뒤 공식 행사에 

속옷 차림으로 오래 서 있는 바람에 고열로 사망했다.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지만 

표토르 2세마저도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그 후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여제가 정국을 안정시킨다.

표트르 대제는 분명히 '위대한 지도자'였다. 
어떠한 입장에서 생각하든 러시아 역사에 그가 없었다면 제정 러시아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단 한 사람만 

러시아의 찬란한 미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러시아 인들은 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그의 업적을 깨달았다. 
표트르 사후, 그리고 예카테리나의 짧은 통치 이후 

러시아는 10년이 넘게 '반동의 시대'를 보냈다. 
그의 작은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에야 

완만한 개혁이 다시 추진되기 시작했으나 그 개혁마저 

완전하지 못해 심각한 사회적 모순을 내포한 상태로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다 결국 사회주의 혁명을 맞이했다.

 

1717년 프랑스의 화가 장 마르크 나티에르가 그린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에서 서구의 문물을 들여와

국가를 발전시킨 위대한 개혁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문물들은 

모두 표트르 대제가 도입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인들이 제2의 빵이라고 여기는 감자와 커피, 담배는 모두 
표트르 대제가 서구를 여행하면서 발견하고 러시아에 들여왔던 문물이다.

또한 대륙 국가이던 러시아에 해양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뜨게 한 것도 큰 업적이다. 
17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아드미랄티 조선소를 건설했는데 

이후 수많은 함선들을 건조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조선소로 남아 꾸준히 선박을 건조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바닷가에는 바다를 향해 달리는 모습의 

표트르 1세 기마상이 있고 현재 러시아 해군의 주력함이자 

세계 최대의 수상 전투함인 키로프급 4번함의 함명이 표트르 벨리키다.

표트르 대제 이후 러시아의 가장 큰 변화는 표트르 이전과 이후의 러시아 역사가 
아예 다른 맥락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서 '중세'란 표현은 쓰이지 않고,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는 '고대'라고 쓴다. 
이 고대 시기 러시아는 제국을 표방하기는 하지만 '차르'라고 하는   
슬라브족의 왕정일 뿐 다른 국가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류리코비치 왕조 이후 귀족의 권한도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세계사의 정면에 등장하게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한 후 이전에 비해 러시아의 교역량은 수십 배로 늘었으며, 
바르샤바에만 있던 대사관도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당시 쓰인 <차르 표트르 1세 폐하가 1700년 스웨덴 왕 카를 12세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게 된 정당한 법적 근거에 대한 강론>을 보면

당시까지 국제무대의 구석에 있던 러시아가 유럽의 공식적 외교 용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외교적으로 크게 부상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강대한 군대, 세련된 외교,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전해지는 수많은 외국 문물은

표트르 대제 즉위 30년간 러시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귀족이라도 군공을 세우지 않으면 고위장교로 

올라가기 힘들었기에 귀족들이 러시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이는 조국 방어 전쟁 이후 러시아 최초의 개혁 운동이라 불리는 

데카브리스트의 움직임을 낳는 계기로도 이루어진다.

아울러 표트르 시대 때 러시아의 지도가 처음 만들어지는데, 
이때 우랄 산맥을 경계로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게 되었다. 
이는 러시아에게 그동안 있던 막연한 러시아라는 이미지가 아닌 

유럽인으로의 정체성, 혹은 정체성의 의문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이는 러시아 사상의 조류 중 큰 줄기인 서구주의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 표트르 대제가 남긴 영향력은 러시아의 어떤 군주들보다 컸다.

하지만 표트르 1세의 실책 역시 존재한다. 
표트르의 개혁은 어디까지나 왕권을 제약하는 보야르들을 타도하고 

표트르 1세의 왕권을 강화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 백성들을 위하지는 않았다. 
개혁을 시행하는 와중에 벌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사업, 근대화 정책은 
많은 비용이 드는데 이 당시 러시아는 그것을 감당할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표트르 1세는 귀족과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여해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려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귀족과 백성들의 개혁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백성들을 강제동원하여 

노임도 제대로 안주고 가혹하게 부려먹어 도시 건설을 한 것이 비판받는다. 
강제노역에 백성들을 동원했다가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대우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보다못한 신하들이 도시 건설을

중단해 달라고 간언했는데도 오히려 이를 힘으로 억누르며 강행했고 

도시 건설이 완료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었다.

또한 서구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후 러시아의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되었던 농노제를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더 강화하였다. 
급격한 서구화 정책에 거부감을 가지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표트르 1세의 통치기 때부터 러시아의 농민 계층은 

사유지 농노, 교회 농노, 국가(국유지) 농노로 분리되었는데, 

이 세 부류의 농민들은 납세자 명부에 등록되어 인두세가 부과되었다. 
결국 농민은 귀족과 교회의 세금과 국가의 인두세에 이중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게다가 1714년 공포된 칙령을 통해 귀족의 법적 지위를 공고히 하는 한편, 
토지 소유 형태에 대한 법적 통합을 규정하니 이는 귀족의 농노 지배를 

더 강화하여 러시아의 농노제가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 2세 때 일어난 푸가초프의 난을 계기로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Portrait of Empress Anna Ioannovna, 1730. by Louis Caravaque.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의 초상. 


예카테리나 1세 이후 황태손인 표트르 2세가 그 뒤를 이어 3대 황제로

즉위하지만 표토르 2세마저도 일찍 사망하면서 러시아는 혼란을 겪는다.
4대 황제 안나 이바노브나(Anna Ioannovna 1693~1740)의 

통치 기간 동안 그녀의 정치적 역할은 미미했다. 

 

Portrait of the Emperor of Russia Ivan VI Antonovich. 러시아 황제 이반 6세의 초상

1740년 안나가 서거하자 안나의 언니의 딸 레오폴도브나가 

자신의 아들 5대 황제 이반 6세 (Ivan VI 1740~1764)의 섭정을 맡고 

옐리자베타를 수녀원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하자, 
옐리자베타는 러시아에 대한 프로이센 왕국 내정 간섭 배제와

러시아의 친 오스트리아 제국 ·  반 프랑스 왕국 외교 정책 

폐지를 희망하는 귀족들과 뜻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었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Elizaveta Petrovna 1709~1762)는 1741년 11월 25일 밤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황제와 그 어머니 레오폴도브나 및 
측근들을 체포하고, 26일 아침 8시에 상트페트르부르크 내 관료들과 
주요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한 후 자신을 러시아의 6대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이 등극과 함께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계보는 끊어졌다.

그 후 표트르와 예카테리나 1세의 차녀 옐리자베타 여제는 1741년부터 1761년까지 
20년 동안 러시아 제국을 다스리며 정국을 안정시킨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문화 사업에 그 열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한 러시아 궁정의 서구화를 열심히 진행했고, 

패션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학예 보호에도 적극적이어서 서구의 학식을 수용하기 위해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를 지원하였다. 


과학자 미하일 로모노소프의 제의를 수용하여 1755년에는 모스크바 대학을 설립했다. 
예술가의 육성에도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장 중요한 사업 분야는 건축이었다. 
궁정의 수석 건축가 라스트렐리에게 명하여 수많은 궁전을 건축하거나 
또는 크게 개축하여 웅장한 러시아 바로크 양식으로 변모시켰다.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고 있는 여러 궁전의 대부분은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통치기에 세워진 것이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개인적으로 안나 여제 시절 영향을 받아 

독일계 발트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으며 프로이센 왕국과 

프리드리히 2세를 매우 싫어하여, 스웨덴과 오스만 투르크라는 공동의 적과 
혐오 대상을 공유한 신성 로마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성향이 맞았기 때문에 곧 동맹을 맺고 7년 전쟁에 참가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프로이센을 거의 몰아붙였으나 
승리 직전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만다.

 

표트르 3세의 초상화.

이후 로마노프 왕조는 단절되었고, 표트르 1세의 외손자인 
표트르 3세 (Pyotr Fyodorovich Romanov 1728~1762)가 러시아 7대 황제로 즉위하여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를 열었으나 전쟁에서 대승한

프로이센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고 무조건 평화 협정을 맺어버린다.
결국 표트르 3세는 6개월 이후에 쿠데타로 실각해 표트르의 아내 예카테리나 2세가 즉위하였다.

 

예카테리나 대제 (Catherine the Great)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황제인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의 마지막 여제(女帝)이기도 하다. 
영어로는 캐서린 대제 (Catherine the Great).
동양의 측천무후와 자주 비교되기도 하는데 둘 다 거대한 제국의 여제였고, 
황후의 자리에서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카테리나는 원래 독일인이었다. 
프로이센군 소장인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딸로, 
본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 
세력이 미약한 귀족의 딸이었다. 
다만 시골 생활에 진저리를 내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열과 
본인의 총명함과 부지런함으로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외삼촌이 옐리자베타 여제와 약혼했던 인연 덕분에 1744년, 
러시아의 제위 계승권자인 홀슈타인 공작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다. 
이때 이름도 러시아식으로 개명하여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Екатерина Алексеевна)라고 불리게 된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 3세는 신혼 무렵엔 같은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사이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예카테리나가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옐리자베타 여제의 

경계를 완화시키기 위해 점차 친러시아 노선을 걷자 사이가 나빠진다. 
게다가 남편인 표트르는 장난감 병정이나 기차만 가지고 노는 

머리 나쁜 위인인데다가 심각한 성불구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래서 장기간 부부 관계가 없었고 부부 모두 18년간 각자 정부를 두고 살았다. 
이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세 아이 모두 각기 다른 정부의 아이였다는 풍문도 돌았다.

러시아군이 프로이센을 거의 막바지로 몰아붙였으나 승리 직전에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제위를 물려받은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추종하여 무조건 평화 협정을 맺어 버리자 

러시아 귀족들은 크게 분노하였고, 예카테리나 역시 남편의 처사에 크게 반발한다.

러시아인들 사이에 평판이 좋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수많은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예카테리나는 결국 1762년 6월 표트르 3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운 사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러시아 제국의 황제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표트르 3세는 체포되어 8일 후에 감옥에서 죽었다. 
이에 대해선 아마도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

혹은 방조가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예카테리나 통치 기간에 농업과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력은 크게 향상되었고, 볼테르 등의 문인들을 후원하며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초청하는 등 문화적인 면에서 업적을 거뒀다.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유럽 각지에 퍼져 있는 
그림, 조각들을 수집, 현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들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원래 예카테리나 2세가 휴식을 취하던 일종의 별궁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러시아인들은 물론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최고 수준의 미술관이 되었다. 
그녀가 사들인 미술품들도 굉장히 많다. 
현재에는 한 작품당 1분씩만 감상을 해도 8년이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향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치에서 대성과를 거두었다. 
오스만 제국에 강한 압박을 가하여 러시아-튀르크 전쟁(1770~1774)에서 승리하고, 
크리미아와 카프카스를 할양 받아 영토를 넓혔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았다. 
이것으로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이었던 크림 칸국은 멸망했다.

또한 크림 칸국으로부터 해방시킨 우크라이나 동부에 코사크 농부들을 정착시키고, 
볼가 강 남부 유역과 키스피해 연안에 칼미크인들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그 자리에 대규모의 독일계 이민을 이주시켜 밀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농업 생산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인신 매매와 약탈을 일삼던 크림 타타르족이 

토벌되면서 농업이 안정화되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산 밀은 러시아의 주력 수출 품목이 되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남자 애인을 많이 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이미 60세가 넘어서 죽음을 앞에 두던 순간까지도 

수많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몇년에 한번씩 정부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헤어진 정부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영지, 관직 등을 하사하여 후히 대접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상트(Sankt)는 라틴어로 성자, 피터(Peter)는 네덜란드어로 베드로, 

부르크(Burg)는 독일어로 도시를 뜻한다.
이 도시 하나로 러시아는 역사 · 문화적 자존심을 드높이고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 모은다. 
아름답고 웅장한 석조 건물들,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도시,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일컷는 에르미타쥐 등 예술적 향기가 넘치지만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의 900일 봉쇄작전을 겪은 ‘죽음의 도시’이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이곳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의 진원지였다. 
거사 성공 후 ‘레닌의 땅’이란 의미의 레닌그라드로 개명했으나 
1991년 6월 시민투표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해천추범(海天秋帆)은 민영환이 204일간 11개국을 여행하고 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일주 기행문이다. 
그는 1896년 4월, 고종의 특명전권 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 이범진, 김도일 등 사절단을 이끌고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거쳐 야간열차로 이곳에 왔다. 
120년 전 그들의 눈에 비친 도시의 인상이 어떠했을까.

“피득보(彼得堡, 페테르부르크)는 사방이 100여 리에 

인구가 100만 명이 넘으며 시가지와 집들이 웅장하고 큰데다가 

예와 강(曳瓦 江, Neva river)이 온도시를 껴안았고 황제의 대궐이 강에 임했다.”
며 도시의 규모에 감탄을 표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미국, 영국, 독일 등 서구의 대도시를 거쳐 왔는데도 말이다.

러시아와 유럽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풍광은 

러시아 그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제정 러시아 당시의 수도이기도 한 이곳은 러시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성당, 극장, 박물관 등 아름다운 건축물과 

도스토예프스키, 푸시킨, 레핀, 차이코프스키, 쇼스타코비치 등 
기라성 같은 예술가들이 숨 쉬던 곳,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도시다.

 

상원광장과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성 이삭 성당에서 네바(Neva) 강 쪽으로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시작된 상원광장에 이르면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나타난다.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이런 멋진 청동기마상을 세웠다. 

 

상원광장과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벼락 맞은 큰 바위 덩어리 위에서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준마는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광장을 질주할 것 만 같다.  
말위의 표트르는 오른손을 들어 도도히 흐르는 네바 강을 가리키고 있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1770년에 시작하여 12년에 걸쳐 1782년에 완성한 프랑스의 조각가  
에티엔 팔코네(Etienne Falconet)의 작품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가  
앞발을 들어 올린 말을 타고 오른손으로 네바 강을 가리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기마상이 위대한 조각물이라는 것은 무거운 청동 기마상을 
말의 뒷발로만 지탱하고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앞발이 들린 높이는 황제의 권위를, 앞발은 전진을 뜻하며, 
뱀을 밟고 있는 뒷발은 악을 물리치는 정의를 상징한다.
그는 이 기마상의 콘셉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죽어 있는 물질에 살아 있는 정열적인 본성을 주입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상을 위대한 정복자보다는 창조자의 개성으로 표현했다.”

 

[영상] 네바 강변과 데카브리스트 광장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바위에는 ‘PETRO primo CATHERINA secunda’ 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1세에게”
원래 이 자리에 대신들의 간청으로, 그녀의 상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여제는 표트르 대제의 상을 세움으로 해서 자신이 독일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불식시키고 표트르의 정통 후계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현명한 군주답게 잘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란했던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표트르와 함께 
‘The Great’의 칭호를 받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1825년 12월 14일 이 광장에서 러시아 장교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어에서 12월인 ‘제카브르(декабрь)’의 미국식 발음에서 온 말이다. 
이는 20~30대의 젊은 귀족으로 이뤄진 12월의 봉기 가담자들을 말한다.

데카브리스트는 대부분 1812년의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정예 부대 장교들이었다. 
‘위대한 애국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사람들이다. 
좋은 가문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이들은 퇴각하는 나폴레옹 군대를 뒤쫓아가 
프랑스 파리에 입성하는 벅찬 감동을 맛보았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선진화된 유럽의 문물과 
프랑스 혁명으로 야기된 자유의 물결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나폴레옹의 독재와 독선에 대항하여 목숨 바쳐 싸웠다. 
그리고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이루지 못했던 나폴레옹에게 
승리를 이뤘다는 자부심을 안고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조국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라 불리는 
황제의 압제와 전근대적 제도 아래서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데카브리스트는 절대 왕정을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나 공화제를 수립하고 
농노를 해방하는 근대화된 러시아를 꿈꾸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데카브리스트는 차르에게 러시아의 개혁을 건의했다.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1세는 귀족 자제들인 데카브리스트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보나 그동안 알렉산드르 1세가 보여줬던 개혁의 의지로 보나 
어느 정도의 낙관적인 답변을 기대할 만했다. 
그러나 차르의 개혁 시도는 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 과정에서 차르조차도 개혁 의지를 저버리고 말았다.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이 농노 해방에 찬성표를 던질 리 없었다. 
결국 데카브리스트의 적(敵)은 황제보다 더 보수적으로 깊이 뿌리박힌, 
기득권을 놓지 않는 귀족들이었던 것이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후계 구도가 확실치 않아 
러시아는 더욱 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동생 니콜라스 1세가 차르로 결정되었지만 데카브리스트에게는 
그 혼란이 반란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여졌다.

 

The Transportation of the Thunder-stone in the Presence of Catherine II; 
Engraving by I. F. Schley of the drawing by Yury Felten, 1770.  
캐서린 2세 시대 선더 스톤의 이동 장면 ; 1770년 유리 펠튼의 I. F. 쉴리에 의한 그림 작성

 

동상을 받치고 있는 벼락 맞은 바위는 400명이 넘는 장정들이  
네바 강변까지 옮겨오는 데만도 약 4개월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한 달 후 12월 14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그 날은 군대가 새로운 차르 니콜라스 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기로 한 날이었다. 
데카브리스트는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를 선봉에 세웠다. 
만일 그날의 거사가 성공하면 왕정을 폐지하고 다섯 명의 지도자를 앞세운 
민주공화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세웠다. 


민주공화국의 헌법은 농노 해방은 물론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러시아를 지향하고 있었다. 
거사 당일의 구호는 “콘스치투치야(конституция)!”였다. 

러시아어로 ‘헌법’이라는 뜻이다. 
이들이 헌법 제정을 얼마나 갈망했는지 이 구호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날 아침 3천여 명의 군인이 페테르부르크의 상원광장에 집결했다. 
그곳은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이 서 있는 도시의 심장부였다. 
12월 중순의 혹독한 날씨에 군인들은 모였는데 
지휘관인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반군들은 지휘관이 없는 상태에서 구호만 외치고 서 있었다.

곧이어 1만여 명의 정부군이 나타났다. 이들은 몇 시간 동안 서로 대치하며 서 있었다. 
지휘관이 나타나지 않아 이미 동요가 일어난 데카브리스트 중에는 
앞장서서 반란군을 이끄는 사람이 없었다. 
대치와 투항 설득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종료되지 않았다. 그러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12월 초의 러시아는 오후 네 시면 해가 져서 컴컴해진다. 

 

Inauguration of the Monument to Peter the Great. 피터 대제의 기념탑 개막식.
Engraving by A. K. Melnikov of the drawing by A. P. Davydov, 1782

결국 차르는 최후의 수단으로 대포 발사를 명령했다. 
난장판이 된 상원광장을 밤 동안 원상 복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왕실의 명령을 받은 경찰과 군인은 ‘정리’를 위해 
시체는 물론 부상자들까지 차디찬 네바 강에 던져 넣었다. 
이렇게 해서 이날 사망자가 1천3백여 명에 이르렀다.

차르 니콜라이 1세는 겨울궁전에서 주동자급의 데카브리스트와 만났다. 
차르는 그들에게 몇 차례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수사에 최대한 협조하면 너의 목숨을 살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교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한 말은 당신이 법 위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우리의 운명이 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당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다섯 명은 교수형을 당했다. 
나머지는 카토르가형이라는 시베리아에서의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차르가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두고두고 당하게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데카브리스트는 쇠사슬에 묶여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이들은 형기를 마친 후에도 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르쿠츠크나 치타보다 훨씬 동쪽에 있는 네르친스크까지, 
혹은 북극 가까운 곳까지 추방되어 광산 등에서 중노동을 했다. 
1856년 알렉산드르 2세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살아남은 사람 모두에게 완전 사면령을 내렸다.

 

Camouflaged from German aircraft during WWII 
세계 제2차 대전 중 독일 항공기로부터 공격을 피하기 위해 표트르 대제 기마상을 위장하고 있다.

"그곳, 황량한 파도 옆에,
그가 서 있었네, 강인한 사고를 북돋우면서.

그리고 응시했네, 오로지 먼 곳으로만
넓은 강 하구에 초라한 돛단배 한 척
네바 강을 표류하며 바다로 갔네, 저 혼자서.

진흙투성이의 강둑에는 이끼만 자라고 서너 개
낡은 헛간만이 여기저기에 서 있었다네.

가여운 핀 족의 거처는 사람들로 그득한데
속삭이는 숲에는 햇빛이 닿지 않아
언제나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네.

그래서 그는 깊은 상념에 빠졌다네.
"여기서부터, 정말로 우리가 스웨덴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을까?"

 위의 시는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 (Aleksandre Sergeievich Pushkin)이 
1833년에 쓴 낭송시 <청동의 기수(Bronze Horseman)> 도입부이다. 
<청동의 기수>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표트르 대제의 동상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1782년 그의 손자 며느리인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Ⅱ)에 의해 봉헌되었으며, 
푸슈킨은 그를 위하며 3장 476행으로 구성된 서사시를 썼다.

표트르 대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근대 러시아를 설계한 사람이었다. 
또한 표트르 대제는 우리에게 과연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종종 어떠한 숭고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경우, 

그 목표에 도달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목표와 정반대되는 

가혹하거나 비열한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숭고한 목표가 비열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결론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

 

[영상]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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