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아 나 간다고 슬퍼 마라” <소년> 잡지 권두시의 비밀…
독립운동가들이 의병투쟁·애국계몽운동 다음으로 선택한 ‘망명’을 은유해


잡지 <소년> 1910년 4월호(왼쪽)에 실린 망명길 떠나는 이들을 노래한 권두시, ‘나라를 떠나는 슬픔’과 ‘태백의 님을 이별함’. 임경석 제공


태백아 우리 님아


나 간다고 슬퍼 마라


나는 간다


가기는 간다마는


나의 가슴에 품긴 이상의 광명은 영겁무궁까지도 네가 그의 표상이로다.


이별을 노래한 시다. 우리 님 ‘태백’에게 석별의 정을 전하고 있다. 부득이 헤어져야 하지만 님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더욱 타오른다고 말한다. 최상급 수사를 써서 속마음을 표현했다. 끝없이 영원토록 당신은 나의 님이라고 토로한다.


신민회 “죽음을 결심하고 자백하지 않을…”


잡지 <소년> 1910년 4월호에 실린 권두시의 한 구절이다. 1908년 11월부터 1911년 5월까지 통권 23호를 발행했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로 이름 높은 바로 그 언론매체다. <소년>은 만 18살에 불과하던 최남선이 거의 혼자 발행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일본 유학을 그만두고 중도에 귀국한 최남선은 큰 목표를 세웠다. 한국의 시대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아, 그 수단으로 잡지 발행을 꾀했다. 그는 근대 지식에 관한 교과서를 젊은이에게 공급하는 방법으로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서구 문학을 비롯해 세계의 지리와 역사, 철학과 과학에 관한 기사, 번역·번안 작품이 <소년>에 실린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1909년 9월호부터 <소년>이 바뀌었다. 청년학우회 결성에 참가한 최남선은 잡지 지면에서 그 단체의 동향을 선전했다. <소년>이 청년학우회의 기관지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청년학우회 참가를 권유한 사람은 안창호였다. 그때 최남선은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에게 여러 군데서 입회하기를 청하는 단체가 많았으나 도무지 응낙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내 이 청년학우회에는 희생적으로 일하겠노라”면서 쾌히 승낙했다.①


청년학우회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표면단체였다. 표면단체란 실정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내에서 합법적·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 말기에 보안법, 신문지법 등과 같이 기본권을 제약하는 악법이 횡행하던 때였다. 외교권·경찰권·사법권을 박탈당하고 허울만 남은 대한제국이었다. 일본의 침략기관 통감부가 지휘하는 경찰의 압제와 감시를 수용해야만 하는 시대였다. 피억압 예속 상태에 빠진 한국을 구하려면 비밀결사가 필요했다. 합법 상태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동지적 결합이 요청됐다.


신민회는 그에 부응하는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에 가입하려는 사람에게는 엄중한 결단을 요구했다. “입회의 첫째 조건으로 만일 경찰에게 발각됐을 때는 죽음을 결심하고 자백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②​ 언제 성립됐는지, 조직 규모는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 말기에 애국계몽운동을 추동하던 비밀결사였다는 점에선 다른 의견이 없다. 신민회의 활동 반경은 넓었다. 서우학회, 한북흥학회, 기호흥학회 같은 학교설립기관 속에 신민회 구성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평양 대성학교를 비롯한 각지의 초·중등 사립학교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상동청년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같은 수도 서울의 기독교 청년단체 속에도,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기관 속에도 신민회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망명가들의 잘 짜인 정교한 독립운동


1910년에 이르렀다. 망국의 그림자가 다가왔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양상이 뚜렷했다. 그것을 저지하려던 비장한 시도들은 유혈 탄압 속에 시들어갔다. 한때 전국을 내란 상태로 몰고 갔던 의병 투쟁은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애국계몽운동도 총칼의 탄압 앞에서 무력했다. 일본군 헌병대는 항일운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특히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 이후에 더욱 그러했다. 무차별적인 체포, 구금, 구속이 자행됐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해 3월께였다. 신민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사들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망명이었다. 집단적으로 외국에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합의했다. 어떻게 강력한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망명을 결심한 사람들은 잘 짜인 정교한 독립운동 계획안을 고안했다.


먼저 일본을 적대하는 서구 열강의 외교적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염두에 둔 강국은 바로 러시아와 독일이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배 이후 절치부심 복수를 염원하고 있었다. 또 남서 태평양의 마셜제도와 중국 교주만(산둥성 자오저우완)에 교두보를 마련한 독일은 아시아·태평양 일대에서 세력권 확장을 위해 일본과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다. 시운이 맞아 굴러간다면 이들이 한국 독립의 우방이 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했다. 만주 밀산현에 농경지를 사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는 한편, 무장투쟁 간부를 양성할 사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다. 일본이 러시아나 독일과 전쟁하게 되면 국내에 진격할 무장부대의 군사 간부를 양성한다는 복안이었다. 또 있었다.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조직화하기로 했다. 북간도, 연해주, 미국 등지에 사는 한인 이주민 수십만 명을 ‘대한인국민회’라는 단일한 조직으로 결속하는 일이었다. 그뿐인가. 독립운동을 선도하는 언론매체도 발행하기로 했다. 제대로 된 항일 언론은 국내에서는 경영하기 어려웠다. 망명을 결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 계획안을 실행에 옮기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문제도 해결됐다. 큰 부자인 이종호·이종만 형제가 대농장의 경영 자금을 출자하기로 약속했다.


망명자들은 중국 산둥반도 칭다오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독일의 조차지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망명 이후의 일을 도모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그해 3~4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일 운동가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사관학교 운영을 책임지기로 한 이갑·유동열·김희선 등 대한제국의 장교들, 언론매체 발간과 사관학교 정신 교육을 담당할 저명한 저널리스트 신채호, 거액의 운동자금을 출자할 이종호 형제, 농경지 구매와 농장 경영을 맡을 김지간, 외국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 안창호와 이강 등이 그들이었다.③ 이 명단은 이강이 뒷날 저술한 회고록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출발 앞두고 자금책이 붙잡히는 바람에


이외에 망명자는 더 있었다. 보기를 들면 보성전문학교 졸업생 김립이 그러했다. 행적을 추적해보면 김립도 신민회 망명 간부들과 보조를 같이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립은 1910년 3월9일 서울에서 열린 보성전문학교 제3회 졸업생 다과회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졸업생을 대표해 개회 취지를 설명했다고 한다.④ 그런데 불과 한 달 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집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4월4일 블라디보스토크 한민학교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 추도회에 참석해 통분에 찬 연설을 했다.⑤ 요컨대 김립도 신민회 요인들의 집단 망명 행렬에 참가한 한 사람이었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당시 망명자 대열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다수의 인물이 더 가담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신민회 인사들의 집단 망명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나라가 망한 뒤인 1910년 12월, 신민회 인사들의 국외 망명이 또 한 차례 집단적으로 조직됐다. 이번에는 근거지가 압록강 건너 서간도로 상정됐다. 농경지 구입과 사관학교 설립을 위해서 75만원을 모금할 계획을 세웠다. 정부 기관 장예원의 주사 월급이 15원이고, 사립학교 교원 월급이 25원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천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이 논의에 참가한 사람들로는 양기탁, 이동녕, 이시영, 안태국, 이승훈, 김구, 김도희, 주진수 등이 밝혀져 있다. 언론과 교육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던 유력한 반일 인사들이었다. 망명 계획은 극비밀리에 이뤄졌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양기탁의 경우 자신의 망명 의도를 친동생 양인탁에게도 비밀에 부쳤다. 국외로 출발하기 직전에야 귀띔할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발을 앞두고 사고가 터졌다. 독립군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잠행하던 안명근이 불행히 체포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국외 망명을 기도하던 신민회 인사들이 속속 검거됐다. 사안이 급박했다. 검거 선풍 속에서 망명을 결행해야만 했다. 이회영·이시영 6형제와 이동녕이 건너갔다. 뒤따라 이상룡, 김동삼, 김대락·김형식 부자 등도 망명에 성공했다. 집안 재산을 처분해 온 가족을 이끌고 나선 비장한 망명길이었다. 서간도에 살던 토착 중국인들이 그 행렬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짐을 실은 수레가 줄지어 오는 것을 보고서는 한국의 황실 인사가 망명하는 것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⑥


동군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소년> 권두시는 바로 신민회 망명자들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었다. 망명 계획이야 극비밀리에 이뤄졌지만, 잡지 편집자는 그 내막을 전해 듣게 됐음이 틀림없다. 기약 없이 망명길에 오르는 동지들을 바라보는 젊은 최남선의 가슴에서는 격정과 비애감이 끓어올랐다. 그는 망명자들을 축복하는 시 두 편을 썼다. ‘나라를 떠나는 슬픔’과 ‘태백의 님을 이별함’이 그것이다. 의도가 노출되면 위험할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망명자들의 용기를 기리지 않을 수 없었다.


‘태백’이란 조국을 가리키는 메타포(은유)였다. 지금은 비록 이지러진 달처럼 쇠락하고 있지만, 시운이 닿으면 다시 둥근 보름달로 떠오르게 될 조국이었다. 피억압 민족에게 그것은 평화와 정의의 표상이었다. “세계 평화의 옹호자, 우리 강토의 정수, 우리 역사의 체화, 우리 민족 이상의 결정, 모든 옳음의 활동력의 원천”으로 간주됐다.⑦ 권두시는 미래의 낙관으로 끝맺고 있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봄은 오느니라


제왕의 권력과 재화의 세력 밖에 있는 동군(東君·태양신)은 때만 되면 오느니라

무궁화 다시 피건 또 다시나 만나자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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