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수배자는 ‘비밀결사’ 재건에 주저하지 않았다

박헌영 등 중앙집행위원 체포로 고려공산청년회 위기 처하자
권오설, 1~4선 후보 집행위 구성해 대행 체제 만들고 안정화


1928년 2월17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찍은 권오설의 초췌한 모습(왼쪽). 권오설과 김동명이 이면지에 급하게 휘갈겨 쓴 1925년 12월3일 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 보고서 첫 페이지. 당시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임경석 제공

권오설(29)이 체포됐다. 1925년 11월30일 이른 아침이었다. 종묘 외대문 밖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 부부의 살림집을 찾아갔다가, 공교롭게도 현장에서 가택수색 중이던 종로경찰서 형사대와 마주쳤다. 형사는 셋이었다.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2년째 일하던 터라 낯이 익었다. “곧 돌아오겠다”며 현장을 벗어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만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 당일 석방되자 잠적을 택했다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은 그제야 알았다. 공청 책임비서 박헌영이 전날 밤 8시30분에 긴급체포됐다는 사실을.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주일 전에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외국 연락기관 책임자들이 검거됐으나, 다행히 단순 폭행 사건에 연루된 탓이라고만 알았다. 비밀결사 존재가 노출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만일 상황을 염려해 선제적으로 보안 조처를 강화한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체포 30분 전에 중요 서류 전부를 책임비서의 처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옮긴 시각은 밤 8시고, 박헌영 부부가 체포된 시각은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때였다. 위기일발이었다.

고등경찰계에서 유능하기로 첫째·둘째 손가락을 다투는 요시노 도조 형사가 취조에 나섰다. 초점은 두 가지였다.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박헌영 집을 찾아갔느냐? 네 동생 권오직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형사는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불러들이려고 했는데 마침 잘 걸렸다.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행이었다. 비밀결사 조직원 명단이 노출된 것 같지는 않았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파견된 동생의 거취를 묻는 걸 보니, 명단의 일부는 드러난 것 같았다. 권오설은 요령껏 대답했다. 자신이 간부로 있는 합법단체 노농총동맹 업무를 전면에 내세워서 진술했다. 동생이야 조선에 있지 않으니, 그의 소재에 관해서는 뭐라 답해도 좋았다.

웬일인지 그날 밤 권오설은 석방됐다. 같은 날 연행된 다른 혐의자 2명과 함께였다.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경찰도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그를 연행한 때문인지 수사 초점을 잡기 어려웠던 것 같다. 공개단체의 중요 간부이므로 신분이 확실하고 도주할 우려가 적다고 보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권오설은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권오설은 깊이 생각했다. 무사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들의 하는 행세가 붙잡은 자들을 영 내보내지 않을 눈치를 보”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뒤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행이 따라붙은 게 틀림없었다. 답은 자명했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고 비밀결사 동지들을 보호하려면 신속히 잠적하는 것이 옳았다.

잠적이란 경찰 수배망을 피하기 위해 일상활동 공간을 벗어나 낯선 환경에서 지내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가정, 직장, 사회활동과 절연하는 것을 의미했다. 혈연·학연·지연 관계가 있는 사람과 연락하거나 물품을 주고받는 것은 금물이었다.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않는 절대적 잠적과 비밀 활동 지속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계를 유지하는 상대적 잠적이 있었다. 권오설은 후자를 택했다. 공청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렸기 때문이다. 당시 공청 집행부는 7명으로 구성됐지만 그중 3명(박헌영·임원근·신철수)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다른 2명(김단야·홍증식)은 때마침 지방에 출장 중이었는데, 검거 사건이 일어났음을 통지받고서 긴급히 피신했다. 서울에 남은 중앙집행위원은 자신과 김동명 둘뿐이었다. 투쟁 일선을 지켜야 할 소임이 자신에게 있었다.


종로경찰서, 권오설 수배망 넓혀


그의 예측이 적중했다. 이틀 뒤인 12월2일 종로경찰서 형사대는 다시 권오설 체포에 나섰다. 이날 형사들은 노농총 회관을 전격적으로 수색했다. 견지동 88번지에 있는 노농총 회관은 상임위원 권오설이 줄곧 있었던 숙소였다. 경찰은 그의 사진까지 2장 휴대했다. 회관 내에 머물거나 출입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일이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형사들의 추적은 집요했다. 그의 친척 아우이자 고향 후배인, 청년운동계의 신진 활동가 권태동이 희생양이 됐다. 경찰은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간부로 있는 그가 권오설의 거처를 알고 있으리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를 붙잡아 가혹하게 고문했다.

검거가 확산됐다.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전 조선에서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전시 상태’와 같았다. 경남 마산에서 김상주가 검거되고, 경기도 강화에서 박길양이 체포됐다. 평북 신의주에서는 조리환이 붙잡혔다. 급기야 12월3일에는 잠적 중이던 공산당 중앙간부 김재봉과 김찬의 비밀 숙소마저 노출됐다. 12월11일에는 피신 중이던 공청 중앙집행위원 홍증식이 체포됐고, 평양에서 최윤옥이 검거됐다.

검거 사건은 한 달간 계속됐다. 이듬해 1월 말의 집계에 따르면, 경찰에 체포된 비밀결사 구성원은 모두 22명이었다. 이 중에서 공청 회원은 12명, 공산당원은 9명이었다. 1명은 비당원이었다. 당시 공청 정회원은 212명이었는데, 그중 6%에 해당하는 사람이 수감된 셈이었다. 체포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비중은 컸다. 공청 중앙집행위원 4명(박헌영·홍증식·신철수·임원근), 중앙검열위원(최윤옥·조리환) 2명이 체포됐다. 공산당도 형편이 비슷했다. 수감된 공산당원 9명은 전체 당원 178명에 비하면 5%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앙집행위원 4명(김재봉·유진희·주종건·김약수)과 중앙검열위원 1명(윤덕병)이 포함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과 공청의 최고 지도자인 책임비서가 둘 다 체포됐다는 점이다. 두 비밀결사의 중앙기관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음이 뚜렷했다. 그뿐인가. 코민테른과 연계를 맡던 국경연락부서도 파괴됐다. 신의주에 거점을 둔 국경연락 책임자들이 수감되고 말았다.


당과 공청 핵심들 줄줄이 잡혀가


권오설은 대담한 성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검거 사건에 부딪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혁명운동에 처음 참여할 때부터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각오했다고 결기를 표명했다. 그는 검거 사건을 냉철히 분석했다. 비밀결사에 곤란을 주는 측면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와 동시에 전 조선의 운동선 초점이 조선공산당과 공청에 향하게 하는 이익도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흥망성쇠가 검거 사건 대응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 난국을 잘 극복하면 조선혁명운동 뿌리는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지만, 우물쭈물하면 혁명운동은 적어도 3~4년 정체할 것이라고 보았다.

권오설은 위기에 처한 비밀결사를 다시 일으키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수배자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랬다. 첫째, 공청 집행부를 재건했다.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중앙집행위원을 중심으로 후계 집행부를 구성했다. 7명의 중앙집행위원 후보 그룹을 4중으로 조직했다. 제1선이 무너지면 제2선 조직이 그를 대행하고, 제2선이 체포되면 제3선이, 제3선이 무너지면 제4선 조직이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모두 청년 사회주의자 28명이 명단에 올랐다. 조두원, 정달헌, 김형선, 장순명, 이걸소, 고광수, 이승엽 등 훗날 사회주의운동의 중진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이 포함됐다.


1선 무너지면 2선이, 2선 무너지면 3선이


둘째, 동요하는 각지의 세포 단체를 안정시키려 했다. 전에 없던 대규모 검거 사건을 보고서 ‘지방 동지들’은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권오설은 이 국면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머잖아 겨울방학이 시작될 터인데, 그를 활용해 ‘학생 동지’를 지방 운동에 투입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도 단위 간부 조직이 없는 곳에 공세적으로 도위원회 선출을 서두르기로 했다. 지방운동 활성화를 전담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2월27일 자로 경기도위원회와 경북도위원회가 설립됐다. 각각 5명으로 이뤄진 간부진이 구성됐다. 마땅히 도지방대회를 소집해 선출해야겠지만, 검거 사건이 진행 중인 비상 시기이기 때문에 부득이 중앙집행위원회가 임명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셋째, ‘표면운동’의 현상 유지 정책을 시행했다. 표면운동이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공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단체의 활동상을 가리킨다. 비밀결사 구성원은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표면운동을 활용했다. 공청도 그랬다. 그러나 검거 사건으로 여러 공청 회원이 체포되거나 잠적했기 때문에 표면운동은 위축 양상을 보였다. 권오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위축과 좌절을 방어하기 위해 종전보다 더 기세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2월 중에 한양청년연맹이 연구반 정례회를 열고, 재경성 노동단체가 경인지역 노동운동자간친회를 소집하며, 학생과학연구회 주최로 강연회를 여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던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건물. 한국전쟁 때 건물이 파괴돼 현재는 종탑만 남아 있다(왼쪽). 1925년 9월24일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적기 게양식. 당시 신문에 “푸른 하늘에 물들인 러시아 국기, 우렁찬 혁명곡에 뱃심 좋게 번득”인다고 대서특필됐다. 한국근대외교사전, 동아일보

검거 확산에도 코민테른과 연락선 복구


권오설은 파괴된 외국 연락선도 복원했다. 국경에 설치한 연락 시스템은 붕괴됐지만, 다른 대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이었다. 1925년 1월 일본과 소련 사이 국교 정상화를 위해 체결된 일소기본조약에 의거해, 그해 9월 경성에 소련총영사관이 설치됐다. 일본 고등경찰은 총영사관의 안팎을 주의 깊게 감시했다. 그 결과 “소련총영사관 측은 일본 관헌의 주목을 피하고자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출입을 표면상 환영하지 않는다”는 소견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 소견은 틀렸다. 실제와 달랐다. 권오설은 검거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나흘 만에 코민테른과의 연락 경로를 뚫는 데 성공했다. 총영사관 내에서 가명 ‘밀러’를 쓰는 외교관 신분의 정보요원이 파트너였다.

동료의 논평에 의하면 권오설의 생김새는 광대뼈가 두 뺨 위에 두드러지게 솟아난 투사적 타입이었다. 말투는 열정과 정성이 가득 찬, 힘있는 어조였다.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지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밀결사 공청은 구성원 12명이 투옥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별다른 위축 없이 신속하게 역량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 문헌


1.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幹部 被捉 사건에 대한 보고’,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22-224, 1925년 12월3일.

2.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二 금번 돌발사건에 대한 대책’,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4-6об, 1925년 12월3일.

3. Член ЦК Коркомсолола Квон-о-сель·Ким-тон-мен(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Испоолкому КИМа(국제공청 집행위 앞), с.3,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94 л.1-12, 1926년 1월31일.

4.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三 금후 事業案’, 1-2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7-219об, 1925년 12월3일.

5.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二 금번 돌발사건에 대한 대책’, 5-6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4-6об, 1925년 12월3일.

6.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權五卨·金東明, ‘고공청 제10호, 道幹部 선정에 관한 건’, 2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2 лл.72-74, 1925년 12월 31일.

7.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神戶, 不二出版, (復刻板), 1984년.

8. 임원근, ‘亡友追憶, 1년 전에 간 權五卨에게’, <삼천리> 13, 60쪽, 1931년 3월1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