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파리강화회의 조선 대표가 모스크바로 간 이유는

딱 100년 전, 한민족 해방에 더해 ‘세계 대동’을 목적한 세계인 김규식
미국 워싱턴회의 대신 러시아 극동대회로 향해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당시 단상에 자리잡은 의장단. 이 중에 김규식이 포함돼 있다. 임경석 제공

 

김규식(40)이 러시아어 신원 증명서를 발급받은 날은 1921년 10월27일이었다. 이르쿠츠크의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는 혁명단체 신한혁명당의 대표자 자격을 인증하는 서류였다. 그런데 날짜가 촉박했다. 대회 개막일이 그해 11월11일로 예정돼 있었다.1 불과 14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기간에 중국 상하이를 출발해 시베리아의 동쪽 중심지까지 이동해야 했다.

 

서류는 손바닥만 한 천 조각에 작성됐다. 고려공산당 위원장 ‘Ман Гем Ким’(김만겸)의 러시아어 필기체 서명과 서기 ‘Pyengchanan’(안병찬)의 영어 필기체 서명이 쓰여 있고,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붉은 직인이 찍혀 있었다. 깨알만 한 글씨였다.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까지 일본군이나 백계 러시아군, 혹은 중국 군경의 예기치 않은 신체 수색의 위험을 넘겨야 했다. 또 소비에트러시아 영토에 진입한 뒤에는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떻게 휴대해야 할까? 지갑이나 호주머니에 지니는 것은 위험했다. 책갈피나 짐 속에 숨기는 것도 안전하지 않았다. 옷 솔기를 뜯어서 그 속에 넣고 꿰매는 방법이 가장 안전했다. 자그마한 천 조각으로 증명서를 만든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변장도 소용없는 밀정의 눈초리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상하이 망명자 사회에서 출발하는 사람이 김규식을 포함해 16명이나 됐다. 대표를 보내는 단체는 신한청년당(1명), 독립신문사(2명), 화동(華東)한국학생연합회(2명), 대한애국부인회(1명), 이팔(二八)구락부(1명), 조선기독교 대표(1명),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6명)와 상하이지부(1명), 고려공산청년회 상하이지부(1명) 등이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를 근거지로 활동하는 조선인 망명자들의 단체였다. 이들은 서너 명씩 짝지어 출발하기로 협의했다. 지극히 위험하고 모험에 찬 여정이 그들을 기다렸다.2

 

김규식 일행은 셋이었다. 신한청년당의 동료이자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장인 여운형(35),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중 2·8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나용균(25)이 길동무였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임장, 나용균은 상하이에 망명한 일본유학생 단체 이팔구락부의 위임장을 소지했다.

 

처음에는 만주 경유 노선을 택했다. 철도를 이용하는 편리한 노선이었다. 상하이에서 톈진까지, 톈진에서 펑톈을 경유해 하얼빈까지, 하얼빈에서 만주리 국경을 넘어 러시아 영내로 진입하는 노선이었다. 그러나 산해관을 넘어 만주 권역으로 들어서면 일본 세력 범위였다. 산해관 이북 남만주철도에 탑승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었다.

 

일행은 11월2일 철도로 북상했다. 여행길에 나선 중국인으로 변장했다. 그러나 열차 내부에 상주하는 밀정들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옷을 입은 어떤 조선 사람’과 ‘양복쟁이 하나’가 일행을 주시하고 있음을 느꼈다. 다행히 만주에 진입하기 전 위험을 감지해, 산해관 진입을 포기했다. 두 번이나 시도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이르쿠츠크로 떠날 때 옷 솔기를 뜯어서 그 속에 숨겼던, 천 조각 위에 깨알같이 작성한 김규식의 신원 증명서. 임경석 제공

 

워싱턴회의 대항 차원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길을 바꿔야 했다. 만주가 아니라 몽골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변경했다. 베이징에서 장자커우를 지나 몽골의 사막지대를 뚫고 러시아로 입국하는 코스였다. 밀정에게 발각될 위험은 적지만 교통상 어려움이 컸다. 그뿐 아니라 치안도 불안정하던 때였다. ‘로만 표도로비치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이 이끄는 2만 명 규모의 러시아 백위파 군대가 붕괴된 직후였다.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혁명정부가 막 들어섰고, 각지에서 약탈을 일삼는 마적단이 출몰하곤 했다. 자동차를 임대하고, 연료용 휘발유를 넉넉히 준비해야 했다. 초겨울 사막지대의 혹한을 견딜 두꺼운 방한구, 긴 여행 중에 부패하지 않을 식료품도 비축했다. 예기치 못할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권총·소총 등 무기류도 준비해야 했다.

 

1921년 11월25일, 김규식 일행은 몽골~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김규식은 극동민족대회 출석 대표자의 신원 조사서인 <조사표>에서, ‘합극도’(合克圖)를 거쳐서 입국했노라고 썼다.3 러시아명으로는 트로이츠코삽스크(Троицкосавск)라고 부르던,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와 베르흐네우딘스크(현재 울란우데)를 잇는 국경 소도시였다. 오늘날의 캬흐타(Кяхта)다. 당시 인구는 약 5천 명이었고,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중국의 교역 중심지였다. 중국인이 이 도시를 매매성(賣買城)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 있었다.

 

11월11일 열릴 예정이던 대회 개막이 뒤로 미뤄졌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대표자들의 도착이 지체됐기 때문이다. 조선인 대표자 가운데 예정일까지 대회 장소인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사람은 16명이었다. 대표단 전체의 30%에 불과했다. 김규식 일행도 그랬다. 그들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시점은 12월9일이었다. 예정보다 한 달 가까이 지체됐다. 이런 사정은 중국이나 몽골, 일본 대표단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부득이 개막일을 연기해야 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워싱턴회의의 진행 경과를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극동민족대회는 처음부터 워싱턴회의에 대항하려 개최된 것이었다. 대회가 연기된 이유를 상하이 <독립신문>이 보도했다. “본월 11일 러시아령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 원동민족혁명단체총연맹 회의는 1개월간 연기하기로 되었다는바, 이는 아마 워싱턴회의에서 되는 결과를 보아 거기 적합한 대응책을 취하고자 함”이라는 것이었다.4 대회는 두 차례 연거푸 연기됐다. 워싱턴회의(1921년 11월12일∼1922년 2월6일) 종료에 즈음한 시기로 옮겨졌고, 대회 장소도 궁벽진 시베리아가 아니라 소비에트러시아의 수도에서 열리는 것으로 변경됐다. 그리하여 1922년 1월21일부터 2월2일까지 코민테른 주최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1921년 12월10일자로 이르쿠츠크에서 극동민족대회 대표자 김규식이 작성한 신원 조사서 <조사표>. 임경석 제공

 

중국어·영어는 능숙, ‘법·덕·아·일’은 ‘약간’

 

대회 개막 일주일 뒤인 1월27일 현재, 조선 대표단은 54명이었다. 이는 결의권을 가진 전체 대표자의 43%에 이르는 수였다. 중국 대표단 37명, 몽골 대표단 14명, 일본 대표단 13명에 견주면 두세 배 되는 규모였다. 극동민족대회 대표단 가운데 가장 수가 많고,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대표단 가운데 김규식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로 파견돼 널리 이름을 떨친데다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 학무총장 등과 같은 고위직 출신이었다. 그는 조선 대표단의 단장으로 선출됐다. 외국어 능력도 고려했던 것 같다. <조사표>에는 “어느 외국말을 아시오?”라고 묻는 항목이 있다. 이 항목에 대해 김규식은 6개 외국어를 나열했다.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본어가 그것이다. 놀라운 재능이었다. 그중에서 중국어와 영어는 능숙했고, “법, 덕, 아(俄), 일” 네 개 외국어에는 ‘약간’이라고 단서를 달았다.

 

특히 영어를 잘 구사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대회의 공식 언어가 영어와 러시아어였기 때문이다. 대회를 취재한 미국인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200명 안팎의 대표 가운데 영어를 하는 사람은 30명이었고, 각국 대표단 가운데 적어도 누구 한 명은 영어를 알고 있었다. 조선 대표단 가운데 영어를 이해한다고 자임한 사람은 6명이고,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6명이었다. 김규식은 극동민족대회 전체 대표들 속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대회 첫날 선출된 16명의 의장단에 포함됐고, 조선 대표단장 자격으로 본회에서 인사말을 했다.

 

김규식은 왜 모스크바로 갔을까? 그는 불과 1~2년 전만 해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 대표이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이었다. 미국에 대한 외교활동을 조선 독립의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옛 동료들은 여전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포고문을 발표해 워싱턴회의가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절실하고 중대한 생사의 문제’가 된다고 표명했다. 구미위원부도 한·일 양국의 대판결이 이뤄지리라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서방 외교를 중시하는 망명자들은 1천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를 맞았다고 흥분했다.5 김규식은 달랐다. 그는 워싱턴회의로 향하지 않고 모스크바의 극동민족대회로 향했다.

 

김규식의 <조사표>에 흥미로운 문항이 있다. ‘목적과 희망’이라는 항목에 대해, 김규식은 “한민족 해방 급 세계 대동”이라고 답했다. 홍범도가 같은 항목에 대해 “고려 독립”이라고만 적은 것과 대비된다. 김규식은 조선 독립에 더해 ‘세계 대동’을 추가했다. 바로 세계 혁명의 이상이었다. 세계적 범위에서 억압과 착취를 배제하고 새로운 이상향을 추구한다는 점을 뚜렷이 했다.

 

김규식은 이즈음 사회주의를 수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대회에 참석한 이시당(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후보당원 명단에 이름이 보인다. 미국인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조선 대표단장 김규식은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했다.

 

모스크바에서 정신적·물질적 희망을 찾자

 

크렘린궁전에서 극동민족대회가 개막되던 날, 단상에 오른 김규식은 왜 모스크바에 왔는지 설명했다. 그는 미국과 러시아를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과거에 워싱턴은 민주주의와 번영의 중심지였는데, 모스크바는 전제군주제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표상으로 간주돼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역전됐다고, 그는 힘주어 강조했다. 모스크바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운동의 중심지’로서 극동 피압박 민족의 대표자를 환영하는데, 워싱턴은 ‘세계의 자본주의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팽창의 중심’으로서 존재하게 됐다는 것이다.6 그는 조선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온 이유를 이렇게 천명했다. 하나의 불씨, 세계 제국주의·자본주의 체제를 재로 만들어버릴 불씨를 얻기 기대한다고.7 김규식의 이 연설은 회의장에 모인 140여 명의 대표자와 수많은 방청객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요컨대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와 구미위원부 경험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정신적·물질적 희망을 찾지 못한다면 조선 독립은 불가능했다. 동시대 다른 많은 조선 사람이 그랬듯이, 독립에 대한 열망이 그에게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는 최후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Удостоверение (Ким-кью-сик), no.41(김규식 증명서),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78 л.14.

2.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현실> 32, 한국역사연구회, 1999년

3. 김규식, <조사표> 1921년 12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78 л.13

4. ‘일쿠스크회의 연기’, <독립신문> 1921년 11월26일

5. 임경석, ‘워싱턴회의 전후 한국 독립운동 진영의 대응’, <대동문화연구> 51,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280~281쪽, 2005년

6. Речь от Ким-Гюсек [Пак-Киен](김규식[박경]의 연설),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59, л.18

7. 高屋定國·辻野功 譯, <極東勤勞者大會,議事錄全文> 東京, 合同出版, 37쪽, 1970년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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