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백남운과 어깨 나란히 한 노동자 출신 역사학자 이청원

사회주의 시각으로 첫 조선 전체 역사 써… 3대 일간지에 동시 연재하기도

35살 때의 이청원.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 중앙당학교 유학 시절에 촬영했다. 임경석 제공

 

이청원(李淸源)은 백남운(白南雲)과 병칭되는 사람이다. 둘 다 사적유물론에 입각해 한국사를 체계화하려 한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다. 1930년대는 ‘과학적 조선학’을 표방하는 신진 연구자가 다수 출현한 시기였다. 그 연구자들 속에서 둘은 항상 첫째, 둘째로 손꼽혔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영향력 있는 학술 단행본을 출간했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상)>(1937)을 간행했고, 이청원은 <조선사회사독본>(1936), <조선독본>(1936), <조선역사독본>(1937)을 펴냈다. 이 저작들은 두 사람의 평판을 한껏 고조시켰다.

 

사회주의 조선 역사학의 쌍두마차

 

백남운의 첫 책은 한국사학사상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고, 조선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성립을 의미하는 징표로 간주됐다. 당시 민간 3대 신문이라 일컫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는 앞다투어 출간 소식을 전했다. 또 여운형, 송진우, 백낙준 같은, 신문사 사장과 전문학교 교장으로 이뤄진 서울의 쟁쟁한 명사 20여 명이 출판 축하회를 열어줬다.1 백남운의 학문적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이청원의 첫 책이 지닌 의미도 그에 지지 않았다. <조선사회사독본>은 한국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저술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였다. 이청원도 “과학적 통사로서는 최초의 책”이라고 자부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는 일약 명사로 떠올랐다. 조선학계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두 사람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무엇보다 저술의 주안점이 달랐다. 백남운은 역사발전의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 조선의 역사를 관찰했다. 그 결과 5권으로 이뤄진 거창한 조선사를 기획했고, 그중 제1권이 바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생애 첫 저작이었다. 그의 책은 학계 내부 소통에 중점을 둔 아카데미즘의 자장 속에 있었다.

 

그에 반해 이청원의 저술은 학계보다는 대중 사이 소통에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다. 신문과 잡지 등 언론매체 지면을 널리 이용했고, 단행본도 모두 ‘독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독본은 교과서 형태로 출간된 텍스트면서, 동시에 ‘노동자·농민 대중의 계몽’을 위한 텍스트였다. 그의 책이 소수 지식인에게만 유통되고 읽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대중의 의식화와 자기 주체화를 의도했음을 잘 보여준다.2

 

두 역사가의 학력과 사회적 직위도 달랐다. 백남운은 동경상과대학(현재 히토쓰바시대학)을 나온 일본 유학생 출신이고, 졸업 이후에는 조선으로 돌아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에 반해 이청원은 학력도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일본에 체재하면서 사회주의 비밀운동에 종사하는 것 같다는 수군거림을 받았다.

 

이청원의 필적. 1948년 8월10일 작성한 ‘자서전’의 첫 쪽.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임경석 제공

 

이청원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백남운에 대해서는 연구 성과가 많은 편이다. 그에 관한 연구는 두텁고 그의 저술과 삶, 사상은 비교적 자세히 밝혀졌다. 그와는 달리 이청원에 대한 관심은 크게 일지 않았다. 그에 관한 학문적 검토가 이뤄진 것은 최근 10년의 일이다. 히로세 데이조, 박형진, 홍종욱 등이 이청원 연구에 참여했다. 이분들의 연구 성과 덕분에 이청원에 관한 우리의 이해가 크게 확장됐다.

 

이청원은 문필이 뛰어난 사람이다. 앞서 거론한 세 도서 외에도 신문과 잡지를 매개체로 활발한 기고 활동을 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에 그가 출간한 저서는 4권이고, 미디어 기고문은 도합 36건이었다. 저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고문은 3분의 1이 일본어로, 3분의 2는 조선어로 쓰였다.3 특히 1935년 말부터 1937년 말까지 2년간의 활동상이 눈부셨다. 미디어 기고문 대다수가 이 연대에 몰려 있었다. 심지어 1936년 1월에는 같은 시기에 3대 신문에 연재 기사 투고를 병행할 정도였다. <동아일보>에는 ‘조선인 사상에 있어서의 ‘아세아적’ 형태에 대하야’(전 5회)와 ‘작년 중 일본학계에 나타난 조선에 관한 논저에 대하여’(전 4회)를 연재했다. <조선일보>에는 ‘고전연구의 방법론’(전 3회)과 ‘시사소감’(時事小感·전 3회)을, <조선중앙일보>에는 ‘작년 조선학계의 수확과 추세 일고(一考)’(전 11회)를 기고했다. 눈길을 주는 신문마다 이청원의 이름이 도배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이청원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인텔리 출신으로 간주됐다. 연구가 활발하기 전에는 그랬다. 자연스러운 추정이었다. 미디어를 통한 저술 활동이 왕성했을 뿐 아니라 재일본 유학생들의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지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일본으로 도항했으나 유학이 목적은 아니었다.

 

이청원의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1923년(10살)부터 1929년(16살)까지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신풍리에 소재하는 풍산공립보통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풍산공립보통학교는 1925년 개교했다는 총독부 기록이 있다. 왜 이러한 불일치가 생기는지는 확실하지 않다.4 여하튼 이청원은 중등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가난한 부모는 아들의 공부하려는 정신을 높이 평가했지만 학자금과 도회지 유학 경비를 뒷감당할 여력이 없었다. 상급학교 진학 기도는 좌절됐다.

 

이청원의 첫 저작 <조선사회사독본>(도쿄 하쿠요샤출판, 1936) 표지. 임경석 제공

 

독서 통해 스스로 독립정신 갖게 돼

 

이청원은 도대체 어떻게 학식을 쌓았을까? 비결은 독서에 있었다. 그는 사회과학과 역사학에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마치 빨려들듯이 그에 관한 책과 팸플릿을 탐독했다고 한다. 그의 술회에 따르면 보통학교 4학년 때 겪은 6·10 만세운동이 그에게 역사와 사회과학에 관한 관심을 일깨워줬다. 신문에 게재된 사건 관련 기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조선 민족의 행복과 자유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국을 독립시켜야만 얻을 수 있음을 이해했다. 13살 소년의 마음에 민족해방 사상이 일어났다. 이청원의 회고에 따르면 불꽃 일어나듯 타올랐다고 한다.

 

이청원은 사회과학 연구와 실천에 대한 갈망을 끝내 억누를 수 없었다. 17살 되던 봄에 그는 마침내 도회지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일본 도쿄였다. 인구 499만의 대도시이자 일본제국의 수도 도쿄에 도착한 것은 1930년 5월이었다. 1934년 당시 서울 인구 39만 명에 견주면 도쿄 인구는 12배나 됐다. 처음 목격한 도쿄는 세계 대공황의 내습으로 위기 현상에 휘말려 있었다. 실업자는 나날이 늘고 혁명적 열기는 고조되던 때였다. 뒷날 이청원은 혁명운동의 격화가 눈에 보이는 듯이 강렬해서 크게 놀랐다고 회고했다.

 

청년 이청원은 생계를 위해 최하층 노동시장에 몸을 던졌다. 낫토 행상, 막노동, 고물상 등을 가리지 않았다. 그중 가장 중히 여긴 것은 토목건축 노동이었다. 건설 현장의 고된 육체노동을 다행히 감당할 수 있었고, 원하는 만큼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일용직 육체노동자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청원은 연구자이자 동시에 혁명운동가의 역할을 겸했다는 평을 받는다. 도대체 그는 어떤 지하운동, 비밀결사와 연관을 맺었을까. 이 의문을 종래에는 충분히 해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당사자가 작성한 기록에 힘입어 명시적으로 인지할 수 있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청원은 도쿄에 도착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노동조합운동에 가담했다.5 1930년 7월에 도쿄 토목건축노동조합 성서지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노동조합의 하급 간부 직위에 오른 것이다.

 

1930년 도쿄 건너가 노조운동 시작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청원은 성서지구를 거점으로 혁명운동 참가 범위를 동심원처럼 확장해갔다. 그해 11월에는 반제동맹에도 가담해 성서지구 위원직에 올랐다. 노동조합운동과 반제운동에서 보인 열성 덕분일까, 그는 1931년 2월에는 비밀결사 일본 공산당에도 가입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일본에 도항한 지 10개월밖에 되지 않은 18살 식민지 청년이 일본혁명운동의 총본산인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으니 말이다. 그에 멈추지 않았다. 이청원은 공청(공산청년회)운동에도 발을 내디뎠다. 19살 되던 1932년 12월에는 일본공산청년동맹의 중앙부에도 진출했다. 중앙위원회 조사자료부 지도원으로 선임된 것이다.6 중앙위원은 아니지만 그 직할 아래서 조사업무의 고급 책임자로 일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주목되는 점이 있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내부에서 그가 담당한 직무는 조사였다. 혁명운동의 주·객관 조건에 관련된 정보의 수집과 분석이 그가 하는 일이었다. 풍부한 독서에 더하여 논리적인 언변과 문필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업무였다. 일본에 건너간 뒤에도 사회과학 탐구 열정을 더욱 불태웠음을 짐작게 한다. 이청원은 육체노동·비밀운동과 관련을 맺으면서도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한때라도 중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청원은 일본어에 능했다. 외국어 능력을 묻는 설문에 그는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일본인과 다름없는 언어구사력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언어능력이 그에게 비밀결사에서 조사업무를 가능하게 했고, 또 1935~1937년 왕성한 ‘과학적 조선학’ 저술을 펴낸 동력이 됐다.

 

이청원은 인문사회과학 방면의 뛰어난 수재였다. 백남운이 정규 고등교육을 이수하고 학계에서 오랜 연구 끝에 첫 저작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펴낸 것은 40살 때였다. 이에 비해 이청원이 사적유물론에 입각한 최초의 한국사 통사 <조선사회사독본>(1936)을 펴낸 것은 23살 때였다. 이청원은 백남운보다 나이가 20살이 더 적음에도, 동시대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연구 현장은 ‘사회주의 비밀결사 조사부’

 

이청원은 노동자 출신의 역사학자였다. 그의 저술 활동은 고된 토목건축 노동과 동시에 병행된 것이었다. 또 노동조합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실천에 가담함과 동시에 ‘과학적 조선학’ 연구를 수행했다. 달리 말하면 그는 기층계급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였다. 그의 연구 현장은 고등교육기관의 연구실이 아니라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조사부였다. 그의 저술은 학계 전문가 내부의 소통이 아니라 노동자·농민 대중의 의식화를 염두에 두고 집필됐다. 이러한 특성으로 이청원의 삶과 저작은 앞으로도 깊이 들여다볼 만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조형열, ‘식민지 조선 역사학의 방향 전환,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 <내일을 여는 역사> 78, 156~157쪽, 2020년 봄호

2. 박형진, ‘1930년대 아시아적 생산양식 논쟁과 이청원의 과학적 조선학 연구’, <역사문제연구> 21-2, 역사문제연구소, 249쪽 각주 21 참조, 2017년

3. 위의 글, 248~249쪽

4. 홍종욱, ‘제국의 사회주의자-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이청원의 삶과 실천’, <상허학보> 63, 상허학회, 123쪽, 2021년

5. 리청원, ‘자서전’, 3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8-21об

6. 리청원, ‘간부리력서’, 4쪽, 1948.8.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9 л.16-17о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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