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석의 역사극장

39년 삶 중 다섯 번 10년 감옥에 갇혔던 윤가현

살아 있었으면 대통령감이라는 말 듣는 사회주의자,

일제와 미군정 감옥살이 뒤 빨치산으로 삶 마감

 

윤가현이 1948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노동당 중앙당 학교에 유학할 때 찍은 사진. 임경석 제공

 

“윤가현이라는 분이 있어. 그분이 하자고 해서 그랬다고 하드만. 그 사람이 살았으면 대통령감인데 죽었다. 만약 그분이 안 계셨으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안 죽었을란가도 몰라.”1

 

마을의 한 여성 노인은 이렇게 회고했다. 윤가현(尹珂鉉)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한다. 그 사람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마을 사람들은 그가 권하는 대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사람됨이 출중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감이라는 평판을 얻을 만큼 두드러졌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6·25전쟁을 거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숨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인 학교에서 겪은 천대와 모욕

 

이 마을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수동리를 가리킨다. 해남 윤씨 집성촌으로서, 1995년 당시 128가구로 이뤄진 큰 마을이었다. 수동마을은 경찰의 표적이었다. 6·25전쟁 때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 27명이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이미 개전 초기에 보도연맹 사건으로 26명이 목숨을 잃었다. 개전과 함께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에 마을 사람이 54명이나 학살당했다.2 성인 남성의 씨가 마를 정도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내면의 공감과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윤가현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남긴 개인 기록에서 삶의 윤곽을 더듬어보기로 하자.

 

윤가현은 수동마을에서 “비교적 생활이 유족한 소지주의 말자로 출생”했다. 그 덕분에 생활고를 모르고 순조롭게 성장했다. ‘말자’란 4남1녀의 형제자매 가운데 막내아들이었음을 가리킨다. 장남 윤정현, 차남 윤남현, 장녀 윤내순, 3남 윤삼현, 4남 윤가현의 순서였다. ‘현’자 항렬의 돌림자를 받아 작명했음을 알 수 있다. 막내인 만큼 장남과는 나이 차이가 많았다. 20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장남의 큰아들, 즉 장조카 윤순달(尹淳達)과는 거의 동년배였다. 이력서에 따르면, 윤가현의 생년월일은 “1912년 5월17일”이고, 조카 윤순달은 그보다 2년 뒤인 1914년생이다. 뒷날 저명한 사회주의자로 성장하는 두 사람은 숙부·조카 사이이지만 한마을에서 거의 같이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윤가현은 9살부터 13살까지 4년간 수동리에 설립된 대구보통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는 잦은 잔병치레로 허약했지만, 학교에 다니면서 건강이 좋아졌고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그러나 읍내의 일본인 학교인 강진심상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한 뒤로는 달랐다. 그는 학교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민족 차별 때문이었다. ‘조선 민족에 대한 열등시, 온갖 모멸, 천대’를 겪어야 했고 그것은 “그 당시 나의 어린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3 첫 두 해에는 학업 성적이나 열의가 남에게 지지 않았지만 점차 상황이 나빠졌다. 결국 어느 땐가 일본인 학생과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다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교장에게서 참지 못할 모욕을 당했다. 윤가현은 결국 학교를 중퇴했다. 1928년, 그의 나이 16살 때의 일이었다.

 

윤가현의 친필. 1948년 8월10일치로 작성한 <자서전> 첫 페이지. 임경석 제공

 

전교생 90% 설득해 동맹휴학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첫 행동에 나선 것은 1930년이었다. 광주에서 폭발한 학생들의 반일 시위가 전 조선으로 퍼지던 그해 1월, 윤가현은 모교인 강진 대구보통학교 학생들을 동맹휴학 투쟁으로 이끌었다. 당시 작성된 경찰의 취조 기록이 남아 있다. ‘1월18일 강진군 대구면 공립보통학교’에서 벌어진 ‘맹휴 및 불온 기획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윤가현을 포함한 9명의 주도자가 있었다. 졸업생이거나 5·6학년 재학생이었다. 이들은 1월14일부터 수차례 모인 끝에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하는 동맹휴학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 1월18일 장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전교생 101명 가운데 88명을 설득해 동맹휴학에 나서게 했고, 교장 앞으로 수감자 석방을 비롯해 여러 항목의 요구서를 제출했다. 또 대구면 내 이장들, 강진군에 있는 8개 보통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격문을 우편으로 발송했다.4

 

이런 행동을 벌이려면 조직과 선전 활동을 너끈히 수행하는 사회적 능력이 필요했다. 전교생의 90%에 가까운 학생을 결속하고, 네 종류의 상이한 문서를 작성하는 준비 작업이 요구됐다. 윤가현은 그 수모자로 지목돼, 결국 체포됐다. 18살 때의 일이었다.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듬해인 1931년 1월까지 꼬박 1년간 목포형무소에 수감돼야 했다.

 

이것이 윤가현의 첫 번째 감옥살이였다. 그는 생애에 수감생활을 다섯 번이나 겪었다. 외세의 지배에 항거하다가 겪은 고난이었다. 두 번째 감옥살이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전남운동협의회’라고 부르는 비밀 농민조합 조직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는 1934년 2월에서 1937년 1월까지 또다시 목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전라남도 9개 군에서 청년 558명이 검거되고, 8개월 장기간의 가혹한 취조 끝에 57명이 기소된 큰 사건이었다. 검찰에 송치된 비밀결사 구성원은 강진과 그곳을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4개 군(해남·완도·장흥·영암) 거주자였다. 이들은 19~35살 청년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을 거치면서 배출된 신세대 반일운동가였다. 윤가현은 강진군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 책임자가 됐다.5 마을마다 농민야학을 열고, 저축계와 독서회를 운용했으며, 소작쟁의가 일어나면 농민 편에 서서 지원활동을 했다. 동지들을 어업조합과 해태(김)조합, 관변 성향의 농촌진흥회 같은 합법단체에 가입시킴으로써 합법성과 대중성을 얻으려 힘썼다.

 

일제와 미군정 폭압정치에 고초

 

두 번째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중매로 배필을 맞았다. 45㎞ 떨어진 보성군 회천면 출신의 정일남을 맞아서 가족을 꾸렸다. 1938년 봄이었다. 신랑은 26살, 신부는 19살이었다.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은 또다시 수감되고 말았다. 세 번째 옥살이였다. 1939년 2월부터 12월까지 강진경찰서 유치장에 장기간 구금됐다. 뚜렷한 범죄의 물증도 없고, 법원의 판결도 거치지 않았다. 수상해 보인다는 고등경찰의 판단만으로 10개월씩이나 갇혀 지내야 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고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삼엄한 시기였다. 사상범 출옥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극단적으로 악화하고 있었다.

 

1939년 4월17일(음력 2월28일)에 첫딸이 태어났다. 아빠가 유치장에 구금됐을 때다. 수감 중에 딸의 출생 소식을 들은 윤가현은 옥중에서 이름을 지었다. 순할 순(順), 처음 초(初)자를 택해 윤순초라 작명해서 전보로 보내왔다고 전한다.

 

강진경찰서에서 석방된 뒤, 윤가현은 고향을 떠나 상경길에 올랐다. 농촌지대의 엄혹한 감시망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의 자서전 기록에 따르면, 서울로 간 의도는 상업에 종사하는 한편 동지들과 연락해 비밀결사운동을 재개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1년 이상 무직 상태로 지냈다.

 

네 번째 투옥은 서울에서 당했다. 비전향 사회주의자를 아무런 범죄 혐의도 없는데 재판 없이 수감할 수 있는 사상범예방구금령에 걸렸다. 윤가현은 1941년 3월에 시행된 이 폭압 정책의 희생자가 됐다. 1941년 6월에서 1945년 8월까지, 경성형무소와 청주예방구금소에 4년2개월 동안 갇혔다. 역대 수감생활에서 가장 길고 혹독했던 이 감옥살이는 8·15 해방이 돼서야 겨우 끝났다.

 

다섯 번째 투옥은 해방 이후에 겪었다. 이번에는 일본 경찰이 아니라 미군정 경찰이 그를 잡아넣었다. 미군포고령 위반 사건이었다. 1946년 4월부터 1947년 9월까지 17개월간 광주형무소에 투옥돼야 했다. 이번에도 옥중에서 아들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1946년 8월31일(음력 8월5일) 광주형무소에 수감 중일 때 아들 윤광이 태어났다. 해방 직후 광주에서 누렸던 짧은 가정생활 덕분에 회임할 수 있었던 아기다. 아내 처지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었다. 처음 딸도 그랬고, 두 번째로 낳은 아들도 그랬다. 남편이 옥중에 있을 때, 젊은 여성 혼자 출산을 감당해야 했다.

 

“아부지 원망 마라”

 

윤가현은 39년간의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나마 다섯 차례 걸쳐 도합 10년5개월의 감옥살이를 겪어야 했음을 고려하면 그의 생은 더욱 짧게 느껴진다. 그는 6·25전쟁 때 대둔산을 근거지 삼은 충남 빨치산 부대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전투 중에 숨졌다고 알려졌다.6

 

아내가 남편과 함께 살았던 기간은 다 합쳐도 3년이 채 되지 않았다. 자녀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 성장해야 했고, 철든 뒤로는 연좌제 탓에 고통을 겪었다. 큰딸 윤순초는 가끔 엄마에게 물었다. “왜 아버지는 안 해도 될 일을 하셔서 우리를 고생시켰단가요?” 젊어서 홀로된 채 두 아이를 어렵게 길러야 했던 정일남은 남편을 원망하는 말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났다. 느그 아부지는 혼자만 아니라 모두 다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일을 하셨다. 원망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정일남은 어디에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남편이 대둔산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년에 접어든 그는 “내가 죽으면 대둔산에서 흙 한 삽 떠서 같이 묻어주라”는 말을 자식에게 남겼다.7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염미경, ‘전쟁과 지역권력구조의 변화’, <전쟁과 사람들>, 한울아카데미, 136~137쪽, 2003년.

2. 주희춘 기자, ‘비운의 공산주의자 윤순달(9)’, <강진일보> 2012년 9월4일.

3. 윤남(윤가현), <자서전>, 1쪽, 1948년 8월10일.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03 л.12-14об.

4. 朝鮮總督府警務局, ‘光州學生事件及其ノ影響其ノ二, 新學期開始後ニ於ケル學生事件裏面策動ノ狀況’, 52~53쪽, 1930년 1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5. ‘전남운동협의회사건 진상’, <조선일보> 호외 1934년 9월7일.

6. 임방규,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9)’, <통일뉴스> 2018년 3월17일.

7. 김병균, ‘일제강점기 강진농민운동과 사회주의자 윤가현(3)’, <강진일보> 2020년 3월26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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