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2 08:00 김삼웅

 

 

5공 시대에 잡지와 가진 인터뷰는 <월간 마당>이 처음이었다.
1981년 5월에 갓 창간한 잡지였다. 앞 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퀘이커 관련 회견이 중심이었다. 인터뷰어는 “꿋꿋한 허리, 정정한 목소리, 조리 있는 말은 80대 노인을 장년처럼 느끼게 한다”고 적었다. 이 잡지 25~37쪽에 실린 회견문 중에서 ‘발문’을 소개한다. 당시 함석헌의 정신을 살필 수 있다.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야.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스스로 절대화해서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하죠.”

“기독교가 찾는 하나님이란 자리를 노장(老莊)이 말하면 도(道)라 하지 않겠는가,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면 다를 지 모르지만, 믿는 입장에선 그 자리가 같아.”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될려면 기독교인을 통해서 해야될 것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썩어가니 어떻게 해야될지! 그들이 도무지 이렇게 무식한 짓을 할 줄 몰랐어요.”

“이 도교(道敎)가 평화주의야요. 우리나라 선비사상도 그렇고, 단군신화에 전쟁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압박을 받으면서 비겁하게 달라져 버렸어.”

“진리가 다수에만 있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뜻에서 퀘이커에서는 다수 가결이 없어요. 전원일치제지요. 절대 서두르지 않고 토론을 충분히….”

“쓸데 없는 곳에 돈을 가장 많이 들여 하는 게 전쟁이니 최고의 사치지요. 실제로도 사치 생활과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기업 유지 위해 전쟁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을 만한 인격이 솔직한 말로 한 사람도 없다면 이것은 참 걱정 아닙니까? 재목은 길러야지 내 생각과 다르면….”

“난 흑백논리가 아주 싫어요. 이 우주의 본의가 뭔고 하니, 온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지요.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물었다.

“함 선생님을 비난한 책을 최근 서점 주인들이 진열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건 그러라고 그래요. 내버려 두라고 그래요. 나는 믿으니까. 하나님 일 아닌 것 없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걸 누가 어떻게 하겠나,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시갔디. 내 잘못이 없다는 것 아니야, 있기야 있지만…. 이런 것을 내가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한국의 지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시험인지도 몰라요.
(주석 9)

당시 정보기관의 후원으로 제작된 <위선자 함석헌> 등의 책을 서점 주인들이 판매를 거부하였다. 이런 경우는 찾기 드문 현상이었다. 함석헌은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함석헌은 1983년 5월에는 <신동아>에서 언론인 최일남과 인터뷰하였다. 5공체제에서 제도권 언론과는 쉽지 않았던 인터뷰였다. 최일남은 3년 전에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질문과 답변 몇 대목을 뽑았다.

- 민족주의가 왜 뒤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 한 민족에도 우리 편이 있고 우리 편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문제도 세계적으로 해석해야지 민족주의만으로 풀어가서는 안됩니다. 물론 민족 자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내셔널리즘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민족주의만 내세우는 걸 보면 안타까와요.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어요. 세계 인류가 같은 운명으로 나가야 합니다. 민족은 영원한 것이니까 그걸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기본이 민족에 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찬성할 수 없어요.

-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을 어떻게 보십니까?
◇ 맞아요. 자꾸 가르쳐야 합니다. 의식이 박약해요. 여기에는 언론의 힘이 큰데… 우리는 고려 이후부터 그랬습니다. 국민의 기운을 키워주어야 하고 이것은 정치의 양심입니다.

- 야인이란 말은 저같은 속물에게는 멋있게도 들립니다.
◇ 멋이란 것이 있나요. 우리나라는 껍데기만 보니까 그럴지 몰라도, 이상주의로 보는 게 옳습니다. 좀 경지를 높이자면 엄자릉(嚴子陵)이나 허유 소부(許由 巢父) 같은…. 그와 관련해서 한 마디 할 것은, 나는 굉장히 간소한 생활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 때로 좌절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살아오시는 동안에 말입니다.
◇ 마음은 약한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극복이 됩니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절대 긍정주의자입니다. 살고 싶다고 살고 안 살고 싶다고 안 살수 있습니까. 어떻든 살아야 하니까. 좌절까지는 모르지만 힘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정신 가다듬고 목숨 있는 한은 말입니다.

- 함석헌, 그는 평생 돈과는 인연이 먼 사람으로 보인다.
◇ 그래요. 돈 모을 줄 모르지만 생각도 안해봤으니까. 그 대신 나는 아끼는 사람입니다. 천성이 그래요. 물건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내게 돈은 없고, 돈이 나를 거쳐갈 뿐이지요. 1928년부터 38년까지 1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한 후로는 줄곧 무직자로 있었는데, 내 수중에는 무슨 형식으로든지 돈이 들어왔다가 나를 거쳐 나갑니다. 따라서 마음은 자유로와요. 살아가는데 걱정 안해요.

- 얼마 전 함옹의 조카되는 분이 분명히 함옹을 가리키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낸 일이 있다.
◇ 조카도 아닙니다. 괜히 그 놈이 그러는 거지. 개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에요. 책 보지도 않았습니다. 보나마나 그까짓거….

-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 내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후회는 안해요. 고통이 많으나, 그것은 어느 정도 적응해서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어서도 그렇겠으나, 노장자(老莊子) 사상의 도움이지요. 그분들도 우리 같은 처지를 겪으면서, 그 가운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터득한 분들이지요. 속된 얘기로 초탈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나와도 상관없어요. 자기 마음의 자유를 안 잊으니까. 그런 인생관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요. 감히 됐다 안 됐다는 말을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고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요.
(주석 10)

함석헌은 1982년 1월 30일 YMCA 강당에서 열린 간디 34주기 추모강연회에서 작심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내란음모라고 왜곡된 광주사태는 반드시 진실이 규명되고 바로 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석상에서 5공비판은 이것이 최초의 발언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 해 함석헌은 26년간 살았던 원효로 4가 70번지의 집에서 아들이 사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사하였다.
낡은 원효로 집을 혼자 관리하고 지내기가 어렵다. 쌍문동 집은 1985년 8월 28일 의문의 화재로 평생 아끼던 책과 자료가 몽땅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함석헌은 이 해 10월 퀘이커 세계협회의 초청으로 멕스코 종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다시 방문했다. 워싱턴 수도 장로회에서 <정치와 종교>, 워싱턴 한인교회에서 <그리스찬의 사명>, LA한인교회에서 <새사람>을 주제로 각각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는 일본 와세다 교회에서 <한국의 민중운동과 나의 걸어온 길>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두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끝내 그를 비껴갔다. 그의 꿈은 15년 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석
9> <월간 마당>, 1983년 8월호, 인터뷰어 한용상.
10> <신동아>, 1983년 10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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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회] 시인 고은 주례, 1시간 주례사: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절망하면서도 희망.. http://t.co/19PXzvXhXY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절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국의 참담함에 절망하고,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정보기관의 음모에 비관하면서도, 자책을 거듭하였다. 잡지가 강제로 폐간되고, 언론이나 학계 어디를 둘러 봐도 의분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환경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전을 강의하고 씨알들의 모임에 달려갔다.

<씨알의 소리> 강제 폐간 이후 함 선생님의 글이나 근황도 매스컴에서는 일체 보도금지 되었으나, 함 선생님은 노자(老子) 모임, 장자(莊子) 모임, 성서모임, 부산모임 등 정기집회와 용기를 가지고 선생님께 초청이 오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말씀을 계속하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선생님을 연금, 도청, 미행 등 각종 방법으로 선생님의 입을 봉하려고 온갖 탄압을 계속했다. (주석 6)

5ㆍ17쿠데타 세력은 5ㆍ16선배들의 판박이처럼 정치정화법을 만들어 구정치인들을 묶고 양심적 지식인, 언론인들을 추방하면서 5공권력을 구축했다. 광주학살의 잔혹상은 가끔 외국(인)을 통해서나 알려질 정도로 철저히 통제되었다.

1981년 초 오산학교에서는 동문들이 모여 함석헌을 동창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89년 2월 숨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함석헌은 1987년 10월 제11회 인촌 언론상을 받았는데, 상금 1천만원 전액을 오산학교에 기증하였다. 3월에는 몇 지인들이 YWCA 강당에서 80회 생신 강연회를 열어서 <되돌아보는 나의 일생>을 주제로 1시간 여 동안 강연하였다. 8월에는 퀘이커 모임을 원주에서 갖고 요한복음을 풀이하는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온갖 음해가 나부껴도 함석헌은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59년에 이미 다짐했던 길이었다.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걸이를 놓지 않으련다. 삼일운동이 몰아쳐 내세워준 이 걸음 늦추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뚱뚱해 앉았을는지 모르고, 세력 있는 자는 자가용 자동차 안에서 바아크샤처럼 드러누웠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으련다. 장안 길거리를 두리번거려도 내가 주워가지라고 떨어진 금덩이는 없을테니, 나는 가난한 순조선종 틈에 끼어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걷고 싶다. 영원히 영원히 빠르나 급하지는 않게, 뚜벅뚜벅 걸으나 느리지는 않게, 길이길이 걸었으면! (주석 7)

정치변혁기가 되면 어김없이 변절자가 생긴다. 정치인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되어 온 악습이었다. 잦은 정세의 격변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정치인, 지식인들의 신념과 절조가 낮은 까닭이다. 함석헌은 3ㆍ1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이래, 이 길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반제, 반공, 반독재의 길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981년 1월 동광출판사는 <함석헌 수상록 바보새>를 펴냈다.
기왕에 발표되었던 글을 묶어 낸 것이다. <안창호를 내놔라>, <남강 선생님 영 앞에>, <농촌을 살려야 한다>, <늙은 이의 옛날이야기>, <큰 도둑 작은 도둑>,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 <내가 맞은 8ㆍ15>,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예수의 비폭력 투쟁>, <간디의 참모습>, <벤들 힐의 명상>, <여자 한 사람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있다>등이 실렸다.

5공 초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비록 지난 글이라도 재생하여 씨알들에게 읽히자는 출판사의 뜻이었다. 기획 의도는 적중하여 짧은 기간에 몇 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함석헌은 1982년 가을 퀘이커 교인들의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젊은날의 스승이었던 우찌무라의 일화가 남아 있던 레딩을 찾았다. 연말에 귀국하였다.

1983년 5월 5일 좀 이색적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장소는 수유리 안병무 교수의 뜰이다. 신랑은 시인 고은, 신부는 이상화 교수, 주례는 함석헌이었다.
1979년 11월 24일 YMCA강당에서 통대 대통령선출 저지를 위한 위장 결혼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식 결혼식이었다. 신랑 고은은 당시 50세의 만혼, 주례 함석헌은 84세의 고령이었다. 함석헌의 주례사는 길기로 이미 소문이 난 터였다. 이날 주례사도 장장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신랑ㆍ신부나 결혼식 장소나, 하객이나 모두 시대와 불화하는 처지였다. 주례는 모처럼 할 말이 많았을 것이고, 듣는 하객들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고은은 오래 전부터 함석헌을 무척 존경하였다.
50 중년에 장가를 들면서 함석헌에게 주례를 맡긴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70년대에 <만인보>에서 <어린 함석헌의 스승>을 지었다.

어린 함석헌의 스승

어린 함석헌
평안북도 정주 서당훈장
붓글씨 쓰는 시간
훈장은 일어서서
엎드려
글자 한 자 한 자 쓰는 학동을 살폈다.

먹 확실히 갈고
붓 확실히 꼬나잡은 것도
공부라

훈장이 뒤에서 학동의 붓 낚아챈다
낚아채지는 놈
네끼 이놈

붓을 그렇게 힘없이 잡아서야
어찌 힘찬 글이 써지겠느냐

왜놈 글씨는 이쁘지만
조선 글씨는 첫째 힘차야 하느니라.
(주석 8)


주석
6> 박선균, 앞의 책, 170쪽.
7>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37쪽.
8> 고은 <만인보> 15, 176쪽, 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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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회] 정보기관 사주, 음해 서적 발간 돼: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전두환 정권과.. http://t.co/2hvuTP3xRS

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전두환 정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주변의 한 켠에서는 음습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시대 공권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사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사적 폭력’에는 암살, 테러, 비리조작, 스켄들 날조 또는 과장 등이 동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아무리 뒤져봐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아서 재물이나 감투로 유혹할 수도 없고, 재산이 없어서 이를 강탈한 방법도, 잡지 발행 과정을 정보기관이 훤히 꿰고 있어서 세무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마침 그런 ‘헛점’이 있었다.

함석헌의 외조카라는 조순명이 1982년 7월 합동 출판사에서 사생활 문제 등을 담은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운명의 여인>, <나이롱 단식>, <사탄아 물러가라> 등 저주 섞인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함석헌에게 “거짓말쟁이”, “색마”, “후안무치” 등 극렬한 용어로 비난해왔다고 한다. 조순명은 이후 1986년에 이 책의 증보판을 펴냈다. 그리고 1992년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를 홍익재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증보판을 낼 때에는 초판 때보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책 제목도 <왠말인가 함석헌>으로 바꾸어서 간행했다. 조순명은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건만, 두번째 역시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석 2)고 서문에서 썼다.

1982년 <거짓 예언자>가 나왔을 때 함석헌의 주위에서는 이를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이 책에 대해 외면하였다. 독자들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외도’와 관련한 소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거짓 예언자>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김용준 교수의 지적이다.

나는 지난 번에 함 선생님이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풍문에 여러 말들이 떠돌았지만 확실치도 않다. 이런 풍문을 여기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다만 씨알농장에서 자진해서 선생님의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과의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의 은사인 김석목 교수에게 고백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주석 3)

함석헌이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오모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참회를 거듭했다. 당시 44일 간의 긴 단식 기도에는 이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었다. 1960년 9월(30일)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함석헌의 편지에도 ‘참회’의 내용이 엿보인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 선생(유영모-필자)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십시오. 아아! (주석 4)

함석헌의 이런 ‘외도’를 빌미로 조순명은 줄기차게 ‘외삼촌’을 비방하고 다녔다.
<거짓 예언자>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웬말인가 함석헌>에 이어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을 두 권으로 묶어 펴냈다. 이를 두고 함석헌과 오랜 교분을 가졌던 김용준은 ‘정보기관의 후원’이라 지적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에게는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운동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석 5)

한국현대사에는 독재자가 적대시하는 인물들에 관한 각종 위서(僞書)가 끊이지 않았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시역의 고민>, 김대중을 음해한 함윤식의 <동교동 25시>, 최근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의 책, 그리고 <거짓예언자 함석헌>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별개로 함석헌의 도덕적 일탈행위는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비판의 대상이다. 도덕성의 상징인 재야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실수였다. 그는 80회 생신 자리를 비롯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였다.


주석
2> 조순명,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 홍익재, 1997.
3> 김용준, 앞의 책, 126~127쪽.
4> 앞의 책, 127쪽, 재인용.
5> 앞의 책,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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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19 08:00 김삼웅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외상으로 들여온 민주주의가 4ㆍ19혁명으로 많은 시민ㆍ학생들의 피를 흘렸지만, 5ㆍ16도벌꾼들의 도끼질을 당하면서 지체아가 되었다. 긴 세월 학생, 민주인사들의 수혈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민주주의의 가녀린 묘목은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새 순이 돋고 부활하는 듯 보였다.

장장 18년의 군부독재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시대가 오는 것으로 알고 환호하였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없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유신잔당의 퇴진과 악덕기업의 처벌을 주장하는 정당한 요구였다. 여전히 신군부의 계엄사령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있었으나 긴 세월 움츠렸던 기자들도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릴만큼 화창난만하다. 생명이 약동하여 만화백초가 다투어 피어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5월은 4월을 대신하여 ‘잔인한 계절’로 바뀌고 있었다. 5ㆍ16쿠데타 때문이었다. 다시 정치의 계절 5월을 맞은 국민은 지난 폭압의 세월보다 새 시대에 희망을 걸었다.

간혹 외신에서 불길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보도관제로 일반 국민은 전두환 일당의 음모를 까맣게 몰랐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근거없이 낙관론을 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차 5월 16일 제주에 머물고 있었다.
서남동 교수와 제주학생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5ㆍ17전국계엄 확대조치 소식을 들었다. 사실상 전두환의 군사변란이었다. 5월 17일 자정에 서남동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고, 함석헌은 이날 오후에 서울 자택에 연금되었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이란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투입을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시켰다. 그리고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부대를 은밀히 파견했다.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했다. 정치활동의 중지와 옥내외 시위금지, 언론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 비상계엄령이었다.

이어서 18일 새벽에는 김대중ㆍ김상현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 등 거물급 26명을 구속하고, 김영삼을 자택에 연금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관련자 수십명도 이날을 전후하여 구속하였다. 5ㆍ17군사반란이 자행된 것이다.

5월 18일부터 광주시민들이 군사변란에 저항하자 신군부는 학생,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정권찬탈에 나섰다. 사망 240명, 행방불명 409명, 부상 2052명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군부는 이미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비상계엄령의 국회통보 절차조차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켰다. 헌정유린이고 국가변란이었다.

신군부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면서 권력을 도득하고, 이땅에서는 18년 전의 5월보다 더 잔혹한 5월이 반복되었다.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되풀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두 번씩이나 비극으로 반복되었다. 함석헌은 위험을 무릅쓰고 5월 26일 광주항쟁의 현장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가누기 어려운 분노를 삼켜야 했다.

7월호 <씨알의 소리>에는 분노에 떨리는 손으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제목은 <治人事天莫若人-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데는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다>를 썼다.

옛날 두목지(杜牧之)란 사람의 아방궁부(阿房宮賦)라는 글이 있습니다. 명문이라고 이름이 높습니다. 내용인 즉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그것이 옳은 이치로 된 것이 아니고 강제로 억지로 된 것이므로 그것을 위압으로 천하 민중의 기운을 죽임으로써 하려고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는데, 몇 날이 못가고 망했다.

그 원인이 뭐냐? 스스로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악으로 억지로 했기 때문이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 가서 누구나 보는 사람이 책을 덮어놓고는 긴 한숨을 쉬고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절이 있습니다.(한문 생략)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고 감히 노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외로운 한 지아비(진시황) 마음이 날로 갈수록 교만하고 완고하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그것이 도리어 천하 인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이곳 저곳서 반군이
일어나 아우성을 치게 되어, 어떤 군대를 가지고도 깨칠 수 없다던 함곡관이
그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후략)

욧점을 말한다면, 씨알 하나에 있습니다. 씨알 사랑하면 나라 될 것이고,
씨알 사랑 아니하면 진시황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 오래갈 수 없고 훗 사람이
불쌍히 여길 것 뿐일 것입니다.
(주석 1)

제95호(1980년7월호)

무서운 글이다. 함석헌은 광주시민 학살과 민주헌정을 짓밟는 전두환을 진시황에 비유하면서 반드시 망하는 날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계엄령의 서릿발치는 5공 초기에 쓰인 글이다. 5ㆍ16때 <5ㆍ16을 어떻게 볼까?> 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검열에서 무사했다. 무식한 검열관들이 놓친 것이다. 옛날 고사를 끌어와 현실을 비판한 함석헌의 전략이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7월 31일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언론통폐합의 조치로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씨알의 소리>를 폐간시켰다.
1970년 4월 창간하여 통권 95권을 발행하고, 1970년 5월의 폐간 이후 두번째 당한 폐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약된 인쇄소가 아니라는 이유라도 댔지만 전두환은 그런 저런 이유도 없었다. 막무가내 막가파식이었다. 함석헌은 망연자실의 상태에서 영구독자 및 정기독자들에게 구독료 환불의 통지를 보냈으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잡지의 운명과 함께 환불은 거부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씨알의 소리>는 죽여도 ‘씨알’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80년 7월호,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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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회]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 기념행사: 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8 08:00 김삼웅 제91호(1980년1.2월호합본.. http://t.co/yFuiBDdGAe

저항인 함석헌 평전/[14장] 유신체제에 마지막 타격 날리다

2013/02/18 08:00 김삼웅

 

 

제91호(1980년1.2월호합본호)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씨알의 소리>는 힘겨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0ㆍ26사태 이후 사실상 처음 발행한 1980년 1,2월 신년호에서 함석헌은 <민족적 비전을 기르라>는 “새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와 시론으로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를 썼다. '편지’의 한 대목이다.

80년대 들었다고 무엇을 조금 아노라는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 댑니다. 씨알은 그 소리에 끌려들어 가서는 아니됩니다. 지나간 일을 잠깐 돌이켜 생각해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70년대가 됐을 때 어떠했습니까? 그때도 지금 같이 떠들었고, 큰 소리를 펑펑 했습니다. 그때에 그 해 79년 10월 26일에 시국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 놈이 하나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70년대에 이보다 더 큰 사건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정치 설계나 해설처럼 실없는 것은 없습니다. (주석 14)

정치선동꾼이나 기회주의 언론인들의 시세영합적인 설계나 해설에 함부로 현혹되지 말고 시국을 바로 보라는 내용이다. <시대의 낌새를 뚫어보는 지혜>에서는 보다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 글은 11월 23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금요기도회의 설교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강연에서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낌새)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는 예수의 말씀을 들어 ‘시대의 낌새’를 알아차리도록 경고하였다. 글의 도입 부분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통령 자리를 맡는 분이 이것을 ‘위기관리내각’이라고 이름을 붙이리만큼 위태한 대목에 부딪쳤습니다. 위태하다는 것은 역사의 나가는 길이 갑자기, 미리 짐작도 못하게, 굉장히 험한 난관에 빠졌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나라가 아주 망해버리던가, 그렇지 않으면 설혹 살아 남는다 해도 제대로 올바른 궤도에 올라 발전의 길을 밟게 되려면 몇 십년, 혹 몇 백년의 혼란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자칫하다가는”이라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아주 덮어놓고 희망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잘만 하면, 정신을 톡톡히 차리기만 하면,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앞 이빨로 물어 멈추고 다시 그것을 잽싸게 시위에 먹여 돌이켜 쏘아 적장을 잡는 옛 명장의 솜씨같이, 나라를 건질 뿐 아니라 전화위복으로 민족의 빛을 더하게 할 수 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 민족의 정신이 통일되지 않고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자칫하다가는”입니다.
(주석 15)

계엄령 선포로 언론의 검열이 강화되면서 <씨알의 소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글도 사전검열 때문에 12ㆍ12사태 등을 직접 거론하지 못하고 “자칫하다가는” 식의 표현으로 에둘러 쓴 것이다. “다시 군인이 정치에 나오다가는”의 변형이었다. 하지만 박정희 밑에서 권력의 단맛을 즐겨온 하나회 출신 신군부는 정치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서울의 봄’은 점차 짙은 안개 속에 덮혀갔다.

함석헌은 2월 29일 복권이 되었다. 무슨 로또 복권에 당첨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치하에서 반독재ㆍ반유신 투쟁을 벌이다 투옥, 자격정지 등을 받았던 민주인사들에 대한 자격회복이었다. 이날 687명이 함께 복권되었다. 함석헌은 3월호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복권>이란 제목의 글을 썼다.

나는 정치 문제에 관한 한, 내가 죄를 지었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었고, 징역을 시킨다 했더라도 억울하단 맘도, 밉단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풀어줬다 해도 속임 없는 말로 고맙단 생각 조금도 없었으니, 이제 와서 복권 어쩌고 해도 별 큰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속임 없는 말이다. 왜 그랬나? 나도 사람이고, 그러는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국가(정부)란 것은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어서 벗어버려야 하는 낡은 옷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석 16)

여기서 함석헌의 아나키즘적 성향을 다시 살피게 한다. 그의 탈권력, 탈국가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 즈음에는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가 복권조치를 한 것은 씨알의 입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왕 그런 이상이면 이제라도 씨알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어진 일일 것이다.” (주석 17)

제93호(1980년4월호, 창간 10주년 기념호)

1980년 4월은 함석헌이 70대 이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독재정권의 갖은 탄압을 견뎌 가면서 발행해 온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이 되는 달이었다. 3, 4월이 되면서 지층에서는 혹독한 냉기류가 흐르고 있었지만, 지상에서는 새봄이 오는 듯 제법 활기를 띠어가고 있었다. 함석헌도 대학가는 물론 각종 사회단체와 언론의 초청으로 강연, 인터뷰를 하였다. 그때 마다 ‘시대의 징조’를 설명하면서 군부의 정치개입을 경계하였다.

1980년 4월호 <씨알의 소리>는 모처럼 126쪽에 이르는 두툼한 지면으로 제작되었다. 10주년기념호였다. 함석헌은 4ㆍ19 스무돌을 기념하여 <오늘 우리에게 4ㆍ19는 무엇인가>라는 장문의 평론을 실었다. CBS 공개방송의 내용을 수정 보완한 글이다. 그리고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로 <글세, 어떡허지?>를 썼다. 이 글에서는 고난에 찼던 지난 10년을 되돌아 본다.

나는 글을 깎이울 때 살을 깎이우는 것 같았고, 붓을 깎이울 때 등뼈를 꺾이우는 것 같았습니다. 죽고 싶었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했습니다. 사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가 갈렸지만 이는 풀을 갈아 생명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대적을 물고 찢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대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물면 어서 더 물게 하고 짓밟으면 어서 더 짓밟히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있어 외치기를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다” 했습니다. 나더러는 원수 갚을 생각 말라 했습니다. (주석 18)

창간 10주년 행사는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4월 18일 서울 강연회를 기점으로 대구, 부산, 전주, 광주를 1차로 하고, 제주ㆍ청주, 원주, 대전, 청주를 2차 계획으로 잡았다.

YWCA 대강당에서 열린 서울 강연회는 1,5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연사는 함석헌ㆍ안병무, 대구는 함석헌ㆍ김용준ㆍ송건호, 부산과 전주는 함석헌ㆍ송건호가 각각 나서고, 광주는 함석헌과 장을병이 맡았다. 가는 곳마다 민주화의 열망과 함께 많은 시민이 모여 함석헌과 연사들을 환영하고, 그간 <씨알의 소리>의 역할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화창한 5월의 푸른 하늘에 서리를 품은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었다.


주석
14> <씨알의 소리>, 1980년 1,2월호, 6~7쪽.
15> 앞의 책, 63~64쪽.
16> <씨알의 소리>, 1980년 3월호, 4쪽.
17> 앞의 책, 9쪽.
18> <씨알의 소리>, 1980년 4월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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