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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회] 당내 비주류, 시시비비 가려: 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당내에서 주류가 .. http://t.co/EOh6CeB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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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당내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국민회의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동교동계가 일사분란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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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3장] 성실한 의정활동, 대안과 정책제시

2012/09/23 08:00 김삼웅

 

 

 

김근태는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당내에서 주류가 되지 못했다.
국민회의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동교동계가 일사분란하게 세력을 형성하고 주류가 되었다. 김상현ㆍ정대철 등 비주류가 있었지만, 경륜ㆍ투쟁ㆍ경력의 면에서 김대중의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김근태는 오래 전부터 김대중의 역량이나 인격을 존중해왔으나 친동교동계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비주류의 위치에서 비판과 견제를 통해 당내민주화를 추동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믿고 그 길을 택하였다.
원칙과 정도를 중시해온 그의 경력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다. 국민회의는 5월 19일 서울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대통령후보와 총재를 선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에 따라 당내에서는 누가 봐도 대세로 굳어진 김대중을 추대하자는 측과 민주정당의 전통을 살려 경선을 하자는 측으로 갈라졌다.

김대중 진영은 하나마나인 경선으로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고, 집권세력에 공작의 빌미를 줘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에 대해 비주류 측은 정권교체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민경선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김근태는 단연 국민경선제의 주장을 폈다. 언론을 통해 이를 밝히고 당기관지의 찬반 토론에 나섰다. 당시 분위기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정권교체 실현위해 국민경선제 필요

정권교체를 실현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한다. 천금같은 이번 기회에 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역사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 것인가.

국민의 5%도 안 되는 사람만이 김영삼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지난 3.5 보궐선거의 결과는 이를 입증한다. 그럼에도 우리 역시 국민에게 폭넓게 신망 받고 있지 못한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여전히 유효한 지난 4.11 총선의 패배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권교체에 대한 염원이 현재의 야당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로 연결되고 있지 않은 오늘의 상황은 무엇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우리는 대선에서 YS라는 후보와 싸우는 것이 아니며 YS를 탈색한 후보와 싸우게 될 것이라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누가 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제1야당이며 민주정통세력인 우리 당이 먼저 해야 한다. 정권교체의 대의를 위해 양보하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한다. 난점이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정권교체를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우리가 쇄신하고 국민적인 참여가 지원한다면 해 볼 수 있다. 국민에게 감동의 순간을 마련하고 준비해야 된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국민경선제를 비판한다면 정권교체를 실현할 어떤 방안을 가지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경선제는 야권에서 대통령후보로 나서고자 하는 사람들이 합의하여 경선의 관리주체를 만들고 후보로 등록한 다음, 등록한 후보들이 10~15개 권역을 순회하며 국민들의 지지와 참여를 호소하고 1일 당원으로 등록하는 선거인단을 모집하여 경선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때 각 권역은 인구비례에 의해 대의원 숫자가 배정되며 이 숫자를 가장 많이 확보한 후보가 야권의 단일후보로 확정되어 후보지명 대회를 거친 뒤 본선에 나서게 된다.

이미 일본 신진당과 대만 민진당에서도 이와 유사한 국민참여 경선의 실시로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두 나라에 비해 정치의식 수준이 뒤지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더 큰 성과가 있을 것이다. 야당간의 정치적 흥정만으로 본선에서 승리 가능성을 높일 수는 없다.

국민경선제가 필요하다.

첫째, 야당이 나뉜 상태에서 후보가 난립하여 서로 대립하는 것보다 출마를 원하는 야당후보가 공정한 관리하에 국민경선을 통해 야권의 단일후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야권의 힘의 소진을 막고 국민의 힘을 결집시키게 될 것이다. 비용의 문제는 경선참여 후보간의 약정과 선언을 통해 깨끗한 선거의 모범을 야당이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둘째, 국민경선은 전국의 지역을 순회하며 시차를 두고 시행하는 것이며 국민과 언론의 감시 하에 치러지는 것이며, 국민과 언론의 감시 하에 치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당이나 안기부의 공작을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여당이나 안기부에 의한 동원이 발각될 경우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쪽은 오히려 여권일 것이기 때문에 쉽게 공작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정치와 정당의 쇄신을 이루고 국민이 정치의 주인으로, 정당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국민과 정당, 정치의 거리가 좁혀져야 한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지우고 국민 스스로가 공직후보를 공천하는 제도의 정착이 정치의 선진화를 앞당길 것이다.

국민이 원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이 단결하고 쇄신하여 수권세력으로 결집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가 이런 국민의 뜻을 받들어 정치쇄신과 정당쇄신을 이루고 야권의 후보를 공개적이고 엄정한 경선을 통해 단일화 할 수 있다면 다가올 12월 대선에서 정권교체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국민회의는 경선제를 받아들여 전당대회를 열었다.
대의원 4,368명과 참관인 등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대회는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대중이 총투표수 4,157표 중 3,223표(77.5%)를 얻어 967표(21.8%)를 얻은 정대철을 크게 눌렀다. 총재 선거에서도 김대중은 73.5%의 득표로 김상현을 압도했다. 국민회의는 국민경선제를 채택함으로써 모양새도 보기 좋고 국민의 관심도 불러모아 전당대회가 흥행을 이룰 수 있었다. 김근태는 크게 보람을 느꼈다.

이날 전당대회는 또 부총재 11명도 선출하였다. 김근태는 자력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이제 영입케이스 부총재에서 당원들의 직선에 의해 부총재가 된 것이다. 그것도 동교동계의 지원이나 비주류 측의 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민회의 대의원들의 선택으로, 자력에 의해 당선된 것이다.

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유신과 5공체제에서 온 몸을 던져 싸우다가 입당한 김근태를 높이 평가하여, 계파의 소속감을 떠나서 그를 지지한 것이다.

김대중이 국민회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면서 대선 정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한국당은 보수언론을 매개로 대대적인 DJ 흠집내기에 나섰다. 예의 색깔론과 천문학적인 정치자금 은닉설이었다. 신한국당 사무총장 강삼재는 김대중이 670억 원 규모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폭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허위로 밝혀졌다. 대선을 앞두고 ‘아니면 말고’ 식의 저질 폭로전이었다.

오히려 14대 대선 당시 신한국당이 3,000억 원 규모의 대선자금을 기업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뒷날 드러났다.


주석
1> 국민회의 기관지 <새정치뉴스>, 1997년 4월 1일~10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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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2 08:00 김삼웅

 

사람이 출세하면 목이 굳어진다고들 한다. 특히 정치 속물들이 의원 뱃지를 달거나 청와대에 들어가면 목에 기브스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근태는 늘 자성하는 마음으로 의정활동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어려웠던 지난 날을 잊지 않으려고 서민들의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틈이 나면 지역구의 어려운 고아나 독거노인들을 찾았다.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수배 중일 때 가족의 생계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에 친구들이 가족을 격려하려고 김근태의 집을 찾았다가 단칸방에서 아내 인재근과 갓난 아기 병준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만 늦었으면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을지 모르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김근태는 평생을 서민들을 위해 살고자 마음을 다지고 다졌다.

그리고 겸손하고 도덕적 바탕에서 원칙과 상식을 지키면서 정치활동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런 자세는 재선에 이어 장관이 되고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강경한 투사라는 인상을 먼저 떠올립니다. 정계에 나온 뒤의 나의 모습이나 행보를 보고서 또 어떤 사람들은 진지하고 원만한 것은 좋은데 유약해 보인다, 너무 점잖고 도덕적이다. 논리적이어서 차가워 보인다고도 합니다. 최근에는 균형감각이 있고, 내재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는, 과분한 평가도 듣곤 합니다.

칭찬이든 비판이든 모두 달게 듣고자 합니다. 또한 반성도 하고 때론 힘도 얻습니다. 그런 평가들이 ‘나’라는 사람 됨됨이와 꼭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크게 틀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은 도덕적인 자신감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갖추고 균형감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더 나은 내일에의 비전을 가질 만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내가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주석 18)

국회의원 김근태는 남다른 길을 걸었다. 그의 투명한 의정활동으로 우선 유관기관과 기업인들이 긴장했다. 그리고 여의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각종 로비스트들이 겁을 먹었다. 그에게는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후원금이 모이지 않았고, 명절 때이면 국회 의원회관에 산더미처럼 쌓이는 선물 꾸러미가 그의 방은 피해갔다.

새로운 정치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나는 그 출발점이 정치자금의 투명성과 민주적 공천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피감기관에는 후원회 초청장을 돌리지 않았다. 한 번도 촌지를 주지 않은 나를 이해해주는 기자들이 고맙다. 당론과 다르게도 투표할 수 있는 크로스보팅과 표결 내용을 그대로 공개하는 표결실명제를 통해서 정책 투명성을 높일 수 있게 되면 참으로 좋겠다.
(주석 19)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은 김영삼 정권의 야당 파괴를 막고 차기 집권을 위해 자민련 총재 김종필과 연합을 서둘렀다. 두 총재는 5월 4일 국회에서 전격 회동하고 대여 공동투쟁을 다짐했다. 이것은 사실상 DJP공조의 신호탄이 되었다. 두 김 총재는 △ 검찰의 표적수사 중단 △ 과반수 확보 중단 △ 입당자의 원상회복을 촉구하면서,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15대 국회 원구성을 거부키로 합의했다.

또 5월 26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함께 대규모 합동집회를 열고 양당공조를 통해 ‘총선민의 수호투쟁’을 결의, 등원 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두 당의 공조체제는 9월 정기국회에서 더욱 강화되어 10여 차례의 합동의총과 정책토론회, 양당 인사들간 식사모임 등으로 이어졌다.

1997년의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은 자민련이 후보 단일화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의원내각제 개헌에 대해 “15대 국회에서는 어려우나 16대에 가서는 추진할 수도 있다.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제 개헌을 선거공약으로 내걸 수 있다”는 등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이와 관련 김근태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오래 전부터 절체절명의 가치로 추구해 왔다. 박정희 정권 이래 36년 동안 철옹성을 쌓아오며 구축된 특정 지역의 패권주의를 깨뜨리는 일이 쉽지 않다는 현실정치의 장벽을 지켜보면서도 5ㆍ16군사쿠데타와 유신정변의 핵심 중의 한 사람인 김종필과의 정치연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김근태는 의원총회와 기자회견을 통해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하는 자민련과의 후보단일화 에 찬성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당 부총재의 위치에서 이같은 발언은 국민회의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김대중은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원칙과 대의를 중시해온 그로서는 하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김근태가 원칙과 타협, 이상과 현실, 가치와 실용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에 대세는 이미 ‘DJP연합'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김근태는 민주당과의 통합을 서둘렀다. 정치적 ‘친정’이기도 하지만, 옛 재야 시절 상당수 동지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들은 4ㆍ11총선에서 대부분 낙마하고, 당내 갈등과 분열로 심한 내홍을 앓고 있었다. 자민련과의 연합도 중요하지만 정통민주세력의 연대가 더욱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인식이었다.

“옳게 또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직 그러한 사실만으로서 능히 불행을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라는 베토벤의 말이 이즈음 김근태의 심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석
18> 김근태, <부드러운 힘>, <희망은 힘이 세다>, 22~23쪽.
19> 김근태, <시린 겨울을 보내며>, <희망은 힘이 세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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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회] ‘영혼을 지키면서’ 걷는 정치인의 길: 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012/09/21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심성이나 행동방식은 국회의.. http://t.co/c8Lbj5qX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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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평전/[12장]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원내 진출 2

012/09/21 08:00 김삼웅

 

 

김근태의 심성이나 행동방식은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겸손하고 나서길 즐겨하지 않았다. 직업 정치인으로서는 적격이지 못한 체질이다. 강준만 교수(전북대)의 평가다.

“김 부총재가 너무 솔직한 면이 있다는 것 하나만큼은 지적해야겠다. 아니 그건 둔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오로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화를 냈겠지만, 나라 생각 이전에 중요한 게 개인의 밥그릇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13)

김근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제1야당 부총재 직함의 3선급 초선의원으로서 항상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은 것이 한국의 정치판이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강성발언이 항상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끄는데 비해 김근태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발언을 하여 매스컴에서 묻히기 마련이었다. 말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민첩하지 못하고 사색형이어서 여의도 정가에서는 ‘햄릿’이라는 평이 나돌았다.

요즘 김근태 부총재에게는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햄릿’이 그것이다. 늘 고뇌하고 망설이는 듯한 태도가 그런 이미지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짧은 정치인 생활 동안 그는 선택이 쉽지 않은 일들을 연속적으로 겪어야 했다. 민주당에 입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했고, 국민회의가 창당되면서 민주당이 쪼개졌다. 그는 김 총재의 복귀와 신당 창당을 반대하였지만 결국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4ㆍ11 총선 이후에는 신한국당의 야권에 대한 차별적인 검찰 수사와 여소야대 뒤집기 정국이 전개되었다. 국민회의는 자민련과 공조체제를 이루면서 대여투쟁에 나섰고, 두 당의 연대는 대선 후보 단일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는 과거 민주세력을 탄압하던 보수세력과 연합하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전술적으로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였다. 신한국당의 법안 날치기를 규탄하는 노동자들과 민주세력의 투쟁이 가속화되는 정국도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민회의는 뭐하는 당이냐, 김근태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거냐 하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진다. 이래저래 그는 괴롭다.
(주석 14)

김근태는 그러나 ‘영혼을 지키면서’ 정치를 하고자 하는 초심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애초 권력을 탐하여 정계에 입문한 것이 아니었기에 천박한 언술이나 대중영합의 포풀리즘에 기대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정치권은 비판의 소지를 많이 안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야유와 냉소를 고집한다면 정치권은 아예 붕괴돼 버릴 것이다. 정치권이 점차 발전되고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평가해 주는 일도 중요하다. 희망을 갖고 격려와 기대를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고뇌와 주저의 심경이었다. 좌절감도 깊었다. 반대로 투지도 생겼다. 정치세계는 나에게 ‘깊은 고뇌’와 ‘냉철한 교활함’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은 ‘진실한 결단’일 것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그러면 이에 응답하는 시대적 분위기가 올 것이라 믿는다. (주석 15)

김근태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과 남북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평적 정권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해 제도권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맑은 이성으로 판단하고 적응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치판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판치는 곳이다. 여간 쉽지가 않았다.

현실 제도정치는 여전히 낯선 동네이다. 대단한 관심과 추적이 오랫동안 있어왔고 군사독재에 대항해 함께 어깨를 걸고 수십년 지내왔기 때문에 퍽 많이 안다고 내심 자부해왔는데도 그렇다. 우선 대표적인 지도급 인사들 말고는 안면이 있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드문드문 해서 그렇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말하는 어법과 문법도 다르고 역사성도 분명히 다른 바가 있다. 늘 신문이나 방송에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를 의식해야만 하는 것도 또 다른 긴장과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주석 16)

 



초선의원 김근태가 낯선 국회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을 즈음, 그가 예측한대로 총선 뒤의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날이 갈수록 실정과 부패가 거듭되면서 검찰과 정보기관에 정권의 안위를 의탁하는 형국이 되었다.

정부여당은 4ㆍ11 총선에서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야당 및 무소속 영입작전을 계속했다. 야권은 “정보기관이 나서 사법처리 등을 빌미로 공간과 협박으로 야당ㆍ무소속 의원들을 입당시키고 있다.”고 비난할만큼 정부 여당은 노골적으로 야당의 파괴활동에 나섰다. 이로써 자민련은 정당 존립 자체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실제로 민주당, 자민련, 무소속의원 10여 명이 신한국당에 입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회담을 거듭하면서 정부 여당의 ‘의원 빼가기’에 공동전선을 폈다. 김영삼 정부의 독주는 계속되었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여당 단독으로 본회의를 소집해 안기부법과 노동관계법 등 11개 안건을 날치기로 처리하는 등 군사정권의 행태를 방불케 하였다.

한때 김근태가 몸담았던 통합민주당은 4ㆍ11총선에서 참패, 원내교섭단체조차 구성하지 못했으며, 그나마 정부 여당의 ‘당선자 빼내기 공작’으로 당선자 15명 중 5명이 이탈하였다. 김원기ㆍ장을병 등 비주류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발족시키고, 총선 후 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당선된 이기택 측은 이를 ‘해당행위’로 규정하여 민주당은 사실상 분당 상태가 되었다. 지리멸렬이었다. 정국은 1997년 겨울의 대선을 앞두고, 분열과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야권통합의 움직임이 나타났다.

“도대체 야당에 들어간 김근태는 뭐 하고 있는 거냐”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재야운동을 하던 동료들의 질책하는 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야당출입 기자들도 왜 본격적으로 발언을 하지 않는가 하고 걱정과 우정의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아직 낯설기도 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의 착종이 순차적으로 파악이 되지 않아 형광등처럼 껌벅껌벅 하기도 한다.… 지금은 참고 기다리고 있다.

기회를 노리는 그런 방향이 아니라 보다 많은 책임 있는 사람들과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와 다리를 어떻게 놓아갈 것인가를 준비하고 타진하고 결단할 그 시기를 기다리고 준비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주석 17)

김근태는 대선을 앞두고 야권과 재야가 통합하는 ‘민주대통합’의 큰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주석
13> 강준만, <국민회의 부총재 김근태의 딜레마>, <인물과 사상>(계간) 제10호, 70쪽.
14> <월간 말>, 1997년 2월호, 김경환 기자.
15> <일요서울>, 1999년 1월 24일, 엄상현 기자.
16> 김근태, <희망의 근거>, 420~421쪽.
17> 앞의 책, 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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