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30. 고향에 대하여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나 군에 입대해서
신병 훈련을 마치고 운전병 교육을 받을 때
나는 같은 동료 교육생들에게 돈을 갈취해서
상병인 구대장이나 교육을 가르치는 고참 사병에게 바쳐야 하는
학생장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한두 번 정도는 시도해 보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나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무서운 매질과 기합을 당해야 했다.
참으로 막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뜻밖에도 부대장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고
만나 보니 연세대 동문 선배였다.

 

그리고는 바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저승사자 먹이가 된 것 같던 학생장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산 중앙정보부에 처음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할 때도 그랬다.
당시 학생운동을 감시 감독하는 책임자로 있던 엄화섭 과장이
내 고향 출신이었고 그 누님이 오산에서 나와 이웃에 살고 있었다.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에 처음으로 끌려 갔을 때에는
담당 수사관이 평소 내가 가까이 모시고 존경해 마지않는
박형규 목사님의 사촌동생이었다.

 

서소문에 위치한 보안사 분실 범진사에
처음으로 연행되었을 때도 그랬다.

 

들어서자마자 사방 벽과 복도에서
고문당하고 비명지르는 소리로 잔뜩 소름이 끼쳐 오르는데
담당 수사관이 나를 벌거벗기고 군복으로 갈아 입히면서
우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으라고 잔뜩 협박을 주고 나갔다.

 

무지막지한 고문에 또 시달리겠구나 마음 졸이고 있는데
수사 책임자가 들어오더니 오랜만에 고향 사람 만난다면서
화성 출신으로 수원고등학교를 졸업했단다.

 

이밖에도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때나 막막한 상황에서
나는 뜻밖에도 고향에 인연이 있는 분들을 만나곤 했다.

 

고향을 그저 막연하게 서울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기분이다.

 

귀소 본능이라 할까?......
태어 나서 자라고 배운 곳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 등 모든 생명체가 지닌 본능적 속성일께다.

 

강에서 부화한 치어는 바다로 내려가 처음에는 연안에서 지낸다.

 성장함에 따라 연어가 되어 점점 더 멀고 깊은 대양으로 이동하며
세상을 누비고 다니다가 완전히 성숙해 지면 산란을 위해서 태어난 강으로 다시 돌아 온다.

 

이를 일컬어 모천회귀(母川回歸)라 하지 않던가...

생명의 자리, 삶의 터전을 바꾼다는 것은
그저 장소의 이동이나 환경의 변화뿐만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생명체로 존재하기 위한 적응이 필요할 것이고
그러러면 끈질기고도 팽팽한 긴장이 필연적으로 뒤따를 것이다.

 

생명의 모체요 보금자리인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역경과 고난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릴 적 고향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고향'하면 나는 머리 속에 정지용의 시가 떠오른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더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이상 정지용 '고 향' 전문)

 

이 시에서 고향은 이미 어릴 적 고향이 아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고향은 점점 황폐해 가고
삶에 찌들릴대로 찌들린 모습으로 메말라 있는 모습이다.

 

사정은 요즘도 마찬가지리라.
개발이다 산업화다 해서 누구에게나 다시 가 보는 고향은
이미 옛 고향인채로일 수 없겠다.

 

이는 고향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 고향은 어머니의 품안처럼 편안하고 따사로운 삶의 보금자리로
우리의 마음 한가운데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 땅 우리 민족의 토속적 정서를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게 다듬고 빗어내던 정지용은
해방 후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에서 좌익계 조선문학가동맹에 편을 들어 활동한 탓으로
분단 이후 남한 정부에서는 아름다운 서정시를 포함해서
그의 작품 모두 보고 읽고 듣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근 반세기가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야
그의 탁월한 작품들이 소위 문화적 해금 조치로 풀려나게 되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그의 시 '고향'에
채동선(蔡東鮮)이 곡을 붙여 널리 애창되던 오리지널 가곡은
분단 이후 어용 작가 이은상(李殷相)의 시 '그리워'가
번안되어 대신 불려지면서 아직도 왜곡된 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한편 다행스러운 일은 해금 조치 이후 그의 서정시 가운데 '향수'가
박인수 이동원의 듀엣으로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고 있는 점이다.

 

나는 출퇴근할 때나 목욕탕 사우나실, 화장실 등에서
노래가 된 그의 시 '고향'과 '향수'를 익히기 위해 입속으로 자주 부르곤 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으으으 음)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내 마음 ~ )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빛 ~ 그리워 ~ )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꿈엔들 꿈엔들) 잊힐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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