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 / 29. 명동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10. 26사건 이후 정국은 급작스러운 변화로 큰 혼란에 빠졌다.

유신독재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민주 정부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군부를 등에 업고 거대한 어둠의 세력이 등장할 꺼라는 비관론도 있었다.


 비관론과 기대론이 뒤섞이면서 전망이 불투명해졌지만

11월 10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실시방침이 발표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이 후보로 나설 것이 분명해지면서

군부독재에 협력했던 최규하의 대통령 임명에 따른 비관론이 자연스럽게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이런 생각에 비관적 입장이었던 민청협과 윤보선, 백기완 등 재야 인사들은

서울 명동 YWCA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대통령 직선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는 삼엄한 계엄령 치하였다.

이런 삼엄한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시위를 열게 되면

군부를 자극하여 돌이킬 수 없는 충돌과 희생이 따를 것이라는  판단이 재야 내에서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를 계획하게 된다.


"홍성엽 군과 윤정민 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민청협 운영위원 홍성엽이 신랑 역할을 맡았다.

신부는 민정(民政)이란 말을 뒤집어 가상의 신부 윤정민을 만들었다.

홍성엽의 어머니도 아들의 가짜결혼식을 이해하고 참석을 약속했다.


▲ 신랑 역할을 했던 홍성엽


홍성엽은 1974년 연세대학교 재학 중 나와 함께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75년 2월 15일 석방된 후

민청협 창립과 함께 총무국장 등 운영위원을 맡아 누구보다도 조직에 헌신해 왔다.


명함 크기의 작은 청첩장이 계엄당국의 눈을 피해

재야 민주 인사와 학생들에게 은밀히 배포됐다.


10.26 시해 사건이 난 지 한 달도 채 못 되는 11월 24일
명동에 위치한 YWCA 대강당으로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삽시에 6백 여 명의 각계 각층 인사들이 모였다.
대강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들로 꽉 메워졌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체육관에 모여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저지하고 하루빨리 거국 민주 내각을 구성해서
민주헌법을 먼저 세운 다음에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선출하자는
국민대회 행사에 참석한 분들이다.
 
주례라고 광고로 나간 대회장은 함석헌 선생이 맡으셨다.

 나는 일찌감치 함 선생님을 모시고 앞자리에 앉았다.


▲ 1979년 11월 24일 서울YWCA 위장결혼식 현장 사진. 함석헌 선생님 한 사람 건너에 필자 모습.


순서가 진행되고 사회자인 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 김정택이 결혼식 시작을 알리자
신랑 홍성엽이 입장했고 예상대로 신부의 입장은 없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유인물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우리는... 신군부세력의 계엄체제 때문에 위장결혼식을 하게 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를 반대한다.”


준비위원장 박종태(전 공화당 국회의원)가
유신 체제의 꼭두각시인 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반대한다는 취지문을 낭독했다

구호를 선창하고 복창할 때 분위기는 사뭇 터질듯 부풀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대회장 단상 쪽에서 비명소리와 의자를 내던지는 소리로 소란이 일더니
대회장은 삽시에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미리 장막을 쳐놓고 호시탐탐 노리던 계엄군들이
쏟아져 들이닥치면서 참석자들을 끌어내고 장내를 휩쓸었다.

 
이윽고 어둠의 세력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계엄군은 함석헌 선생님을 비롯해서
개신교 목사님과 신부님, 교수와 문인, 청년 학생 등 140여 명을 연행해 갔다.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게서 수사를 받은 함석헌 선생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수경사에서 재판을 받은 윤보선 전 대통령

 

YWCA 현장에서  98명이 연행되었고

밖으로 빠져 나온 참석자들이 코스모스백화점 앞에 모여 “유신 철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등을 외치며

조흥은행 본점까지 거리시위를 벌이다 다시 44명이 체포됐다.


 거리시위 중 청진동 도로변에서 검거된  나는

종로경찰서를 거쳐 삼각지에 소재한 육군본부범죄수사대(CID) 지하실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른 후
서빙고 보안사 대공분실로 다시 이첩되었다.

.도착하자마자 우선 몽둥이로 흠씬 두둘겨 맞았다. 







고문하던 계엄군은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모셨던 경호병들이라 했다.

 그들 말로 자기들은 신장 180센티미터 이상에다 

운동으로 몸이 단련된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들이라 했다

.

학력은 고졸 이하로 머리 굴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충성을 할 수 있는 자들 가운데
엄격한 신원 조사를 거쳐 선발되었다고 했다.

전군을 통틀어 가장 강하고 충직스런 군대라 했다.

 
박 대통령을 시해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20여 일 동안 피똥을 싸고 엉금엉금 기어다니다가
명줄만 붙어서 남한산성으로 간 지 이틀밖에 안 됐다고 했다.

 

김재규 일당을 보내 놓고 오랜만에 좀 쉴려던 참이었는데
피곤한 몸 쉬지도 못하게 웬 지랄들이냐고 했다.

 위대한 영도자이신 각하께서 서거하신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웬 난리냐는 거다.

 

가뜩이나 각하 경호를 못해드려서 죽을 맛이던 참에 유신을 반대하고 각하를 모독하는 놈들이나
다 때려 죽이고 자폭하고 싶은 심정이라 했다.

 

10.26 사태가 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극비리에 여기로 이동되어 왔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네들이 알면 무슨 난동을 벌일지 두려웠던지
갑자기 이동되어 분하고 억울해서 잠도 안 온다고 했다.

자기네들은 어떤 작전도 감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분기탱천하는 지경에서 연행된 이들 모두가 생사를 알 길 없는 궁지로 빠져들고 있었다.

함께 연행된 백기완 선생은 몇 번을 혼절했다 깨어났다 하더니 정신착란증과 협심증에 빠졌다.




김병걸 교수님은 온몸뿐 아니라 손과 발, 얼굴까지
새카맣게 피멍이 들고 고막이 터져나갔다.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고 구속된 김병걸 교수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회장이던 이우회는 온몸이 피투성이인채로 기절을 거듭하면서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끝내 한밤중에 계엄군들의 군화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몰려 왔다.

 

이우회의 숨소리가 깔닥깔닥하면서
심상치 않다고 저희들끼리 술렁거렸다.

 

치료하거나 응급 처치할 생각은 도무지 없는 듯
잘 지켜보고 있다가 숨이 멎으면 빨리 보고하라면서
담당 근무자에게 지시하고 저벅저벅 사라졌다.


지금 환경운동연합을 이끌고 있는 최열은 참으로 맷집이 좋았다.
그토록 고문 당하고 두들겨 맞고서도 기절을 안했으니...

고문하는 자들도 그렇게 매를 두드려 맞고도 오뚜기처럼 오똑오똑 일어나더란다.



홍성엽은 평소 하얗고 깨끗한 피부에 부드러운 미남형으로

자세 또한 늘 흐트러짐 없이 올곧았다.


나는 그 맑고 티없는 피부가 상반신 하반신 모두  

진한 자주빛 가지색으로 변질된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 홍성엽,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2005년 53세의 나이에 지병인 백혈병으로 운명했다.


양순직, 박종태 전 국회의원과 임채정 전 국회의장 등도 모두 같은 지경이었다.

고문자들은 내게 조사실 벽에 시뻘건 피가 짓뭉개진 것을 가리키며

박종태 전 의원이 고문당한 흔적이라고 으쓰대듯 말했다.





목사님들과 신부님들, 교수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연행된 이들은 누구랄 것 없이 군홧발과 몽둥이

온갖 고문과 욕설로 참혹하게 능욕당했다.


보안사 서빙고 대공분실에 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1달 여를 조사받고

1975년 10월 서울의대 간첩단 사건 때 서너 차례 연행되고

긴급조치 9호 위반 유언비어 유포죄로 아버님과 함께 20일간 조사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만큼 조사관들을 대개 알고 있는 사이였다.

그 중에는 박형규 목사님 사촌동생도 있었다.


그런데 박형규 목사님 자제분인 박종렬 목사가

나와 함께 연행되어 조사받고 있었다.



5촌 당숙이 되는 그 조사관은 내가 조사받는 방을 자주 들락거렸다.

조카 박종열 목사가 와 있는데 자기는 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는 거다.


그래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는데 조카나 형님이 그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면서 한걱정이다.

덕분에 당숙에게 박종렬 목사가 받아야 할 보호를 오히려 내가 덕을 본 셈이 되었다.


10.26 사태로 계엄령선포 이후 한 달이 채 안 되어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일어났고

대회장 등 조직 역시 공개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수사할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도 많지도 않았다.


일주일 남짓 지나자 수사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다만 저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데 시간이 더 필요했던가 보다.


조사할 내용도 없이 조사실에서 조사관과 얼굴을 맞대고

하루이틀 지내다 보니 조사받는 나는 물론이거니와 조사관 또한 지루하기 이를데 없다.


안면이 있는 조사관들이 내가 있는 조사실로 모여들었다.

거기에서 나는 김재규 수사와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 조각들을 열거해 본다.


. . . . . .


- 김재규가 서소문 소재 범진사에서 서빙고로 연행되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삼일을 죽도록 얻어 맞았다는 이야기


- 김재규 사건과 관련하여 심수봉과 신재순 뿐만 아니라

채홍사 박선호가 주선하여 박 대통령을 모신 이들도 샅샅이 불러다 조사했다는 이야기


- 조사를 받던 중 박정희 장례식을 알리는 묵념 소리가 나자

바로 무릎을 꿇고 청와대 방향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갖추더라는 이야기


- 요정 선운각 마담 몸뻬아줌마(장정이)와 김재규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몸뻬아줌마는 본래 박정희와 친했는데 정치적 감각이 아주 탁월해서 박정희가

솔직담백하고 약간은 무뚝뚝한 김재규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후 김재규와 몸뻬아줌마 장정이는 애인 사이가 되고 둘 사이에 아들도 낳았다.

박정희 역시 본부인에게 딸 하나 있고 아들이 없던 김재규와

몸뻬아줌마 사이에 낳은 아들을 대견해 하고 귀여워했다.

아들의 생일에는 한동안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박정희가 개각을 단행하면서 청와대 비서실장에 김계원, 경호실장에 차지철,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에 김재규를 임명하자 몸뻬아줌마는 김재규에게


"각하께서 인사를 잘 못하셨다.

차지철 성질에 김재규 당신과 사사건건 부딪칠게 뻔한데 그러다가 큰 사고라도 날까 우려된다.

차라리 당신이 비서실장으로 가고 김계원을 중앙정보부에 앉혀야 좀 마음이 놓이겠다.

당신이 건의하기 어려우면 내가 직접 각하께 건의드려 보겠다" 고 했다.


이 뿐만이 아니고 몸뻬아줌마가 연행되어 와서

그동안 정부 인사에 대해 박정희에게 건의한 내용들을 들어보니

정치적 감각이 제갈공명 못지 않게 탁월하더라.


몸뻬아줌마는 김재규의 거사에 대해서는 전혀 낌새를 채지 못했다고 하더라.

다만 거사 이틀 전에 찾아와서 아들을 한동안 꼬옥 안아주더란다.

. . . . . .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훗날 나는 몸뻬아줌마 장정이가 잠적해 지내고

아들을 키우면서 절을 짓고 시주하며

김재규와 박정희의 명복을 빌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치떨리고 몸서리치는 지경에서

나는 천만뜻밖인지 다행인지 고향 후배를 만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나와 한동네에 살았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께 예방 주사를 맞고 자랐다고 했다.

 

내가 대학에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신문에 가끔씩 큼직큼직하게 보도되는 것을 보고 들으면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배라고 했다.

 

태권도와 축구 주특기로 청와대 경호실에 차출되었는데
이제 제대 말년으로 고참이라 했다.

 
덕분에 나는 극한 상황을 다소나마 모면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막막한 지경에 처했을 때 나에게는 이처럼 뜻밖의 인연이 자주 있어 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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