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년 6월 17일 (목) 오전 7시 30분
장 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인터넷에 꽤 많은 펌글들이 검색이 되는 바, 처음 인터넷에 게재된 곳이 어디인지 출처를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
 

조선은 어떻게 500년이나 유지할 수 있었을까?

  ㅡ 서울대 허성도 교수의 2010년 강연내용 개제



저는 지난 6월 10일 오후 5시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 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 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 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 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 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 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 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 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 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 재미니, 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 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 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 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 이 둘을 1 대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 노트 한 권, 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 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
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 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 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 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 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세, 1970년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 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 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 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 에스파냐왕국입니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 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 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 ‘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격쟁(?錚)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입니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 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 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하셨지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 왕이 ‘국민 여러분,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 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 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 이걸 사초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 쓰는 게 경제적이지요.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 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 몇 년이 지났습니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

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 안 들었겠습니까? 들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봅니까?
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 여러분,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 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입니다. 왕들의 일기입니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습니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 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 실록이 있습니다. 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 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야, 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 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 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 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 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방폐장, 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 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 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방폐장, 핵발전소, 수력발전소를 만든다. 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 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 ‘흙담에 금이 갔다, 흙담이 무너졌다, 돌담에 금이 갔다, 돌담이 무너졌다, 기왓장이 떨어졌다, 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 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 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 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 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 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 세종12년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 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 세종12년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찬성 9만 8,657표, 반대 7만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 찬성이 훨씬 많지요. 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 찬성이 9만 8,000, 반대가 7만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 그러나 7만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 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 

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 ‘마마, 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 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 또 부결이 됐습니다. 이유는 ‘마마, 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년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 관찰사로 갑니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 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 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 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 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 주희. 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황진이의 애인, 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 지구는 둥글어야 한다, 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 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 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1400년대입니다. 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 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일식, 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 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 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 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 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 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 

‘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
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 옛날에도 똑같았어요. 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
‘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
‘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 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 ‘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
‘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 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 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 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분, 20분,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한 100년,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 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 1,447년 세종 29년 음력 8월 1일 오후 4시 50분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시 55분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 하나는 아라비아, 하나는 중국, 하나는 조선입니다. 

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분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분 46초입니다. 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 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 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 ‘구체의 체적이 6만 2,208척이다. 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도 42분 51초, 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 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 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 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 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 甲地는 北極出地, 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 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도 30분에 있다. 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鼓?)가 12번 울리고 종료(鍾鬧)가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하라. 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鼓?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 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 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 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 里數를 기록하는, 고는 북 鼓자, 북을 매단 수레 車, 수레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 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 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 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 여기 고뢰, 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 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 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 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 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 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 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 석굴암도 멋있잖아요. 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 에스파냐, 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 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 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쳐야지요.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 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산과입니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科. 계산을 밝히는 과,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 수학과를 세웠습니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 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 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 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 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 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 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 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 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 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 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 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 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 갈고리 勾자, 허벅다리 股자입니다. 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 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 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 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 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비밀할 때 密, 비율 할 때 率. 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 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 마이너스, 정사각형 넓이, 원의 넓이, 방정식, 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 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 부담하는 부(負)라고 불렀다. 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 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 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 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 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 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 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물리학사, 건축학사가 나옵니다. 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 그래야 허벅다리, 갈고리를 아! 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 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7 08:00 김삼웅

 

 

늙어가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맑은 정신으로 청청하게 활동하고 글을 쓰던 함석헌이 큰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나이는 이미 미수(米壽)에 이르렀다. 거인은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서울대병원 12층 108호실에서였다.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가 추대되었다. 장례는 2월 8일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거행되었다. 2,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거인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장지는 연천군 진곡읍 감파리 마차산 기슭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8월 15일,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2006년 10월 19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는 2001년 4월 ‘이달의 문화인물’ 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함석헌은 1988년 11월 22일 오산고등학교 전제현 교장에게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남강(남강 이승훈 - 저자) 선생께서 이루지 못하신 소원을 내 유해를 가지고라도 이루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내 뼈를 골격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생들이 공부하게 해 주시고 내 대뇌와 심장 등 모든 장기도 방부제에 담아서 두고 공부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살던 작은 집과 터가 있는데 그것도 남강재단에 드리니 써주세요. (주석 4)

함석헌의 ‘표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준비 과정에서 유체를 표본으로 만들었을 경우 보관문제와 자칫 우상의 대상이 되어 고인의 뜻과는 달리 이용될 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으로도 어려운 문제라는 의견에 따라 유택에 안장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지인들에게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라” 면서 “만일 누가 비석을 세운다면 벼락을 쳐서라도 부셔버리겠다” 고 당부하였다. 지인들이 후대를 위해서라도 무슨 말이라도 새겨야 한다고 설득하자 “정말 무슨 말을 쓰고 싶으면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라는 그 말만 조그마하게 써 달라”고 하였다.

장례 뒤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족이 기념사업회 쪽에 돌책에 세울 고인의 말씀을 50~60자로 골라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이와 같은 거인의 생애를 50~60자로 압축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몇몇이 의논하여 유일한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고르기로 하였다.

“결국 생전에 함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고 생각되는 안병무 박사에게 의뢰했다. 안 박사님은 다음과 같은 시를 선정해 주셨다.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 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 중에서”
(주석 5)

함석헌 부부에게는 2남 5녀가 있었다.
장남 국용, 차남 우용, 장녀 은수, 차녀 은삼, 3녀 은자, 4녀 은화, 5녀 은선이다. 함석헌이 1947년 3월 월남한데 이어 차남이 1948년 6월 30일 용암포를 통해 단신 월남했다. 그리고 이어서 부인과 남은 가족이 1950년 월남하고, 어머니와 장남, 장녀는 용천에 그대로 남았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망한데 이어 장남이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는 장녀 은수가 살아 있었으나 함석헌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유영모처럼 매일 산 날짜를 그날그날 달력에 기록하였다. 탁상용 달력 1988년 8월 8일자에 31925를 기록한 것이 남았다. 8월 12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귀가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날짜로 정확히 31929일을 살았다.

1988년 5월의 화재로 장서 5천여 권이 다 소실된 이후 새로 준비한 1천여 권과 쌍문동의 낡은 집 한 채, 20여 권의 저서와 역서 몇 권이 유산의 전부였다. 함석헌 사상의 본향이고 <씨알의 소리>의 산실이었던 원효로 4가의 옛집과 부지 82평은 오산학교에서 운영하는 남강문화재단으로 기증,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함석헌의 별세 뒤 공석 중이던 <씨알의 소리> 발행인 및 편집인에는 1948년부터 함석헌을 사사하면서 고려대학에서 두 차례나 해직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김용준 박사가 선임되었다. <씨알의 소리> 후원회는 명칭을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로 바꾸고 후원회장 장기려 박사를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주석
4> 전제현 <함석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함석헌선생추모문집>, 324쪽, 오산학교동창회 편, 1994,.
5> <씨알의 소리>, 1989년 5월호,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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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6 08:00 김삼웅

 

 

노태우가 6.29 항복선언을 하던 날 함석헌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7월 13일 췌장, 담낭, 십이지장 등 종양부위의 절제수술이 4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입원 두 달 만인 8월 29일 잠시 퇴원했다가 9월 4일 백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수술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다. 군부독재의 항복선언의 날에 함석헌이 입원한 것은 하늘의 섭리였는지 모른다. 독재세력의 항복으로 이제 그의 저항도 마무리할 시점이라는 섭리였을까, 그는 ‘섭리사관’을 믿어왔었다.

함석헌은 재입원하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의 뜻을 밝히었다.
1980년 7월 강제폐간 당한 지 7년 째가 되었다. 6월 항쟁으로 5공세력의 기가 어느 정도 꺾이면서, 그리고 직선제 개헌과 대선 국면으로 전환되면서 느리게나마 민주화가 진척되고는 있었다. 해서 <씨알의 소리> 복간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악명 높은 언론기본법이 폐기되고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함석헌은 12월 22일 <씨알의 소리> 복간을 신청했다. 하지만 문공부는 꿀 먹은 벙어리였다.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양김이 함께 출마하여 노태우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게되고, 6월항쟁은 결국 군부정권을 5년간 연장시키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노태우 정권이 <씨알의 소리>의 복간을 미루게 된 정치적 백경이 되었다.

함석헌은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성치않은 몸으로 단일화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김대중ㆍ김영삼의 단일화가 되어야만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김이 각각 잇따라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한 후 그의 자택에는 양김과 그들의 측근들의 발길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를 예감한 듯 쌍문동 자택을 찾아온 양김 가운데 한 후보의 부인과 그 부인의 절친한 여성운동가 앞에서 <노자> 제29장의 한 구절을 써서 풀이해주었다고 한다.

將慾取天下而爲之 吳見基不得己 天下神器 不可爲也

장차 천하를 먹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자를 보면 나는 그 먹지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함을 볼뿐이다. 천하란 신령스런 그릇이므로 거기에 무엇을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주석 2)

제96호(1988년12월호) 복간호

6월 항쟁으로 민주세력이 집권하지는 못했으나, 1988년 4.26총선에서 여소야대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5공과 같은 폭압은 사라지고,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씨알의 소리>는 1988년 7월 18일 폐간 8년만에 정기간행물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등록번호 <라 - 3676>였다. 법적 처리기간은 신청한지 1개월내로 내주게 되었으나, 정부는 무려 7개월 만에 등록증을 내주었다. 군사독재 잔당들에게 함석헌과 <씨알의 소리>의 존재가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함석헌은 새편집위원으로 계훈제ㆍ김경제ㆍ김동길ㆍ김용준ㆍ김영호ㆍ노명식ㆍ법정ㆍ송건호ㆍ송기득ㆍ안병무ㆍ이태영ㆍ조요한ㆍ한승헌을 위촉하고, 이중 김용준(위원장)ㆍ김영호ㆍ한승헌으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편집기획과 자문 역할을 맡겼다.

1988년 12월호로 복간호를 발행하였다. 200여 쪽에 내용도 풍부했다. 함석헌의 <절대승리>, 특집 <씨알ㆍ반핵ㆍ통일>, 조요한의 <군사문화는 청산되어야 한다>는 시론, 박두진의 축시 <깃발>, 김경재의 <자유혼, 인간 김재준>, 김준엽ㆍ송건호ㆍ법정ㆍ계훈제의 <복간축사> 등이 실렸다.

함석헌은 8년 만에 다시 쓴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의 <씨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에서 통한의 사연을, 그러나 정제된 언어로 정리한다.

저들은 씨알을 칼로 자르면 쉽게 죽을 줄 알았겠지만 씨알은 죽지 않습니다. 죽는 법 없습니다. 죽이면 죽은 것 같으나 다시 살고, 다 죽어 없어졌다가도 굳은 땅껍질을 들추고 일어나는 들풀같은 씨알입니다.

나는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불의한 세력들은 나를 연금, 미행, 도청 등 갖은 방법을 다해 나의 입을 막고 나의 붓을 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전국 곳곳, 어느 산 어느 골짜기 골짜기마다 이름모를 수많은 씨알들의 꿈틀거림, 작은외침, 부르짖음이 함성이 되고, 마침내 도도한 물결을 이루어 불의의 세력들을 밀어부친 것이 작년 6월의 싸움이 아닙니까? 이때 나는 갑작스런 병을 얻어서 병원에 누워 있었고 마침내 대수술을 받게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병원을 드나들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주석 3)

함석헌은 퇴원을 했으나 노령인데다 큰 수술을 하여 건강이 예전치 못했다. 그러나 타고난 건강체질과 정신력으로 <씨알의 소리> 발행에 전력하였다. 복간호에 이어 1988년 1.2월호에는 특별한 글을 쓰지 않았다. 4월호가 통권 100호이기에 여기 준비를 서둘렀다. 평상시라면 창간 10년에 통권 100호가 발행되지만 <씨알의 소리>는 독재와 싸우느라 두 차례나 목이 졸려서 19년 만에야 100호가 나오게 되었다. 통상적이라면 200호가 나올 시점이었다.

함석헌은 재복간과 100호 준비, 그리고 몇 차례 시국강연으로 다소 무리를 한 것인지, 8월 3일 서울대병원에 다시 입원하였다. 1년 만이었다. 의사는 안정을 권하였다.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제24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노태우정부는 올림픽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 함석헌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올림픽개최의 날 노태우와 함께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으로서 평화의 문에 불을 지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5공의 제2인자로서 헌정 유린과 인권탄압에 핵심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었다. 위기에 몰리자 6.29선언을 통해 국면을 전환하고, 야당분열의 선거전에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나마 전두환과 다른 점이라면 1988년 7월 7일 ‘대북정책 특별선언’을 통해 대북 화해무드를 조성한 것이다.

함석헌이 민주진영 일부로부터 “망령이 들었다” 는 격한 비난을 들어가면서 병중의 몸으로 서울올림픽평화대회 추진위원장으로서 노태우와 평화대회의 공동의장이 된 것은 올림픽의 평화정신과, 대북 화해 분위기를 살리고자 했던 것 같다. 이제까지의 삶과는 달리 군사정권이 주최한 ‘행사’에 참여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이에 앞서 1987년 10월 12일에는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인촌 언론상’을 수상했다.
인촌 김성수의 일제말기 친일행적을 둘러싸고 지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함석헌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인들과 <씨알의 소리>독자들이 이 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상을 수상했고, 상금 전액을 오산학교 남강문화재단에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그는 1984년 남강 이승훈을 기리는 ‘남강문화재단’을 오산학교에 설립하고 원고료와 강연료 등을 털어 기금으로 희사해왔었다.


주석
2> 이치석, 앞의 책, 637~638쪽, 재인용.
3> <씨알의 소리>, 복간호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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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5 08:00 김삼웅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폭로> 20년 전 박종철 씨가 공안당국의 고문에 의해 사망했을 때 군사독재정권은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부들의 용기 있는 폭로가 있었기에 암흑 속에서 한 가닥 희망의 빛을 발견하게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자료사진

 

국민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언제까지 굴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청년ㆍ학생들이 금단의 철벽에 도전하였다. 1982년 3월 18일 일군의 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에 방화하면서 광주학살에 미국의 역할을 성토한 것이 반독재 항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어서 1983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결성되어 투쟁하면서 5공의 철옹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경향 각지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1984년 5월 18일 김영삼ㆍ김대중 계의 야당인사들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면서 저항운동은 야당 진영에까지 확대되었다.

80년대 초기 민주화운동의 선두 그룹에는 유신체제에 저항하면서 연대를 이루어 온 재야인사들이 있었다. 1983년 5월 31일 함석헌ㆍ문익환ㆍ홍남순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광주학살 진상” 등을 요구하는 <긴급민주선언>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이에따라 6월 16일 양심수가족협의회가 NCC사무실에서 양심수 석방 등을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가고, 이것은 고려대학을 필두로 대학가의 시위로 확산되었다.

시대는 다시 함석헌을 부르고 있었다. 함석헌이 새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전두환의 폭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면서, 5공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흉폭해지고 민심의 이반속도가 빨라졌다. 정부는 저항하는 민주인사들을 고문하고 용공으로 몰았다.

함석헌은 김재준ㆍ윤반웅ㆍ홍남순ㆍ이민우ㆍ문익환ㆍ지학순ㆍ김대중ㆍ김영삼 등과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1985년 11월 11일 <고문용공조작은 절대로 은폐될 수 없다>는 성명에 이어 농성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우리의 주장>에서 5가지를 주장했다.

-. 고문과 용공조작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수사기관원들을 색출ㆍ처단하라.
-. 국회에서 위증한 내무장관과 법무장관은 인책ㆍ사퇴하라.
-. 우종원 군의 사인을 공개수사를 통해 밝혀라.
-. 현정권은 다시는 고문 및 용공조작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국민과 세계 앞에 공약하라.
-. 우리는 국민의 자유로운 정부 선택권과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총력을 경주할 것이다.
(주석 1)

많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분신ㆍ투신ㆍ할복 등 극한적으로 저항에 나섰다. 전두환 정권은 막나갔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을 당하다가 숨졌다. 함석헌 등 민주인사들은 1월 26일 기독교회관에서 ‘고 박종철군 국민추모회준비위원회’ (추모위)의 발족식을 갖고, 고문살인 사건의 진상규명과 이 땅에서 영원히 고문 등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추방하기 위한 국민연대를 결성했다. 그리고 박종철군 국민추모대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추모위’는 이후 민주쟁취의 대장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함석헌은 6월 5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면서 홍남순ㆍ강석주ㆍ문익환ㆍ윤공희ㆍ김지길ㆍ김대중ㆍ김영삼과 공동으로 고문을 맡아 이 단체를 이끌었다. ‘국민운동본부’ 는 전국에서 노도처럼 일어나는 6월항쟁의 중심이 되었다. 함석헌은 많은 집회와 시위 대열에서 빠지지 않았고, 국민운동본부의 주요 성명을 발표할 때이면 이를 낭독하였다.

시민의 궐기에 견디지 못한 신군부 정권은 6월 29일 마침내 노태우가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수구세력의 교활한 국면 전환용 전략이었다. 그들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유화책을 쓰고, 가라앉은다 싶으면 다시 칼을 빼드는 숫법이었다. 최근에는 이명박이 촛불집회로 위기에 몰리자 반성하는 듯 하다가 곧 공안카드를 꺼낸 바있다.

들불처럼 번지던 6월항쟁은 6.29선언과 함께 보수야당이 체제내로 귀환하면서 곧 대선 정국으로 전환되고, ‘전두환 타도’의 열기는 사라졌다. 이번에도 혁명적 열기로 치솟던 민중의 역량이 비등점에서 사그라지고 말았다. 매번 그랬다. 반유신 항쟁이 10.26사태로, 반전두환 6월항쟁이 6.29선언으로, 반이명박 촛불집회가 MB의 반성 발언으로 수그러들었다.

함석헌이 늘 걱정했던대로 국민적 ‘의분’ 이 모자랐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눈물로 전송하고, 박정희가 암살되어 장례를 치를 때 수많은 국민이 연도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전두환이 백담사에 유폐되었을 때도 많은 국민(신도)들이 그를 찾아갔다. 인정이 많은 국민인지, 의분이 없는 국민인지, 그래서 압제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일 터이다. 1911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의 반독재 투쟁의 치열했던 것과도 비교된다.


주석
1> <6월항쟁 10주년기념자료집>, 45쪽, 6월민주항쟁 10주년사업 범국민추진위원회 엮음, 사계절,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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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4 08:00 김삼웅

 

 

983년 3월 한길사

함석헌의 80순을 넘긴 1982년 암담한 시국에서도 지인들이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간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씨알ㆍ인간ㆍ역사>라는 390쪽 분량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문집편집위원에는 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송건호ㆍ법정ㆍ안병무 등이 참여했다.
문집은 안병무의 <선생님께 드리는 글>, 박두진의 기념시 <빙원행>에 이어 제1부는 안병무의 <순수와 저항의 길>, 송건호의 <언론인 함석헌>. 김경제의 <뜻ㆍ역사ㆍ민족>, 송기득의 <함석헌의 저항론>을 묶었다.
제2부는 양호민의 <마르크스ㆍ레닌의 민족이론>, 박현채의 <한국농업의 상황과 농업혁명에의 길>, 장을병의 <평등이념의 정치적 접근>, 제3부는 안병무의 <세례요한과 예수>, 유동식의 <한국사상과 기독교신학>, 장일조의 <인간의 자기해방과정으로서의 역사>, 남정길의 <정의관념의 붕괴와 그 결과에 대한 고찰>, 제4부는 장회익의 <인간:우주적 실재에 대한 역사적 모형>, 김용준의 <분자생물학의 현재>, 장기홍의 <지구의 초기사>, 제5부는 김성식의 <이집트 문화의 재음미>, 김정환의 <페스탈로찌의 정치철학적 저작 연구>, 이태영의 <자녀의 양육에 관한 연구>가 쓰였다.

한길사는 1983년 3월부터 함석헌전집 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1988년까지 20권의 전집을 펴냈다.
편집위원은 계훈제ㆍ고은ㆍ김동길ㆍ김성식ㆍ김용준ㆍ법정ㆍ송건호ㆍ안병무로 구성되었다.
전집은
1. 뜻으로 본 한국역사.
2. 인간혁명의 철학.
3.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4.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5. 서풍의 노래.
6. 수평선 너머.
7. 간디의 참모습 / 간디 자서전.
8.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9. 역사와 민족.
10. 달라지는 세계의 한길 위에서.
11. 두려워 말고 외치라.
12. 6천만 민족 앞에 부르짖는 말.
13. 바가바드 기타.
14.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15. 예언자 / 퀘이커 3백년 외.
16. 사람의 아들 예수 / 예언자 [칼린 지브란]
17. 민족통일의 길.
18. 씨알의 옛글 고쳐 읽기.
19. 영원의 뱃길.
20. 함석헌의 삶과 사상.
(주석 14)

당시 생존 인물의 저작물이 20권의 전집으로 묶여나온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함석헌은 80여 년의 생애에서 그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 인터뷰 그리고 여러 권을 번역한 노력의 결정이었다. 편집위원회의 간행사 몇 대목이다.

“이 시대에 살면서 글줄이나 읽은 사람치고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삶과 뜻을 훌륭하다 칭찬하는 사람, 또는 부질없다 나무라는 사람, 또는 마땅치 않다 욕하는 사람이 다 있어 그 의견이 한결같을 수는 없으나, 그 누구도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잡아떼지는 못할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해방 후 40여 년, 아니 그 이전 일제시대부터의 이 나라 이 민족 역사에 있어서 그의 이름은 언제나 그 현장에 있었고 또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 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막상 ‘함석헌이 어떤 사람인가?’하고 누가 묻는다면 성큼 ‘이런 사람이다’ 라고 대답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그런 인물이다. 금강산에는 만물상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아서 무어라 이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런 면이 있는가 하면 또 저런 면이 있으니, 어떤 형용사도 그 바위산의 특정을 나타내지 못하여 만물상이라는 이름이 붙였을 것이다.”

“학자이기도 하고 학자가 아니기도 하고, 문인이면서 문인이 아닌 함석헌은 또한 종교인이면서 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 기독교를 배우고 우찌무라ㆍ유영모 같은 이들의 여향을 받았으며, 현재는 퀘이커 교도들 모임에 몸을 담고 있는 그가 크리스찬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신앙의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는 정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곳에서 늘 살아왔지만 해방 이후 이땅의 가파른 정치사에 큰 선을 긋는 영향을 미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론인이 아니지만 칼날같은 날카로운 붓끝으로 한 시대의 잘못을 고발한 언론인이 또 누구이겠는가? 그의 붓끝을 따라 한 시대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만물상이기 때문에 뭐라고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 몇 마디로 굳이 표현하자면,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이며 ‘죽어가는 시대의 양심’이다. 그는 ‘민중의 대변자’로서 ‘시대의 예언자’로서, 이 날 이 시간까지 살아왔다. 그는 ‘씨알’을 위해 씨알과 더불어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면서 가시밭길 80년을 헤치고 예까지 걸어온 우리 시대의 자랑스런 얼굴이다. 에머슨이 ‘위대한 것은 오해받기 마련’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인간 함석헌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삶과 역사를 살아온 우리 시대의 참 인간상이다.”
(주석 15)

함석헌전집은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20권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공전의 인기를 불러모았다. 그런데 뒷날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이 전집의 많은 오ㆍ탈자를 비롯 문장의 부분적인 탈락 등편집상의 여러 가지 부실성을 들어 판매금지를 요구하고, 출판사가 이를 수용하면서 서점에서 절판되었다. 전집 편찬 이후에 발굴된 각종 자료까지 포함하여 새 전집의 발간이 기대된다. 


주석
14> <씨알ㆍ인간ㆍ역사>, 차례, 한길사, 1982.
15> <전집>, <함석헌전집 간행에 부쳐>, 3~5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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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3 08:00 김삼웅

 

 

한승헌 변호사가 조작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생계형’으로 삼민출판사를 차렸다. 그리고 1982년 5월 함석헌의 <씨알의 옛글풀이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를 펴냈다. 그동안 <씨알의 소리> 등에 연재한 동양고전을 묶은 것이다. <제1장, 동양정신의 뿌리>, <제2장 장자>, <제3장 둬두는 정치 (속 장자)>, <제4장, 노자>, <제5장 맹자>, <제6장 잡편>이다. <예와 이제(古今)>이란 서문의 한 대목을 보자. 그의 고전에 관한 인식의 편린을 알게 된다.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옛길을 다시 읽어보자는 것이다. 왜? 그 안에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기본적인 모습, 그리고 그렇게 살고 죽는 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야말로 초창시기기 때문에 사치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고, 비교적 간사한 지혜가 없이 순전히,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나도 인간답게 죽고 너도 인간답게 죽어, 이 인생을, 이 생명을 이 하늘을 한 뜻 속에 실현해보려고 애썼던 것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중략) 세상 풍조는 새것만을 좋아하고 옛것을 존중할 줄 모르지만 뜻 있는 이는 그렇지 않다. 옛날에 위대했던 이들은 예외 없이 다 옛길을 찾았다. 모든 종교, 모든 철학이 그것을 증거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고등기술의 급작스런 발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날마다 변하는 새 풍조만을 따르고 옛 정신을 거의 무시하게 됐지만, 이대로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주석 11)

이 책의 <잡편>에 풀이한 굴원(屈原)의 글 <고기잡이 늙은이가 묻기를>에서는 이 무렵 함석헌의 심기와 통함을 느끼게 한다.

굴원이 이미 내침을 받음에 강담에 놀아 못가에 걸으며, 읊조리니 낯빛이 바싹 마르고 모양이 마른 나무처럼 시들었더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보고 묻기를, 그대 삼려대부가 아닌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이르렀는고,

굴원이 가로되, 온 세상이 다 흐렸는데 나 홀로 맑았고,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었노라. 이러므로 내침을 보았노라. 고기잡이 늙은이가 가로되, 어진 이는 무엇에나 걸림이 없어 세상으로 더불어 잘 어울려 옮겨가는 것이다. 온 세상이 다 흐렸거든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으며 그 물결을 일으키지 않는고. 그러고는 깊이 생각하고 높이 서서 스스로 내침을 받도록 하는고. 굴원이 가로되, 나는 들으니 새로 머리 감은 이는 반드시 감투를 튕겨서 쓰고 새로 몸 씻는 이는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하니, 어찌 내 몸의 깨끗함을 가지고 남의 얼룩덜룩한 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소상강에 나가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 지언정 또 어찌 차마 희고도 흰 맑음을 가지고 더러운 세상의 티끌을 무릅쓸 수 있겠는가. 고기잡이 늙은이 빙긋이 웃고 뱃삯을 쳐 떠나가면서 노래하기를, 창랑물 맑거들랑 내 갓끈을 씻읍세나, 창랑물 흐리거들랑 내 발을 씻읍세나. 드디어 가 버린 다음 서로 다시 말이 없더라.
(주석 12)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퀘이커교인으로 생활하였다. 세계적으로 연대를 갖고 국제 모임은 물론 국내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그리고 1985년 11월에는 삼민사에서 <현대의 선(禪)과 퀘이커신앙>을 편역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영문학자로서 일본 퀘이커의 원로인 이기에 유끼오의 <퀘이커의 길>은 1958년 호주 퀘이커 연회에서 퀘이커신앙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펴낸 것을, 그쪽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펴내기를 희망하여 번역하게 되었음을 서문에서 밝힌다.

이 책은 <제1부 기독교는 달라져야 한다>, <제2부 종교의 원천을 찾아서>, <제3부 퀘이커의 길>로 구성되었다. 1부는 함석헌이 퀘이커 예배모임에서 발표한 내용이고, 2부는 유끼오의 글을 조형균의 번역, 3부는 부길만이 각각 옮겼다. 함석헌은 이 책을 펴내는 이유를 말한다.

이상하게도, 그 진실하고도 담대한 정신의 개척자들이 북아메리카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고, 인도에도 가고, 일본에까지 오면서도 오직 우리, 졸고 있는 은둔자라 불리던 우리에게만 늦었다. 그래서 인류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끔찍한 환난인 6ㆍ25에 와서야 비로소 그 개척자들의 발길이 우리나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먼저 그 물결에 접한 우리의 정성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 수난의 여왕의 지침이 너무해서 그랬는지, 30년이 넘는 동안 우리는 이렇다할 만한 새 정신의 증거를 한 것이 없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차차 젊은 혼들로부터 “퀘이커란 무엇입니까” 하는 고마운 질문을 받게 된다. 지금 여기 펴내는 조그만 책자도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함으로써 새로 남의 꿈틀거림을 일으켜보자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주석 13)

여기서 함석헌의 책 얘기를 덧붙이기로 한다. 그의 사회적인 명성이 높아지면서 출판사들의 책 출판이 이어졌다. 1959년 3월 생각사에서 처음으로 펴낸 <새 시대의 전망>은 반응이 좋아지면서 1979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게재하여 몇 달 만에 5쇄까지 찍었다. 기왕에 발표했던 글을 묶은 책이다.

이에 앞서 1969년 1월 칼릴 지브란의 번역서 <예언자>가 삼중당에서, 역시 번역한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이 1976년 5월 한샘문화원에서 출판되었다. 1978년 10월 휘문출판사가 <씨알은 외롭지 않다>, 1979년 4월 동광출판사가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1985년 11월 한길사가 산문을 모은 <들사람 얼>을 각각 펴냈다. 이들 책에는 중복된 내용이 많아서 독자들을 실망시켰다는 평도 따랐다. 휘문출판사는 1989년 “나의 인생관” 시리즈 10권을 편찬하면서 함석헌의 책을 <씨알은 외롭지 않다>라는 제목을 달아 펴냈다.


주석
11> 함석헌,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 5~6쪽, 삼민사, 1982.
12> 앞의 책, 315~316쪽.
13> 함석헌 외, <현대의 선과 퀘이커의 신앙>, 2~3쪽, 삼민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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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2 08:00 김삼웅

 

 

5공 시대에 잡지와 가진 인터뷰는 <월간 마당>이 처음이었다.
1981년 5월에 갓 창간한 잡지였다. 앞 장에서도 인용한 바 있는 퀘이커 관련 회견이 중심이었다. 인터뷰어는 “꿋꿋한 허리, 정정한 목소리, 조리 있는 말은 80대 노인을 장년처럼 느끼게 한다”고 적었다. 이 잡지 25~37쪽에 실린 회견문 중에서 ‘발문’을 소개한다. 당시 함석헌의 정신을 살필 수 있다.

“꼭 기독교에만 진리가 있다든지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야.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스스로 절대화해서 우리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하죠.”

“기독교가 찾는 하나님이란 자리를 노장(老莊)이 말하면 도(道)라 하지 않겠는가, 그걸 관념적으로 분석하면 다를 지 모르지만, 믿는 입장에선 그 자리가 같아.”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될려면 기독교인을 통해서 해야될 것인데 이 사람들이 이렇게 썩어가니 어떻게 해야될지! 그들이 도무지 이렇게 무식한 짓을 할 줄 몰랐어요.”

“이 도교(道敎)가 평화주의야요. 우리나라 선비사상도 그렇고, 단군신화에 전쟁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주의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다가 압박을 받으면서 비겁하게 달라져 버렸어.”

“진리가 다수에만 있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한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는데, 이런 뜻에서 퀘이커에서는 다수 가결이 없어요. 전원일치제지요. 절대 서두르지 않고 토론을 충분히….”

“쓸데 없는 곳에 돈을 가장 많이 들여 하는 게 전쟁이니 최고의 사치지요. 실제로도 사치 생활과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기업 유지 위해 전쟁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 전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젊은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을 만한 인격이 솔직한 말로 한 사람도 없다면 이것은 참 걱정 아닙니까? 재목은 길러야지 내 생각과 다르면….”

“난 흑백논리가 아주 싫어요. 이 우주의 본의가 뭔고 하니, 온갖 꽃과 수만 가지 식물, 곤충들만 보더라도 다원의 세계지요. 다(多)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물었다.

“함 선생님을 비난한 책을 최근 서점 주인들이 진열하지 않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건 그러라고 그래요. 내버려 두라고 그래요. 나는 믿으니까. 하나님 일 아닌 것 없다고 생각하는 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걸 누가 어떻게 하겠나, 무슨 까닭이 있어 그러시갔디. 내 잘못이 없다는 것 아니야, 있기야 있지만…. 이런 것을 내가 말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한국의 지성에 대한, 도덕에 대한 시험인지도 몰라요.
(주석 9)

당시 정보기관의 후원으로 제작된 <위선자 함석헌> 등의 책을 서점 주인들이 판매를 거부하였다. 이런 경우는 찾기 드문 현상이었다. 함석헌은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이만큼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함석헌은 1983년 5월에는 <신동아>에서 언론인 최일남과 인터뷰하였다. 5공체제에서 제도권 언론과는 쉽지 않았던 인터뷰였다. 최일남은 3년 전에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질문과 답변 몇 대목을 뽑았다.

- 민족주의가 왜 뒤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근거는?
◇ 한 민족에도 우리 편이 있고 우리 편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문제도 세계적으로 해석해야지 민족주의만으로 풀어가서는 안됩니다. 물론 민족 자체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내셔널리즘만 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민족주의만 내세우는 걸 보면 안타까와요.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만 가지고는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어요. 세계 인류가 같은 운명으로 나가야 합니다. 민족은 영원한 것이니까 그걸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나,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기본이 민족에 있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찬성할 수 없어요.

- 우리 민주주의의 수준을 어떻게 보십니까?
◇ 맞아요. 자꾸 가르쳐야 합니다. 의식이 박약해요. 여기에는 언론의 힘이 큰데… 우리는 고려 이후부터 그랬습니다. 국민의 기운을 키워주어야 하고 이것은 정치의 양심입니다.

- 야인이란 말은 저같은 속물에게는 멋있게도 들립니다.
◇ 멋이란 것이 있나요. 우리나라는 껍데기만 보니까 그럴지 몰라도, 이상주의로 보는 게 옳습니다. 좀 경지를 높이자면 엄자릉(嚴子陵)이나 허유 소부(許由 巢父) 같은…. 그와 관련해서 한 마디 할 것은, 나는 굉장히 간소한 생활을 내세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 때로 좌절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살아오시는 동안에 말입니다.
◇ 마음은 약한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극복이 됩니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나는 절대 긍정주의자입니다. 살고 싶다고 살고 안 살고 싶다고 안 살수 있습니까. 어떻든 살아야 하니까. 좌절까지는 모르지만 힘껏 살아오고 있습니다. 정신 가다듬고 목숨 있는 한은 말입니다.

- 함석헌, 그는 평생 돈과는 인연이 먼 사람으로 보인다.
◇ 그래요. 돈 모을 줄 모르지만 생각도 안해봤으니까. 그 대신 나는 아끼는 사람입니다. 천성이 그래요. 물건을 아끼는 사람입니다. 내게 돈은 없고, 돈이 나를 거쳐갈 뿐이지요. 1928년부터 38년까지 10년 동안 선생 노릇을 한 후로는 줄곧 무직자로 있었는데, 내 수중에는 무슨 형식으로든지 돈이 들어왔다가 나를 거쳐 나갑니다. 따라서 마음은 자유로와요. 살아가는데 걱정 안해요.

- 얼마 전 함옹의 조카되는 분이 분명히 함옹을 가리키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낸 일이 있다.
◇ 조카도 아닙니다. 괜히 그 놈이 그러는 거지. 개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에요. 책 보지도 않았습니다. 보나마나 그까짓거….

- 생애를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 내 마음에 차지는 않지만 후회는 안해요. 고통이 많으나, 그것은 어느 정도 적응해서 이겨나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어서도 그렇겠으나, 노장자(老莊子) 사상의 도움이지요. 그분들도 우리 같은 처지를 겪으면서, 그 가운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를 터득한 분들이지요. 속된 얘기로 초탈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문제가 나와도 상관없어요. 자기 마음의 자유를 안 잊으니까. 그런 인생관은 어느 정도 되어 있어요. 감히 됐다 안 됐다는 말을 할 수 없을지 모르나, 어떤 사람이고 사람이 무섭다는 생각은 안 해요.
(주석 10)

함석헌은 1982년 1월 30일 YMCA 강당에서 열린 간디 34주기 추모강연회에서 작심하고 전두환 정권을 비판했다. “내란음모라고 왜곡된 광주사태는 반드시 진실이 규명되고 바로 잡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개석상에서 5공비판은 이것이 최초의 발언이 아니었는가 싶다.

이 해 함석헌은 26년간 살았던 원효로 4가 70번지의 집에서 아들이 사는 도봉구 쌍문동으로 이사하였다.
낡은 원효로 집을 혼자 관리하고 지내기가 어렵다. 쌍문동 집은 1985년 8월 28일 의문의 화재로 평생 아끼던 책과 자료가 몽땅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함석헌은 이 해 10월 퀘이커 세계협회의 초청으로 멕스코 종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과 캐나다를 다시 방문했다. 워싱턴 수도 장로회에서 <정치와 종교>, 워싱턴 한인교회에서 <그리스찬의 사명>, LA한인교회에서 <새사람>을 주제로 각각 강연을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는 일본 와세다 교회에서 <한국의 민중운동과 나의 걸어온 길>이란 주제의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두번째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추천되었다. 행운의 여신은 끝내 그를 비껴갔다. 그의 꿈은 15년 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주석
9> <월간 마당>, 1983년 8월호, 인터뷰어 한용상.
10> <신동아>, 1983년 10월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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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1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절망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시국의 참담함에 절망하고, 자신을 나락으로 빠뜨리려는 정보기관의 음모에 비관하면서도, 자책을 거듭하였다. 잡지가 강제로 폐간되고, 언론이나 학계 어디를 둘러 봐도 의분이 보이지 않는 삭막한 환경이었다. 그런 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고전을 강의하고 씨알들의 모임에 달려갔다.

<씨알의 소리> 강제 폐간 이후 함 선생님의 글이나 근황도 매스컴에서는 일체 보도금지 되었으나, 함 선생님은 노자(老子) 모임, 장자(莊子) 모임, 성서모임, 부산모임 등 정기집회와 용기를 가지고 선생님께 초청이 오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말씀을 계속하시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선생님을 연금, 도청, 미행 등 각종 방법으로 선생님의 입을 봉하려고 온갖 탄압을 계속했다. (주석 6)

5ㆍ17쿠데타 세력은 5ㆍ16선배들의 판박이처럼 정치정화법을 만들어 구정치인들을 묶고 양심적 지식인, 언론인들을 추방하면서 5공권력을 구축했다. 광주학살의 잔혹상은 가끔 외국(인)을 통해서나 알려질 정도로 철저히 통제되었다.

1981년 초 오산학교에서는 동문들이 모여 함석헌을 동창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89년 2월 숨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함석헌은 1987년 10월 제11회 인촌 언론상을 받았는데, 상금 1천만원 전액을 오산학교에 기증하였다. 3월에는 몇 지인들이 YWCA 강당에서 80회 생신 강연회를 열어서 <되돌아보는 나의 일생>을 주제로 1시간 여 동안 강연하였다. 8월에는 퀘이커 모임을 원주에서 갖고 요한복음을 풀이하는 여름 수양회에 참석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온갖 음해가 나부껴도 함석헌은 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59년에 이미 다짐했던 길이었다.

장담은 못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걸이를 놓지 않으련다. 삼일운동이 몰아쳐 내세워준 이 걸음 늦추지 않을 것이다. 부자는 뚱뚱해 앉았을는지 모르고, 세력 있는 자는 자가용 자동차 안에서 바아크샤처럼 드러누웠는지 몰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걸으련다. 장안 길거리를 두리번거려도 내가 주워가지라고 떨어진 금덩이는 없을테니, 나는 가난한 순조선종 틈에 끼어 뒤도 돌아볼 것 없이 걷고 싶다. 영원히 영원히 빠르나 급하지는 않게, 뚜벅뚜벅 걸으나 느리지는 않게, 길이길이 걸었으면! (주석 7)

정치변혁기가 되면 어김없이 변절자가 생긴다. 정치인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이래 계속되어 온 악습이었다. 잦은 정세의 격변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정치인, 지식인들의 신념과 절조가 낮은 까닭이다. 함석헌은 3ㆍ1운동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한 이래, 이 길을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반제, 반공, 반독재의 길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981년 1월 동광출판사는 <함석헌 수상록 바보새>를 펴냈다.
기왕에 발표되었던 글을 묶어 낸 것이다. <안창호를 내놔라>, <남강 선생님 영 앞에>, <농촌을 살려야 한다>, <늙은 이의 옛날이야기>, <큰 도둑 작은 도둑>, <역사의 격전지를 찾아서>, <내가 맞은 8ㆍ15>,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예수의 비폭력 투쟁>, <간디의 참모습>, <벤들 힐의 명상>, <여자 한 사람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있다>등이 실렸다.

5공 초기의 암담한 상황에서 비록 지난 글이라도 재생하여 씨알들에게 읽히자는 출판사의 뜻이었다. 기획 의도는 적중하여 짧은 기간에 몇 쇄를 찍을 만큼 반응이 좋았다.

함석헌은 1982년 가을 퀘이커 교인들의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였다.
펜실베니아주에서는 젊은날의 스승이었던 우찌무라의 일화가 남아 있던 레딩을 찾았다. 연말에 귀국하였다.

1983년 5월 5일 좀 이색적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장소는 수유리 안병무 교수의 뜰이다. 신랑은 시인 고은, 신부는 이상화 교수, 주례는 함석헌이었다.
1979년 11월 24일 YMCA강당에서 통대 대통령선출 저지를 위한 위장 결혼식과는 달리 이번에는 정식 결혼식이었다. 신랑 고은은 당시 50세의 만혼, 주례 함석헌은 84세의 고령이었다. 함석헌의 주례사는 길기로 이미 소문이 난 터였다. 이날 주례사도 장장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신랑ㆍ신부나 결혼식 장소나, 하객이나 모두 시대와 불화하는 처지였다. 주례는 모처럼 할 말이 많았을 것이고, 듣는 하객들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고은은 오래 전부터 함석헌을 무척 존경하였다.
50 중년에 장가를 들면서 함석헌에게 주례를 맡긴 데서 알 수 있다.
그는 70년대에 <만인보>에서 <어린 함석헌의 스승>을 지었다.

어린 함석헌의 스승

어린 함석헌
평안북도 정주 서당훈장
붓글씨 쓰는 시간
훈장은 일어서서
엎드려
글자 한 자 한 자 쓰는 학동을 살폈다.

먹 확실히 갈고
붓 확실히 꼬나잡은 것도
공부라

훈장이 뒤에서 학동의 붓 낚아챈다
낚아채지는 놈
네끼 이놈

붓을 그렇게 힘없이 잡아서야
어찌 힘찬 글이 써지겠느냐

왜놈 글씨는 이쁘지만
조선 글씨는 첫째 힘차야 하느니라.
(주석 8)


주석
6> 박선균, 앞의 책, 170쪽.
7> <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전집> 4, 137쪽.
8> 고은 <만인보> 15, 176쪽, 창작과비평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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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20 08:00 김삼웅

 

 

함석헌이 전두환 정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주변의 한 켠에서는 음습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독재시대 공권력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상대에게 사적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독재자들이 즐기는 수법이었다. ‘사적 폭력’에는 암살, 테러, 비리조작, 스켄들 날조 또는 과장 등이 동원되었다.

함석헌에게는 아무리 뒤져봐도 엮을 건덕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아서 재물이나 감투로 유혹할 수도 없고, 재산이 없어서 이를 강탈한 방법도, 잡지 발행 과정을 정보기관이 훤히 꿰고 있어서 세무조사를 해봐야 나올 것이 없었다. 해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는 방법 뿐이었다. 함석헌에게는 마침 그런 ‘헛점’이 있었다.

함석헌의 외조카라는 조순명이 1982년 7월 합동 출판사에서 사생활 문제 등을 담은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운명의 여인>, <나이롱 단식>, <사탄아 물러가라> 등 저주 섞인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는 1965년부터 함석헌에게 “거짓말쟁이”, “색마”, “후안무치” 등 극렬한 용어로 비난해왔다고 한다. 조순명은 이후 1986년에 이 책의 증보판을 펴냈다. 그리고 1992년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 上下>를 홍익재라는 출판사에서 간행하였다.

1986년 증보판을 낼 때에는 초판 때보다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책 제목도 <왠말인가 함석헌>으로 바꾸어서 간행했다. 조순명은 “그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건만, 두번째 역시 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석 2)고 서문에서 썼다.

1982년 <거짓 예언자>가 나왔을 때 함석헌의 주위에서는 이를 전두환 정권 정보기관의 소행으로 치부했다. 그리고 이심전심으로 이 책에 대해 외면하였다. 독자들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의 ‘외도’와 관련한 소문은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자되었고, 본인도 공개석상에서 이를 시인하면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거짓 예언자>들의 내용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김용준 교수의 지적이다.

나는 지난 번에 함 선생님이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는 표현을 쓰기는 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차원에서 하는 소리다. 풍문에 여러 말들이 떠돌았지만 확실치도 않다. 이런 풍문을 여기에 옮겨 놓을 수도 없지만, 다만 씨알농장에서 자진해서 선생님의 취사와 살림살이를 돕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나온 오모 여인과의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일이 있은 다음 이 여인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자기의 은사인 김석목 교수에게 고백한 것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주석 3)

함석헌이 1957년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오모 여인과 관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참회를 거듭했다. 당시 44일 간의 긴 단식 기도에는 이에 대한 반성도 포함되었다. 1960년 9월(30일) 당시 독일에서 공부 중이던 안병무에게 보낸 함석헌의 편지에도 ‘참회’의 내용이 엿보인다.

내가 분명 죄 되는 일을 한 게 있습니다. 벌써 전부터 있던 일이지만 그것이 금년 1월에 와서 가까운 친구들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단식도 그래 했고 글과 말을 그만두고 모임을 중지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 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 선생(유영모-필자)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않거든 또 소식 주십시오. 아아! (주석 4)

함석헌의 이런 ‘외도’를 빌미로 조순명은 줄기차게 ‘외삼촌’을 비방하고 다녔다.
<거짓 예언자>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면서 <웬말인가 함석헌>에 이어 <함석헌과 한국 지성들>을 두 권으로 묶어 펴냈다. 이를 두고 함석헌과 오랜 교분을 가졌던 김용준은 ‘정보기관의 후원’이라 지적한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할 수 없지만 함 선생님에게는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정보기관의 후원까지 받아가면서 그는 당시 민주화운동의 선봉에서 주야장천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함석헌을 마치 희대의 색한이나 되는 듯 비난하는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출판하여 화제를 모은 일이 있다.

이 책을 낸 출판사는 일확천금을 노려 초판을 5만부나 찍었다. 그러나 당시 시민운동으로 불매운동이 벌어져 이 책은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말씀하시면서 불매운동을 일으킨 젊은이들에게 고마움과 흥분을 감추지 못하시던 함 선생님의 모습을 나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주석 5)

한국현대사에는 독재자가 적대시하는 인물들에 관한 각종 위서(僞書)가 끊이지 않았다.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의 <시역의 고민>, 김대중을 음해한 함윤식의 <동교동 25시>, 최근 김근태를 고문한 이근안의 책, 그리고 <거짓예언자 함석헌>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별개로 함석헌의 도덕적 일탈행위는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비판의 대상이다. 도덕성의 상징인 재야 지도자의 위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일생일대의 오점이고 실수였다. 그는 80회 생신 자리를 비롯 몇 차례 공개석상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였다.


주석
2> 조순명, <함석헌과 한국지성들 上>, 홍익재, 1997.
3> 김용준, 앞의 책, 126~127쪽.
4> 앞의 책, 127쪽, 재인용.
5> 앞의 책,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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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5장] 살육의 5공시대, <씨알의 소리> 또 폐간

2013/02/19 08:00 김삼웅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다.
외상으로 들여온 민주주의가 4ㆍ19혁명으로 많은 시민ㆍ학생들의 피를 흘렸지만, 5ㆍ16도벌꾼들의 도끼질을 당하면서 지체아가 되었다. 긴 세월 학생, 민주인사들의 수혈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민주주의의 가녀린 묘목은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새 순이 돋고 부활하는 듯 보였다.

장장 18년의 군부독재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이제 민주주의시대가 오는 것으로 알고 환호하였다.
학생과 노동자들의 시위가 없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유신잔당의 퇴진과 악덕기업의 처벌을 주장하는 정당한 요구였다. 여전히 신군부의 계엄사령부가 언론을 검열하고 있었으나 긴 세월 움츠렸던 기자들도 활력을 찾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릴만큼 화창난만하다. 생명이 약동하여 만화백초가 다투어 피어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5월은 4월을 대신하여 ‘잔인한 계절’로 바뀌고 있었다. 5ㆍ16쿠데타 때문이었다. 다시 정치의 계절 5월을 맞은 국민은 지난 폭압의 세월보다 새 시대에 희망을 걸었다.

간혹 외신에서 불길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보도관제로 일반 국민은 전두환 일당의 음모를 까맣게 몰랐다. 야당 정치인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근거없이 낙관론을 폈다.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 창간 10주년 기념행사차 5월 16일 제주에 머물고 있었다.
서남동 교수와 제주학생회관에서 강연을 마치고 숙소에서 5ㆍ17전국계엄 확대조치 소식을 들었다. 사실상 전두환의 군사변란이었다. 5월 17일 자정에 서남동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정보원들에 의해 연행되고, 함석헌은 이날 오후에 서울 자택에 연금되었다.

신군부는 5월 초순부터 이른바 ‘충정작전’이란 구실로 충정부대의 서울 투입을 17일 이전에 이미 완료시켰다. 그리고 광주에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부대를 은밀히 파견했다.

치밀하게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신군부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했다. 정치활동의 중지와 옥내외 시위금지, 언론의 사전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등 비상계엄령이었다.

이어서 18일 새벽에는 김대중ㆍ김상현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 등 거물급 26명을 구속하고, 김영삼을 자택에 연금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 관련자 수십명도 이날을 전후하여 구속하였다. 5ㆍ17군사반란이 자행된 것이다.

5월 18일부터 광주시민들이 군사변란에 저항하자 신군부는 학생,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정권찬탈에 나섰다. 사망 240명, 행방불명 409명, 부상 2052명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신군부는 이미 소집 공고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수도군단 30사단 101연대 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헌법에 규정된 비상계엄령의 국회통보 절차조차 밟지 않은 채 사실상 국회를 해산시켰다. 헌정유린이고 국가변란이었다.

신군부는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면서 권력을 도득하고, 이땅에서는 18년 전의 5월보다 더 잔혹한 5월이 반복되었다.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되풀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두 번씩이나 비극으로 반복되었다. 함석헌은 위험을 무릅쓰고 5월 26일 광주항쟁의 현장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가누기 어려운 분노를 삼켜야 했다.

7월호 <씨알의 소리>에는 분노에 떨리는 손으로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제목은 <治人事天莫若人-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데는 아끼는 것만한 것이 없다>를 썼다.

옛날 두목지(杜牧之)란 사람의 아방궁부(阿房宮賦)라는 글이 있습니다. 명문이라고 이름이 높습니다. 내용인 즉 진시황이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그것이 옳은 이치로 된 것이 아니고 강제로 억지로 된 것이므로 그것을 위압으로 천하 민중의 기운을 죽임으로써 하려고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는데, 몇 날이 못가고 망했다.

그 원인이 뭐냐? 스스로 옳은 일을 하지 않고 악으로 억지로 했기 때문이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에 가서 누구나 보는 사람이 책을 덮어놓고는 긴 한숨을 쉬고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한 절이 있습니다.(한문 생략)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말도 못하고 감히 노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외로운 한 지아비(진시황) 마음이 날로 갈수록 교만하고 완고하게 되었구나
(그렇지만 그것이 도리어 천하 인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어) 이곳 저곳서 반군이
일어나 아우성을 치게 되어, 어떤 군대를 가지고도 깨칠 수 없다던 함곡관이
그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구나! (후략)

욧점을 말한다면, 씨알 하나에 있습니다. 씨알 사랑하면 나라 될 것이고,
씨알 사랑 아니하면 진시황만 아니라 그 누구도 다 오래갈 수 없고 훗 사람이
불쌍히 여길 것 뿐일 것입니다.
(주석 1)

제95호(1980년7월호)

무서운 글이다. 함석헌은 광주시민 학살과 민주헌정을 짓밟는 전두환을 진시황에 비유하면서 반드시 망하는 날이 있을 것임을 예고한다. 계엄령의 서릿발치는 5공 초기에 쓰인 글이다. 5ㆍ16때 <5ㆍ16을 어떻게 볼까?> 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검열에서 무사했다. 무식한 검열관들이 놓친 것이다. 옛날 고사를 끌어와 현실을 비판한 함석헌의 전략이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7월 31일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언론통폐합의 조치로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씨알의 소리>를 폐간시켰다.
1970년 4월 창간하여 통권 95권을 발행하고, 1970년 5월의 폐간 이후 두번째 당한 폐간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약된 인쇄소가 아니라는 이유라도 댔지만 전두환은 그런 저런 이유도 없었다. 막무가내 막가파식이었다. 함석헌은 망연자실의 상태에서 영구독자 및 정기독자들에게 구독료 환불의 통지를 보냈으나 대부분의 독자들은 잡지의 운명과 함께 환불은 거부하고 받아가지 않았다. <씨알의 소리>는 죽여도 ‘씨알’은 죽이지 못한 것이다.


주석
1> <씨알의 소리>, 1980년 7월호,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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