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TV 1989 가요대상 - 1989년 12월(19891230)
한돌 - '터'

저 산맥은 말도 없이 5천년을 살았네
모진 바람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왓네
저 강물은 말도 없이 5천년을 흘렸네
온갖 슬픔을 다 이기고 이 터를 지켜왔네

설악산을 휘휘돌아 동해로 접어드니
아름다운 이 강산은 동방의 하얀 나라
동해 바다 큰 태양은 우리의 희망이라
이 내 몸이 태어난 나라 온누리에 빛나라

자유와 평화는 우리 모두의 손으로
역사의 숨소리 그날은 오리라
그날이 오면은 모두 기뻐하리라
우리의 숨소리로 이 터를 지켜나가자

한라산에 올라서서 백두산을 바라보며
머나먼 고향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하구나
백두산에 호랑이야 지금도 살아있느냐
살아있으면 한번쯤은 어흥하고 소리쳐봐라

얼어붙은 압록강아 한강으로 흘러라
같이 만나서 큰 바다로 흘러가야 옳지 않겠나
태극기에 펄럭임과 민족의 커다란 꿈
통일이여 어서 오너라 모두가 기다리네

불러라 불러라 우리의 노래를 그날이 오도록
모두 함께 부르자 무궁화 꽃내음
삼천리에 퍼져라 그날은 오리라
그날은 꼭 오리라



노래를 찾는 사람들 -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 박혜정 작사, 송숙환 노래

- 1987년 10월 1회 정기공연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 사이로 해가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음-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노래를 찾는 사람들 첫 공연 / 김형민

1987년 10월 13일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앞은 때아닌 장사진이 쳐졌다. 대개 젊은 대학생들이었던 장사진의 면면에는 9할의 설렘과 1할의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공연을 보기 위해 모여든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공연에서는 몇 달 전만 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불리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노래들이 선보일 예정이었다. 물론 대학가 술집에서나 동아리방에서야 목 터지게 부른 노래들이긴 했지만 그 노래들을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 같은 시내 한 복판에서 ‘공연’의 형태로 만나게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생소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통로까지 꽉꽉 들어차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관중들은 팜플렛을 보면서 또 한 번 마음이 일렁인다. 어느 야학의 교가로 지어졌던 ‘그루터기’ , 4.19로 죽어간 넋들을 위한 노래 ‘진달러, 밥 딜런의 클래식 ‘바람만이 아는 대답’ 김민기의 ‘친구’, 일본 제국주의자는 물론 그후 여러 집권자들을 성나게 했던 시에 노래를 붙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그리고 김지하의 시에 처절한 곡을 붙인 ‘녹두꽃’ 등등 제목만 보아도 “이 노래를 대놓고 부른단 말이지?” 라는 질문이 새어나올만한 노래들이 줄을 있고 있었는데다 피날레는 합창으로 장식되게 짜여져 있었다 한돌의 ‘터’, 그리고 요즘은 한나라당 연찬회에서도 부른다는 소문이 있는 ‘광야에서’ 그리고 87년 당시 부르기만 해도 목이 메어 꺽꺽거리는 사람이 많았던 노래 ‘그날이 오면’까지.

원래 "노래를 찾는 사람들" 즉 노찾사는 대학 노래패 출신들이 만든 노래모임 새벽을 모태로 했다. 지하 아닌 지하에서 유통되는 노래를 생산하고, 현실과 떨어진 사랑 타령만이 아닌 생생한 삶의 노래와 진실의 소리의 작은 새암이었던 그들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드디어 지상으로 분출되어 나온 것이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콘서트 한 번 해 보자.”

하지만 아무리 6월 항쟁 뒤끝이라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노래모임 새벽의 이름을 대놓고 내걸기에도 찜찜했다. 그래서 당국이 봐도 무난하고 까탈 잡히지 않을만한 사람들로 공연 팀을 구성했다. 잠깐 ‘새벽’ 활동을 했었던 가수 김광석을 비롯하여 역시 새벽 출신이거나 노래운동을 했던 학교 선생님, 은행 직원 등이 합류했다. 단적인 예로 ‘노찾사’ 초대 대표로서 무대 인사를 했던 사람은 한국은행 대리였다.

공연이 시작됐다. 첫 곡부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라기보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대지를 꿰뚫은 깊은 뿌리와 내일을 드리고선 바쁜 의지로 호롱불 밝히는 이 밤 여기에 뜨거운 가슴마다 사랑 넘친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맷등마다 그날 쓰러져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네 빼앗기겠네......” 한때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바로 거리에서 연행되어 머리 깎여서 군대로 끌려가기도 했고 학교 안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는 이유로 강당 밖에서 대공계 형사가 주먹을 부르쥐고 서 있기도 했었다.

공연 팜플렛에 등장하는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라는 노래의 작사자의 사연은 보다 특별했다. 그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서울대 국문과 83학번 박혜정이 그였다.

“누워 쉬는 서해의 섬들사이로 해가질 때 눈앞이 아득해 오는 밤

해 지는 풍경으론 상처받지 않으리

별빛에 눈이 부셔 기댈 곳 찾아

서성이다 서성이다 떠나는 나의 그림자 음음음음

언제나 떠날 때가 아름다웠지

오늘도 비는 내리고 거리의 우산들처럼 말없이 돌아가지만

아아아아 사람들이여 떠남이 아름다운 사람들이여.”

시인 김수영을 좋아하던 국문학도, 엄한 아버지 탓에 MT 한 번 가지 못했던 모범적인 여대생. 휴학을 해서라도 끔찍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녀에게도 86년은 어김없이 송곳처럼 찾아왔다. 어느 날 집회 도중 서울대 원예과 1학년 이동수가 온몸이 불덩이가 된 채 아크로폴리스로 떨어져 내린다. 그 자리에 있던 문익환 목사는 평생 그 일을 가슴에서 지우지 못했거니와 그를 지켜본 사람들에게 그 광경은 머리 속에서 절대로 떼어내지 못할 충격이었다. 한 학생은 도서관에 뛰어들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사람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나와서 싸우자 싸우지 않겠거든 나와서 구경이라도 해라.”

그날 박혜정도 울면서 돌을 들었다. 용기 없음을 스스로 질책하던 한 젊은이의 폭발이었고 참전할 수 밖에 없었던 전쟁의 발발이었다. 그날 그녀는 평생 처음 외박을 하고 며칠 뒤 한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된다. “절망과 무기력, 이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하게 빼앗김의 방관, 덧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더 이상 죄지음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부끄럽다. 사랑하지 못했던 빚 갚음일 뿐이다.” 그녀는 유서에서 이렇게 썼다. 그로부터 1년 뒤 그녀의 시는 노래로 살아나 객석을 메운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사연을 싣고 공연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원래 전태일 추모곡으로 만들어졌던 ‘그날이 오면’으로 공연은 끝났지만 관객들은 당연히 앵콜을 부르며 떠날 줄을 몰랐다. 그때 등장한 것이 공연 중 ‘녹두꽃’으로 사람들을 홀렸던 김광석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이 산하에’ 1절은 갑오농민 전쟁, 2절은 3.1운동 3절은 북만주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이 장중한 노래는 김광석의 미성에 실려 새처럼 가볍게 사람들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노래는 승리를 노래하지 않았다.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었고 ‘피에 물든 깃발’의 처참함이었고 ‘붉은 이 산하에 이 한 목숨 묻힐 수 있는’ 막막함이 그득했다. 하지만 관중들도 노래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런 과거가 어제까지의 일이었고, 박혜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1987년 10월 13일 오늘 그들이 이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자신들의 앞에서 펼쳐지는 노래 자락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했다. 그것은 자신들이 쟁취한 자유였고, 또 바로 그들의 노래였기 때문이다.

언뜻 오늘을 둘러 보면 그날 노찾사가 부른 노래들은 흘러간 옛 노래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삶이 바닥에서부터 무너지고, 고단하고 성마른 삶을 비빌 언덕이 필요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입을 열 때, 그 노래들은 또 다른 생명력으로 우리 귓전을 때릴 지도 모른다. 1920년대 이상화가 노래한 ‘빼앗긴 봄’이 1980년대에도 슬프게 열린 것처럼.

https://www.facebook.com/88sanha/posts/3098967416815089




위스퀴다르(Üsküdar)


우리나라 50년대 후반에서부터 30년간이나 유행했던 잊을 수 없는 노랫가락을
우리는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Üsküdar)에서 만나게 된다.
터키의 민요로서 애창되는 Üsküdar'a Gider İken (위스퀴다라 기데르 이켄 - 위스퀴다르 가는 길에)는
오스만제국 시절에 관리를 사모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를 노래로 읊은 것이라고 한다.


아시아쪽에 위치한 위스퀴다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반사되는 햇빛이
도시를 황금으로 빛나게 하여 일명 "황금의 市"라 불렀다.
소아시아의 모든 도로가 여기서 끝나 소위 아시아의 땅 끝인 이곳을
오스만 제국의 왕들은 모스크와 대상들의 숙소로 장식했고
그 당시만 해도 아시아쪽 메카 참배객들은 매년 그들의 순례 여행을 이곳에서 시작했다.


이스탄불 유럽쪽이 로마~파리~런던까지 가는 오리엔트 특급의 출발지라면
이곳은 소아시아를 횡단하는 바그다드철도의 시발점이다.

유럽 근대사에서 위스퀴다르는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1854년 이곳에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크림(Krim)전쟁의 부상자를 치료했다.


Üsküdara Gideriken Şarkısı. / 에일리


“Uskudar’a gideriken aldida bir yagmur (위스퀴다라 기데리켄 알디다 비랴 무르)”
대충 이렇게 귀에 들린 이 노래를 초중학교 시절 뜻도 모르고 따라서 흥얼거리다가
외국민요로 학생 애창곡집에 가사와 악보가 수록되어 배운 기억이 있다.

이 곡은 터키의 민요인 《Kâtibim》(카티빔, '나의 서기' 라는 뜻)으로
연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고 있는 노래다.

오스만투르크 시절, 위스퀴다라의 세관원이 재상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야 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정기선.
이들의 애절한 사랑을 그린 노래가 ‘위스퀴다라’라고 한다.


참르자 (Çamlıca) 언덕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아시아 지역 위스퀴다르(Üsküdar)에 있다.


텔레비전 송신탑을 중심으로 조성된 공원이지만  터키인들 사이에 섞여 산책을 하거나
카페 등에 머물러 여행 중 지친 몸을 잠시 쉬어 가기 좋은 곳이다.




참르자(Çamlıca) 언덕에서 보는 이스탄불과 보스포루스 해협.
해발 650m로 이스탄불의 많은 언덕 중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으로 꼽히는 참르자 언덕은 전망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참르자는 터키의 이스탄블 전체를 볼 수 있는 높은 곳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참르자 언덕 (Camlica Hill)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궁전에서 바다로 바로 통하는 문이 있다. 궁전 입구를 기준으로 동문.

술탄이 배를 타기 위한 정박장이었다.




보스포러스해협과 돌마바흐체 궁전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의 유럽 쪽 해안에는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궁전 중 하나가 서 있다. 

이 궁전은 자신의 하렘과 궁정, 그리고 외국의 군주들과 사신들을 영접할 넓은 응접실을 갖춘 건물을 원한 

오토만 투르크의 술탄 아브뒬메시드 1세를 위해 지어졌다. 


술탄의 전속 건축가였던 가라벳 아미라 발리얀(1800~1866년)은 이러한 기능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웅장하고 압도적으로 큰 궁전을 세웠다. 

발리얀이 채택한 스타일은 정교한 신 바로크 양식이었다. 

2층 높이의 포르티코와 풍부한 조각은 웅장함과 정교하고 값비싼 장식을 결합하는 효과를 낳았다.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 쇠퇴하던 때 국력쇄신을 위해 베르샤이유 궁전을 본떠 초호화판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너무 막대한 건축비 지출로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게 만든 비운의 궁전이다..

중앙홀에 설치된 세계에서 2번째 큰 4톤에 달하는 샹드리에와 난간을 모두 크리스탈로 장식한 수정계단

상상을 초월하는 그 호사스러움은 과연 오스만제국의 호사스러움의 극치이다.


이 궁전은 특히 시계 궁전으로 유명한데 모두 160여 개에 달하는 갖가지 시계가 있고....

더 재미있는 것은 이전의 대통령이 이곳에서 집무를 보다 사망하였는데 그 시간에 맞추어 모두 9시 5분으로 맞추어져 있다.




20세기 들어서 터키가 공화국이 되면서 돌마바흐체는 국가 지도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이스탄불 관저가 되었다. 

1938년 무스타파 케말은 돌마바흐체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곳에 묻혔다. 

오늘날 터키에서 돌마바흐체는 무스타파 케말에게 바치는 기념비와도 같다.





옥으로 된 계단 난간


대리석으로 된 세면대

마블 특유의 무늬에 섬세한 부조까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돌마바흐체 궁전 세면대


돌마바흐체 궁전 세면대


돌마바흐체 궁전 목욕탕


돌마바흐체 궁전 목욕탕


돌마바흐체 궁전 목욕탕


대리석으로 된 화장실


지도 문양의 카페트


카페트


카페트


카페트


카페트



칼과 권총 등


금으로 만든 술탄의 갑옷



화려한 금제 식기세트

오스만투르크의 말기 술탄 압둘마지드에 의해 지어진 이 궁전은 역대 왕족들이 사용하던 화려한 식기들로 유명하다

















돌마바흐체 궁전 세람르크


화려한 석조 건축물로 세워진 이 궁전은 원래는 목조 건물이었으나, 

1814년의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인 압둘마지드에 의해서 1856년에 재건되었다. 

1843년 착공하여 1859년에 완공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였다. 

유럽에서 보내온 수많은 현상품과 호화롭게 꾸며진 사방의 벽들을 보면 당시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 후기 6명의 술탄이 일부 사용했다.


세람르크는 술탄이 공무를 보고, 각국의 대사를 접견하던 장소로 남성만 출입이 가능하였다. 

하렘은 왕실의 가정으로 술탄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으며, 

터키의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이 곳을 관저로 사용하였다가,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집무실에서 사망하였다. 

그 때문에 집무실과 침실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궁전 내부는 카페트가 깔려 있어서 비닐 덧신을 신어야 입장할 수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계단


화려한 석조 건축물로 세워진 이 궁전은 원래 목조 건물이었으나 

1814년 대화재로 대부분 불타고 31대 술탄 압둘마지드 1세가 1856년에 재건했다. 

1843년에 착공해서 1859년에 완공했으며 베르사유 궁전을 모델로 했다. 


유럽에서 보낸 수많은 현상품과 호화롭게 꾸며진 사방의 벽들을 보면 당시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 후기 술탄 6명이 일부 사용했다.

말발굽 모양의 층계는 크리스털 난간으로 유명하다. 


돌마바흐체 궁전 계단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 계단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 계단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 황제의 방 대형홀


돌마바흐체 궁전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남자들의 구역인 세람르크(Selamlik), 

술탄의 가족과 여자들이 거주하는 구역인 하렘(Harem), 

행사가 치뤄지는 커다란 홀.


세람르크는 술탄이 공무를 보고 각국 대사를 접견하던 장소로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하렘은 왕실 가정으로 술탄과 가족이 살았으며 

터키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도 이 곳을 관저로 쓰다가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집무실에서 죽었다. 

그 때문에 집무실과 침실의 모든 시계는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황제의 방에 걸린 화려한 샹들리에


홀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선사했다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샹들리에가 있는데 그 무게는 자그마치 4톤이 넘는다.

웅장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를 올려다 보니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가이드의 설명으로 홀 위층엔 오케스트라와 사절단이 자리하고, 

아래 층에 한 가운데에는 왕이 앉고, 그 맞은편은 신하와 남자들의 자리였다.

재미있게 들었던 것은 왕보다 높은 사람은 없으므로 왕의 자리 위에는 2층이 없다는 것.

또 여자들은 왕의 맞은편에 있는 창가에서 내부를 구경했는데 

남자들이 왕의 맞은편에 앉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 볼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그 옛날 성대했던 행사를 상상해 본다.


돌마바흐체 궁전


돌마바흐체는 오스만 제국이 기울어가던 때에 국가의 부흥을 꿈꾸며 지어진 궁전으로 '최대한 유럽스럽게' 지어졌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따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정원에서부터 유럽에서 많이 보던 느낌이 짙게 배어 있다.

모든 역사에서 늘 그렇듯 이 궁전을 짓느라 국가 재정을 많이 탕진해 먹었고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후대 술탄은 여기가 마음에 안 든다며 다른 궁전으로 떠나서 

이렇게 화려하게 지어 놓고도 거의 대부분 비어 있었다고 한다.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는 이스탄불에 오면 늘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가 사망한 곳도 바로 이 돌마바흐체 궁전이다.


황제의 방에 걸린 화려한 샹들리에


압둘마지드 1세 이전 술탄의 궁전인 톱카프 궁전에는 이즈니크 타일과 오스만제국 스타일의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면,

돌마바흐체 궁전은 금과 크리스탈로 장식되어 있다.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14톤의 금이 사용됐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보헤미안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식장에 있다. 


샹들리에는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로 줬다고 전해지나, 

2006년에 영수증이 발견됨에 따라, 대금을 지불한 것으로 밝혀졌다. 

샹들리에의 램프는 750개이며 무게는 4.5 톤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보헤미안 및 바카라 크리스탈 샹들리에 컬렉션이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돔 천장


거대한 규모가 풍부하고 복잡한 장식과 결합한 건축물. 

수많은 방 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방은 36미터 높이의 돔과 늘어선 기둥들, 아치들로 꾸민 무도회장이다.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은 계단 홀인데, 이 중 말발굽 모양의 층계는 크리스털 난간으로 유명하다. 

또 끝없이 이어지는 접견실, 화려하게 도금한 개인실, 

그리고 설화석고를 두른 욕실 역시 돌마바흐체의 자랑거리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돔 천장


황제의 방에 걸린 화려한 샹들리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선사받은 750개의 전구로 장식된 샹들리에가 '황제의 방' 천장에 매달려 있다. 

또한 터키 건국의 아버지인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8년 서거할 때까지 사용했던 방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방의 시계는 케말 아타튀르크를 기리기 위하여 지금도 그가 사망한 시각인 9시 5분을 가리키고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


돌마바흐체 궁전은 19세기 중반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하여 지어졌다.

돌마바흐체란 '가득찬 정원'이라는 뜻인데 해변이었던 자리를 메우고 정원을 조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세계에서가장 화려한 궁전이기도 하다.

돌마바흐체를 꾸미기 위해서 무려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수백 개의 방과 연회장은 유럽풍의 화려한 가구와 장신구로 꾸며져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


돌마바흐체 궁전 2층 접견실 탁자와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 기둥


화려한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


돌마바흐체 궁전 내부 화려한 샹들리에


돌마바흐체 궁전 기둥


돌마바흐체 궁전 2층 접견실






아타튀르크 초대 대통령 침실


1938년 11월 10일 아침 9시 5분에 아타튀르크가 숨을 거둔 방

그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시계를 9시 5분에 멈춰 놓았다.




[영상 EBS 세계테마기행]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돌마바흐체 궁전(터키어: Dolmabahçe Sarayı) 위치


19세기 중엽, 서구화를 통해 국운이 기울어 가던 오스만제국의 부흥을 꾀했던 압둘 메지드 1세가 건설한 궁전이다.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다. 

돌마바흐체의 돌마는 터키어로 '꽉 찼다'는 의미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작은 만을 메워서 간척한 곳에 정원을 조성해 '가득 찬 정원'을 뜻하는 돌마바흐체라 불리게 되었다. 

해안을 따라 600m가량 길게 뻗어 있어 '바다 위의 궁전'이라고도 불린다.


원래는 술탄 하흐메트 1세가 휴식처로 쓰던 건물이 있었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31대 술탄 압둘 마지드가 1853년에 대리석으로 새로 궁전을 지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 지은 유럽풍 건축물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앞에 있는 시계탑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축물

1890 ~ 1895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 시계탑은 돌마바흐체 궁전 건설 이후에 추가되었다고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 앞에 있는 시계탑


돌마바흐체 궁전 안내도


티켓박스에 티켓을 사려고 길게 늘어진 줄


티켓은 궁전만 보는 것과 술탄과 가족들이 살았고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관저로도 사용되던 

하렘을 같이 보는 티켓으로 나누어서 판다. 

대게 가이드 투어는 시간상 궁전만 보여주고 말기 때문에 

가이드 투어보다는 개별 여행으로 꼭 하렘까지 보는 것을 추천한다.  

많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렘까지 볼 경우 2시간 이상은 생각해야 한다.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입구


원래 이 곳은 오스만 제국의 함대가 정박했던 곳이며, 17세기에 매립되기 시작,

제국의 정원으로 사용되면서 "돌마바흐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구 열강에 밀려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면서 탄지마트(개혁)가 추진되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압둘 마지드 1세가 서구화를 지향하는 의미에서 베르사유 궁전을 본따 지은 것으로, 1856년 완공되었다.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입구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Palace) 입구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은 화려하게 치장한 조각들로 유명하다.


양각문양의 화려한 대리석 벽면이 인상 깊다.


양각문양의 화려한 대리석


돌마바흐체 궁전의 문


돌마바흐체 궁전의 문


넓은 정원을 지나야 돌마바흐체 궁전 본전이 있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건설되었고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도 프랑스식이다.

궁전 앞에 정원을 배치하고, 한가운데 연못이 있고, 연못 가운데는 조각상이 있는 것이 베르사유와 똑같다.


돌마바흐체 궁전 분수대


궁전 안으로 들어가면 백조가 물을 뿜고 있는 아름다운 분수가 있다.

터키 이스탄불. 19세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유럽 스타일의 궁전이다. 

압둘 메시드 1세가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었다.


돌마바흐체 궁전 세람르크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이 혼재된 돌마바흐체 궁전은 웅장하고 화려하다. 

동양적인 형식미가 돋보이는 톱카프 궁전과 대비되는 서양식 궁전이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건설되었고 내부 인테리어와 정원도 프랑스식이다. 

오스만제국 말기의 술탄들은 톱카프 궁전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현재도 영빈관으로 이용된다.


건물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방 285개, 홀 43개, 발코니와 목욕탕이 각각 6개 있다. 

규모는 톱카프 궁전보다 작지만 눈길을 끄는 볼거리가 많다. 

궁전 건립에 금 14톤과 은 40톤이 사용되었으며 샹들리에 36개, 크리스털 촛대 58개, 명화 60여 점, 

시계 156개, 화병 280개 등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었다. 

실내를 장식한 인테리어 소품과 가구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 각지에서 수입한 것이다. 

바닥에는 최고급 수제 양탄자가 깔려 있다.


한편 돌마바흐체 궁전의 모든 시계가 9시 5분을 가리킨 채로 멈춰 있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의 사망 시각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었는데 아타튀르크는 1938년 11월 10일 9시 5분, 집무 중에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아타튀르크의 서거일이나 주요 국경일에는 아타튀르크가 머물던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방을 특별히 공개하기도 한다.


[영상 KBS 걸어서 세계속으로] 돌마바흐체 궁전, 황금 샹들리에 (Dolmabahce Palace, Golden Chandel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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