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st of D. Kennedy, Jacques Lipschitz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5 

 

자크 립쉬츠(Jacques Lipschitz 1891~1973)는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으로 입체파 조각가였다.
어린 시절 립쉬츠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공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909년 파리로 이주하면서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매료되어 
현대 미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12~13년 러시아 제국군에서 잠시 복무한 후 립쉬츠는 파리로 돌아왔다. 
1907년 멕시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는 파리에서 립쉬츠를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에게 소개했다. 
립쉬츠는 입체파 그림의 다색 프리즘을 시뮬레이션 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작업했다.
립쉬츠의 기념비적인 작품 중 하나인 "Bust of D. Kennedy"(1964~1965)가 여기 전시되어 있다.

 

Jacob and the Angel, Jacques Lipschitz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5 

예술적 혁신이 절정에 달한 1920년대에 자크 립쉬츠는 

투명한 조각이라고 불리는 추상적인 형태를 실험했다. 
나중에 그는 더 역동적인 스타일을 개발하여 인물과 동물의 청동 구성에 효과를 적용했다.
1924~25 년에 립쉬츠는 귀화를 통해 프랑스 시민이 되었고  

베르테 키트로서(Berthe Kitrosser)와 결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그는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정착했다.
1941년 뉴욕으로 이사했을 때 립쉬츠는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입체파 스타일로 제작된 조각 "Jacob and the Angel"(1931)은 예술에 대한 립쉬츠의 열정을 반영한다. 

 

Loneliness in the Closet 옷장 속의 외로움, Ilya Kabak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7

일리야 이오시포비치 카바코프(Ilya Iosifovich Kabakov 1933~)는 우크라이나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Dnipropetrovsk)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모스크바에서 30년 동안 일했고 현재는 미국 롱아일랜드에서 거주하며 일하고 있다. 
40년 이상의 경력을 통해 카바코프는 어린 시절부터 1980년대 초까지 
그의 삶을 추적하는 방대한 회고록은 말할 것도없고 
다양한 그림, 드로잉, 설치 및 이론적 텍스트를 제작했다.


모스크바 개념주의자이자 전체 설치 장르의 창시자인 카바코프의 방에는 
2004년 작가가 Hermitage에 설치한 작품 "옷장 속의 외로움(Loneliness in the Closet)"과 
"구석에 있는 화장실(Toilet in the Corner)"이 있다. 

 

Toilet in the Corner 구석에 있는 화장실, Ilya Kabak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7

카바코프는 은밀하고 친밀하며 개인적인 영역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벽을 만들고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한다. 
작가는 어렸을 때 옷장에 오랫동안 숨어서 앉아 있거나, 
소련의 현실에서 화장실에서 숨어 있었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duard Steinberg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49

 

이 홀은 1960~1980년대 비공식 예술의 리더이자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두 번째 물결의 예술가인 스타인버그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러시아 종교 철학의 아이디어를 수행한 기하학적 추상 작품들은 
작가의 미망인 갈리나 마네비치가 2014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기증했다.


에두아르드 스타인버그(Eduard Arkadevich Steinberg 1937~2012)는 

모스크바 출생으로 러시아의 화가, 철학자 및 활동가였다.
그의 아내 갈리나 마네비치(Galina Iosifovna Manevich) 역시 

러시아의 미술 평론가, 작가 및 수필가이다.
스타인버그는 처음에 생생한 모델과 풍경을 그렸고 

나중에는 "형이상학적 정물"로 전환했다.


1960~1980년대에 스타인버그는 예술 표현의 자유와 

기본 인권을 지지하는 소련의 반체제 운동에 참여했다.
스타인버그는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의 명예 회원이 되었다. 

 

Dmitry Alexandrovich Prig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51

 

드미트리 프리고프(Dmitry Aleksandrovich Prigov 1940~2007)는 러시아 작가이자 예술가였다. 
프리고프는 소련 시대에 반체제 인사였으며 1986년에 잠시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프리고프는 십대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의 스트로가노프(Stroganov) Art Institute에서 조각가로 훈련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시립 공원의 조각품을 디자인하고 건축가로 일했다. 

프리고프와 그의 친구 루빈스타인(Lev Rubinstein)은 공연을 

예술의 한 형태로 보는 1960년대에 시작된 개념 미술학교의 리더였다. 
그는 또한 깡통에 구절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2005년까지 거의 36,000 개의 시를 썼던 다작의 시인이었다. 
소비에트 시대 동안 그의 시는 지하에서 유통되었다. 
공산주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은 공식적으로 배포되기 훨씬 전에 

émigré 간행물과 Slavic 학술지에 널리 게재되었다.
1987년부터 공식적으로 출판 및 전시되기 시작했으며 1991년에는 작가 연합에 가입했다. 
그는 1975년부터 예술가 연합의 회원이었다.

 

Dmitry Alexandrovich Prigov Roo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Hall Number 351

모스크바 개념 주의자이자 예술가, 시인, 조각가인 드미트리 프리고프의 방은 
그의 감독 하에 예술가의 스케치에 따라 지어진 설치물을 보관하고 있다. 
흑백 방은 의자와 일반적인 로프 울타리가 놓여 있고 빈 프레임이 벽에 걸려 있고 
그 옆에 거대한 레이블이 있는 박물관 홀과 비슷하다. 
태블릿에는 "마티스입니다", "렘브란트입니다", "말레비치입니다", 

"레오나르도입니다." 라고 씌여 있다.
드미트리 프리고프는 예술에 대한 인식의 자유와 부족, 예술가 이름의 역할, 
"순수한 묵상"의 불가능성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금속 장식 전시관
이곳에는 오래된 유물부터 비교적 최근의 작품까지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금속 장식들 - 크기도 작은 것부터 큰것까지 다양하게 있다.

 

알렉산더(Alexander) 3세와 마리아 표도르브나(Maria Feodorovna )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시계

 

The Imperial Crown of Russia

 

The Imperial Crown of Russia

 

Rothschild Fabergé Egg

2007년 11월 Christie's 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경매된 Fabergé Egg는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최초의 러시아 소유 박물관인 바덴바덴에 있는 
파베르제 박물관의 창립자 알렉산더 이바노프가 구입했다.

27cm 높이의 Fabergé Egg는 190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파베르제(Fabergé) 수석 작업장인 마이클 퍼킨(Michael Perchin)이 만들었으며, 
겨울 궁전의 유명한 오르몰루 자동 기계 공작 알에서 영감을 받은 시계와 
자동 기계를 모두 통합한 3개의 대형 Fabergé 달걀 중 하나였다.

 

유리병 장식

 

유리병 장식

 

조각

 

조각

 

Tsar Alexander III와 Tsarina Maria Feodorovna의 대관식, 1888. by Georges Becker. 
oil on canvas, 108 x 156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1883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 (Tsar Alexander III 1845~1894)와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Maria Feodorovna 1847-1928)의 대관식 장면을 프랑스 출신의 화가 
조르주 베커(Georges Becker 1845~1909)가 1888년 그린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조르주 베커(Georges Becker 1846~1909)는

1845년 5월 18일 파리에서 부르주아 멜키즈 가문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성향과 의심할 여지없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파리 줄리안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로마노프(Romanovs) 황제 가문의 초청으로 

그는 오랫동안 러시아에 살면서 제국 황실의 명령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 

조르주 베커는 알렉산더 3세와 마리아 페오도로프나 황후의 대관식을 
몇 년 동안 작업하여 1888년에 완성했다. 
알렉산더 3세와 마리아 페오도로프나의 대관식은 알렉산더 2세 황제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지 1년 반이 지난 1883년 5 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르주 베커는 1909년 가을 파리에서 죽었고 그곳에 묻혔다.

 

인증샷

1896년 5월 14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by Laurits Tuxen. oil on canvas. 

덴마크의 화가이자 조각가 라우리츠 툭센 (Laurits Tuxen 1853~1927)의 작품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제14대 황제이자 러시아 역사상 마지막 군주이다.
1868년 당시 알렉산드르 2세의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르 3세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1년 부친의 즉위와 함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으로 평가된다. 
사적으로는 교양 있고 예의바른 신사였지만, 황제로서는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다 러시아 혁명 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사적으로 그는 매우 교양있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다. 


그는 당대 러시아 고위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프랑스어를 비롯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발레 애호가였다. 
문학가 중에서는 니콜라이 고골을 높게 평가했으며 말할 때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작품 속 내용을 곧잘 인용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러시아 역사 전문가인 올랜도 파이지스(Orlando Figes) 교수는 
"니콜라이 2세가 러시아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동시대 영국의 국왕이었다면 
모두의 사랑을 받는 모범적인 군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선량한 인품과 교양, 사교술 등 입헌군주제 국가의 이상적인 군주의 자질을 모두 갖추었던 셈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니콜라이 2세는 유약하고 무능하면서도 독선적인데다 
심한 반유대주의자에 정치적으로 보수반동으로 전제정을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유약하기만 해서 주변 말 잘 듣는 예스맨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텐데 유약함과 독선이라는 
상반된 성향이 교대로 튀어나와 강단있게 결단을 내려야 할 때는 우물쭈물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전문가들의 조언의 수용해야 할 때는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처리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리더로선 정말 짜증나는 유형이었다. 
전형적인 능력 없으면서 부지런하기만한 지도자상으로 잘 하지도 못하면서 
주변 말 안 듣고 자기 독단으로 밀어붙이다 모두 말아먹었다.

당대 러시아 정계에는 세르게이 비테를 비롯, 표트르 스톨리핀처럼 유능한 관료들이 존재했으며 
니콜라이 2세 또한 스톨리핀에게 나름대로 힘을 실어주었지만, 
'나름대로 밀어주는 수준'으로 러시아를 되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스톨리핀의 암살 이후로는 황제의 독선을 제지하면서 개혁을 밀어붙일 만한 인사들이 없었다.

러일전쟁 패전 이후 벌어진 경제난과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의 

잘못된 대처로 니콜라이 2세는 국민의 지지를 잃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진퇴양난에 처한다. 
니콜라이 2세가 직접 러시아 제국군 사령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국내 정치는 독일인이며 빌헬름 2세의 이종사촌 누이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맡았는데, 그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 때문에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라스푸틴은 황후의 신임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각종 괴상한 정책들을 제안하여 국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모두 라스푸틴을 싫어했고, 황제의 여동생 올가 여대공, 황후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타 

대공비 같은 황족들까지 오빠와 여동생에게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했지만,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는 듣지 않았다. 

당연히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져 갔다. 


니콜라이 2세 본인은 권력을 휘두르는 라스푸틴을 황후처럼 

맹신하진 않았지만 아내와의 충돌이 두려워 막지 않았다. 
또한 농민 출신인 라스푸틴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방탕한 행동 또한 백성들의 한 단면이라 생각하고 딱히 제지하진 않았다. 
자녀들과 지나치게 접촉하고 강간 의혹까지 터지며 라스푸틴을 
잠시 유배보내긴 했지만 상황을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소련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니콜라이 2세 재위 기간의 말기 

러시아 제국을 호의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니콜라이 2세에 대해 동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대부분 
'선량한 암군' 혹은 '죄 없던 자녀들까지 묶어서 잔혹하게 죽인 것은 잘못된 일이나, 
제정의 몰락 자체는 본인이 자초한 일'이라고 본다.

 

1896년 5월 14일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by Laurits Tuxen. oil on canvas.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은 우리의 역사와도 관계가 있다.
고종과 친러파는 아관파천 후 조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러시아에게 확실히 요청하고 싶어 했다. 
전 세계 외교사절이 집결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축하 사절로 모스크바에 간 민영환 일행은 비밀리에 니콜라이 2세를 만나 
조선을 러시아 보호국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차르가 약속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 이때 제안했다는 내용은 공개된 적이 없어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민영환과 러시아 외무상 로마노프 간에 체결된 각서 내용은 당시 수행원인 
윤치호가 쓴 자신의 일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당시 러시아는 조선의 가치를 만주 방위를 위한 완충지대 정도로 생각했다. 
일본에게 요긴한 조선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조선에 얽매이는 것보다 자신들의 국익에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의 그런 저의가 드러나는 것은 고종이 환궁하고 나서 1년 여 지난 
1898년 4월 25일 일본과 맺은 로제-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일본과의 다툼에 

한 발 물러서는 모습으로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조선에서 러일 간 대립이 종식되고 일본의 독점적 지위가 굳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에 극도로 의존한 조선의 경제 구조, 만주 지역 경략의 매력이 러시아로 하여금 
한반도에서의 끈을 놓게 만든 요인으로 보인다. 
이해 9월 일본은 경부선 부설권을 재차 획득했다.

 

Napoleon's first wife, Joséphine, Empress of the French. 1801. 
by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oil on canvas, 178 x 17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나폴레옹의 아내 조세핀의 초상화, 화가 프랑수아 제라르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1770-1837)
조세핀 드 보아르네 (Joséphine de Beauharnais 1763-1814)는 마르티니크(Martinique)에서
재력이 부유한 크리올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첫 결혼으로 1794년 7월 28일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된 
자작 Alexandre de Beauharnais 장군의 아내였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한 후 조세핀은 몇 달 동안 수감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1796년 그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과 재혼했다. 
1799년에 그녀는 말메종 궁전 (Chateau de Malmaison)의 소유자가 되었다. 

 

Napoleon's first wife, Joséphine, Empress of the French. 1801. 
by François Pascal Simon Gérard, oil on canvas, 178 x 17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Napoleon Bonaparte on the Bridge at Arcole, 1796~7. by Antoine Jean Gros. 
oil on canvas, 134 x 10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프랑스 화가 앙투안 장 그로스 (Antoine Jean Gros 1771-1835)가 그린
Arcole의 다리 위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on the Bridge at Arcole, 1796~7. by Antoine Jean Gros. 
oil on canvas, 134 x 104 c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03. 

전투 장면과 공식적인 초상화를 결합한 이 그림은 화가

앙투안 그로스 (Antoine Jean Gros 1771-1835)의 개인적인 인상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캠페인에서 보나파르트와 동행했으며 일어난 모든 일을 목격했다. 
그로스(Gros)는 나폴레옹의 이미지에서 신고전주의 예술의 

전형적이고 강한 개인의 이상을 구체화했다. 
그 모습은 영웅의 결단력과 용감함을 강조하는 긴장된 시선으로 
차갑고 차분하면서도 긴장된 표정으로 묘사되어 있다.

 

Peter the Great, 1838. 복제품

 

Peter the Great, 1838. by Paul Delaroche, oil on canvas. 130,6 x 97 cm.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 (Paul Delaroche 1797~1856)의 1838년 작품

 

표트르 대제의 옷

 

캐서린 대제(Catherine II)의 승마 초상화, 복제품

 

Catherine II on horseback, 18th century. by Vigilius Ericksen. oil on canvas. 358 х 388 cm. 

 

군복과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Equestrian portrait of Elizaveta Petrovna with a little arapchon, 1743. 
by Georg Cristoph Grooth. oil on canvas. 

 

Equestrian portrait of Elizaveta Petrovna with a little arapchon, 1743. 
by Georg Cristoph Grooth. oil on canvas. 

독일 출신 화가 조그 크리스토퍼 그루쓰(Georg Cristoph Grooth 1716~1749)의 
흑인 하인과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승마 초상화

 

Portrait of Paul I of Russia, by Andrey Filippovich Mitrokhi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파벨 1세(Pavel I Petrovich 1754~1801)는 로마노프 왕조의 9번째 군주로, 
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이다. 
 파벨의 출생에 대해선 파벨은 원래 표트르 예카테리나 부부의 

자식이 아니라, 예카테리나와 그 애인인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근거는 없다.

파벨은 아내인 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가 죽자 
1776년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와 재혼하였다. 
1783년 어머니에 의해 가트치나의 영지에서 살게 된 그는 그 곳에 작은 궁정을 갖고 
영지를 관리하며 사병을 훈련시키고 정부 개혁을 계획하는 일에 몰두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파벨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으나 갑작스레 서거하여 1796년 파벨이 제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파벨 1세는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살해되었고 따라서 표트르 3세를 계승할 권리를 
그녀가 침해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해 왔었다. 


그는 황태자인 동시에 정적으로서 항상 어머니의 감시에 시달려 왔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혐오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총애하던 신하와 측근들을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여 
국내정치와 대외정치의 정책 전반을 모두 거부하였다. 


이러한 과거의 쓰라린 경험의 영향으로 1797년 그는 법령을 발표하여 
제위 계승법을 맏아들 상속의 원칙으로 확립했다. 
또한 프랑스의 혁명 사상과 투쟁을 더욱 거부하였고, 국내로 들어오는 
모든 사상 서적을 금지시켰으며 프랑스풍의 옷도 입을 수 없게 했다. 
이렇게 그의 통치 방식은 엄격하고 혹독한 규제로 일관되었다.

 

Portrait of Paul I of Russia, by Andrey Filippovich Mitrokhi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그러나 파벨 1세는 음울하고 변덕이 심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가 시행한 여러 정책들 간에 일관된 노선은 하나도 없었다. 
예를 들면 영지 경작을 위한 농노들의 노동 부역 일수를 주 3일로 줄였다. 
이는 사유지에 거주하는 농노들의 강제 노동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서 시행한 정책이었지만, 
반면 과거보다 더 많은 12만 명의 황실령지 농민을 지주 귀족에게 양도하여 
결과적으로 농노의 수를 늘려놓은 식의 정책이 되고 말았다. 


파벨 1세는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귀족들에게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일방적인 충성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1798년 파벨 1세는 프랑스와 맞서는 나라들과 동맹을 맺었고, 러시아의 군대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1799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다시 프랑스를 장악하게 되자 
그는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사실 파벨 1세는 아버지 표트르 3세만큼은 아니지만 약간의 정신 질환자의 기질이 있었다. 
파벨 1세가 사람들의 외모만 보고 판단해 잘 생겼다는 이유로 
무능한 사람들을 관료로 세우는 일이 있었고, 귀족들의 특권 중 
여러 개의 특권을 박탈하면서 귀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801년 3월 23일 새벽, 파벨 1세는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버닝젠 백작의 개인 소유 군인으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파벨 1세의 침실에서 들어와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에 파벨 1세는 군인들에게 크게 화를 냈고,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파벨 1세를 처형하였다. 
일설에는 이에 아들 알렉산드르 1세가 동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알렉산드르 1세 초상화

화가를 알 수 없는 초상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0번째 군주.
본명은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Alexander Pavlovich Romanov 1777~1825)

파벨 1세와 뷔르텐베르크의 소피 도로테아(러시아 이름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예카테리나 2세는 외아들 파벨을 싫어하여 그가 제위에 적합한 후계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였고, 손자인 알렉산드르에게 제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유주의 교육을 시키며 자신이 직접 데려다가 길렀다.

 
알렉산드르는 그런 그녀의 뜻을 거절하였으나, 예카테리나 2세에 뒤이어 황제가 된 파벨 1세가 
그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자 반란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할 당시의 러시아는 표트르 1세 때부터 추구해 온 
서구화의 결과로 누적된 문제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러시아 전통 사회와 정치체제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공격과 비판의 대상으로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제군주제가 서구화를 통하여 국력을 강화시키고 행정기구의 개선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동안 계몽주의라는 서구의 사상까지 습득되어, 
입헌정치와 권력층의 특권을 제약하는 평등과 자유라는 개념 등이 등장하였다. 
특히 농노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가장 드세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의 악이라고 여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어 기존 질서와의 마찰이 불가피해지자 
알렉산드르 1세는 결국 러시아의 전통을 계승하고 수호하는 쪽을 택하였지만 
처음에는 국민에 대한 무마책과 더불어 시대의 흐름에 따르려고 노력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러시아 내부의 정치질서를 바로잡는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행정기구의 창설을 서둘렀다. 
이에 알렉산드르 1세는 그의 젊은 시절 친구인 노보실체프, 스트로가노프, 차르토리스키 등으로 구성된 
비(非)공식위원회를 조직하여 여러 차례 회의를 하면서 대대적인 행정개혁을 구성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즉위 이후 1805년까지 비공식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농노제의 폐지를 검토했다. 
그러나 당시 행정부와 일반 대중은 이런 개혁에 대해 아직 이해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된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다. 
먼저 농노제의 폐지가 가져올 귀족층의 약화를 현재 실권을 쥐고 있는 귀족들이 허락할 리가 없었고 
더욱이 황제 자신도 자신이 특권을 포기하는 자유주의 물결을 쉽게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때문에 회의는 자주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1805년 급기야 

프랑스와의 전쟁 발발로 러시아의 개혁은 일단 보류되었다. 
따라서 농노제는 무수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861년까지 존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르 1세의 집권 초기 몇 해 동안에는 착실한 성과도 있었다. 
원로원이 부활되어 최고의 사법 및 행정기관으로 바뀌어 황제의 권한을 어느 정도 견제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결실은 근대적인 관료제의 도입이었다. 
이것은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폐지된 합좌제(콜레지아)에 대치된 것이다. 
1802년부터 몇 년 동안 각 부서를 1명의 장관이 책임지는 
현재의 체제와 흡사한 관료제도를 확립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법무부, 외무부, 재무부, 국방부, 상업부 그리고 문교부가 있었으나 
나중에 상업부가 폐지되고 경찰부가 새로 구성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초상화

나폴레옹 포위망
1801년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끝없는 야심을 두려워하여 
1804년 영국이 주도하는 대(對)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전쟁에 직접 참가하였다. 
당시 러시아가 반(反)프랑스 세력에 가담하게 된 것은 영국과의 경제적 유대,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전통적 우호관계,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전통적 적대 감정 등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로 알렉산드르 1세는 오래 전부터 나폴레옹을 위험 인물로 생각해 왔으며, 
그 나름대로 유럽의 새로운 질서 체계와 연관지은 몇 가지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805년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의 연합군이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 

가담하여 프랑스와 동맹국인 에스파냐와 충돌하면서 대접전이 벌어졌다. 
그 해 12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은 아우스테를리치(Battle of Austerlitz)에서 

프랑스군과 격돌하여 참패를 당했다. 


오스트리아는 아우에르슈테트 전투(Battle of Auerstadt)에서 큰 타격을 받고 전쟁을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계속 전쟁을 수행하여 1806년 프로이센 왕국을 새로운 동맹국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예나(Battle of Jena)에서 프랑스에게 무참하게 격파당했고 
러시아도 프리틀란트(Battle of Friedland)에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알렉산드르 1세는 재빨리 정책을 변경하여 나폴레옹과 강화협정을 맺고 
1807년 6월 25일 틸지트에서 프로이센과 함께 프랑스와 화해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결국 프로이센을 2등국으로 격하시켰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러시아는 동유럽 거의 대부분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으며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유럽 대륙의 최강대국으로 대두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지지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맞서면서 
프랑스와 잠정적 화해 관계로 안심하고 기타 상대국들과 전쟁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국경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었으며 1803년과 1810년 사이에는 
지배권이 서부의 그루지야 지방에까지 이르렀다.

대륙 봉쇄(Continental System)
그러나 프랑스의 대륙봉쇄령 발표와 함께 양국은 다시 한 번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봉쇄령은 유럽의 무역을 마비시켜 
유럽 각국은 프랑스에게 많은 불만을 나타내었다. 
더욱이 러시아는 농업국가라서 매년 많은 양의 곡물을 영국으로 수출해 왔기 때문에 
대륙봉쇄령으로 수출선이 끊기자 대지주인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밖에도 알렉산드르 1세와 나폴레옹 사이에 서로를 위험시하고 적대시하는 
개인적인 감정과 양국의 외교적 팽창 다툼 등이 1812년 평화를 깨는 주된 요인이 되고 말았다. 
또한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에게 있어 러시아 제국의 광활한 영토가 
탐이 났을 뿐더러 점점 남진해 내려오는 러시아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1812년 6월, 드디어 프랑스는 러시아를 침공했다. 
프랑스군 15만 명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2개국의 원군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을 개시했다. 
병력을 각각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국경 지역으로 나누어 총공세의 형태를 취했다. 
한편 러시아는 서둘러 오스만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스웨덴 및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서부 국경 지대에 있던 20만 명의 군사들을 

3개 부대로 나누어 프랑스군과 맞서게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병력 수나 경험 면에서 러시아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생각했으므로 
러시아의 방어선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판단했으나 그의 판단은 완전히 빗나갔다. 
알렉산드르 1세의 계획은 장기전으로 초기에는 방어전을 펴고 
서서히 서부에서 동부쪽으로 후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해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는 1차적으로 스몰렌스크를 근거지로 프랑스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장교와 병사들, 그리고 시민들이 모두 단결하였다. 

고육지책으로 강구한 것이 초토화 작전이었다. 
프랑스군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도록 

후퇴를 거듭하면서 식량과 가옥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그리고 항상 일부 병력을 매복대로 남겨두어 프랑스군을 기습공격했다. 
그 결과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2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러시아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총사령관으로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을 새로이 임명했다. 
수보로프의 제자이자 그의 추종자인 쿠투조프는 후퇴 작전에 동의를 했지만 
일방적인 후퇴를 원하지는 않았다. 
특히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접근해 오자 그는 옛 수도인 모스크바를 

싸움 한번 하지 않고 나폴레옹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스크바의 서쪽 보로지노 촌락을 방어기지로 

설정하고 나폴레옹과의 대결전을 계획했다. 
보로지노의 지형적 조건은 병력 이동로가 매우 좁기 때문에 
프랑스군이 종대로 공격할 수밖에 없음을 이용하기로 생각한 것이다.

쿠투조프는 12만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최대한 적군의 이동로에 근접시켜 
후방을 기습 공격하도록 방어대형을 편성했다. 
그래서 프랑스군이 동요되면 즉시 전방에 배치된 600여 문이 넘는 대포로 포격했다. 
이렇듯 철저한 방어망에 부딪힌 프랑스군은 진격을 쉽게 하지 못했다. 


1812년 9월 5일에 벌어진 야간전투가 도화선이 되어 쌍방의 전투는 치열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프랑스군을 공격하고 후퇴하는, 이른바 치고 빠지기 전법을 폈고 
프랑스군은 전형적인 공격전법을 사용했다. 
따라서 시간이 갈수록 프랑스군의 피해가 늘어났다. 
나폴레옹은 일단 공격을 중지시키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 포 사격을 공격 신호로 하여 총공격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이 러시아군의 왼쪽 방어선을 공격하자 러시아군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막았다. 
프랑스의 8번째 공격으로 러시아의 바크라치온 장군이 치명상을 입게 되자 
방어전이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왼쪽 방어선이 점령당했다. 


그러나 프랑스군도 피해가 상상외로 컸기 때문에 더 이상 진군할 수는 없었다. 
보로지노 전투는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격전이었다. 
또 하루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4만여 명이나 전사했으며 
프랑스와 동맹국 측에서는 6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나왔다. 
바크라치온 공작과 그 밖의 유명한 지휘관들이 죽거나 다치는 등 사망자 중에는 
다수의 장군과 수천 명의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러시아 진영의 중앙과 왼쪽은 프랑스군에게 

격파당했지만 오른쪽은 끝까지 버텨냈다. 
그러나 쿠투조프는 전투를 중지하고 모스크바의 남동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9월 14일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모스크바 정복이 곧 러시아의 정복이라고 생각했던 나폴레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나폴레옹은 크레믈린 궁전을 총본부로 삼고 
전군을 분산시킨 뒤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몇시간 후 모스크바에 큰 화재가 일어났다. 
삽시간에 불길이 번져 크레믈린 궁전에까지 옮겨 붙었다. 


프랑스군은 필사적으로 진화작업을 폈으나 사방에서 일어나는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모스크바 대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로는 
프랑스 병사들이 민가에 들어가 식량을 약탈할 때 불이 붙은 등불을 그대로 두었다가 
민가에 옮겨 붙게 되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의 수비 책임자인 로스토프친이 
프랑스를 괴롭힐 목적으로 죄수들을 석방시켜 곳곳에 방화했다는 설이다.

프랑스군이 애써 고생하며 겨우 정복한 모스크바가 하루도 안 되어 
거의 불타 잿더미가 되었으므로 병사들이 숙영할 집도 없게 되었고 식량도 계속 모자랐다. 
게다가 추위는 예년에 비해 더욱 혹독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이제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니 알렉산드르 1세가 
화평을 청해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그동안 추위는 더욱 극심해져 
프랑스군 내에서 얼어죽는 자가 속출했다. 
거꾸로 부하를 보내 알렉산드르 1세에게 강화를 구했으나 묵살당했다. 


사태가 갈수록 나빠지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마침내 1개월 만에 퇴각을 결정했다. 
계속되는 혹한과 배고픔에 떨던 프랑스 병사들은 죽은 전우의 옷을 빼앗아 입고 
죽은 말을 뜯어먹으며 퇴각을 했다. 
그러한 때에 기회를 노리던 러시아 기마병들이 출동하여 기습작전으로 협공을 가했다. 
또한 곳곳에서 농민 파르티잔이 들고 일어나 앞길을 막고 공격해왔다.

나폴레옹은 가능하면 선발대가 이미 통과한 길을 피하고 
물자가 있을 만한 다른 길을 택하여 퇴각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눈치챈 러시아군의 기습으로 더욱 곤경에 빠지는 결과를 빚었다. 
결국 더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11월 초에 군대를 해산하고 자유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말 나폴레옹이 본국인 프랑스로 돌아올 때는 
출발 당시 60만 대군 중에 겨우 3만 명의 패잔병이 귀국할 수 있었다.

1814년 러시아군의 파리 입성
1813년에 쿠투조프는 죽었으나 러시아군은 황제를 따라 프랑스군을 계속 추격했다. 
1814년 3월 러시아군은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엘바 섬에 유배되고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격파한 일동 공로를 인정받으며 전후 처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기독교의 정의와 사랑을 내세우며 
신성 동맹을 제창하며 유럽의 복고 반동에 앞장섰다. 
그 부산물로서,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을 양도받아 

폴란드 왕국을 부활시키고 그 왕을 겸인하는 소득도 얻었다. 


1812년의 나폴레옹 격퇴 전쟁은 러시아에서는 ‘조국 전쟁’으로 불린다. 
영웅적인 투쟁으로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고 

1813년~1814년의 원정 싸움에서까지 대승리를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러시아인들의 민족 의식은 급속도로 고양됐다. 
러시아의 작가와 음악가, 화가 등 예술가들은 

조국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어 많은 예술 작품을 남겼다.


대프랑스 전쟁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전 육군 장관 아락체예프에게 

국내 정치를 일임하고 국제 정치에 몰두하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했다. 
아락체예프는 자유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반동 정치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는 흑해 연안의 요양지인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 
워낙 갑작스럽고 비밀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그가 죽음을 가장하여 제위를 버리고 
수도원에 들어가 종교에 헌신하고 있다는 소문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알렉산드르 1세를 자칭하는 가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본부인 사이의 자녀가 어려서 죽어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제위를 이었다.

 

Battle of Borodino, by Peter von Hess, The State Hermitage Museum

유럽 전역을 빨아들이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러시아를 피해갈 리는 없었고, 
우연적이며 필연적인 몇 가지 이유가 얽혀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일으킨다. 
일찍이 없던 초대규모 병력의 침공 앞에 알렉산드르 1세는 군사적 소양이 

사실상 전무함에도 전선의 전술에 사사건건 개입하여 러시아군의 

연전연패에 여러모로 기여하였으나 끝까지 항전한다는 의지만은 굳건했고,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전투에서는 밀리지 않았을지라도 러시아의 광대한 토지와 

극심한 추위, 그리고 제 몸을 갉아먹는 시간 앞에서 결국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원정의 기록적인 실패는 결국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몰락을 앞당기는 한편 
러시아의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실상 끝장나며 

나폴레옹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이 세워진 빈 체제에서 러시아와 알렉산드르 1세는 

'유럽의 해방자'로 일컬어지며 열렬한 환대를 받는다.
군사적 능력이야 어찌됐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라의 지도자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덕분에 수많은 영웅들로 장식된 모스크바 크렘린 궁의 붉은 성벽 앞에 그의 동상도 세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젊어서 따르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를 스스로 깨부수는 모순되는 처지에 있었고 
전쟁 후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극히 보수적인 군주가 되면서 한편 미신에 빠져드는 등
영웅으로 떠받들여진 겉모습과 달리 불행한 삶을 살다가 크림 반도에서 요양 중 사망한다.

 

Parting of Napoleon and Alexander I at Tilsit (copy), Anonymous Artist. 19th century.
oil on canvas. 75 x 87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Parting of Napoleon and Alexander I at Tilsit (original), 1807. 
by Gioacchino Giuseppe Serangeli. oil on canvas.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알렉산더 1 세 : 동맹과 적". 
원작자는 로마 출신 화가 지오아치노 주세페 세란젤리 (Gioachino Giuseppe Serangeli 1768-1852)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by Franz Krüger,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독일 출신 화가 겸 석판가 프란츠 크루거 (Franz Krüger 1797~1857)의 작품 니콜라스 1 세의 초상화.
알렉산드르 1세에게는 아들 없이 딸만 있었던데다 이전 파벨 1세가 제위 계승법을 확립하면서
여성의 황위 계승을 금지하였으므로 그의 막내 동생인 니콜라이 1세(Nicholas I Pavlovich, 1796~1855)가 
새로운 황제 로마노프 왕조의 11번째 군주로 등극한다.

니콜라이 1세는 1796년에 파벨 1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알렉산드르 1세보다 19살 아래였다. 
니콜라이 1세는 체격이 건장하고 외모가 수려하여 귀족적인 위엄을 뿜어내어 
항상 다른 사람을 압도했다고 전해진다. 
이를 뒷받침하듯 ‘유럽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권위에 찬 엄숙한 사람’ 등과 같은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이와 같은 그의 인상처럼 그는 병사들의 복장이나 군대의 훈련 등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제위에 오른 후 먼저 군인들의 제복을 정비할 것을 명령했으며 
심지어 단추의 수까지 지정해 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그가 즉위할 당시 러시아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의 전쟁과 내란 등으로 사회가 불안했다. 
게다가 즉위식 때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나 이로 인해 

군주제가 무너지지 않을까 하며 항상 노심초사했다. 
이러한 본능적인 공포는 그를 공격적인 성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후 혁명 운동 탄압에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의 헌병'으로 불렸다.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by Georg von Bothman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예민하고 의심이 많던 니콜라스 1세는 국가의 모든 기능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여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어갔다. 
니콜라이 1세는 정부의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직접 처리하려 했다. 
국가평의회나 원로원 등의 도움 없이 황제 직속으로 사설 집행부를 만들어 일을 처리했다. 


곧 황제원에 권력이 집중됐다. 
황제와 관련된 문제들을 처리하는 황제원의 단면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제3부는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곧 거대한 비밀경찰기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3부의 제1과는 반(反)정부 조직을 감시했고, 제2과는 종교적 이단행위를 감시하고 위조화폐를 단속했다. 
제3과는 체류 외국인을 감시하고 해외정보를 수집했으며, 제4과는 농촌과 농민의 동향을 감시했다. 
제5과는 문서검열을 담당했다. 
니콜라이 1세는 제3부에서 작성해 올린 보고서를 상세히 훑어보고 사소한 문제까지 직접 지시했다.

그와 더불어 반(反)정부 사사의 유포를 막기 위해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당시 갓 피어나던 러시아 문학도 제3부와 정부에 의해 감시를 받아, 
개작을 강요받거나 작가가 유형 또는 구금을 당하는 예가 비일비재했다. 
교육 역시 반동의 깃발 아래 획일적인 통제 하에 놓였다. 


1828년에 제정된 규칙에 따라, 중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귀족과 관리의 자녀들로 제한됐다. 
그와 더불어 법률학교와 여러 기술전문학교를 세우는 등 

중등교육기관은 꽤 늘었으나, 초등학교는 세우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의 자녀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문맹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대학교육의 강조점도 관료체제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대외정책 면에서도 신성동맹의 정통 이념에 충실했던 니콜라이 1세의 첫째 목표는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를 책임지는 ‘유럽의 헌병’으로서 유럽의 혁명운동을 진압하고 
그 여파가 러시아에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그 영향으로 그의 지배 아래에 있던 
폴란드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1831년 데이비치 장군이 이끄는 
15만 대군을 바르샤바에 보내 무참하게 진압했다. 


그러고는 폴란드에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던 자유와 자치권을 빼앗고 
완전히 러시아의 일부로 편입시켜 버렸다. 
1832년 5월,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라는 세 열강국 간의 회의가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이 런던 회의는 그리스에 안정적인 정부를 성립하기 위해 모인 국제 회의였다. 
이 협상으로 바이에른 왕자 오톤을 임금으로 세워 그리스 왕국이 성립하였다. 
1833년에는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 등과 동맹을 맺고 유럽을 수호할 것을 다짐했다.

 

Portrait of Emperor Nicholas I,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1848년 프랑스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1세는 프랑스와 즉각 외교를 단절하고 
40만 대군을 서부 국경으로 집결시켰으나, 유럽 각국의 냉담한 반응에 군대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1849년에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가 지원을 요청해왔고, 
니콜라이 1세는 기꺼이 군대를 보내 혁명을 진압하고 합스부르크 가를 위험에서 구출해주었다.

유럽의 혁명을 목도한 니콜라이 1세는 국내에서 억압의 강도를 더욱 높였다. 
경찰통치는 점점 더 독단적으로 변해갔고, 개혁의 방도를 찾으려는 시도는 물론 
이견의 표시마저도 금지되었다. 
대학교에서도 입학자격과 교과과정이 더욱 개악됐다. 
매우 경미한 정치범에게도 시베리아 유형이 떨어졌다. 
체제의 충실한 옹호자였던 우바로프 문교부 장관마저도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해임됐다.

이러한 그의 과도한 강경책은 곧 군부에 대한 의존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정치가 거의 대부분 장군들로 구성된 특사에 의존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행정적 공백으로 인한 부패와 혼란이 가중되었다.

1853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다뉴브 강 유역에 주둔 중이던 
러시아 군대를 공격함으로써 크림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어 다음 해에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았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압력을 가해 왔다. 


주변국의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사사건건 방해하는 러시아가 부담스러웠다. 
때문에 러시아는 졸지에 유럽과 맞서 싸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들은 바다를 장악하고 러시아 해안에서 소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기 위해 1854년 9월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동맹국들은 7만 명의 전사자를 내는 큰 희생을 치르면서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를 점령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패배하였고 군사적 ·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1855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Decembrists on Senate Square, Uprising of December 14. 1853. by Vasily Timm. 
oil on canvas, 196 x 12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실패로 끝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1825년 12월, 러시아 제국에서 일부 청년 장교들이 
입헌 군주제의 실현을 목표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은 유럽의 자유주의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서 데카브리스트란 12월을 뜻하는 러시아어 '제카브르'(декабрь)에서 기인한 것으로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자유주의 운동에 위협을 느껴, 
전제 정치를 더욱 강화하게된다.
19세기 전반기 농노제와 전제정치가 계속 존속하여 빈곤한 삶에 빠져 있던 
러시아 제국에 자유주의 사상이 전파되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옹을 추격해 유럽을 원정했던 진보적인 성향의 
청년 귀족들 사이에 자유주의 분위기 영향을 받게된 것부터 시작된다.

 

Decembrists on Senate Square, Uprising of December 14. 1853. by Vasily Timm. 
oil on canvas, 196 x 129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청년 귀족들은 1816년부터 구제동맹이라는 결사를 조직하였으나 

중간에 사상적 차이로 인하여 공화제를 주장하는 남부결사, 

입헌 군주제를 주장하는 북부결사, 연방제를 주장하는 통일슬라브 결사 

등으로 분열되었으나 활동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면서 3주 동안 후계 계승 논쟁으로 

혼란한 공백기가 이어지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부 청년장교들이 

혼란한 기간을 틈타 이를 기회로 봉기를 계획했다. 
이들은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1825년 12월 14일에 봉기를 하게 된다. 
이들은 입헌군주제와 농노제폐지 등 서부 유럽같이 자유주의 사상을 실현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봉기는 준비와 조직이 충분하지 못하였고 실행 직전에 

남부 결사의 지도자였던 파벨 페스텔이 우연한 경위로 체포됨에 따라 

사전에 계획이 니콜라이 1세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에 곧 쉽게 진압되었다. 
임시정부의 권력자가 될 예정이던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공작은 도망쳤다. 
곧이어 봉기를 일으켰던 체르니고프의 연대도 역시 쉽게 진압되어 무너졌다. 

이어서 니콜라이 1세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여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벨 페스텔, 릴리예프, 
카홉스키,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페스트체프 류민 5명이 1826년 7월 25일에 처형당했고, 
31명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Vladimir Bobrinsky 백작 (1853-1877)의 초상화, 1879. by Makovsky, Konstantin. 
oil on canvas. 135,5 x 88,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15.

러시아 이동파 화가 콘스탄틴 마코프스키(Konstantin Makovsky 1839-1915)의 작품
Vladimir Bobrinsky 백작 (1853-1877)의 초상화.

 

Portrait of the palace grenadier M. Kulako, 1915. by Vladimir Alexandrovich Poyarkov
oil on canvas. 79,5 x 55,5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General Staff Building Room 315.

 

화려한 방들

 

[영상] General Staff Building 3 Floor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겨울 궁전(Winter Palace), 바실리예프스키 섬

 

네바 강에서 본 에르미타시 박물관

에르미타시 박물관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① 거울궁전 - ② 소(Small) 에르미타시 - ③ 구(Old) 에르미타시 - ④ 에르미타시 극장
신(New) 에르미타주시 구(Old)에르미타시의 뒷편에 위치해 있다. 
처음에는 소(Small) 에르미타시만 박물관으로 쓰였으나, 차츰 컬렉션이 많아지면서 확장되어 
지금은 구(Old)에르미타시와 신(New) 에르미타시 뿐만 아니라 겨울궁전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까지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고 있다.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국립 에르미타시 미술관(State Hermitage Museum)이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과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에 손꼽힌다.
미술관은 소(Small) 에르미타시, 구(Old)에르미타시, 신(New) 에르미타시, 
에르미타시 극장, 겨울 궁전의 5개 건물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고, 120개의 계단이 있다. 
현재 본관의 일부인 겨울궁전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궁이다.

 

상공에서 본 네바 강과 궁전 광장

1764년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을 수집한 것이 에르미타시의 기원이다. 
본래는 예카테리나 2세 전용의 미술관으로, 프랑스어로는 "은둔지"를 의미하는 
"에르미타시(Hermitage)"라고 하는 명칭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이름이 주어진 배경에는 에르미타시 초기에 굉장히 한정된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기에 왕과 귀족들 간 '은둔자의 집' 이라 불렸던 이력이 있어서 이다.
초기에는 왕족과 귀족들의 수집품을 모았으나, 19세기 말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세계 3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라는 명성에 걸맞게 전 세계 예술품을 골고루 소장한 에르미타시는 
바로크 스타일의 기품있는 궁전으로 제정 러시아 황제의 거처였던 
겨울 궁전과 네 개의 건물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궁전은 원래 이처럼 방대하지 않았지만 표트르 대제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죽은 후 
러시아 황실과 귀족들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 싸움 끝에 제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의 딸 Jason이 오늘날의 겨울 궁전을 건설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에 문화의 황금기를 맞는다. 
그녀는 밖으로 실내 정원이 나 있는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때 그녀는 겨울 궁전을 프랑스어로 은둔지, 인적 없는 방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르미타시(Hermitage)"라고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에르미타시 명칭의 유래이다.

 

상공에서 본 에르미타주 박물관

① 겨울궁전 ② 소(Small) 에르미타시 - ③ 구(Old) 에르미타시 ④ 신(New) 에르미타시  
에르미타시 별관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 

 

에르미타시 박물관 입구

①번 연한 하늘색이 에르미타시 본관인 겨울궁전 입구
②번은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동관 입구이다.
③번은 에르미타시 극장 입구
④번 위-아래 건물이 소에르미타시 입구, 
⑤번 건물이 구(Old) 에르미타시 ⑥번 건물이 신(New) 에르미타시인데 ⑤ ⑥번 신-구 에르미타시를 합쳐 
대에르미타시라고 한다. 위에 조금 진한 색이 구에르미타시, 조금 연한 색이 신에르미타시이다. 
⑤ ⑥번의 입구는 따로 없고 ①번 ④번과 연결된다.

1764~1787년 예카테리나 대제는 궁전 옆에 ‘소(小)에르미타시’와 ‘구(舊)에르미타시’를 건설하고, 
겨울 운하를 따라 그것을 연결해 라파엘 회랑을, 그리고 1783~1786년에 에르미타시 극장을 만든다. 
1799~1851년 니콜라이 황제가 화랑을 하나 추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新)에르미타시이다.

 

궁전 광장에서 본 에르미타시 본관 겨울궁전 입구

에르미타시가 출현한 1764년 당시 베를린의 네고니안트라는 갑부가 
부채 대신 자기의 미술 소장품 225점을 러시아로 가져왔다. 
일찍이 스몰니에 최초의 러시아 여성 학교를 세울 정도로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예카테리나 대제는 서유럽의 고품격 삶의 양식에 비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러시아 귀족들의 생활 문화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부유한 귀족들과 자본가들은 
예술 작품들을 수집하여 개인 화랑에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개인 화랑은커녕 박물관조차 전혀 없었다. 
이에 예카테리나 대제는 황제인 자신부터 화랑을 열기로 마음먹고 
다양한 소장품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그림들을 전시할 곳이 없어 러시아 최초의 박물관인 쿤스카메라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 후 에르미타시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카벤첼레 공작(1768), 
브를리 남작(1769), 크로자 남작(1772), 월 폴 총리(1779), 보뎅(1781), 
나폴레옹의 황후 조제핀(1814) 등의 값진 소장품들을 구입했다. 
그로 인해 에르미타시는 예카테리나 대제 때 이미 
2,000여 점의 예술작품이 소장된 일류 화랑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동관

궁전광장은 러시아 바로크 예술의 진수라고 알려져 있는 겨울궁전 

반대편으로는 카를로 로시(Carlo Rossi)에 의해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반원형의 개선아치를 갖춘 구 참모본부가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장의 중앙에는 1834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47.5m 높이의 알렉산더 원기둥이 서 있다. 


궁전광장은 수많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 날 시위가 있었던 곳이며, 
볼셰비키 통치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행진을 위해 사용된 장소도 바로 이곳이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군주제 옹호자, 반시오니스트 등  
갖가지 종류의 정치적 집회 문화 공연이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 기념물 중 하나인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은 
러시아 제국에서 일한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로시 (Carlo di Giovanni Rossi 1775~1849)에 의해 
설계되고 182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지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개의 개별 건물을 개선문인 기념비로 통합하려는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장엄한 아치는 러시아의 영광과 군사적 승리를 상징한다. 
그것은 겨울 궁전의 중앙 부분과 대칭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다.

 

에르미타시 별관으로 쓰이는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는 니콜라이 1세의 무지로 1,000점이 넘는 작품들이 경매에 나오게 되는가 하면, 
사회주의 혁명 때는 화랑이 아닌 임시정부 회의장소로 사용되기도 하고, 
수도가 모스크바로 옮겨지면서 모스크바 국립표현박물관에 
많은 예술품들이 옮겨가는 등의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국립 에르미타시 박물관으로 명명된 이곳은 현재 
1,020여 개의 방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루빈슨, 
피카소, 고갱, 고흐, 르느와르 등의 명화가 전시되어 있고, 
이탈리아 등지에서 들여온 조각품들과 이집트의 미라부터 현대의 병기에 이르는 
고고학적 유물, 화폐와 메달, 장신구, 의상 등 300만 점의 소장품이 전시되어 있고 
지붕 위에는 176개의 조각상이 있다. 


가장 볼 만한 것은 서구 미술의 전시품으로 러시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터키, 
인도, 중국, 비잔틴, 일본 등 세계의 고대 유물과 예술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고, 
고대 러시아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또 제정시대의 보석과 왕관 등도 지하 보물실에 전시되어 있다.

 

에르미타시 별관 매표소

에르미타시 별관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표를 쉽게 살 수 있는데 이 표를 가지고 본관에 
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에르미타시 입장권은 별관에서 사는게 좋다.

 

참모본부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에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올라간다.

에르미타시 박물관(Hermitage)은 1993년 참모본부 동쪽 건물에  
19세기 및 20세기 예술 작품을 소장하기로 결정했다.  
목적에 맞게 건물을 개조하는 작업은 2014년에 완료되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 박물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 

박물관의 2층에는 상설 전시물인 아르누보 시대 예술품과 황제에게 제공된 
희귀한 선물 컬렉션, 한때 러시아 제국 재무부 건물에 있던 예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입구에 들어서서 2층으로 

3층에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장식 예술과 의상들, 
19세기 프랑스 회화와 조각, 19세기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등 
서유럽 미술 및 18세기 러시아 근위대 박물관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참모 건물에 거주하던 러시아 제국 외교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다. 

 

2층 출입구에 들어서면 예술품을 전시 관리하는 시설물 모형이 나온다. 

참모관 4층은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 컬렉션은 그 기원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과  
그 이후에 적군에게 점령한 영토에서 압수되었으며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작품들은 1995년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칸딘스키(Vasiliy Kandinskiy)와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작품을 포함하여  
혁명 이전 러시아 미술 컬렉션도 있다.

 

처음에는 로마노프 왕조가 수집한 예술품들을 겨울 궁전의 별관에 숨겨놓고 전시하는 것에서 시작했으나
어느새 본관 전체로도 감당할 수 없을만큼 넘쳐 흐른 나머지 2013년부터는 궁전 광장 건너편의
구 참모본부 건물을 별관으로 편입하여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참모본부 건물 (General Staff Building) 내부 에르미타시 별관의 새로운 전시 공간 모형

 

참모본부 건물(General Staff Building)의 안뜰 중 한 곳

 

여러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 Review of General Staff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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