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3 08:00 김삼웅

 

 

 

함석헌은 출생을 들사람으로 시작했다.
옛적부터 푸대접 받고 소외된 땅 평안도 상놈(평민)의 후예로 태어났다. 바탕이 들사람이고 자라나기를 상민들과 함께하였다. 민중정신을 기르는 ‘청산맹호(靑山猛虎)’라는 오산(五山)의 교육이념은 함석헌의 혼과 얼을 키우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이곳에서 참스승을 만나 저항정신이 길러지고 민중과 대화하는 말길(言路)을 배웠다. 청년기에 3.1운동에 직접 나서고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을 겪었다. 그리고 외면하지 않고 저항하였다.

이후 식민지배, 공산주의, 백색독재, 군사독재와 싸우면서 숱한 필화를 겪고, 옥고를 치르고, 온갖 고난을 당했다. 그러나 명저의 저술가가 되었지만 돈을 모으지 못하고, 종교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장로ㆍ신부 ․ 목사가 되지 못하고, 교사 생활을 했지만 교장, 총장을 하지 못하고, 반생을 언론과 함께 하면서도 거대 신문, 잡지의 사주가 되지 아니했다.

80여 년을 살아 온 오늘까지 그는 한번도 벼슬을 한 적이 없다. 권력계층이나 부유층에 끼어 본 적이 없다. 다스리는 자리에 앉아본 적도 없고 ‘가진 자’의 부류에 끼어 든 적이 없다. 그런가 하면 어떤 성직에 있어 본적도 없다. 흔히 그를 ‘종교인’이라고 부른다. 이건 그에 대한 편이상의 호칭일 뿐,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다. ‘씨알’에게 명칭이 붙을수록 씨알스럽지 못한 점을 감안하면, 적어도 겉으로라도 그는 ‘씨알’의 한 상징임에 틀림없다. (주석 5)

함석헌은 ‘겉으로라도’가 아니라 속내가 알짬 씨알이고 들사람이다. 권력은 탐하고 부를 추구하고 종교나 교육계의 자리를 원했다면, 그의 능력이나 성실성과 치열함으로써 얼마든지 성취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들사람이고 씨알정신이기 때문에 세속의 감투나 관직 따위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반면에 그는 어리숙하고 바보스럽고 타산적이지 못하고 처세에 약하고 세상의 물정을 잘 몰랐다. 그는 자신을 우리 말로 바보새, 한자로 신천옹(信天翁), 영어로 알바트로스(allbatros)라고 부르는 ‘바보새’가 되었다. 바보새를 닮았고, 휘호에도 신천을 낙관으로 썼다. 프랑스 <악의꽃>의 시인 보들레르는 가난한 민중, 소외된 자, 고아, 창녀들을 노래하며 그들의 벗이 된 ‘저주받은’ 시인이다.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의 모습을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렸다.

뱃 사람들은 자주 장난거리로
항해의 벗인 양
뱃길따라 미끄러지는 선박을 뒤쫒는
아주 커다란 알바트로스를 붙잡는다.

간판 위에 막 던져진 순간,
이 창공의 임금님은 힘들게 노를 젓듯
조롱을 받으면서
그 큼직한 흰 날개를 질질 끌어댄다.(후략)
(주석 6)

함석헌이야말로 20세기 알바트로스다.
장자, 노자, 제논, 디오게네스, 플로티노스, 두보, 비용, 원효, 양녕대군, 임제, 무학대사, 김시습, 이지함, 김삿갓, 이달, 허균, 이탁오, 브르노, 스피노자, 소로, 셀리, 하이네, 조르주 상드, 애드가 앨런 포우, 보들레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혼과 얼과 행동이 전해지고 합해진 바보새이고 신천옹이고 알바트로스다.

20세기가 첫 시작되는 해에 고난의 한국에서 바보새가 태어난 것은 심상한 일이 아니었다.
20세기 전반기는 일제의 압박에, 후반기는 분단, 전쟁, 독재, 민주화의 고된 전장터의 씨알에게 그는 항상 벗이고 동지이고 교사이고 스승이었다. 고난의 시대에 씨알은 그가 곁에 있었기에, 다른 민족이 1천 년에 겪을까 말까한 일을 1세기 동안에 모두 겪으면서도 미치거나 망하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었다.

독재 권력자들이 미쳐날뛰고, 외세가 국토를 동강내고, 재벌이 미다스의 손이 되고, 언론이 권력과 재벌의 나팔수가 되고, 교수들이 지식난쟁이를 대량생산하고, 종교인들이 물신주의의 바벨탑을 쌓을 때, 그래도 함석헌의 야인 혼이 있어 씨알은 위로 받고, 숨통을 트고, 저항정신을 길러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인 중에서 아주 드물게 세계사적 사상과 철학을 가진 인물이다. 반도에서 태어나 일본 섬나라에서 공부했지만, 그의 사유의 넓이와 깊이는 대륙적이고 국제적이었다.

“함석헌의 씨알사상 속에 아시아의 정신적 유산의 알짬과 성서적 신앙의 핵심이 융합되어 새로운 21세기의 종교사상의 씨앗으로 열매 맺고 있다.”
(주석 7)

함석헌만큼 사상사, 정신사, 철학사, 종교사, 민주주의 역사를 꿰뚫는 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가히 사상의 통섭자이고 철학의 실천자이다. 바보와 노마드는 ‘궁합’이 맞지 않는 관계이지만, 그는 모순의 창과 방패를 바보라는 보자기로 싸서 이것을 융합하고 실행하는 야인이 되었다.

나는 그이와 수개월 이국땅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떤 때는 한 가지 일을 되씹고 고쳐 생각할 뿐 아무런 결단도 못하는 햄릿, 어떤 때는 손에 아무런 방도도 없으면서 세계에 저항할 듯 흥분하는 돈키호테, 조용히 정좌해서 끝없는 명상에 잠긴 모습은 수도승의 모습인데, 시속 120킬로 달리는 차를 더 속력내라고 하며 쉬지 말고 일생이라도 달렸으면 할 때는 돈환, 세계지도를 내놓고 관광할 계획에 심취할 때는 고향 없는 집시, 그러나 한국에서 온 신문을 손에 들었다가 드시던 식사를 그만두고 목이 메어 울면서 귀국길을 위해 짐을 쌀 때보면 이 땅에 뿌리를 박은 애국자, 글을 쓴 것을 보면 사고에 골똘한 분인데 왜 그렇게 안절부절할까? 가슴에 화살을 맞은 이처럼! 그렇다. 그는 가슴에 화살을 맞아서 안절부절이다. 그 안의 양극성, 그 안의 이율배반 그것이 바로 그의 가슴에 꽂힌 화살이다. (주석 8)


주석
5>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알․인간․역사 - 함석헌 선생 80순기념문집>, 한길사, 1982.
6> 이치석, <씨올함석헌 평전>, 35~36쪽, 재인용, 시대의 창, 2005.
7> 김경재, <함석헌의 씨올사상연구>, <신학연구>, 30 (1989년).
8> 안병무, <선생님께 드리는 글>, <함석헌선생 80순기념문집>,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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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누구냐? 그의 사상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압축이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호메르스의 <일리아드>를 한 마디로 줄이거나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열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2010년 4월 교수신문은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 함석헌을 뽑았다.
그가 역사 분야의 대표 인물로 뽑히고, 전체로도 수위를 차지했다. 망국과 식민지, 독립운동과 친일, 해방과 분단, 독재와 민주의 굴곡진 현대사에서 속출한 수많은 학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을 제치고 함석헌이 1위로 뽑힌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함석헌은 종교인, 역사가, 언론인, 민주화운동가, 시인, 교육자, 저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각 분야에서 대표적 위치에 오를 만큼 사유와 활동의 폭이 넓고 깊고 다양했다. 많은 업적도 남겼다. 정신과 철학, 사상면에서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세기난우(世紀難遇)’의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함석헌은 역사책을 썼지만 역사학자가 아니고, 시집을 냈지만 시인이 아니고,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농부도 교사도 못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목사, 신부가 되지 아니하고,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지만 정치를 하지 않았다. 당대에 언론인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론, 평론을 많이 썼지만 직업 언론인이 되지 않았다.

그럼 함석헌은 누구냐, 무엇이냐.
한마디로 야인(野人)이고 들사람이다. 여당, 야당 할 때의 권력을 잡지 못한 정당을 뜻하는 것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야가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들사람을 말하는 야인이다. 우리 조상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이라 불렀다. 야만족이란 비하가 따랐다. 하지만 함석헌을 일컬을 때의 야인은 그런 의미와는 격이 다른 맨사람, 씨알을 말한다.

야(野), 곧 들은 도(都), 읍(邑)에 대해 쓰는 말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읍, 그 읍 중에서도 나라 임금 있는 곳이 도다. 야는 그 도읍 밖에 나와 있는 들, 교외다. 시골, 농촌이다. 야인, 들사람은 시골사람, 두메 사람이다. (주석 1)

함석헌은 “문명의 병이 들어 정신이 약해지면 반드시 소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썩어가는 백성을 책망하여 그 마음속에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도로 찾도록 부르짖는다.” (주석 2)고 했다. 중국의 노자와 장자,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미국의 휘트맨과 소로를 대표적 야인으로 꼽았고, 그는 또 새시대의 문을 연 예언가를 야인으로 보았다. 예레미아,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세례 요한, 예수를 순수한 들사람이라고 지목했다.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도 들사람이라고 하였다. 함석헌 자신도 이들과 한 줄에 꿰이는 들사람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첫째, 아나키스트다.
세계평화주의, 자연론적 사회관, 개인의 자주성과 부당한 권위에 대해 저항한 아나키스트이다. 일본인 케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가 의도적으로 오역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크로포토킨에 의해 체계화된 반봉건ㆍ반전제ㆍ반강권주의, 개인의 자율과 자치를 존중하는 아나키스트다.

둘째, 소로주의자다.
자연주의, 물질과 과학 위에 서야 한다는 초절주의, 부당한 조세와 침략전쟁을 거부하는 높은 정신운동, 기계 문명의 거부, 단순한 생활을 지향하는 소로주의자이다.

셋째, 간디주의자다.
비폭력저항, 불복종 ․ 비협력주의, 불가촉민(不可觸民, 씨알)의 지위향상운동, 민중교육운동, 인도 고유의 전통사상인 사티아그라하(眞理把握)운동, 절제된 생활원칙인 브라아마차리아(brahmacharya) 등 종교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를 결합하여 ‘국가의 도덕성’을 실천한 간디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간디주의자다.

넷째, 유목주의(nomadism)자다.
그의 사유와 철학은 고정되지 않고, 장소와 상황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동성과 도전성을 보여주는 노마디즘의 실천자이다. 고금동서를 종횡하면서 세계사의 정신과 사상을 육화(肉化)한 도전가이고, 머물면서는 민주화운동과 씨알의 세상을 위한 언로(言路)를 개척한 뉴노마니스티다.

다섯째, 퀘이커교도이다.
기록된 교리도, 교회와 성당과 같은 지정된 예배장소도, ‘선교’라는 말 대신 ‘봉사’라는 말을 선호하는, “진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내놓고 말하는” 퀘이커다. 무교회주의와도 가깝지만 보다 근원적인 종교관은 톨스토이, 간디, 우찌무라 간조, 유영모와 종교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주석 3)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기독교의 형식주의와 세속화를 거부하는 퀘이커 교도이다.

여섯째, 풍류사상가(風流思想家)다.
근래에 술 잘마시고 여성편력이 마치 ‘풍류’인 것처럼 타락했지만, 우리 민족사상의 원형인 풍류는 생각이나 생활에서 속(俗)되거나 삿(邪) 됨이 없는 생활철학을 말한다. 함석헌의 선풍도골의 헌헌한 모습이나 무애(無碍)의 사유와 활동은 한국의 마지막 풍류사상가이다.

일곱째, 평화사상가이다.
그의 모든 탐구ㆍ실천ㆍ도전ㆍ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에 있었다. 국가주의와 국수적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일체의 권위주의를 배격하였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전적 평화정신에서부터 현대 ‘무장된 평화체제’를 반대하였다. 일국의 평화가 아닌 지구촌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함석헌은 사상적으로는 간디주의, 사회적으로는 아나키즘, 철학적으로는 소로주의, 정신적으로는 노마니즘, 퀘이커신앙,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한 대사상가이다. ‘야인’, ‘씨알 사상’은 바로 이렇게 하여 생성되고 발육되고 실천되었다.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은 2012년 42회 째 대회에서 <대전환 : 새로운 모델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과거 자본주의는 틀렸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현실사회주의는 이미 망했고, 자본주의의 낡은 기차는 종착역에 이르렀다.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를 기반으로 한 경제학은 위기에 도달했다. 우리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주석 4)고 다보스포럼에서 말하였다.

21세기 인류의 미래상이 간디주의, 아나키즘, 소로철학, 노마디즘, 퀘이커주의,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하는 ‘야인주의’라면 함석헌은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러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기계적 합리주의자들의 눈에는 ‘바보’로 보이고, ‘배부른 돼지’들의 눈에는 ‘가난뱅이’, 세속적 권력주의자들에게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비쳤겠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음해와 비난이 따랐다. 함석헌도 마찬가지였다.

주석
1> 함석헌, <인간혁명>, 일우사, 1962년.
2> 앞과 같음.
3> 함석헌, <벤들힐의 명상>, <함석헌 전집>, 제3권.
4> <다보스포럼, 자본주의를 버리다>, 매일경제신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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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3/01 08:00 김삼웅

 

 

 

필자는 2001년 3월 <대한매일> 주필로 재직할 때 ‘김삼웅 칼럼’에서 <진짜 언론인 함석헌 100주년>을 기고한 바 있다

오늘 (13일)은 함석헌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함석헌은 역사연구가ㆍ사상가ㆍ민권운동가ㆍ잡지발행인 등 여러가지로 분류되지만 ‘진짜 언론인’도 한 범주라 하겠다.

언론인이면 언론인이지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고 진실한 사람과 위선자가 있듯이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 독재와 냉전시대에 사이비언론(인)이 득세하고 판칠 때 함석헌이야말로 진짜 언론인의 역할을 했다. 제도언론에 지면이 허용될 때는 할 말을 하고, 지면이 봉쇄당할 때는 ‘언론게릴라전’을 펴면서 독재와 냉전세력과 싸웠다.

최근 어떤 신문이 ‘할 말은 하는 신문’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그런 신문이 독재에 침묵하거나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함석헌은 진짜 할 말을 했다. 억압시대에는 비굴하고 민주시대에는 방종하는 사이비 비판이 아니라 남들이 입을 다물 때, 천지가 암흑에 덮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친일언론이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갈 때 함석헌은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만들며 어둠에 묻힌 조선역사를 쓰다가 투옥되고,자유당 천하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어용족 또는 만송족(晩松族)일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썼다가 감옥엘 갔다. 5·16쿠데타로 온 세상이 공포에 싸일 때는 <5ㆍ16을 어떻게 볼까>란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정치군인들에게 할 말을 다한 것이다. 당시 족벌언론이 쓴 쿠데타 지지 사설과 기사,논평은 한국언론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독재권력이 강화되면서 지식인은 두 갈래 부류로 나타났다. 저항과 타협의 길이었다. 저항자는 설 땅을 잃고 타협자는 풍요가 따랐다. 고려무인정권 때도 그랬고 일제식민시대도 그랬다. 그리고 비굴하게 타협하면서 무인정권과 식민통치를 찬양한 세력이 당대의 주류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석헌 등 진짜 비판자는 도태되고 사이비들이 득세하여 사세를 키우고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전두환 정권에서 이런 현상은 절정을 이루었다.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함석헌은 제도언론인들에게 ‘언론게릴라전’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언론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게릴라전술로 언론투쟁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게릴라전은 정규군이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특수임무가 요구될 때 전개된다. 신문사주와 간부들이 군사독재와 유착된 상태에서 언론의 정상적 기능(정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게릴라전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목마른 외침은 빈 산의 메아리에 그쳤다. 독재의 짓누름도 심했지만 그들이 던져준 이권과 고깃덩이도 만만찮았다. 또 긴 세월 길들여진 보신주의 언론인들이 게릴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배부르고 비대해졌다. 특히 일부 양심적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었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진짜 저항언론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직접 게릴라전에 나섰다.

함석헌은 사이비들처럼 사주의 지침이나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하는 따위의 언론인과는 격이 달랐다. 군사독재를 준엄하게 비판하다가도 통일문제에는 지극히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북을 믿고 북은 남을 믿고 일어섭시다.”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30여 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읽어도 감동을 준다. 참 글은 이렇게 이념과 시공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 진짜 언론인이었던 송건호 씨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다. 신문기자나 논설위원의 경력은 없지만 타고난 언론인이란 두가지 논거를 들었다.

첫째, 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다. 언론인과 비언론인의 구분은 문장이 쉬운가 난삽한가라면 함 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쉽다.

둘째, 시대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나날의 시사문제에 날카롭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 이면에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 날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함석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고 용기의 원천은 역사의식이었다. 역사의식이 없는 용기는 풍차에 칼질하는 만용이거나 멧돼지의 저돌성이다. 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 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
(주석 7)

함석헌은 일제의 패악이 천지를 뒤덮을 때 1930년 <성서조선> 제22호에 <의인은 멸절하였는가>에서 “구원 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仁者)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라고 기구하였다.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무리에서 절규한다.

“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 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7> <대한매일>, 2001년 3월 1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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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8 08:00 김삼웅

 

 

제100호(1989년 4월호)

함석헌이 생전에 그토록 기대했던 <씨알의 소리> 통권 100호는 그가 세상을 뜬 뒤에 나왔다. ‘통권100호 기념호’로 나온 “함석헌 추모특집” 형태의 4월호였다. 새 발행인이 된 김용준은 <선생님의 ‘글쎄’가 그리워집니다>에서 “편집위원들이 모여 <씨알의 소리>를 계속 펴나가기로 결정했다”는 뜻을 전했다.

통권 100호의 특집 ① “함석헌 선생의 인간과 사상”에는 노명식의 <함석헌의 고난사관>, 송건호의 <언론인으로서의 함석헌>, 김경재의 <함석헌의 종교사상>, 송현의 <시인 함석헌 연구>, 김영호의 <함석헌과 동양사상>, 이윤구의 <하늘만 믿은 님과 퀘이커 신앙>, 송기득의 <함석헌의 대듦, 그 삶과 얼과 생각>이 실렸다.

특집② “함석헌 선생과 나” 에는 장기려ㆍ김대중ㆍ김영삼ㆍ최태사ㆍ이태영ㆍ법정ㆍ서영훈ㆍ김상근ㆍ원경선ㆍ다나까ㆍ한승헌ㆍ강기철ㆍ장기홍ㆍ김숭경ㆍ배영기ㆍ문대골이 쓴 각각의 사연이 담겼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박재순의 <씨알의 소리와 씨알의 사상>, <씨알의 소리 총목차>, <사진으로 보는 함석헌 선생> 등 내용면에서 ‘함석헌 추모특집’에 모자라지 않았다.

박두진의 시 <함석헌 선생>

이 시대, 이 세기,
우리들의 이 시대의 한 의인 가셨느니.
참 사람 사랑의 사람
자유의 사람 가셨느니.

그 암담하고 처절한
악의 시대 횡포의 시대의 상처투성이의
그 하늘의 사람 빛의 사람의
형형한 정기,
질풍노도로 한 시대를 깨우쳤느니.

불의ㆍ무도ㆍ악을 쳐
번개처럼 번뜩이고,
사랑에는 촉촉한 봄비로 스며,
빛의 길 참의 길을
밝혀 가셨느니.

아, 불의 자유, 불의 사랑, 불의 의지 그 활력,
스스로 안에 삭혀 눈물 머금던
겨레사랑, 인간사랑, 인류사랑 끝없이
불멸의 넋 활활 태운
이 시대의 의인,
불의 사람 참의사람 가시었느니.
(주석 6)

인물은 두 가지 형태로 역사에 남는다. 생전에 세상을 요란하게 했던 인물 중에는 갈수록 세월의 더께에 묻혀 망각되는 경우, 세찬 풍상과 인위의 작용에도 씻기지 안고 샛별처럼 반짝이는 경우다. 함석헌의 경우는 기념사업과 연구사업이 활발하고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인상’으로 조명된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그동안 이사장이 장기려 ⟶ 이문영 ⟶ 김경재 ⟶ 문대골 ⟶ 김조년으로 이어지고, <씨알의 소리>도 격월간으로 최근 (2013년 봄)까지 김조년 교수가 발행 겸 주간을 맡아 통권 226호를 발간하였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함석헌 탄신 100주년인 2001년 3월 13일 한국언론재단(프레스센터)에서 추념 및 후원의 밤 행사를 가졌다. 김대중 대통령은 추념 메시지에서 “함석헌 선생이야말로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 사상가요 문필가였으며, 행동하는 지성이었고, 민주화운동이 전개되었던 어두웠던 시절, 선생은 태산처럼 우뚝 서서 저와 민주화 동지들을 지탱해주고, 지도하시고 이끌어 오신 큰 스승이었다.”고 회고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는 3월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 충신교회에서도 열리고, 3월 13일 오산학교에서도 학생, 교사, 동문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오산학교 동창회는 1994년 2월 <함석헌선생추모문집>을 편찬했다.
고인의 희귀한 사진 화보와 부록으로 저술, 연설의 목록을 연대별로 정리하여 연구에 도움을 준다. 문집에는 육필 원고가 실리고, 오산학교 후배로서 함석헌이 3.8선을 넘어 서울에 정착할 때 도움을 준 최태사의 글, 50년 동안 지켜보았다는 최진삼의 기록 등 값진 내용이 많다. 60여 년 전 오산학교 제자였던 안이현ㆍ김극진ㆍ이동순ㆍ임상흠ㆍ김창화ㆍ윤창흠ㆍ이용서ㆍ왕지균ㆍ이기백ㆍ김경옥ㆍ선우양국 등의 회고담에서 ‘교사 함석헌’의 모습과 비화, 일화를 듣게된다.

오산학교 30회 졸업생인 역사학자 이기백은 <함 선생의 속마음>에서 일제가 학교에서 일본어를 상용토록 했는데도 여전히 우리말로 강의하다가 갑자기 장학관과 교장이 교실로 들이닥치자 유창한 일본어로 강의를 한 ‘현장’을 소개했다. 함석헌이 얼마 뒤 학교를 떠나게 된 것이 이와 관련되었을 것이라고 이기백은 적었다.

‘씨알사상’을 되살리는 <함석헌연구>지가 2010년 봄부터 씨알사상연구원에서 반년간으로 발행되고, 제22차 세계철학대회가 2008년 8월 서울대학교에서 ‘유영모ㆍ함석헌사상연구’를 주제로 열렸다.

2009년 7월에는 ‘제1차 한ㆍ일 철학포럼이 일본에서 열렸다. 한ㆍ일 두 나라 철학자 30여명이 모인 철학포럼은 함석헌과 유영모, 다나카 쇼조, 아라이 오스이의 사상을 탐구하면서 “씨알사상은 생태계를 구할 대안”이라는 데 뜻을 모았다. 2010년에 함석헌 사상을 본격 연구하는 ‘씨알학회’(회장 이규성)가 창립되었다.

함석헌기념사업회는 해마다 ‘씨알모임’ 의 행사를 갖고, 씨알학술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씨알정신 승계와 확장에 노력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소재 함석헌기념사업회관에는 고인의 각종 저서와 자료,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주석
6> <씨알의 소리>, 1989년 4월호,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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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2/27 08:00 김삼웅

 

 

늙어가면서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맑은 정신으로 청청하게 활동하고 글을 쓰던 함석헌이 큰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나이는 이미 미수(米壽)에 이르렀다. 거인은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25분 8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서울대병원 12층 108호실에서였다. 빈소에서 <씨알의 소리>후원회가 구성되고, 준비위원장에 장기려 박사가 추대되었다. 장례는 2월 8일 오산학교 강당에서 오산학교장으로 거행되었다. 2,000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거인의 가는 길을 애도했다. 장지는 연천군 진곡읍 감파리 마차산 기슭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8월 15일, 그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수여하고, 2006년 10월 19일 대전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는 2001년 4월 ‘이달의 문화인물’ 로 선정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함석헌은 1988년 11월 22일 오산고등학교 전제현 교장에게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남강(남강 이승훈 - 저자) 선생께서 이루지 못하신 소원을 내 유해를 가지고라도 이루어 드리면 좋겠습니다. 내 뼈를 골격표본으로 만들어 오산학생들이 공부하게 해 주시고 내 대뇌와 심장 등 모든 장기도 방부제에 담아서 두고 공부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내 살던 작은 집과 터가 있는데 그것도 남강재단에 드리니 써주세요. (주석 4)

함석헌의 ‘표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준비 과정에서 유체를 표본으로 만들었을 경우 보관문제와 자칫 우상의 대상이 되어 고인의 뜻과는 달리 이용될 지 모른다는 점,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으로도 어려운 문제라는 의견에 따라 유택에 안장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지인들에게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우지 말라” 면서 “만일 누가 비석을 세운다면 벼락을 쳐서라도 부셔버리겠다” 고 당부하였다. 지인들이 후대를 위해서라도 무슨 말이라도 새겨야 한다고 설득하자 “정말 무슨 말을 쓰고 싶으면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라는 그 말만 조그마하게 써 달라”고 하였다.

장례 뒤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족이 기념사업회 쪽에 돌책에 세울 고인의 말씀을 50~60자로 골라달라고 요청하였다. 그이와 같은 거인의 생애를 50~60자로 압축한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몇몇이 의논하여 유일한 시집 <수평선 너머>에서 고르기로 하였다.

“결국 생전에 함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고 생각되는 안병무 박사에게 의뢰했다. 안 박사님은 다음과 같은 시를 선정해 주셨다.

나는 빈 들에서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 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 중에서”
(주석 5)

함석헌 부부에게는 2남 5녀가 있었다.
장남 국용, 차남 우용, 장녀 은수, 차녀 은삼, 3녀 은자, 4녀 은화, 5녀 은선이다. 함석헌이 1947년 3월 월남한데 이어 차남이 1948년 6월 30일 용암포를 통해 단신 월남했다. 그리고 이어서 부인과 남은 가족이 1950년 월남하고, 어머니와 장남, 장녀는 용천에 그대로 남았다. 어머니가 고향에서 사망한데 이어 장남이 1958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는 장녀 은수가 살아 있었으나 함석헌은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함석헌은 죽을 때까지 유영모처럼 매일 산 날짜를 그날그날 달력에 기록하였다. 탁상용 달력 1988년 8월 8일자에 31925를 기록한 것이 남았다. 8월 12일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뒤 귀가하지 못한 채 눈을 감은 것이다. 날짜로 정확히 31929일을 살았다.

1988년 5월의 화재로 장서 5천여 권이 다 소실된 이후 새로 준비한 1천여 권과 쌍문동의 낡은 집 한 채, 20여 권의 저서와 역서 몇 권이 유산의 전부였다. 함석헌 사상의 본향이고 <씨알의 소리>의 산실이었던 원효로 4가의 옛집과 부지 82평은 오산학교에서 운영하는 남강문화재단으로 기증, 소유권을 이전하였다.

함석헌의 별세 뒤 공석 중이던 <씨알의 소리> 발행인 및 편집인에는 1948년부터 함석헌을 사사하면서 고려대학에서 두 차례나 해직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헌신해온 김용준 박사가 선임되었다. <씨알의 소리> 후원회는 명칭을 ‘함석헌선생기념사업회’로 바꾸고 후원회장 장기려 박사를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주석
4> 전제현 <함석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함석헌선생추모문집>, 324쪽, 오산학교동창회 편, 1994,.
5> <씨알의 소리>, 1989년 5월호,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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