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사태’ 전후한 정세 동력과 변혁진영의 과제(1)



본 기고는 김정호 박사의 조국사태를 둘러싼 정국진단과 변혁운동에 대한 제언이다. 조국사태의 바탕에는 한국자본축적체제의 위기가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필자의 견해가 돋보인다. 또한 이를 해결하는 근본은 재벌체제개혁이며, 변혁진영의 과제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인 제안을 던지고 있다. 이에 일독을 권한다. 분량이 많이 2회에 걸쳐 연속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조국사태’ 전후한 정세 동력과 변혁진영의 과제

1. 현 정세의 특징
2. 현 정국의 동력은 한국경제 축적체제의 위기로부터 온다
3. 관건은 재벌개혁

4. 재벌개혁에 대한 각 정치세력의 태도
5. 한국 변혁진영의 과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적격성 여부를 따지는 얼핏 사소한 쟁점이, 끈질기게 두 달 넘게 계속되었다. 한 쟁점이 이토록 오래도록 지속될 경우 대중들은 대개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이 같은 피로감은 자칫 정치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무관심을 낳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집중도를 높여 강한 스트레스를 자아낸다. 만일 후자일 경우, 이 같은 스트레스는 사회적 긴장도를 너무 팽창시킨 나머지 자칫 한꺼번에 폭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평소엔 어떤 정치세력이나 언론들도 이렇듯 한 쟁점을 지나치게 파고드는 일을 터부시한다. 이러한 관례에 비추어 본다면 금번 조국사태는 매우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투쟁양상 역시도 매우 비타협적이다. 상대에 대한 일격필살의 ‘치명타’를 노리면서 각자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카드를 동원하여 전력투구(올인)하고 있다. 한쪽은 마치 놓칠 수 없는 좋은 ‘먹이감’을 발견한 듯 여기서 끝장을 보겠다는 태도이며, 이 때문에 다른 쪽도 쉽게 발을 빼지 못하고 함께 맞설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한 마디로, 정치세력들이 서로 배수진을 쳤다는 것은 이번 조국사태를 보는 사람들의 공통된 느낌일 것이다.
이 같은 정국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지금 한국사회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으며, 과연 현 정세를 밀어붙이는 진정한 ‘동력’은 무엇일까? 일련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1. 현 정세의 특징

정치권에서 이렇듯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이유에 대해, 어떤 이는 내년 총선 혹은 더 나아가 내후년 대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매번 선거 때마다 정치세력들은 지금과 같이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매번 선거를 앞둔 공방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강도와 양상은 각기 달랐으며 그 목적 또한 똑같을 수는 없다.
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 정국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국가권력 내부의 다툼이라 할 수 있다. 즉 하급기관인 검찰 권력이 상급기관인 청와대 권력에 노골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과거 노무현정부 시절에도 한 차례 나타난 적이 있었다. 사실 조국사태가 예상치 않게 이렇듯 커지고 완강하게 지속되는 것은, 검찰 권력의 저항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좀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
얼핏 검찰의 반항은 ‘부처 이기주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대통령이 검찰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검찰개혁을 강력히 주장하는 조국을 굳이 법무장관에 앉힌 것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는 것이다. 여기에 때마침 그간 ‘적폐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 밀려 내내 수세에 몰리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한국당과 검찰이 죽이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수언론이 이에 가세하였다. 이리하여 검찰은 조국과 가족에 대한 혐의사실을 계속해서 흘리고, 이를 보수언론이 대대적으로 받아쓰고, 한국당은 국회에서 강력한 정치 공세를 폄으로써 지금의 조국정국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이 틀린 것은 아니며, 실제 사태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표면상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좀 더 내면적인 것에 천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검찰개혁’ 사안 자체가 갖는 중요성이다. 만약 그것이 진보세력이 수구세력과 맞붙는 수많은 적폐청산 과제 중의 하나가 아니라, 현 한국사회의 보수연합세력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결정적’ 사안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럴 경우 검찰개혁은 개혁세력 입장에서나 보수세력 입장에서나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일종의 ‘전략 고지’의 성격을 지니며, 이 때문에 정치세력 간에 일전이 불가피해진다.

실제로 조국사태가 상당기간 지속되면서 검찰개혁과 관련하여 그동안 몰랐던 사실들이 언론과 SNS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대체로 모아지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검찰은 한국사회에서 특별한 지위와 역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처럼 노골적 폭력에 의존하기가 어렵게 된 지배세력이, 오늘날의 형식 민주주의 진전에 발맞추어 자신들의 보호막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검찰 권력이라는 것이다. 한국 검찰은 국제적으로도 드물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중립’이라는 명목 하에 그 수장인 검찰총장의 임기는 보장된다. 이리하여 검찰은 사실상 국민의 감시통제로부터 벗어나게 되었으며,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의 지휘통제권마저 미칠 수 없는 권력기관으로 변했다. 재벌과 보수언론 등 기득권세력들은 이러한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의 속성을 파악한 후, 대기업 사외이사, 전관예우, 김&장 같은 법률로펌에의 영입과 같은 갖가지 매수와 특혜 수단을 통해 이들 소수정예 집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검찰 권력은 재벌총수와 언론사주, 그리고 고위 권력층이 법을 위반할 때마다 축소수사, 불기소 등으로 그들을 보호해주는 방패막이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정적을 쓰러뜨리는데 있어서는, ‘피의사실 유포’를 통해 언론과 공조함으로써 그 무엇보다도 예리한 공격무기가 되었다.
여기서 검찰-언론의 밀착 사례는 해외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인데, 이의엽 민중교육연구소 소장이 자신의 칼럼에서 소개한 책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지배했나: 일본의 사례, 1945-2012년』(마코사키 우케루 저)의 내용에 따르면, 일본의 자민당 내 친미파와 자주파 간의 대립에서 미국은 자주파를 견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 일본의 검찰 권력과 언론을 종종 이용한다는 것이다. 다음을 보자.

“정치인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 피의자가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기 전까지 수많은 언론 보도가 쏟아진다. ‘단독’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는 대부분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또는 ‘익명을 요구한 검찰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이라고 정보의 출처를 댄다. 검찰 쪽에서 누군가가 흘려줬고, 언론이 그대로 받아쓴다는 의미다. 검찰이 ‘유포’하고, 언론이 ‘추정’한 혐의들은 독자들에게 유죄의 ‘심증’을 갖게 만드는 효과를 낳는다. 피의자는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여론재판을 통해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마녀사냥을 당하는 셈이다.”(이의엽, “정치검찰을 물리쳐야 한다”)

작금의 조국사태의 진행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또 브라질의 온라인 저널 ‘디 인터셉트(The Intercept)’의 보도에 따르면, 얼마 전 브라질의 노동자당 권력이 몰락하고 룰라가 구속된 최대의 부패 스캔들 ‘페트로브라스 사건’(일명 ‘세차작전’,Operation Car Wash)에서도 현지 검찰-언론의 콤비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전한다.
이 같은 국내외 사례들을 보노라면, 우리는 왜 그동안 삼성 이재용 등 재벌총수와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의 사주들이 그토록 많은 범법행위들을 저지르고서도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검찰 권력은 1987년 이후 파쇼권력이 사라지고 형식적 민주화를 이룬 한국사회에서 재벌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핵심 보호장치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검찰개혁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조국사태를 단순한 보수세력이 만난 우연한 ‘호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개혁과 수구세력 간에 ‘전략 고지’를 놓고 벌이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라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그런 면에서 일찍이 노무현정부 시절의 개혁 추진과정에서 검찰 권력에 막혀 일차 패배의 쓰라린 경험을 겪었던 것은 개혁세력 모두에게 있어선 소중한 교훈이었다. 지금 이 ‘전략 고지’를 둘러싼 전투의 승패가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이후 정국의 양상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정권은 왜 이렇듯 보수세력의 강력한 반발을 무릅쓰고 조국 임명을 강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적당한 타협의 길은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문재인정권으로서도 그 정도 강도의 ‘적폐청산’을 수행해야지만 촛불혁명을 통해 자신에게 권력을 맡긴 대중의 분노를 잠시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사회적 모순이 격화할수록, 그리고 이 때문에 대중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강할수록, 그것을 대변하는 ‘개혁정부’ 역시도 급진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물론 개혁세력의 공세가 거칠어짐에 따라 보수세력의 저항 역시도 필사적이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개혁-반개혁이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정세를 한 발짝씩 고양시켜가는 변증법이다. 지금은 이 같은 변증법이 작동하는 정세인 것 같다.

2. 현 정국의 동력은 한국경제 축적체제의 위기로부터 온다

여기서 우리는 문재인 정부가 사회적 긴장도가 고조됨에도 불구하고 검찰개혁과 같은 강도 높은 개혁을 계속해서 밀고 나갈 수밖에 없게 하는 대중의 불만의 강도에 주목해야 한다. 그 같은 대중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검찰-언론-한국당 보수세력이 조성하는 입체적인 여론전에 밀려 아마 조국카드를 진작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실 9월28일 서초동집회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집권 민주당 내부의 동요는 상당하였다. 따라서 다시금 시작된 ‘촛불집회’의 진정한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먼저 우리가 유념할 것은, ‘촛불집회’라는 형식은 동일할 지라도 군중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동원이 가능한 ‘상비군’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그 핵심부대는 일정하다 할지라도, 집회 군중은 매 시기 갖가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문재인정부를 탄생시킬 때의 촛불집회의 군중과 이명박정부의 수입 쇠고기 파동 때의 그것은 서로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3년 전 박근혜 탄핵을 몰고 왔던 촛불집회의 군중 역시도 이번 조국사태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촛불집회 ‘형식’이나 누가 표면상 주최했느냐는 측면보다도, 우선 금번 대규모 촛불집회가 성립하게 된 사회적 요인에 더 주목해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한 ‘축적양식’이 근본적으로 한계에 부딪칠수록, 정치적으로는 그 변화와 개혁에 대한 요구의 폭과 강도는 높아진다. 지금의 대중의 불만과 고통은 1990년대 이래 한국사회에 정착된 축적양식의 위기를 반영한다. 그 근거는 앞서 언급한 대로, 개혁세력과 보수세력 간에 검찰개혁이라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전략 고지’를 놓고 한판 승부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7년 이후 파쇼권력이 사라지고 형식적 민주화를 이룬 한국 정치사회 현실에서, 검찰 권력은 재벌을 비롯한 지배세력들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핵심 보호장치이다. 이것이 제거되면 통치세력은 큰 타격을 받게 되며 이 때문에 결사저항을 하고 있는데, 문재인정부는 그 저항을 기필코 돌파하기 위하여 군중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정면충돌이야말로 한 사회의 대변혁기에나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한국경제는 1990년대 들어 외주화, 고용 유연화, 비정규직 확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소위 ‘신경영’ 정책을 추진하였다. 1990년대 후반의 IMF 외환위기를 넘긴 후 이 같은 신경영에 기반한 새로운 축적체제는 한국사회에 정착되었다. 때마침 확장기를 맞이한 세계경제와 거대한 이웃나라 중국의 고도성장은 이 같은 한국경제의 신축적체제의 발전을 위한 우호적인 외부환경을 제공하였다.
2000년대 초 이후 비정규직을 적극 활용하고 여기에 일정 수준의 응용기술을 결합시킨 한국경제는 세계시장에서 상당한 위력을 떨쳤다. 2008년 말 금융위기가 도래한 이후에도, 아직 세계 각국이 기존의 금융 중심 패러다임에서 제조업으로의 전환을 미처 이루지 못한 2014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새로운 축적모델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철강, 조선, 자동차, 전자, 반도체 등 한국경제를 대표하는 주력산업은 이 시기에도 계속해서 호황을 누렸다. 비록 사회 전반으로는 비정규직이 꾸준히 증가하고 사회적 빈부격차 역시도 확대됨으로써 사회적 불안요인이 누적되어 갔지만, 그 대신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은 상대적 고임금과 안정된 직장을 보장받아 자본에 포섭됨으로써 전체적으로 노사관계는 큰 무리 없이 안정되었다. 우리는 이 시기까지를 (비정규직에 기초한) 새로운 축적양식의 상대적 안정기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상대적 안정은 세계 각국이 금융위기의 충격으로부터 점차 회복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동요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각국은 ‘제조업’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마침 앞으로 기존 경제에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몰고 올 ‘4차 산업혁명’이 접목되면서 가속화되었다. 다른 한편, 이 무렵부터 중국이 산업화 과정을 일차 마무리함으로써, 이제 중국은 한국의 거대한 수출시장이 아닌 무서운 경쟁상대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이후 정착되어 온 한국의 ‘비정규직(저임금) + 중간수준 응용기술’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중국의 노동력은 한국의 비정규직보다도 아직까지 훨씬 저렴하고, 그러면서도 기술수준은 거의 한국을 추격하고 일부 분야에선 앞서나가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특히 튼튼한 기초과학을 바탕으로 친환경에너지, 양자통신,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분야에서는 기초과학이 취약한 한국을 크게 앞서고 있다. 이제 한국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동안 황금알을 안겨주던 중국시장에서 밀려나고 있으며, 다른 세계시장에서도 중국에 밀려 국제시장 점유율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형국이다.

지금까지의 축적방식으로는 더 이상 한국경제의 존립이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 이제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전통산업 분야에서는 중국에 밀리고, 그렇다고 해서 미래 산업에 대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기존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존을 유지할 수 없으면서도, 새로운 대안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한 사회 ‘위기상황’의 전형적인 규정이다. 현재 대중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고통, 예컨대 날로 증가하는 실업자와 고용에 대한 불안감, 자영업자의 파산, 가계부채의 끝없는 증가, 젊은 청년세대들의 좌절감, 입시지옥 등은 바로 이처럼 갈수록 생명력을 다해 가고 있는 한국경제의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대중은 지금 이 같은 절망적 상황에 처해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하라고 정치권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그를 위한 대대적인 사회 전반의 개혁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되돌아보면 1990년대 이후 정착되어 온 비정규직에 기초한 새로운 축적양식은, 과거 ‘개발독재하의 축적양식’(1960~1987)이 그러하였듯, 대략 ‘30년 주기’의 자기 생명을 마쳐가고 있으며 그 본격적인 해체기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가 신경영 전략의 도입과 정착기였다라고 한다면, 2000-2014년은 그 발전기라 볼 수 있으며, 조선업종 불황과 4차 산업혁명 및 중국경제의 부정적 영향이 본격화한 2015년 이후는 쇠퇴기에 해당된다. 이제 2020년 이후에는 해체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정세를 밀어부치고 있는 동력은 바로 이 같은 축적양식의 위기가 불러일으키는 광범위한 대중의 불안과 고통이라 할 수 있다.

3. 관건은 재벌개혁

위에서 거론한 1990년대 이후의 한국 축적체제는 ‘재벌체제’로 상징되며, 따라서 당연히 재벌개혁이 초점이 된다. 그동안 문재인정부가 걸어온 2년 반의 기간을 되돌아보면, 이 핵심문제를 건드리지 않은 채 주변만 맴돌면서 우회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정치 분야에서는 박근혜, 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시키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다른 분야 특히 경제 분야의 성과는 미진하였다. 예컨대 경제분야의 대표적 정책이라 할 수 있는 최저임금제와 52시간 노동시간단축 등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갖가지 장애에 부딪쳐 그것을 주도하던 청와대 경제수석 장하성의 교체에서 보듯 거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공공기관 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약속 역시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문재인정부의 야심작인 북방정책 역시도 북미 간 핵협상의 부진함으로 별반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대내외적인 각종 악재에 휩싸인 한국경제는 나날이 악화되어 가고 있으며, 경제문제는 문재인정부의 그간의 개혁성과를 모조리 빼앗아갈 만큼 최대의 우환이 되고 있다. 이처럼 문재인정부의 지금까지의 개혁이 보여주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재벌문제를 비켜가고서는 어떠한 성과도 내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30대 재벌 매출액이 GDP의 80%에 이르는 한국적 상황이 말해주듯, 사회적 부의 대부분을 재벌이 장악한 상황에서 그 점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많은 문제가 주요하게는 '민주화'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 점은 노동자, 재야지식인, 청년학생, 종교계, 농민 등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이들이 무슨 일을 할라치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가 나서 탄압하고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각 부문의 주체들은 민주화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항해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기본 조직인 노조를 하나 만들고 싶을 때도 그러하였는데, 이 시기엔 이 같은 노조결성 조차도 '반공'의 이름 아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처럼 언론, 결사, 사상의 자유가 심각하게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 노동운동은 제대로 성장하기가 힘들었다. 또 농민이 추곡수매가 인상과 농가부채 탕감을 요구할 때도, 학생들이 자치조직으로서의 학생회 부활과 학내 민주화를 요구할 때도 그러한 탄압에 직면하여야만 하였다. 문인과 언론인과 예술인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들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그러기에 이들은 민주화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투쟁 대상을 '군사독재'로 설정하고 그것의 타도를 위해 자신들의 부문운동의 고유한 영역을 넘어 반독재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재벌문제는 한국사회 곳곳에 침투되지 않은 곳이 없다. 한국의 재벌들은 '글로벌 경영'이라는 화려한 외형과는 달리, 여전히 기본적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기반함으로써 비정규직을 양산시킨다. 한국의 재벌문제는 또한 이 같은 비정규직문제를 매개로 해서 기타 사회문제를 한층 증폭시킨다. 예컨대 교육과 청년실업 문제가 그러하며, 남녀 성차별 문제 역시 그러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청년실업의 주요한 원인이며, 그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하여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 또 이 같은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은 일찍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려야 하는데, 이는 복잡한 교육문제를 야기시킨다. 최근의 '미투'로 명명되는 성폭력 문제 역시도 비정규직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직장 내 성폭력은 상 하급 간의 신분상 차이를 매개로 발생하는데, 정규직 상사와 비정규직 하급자 간의 심각한 격차는 그 같은 성폭력이 매우 손쉽게 발생할 수 있게끔 만든다.

한국의 재벌체제는 또한 우리사회의 각종 비리의 온상이자 공적체계를 무너뜨리고 비선조직의 번성을 낳게 하는 비옥한 토양이기도 하다. 얼마 전 탄핵정국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최순실 사건' 역시도 좀 더 근원을 캐보면, 외환위기 이후 출현한 한국경제의 소수 ‘상위’ 재벌에의 경제력집중 문제가 놓여 있다. 외환위기 이후 살아남은 삼성, 현대, SK, LG 등 상위 재벌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계는 물론 사법·관료·언론·문화계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전반에 '재벌장학생'을 키울 정도로 무소불위한 힘을 갖게 되었다. 이 같은 재벌체제야말로 불법상속, 비자금조성, 탈세, 뇌물공여, 회계조작, 정경유착 등 갖가지 부정부패와 범죄의 온상이 된다.

이렇듯 한국의 중대한 사회문제는 그 어느 것 하나 재벌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1970-1980년대에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통해 군사독재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사회진보가 불가능하였듯이, 지금은 재벌체제의 근본적 개혁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국사회의 발전은 꿈꿀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문재인정부도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현 정부가 그동안 재벌개혁에 소극적이었다고 해서 아예 그것을 포기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다. 문재인정부는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인데, 지금 웬만한 반대를 무릅쓰고 검찰개혁을 강하게 밀어부쳐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즉 검찰개혁은 재벌개혁이라는 한 단계 높은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 경제가 줄곧 하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의 생활고에 대한 불만을 달래 줄 다른 마땅한 방책이 없다. 내년 총선과 내후년 대선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검찰개혁을 통해 문재인정권은 자신의 개혁 이미지를 쇄신하여야만 한다. 그와 함께 다음 단계의 더 지난한 개혁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볼 때 지금은 현 정권이 사활을 건 승부수를 던질 때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문재인정권의 검찰개혁이 성공할 경우를 상정해 보자. 이 경우 재벌개혁의 본격화로 인해 한국사회는 1990년대 들어 성립된 신 축적모델 (필자는 이를 ‘후기 신식국독자’ 체제라고 부른다)의 해체과정이 보다 가시화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구의 눈에도 한국사회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고 있음이 명확해질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의 검찰개혁을 둘러싼 공방은 1987년 민주화 대투쟁과 마찬가지로, 한 축적체제를 마감키 위한 ‘선행적인 상부구조 변화’의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 주도세력인 자유주의자들이 애초 의도하는 바대로 그것이 좀 더 발전적인 축적제제가 될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이다. (계속)

김정호 북경대 박사  webmaster@minplus.or.kr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8061




임경석의 역사극장

그는 누명 쓰고 죽은 것일까

중국 베이징 주택가에서 밀정 혐의로 살해당한 김달하, 증거는 김창숙 발언밖에 없었는데…


1909년께 김달하와 김애란의 약혼 사진. 가운데 소녀는 신부의 여동생 김활란(11살). 임경석 제공

김달하(金達河) 사건이란 1925년 3월30일 중국 수도 베이징의 북쪽 안정문 인근 한 주택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가리킨다. 반일 조선인 사회의 유력자로 알려진 57살 초로의 남자가 일본 밀정 혐의를 받고서 한때 동지였던 사람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도대체 김달하가 어떤 사람이길래 그러한 화를 입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권세가 후원을 업고 벼슬길로


김창숙이 처음 김달하를 알게 된 것은 베이징에 정착한 1921~22년께 일이다. 유교 지식인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국외로 망명한 김창숙이었다. 그는 중국의 어떤 도시보다도 베이징을 선호했다. 조선 국내로 몰래 연락을 주고받는 데에는 그 도시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와 광저우를 무대로 하여 동분서주하던 망명 초창기 2~3년을 보낸 뒤에는 베이징에 자리를 잡았다.

김창숙은 그를 처음 만났는데도 마음에 들었다. 김달하가 한문학과 유학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고 신망도 두터웠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의주에서 나고 자란 김달하는 관서지방 출신의 이승훈이나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사이가 좋았다. 유학 고전과 역사를 토론하다보면 그 해박한 지식이 돋보였다. 말이 통하고 뜻이 맞아서 마음이 흡족했다. 김달하는 이미 50대 중반이고 김창숙은 그보다 10년 연하였지만, 두 사람이 교분을 나누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김달하가 유학에 깊은 소양을 갖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한학을 익혔을 뿐 아니라, 15살 되던 1883년에 의주의 저명한 유학자 백회순(1827~88) 문하에 나아가서 유학 고전과 한문학을 수학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 학문 경력은 관직 진출의 기반이 됐다. 27살 되던 해에 평안도 관찰사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고, 29살 되던 1897년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첫 벼슬은 의령원 참봉직이었다. 의령원이란 사도세자와 세자빈 혜빈 홍씨의 적장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무덤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왕실의 유택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뒤이어 31살 되던 1899년부터 영향력 있는 관직에 취임했다. 내부 주사로 약 6개월 재직한 데 이어 1900년에 대한제국 시절 유일한 관립중등학교인 한성중학교 교관에 취임했다. ‘교관’이란 중등학교 교사를 가리키는 당시 명칭인데, 그 자리에 6년간 재임했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는 중추원 부찬의를 지냈다. 실권은 없지만 품계가 정3품인 고위 관직이었다.

일본 관헌이 작성한 정보문서에 따르면, 그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권세가의 후원이 있었다. 민씨 집권 그룹의 일원인 민병석(1858~1940)이 그의 상전이었다. 민병석은 1889년부터 평안도 관찰사에 5년간이나 재임했는데, 이 기간에 김달하는 그의 참서관 자격으로 수행했으며, 여러 가지 부정한 행위로 큰 재산을 얻었다고 한다.


김달하가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일궜는데도 관서지방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또 다른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그는 1906년 10월 서우학회 설립을 주도한 12명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창립회의 개최 장소가 김달하의 저택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초창기부터 깊숙이 관여했음이 분명하다.


독립운동 지도자와 허물없이 지내


서우학회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출신 관료·신지식층 집단이 설립한 애국계몽운동단체다. 을사조약 이후 이른바 일본 보호국 체제하에 합법·공개적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학교 설립과 잡지 발행 등 비정치적 영역 활동만 허용됐지만, 관서지방을 무대로 애국주의 열기를 고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달하는 서우학회 임원진이었다. 재정 총괄 직책인 ‘회계원’으로 선임됐고, 일반 회무의 의사결정 과정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단체 설립 이듬해에는 모든 업무를 지휘하는 ‘총무원’이자 부회장에 선출됐다. 서열 2위라 해도 지나치지 않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관지 발행에도 주도적이었다. 월간지 <서우>를 냈는데, 전체 15개 호 가운데 6회분 글을 썼다. 기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빈번하게 투고했음을 알 수 있다.

1906~07년 두 해 동안 서우학회에서 발휘한 김달하의 눈부신 활동상은 1908~09년 서북학회에도 계승됐다. 서북학회는 관서지방을 관할하는 서우학회와 관북지방을 무대로 하는 한북흥학회, 두 단체를 통합한 것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단체라 해도 좋았다. 여기서도 김달하는 ‘총무’직을 수행했다. 기관지 편집원 등의 직위도 갖고 있었다.

김달하가 관서 사람들의 신망을 얻은 이유를 알 만하다. 이승훈이나 안창호와 같은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잘 알고 지내는 사정도 수긍이 간다. 김창숙이 그와 허물없이 지낸 것도 자연스럽다 하겠다. 김달하는 베이징의 조선인 망명자 사회에서 반일 유력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보기를 들면 1921년 3월1일 저녁에 베이징 조선인 14명이 3·1운동 기념연회를 은밀히 열었는데, 그 속에 김달하가 있었다. 신채호, 김좌진, 서왈보, 한진산 등 이름 높은 반일 인사들이 참석한 자리였다.4 또 일본공사관 경찰은 비밀리에 ‘베이징 거주 요시찰 조선인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28명 명단에 어김없이 김달하 이름도 있었다.

그런데 김창숙은 언제부턴가 김달하에 관한 추문이 돌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일본 경찰 간부와 은밀히 만난다는 소문이었다. 일본 밀정인 것 같다는 의심이었다. 하지만 일축했다. 김창숙은 그를 믿었다. 김달하의 교제 범위가 넓다보니 남들에게 오해를 살 수도 있겠거니 생각했다. 김달하가 베이징으로 망명한 때는 1913년이다. 10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게다가 서울에 있던 가족까지 모두 불러들여 10여 명의 대가족 살림을 꾸리고 있었다. 그동안 중국 정부기관에 취직도 했다. 북양 군벌정권의 거두 돤치루이의 부관으로도 일했다. 교제 범위가 신진 망명자보다 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창숙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1925년 초였다. 김달하의 초청으로 둘만의 은밀한 대화 자리가 만들어졌다. 김달하는 독립운동이 성공할 가망이 없다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끝에 마침내 폭탄 발언을 했다. 조선으로 귀국하라는 권유였다. 당신같이 학덕 높은 유학자는 경학원에 들어가서 유교를 진흥하는 일에 종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경학원의 제2인자 자리인 부제학으로 취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조선총독부에 교섭해 이미 승낙까지 받아놓았다는 말도 했다. 요컨대 독립운동을 청산하고 식민지 통치체제에 투항하라는 권고였다. 김창숙은 격노했다. 말리는 손을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김활란의 언니와 ‘치우친’ 결혼


김창숙은 동지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겪은 일을 폭로했다. 김달하의 정체가 뭔지 증언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회유 공작에 임하고 있으며 일본을 위해 일하는 밀정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독립운동을 와해하려는 범죄자이므로 마땅히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5년 3월30일 김달하가 자택에서 피살됐다. 그 정황을 전하는 여러 문서가 있는데, 그중 두 기록이 주목된다. 하나는 사건 두 달 만에 게재된 <동아일보>의 상세한 보도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 뒤 간행된 <약산과 의열단> 기록이다. 양자는 같은 점도 있지만 세부적으로 차이가 크다. 양자의 공통성을 기반으로 사건 골격을 재구성해보자.

밀정 처형 집행자는 둘이다. 반일 비밀결사 구성원인 이인홍과 이기환이다. 어떤 비밀결사인가. 자료에 따라서 의열단이라고도 하고 다물단 소속이라고도 한다. 김창숙이나 이은숙(이회영 부인) 등과 같이 당시 베이징에 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다물단’이라고 지목하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물단은 베이징을 주요 활동 공간으로 삼아 아나키스트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의열투쟁 단체였다.

처형 장소는 김달하의 자택이다. 베이징 북쪽 안정문 차련호동 서구내로 북문패 23호다. 식구 10여 명이 사는 규모가 큰 집이었다. 두 집행자는 권총으로 가족 구성원을 위협해 결박했고, 김달하를 외떨어진 공간으로 이끌고 갔다고 한다. 처형 방법은 교살이다. 권총을 사용하면 총소리가 집 밖으로 울려퍼질 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검 목에는 한 오라기 새끼줄이 감겨 있음이 발견됐다.

망명자임에도 가족이 많은 점이 눈에 띈다. 김달하는 1909년 이화학당에 재학 중인 19살 김애란과 결혼했다. 당시 42살이던 신랑과 나이 차이가 23년이나 지는, 몹시 치우친 혼사였다. 김달하는 두 번 상처했으며 아들 오형제를 둔 홀아비였다. 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김달하는 가난한 처가를 위해 집을 한 채 사주었다고 한다. 아무튼 김달하·김애란 부부는 결혼 뒤 5년 만에 베이징으로 이민 갔으며, 그곳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자 처갓집 식구를 불러들였다. 1921년 가을 장인, 장모, 처남 식구가 대거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집에는 김달하·김애란 부부가 낳은 두 딸 외에 전처 소생의 다섯 아들과 처갓집 식구까지 모두 12명이 살았다. 뒷날 미국 유학 이후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은 바로 김애란의 여동생이다.



1924년 중국 베이징의 조선인 망명자들. 앞줄 왼쪽부터 이회영, 미상, 김창숙. 뒷줄 오른쪽 김달하. 임경석 제공

김복의 편지가 발굴된 뒤


김달하 처형이 과연 적절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연구자도 있다. 김달하가 일본 밀정이라는 증거가 김창숙의 발언 외에 더 없지 않은가.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이자 베이징 조선인 망명자 사회의 유력자인 그에게 훼절할 만한 동기가 무엇인지 뚜렷하지 않다. 만에 하나라도 억울한 죽음일 가능성은 없는가. 김달하 사건을 조사하다보면 뇌리 한구석에 이런 의문이 남는다.

최근 김달하가 독립운동가의 귀순을 위해 노력해왔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발견됐다.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김복이 조선 주둔 일본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에게 보낸 편지가 발굴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상해임시정부는 200명이었으나 대부분 귀국하고, 현재 남은 사람은 60명입니다. 이 중 극렬분자는 40명에 이릅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선 20만~30만엔이 필요합니다. …김달하와 함께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을 북경에 모아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는 계책을 갖고 있습니다. 활동비로 김달하에게는 3만엔, 저에게도 2만엔을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이 편지에서 김달하가 망명 독립운동가들의 훼절과 조선 귀환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 대가로 거액을 청구했다는 점이 뚜렷이 드러났다. 뇌리 한구석에 남아 있던, 억울한 죽음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말끔히 가시는 것을 느낀다.


참고 문헌

1.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제국관헌 이력서> 33책, 774쪽, 1972년.

2. 臨時統監府總務長官事務取扱 統監府參與官 石塚英藏, ‘機密統發第536號, 金東億의 身分取調 照會에 대한 回答’, 1909년 4월8일.

3. ‘회록’, <서우> 제1호, 45쪽, 1906년 12월1일.

4. 支那特命全權公使 小幡酉吉, ‘公제92호, 獨立紀念日에서의 鮮人의 行動 報告의 件’,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 1, 1921년 3월5일.

5. ‘尋訪왔던 괴청년, 一去후에 流血慘屍’, <동아일보> 1925년 8월6일치 2면.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초판, 174~179쪽, 1947년 9월.

6. <시사기획 창: 밀정 2부-임시정부를 파괴하라> KBS, 2019년 8월20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이름 없는 이들도 쇠갈고리에 찢겼다

강용흘의 체험적 소설 <초당>에 묘사된 3·1운동



1920년대 말 미국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졸업할 때쯤의 강용흘(왼쪽). 서재에서 책을 읽는 50대 강용흘의 모습. 김욱동 제공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다시 펼쳐보고 싶은 문학작품들이 있다. 3·1운동 양상을 핍진하게 묘사했거나, 체험적 관찰 결과를 생생히 재현하는 작품들 말이다. 재미 작가 강용흘의 장편소설 <초당>이 그 두드러진 보기다.

강용흘은 ‘최초의 한국계 미국 작가’로 꼽힌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말에 북미로 건너가, 캐나다 댈하우지대학과 미국 보스턴대학, 하버드대학 교육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1931년 뉴욕의 찰스스크립너스선스출판사에서 영문소설 <초당>(The Grass Roof)을 발간했는데, 그의 첫 장편소설이자 자전적 성장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성인 세계로 진입하는 한 소년의 성장 과정과 내면을 그린다.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 조선의 현실이 잘 묘사됐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차츰 이해해가는 소년의 시선이 담겼다.(<초당>, 강용흘 지음, 장문평 옮김, 종합출판범우, 2015)


작가 강용흘도 경찰에 체포돼 고초


<초당>은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작가는 이 소설 덕분에 2년 뒤 존 사이먼 구겐하임 재단에서 창작기금 펠로십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에서의 반향도 컸다. 이광수는 ‘강용흘씨의 초당(상·하)’이라는 제하에 소설 내용을 소개하는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했다. 평론가 홍효민도 ‘초당을 독(讀)하고’를 써서 관심을 나타냈다. 6년 뒤에는 프랑스어 번역판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간행됐는데, 우수한 번역 작품에 주는 ‘할퍼린 카민스키’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반향은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 내 다른 소수민족 출신 작가들이 대다수 겪는 것처럼, 미국 문단과 학계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백인 남성 작가 위주의 미국 문단에서 그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다. 최근에야 비로소 <미국문학백과사전>(하퍼콜린스출판사, 2002)에 그의 작품이 소개됐을 뿐, 미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에 오르기까지는 좀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 같다.(<강용흘 그의 삶과 문학>, 김욱동, 서울대학교출판부, 4~5쪽, 2004)

문학사적 평가가 어떻든 간에, 강용흘의 소설은 역사학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묘사됐기 때문이다. <초당>은 3·1운동 전후 조선 사회의 내부에 대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한다.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3·1운동에 참가한 이름 없는 보통 사람들에 관한 서술이다. 그들이 겪은 격정과 고통을 생생히 형상화하고 있다.


강용흘 자신이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의 목격자이자 참가자였다. 1918년 함경남도 함흥 영생학교에서 중등교육과정을 졸업한 작가는, 이듬해 봄 서울에 있었다. 17살이었다. 어떻게든 미국에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는, 북미 선교사들과 친교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태평양을 건너려면 일본 여권과 여행 경비가 필요했는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을 그들만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로 올라간 강용흘은 호러스 G. 언더우드 여사가 영국 작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이 책은 지상에서 천국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우화로서,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됐다.

소년 강용흘은 3·1운동에 휩쓸렸다. 서울 거리의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돼, 종로경찰서에 갇혀 심문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길지는 않았다. 어렸기 때문에 사흘 만에 훈방됐다. 이 체험은 강용흘의 심리에 깊은 인상과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초당>에 그 정황이 상세히 묘사된 것을 보면 말이다.

길거리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게 체포되던 상황을 보자. 기마경찰이 시위 대열의 비무장 조선인들에게 쇠갈고리를 무자비하게 휘두르고 부상자가 속출했음을 증언한다. <초당>의 주인공 소년도 말 탄 일본인이 들고 있던 큰 쇠갈고리에 걸렸다. “갈고리는 내 목 안으로 파고들어 핏물을 옷에 뚝뚝 떨어뜨리고 뺨을 할퀴었으나, 다른 죄인들과 함께 줄지어 서라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순순히 그의 말에 복종했다”고 한다. 그는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상처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 경찰은 “툭하면 쇠갈고리를 우리의 머리와 어깨와 소매 위로 휘둘러 여러 차례 우리에게 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썼다.


<초당>, 미국 뉴욕 찰스스크립너스선스(Charles Scribner’s Sons)출판사, 1931년판 겉표지(왼쪽). <초당> 1931년판 속표지. 임경석 제공

사흘간 계속 된 몽둥이 고문


소년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조그만 유치장 안에 다른 소년 13명이 함께 수감됐다. “모두들 중상을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귀가 찢어졌고, 또 어떤 사람은 팔이 찢어졌다.” 유치장은 좁고 불결했다. “통풍 장치가 전혀 없었는데, 창문도 없고 우리가 전부 앉을 만한 여유도 없었다.” 수감 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시설 부족은 갇힌 자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증언이 더 있다. 3·1운동 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작가 심훈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두 간도 못 되는 방 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갇혀 지냈다. 여름에 더위가 시작되자 고통이 가중됐다. “날이 몹시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는” 조건에서, 수감자들은 다리도 뻗지 못하고 살을 맞댄 상태로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워야 했다.(‘어머님께’, 심훈, 1919년 8월29일.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다시 <초당>의 주인공에게로 돌아가자. 한밤중에 심문이 시작됐다. 새벽 1시에 호출된 소년은 “두 손을 앞으로 묶이고 수갑을 찬 채” 심문관 앞으로 불려갔다. 구타가 시작됐다. 너무 천천히 걸어도, 너무 빨리 걸어도 등허리를 차였다. 심문실에 들어갈 때도 구둣발에 차여 꼬꾸라졌다. 그는 조선어만 아는 척했다. 경관은 조선어를 할 줄 몰라 통역을 불렀는데, 통역은 천민 출신의 시골 사람이었다. 심문관은 이름, 나이, 직업, 종교, 그해 봄 서울에 오게 된 경위, 만세를 부르게 된 경위 등을 물었다. 질문과 답변이 오간 뒤, 심문관은 묘하게 웃으면서 “좋다, 매 좀 맞아봐라”라고 내뱉었다. 두 경관이 각목을 각각 집어들었다. 무자비한 매질이 시작됐다. 머잖아 소년은 기절해버렸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소년에게 물을 먹이더니 다시 질문을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새벽 5시까지 심문이 계속됐다. 이게 첫 번째 심문이었다.

똑같은 몽둥이 고문이 심문 때마다 되풀이됐다. 일요일 새벽에 시작된 심문은 수요일에야 끝났다. 경관들은 판단을 내렸다. 소년을 가리켜 부화뇌동하여 단순 가담한 자라고 규정했다. “독립운동 기간 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구경꾼인데 마음이 약해서 만세를 불렀다”라고. 결국 소년은 훈방 처분을 받았다.

우리는 훈방 처분을 받은 사람들조차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총독부 집계에 따르면, 3월1일부터 6월 말까지 검사 처분에 부친 3·1운동 피검자 수는 1만6908명이었다.(조선총독부, ‘소요사건검사처분인원표’, 1919년 7월8일.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其二>, 223~228쪽, 1978년)


소설엔 최팔용 언급도


그 숫자가 방대한 점이 놀랍다. 여기에는 검사국에 송치되기 이전에 경찰과 헌병이 즉결처분을 하거나 훈방한, 훨씬 더 많은 피검자가 배제됐음을 유의해야 한다. <초당>에는 공식 집계 과정에서 누락된, 이름 없는 참여자들의 수난이 생생히 묘사됐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경찰에게 고문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상습 행위였다. 피의자로부터 범죄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으레 채택하는 심문 방법으로 간주됐다. 일제강점기 일간신문에는 고문 피해 기사가 계속 실렸다. 은폐, 검열 등으로 보도되지 않도록 막는데도 그랬다. 고문이 반체제 정치범에게만 가해졌던 것은 아니다. 민사·형사상 통상적인 범죄 사건의 피의자도 피해가지 않았다.

<초당>에는 주인공의 숙부가 겪은 고문 체험이 상세히 기술됐다. 105인 사건에 연루돼 7년 징역형을 받은 숙부는, 출감 뒤 완전히 변해버리고 말았다. 끔찍한 고문을 겪은 탓이었다. 숙부는 열하루 동안 고문당했다. “양쪽 엄지손가락을 묶어 매달아놓았는데, 두 발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매달려 있었지. …마구 때리더구나. 자기들이 묻는 건 무엇이든 다 자백하라는 거야. 그러니 내가 자백한 것은 사실이 아니었어. 그저 네, 네 할 수밖에 없었지. 아이구 그 고문이라니. 얼마나 지긋지긋하던지! 열두 번도 더 당했어. 놈들한테 당한 것은 체면상 차마 다 말하지 못하겠다. 세 번은 기절을 했는데, 깨어나보니 나는 지저분한 마룻바닥에 눕혀져 있고, 한 경관이 내 입에 물을 먹이고 있더구나. …그들에게 채찍질당한 것이 모두 몇 번이었는지 일일이 다 기억나지도 않아. 그들은 나를 발가벗겨 양손을 뒤로 결박시켜놓고 매질을 해댔는데, 그 중간중간에 경관이 내 몸의 가장 부드러운 곳에다 담뱃불을 가져다 대더구나.”

강용흘은 <초당> 곳곳에서 고문의 실상과 폐해를 설명한다. 일본 식민지 통치가 저들의 선전과 달리 얼마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지를 폭로하고 싶었던 것 같다.

<초당>에는 3·1운동 지도자들을 묘사한 부분도 있다. 그중 단연 주목되는 것은, 2·8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개척자인 최팔용에 대한 것이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16년, 최팔용은 25살가량의 키가 크고 매우 창백한 청년이었다. 키는 컸으나 비쩍 말랐던 것 같다. 명주옷을 입은 그가 마치 잠자리같이 보였다고 한다. 최팔용은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을 근거로 하는 집회를 여럿 주도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그곳에는 조선인 유학생 대부분이 모였다. 기독교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었다. 그는 유학생들 내에서 비밀결사를 만들었고, 먼저 귀국한 유학생들이 국내에서 결성한 비밀결사와 지속적으로 연계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기록


강용흘이 최팔용에 대해 그처럼 잘 알았던 이유가 있다. 동향이었다. 함경남도 홍원이다. 최팔용은 홍원군 홍원면 남당리에서 태어났고, 강용흘은 인접한 운학면 산양리에서 출생했다. 두 집안은 겹으로 혼맥을 맺고 있었다. 최팔용의 누이는 강용흘의 당숙 장손과 결혼했고, 그의 아내는 강용흘 조모의 조카였다. 달리 말하면 최팔용은 강용흘의 진외가 사위였고, 최팔용의 누이동생은 강용흘의 당숙 집안 손자며느리였다. 두 집안 사이에 긴밀한 왕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초당>에는 3·1운동 전후 식민지 조선의 사회상에 관한 흥미로운 관찰 기록이 담겨 있다. 소설이니만큼 그 속에 적힌 얘기가 모두 사실은 아니겠지만, 그 시절 조선인들 삶의 모습을 반영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서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볼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1920년대 연애소설인 듯, 연애소설 아닌

심훈 소설 <동방의 애인> 속 상하이 망명객들



작가 심훈의 20대 모습. 압록강 철교와 뗏목. 신문 연재소설 <동방의 애인> 제1회 삽화(안석주 그림). 임경석 제공

심훈의 글 중 <동방의 애인>이란 장편소설이 있다. 신문 연재소설이다. 일제강점기 1930년 10월29일부터 12월10일까지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런데 연재소설치고 발표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은 점이 눈에 띈다. 두 달이 채 안 되는 단기간에 머물렀고, 연재 횟수도 39회에 불과했다. 까닭이 있었다. 내용이 불온하다고 판정한 식민지 통치기구 검열관에게 걸려서 연재가 중단됐다.

이 작품은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 서사 전개와 플롯(구성)이 불완전한 만큼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문학평론가들이 보기에 <동방의 애인>이 예술적 성취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일찍이 팔봉 김기진이 이 작품을 가리켜 새로운 통속소설, 혹은 마르크스주의 통속소설이라고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의미가 있다. 1920~21년 중국 상하이에 망명한 조선인 혁명가들의 삶을 형상화했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반일 독립운동가에게 최선의 활동 근거지였다. 일본 경무국 관료들은 상하이를 ‘해외 반일 조선인들의 음모 책원지’라고 일렀다. 그뿐만이 아니다. 상하이는 동아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 조선과 중국의 사회주의 단체가 그곳에서 싹을 틔웠다.


<조선일보> 1930년 10월29일치. 임경석 제공

검열에 걸려 두 달 만에 연재 중단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상하이에 머무른 조선인 수는 100명 정도였다. 대체로 상업이나 노동에 종사하는 평범한 교민이었다. 1919년부터 달라졌다. 망명객이 몰려들었다. 1919년 5월에 조선인 교민 수가 1천 명을 넘었다. 그 수는 이듬해까지 계속 늘어났다. 심훈은 상하이에 몰려든 망명객들의 삶에 돋보기를 갖다 댔다.

제목이 말하듯 <동방의 애인>은 사랑에 관해 얘기한다. 개인의 사적인 사랑이 아니었다. ‘작자의 말’에서 심훈은 자기가 묘사하려는 것은 ‘남녀 간에 맺어지는 연애’가 아니라고 썼다. ‘어버이와 자녀 간의 사랑’도 아니었다.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더 크고 깊고 변함이 없는 사랑’이었다. 민족과 계급에 대한, 공적인 사랑이었다. ‘그 사랑에 겨워 껴안고 몸부림칠 만한’ 애인을 그리려 한다고 썼다. 일제의 검열을 고려해 모호하게 말하지만, 피억압 민족과 계급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구상했음이 틀림없다.


소설 속 주인공 ‘동렬’이 현실 세계의 박헌영을 모델로 삼았다는 견해는 연구자들에게 널리 수용된다. 소설 속에서 동렬은 “뜨거운 정열의 주인공이면서도 좀체 자기의 감정을 표면에 나타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더라도 계획했던 일이 삐뚤어진 코스를 밟게 될 경우를 미리 점쳐보고, 그다음에는 이러저러해야겠다는 제2, 제3의 방침을 세워놓고서야” 그때 비로소 행동에 착수했다고 한다. “침착하고 두뇌가 면밀하여” 혁명단체의 ‘책임비서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헌영의 실제 성격도 그랬다. 경성고등보통학교 동급생 최기룡의 증언에 따르면, 학창 시절 박헌영은 말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잘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으나, 침착했고 사려가 깊었다고 한다. 학적부에 기재된 4학년 담임선생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성질’을 “온순 과묵하고 착실”하다고 표현했다.1

작가 심훈이 박헌영의 성격과 개인적 면모를 잘 아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심훈은 1915년 경성고보에 입학한, 박헌영의 동창생이었다.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사이였다.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을 같이 겪었을 뿐 아니라, 상하이 시절에 함께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심훈은 뒷날 쓴 시에서 자신과 박헌영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하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사이였다고 표현했다.2


박헌영은 동렬, 주세죽은 세정


동렬의 연인 ‘세정’이는 주세죽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눈이 맑고 살빛이 흰 여성으로 묘사됐다. “총명, 바로 그것인 듯한 맑은 눈”을 가졌으며, “살갗은 희나 좀 강팔라서 성미는 깔끔할 법하여도 그야말로 대리석으로 아로새긴 듯한 똑똑한 얼굴의 윤곽”을 지닌 인물이다. 3·1운동 때는 여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운동을 주도했고, 상하이 망명을 결행할 정도로 용기 있는 여성으로 그렸다.

현실에서 주세죽도 그랬다. 그녀는 용모가 빼어났다. ‘동양화 속에서 고요히 빠져나온 듯한 수려한 미인’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 3·1운동에도 참가했다.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시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1개월 동안 유치장에 수감돼야 했다. 머잖아 주세죽은 상하이에 망명했으며, 사회주의를 수용해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와 고려공산당 조직에 가담했다. 소설 속에서 세정과 동렬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주세죽과 박헌영은 결혼식을 올렸다. 뒷날 제1차 공산당 사건 때 작성된 박헌영의 피고인 조서에 따르면, 둘은 1921년 봄에 부부가 됐다고 한다.

또 한 사람, 중요한 등장인물이 있다. 동렬의 절친한 벗 ‘박진’이다. 그는 성격이 동렬이와는 대조적이었다. “걱실걱실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덤벙대는 듯하나, 의롭지 못한 일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움터로 나설 수 있는 정의감이 굳센 용감한 청년”이었다. 3·1운동 당시 ‘××공보’라는 지하신문 발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체포됐으며, 상하이에 망명한 뒤로는 ‘○○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는 것으로 묘사됐다. 부인이 있었다. 일찌감치 부모 뜻에 따라 구식 결혼식을 올려서 “시골집에 마음에 맞지 않는 아내가 있”다고 서술됐다.

‘박진’의 모델은 곧 김단야였다고 판단된다. 소설 속 박진과 마찬가지로 김단야도 기혼이었다.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에는 아내 윤재분(?∼1974)이 살고 있었다. 어린 아들 하나, 딸 하나를 키우면서 평생 시골집을 지키고 살았다. 김단야는 3·1운동에도 참여했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신문 발간에 가담했고, 고향에 내려가서 농민시위를 조직했다. 관헌에 체포돼 태형 90대라는 야만적인 형벌을 받았다.

상하이 망명 뒤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도 사실이었다. 뒷날 김단야가 쓴 자서전 기록에 따르면, “나는 1920년 1월 중순 상하이를 떠나 그때 조선인 혁명가들을 위한 군사학교가 있던 광둥으로 갔다”고 한다. “이 군사학교는 친일파 돤치루이의 북양(북경) 정부에 대적하는, 쑨원 지도하의 광둥 정부에 의해 설립된 것”이었다. 그러나 유학 생활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해 4월에 되돌아와야 했다. 쑨원파가 광시 군벌 루룽팅의 군사행동에 밀려서 광둥에서 추방된 탓이었다.3

김단야가 광둥에 있는 군관학교에 한때 입학한 정황은 심산 김창숙의 회고록에도 나온다. 유림을 대표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창숙은 그즈음 조선인 청년 간부 교육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광둥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년 망명객들을 군사와 정치 분야 간부로 양성하는 사업이었다. 첫 번째 성과가 나타났다. 청년 50명을 뽑아 광저우에 있는 군관학교와 고등교육기관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시켰다. 청년 명단 일부가 알려졌는데, 그 속에 김주(金柱)가 있었다. 김단야가 상하이 망명 시절에 썼던 가명이다.4


중국 상하이에 머물 때의 박헌영과 김단야, 주세죽(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실존 인물의 행적과 다른 부분도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공통점이 있다.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사회주의를 수용했다. 귀착점은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었다. 동렬, 세정, 박진 등은 3·1운동 직후 망명지 상하이에서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한 초창기 마르크스주의자를 표상하는 캐릭터(인물)였다. 심훈은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출현하는지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있다. 소설 속 캐릭터의 행적을 현실의 특정인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등장인물의 행적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설 속 동렬의 행적을 모두 박헌영의 그것과 같다고 여기면 안 된다.

예를 들어보자. 소설 속에서 동렬은 1921년 7월 다른 두 동지와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자동차로 고비사막을 넘는 노정을 택했다. 몽골을 지나 러시아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일정이라든가 세부 묘사가 생생한 까닭에, 독자는 진짜 박헌영이 모스크바로 향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박헌영은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단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 자격으로 대표자를 선정·파견했을 뿐이다.5

또 있다. 소설 첫머리에 박진이 열차 편으로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잠입하는 드라마틱한(극적인)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미 국내에서 잡지사 기자라는 합법 신분을 확보한 동렬과 접선하는 장면이 뒤를 잇는다. 이 장면들도 실제와는 다르다. 1922년 4월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인 박헌영과 김단야, 임원근 세 사람이 국내 공작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게 사실이다.

그 외에 박진이 군관학교를 졸업하고서 장교로 임관했다거나, 동렬과 박진이 고등보통학교 동창생이라는 언급 등이 있다. 모두 실제와는 다르다. 심훈이 고안한 픽션(허구)이었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요컨대 소설 속 주인공들을 실재하는 특정인을 모델로 그려낸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역사적 사실로 구성된 것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물의 한 측면이 반영됐을 뿐이다. 게다가 픽션의 요소, 지어낸 얘기가 뒤섞여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심훈 자신도 상하이 망명객


심훈은 1920~21년 상하이에 머무른 적이 있다. 자신이 상하이 망명객이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녹여서 소설을 썼다. 경험에서 우러나는 서술이 역사학자의 눈길을 끈다. 어떤 사료보다 생생하게 역사적 진실을 전달해준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상하이 거리 풍경을 묘사한 것이나, 그 도시에서 막 싹튼 사회주의 사상의 수용과 단체 활동 모습을 서술한 것이 그 예다. 국경도시 신의주를 통해 열차 편으로 잠입하는 비밀 활동 참가자의 행동과 심리 묘사도 압권이다. 그를 색출·체포하려는 경찰, 헌병, 세관 관리 등의 언행도 흥미롭다. 역사학자들은 <동방의 애인>에 주목한다. 1920년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의 내면을 묘사하고, 특히 사회주의가 처음 수용되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 문헌

1.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56~57쪽, 2004.

2. 심훈, ‘박군의 얼굴’, <沈熏文學全集> 61쪽, 1927년 12월2일.

3.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4. 김창숙, ‘벽옹 73년 회상기’, <국역 심산유고>, 723쪽, 1979년.

5. 임경석, ‘극동민족대회와 조선대표단’, <역사와 현실> 제32호, 한국역사연구회, 1999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혁명가의 첫 페이지에 기록된 3·1운동

김단야가 말년에 쓴 ‘자전’ 통해 3·1운동에서 한 역할 확인할 수 있어


1919년 3월24일 경북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 시위사건 판결문에 김단야의 본명 ‘김태연’이 쓰여 있다. 임경석 제공

김단야는 생애 말년에 자신의 혁명운동 참여 내력에 관해 글을 썼다. ‘자전’(自傳)이라는 제목의 10여 쪽짜리 원고였다. 이 글에서 그는 언제 처음 혁명운동에 참여했는지를 밝혔다. 바로 3·1운동 때였다. 19살 나던 해, 배재고등보통학교 3학년이던 시절에 혁명적 삶을 시작했노라고 썼다.

명단에 누락된 배재고보 학생 대표


“나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 사본을 입수하여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많은 복본을 만든 후 그것들을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성에 있는 모든 고등보통학교의 대표들로 구성된 지하 학생위원회의 조직자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연락을 취하면서 시위에 학생 대중을 동원하고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위원회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역할을 분담하여 선언서를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했고, 나도 그것을 영국 영사 및 프랑스 선교사에게 직접 전해주었다.”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이란 바로 2·8독립선언서를 가리킨다.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이 고보 재학생 김단야에게 큰 감화와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필사로 많은 복본을 만들었다. 동료 학생들에게 배포하기 위해서였다. 김단야는 여러 차례 필사로 내용을 숙지했을 것이다. 2·8독립선언서의 정세관과 정책론 등이 그의 내면에서 큰 공명을 얻었으리라고 판단된다.

김단야가 경성 시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학생위원회에 참여했다는 문장이 주목된다. 그는 배재고보 대표 자격으로 그 일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전야에 이러한 비밀결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느껴진다. 종래에도 학생단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다. 1919년 1월 초순과 하순에 중국음식점 대관원에서 경성 시내 각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이 몰래 모임을 열어 학생 지도부를 구성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른바 ‘대관원 회합’이었다. 하지만 지도부는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로 이뤄졌을 뿐, 고보생 대표들은 포함하진 않았다. 고보별 학생 대표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2월 초쯤 전문학교 학생단 대표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해 고보생 대표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때 망라된 고보와 그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다.

경성고보: 박쾌인, 김백평, 박노영. 중앙학교: 장기욱. 보성고보: 장채극, 전옥결. 경신학교: 강우열, 신창준. 선린상업: 이규송, 정세현.


이 명단은 완전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시 경성에는 8개 고등보통학교가 있었는데 그중 배재고보·휘문고보·양정고보 세 곳이 누락돼 있다. 이 명단 외에 숨겨진 사람이 더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김단야의 진술은 이런 역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게 해준다. 누락된 세 학교 가운데 배재고보 학생 대표가 누구였는지는 이제 짐작할 수 있다.


미성년자여서 매 90대 맞고 석방


김단야에 따르면, 고보생 대표들로 이뤄진 비밀 학생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유기적인 연락을 했다. 바로 민족대표 33인을 가리킨다. 이 진술에서 우리는 민족대표와 연계하면서도 그와 독립적으로 비밀결사 2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전문학교 학생 대표 조직과 고보생 대표 조직이다. 이 중 고보생 대표 조직, 곧 김단야가 말하는 비합법 학생위원회는 3·1운동에 즈음해 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첫째, 만세 시위 현장에 학생 대중을 동원한다. 둘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시내 곳곳에 살포한다. 셋째, 독립선언서를 경성 주재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한다.

경성의 외국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대목에 유의하자. 기존 연구에 의하면 이 역할은 배재고보 교사 김진호가 맡았다고 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3월1일 정오에 각자 맡은 외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실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국영사관에 전달한 장용하뿐이었다. 그는 김진호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2월27일 중국영사관의 위치와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사전 답사를 했다. 이튿날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았고, 3월1일 정오 중국영사관에 가서 이를 전달했다고 한다.

기존 연구 성과와 김단야의 진술 사이에 역할 책임자가 누구였는지에는 불일치하는 점이 있지만 공통점도 있음에 유의할 만하다. 배재고보 학생 대표들이 선언서 전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김단야와 장용하 등이 영국영사관과 프랑스 선교사, 중국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준비 과정에만 멈추지 않았다. 김단야는 3월1일 이후에도 쉼 없이 반일운동에 참여했다. 그의 진술을 들어보자.

“3월1일 후에 나는 학교 동무들과 함께 ‘반도의 목탁’이라는 이름의 지하 인쇄물을 만들었다. 3월 중순에 고향 쪽으로 내려가 시위를 두 곳에서 성공적으로 조직했으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 후, 징역 3개월 대신에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는데, 그 이유가 판사의 말로는 내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3일에 걸쳐 매 90대를 맞고 난 후 석방되었다.”


김단야 등이 소속된 비밀결사가 간행한 ‘반도의 목탁’ 제2호 필사본. 임경석 제공

시위로 체포돼, 검거되지 않은 김기진


지하 인쇄물 ‘반도의 목탁’ 제작에 참여했다는 정보에 눈길이 간다. 만세시위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19년 3~4월에는 수많은 지하 인쇄물이 조선 전역에 유포됐다. 경성에서 발간된 정기간행물만 해도 <조선독립신문> <자유민보> <진민보> <국민신보> <경성단신문> <자유신종보>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경고문’ ‘격문’이라는 제목 아래 숱한 반일 인쇄물이 나왔다. ‘반도의 목탁’은 경찰에게 적발된 탓에 관련자들이 누군지 이미 알려져 있다.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배재고보 3학년 학생 장용하·이봉순·염형우와 경성고보생 이춘봉, 중앙학교 학생 서정기 등 고보생 5명이 주역이었다. 이들은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각각 1∼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이 ‘반도의 목탁’ 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체포되지 않은 구성원들이 있었다. 김단야 외에 김기진이 있었다. 뒷날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을 개척한 팔봉 김기진도 구성원이었다. 배재고보 3학년이던 김기진은 같은 반 반장이던 장용하와 함께 비합법 유인물을 만드는 작업에 참가했다고 회고했다. 3월1일 밤부터 장용하의 하숙집에서 여러 동지들과 함께 새우잠을 자면서 인쇄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구는 등사판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서울 관훈동에서 소격동으로 이르는 골목을 걸으면서 집집마다 대문 안으로 인쇄물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김기진은 3월5일 남대문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까닭에 이 비밀단체 검거 사건에서 벗어났고, 김단야는 3월 중순 귀향함으로써 그렇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경북 김천 개령면 동부동이 김단야의 고향이었다. 귀향한 이후에도 그는 쉬지 않았다. 고향에 내려간 3월 중하순은 3·1운동이 ‘개시 국면’을 넘어 시위 군중과 탄압 군경 사이에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는 ‘파상 국면’에 있었던 때다. 김단야는 김천의 청년들을 결속해 만세시위를 꾀했다. 그 결과 두 차례 만세시위를 성사시켰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은 3월24일 고향 마을 뒷산에서 벌어진 산상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이 만세시위는 일본 관헌의 탄압에 노출되고 말았다. 만세시위를 벌였다고 의심받는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체포됐는데 그중 네 사람이 재판에 회부됐다. 20~38살 청년들이었다. 그 속에는 학생 김태연(金泰淵)이 포함됐다. 김태연은 바로 김단야의 본명이었다. 피고인들은 그해 4월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징역 3개월에 처해야 하지만 나이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태형 90대에 처한다고 선고했다.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사실은 3·1운동 수감자가 급격히 늘어나서 수형 시설이 부족했기에 그런 결정을 했던 것이다.

태형이란 엉덩이를 나무 막대로 내려치는 형벌을 말한다. 조선 강점 직후 1912년 ‘조선태형령’으로 법제화된, 일본 제국주의의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제도였다. 식민지 토착민인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차별적이자 모욕적인 징벌이었고, 인간 몸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야만적인 형벌이었다. 김단야와 그 동료들은 하루 30대씩 사흘에 걸쳐 모두 90대의 매질을 당했다.


3·1운동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을 무렵의 김단야. 임경석 제공

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


김단야는 3·1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 숱한 무명의 유공자와 희생자들처럼 그의 3·1운동 참가 사실도 오랫동안 역사의 그늘에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김단야의 3·1운동 행적이 밝은 햇빛 아래 드러났다. 그는 3·1운동 발발 이전에 이미 비밀 학생위원회 일원이었고, 시위가 일어난 뒤에도 비밀결사 ‘반도의 목탁’ 팀의 구성원으로서 반일 유인물의 제작과 배포에 헌신했다. 3월 중순에는 농촌 만세시위운동 조직화에 참여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야만적인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3·1운동은 김단야에게는 혁명가로서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비밀결사 참여, 외국 망명, 사회주의 수용, 귀국 도중 체포와 형무소 수감,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 결성 등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는 김단야 혁명운동사의 첫 페이지에는 3·1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참고 문헌

1.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전),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2. ‘3·1항쟁기의 한국학생운동-국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 <논문집> 8, 숙명여자대학교, 5쪽, 1968년.

3.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2>, 탐구당, 166쪽, 1966년.

4. ‘배재고등보통학교 3년생도 장용하 등 판결’, ,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229쪽, 1971년.

5. 김팔봉, ‘片片夜話 71, 배재와 3·1운동’, , <동아일보> 1974년 5월23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1925년 9월24일 경성에 ‘적기’가 나부꼈다

식민지 조선 사회에 다면적 영향력 행사한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초대 소련총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왼쪽).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임경석 제공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이 개관하던 날, 일본 경찰들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혹여 은밀하게 접근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 영사관 건물 안팎에 배치된 정사복 경찰들은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날은 1925년 9월24일이었다. 낮 12시 세 발의 폭죽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것을 신호로 소련의 붉은 깃발이 게양됐다. 하객으로 참석한 총독부 몇몇 관리와 영국·프랑스·중국 영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박수를 쳤다. 경성 하늘에서 적기가 힘차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경성 하늘에 내걸린 모습은 대단히 이채로웠다.

일소기본조약으로 소련총영사관 개관


경성에 소련 외교기관이 들어설 수 있었던 근거는 일소기본조약이었다. 1925년 1월20일 소련과 일본 사이에 체결되고 2월25일에 비준된 조약이었다. 정식 명칭은 ‘일본국 및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간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 법칙에 관한 조약’이었다. 이는 소련과 일본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기본 원칙을 정한 것으로 양국 간 첫 번째 조약이었다.

소련 외교관이 하나둘 입국했다. 경성총영사관의 초대 총영사 바실리 샤르마노프는 일본 도쿄에서 부임했고, 부영사 드미트리 무르친은 중국 하얼빈에서 전근했다. 이들은 가족과 행정 실무 요원 몇 명을 인솔했다. 총영사관에 딸린 러시아인은 12명이었다. 이 중 6명은 가족이고, 6명은 구체적인 소임을 맡은 외교부 임직원이었다. 총영사, 부영사, 통역, 사무원, 타이피스트, 고용인이 한 팀이었다. 이외에 조선인 조력자 서너 명이 고용됐다. 통역하고 신문기사를 스크랩, 번역하는 이들이었다.

총영사관 건물로 경성 시내 정동에 있는 대한제국 시절의 옛 러시아대사관이 제공됐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뒤 8년간 비어 있던 건물이었다. 소련 쪽은 수만엔의 수리비를 들여 영사관 구내의 정원과 길을 단장했고 출입문도 새로 만들었다.


일 경찰, 조선인 사회주의자 움직임 주시


경찰은 소련총영사관 안팎을 면밀히 주시했다. 영사관 존재 자체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심리적 자극과 충동을 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를 비치해 일반인 출입을 허용하는 총영사관 도서실이 치안 교란의 원천이 될 우려가 있었다. 매년 11월7일 열리는 러시아혁명 기념일 행사도 그랬다. 축하차 총영사관을 방문하거나 축전을 보내는 조선인들이 있었다. 어느 경우나 다 엄중한 경계 대상이었다.

경찰이 감시한다는 사실을 웬만한 조선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총영사관을 공공연히 출입하는 자는 적었다. 총영사관 쪽도 조심했다. 일본 관헌과 마찰을 피하고 싶어 했다. 적어도 겉으로는 조선인들의 총영사관 출입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총영사관 출입문을 폐쇄해 조선인 출입을 막기도 했다. 1926년 6월 망국의 군주 순종 황제가 운명했을 때 그랬다. 3·1운동 같은 독립운동의 일대 고조 현상이 재현될지도 모른다고 예측되자 일시적으로 출입문을 폐쇄하기도 했다.

경찰이 보기에, 소련총영사관이 조선인 사회주의자를 지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조선 내외의 비밀 연락 거점이 되거나, 불온사상의 선전 기지가 될 가능성도 매우 적었다. 그곳에서 비밀결사 운동자금이 유출되거나 전달될 우려도 없었다. 일본 경찰은 그처럼 판단했다.


조선어 신문, 조선-소련 관계 증진 기대감


소련총영사관 관련 기사는 일간신문의 뜨거운 소재였다. 경성 하늘에 적기가 펄럭이게 됐으니, 매우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붉은색만 봤다 하면 탄압하기 위해 죽을 둥 살 둥 덤벼드는 경찰 당국도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됐다고 풍자하는 신문도 있었다. 영사관 주변에 경찰을 겹겹이 배치할 터이니 순사들로 이뤄진 ‘순사성’을 쌓을 게 틀림없다고 비꼬는 만평도 실렸다.

이제 막 부임한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샤르마노프’ 총영사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의 초점이 됐다. 40살, 모스크바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직업 외교관이었다. 그가 경성역에 도착한 것은 1925년 9월5일 저녁 7시였다. 직전 근무지인 도쿄 소련대사관을 떠나서 기차편으로 새 근무지에 왔다. 일행은 둘이었다. 통역 겸 수행원인 ‘게오르기 키바르친’이 동행했다. 그는 레닌그라드동양어학전문학교 학생으로 20대 젊은이였다. 두 사람은 경성역 인근에 있는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땅히 영사관에 짐을 풀어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총독부와 교섭해 영사관 부지를 받고, 돈을 들여 수리하며, 영사·대민 업무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그가 새로 해야 할 일이었다.

호텔 방에 든 지 얼마 안 돼 <조선일보> 기자가 찾아왔다. 인터뷰 요청이었다. 기민함 덕분에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들보다 먼저, 9월6일치 지면에 신임 소련 총영사의 동정과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신문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소련 총영사 기사를 쏟아냈다.

일간신문들 지면에는 감지할 수 있는 공통성이 있었다. 기대감이었다. 총영사관이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를 증진하는 데 공헌하기를 바라는 심리였다. 신문 지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심리 현상은 감격이었다. 한 예로 <조선일보> 1925년 9월7일치 사설을 보자. ‘소련영사 부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논설부 기자 신일용이 쓴 사설은 조선 사람들의 격정을 토로한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소슬한 경성의 가을 하늘에 적기가 나부끼는 현실에 무한한 감격을 느낀다고 썼다. 적기는 정의를 위해 헌신한 많은 의사의 피로 물들인 깃발이며, 그것은 인류 역사의 투쟁 시기를 표상하는 상징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튿날인 9월8일치 <조선일보> 사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또 신일용이 펜을 들었다. ‘조선과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라는 제목이었다. 조선의 민족적·계급적 해방운동은 소비에트러시아의 세계혁신운동과 보조를 일치해서 나아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설을 문제 삼았다. 사유재산 제도를 부인하고 일본제국의 국체를 타파하는 선동적인 기사라고 간주했다. 중벌을 가하려 했다. 9월8일치 신문에 압수 처분을 내리고 그다음 날에는 <조선일보>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다. ‘정간’은 신문 발행을 중단시키는 행정처분으로 신문 경영에 치명적인 조처였다. 신문사 존폐와 관련된 심각한 억압이었다. 집필자도 무사하지 못했다. 신일용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됐다.


고려공청 책임비서가 발급한 김단야의 위임장. 임경석 제공

총영사 인터뷰한 기자는 조선공산당 4인방


샤르마노프 총영사는 본국 외무성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경성에 도착한 직후 상황이었다.

“현지 신문기자들을 만났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모스크바에서 남만춘으로부터 신문사에서 일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 15명의 성명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Gr. 동무에게서 얼마 전 그 명단 속에서 가장 믿을 만한 4명의 이름을 보충적으로 받았습니다. 내가 도착한 지 20분 뒤에 경성역 호텔에 그 명단 속에 있는 한 사람이 신문기자 자격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그처럼 빠른 접근에 깜짝 놀랐고 의혹을 품었습니다. 얼마 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하는 김단야인데, 그의 기자 신분을 이용하여 곧바로 나를 만났던 것입니다.”

경성에 도착한 직후, 호텔방에 들어간 지 불과 20분 만에 신문기자가 방문했다고 한다. 그 기자는 <조선일보> 소속의 김단야 기자였다. 샤르마노프 총영사는 그를 선뜻 믿을 수 없었다. 너무나 빨랐기 때문이다. 경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소재 정보를 그처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을까? 경찰 지시를 받고서 일하는 사람 같았다.

다행히 샤르마노프에게는 믿을 만한 동지들의 명단이 있었다. 두 종류였다. 그중 하나는 15명의 이름이 적혔는데, 모스크바에 있을 때 남만춘에게서 받았다. 남만춘은 조선공산당의 국제당 가입 외교를 지원하려 맹활약 중인 유명한 혁명가였다. 다른 하나는 가장 믿을 만한 4명의 이름이 쓰인 명단이었다. ‘Gr. 동무’라는 이가 제공했다고 한다. 아마 ‘그리고리 보이틴스키’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는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대회 개최와 그 당의 국제당 가입을 맨 앞에서 지휘한 국제당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다.

샤르마노프 총영사가 김단야를 신뢰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Gr. 동무의 리스트’ 덕분이었다. 4명의 동지란 누군가. 조선공산당에서는 김재봉과 김찬이고, 고려공산청년회에서는 박헌영과 김단야였다. 이 네 사람이 보이틴스키가 지목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터였다. 하지만 김단야는 신뢰 구축을 위해 위임장까지 제출했다.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이 발행한 1925년 9월10일치 위임장이었다. 수신자는 샤르마노프 총영사였다. 이 조그만 증빙 문건에는 김단야가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이라는 점, 현안에 관한 상호 협의를 위해 파견한다는 점 등이 명시돼 있었다.


국내 사회주의-국제기구 연락체계 구축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설립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다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언론 역사에 부침을 초래했고, 사회주의 운동사의 진행 과정에도 족적을 남겼다. 특히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국외 국제기구 사이에 또 하나 은밀한 연락체계가 구축됐음이 주목된다. 이 체계를 개척한 사람은 <조선일보> 기자 김단야였다. 비밀결사 고려공청 간부이기도 한 그는 그 뒤로도 국제공산당과 밀접한 연계를 설정하는 데 남다른 성과를 올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1.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神戶, 不二出版, (復刻板), 444~448쪽, 1984년.

2. ‘동아만화, 이 주위에 순사성이나 쌓을는지?’, <동아일보> 1925년 9월7일치.

3. ‘사설, 赤露 영사 부임에 際하여’, <조선일보> 1925년 9월7일치.

4. Билль(빌리), Дорогие товарищи(친애하는 동무들),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6 л.19-24, 1925년 9월19일.

5. Secretary of C.E.C. YOUNG COMMUNIST LEAGUE of KOREA PARK Hun Young, Mandate of Comrade Kim Dan Ya: To Comrade Sharmanoff, p.1,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257 л.8, 1925년 9월10일.






임경석의 역사극장

‘김단야 기자’가 상하이에 특파된 까닭은

1924년부터 2년간 기자였던 김단야,
기자 신분증은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 역할에도 유용하게 쓰였으니…


김단야. 임경석 제공

김단야도 합법 신분을 가진 때가 있었다. 1924~25년 두 해가 그랬다. 24~25살 젊은 때였다. 그땐 공공연하게 식민지 수도 경성의 대로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다. 한평생 혁명운동에 몸담은 까닭에 비합법 영역에서 남의 이목을 피해 다니거나 외국 여러 나라로 망명했던 그로서는 예외적인 시절이었다.

국경도 넘고 철도 여행도 하는 신분증


1924년 1월 신의주 감옥에서 출옥한 뒤 그러한 자유를 얻었다. 수감된 이유는 사회주의를 선전했다는 혐의였다. 압록강을 넘어 국내로 잠입하려다 국경에서 그만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실제로는 1년10개월이나 갇혔다. 경찰 신문과 검사국 예심 기간이 터무니없이 길었던 탓이다.

김단야는 출옥 후 곧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3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공청)에 복귀해 중앙총국 위원에 선임됐다. 체포될 때 재임했던 자리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단야는 합법 공개 영역에서도 활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그해 4월에 설립된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합법·비합법 양 영역에서 조선 청년운동의 진행 과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의 합법 신분이 공고하게 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신문사 덕분이다. 김단야는 그해 8월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 신문기자 직은 비밀결사의 중앙 간부 역할을 하는 데 유용했다. 기자가 되면 여러 활동의 편의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철도를 이용한 지방 출장이 가능했다. 식민지 시대 철도 여행은 비합법 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기차역 개찰구와 열차 속에는 어느 때건 경찰이 상주했다. 그들은 의심스러운 자가 있으면 불시에 검문했고, 소지품 검사를 했으며, 조금만 이상하다 싶으면 연행하기를 능사로 했다. 그러나 기자 신분증만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심지어 국경도 쉽게 넘을 수 있었다. 신의주를 지나 중국 영토로 나가거나,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도항하는 데에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김단야는 합법 신분을 활용하여 각 지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표면상으로 취재 활동에 종사함과 동시에 이면으로는 비밀결사 세포단체들과 연락·통신하는 업무에 임했다. 경찰이 막아서는 곳이라면 어디든 신문사 명함만 제시하면 그만이었다.


기자가 되면 선전도 손쉬웠다. 해방 이념과 자유 서사를 전파하는 데에는 신문 지면 이상으로 큰 영향력을 갖는 게 더 없었다. 비록 총독부의 검열과 정간의 위협 때문에 표현을 적실하게 하는 데에는 제한이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획득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었다. 김단야는 그 여지를 잘 활용했다. 그가 자기 명의로 <조선일보> 지면에 기고한 글들이 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주목을 모은 것은 ‘레닌 회견 인상기’라는 제목의 11회 연속 기사였다. 레닌 사후 1주년을 기념하여 1925년 1월22일부터 2월3일까지 연재한 글이었다.


레닌 회견 내용을 녹인 놀라운 기사


이 글은 레닌 사망 1주년을 맞아 각 신문사가 기획한 특집 기사들 가운데 가장 돋보였다. 김단야는 레닌과 회견한 경험이 있었다. 1921년 말 1922년 초 극동민족대회 참석차 모스크바에 갔을 때 조선대표단 일원으로서 레닌과 회견했던 경험을 기사 속에 녹여넣었다. 이 연속 기사는 독자를 놀라게 했다. 극동민족대회 조선대표단의 활동상을 합법적인 신문 지면에서 공공연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세계사적 영향력을 지닌 레닌과 직접 면대한 조선인의 기록이라는 점, 조선일보사 현직 기자가 직접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점 등도 눈길을 끌었다.

김단야는 민완한 신문기자였다. 국내외 정세에 밝고 문장력이 좋았다. 외국어 능력도 출중했다. 중등학교 이상 교육을 이수한 조선인이라면 다들 할 줄 아는 조선어와 일본어 외에도 두 개의 외국어를 더 구사했다. 중국어와 영어로 외국인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김단야의 기명 기사 가운데 상하이에 관한 것이 있다. ‘제주도를 조망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와 ‘두 번째 상해를 밟고, 신년을 맞으면서’가 그것이다. 이 글들은 상하이에 가는 노정에서 겪은 일과, 상하이라는 공간이 조선인의 삶과 역사에 비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묘사하고 있다. 그중 한 소절을 읽어보자. 김단야의 내면 의식과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조금씩 흔들리던 선체는 아주 자는 듯이 침착하여졌다. 둥그런 유리창을 통하여 멀리 푸른 물결 저편에 뫼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것이 겨우 곤한 잠을 채 깨지 못한 나의 시선을 물들인다. 나는 정신을 차려 한참 주목했다. (중략) 과연 큰 섬이었다. 그러나 크고 높은 산이었다. 그 섬이 즉 산이오, 그 산이 즉 섬이었다. 그것이 곧 제주도인 한라산이오, 한라산인 제주도이었다.”

김단야는 남해 먼바다를 항해하는 여객선 로쿠칸마루 선상에서 멀리 제주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실 유리창을 통해서였다. 일본 모지항에서 출발하여 49시간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항로였다. 1924년 12월30일 오후 2시에 출항했으므로, 상하이 도착 예정 시간은 해가 바뀌는 1925년 1월1일 오후 3시였다.

그는 제주도를 바라보면서 고국 사랑을 느꼈다고 썼다. “아! 저것이 과연 제주도이다. 나의 고국의 산천이다”라는 탄성이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저 땅에서 발을 옮겨놓은 지가 불과 3일이 못 되는”데도 그랬다. 경성을 떠난 것이 3일 전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땅이 새삼스럽게 그립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본 식민지 통치하에서 발간되는 신문에 싣는 글이었음을 고려하면, 매우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표현이었다.


상하이 특파원 김단야가 송고한 첫 번째 기사 ‘제주도를 조망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 <조선일보> 1925년 1월26일치

따로 특파원을 파견해야 했을까


그는 갑판에 올라갔다. 혹여 흰옷 입은 사람이라도 보이겠나 싶어서였다. 마침 망원경을 지닌 중국인 승객이 곁에 있었다. 김단야는 말을 걸었다. 망원경을 좀 빌려달라고 중국어로 청했다. 하지만 그 중국인은 잘 못 알아들겠다고 답했는데, 광둥어였다. 김단야는 그제야 그 사람이 광둥 사람인 줄 알고서 다시 광둥어로 청했다고 한다.

김단야가 중국어에 더하여 광둥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상하이·광저우 체류 경험이 놓여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그해 1919년 12월에 망명을 단행한 김단야는 1922년 4월 입국을 시도할 때까지 주로 상하이에서 체류했다. 1920년에는 사관학교에서 수학할 목적으로 광저우에서 4개월간 머물기도 했다.

김단야가 상하이로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저 땅을 떠난 지 불과 3일도 못 됐다”는 문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조선일보사의 사명을 받고서 중국 특파원 자격으로 상하이로 가는 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취재하려고 했는가. 상하이에서 기고한 두 기사만으로는 김단야 특파원의 소임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상하이로 가는 노정기라든가 상하이 조선인 사회에 관한 스케치 기사는 흥미롭기는 하지만, 따로 특파원을 파견할 것까지는 없는 평범한 테마였다. 도대체 김단야는 왜 상하이에 출장을 갔을까?

필자는 최근에야 이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김단야가 1937년 2월에 작성한 <자서전>을 보았는데, 그 기록에 1924년 말~1925년 초 그의 상하이 출장의 비밀이 담담하게 적혀 있었다.

“1924년 말 상해 소재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원동국은 ‘상해로 한 동무를 보내 당과 공청의 사업 활동에 관해 보고하도록 하라’고 내게 알려왔다. 내가 보고자로 지목되었다. 나는 <조선일보>에서의 나의 위치를 이용하여, 전쟁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상해로 임시 특파원을 보내야 한다고 신문사 사장을 설득했다. 그때 마침 쑨촨팡(孫傳芳) 장군(장쑤성장)과 루융샹(盧永祥) 장군(저장성장)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상해와 중국어를 아는 사람으로서 내가 꼭 가야 한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김단야가 상하이로 여행하는 내면의 이유는 비밀결사 운동의 필요에서 나왔다. 상하이에 소재하는 국제당 원동국과 경성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비밀결사 집행부 사이에 업무 연락의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김단야는 당과 공청의 내막을 잘 아는 핵심 간부인데다 합법 신분이 튼튼했다. 국경을 넘어서 오가는 데 그만큼 적임자가 없었다. 그뿐인가. 그는 중국어와 영어 구사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과 공청의 집행부를 대표하여 국제당 원동국과 책임 있는 업무를 협의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외부로는 군벌 취재, 내부로는 비밀결사 운동


상하이로 특파되기 위해서는 신문사 경영진을 설득해야 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은 사회적으로 신망이 높은 이상재가 추대되어 있었고, 상무이사에는 신석우가 재임하고 있었다.

김단야가 설득했다는 경영진은 아마도 신석우였을 것이다. 김단야는 중국 군벌전쟁의 취재 필요성을 제기했다. 1924년 8월에 발발한, 장쑤성의 쑨촨팡과 저장성의 루융샹 두 군벌 사이의 전쟁 양상을 보도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특파원으로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스스로 추천했다. 2년여 상하이 체류 경험이 있고,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결국 김단야는 1924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상하이 출장을 다녀올 수 있었다. 그의 상대역은 국제당 원동국 책임자 보이틴스키였다. 두 사람은 국제당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창립 문제가 최대 현안이라는 점에 동의했고, 이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행동의 골자를 입안하는 데에 성공했다. 4개 대회를 한꺼번에 준비한다는 복잡하고도 거창한 복안이었다. 비밀 영역에서 당과 공청의 창립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 합법 공개 영역에서 전국 규모의 두 종류 대중 집회를 소집한다는 계획안이었다. 김단야가 상하이 출장에서 되돌아온 직후,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대규모 조직 계획이 은밀하게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참고 문헌

1. 김단야, ‘레닌 회견 인상기, 그의 서거 1주년에 (1-11)’, , <조선일보> 1925년 1월22일~2월3일.

2. 김단야, ‘제주도를 眺望하면서, 상해 가는 길에’, , <조선일보> 1925년 1월26일.

3.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서전), 1937년 2월7일, с.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4. 이혜인, ‘혁신의 동요와 굴절: 1924-25년 조선일보의 혁신과 사원해직사건’, , <역사연구> 32, 184쪽, 2017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수배자는 ‘비밀결사’ 재건에 주저하지 않았다

박헌영 등 중앙집행위원 체포로 고려공산청년회 위기 처하자
권오설, 1~4선 후보 집행위 구성해 대행 체제 만들고 안정화


1928년 2월17일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찍은 권오설의 초췌한 모습(왼쪽). 권오설과 김동명이 이면지에 급하게 휘갈겨 쓴 1925년 12월3일 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 보고서 첫 페이지. 당시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임경석 제공

권오설(29)이 체포됐다. 1925년 11월30일 이른 아침이었다. 종묘 외대문 밖 훈정동에 있는 박헌영 부부의 살림집을 찾아갔다가, 공교롭게도 현장에서 가택수색 중이던 종로경찰서 형사대와 마주쳤다. 형사는 셋이었다.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2년째 일하던 터라 낯이 익었다. “곧 돌아오겠다”며 현장을 벗어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만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 당일 석방되자 잠적을 택했다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은 그제야 알았다. 공청 책임비서 박헌영이 전날 밤 8시30분에 긴급체포됐다는 사실을.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주일 전에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외국 연락기관 책임자들이 검거됐으나, 다행히 단순 폭행 사건에 연루된 탓이라고만 알았다. 비밀결사 존재가 노출된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만일 상황을 염려해 선제적으로 보안 조처를 강화한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체포 30분 전에 중요 서류 전부를 책임비서의 처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보관했다. 옮긴 시각은 밤 8시고, 박헌영 부부가 체포된 시각은 그로부터 30분이 지난 때였다. 위기일발이었다.

고등경찰계에서 유능하기로 첫째·둘째 손가락을 다투는 요시노 도조 형사가 취조에 나섰다. 초점은 두 가지였다.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박헌영 집을 찾아갔느냐? 네 동생 권오직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형사는 덧붙였다. 그렇지 않아도 너를 불러들이려고 했는데 마침 잘 걸렸다.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행이었다. 비밀결사 조직원 명단이 노출된 것 같지는 않았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유학생으로 파견된 동생의 거취를 묻는 걸 보니, 명단의 일부는 드러난 것 같았다. 권오설은 요령껏 대답했다. 자신이 간부로 있는 합법단체 노농총동맹 업무를 전면에 내세워서 진술했다. 동생이야 조선에 있지 않으니, 그의 소재에 관해서는 뭐라 답해도 좋았다.

웬일인지 그날 밤 권오설은 석방됐다. 같은 날 연행된 다른 혐의자 2명과 함께였다.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경찰도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그를 연행한 때문인지 수사 초점을 잡기 어려웠던 것 같다. 공개단체의 중요 간부이므로 신분이 확실하고 도주할 우려가 적다고 보았던 것 같다. 어쨌거나 권오설은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권오설은 깊이 생각했다. 무사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들의 하는 행세가 붙잡은 자들을 영 내보내지 않을 눈치를 보”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뒤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행이 따라붙은 게 틀림없었다. 답은 자명했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고 비밀결사 동지들을 보호하려면 신속히 잠적하는 것이 옳았다.

잠적이란 경찰 수배망을 피하기 위해 일상활동 공간을 벗어나 낯선 환경에서 지내는 행동양식을 말한다. 가정, 직장, 사회활동과 절연하는 것을 의미했다. 혈연·학연·지연 관계가 있는 사람과 연락하거나 물품을 주고받는 것은 금물이었다.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않는 절대적 잠적과 비밀 활동 지속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계를 유지하는 상대적 잠적이 있었다. 권오설은 후자를 택했다. 공청의 운명이 자신의 어깨에 달렸기 때문이다. 당시 공청 집행부는 7명으로 구성됐지만 그중 3명(박헌영·임원근·신철수)은 이미 체포된 상태였다. 다른 2명(김단야·홍증식)은 때마침 지방에 출장 중이었는데, 검거 사건이 일어났음을 통지받고서 긴급히 피신했다. 서울에 남은 중앙집행위원은 자신과 김동명 둘뿐이었다. 투쟁 일선을 지켜야 할 소임이 자신에게 있었다.


종로경찰서, 권오설 수배망 넓혀


그의 예측이 적중했다. 이틀 뒤인 12월2일 종로경찰서 형사대는 다시 권오설 체포에 나섰다. 이날 형사들은 노농총 회관을 전격적으로 수색했다. 견지동 88번지에 있는 노농총 회관은 상임위원 권오설이 줄곧 있었던 숙소였다. 경찰은 그의 사진까지 2장 휴대했다. 회관 내에 머물거나 출입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일일이 대조하기 위해서였다. 형사들의 추적은 집요했다. 그의 친척 아우이자 고향 후배인, 청년운동계의 신진 활동가 권태동이 희생양이 됐다. 경찰은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간부로 있는 그가 권오설의 거처를 알고 있으리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를 붙잡아 가혹하게 고문했다.

검거가 확산됐다. 경성 시내는 물론이고 전 조선에서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졌다. ‘전시 상태’와 같았다. 경남 마산에서 김상주가 검거되고, 경기도 강화에서 박길양이 체포됐다. 평북 신의주에서는 조리환이 붙잡혔다. 급기야 12월3일에는 잠적 중이던 공산당 중앙간부 김재봉과 김찬의 비밀 숙소마저 노출됐다. 12월11일에는 피신 중이던 공청 중앙집행위원 홍증식이 체포됐고, 평양에서 최윤옥이 검거됐다.

검거 사건은 한 달간 계속됐다. 이듬해 1월 말의 집계에 따르면, 경찰에 체포된 비밀결사 구성원은 모두 22명이었다. 이 중에서 공청 회원은 12명, 공산당원은 9명이었다. 1명은 비당원이었다. 당시 공청 정회원은 212명이었는데, 그중 6%에 해당하는 사람이 수감된 셈이었다. 체포된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비중은 컸다. 공청 중앙집행위원 4명(박헌영·홍증식·신철수·임원근), 중앙검열위원(최윤옥·조리환) 2명이 체포됐다. 공산당도 형편이 비슷했다. 수감된 공산당원 9명은 전체 당원 178명에 비하면 5%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중앙집행위원 4명(김재봉·유진희·주종건·김약수)과 중앙검열위원 1명(윤덕병)이 포함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당과 공청의 최고 지도자인 책임비서가 둘 다 체포됐다는 점이다. 두 비밀결사의 중앙기관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음이 뚜렷했다. 그뿐인가. 코민테른과 연계를 맡던 국경연락부서도 파괴됐다. 신의주에 거점을 둔 국경연락 책임자들이 수감되고 말았다.


당과 공청 핵심들 줄줄이 잡혀가


권오설은 대담한 성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는 검거 사건에 부딪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혁명운동에 처음 참여할 때부터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각오했다고 결기를 표명했다. 그는 검거 사건을 냉철히 분석했다. 비밀결사에 곤란을 주는 측면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와 동시에 전 조선의 운동선 초점이 조선공산당과 공청에 향하게 하는 이익도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흥망성쇠가 검거 사건 대응에 달렸다고 보았다. 이 난국을 잘 극복하면 조선혁명운동 뿌리는 더욱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지만, 우물쭈물하면 혁명운동은 적어도 3~4년 정체할 것이라고 보았다.

권오설은 위기에 처한 비밀결사를 다시 일으키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수배자 처지에 있으면서도 그랬다. 첫째, 공청 집행부를 재건했다.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중앙집행위원을 중심으로 후계 집행부를 구성했다. 7명의 중앙집행위원 후보 그룹을 4중으로 조직했다. 제1선이 무너지면 제2선 조직이 그를 대행하고, 제2선이 체포되면 제3선이, 제3선이 무너지면 제4선 조직이 대신하는 방식이었다. 모두 청년 사회주의자 28명이 명단에 올랐다. 조두원, 정달헌, 김형선, 장순명, 이걸소, 고광수, 이승엽 등 훗날 사회주의운동의 중진으로 성장하는 인물들이 포함됐다.


1선 무너지면 2선이, 2선 무너지면 3선이


둘째, 동요하는 각지의 세포 단체를 안정시키려 했다. 전에 없던 대규모 검거 사건을 보고서 ‘지방 동지들’은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권오설은 이 국면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머잖아 겨울방학이 시작될 터인데, 그를 활용해 ‘학생 동지’를 지방 운동에 투입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 도 단위 간부 조직이 없는 곳에 공세적으로 도위원회 선출을 서두르기로 했다. 지방운동 활성화를 전담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12월27일 자로 경기도위원회와 경북도위원회가 설립됐다. 각각 5명으로 이뤄진 간부진이 구성됐다. 마땅히 도지방대회를 소집해 선출해야겠지만, 검거 사건이 진행 중인 비상 시기이기 때문에 부득이 중앙집행위원회가 임명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셋째, ‘표면운동’의 현상 유지 정책을 시행했다. 표면운동이란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공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단체의 활동상을 가리킨다. 비밀결사 구성원은 대중과의 접촉면을 넓히기 위해 표면운동을 활용했다. 공청도 그랬다. 그러나 검거 사건으로 여러 공청 회원이 체포되거나 잠적했기 때문에 표면운동은 위축 양상을 보였다. 권오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위축과 좌절을 방어하기 위해 종전보다 더 기세를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12월 중에 한양청년연맹이 연구반 정례회를 열고, 재경성 노동단체가 경인지역 노동운동자간친회를 소집하며, 학생과학연구회 주최로 강연회를 여는 등의 방침을 세웠다.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던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건물. 한국전쟁 때 건물이 파괴돼 현재는 종탑만 남아 있다(왼쪽). 1925년 9월24일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 적기 게양식. 당시 신문에 “푸른 하늘에 물들인 러시아 국기, 우렁찬 혁명곡에 뱃심 좋게 번득”인다고 대서특필됐다. 한국근대외교사전, 동아일보

검거 확산에도 코민테른과 연락선 복구


권오설은 파괴된 외국 연락선도 복원했다. 국경에 설치한 연락 시스템은 붕괴됐지만, 다른 대안을 생각해냈다. 바로 경성 주재 소련총영사관이었다. 1925년 1월 일본과 소련 사이 국교 정상화를 위해 체결된 일소기본조약에 의거해, 그해 9월 경성에 소련총영사관이 설치됐다. 일본 고등경찰은 총영사관의 안팎을 주의 깊게 감시했다. 그 결과 “소련총영사관 측은 일본 관헌의 주목을 피하고자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의 출입을 표면상 환영하지 않는다”는 소견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 소견은 틀렸다. 실제와 달랐다. 권오설은 검거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나흘 만에 코민테른과의 연락 경로를 뚫는 데 성공했다. 총영사관 내에서 가명 ‘밀러’를 쓰는 외교관 신분의 정보요원이 파트너였다.

동료의 논평에 의하면 권오설의 생김새는 광대뼈가 두 뺨 위에 두드러지게 솟아난 투사적 타입이었다. 말투는 열정과 정성이 가득 찬, 힘있는 어조였다. 그의 과감하고 단호한 지도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밀결사 공청은 구성원 12명이 투옥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별다른 위축 없이 신속하게 역량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 문헌


1.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幹部 被捉 사건에 대한 보고’,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22-224, 1925년 12월3일.

2.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二 금번 돌발사건에 대한 대책’, 1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4-6об, 1925년 12월3일.

3. Член ЦК Коркомсолола Квон-о-сель·Ким-тон-мен(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Испоолкому КИМа(국제공청 집행위 앞), с.3,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894 л.1-12, 1926년 1월31일.

4.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三 금후 事業案’, 1-2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7-219об, 1925년 12월3일.

5.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김동명, ‘第特号二 금번 돌발사건에 대한 대책’, 5-6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214-6об, 1925년 12월3일.

6. 고공청 중앙집행위원 權五卨·金東明, ‘고공청 제10호, 道幹部 선정에 관한 건’, 2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2 лл.72-74, 1925년 12월 31일.

7. 朝鮮總督府警務局, <朝鮮の治安狀況(昭和2年版)>, 神戶, 不二出版, (復刻板), 1984년.

8. 임원근, ‘亡友追憶, 1년 전에 간 權五卨에게’, <삼천리> 13, 60쪽, 1931년 3월1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책임비서의 비밀편지

조선공산당 최고책임자 김재봉, 체포 12일 전 육필 문서
반대파인 ‘북풍파’ 제명 등 당 내막 담겨 ‘사료 가치’ 높아


(왼쪽부터) 김재봉의 1925년 12월7일치 비밀편지 첫 페이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의 친필 서명. 수감 중인 김재봉, 1928년 1월2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임경석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김재봉이 1925년 12월7일치로 작성한 비밀편지가 있다. 35살 때였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었던 시기다. ‘당 내부에 대한 정리 문제’라는 제목이 달린 24쪽 분량의 육필 문서였다.1 제목이 말해주듯이 조선공산당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전하는 극비 문서였다. 비밀결사의 긴급한 현안을 다루고 있었다.

잉크를 찍어서 펜으로 썼다. 어쩌면 만년필 글씨일 수도 있겠다. 국한문 혼용체의 달필이다. 잘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유려한 글씨체였다. 향리(태어나서 자란 곳)인 경북 안동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보통학교와 중등과정의 중동학교를 마쳤으며, 고등교육기관인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사람다웠다. 근대교육 시스템이 채 갖춰지지 않았던 식민지 초기 1910년대였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수할 수 있는 최상급 교육을 받은 셈이었다.

수신처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누구에게 보냈는지를 추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코민테른 동양부 앞으로 보낸 것이었다. 옛 코민테른 문서관에서 발굴된 이 문서는 사료 가치가 매우 높다. 1925년 창립 이후 조선공산당의 내막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내부 기록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당 문서는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다. 이 문서는 그러한 사료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다. 비밀결사의 최고 책임자가 쓴 것이니만큼 최상급 비밀정보를 다루고 있다. 어떤 자료에서도 볼 수 없는 내밀한 정보가 담겼다. 그뿐인가. 이 문서는 공산당 최고 지도자의 긴장된 내면 의식과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조선공산당 1차 검거 사건 와중에 작성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비밀결사의 존재를 탐지했기 때문이다. 발단은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일어난 한 집단 폭행 사건에서 비롯됐다. 폭행 피의자로 지목된 청년들의 집을 수색하던 신의주 경찰이 뜻밖에도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의 비밀문건 뭉치를 발견했다. 국외 통신을 맡던 비밀 연락 기구가 우연한 사건으로 적발되고 말았던 것이다. 조선공산당 1차 검거 사건이 터졌다.

첫 검거는 일주일 전인 그해 11월29일 밤에 일어났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이 자택에서 체포됐다. 이튿날 새벽 7시에는 주종건, 유진희, 임원근, 권오설이 피검됐다. 다행히 그날 오후 주종건과 권오설이 일시적으로 석방됐다. 두 사람은 바로 잠적했다. 이튿날 12월1일에는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동총동맹, 한양청년연맹, 신흥청년동맹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했다. 검거는 지방 도시로 확대됐다. 경기도 강화에서 박길양이, 경상남도 마산에서 김상주가 체포됐다. 12월3일에는 조리환이 체포됐다. 이날 체포망이 공산당 핵심부까지 치고 들어왔다. 책임비서 김재봉과 중앙집행위원 김찬의 거처에 가택수색이 들어왔다.2


김재봉은 긴장했다. 다행히 가택수색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경찰 체포망에 포함된 게 틀림없었다. 비밀편지에 쓴 것처럼 “모든 것이 위기일발에 걸렸다”고 봐야 했다. 즉시 잠적했다. 일상생활을 중단하고 평소의 활동 공간에서 벗어나야 했다. 불과 일주일 만에 10여 명이 검거된 것으로 파악됐다. 그중에는 당 중앙간부(유진희)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공산청년회 구성원에게 위험이 집중되고 있었다. 검거망이 어느 방향으로 어느 정도까지 확대될지 알 수 없었다. 사태의 진전을 날카롭게 주시해야만 했다.

여차하면 외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현안이 쌓여 있었고, 유사시에 대비해 당무를 이어갈 후계 간부진도 구성해야 했다. 잠적하거나 망명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먹고 자는 것은 물론이고 원활한 장소 이동을 위해서는 돈이 들었다. 한 푼 준비도 없이 무작정 잠적한, 형편이 어려운 동지들에게는 긴급히 자금을 제공해야 했다.

김재봉이 경찰에게 쫓기는 위험 속에서도 비밀편지를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돈 때문이었다. 그는 편지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물질 원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썼다. 긴급히 도망쳐야 하는 동지들에게 여비를 주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당 규율 위반 반대파에 초강경 제명 조처


잠적 중에도 일은 해야 했다. 처리해야 할 가장 긴급한 당무 가운데 하나는 당내 분파에 관한 것이었다. ‘김약수 그룹’이 말썽이었다. 김약수 그룹이란 공개 사상단체 북풍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 공산주의 단체로 ‘북풍파’라고도 했다.

되돌아보건대, 1925년 4월17일 조선공산당이 창립되기 전에도 조선 사회주의운동은 활발히 전개됐다. 그 주역은 국내외에 걸쳐 존재하는 공산주의 그룹들이었다. 국외에는 상해파·이시파·국민의회파가 있었고, 국내에는 화요파·서울파·북풍파·상해파가 포진했다. 각 공산주의 그룹은 조직·정치적 공통성에 입각해서 형성된 비밀결사였다. 자체의 중앙기관과 세포단체가 있고, 독자의 조직적 규율을 갖춘 조직체였다. 또 독자의 정치사상과 정책을 갖춘 정치세력이었다.

단순화해 말하면 조선공산당 창립은 두 개의 공산그룹이 연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재봉이 속한 화요파와 김약수를 위시한 북풍파가 연합한 게 곧 조선공산당이었다. 하지만 화학적 결합이 아니었다. 두 그룹은 따로 놀았다. 공산당이 창립된 뒤에도 그랬다. 혼연일체의 동지적 연대감이 아니라 경쟁심과 호승심이 두 그룹 구성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북풍파 공산그룹은 자파의 이익을 늘리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합법 공개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의 임원진을 구성할 때 자파의 구성원인 서정희가 반드시 상임 총무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내에서 자파 인원이 화요파보다 한 사람 적은 것을 수정하기 위해 임시 당대회를 열 것을 요구했다. 김재봉이 보기에 이 요구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위 혁명당이어야 할 공산당을 마치 연립내각 같은 느슨한 연대기구로 만들자는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당 규율을 해치는 행위도 용서할 수 없었다. 공개 대중단체의 집회에서 비당원이 여럿 섞인 자리인데도 당내 기밀 사항을 입 밖에 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그뿐인가. 당내 논의에 앞서 자파에 속하는 사람들끼리만 사전 논의를 하곤 했다. 당보다 자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규율 위반 행위였다.

김재봉은 북풍파와의 결별을 각오했다. 당에 가입한 북풍파 인사는 3개 야체이카(세포단체)에 속한 15명뿐이었다. 그들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조선공산당의 조직 기반이 와해될지도 모르는 강경한 대책이었다.


코민테른 지부 승인 뒤 자신감 반영


강경한 카드를 꺼낸 데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코민테른의 1925년 9월 결정서가 조선공산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해 4월17일 설립된 조선공산당을 코민테른 지부로서 사실상 승인한다는 결정이었다.3 모스크바에 파견한 대표자 조봉암이 코민테른 동양부의 보이틴스키의 협력을 받아서 이뤄낸 외교적 성과 였다.

경성 주재 소련영사관에서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는 9월 결정서를 접수한 이후 조선공산당의 자신감이 묘사돼 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신은 사라지고, 노동자적인 분위기가 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 동무들은 유쾌해졌고, 어떤 분쟁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4 또 하나는 공산당의 조직 역량에 대한 자긍심이었다. 김재봉은 조선공산당의 세포단체가 전국에 33개 있고, 그에 망라된 당원 수는 133명이라고 집계했다. 그에 더해 후보 당원 49명이 있었다.5

김재봉은 자신했다. 당원 대다수가 노동자단체, 청년단체, 사상단체와 신문사·잡지사 등 언론기관에 소속돼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전국 각지의 사회단체 600여 개를 동원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당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역량도 있었다. 이들의 수는 더 많았다. 1926년 2월 현재 공청의 세포단체는 63개였고, 그에 망라된 공청 회원은 284명, 후보 회원은 229명이 었다.6


체포 전 조직한 후계자는 강달영


김재봉을 필두로 하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부의 결심은 단호했다. 이 사안으로 혹여 코민테른에서 불리한 조처가 내려지더라도 감내하기로 했다. 만약 코민테른이 15명 제명을 문제 삼아서 코민테른 지부 승인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재봉은 이왕 결성된 조직을 잘 발전시켜서 조선 혁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성심껏 전진할 뿐이라고 썼다.

이 비밀편지를 쓴 뒤 얼마 안 돼 김재봉에게 불행이 닥쳤다. 1925년 12월19일 밤이었다. 비밀편지를 쓴 지 12일이 지나서였다. 경성 돈의동에 잠복 가옥을 정한 채 당무에 여념이 없던 김재봉은 어딘가에 전화하기 위해 종로에 나왔다가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누구에게 무슨 전화를 하려고 위험을 무릅썼던 것일까.

그래도 천만다행인 게 있었다. 체포되기 며칠 전, 후계 집행부 조직에 성공했다. 체포와 망명 탓에 결원이 된 중앙집행위원을 보선했던 것이다. 후계 책임비서로는 경남 진주의 열렬한 혁명가이자 사회주의자인 강달영을 선정했다. 의외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게 강점이었다. 경찰의 주목을 비교적 적게 받는 점, 당 내외 반대파 공산그룹의 반감을 적게 사는 점, 의지가 강하고 업무 능력이 탁월한 점 등을 고려했다. 책임비서 김재봉은 붙잡혔지만, 후계자 강달영의 진두지휘 아래 비밀결사의 혁명 사업은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 었다.


참고 문헌


1.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 책임비서 金在鳳, ‘黨 內部에 대한 整理問題’, ,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7 л.20-43, 1925년 12월7일.

2. 고공청중앙집행위원 權五卨·金東明, ‘고공청 제13호, 본회 및 조공당 관계자 被逮사건 顚末’, , 3쪽,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2 л.80-84, 1925년 12월31일.

3. The last resolution of the presidium of the ECCI on the Korean question,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04 л.53-56, 1925년 9월.

4. Мильнер(밀러), тов.Серегину(세레긴 동무에게),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10 л.151-154, 1925년 11월13일.

5. 김재봉, 앞의 글, 20~21쪽.

6. Ответств.ген.секретарь Коркомсомола(고려공청 책임비서), В ИКИ КИМ no.17 Общее положение ячеек комсомола, 28/Ⅱ-26 г.(제17호, 국제공청 집행위원회에 보내는 공청 야체이카 일반 상황)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131 л.140.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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