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portrait. 자화상.1885. Indian ink, brush and white on yellow paper. 27.8 X 37.7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리투아니아 카팔타이 출생.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예술에 대한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모스크바의 미술전문학교에서 수학하고 풍경화가인 A.K.사브라소프와 V.D.폴레노프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서정적인 러시아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초기부터 개성있는 자신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인 무드 풍경화 (Mood Landscape)로 그의 그림이 불리면서 러시아 지식인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으며 그는 그림뿐 아니라 시와 음악에도 무한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안톤 체홉(Anton Chekhov, 1860~1904)과도 친구였던 그는 

삶에 대한 철학적인 고뇌를 거듭하며 뛰어난 예술가로 성장했다. 

1884년부터는 이동파(移動派)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리얼리즘 회화 발전에 주력하고, 
1898년 이후는 모교에서 후진들의 지도에 힘쓰는 한편 볼가를 비롯하여 
핀란드 · 독일 · 프랑스 · 스위스 · 이탈리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독특한 풍경화를 그렸다.

1897년 그는 심한 심장병을 앓게 되고 죽음과의 싸움 속에서도 열정과 뛰어난 테크닉, 
특별한 영감은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새로운 스타일의 작업을 시도하게 했다. 
1900년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많은 전시회를 열고 
그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 속에서 신비를 느끼면서도 그 웅대한 느낌을 
표현해 낼 수 없는 내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또 있으랴!" 
- Isaak Levitan

이삭 일리치 레비탄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전 러시아에서 가장 사랑 받는 풍경화가였다. 
그의 작품에는 서정과 철학 그리고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들어 있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는 특히 조국 러시아의 대자연을 사랑하여 이를 소재로 서정적인 풍경화를 많이 그렸다. 
대표작으로 《블라디미르에의 길》《가을날》《못가》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과 함께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 Gallery, Moscow)에 소장되어 있다.  

 

Self portrait. 자화상. 1896. ​oil on canvas. 39 X 5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삭 일리치 레비탄은 1860년 러시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랍비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10살때  가족을 따라 모스크바로 이주한 그는 13살때인 1873년 
형인 아벨이 2년간 공부한 적이 있었던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1년간의 모사 학습을 마친 뒤 자연주의적 화풍을 배우는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풍경화 수업을 시작한다.

이때 그를 가르켰던 스승은 러시아 회화에 있어 큰 획을 그었다고 알려진 사라토프. 페로프. 뽈로네프 등이다. 
그림에 대한 천재들만 모여 있던 학교에서 우수한 재능을 인정받아 
한 박스의 그림 도구와 두 타스의 붓을 상으로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의 그림에 대한 재능은 타고난 것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의 나이 15살 때인 1875년에 모친이 사망하고, 이어 1879년에 부친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그의 가족은 처참한 가난의 상채로 빠져들지만 레비탄의 재능과 그때까지 이룬 성과를 
지속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학교에서 장학금을 수여한다.

​1877년 이삭 레비탄은 처음으로 공재 전시회를 열며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1878년 짜르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솔로비예프의 암살 시도 후 제국 내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을 살티코프카 교회로 강제 이주시키는 일이 벌어져 

레비탄 역시 사회로부터 격리되지만 예술 애호가들의 압력으로 

행정당국은 레비탄에게 모스크바로 돌아 갈 수 있도록 허가한다.

​1870년대 말 그는 주로 모스크바 근교에서 작업하며 자연의 형태와 상태에

숭고한 기품이 드리워지고 인간의 심상을 반영한 <가을날. 소콜니키>와 같은

느낌이 풍성하게 깃들어진 풍경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쉐레메쩨프 공작의 궁전인 <오스딴끼>에서 작업을 할 동안 저택과 공원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가 가장 선호한 장소는 쉐레메쩨프 공작의 영지이기도 한 

모스크바 인근의 시적인 풍광이 살아 있는 숲과 근교였다. 
현재 모스크바 국제 공항인 <쉐레메쩨프 드바> 공항은 

공작의 영지 위에 건설한 이유로 공작의 이름을 따 사용하고 있다.

​1880년 미술애호가인 파벨 트레쨔코프가 레비탄의 그림 

<가을. 소콜니카>를 사들이게 되면서 트레치아코프의 후원을 받는다.  
러시아 근대 미술은 부유한 상인이 었던 트레짜코프에 빗진 바가 크다. 
그는 무명의 재능있는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제값을 주고 사들임으로서 

화가가 생계를 유지하며 재능이 꽃필 수있도록 뒷받침을 했다. 
현재 모스크바 라브루쉰스끼 10번지에 있는 트레짜코프 미술관은 이콘 등 종교화를 포함해 
가장 방대한 러시아 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이는 거상 트레짜코프가 
자신의 미술 컬렉션을 사회에 기부한 것을 바탕으로 조성된 것이다.

​레비탄이 태어나던 이듬해인 1861년 러시아에서는 

기존 사회 구조을 기본부터 흔드는 농노해방이 있었다. 
농노해방을 전후로 당시 독일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뻬쩨르부르크 아카데미 주도로 이뤄지고 있었던 황제. 러시아 귀족 계층과 관료 만을 위한 
러시아 예술의 경향에 회의를 갖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특히 러시아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는 자신의 영지 아브람체보에 당대 가장 진보적인 
예술가. 화가. 작곡가. 가수. 역사학자. 고고학자. 문필가. 배우를 볼러모아 
슬라브적인 예술의 가치를 높히며 관제 예술과 차별성을 시도한다.

이러한 아브람체보 공동체 멤버 중의한 사람이었던 이삭 레비탄은 1884년 봄 
<뻬레드비줴니카> 라고 알려져 있는 <이동전람회파>에 참가하고 1891년 정회원 자격을 얻는다.  
이동전람회파는 '보야르'라는 러시아 전통적인 귀족 중심의 미술을 러시아 대지를 지키며 살아가는 
민중에게 돌려 주려는 미술가들의 각성이 일으킨 운동으로 화랑과 대지주의 저택이 아닌 
거리와 광장을 그들의전시회장으로 삼았으며 그림의 소재 역시 서구주의에 치우친 
귀족중심의 취향이 아니라 생새하게 살아 숨쉬는 자연고 민초들의 이상을 화폭에 담았다. 
레비탄의 그림이 보여주는 소재와 경향을 잘 설명하는 단초이다.

​이것은 모두 1812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인 <조국전쟁>에서 승리후 승전국의 지위를 갖고 
서유럽을 시찰한 청년 귀족들이 귀국하며 1825년 일으킨 러시아 민중의 혼을 자각하고, 
폐쇄적인 권력체제에 도전했던 12월당(제카브리스뜨) 혁명의 자식들이었다. 

<모스크바 미술. 조각. 건축학교>시절 레비탄은 콘스탄찐 코로빈, 미하일 네스쩨로프,
건축가 표도르 쉐흐쩰과 친교를 쌓으며 작가인 안톤 체호프와

그의 형제 니콜라이 체호프와 깊은 교분을 갖게 된다. 
레비탄은 종종 체호프의 저택을 방문했다. 
이에 어떤 사람은 레비탄이 체호프의 누이인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고도 생각하기도 헀다고 한다.

​1880년대 초 레비탄은 체호프 형제들과 잡지 <모스크바>에서 같이 작업했으며 
<크레믈린>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1885~86년 마몬토프가 후원하는 러시아식 오페라에서 코로빈과 같이 무대 미술을 담당했다.  
또한 1880년대에는 뽈레노프의 집에서 열렸던 소묘 및 수채화 모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레비탄의 작품은 러시아 풍경에 대한 깊은 시적인 울림을 표현하고 있다. 
레비탄은 풍경화가이기는 했지만 도시 풍경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 
여기에 전시된 그의 그림을 보면 단번에 드러나는 사실이지만 그는 심산유곡과 같은 
순수한 자연이나 이상화된 자연풍경을 그리지 않고 , 인간의 삶과 접점을 이루는 풍경을 그렸다. 
다시말하면 그는 경계선상의 풍경화가였다.

​그 경계선상에서 "자연의 장엄한 아름다움 속에서 신비를 느끼면서도 그 웅대한 느낌을 표현해 낼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닫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또 있으랴?"라고 되뇌이며 ,
레비탄은 소박하지만 위대한, 하지만 모든 이의 공감을 얻는 자연의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그의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는 조용하며 전원풍경 가운데서는 레비탄 특유의 멜랑꼴리가 살아 있다. 
이런 경향의 주요 작품으로는 <블라디미르카 가도 (Vladimirka Road). 1892>, 
<저녁종(Evening Bells)1892>과 <영원한 안식(Above the Eternal Peace).1894>등이 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인상주의적인 것에 근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파레트는 인상주의의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나 과학적 사실 보다는

점점 더 자연주의적이고 시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1890년 여름 레비탄은 유례베츠를 방문하여 많은 풍경화와 습작을 남겼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인 <침묵의 수도원(Qulet Abode)>이 탄생했다. 
조용한 수도원 풍경과 외부세계로 연결되는 단촐한 다리는 레비탄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1897년. 이미 유명해진 레비탄은 당시 러시아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는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선출되었지만, 
지병으로 인해 그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밀년의 레비탄은 크림 지방에 있는 체호프의 집에서 보낸다. 
끈임없는 질병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러시아 자연 풍경의 

영속적인 미와 적막을 의미하는 빛의 환호로 가득차 있다.

​가족이나 아이가 없었던 레비탄이 40세를 일기로 사망한 뒤 도로고말로보 유태인 묘지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무덤은 1941년 체호프 일가의 가족묘 옆으로 이장되어 
모스크바의 노보제비치 수도원 묘지에 있다.

 

On the Volga 볼가 강에서. 1887-1888, Oil on canvas. 57.8x88.7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볼가강은 러시아 풍경화가들이 빼놓지 않고 그린 주제였다. 
러시아를 관통하는 볼가강은 러시아인 들에게 생명이었을 것이고 어머니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모습이다. 
강변에도 그리고 강물 위에서 흔들리는 배 위에도 인적이 없다.
강물은 흐린 하늘과 강을 따라 달리는 검붉은 언덕의 모습을 담고 반으로 나뉘었다

언뜻 보기에는 한 장의 엽서와도 같은 평범한 풍경이다. 
고요한 강변에 나룻배들이 정박해 있고 저 멀리 통나무를 운반하려는 작업 광경이 보인다. 
세심하게 구석구석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화면 전체에서 묘한 떨림과 깊이감이 확연히 살아난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갈색이 완연한 강 건너 야트막한 숲 언덕이 유장한 볼가 강물에 반사되고 있다.
그런데 그 물그림자로부터 시작된 공간감과 사실감의 진동이 화면 전체로 번지며 
생기를 되살리는 데는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19세기 말 러시아 풍경화의 거장 레비탄은 
‘분위기 풍경화(peizazh nastroeniya)’라는 분야를 개척한 장본인이다.
그는 보는 이의 내적 심리와 공명하는 자연의 상태를 창조해냈다. 
1887년 처음으로 볼가 강을 여행한 레비탄은 
“강력한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서 볼가 강을 기다려왔다”라고 술회하였고 

이 여행으로 완성된 작품들은 그의 여러 풍경화들 가운데서도 

더욱 중요하고 값진 그림이 되었다고 한다. 

In the North. 북부지방에서. 1896. oil on canvas. 106 X 77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이번엔 러시아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레비탄(1860~1900)의 '북부 지방에서'를 보자. 
그는 러시아 이동파 화가로 조국의 자연을 극진히 사랑하여 

적막한 분위기까지도 서정적 풍경화로 그렸다.

이 그림은 러시아와 핀란드 북부지방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운 북부지방의 신비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야성의 숲에 신비한 실루엣이 도입되어 장엄하게 느껴진다. 
그밖에도 풍경화의 대가들 폴레노프, 사브라소프, 쥬코프스키, 키셀료프 등이 있다

레비탄은 지금의 리투아니아 지방의 가난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을에서는 독일어와 불어를 가르쳤고, 
나중에는 철교 공사를 하는 프랑스 회사의 통역으로 일을 했다, 
교육을 받은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1살 때 모스크바로 이사를 가서는 형이 2년 전부터 다니고 있던 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공부를 잘했는지 물감 한 박스와 그림 붓 두 다스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5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바로 아버지도 병으로 눕고 만다. 
아버지는 더 이상 4명의 자식들을 지킬 수 없었고 레비탄은 극심한 가난에 빠지게 되었다.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친척집이나 친구집에서 잠을 잤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학교의 빈 강의실에서 잠을 잤다. 
야경꾼들이 그런 그를 보고는 야경꾼 숙소에서 재우기도 했다. 
그러자 학교는 그가 보여준 재능과 성취를 감안하여 학비를 면제하여 준다.

병석에 있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2년 후 장티푸스로 아내의 뒤를 따른다. 
그 해 순회전시회 처음 참가했는데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의 인생에서 불행은 여기까지가 아니었다.

학생이었던 알렉산더 솔로비에프라는 청년이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더 2세를 권총으로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일로 인해 러시아 대도시에 사는 모든 유태인들에게 도시 추방령이 내려진다.  
아픈 여동생 데레사와 함께 레비탄은 오스탄키노라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미술 애호가들이 관리들에게 압력을 넣어 그를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오게 한다.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그는 
미술, 조각, 건축을 전공하는 각 방면의 여러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 중 니콜라이 체홉이라는 건축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동생이 소설가였던 안톤 체홉이었다

레비탄의 그림이 주목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소위 ‘무드 풍경화’ 라는 

독특한 장르에서 그의 작품이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시와 음악을 좋아했고 야외에서의 작업을 늘 고집했던 그는, 

자연을 향한 그의 감성을 그림 속에 녹여 넣었다. 


그는 안톤 체홉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주위의 친구들은 그가 체홉의 여동생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가 가족도 아이도 없이 세상을 떠난 것을 보면 괜한 소리 같기도 하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부터 그는 심각한 심장병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졸업한 모스크바 예술학교에서 죽는 순간까지 학생들을 지도했다. 
말년을 평생 친구였던 체홉의 집에서 지냈는데 심한 감기와 열을 앓다가 4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운명하기 전 동생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편지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부탁을 한다. 
그림 외에는 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가장 사랑 받고 가장 존경 받았던 그의 명성에 비하면 그의 일생은 너무 짧았다. 
안톤 체홉은 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곤 했다고 한다. 
그가 자연에 대해 가졌던 행복한 감정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라고 했던 레비탄이었다.

 

Autumn Day, Sokolniki. 1879 . oil on canvas. 63 X 50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리비탄의 작품은 러시아 풍경화의 서정적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도시보다는 시적인 분위기의 숲, 전원의 풍경을 선호했고, 그가  창시한 "무드 풍경화"는 
이런 형태와 자연 조건에 정신적인 의미를 불어넣어 인간의 정신상태를 담아내려 했다.  
숨죽인듯, 멜랑코리하며 파스텔 톤에 사람이 주로 배제된 점이 그 특징이다. 

독신이었던 리비탄은 그의 생애 마지막을 크리미아의 안톤 체홉의 집에서 보냈다.  
병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그림은 빛으로 넘쳤고, 러시의 자연의 고요함과 영원한 아름다움을 담아냈다.  
리비탄은 40세로 요절하여 유대인 묘지에 묻혔는데, 41년 후 그의 유골은 안톤 체홉의 묘지 옆으로 이장됐다.

 

Vesper Chimes. 저녁 종. 1892. oil on canvas. 67 X 10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Vladimir's Road. 블라디미르 도로. 1892 . oil on canvas. 79  X 103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끝이 어디에 닿을 지도 모를 듯 길게 난 길. 

이 길은 누군가에게 시작 될 수도 있고 도착이 될 수도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의 발자취를 품고 있는 저 길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사실 그림 속 길은 시베리아 유형지로 연결되는 길이란다. 
수 백년의 역사 속에 수많은 눈물을 뿌렸을 저 길은 러시아인들의 존재이며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길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헤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을 장벽으로 만드는 것도 길이다. 
지평선 너머 사리지는 길의 끝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그러나 이 길은 시베리아 유형지로 가는 길이다.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의 <니쥐니 노보고로트>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으며, 
제정 러시아 당시 그 길은 시베리아로 접근하는 주요 통로 중의 하나였다. 
네를리 성당 인근의 보골류보보까지 가는 도중 깨끗하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는, 
제정 러시아 당시에는 시대와의 불화를 겪었던 젊은 유형수들이 

시베리아의 유형지를 향해 떠나며 걸었던 길이었다. 
어쩌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못할 그 길을 가며 피눈물을 뿌렸던 바로 그 길이었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의 러시아의 풍광을 배경으로 잘 만들어진 영화필름과 같은 기억 속의 
블라디미르카 가도를 레비탄의 그림을 통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만난다.
하지만, 흙먼지 날리는 모습의 <블라지미르카 가도>, 그 길은 <수용소군도>,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의 저자 솔제니친이 기나긴 소비에트에 대한 정치적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러시아에 돌아와서 맨 처음 했던, 광활한 러시아 영토에 대한 순례를 위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떠난 길이기도 했다.

1958년 작가 보리스 빠스쩨르나끄는 스웨덴 한림원으로 부터 

<의사 지바고>에 대한 노벨문학상 지명을 통보받는다. 
소비에트 혁명에 소극적이고, 어쩌면 비판적이기까지 했기에 조국 러시아에서 

출간되지 못하고 이탈리아에서 처음 출간되었던 <의사 지바고>에 주어지는 상을 수상하면, 
혁명으로 세워진 당시의 조국인 소비에트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수상을 위해 출국한다면 소비에트로의 귀국을 허가받지 못할 것이라는 당국의 통고가 있고 나서 
"고국을 떠난 작가는 토양을 떠난 화초와 같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수상을 거부한다.

도무지 사랑하기는 어려웠던 소비에트라는 정치체제와는 별개로, 
그에게 있어 러시아는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살가운 애정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 후, 소비에트 작가동맹에서 축출되고, 마치 지바고가 평생의 연인 라라의 뒷모습을 보며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어갔듯이 빠르쩨르나끄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쓸쓸하게 사망하면서도 러시아 대지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빠스쩨르나끄가 잃어버리길 두려워했던, 솔제니친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순례한 
바로 그 러시아의 대지와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의 숨결이 <블라디미르카 가도> 속에

표현되어 있고, 비록 손바닥만한 도판이지만 그 조그만 그림에서 이러한 것들을 읽어낼 수 있다.

한여름 뙤약볕에 몸을 내어말리던 금잔화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로 피어있던 그 길을, 
그리고 몇 년 만에 친정을 다니러 왔다가 헤어짐의 눈물을 훔치며 집을 나서는 
고된 시집살이에 시달린 이웃집 누나와 늙으신 그녀 어머니의 주름진 눈매 틈으로 번져가던 
마른 눈물 사이에 고통스럽게 놓여있던 황토길을 다시 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 했던, 아직도 기나긴 과거로부터 흙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미래를 향해

놓여 있어, 현재의 우리 삶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처절한 확증성을 더해주던, 
애증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삶과 역사의 그 길을 레비탄의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다.

분명히, 레비탄의 그 그림에 시선을 붙들어 둔 것은, 
광활한 서시베리아 순상지 평원에 뚫린 단순하면서도 지리적인 개념의 도로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잊혀진 삶의 기억의 어느 부분을 현재와의 소통이 가능하도록 
정신적 제단에 올려놓게 만드는 힘이며 그 통로일 것이다.
또한, 그 힘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시간이 우리 얼굴에 빚어놓을 그 무엇을 기대하게 하며, 
불확실함을 기대와 환호와 좌절로 변태시키면서 현실에 한발 앞서 나의 삶을 이끄는, 
돌연한 향기와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끈적한 집착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제 누가 감히 눈에 보이는 풍경만을 그렸던 풍경화가라는 단순한 수식어를 그에게 선사할 수 있을까?
비록 컴퓨터 화면으로나마 그의 그림을 접할수록, 그가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숙주로 해서, 
자연 위에 흘렀던 바람의 흔적을, 광활한 초원과 수풀을 휘감으며 어루만지면서 
들꽃과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던 러시아 민초들의 이마와 가슴에 속삭였던 
그런 바람을 번식시켰다는 심증을 갖게 된다. 

이렇듯 레비탄의 천재성은 경계선상의 자연과, 이 안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과, 
역사를 한꺼번에 화폭에 씨줄과 날줄로 엮어 화폭 속에 통합시켜 놓았다.
그는 영속적인 자연의 미와 적막한 빛의 환희 속에서 바람을 그린 화가였다.

 

Above the Eternal  tranquility. 영원한 평화 그너머. 1894 . oil on canvas. 95 X 12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영원한 평화 그 너머'에는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고즈넉한 여름 풍경을 그대로 품고 있다. 
그림 속 자연은 장엄하고 거룩한 느낌이다. 
작가는 언덕 위에 있는 교회 옆에 자신을 세워 놓고 광활한 자연을 둘러 보라고 말한다. 
세상 안에서 우리 인간은 아름다운 다툼을 하지만 

대단한 자연 앞에 서면 누구나 자신을 돌아보며 겸허해진다. 
레비탄은 이런 풍경을 보여주며 삶을 돌이켜보라 일깨워 주는 것이다.

 

Autumn. Road in a Village. 187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187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Moskva River. 1877.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unny Day. Spring, 햇살 바른 날. 1876-1877 .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흰 허리를 드러낸 자작나무 아래 닭 몇 마리가 있는 아주 평범한 풍경이다. 
모스크바에서 추방당해 오스탄키노에 거주할 때 레비탄은 집이나 공원의 허름한 부분들을 포함한 
소박한 전원 풍경을 주로 그렸는데,  그가 가장 좋아했던 대상은 시가 있는 숲과 평온한 시골 모습이었다. 

 

Birch Grove. 1878.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utumn Leaves. 1879. oil on cardboard. 10 X 14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ak Tree. 1880. oil on canvas. 57.6 X 57.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oad in a Wood.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Spring in the Forest. 숲속의 샘물. 1882.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Evening in the Field. 188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The First Green. May. 188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Tree Trunk. 1883​. graphite. pencil, paper.  Sketch and Study.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1884.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ootbridge. Savvina Sloboda. 다리. 사빈스카야 정착지. Study. 1884. oil on canvas.  29 X 2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Last Snow. Savvina Sloboda. Study. 188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Village Savvinskaya Sloboda near Zvenigorod. 1884. oil on canvas. 44 X 67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Village Savvinskaya Sloboda near Zvenigorod. Summer View. 188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resh Wind. Volga. 볼가강의  시원한 바람. 1895. oil on canvas. 72 X 12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볼가 강의 여름 강물과 파란 하늘이 하나되어 온 세상을 푸르게 물들인 듯한 그림이다. 
잔잔한 물결의 움직임과 하늘의 구름을 보며 
볼가 강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이 현실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듯 상쾌하다.

 

The Church Wall. 1885 .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arkway. Ostankino. (Alley in Ostankino). 1885. oil on cardboard.  43.6 X 54.3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Winter in the Forest.1885 . oil on canvas. 45 X 5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rimea. In the Mountains. Study.1886 . Oil on paper mounted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House in Alupka.1886.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In the Mountains, Crimea. 1886.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In the Mountains, Crimea.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Istra River. Study. 1885-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Writer Anton Chekhov. 1885-1886. oil on paper. 31 X 41.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Rocky Coast.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treet in Yalta. 얄타의 거리. 1886.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atar Cemetery, Crimea. 1886. oil on canvas. 75.2 X 4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Apiary. 188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Morning Mist. 1886-188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rimean Landscape. 1887. Lithograph.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pring Flood. 188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The Watermill. 1888. oil on canvas.  65 X 41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on the Volga. 1887-1888. oil on canvas. 81 X 50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on the Volga. 1888.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First Green. May. Study. 1883-1888.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rey Day. 1888. oil on cardboard. 25 X 17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rey Day. 1888. oil on cardboard. 25 X 15.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Interior of Sts. Peter and Paul Church in Plyos. 1888. oil on canvas. 25.2 X 14.3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n the Volga. 1888. oil on paper. 88.7 X 57.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River. 188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Seashore. 1888.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oonlit Night. A Village.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fter the Rain. Plyos. 1889. oil on canvas. 125 X 80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Birch grove. 1889. oil on canvas. 50 X 30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1889. pen and ink.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The Golden Plyos. 1889. oil on canvas. 84 X 14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The Golden Plyos. 1889.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The Golden Plyos. 1889.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orest violets and forget-me-nots. 1889. oil on canvas. 49 X 3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owherd. 1890.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In the Vicinity of Bordighera, in the North of Italy. 1890.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In the Vicinity of Bordighera, in the North of Italy. 1890. pastel.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editerranean Seacoast. 189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ld Homestead in Plyos. 1890. oil on canvas. 62 X 40.2 츠.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ilent Cloister. 1890. oil on canvas. 108 X 8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조그만 개울을 지나 길이 성당으로 이어져 있다. 
다리를 가운데 두고 성당이 있는 곳과 내가 서 있는 곳이 나뉘어 있다. 
다리는 세상과 나를 연결하고, 자연과 나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단 한 작품을 제외하고는 도시를 그리지 않았던 레비탄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그림에 표현되어 있다. 

 

Silent Cloister. 189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pringtime in Italy. 189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1890. Water-colors and pencilon paper.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By the Whirlpool. 1892. oil on canvas. 150 X 20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강을 가로질러  Across the River
강을 건너 숲 속으로 뻗어 있는 길을 다리가 연결하고 있다. 
가난한 시절 돈이 없어 학비가 면제되는 것을 부끄러워 했던 레비탄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역으로 달려가 승객들을 태운 기차가 출발하기 전 기차를 스케치하고는 했다. 

 

대낮의 태양을 품고 있는 러시아 여름 저녁의 고즈넉함과 

외롭게 서 있는 통마무 다리가 한 편의 시 같은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은 실제로 보면 좋은데 다리의 방향이 내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By the Whirlpool. Study. 습작. 1892 .oil on canvas. 33 X 2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tudy to "Above the eternal tranquility". 1892. oil on canvas. 127 X 9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arden in Blossom. 1890-1893. past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bove the Eternal Peace. Study. 189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orniche, Southern France. Sketch. 1894.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Lake Como. 1894 . past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Lake Como. 1894.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189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Landscape with a Church. 1893-1895. past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lood.(High waters), 1895. past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olden Autumn. 1895. oil on canvas. 126 X 8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오렌지색과 노란색으로 물든 가을 풍경이다.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가볍게 떠 있고, 누릇누릇한 들판 사이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있다. 
노란 자작나무 잎이 햇살을 받아 금박처럼 반짝인다. 
이사크 레비탄의 풍경화는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를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내밀한 속삭임과 그 아름다움 앞에 떨리는 영혼을 표현할 줄 알았다.

그는 가을의 화가였다. 
그를 맨 처음 유명하게 만든 그림도 모스크바 교외의 가을 풍경을 그린 ‘가을날, 소콜니키’(1879)였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배어 있는 서글픈 정서를 우울증에서 찾는다. 
레비탄은 힘들게 살았다. 
청소년기에 부모를 잃었고 평생 심장병과 동맥류를 앓았으며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오늘날 리투아니아가 된 작은 도시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이사해 두 아들을 예술학교에 넣을 정도로 교육에 열의가 있었지만, 
외국어 교사의 수입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빠듯했다. 
단란했던 시절은 어머니가 죽고 두 해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끝났다. 
어린 자식들은 가난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유대인이란 사실도 삶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였다. 
1879년 5월 암살될 뻔한 위기를 겪은 알렉산더 2세는 대도시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892년에도 재차 추방 명령이 떨어졌다. 
거부당하는 유대인이었으나 레비탄은 누구보다도 러시아적인 화가였다. 
그는 여름과 가을에 시골을 다니며 사생을 했고, 
겨울과 봄에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그것을 바탕으로 대작을 완성했다.

명성을 얻었어도 우울증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우울증이 덮치면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적대시한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조차 피했다. 
조급해져서 화를 내며 작품을 부수기도 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면 이번에는 과도하게 명랑해져서 의욕을 불태웠다. 
레비탄은 두 번의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은 불발에 그쳤으나 그는 점점 쇠약해지고 있었다. 
1896년 장티푸스를 앓은 후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 
그는 1900년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000점에 가까운 유화, 스케치, 드로잉을 남겼다. 
고통스러웠던 삶이었으나 그가 남긴 그림에는 고요함과 빛이 가득 차 있다.
[미술평론가 이미혜]

 

In the Park. 189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Lake. 1895. oil on canvas. 18 X 13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arch. 1895. oil on canvas. 60 X 7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자연주의적인 화풍을 유지하던 레비탄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부터는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쓰기 시작했고 주제도 달빛이 비치는 풍경, 여명, 
고요한 마을의 모습 등을 즐겨 소재로 다뤘다.  

 

Water Lilies. 189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Winter. 1895.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oonlit Landscape.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pple Trees in Bloom. 1896.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pple Trees in Bloom. 189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1896. Watercolor.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olden Autumn. 1896. oil on canvas. 84.6 X 5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oonlit Night. 189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ountain Range, Mont Blanc. 1897. oil on cara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n the River. 1897. Gouache.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Remains of the Past. Twilight. Finland. 189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pring Flood. 1897.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tormy day. 1897. oil on canvas. 82 X 86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Sunny Day. 1897-1898.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Forest Edge. 1898.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rey Day. 1898.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unny Day. A Village. 1898.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Study. 1895-1899.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utumn. Sunny Day. 1898-1899. oil on pan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189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rey Day. 1899.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Haystacks. Twilight. 1899.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Lake. Study. 1898-189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Last Rays of the Sun. 1899. oil on canvas. 80 X 86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Last Rays of the Sun. Lake. 1898-1899.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Moonlit Night. 189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Stream. 1899. past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ummer Evening. 1899. oil on canvas. 49 X 73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wilight. 1899. oil on canvas. 51 X 74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Valley of a River. Study. 1890-1899.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Windy Day. 1898-1899. oil on papo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Haystacking. 1900. oil on cardboard. 58 X 89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pringtime in Crimea. 1900. oil on cardboard. 55 X 7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t the seashore. Date unknown. oil on canvas. 65 X 41.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A. Grosheva. Date unknown. charcoa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Iosif Levin.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 Student.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ree Trunks. Date unknown. penci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ree Trunks. Date unknown. graphite.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wilight. Date unknown.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Windmills. Twilight.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Beehives. Date unknown.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By the Lake. Summer Evening. Date unknown. pastel.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ield. Date unknown.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Landscape. Date unknown. pen and ink.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Landscape on the Volga. Boats by the Riverbank. 1878.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vergrown Pond. Date unknow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37. 이삭 레비탄 (Isaak Ilyich Levitan) 작품 전시실

 

 

Art teacher. 1867.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hrist and the Virgin at the sea. 1867. 103 X 155 cm. Private collection

 

In the pawnshop. 1867. sketch and study. 37.6 X 43.2 cm.

 

Pilgrims. On a pilgrimage. 1867. sketch and study. 47.3 X 31.6 cm.

 

Fomushka-owl. 1868.  oil on panel. 36.8 X 44.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omushka-owl. 1868.  oil on panel. 36.8 X 44.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cene at the Railroad. 철로길 장면. 1868. 66 X 5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F.F. Rezanov. 1868. 71.5 X 91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Feodosya Resanova. 1868. oil on canvas. 53 X 63 cm.
Chelyabinsk State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Chelyabinsk)

 

Portrait of N.F. Rezanov. 1868. 53 X 63 cm.

 

The Market in Moscow. 1868. sketch and study. 48.7 X 29.8 cm.

 

Head of a Kirghiz. Sketch. 1869. oil on canvas.

 

Portrait of A. A. Borisov. 1869. 71 X 89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Portrait of Writer A.F. Pisemsky. 1869.
Ivanovo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Ivanovo)

 

Portrait of Nikolai Lanin. 1869. oil on canvas. 68.8 X 83.5 cm.
The Museum of Latvian and Russian Art of Latvia

 

Portrait of Vasily Bezsonov. 1869. oil on canvas. 62.5  X 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Yelena Perova, n e Scheins, The Artist s First Wife. 1869. oil on canvas.
The Art Museum of Belarus

 

Girl with a Jug.  1869​.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Small seventeen (baker). 1869. 48.5 X 58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Wanderer. 1869. oil on canvas. 40 X 48 cm. Lugansk Regional Art Museum  (Ukraine - Lugansk)

 

Arrival schoolgirl to a blind father(Visiting the Blind Father). 눈먼 아버지에게 돌아온 여학생. 
1870.  sketch and study. 53 x 60.5 cm . Tretyakov Gallery - Moscow

 

The Bride Leaving the Bath House before the Wedding
(On the eve of bachelorette party. The bride from the bath). 1870.  oil on canvas. 72.8 X 48 cm.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Portrait Avdotya Kuznetsova. 1870. 54 X 61.5 cm.

 

Portrait of Nikolai Rubinstein. 1870. 79 X 102.5 cm.

 

Portrait of the Composer Anton Rubinstein. 1870. oil on canvas. 80 X 96 cm.
Glinka Central Museum of Musical Culture

 

Portrait of Unknown Man. 1870. 61 X 75 cm.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o the Holy Trinity (Going to the Monastery). 1870.  oil on panel. 19.7 X 2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randfather and grandson. 할아버지와 손자. 1871. 62 X 78 cm.

 

Portrait of the Playwright Alexander Ostrovsky. 1871. oil on canvas. 80.7 X 103.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Evfimia Timasheva. 1871 ​,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tudents talk with the monk. 1871. sketch and study. 71.5 X 53.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Holy fool, surrounded by pilgrims.1872.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Sergei Timofeevich Aksakov. 1872.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Portrait of the Author Ivan Turgenev. 소설가 투르게노프. 1872. oil on canvas. 80 X 102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Portrait of the Author Vladimir Dahl.  1872. oil on canvas.80.5 X 9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composer P.S. Campione. 1872.
Astrakhan State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Astrakhan)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etrovich Pogodin. 1872. 88.8 X 11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the Historian Mikhail Pogodin. 1872. oil on canvas. 84.3  X  10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the Poet Apollon Maikov. 1872. oil on canvas. 89.8  X  103.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ossack. 코사크. 1873. 30 X 57.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vening on Holy Saturday (Easter Eve). 1873. 39.1 x 20.2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Judgement of Pugachev.  1873 .,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edot and Arina. 1873. sketch and study.. 12 x 14 cm.

 

Gogol is supported by the figures of his works to the grave. 1873. 
sketch and study. 50.7 X 29.2 cm.

 

Head of a Kirgiz-convict. 1873. oil on canvas. 58.5 x 64.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a merchant S.T. Kuznetsov. 1873.

 

 Wayfarer. 1873.  sketch and study.

 

An Old. 1874. 65.5 X 81 cm.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pple Tree in Blossom. 187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Botanist. 1874. oil on canvas. 79 X 65.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Joyful Father. 1874.  sketch and study. 16.8 X 21.8 cm.

 

Naushnitsa. Before the storm. 1874.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an Old man. 1874.  oil on canvas, 47 X 58 cm.
National Art Museum of the Republic of Belarus  (Belarus - Minsk)

 

Old Parents Visiting the Grave of Their Son. 아들의 무덤을 찾아온 노부부. 1874. 

oil on canvas. 37.5 X 4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Bird-Catcher. 새잡는 사람. 1874. oil on canvas. 80.7 X 10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eceiving Wanderer (The Guest). 유랑자를 접대함. 1874. oil on canvas. 78 X 93 cm.

 

Return reaper from the field in the Ryazan province. 1874. oil on cardboard.  65 X 25.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ad Father. 1873~1874.  sketch and study.. 16.8 cm X 21.8 cm.

 

Scouts at Sevastopol. 1874.  oil on canvas. 196 X 130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Scouts at Sevastopol. 1874. 60.8 X 40 cm.

 

Court Pugacheva. 1875. 43 X 30.3 cm.

 

Court Pugacheva. 1875. sketch and study.  43 X 30.3 cm.

 

Gossip. 1875.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Anna Sergeyeva. 1875.  oil on canvas. 71.3 X 88.5 cm.
The State Museum of Fine Arts of Tatarstan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Kazan)

 

Pugachev escort convoys of prisoners. 1873~1875.  sketch and study.. 23 X 25.2 cm.

 

Pugachev`s Judgement. 1875. oil on canvas. 238 x 150 cm.
State Historical Museum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A.I. Kridener, born. Ivanova, mother of the artist. 1876. 88 X 101.5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Portrait of Peter Ivanovich Nikolayev, chairman of the Vladimir district council. 1876. 78 X 93.5 cm.

 

Portrait of the Painter Nikolai Kasatkin. 1876. oil on canvas. 31 X 40.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farmer in the field. 들판의 농부. 1876. 50 X 62.5 cm. Mākslas muzejs Rīgas Birža  (Latvia - Rīga)

 

Blind Man . 1878. 57 X 75 cm.
Ryazan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Ryazan)

 

Portrait of Painter Alexei Savrasov. 187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Executed by Pugachev. 1878.  sketch and study.

 

Mother with sick child. 1878. sketch and study.. 22.6 X 29.9 cm.

 

Blessed One. 1879. oil on  canvas. 103 x 153 cm.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By train. 1879.  sketch and study.

 

Fishers (priest, deacon and seminarian). 1879.  oil on canvas. 179.5 X 104 cm.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Out under. 1879. sketch and study.

 

The girl, thrown into the water. 1879. 41.7 X 56.5 cm.

 

Wandering in a field (Pilgrim Resting). 1879. 94 X 63 cm.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Dispute about faith (a scene in the car). 1879.  sketch and study. 33.5 X 24 cm.

 

Before vows. 서약하기 전. 1879.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Judgement of Pugachev.  1879 ​.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The Snow Maiden. 1879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Snow Maiden Melting. 1879 .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irst Christians in Kiev. 1880.  oil on canvas. 243 X 156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Modern Idyll. 1880. sketch and study.. 19 X 26 cm.

 

Nikita Pustosvyat. The dispute about the faith. 1880. sketch and study.

 

Return of the peasants from a funeral in the winter. 겨울날 장례식에서 돌아오는 농부들. 1880. 
oil on canvas. 56.7 X 36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old man on the bench. 1880. 29 X 36 cm.
Rostov Regional Museum of Fine Arts  (Russian Federation - Rostov-on-Don)

 

Walkers-seeking. sketch and study. 26.8 X 17.7 cm.

 

Nikita Pustosviat. Dispute on the Confession of Faith. 1881. oil on canvas. 512 X 336.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Yaroslavna's Lament. 1881.  Private collection 

 

A Woman. Date unknown . oil on paper. 18,5 X 26.5 cm.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Court Pugacheva. Date unknown . 330 X 226 cm.

 

Court Pugacheva. Date unknown . sketch and study

 

Court Pugacheva. Date unknown.

 

The Deposition. Date unknown. oil on canvas. 242 X 150.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Boy (study for 'The Judgement of Pugachev').  Date unknown ​. oil on canvas.
Penza Regional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Penza)71.5 X 47 cm.

 

A Girl. Date unknown

 

Guitarist-bach. Date unknown . sketch and study

 

Head of a Kirgiz Man.  Date unknown .
Irkutsk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Irkutsk)

 

Head of a Kirgiz Man. Date unknown. oil on canvas.
Nizhny Novgorod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Nizhni Novgorod

 

The Boar Hunt.  Date unknown​. oil on canvas. 142 X 93.5 cm.

 

Khlysty zeal. Sketch. Date unknown . sketch and study

 

Labor family. Date unknown . sketch and study

 

Melting Snow Maiden.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33 X 21.2 cm

 

Naushnitsa. Before the storm. Date unknown . sketch and study​.

 

Night in the hut. Sketch for 'Sleeping Children'.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20 X 14.4 cm.

 

Organ-grinders.  Date unknown . ​sketch and study​.

 

Pilgrim.  Date unknown​. oil on canvas,
State Art Museum of Uzbekistan  (Uzbekistan - Tashkent)

 

Portrait of a Ma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skov State Historical and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Pskov)

 

Portrait of an Old Woman.  Date unknown​.
Krasnodar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rasnodar)

 

The arrival of rural teachers Date unknown . oil on canvas. 35 X 44.5 cm.

 

The head of Pugachev. Sketch.  Date unknown . ​sketch and study​. 17.9 X 19.1 cm

 

Dividing the inheritance in a monastery (Death of a monk).  date unknown . 27.5 X 18 cm.

 

Portrait of a Lady.  Date unknown . oil on canvas. 55 X 69 cm.
Altai State Fine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Barnaul) 

 

 

[영상] Vasily Perov: A collection of 138 paintings (HD)

 

 

 

 

 

Self Portrait. 18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1833년 시베리아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바실리 페로프는 

모스크바 회화조각학교에서 수학하였다(1853~62). 
이때의 스승들 중에는 앞서 살펴본 <M.V. 보론초바의 초상>의 작가 S.K. 자랸코가 있었다. 
학교를 마치던 무렵 러시아 현실에 대한 분노와 민초들에 대한 연민을 버무려 그가 그려낸 풍자화들은, 
러시아 화단이 페로프란 이름을 주목하도록 만든다. 

‘키치(Kitsch)’라는 용어가 있다. 
고매한 품격을 갖지 못한, 싸구려 또는 사이비 미술품을 조롱하는 말이다. 
예전 우리나라에서는 머리 깎는 곳에 꼭 그런 그림들이 걸려 있었으므로 
흔히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리던 것들이 그런 부류이다.

세계 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19세기 러시아 회화들을 

서유럽 쪽 화단에서는 흔히 키치로 취급했었다. 
외관상으로 어딘지 그 ‘이발소 그림’의 냄새가 나는 듯한 작품들이 없지 않다. 
현란한 빛이 세련되게 부서지는 인상파 그림들을 익숙하게 보며 자라온 우리 눈에는, 
러시아 회화들의 칙칙한 색채나 가끔 좀 갸우뚱한 사실적 묘사는 

뭔가 촌스러운 느낌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바실리 페로프(1833~1882). 러시아 회화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이지만,

상당수는 이발소 그림을 닮은 데가 있다. 
그의 독특한 카키와 우울한 화면 분위기는 세련된 도회인들의 입맛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처음 러시아 회화들에 매혹되었을 때도 그 대상은 주로 레핀이나 크람스코이,

세로프처럼 기존의 취향으로도 충분히 전율할 수 있는 화가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페로프 미학의 핵심은 시대정신과 휴머니티이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변함 없이 피어나는 모네의 수련이나 
고흐의 해바라기와는 다른 관점에서 그의 그림에 접근해야 한다. 
페로프가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발을 딛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의 그림은 어떤 예술 작품들보다도 깊은 감동을 가져다준다. 
그런 점에서 페로프의 그림들은, 투박하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러시아의 흑빵을 닮았다. 

그의 장르화들을 특징에 따라 구분해보면 사회비판, 해학, 

그 외 인물과 역사쯤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현실 비판적 시각의 그림들을 살펴보자. 
그가 비판한 ‘현실’, 즉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는 농노이거나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농노는 지주의 토지를 경작하고 지대를 납부할 뿐 아니라 

주 3일 이상 지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으로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국가는 그들로부터 인두세를 걷고 병역의무를 부과하였지만 그 대가로 어떤 보호도 제공하지 않았다. 
지주는 재판 없이 그들에게 체형을 가할 수 있었으며 매매할 수도 있었다. 
농민들은 농노에 비해 다소 덜 예속적이었지만, 그 궁핍한 삶은 농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상상 속의 지옥 풍경이 아니고 노예가 콜로세움에서 사자와 싸우던 글래디에이터 시대의 이야기도 아니다. 
불과 150년 전의 러시아 사회는 그런 곳이었다.

그뿐이랴. 갓 불붙은 산업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이 탄생하면서 지옥은 농촌에서 도시로 확산된다. 
초기자본주의 시절, 서로 먹고 먹히는 자본 간의 처절한 전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그때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이 노동자의 육신과 영혼을 깡그리 망가뜨리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런 러시아 사회의 정점에는 무능하며 폭압적인 로마노프 황실과 

한줌도 안 되는 귀족들의 화려한 삶이 놓여있었다. 
이런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했던, '브나로드 운동'처럼 

평화적이고 낭만적인 시도는 무참히 좌절되었다. 
당신이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이제 달리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혁명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Ivan Kramskoy. Portrait  of the Artist Vasily Perov. 1881 . The Russian Museum 
러시아의 국민화가 이반 크람스코이가 그린 바실리 페로프 초상화이다.

 

Self-portrait. 17세 때 자화상. 1851. oil on canvas. 59.5 X 77 cm.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작품 전시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also known as Children Carrying Water). 1866. Oil on canvas, 

123.5cm x 167.5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바실리 페로프의 작품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 1866)>이다.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세상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밤, 행복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길에 나와 있지 않을 그 시간에 이를 악물고 물을 길어 나르는 어린 도제들의 모습이다.

페로프는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여 그린 대표적 화가이다. 
그의 유명한 그림 ‘트로이카'에서는 세 명의 어린 아이들이 눈보라가 치고 얼어 있는 길을 
아주 커다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당시의 비참하던 아이들의 생활과 처지를 그림으로서 어른들의 횡포와 무자비함을 고발하고 있다. 
3을 뜻하는 ‘트로이카' 라는 말은 황제의 마차를 끄는 말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그와 대비되어 아이들의 모습은 더욱 더 서글프게 느껴진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칼바람에 건물 지붕의 눈가루가 모래처럼 휘날리고, 

넘쳐흐른 물은 이내 수레에 얼어붙어 고드름을 만들었다. 
이런 길이라면 튼실한 말들이 삼두마차를 끌고 지나가더라도 안쓰러울 법하다. 
맨 왼쪽의 작은 아이는 오르막을 넘어서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튿어진 모자, 그리고 얻어 입은 어른 코트의 소매 안으로 주먹 쥔 고사리 손.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가운데 녀석은 셋 중 제일 덩치가 크지만 아직 이 빠진 구멍이 숭숭한 어린아이이긴 마찬가지다. 
길이 아직 많이 남은 것일까, 수레의 무게와 추위에 그는 혼이 거의 빠져버린 것 같다. 
오른쪽 계집아이는 오히려 처연한 표정이다. 
발에 맞지 않아 덜그럭 거리는 구두의 끈은 풀어져 있고, 

실제 그림을 보면 그러쥔 조그만 주먹에는 핏줄과 힘줄이 솟아 있다.

세상은 저 어린 것에게 낡은 장갑 하나 건네줄 여유가 없다. 
헌 외투 사이로 드러난 분홍치마. 아이가 저 옷을 처음 가졌을 때, 저 꽃무늬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을까. 
꽃분홍 치마는 그가 현실에서 가 닿을 수 없는 행복의 신기루 같다. 
세 아이의 뒤에는 비슷한 운명의 소년 하나가 온힘을 다해 수레를 밀고 있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 detail (부분)

그들과 함께 하는 건 오직 앞장서서 뛰어가는 개 한 마리뿐이다. 
힘차게 뛰어가는 털북숭이 개. 

뜬금없는 이야기 같지만 그 모습에 화가 페로프가 자꾸 겹쳐 보인다. 
민초들의 고난을 자신의 일처럼 아파한 바실리 페로프. 
털북숭이가 날카롭게 드러난 이빨은 냉혹한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이며, 
힘찬 뜀박질은 어떻게든 이겨나가야 한다고 아이들을 독려하는 그의 애틋한 마음이 아닐까. 
안타까움이 가득한 털북숭이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도록에서는 잘려버렸지만, 그림 왼쪽 끝에는 건물의 창이 그려져 있다. 
유리를 통해 비치는, 따뜻하지만 온기 한 점을 나눌 수 없는 촛불은 

오히려 아이들을 더 큰 절망에 빠트릴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수레 뒤쪽 어둠 속의 사내도 추위에 몸을 웅크린 채 종종 걸음으로 제 길을 가고 있다.

 

트로이카, 물을 나르는 견습생들 (Troika. Apprentices fetch water) 습작.
Triple. 1865. sketch and study. 31 X 15.7 cm.

 

시골의 부활절 행진-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 1861, oil on canvas. 71.5cm x 89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바실리 페로프 역시 19세기 유명한 사실주의화가이자 초상화가이다. 
그는 <도스도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한데, 페로프의 작품은 대부분 강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으며, 
당시 러시아 회화 역사에서 중요한 랜드마크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고고하고 가식적인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다. 
보이는 대로의 과장없는 색감이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페로프는 1834년 유형에 처해진 급진 귀족의 서자로 태어났다. 
검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에 적극적이었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1854~1861년까지 모스크바 예술 학교에서 회화, 조각, 건축등을 공부한다.

평범하게 보이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현실의 어두움을 직시한 페로프는 성직자의 타락을 폭로한 
<부활절 마을 십자가 행렬>을 비롯하여 통렬한 풍자와 사회적 항의를 담은 그림을 그렸다.

당시 <부활절 마을 십자가 행렬>은 그 풍자로 인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고, 
1862년부터 2년 동안 유럽 체류 후의 일련의 작품 <트로이카>, <들판의 환송> 등에도 사회적 항의의 자세가 역력하다. 
크람스코이와 레핀 등 젊은 미술가 그룹이 '이동파'를 결성했을 때, 선배 화가로서 그는 그들과 함께 행동하기도 했다.  

먼저 <시골의 부활절 행진 Easter Procession in the Country(1861)>을 보자. 
부활절을 맞아 시골교회의 문을 나선 사람들은 십자가와 깃발을 앞세우고 성가를 부르며 행진하기 시작한다. 
그림이 그려진 1861년은 러시아 역사상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농노해방령이 내려진 해이다.

게다가 이날은 또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쯤 되면 그림 속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대와 환희에 들뜬 표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모습은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깃발과 십자가를 든 사내, 그리고 이콘을 가슴에 안은 여인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교회문 앞 좌우로는 고주망태가 된 사내 셋이 널브러져 있으며, 
기둥에 몸을 의지한 정교 사제 역시 술에 취해 계단을 잘 내려 설 수 있을지 아슬아슬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는 남루한 사내가 굽은 등을 하고 또 다른 이콘이 그려진듯한 널빤지를 안고 있다. 
만약 오랜 숙원이던 농노해방 조치가 세상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면 
화가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페로프는 음산한 잿빛 하늘과 눈이 녹아 질척한 시골 흙길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미래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Tretyakov Gallery Room 17. 바실리 페로프 (Vasily Grigorevich Perov)

 

Procession on Easter. Sketch for the painting. 1860. sketch and study. 습작

 

Easter. 1861. oil on paper.  59.5 X 77 cm.
Kiev National Museum of Russian Art (Ukraine - Kiev)

 

Procession on Easter. 1862. 67 X 53 cm.

 

The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1861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이 그림은 트레차코프 갤러리가 아닌, 시베리아 울란우데의 브리야트 공화국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같은 해에 그린 <마을에서의 설교 Sermon in a Village (1861)>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얼핏 보면 주일을 맞아 시골마을 교회에 모여 앉은 부자와 빈자가 

사제의 설교를 오순도순, 그러나 좀 따분하게 듣고 있는 광경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뒤쪽 어둠 속에서 완전히 따로 놀고 있는 군중들의 모습에 주목해야한다.

그들은 설교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화면 제일 오른쪽의 서류를 든 사내가 하는 말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다. 
그는 마을 학교의 교사쯤 될 것이고, 그가 들고 있는 종이에 쓰여 있는 것은 
아마도 농노해방을 알리는 차르의 칙령일 것이다. 
당시 러시아 방방곡곡에서는 해방령 칙서가 주로 교회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반노예나 다름없던 오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소식이건만 군중들은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회색 어둠속에서 여전히 깊은 시름에 잠겨있다. 
그도 그럴 것이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4년의 준비 끝에 단행한 역사적 농노해방은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다. 
노예의 사슬만 끊어준다고 상황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해방된 농노들이 농민으로 살아남으려면 경작할 토지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국가는 그들에게 토지를 배분하였다. 
하지만 절반 이상의 땅이 여전히 지주의 손에 남아 있었으므로 농민들에게 할당된 토지는 매우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토지 대금의 일부를 자신이 직접 부담해야 했다.

또한 농민공동체의 연대책임이 강화됨으로써 농민은 공동체에 강하게 예속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농노들은 해방되었으나 여전히 그 신분이 자유롭지 못했고, 
경제적 부담의 증가로 궁핍이 가속화 되었다. 

 

Sermon in a Village. 마을에서의 설교. detail (부분)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186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모스크바 근교 므이치시치에서의 다회 (Tea party in Mytischi near Moscow)> 역시 암울한 그림이다. 
값비싼 옷을 입고 차를 마시는 사제. 
그의 혈색 좋고 거대한 몸집에 비해, 적선을 구걸하는 눈먼 거지부자의 행색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다. 
사제의 반들거리는 구두 한 켤레면 이들은 며칠간 배고픔을 잊겠지만, 
거대한 기름덩어리로 타락한 짐승은 인간의 불행에 도통 관심이 없고 시종은 그를 냉정하게 밀어낸다.

당시 귀족들과 함께 특권지배계급에 속했던 정교회의 사제들은 
이처럼 페로프 초기 그림에서 집중적인 풍자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귀족들보다는 사제가 아무래도 좀 만만해서일까. 
혹은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들의 타락한 영혼이 그만큼 더 가증스러워서일까. 
150년 전 먼 러시아에서 그려진 이 그림 속 비계덩어리들이 그리 낯설지 않음은, 
그 수많은 아바타들을 오늘 이 땅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유럽의 화가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바실리 페로프도 세상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건너간다. 
하지만 그가 그곳에 머무른 것은 1863~4년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이 무렵은 파리에서 인상파가 막 태동하던 시기로서, 1863년은 마네가 낙선화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풀밭위의 점심>을 두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던 기념비적인 해이다.

대혁명과 그에 뒤이은 두 차례의 혁명을 거치며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횃불을 가장 치열하게 들었던 나라 프랑스. 
누구 하나 빠짐없이 사회의식으로 충일하였을 것 같은 그곳에서, 
사회의식을 가장 멀리 하는 예술가 집단인 인상파가 탄생한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이다.

이는 19세기 후반 들어 노동조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예술가란 원래가 앞 사람이 해 오던 방식을 좇아 생각하고 살아가기를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다. 
먹고살기가 조금 나아지면서 도시를 중심으로 한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생활양식들이 등장하자 
파리의 화가들은 대번 그쪽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공원과 카페, 나이트클럽의 풍경은 그들의 단골소재였다. 
화가들은 그곳의 무용수와 가수, 여급, 창녀들의 모습을 즐겨 그렸으되, 
그를 통해 무거운 메시지를 전하거나 사회진보 따위를 꾀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을 빼앗은 건 새로운 세상을 비추는 빛과 우연성의 미학이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 국가였던 러시아의 사정은 프랑스와 전혀 달랐다. 
1861년 농노해방령이 내려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곤궁한 처지에 있던 농민들, 
그리고 산업혁명의 태동과 함께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도시노동자들. 
러시아는 여전히 참혹한 환경 속에서 빵과 자유를 갈구하는 존재들로 가득했고, 
프랑스와는 달리 어디서도 희망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페로프의 눈에, 

빛과 색채에 혼을 빼앗긴 파리 인상파의 그림들이 탐탁하게 느껴졌을 리 만무하다. 
똑같은 대상을 마주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볼 준비가 되어있는 것만 보게 된다. 
모네와 르느와르, 드가의 현란한 그림들이 태동하고 있는 파리에서도 
페로프의 눈길은 그 사회의 가장 아랫바닥 사람들에게 닿아있었다.

 

Teatime in Mytischi near Moscow. 1862. sketch and study. 37.5 X 31 cm.

 

Savoyard Boy. 1863.  Oil on canvas, 32 x 41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짧은 파리 시절 그가 남긴 작품들인 <거리의 아이(Savoyard Boy)> 그리고 <떠돌이 음악가(Organ-Grinder)>를 보자. 
Savoy 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에 걸쳐 있는 지역으로서 휴양지로 유명하다. 
‘Savoyard’를 직역하면 ‘사보이 사람’이지만, 그곳에 거지가 많았는지 19세기 유럽에서는 
거리의 거지아이들을 ‘Savoyard’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림에서 길가 돌 위에 주저앉은 아이는 곤한 잠에 빠져 있다. 
남루한 행색. 비정상적으로 커 보이는 얼굴에 담겨 있는 고단함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서, 정말 ‘아이’가 맞는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The Organ-Grinder. 1864. Oil on panel, 25 x 31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떠돌이 음악가의 신산한 삶도 마찬가지이다. 
곁에 내려 놓은 것은 등에 지고 다니던 소형 오르간 ‘샤르만카(шарманка)’이다. 
퇴락한 돌담 곁 벤치에 팔을 괴고 앉은 그의 모습은 Savoyard 만큼 남루하지는 않다. 
하지만 표정 없이 멍한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에서는 내일에 대한 작은 희망의 기미마저 찾아볼 수 없다.     
 
2년 동안의 짧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페로프는 곧바로 그의 대표적 걸작들을 그려 나간다. 
그의 사회비판 정신은 이무렵 절정에 이른 듯하다. 
그림에서는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기가 힘겨운 가련한 자들에 대한 연민과 

아울러 그들을 그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가 느껴진다.

 

The Funeral Procession (Last Journey / Проводы покойника ).1865. Oil on canvas, 57 x 45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Funeral Procession(1865). 마지막 여행>
도록에 따라서는 <Following a Dead Man> 또는 <Bidding Farewell to the Dead Man>로도 번역되어 있다. 
앞에서 소개한 걸작 <Troika Apprentices Carrying Water>의 왼쪽 아랫부분에 걸려 있는 이 그림은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전혀 아름답다고도 할 수 없는 을씨년스런 작품이다.

그러나 이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걸린 어떤 화려하고 거대한 그림들에도 뒤지지 않을 

강력한 인상을 우리에게 남겨준다. 
화폭에 담긴 것은 겨울 눈길을 헤치고 가장의 시신을 운구하는 한 가족의 절망적 모습이다.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채 썰매를 끄는 여인의 막막한 등, 
마른 풀을 깔고 누운 사내아이는 잠든 것이 아니라 신열에 들떠 눈을 뒤집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질 듯 엉성한 관을 꽉 부여잡고 있는 딸아이는 제법 눈을 부릅뜨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넋 나간 표정이긴 마찬가지이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눈길은 아주 춥고 멀 것만 같다.

봄이 올 때까지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을까.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는 이 작품에서 아주 극단적으로 누렇게 떠 있어 황폐한 느낌을 더 해준다. 
이 그림은 무심히 지나가던 사람의 발길을 한동안 묶어놓는다.
그리고 그림이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언가 진심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은 기분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을 붙일 수가 없다. 그것이 이 조그만 그림에 담긴 페로프의 힘이다. 

 

The Last Tavern at the City Gates.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1868. Oil on canvas, 66 x 51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트로이카의 우측에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이다. 
도록마다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작품이지만 생각보다 크기가 아주 작은 소품이다. 
이 조그만 그림으로부터 사람들은 무얼 찾아 내었을까. 
도시 관문에 인접해 있는 작은 여관, 먼 길을 왔거나 떠날 사람들은 따뜻한 불빛이 비치는 창안에서 휴식하고 있다.

그 안에 들지 못한 소녀는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고 있다. 
밤이 시작되는 것인지 새벽의 미명인지 화면은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그 속의 디테일은 하나하나 살아 있다. 
얼어붙은 먼 길을 다시 떠나야할 말은 눈 위에서도 건초를 씹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혹독하더라도 이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인 건지. 
눈길에는 역시 개 한 마리, 그리고 하늘에는 차가운 새 몇 마리. 
이 시기 페로프의 대표작들에는 어김없이 먼 하늘을 날고 있는 새들이 등장한다.   
페로프의 매서운 새들은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일까.

화려하지도 크지도 않은 이 작품을 어떻게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후세의 사람들이야 페로프의 주요 작품으로 소개되니 곰곰이 뜯어보게 되는 것일 테지만, 
이 그림의 핵심은 아마도 어둠 속 소녀가 아닐까 싶다.

 

마을 입구의 마지막 주점 (The Last Tavern by the City Gates) - detail (부분)

이발소 그림을 연상할 정도로 어수룩해 보이는 이 작품을 

빛나는 걸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은 바로 이 소녀라 생각된다. 
계집아이는 추위에 웅크린 채 불안과 천진함이 담긴 눈빛으로 돌아보고 있다. 
눈밭에 나앉은 어린 것의 그 눈빛과 마주친다면 아무리 가슴 두꺼운 당신이라도 그만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페로프가 전하고자 했던 모든 생각들이 아무 설명할 필요 없이 온몸으로 젖어든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A Drowned Woman (also known as Found Drowned). 익사한 여자. 1867. oil on canvas. 68 X 108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익사한 채로 발견 된 여인의 시신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형사의 모습이다. 
멀리 바라보이는 큐폴라들과 강위를 떠가는 큼직한 배를 볼 때 무대는 필경 모스크바이다. 
페테르부르크의 스카이라인은 모스크바의 그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어 어렵지 않게 구별된다.

강에서 건져낸 여자는 밀랍 같은 얼굴로 누워 있고, 관리 하나가 그 곁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왜 죽은 것일까. 혹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인지, 그림만 보아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채 감지 못한 그녀의 눈으로 미루어 한이 많은 죽음이란 느낌은 분명하다.

시체 옆에서 태연히 담배를 물고 있는 관리의 무심한 얼굴은 또 무엇인가. 
이제 이골이 난 타인의 불상사 같은 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는 의미일까. 
또는 그치지 않는 불행들에 그도 덤덤해져 버린 것일까. 
주검의 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접근하고 있다. 한 마리는 머리맡을 어슬렁거리며 시신을 넘본다.

병든 러시아에 바싹 다가선 재앙의 예고편처럼 그녀의 다리와 손을 휘감고 있는 건 아마도 물풀인 것 같다. 
경직되어가는 여자의 시신에 작가가 감아놓은 부드러운 물풀의 줄기와 꽃. 
페로프의 전형적인 황색 색조만으로도 이미 더할 나위 없이 황량한 느낌을 주는 화면에서 
그나마 위로 받을 대상이라고는 그것들 밖에 없다. 

 

<익사한 여자 (1867)> detail (부분)

화면상 잘 보이지 않지만,  왼쪽의 동그란 물체 둘은 물풀(?)의 꽃이고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녀의 오른손에 남은 반지는 한때 지상에서 그녀가 꾸었던 꿈의 흔적이리라.  
19세기 러시아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비판적 리얼리즘 회화의 기수 바실리 페로프.  
격동의 1860년대는 갓 삼십대에 접어든 그가 슬픈 러시아의 현실과 고통스럽게 교감한 시기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분노를 에두르지 않고 우리의 눈앞에 그대로 들이민 시절이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그래 세상이 이래도 정말 괜찮은 거냐고 외치는 그의 절규를 듣는다. 
얼어붙은 땅에 가장의 시신을 묻으러 가는 초라한 장례행렬, 
그리고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자기 덩치보다 훨씬 큰 물수레를 끌어야 하는 어린 것들의 모습. 
이 정도라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절망의 깊이 만큼 분노하고 분노한 만큼 내지르는, 삼십대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크람스코이 등 주류 미술에 반기를 든 일단의 진보적 화가들이 1871년 ‘이동파’를 발족하였을 때 
페로프가 창립 멤버로 참여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A Drowned Woman. 1867. 37.5 X 23.7 cm

 

Drowned. 1867. sketch and study. 습작.

 

Portrait of Writer Fedor Dostoyevsky. 도스토예프스키. 1872  .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앞서 언급했듯이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로 유명하다. 
페로프는 개인적으로 19세기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러시아 민중을 대표하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무척 존경했다.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그려내고, 사실주의에 자부심을 가졌던 작가와 화가는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페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주제와 유사한 현실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페로프의 초상화는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빛을 비춤으로서 
미묘한 음영을 만들어 인간의 내면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페로프는 기민한 관찰력으로 대상을 포착해 내면 심리를 화폭에 담아 냈다.

하나의 초상화 속에 인물의 성격을 포착한 페로프의 묘사로 

19세기 러시아 미술은 한층 리얼리즘의 가치를 더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말년에 이르러 추락했다고 한다. 페로프는 1882년 결핵으로 사망했다.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고 민중들에게 진정성을 가르쳤던 예술가들은

1917년 소련의 출발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정치가들과 볼셰비키 정부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더 이상 '사실적'인 그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의 정치 이상을 지지하는 작품들 만을 원했다. 무서운 세상이었다. 
전제 정치 하에 점차 독창적인 예술이 사라지고 국가조직으로부터의 압력은 점점 강화되었다. 
정부에 대항하면 즉각적으로 강력한 처벌이 내려졌고,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정부의 문화정책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출판, 전시, 공연 활동을 

할 수 없도록 고립시켰고, 이를 어긴 예술가들은 강제노동수용소에 구류, 감금되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그곳에서 되돌아오지 못했다. 이 시기에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1930년 천재시인이라 칭송 받던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의 자살 사건이다. 
마야코프스키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을 가진 예술가였다. 

물론 스스로 열렬한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삶은 삶은 정말 인간적이고 처절했다. 

마야코프스키는 청춘을 불사르며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3번의 구속까지 거치며 혁명을 향해 달려온 시인에게 

막 눈앞에 시작된 관료주의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철저하게 관습을 거부했던 그의 눈에 이런 현실은 배반당한 혁명으로 비쳐졌다. 
게다가 그는 끊임없는 검열과 감시속에서 거대한 정치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비열하고 남루한 현실에 절망,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한다.

더욱 끔찍스러운 일은 1937~53년 소련 정부가 수백 명에 달하는 뛰어난 예술가들과 
그들을 지지하던 수백만 명의 시민들을  문화영역에 미친 이같은 정부의 강압정책의 결과 
1930년대에서부터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소련에서 창작된 예술작품의 대부분은 
소련인들의 표현을 빌리면 '책상서랍' 속에 쌓아두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이 작품들은 출판이나 전시, 공연활동을 위해 결코 제출되지 않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어떤 경우에는 1980년대말까지 숨겨져 왔다.

하지만 40대에 접어들며 페로프의 그림은 상당히 변화한다. 

미술사가들은 종종 그것을 ‘성숙’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숙'이란, 그 의미가 매우 주관적인 단어가 아닐지. 
어쨌거나 ‘성숙’해가는 페로프의 작품세계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그 소재가 매우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반면 그의 초기작들이 하나같이 품고 있던, 심장에 사정없이 날아와 꽂히던 그 서슬 퍼런 비수는 찾을 수 없다.

그의 대표작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1872)>은 
페로프가 40대에 들어서기 직전 그린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소개할 때면 어김없이 인용되는 이 그림도 
페로프의 ‘성숙’한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언급되곤 한다. 
이 초상은 19세기 말 러시아 미술의 위대한 파트롱 파벨 트레차코프가 기획한 
'우리나라에 소중한 사람들'이란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그는 페로프를 비롯한 최고의 화가들에게 당대 최고의 인물들을 그리도록 의뢰하였다.

그림 속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주 금욕적인 구도자 같은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어떤 평자는 이 그림이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 기술한 수천 편의 논문보다도 
더 함축적으로 그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감탄한다.

그쯤에서 나는 좀 혼란스럽다. 
만약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강고한 신념과 지혜를 가진 구도자였다면, 
이 초상은 대단한 걸작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잘 알려진대로 금치산자에 가까운 낭비벽과 도박으로
 평생 가난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닌가.

돈 몇 푼을 빌리기 위해 주변사람들에게 아첨과 자학으로 가득한 비굴한 편지를 보내고, 
그렇게 빌린 돈을 또다시 허망하게 탕진해버렸던 그가 아닌가. 
그가 온갖 남루한 인생들의 심리를 탁월하게 기술한 기념비적 소설들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허점투성이인 그의 삶은 구도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영상]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도스토옙스키 초상화

 

이 초상화는 1872년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요청으로 
바실리 페로프가 그린 것인데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적인 초상화라고 할 수 있다.
트레티야코프는 당시 유명 문인들의 모습을 당대 최고의 화가들에게 부탁해 그리도록 했다. 
이 그림은 도스토옙스키가 유럽에서 귀국한 그해인 1871년 말에 시작돼 이듬해 완성됐다. 
도스토옙스키가 귀국해 보니 『백치』, 『악령』등의 성공으로 그의 명성이 
트레티야코프가 초상화를 부탁할 정도로 높아져 있었던 것이다. 


짙은 그린색 두터운 재킷 차림의 수수한 그의 복장은 

당시 넉넉지 않았던 그의 경제 상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초상화에 대해서 안나는 회고록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해(1871년) 겨울에는 모스크바의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미술관 소유주인 
뜨레찌야꼬프가 남편에게 미술관에 소장할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위해 유명한 화가인 뻬로프가 모스크바에서 왔고, 

작업을 시작하기 전 일주일간 그는 매일 우리를 찾아왔다. 
뻬로프는 그야말로 다양한 정서 상태의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논쟁을 유도하면서 남편의 얼굴에서 가장 특징적인 표정을 포착해 냈다. 
그것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가 예술적 사고에 몰입해 있을 때의 표정이었다. 
뻬로프는 ‘도스토에프스끼의 창작 순간’을 초상화에 붙박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표도르 미하일로비치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그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오른 것을 여러번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마치 ‘자기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을 때는 아무 말 없이 서재를 빠져나오곤 했다. 
나중에 이야기하다 보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자기 생각에 완전히 빠져서 

내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고, 내가 자기 방에 다녀갔다는 것도 믿지 않았다.
  뻬로프는 똑똑하고 친절한 사람이어서 남편은 그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참석했다. 
뻬로프에 관해서는 정말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페로프가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완성한 것은 1872년 5월이었다. 다섯달이나 걸린 것이다. 
이 초상화에 대해 트레티야코프가 페로프에게 준 사례비는 6백 루블이었다.

 

모스크바 '러시아국립도서관(구 레닌도서관)' 앞의 도스토예프스키 동상. 
페로프의 초상화를 토대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를 잘 묘사한 것은 이 초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바탕으로 제작했다는 모스크바 레닌도서관 앞의 동상이 아닐까 싶다. 
세계 최대 규모로 러시아가 자랑하던 이 도서관 앞자리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에는 불안과 우울이 가득하다. 

 

The bird-catcher. 새 사냥꾼. 18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The Hunters at Rest. 휴식중인 사냥꾼들. 187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낚시꾼 The Angler. 187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그 무렵 페로프가 흥미를 가진 또 다른 소재는 '사냥하는 사람들'이었다. 
화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새 사냥꾼(1870)>, <사냥꾼들의 휴식(1871)>, <낚시꾼(1871)>에서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 세속적 행복에 취한" 젠틀하고 유머러스한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그림들을 보면 그는 앞서 소개한 파벨 페도도프(1815~52)를 계승하여 
해학적 풍속화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페도도프의 <새 수훈자>나 <불청객>을 페로프의 '사냥 시리즈'와 섞어 놓으면 
처음 보는 사람은 같은 화가의 그림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후자에는 페로프의 전매특허인 카키색조가 좀 더 진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림의 분위기나 묘사가 아주 비슷하다. 

 

Fishing. 1878​.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Christ in the Garden at Gethsemane.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 1879 . tempera on canvas. 

151.5 X 23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제자들이 잠든 사이 예수는 땅에 엎드려 기도한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화폭 속은 지금 깊고 푸른 밤이다. 페로프에게서는 일찍이 엿볼 수 없었던 특이한 암록색. 
그 두꺼운 어둠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비장하게 엎드려 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이곳에 오른 그는 곧이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잘 알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림에서 건너오는 서늘한 기운.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둡고 푸른빛 탓일 수도 있다. 
혹은 필생의 사건을 앞둔 예수의 고뇌가 그만큼 처절한 탓일지도 모른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불빛은 누구와도 이 두려운 짐을 나눌 수 없는 예수의 고독을 더 사무치게 드러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잇는다. 페로프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젊은 시절의 대표작 <트로이카>와 이 그림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혹시 '성숙'한 페로프는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며 그랬듯이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덧없이 여기고 종교의 세계로 침잠해 갔던 것일까.

페로프의 작품세계에서 이 그림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건 간에, 
보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꿰뚫고 지나가는 힘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건, 니콜라이 게(1831~94)가 내놓은 예수 연작들과의 유사성이다.  

 

Christ in the Garden at Gethsemane. 게네마내의 예수. Date unknown .oil on canvas.  53.5 X 30.5 cm.
Ulyanovsk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Ulyanovsk)

 

니콜라이 게, <겟세마네 동산 (1869)>.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들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른다.

 

니콜라이 게, <유다(1880)>.
사람들이 예수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유다의 또다른 고독.

 

Nikita Pustosviat. Dispute on the Confession of Faith.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

1880 - 1881. oil on canvas. 512 x 337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니키타 푸스토스비아트, 신앙에 관한 논쟁>은 페로프 이야기에서 대단원을 장식할만한 작품이다.
이는 페로프가 49세로 세상을 뜨기 한 해전에 완성한 대작이다.  
화사한 색채로 가득한 화면. 페로프가 집착하던 카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게다가 그려진 내용은 생뚱맞게도 17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내분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988년 비잔틴으로부터 러시아로 전래된 동방정교는 
몽골의 지배기(1240~1480)에 급성장하여 부와 세속적 권력까지 틀어쥐게 된다. 
그러나 한때 차르와 맞설 정도의 위세를 떨치던 러시아 정교회는 16세기 초 그 세속화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 터져 나오며 소유파-무소유파의 충돌이라는 내홍에 직면한다.

소르스키를 중심으로 한 ‘무소유파’ 수도자들은, 
교회는 국가와 분립하여 과다한 토지를 포기하고 원래의 청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권력과 연대한 소유파들이었다. 
이들은 무력으로 무소유파들을 축출하여 추방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러한 교회의 분열에 따라 그 세속적 힘은 이미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다.    

러시아정교회가 더 결정적으로 분열함으로써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Patriarch, 가톨릭의 교황에 해당함)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종속되는 계기는 17세기 전례 개혁을 둘러싼 개혁-분리파의 분열(‘라스콜 Раскол’)이었다. 
정교회는 갖가지 화려한 비잔틴 문화와 함께 러시아에 도입되었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서 점차 토착화한다. 
이에 따라 종교예식의 세부적 내용에 있어서 원래의 비잔틴 양식과 상이한 점이 하나둘 나타나게 된다.
이는 모든 외래종교의 전래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가톨릭이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전례개혁은 비극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1654년 당시 러시아정교의 수장은 총대주교 니콘(니키타 미노프, 1605~1681)이었다. 
그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러시아 교회를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기도서와 예배의식을 비잔틴 본래의 양식으로 되돌리겠다고 선언하고 주교회의의 승인을 받는다. 
표면상 이는 단순한 전례형식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지 않은 신자들은 이러한 조치가 사실은 신앙의 본질과 무관하며, 
‘개혁파’들이 교회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꾸미는 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많은 고위 성직자와 수백만의 신도들이 이에 대해 강하게 저항한다. 
그들은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토착화한 전례의 전통을 고집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라스콜니키 파’ 즉 ‘분리파’ 또는 '구교도'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두 번째 차르 알렉세이 (재위 1645~76)는 이 대목에서 개혁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분리파는 차르에게도 맞서다가 무려 80년 간 갖은 고난을 겪는다. 
분리파의 수장인 수좌대주교 아바쿰 페트로비치(1621~82)가 화형 당하고, 
수많은 신도들이 분신으로 이에 저항하는 처참한 사건도 발생한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 전례의 차이란 실상 매우 사소해 보이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호를 긋는 손가락의 수였는데, 비잔틴의 원래 방식은 
손가락 3개를 사용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2개로 토착화함으로써 문제가 된 것이다.
이는 19세기 역사화의 대가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 <대귀족 모로조바(1887)>에 잘 나타나 있다. 

 

바실리 수리코프, <대귀족 모로조바(1887)>.  '손가락 둘' 그룹의 몰락

그림은 분리파의 거물이었던 대귀족 모로조바가 어느 겨울날 먼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슬에 묶인 채 짚으로 바닥을 깐 초라한 썰매에 몸을 맡긴 모로조바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우측에는 분리파들이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개혁파들이 유쾌한 얼굴로 패배자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대립의 패배자는 분리파뿐이었을까. 
니콘은 러시아정교회를 과도한 민족주의로부터 구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과정에서 파문한 수많은 인재들을 상실함으로써 

교회의 역량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우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하다가 
1667년 주교회의에서 파면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1681년 아바쿰보다 오히려 한 해 먼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실행한 사회전반의 개혁에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정교회의 수장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복속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두 번에 걸친 내부분열을 거치면서 
그 화려했던 권력을 세속 군주에게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니키타 푸스토스뱌트, 신앙에 관한 논쟁(1880~1)> 부분

수라장이 된 분리파 진영. 왼쪽 위 흰수염의 사나이가 니키타이다. 
오른쪽 붉은 망토의 병사가 바로 '스트렐치' 부대원이다. 
왼손에는 머스켓 소총을, 오른손에는 도끼의 일종인 '바디쉬'를 들고 있다.

 

<니키타 푸스토스뱌트, 신앙에 관한 논쟁(1880~1)> 부분
헤게모니를 쥔 자들의 냉랭한 여유, 오른쪽 흰수염이 개혁파의 수장 총대주교 요아킴.  

페로프의 그림은 이러한 개혁파-분리파의 대립이 극점에 있었을 때 
차르의 궁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주연은 분리파 구교도 사제 니키타 푸스토스뱌트(? ~ 1683)이며, 
조연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소피아 공주이다. 
요아킴은 개혁파의 수장이었고, 소피아는 공동 차르를 맡은 어린 동생들 위에서 
수렴청정을 하며 사실상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었다 (재위 1682~9).

수즈달의 사제 니키타는 당시 구교도 측의 리더 중 한 명이었다. 
반대파들은 그에게 '헛일 하는자'란 의미의 '푸스토뱌트(Пустосвят)'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는 1659년 수즈달의 대주교인 스테판을 이단으로 고발하였으며, 
그의 무죄가 선고되자 다시 차르 알렉세이에게 고발하였다.

대세는 개혁파 쪽으로 이미 기울어 버렸지만, 1682년 구교도들은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다. 
차르의 근위대 역할 맡았던 머스켓 소총부대 ‘스트렐치’ 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스트렐치는 소피아를 위해 세 차례나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는, 그녀의 핵심적 권력기반이었다.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니키타 푸스토뱌트는 그해 7월 5일 차르 소피아의 면전에서 
개혁파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기회를 얻게 된다. 페로프의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그린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이 그림을 보면 
그 승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우측의 수염 덥수룩한 무리들은 전통을 고집하는 분리파 구교도들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좌측의 세련된 귀족풍 인사들은 총대주교 요아킴과 개혁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수렴청정의 억센 통치자 소피아가 서있다. 
그녀와 개혁파 인사들이 한통속으로 냉랭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만 보아도 
니키타의 상황이 절망적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분에 못 이겨 돌진하며 몸싸움을 하느라 니키타의 웃옷이 반쯤 벗겨져있다.

발밑에 어지러이 펼쳐진 책, 그리고 나동그라진 그릇과 사람들. 분리파 진영은 수라장이 되어있다. 
니키타가 의지할 것이라고는 손에 쥔 십자가와 등 뒤의 이콘 밖에 없다. 
당신들,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라고 외쳐보지만, 하늘은 늘 멀리 있다.   

  바실리 페로프의 <신앙에 관한 논쟁 중 소피아 (부분)>                    일리야 레핀,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 (부분)>

 

소피아의 냉랭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표정은 이태전에 그려진  
일리야 레핀의 <공주 소피아 알렉세예브나(1879)>를 연상케 한다.  
그녀의 권력기반인 스트렐치는 니키타를 배신하고 입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개혁파의 손을 들어준다.  
가련한 니키타는 다음날 처형되고 만다. 

 

크기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범상찮은 이 그림은 왜 페로프의 대표작으로 도록에 소개되지 않았을까. 
비록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나 이 그림이나 종교적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고통 받고 억압 받는 자에 대한 연민’이란 코드로 작가의 시선을 이해한다면 
젊은 시절로부터 시종일관한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

페로프는 모교인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어 네스트로프, 코로빈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직 오십이 되지 못한 나이였다. 

 

The Arrival of a New Governess in a Merchant House. 상인의 집에 도착한 가정교사. 1866, 

Oil on canvas, 54 x 44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The arrival of a governess in a merchant's house. 1866. sketch and study. 29.5 X 26.5 cm. 습작

The Bachelor Guitarist. 독신 기타리스트. 1865. Oil on panel, 22 x 31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페르프는 아르자마스 지역의 행정관이었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적자가 아니고 서자였다고 한다.  
열 두 살이 되던 해 페로프는 아르자마스에 있는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가 얻은 별명은 그의 이름이 되는 ‘페로프’였습니다. 
그의 글씨체가 아주 좋아서 얻은 별명이었는데 페르프는 ‘러시아의 펜’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Amateur 1862  Oil on canvas, 28 x 34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1853년, 19세의 나이로 페로프는 모스크바 예술학교에 입학한다. 
이 곳에서 풍속화와 풍자화를 배웠는데 훗날 페르프의 주요 장르가 된다. 
학교 재학 기간 중 페로프는 작품으로 두 번의 은메달을 수상했다고 한다. 
초기 그의 작품은 섬세한 붓 터치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Self-Educating Caretaker. 1868  Oil on panel, 25 x 34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Blind Musician 1863-1864. Oil on canvas, 48 x 56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Wanderer(Pilgrim). 1870 Oil on canvas, 54 x 88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48년 2월 혁명으로 공화정이 들어설 때까지 
리얼리즘은 부르주아들의 부정적인 면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비인간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을 묘사한 리얼리즘을 비판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데, 
러시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그리고 나중에 고리끼가지 이어지는 흐름인데 
페로프도 작품 활동을 할 때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예술가가 눈을 감는 것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그런시기였다.   
 
1861년, 27세가 되던 해 페로프는 졸업 작품으로 금메달을 수상한다. 
부상으로는 해외 유학이 주어졌으나 그 해 그가 제작해서 전시한 작품이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부활절의 마을 십자가 행렬’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성직자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전시회에서 철거되고 말았다. 
비판적 사실주의 작품이기 때문이었고 한다.  
당시 페로프의 친구가 남긴 글 중에는 

‘이태리 유학 대신에 솔로베츠키섬으로 유배를 갈지도 모른다’라는 대목이 있다고 한다.   

 

The  Organ-Grinder in Paris. 파리 거리의 악사. 1864  Oil on canvas, 56 x 76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다음 해 독일의 몇 개 도시를 거쳐 파리로 유학을 간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유럽 거리의 풍경은 이 때 그려진 것이다.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에 대해 그 자신은 ‘그림을 그리는 기술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뚜렷하게 남긴 것은 없다고 한다. 

 

Paris sharmanschitsa. 파리의 오르간 키는 사람. Sketch. 1863. sketch and study. 습작. 21.8 X 27 cm.

 

A Meal in the Monastery. 수도원의 식사. 1865~1876. Oil on canvas, 126 x 84 cm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1865년, 4년 만에 페로프는 정부가 보장한 유학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러시아로 돌아 온다. 
기간을 채우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다. 귀국한 그 해부터 약 5~6 년간 그의 역작들이 제작된다
 
귀국 한 그 해 페로프는 아카데미 회원이 된다. 
이 때부터 그려진 그의 작품은 누구나 알기 쉬운 내용이었다. 
또 의도적으로 쉬운 주제를 선택하기도 하였다. 
비판적 리얼리즘에 충실한 그의 작품은 1860년 러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그를 이끌었다.    
 
1871년 페로프는 관주도의 전시회를 반대하고 

러시아 전역에 직접 전시회를 여는 이동파의 창립 멤버가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가 졸업한 모스크바 예술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교수로서의 그의 자질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의 제자 중에는 미하일 네스트로프, 
세르게이 코로빈 같은, 훗날 러시아 회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화가들이 있었다.
 
1860년대 말 페로프의 초상화는 다른 초상화가들의 작품과는 달랐다. 
초상화 주인공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에 두고 페로프는 모델의 개성과 속 내를 꺼내 화폭에 담았다.
  남긴 초상화 속의 주인공들의 계층은 다양하여 당대 러시아를 대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떠돌이도 있고 농민도 있었다. 
이런 그의 작품 성향은 훗날 레핀이나 막시모프 같은 화가들에게로 이어지게 된다. 

 

First Christians in Kiev. 1880. Oil on canvas, 243 x 156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페로프는 변신를 도모하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 자신이 추구해 왔던 

기법이나 주제를 바꾸지 않고 평생 자신의 것을 유지하는 화가였다.

 

Sleeping children. 잠자는 아이들. 1870. Oil on canvas, 61 x 53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그의 첫 번째 아내의 초상화가 있는 것으로 봐서 두 번 결혼한 것으로 추측된다. 
 페로프는 결핵에 걸려 48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The Investigation (Arriving at an the inquiry). 1867. oil on canvas.43 X 3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the Painter Alexei Savrasov.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Pugachev's Judgement. 푸가체프의 판결. 1875  Oil on canvas, 238 x 150 cm
The History Museum, Moscow, Russian Federation 

 

The Convict(Incorrigible One ).1873  .Oil on canvas, 113 x 88 cm
The History Museum, Moscow, Russian Federation

 

The Seller of Song Books  in Paris. 1864  Oil on canvas,
 The State Museum of Fine Arts of Tatarstan Republic, Moscow, Russian Federation

 

Lent Monday (Going to the Bath House). 1866. oil on board. 17.5 X 22.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19세기 러시아 민중들의 삶은 비참했다. 짓밟히고, 고통받고, 숨 막히는 삶이었다. 
사회는 부패했고, 비판세력이나 국민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극에 달했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고 전 러시아를 향해 광범위한 세뇌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은 러시아인의 민족적 자각을 낳았다.

이어 1825년 터진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이 자각이 사회변혁의 열정으로 표출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러시아 미술은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진화하고 변모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화가들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지식인이었다. 
그들에게 그림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었고 삶을 변혁하는 도구였다. 
‘비판적 리얼리즘’은 러시아 화가들의 창작 규범이었다. 그들은 사회를 비판했고, 정부에 맞섰다. 
그런 예술가 정신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것이 1870년 결성된 ‘이동파’였다.

이동파의 등장이야말로 근대 러시아 미술을 서유럽 미술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는 지점이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동파란 러시아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려고 
여러 도시로 옮겨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취지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이동파는 말하자면, 미술계의 브나르도(‘민중 속으로!’) 운동이었다.

이동파는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후진국이면서도 
정신적으로 이것을 극복하려 했던 지식인들 중심의 민주적 미술 유파였다. 
세계 미술사에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반체제적 성격을 유지한 미술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동파는 ‘삶의 진실’을 추구한다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시켰다.

 

Fishing.  1887.

 

Portrait of Nikolai Kridener, the Artist s Brother. 1856.  oil on canvas. 51 X 62.3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At the Cemetery (Scene on a Grave). 1859. oil on canvas. 69 X 5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ilgrim (Wanderer). 유랑자. 1859.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Portrait of an unknown. 1860.

 

Portrait of E.E. Perov. 1860. 46 X 57cm.

 

The first rank. Son of a sacristan, produced in the collegiate registrars. 1860.

 

Burglary at Easter Eve. 1861. 42.5 X 33 cm. 

 

Portrait of a Man. 1861. oil on canvas. 60 X 46.8 cm..
The State Hermitage Museum -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Courting an official to his daughter tailor. 1862.

 

At the Cemetery(Scene on a Grave). 1859.  oil on canvas. 69 X 5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rt teacher. 1863. sketch and study.

 

Parisian promenade. 1863. 23.8 X 15.2 cm.

 

Policy. 1863. sketch and study.

 

The Seller of Song-books in Paris (study).  1863 .oil on canvas.
The State Museum of Fine Arts of Tatarstan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Kazan)

 

Street musicians in Paris. 1863. 17 X 14 cm.

 

The funeral of a poor quarter of Paris. 1863. 29.2 X 22 cm.

 

Boy with raised hands, reaching out to the public. 1864.

 

Celebration in the outskirts of Paris.1864. sketch and study.  51.9 x 33.4 cm

 

 Festivities on Montmartre. 186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Festivities in Paris. 1863-1864.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Orphans in the cemetery. 1864.  oil on canvas. 34.8 X 48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Parisian rag-picker. 파리의 넝마주이. 1864.  oil on canvas. 55 X 72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Shy girl. Study for the painting 'The Janitor, who gives an apartment to her mistress'. 

1864. sketch and study.

 

Vendor of Song Books.1863~1864. oil on  canvas. 102.5 X 76.5 cm.
The State Museum of Fine Arts of Tatarstan Republic  (Russian Federation - Kazan)

 

The Apprentice Boy (Boy-craftsman). 1865.
Ulyanovsk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Ulyanovsk)

 

Regular pool(Queuing for Water). 1865. 61 X 49.5 cm.
National Art Museum of the Republic of Belarus  (Belarus - Minsk)

 

Regular pool. 1865. sketch and study

 

Repast. 1865. 27.2 X 15.3 cm. sketch and study

 

Caretaker Letting an Apartment to a Lady. 숙녀에게 아파트를 세주는 관리인. 1864-186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aretaker-Letting-an-Apartment-to-a-Lady. 숙녀에게 아파트를 세주는 관리인. 1878.
Yaroslavl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Yaroslavl)

 

General, requiring horses. Sketch for the painting 'The scene at the post office'. 

1866. sketch and study

 

The boy, preparing for a fight.(Boy Getting Ready to Fight). 1866.
Yaroslavl Arts Museum  (Russian Federation - Yaroslavl)

 

The conversation at the round table. 1866. oil on canvas.

 

 

Mikhail Vrubel, "Self-portrait" (1905), State Tretyakov Gallery

일리야 레핀보다 10년쯤 뒤에 태어나 19세기 말에 활동한 상징주의 및 아르누보 사조의 화가이다.
키예프의 키릴로프스키 수도원의 벽화를 복원하고, 모스크바로 나와

S.I.마몬토프의 오페라극장에서 무대미술을 담당, 일련의 대장식(大裝飾) 패널을 완성하기도 했다. 
신화 ·성서 ·영웅서사시와 문학작품을 주제로 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 강렬한 개성과 대담한 구도와 필치 등으로 독자적인 미적 세계를 확립하였다.

1910년 정신병으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그림의 화두는 '악마'였다. 
브루벨의 등장은 러시아미술계에서 이단아로 불릴만큼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그는 악마 그림을 통한 독창적인 상징주의로 러시아 미술사에 새로운 국면을 전개한 화가였다.
그의 작품은 세기말 사상과 데카당스와 맞닿아 있으며, 비잔틴 미술을 재해석해 새롭게 재창조했다. 
브루벨은 회화 뿐만 아니라 음악, 연극 등과 같은 분야를 아우르며 시대를 앞서나간 인물로 평가받았다.

미하일 브루벨은 러시아의 옴스크, 즉 시베리아의 어느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베리아, 그곳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시려오는 <닥터 지바고>의 '라라의 테마'가 귀에 맴맴 돌고, 
러시아 민속 악기 발랄라이카 소리가 가슴을 후벼파는 곳이다.
살을 애이는 듯한 추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땅 시베리아에서 브루벨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보냈다. 
브루벨을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미술 실력을 인정 받았지만, 
집안의 뜻에 따라 188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다. 
하지만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그는 임페리얼 아카데미 예술 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1884년 브부벨은 키예프의 키릴로프스키 수도원의 프레스코화 복구 작업에 참여하게 되고, 
이 벽화 복원 과정을 통해  향후 자신의 예술 세계를 좌우할 중요한 조형적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그는 그동안 배워온 유럽 전통의 사실적이고 합리적 표현을 넘어 
비잔틴 미술 특유의 아름다운 선과 장식적인 면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중세 기독교 미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세기말의 영향으로 관능적이지만 시대의 불안과 공포를 그림으로 풀기 시작한다.

브루벨의 작품은 초기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눈에 띄는 재능을 보여준다. 
시베리아의 극단적인 자연 환경 속에서 어린시절 형제 자매의 죽음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고,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어둡고, 서늘하다
대표작으로 《악마》(1890) 《술탄왕 이야기》(1900) 《라일락》(1900) 등이 있으며, 
도기나 유리를 소재로 한 작품 등도 남겼다.

 

Self Portrait. 1882. watercolor on paper,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브루벨은 초기 크리스트 미술을 바탕으로 동방의 문화를 흡수한 헬리니즘 미술, 
고대 아시아와 페르시아 왕조의 미술이 섞인 비잔틴 미술에 매료되었다. 
비잔틴 미술은 화려하고 장엄하지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중시하는 미술이다. 
브루벨은 그 중후하고 선명한 색채, 화려한 장식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아 낸다. 
비잔틴 미술의 또 하나의 특징인 화려한 모자이크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보여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1890년부터 브루벨은 모스크바에서 활동한다. 
그는 아르누보적인 그림,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 건축, 의상, 무대 제작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브루벨은 러시아의 시인 레르몬트프(Lemontov)의  
낭만적인 시와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그 유명한 '악마' 시리즈를 발표한다. 


시인의 악마는 아름다운 공주를 사랑했다. 
'타마라'라는 공주는 그를 두려워 하면서도 마침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랑의 밤이 지나자 그녀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고, 
커다란 마음의 고통을 안은 이 악마는 그녀의 영혼을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에서 나타난 천사가 그녀의 영혼을 데리고 가버렸고 악마는 그녀의 영혼을 따라 
신 앞에 나가고 싶었지만 악마로서는 허용되지 않은 신성한 곳인 신 앞에 갈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 받지 못하고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에게조차 버림받은 악마, 
브루벨은 그 숙명적인 존재를 슬프고 고독하게 표현했다.

브루벨은 중성적인 얼굴에 뾰족한 귀, 노을지는 하늘과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먼 산을 응시하는 악마를 창조해 냈다. 
그의 눈은 우수에 잠겨있고, 마치 눈물이 고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브루벨은 그의 작품 속 악마에 대해 '여성과 남성의 외양을 통합한 영혼, 
악하기 보다는 강하고 고귀한 존재로서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영혼' 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에 대해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천재의 매력적인 교향곡으로 악마를 창조했다" 라고 극찬을 했지만, 
일부 비평가들은 '야생적 추함' 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했다.

Self Portrait. 1880. pencil on paper.

1896년 브루벨은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오페라 가수 나데즈다 자벨라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아내를 위해 그 유명한 오페라 <백조공주>의 무대 세트와 의상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브루벨은 화려하고 조형적인 작품들을 많이 제작한다. 

하지만 사랑하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고통으로  
1901년 다시 '악마'를 테마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는 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렸고, 결국 한 정신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매독 3기로, 근육과 골격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병마는 이미 뇌까지 침범하여 브루벨은 회복 불능한 상태였다.  
그는 1906년부터는 전혀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고, 1910년 매독의 고통속에 생을 마감했다. 

 

Mikhail Aleksandrovich Vrubel, At work, 1900s

미하일 브루벨 그는 옴스크 태생으로 쌍트 뻬쩨르부르그 대학에서(1874-1880) 법학을 공부하고 
예술아카데미에서(1880-1884) 미술을 공부했다. 
그는 러시아의 대표적 상징주의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미술 디자이너, 무대화가, 일러스트레이터, 그리고 건축가였다. 
그의 가족은 러시아, 폴란드, 타타르, 덴마크 등 여러 민족의 피가 섞여 있었다.

그의 여동생 예카테리나와 남동생 알렉산더는 어린시절 죽었고 
이것은 그에게 깊은 내적인 상처를 남았다. 
그는 라틴, 프랑스, 독일 등의 문학 작품 등을 어려서부터 배웠으며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한때 독일 철학 중에서 특히 니체, 칸트, 쇼펜하우어에게 빠지기도 했다.

젊어서 부터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아 교수들의 만장일치로 1884년부터 1889년까지
키예프의 키릴로프스키 성당의 벽화(프레스코화)를 복원하는작업을 수행했다. 
한동안 그가 머물렀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셰익스피어, 괴테, 레르몬토프 등 문학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강렬하고도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색채와 결정을 이어 놓은 것 같은 
퀼트의 패치워크법과 같이 여러 조각을 이어 붙인 것 같은 표현법, 
그림의 대담한 구도 등으로 당대 화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확립했다.

브루벨은 "예술세계"협회 회원(1900년부터)이었으며, 예술 아카데미(1905년)의 회원이었다. 
1889년부터 아브람쩨보 콜로니에 동참하게 되었다. 
1889부터 1891년 사이 마몬또프의 모스크바 저택에서 "앉아 있는 사탄"을 그렸고 
마몬또프 가족의 초상화도 그렸다​

 

Princess Reverie, 리베리 공주. 1896. ​oil on canvas. 750 x 140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한개 층의 중앙 홀을 꽉 채운 작품을 만난다.

 

Princess Reverie. 리베리 공주. 1896. oil on canvas. 750 x 1400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rincess Reverie. 리베리 공주. (부분)

 

Faust. 189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Flight of Faust and Mephisto.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fter the Concert Portrait of Nadezhda Zabela. 1905. charcoal, pastel on  canvas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Faust. 189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Flight of Faust and Mephisto. 188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omeo and Juliet. 1896.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 Businessman K. Artsybushev, 189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Fallen Demon" (1902), State Tretyakov Gallery
추락하는 악마. 가로로 매우 길다. 가운데 눈과 머리가 보인다.

 

브루벨은 악마 연작 시리즈로 유명한데, 
고통받고 상처받은 후에 버려진 악마. 연작 시리즈중 마지막 작품이다. 
부자연스럽게 목이 꺾인 악마는 이카루스 이후에 하늘에서 추락한 또 하나의 존재이다.  
온통 폭풍우와 태풍의 격렬한 감정 속에 팽개쳐진 악마의 얼굴은 차라리 고요하다.
악마 시리즈 외의 다른 그림들을 보면, 역시 처연하다.

 

"The Swan Princess" 백조공주. (1900), State Tretyakov Gallery

브루벨이 무대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부인 '나제즈다 자벨라'와의 만남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6년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한 오페라에서 가수 나제즈다 자벨라의 노래를 듣게 된다.  
그녀의 목소리에 반한 브루벨이 무대 뒤로 찾아갔고 반년 후에 둘은 결혼했다. 
자벨라는 특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노래를 잘 불렀다. 
이 작품 "백조 공주"는 바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차르 술탄 이야기"에서 
백조 공주로 분한 아내 자벨라의 의상을 스스로 디자인한 뒤 다시 그림으로 옮긴 모습이다.

여기에 동양 미술, 특히 페르시아 카펫에 대한 관심이 겹쳐지면서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거장
알폰스 무하나 구스타프 클림트와는 꽤 다르면서 어딘가 비슷하기도 한 화풍이 완성된다.
어떻게 보면 동양(페르시아)의 영향과 금색(정교회 이콘) 등 화려한 색상이라는 
두 사람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다. 
브루벨 역시  회화 외에도 색유리화, 도예, 무대미술, 의상 등등에도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그린 백조공주는 다른 작품 속의 그 눈빛이면서도 젖어 있는 우수를 표현하는 걸로 충분한,
우아함 가득한 그림이었으나, 그가 그렇게 파들어갔던 그림은 이런 소품과는 뭔가 다른 게 있었다.
좀더 추상적이거나, 많은 부분 중동으로부터 영향받은, 장식적이고 단순화된 문양과 색감 등이 나타나는
여러 다른 작품에서도 작가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이 데몬 시리즈에서 작가가 찾고 싶었던 그 뭔가, 그리고 끝내 구현해내지 못하고 정신병에 빠지게 한 그 뭔가는
사람 속에 뭔가 깊은 감정, 그것이 슬픔이건 절망이건 사람이 겪어야 하는 지독하게 인간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The Demon Seated" 앉아 있는 악마. 1890. ​oil on canvas. 212.5 x 11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산등성이에 앉아서 서글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상념에 잠겨 있는 이 아름다운 청년은 악마다.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은 출구 없는 열정의 꿈틀거림처럼 느껴진다. 
그는 대답을 찾을 수 없는 의문 속에서 길을 잃고 이곳 카프카즈의 돌산 위에 잠시 머물러 있다. 

이 작품은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 레르몬토프의 서정시 <악마, 1839>에서 직접 영감을 받은 것이다.  
레르몬토프의 악마는 신에 대한 반역으로 낙원에서 쫒겨났다. 
추방된 천사를 악마로 만든 것은 바로 세계의 모순과 부조화다.
이 악마는 순수한 악을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과 악이 대립하는 
구역질나는 현실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영웅적인 반항이다. 
그는 지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하는 데카당이다. 
세상과 불화하는 자, '악마'는 브루벨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서 그의 스타일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세기말의 암울한 감수성으로 브루벨은 빛을 어둠으로 바꾼다. 이것은 보랏빛 시간이다. 
브루벨의 다른 작품 <저녁으로> <세이렌> <판> <백조공주> 등에도 이 보랏빛 시간이 표현되어 있다. 
레르몬토프의 시구처럼 '낮도, 밤도, 황혼도, 여명도 아닌' 시간이다. 
그것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휴지부 같은 시간이다. 
모드 것이 혼돈에 빠져 있으며,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시간이다.

그에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이라면 

이것 "앉아 있는 악마(Демон сидящий)"를 비롯한 악마 시리즈일 것이다.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낭만시에서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은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는 

거칠고 추악하다는 악평을, 우호적인 후원가들로부터는 천재성이 번득인다는 호평을 받았다. 
레르몬토프의 시가 아니더라도 그는 예전부터 우울증에 시달리는 등 어두운 구석이 있었으나 
결혼 뒤 생활이 안정되면서 디자인과 관련된 다방면의 작업을 진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27살에 자기를 질투한 젊은 귀족들에 둘러싸여 권총 결투를 하다 사망했던 러시아의 시인 레르몬토프가 

믿어지지 않지만, 15살 때 부터 구상하고 수정해서 출간했던 서사시 '악마'는 

원래 천사였다가 날개를 잃고(신을 배반하고) 지상으로 축출된 데몬의 이야기이다.

'타마라' 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지상에 떠돌던 데몬은 그녀에게 반하고, 그녀 곁에 있고 싶어하고,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어 했다.
그가 데몬임을 알았던 그녀의 두려움과 회피, 그리고 데몬 자신도 알고 있었던 파국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극이 그렇듯 둘은 사랑하게 되고,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데몬을 사랑하겠다던 
타마라와 첫날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데몬은 그녀의 죽음을 본다.

살아 있는 순간이 아닌 죽음 이후의 영혼은 신의 것.
그녀의 영혼이라도 자기가 지켜주고 싶었으나, 손가락 사이로 물이 쏟아지듯 데몬이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신의 하늘로 타마라의 영혼은 올라가고 데몬은 지상에 남겨졌다.

부르벨의 그림은 홀로 있는 데몬의 눈에 통곡이나 분노가 아니라 
공허하게 생명이 꺼져가는 것 같은 묘사를 해놓았다.
너무 깊어서 감당이 안되는 슬픔. 돌덩어리를 닮은 사람의 몸, 노을을 닮은 사람의 눈,
이리도 모질게 구는 신과 악마로 강등되어서도 굽히지 않는 그 아래의 존재.
19세기는 유달리 영웅들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수많은 영웅상이 그려졌었다.

레르몬토프의 데몬은 인간을 뛰어넘는 하나의 영웅이었겠지만, 
부르벨의 데몬은 굴복하진 않았으나, 끝내 부러지고 죽어가는 모습이다.
짜르의 폭정에 대항하던 혁명가들이 드디어 등장하는 제정 러시아에서, 
난폭한 신 앞에 선 인간을 표현했던 데몬은 그 절망 때문에 인간적이었다.

 

Head of Demon. '악마의 머리' 기초 작업인 상태의 그림. 1890. watercolor on paper. 114 x 211cm.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미하일 브루벨의 그림들은 다른 화가들처럼 많이 남아 있지 않고, 그나마도 검게 변하는 특징이 있다. 
그의 악마 그림이 검게 변한 이유는 청동 가루 때문이다.
러시아 아르누보의 창시자이며 창작의 집착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았던 한 화가의 이야기이다.

그는 그림에 번들거리는 효과를 내려고 유화 물감에 청동 가루를 섞어서 그렸다고 한다. 
당장에는 실감 나는 표현이겠지만,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청동이 산화되며 그림들이 검게 변한다는 것이다. 
그리는 데에 완전히 집중한 그는 그것을 몰랐다. 

미하일 브루벨의 화풍은 서유럽인들이 보기에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유행이 늦은 러시아에서 그는 환영받았다.
화가 자신도 인간이기에 가진 나약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항하는 도전 속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사람이었다

 

The Flying Demon. 날고 있는 악마 미완성. 1899. illustration. oil on canvas. 138.5 x 430.5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꼭 농담같은 이야기지만 이 '날고 있는 악마'의 그림을 전시하던 때, 전시장이 개장하는 그 순간까지도 
데몬의 눈을 고치고 덧칠하다가 부르벨이 친구들에게 끌려서 간 곳은 정신병원이었다고 한다.
1910년 그의 사망 원인도 신경쇠약과 정신 분열 탓에 왔던 건강문제였었다.
지독스러운 집착. 다시 지우고 또다시 그리던 악마에 집중했던 그는 뭘 찾고 있었을까.
4m가 넘는다는 이 대형 그림은 한개의 벽을 채우고 벽 뿐만 아니라 방 전체를 암울함으로 가득채우고 있다.

 

Pan. 1899. oil on canvas. 124 x 106.3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절대 고독 '판', 아르카디아 산자락에 사는 요정 쉬링크스는 아르테미스를 따르며 사냥을 즐긴다. 
천사같은 그녀를 보고 우락부락한 얼굴에 염소 다리와 뿔을 가진 괴물 판은 한눈에 사랑을 느낀다.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쉬링크스에게 열렬히 고백해 보지만 

공포의 꽥꽥거림으로 나타나는 판의 목소리에 요정은 필사적으로 도망만 다닌다. 
영어의 panic 이란 단어는 이 pan(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판은 존재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인 괴물이었나 보다.

그런 판의 구애에 진저리 난 쉬링크스는 결국 자신을 포기해 버리고 갈대로 변해 버린다. 
사랑을 잃어버린 판의 한숨 소리가 갈대 속을 지나 가냘프고 애끊는 소리로 변하니 
그 갈대를 엮어 만든 피리는 천상의 아름다운 소리로 사람의 마음을 끌게 된다. 
요정의 이름을 따 '쉬링크스'라고 불리는 판의 피리인 팬 플루트는 
그 애절한 음색으로 우리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 준다. 
쓸쓸한 음색만큼 슬픈 사연의 악기다.

살다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다. 
내 속에 너무 많은 내가 다양한 목소리로 싸우지만 그들의 언어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어떤 형태의 옷을 입고 세상과 맞이해야 할 지 몰라 마음 속 테두리에 갇혀 안으로만 잦아들게 된다. 
그럴 땐 마음의 쓸쓸함, 고독함을 바위처럼 웅크린 채로 안으로 곰삭아야 한다. 
그림의 판처럼 말이다. 그래야 내 안의 쓸쓸함은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게 사랑이든, 슬픔이든, 행복이든, 절망이든.

모두가 절대 고독이란 모습으로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마 음속에 집을 짓게 된다. 
브루벨의 <판>을 보면 그런 내 안의 절대 고독이 투영된다. 
다가가 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토닥토닥 하며 쓰다듬고 싶어진다. 
'널 이해할 거 같아’하면서 말이다. 
판의 근원적 외로움 또한 내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쓸쓸함과 같은 모양이다. 
사랑을 잃고 홀로 주저앉은 판의 웅크림에서, 그의 텅 빈 눈빛에서, 둥근 어깨에서, 
그리고 한 손에 꽉 움켜 쥔 요정의 분신에서 우리의 쓸쓸한 자화상을 보게 된다.

현실적 외로움과 정신적 어려움을 고귀하게 지켜내겠다는 

'백석'의 굳은 의지도 브루벨의 '판'이 웅크리고 있다. 
백석 또한 자신의 쓸쓸한 내면을 그의 시적 언어로 고백한다. 

백석과 판은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우린 그들을 읽으며 공감하며 내 안의 나와 대화를 나눈다. 
그렇게 시와 그림은 우리 인생에 최고의 동반자가 되는 거다. 
그리고, 백석의 시적 자아와 브루벨의 판이 이렇게 질문 하는 듯 하다. 
"여러 현실적 어려움 앞에 정신적 고결함을 너는 어찌 지킬 것이냐?"라고 말이다.
김희은 (갤러리 카르찌나 대표)

넓적하고 순박한 얼굴을 하고 있다. 달이 낮게 뜬 초저녁 판은 피리를 들고 앉아 있다. 
유리알같이 파란 눈은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투명하고 텅 비어 있다. 
거친 손을 보면 금방이라도 그가 나무 등걸로 변해버릴 것만 같다. 판은 자연력의 상징이다. 
그는 사람이면서 짐승이고, 동물이면서 식물이다.  
'판'과 '백조 공주'는 모두 반인반수로 자연과의 조화 속에 살고 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공존하는 보랏빛 시간에 그들은 기꺼이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는 러시아의 전래 동화와 민중 서사시에 담겨 있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표현하고 있다.

 

'여섯 날개의 세라핌' 1904. 러시아 미술관

말년에 그를 사로잡고 있엇던 것은 '예언자' 시리즈였다. 이는 푸쉬킨의 동명 詩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다.
'여섯 날개의 세라핌'은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푸쉬킨의 시 속에서 세라핌은 예술가에게 비극적인 의무를 부여하며, 예술가를 새로운 예언자로 이끈다. 
낫을 들고 당당하고 위엄 있는 죽음의 천사 아즈라엘은 악마의 새로운 안티테제다. 
불의한 세계, 혁명을 향해서 한 걸음 다가가는 위태로운 시대에 예술가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순교자적 사명을 노래하고 있다.

브루벨이 러시아의 문학과 미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이 등장하기 20년 전에 이미 그의 창작의 완성기를 맞았다. 
미술이 문학을 앞서간 드문 경우였다. (이진숙)

 

"Demon Downcast" (1902), State Tretyakov Gallery

그로부터 10여년 뒤, 캔버스에 다시 악마가 소재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패배한 악마(Демон поверженный)"의 끝없는 작업은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급기야 신경 쇠약으로 정신 병원에 입원되기에 이른다.
더불어 매독에 의한 신체의 손상이 시작되고 아들이 죽으면서 악화와 호전을 반복하던 그는
시력을 잃으면서 작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10년 사망했다.

 

Tretyakov Gallery Room 32, 33, 34. 미하일 브루벨 (Mikhail Vrubel) 작품 전시실

 

Anna Karenina meets her son. 1878. illustration,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Lady in furs, 1880.

 

Betrothal of Mary and Joseph. 1881. watercolor on paper

 

The left artist's hand, 1882, sketch and study. pencil on paper.

 

Male nude, 1882.

 

Portrait of student, 1882, : watercolor on  paper.

 

Hamlet and Ophelia. 1883. watercolor on paper.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Sitter in the Renaissance Setting. 1883. wash, watercolor on 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Feasting Romans. 1883. sketch and study. pencil, watercolor on paper, 44.7 x 53.9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A model with eastern dress,1884, watercolor on paper.

 

Hamlet and Ophelia, 1884.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Angel with Labara. 1884, fresco.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Angel with Labara. 1884. fresco.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Moses. 1884.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Pieta. 1884. fresco.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Still life. Fabrics. 1884.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Briar. 1884. watercolor on paper. Place of Creation: Kiev, Ukraine

 

Virgin and Child. 1884. oil on canvas.

 

Woman's Head (Emily L. Prahova). 1884. sketch and study. oil, pencil on paper. 43 x 32.3 cm

 

Salieri pours poison into a Mozart's glass. 1884. pencil on  paper

 

Field flowers. 1884. 

 

Archangel Gabriel. 1885. fresco.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Christ. 1885. zinc.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St. Cyril. ​1885. zinc.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Madonna. 1885. zinc.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Wróbel에서 기원한 성에서 보듯 폴란드계 러시아인인 그는 레핀과 비슷하게 군 복무를 겪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뒤늦게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그림을 시작했다.
1884년 브루벨은 키예프 성 시릴 성당의 벽화 작업을 위해 베니스에서 중세 예술을 공부하는데
초기 르네상스와 비잔틴 미술에 대한 이 때의 경험이 그의 예술적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Descent of Holy Spirit on the Apostles. 1885. fresco. Church of St. Cyril, Kiev, Ukraine

 

Italian fisherman. 1885. watercolor on paper. Venice, Italy

 

Odessa harbour. 1885.​ watercolor on paper. Odessa, Ukraine

 

Sappho. 1885.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Erevan, Armenia

 

Self Portrait. 1885. watercolor on paper.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wo gondolas on the quay. 1885. pencil on  paper

 

Still Life. Plaster mask. horn of chandelier. 1885. watercolor on paper

Self Portrait. 1885. pencil on paper

 

A Man in a Russian Old Style Costume. 1886,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Eastern Tale. 1886,wash. watercolor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Flowers in a Blue Vase. 1886. watercolor on 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ersian Prince. 1886. watercolor on paper. 24.5 x 16.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 Girl against a Persian Carpet. 1886. oil on canvas.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Red Azaleas. 1886. watercolor on paper. 24 x 15cm,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Angel with censer and candle. 1887. pencil, watercolor on 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Eastern dance. 1887. watercolor on paper. Kiev, Ukraine

 

Orchid. 1887. watercolor on 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ieta. 1887. wash. watercolor on 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ieta. ​1887. wash, watercolor on 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Portrait of M. V. Yakunchikova. 1887.​ Kiev. Ukraine

 

Red Flowers and Leaves of Begonia in a Basket, 1887, watercolor on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Resurrection, 1887. Kiev, Ukraine

 

Resurrection, 1887, ​watercolor on paper. Kiev, Ukraine

 

White Iris, 1887, watercolor on paper.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Christ in Gethsemane, 1888, charcoal on paper. 140.5 x 52.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amlet and Ophelia, 1888, oil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n Officer (Pechorin on a Sofa), 1889, watercolor on paper ,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Farewell of Zara with Ismail, 1890,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Demon, 1890, ​watercolor on paper. 
The Krasnodar regional art museum by F.A. Kovalenko, Krasnodar, Russia

 

Head of Demon, ​1890, sculptur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Head of Demon with mountains, 1890, ​watercolor on paper ,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Tamara and Demon. Ill to Lermontov's poem. 1890.

 

Muse, 1890, ​oil on canvas. Radishchev Saratov State Museum of Art, Saratov, Russia

 

Tamara in Coffin. 1890. 

 

Tamara in Coffin. 1890. Prince Guido (Costume design for the opera "The Tale of Tsar Saltan"), 
1890, ​design, watercolor on  paper

 

The Flying Demon, 1890, illustration, watercolor on  paper

 

Horseman. 1890. sketch and study. pencil on paper. 

 

Demon and Angel with Tamara's Soul, 1891. wash, watercolor on paper , 
The Museum of Russian Art, Erevan, Armenia

 

Duel of Pechorin and Grushnitsky, 1891, ​watercolor on paper.

 

Italian Night (Sketch for the curtain in Russian Private Opera), 1891, ​watercolor on cardboard.
Pushkin Museum of Fine Art, Moscow, Russia

 

Italian Night in Naples (Sketch for the curtain in Russian Private Opera), 1891,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taly. Scenes of ancient life. (Sketch for the curtain in Russian Private Opera), 1891, watercolor on  paper

 

Tamara and Demon, 1891, watercolor on paper

 

Tamara and Demon, 1891, ​watercolor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amara Dancing, 1891, watercolor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amara Lying in State, 1891, watercolor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Rider ("Is carried horse faster of fallow-deer..."), 1891, watercolor on cardboard.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Walking on Water, 1891. watercolor on paper.

 

Demon by the walls of monastery, 1891, illustration,  watercolor on paper

 

Demon looking, 1891, illustration. watercolor on paper.

 

Demon looking to the valley, 1891, illustration, watercolor on paper.

 

Mermaid, 1891, illustration, watercolor on paper.

 

The Judgement of Paris, 1893, oil on canvas. 
​The M.A. Vrubel Omsk Regional Museum of Fine Arts, Omsk, Russia

 

Venice, 1893.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atania. Sicily, 1894, oil on canvas. 

 

Fantastic landscape, 1894, watercolor on paper.

 

Primavera, 1894, watercolor on paper.

 

Roses and orchids, 1894, ​oil on canvas.
​The M.A. Vrubel Omsk Regional Museum of Fine Arts, Omsk, Russia

 

Yellow roses, 1894, oil on canvas.
The M.A. Vrubel Omsk Regional Museum of Fine Arts, Omsk, Russia

 

Spain, 189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Venice. Bridge of Sighs, 1894.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 T. Lyubatovich in role of Carmen, 1895.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Fortune Teller. 1895, oil on canvas, 
Bakhrushin State Central Theater Museum, Moscow, Russia

 

Portrait of N.I. Zabela and T.S. Lyubatovich. 1895.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Snow Maiden, 1896, gouache on paper. 25 x 17cm, Art Museum of Ryasan, Russia

 

Vase, 1895, sculpture, majolica, Abramtsevo State Historical,
Artistic and Literary Museum-Reserve, Moscow region, Abramtsevo, Russia

 

Water Lilies, 1895, oil on canvas. Abramtsevo State Historical,
Artistic and Literary Museum-Reserve, Moscow region, Abramtsevo, Russia

 

Captured Pechenegs (Costume design for the opera "Rogneda"), 
1896, design, watercolor on paper

 

Hansel and Gretel, 1896, oil on canvas. Smirnov-Sokolsky Collection.

 

Knight, 1896, Destroyed.

 

Morning, 1897,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laying naiads and tritons. 1896. watercolor on paper.

 

Portrait of S. Mamontov, the Founder of the First Private Opera, 1897, 

oil on canvas. 142.5 x 18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사설 오페라극장 창립자인 마몬토프의 초상

 

Portrait of wife of the businessman Artsybushev, 1897, oil on canvas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Viking Merchant (Costume design for the opera "Sadko"), 1897, 

design, watercolor on paper

 

Volkhova, the sea princess (Costume design for the opera "Sadko"), 1897, 

design, watercolor on paper.

 

Bogatyr, 1898,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보가티르(Bogatyr)는 러시아 고유의 전사. 

 

Nadezhda Zabela-Vrubel as Princess Volkhova, 1898, watercolor on paper ,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arting of the Sea King and Princess Volkhova, 1898,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Nadezhda Zabela-Vrubel, the Artist's Wife, in an Empire Dress, 1898,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rophet, 1898, illustration,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ikula Selianinovich and Volha, 1899, majolica,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adko, 1899, design, watercolor,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Sadko, 1899, design, watercolor,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e Alexander Sloboda, 1899, design, watercolor on paper.

 

Valkyr, 1899, oil on canvas.

 

Philosophy. 1899.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At Nightfall, 1900, oil on canvas, 129 x 18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Egyptian Woman, 1900, sculpture, majolica,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Fist-fighter (Costume design for the opera "The Enchantress"), 1900. 

design, watercolor on  paper

 

Kudma, the sorcerer (Costume design for the opera "The Enchantress"), 1900, 

design, watercolor on  paper.

 

Lelle, 1900, sculpture, majolica, Abramtsevo State Historical,
Artistic and Literary Museum-Reserve, Moscow region, Abramtsevo, Russia

 

 

[영상] Mikhail Vrubel

 

 

 

 

 

Self-portrait 자화상. 29.2cm x 20cm. 1840년대. Lead Pencil in paper.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파벨 페도토프 (Pavel Andreyevich Fedotov)

러시아의 풍속화가. '러시아의 호가스'로 알려질 만큼 19세기 중엽 

러시아 민중의 삶을 특유의 해학과 풍자로 그렸다.
1815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은퇴한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 제1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근위대에 장교로 군복무를 했다.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청강했다. 
1843년 그의 나이 28세 되던 해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 

전역을 신청하고 화가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파벨 페도토프는 제대 후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하여 그림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 있는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료했다. 
특히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데 탁월했으며, 

삶 속에 녹아 있는 진솔한 모습을 담아내는 것에 열중했다.

페도토프는 1846년부터 유화로 작업을 시작했다. 이전에는 연필과 수채화를 이용했었다. 
그는 유화를 재료로 하여 러시아 민중의 삶을 담아내는 풍속화를 그려 나갔다. 
여기에는 19세기 중반 러시아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와 비평이 짙게 깔려 있다. 
당시 진보적인 문필가 및 평론가들과 어울렸던 그는 그림으로 삶의 진실과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 
비록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그의 그림은 위트와 유머로 웃음을 짓게 한다. 
페도토프는 1852년 37세라는 안타까운 나이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정신 병원에서 사망했다. 

Self Portrait 자화상. 1848. watercolor.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때면 화가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자주 보게 된다. 

우선 어떤 얼굴인지 궁금하다. 
파벨 페도토프는 약간 벗어진 머리와 형형한 눈 빛 그리고 멋진 콧수염은 

그가 쉽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 주고 있다.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의지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차가운 냉소도 묻어 있다.
자화상을 그린다면 무엇을 그리게 될까?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것을 그릴까? 

보아 주었으면 하는 것을 그릴까?

화가이자 시인인 파벨 페도토프는 2급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제1군사학교에서 공부했다.  
1954년부터 10년간 미술아카데미에서 드로잉 수업을 청강했고, 

자우에르베이드에게 전쟁화를 배웠다. 
1840면 미술에 몰두하기 위해 군대를 떠나 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여 그림공부를 계속하였다.

당시 소설가 도스토에프스키도 회원이었던 사상가 Mikhail Petra-shevsky가 만든 

철학과 문학 토론클럽  'Petrashevsky Circle'의 진보적인 문필가, 평론가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민중화가가 되어 후대 모스크바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Portrait of M. M. Rodivanovsky. 1836. watercolour on cardboard. 16.9 x 14.5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러시아의 호가스"라고 불리는 아마츄어 화가.  
페도토프는 상페테르부르그의 황실근위대 장교였다.  
당시의 장교들의 풍속대로 그는 플루웃도 배우고 Academy of Fine Arts의 야간 클래스에서 그림을 배웠다.  
뛰어난 재주를 보이진 않았으나 부대에서 장교나 병영의 일상을 그려 이름이 알려졌는데, 
그의 그림에는  은근한 풍자가 담겨있었다.

 

The fresh cavalier - Newly Awarded. 

Morning of an Official Who Had Been Decorated with  His First Medal,
1848,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침부터 난감한 상황에 빠진 관리이다. 
방안은 깨진 그릇과 나뒹구는 빈 병에다가, 세간과 옷, 줄 끊어진 악기 등으로 난장판인데, 

그는 한 아낙네와 다투고 있다. 
구두를 비롯하여 여인의 손에 들려있는 돈 될만한 물건들과 그녀의 표정을 보면 상황이 대강 짐작된다.

여인은 여러 달째 하숙비를 받지 못한 집주인쯤 되지 않을까. 
혹은 아침부터 작정을 하고 들이닥친 빚쟁이거나. 채귀(債鬼)라고 했다. 
아무리 고귀하신 분이라도 빚쟁이한테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관리는 어제 받은 소중한 훈장을 가리키며, 국가가 인정한 공훈의 권위를 

코웃음 치는 여인에게 눈을 부릅뜨고 일갈하고 있다.  
“나, 훈장 받은 남자야!”

그러나 자랑스런 훈장이 달려 있는 너덜너덜한 가운의 구멍들, 

세수도 안 한 것 같은 얼굴에 롤을 감아놓은 머리의 꼬락서니, 
탁자 밑에 숨어 있는 친구의 몰골, 이런 모든 상황이 이제 지겹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있는 고양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그림의 압권인 여인의 조롱 섞인 표정을 볼 때, 

그런 호통은 부질없는 허세임이 분명하다.

페도토프는 장교로서 주간 근무를 끝내고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야간 수업에 참석했다. 
학생으로서는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부대의 모습과 장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는 부대 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미 일반적인 수채화와 초상화에 관계된 테크닉은 모두 끝낸 그였다. 
이 때 페도토프의 작품은 수채화와 연필로 제작되었다. 

그가 유화로 방향을 바꾼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페도토프는 초상화에 이어 캐리커처로 범위를 넓혔다. 

이 때까지는 신랄한 풍자를 담은 작품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30년에 걸친 시대착오적 반동정치를 통해 러시아를 유럽의 후진국으로 퇴화시켜버린 

차르 니콜라이 1세 (1825~55).  그를 받치고 있는 기둥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의 관리들이 
얼마나 타락하고 허세에 찬 존재인가를 풍자하는 그의 붓놀림은 좀 아슬아슬해 보이기까지 한다.
국가를 거대한 병영으로 만들고 비밀경찰까지 창설하어 국민을 억압했던 당시에, 

이런 비판적 그림이 무사할 수 있었을까.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1851. 58cm x 75cm.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페도도프의 대표작인 <소령의 구혼(1848)>은 <새 수훈자>와 함께 그가 미술 아카데미展에 출품한 작품이다. 
지위를 가졌지만 가난한 남자, 그리고 신분이 낮으나 돈은 많은 집안. 
양측이 이러한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현명한 결합을 일삼던 시대를 풍자한 그림이다.   

장르화(Genre Painting)는 성격상 곧잘 풍자와 해학을 띤다. 
19세기 초반에 활동한 파벨 페도토프는 자기 시대의 모순들을 유머러스한 붓길로 재치 있게 묘사했다. 
사리사욕과 기만, 배신 등이 그가 즐겨 다룬 주제인데, 관료주의에 물든 관료들 뿐 아니라 
사랑을 약속한 연인 사이에서도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자주 나타난다. 

페도토프의 이 작품은 인륜지대사인 결혼이 철저한 계산과 이기심에 따라 

일종의 거래로 타락한 모습을 고발한 작품이다. 
오른쪽 문간에 기댄 남자는 이 집 딸에게 구혼하러 온 소령이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왼쪽 문으로 부리나게 달려가는 처녀는 그의 구애 대상인 아가씨다.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는 소령의 모습이 볼수록 역겨운데, 

그래도 그는 소령이라는 자랑할 만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다. 

그 신분을 밑천으로 열악한 경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이렇게 부유한 상인의 집에 찾아와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콧수염을 만지는 그의 모습은 일이 잘 풀려 

곧 자기 주머니에 돈이 들어차리라는 기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사람의 느낌과 관계없이 스스로는 지금 기분이 매우 고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문안의 풍경을 보자. 문을 들어서는 노파는 중매쟁이다. 
그녀가 나타난 것을 보고 이 집 주인인 상인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노파에게 다가가고 있다. 
딸은 신랑감 도착 소식에 깜짝 놀라 옆방으로 숨으려 한다. 
손님을 맞기 위해 한껏 차려 입었지만,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되는 이 중매에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러자 어머니가 딸의 드레스를 잡아당기며 대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경고한다. 
식탁에서 음식을 차리는 요리사와 집사 등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하며 서로 관심을 주고 받는다.

파벨 페도토프는 좀 더 발전된 소재를 가지고 풍속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연극이나 판토마임 무대예술과 많은 관련을 보이고 있다. 
그림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가 풍자하고자 하는 것을 아주 잘 볼 수 있다. 
이 작품 <소령의 구혼>은 국내에도 꽤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그림 속에는 엄마의 강요로 예쁘게 머리도 말아올리고,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 하나가 
현관 입구에서 등을 돌린 채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현관 밖에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 것으로 보이는 소령이 멋쩍게 벽에 기대어 있고, 
왠지 여인이 결국은 자신에게 시집을 올 거라고 당연히 생각하고 있는 듯 불안감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 앞의 여자는 여인의 아버지로 보이는 수염이 길게 자란 남자에게 

밖에 사윗감이 왔노라고 설명을 하는 것 같고, 
여인의 엄마는 여인의 드레스 자락을 꽈악 움켜쥐고, 여인을 강하게 통제하고 있다. 
여인은 하얀 레이스 손수건도 바닥에 떨어뜨린채 현관을 넘어서 소령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듯 결혼을 거부하는 몸짓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파벨 페도토프는 사실주의 화가였던 만큼 

19세기 중반의 러시아 가정의 집안 인테리어도 아주 잘 나타나 있다. 
바닥, 벽지, 천장, 벽면에 걸려있는 그림들, 소품들까지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각 인물이 입고 있는 옷감의 느낌도 충분히 살려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림 오른쪽 앞의 고양이도 빼 놓을 수 없다. 
주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 양 고개를 돌리고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아마도 빈털터리일 가능성이 높은 소령이, 그를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구해줄 가문을 찾아 왔다. 
청혼의 자리이긴 하지만 거래의 실질적 합의는 이미 끝난 상태일 것이다. 
매파가 바깥주인에게 소령을 소개하는 동안, 처녀는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며 다른 방으로 달아나고 있다.

그녀는 이미 통보를 받아 잘 차려입은 채 소령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정작 도착한 신랑 후보의 나이 들고 통속적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이리라. 
이 광경을 지켜보며 수군거리는 하녀들.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가 워낙 정교해서 실물을 보기 전에는 

사이즈가 상당히 큰 대작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림의 크기는 58.3cm X 75.4cm에 불과하다. 
어떤 이는 이 그림을 두고 ‘결혼이 거래이던 시절의 풍경’이라 말하지만,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닐까...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무슨 일 일까? 옅은 분홍빛 드레스 여인은 아름답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을 거다.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고 정성스레 머리를 빗고 
'내 님은 누구일까, 어찌 생겼을까? 처음 보는 내게 어떤 눈빛을 아니 어떤 첫마디를 건넬까?' 
두 볼을 붉게 물들이며 그분을 기다렸을 거다. 
낭만 소설에서 읽어 얻은 아이디어로 미래의 그분 앞에 

살짝 떨어뜨릴 손수건을 준비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떨어뜨린 손수건을 집어 들며 첫마디를 건네 올 그분과의 낭만을 기대하며 가슴 떨려 했을 그녀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는 건가! 심쿵을 기대했던 그분과의 만남에서 
그녀는 '이건 아니야' 를 외치며 몸을 돌린다. 낭만의 징표인 손수건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이럴 수는 없어요. 등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여인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리는 듯하다. 
청혼을 거절당한 소령은 멋적게 턱을 괴고 있지만 별로 부끄러운 기색은 아니다. 


어머니는 딸의 치마를 끌어 당기고 있지만 그렇다고 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가만히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 모든 광경은 사전에 딸이나 남편에게 

아무런 상의 없이 저지른 어머니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 
어머니의 마음에는 딸의 사랑보다 든든한 배경을 가진 사위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방 구석 그늘에 있는 아버지는 있는 듯 마는 듯 하다.

하인들은 서로에게 귓속말로 이 상황을 따져 보고 있다.
아가씨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아직도 모르겠어? 

결국은 주인 마님 의견대로 아마 저 늙은 소령하고 결혼하게 될 거야.
어휴, 안타까워라. 도시 부르주아에 대한 풍자를 숨기지 않았던 

페도토프의 성숙된 테크닉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군대에서 종군 화가라는 직책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페도토프는 진정한 창의력 있는 화가는 미술에 모든 것을 받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 전역을 신청한다.
그 때 그의 나이 28세 되던 1843년 11월이었다. 
제대를 하기 위해 황제로부터 미술에 전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페도토프는 

우선 공부를 위해 미술 아카데미에 정규 출석한다. 
처음 그는 전쟁화를 그리는 반에 들어 갔으나 곧 풍속화반으로 자리를 옮긴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이 그림은 아마도 러시아 귀족계급일 고위 장교와 상인계급의 처녀와의 결혼을 암시한다.  
당시는 자본주의가 퍼져서 혈통보다는 돈이 더 중시되던 때여서, 
가난한 귀족의 자제가 경제적 이득을 위해 부유한 상인의 딸과 결혼하는게 드물지 않았다.  
이 때, 귀족뿐 아니라 결혼의 상대인 상인 가정도 정략결혼의 덕으로 상류사회에 접하게 되는 것을 반겼다.  
아버지일 노인은 표정은 매우 흡족하다. 특히 신부감은 엘리트 러시아 살롱에 속하게 되어 매우 행복하다.  
모두가 서두르는 분위기. 아랫쪽의 고양이만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심한 유일한 존재이다. 

이는 전체 장면을 풍자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매우 강한 정치적 메세지를 담고 있다. 

러시아 최고의 계층에서의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주제는 러시아 황실의 검열을 벗어나기 힘들었을 터이지만 
페도토프는 자신의 친구나 후원자를 위한 사적인 그림을 그렸기에 무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훗날 알렉산더 2세가 즉위 후 여러가지 민주적인 개혁을 벌이는 시대가 되자 
페도토프의 뛰어난 풍자의 기술은 더욱 인기를 얻었다.  

브륄로프와 대조적으로, 페도토프는 러시아 화화사에서 최초로 사실주의를 보인 화가중의 하나이다.  
그는 과장이나 미화없이 객관적으로, 그러나 약간의 유머를 담아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런 배경에는 페도토프가 황립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지 않아 

신고전주의적 화풍에 훈련되지 않은 것이 이유일 것이다.  
독학의 화가로 군대와 지방에서 경험을 쌓아 그는 과거의 일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현재였고, 현재를 가능한 한 자신의 능력대로 잘 그려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녀의 그분이 될 남자는 딱 봐도 풋풋한 아가씨와는 어울리는 나이가 아닌 듯하다. 
세상 물정 알만큼 다 알고 설렘, 순수 이런 것들은 아주 예전에 묻어 버린 나이 먹을 대로 먹어버린, 
고작 소령이라는 사회적 지위 하나만 부여잡고 상인의 집에 

지참금 두둑이 뜯어내 앞으로의 일신을 편안히 돌보려는 속물이다. 
문 앞에서 '혹시 나 홀대하는 거요? 감히 내게?'라는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는 소령의 모습이 참으로 느끼하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번들거리는 비단옷에 거대한 몸을 맡긴 드레스 여인의 엄마는 휙 돌아서는 딸의 철딱서니가 못마땅하다. 
결혼은 남녀에게 서로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일. 

이 불변의 절대적 진리를 두고 철없이 구는 딸아이를 세게 잡아당긴다. 
'우리가 가진 돈만 있으면 세상 편히 살 줄 아니? 

돈을 뿌리면 반짝거리게 해줄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일렀거늘. 쯧쯧…...' 
이런 잔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결국은 가장 힘 세 보이는 엄마는 의지대로 소령에게서 권력을 사 딸에게 안겨 줄 거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이 거래로 중매 비용을 두둑이 챙겨야 하는 중매쟁이는 아가씨의 돌발행동에 몹시도 불편하다. 
혹시라도 이 결혼이 깨질까 노심초사한다. 
거래의 성사에 전혀 힘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아버지라도 다그쳐 본다. 
검은 옷의 사내는 중매쟁이를 묵묵히 받아낼 뿐이다.

“난 이 집에서 힘이 없다우. 우리가 이만큼 사는 것도 아내가 가져온 지참금 때문이라오.
난 무능력한 상인. 아내는 그게 철전지 한이 된 사람이라오”라고 소심하게 중얼대는 듯하다.
수십 년 알코올에 절어 붉어진 아빠의 콧잔등이 현실에 흥분하는 항변으로 착각되는 씁쓸한 현실이다.

 

The Major's Proposal 소령의 구혼. (부분)

안타까운 눈빛으로, 인간다운 눈빛으로 딱 한 사람만이 드레스 여인을 쳐다본다. 
손님 접대 상차림에 분주한 앞치마 두른 여인은 어릴 적부터 그녀를 키운 유모인가 보다. 
딸 같은 그녀가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된 현실에 희생되는 지금이 못마땅하다. 
하지만 유모는 힘이 없다. 체념하고 지켜볼 뿐이다.

결혼이 거래이던 19세기 러시아. 찰나의 이 그림이 과연 과거 러시아에서만의 일일까?
세상사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현실 한 자락을 따끔히 꼬집어내는 페도토프의 천재성이 참으로 대단하다.

 

[영상] Tretyakov Gallery Room 15. 파벨 페도토프(Pavel Fedotov)

 

The Promenade. 군복을 입은 페도토프와, 부친과 여동생. 1837. watercolor. ​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Street Scene in Moscow. 1837.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Grand Duke Mikhail Pavlovich Visiting the Camp of the Finland Regiment of Imperial Guards on July 8. 
1837~1838. watercolour on paper. 31 x 44.4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A. I. Fedotov, the Artist's Father 작가 아버지의 초상. 1837. watercolor. 

cardboard. 17.3 X 20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장르화’란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우리나라의 풍속화쯤으로 보면 된다. 
서양화단에서는 17세기 무렵부터 회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우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역사화’와 그 외의 모든 그림을 칭하는 ‘장르화’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그 장르화에서 다시 인물화와 정물화, 풍경화 등이 쪼개져 나갔으며, 
이도저도 아닌 것들만 여전히 ‘장르화’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주로 당대 사람들의 일상과 풍속을 담은 회화들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근래에 가장 사랑받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진주귀걸이 소녀>의 얀 베르메르를 떠올려보면 되겠다. 
그가 자주 그린 17세기 네덜란드의 부엌 풍경들. 
그로부터 우리는 당시 네덜란드인들이 살아가던 모습의 진솔한 단면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장르화의 가치는 미학적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그림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정신’이나 ‘가치’가 담기지 않은 아름다움이란 백치미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이 없는 가치란 자칫 구호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가 단원과 혜원의 풍속도를 사랑하는 것은 우선 그 그림들이 미학적으로도 볼만하지만, 
그 속에서 조선 후기 민초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고, 생활에 발을 딛지 않은 
고고한 문인화에서 벗어나 낮은 데로 임한 화가의 정신을 높이 사기 때문이 아닐까.

러시아 장르화의 뿌리를 찾자면 앞서 소개한 농노화가 미하일 시바노프의 <결혼계약의 축하(1777)>, 
그리고 알렉세이 베네치아노프의 농촌그림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단순한 묘사를 넘어 장르화의 묘미인 ‘풍자’와 ‘해학’이 가미됨으로써 
비로소 맛깔스런 그림들이 탄생한 것은 파벨 페도도프(1815~52)에 이르러서이다. 
민초들의 삶이란 대개 고통스런 것이고, 풍자와 해학은 이를 웃음으로 버무려 이겨내고자 하는 묘약이다.
우리의 풍속도 군데군데에 풍자와 해학들이 숨어있듯이, 페도도프를 거쳐 바실리 페로프(1834~82)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장르화들도 하나하나 뜯어볼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숨겨져있다.

페도도프는 당시 주류 화가들의 교육기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 출신이었지만, 귀족이나 성직자, 
관리 등 ‘지도층 인사’들 뿐 아니라 밑바닥 인생들이 살아가는 막장까지 구석구석 돌아보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그렇게 그가 발굴한 이야기들은, 트레차코프 갤러리 Room 15에서 만나게 되는 
가로 세로 50cm 내외의 크지도 않은 화폭들에 치밀하게 담겨있다.  

 

Andrey, Grigoriy and Alexander Druzhinin, 1840,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당시 군대 화가는 꽤 괜찮은 직업이었지만, 

페도토프는 참된 예술가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란 믿음에 그 직업을 마다했다.  
1844년 군대를 나와 전업화가의 길을 걷는다. 

군대의 안정된 수입이 없이 화가로서 가족 부양까지 해야됨은 사실 부담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연필과  수채화로 시작하여 유화로 바꾸며 실력이 나아졌다.  
1848년의 전시에서 어느 정도 화가로서의 가능성이 보였고, 

1851년의 소령의 구혼(The Major's Proposal)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이후 정신병이 심해져서 결국은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당시의 정신병원은 체벌도 하고 열악했다) 

결국 37세에 사망한다.

 

Get Married, Gentlemen That Would Come in Very Handy, 1840. watercolor on paper. 

29.6 x 33.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Consecration of Regimental Banners at the Winter Palace. 1839.

 

Pavel Fedotov and His Friends. 1840.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Fidelka's Death. 1844.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The First Morning of a Deceited Husband. 1844.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lice Commissary's Reception Room the Night Beforea Holiday 1837. <명절 전 관리의 방 대기실>
Watercolor, pen and Indian ink on paper mountedon paper, 24 x 18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페도도프는 이미 오래전에 어쩌면 더 위험한 그림을 그린 바 있다. 
<명절 전 관리의 방 대기실(1837)>이 그것이다. 
그곳에는 명절을 맞아 관리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 눈도장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가로 세로 20cm 내외인 이 손바닥만 한 수채화 속에서 

흰옷을 입은 농부는 아예 돼지 한 마리를 업고 들어선다.

 

Aristocrat's breakfast. 51cm x 42cm. 1849~1850.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불청객, 아침을 먹고 있는 귀족 (1848)>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제법 격조가 있는 집의 방안이다. 
아직 가운차림인 귀족은 아침 요기를 하고 있다가 뜻하지 않은 불청객을 맞아 당황하는 모습이다. 
애견은 커튼을 젖히며 들어서는 낯선 손을 경계하고 있고, 주인공은 엉거주춤하게 일어나며 돌아본다. 
이 그림에서 화가가 표현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남자가 황급히 책으로 덮고 있는 것은 러시아 서민들의 전통음식인 흑빵이다.

농노제에 기초한 러시아 농업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기에 처하게 된다. 
기술의 발전 없이 오로지 농노의 고혈을 짜는 데만 의존한 생산방식의 비능률 때문이었다. 
토지에 부를 의존하고 있던 러시아 귀족계급은 이로 인해 급격히 몰락한다.
그들은 땅과 농노를 저당 잡힌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그림 속 귀족의 입성이나 가구며 방안의 풍경은 아직 품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곤궁한 처지는 달랑 흑빵 한 조각뿐인 아침식사가 잘 시사해주고 있다.

하필 이런 때에 누가 집을 방문하다니, 그는 황급히 흑빵을 책으로 덮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은 그걸로 덮어질 수 없을 듯하다. 
의자에 놓인 팸플릿의 제목은 ‘устрицы(굴, oyster)'이다. 
아침의 허기를 고작 흑빵 한 조각으로 때우는 그는, 지난 밤 저 팸플릿을 읽으며 
오래 전 풍족하던 시절 맛보았던 굴의 향을 추억하였는지도 모른다.              

<소령의 구혼>과 <새 수훈자 - 첫 훈장을 받고난 아침의 관리>는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원화는 판매될 수 없었고 석판화도 검열에 걸려 발매가 중단되었다. 

게다가 그는 미술아카데미전에 출품이 금지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리얼리즘에 대해 호의적이던 모스크바의 화단에 그의 작품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의 계승자라 할 수 있는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푸키레프, 

일라리온 프랴니시니코프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처음으로 파벨 페도토프가 비판적 사실주의를 실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귀족의 실상을 폭로하듯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면 언뜻 생각하기에 제목과는 달리 귀족의 아침식사라고는 보기 힘들다. 
오른쪽 구석에 커튼을 젖히며 누군가 들어오려고 하자 황급히 책상위의 빵을 책으로 덮으려 하는 모습이다. 
귀족이라면 엄청 큰 식탁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음식을 조금씩 입에 물고 오물오물 

우아하게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그림 안의 귀족은 아주 편안한 차림에 쟁반도 없이 

종이 위에 올려 놓은 음식을 양 볼이 터져라 집어 넣고 먹고 있다. 
겉으로는 우아한 척 다하면서 품위있고 격조 높은 모습을 하고 일반 평민을 업신여기는 귀족도 
실제로는 일반 사람과 똑같이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물고 우걱우걱 먹는 다는 설정인가 보다. 
들어오는 사람을 경계하는 듯 낯선 사람을 향하고 있는 강아지는 귀족이 키우는 강아지 답게 
결이 아주 부드러워 보이고, 미용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막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인데 예기치 않은 손님이 방문했다. 
손님도 어지간히 급한 성격인지 한 손으로는 벌써 커튼을 열고 있다. 
손님을 보고 짖는 개도 놀랐겠지만 더 놀란 사람은 귀족이다. 
근사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귀족의 아침 식사 모습은 보잘것 없다. 
급한 마음에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책을 들었지만 책상에 놓인 음식은 어떻게 하나? 
더 큰 문제는 입이 불룩 튀어 나오도록 먹은 음식이다.

보여주는 모습과 보여지는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세상 사람 대부분은 알고 있다. 
그 간극이 차이가 그 사람의 당당함을 결정하는 것이다. 
군에서는 정직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장교로 인정을 받았던 페도토프도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다른 많은 동료들처럼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플룻을 연주하는가 하면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드로잉과 그림을 그리는데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군인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참 대단한 열정이다. 

 

Young Widow 아기가 태어나기 전 젊은 미망인 - 2nd version, 1851-1852.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촛불을 켜 놓고 기도를 올리다가 벌떡 일어나 세상을 떠나 

지금은 옆에 없는 남편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림 속 남편과 눈을 맞추다가 결국 아내는 등을 돌리고 말았다. 
조금 더 그렇게 순간이 흐르면 그냥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인의 손이 배 위에 머물렀다. 
남편이 남겨 준 생명은 엄마의 격한 마음을 알고 있겠는지...

 

Young Widow. 아기가 태어난 후 젊은 미망인. Oil on canvas, 44 x 58 cm. oil on canvas. 

Art Museum, Ivanovo, Russian Federation

 

Young Widow (detail). Oil on canvas, 44 x 58 cm. oil on canvas. 

Art Museum, Ivanovo, Russian Federation

 

A Home Thief. 1851.

 

Difficult Bride. 다루기 힘든 신부. 1847. oil on canvas. 45 X 3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공주과’ 신부인 모양이다. 무릎을 꿇고 꽃을 건넨 남자는 여인의 손을 잡았지만 

여인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한 표정이다. 
커튼 밖에서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관이다. 
여자의 치켜든 손가락에서, 미간을 잡고 ‘아이구 머리야’ 하는 사내의 몸 짓에서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돈 많은 집의 외동딸쯤 되는 것 같다. 당연히 유서 깊은 집안은 아니겠고... 
여인의 손을 잡고 있는 사내의 표정은 아주 간단하다.

‘너하고 결혼 할 수 만 있다면 이런 수고쯤이야’
여인보다는 돈을 보고 있는 음흉한 사내의 속마음이 들려 온다.
내용은 우습지만 장면을 바라보는 페도토프의 눈은 차갑다.

19세기 전반부에 시작된 러시아의 아마추어리즘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예술가의 흉내를 내는 것인데 (따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도 같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광범위한 예술적 토대가 쌓이는 효과가 있었다.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구축된 역량은 젊은 예술가들이 끝없이 탄생하는데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물질 숭배를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답답하다.

 

Portrait of N.P. Zhdanovich as a Child. 어린이 모습의 즈다노비치 초상화. 26.7cm x 21.7cm. 

1846~1847. watercolor on cardboard.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다소곳한 모습이 ‘처음 만나는 그림’의 표지 모델이었던 프랑세스와 닮았지만 

훨씬 어른스러운 얼굴이다.
풍성한 검은 머리와 다소 우수 어린 큰 눈을 가지고 있지만 

다문 입술에는 웃음이 걸려 있는 듯 하다.
웃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뜬 모습 같아서 귀엽다는 생각이 든다. 
사소한 묘사는 과감하게 단순하게 처리하고 모델의 속내를 찾아 내 

화폭에 옮기는 것은 페도토프의 장기였다.

페도토프는 은퇴한 장교의 아들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짧은 생애 때문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본인이 원했는지 알 수 없지만 모스크바 생도 학교에 입학한다.

학교를 졸업 후 열 아홉의 나이에 상트 페테스부르그에 있는 근위대에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다. 
19세기 전반부에 시작된 러시아의 아마추어리즘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 예술가의 흉내를 내는 것인데 (따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도 같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광범위한 예술적 토대가 쌓이는 효과가 있었다.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구축된 역량은 

젊은 예술가들이 끝없이 탄생하는데도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군에서는 정직하고 매우 열심히 일하는 장교로 인정을 받았던 페도토프도 

아마추어리즘의 영향으로 다른 많은 동료들처럼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보였다. 
플룻을 연주하는가 하면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 서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드로잉과 그림을 그리는데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군인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참 대단한 열정이다.  
또한 페도토프는 장교로서 주간 근무를 끝내고 밤에는 미술 아카데미의 야간 수업에 참석했다. 
학생으로 서는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부대의 모습과 장교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는 부대 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미 일반적인 수채화와 초상화에 관계된 테크닉은 모두 끝낸 그였다. 
이 때 페도토프의 작품은 수채화와 연필로 제작되었다. 
그가 유화로 방향을 바꾼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페도토프는 초상화에 이어 캐리커처로 범위를 넓혔다. 
이 때까지는 신랄한 풍자를 담은 작품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군대에서 종군 화가라는 직책도 매력적이었지만 그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페도토프는 진정한 창의력 있는 화가는 미술에 모든 것을 받쳐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10년간 복무하던 부대에 전역을 신청한다.
그 때 그의 나이 28세 되던 1843년 11월이었다. 
제대를 하기 위해 황제로부터 미술에 전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페도토프는 

우선 공부를 위해 미술 아카데미에 정규 출석한다. 
처음 그는 전쟁화를 그리는 반에 들어 갔으나 곧 풍속화반으로 자리를 옮긴다. 

 

Portrait of N.P. Zhdanovich at the Harpsichord. 합시코드를 연주하는 즈다노비치 초상화.
1849~1850, oil on canvas, 19.2 x 24.5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앞에서 본 초상화 모델의 어른 모습이다.
페도토프는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던 즈다노비치 식구들의 초상화를 연작으로 남겼다. 
목이 너무 길다고 했더니 아내는 목이 길어야 우아하다고 한다. 

1846년, 서른 한 살부터 페도토프는 유화를 시작한다. 
그는 유화를 통해 19세게 중반 러시아 부르주아들에 대한 풍자와 비평을 시작했다. 
1849년과 1850년 상 페테스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걸렸고 
화가로서의 성공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리 말하면 화가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 

그러나 그는 곧 거대한 벽을 만나게 된다. 
완고한 아카데미 화가들의 반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또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Winter Day 겨울날. 1851. Oil on canvas. 24 x 19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전시회가 끝나고 페도토프는 페트라세프스키가 주동이 된 공상적 사회주의 서클에 가입한다. 
적극적으로이 서클과 연계를 맺고 있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도 이 서클의 멤버였다가 

체포되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후에 물론 구사 일생으로 살아 났지만. 
당시 1848년과 1849년의 서유럽 혁명의 여파가 러시아로 밀어 닥칠 것을 염려한 러시아 정부는 

적극적으로 사상 통제를 실시한다. 
당시 많은 민주주의 성향을 가진 젊은이들이 당했던 것처럼 

페도토프 역시 반동의 물결에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눈이 지붕과 길에 수북한 날, 하늘이 누렇게 떠 있다. 
나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바람도 심하게 부는 날이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길을 걷는 행인의 모습은 위로 열린 하늘 때문인지 더 왜소하다.
혹시 페도토프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지붕 위 붉은 색 굴뚝은 마치 하늘을 향해 지붕 위로 솟은 사람 같다. 
겨울 하늘을 향해 질식할 것 같은 사회를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

 

Gamblers 노름꾼들. Oil on canvas, 60.5cm x 70.2cm. 1852. The Museum of Russian Art, Kiev, Ukraine 

이제 막 놀음판이 끝났다. 왼쪽 남자는 모든 것을 날린 것 같다. 
정면을 바라보고 앉은 남자도 망연자실한 표정이다. 
그렇다면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와 기지개를 펴고 있는 오른쪽 남자가 승자이겠다. 
노름에서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철저하게 야만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속여야 하고, 더 많이 빼앗아야 하고 그리고 약한 자의 숨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주 당당해 보인다. 
돌아보면 당당함을 가정한 비열함은 있어도 비열함을 가장한 당당함은 없다.
정부와 아카데미 화가들로부터의 압력이 점차 커져가자 페도토프는 

자포자기 심정이 점점 커져갔고 그것을 그림에 담기기 시작했다.

페도토프는 고골리가 러시아 문학에 추악한 삶에 대한 풍자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을 남긴 것처럼 그는 미술에 같은 것을 남기고자 했다. 
그러나 1852년 노름꾼이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페도토프의 작업은 중단된다. 
그 해 그는 서른 일곱의 나이로 정신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Fashionable Wife 유행을 따르는 멋쟁이 아내. 1849. Oil on cardboard, 30 x 25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모두 어두운 실내의 그림자에 갇혀 있는데 붉은 옷을 차려 입고 

담배를 입에 문 여인만이 도도하게 빛나고 있다. 
모자를 벗고 여인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남편인 것 같다. 
아마 외출이라도 할 모양인데 아내에게 돈을 달라고 한 것 같다. 
굳어진 여인의 얼굴과 대비되는 어수룩한 남자의 얼굴에는 비굴함도 보인다.

얼마나 필요한데? 지갑에 한 손을 넣고 있는 여인의 싸늘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이구, 차라리 안 보고 말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여인의 구부정한 허리 위로 답답함과 체념 그리고 분노가 한꺼번에 쌓여 있다.
한심한 남자들에 대한 페도토프의 비아냥을 보고 웃다가 문득 저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열심히 ‘모시고’ 잘 살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페도토프는 제대를 했지만 군대 밖은 생각보다 쉬운 곳은 아니었다. 
군에서 받던 월급은 그의 유일한 수입원이자 모스크바에 있는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한 돈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의 초상화는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료했다. 그러나 모델의 내면 모습을 묘사하는데 탁월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담는데도 열중했다. 
군인 출신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화가는 확실히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 같다.

 

It is Cholera to Blame 콜레라의 탓. 1848  Watercolour on paper, 38 x 33 cm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n Federation

 

Encore, Encore! 앵콜 앵콜. 1850  Oil on canva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Encore, Encore! 앵콜 앵콜. 1851 

 

Officer and His Orderly 장교와 그의 조수. 1850 ~ 1851. Oil on canvas, 24 x 28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P. P. Zhdanovich. 1846 ~ 1847. Oil on canvas, 12 x 16 cm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M. P. Zhdanovich. 1846 ~ 1847. Oil on canvas, 19 x 23 cm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Ye. G. Flug. 1850. Oil on canvas, 25 x 33 cm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S. S. Krylov. 1850 ~ 1851. Oil on canvas, 25 x 35 cm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F. Ye. Yakovlev. 1846 ~ 1847. Oil on cardboard, 17 x 21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Second-Captain Vannovsky. 1849. Oil on canvas, 16 x 22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P. V. Zhdanovich. 1846 ~ 1847. Oil on canvas, 13 x 2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an Architect. 1849. Oil on canvas, 15 x 19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Amalia Legrand. 1846 ~ 1847. Oil on canvas, 18.5 x 23 cm
The Art Museum of Belarus, Minsk, Belarus

 

Portrait of O. P. Zhdanovich, née Chernyshova. 1846 ~ 47. Oil on canvas, 13 .3 x 17.3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O. I. Demoncalle. 1851. Oil on canvas, 17 x 22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Zherbin Children. 1850 ~ 1851. Oil on canvas, 17 x 23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Ye. P. Zhdanovich. 1846 ~ 1847. Oil on canvas, 13 x 18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Maria Pavlovna Druzhinina. 1848. Oil on canvas, 26 x 31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Anna Zhdanovich. 1848.  Oil on canvas, 13 x 18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N. P. Chernyshova. 1846 ~ 1847. Oil on canvas, 17.7 x 13.2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A. P. Zhdanovich. 1846 ~ 1847. Oil on canvas, 12 x 17 cm .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Elizaveta Petrovna Zhdanova. oil on cardboard. 13 x 17.7 cm.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ortrait of a Woman. Date unknown. oil on canvas.
​The State Hermitage Museum -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Portrait of M. Ye. Shishmareva. 1849. Leadpencil on paper, 23 x 30 cm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n Federation

 

Portrait of Lieutenant Lvov. 1846. Leadpencil on paper, 19 x 21 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S. D. Shishmarev on Board the Ship. 1849.  Lead pencil on paper, 24 x 32 cm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n Federation

 

[영상] Pavel Fedotov Realism Russian

 

 

 

 

A herd of horses in Baraba steppes. 1895. oil on canvas. 33.5 X 21.5 cm.

 

River Ob. 1895.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olosseum. 1900. watercolor on paper. 30.4 cm . Private Collection

 

Empress Anna Ioannovna in Peterhof Temple shoots deer. 1900.

 

Naples. 1900. watercolor on paper. 30.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Venice. Doge's Palace. 1900. watercolor on paper. 30 x 22.6 cm. Private Collection

 

Venice. Saint Mark's Basilica. 1900. watercolor on paper. 30.4 x 2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ossack with red shirt, 1901. sketch and study.

 

Female portrait. 1902. sketch and study

 

Krasnoyarsk rebellion. 1902. sketch and study

 

The Persian. 1902. sketch and study.

 

Townswoman. Portrait of Alexandra I. Yemelyanova nee Schrader. 1902. oil on canvas. 

82 X 67.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 I. Yemelyanova. 1903

 

Anfisa. 1905. oil on canvas.

 

Portrait of young lady. 1906.

 

Monk. 1907. oil on canvas. The M.A. Vrubel Omsk Regional Museum of Fine Arts, Omsk, Russia

 

Portrait of Alexander Suvorov. 1907

 

Portrait of E. N. Sabashnikova. 1907.

 

Crimea. Ai-Petri.1908. oil on canvas.

 

Head of girl. Portrait of Z. S. Khaminova.1908.

 

Portrait of A. P. Yurgenson. 1908.

 

Portrait of A. P. Yurgenson. 1908.

 

Mountains near Krasnoyarsk. 1909.

 

Portrait of A. I. Yemelyanova.  née Schreider. 1909. oil on canvas. 37.5 X 43.5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khakasy. 1909.

 

Portrait of Natalia F. Matveeva. 1909.  oil on canvas. 74.5 X 92 cm.
Kharkov Museum of Art  (Ukraine - Kharkov)

 

Pugachov (study). 1909 . oil on canvas. 56 X 45 cm.
Kalinin Regional Picture Gallery  (Russian Federation - Kaliningrad)

 

Razin. 1909 oil on canvas.

 

Siberian woman. 1909. oil on canvas.

 

Yenisey near Krasnoyarsk. 1909

 

A girl with braids. Portrait of A. A. Dobrinskaya. 1910. oil on canvas.

 

Alcázar of Seville. 1910. watercolor on paper.  34.5 x 2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hurch. 1910. Watercolor. paper. Private collection

 

Granada. Alhambra.. 1910. Watercolor on paper. 24.5 X 34.6 cm. private collection.

 

Valencia. 1910. Watercolor. on paper. 34.7 X 24.6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Portrait of doctor A. D. Yesersky. 1910. oil on canvas. 102 X 62 cm.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princess P. I. Shcherbatova. 1910. oil on canvas. 96.5 X 70 cm.
Saratov State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Saratov Region)

 

Seville. 1910. watercolor on paper. 25 x 3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eville. The bullfight. 1910. pencil. Watercolor on paper. 34.7 X 25.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quare ​​San-Fernando in Seville. 1910. oil on canvas.

 

Portrait of A. A. Dobrinskaya. 1911.

 

Portrait of woman with yellow background. 1911.​ oil on canvas. 51 X 44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Portrait of young woman. 1911.

 

Pugachev. 1911. sketch and study. penc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hurch in the village Dyakovo. 1913. Watercolor. paper.

 

In Alupka. 1913.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In Crimea. 1913. watercolor on paper. 24 x 31 cm. Private Collection

 

Kolomenskoye. 1913. Watercolor on paper.

 

Portrait of A. N Tretyakova. 1913. oil on canvas.

 

Man with an Injured Arm.  1913 . oil on canvas.  68.5 X 53.9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Still Life with Decanter, 1913 ​.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quare in front of the Museum of Fine Arts in Moscow. 1913. oil on canvas.

 

View of Kremlin. 1913.

 

Annunciation. 1914. oil on canvas. 206 X 160 cm.

 

Maria's head. 1914.

 

Old Krasnoyarsk. 1914.

 

Portrait of M. Velichkina, nee Baroness von Klodt Yurgensburg. 1914.

 

Alupka. Ai-Petri. 1915. watercolor on paper. 24.5 x 33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M. P. Konchalovsky in childhood. 1915.

 

Princess Olga meets the body of Prince Igor. 1915.

 

Portrait of N. S. Matveev. 1881. oil on canvas.

 

Princess Xenia Godunova with portrait of her dead groom prince. 1881.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Zubovsky boulevard in winter. 1881.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llumination of Moscow. 1882. oil on canvas.

 

Menshikov's head in profile. 1882.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princess S. A. Kropotkina with guitar. 1882. oil on canvas. 24.3 x 39.4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s of Menshikov family, 1882.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The elder Menshikov's daughter. 1882. watercolor on  paper. 

 

The model in the ancient russian costume. 1882. oil on canvas.

 

The old gardener. 1882. oil on canvas.

 

Boyarynya Morozova (study). 1883. sketch and study

 

Dancing girls. 1883. watercolor on paper. 23 x 14.5 cm.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Olga Surikova in childhood. 1883. watercolor on paper. 20 x 2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Bouquet. 1884. watercolor on paper.

 

Colosseum. 1884. watercolor on paper.

 

Female figures, wanderer, whacky (Study to "Boyarynya Morozova"). 1884. sketch and study

 

Florence1884. 1884. watercolor on paper

 

Florence. Walk. 1884. watercolor on paper.

 

Italian woman. 188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talian women. 1884.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14.5 x 14.5 cm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ilan's Cathedral. 1884. watercolor on paper. Private Collection

 

Naples. 1884. watercolor on paper.

 

Naples. Enbankment. 1884. watercolor on paper.

 

Naples. Vesuvius. 1884. watercolor on paper.

 

Neapolitan girl with flowers in her hair. 1884.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mpey. Street. 1884. watercolor on paper. 18 x 25 cm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I. E. Krachkovsky. 1884.

 

Portrait of I. S. Ostroukhov. 1884. 

 

Road in Khotkovo. 1884.

 

Roman Carnival. 1884.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aint Peter's Cathedral in Rome. 1884. watercolor on paper

 

Scene from the Roman carnival. 188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

 

Venice. Saint Mark's Basilica. 1884. watercolor on paper. Private Collection .

 

Female portrait. 1885. 

 

Portrait of O. V. Surikova. 1885.

 

Rooftops in winter. 1885. oil on canvas.

 

Village altapiece. 1885. watercolor on paper

 

Wanderer. 1885. sketch and study. watercolor. paper.

 

Whacky, seated on the snow (Study to "Boyarynya Morozova"). 1885. watercolor on paper.

 

Winter in Moscow. 1885.

 

[영상] Vasily Surikov

 

그림 출처 : http://www.abcgallery.com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 Stepan Razin. 1906. Oil on canvas. 318 X 600cm.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역사화로 수리코프의 마지막 작품인 <스테판 라진>은 <대귀족부인 모로조바>를 그릴 때 이미 구상되고 있었다. 
<대귀족부인 모로조바>가 17세기 후반 차르 알렉세이 시대에 일어난 종교적 충돌을 다룬 것이므로, 
수리코프는 자신의 역사화를 새로이 구상하는 기제로서 차르 알렉세이 시대에 일어난 
또 다른 역사적 충돌을 포착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가 포착한 역사적 충돌은 스테판 라진으로 상징되는 농민반란이었다. 
‘민중(개인)과 전제권력과의 충돌’이라는 수리코프의 테마는 초기 작품들인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베레조보의 멘쉬코프>에 이어 마지막 작품인 <스테판 라진>에까지 계속되었다. 

러시아 이동파의 주요 화가인 바실리 수리코프의 작품 <스텐카 라진(Stepan Razin)>은 

크기가 6m에 이르는 대작으로, 스텐카 라진이 러시아 역사에서 그리고 

수리코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스텐카 라진과 그의 지지 기반이었던 코사크(Cossack) 또는 ‘카자크(Kazak)’는 
터키어의 ‘자유인(自由人)’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15세기 중반까지 코사크라는 명칭은 드네프르 지역에서 형성된 반(半)독립적 타타르족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5세기 말에는 농노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스크바 공국을 비롯하여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에서 드네프르나 돈 지방으로 이주하여 자유롭고 반자치적인 성격의 

군사조직을 만든 농민들도 같은 이름으로 불렀다.

​이들은 러시아나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봉건 제후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유목들과 싸워 토지를 확대해 
16세기에는 돈, 카프카스, 야이크(우랄 강), 볼가, 드네프르, 자포로제 등 6개의 주요 코사크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선거에 의해 수장인 아타만(ataman)을 선출하고 중요한 문제를 합의로 결정하는 민주적인 자치를 실시하였다.

 

 

Stepan Razin. 1903. sketch and study. 습작.

 

 

Haydamak. 1904. oil on canvas. 38 X 59 cm. Tul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Tula)

 

 

Head of a young cossack. 1905. . 33 X 56 cm. sketch and study. 습작

 

 

Stepan Razin. 1910. Sketch and study. 습작. indian ink. pencil. paper.

 

 

Boatsman. 1912. sketch and study. 습작.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 (부분 1)

러시아나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결코 우호적일 수 없었으나 몽고의 침입 경험과 

타타르 및 투르크 족의 침입에 대한 방비가 필요했던 이들 정부는 코사크(Cossack)에게 회유책을 폈다. 
무기와 식량 그리고 자금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국의 국경을 방어케 하는 역할을 맡게 하였다. 
그러나 제정(帝政) 러시아의 등장과 중앙 집권의 강화는 이들의 자치권을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러시아 위정자들은 코사크 상층부에 특권을 주어 회유하면서 코사크 자치의 축소를 기도했고, 
이에 맞서 코사크 민중들이 맞서 싸운 것이 17세기 후반의 스텐카 라진(Stenka Razin, 1630-1671)과 
18세기 초의 콘드라티 불라빈(Kondratii Afanasevich Bulavin, 1660?-1708), 

18세기 후반의 예멜리안 이바노비치 푸가초프(Yemelyan Ivanovich Pugachov, 1742-1775) 

등을 지도자로 한 농민전쟁과 봉기들이었다.

​몇 번의 봉기가 실패한 이후 유력수장들이 러시아 정부의 관작을 지주 귀족화하였고 
코사크는 제정 러시아의 비정규군으로서 재편성되었다. 
20세기 초기에 11개의 코사크 군단이 각 지방 군관구에 소속되었는데, 

1912년 코사크 총인구가 약 400만 정도이고 그 중 약 45만이 군사요원이었고 

몇 만의 기마부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굉장한 전투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대다수의 코사크는 중립을 지켰고 소련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집단농장제도가 도입되면서 특권계층으로서의 코사크 집단은 해체되었으나 1930년대 편성된

코사크 사단은 2차 세계대전 중 소련과 독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인 알렉세이 1세 (Aleksey I Mikhailovich Romanov)는 

1649년에 황제의 칙령(勅令)으로 농민들의 이동권을 박탈하여 

농민들은 땅과 지주에게 예속시키고 완전한 농노로 만들었다. 
그리고 1650년대 말부터 우크라이나 편입하기 위하여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의 지배권을 놓고 스웨덴과의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 정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할 목적으로 
소금세를 인상하고 담배 유통을 확대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은화 대신 동전을 유통시켜 통화량이 증가하면서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차르의 중압 집권적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제정치를 강화하고 반대파 귀족들을 제거했다.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 (부분 2)

당연히 농민 등 민중의 삶은 피폐해졌고 농노제(農奴制)를 피해 도망치는 농민들이 

코사크로 이주하면서 무산(無産) 코사크가 증가하여 코사크 내에서 계층분화가 나타나면서 

그들 사이에도 차르 정부와 당시 사회구조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이런 불만을 모아 농민들의 봉기를 이끌어 낸 지도자가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Stepan Timofeevich Razin)이다.

​그는 원래 돈 코사크 중에서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이주민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보통 그를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이라고 부르는 것도, 

스텐카가 스테판을 별명처럼 낮춰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텐카 라진은 1667년에 자신을 따르는 코사크들과 도망 농민들과 함께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돈 코사크를 떠나 돈에서 볼가강 강변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라진이 이끄는 코사크 무리는 

대상인의 곡물이나 상품 운반선을 습격하고 귀족에 대한 약탈을 시작하였다. 
2년간 스텐카 라진은 볼가 강 하류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장악하여 

귀족들의 재산을 빼앗었다. 그리고 주변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스텐카 라진은 농민들 사이에서 유명해졌고 무리도 점점 불어났다. 
무리가 커진 만큼 더 많은 식량과 물자가 필요하게 됐고 고심하던 스텐카 라진은 페르시아로 눈을 돌렸다. 
1668년에 농민군은 카스피 해(海)에 나타나 무역선을 습격하였다. 
그리고 스텐카 라진의 농민군은 카스피 해를 넘어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 군대와 싸워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얻었고 아름다운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잡아왔다. 
스텐카 라진은 이 공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 (부분 3)

스텐카 라진은 1670년 다시 전투에 나섰다. 
알렉세이 1세의 폭정과 봉건 영주들의 수탈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농민들에게 격문을 돌렸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여, 예속을 강요받은 자여, 봉기하라!
우리 코사크는 항상 그대들과 함께 하리라.”

코사크 군은 먼저 볼가강 연안에 있는 차르의 요새들을 정벌하기로 하였다. 
라진은 7,000여 명의 코사크 군을 이끌고 차리친(Tsaritsyn, 지금의 볼고그라드 Volgograd)과 

아스트라한(Astrakha)을 함락시켰다. 
두 도시에서 라진과 그 부하들은 차르의 편에 섰던 귀족과 장교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거주단위를 천 단위, 백 단위, 십 단위로 쪼개고 대표자를 선임하였고 
베체(veche)라는 의사 수렴기관을 설치하는 등 그 지역 정부들을 코사크 자치기관들로 대체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농민과 도시하층민들을 농민군에 가담시켜 구 규모가 2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계속 진격하여 사라토프를 정복했으며 심비르스크까지 진출하여 볼가강 전 지역 및 돈강과 
도네츠크강 인접 지역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부지방까지 진출했다.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 (부분 4)

스텐카 라진의 반란에 놀란 차르 알렉세이 1세는 황태자 유리 바리야틴스키을 내세워 반란 진압에 나섰다. 
1670년 10월 스텐카 라진이 지휘하는 반란군은 심비르스크(Simbirsk, 현재의 울리야노프스크 Ulyanovsk) 

교외에서 황제가 보낸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쉬지 않고 나흘간이나 계속되었다. 
서유럽의 군사기술을 익힌 차르의 군대는 준군사조직이었던 라진의 군대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전세는 점점 스텐카 라진의 군대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나흘 째 되는 날, 선봉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스텐카 라진은 적의 총탄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부상을 입은 스텐카 라진은 볼가강 하류 쪽으로 도망쳤고, 

차르의 군대는 심비르스크를 점령하고 스텐카 라진을 추격하였다. 
그는 돈 강의 코사크의 마을로 숨어들었다. 다시 코사크들과 봉기하여 반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1671년 4월 24일 차르파 코사크의 밀고로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은 스텐카 라진은 1671년 6월 16일, 모스크바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사지(四肢)를 찢기는 능지처참으로 처형되었다. 
차르의 군대는 농민군의 마을을 불태우고 농민군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1671년 12월 농민군 최후의 거점 도시인 아스트라한을 점령했다.

스텐카 라진은 처형되었고 농민군은 진압되었지만 스텐카 라진의 전설과 노래는 

러시아 농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스텐카 라진은 러시아 민중의 가슴에 영원히 농민혁명가로 살아 있다. 
그리고 쇼비타비치(Dmitri Shostakovich, 1906~1975)의 교향곡의 주제가 되었고,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Alexander Glazunov, 1865~1936)의 교향시의 주제이기도 했다.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 (부분 5)

그러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노래는 러시아 전통 민요 가락으로 불리는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00년대 초반에 독립군들이 즐겨 부르다가 

다시 1970~80년대에는 민주화 운동 시기에 애창곡이 되었다. 
노래의 배경이기도 하지만 수리코프의 그림 배경이기도 하다. 
전설처럼 들리는 그 이야기를 짧게 말하자면 이렇다.

1670년, 스텐카 라진은 코사크와 농민들을 볼가강 하류에 있는 도시 아스트라한을 점령하였다. 
라진과 농민군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스텐카 라진은 자신을 둘러보게 되었다. 
이전에 싸웠던 이유는 사실상 전리품을 얻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가난한 코사크와 도망쳐온 농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는 가난한 농민들을 다 구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 농민들에 대한 형제애가 강하게 싹터 올랐다. 
농노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갖게 하여 러시아의 모든 농민들을 

지주와 귀족들의 억압에서 구해내고 싶었다. 
이런 결심이 알려지자 스텐카 라진의 농민군은 더욱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 
사라토프나 사마라 등의 큰 도시를 공략할 때는 성 안에 있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승승장구할 수 있었고 심지어 성을 지키던 수비대가 스스로 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스텐카 라진의 부대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농민군의 내부에서 불만이 있었다. 

바로 스텐카 라진과 사랑에 빠진 페르시아 공주의 오만함 때문이었다. 
공주의 오만함에 불만을 품었던 이들이 있었고 이것이 농민군의 사기에 영향을 주었다. 
라진은, 공주를 사랑했지만 그보다는 더 코사크를 그리고 농민들을 사랑했기에 

결국 비장한 마음으로 공주를 강물에 집어넣고 만다.

 

 

볼가강의 스텐카 라진 (부분 6). 사랑하는 여인을 물속에 집어 던진 비운의 영웅

수리코프의 그림은 스텐카 라진이 공주를 강에 던진 후의 모습이라고 한다. 
분노와 격정, 혁명에 대한 열정, 공주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 등의 그 얼굴에서 드러나 보인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니 지금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 

스텐카 라진 Stenka Razin 

넘쳐 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페르시아의 영화의 꿈 다시 찾는 공주의
웃음 띄운 그 입술에 노래 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그 모습.

일제 강점기에 항일독립군의 애창곡이었던 ‘스텐카 라진’의 노랫말이다. 
구슬픈 곡조의 이 러시아 민요에는 한때 러시아 온 땅을 톺고 지나간 반란의 주인공 
‘스텐카 라진’의 비극적 사랑이 담겨 있다. 
러시아 민요 '스텐카 라진'은 애잔하고 굳센 선율은 라진의 무쇠 같은 의지를 잘 표현하여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영상] 스텐카 라진 Stenka Razine / 이연실

 

1980년대 중반 러시아 민요 스텐카라친을 우리 사회에 널리 보급하기 위해

민중 음악 운동을 이끌어 온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서 
대중가수 이연실에게 오리지날 음반을 제공하고 노래 취입을 부탁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음악 검열이 아주 심할 적이어서 목로주점, 반지 등 

별로 문제될 것 없는 노래에 슬쩍 끼워넣기로 취입했는데
가사가 불온하다면서 문제를 삼아 김정환(시인), 김학민(출판사 대표) 등이 옥신각신한 결과 

내용이 다음과 같이 다소 엉뚱하게 왜곡된 채로 음반이 제작되어 세상에 나왔다.

돈 코사크 (- 동편 저 쪽)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 우리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 라진 장하도다 (-외롭구나) 그 모습.

 

[영상] Song of Stenka Razin. Russian folk song / 오리지널 사운드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여전히 농노제가 시행되는 낙후한 봉건국가였다. 
농노들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을 하며, 남는 시간에 소작지를 경작했다. 
그나마 수확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이중삼중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노들은 몰래 도망쳐서 카자크에 합류하였다. 
그런 와중에 카자크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간섭이 심해졌다. 
그러자 카자크들은 발끈하였고, 마침내 1667년에 무력봉기를 일으킨다.
 
카자크 무리는 스텐카 라진의 지도 아래 대상인과 귀족에 대한 약탈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많은 식량과 옷, 보석 등을 빼앗아 주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후 2년간 스텐카 라진은 볼가 강 하류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스텐카 라진은 농민들 사이에서 스타가 됐다.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더 많은 식량과 물자가 필요하게 됐다. 고심하던 스텐카 라진은 페르시아로 눈을 돌린다.
 
1670년, 카스피 해의 검은 물결을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한 라진의 군대는 막대한 전리품을 얻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잡아왔다. 
그 소식에 힘을 얻은 러시아 농민들은 곳곳에서 스스로 봉기를 일으켰다. 
더불어 라진의 군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볼가 강 유역의 볼고그라드와 아스트라한에 이어 사라토프, 사마라 등의 도시를 차례로 굴복시켰다. 
그들 앞에는 어떤 적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문제가 반란군의 발목을 붙들었다. 
스텐카 라진이 페르시아 인질과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공주의 미모에 취한 스텐카 라진은 정신 못 차리고 사랑에 탐닉하게 된다. 
당연히 봉기의 칼끝은 무뎌졌다. 마침내 반란군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곤혹스런 처지에 빠진 라진은, 결국 비장한 마음으로 공주를 강물에 집어넣고 만다.
 
공주의 비명을 뒤로 한 채 스텐카 라진은 분위기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차르 황제와 ‘맞장’을 뜨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하지만 1670년 10월, 이들은 심비르스크 근처에서 정부군과 접전을 벌여 처참하게 패하고 만다. 
더불어 스텐카 라진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간신히 카자크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옛 동료들의 배신으로 1671년 4월에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압송됐다. 
그리고 1671년 6월 16일.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라’는 황제의 특별한 주문에 따라 
모스크바 광장에서 손과 발과 목이 차례로 잘려 나갔다. 

 

Russian Troops under suvorov Crossing the Alps in 1799.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Heroic view of a russian artist from the late 19th century 1899. oil on canvas. 373 X 495 cm. 

Museum of Russia, St. Petersburg.

제 2기 서사적 삼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는 
<베레조보의 멘쉬코프>에서 나타났던 황제의 ‘총애와 실총의 극적인 충돌’의 또 다른 변주이다. 
예카테리나 여제 시대의 백전불패(百戰不敗)의 명장이었던 수보로프 장군은 

여제가 죽은 후 즉위한 그녀의 아들 파벨 1세의 군복, 열병식, 교범 같은 분야의 

형식적인 변화에 치중한 군개혁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총하게 된다.


예카테리나 여제로부터 최고의 우정과 영예를 누리던 수보로프 장군의 실총 후 
노브고로드 근처 콘찬스코예 마을로 유형당한 상황은,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다가 
표트르 2세 때 실총해 베레조프 마을에 유형당한 멘쉬코프의 그것과 너무나 닮아 있다. 
그러나 멘쉬코프는 실총으로 그 운명적 삶을 마감했지만, 수보로프 장군은 
프랑스군을 대항하기 위한 동맹군의 지휘관으로 재기용되어 권토중래(捲土重來)하게 된다. 
수리코프는 <베료조프의 멘쉬코프>가 품었을 법한 총애의 회복을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로 형상화하였다.
이 그림은 니콜라스 2세가 매입한다.

 

 

Head of baptized soldier. 1897.  sketch and study. 습작. oil on canvas. 41 X 31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Snowy mountains. 1897.  oil on canvas.

 

 

Head of Suvorov. 1898. sketch and study.

 

 

Old soldier descending from the snowy mountain. 1898.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습작. 1898.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습작. Soldier. 1898. sketch and study.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습작. Soldier descending from the snowy mountain. 1898.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습작. Soldier with drum. 1898.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습작. Soldier with gun. 1898. sketch and study

 

 

<1799년 알프스를 넘는 수보로프> 습작. Soldier with gun. 1898. sketch and study

 

 

Soldier's head in a cocked hat. 1898. sketch and study charcoal. paper.

 

 

The head of soldier-drummer. 1898. sketch and study . oil on canvas. 34.6 X 31.5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 St Petersburg)

 

 

Russian Troops under Suvorov Crossing the Alps (study). 1899. sketch and study. oil on canvas.

 

 

 

Portrait of E. A. Surikova. 1887. 

 

 

Portrait of N. P. Passek. 1887. watercolor on  paper. 34 x 24.6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P. F. Surikova (Artist's Mother). 1887. oil on canvas.

 

 

View of Krasnoyarsk. 1887. oil on canvas.

 

 

Healing the man born blind by Jesus Christ. 1888. oil on canvas.

 

 

Portrait of Olga Surikova, the artist's daughter. 1888. oil on canvas. 80 x 135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A. I. Surikov. 1889. oil on canvas.

 

 

A. I. Surikov with fur coat. Study to "Taking the snow town". 1890. sketch and study. oil on canvas.

 

 

Alexander N. Pestunov. 1890. watercolor on paper.

 

 

Head of young lady. 1890.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House of Surikov family in Krasnoyarsk 1890. pencil. watercolor on paper.  33 x 24.5cm

 

 

Okhotnikov's house in Krasnoyarsk. 1890. watercolor on paper.  34 x 2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K. M. Verkhoturova. 1890. watercolor on paper. 13 x 19.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young Leonid Chernyshev. 1890. 11.5 X 15 cm.

 

 

Portrait of young woman in fur coat with muff. 1890.

 

 

Room in Surikov's house. 1890. watercolor on paper. 33.5 x 24.5 cm

 

 

The head of laughting girl. 1890.  sketch and study.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ossacks. 1891.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Cossacks. 1891.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Cossack's head. 1891. sketch and study.

 

 

Executioner. 1891.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T. K. Domozhilova. 1891.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iberian Beauty. Portrait of E. A. Rachkovsk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습작. 1891.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sketch and study.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습작. 1891.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sketch and study.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습작. 1891.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sketch and study.

 

 

 Cossack-rower. 1892. sketch and study.

 

 

Girl with a red jacket. 1892.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Irtysh. 1892. oil on canvas.

 

 

Portrait of L. T. Matorina. Cossack woman. 189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ortrait of young woman with kokoshnik. 1892.

 

 

Portrait of governor Zamyatnin. 1865.watercolor. paper. 20 x 25.1cm

 

 

Evening in Petersburg. 1871.

 

 

Under the rain by the coach to Black River. 1871. watercolor on paper. 21.8 x 16.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oly Face. 1872.

 

 

Peter I drags ships from the Onega Bay in Lake Onega in 1702. 1872. charcoal.  pencil on  paper.

 

 

Salome brings head of Saint John the Baptist to her mother Herodias. 1872. oil oncanvas. 71 x 89 cm

 

 

Temptation of Christ. 1872.

 

 

A rich man and Lazarus. 1873. oil on canvas.

 

 

Christ Driving the Merchants from the Temple. 1873.

 

 

Isba. 1873. watercolor on paper. 34.5 x 24.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Khakasy with his feet bound with chains. 1873.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32 x 23 cm. Private Collection

 

 

Minusinsk steppe. 1873.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inusinsk. On the way. 1873. watercolor on paper. 32.6 x 23 cm. Private Collection

 

 

Siberian landscape. Torgoshyno. 1873 : pencil,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Belshazzar's Feast. 1874.

 

 

Male nude. 187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On Nevsky Prospekt at night. 1874. watercolor on paper. 15.5 x 21.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On Nevsky Prospekt on day. 1874. watercolor on paper.15.5 x 21.6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Good Samaritan.1874. oil on canvas.

 

 

Assassination of Julius Caesar. 1875.

 

 

The Apostle Paul explains the tenets of faith in the presence of King Agrippa, 

his sister Berenice, and the proconsul Festus. 1875. oil on  canvas. 218.5 x 14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fight of good spirits against evil spirits. 1875. sketch and study.

 

 

Belfry Ivan the Great. 1875, Watercolor. paper.

 

 

First Ecumenical Council of Nicaea. 1876. oil on canvas.

 

 

Fourth Ecumenical Council of Chalcedon. 1876. oil on canvas.

 

 

Samovar.1876. oil on canvas.watercolor on paper.

 

 

Second Ecumenical Council of Constantinople. 1876. oil on canvas.

 

 

Third Ecumenical Council of Ephesus. oil on canvas.

 

 

View of Kremlin at winter. 1876. oil on canvas.

 

 

View of Kremlin at winter. 1879. oil on canvas.

 

 

View of Kremlin at winter1879.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E. K. Deryagina. 1879. oil on canvas.

 

 

Strelets with cap. 1879.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Bit of Moscow. 1880.  oil on canvas.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oscow yard. 1880.  oil on canvas.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amara. 1880. oil on canvas. watercolor on paper. 28 x 19 cm. Private Collection

 

 

Strelets. 1880.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Boyarynya Morozova (study). 1881.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Icon-lamp. 1881. oil on canvas.

 

 

Portrait of A. S. Matveev in childhood. 1881. oil on canvas.

 

Kyrgyz​. 1894. sketvh and study. pencil on paper

 

 

Study of khakasy. 1892. sketch and study.  pencil on paper.

 

 

View of Krasnoyarsk from knoll. 1892.

 

Cossack . 1893.  sketch and study. sketch and study

 

 

Cossack Dmitry Sokol. 1893.

 

 

Cossack with gun. 1893.

 

 

Head of khakasy. 1893.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Krasnoyarsk. Kachinskaya street.1893. sketch and study. Watercolo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hooting cossack. 1893.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Tatar's heads (old and young). 1893. sketch and study

 

 

Yermak with cossacks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1893.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  sketch and study.

 

 

Portrait of girl with red dress. 1894.

 

 

Portrait of mother. 1894. oil on canvas. 23 X 29 cm.

 

[영상] Vasily Surikov: A collection of 254 works (HD)

 

 

 

Self-Portrait. 1879.  Oil on canvas . 80 X 135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1848년 시베리아의 카자흐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졸업 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베로네제, 티치아노, 틴토레토 등의 그림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들의 색채 기법을 받아들였다.

1870년대의 러시아 제실(帝室)아카데미에 대항하여 회화의 리얼리즘을 지향한 진보적 그룹인 
'이동파(移動派)'에 들어가 레핀(Ilya Repin, 1844~1930)과 함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주로 러시아 역사에서 소재를 찾았으며, 대표작에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정복》
《베료조프에서의 멘시코프》《스테판 라진》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파웰 트레치야코프가 구입을 했고, 
그의 후원으로 수리코프는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7년 사랑하던 아내가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자 수리코프는 
그림을 포기하고 종교에 빠져들었으며 고향인 시베리아로 떠났다. 
오랜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고, 
몇 년 뒤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1916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이동파' 일원으로 레핀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주로 대형 크기의 러시아 역사와 관련된 주제를 즐겨 그렸으며, 
사실주의 역사화의 거장으로 칭송 받았다. 
1877년부터 모스크바에서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시베리아의 카자흐 가정에서 태어난 수리코프는 조상들의 파란만 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일찍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이주민' 혹은 '일당 노동자'라는 의미를 지닌 '카자흐'는 무거운 세금과 
강제노역을 피해 변경으로 달아난 농노와 그 자손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품팔이, 수렵, 약탈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등 
용맹성과 강인한 개척정신을 보여주었다. 
수리코프는 이런 조상들의 삶을 의식하고 자신의 예술 속에서 
민중적이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가치를 중시 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

 

Self-Portrait. 1884. watercolor on  paper.

 

Self-Portrait against the background of picture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189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elf-Portrait. 1902. 

 

Self-Portrait. 1910. pencil on paper.

 

Self-Portrait . 1913. oil on canvas.

 

Self-Portrait. 1915. oil on canvas. 92 X 75 cm. The State Russian Museum - Saint Petersburg

 

Boyarynya Morozova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1887. oil on canvas 304 x 587.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러시아 역사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하게 되는 화가는 바실리 수리코프다. 
수리코프의 역사화는 유장하고 장엄한 분위기와 다소 음울하고 사색적인 색조가 특징이다. 
그래서 누가 봐도 '러시아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인상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리코프의 장엄함과 음울함에는 분명 저 대륙의 광활함과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그리스 정교의 구교와 신교의 분쟁을 테마로 민중적 주제를 제시한 그림이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구교(분리교) 즉, 러시아 구세력을 상징하는 
모로조바 부인을 중심으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그림의 중심에 있다. 
그들은 선택 받지 못한 계층으로 삶의 고통, 소외감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델의 대부분이 여성들이다. 
굴곡있는 러시아의 힘든 역사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러시아 여인들의 굳은 의지가 그림에 절절히 배어 나온다. 
이 작품은 여성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으로 손꼽히며 레핀과 함께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끌어 올린 대표 작품으로 손꼽힌다.

다른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러시아적 풍미가 충만하다. 
이 작품은 자신의 신앙과 신념을 위해 어떤 핍박도 마다하지 않은 용감한 귀족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이다. 
건초가 깔린 수레 위에 쇠사슬로 묶인 모로조바. 
그녀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며 비웃는 사람도 있지만, 안타까 워하고 슬퍼하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지체 높은 여인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추운 눈밭을 가르며 무서운 형벌의 운명을 지게 되었을까?

그림은 17세기 러시아의 종교 대분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회 개혁과 교권 확대를 위해 러시아 교회의 전례를 
그리스 식으로 개편하려 하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들고 일어났다. 
후자는 옛 의식을 고수하는 점에서 구교도로 불렸는데, 이들 구교도 뒤에는 일부 대귀족이 있었다. 
이들은 구교도 운동을 통해 구습을 지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차르 알렉세이의 중앙집권적 권력을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반면 차르는 니콘의 종교개혁에 기대어 전 동방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양쪽 다 열정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까닭에 그 충돌은 요란했으며, 

결국 차르는 구교도들을 파문하고 화형에 처했다. 
구교도의 중추인 대주교 아바쿰(1621-1682)도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와 같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2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분신자살하는 등 
구교도들은 격렬히 저항했으며, 끝내 짜르도 이들을 완전히 '박멸'할 수 없었다. 
이들의 신앙은 면면히 이어져 18세기에는 그 권리를 다시 인정받았고, 
1905년에는 이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락하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그림의 여주인공 모로조바는 종교 대분열시 구교도 편에 섰던 대귀족 
프로코피 소코부닌의 딸이자 역시 특권 귀족인 모로조프의 부인이다. 
여동생 우르소바와 더불어 옛 신앙을 수호하려고 개혁에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보로프스크 수도원 감옥에 유폐되어 삶을 마감했다. 
모로조바는 구교 의 지도자 아바쿰과 왕래하며 그의 가족을 재정적으로 도와 차르의 분노를 샀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녀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아니, 확신이라기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빛을 발한다. 
수레 곁에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쫓아가는 동생 우르소바는 

신앙적 열정 속에서도 초탈한 듯한 인상을 보여 준다.

겉으로 드러난 빛깔은 어떠하든 이 두 사람의 신앙 목표는 같다. 
이들의 신앙 앞에 무릎 꿇고 가호를 빌거나 동정의 눈물을 흘리는 
모스크바 거리의 사람들은 절대 권력에 억눌린 민중의 한을 대변한다. 
지독한 탄압 속에서도 구교도의 신앙이 농민과 상인, 장인 등 민중의 마음을 사고 
그들의 연대 의식과 저항 정신과 만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포착된 그림이다. 

 

그림은 분리파의 거물이었던 대귀족 모로조바가 어느 겨울날 먼 귀양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슬에 묶인 채 짚으로 바닥을 깐 초라한 썰매에 몸을 맡긴 모로조바의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  
그는 오른손을 들어 두 개의 손가락을 허공에 내지르며 저항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화면 우측에는 분리파들이 안타깝고 슬픈 얼굴로 그를 배웅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개혁파들이 유쾌한 얼굴로 패배자를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대립의 패배자는 분리파 뿐이었을까.  
니콘은 러시아정교회를 과도한 민족주의로부터 구하고 교회의 일체성을 강화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투쟁의 과정에서 파문한 수많은 인재들을 상실함으로써 
교회의 역량을 현저히 약화시키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우위의 환상을 버리지 못한 니콘은 차르 알렉세이와 대립하다가  
1667년 주교회의에서 파면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어,  
1681년 아바쿰보다 오히려 한 해 먼저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 18세기 표트르 대제가 실행한 사회전반의 개혁에서 교회는 공식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정교회의 수장은 차르의 신하로 완전히 복속하게 된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두 번에 걸친 내부분열을 거치면서  
그 화려했던 권력을 세속 군주에게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1887. oil on canvas 304 x 587.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모로조바(Feodosia Prokopiyevna Morozova ,1632–1675)는 귀족(okolnichi)인 
프로코피 소고브닌(Prokopy Feodorovich Sokovnin)의 딸로 열일곱 살에 
역시 귀족(boyar)인 모르조프(Gleb Morozov)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이 1662년에 사망하여 일찍 홀로 되었으나 그녀의 지위는 여전했다고  한다. 
전례 개편 과정에서 구교도를 이끌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이 모로조바의 정교회 신부였다. 
모로조바는 계급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구교도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동생 우르소바(Evdokia Urusova)도 구교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르조바는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1671년에 체포되어 보로프스키의 성 파프누티우스 수도원

(St. Paphnutius Monastery, Borovsk)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1675년 1월에 일생을 마친다. 
이런 그녀의 일생은 구교도들에게 순교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이동파의 대표적인 역사화가인 수리코프는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 대귀족부인 구교도 모로조바가 끌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에 대한 세력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녀의 주장이 뭔지가 모스크바 길거리의 설경과 함께 펼쳐져 있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이 반대파의 저항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고명섭 한겨레신문 기자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 창백한 낯색에 광기 어린 표정, 
이 강렬한 인상의 여인은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다. 
17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이루는 사건은  
바로 총주교 니콘과 사제 아바쿰의 대결이었다. 
교회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해 근대화한다는 니콘 주교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것은 교회 권력보다 교묘한 왕권강화정책이었다. 

사제 아바쿰은 교회 개혁에 반대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종교의식을 옹호했다.  
사제 아바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박한 종교생활을 하던 기층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황제보다도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개혁이 단행되었고 아바쿰을 지지하던 구교도들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구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수리코프가 그리고자 한 것은 그녀의 순교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순교를 둘러싼 여러 반응들이다.  
그림 왼쪽에 이빨 빠진 하아버지와 그 옆의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어쩔줄 몰라하는 젊은 여인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 옆의 여인도 고개를 숙여 숭고한 순교에 깊이 경배한다.  
마차 옆에 걸어가는 붉은 색을 입은 여인은 그녀의 동생인 우루소바 공작 부인이다.  
언니를 따라서 먼 길을 함께 거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그저 재밌다고 키득거린다. 

모로조바 부인을 싣고 가는 썰매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비록 그녀에게 동감하더라도 검은 옷의 사제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화면 오른편의 걸인이다.  
추운 겨울 맨발에 어깨의 맨살까지 드러난 참혹한 모습이지만 목에 걸린 사슬로 보아 고행승이다.  
오므라든 발가락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실감나게 한다. 

수리코프의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장대한 서사성과 더불어 

놀라운 장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누아는 카펫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수리코프는 사실적인 장면 묘사를 위해 우르소바 부인의 진주 장식 모자,  
노부인이 걸친 금실로 수놓은 숄과 외투, 17세기의 의상과 장신구, 

건물의 외관 등을 아주 섬세하게 재현해 냈다.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의상은 흰 눈과 어울려 하나의 합창이 되었다. 
다양한 색채를 화면에 구사하되 하나의 톤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Young lady with his arms folded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연습 작품
이 원본 그림은 크기가 304 x 587.5 cm나 되는 대작이다. 
그림을 몇 개의 작품으로 나눠 놓아도 될 정도로 생생하다.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여러 개로 나눠보았다. 
하나하나가 별도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연습 작품 

실제로 수리코프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부분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Young lady with violet overcoat.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Young lady with blue fur coat. 1887.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바실리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Detail (부분 1)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그림을 여러 개로 나누어 보았다. 
하나하나가 별도의 작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림의 주인공인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이다. 그녀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다.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손은 두 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늘 차르의 손에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이전처럼 두 손가락으로 기도하겠다"는 결의가 보인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2)

모로조바의 여동생인 우르소바(Evdokia Urusova)는 수레 옆에서 
기도하는 모습으로 언니를 따라가고 있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 종교적 믿음과 삶을 초월한 듯한 인상을 준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3)

거지같은 모습을 한 수도승이다. 
한 겨울인데 헤진 옷을 입고 쇠사슬로 연결된 십자가를 걸고 있다. 
이 수도승 또한 손가락 두 개를 들고서 순교의 결의를 보이고 있다.

그림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모로조바와 같은 구교도이거나 
그녀의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민중들의 눈물을 동해서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4)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러시아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에서 정복이라고 하면 알렉산더와 칭기즈 칸을 떠올리지만 
21세기까지 “영토”의 의미로 정복을 완성한 나라는 러시아다.

레핀의 그림에 아들을 때려죽였다고 등장하는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 
(Иван IV Васильевич, 1530-1584)는 보통 그가 폭정을 펼쳤다고 해서 
이반 그로즈니 (Ива́н Гро́зный,Ivan the Terrible) 이반 뇌제(雷帝)라고 한다. 
러시아는 당시 1582년에는 시베리아 정복을 시작으로 동방 진출을 도모했고, 
1588년에는 발트 해 연안까지 진출하려다 패전하기도 했다. 

이반 4세의 류리크 왕조는 러시아 통지세력인 자신들에게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카이사르(Caesar, 케사르, 시저)를 본 따 차르(tsar)라는 호칭을 처음 사용하여 
차르의 시대를 열었지만 1598년에 표도르 1세가 사망하고 막을 내리게 된다.

1613년 이반 4세의 황후의 집안인 로마노프(Romanov) 가의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미하일 1세 차르로 등장한다. 
우리가 흔히 차르의 전제 정치라고 하면 떠올리는 로마노프 왕조(Romanov dynasty)가 이들이다. 

로마노프 왕조는 지배구조가 혼란스럽고 영토가 좁았던 모스크바 차르국의 후반 시대 즉
"1613년 – 1721년 루스 차르국 시대"와 표트르 1세 (표트르 대제)에 의해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건국된 “러시아 제국 시대(1721년 – 1917년)”로 구분한다. 
이 과정에서 15세기만 해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나라가 
1894년까지 영토 확장을 거듭하여 시베리아를 정복하고 
태평양까지 진출하여 오늘날의 러시아 영토가 형성되었다. 

한마디로 러시아는 약 300여 년 동안 내부의 권력투쟁과 암투를 벌이며 
끊임없이 주변 국가와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한 나라이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5)

수리코프의 “대귀족부인 모로조바”는 로마노프 왕조의 2대 황제인 알렉세이 1세 
(Aleksey I Mikhailovich Romanov, 재위: 1645-1676) 시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알렉세이 1세 시기에 큰 사건 몇 개를 꼽자면 1649년에 농민들의 이동권을 박탈하여 
농민들은 땅과 지주에게 예속시키고 완전한 농노로 만들었다. 
그리고 1650년대 말부터 우크라이나를 편입하기 위하여 
폴란드와 발트 해 연안의 지배권을 놓고 스웨덴과의 전쟁을 벌였다. 


러시아 정부의 재정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부는 
재정 위기를 해결할 목적으로 소금세를 인상하고 담배 유통을 확대하였다. 
그것도 부족하여 은화 대신 동전을 유통시켜 통화량이 증가하면서, 물가가 엄청나게 올랐다. 
당연히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도처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가장 유명한 반란이 
바로 1670년대에 코사크의 농민지도자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의 봉기이다.

오늘 소개하는 “대귀족부인 모로조바”의 직접적 배경은 러시아인들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전례수정에 대한 갈등이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러시아 정교의 주도권을 누가 가질 것인가의 문제가 있었다. 
러시아 정교에 대한 영향력 강화는 차르의 중압 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이미 이반 뇌제(雷帝)때부터 그리스 정교가 러시아로 오면서 나타난 
번역의 오류를 고쳐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있어 왔다. 
1649년에는 동방정교회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전례에 이단적 요소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기에 새롭게 확장된 남부 슬라브 지방의 우크라이나인들 등을 교화시키기 위해 
단일한 올바른 전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도 충분했다. 


이런 시기인 1652년 알렉세이 1세와 교분이 깊었던 노브고로드 대주교 
니콘 (Nikon, 1605–81)이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그리스로 보내 그리스 전례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1653~1655년에 걸쳐 전례 수정 작업을 벌이고, 
1655년에 종교회의를 열거 전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6)

당시 개정된 내용은 상당히 많지만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성호를 두 손가락으로 긋던 것을 
세 손가락으로 긋게 하고, 예수의 철자를 Ісусъ에서 Іисусъ로 바꾸고, 
할렐루야도 두 번 외치던 것을 세 번 외치게 하였다. 
그리고 태양의 이동방향에 따라 교회 주변을 도는 예배의식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동안은 전례 개정에 동의하고, 실제로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 Petrovich, 1621~1682) 등이 대대적으로 반발하였다. 
반대파들은 너무 급격한 변화로 러시아 전통 방식을 버리고 
그리스 식을 대대적으로 도입한 것에 반발하였다.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고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들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농민과 상공인 지대의 사람들에게는 구교파 운동이 농노제와 
차르 지방관들의 횡포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생각되었다. 
결국 전례 수정을 둘러싼 갈등은 신교도 중심의 차르 지지 세력과 
구교도를 중심으로 한 일부 귀족과 농민들의 싸움으로 확장되었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구교도의 일부는 볼가 강을 건너가 숲 속에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했다. 
차르의 정부군은 구교도들의 수도원과 공동체를 수년간 포위 공격했고, 
구교도들은 극단적인 선택으로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이 갈등은 러시아 정부가 구교들의 권리를 인정한 18세기까지 이어졌고, 
감정의 골은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한다.

대격돌의 중심에 섰던 두 종교지도자의 마지막은 모두 비참했다. 
니콘은 한때 차르 알렉세이 1세와 함께 대주권자(Great Sovereign)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차르의 버림을 받아 1658년 총대주교직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알렉세이 1세는 1666년 종교 회의를 열어 공석이 된 모스크바 총대주교 자리에 
새 인물을 앉히고, 군주의 권력이 교회보다 강하다는 것을 공인받았다. 
그리고 니콘은 추방되고, 유폐되었다가 알렉세이 1세 사후에 모스크바로 돌아오지만 길에서 죽었다. 
구교도들을 이끌었던 아바쿰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가 
겨우 모스크바로 둘아 왔지만 1682년에 화형 당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7)

그림의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조바가 받는 고통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철모르는 아이들도 이 모습에 즐거워하고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8)

모로조바(Feodosia Prokopiyevna Morozova ,1632–1675)는 귀족(okolnichi)인 
프로코피 소고브닌(Prokopy Feodorovich Sokovnin)의 딸로 열일곱 살에 역시 
귀족(boyar)인 모르조프(Gleb Morozov)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이 1662년에 사망하여 일찍 홀로 되었으나 그녀의 지위는 여전했다고 한다. 
전례 개편 과정에서 구교도를 이끌었던 대주교 아바쿰 (Avvakum)이 모로조바의 정교회 신부였다. 
모로조바는 계급적으로나 신앙적으로 구교도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여동생 우르소바(Evdokia Urusova)도 구교도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로조바는 차르 알렉세이 1세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1671년에 체포되어 보로프스키의 성 파프누티우스 수도원
(St. Paphnutius Monastery, Borovsk)에 감금되었고 그곳에서 1675년 1월에 일생을 마친다. 
이런 그녀의 일생은 구교도들에게 순교자의 삶이었을 것이다.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이동파의 대표적인 역사화가인 수리코프는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 
대귀족부인 구교도 모로조바가 끌려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을 보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건에 대한 세력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그녀의 주장이 뭔지가 모스크바 길거리의 설경과 함께 펼쳐져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9)

반대파의 고통에 즐거워하고는 모습. 
우리나라에도 극히 일부 노인들이 이런 행위를 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반대파의 저항을 극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역사화는 또한 수리코프가 살던 시대에 대한 발언임이 분명하다. 
차르의 전제 정치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민중들의 각성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민주주의자들의 주장과 
러시아에 있어서 민주를 지향하는 예술로써 이동파의 열망이 들어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0)

레핀과 더불어 러시아 역사화가의 양대산맥인 수리코프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17세기 러시아 니콘의 종교 개혁시, 귀족 모로조프의 부인이던 모로조바는  
새로이 개편된 전례에 반대하고 원래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저항을 벌인다.  
결국 수도원에 유폐되어 생을 마감한 그녀는 여전히 러시아 국민들에게는 성녀처럼 추앙되고 있다. 

그 현장을 생동감있게 그려낸 수리코프의 그림을 통해 좌우로 대칭되는 사람들의 행동과 표정,  
그 가운데를 모로조바가 쇠사슬에 묶여 무언가를 격렬히 호소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의 겨울 길거리의 모습을 훌륭하게 묘사해 더욱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1)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는 것은 17세기 러시아 정교의 대분열이다.  
당시 총대주교였던 니콘이 교권을 확장하려 러시아 교회 전례를 뒤바꾸자  
전통을 중시하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반기를 들었다.  
교권 확장은 러시아 정교의 우두머리인 차르의 중압집권적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기도 했다. 

반대파에는 차르의 권력 강화에 반대하는 귀족 계급이 포함돼 있었다.  
차르 중심의 신교도와 귀족 중심의 구교도는 끝까지 맞섰다.  
차르는 결국 반대파를 파문하고 주동자를 화형에 처했다.  
2만명의 구교도가 분신자살로 격렬히 저항했다.  
구교도의 반차르 저항 정신은 이후 수백년 동안 도도히 흐를 반역의 저류가 됐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2)

주인공 모로조바는 차르에 맞서다 수도원에 유폐돼 삶을 마감한 역사적 인물이다.  
“화가는 이 순교자를 세상의 어떤 징벌로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하늘을 향해 치켜뜬 그의 눈은 자신의 행동이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쇠사슬에 묶인 이 귀족 여성 주위에서 민중들이 눈물을 흘린다.  
구교도와 민중이 내적으로 결속돼 있음을 보여주는 이 역사화는  
당대 현실을 향한 정치적 발언임이 분명하다.  -고명섭 한겨레신문 기자

까마귀처럼 새까만 옷, 창백한 낯색에 광기 어린 표정, 
이 강렬한 인상의 여인은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다. 
17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를 이루는 사건은  
바로 총주교 니콘과 사제 아바쿰의 대결이었다. 
교회에서 미신적 요소를 제거해 근대화한다는 니콘 주교의 개혁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것은 교회 권력보다 교묘한 왕권강화정책이었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3)

사제 아바쿰은 교회 개혁에 반대하고 기존의 전근대적 종교의식을 옹호했다.  
사제 아바쿰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소박한 종교생활을 하던 기층 민중들이었다.  
그들은 황제보다도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개혁이 단행되었고 아바쿰을 지지하던 구교도들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구교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수리코프가 그리고자 한 것은 그녀의 순교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순교를 둘러싼 여러 반응들이다.  
그림 왼쪽에 이빨 빠진 하아버지와 그 옆의 남자는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어쩔줄 몰라하는 젊은 여인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 옆의 여인도 고개를 숙여 숭고한 순교에 깊이 경배한다.  
마차 옆에 걸어가는 붉은 색을 입은 여인은 그녀의 동생인 우루소바 공작 부인이다.  
언니를 따라서 먼 길을 함께 거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은 그저 재밌다고 키득거린다. 

 

Boyarynya Morozova, Detail (부분 14)

모로조바 부인을 싣고 가는 썰매는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비록 그녀에게 동감하더라도 검은 옷의 사제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다.  
두려움 없이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은 화면 오른편의 걸인이다.  
추운 겨울 맨발에 어깨의 맨살까지 드러난 참혹한 모습이지만 목에 걸린 사슬로 보아 고행승이다.  
오므라든 발가락은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를 실감나게 한다. 

수리코프의「대귀족 부인 모로조바」는 장대한 서사성과 더불어 놀라운 장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베누아는 카펫의 그림 같다고 평했다.  
수리코프는 사실적인 장면 묘사를 위해 우르소바 부인의 진주 장식 모자,  
노부인이 걸친 금실로 수놓은 숄과 외투, 17세기의 의상과 장신구, 건물의 외관 등을 아주 섬세하게 재현해 냈다. 
화려한 러시아의 전통 의상은 흰 눈과 어울려 하나의 합창이 되었다. 
다양한 색채를 화면에 구사하되 하나의 톤으로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The old woman with a patterned headscarf. 1886.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36 x 43.7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Kneeling beggar.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습작

 

Wanderer. 1886. sketch and study. 습작. watercolor on paper.

 

Wanderer. 1886. sketch and study. pencil on  paper.

 

Thoughtful teenager. 1885. sketch and study.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ale heads with winter caps. 1887. sketch and study. 습작. watercolor on  paper. 

34.5 x 24.5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a woman in black shawl. 1886. sketch and study. 습작.

 

Head of Boyarynya Morozova (study). 1886. Series: Boyarynya Morozova .

sketch and study. 습작. oil on canvas.

 

Head of Boyarynya Morozova (study). 1886. Series: Boyarynya Morozova .
sketch and study. 습작. oil on canvas.

 

Morning of the Strelets’ Execution. 1881.  oil on canvas. 379 x 218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수리코프의 첫 역사화 대작인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은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수리코프의 첫 번째 대작으로 표트르 대제(1672~1725) 시대의 친위병 반란을 소재하고 있다. 
표트르 대제는 권력을 잡자 여러 개혁을 추진하였고, 그 일환으로 친위병들을 정규군으로 대체하였다. 
그러자 정규군으로 편입되지 못한 기존의 친위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표트르 대제의 누나 소피아 공주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려 하지만, 
반란은 실패로 끝이 났고, 이들은 잔혹하게 진압 당했다. 
결국 소피아 공주는 1704년 47세로 죽을 때까지 노보데비치 사원에 위폐 당했고, 
봉기에 가담했던 친위병들은 색출되어 처형당했다.

1698년 최초의 친위병 공개 처형이 있었는데, 표트르 대제는 직접 5명의 친위병의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그 날 57명이 처형당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1182명이 처형당했다. 
그 후 10년 간 반란의 여파로 처형이 계속되었고, 그 일로 사형당한 이가 2000명에 달했다

수리코프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들을 모델로 하고 있다. 
검은 수염의 친위병은 화가의 외삼촌인 스테판 페도로비치 토르고쉰이었고, 
여인들은 화가의 고향인 시베리아의 아낙네들이며, 친위병 노인은 시베리아 유형수였고, 
붉은 수염의 친위병은 고향의 묘지기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림 속 수레는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그곳에서 보고 그렸다고 한다. 
성 바실리 사원을 배경으로 붉은 광장에 결박당한 친위병들이 처형을 기다리고 있다.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전경 속에서 사형수들의 흰 셔츠가 더 두르러지게 보인다.  
여인의 절망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들의 죽음과 마딱드린 노파의 고통이 전해집니다. 
사형을 앞두고 있는 마지막 몇 분의 시간은 처연하기만 하다.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 부분

 

Menshikov in Berezovo. 베레조보의 멘쉬코프. 1883.  oil on canvas. 204 x 169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멘쉬코프(1673-1729)는 군인이자 행정가로 미천한 신분에서 당대 최고의 실력자로 올랐던 인물. 
표트르 1세 사후 그의 왕비 카테리나를 통치자로 세우고 승승장구했고, 
그 후에는 어린 표트르 2세를 왕위에 앉히고 섭정을 꾀했으나 귀족들의 반격으로 실각.  
부와 권력을 모두 잃고 베레조보에서 사망했다.  이 그림은 몰락한 멘쉬코프와 가족을 그린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가장 충실한 심복이며 권력 2인자였던 멘시코프는 
대제 사후에 실각하게 되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다. 
그림은 시베리아로 유배된 권력자, 권세가 다한 권력자의 고독을 그린 것이다. 
커다란 주먹을 불끈 쥐고 미래를 다짐하는 멘시코프지만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린 감이 있다. 
모든 것이 다 허무한 것임을 색바랜 갈색 톤의 색채가 대변해 준다. 
다만 아버지의 신세와 함께 시베리아에서 혹독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딸들의 청춘만이 안타까울 뿐이다. 
풍요롭던 귀족의 삶에서 하루 아침에 조락한 그녀들의 삶에 병마저 찾아 온 것인지 
검은 옷을 입은 셋째 딸은 병색이 완연하다. 참으로 부질없는 과거의 부귀와 영화다.

수리코프의 역사화로 두 번째 작품이다.
수리코프의 첫 역사화 대작인 <총기병 처형의 아침>이 표트르 대제 시대를 강타했던 
‘신구(新舊) 러시아의 충돌’이 빚은 비극을 다루었다면, 두 번째 작품인 <베료조프의 멘쉬코프>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 선봉에 섰던 한 권력자의 몰락을 통해 본 ‘전제권력의 은총과 징벌의 변덕스러운 충돌’을 보여주었으며, 
세 번째 작품인 «귀족부인 모로조바»는 17세기 러시아 종교분열이라는 ‘신구교(新舊敎) 충돌’을 다루었다. 

수리코프의 초기 작품들이 포착하고 있는 일련의 충돌 지점들은 
수리코프의 역사적 사유 안에서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초기 삼부작이 서로 상이한 시공간 – ‘17세기 후반 모스크바 붉은 광장’, ‘18세기 초반 시베리아의 베료조프 마을’, 
‘17세기 후반 모스크바의 파프누티예프-보롭스키 수도원 가는 길’ – 을 각각 보여주고 있지만,

수리코프의 역사적 사유의 전개는 첫 작품인 <친위대 병사 처형의 날 아침>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쉐코토프(Н. Щекотов)는 <베료조프의 멘쉬코프>를 “수리코프의 표트르 대제에 관한 전반적인 사유의 지맥 중 하나”
라고 보았는데, 필자는 쉐코토프의 이러한 주장을 수리코프 작품 전체로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권정임)

 

Yermak's conquest of Siberia.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1895. oil on Canvas. 5.99 X 2.85m 

이 그림은 화가 수리코프가 네 번째로 그린 역사화 대작이다. 
1881년에 그려진 역사화 대작 <총기병 처형의 아침>에서부터 1906년에 마지막으로 완성된 작품인 
<스테판 라진(Стенан Разин)>에 이르는 그의 작품세계에서 시기적으로 중반에 위치하는 작품이다. 
또한 그가 1880년대에 그린 세 편의 대작들인 <총기병 처형의 아침>, <베료조프의 멘쉬코프>, 

<귀족부인 모로조바>를 통해 역사화가로서 명성의 절정에 이른 뒤, 잠깐 동안의 정신적 위기 이후 

다시 러시아 역사로 돌아와 그린 첫 작품이기도 하다. 


볼로쉰(М. Волошин)의 표현대로라면, “수리코프 작품 세계의 제 1기에 속하는 1880년대 

비극적 삼부작에 이어, 제 2기인 서사적 삼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다.
이 그림은 카자크의 수장인 예르막이 이끄는 군대와 

시비르 한국(汗國)의 퀴춤이 이끄는 군대의 대격전을 담고 있다. 


수리코프는 1579년 우랄 산맥을 넘어 시비르 한국의 영역을 침범한 예르막 원정군이 치룬 전투들 중 

가장 결정적인 전투인 1582년 10월, 시비르 한국의 수도 카슈르이크를 함락하게 되는 전투를 

거대한 화폭에 옮겨놓았다. 
대략 세로 3미터, 가로 6미터에 달하는 화폭의 대각선을 따라 

두 진영의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시베리아의 이르트이쉬 강의 지류인 토볼 강이다. 
토볼 강 하구 얕은 물길을 가르며 퀴춤 칸(汗)의 군대는 강둑에서 내려와 자신의 땅을 결사적으로 

방어하고 있으며, 그림 왼편 예르막의 군대는 ‘손으로 그려지지 않은 구세주(Спас Нерукотворный)’ 

이콘과  ‘승리자 게오르기(Георгий Победоносец)’ 깃발을 앞세우며 새로운 땅 시베리아를 공격하고 있다. 

수리코프의 역사화 대작들을 창작 순서가 아닌 연대기적 순서대로 배열한다면, 
그 처음에 위치하는 것이 바로 <예르막의 시베리아 정복>이다. 
예르막이 이끄는 카자크 병사들은 뛰어난 병기인 화승총으로 퀴춤 칸의 군대를 압도할 수 있었다. 
압도적인 숫자를 지닌 시비르 한국의 병사들이 겨우 840명에 불과한 예르막의 군대에 패한 것을 두고, 
카람진은 “시베리아 정복은 많은 면에서 멕시코와 페루 정복과 닮았다. 
총을 쏘는 한 줌의 사람들이 활과 창으로 무장한 수천 명을 이긴 것이 그러한데, 
이는 북방 몽골족과 타타르인들이 화약 발명품을 사용할 줄 몰랐으며, 
16세기 말에는 칭기즈칸 시대의 무기로만 유일하게 싸웠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러시아는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통해 근대로 들어섰다고 평가받지만, 
이미 무기류 부분에서는 16세기 후반 이반 뇌제 시기에 개인화기(個人火器)인 화승총이 일반화되어 
중세적 무기를 지닌 타타르족을 차례로 타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River Ob. 1895.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standard with the Mandylion kept in the Armoury of the Moscow Kremlin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1895. oil on canvas. sketch and study.  Private Collection

 

Shooting cossack. 1895. sketvh and study. 습작.

 

Tsarevna's visit of nunnery. 황녀의 수녀원 방문. 1912.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제목은 황녀의 수녀원 방문이지만 유배되어 온 황녀이다. 
뒷쪽에서 수근거리면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보인다. 
황녀는 유배되어서 그런지 멍하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다.

19세기까지는 이처럼 사실적인 그림이 많았지만  20세기초가 되면서부터 급격하게 러시아 미술은 바뀌게 된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진기술이 발달하면서 더이상 사물과 그대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겠다. 
그래서 아방가드로라고 하는 추상화가 대표적인 화풍으로 자리잡게 된다.

 

수녀원을 방문하는 공주. 습작. Study. 1900s

 

The Tsarina.  1911. oil on canvas. 56 X 39 cm.
National Art Museum of the Republic of Belarus  (Belarus - Minsk)

 

Tsarevna. 1911.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The Taking of a Snow Fortress. 눈싸움. 1891. Oil on canvas. 855×474.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n Federation
1888년 부인의 사망 후 두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지낼 때 그린 가벼운 주제의 그림이다.

 

View of monument to Peter I on the Senate Square in St. Petersburg. 1870. oil on canvas.
표트르 대제 기마상 뒤에 성 이삭 성당이 보인다. 기마상과 성 이삭 성당은 상트페테스브르그의 상징이다.

이삭성당의 북쪽 뒤로 1825년 12월 청년 장교를 주축으로 전제정치에 대한 러시아 최초의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난 것을 기념하여 제까브리스트 광장이라 불리웠던 원로원 광장 끝 네바강변 쪽에는 
러시아의 대문호인 알렉산드르 푸쉬킨의 시 청동기마상에도 등장하는 같은 이름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이는 구테타로 남편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예카째리나 2세가 이 도시의 건립자이자 
러시아 역사에 길이 남을 황제인 표트르대제의 후계자임을 공식적으로 알리기 위해 
1766년 프랑스 조각가 팔코네를 시켜 12년간에 걸쳐 만든 것이다. 


표트르 대제가 탄 말이 앞쪽 다리를 번쩍 들어올리고 있는 형상의 조각상을 받치고 있는 돌은 
상트페테스브르그에서 12베르스타(1베르스타는 약 1076km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것으로

그 무게가 1600톤에 달하고 길이가 13.5m, 폭 7m, 높이가 8m에 이르는 아주 거대한 뇌석이다. 
400명이 넘는 장정들이 핀란드만에서 이곳 네바강둑으로 이돌을 옮겨오는데만도 

4개월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니 얼마나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마르스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과 함께 결혼을 마친 젊은 신혼부부들이 방문하여 
꽃다발을 바치고 기념사진을 찍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Zubovsky boulevard in winter. 1886. oil on canvas.  30 x 42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겨울철 주보프스키 가로. 

 

Vasilii Ivanovich Surikov 1875  

 

Ilya Yefimovich Repin  Portrait of the painter Vasily Ivanovich Surikov  1885 

바실리 수리코프가 그린 러시아 국민 화가 일리야 레핀 초상화.

 

Anfisa.  Date unknown .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A Black Bearded Strelets' Wife (study). Date unknown . oil on canvas. 19.5 X 18.8 cm.
Tretyakov Gallery - Moscow  (Russian Federation - Moscow)

 

Candlestick (study).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Female Portrait.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a Boyarynya.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tudy for the Portrait of Sleeping Stenka Razin.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Berlin. Enbankment. Date unknown. watercolor on paper.

 

Cossacks in boat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Don Cossack Rjidin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Hand of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oil on canvas.

 

Head of girl.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watercolor on  paper.

 

Krasnoyarsk vicinities. Date unknown.

 

Landscape with brother's figure. Date unknown.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Man's body. Date unknown.

 

Menshikov in Berezovo.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On boat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Date unknown. oil on canvas.

 

Portrait of E. A. Surikova. Date unknown.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R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습작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Date unknown.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sketch and study.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습작. oil on canvas.

 

Study to "The Conquest of Siberia by Yermak". Date unknown.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sketch and study.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습작. oil on canvas.

 

"Tsarevna's visit of nunnery".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황녀의 수녀원 방문 습작. pencil on paper. 

 

The head of nun. Date unknown. oil on canvas.​sketch and study.
Kaluga Regional Art Museum  (Russian Federation - Kaluga)

 

Venice. Date unknown. Watercolor on paper.

 

Whacky, seated on the ground (Study to "Boyarynya Morozova").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대귀족부인 모로조바 습작. Pencil on paper. 

 

Yenisey. Date unknown

 

Yermak's conquest of Siberia (study). Date unknown. sketch and study.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습작.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Yermak's conquest of Siberia (study). Date unknown. watercolor ON  paper. sketch and study. 
예르막의 시베리아 점령. Series: Yermak's conquest of Siberia

 

바실리 수리코프 (Vasili Ivanovich Surikov) 작품 전시실. Tretyakov Gallery Room 28.

 

 

 

The Appearance of Christ to Mary Magdalene​. 1835. oil on canvas.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부활 후 막달아 마리아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이 작품은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제작하기 전에 그린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미술을 열심히 연구하던 시절,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화가의 짙은 애정이 잘 나타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예수는 비애미를 지닌 인간이라기보다 로맨틱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인간에 더 가깝다.
 
막달라 마리아 주제는 중세 때부터 애호되었지만, 서양미술사에서 집중 조명된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날 무렵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영항으로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전통 전반이 크게 위협 받자 고해성사를 비롯한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고해자의 전형으로 막달라 마리아를 형상화한 그림이 많이 제작된 것이다.
 
이때 마리아 이미지는 머리를 길게 풀어헤치고 깊은 수심에 잠긴 모습이 대부분이다. 
풀어헤친 머리에서 보듯 이바노프의 막달라 마리아도 그런 가톨릭 전통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좀더 깔끔하고 산뜻한 용모 때문에 세속적인 미인의 인상을 더 짙게 던진다. 
그 옆의 예수 그리스도도 군더더기 없는 '몸짱'에 상당히 수려한 인상이다.
 
얼핏 보면 이런 세속적인 아름다움이 두 사람을 마치 한 쌍의 연인처럼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은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한 사람은 짐짓 이를 뿌리치는 듯한. 
주제로 보자면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예수가 그녀를 진정시키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붙들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주제가 지닌 이와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바노프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향기를 발산한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의 클라이맥스 같은 장면, 선남선녀의 지극히 감상적인 몸짓...
마리아의 풀어헤친 머리는 전통적인 참회와 자기부정의 표시라기 보다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머리를 단정히 가다듬고 있어도 
남편 앞에서는 머리를 풀어헤치는 여염집 여인의 사적인 친밀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미묘한 뉘앙스가 이 그림을 향한 시선의 집중도를 높이고 주제를 살뜰한 감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해후 뿐 아니라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해후에 대한 연상을 불러온다. 
사실 그리스도가 신랑이요 교회가 신부라는 성경의 비유도 이런 종류의 낭만주의적 감상에 적잖이 기대고 있다.
 
춘향에게 이몽룡이 그런 것처럼, 구세주는 단순히 불의를 벌하는 어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스런 내 낭군이기도 한 것이다. 
이바노프의 붓질은 그 인간적인 기대를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인상적인 이미지 안에 섬세하게 녹여 놓았다.
 
종교적인 주제가 지닌 신성함과 세속적인 이미지가 주는 감상주의 미학이 아름답게 결합된 작품이라고나 할까. 
왠지 "아름다음이 세상을 구원하리라."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언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Mary Magdalene​. 부분

 

 

Italian scene. 1838.

 

 

Pontian swamps. 1838.

 

 

A Bridegroom Buying a Ring for His Fiancee. 1839. watercolor on  paper.

 

 

Ave Maria. 1839. watercolor on  paper.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Preaching of Christ on the Mount of Olives about the second coming. 1840.

 

 

Festival in Rome in October. Scene in the Loggia (Asking to Dance). 1842.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onticelli, near Tivoli. 1843. Russian Federation

 

 

Seven Boys in Colourful Clothes. 1845. oil on paper.

 

 

Entombment of Christ, 예수의 매장. 1855,   watercolor on paper

 

 

Jesus and Nicodemus, 1855

 

 

Joseph's dream, 1855. sketch and study.

 

 

Naked boy, 1855,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Walking on Water (Christ saves Peter began to sink), 1855.

 

 

Adorarion of Golden Calf, sketch and study

 

 

Adoration of the shepherds,

 

 

Angel rolled the stone from the tomb

 

 

Bathsheba

 

 

 Christ's sermon in the temple, sketch and study

 

 

Dream of Jacob, sketch and study

 

 

Exit from the Last Supper. sketch and study

 

 

Flagellation of Christ. sketch and study

 

 

Landscape in Albano,  Radishchev Saratov State Museum of Art, Saratov, Russia

 

 

Moses doubted God's promise to satisfy people with meat

 

 

People gather manna

 

 

Pharaoh asked Moses to bring jewish people out of Egypt

 

 

Preaching of of the Apostle Paul in the Roman prison

 

 

Prophet Elijah in the desert.

 

 

Samuel anoints David to the kingdom

 

 

Sarah breast-feeding Isaac

 

 

Sermon of Saint John the Baptist

 

 

The Calling of Abraham, sketch and study

 

 

The Calling of David. sketch and study

 

 

The foot of Vikovary on the road from Tivoli in Subiaco

 

 

The Mocking of Christ. From the biblical sketches.sketch and study

 

 

The multiplication of breads, sketch and study

 

 

The Prophet Elijah and the widow sareptana. sketch and study.

 

 

Three nude boys,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Three pilgrim announce Abraham the birth of Isaac. sketch and study.

 

 

Transformation. sketch and study

 

 

Untitled. From the biblical sketches. sketch and study

 

 

View of Naples from the road in Pozilippe

 

[영상] 알렉산더 이바노프(Aleksander Ivanov)

그림 출처 : http://www.abcgallery.com

 

알렉산더 이바노프(Aleksander Andreyevich Ivanov)의 초상화.

Sergey Petrovich Postnikov 작품 (1838-1880)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미술아카데미 교수였던 아버지 안드레이 이바노프에게 

알렉산더 이바노프(Alexander Ivanov)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웠다.

 

1830년 이탈리아에 유학한 뒤 생애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종교화 특히 성서를 주제로 하여 예수의 인간성을 표현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있은 후 알렉산더 이바노프는 사회의 모순에

더욱 회의를 느꼈고, 제정 하의 권력자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으려 했기에

그가 평생에 가진 삶의 무게는 힘겹기만 하였다.

 

그의 그림 중 20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 바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림의 주제는 성경 요한복음 1장을 나타내고 있다. 

이바노프가 이탈리아에서 20년 동안(1837-1857) 정성을 들여 그린 작품이다. 

그 당시 이바노프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인류가 고뇌와 부정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예수의 모습과 허망함과 슬픔 또 종교적 감정이 이바노프를 강하게 흔들었다. 

그리하여 '구원'이라는 모든 사람들의 꿈을 큰 그림으로 나타내고자 그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의 대표작이 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회화사에서 수도 없이 거론되는 최고의 갈작 가운데 하나일 뿐 아니라, 

19세기 러시아 회화 특유의 '인자로서의 예수상'의 선구적인 모범이 되는 작품이다. 

이 대작 앞에 서면 누구든 예수와 역사의 현장에서 만나는 듯한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된다.

 

1858년 이바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얻지 못한다. 

6주 후 결국 52세의 나이로 이바노프는 죽음을 맞이한다. 

당시 장례식에 많은 예술인과 문화인이 참석했는데,

그 중 앞서서 포스팅 했던 이동파 화가 크람스코이도 있었다 한다. 

이바노프의 대작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모스크바에서 일반 경매로 붙여진다. 

그 당시 트레티야코프는 러시아 미술의 훌륭한 작품을 모아서

미술관을 설립하려는 꿈이 있었다. 

그리하여 트레티야코프가 이바노프의 대작을 구입한다.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1857, oil on canvas.

540 x 75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넓은 요르단 강변, 세례 요한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구세주가 있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아직 보이지 않으나, 멀리서 다가오는 쪽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요한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있다. 
터번을 두른 남자는 증오에 가득 찬 눈매로 요한의 말을 듣고 있다. 
이 남자는 바로 요한의 비난을 증오하여 그의 투옥과 처형을 요구했던 바리새인이다. 

이 작품에서 이바노프는 학대받는 민중의 꿈, 그리고 땅의 자유와 정의를 구하는 마음, 
수세기에 걸쳐 길러진 민중의 가부장적인 환상, 여러 가지 소박한 소망과 신앙을 이야기한다. 
미래의 자유를 믿으나 현재의 억압과 악의 세계를 타도하지 못하고
전설의 구세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민중의 비극이 그려져 있다.

1825년 12월 러시아에는 최초의 근대적 혁명 운동인 데카브리스트 난이 일어난다. 
그 일로 주동자 다섯 명이 처형당하고 1,000여 명이 넘는 

젊은 지식인들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많은 지식인들을 분노하게 하고 혁명과 개혁의 불씨를 심는 계기가 되었다. 
작가 이바노프는 또한 그런 염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에 빗대어 표현한다. 
그림의 장면은 요르단 강변이며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세례 요한의 
손 끝에 서 있는 푸른 색 가운은 예수 그리스도다. 
현실을 반영하듯 예수의 도래를 기뻐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분되어 표현되어 있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1857, oil on canvas , 540 x 750 cm,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러시아 화가 이바노프의 대표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리키며 성령으로 세례해 주실 분임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가난한 이들과 녹색 얼굴의 노예는 반색하며 돌아보고 있고
오른쪽의 흰 터번을 두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탐탁하지 않은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다가오고 계시는 예수님을 감싼 주위의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수많은 습작을 남기며 20년 만에 완성된 그림이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흔히 한 사회의 역사와 개인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탄생되곤 한다. 
이탈리아 유학은 이바노프 본인의 희망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던 것은 세상 탓이었다. 
그로 인한 화가의 기나긴 고뇌가 대작 <민중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탈리아가 어떤 곳인가.
축복 받은 자연 속에서 시끌벅적하면서도 다감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 
이바노프는 춥고 야박한 조국 같은 건 잊고 

그냥 그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행복할 수 없었을까. 
화가 이바노프는 그럴 수가 없었나 보다.

그는 격동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러시아 사람들을 

마음에서 털어내 버리지 못하였다. 
근심은 날로 깊어 갔다.
혁명에 몸을 던진 당시 유럽과 러시아의 인텔리겐차들과는 달리, 

이바노프는 머지않아 사람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스무 해에 걸쳐 그처럼 구세주의 출현에 집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긴 세월에 걸친 이바노프의 고뇌를 알기 전에는 
그림 속 멀리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그리스도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림에서처럼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희망으로 이바노프가 정성을 다해 화폭에 담은 구세주의 고고한 모습이 어쩐지
시큰둥해 보이면서, 오히려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의 각양각색 표정에 더 눈이 간다.

신심이 얕은 자에게 이바노프의 그리스도는 무표정하고,
정말 우리의 짐을 다 내려주실까 싶을 정도로 담담한 모습이다. 
세상사에 짓눌리며 그를 고대하는 우리에게 그건 좀 서운하다. 
그런 점에서 더 울림이 있는 것은 이지적 화가 니콜라이 게 (1831~94)의 그리스도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가 재림하더라도 이미 2천 년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 덩어리가 되어버린 이 세상을 구하실 수 있을까. 
정말 이 뜨거워진 지구를 식히고, 저 독한 신자유주의 바이러스를 박멸하실 수가 있을까. 

<민중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 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습작의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심지어 전시실에 비치된 한 장짜리 해설문만 해도 

영어판에는 800개, 노어판에는 300개로 나와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세례 요한이다. 
듣던 대로 낙타털옷을 입은 그는,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답게
가장 먼저 그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친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이 유명한 장면은 신약성서의 4복음서 모두에 언급되어 있으나, 화면과 가장 어울리는 

상황으로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이다. (요한 1:29~34) 
그것은 아마도 복음서를 기술한 자들 가운데 현장에서
이를 직접 목격한 사람은 사도 요한뿐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에서 빨간 머리의 수려한 청년 사도 요한은
연두색 옷을 걸치고 세례 요한의 등 뒤에 바싹 붙어 있다. 
그리고 그 왼쪽으로는 사도 베드로와 안드레이 형제, 그리고 나다나엘이 차례로 서 있다.

화가가 이들의 모습을 그린 에튀드(습작)는 여러 편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세례 요한과 나다나엘에 대한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이바노프의 에튀드에는
주로 하나의 캔버스에 둘 또는 그 이상의 얼굴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그가 열심히 거리를 돌아다니며 찾아낸 사람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이 화폭에 담을 모습으로 변환한 것이다. 
가끔은 라파엘로의 그림이나 고대 로마의 입상 등
이탈리아에서 만난 고전 작품들에서 인물의 원형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를 위한 에튀드에는 여자 또는 소년의 모습이 요한의 얼굴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는 어쩌면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일갈하는 터프가이 요한의 내면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말일까. 
언뜻 짐작이 되지 않는 그에 대한 설명은 숙제로 남겨 두자. 

그림은 전경의 무리와 원경의 그리스도로 크게 대별된다. 
전경의 무리 가운데 중앙에서 약간 왼편으로 있는 

십자가 지팡이를 든 인물이 세례 요한이다. 
요한을 중심으로 군중 속에는 세례 받는 이,  바리새인,
노예, 로마 병정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보인다. 
이 사람들을 향해 멀리 언덕에서 한 사내가 조용히 걸어온다.

눈앞의 그는 하나의 육신에 불과하지만 민중에게 해방과 구원을 약속하는 권능자다. 
성경은 이 장면에서 요한이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리며 요한의 그 외침이
당대 러시아 민중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바노프와 그의 아버지는 데카브리스트 그룹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혁명을 꾀한 데카브리스트들은 1825년 12월 반란으로 
다섯 명이 교수형을 당하고 100여 명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비극적인 말로에 이바노프는 가슴 아파했다. 
더 이상 믿을 것이 없는 세상, 억압과 타락과 부패로 가득한 세상,
인자가 오셔야 할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런 세상이다. 
그 모순의 땅으로 이바노프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한 것이다.

성경에서 세례 오한은 유대의 분봉왕 헤롯의 잘못에 대해 담대하게 비판했다. 
그는 진리의 전파자요, 양심의 목소리였다. 
그림 속 요한은 성경의 묘사 못지않게 올곧고 강직한 위인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헤롯왕은 두려워 했다.

요한 자신이 선과 양심인 이상, 욕망의 화신인 압제자는 그와 원수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바노프의 그림에서 그 갈등은 화면 오른쪽,
터번을 두른 두 남자의 못마땅해 하는 표정으로 나타난다. 
부조리와 모순이 가져다주는 이득에 눈이 먼 기득권자들이다. 
그 대립을 통해 이바노프는 당시 러시아에 내재한 모순과 갈등을 들춘다.
이렇듯 성경 속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으로 이해의 지평을 넓혔기에 
이 그림은 예술과 역사의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기념비적인 걸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림 중앙의 오른쪽에 그려진 푸른 옷의 노예가 요한이 전하는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를 듣고 감격해 하는 모습은 곧 
러시아 민중의 기대와 소망을 절절히 반영하는 이미지라 하겠다.

쪼그려 앉은 그는 이제 막 일어날 태세고,
눈물과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은 마침내 밝게 펴지려 한다. 
세례를 받으려고 옷을 벗은 채 감격과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짓는 

오른쪽의 인물도 예수가 가져다주는 희망의 밝기를 생생히 증거하고 있다. 
압제 하의 러시아는 이처럼 진정한 구세주를 

세상 그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주제에 담긴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 측면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지만, 미술사적인 측면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이바노프는 이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무려 600점이 넘는 드로잉과 유화 스케치를 제작했다.

모델들을 동원해 등장 인물의 포즈와 표정에 대해 다각도로 연구하는 한편, 
라파엘로의 <그리스도의 변용>과 고대 조각인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자살하는 갈리아인과 그의 아내> 등 고전 걸작들을 탐구해 

구도와 연출을 위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또 배경 표현을 위해 이탈리아의 풍경을 

꼼꼼히 관찰하고 묘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까지 러시아 미술사에서 시간과 에너지 투자 면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엄청난 역작이요 대작인 것이다.

이 모든 결과물 가운데 일부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는데, <벌거벗은 아이> 등 소년 누드 시리즈와 

<가지> 등 풍경화 시리즈가 그 대표적인 스케치들이다.

이들 그림에서 우리는 햇빛과 미묘한 대기의 흐름 등, 아직 프랑스 인상파가 대두되기 

전인데도 야외 공간에 대한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관찰과 표현을 볼 수 있다. 
이바노프가 감각적으로도 시대를 앞서가는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

 

이바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이 민중 앞에서 위선자와 위학자를 비판하는 장면은 훌륭한 주제이다. 

천한 인간들은 당황하여 허둥거리고, 민중은 요한의 확신에 경탄하고, 사회 전체가 그 정신에 고무된다. 

나는 이 작품에서 세속의 위정자들의 민중 억압과 타락, 그리고 왕위를 지키기 위해 

로마인에게 아첨하는 유대 왕들의 천한 행동거지,

갖가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비애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한다. 

로마인에 대한 두려움, 사람의 슬픔, 자유와 독립에의 동경을 그려보려고 한다."

이바노프의 자필 - 러시아 미술사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

 

현재 보고 있는 사진들은 러시아 박물관에 있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모본과 습작들이다.

이바노프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습작 작품만 해도 600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한 작품을 20년 동안 그린 러시아의 화가 이바노프. 그의 미술 재료는 자기 자신의 고뇌였다. 

어떻게 이러한 열정으로 2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그린 걸까?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들

 

알렉산더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뒤편, 불신자들의 군상 - (detail)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뒤편 우측 - (detail)

 

화면 오른쪽 위는 반대자들의 영역이다. 

값비싼 옷에 신수가 좋은 바리새인들이나 말을 타고 지나가던 로마 병정들은 모두 그리 탐탁찮은 표정이다.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요한의 말에 그들은 시큰둥해 하거나 찡그리거나 노여워하고 있다. 

그 사람들도 고민이 없으랴만, 그럭저럭 살만하면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싫은 법이다. 

찌질한 것들이 모여 자신들을 욕하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설친다니 구경삼아 요르단 강가로 나와 보았는데, 

예언자들이 말한 그리스도가 나타났다니 갈수록 태산인 것이다. 

 

1850년대 말이 되자 러시아의 정세는 상당히 유화적 국면으로 바뀌게 된다. 

'유럽의 헌병'이란 별명으로 불리며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자유주의 운동에 간섭하고 

군대를 보내어 진압했던 폭압적 통치자 니콜라이 1세 (재위 1825~55). 

그의 권좌를 물려받은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81)는 부왕과 달리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심약한 사람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읽은 그는 검열을 완화하고 시베리아에 유배 중이던 데카브리스트들을 사면하였으며, 

러시아의 고질적 숙제이던 농노 해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차르를 비롯한 주류 지배층에 미운 털이 박혀 삽십 년 가까이

이탈리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던 이바노프는 마침내 귀국을 결심한다. 

그는 그간 떠나 있던 조국의 현실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민주화의 기운 속에서 러시아 화단에 

자신이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1858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이바노프는 스무해 동안 매달린 필생의 대작을 소중하게 보듬고 돌아왔지만,

러시아는 그의 그림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그를 환대하였지만, 기대했던 차르는 그의 그림을 선뜻 구입하려 하지 않았으며 

악의적인 비평도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이바노프는 결국 귀국한 지 두 달이 채 못 되어 화병으로 급서한다.

 

그의 걸작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그 후 행방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이 있다. 

미술사가 A.I. 조토프에 의하면, 이를 구입하려는 사람이 없어 그림 경매가 아닌 일반 경매에 붙여졌고, 

그것을 당시 아직 청년이던 사업가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차코프가 사들여 소장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트레차코프 갤러리에서 직접 발간한 가이드북에 의하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림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구입되었고, 설립된 지 얼마 안 되는 

Moscow Public and Rumyantsev Museum에서 1862년부터 전시되었다.

 

그리고 1925년 그 박물관이 문을 닫자 이바노프의 작품 모두가 트레차코프 갤러리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양쪽 다 나름대로 권위를 가진 기술들이므로 어느 쪽이 맞는지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지만, 

미술사를 전공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리 집착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세례 요한과 사도들. (detail)

세례 요한의 뒤로는 사도 요한, 베드로와 안드레이 형제, 그리고 회의주의자 나다나엘이다. 

나다나엘의 우울한 표정에 시선이 간다.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detail)

이 에튀드에서는 맨 왼쪽 노인의 옷과 그림자의 색깔이 붉은 색으로 일치한다. 

그렇다면 완성작에서의 불일치는 실수가 아닐까?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detail)

 

The Appearance of Christ to the People <노예> 습작

 

Kopf eines Sklaven in zwei Varianten, 눈물이 그렁그렁한 노예의 에튀드. 

1837-1857. Th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그리스도의 출현을 가장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은 화면의 중앙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벗은 몸으로 등을 보이고 있는 몸짱 사나이의 왼팔에 얼굴이 반쯤 가려 있는 노인이 그 중 하나이다. 

쇠약한 몸을 아들에게 의지해 요르단 강가에 나왔던 노인은 기력을 놓고 있다가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소식에 황급히 일어서려 한다.

 

가장 큰 기쁨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은 노예의 푸른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 

짐승처럼 목덜미가 줄에 묶여 있는 그는 아마도 주인님의 옷을 챙기려던 참인가 보다.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에 손을 멈추고 돌아보는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세상에서 잃을 것이라고는 목줄 밖에 없을 노예가 구세주의 출현에 감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바노프는 잃을 것이라고는 역시 쇠사슬밖에 없는 조국 러시아의 민중들을

노예의 모습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미술사가 A.I. 조토프에 의하면, 러시아 회화에서 학대받는 이의 모습을

이처럼 감동적이고 박진감 있게 묘사한 것은 이 그림이 처음이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노인과 소년. 습작

 

세례를 받다가 요르단 강에서 황급히 걸어나오는 노인과 소년.

노인의 흰옷은 강물에 붉은 색으로 비춰져 있다. 

왜 일까? 에튀드들 가운데에는 노인의 옷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하단에서 두번째 그림 참조) 

하도 많은 습작들을 그리다보니 화가가 잠시 착각한, '옥의 티'는 아닐까? 

 

이바노프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탈리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습작을 남겼다. 

이탈리아와 또 그밖의 화가들이 수백 년에 걸쳐 그려 왔던 이탈리아의 풍경을 매우 놀라운 신선함으로 그렸다. 

<아리치 공원에서>, <기지 공원의 수목>, <나뭇가지>, <거리의 지붕>, <물속의 돌> 많은 자연의 습작이 있다. 

이바노프는 풍경화가로서 강변의 생활, 따스한 태양, 돌과 풀, 등 자연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우측 벌거숭이 사내의 에튀드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일어서려는 노인의 에튀드

 

가끔은 이처럼 고대 로마의 조각상을 인물의 원형으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모습은 완성작에서 노인보다도 아래쪽 노예의 얼굴과 더 닮은 것 같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초점은 아무래도 그리스도보다 그를 영접하는 인간 군상들에게 있다. 

이바노프는 “나는 이 그림에서 타락한 지배자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모습,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로마에 아부하는 천박한 유대 왕들의 행태, 

그리고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을 그려보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화가는 화면에 배치된 인물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수많은 에튀드(습작)들을 거쳤다.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사도 베드로의 습작

 

그리스도의 등장에 대해 군중 속의 사람들은 대개 놀라며 기뻐하거나 불신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본다. 

하지만 사도들 가운데 제일 왼편에 하늘색 옷을 입고 서 있는 나다나엘의 모습은 좀 특이하다. 

그는 유독 이도저도 아닌 우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깔고 있다. 

이바노프는 그의 얼굴로, 친구이자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인 고골리의 모습을 빌려 온다.

 

이바노프가 그린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 Gogol)>의 초상화

 

이바노프가 그린 <고골의 초상>은 상당히 재미있다. 

고골의 심리와 그의 마음에서 전해지는 미소와 눈, 그리고 마음의 괴로움의 그림자가 있다. 

고골의 이상하고 복잡한 심리를 볼 수 있다. 화가 이바노프는 그 당시 러시아 작가 고골과 친분이 있었다. 

이미지를 고안 하던 중 고골을 모델로 한 명의 인물을 창조한다. 

 

 

이바노프,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 Gogol)> 초상화. 1847

 

이바노프, <니콜라이 고골 (Nikolai V. Gogol)> 초상화. 1841

이바노프는 친구인 그의 얼굴을 회의주의자 나다나엘의 원형으로 삼았다. 

 

<민중 앞에 나타난 에수 그리스도>에서 고골의 모습으로 나다나엘을 그린 습작.

 

나다나엘은 흔히 '회의주의자(doubter)'로 불리는 사람이다. 

성서에 의하면 그는 친구 빌립이 율법에 기록된 메시아 나사렛 예수를 만났다고 말하자, 

당시 천한 곳으로 멸시 받던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비로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제자가 된다.

 

그렇다면 이바노프는 왜 나다나엘의 얼굴을 고골리의 모습으로 그렸을까. 

니콜라이 고골리(1809~52)는 추악한 현실 세계에 대한 증오와 삶의 패배자들에 대한 동정으로 

<검찰관(1836)>, <외투(1842)> 등의 걸작을 남긴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이다.

 

관료 사회의 악을 다룬 <검찰관>을 발표한 후 어려움을 겪다가 서유럽으로 건너온 그는 

10여 년 간 로마 등지에 머물렀으며, 이때 이바노프와 교류하였다. 

그러나 고골리는 악을 파헤치는 데만 집착해 온 자신의 작업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종교적 신비주의에 빠져 들었고, 끝내 정신착란으로 사망한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 없다고 의심했던 나다나엘과 인간의 구원을 믿지 못해 

세상의 악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데 몰두하며 고뇌에 빠져 있던 고골리. 

그들은 그림에서 다가오는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기뻐하지 못하고 우울한 얼굴로 혼란에 빠져 있다.

 

요한으로부터 갓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와 대조적으로 파안하며 기뻐하고 있다. 

화면 좌측 끝 요르단 강에서 막 올라오고 있는 벌거숭이 노인과 소년, 

그리고 우측 끝 세례를 마치고 막 옷을 입으려던 아버지와 아들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차오르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행색으로 보아 그들은 유대사회에서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가진 것이 없어 그만큼 삶이 고단한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구원자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세주가 오셨다는 세례 요한의 한 마디에 의심하지 않고 환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현세에서의 기적과 세속적 행복이었다. 

화면 오른쪽 뒤에 자리 잡은 바리새인 식자들과 달리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가 그리스도임을 믿는다.

 

예수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당장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늘 기뻐하던 저 얼굴들은 그를 골고다 언덕에 못 박아 세우고 돌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몽매함에 대해 자신 있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가. 

누가 내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해 주리라는 기대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미혹시키는 힘이 있다. 

 

내 호주머니를 불려주기만 한다면 그가 과연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믿을만한 위인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너져버리는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다를 바 없겠다. 

삶이 고단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 '세례 후'

 

이바노프는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탈리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많은 습작을 남겼다. 

이탈리아와 또 그밖의 화가들이 수백년에 걸쳐 그려 왔던 이탈리아의 풍경을 매우 놀라운 신선함으로 그렸다. 

<아리치 공원에서>, <기지 공원의 수목>, <나뭇가지>, <거리의 지붕>, <물속의 돌> 많은 자연의 습작이 있다. 

이바노프는 풍경화가로서 강변의 생활, 따스한 태양, 돌과 풀, 등 자연을 그리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여기에서는 노인의 옷이 붉은색으로, 물에 비친 그림자도 붉은색으로 되어 있다.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례 요한 습작. 1840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 <세례 요한>

 

Head of John the Baptist, 세레 요한의 습작. 1840s,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Head of John the Baptist​. 1845. 세례 요한 습작.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John the Evangelist. 사도 요한 습작.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Head of a Young Man. 습작. 1845.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Head of a man. Study of the figure of paralytic for the painting

 

Sketch of a Man​. 184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영상] 알렉산더 이바노프 (Aleksander Ivanov)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

 

White horse. Study. 습작. Alexander Ivanov,  1820.  Russian Federation.

 

Annunciation, Alexander Ivanov, 1824.  Russian Federation

 

Archangel Gabriel struck Zechariah mute,  Alexander Ivanov,  1824. Russian Federation

 

Expulsion of merchants from the temple, Alexander Ivanov, 1824. sketch and study . Russian Federation

 

Four nude boys. Alexander Ivanov. 1824. Russian Federation

 

Olive trees by the cemetery in Albano. New Moon.  Alexander Ivanov, 182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Priam asking Achilles for Hector's body, 1824, Russian Federation

 

The Last Supper, Alexander Ivanov, 1824. Russian Federation 

 

Transformation, Alexander Ivanov, 1824. Russian Federation 

 

Olive trees, 182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Joseph interpreting dreams to butler and baker, concluded with him in prison,  oil on canvas,1827, 

Russian Federation.

 

Bellerophon is sent to the campaign against the Chimera, Alexander Ivanov, 1829, Russian Federation

 

Artist's Workshop in Rome, 1830,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Joseph's Brothers Find the Silver Goblet in Benjamin's Sack,1831~1834. oil on canvas . Tretyakov Gallery, Moscow

 

Apollo, Hyacinthus and Cyparis singing and playing. 1834. ​oil on canvas . Tretyakov Gallery, Moscow

 

Via Appia, 1845.oil on  canvas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Via Appia at Sunset , 1845,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Stones on a River Shore, 1846, oil on  canvas .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Bay of Naples Near Castellmare, 1848.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Torre del Greco near Pompea and Naples, 1846,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Chigi Palace on the Park, 1847.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On the Shore of the Bay of Naples 1850.  Oil on canvas. 41.4x60.6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습작 <나폴리 만의 해변에서>

야외에서 나체를 그렸던 그는 그림으로 아름다움을 올바르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미역 감는 소년들>은 러시아 그리고 세계 미술의 걸작에 속한다. 

햇볕을 쬐며, 땅으로 부터 빛이 반사되고, 빛과 공기 속에 균형 잡힌 탄력적인 육체를 생생히 표현해 냈다. 

이바노프의 <미역 감는 소년들>은 19~20세기 유럽 회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Portrait of Vittoria Marini, oil on canvas. 1850.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Tree Branch, 1850.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Tree over Water in the Vicinity of Castel Gandolfo. 1850. oil on paper.

 

Christ in Gethsemane. The Angel, 1850.

 

Italian Landscape, 1850.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Moses before the God, 1850

 

Dream of Joseph, 1855, sketch and study.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A girl from Albano standing in the doorway,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he Virgin, Christ's disciples and the women, following him, watching from afar, to be crucified,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Travell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Sketch of a Man 1840  Oil on cardboard.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n Federation

 

Water and stones under Palaccuolo, oil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이바노프는 인물 뿐 아니라 배경을 위한 에튀드들도 숱하게 남겼다.  

 

Olive trees by the cemetery in Albano. New Moon. 1824,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Olive trees, 1825, oil on canvas.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Festival in Rome in October. Scene in the Loggia (Asking to Dance). 1842. watercolor on  paper.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