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가수, 인권 운동가이며 반전 평화 운동가이다. 1960년대에 포크 음악으로 젊은층에 크게 인기 있었다. 의사인 아버지의 교수직과 연구활동에 따라 뉴욕, 캘리포니아, 그밖에 여러 곳의 다양한 사회에서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사를 자주 다녀야 했고 정식 음악교육은 거의 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기타를 위해 편곡한 기타 반주만으로 노래를 불렀으며 그녀의 소프라노 목소리는 때때로 지나치게 예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포크 송 부흥의 선두주자였던 그녀는 찻집, 음악 페스티벌, 텔레비전 등을 통해 포크송의 인기를 북돋웠고 음반도 내놓았다. 그녀의 음반은 1960~64년 최고의 판매실적을 기록했으며 1970년대까지 인기를 지속했다.
1960년대 저항운동에 활발히 참여했고 유네스코, 시민권 운동기관, 베트남 전쟁 반대시위를 위해 무료 연주회를 활발히 가졌다. 1964년 전비로 사용되는 세금을 낼 수 없다는 이유로 연방 조세를 거부하여 1967년 10~12월에 투옥되기도 했다. 1968년 자서전 〈여명 Daybreak〉이 출판되었다
“내가 원하지않는 것을 남의 부탁을 받아 마지못해 하는 것이 ‘희생’ 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였다” ” 정치적인 활동을 할 때 가장 행복했고 보다 더 건강했다. 음악은 내 인생에서 두번째였다”
이탈리아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안드레아 보첼리는 선천성 녹내장을 앓았다. 부모는 농기구를 팔고 올리브와 포도를 재배했는데, 특별한 음악적 재능은 없었다. 보첼리는 6세 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해 몇 년 뒤에는 플루트와 색소폰도 연주했고 집에 있는 이탈리아 테너 가수들의 음반을 따라 불렀다.
12세 때 축구를 하다가 머리에 부상을 입고 뇌출혈을 일으키면서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시력 장애에 굴하지 않고 피사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피아노 바와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러 학비를 벌었다. 학위를 받은 뒤에는 1년간 변호사 생활을 했으나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테너 프랑코 코렐리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1992년 보첼리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이탈리아의 팝 스타 추케로 포르나차리로부터 저명한 성악가인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위해 만든 곡 〈미제레레 Miserere〉의 데모 음반을 녹음하자는 요청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파바로티는 보첼리의 목소리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벗으로 삼기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보첼리는 녹음 계약에 서명했다. 그의 데뷔 앨범은 유럽에서 플래티넘 음반이 되었다. 1995년에는 〈작별할 시간 Con te partiro〉이 출시되었다. 나중에는 이 노래를 새러 브라이트먼과 함께 영어로 부르기도 했는데, 2곡 모두 대히트를 기록했다.
1999년 보첼리는 고전음악가로는 드물게 오페라와 대중음악 양쪽에서 국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는 그는 1997년 출시 음반 〈로만차 Romanza〉로 듣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음반은 줄잡아 1,500만 장이 팔렸다. 1999년에 나온 〈소뇨 Sogno〉가 출시된 지 2개월이 안 되어 약 300만 장이 팔리면서 보첼리는 대중음악 차트 1위에 오른 앨범을 가진 첫 고전음악가가 되었다.
시각장애인이었지만, 보첼리는 주로 콘서트에서 공연했다. 1999년 그는 그래미상 최우수신인상 후보에 올랐고,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팝 스타 셀린 디온과 함께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기도 The Prayer〉를 불러 기립 박수를 받았다. 1999년에는 '보첼리 열풍'이 이탈리아로부터 유럽 전역을 거쳐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이르렀다. 보첼리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오페라라고 하면서도, 녹음을 할 때 아리아에 대중음악을 섞는다. 이를 가리켜 매스컴에서는 '팝페라'(popera)라고 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오페라계에서 진지하게 다루기에는 너무 경량급이라고 보첼리를 폄하한다. 그러나 그는 1999년 7월에 오페라 〈즐거운 과부 The Merry Widow〉에서 아리아 3곡을 불렀고, 11월에는 미시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된 줄 마스네의 〈베르테르 Werther〉에서 주역을 맡아 미국 오페라 관객 앞에 선을 보였다.
1999년이 저물 때 보첼리는 뉴욕시티의 새해 전야제로 열리는 밀레니엄 콘서트 '세기의 파티'에서 공연했다. 이후에도 주빈 메타, 로린 마젤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오페라 〈라보엠 La Boheme〉, 〈토스카 Tosca〉 음반을 녹음하기도 하고, 푸치니 페스티벌에서 정명훈 지휘로 오페라 〈나비부인 Madame Butterfly〉에서 핑커톤 역을 맡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정통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1950년 5월 13일 미시건주 작은 도시 사기노우에서 출생 어릴 때부터 하모니카, 올겐, 피아노 등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던 그는 3살 때 디트로이트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하였다.
그가 10살이 되던 1960년 그룹 Miracles의 멤버였던 Ronnie White로부터 재질을 인정받아 탐라 레코드의 오디션에 합격하여
그해 봄 6월 시험판 싱글 Mother, Thank You를 내놓았으나 별반응을 얻지 못하고 4년 동안 침체에 빠졌다.
그러다가 1962년 모타운과 정식으로 계약을 맺고 I Call It Pretty Music이란 싱글을 최초로 발표하였다. 1963년에는
Water Boy, Contract on Love, Fingertips 등의 싱글을 발표하였는데, <Fingertips>는 팝 챠트와 소울 챠트에서 No.1에 올라
스티비 원더는 많은 사람들을 경탄케했고, “천재아 Little Stevie Wonder"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스티비는 첫 앨범 '12 Years Old Genius'를 발표하여 천재성을 보여주었고, 여기에서 싱글 커트한 Workout Stevie, Workout이 인기를 얻었다.
이름 앞에 붙어 다니던 리틀 스티비 원더의 “리틀”자를 떼어버리고 싱글 High Hell Sneakers와 Up Tight로 인기를 얻으면서 세번째 앨범 「Up Tight」는 100만장 이상의 매상고를 올렸다.
앨범 'My Cherie Amour'와 'Yester Me, Yester You, Yesterday'는 각각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스티비 원더를 천재 아티스트로서의 위치를 재확인시켜 주었다.
1970년대 스티비 원더가 남긴 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그가 건설해놓은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성채로 접근하는 것과 다름없다.
1972년 『Music Of My Mind』를 공개하며 야심차게 첫발을 뗀 그는 같은 해 걸작 『Talking Book』을 발표하며 지정(地釘)작업을 시작했다.
그 후 『Innervisions』와 『Fulfillingness’ First Finale』를 통해 1974년과 75년 연속으로
그래미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부문을 획득함으로써 기본 뼈대를 구축했다.
이때부터 거칠 것 없는 성공시대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1976년 그의 연대기 중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되는 본 앨범이 공개된 것이다.
평단에서는 더블 앨범으로 발표된 본 작품을 스티비 원더만의 영예가 아닌 대중음악사에 영구히 기록될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포착한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 앨범의 위대성과 파급력에 대한 언급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만큼 명반이라는 말이다.
곡 하나하나에 흘러넘치는 마력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실례다.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에게 헌정하는 「Sir Duke」,
재즈와 팝의 기묘한 공존 사례 「I Wish」와 같이 앨범의 투톱 싱글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싱글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인기를 누린 「Isn’t She Lovely」와 후일 메리 제이 블라이지(Mary J. Blige)와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에 의해 가치가 재발견된 「As」, 그리고 힙합 뮤지션 쿨리오(Coolio)에 의해 리메이크된
「Pastime Paradise」 등 돋을새김 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다.
생각할 틈도 없이 음과 악의 황홀경을 향해 투사되는 그의 곡들 안에서 우리는 록, 발라드, 재즈, 소울, 펑크 등
인류가 만들어낸 음악 유산의 집대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1977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 주인공은 다시 한 번 그의 몫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세 개 앨범 연속 ‘올해의 앨범’ 트로피 수상자로 지명된 것이다. 시상식 당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음악 연구차 머물고 있던 스티비 원더는 화상 통화로 수상 소식을 접하며 예의 그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래미에서 처음으로 수상자와의 전화 연결을 위해 인공위성을 띄웠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 음반을 1년만 일찍 발표했더라면 3년 연속 제패’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추가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를 의식한 폴 사이먼(Paul Simon)이 1976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며 “이번 해에는 스티비 원더가 음반을 내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소감을 밝힌 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작품성과 대중성의 가장 이상적인 병존, 완벽한 짜임새와 구성력, 장르를 초월해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신기에 가까운 가창력과 연주력.
명작의 조건 중 단 하나도 누락될 것이 없는 퍼펙트 레코드다.
이 음반을 끝으로 스티비 원더의 길었던 전성시대는 1막을 고하지만, 앨범은 지금까지도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영감을 후배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비 원더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천부적인 작곡 감각과 각종 키보드를 비롯, 앨범 녹음시 대부분의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해 낼 정도로 다재다능한 그는
도무지 시각 장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독창성을 자신에 음악에 담아낸다.
또한 마빈 게이(Marvin Gaye)와 함께 1970년대 미국 사회 내 흑인들의 비참한 삶과 애환을 표현한 '게토 리얼리티'를 얘기한
음악인으로 기억되면서 흑인 인권 지도자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자는 운동을 이끌었던
사회 운동가이기도 했다.
자신의 노래를 통해 스티비 원더는 지금껏 인종과 이념의 벽을 넘어선 절대불변의 숭고한 가치인 '사랑의 전도사'임을 전 세계에 알려왔다. 그의 음악만큼이나 이런 그의 행적은 전 세계 음악인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으로 그를 기억하게 했다.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No New Year's Day to celebrate 축제 기분을 낼 새해가 온것도 아니고 No chocolate covered candy hearts to give away 나누어 줄 사탕 덮힌 발렌타인 쵸콜렛도 없어요.
No first of spring No song to sing 새로운 봄도 아니고, 부를만한 노래도 없고 In fact here's just another ordinary day 사실은 그저 여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날일 뿐이에요.
No April rain No flower bloom 4월에 내리는 비도, 꽃도 피어나지 않아요. No wedding Saturday within the month of June 6월달에 들어 있는 토요일엔 결혼식도 없네요.
But what it is, is something true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Made up of these three words That I must say to you 이 세마디로 이루어진 말은 진실이에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No summer's high No warm July 여름이 무르익은것도 아니고 따사로운 7월도 아니에요. No harvest moon to light one tender August night 부드러운 8월의 밤을 비추어 줄 보름달도 없네요.
No autumn breeze No falling leaves 가을 산들바람도 떨어지는 낙엽도 없어요. Not even time for birds to fly to southen skies 심지어는 새들이 남쪽 하늘로 날아갈 때도 아니에요.
No Libra sun No Halloween 천칭자리가 있는 것도 즐거운 할로윈도 없네요. No giving thanks to all the Christmas joy you bring 당신이 가져다 준 크리스마스의 모든 기쁨에도 감사할 수 없네요.
But what it is though old so new 구식이지만 신선한 말, 어느 것도 To fill your heart like no three words could ever do 이 세 마디 말처럼 당신의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어요.
* repeat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I just called to say how much I care 내가 얼마나 당신을 아끼는지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난 그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전화했어요. And I mean it from the bottom of my heart 이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에요.
of my heart of my heart bayby you're my heart 내 마음 깊은 곳,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대는 내 마음이에요.
The hills are alive with the sound of music With songs they have sung for a thousand years The hills fill my heart with the sound of music
My heart wants to sing every song it hears My heart wants to beat like the wings of the birds that rise from the lake to the trees
My heart wants to sigh like a chime that flies from a church on a breeze To laugh like a brook when it trips and falls
over stones on its way
To sing through the night Like a lark who is learning to pray I go to the hills when my heart is lonely
I know I will hear what I've heard before My heart will be blessed with the sound of music And I'll sing on ce more
조국애와 형제애, 가족끼리의 따뜻한 연대감, 약간의 스릴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로 이 영화는 단연 명화 중의 명화다.
줄거리를 떠나 펼쳐지는 평원과 아름다운 자연 끊임없이 쏟아지는 음악 음악들...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오스트리아의 짤스부르그 수도원. 견습 수녀인 마리아는 미사도 잊을 정도로 노래를 좋아하며 기도시간에 늦는 등 수녀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지만 항상 쾌활한 성격탓에 원장 수녀의 귀여움을 받는다.
하지만 수녀로서의 자질보다 다른 것을 발견한 원장수녀는 명문 트랩가의 가정교사로 그녀를 추천한다. 퇴역해군 대령으로 7명의 자녀를 둔 홀아비인 트랩 대령은 엄격한 군대식 교육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어 아이들은 아빠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아름답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게 함으로써 밝은 분위기를 찾도록 노력한다.
한편, 마리아는 언제부터인가 트랩 대령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되지만 그에게는 이미 약혼녀 백작 부인이 있는 상황. 트랩 대령이 백작부인을 맞으러 빈으로 떠나자 마리아는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게 해준다. 대령이 돌아오던 날. 백작부인을 위해 환영의 합창을 하자 이에 감동한 대령은 딱딱한 모습을 허물어 버리고 음악을 사랑했던 자신의 이전 모습을 상기한다.
파티가 열리던 날, 마리아와 춤을 추게된 대령은 어렴풋하던 마리아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고 이를 눈치챈 백작부인은 마리아를 찾아가 그녀를 비난한다.
괴로움에 싸인 마리아는 그날밤 수녀원으로 돌아가 버리고 아이들과 트랩 대령은 마리아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못 이루게 되는데...
대령과 마리아의 결혼으로 아름다운 가정으로 다시 태어난 트랩가 하지만 전쟁으로 조국을 잃은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망명의 길을 떠난다. 이때 망명길의 장면은 이 영화의 내용 중 가장 스릴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뮤지컬 영화로 1965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등 5개 부문 수상을 비롯,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흥행기록을 사상 처음으로 돌파했던 대 히트작이다.
이 영화는 Maria Augusta Von Trapp"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실화이다. "마리아”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녀야말로 이 영화,
"The Sound of Music”에 나오는 즐거운 음악 같은 인생을 살고 갔다고 증언한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1905년1월26일에 태어났다. 한 살 때, 엄마가 병으로 죽고 나자, 아버지, Karl Kutschera"는 어린 그녀를, (영화에 나오는) 수녀원에 맡기고 외지로 갔다가 그녀 나이 6살 때 사망했다.
18살 때 까지 주로 수녀원 밖에서 자란 고아인 그녀는 비엔나의 진보적인 교사학교의 졸업 반 때, 드디어 수녀가 되기로 작정을 하고 잘츠부르크의 “Nonnberg Benedictine 수도회” 에 들어간다.
이후 이 영화 줄거리와도 같은 우여곡절 끝에 1927년11월27일 Salzburg 의 "Georg Von Trapp" 남작과 결혼을 하게 된다
아래는 그녀의 결혼식 때의 실제 사진이다. 이후 세 명의 자녀를 더 출산한다.
영화 줄거리와는 약간 다르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해서 1930년대 초반부터 이미, “The Von Trapp Family Choir"라는 이름으로 종교축제와 방송 그리고 순회 공연 등에 출연을 하던 이들은
1938년에 독일과 합병이 된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화에서와 같이 스위스가 아닌 이태리와 영국을 거쳐
미국 공연 기획자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그리고 1938년10월의 Pennsylvania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에서도 같은 활동을 한다. (1950년, 여름에는 "Salzburg Festival"에도 출연)
애들이 다 성장을 한 1955년에 순회 음악 활동을 중단하고 1942년에 이미 마련해둔 Vermont(Stowe) 의 농장에 정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작은 리조트 호텔을 운영하던 "Georg Von Trapp"은 1947년에 죽었으나 “Maria”는 82세 때까지 자손들과 함께 이 호텔과 또 농장을 운영하다 1987년에 남편 곁에 묻히게 된다
들려지는 이야기로는 수녀가 되지못한 미안함인지 중간에 잠시잠시 “뉴 기니”로 가서 선교 활동도 하였다고 한다
호텔(Lodge)은 한때, 1980년에 불에 탄 적이 있었으나 “Maria”의 막내아들인“Johannes"에 의해 복구되었고 오늘 날에도 계속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한다
비록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원장 수녀와 여러 사람들의 후원으로 잘 자라나, 신데렐라 같이“Von Trapp“남작과 결혼하게 된 “마리아“는 증손자를 포함해서 모두 100 여명의 가까운 자손들과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고 하는데 항상 명랑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그녀에게 음악과 같이 즐거웠던 인생이 따로 또 없었다고 하니 분명, “복 받은 삶“ 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래 사진은 중년과 노년의 “Maria Augusta Kutschera”의 실제 모습
“Maria”는 남편이 죽고 난후인 1949년에 자전적 소설인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 를 출간했다. 1956년에 독일의 한 영화사와 판권의 양도 계약을 하게 되고 이후, 독일에서 “Die Trapp Famillie"(1956)라는 영화가 나오면서 이들의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는데 다음해에는 브로드웨이의 프로듀서인“Richard Haliday"와 다시 무대 공연 계약을 하면서 1959년11월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초연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그 유명한 작곡가 “Richard Rogers” 와 콤비 작사가 인 “Oscar Hammerstein 2세”가 음악 작업에 참여 하므로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The Sound of Music“의 명곡들이 드디어 만들어 진 것이다. 이 유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1965년 20세기 폭스”에 의해 영화화가 되면서 오늘날까지 가장 위대한 뮤지컬로 손꼽히는 영화“The Sound of Music“이 탄생하게 된다.
ЖУРАВЛИ 백학 - 이오시프 꼬브존 Мне кажется порою, что солдаты, 므녜 까쥇샤 빠로유 쉬또 쌀다띄이 С кровавых не пришедшие полей, 스 끄라바븨흐 니 쁘리쉐드쉬예 빨례이 Не в землю нашу полегли когда-то, 니 브 지믈류 나슈 빨례글리 까그다-따 А превратились в белых журавлей. 아 쁘리브라질리씨 브 볠릐흐 주라블례이
Они до сей поры с времен тех дальних 아니 다 쎄이 빠릐 스 브레몐 쩨흐 달니흐 Летят и подают нам голоса. 리쨧 이 빠다유뜨 남 갈라싸 Не потому ль так часто и печально 니 빠따무 리 딱 차스따 이 뼤찰나 Мы замолкаем, глядя в небеса? 믜 자말까옘 글랴쟈 브 녜볘싸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Летит, летит по небу клин усталый, 레찟뜨, 레찟뜨 빠 녜부 끌린 우스딸릐이 Летит в тумане на исходе дня. 레찟뜨 브 뚜만녜 나 이스호졔 드냐 И в том строю естъ промежуток малый, 이 브 똠 스뜨로유 예스찌 쁘로메주똑 말릐이 Бытъ может, это место для меня 븨찌 모쥇뜨, 에떠 메스따 들랴 미냐 Настанет денъ,и с журавлиной стаей 나스따녜뜨 졘,이 스 주라블리노이 스따예이 Я поплыву в такой же сизой мгле, 야 빠쁠릐부 브 따꼬이 줴 씨보이 므글례 Из- под небес поптичъи окликая 이즈-빠드 녜볘스 뽀쁘찌치이 이끌리까야 Всех вас,кого оставил на земле. 프쎄흐 바스,까고 아스따빌 나 졔믈례 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 Мне кажется порою, что солдаты, 므녜 까쥇샤 빠로유 쉬또 쌀다띄이 С кровавых не пришедшие полей, 스 끄라바븨흐 니 쁘리쉐드쉬예 빨례이 Не в землю нашу полегли когда-то, 니 브 지믈류 나슈 빨례글리 까그다-따 А превратились в белых журавлей. 아 쁘리브라질리씨 브 볠릐흐 주라블례이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가사번역]
유혈의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이 낯선땅에 쓰러져 백학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이따금 드네..
저들이 저 먼 시간에서 날아와 울부짖는 것은 우리가 자주 슬픔에 겨워 하늘을 보며 침묵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우..우..우..우..
피곤에 지친 새들이 떼를 지어 석양 안개 속을 날아다니는데 저들 무리 속 작은 공간은 나를 위한 것인가...
학의 무리처럼 새날이 찾아 들면 나도 그들처럼 회색안개 속을 훨훨 날아보리 이 땅에 남겨진 우리 모두에게 하늘 아래서 새처럼 울부 짖으며... Crane (백학)은 러시아의 가사가 아닌 러시아와 적대 관계로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는 체첸공화국의 음유시다. Crane(백학:흰학,두루미)이라는 제목의 이 곡은 체첸 유목민 전사(戰士:Warrior)들의 영광된 죽음을 찬미하는 음유시에
러시아 가수이자 유명 정치인 요시프 코프존이 현대적인 곡을 붙인 노래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카프카스(코카서스)는 러시아의 남부, 카스피 해와 흑해 사이의 험준한 산악지역이다. 230여 민족이 심한경우에는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두고 종족도 언어도 다를 정도로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불리운다. 이를 두고 창조주가 언어를 나누어 줄 때 카프카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람에 그만 가지고 있던 자루 속의 언어가
쏟아졌기 때문이라고 다케스탄의 위대한 민족시인 감자토프는 해학적을로 말했다. 카프카스인들은 이처럼 언어 차이로 크게 분리되어 마치 서로 다른 대륙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보이는데다가
왕왕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카프카스 산악지대의 자연, 풍속, 사랑, 우정을 노래하여 러시아 시단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라술 감자토비치 감자토프(Rasull Gamzatovich Gamzatov)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민족색이 짙은 서정시 백학(zuravli)을 썼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다른 카프카스 전사들과 함께 직접 소련군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대항해 싸운 전사였던 감자토프의 시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