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먹이 홀로 돌보는데...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다


대탄압 탓에 민청련은 위기에 몰렸다. 고문 수사에 반대하는 맹렬한 대응 운동에 나섰지만, 타격을 받고서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지도력을 제공하던 공개 간부를 한꺼번에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김근태 전 의장을 비롯해 최민화 부의장과 김병곤 상임위원장, 이을호 상임위 부위원장,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 김종복 청년부장, 권형택 사회부장, 김희상 대변인 등과 같은 상층 간부들이 모두 구속됐다.


1986년 4월 민청련·민가협에서 발간한 [민청련 탄압사건 백서-무릎꿇고 살기보다 서서 싸우길 원한다]에 실린 당시 민청련 사건 관련자 사진과 명단ⓒ 민청련동지회


장보러 가는 길까지 미행... 감시는 '일상'

이범영 집행국장을 비롯한 체포되지 않은 간부들도 행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수배령이 내려졌다. 각급 수사기관에 소속된 체포조들이 다투어 수배자들의 행적을 뒤쫓고 있었다.

그뿐인가. 지도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새로 선출한 신임 간부진도 부자유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한경남 신임 의장을 비롯해 김희택 부의장, 천영초 상임위원장과 윤여연 사무국장, 서원기 집행국장 등 새 집행부 성원들 10여 명도 지명 수배자가 됐다. 선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망자 신세가 됐다. 안팎으로 민청련을 대표하고, 다른 부문 운동과의 연대를 담당하던 공개 간부들이 한꺼번에 활동의 자유를 속박 당했다.

수배자를 뒤쫓는 경찰의 추적은 삼엄했다. 우선 수배자 가족이 표적이 됐다. 첫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새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범영 집행국장의 부인 김설이가 젖먹이를 홀로 양육하고 있는 집에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와 수색 영장도 없이 집을 뒤지는 게 예사였다. 그녀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상황에 놓였다. 사복형사 3인이 1개조로 시장에 장 보러 가는 것까지 미행했다. 감시조는 3교대로 24시간 작동했다. 따라서 수배자로서는 가족과 연락을 시도하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공개 활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실 운영도 난관에 부딪혔다. 그곳을 지킬 활동가가 없어진 데다가 경찰의 감시 및 폐쇄 조치가 강화된 탓이었다. 중부경찰서 형사대는 1985년 9월 8일, 민청련 사무실을 압수 수색했다. 잠긴 자물쇠를 쇠톱으로 자르고 강제로 진입해 사무실에 보관된 책자와 문서들을 가져갔다. 뒤이어 10월 6일에는 민청련 사무실이 치안본부, 국가안전기획부, 중부경찰서 형사들에 의해 폐쇄됐다. 간부들에 대한 수배령과 함께 출입 차단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이제 사무실에 출입하는 행위는 경찰의 강화된 감시·통제 조치로 인해 위험한 일이 됐다. 사무실에 출입하는 것은 신분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고, 느닷없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형사대에게 붙잡힐 우려가 있었다. 사무실은 텅 빈 상태가 됐다.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잠긴 채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민청련 탄압을 규탄하는 농성을 하면서 동료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있는, 이범영 집행국장 부인 김설이ⓒ 민청련동지회


남산처럼 부른 배를 부여잡고 삼각지 사무실로  

이때 경찰의 부당한 폐쇄 조치를 무력화하고 민청련 사무실을 다시 활성화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체포되거나 수배된 민청련 간부들의 젊은 아내들은 고문 수사와 용공조작에 맞서는 제3차 농성 장소를 민청련 사무실로 잡았다.

폐쇄 명령이 내린 지 불과 9일 만인 그해 10월 15일, 민청련 여성들은 아침 일찍부터 삼각동 사무실로 집결했다. 연합 농성을 벌이기로 약속한, 문익환 의장을 비롯한 민통련의 연로한 임원들도 동행했다. 여성과 노인으로 이뤄진 연합부대였다. '적진을 향해 돌격 앞으로' 진격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웬걸! 아무도 지키는 자들이 없었다. 각목으로 출입문을 가로질러 못질을 해놨을 뿐이었다. 일행은 장도리로 못을 빼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경찰의 연이은 압수 수색 탓에 난장판이 된 사무실 공간을 말끔히 청소하고 항의 농성에 돌입했다. 이 농성은 반독재 연합전선을 구성하는 데에 큰 지렛대가 됐다. 농성 이틀째에는 야당 정치세력의 두 지도자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4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경찰 저지를 뚫고 농성장인 민청련 사무실을 격려 방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경찰의 사무실 폐쇄 조치는 사실상 무력화됐다. 삼각동 사무실은 탄압 하의 민청련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웅변해주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그해 12월 28일 민가협이 현판식을 거행한 장소도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이었다.

민가협 현판식을 거행할 때 경찰은 현장을 봉쇄했다. 이미 사무실에 들어간 사람들과 뒤늦게 도착한 회원들은 격리되고 말았다. 어떻게든 그 저지선을 뚫어야 했다. 해산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최정순이 앞장섰다. 민청련 회원이자 구속자 이을호의 부인인 그녀는 남산처럼 불러 오른 배를 부여잡고 맨 앞장에 섰다.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던 경찰들도 차마 그녀를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사무실 봉쇄는 여전히 유지됐다. 사무실 진입이 가로막힌 구속자 가족들은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 앞 길거리에 앉아서 농성을 시작했다. 군중들이 모여들고 교통 혼잡이 일어났다. 경찰은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다. 거리에 주저앉아 있는 농성 대열을 향해 트럭을 밀고 들어왔다. 놀란 가족들이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피하려 한 탓에 대오가 흩어졌다.

이때 끝까지 대오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연성수 상임위 부위원장의 아내 이기연이 끝까지 버티자, 트럭 범퍼가 등에 닿으려는 위급한 상황이 조성됐다. 김희택 부의장의 아내 조명자가 그 옆으로 뛰어 들어왔다. 둘이 함께 트럭의 진입을 막았다. 그 당시의 극적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일본에서 만든 민가협 회보 번역판 뒤표지에 실려서 민청련 여성들의 투쟁사를 증명하고 있다.


1985년 12월 18일 삼각동 민청련 사무실에서 개최한 민가협 현판식 날, 도로에 난입한 트럭을 막고 있는 이기연(왼쪽)과 조명자(오른쪽). 민가협 회보 민주가족 일본판에 실린 사진이다.ⓒ 민청련동지회


공개 포스트를 맡은 진영효

그렇지만 민청련은 활동의 중점을 옮겨야만 했다. 공개 영역의 활동을 부득이 축소해야만 했다. 구속자 가족들과 민가협 회원들이 활용하고 있는 삼각동 사무실에는 민청련 대표로는 한 사람만 출입하게 했다. 진영효 회원이였다.

서울대 사대 78학번이었던 그는 비공개 계반 조직 4개 단위 가운데 한 단위를 관리하는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대표자로 선임된 것이다. 그는 공개 영역에 연결된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에 수배 중인 간부진과 접촉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비공개 집행부와의 연결은 장준영 부의장이 맡았다. 진영효와 장준영 두 사람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공개 영역 전반에 걸친 여러 현안과 의제를 협의했다.

진영효는 민청련의 유일한 공개 활동가로서 동분서주했다. 민청련 대표 자격으로 '고문 수사 및 용공 조작 공동대책위원회'에 참석했고, 설립 이후에는 그 실무를 맡았다. 민가협이 결성될 때에는 행정적인 일 처리를 도맡았다. 대외 연대 업무도 그의 일이었다. 종교계와 민통련 관계자들을 만나 현안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고, 구속된 민청련 간부들의 담당 변호사들과 만나 협의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민청련 탄압 시기에 유일하게 공개 활동 역할을 맡은 진영효(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민중신문] 제작을 담당한 연성만(오른쪽에서 세번째)이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인 이부영(오른쪽 첫번째)과 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구수회의를 하는 모습ⓒ 민청련동지회


만화가게로 위장한 비공개 단위들

민청련 활동의 중점이 비공개 영역으로 옮겨지면서 비공개 상임위원회와 기반 조직인 계반이 활동의 중심이 됐다.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주요 비공개 활동 단위들이 재배치됐다. <민중신문>과 전단지를 제작하는 선전국, <민주화의 길>을 발간하고 정책을 입안하는 정책실, 회원을 관리하는 조직국,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국이 그것이다. 이 기구들은 합정동, 영동시장, 아현동, 냉천동 등지에서 비공개 사무실을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비공개 사무실들은 겉으로는 가게나 사업체인 것처럼 꾸몄다. 이를테면 1985년 하반기에 집행국 교육선점부의 비공개 사무실로 사용된 공간은 마포 공덕동 고갯길에 있는 만화가게였다. 교선부장 윤형기가 그곳에 상주했고, 부엌과 방이 있어 부원들이 일주일에 며칠씩 교대로 숙직을 했다. 그 방에서 전단지를 비롯한 각종 유인물 초안을 작성했고 인쇄소에서 찾아온 유인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하기도 했다.

이 선전용 인쇄물들은 각 계반으로 분배됐고, 민청련 회원들의 손을 거쳐 서울 시내 곳곳에 은밀히 살포됐다. 이와 같이 원고, 제작, 배포에 이르는 모든 업무를 윤형기 부장과 김석영, 이영애, 곽해곤, 최성웅 등이 나눠 맡았다.

1985년 말부터 1986년 봄에 이르기까지 <민중신문> 팀의 비공개 사무실은 아현동에 있었다. 아현시장을 지나 북아현동 언덕배기 오르막길에 위치한 이 사무실은 들고나는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경찰의 주목 대상이 됐다.

결국 1986년 4월 17일 오후에 경찰이 불시 기습을 받았다. 그때 불운하게도 사무실에서 4.19 메시지 작성에 여념이 없던 연성만 회원이 연행되고 말았다. 머지않아 들이닥친 10여 명의 정사복 경찰은 2대의 차량을 동원해 사무실에 보관해 두었던 민청련 발행 소책자와 간행물을 닥치는 대로 압수해 갔다. 이날 <민중신문> 제12호 6천 부, <민청련탄압사건 백서> 소책자 400여 권을 빼앗겼다. 그뿐 아니라 <민중신문>팀 활동가들의 신원이 노출됐다. 유기홍과 유재상 회원이 경찰의 지명 수배를 받았다. 

민청련 탄압 시기에 신분이 노출되어 경찰의 수배를 받은 [민중신문] 팀의 유기홍(왼쪽)과 유재상(오른쪽)ⓒ 민청련동지회


여성부 조직도 탄압 국면에 적응했다. 이전에는 민청련 조직이 공개영역의 운영위원회와 비공개 상임위원회로 나뉘어 있었다. 여성운동의 경우, 운영위원회 내에서 여성부장 1인이 연대 사업을 담당했고, 상임위원회에는 여성분과를 설치해 정책 입안과 교육·연구 부문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탄압 국면에서는 조직 체계를 단일화했다. 여성부와 여성분과 조직을 상임위원회 산하 여성국으로 재편했다. 이 체제에서 밖으로는 다른 여성단체들과의 연대투쟁을 이끌어내고, 안으로는 여성 회원들을 비공개 가두 선전전에 지속적으로 동원해나갔다.

이리하여 탄압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체계가 짜였다. 앞 시기의 집행부는 공개와 비공개의 2중 체제였다. 공개된 의장단과 운영위원회는 제1진이고, 비공개 상임위원회는 제2진이었다. 하지만 탄압으로 인해 체제가 바뀌었다. 제1진은 구속되거나 잠복 상태에 들어갔고, 공개 영역은 위축됐다. 이제 집행부는 비공개 단일체제로 재편됐다.

민청련은 조직체계를 정비함과 동시에 투쟁 대오를 가다듬었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탄압 국면에 맞서는 고문 수사 반대 투쟁이었다. 민청련은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투쟁위원회'(아래 고문투위)를 설립하여, 탄압 국면에 맞서는 항의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고문투위의 활약상은 두드러졌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과 결합하여 과감한 농성 투쟁을 연이어 벌였으며, 그에 기반해 활발한 연대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야당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광범한 반독재연합전선을 조직했고, 민가협 설립마저 이끌어냈다.

탄압 돌파는 투쟁으로

1985년 10월에는 세계은행(IBRD)·국제통화기금(IMF) 서울총회가 예정돼 있어 이에 대한 반대 투쟁에 힘을 쏟았다. 이 총회는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서울 힐튼호텔에서 개최됐는데 가맹국 148개국의 재무장관을 비롯한 대표 3,200여 명이 참석했고, 리셉션만 370여 회에 달하는 호화판 행사였다. 취재기자들의 솔직한 토로에 의하면, 총회 개최국이 누리는 실익은 별로 없고 예산 낭비에 불과한 국제회의였다.

민청련은 이 국제회의의 본질을 폭로하는 자료집 <IMF·IBRD 서울 총회와 민중민주화운동>을 발행하고, 전단과 스티커 등의 선전물을 살포했다. 10월 4일에는 민통련 등 28개 민주화운동 단체와 더불어 공동성명서를 발표했으며, 10월 8일에는 가두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는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이뤄진 것으로서, 민통련 가맹단체와 EYC 등 청년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것이었다. 300명 정도의 소규모 시위대가 청량리 미주상가 앞길에서 "외채정권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전단을 뿌리며 15분간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시기에 민청련이 역점을 둔 또 하나의 투쟁이 있었다. 개헌투쟁이 그것이다. 민청련은 고문투위와 함께 '민주제개헌투쟁위원회'(개헌투위)를 자기 내부에 조직할 정도로 이것을 중시했다. 그러나 개헌투위의 활동은 기대 수준에 현저히 못 미쳤다.

 
1985년 9월 19일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군사독재정권퇴진과 민주제개헌쟁취를 위한 공개대토론회’를 열었다(위). 아래 사진은 윤여연 신임 사무국장이 교회 옥상에서 거리를 향해 토론회에 대한 홍보 및 선전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 민청련동지회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개헌투쟁의 전술 논쟁이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오래 계속된 점을 들 수 있다. 민청련 회원들 사이에는 개헌 문제를 둘러싸고 '직선제 개헌론'에서부터 '제헌의회 소집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이 혼재돼 있었다. 이러한 이견은 전체 민주화운동 내부의 불일치가 반영된 것이었다. 민청련 안과 밖의 논쟁 당사자들은 끝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또 하나의 원인은 민청련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데에 있었다. 탄압으로 인해 활동력이 손상된 데다가 구로동맹파업 이후 노동운동권의 정치적 발언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게다가 민통련의 확대통합 과정에 민청련이 참여(9월 20일)하게 된 점도 이에 관련이 있었다. 뒤늦게 확대통합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연합운동의 방향과 정책 수립을 둘러싸고서 여전히 체제 정비가 이뤄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민청련은 개헌투쟁에 임하는 전체 민주화운동 대열의 통일적 대응을 모색했으나 성공할 수 없었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과 10월 고문수사 반대운동에서는 실현했던 광범위한 반독재연합전선을 개헌문제에 관해서는 재현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민통련, 개신교, 청년, 학생운동은 제각각 개헌투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1985년 12월 6일, 민청련은 개헌 문제를 내세운 가두시위를 조직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진 연대투쟁이었다. 민청련, 민중불교운동연합, 기독청년협의회, 기독학생회총연맹, 가톨릭학생총연맹 등 5개 청년 학생단체가 주동한 시위였다. 경찰의 원천 봉쇄로 인해 시위운동 개최지는 서울시 외곽의 화양동 로터리로 변경됐다. 300명 수준의 소규모 시위 대열이 형성될 수 있었고, '군사독재헌법 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대회' 개최를 알리는 전단과 유인물이 길거리에 살포됐다.

그러나 시위 시간은 경찰 병력의 신속한 출동으로 10분을 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 전반에 위기감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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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독립에 헌신한 3·1운동의 투사 김마리아
 고문 후유증 시달리다 해방 1년 앞두고 목숨 거둬


애국부인회 임원. 번호순으로 김영순 서기, 황에스더 총무, 이혜경 부회장, 신의경 서기, 장선희 재무부장, 이정숙 적십자부장, 백신영 결사대장, 김마리아 회장, 유인경 대구지부장. 독립기념관 제공


김철수 노인의 지갑에 한 여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는 지갑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지인들은 궁금해했다. 부인도 아닌데 도대체 누구냐고 물었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지금도 품고 다니나. 혹시 젊어서 맺었던 연인이 아닌가.’

노인은 혁명가였다. 일제의 감옥에서 십수 년을 보낸 투사고, 비밀결사인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였으며, 탄압으로 와해된 조직을 일으켜세운 지하운동가였고, 러시아 모스크바와 중국 상하이를 넘나들며 코민테른 외교를 좌우하던 풍운아였다. 남북이 분단될 즈음 운동 일선에서 은퇴해, 고향인 전북 부안의 야산에 토담집을 짓고 지냈다. 이따금 화가 허백련 등과 어울려 글씨를 쓰며 지내는 게 낙이라면 낙이었다.


김철수가 가슴에 품은 사진


노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몇몇 지인에게 사진에 대해 얘기했다. 사진 속 여인은 3·1운동 때 비밀결사 애국부인회 회장이던 김마리아였다. 김철수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상하이에서였다. 1923년 1∼6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 회의장에서 처음 만났다. 한국 독립운동의 진로를 좌우하는 막중한 의의를 지닌 이 회의에는 중국, 러시아, 미국에 있는 반일 단체의 대표원이 125명이나 모였다. 김철수는 고려공산당 상하이파 대표원 자격으로, 김마리아는 애국부인회 대표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김철수는 31살이었고, 김마리아는 그보다 한 살 많았다.

김마리아의 존재는 이채로웠다. 대표원 총수 중에서 3.2%에 지나지 않는 여성이기도 했지만, 그의 특이한 행동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했다. 30분을 못 넘겼다. 의자에 앉아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가만히 견디지를 못했다. 빈자리를 찾아 옮겨 앉아야 했다. 때로는 자리에 앉았다가 서 있기를 반복했다.①

그러나 회의장의 누구도 그의 산만한 행동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가 왜 그렇게 됐는지 다들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질책은커녕 연민의 시선으로 그를 대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생이었다. 서울에서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24살 되던 191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도쿄조시가쿠인(東京女子學院) 학교를 다녔다. 본과(중등교육과정)에서 1년, 고등과(전문학교 과정)에서 3년간 수학했다. 김마리아는 유학생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도쿄에 건너간 이듬해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이 되었다. 그때 도쿄의 여자 유학생 수는 40여 명이었다. 조선인 유학생 350명의 약 10%에 지나지 않았지만, 최상층의 여성 지식인 사회였기에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컸다. 김마리아 회장은 기관지 <여자계> 발간에 힘썼다. 이 잡지는 남녀 학생을 망라한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과 나란히 유학생 사회의 여론을 이끌었다.

김마리아는 3·1운동의 투사였다. 1919년 2·8 도쿄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했고, 그 선언문을 몰래 국내로 들여왔다. 3·1운동의 소용돌이에서 여학생 조직화에 노력했다. 도쿄여자유학생 그룹과 이화학당 그룹을 묶고, 서울 시내 각 여학교 대표자들의 연합 기구를 조직하려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비밀이 탄로나 체포됐다. 3월6일 체포된 그는 3·1운동 여성 수감자들이 일반적으로 겪은 폭력과 수모를 견뎌야 했다.

체포된 여성들이 받았던 학대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있다. 무차별 구타가 기본이었다.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포악한 태도로 나를 의자로부터 넘어뜨렸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다시 달려든 그들은 얼굴과 손다리는 물론이고 몸까지 사정없이 구타하였다.” 성적 폭력도 일어났다. “그들은 나의 옷을 모두 벗기고 억센 밧줄로 결박하여 천장에 매달았다.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에게 무수하게 내리쳐지는 참대 막대기의 뭇매에 나는 의식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거리낌 없는 모욕도 가해졌다. “우리는 그 추운 밤에 발가벗기어 일본인 남자의 앞에 오래 서 있었습니다. 어떤 형사부의 순사가 나더러 ‘고양이 모양으로 네발로 기어서 저 거울 앞을 지나가거라, 허 네 모양이 예쁘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일제 모진 고문에 고질병 얻어


김마리아는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얼마나 폭행을 당했던지 신경이 아주 말할 수 없이 쇠약해졌다. 귀와 코에 고름이 들어차는 후유증도 앓았다.② 유양돌기염과 상악골 축농증이라는 고질병에 걸린 것이다. 이 질병은 마리아의 이후 삶을 줄곧 괴롭혔다.

그는 수감 4개월 뒤인 7월24일, 체포된 여성 46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김마리아는 출옥하자마자 활동을 재개했다. 그즈음 3·1운동의 혁명적 열기가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 6월28일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 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에 대한 아무런 희망적 조치 없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만세시위와 유인물 살포, 운동자금 모금과 수감자 지원에 종사하던 비밀단체들이 기력을 잃어갔다. 여성단체도 그랬다. 만세시위운동이 고조됐을 때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오현주를 중심으로 결성된 애국부인회가 침체에 빠져들고 있었다.

김마리아는 그 단체의 재조직에 나섰다. 10월19일 여성 16명이 은밀히 모였다. 정신여학교 부교장이자 미국인 선교사 천미례의 사택 2층에서였다. 김마리아는 선교사의 호의로 그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날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애국부인회가 새로이 출범했다. 그를 필두로 하는 정신여학교 졸업생 그룹이 주가 되고, 황에스더 등 몇몇 이화학당 졸업생들이 가세했다. 전자는 기독교 장로교 계열이고, 후자는 감리교 계열이다.

애국부인회는 규모가 큰 비밀결사였다. 각 도에 하나씩 지부를 설립하기로 했고, 적십자부와 결사대 같은 특별 부서를 설치했다. 특별 부서를 둔 까닭은 만세시위운동이 종식된 뒤 무장투쟁으로 전환하려는 독립운동의 일반적인 흐름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김마리아의 안목이 정세 변화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직을 새로 추스른 지 불과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그해 11월28일 일제 검거가 시작됐다. 경북 경찰부가 주무기관이었다. 며칠 만에 서울과 원산, 북간도, 제주 등지에서 52명의 관련자가 체포됐다. 모두 여성이었다. 다들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전격적인 체포가 이뤄진 까닭이 있었다. 밀고가 있었다. 내부 구성원 가운데 배신자가 있었다. 애국부인회 취지서와 규칙 등 비밀서류가 발각됐다. 지하실 땅속에 묻어둔 등사판과 회원 명부도 드러났다. 공문서 작성에 사용한 여러 도장도 빼앗겼다.

체포된 사람들은 폭력에 노출됐다. 특히 회장 김마리아는 저들의 표적이 됐다. 심문관들은 그의 두 무릎 사이에 굵은 장작개비를 넣고, 수갑을 채운 두 팔 사이에 쪼갠 대나무를 끼운 채 빨래 짜듯이 비틀었다. 코에 고무호스를 끼워 물을 집어넣었고, 굵은 나무토막을 끼고 앉은 가녀린 여성을 짓밟았다.③


병보석 상태서 홀연 망명길 올라


김마리아의 탈출을 전하는 <동아일보> 1921년 8월5일치 3면. <동아일보> 자료


김마리아는 차마 입으로 옮기기 어려운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심문관들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그를 발가벗긴 채 손과 발을 묶었다. 곁엔 타오르는 화로가 있었고, 인두와 쇠꼬챙이가 그 속에서 벌겋게 타올랐다. 짐승 같은 자들은 끝내 그 도구를 사용하고 말았다. 화롯불에 달궈진 쇠꼬챙이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았다. “그렇게 하고서 문지르면 그곳이 벗겨질 것 아니여?” 진실을 전하는 김철수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마리아는 공포와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주 그냥 머리를 때리고 터지고 소리를 지르고 그냥 욕을 하구” 그러다가 결국 혼절했다.④

김마리아는 육신과 정신이 파괴됐다. 정신이 혼미해 말을 분명히 하지 못했다. 곡기라고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뼈만 남은 몸에 얼굴은 퉁퉁 부었다. 면회소에 나올 때는 제 발로 걷지를 못해 간수가 부축했다. 마치 송장을 떠메어 나오는 듯했다. 면회객은 그 모습을 보고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참기 어려웠다. 더운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셨다. 아무래도 마리아가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고, 면회 소감을 얘기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노력이 주효했을까. 1920년 5월22일 대구지방법원은 김마리아의 병보석을 허가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주거지를 대구 거주 블레어 선교사의 사택과 주변 건물로 제한하고, 의료진 외에 어떤 조선인도 면회해서는 안 되었다. 치료가 급했다.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병증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 가장 위급한 것은 귀와 코에 들어찬 화농이었다. 1921년 6월20일 고등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김마리아는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두 번, 한양병원에서 한 번 수술했다. 고열과 신경쇠약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콧속과 양미간, 귓속에 가득 찬 고름을 긁어내는 수술이었다. 완치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고름이 다시 고였다.

최종심에서 징역 3년형이 확정된 지 9일째 되던 날이었다. 김마리아는 병보석 때 지켜야 할 규범을 깨뜨렸다. 1921년 6월29일, 정양을 위해 머물던 서울 성북동의 한적한 농가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잠자던 이부자리만 남겨둔 채였다. 탈출이었다. 김마리아는 망명길에 올랐다.

병고에 신음하는 젊은 여성이, 경찰과 사법 당국의 감시를 받는 상태에서 어떻게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을까? 협력자들이 있었다. 선교사 매큔은 김마리아의 망명 계획을 지지하고 재정을 지원했다. 망명과 정착 비용으로 4천원을 제공했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원 정도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4억원쯤 하는 큰돈이었다.

교통편을 주선하고 길을 안내해준 이도 있었다. 임시정부 교통부 소속 요원으로 상하이와 국내를 넘나들며 비밀 임무를 하던 윤응념(28)이었다. 그는 김마리아뿐만 아니라 상하이 망명객 가족들의 밀항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상하이 거류민단장 도인권의 부인과 두 아들, 흥사단 원동위원부 김붕준의 아내와 세 자녀(아들 1명, 딸 2명)도 밀항선을 탔다. 일행이 산둥반도 웨이하이 항구에 도착한 때는 7월21일이었다. 서해 넓은 바다에서 풍랑과 뱃멀미에 시달린 지 17일 만이었다.⑤

김마리아의 탈출 소식은 널리 알려졌다. 서울 안 신문 지면을 두루 장식했다. 국내의 친지와 동료들은 그의 망명을 기뻐했다. 건강과 앞날의 행운을 빌었다. 상하이의 망명자 사회에서도 김마리아의 도래를 환영했다. 상하이 거류민들은 김마리아의 건강이 회복되기 기다려 1921년 11월25일 환영회를 열었다. 그는 3·1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간주됐다.


잇따른 혼담, 찾지 못한 반려자 


(왼쪽부터)1927년 파크대학 졸업 때 김마리아./ 김마리아의 1932년 미국 재입국증 사진./ 1922년 중국 상하이에서 30살의 김철수./ 노년의 김철수. 박용옥 제공/ 박용옥 제공/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상하이 조선 사람들은 김마리아를 찬탄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따스하게 대했다. 특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그가 홀로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혼담이 오갔다. 혼인 상대로 거론되는 이는 일본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장진영이었다. 나이 지긋한 미혼남이었다.

중매에 나선 사람은 흥사단 지도자 안창호와 고려공산당 대표원 김철수였다. 안창호는 김마리아의 뜻을 확인하고, 김철수는 시베리아에서 함께 지낸 적 있는 장진영의 의사를 확인했다. 남자는 쾌히 승낙했다. 김마리아가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그랬다고 한다. 장진영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시집가면 병이 나을 것 같아” 승낙했던 것이라고 김철수는 해석했다. 하지만 혼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김마리아가 싫다고 거절했다. 안창호는 거듭 권했다. 제발 시집가라고,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강력히 권유했다. 김마리아는 요지부동이었다. 첫 번째 중매는 실패로 돌아갔다.

두 번째 혼담 상대는 김철수였다. 김마리아와 숙소를 같이 쓰던 양한라가 나섰다. 제주도 출신의 흥사단 단원이었다. 그의 연인이자 2·8독립선언운동에 참가했던 재일 유학생 정광호(29)도 거들었다. 양한라와 정광호가 중매를 섰다. 두 사람은 김마리아의 의중을 먼저 확인했다. 김마리아는 수줍게 승낙했다고 한다.

김철수의 뜻에 모든 것이 달렸다. 그는 오래 생각한 끝에 결심했다. “그 사람은 애국부인회 회장이다. 그런데 나한테 시집오면 첩이 된다. 아! 나에겐 아내가 있다. 내가 승낙하면 두 여성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 그래서 거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양한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김마리아의 뜻을 다시 전했다. 혁명운동을 하는 동안 같이 사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만일 남자가 운동을 포기하고 조선 내지에 가서 편히 살려고 한다면 그때 갈라서도 좋은 일이다. 만일 독립이 된다면 그때는 내지에 있는 첫부인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의사였다.

양한라에게서 김마리아의 의지를 전해들은 김철수는 고민했다. 착잡했다. 자기도 싫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 둘이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어딘가 가서 ‘교원질’이나 하며 먹고살게 되지 않을까. “아! 안 될 말이다.” 이미 결혼한 여성도 떼내버리고 국외 망명과 지하운동으로 돌아다니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김철수는 다시 결심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김마리아도 첩 신분이 되니, 그를 모욕하는 일이다. 김마리아는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 호칭을 받는 사람이 아닌가.⑥ 그럴 수는 없다고 확고히 결정했다.

김마리아는 국민대표회 회기 중에 한때 앓았다. 김철수와 정광호는 문병을 갔다. 혼사 거절 뜻을 명백히 전한 뒤에 있었던 일이다. 머리를 풀고 드러누웠는데 김마리아의 얼굴이 창백했다. 병상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대단히 불쌍했다. 80대 노인이 된 뒤에도 김철수는 그 모습을 잊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 머리 푼 것이 지금도 눈에가 환해. 불쌍해.”⑦


“아이고! 1년만 더 살았더라면…”

김철수는 뒷날 김마리아의 소식을 들었다.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9년간 파크대학, 시카고대학원, 컬럼비아대학 교육대학원, 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32년 귀국했고, 종교활동에만 종사한다는 입국 조건에 묶여서, 원산의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 교수, 장로교여전회 회장 등의 일에만 전념했다. 그러다 해방 1년 전에 원산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아이고! 1년만 더 살았으면 해방되는 것을 보았을 텐데.” 김철수는 책에 실린 김마리아의 사진을 사진사에게 옮겨 찍게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평생 품에 지녔다. 영혼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늘 잊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한다.


참고 문헌

① ‘구술자료 김소중 소장본’, <遲耘 金?洙> 한국정신문화연구

원 현대사연구소 편, 105쪽, 1999

② ‘병상에 누운 김마리아’(5), <동아일보> 1920년 6월6일치

③ 金永三, <김마리아>, 태극출판사, 중판, 236쪽, 1978

④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앞의 책, 104쪽

⑤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

사, 274∼286쪽, 2003

⑥ ‘김마리아양의 근황’, <신한민보>, 1932년 11월3일

⑦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앞의 책, 108쪽


출처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4786.html 





조선공산당 최고위급 지도자로 손꼽히던 김단야
 스탈린 대숙청기 ‘일본 밀정’ 혐의 앞세워 총살돼



32살 김단야(1932년 소련 모스크바 추정). 임경석 제공


해방이 되자 혁명가들이 되돌아왔다. 국외로 망명한 항일운동가들이 속속 귀환했다. 중국 충칭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돌아왔고, 옌안에서 독립동맹 인사들이 귀국했다. 미국에서 살던 이승만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조선인 간부들도 입국했다. 국외뿐이랴.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던 비합법 지하 운동자들도 얼굴을 드러냈다. 감옥에 갇힌 치안유지법 위반자들도 형무소 문을 열고 나왔다. 징병과 징용을 피해 깊은 산속에 은거하던 도망자들도 산에서 내려왔다.


“혁명 이끌 사회주의자 육성”


김단야가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하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건물. 임경석 제공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망명지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이 그러했다. 하지만 죽었다는 풍문도 들리지 않았는데 되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모스크바에 망명한 혁명가들이었다. 소련은 국제관계상 오랫동안 일본과 적대적 위치에 있었고, 세계혁명을 이끄는 코민테른이 소재한 곳이었다. 그뿐인가. 수십만 고려사람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땅이었다. 식민지 시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스크바로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많은 혁명가들이 소련으로 망명했다.

모스크바에 망명한 그 많은 혁명가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이역만리에서 행여 병이라도 얻어 세상을 떴기 때문일까? 아니야, 그곳에서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 이렇게들 짐작했다.

김단야(金丹冶)가 그 좋은 보기가 된다. 박헌영과 더불어 조선공산당의 최고위급 지도자로 손꼽히던 그였다. 해방 이듬해 아들 김단야의 소식을 찾아 서울에 올라온 김종원(70) 노인의 동향이 신문에 보도됐다. 소련에 망명한 아들이 해방되고 나서도 귀국하지 않으므로,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상경했던 것이다. “아들 생각이 나서 서울에 와보니, 자세한 것은 모르고 모스크바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풍문만 들었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① 아들의 소식을 끝내 확인할 수 없었던 노인은 하릴없이 고향 경북 김천으로 낙향해야 했다.


김단야가 위기감을 느낀 것은 아마 1936년 8월부터였을 것이다. 그때 그는 직장을 잃었다. 실직이기보다 책임 있는 직무에서 배제됐다는 의미에서 숙청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장 직위에서 면직됐다. 1934년 2월 이래 2년6개월 동안 한국학부장으로 있으면서 한국혁명을 이끌 사회주의자를 육성해오던 차였다. 김단야는 이 직무를 중히 여겼다. 학부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전력을 다하여 간부 양성을 위해 일했노라”고 자부했다.②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한국 사회주의운동과 깊은 인연이 있는 기관이었다. 그것은 1921년 4월 식민지 민족들의 해방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설립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설립 초창기부터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이 대학과 관계를 맺었다. 최근 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1924~25년 이 대학의 한국학부에 재학 중인 사람은 무려 120명이나 됐다.③ 이 대학은 식민지 한국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몹시 선망하던 교육기관이었다. 통칭 ‘모스크바공산대학’이라 하던 학교였다. 교육 연한은 2년제였다. 러시아어 학습을 위한 예비학부 재학 기간 1년을 포함하면 좀더 오랫동안 학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단야가 학부장이던 1930년대 중반에는 학부 규모가 줄어들었다. 예컨대 1933학년도에는 한국학부 내에 3개 학급이 있었는데, 총 학생 수는 15명이었다.④ 한창 성황을 보이던 1920년대 전반기에 비하면 16%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혁명에 대한 코민테른의 관심과 지원이 예전만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대숙청기, 밀정으로 의심 받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아직 괜찮았다. 상황이 점점 나빠졌다. 한국혁명의 중요성에 대한 고려가 코민테른에 과연 있는지 의심케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의 한국학부가 철폐된 것이다. 김단야가 학부장직에서 물러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1936년 8월에 한국학부가 폐지됨에 따라 나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떠났다”라고, 김단야는 자술서에 썼다.

코민테른 당국은 왜 한국학부를 폐지했을까? 해당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탈린 대숙청이 바야흐로 막을 올리던 때였다. 숙청은 소련의 당과 군대와 정부기관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인사들을 겨냥했다. 이 시기에 숙청이란 말은 결함 있는 자의 면직과 새 인물의 등용을 뜻하는 통상적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인민의 적’으로 지목된 혐의자가 체포, 고문, 자백, 재판, 처형을 차례로 겪는 참혹하고 유혈적인 사건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숙청의 절정기인 1937~38년 두 해 동안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경찰 기록에 의하면 158만 명에 이르렀다. 그중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134만 명, 사형당해 목숨을 잃은 이는 68만2천 명이었다.⑤ 일단 체포되면 절반 가까이 사형을 당하는 실정이었다. 무서운 공포의 시절이었다.

숙청의 칼날은 러시아 국민만이 아니라 러시아에 체재하는 코민테른과 외국 공산당 요인들에게도 향했다. 벨러 쿤을 비롯한 헝가리 공산당원, 렌스키 서기장을 필두로 하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불가리아 공산당, 독일 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그 외 외국 공산당의 지도부와 일반 당원들이 희생됐다. 독일의 예를 들어보자. 1938년 4월 현재 소련에 거주하는 독일 공산당원 842명이 내무인민위원부 비밀경찰에 체포됐다. 이 수는 실제보다 과소 집계된 것으로 평가된다.

소련에 체류 중인 한국인 사회주의자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스탈린 대숙청에 휘말려들지 모르는 위기감 속에 지내야 했다. 1936년 8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한국학부가 폐지된 것은 이런 정황을 반영한 사건이었다. 한국인 혁명가들이 예외 없이 ‘인민의 적’일지 모른다는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에 노출됐음을 뜻했다.

김단야는 해직 뒤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첫째, 일본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았다. 동료들에게서 사적으로 그런 의심을 받더라도 보통 일이 아닐진대, 생사여탈권을 쥔 소련 국가기관으로부터 혐의를 받았으니 여간 위태로운 게 아니었다. 객관적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의심스러워 보였을 뿐이다.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위해 국내에 잠입해 활동할 때 다른 동지들은 모두 체포됐는데, 어찌하여 너는 무사히 국외로 탈출할 수 있었는가? 가까운 네 동료 김한이 이미 밀정임이 판명돼 1934년에 처형됐는데, 너는 과연 그의 정체를 몰랐는가? 김단야는 이러한 의심을 받았다.


자기를 변호하는 필사적인 노력


김단야의 한글 필적(해명서 첫 장, 1937년). 임경석 제공


또 하나는 일상생활의 곤궁함이었다. 그는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노보페레베덴스카야 거리 8번지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했다. 아내 주세죽과 어린 두 아이가 있었다. ‘비딸리’라는 이름의 3살 아들과 이제 갓 낳은 딸이었다. 이들이 거주하는 주택의 소유권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있었다. 교직원에게 배분되는 관사였던 것이다. 어쩌랴. 김단야는 해직돼 그 주택도 비워줘야 했다. 해직 뒤 7개월 동안 두 차례나 가옥 양도 명령서가 날아왔다. 대학 행정 당국이 보낸 공문이었다. 더 이상 양도를 지체하면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냉정한 내용이 담겼다. 오갈 데도 없이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그뿐이랴. 여권 문제도 있었다. 아내의 여권 기한이 만료돼 갱신을 신청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갱신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여권 발급 여부를 내무인민위원부가 심의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주소지 행정 기관도 인정사정없이 채근했다. 거주 기한을 넘겼다는 이유로 벌금을 내야 한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많은 문제가 뒤엉켜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하나의 문제로 귀결됐다. 김단야는 만사가 “나 자신에 대한 근본 문제의 해결”에 달렸다고 이해했다. “내가 믿을 만한 혁명자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였다. 그는 자신이 안고 있는 혐의로부터 속히 벗어나야 했다.⑥

김단야는 자기를 변호하는 필사적인 노력에 착수했다. 자신의 결백함을 뒷받침하는 근거와 논리를 제공하기 위해 장문의 글쓰기 작업에 임했다. 1937년 2∼3월 여러 편의 글을 썼다. 혁명운동 경력을 소개하는 ‘이력서’, 밀정 혐의가 근거 없음을 보여주는 상세한 ‘해명서’, 심문자가 제기한 자잘한 의문들에 대한 답변을 적은 글이었다.

그가 힘을 기울인 논점은 밀정 혐의에 대한 항변이었다. 1929년 7월부터 12월까지 국내에 잠입해 어떻게 비밀 활동을 했는지 상세히 묘사했다. 이때 김단야는 “흥분 중에 글을 썼다”고 한다. 아마 다음 대목일 것이다. 그는 조선의 경험 많은 공산주의자 가운데 1925년 이래 한 번도 체포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남들이 다 잡혀가는 상하이에서도 무사했고, 한국 내에 잠입해서도 임무를 마친 뒤 무사히 벗어나기를 두 차례나 거듭했노라고 말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분노를 터트렸다. 이게 과연 허물이냐고 말이다. 붙잡히지 않으려고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이 의심받아야 하는 근거가 되느냐고 항변했다.

밀정 김한이 왜 자신을 경찰에게 밀고하지 않았는가? 심문관들이 집요하게 되묻는 질문이었다. 김단야는 답했다. 김한을 의심하지 않았노라고. 김한은 다년간 투옥 경력이 있는데다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였으므로, “일반이 혁명자로 인증하는 자요, 나도 그를 믿었다”고 말했다. 김한이 밀정임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행동 동기를 자신은 알 수 없다고 썼다. 그것은 김한 자신이나 일본 경찰이 알 일이지, 내가 추측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는 모른다고 답했다.


숨 가쁜, 그러나 실패한 구명운동


김단야는 요청했다. 자신을 혁명 일선으로 파견해달라고. 조선에 가서 조선공산당 재건 사업과 혁명운동에 종사하는 것이 자신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지 전선에 가서 일하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표현했다. 혁명가의 진실성을 입증할 유일한 길이므로 부디 허용해달라고 청했다.

위기에 처한 김단야를 도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혁명을 관장하는 코민테른 동방부의 임직원들이 나섰다. 그의 오랜 동료들이었다. 김단야가 1937년 2~3월 장문의 이력서와 해명서 등을 집필한 것도 사실은 이 동료들의 제안에 따른 행동이었다.

동방부 임원 벨로프가 1937년 3월2일 구명의 손길을 뻗었다. 김단야가 ‘인민의 적’ 혐의를 받고서 취조를 받는 중이었다. 내무인민위원부 간부 폴랴체크에게 공문 제11013호를 보냈다. 조선공산당의 당면 사업을 위해 김단야를 현지 파견 대표로 선임했으니 그 집행 여부를 회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갇힌 김단야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해 5월4일에도 구명의 움직임이 있었다. 코민테른 동방부의 또 다른 임원인 밀러와 최성우 두 사람이 연명으로 같은 요구를 했다. 이번에는 코민테른 간부국 알리하노프에게 보내는 공문이었다. 김단야를 조선공산당 방면의 실제 사업에 활용하려는데, 그의 정치적 경력에서 한 부분이 아직 해명되지 않았으므로 이 문제의 결론을 되도록 속히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6월7일에도 또 한 번 움직임이 있었다. 동방부 임원 벨로프가 다시 내무인민위원부 폴랴체크에게 회신을 독촉했다. 3월2일치 공문의 회신을 속히 부탁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동방부 임원들의 거듭된 요청은 위기에 처한 김단야의 운명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한국혁명이 중요하다면 혁명운동을 진작할 만한 작은 가능성이라도 존중받지 않을까? 과연 운명의 추는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

마침내 8월2일 내무인민위원부가 회신을 보내왔다. 김단야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은 권고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운명의 여신은 김단야에게 등을 돌렸다. 1937년 상반기 코민테른 동방부에 남아 있던 옛 동료들이 시도한 숨 가쁜 구명운동은 8월에 가서 결판이 났다.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벼랑 끝에 선 김단야의 등을 떠미는 동료도 있었다. 언론인 출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모스크바 망명객인 이성태는 그해 9월28일치로 코민테른 비서부 앞으로 의견서를 냈다. 의견서에 따르면, 김단야는 화요파 위주의 종파주의자이고 가까운 동료들 중에는 밀정으로 전락한 자가 많았다. 김찬, 조봉암, 박헌영, 김한, 고명자 등이 지목됐다. 이 의견서에는 김단야는 검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체포되지 않은 극소수에 속했고, 두세 차례 체포됐을 때도 다른 동료들보다 현저히 낮은 형량을 받고 풀려났다고 쓰여 있었다.⑦


선고한 날 바로 총살형 집행


김단야는 1937년 11월5일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의 손에 체포됐다. ‘반혁명 스파이, 테러단체 결성’ 혐의였다. 스탈린 대숙청의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고문, 자백, 재판, 처형의 길을 걸었다. 체포 3개월 만에 이 모든 과정이 종료됐다. 1938년 2월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정은 러시아 형법 제58조 1항, 동 2항, 8항, 9항, 11항 위반죄로 김단야에게 재산 몰수와 총살형을 선고했다. 형 집행은 신속히 이뤄졌다. 선고한 바로 그날 총살형이 집행됐다. 매장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⑧



① ‘아들 소식 들으러 서울까지?’, <조선인민보> 1946년 5월2일

② Ким Даня(김단야), автобиография(자서전), с.10,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56-65, 1937년 2월7일

③ 김국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연구’,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11쪽, 2013년

④ отчетный доклад 5-й секции(한국학부 보고서), с.1-3, РГАСПИ ф.532 оп.1 д.427

⑤ 김남섭, ‘스딸린 대 테러의 성격’, <러시아연구> 15-2, 49쪽, 2005년

⑥ 김단야, ‘나의 제출한 записка에 대한 보충 건’,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37-39, 1937년 3월16일

⑦ Бывш.члена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전 조선공산당원 김춘성 곧 이성태),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1937년 9월28일

⑧ Ким Данъ Я(김단야), https://ru.wikipedia.org/wiki/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730.html 





조선인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 핵심 지도부 김한
 스탈린 대숙청 시절 ‘일본 밀정’ 혐의 들씌워 처형



1920년 수감 중인 김한의 앞모습(왼쪽)과 옆모습. 임경석 제공


김한(金翰)이 출옥했다.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에서 형기를 모두 마치고 옥문을 나섰다. 1927년 4월24일이었다.① 41살, 장년기에 접어드는 연령이었다. 이 형무소는 도쿄 서북쪽 교외에 있는 신설 형무소였다. 주로 사상범을 가두는 것으로 유명했다. 체포된 때가 1923년 1월28일이었고 이후 줄곧 갇혀 있었으므로 재감 기간은 꼬박 4년3개월이었다.


4년3개월 만에 가족과 해후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 철거 전 모습, 도요타마형무소 정문. 임경석 제공


철창에서 되돌아온 김한은 동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을 개시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엄혹한 경찰의 취조 속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단 하나도 누설하지 않은 투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일명 중립당)의 창립 멤버이자 지도부 성원이었다. 하지만 경찰 기록과 공판 문서에는 그에 관한 단 하나의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들씌워진 혐의를 폭탄 문제 하나로 귀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외 반일 단체 의열단과 손잡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 했으며, 폭탄을 보관하고 있다가 김상옥이나 박열처럼 필요한 혁명가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개요였다. 그 덕분에 중립당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으며,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중심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한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노모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서울 마포 공덕리의 조그만 집이었다. 가난한 살림이었다. 아내가 10리 떨어진 용산의 대륙고무공장에 일을 나가서 한 달에 10여원 받아오는 수입으로 버티는 살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뒷날 노년기에 접어든 둘째딸 김례정은 12살 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이분이 정말 내 아버지가 맞나 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두 팔 벌린 아버지 품안에 안겼다.”② 다른 집과 달리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야속한 아버지, 한편으로는 천하사를 도모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김한의 운신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 대상이 됐다. 뭔가 의심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하면 으레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연례행사라 해도 좋을 만치 시달림을 받았다. 예컨대 출감한 그해 가을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1927년 10월21일 용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딱히 구체적인 혐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덕리 경찰 주재소 인근에서 폭탄과 유사한 폭발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두 차례 온 집 안을 샅샅이 뒤졌고, 여러 문서와 도서를 압수해갔다.


이듬해 가을에는 좀더 심각했다. 경기도경찰부 소속 형사대가 출동했다. 1928년 10월19일 새벽에 그는 긴급체포됐다. 잠자던 중이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서 출동한 경관들이 그를 붙잡아갔다. 비밀결사 조직 혐의였다. 서울, 경기, 황해, 충북 등에서 십수 명의 용의자들이 체포됐다. 경찰은 기대감을 표명했다. 뭔가 거창한 불온단체를 적발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검거의 발단은 일본 경찰이 관리하는 ‘밀정배들의 밀고’였다고 한다. 그러나 취조 결과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뭔가를 음모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검거 개시 4~5일 만에 하나둘 혐의자들이 풀려났다. 당시 언론 보도는 “그렇게 떠들던 사건이건만 결국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격으로 끝을” 맺었다고 논평했다.③


출감 이듬해 비밀결사 설립



김한이 알선한 국제선 간부의 은신처 서울 마포구 도화동 85번지 현 위치. 다음 지도

김한이 비밀결사 운동에 복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경찰의 날카로운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김한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동료의 안위마저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감옥에 있을 동안 조선 사회주의 운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가 설립했던 비밀결사는 이미 발전적으로 해체된 상태였다. 그새 전국적 통일 전위정당인 조선공산당이 창당됐고, 그 뒤로도 사회주의 운동의 내부 상황은 변화를 거듭했다. 초창기의 이론과 정책, 운동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김한은 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출감하자마자 비밀결사 운동 복귀를 조심스레 모색했다. 그리하여 출감 이듬해인 1928년 8월 마침내 ‘고려공산청년회’ 위상을 갖는 비밀결사를 설립하게 되었다.④ 이 단체는 중립당 계열의 과거 동료들을 재결속한 것이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되돌아온 옛 동료들과 새로이 운동에 참여한 신진 인사들이 합류했다. 이 단체는 다른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화요파’ 공산그룹의 부활로 간주됐다.

시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놀랍다. 조직 2개월 만에 경기도경이 이끄는 일제 검거에 휘말렸으나,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점이 말이다. 이 단체의 가담자들이 일본 경찰과 맞대응에 얼마나 숙련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듬해인 1929년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경찰의 억압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판단에 의해 스스로 해산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합류했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을 실지에서 수행”하는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했던 것이다. ‘국제선’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⑤ 이들은 각파 공산그룹이 운동 발전에 유해한 역할을 끼쳤다고 보았다. 기존 파벌 관계를 단절하고 국제당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노선을 천명했다.

국제선의 국내사업 지도부는 3인이었다. 김단야, 김정하, 조두원이 그들이다. 모스크바의 국제당 집행위원회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비밀리에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는 환경 속에서 곧잘 채택되던 트로이카(삼두마차) 조직 형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그들은 1929년 8~9월 국내에 잠입했다. 이들에 더하여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모스크바 유학생들도 잇따라 입국했다. 권오직(權五稷)을 비롯한 공산대학 졸업생 9명이 국제선의 일원으로서 비밀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했다.


탄로난 비밀과 잇따른 체포


국제선 그룹은 유능했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2개월 만에 당과 공청 조직의 근간을 세웠다. 그해 11월 5인으로 구성된 ‘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10월에는 3인 지도부로 이뤄진 공청 트로이카를 결성했다. 하부조직도 바로바로 구축됐다. 서울을 비롯해 평양, 원산, 부산, 목포, 함흥, 마산, 청진, 웅기, 신의주 등 도시 지역에 지방 당기관을 설치했다.

김한은 이들의 리더십을 인정했다. 그들은 코민테른의 지원과 협력 속에서 활동하는 만큼 자금과 정보가 풍부했고, 비전이 뚜렷했다. 비록 10여 년 연하에 해당하는 후배들이지만 성심껏 협력했다. 그중 하나는 신뢰할 만한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었다. 서울에 밀입국한 국제선 간부들에게는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한은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마포에서 숙소를 알아봤다. 적당한 곳이 나왔다. 도화동 85번지, 늙은 부부 둘이 사는 집이었다. 남편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세상일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안주인이 안팎살림을 모두 감당하고 있었다. 그곳에 국제선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김단야가 입주했다. 그는 안주인의 시골 조카로 가장하고, 병을 고치려 서울에 왔다고 위장했다. 늘 한약을 달이며 약 냄새를 풍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런 줄로만 알았다.⑥

김한은 직접 국제선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모플’ 사업을 전담했다. 모플(МОПР)이란 혁명가후원회를 뜻하는 러시아 외래어였다. 옥중에 수감된 혁명가와 그 가족을 돌보는 구호 사업이었다. 당과 공청의 비밀 조직 사업을 20~30대 젊은 세대가 주로 맡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적절한 역할 분담이었다. 김한은 옥중 생활을 오래 했기에 그 방면의 실정을 꿰뚫고 있었고, 변호사들과 지면도 넓었다. 적임자였다. 그는 국제선 그룹에서 상당한 금액을 받아, 그 돈을 수감자 차입비, 출옥자 치료비, 피검자 가족 구호비 등으로 썼다. 약 6개월간 그가 집행한 돈은 970엔이었다. 초등학교 초임 교원의 월급이 50엔이고, 신문사 논설부 기자의 월급이 90엔 하던 때였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3천만원쯤 되는 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듬해 모플 사업비로 8400엔이 필요하다고 국제당 앞으로 예산을 신청했다.

이듬해 2월경이었다. 경찰이 냄새를 맡았다. 급속히 조직을 확대해가던 국제선 그룹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체포가 시작됐다. 김한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조직의 비밀이 탄로났고, 관련자들이 연달아 체포됐다. 온갖 노력을 다해 몸을 숨기고 있지만, 언제까지 계속 숨을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서울 바닥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고등경찰의 삼엄한 경계망과 곳곳에 깔린 밀정들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사형으로 이어진 밀정 혐의



김한을 밀정이라고 지목한 이성태 의견서의 첫 페이지(위)와 해당 부분. 임경석 제공

자신이 제공했던 도화동 은신처가 수사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경찰이 최상급 간부라고 지목한 김단야가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이미 저들에게 탐지됐다. 그뿐인가. 공산당과 공청 지도부에 다 소속된, 김단야 탈출 이후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권오직이 바로 그 집에서 체포됐다. 공청 3인 지도부의 한 사람인 김응기도 떡장수로 분장해 그 집을 방문했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도화동 은신처를 둘러싸고 중요 인물들이 거푸 검거된 만큼, 경찰은 그 집을 아지트로 알선한 김한을 기필코 잡아들여야 할 인물로 꼽았다.

김한은 국외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3월16일 김단야의 아내이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여성 사회주의자 고명자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사실을 인지한 그는 곧바로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목적지는 소련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30년 4월 초순경이었다.

그는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핍박을 피해 망명한 혁명가답게 합당한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 근무했다. 1930~31년 조선의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후원하고 독려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망명 2년이 지난 1932년, 김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망명지 체류가 장기화할 것을 예상하고 좀더 장기적이고 유의미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간부 재교육 기관에 입학한다든가, 국제공산당 본부와 직접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등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렀다. 모스크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벅찬 미래가 아니라 참담한 현실이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국제선 검거 사건이 그처럼 대규모로 터진 이유가 김한에게 있지 않으냐는 혐의였다. 급기야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기관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스탈린 대숙청을 앞장서서 수행하던 비밀경찰이었다.

김한이 일본 밀정 혐의를 받은 데에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내부에 존재하던 적대감이 일정한 몫을 했다. 좀더 뒷시기에 작성된 기록이지만, 언론계 출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이성태(李星泰)는 김한을 통렬히 비난하는 의견서를 썼다. 그것은 국제당 집행위원회 앞으로 제출됐다. 그에 따르면 김한은 오래전부터 밀정으로 알려져왔다고 한다.⑦ 이성태가 비단 김한만 겨냥했던 것은 아니다. 김단야, 박헌영, 김찬, 조봉암, 고명자 등도 일본의 밀정이라고 고발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공산당 분파와 다른 계열에 속했던 사람들을 모두 밀정이라고 지목한 셈이다. 객관적 증거를 제시했던 것도 아니다. 스탈린 대숙청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말살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밀정이라고 고발하는 일은 일종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왜 이성태가 한때 이념적 동지였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증오의 화신이 됐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김한은 밀정 혐의를 끝내 벗지 못했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32~34년 어느 때에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관료들의 손에 사형당했다.


격문에서 촉발된 ‘국제선’ 검거 사건


국제선 그룹의 1930년 2~4월 검거는 어떻게 터졌는가. 무엇이 단서가 되어서 대규모 검거가 일어났는가? 우리는 이 의문에 답할 수 있다. 경찰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거 사건을 마무리하던 1930년 5월 시점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작성한 긴 분량의 사건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수사의 단서는 1930년 2월22일 이른 새벽에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배포된 격문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이 계기가 되어 전국으로 학생운동이 확산되던 때였다.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지만, 이 격문은 지질과 인쇄 상태가 통례적인 것과는 달랐다. 대다수 격문은 등사판으로 제작한 값싸고 볼품없는 외양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격문은 활자로 인쇄된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경기도경찰부는 이 사안을 중히 여겼다. 서울 시내 각 경찰서 고등계 주임들을 소집해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대규모 불온단체가 잠재했음이 틀림없다는 판단 아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참고 문헌

① ‘金翰씨 출옥’, , <동아일보> 1927.4.24

②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011, 97쪽

③‘경찰부검거사건 무증거로 속속 석방’, <조선일보> 1928.10.24

④朝鮮總督府 警務局長, ‘朝保秘第1025?,火曜派朝鮮共産黨再組織事件檢擧ニ關スル件’, 1930.7.25, <現代史資料> 29, 1972, 238-239쪽

⑤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 186쪽

⑥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개요’ 1937.2.23, 4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⑦Бывш.члена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1937.9.28,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533.html 







올 들어 잇따라 소설화된 사회주의 혁명가 주세죽
 최근 자필 기록 ‘이력서’ 발견돼 오류들 정정 기회


주세죽은 3·1운동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1921년 중국 상해, 1925년, 1928년 9월, 1929년 8월, 1938년 무렵, 1945년의 주세죽(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임경석 제공


주세죽(朱世竹)이라는 여성이 있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지났으니 역사 속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는 잊힌 인물이었다.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했는데도 그랬다. 마땅히 남과 북 어디선가는 그의 삶을 되돌아보고 기억해왔을 법한데도, 그 존재는 잊혀져왔다.

남한에서는 이념적인 금제 탓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줄곧 국가 이념(이데올로기)으로 작동해온 반공 이념 때문이었다. 주세죽은 사회주의자였다. 3·1운동 참가자였고, 그 직후에 물밀듯이 몰려온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한 첫 세대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삶이 공론장에 떠오른 것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의 일이다. 민주주의적 권리와 언론 자유가 확장된 조건 속에서 역사에 복귀할 수 있었다. 비로소 활자로 그의 이름을 만날 수 있게 됐다.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1996년)에 ‘주세죽’ 항목이 수록됐고, 2004년에는 그의 굴곡진 삶의 편린이 기록된 <이정 박헌영 일대기>가 출간됐다. 2007년에는 정점을 찍었다. 한국 정부가 고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영화로도 만들어질 주세죽의 삶


최근 발견된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 사료적 값어치가 높은 이 기록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아래 작은 사진은 ‘코레예바’라는 주세죽의 러시아어 서명.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올 들어 더욱 이채로운 일이 일어났다. 주세죽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이 연이어 발간되더니, 그 작품들이 나란히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올봄에 <코레예바의 눈물>(동하출판)을 쓴 손석춘 작가가 제2회 이태준문학상을 받았다. 코레예바는 주세죽이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쓰던 이름이다. 가을에도 수상작이 나왔다. 주세죽과 그의 두 벗의 삶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거해 형상화한 <세 여자>(한겨레출판사)가 발간됐다. 이 책을 지은 조선희 작가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4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11월2일 부산일보사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놀랍다.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이처럼 급격히 떠오르다니 말이다. 주세죽의 삶이 문학의 매력적인 소재로 떠오르고 있는 양상이다. 따지고 보면 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미 그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바 있다. 1930년 신문 연재소설 형식으로 발표된 심훈의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이 있다. 주세죽을 모델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마 첫자리를 점할 것이다.


<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생각난다. 16세기 프랑스 농촌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가짜 남편에 관한 이야기가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과 미국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이야기는 소설·희곡·오페레타·영화·뮤지컬 등의 형태로 수백년간 반추돼왔다. 1981년에는 프랑스 영화감독 다니엘 비뉴가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1983년에는 미국의 역사가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가 같은 제목의 역사책을 출간했다. 미시사 연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그 책은 역사 연구자들에게 지금도 마르지 않는 영감을 주고 있다.

머지않아 주세죽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문학에 이어 영화가 뒤따르고 있는 셈이다. 그의 삶이 문학과 예술의 여러 장르를 통해 다양하게 반추되는 현상을 보게 될 것만 같다. 그러기를 바란다. 비극적인 삶을 견뎌야 했던 그의 영혼에 따스한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주세죽의 자필 기록이 발견됐다.① ‘이력서’라는 제목의 6쪽짜리 필기체 문서다. 직접 펜을 들고 잉크를 찍어서 쓴 것이다. 일제강점기 옛 맞춤법에 따라 쓴 국한문 혼용의 글이다. 오자나 탈자가 눈에 띄지 않고 문장 구성이 문법에 합당하게 짜인, 교육받은 지식층이 작성했을 법한 글이다. 펜촉이 덜 길든 탓인지 잉크 흐름이 균일하지 않아서 더러 진하기가 들쭉날쭉하다. 그래서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젊은 여성 특유의 아담하고 단정한 맛이 느껴지는 필적이다. 역사 속 그를 직접 만나는 느낌마저 든다.


박헌영·주세죽에 대한 코민테른 신망


이 문서는 연구자의 관심을 끈다. 왜냐하면 역사학자들이 여태까지 활용할 수 있었던 주세죽의 정보는 주로 타자가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자라기보다는 적대자라고 해야 더 적절하겠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나 소련 내무인민위원부 심문관이 남긴 문답록 따위였다. 그에게서 ‘범죄’ 혐의를 이끌어내려는 목적의식을 가진 자들이 생산한 기록이었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주세죽 삶의 진면목을 드러낸다든가 내면세계의 진정성을 밝힌다는 등의 목표는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맥락이 단절된 단편적인 정보가 나열되어 있기 일쑤다. 이런 자료에만 의존한다면 아무리 주의 깊게 사료 비판을 하더라도, 메마르고 엉뚱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십상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당사자가 자기 의지로 작성한 기록이 나타났다. 이 문서는 1930년 3월24일에 쓴 것이다. 주세죽이 모스크바에서 살던 때였다. 나이 30살, 젊고 활동적이며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1929년 2월에 입학했으니 이제 2학년이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아이도 있었다. 세 살 난 어린 딸 박영(朴影)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성장하는 만큼 ‘비비안나’라는 러시아식 이름으로 불렀다.

젊은 부부가 다닌 두 대학교는 코민테른이 경영하는, 세계 여러 나라 혁명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주세죽이 다니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식민지 약소민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학부가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다. 1929년 현재 조선인 재학생은 38명이었다.② 그에 비해 국제레닌대학은 코민테른 비서부가 직영하는 최상급 간부를 위한 학교였다. 입학 자격은 매우 엄격했다. 각국 공산당의 지도적 지위에 있는 간부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또 일정한 이론 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이 필요했다. 조선인으로서 이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1920~30년대에 박헌영을 포함해 6명에 불과했다.

어느 대학이든 입학이 허용된 사람들에게는 재학 동안 기숙사, 장학금, 의복, 음식 등이 제공됐다. 박헌영과 주세죽이 코민테른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숙소와 생활비를 받고, 양질의 고등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그들에 대한 코민테른의 신망도 두터웠다. 모스크바 시절이 두 사람에게는 황금기였다.

그런데 왜 자필 이력서를 썼을까. 부족함이 없을 것만 같은데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글을 썼을까? 이 의문은 문서 끝부분을 보면 풀린다. 조선공산당에서 소련공산당으로 당적을 이전하는 수속을 밟기 위해서였다. 그는 3주 전에 당적 이전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력서는 그것을 위한 서류였다.

당적을 옮기는 것은 모스크바에 살아야 하는 조선공산당원으로서는 마땅히 해야 할 의무였다. ‘코민테른 규약’에 따르면, “거주지를 변경한 공산주의자는 이주한 나라의 지부에 가입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었다.③ 그것은 국제주의자의 의무였을 뿐 아니라 모스크바 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모든 공적 활동에서 객체가 아니라 한 주체로서 참여할 자격과 권한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눈물 많은 청순가련형 여인?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주세죽은 수동적인 여성이었다. 1925년 11월 말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됐을 때다. 신문 조서에 따르면 그는 사회주의를 깊이 연구한 적이 없고, 교육 수준이 낮아서 그 내용을 잘 모르며, 사상운동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여성이었다. 1925년 4월에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이유는 자기 집이기 때문이었다. 그날 서울 훈정동에 있는 자기 살림집에서 십수 명의 장정들이 모여서 뭔가를 협의했지만, 주세죽은 논의 내용을 잘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 집의 안주인으로서 손님 대접을 위해 식사 준비를 했을 뿐이지 비밀결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④ 피의자들은 엄격히 격리됐을 터였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을 텐데도 박헌영은 자기 아내와 같은 기조로 진술했다. 창립대회 장소로 사용된 자기네 거처는 단칸방이었음을 환기했다. 따라서 아내는 저녁밥을 준비하느라 회의장에 출입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여성동우회를 대표해 그 회합에 참여했다는 의심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언론에 보도되던 주세죽의 이미지는 청순가련형이었다. 박헌영이 1926년 7월21일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될 때였다. 포승줄에 묶인 채 서울로 압송되는 박헌영의 동정은 언론기관의 주목을 받았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신촌역에서 내리는 공산당사건 피고인들을 잠시라도 만나보려고 7~8명의 지인들이 역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속에는 주세죽도 있었다. 그는 “눈물 머금은 얼굴로 그리운 남편과 말 한마디 못하고 섰는 정경”을 보였는데, “그야말로 비감한 무언극의 일 장면”과 같았다고 한다.⑤

1927년 9월20일 공산당 재판 제4회 공판 때였다. 고문에 항의하는 소란 행위로 피고 박헌영이 공판정 밖으로 끌려나왔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지방법원 구내에 와 서 있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 여사가 이것을 보고, 어찌된 까닭인지 몰라 눈에 눈물을 머금고 이리저리 헤매”었다. 이 정경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밑도 모를 눈물을 재촉”했다고 한다.⑥

수동적이고 순종적이며 눈물을 잘 흘리는 청순가련한 여인! 타자의 기록에 보이는 주세죽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주세죽이 스스로 작성한 기록에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담겨 있다.


진보적 사회의식 지닌 독립적 여성


그는 혁명가였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3·1운동이 첫 경험이었다. 운동이 고조되던 때 함흥에서 비밀결사 ‘애국부인회’를 조직했고, 만세시위운동에도 참가했다. 그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2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애국부인회가 주목된다.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비밀리에 조직됐으며, 만세 시위와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는 증언이 흥미롭다.

이미 보았듯이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단체에 가입한 것은 1921년 망명지 상해에서였다. 그해 6월 상해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입회했고, 11월 고려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열성적인 사회주의자가 됐다. 한시도 사회주의 단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1923년 국내로 귀환한 뒤에는 함흥에서 비밀리에 공산청년회 세포 단체를 만들었고, 공개 사상단체인 ‘칠칠회’(七七會) 활동에도 관여했다. 1925년 4월에는 고려공청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여성동우회 내부의 비밀 세포 단체를 대표하는 자격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에는 고려공청 서울지방간부 위원에 피선됐고, 제2선 지도부인 중앙후보위원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해 5월에는 인천 정미 여공들을 조직화할 목적으로 인천에 출장을 갔다. 거기서 비밀리에 공청 세포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여성운동가였다. 3·1운동기에 이미 여성 비밀단체인 ‘애국부인회’에 참여한데다가, 1924년 5월 사회주의 계열 공개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 결성을 주도하고 그 7인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동우회 내부에 은밀하게 공산주의 세포단체를 조직했다. 이듬해에는 서울 지역의 대중적인 여성단체를 만들기 위해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이처럼 주세죽의 글에는 진보적인 사회의식을 지닌 독립적인 젊은 여성의 삶이 묘사되어 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이미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인간상이다. 눈물 머금은 청순가련한 이미지는 그의 겉모습에 취한 착시의 소산이었다. 그의 내면에는 억눌리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정신이 활활 불타고 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문학·예술 방면에서 주세죽의 삶을 형상화하려는 이들은 마땅히 이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그의 진면목을 목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기록은 사료적 값어치가 높다. 그동안 곡해돼온 사실을 정정할 가능성을 준다.


이춘, 이정 그리고 이준


맺음말 삼아, 보기를 하나 들어보자. 박헌영이 러시아에서 사용한 가명이 있다. ‘Ли Чун’(리춘)이 그것이다. 영문으로는 ‘Lee Chun’으로 표기됐다. 박헌영은 모스크바 시절 줄곧 이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가명의 한글과 한자 표기가 무엇인지는 밝히기 어려웠다. 영문과 러시아어 표기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잠정적으로 ‘이춘’이라 읽기로 결정했다.⑦ 음가 그대로 옮겼던 것이다. 뒷날 상해에서 발간한 비합법 출판물 <콤무니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박헌영은 ‘이정’(爾丁)이라는 필명을 쓴 바 있다. 그 때문에 ‘Ли Чун (Lee Chun)’이란 ‘이정’과 동의어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연구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절 박헌영의 가명이 ‘이춘’이나 ‘이정’이라고 보는 견해는 모두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다. 주세죽 이력서에 기재된 정보가 그를 정정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자신의 남편을 일관되게 ‘리준’으로 부르고 있다. ‘Ли Чун (Lee Chun)’이란 곧 ‘리준’이라는 이름의 음차 표기였던 것이다. 두음법칙을 적용한다면 박헌영이 모스크바에서 사용한 가명은 ‘이준’이었다고 확정해도 좋다.


참고 문헌

① Кореева, ‘이력서’ , 1930.3.24,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80 л.6-9об

② ‘동방노력자공산대학 특별과(спецсектор) 조선인 학생 명단’ , РГАСПИ ф.532 оп.1 д.424, л.22об

③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규약’ 1928.8.29, <코민테른 자료선집> 1, 동녘, 1989, 72쪽

④ 신의주경찰서 도경부보 茅根龍夫, ‘피의자신문조서(주세죽)’ , 1925.12.4: <한국공산주의운동사-자료편> 1

⑤ ‘캄캄한 밤중에 無言劇의 一場面’, <동아일보> 1926.7.23

⑥ ‘30여 경관 총출동’ , <동아일보> 1927.9.21

⑦ ‘주세죽 관계 자료’ <역사비평> 1997년 여름호, 145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438.html 



사형으로 스러진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
 체포 작전 도운 밀정은 안중근의 의형제 엄인섭


엄인섭이 밀정으로 암약한 시기는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이나 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스파이 노릇을 행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 <암살>에서 거물급 항일운동가인 염석진(이정재)은 밀정으로 전향한 뒤 고등계 형사 노릇까지 한다. (주)쇼박스 제공


(앞의 글 <도대체 누가 밀정이었나>에서 계속) 

체포 작전은 1920년 1월31일 새벽 3시부터 4시간 동안 계속됐다. 먼동이 밝아오는 7시가 되어서야 헌병대는 현장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소득이 컸다. ‘살인강도’ 사건 혐의자를 4명이나 한꺼번에 붙잡았다.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셋은 간도 15만원 사건의 ‘범인’임이 틀림없었다. 나머지 한 사람 나일(羅一)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직 모르지만, 숙소에서 기거를 같이 하는 것으로 미뤄보아 범죄 가담 혐의가 두터웠다.


하루만 늦었어도 실패했을 체포


다만 유감스럽게도 범인 한 명을 놓쳤다. 그는 기민한 자였다. 권총을 빼들고 완강히 저항하는 윤준희를 제압하느라 혼잡한 틈을 타 문 두 짝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 헌병’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도주하는 용의자에게 사격을 가했으며, 그자의 한편 어깨뼈 아래에 관통상을 입혔다. 피를 많이 흘린데다 매섭게 추운 북국의 겨울밤에 속옷 바람으로 내몰렸으므로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빼앗긴 현금도 되찾았다. 철제 상자 안에 담긴 현금을 헤아리니 약 13만원이었다. 잃었던 돈 가운데 87%에 해당하는 현금을 회수했다. 상자 안에는 또 귀중한 게 있었다. 문서들이었다. 노트, 편지, 증서 등이 있었다. 총영사관의 경찰간부 기토 가쓰미 통역관이 이 압수 문서들을 분석했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일지였다. 범인들은 자신의 행동 양상을 날마다 일지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건의 진범임을 의심할 여지 없이 보여주는 증거였다. 편지와 거래 서류도 있었다. 신한촌의 조선인 상인들과 자금 투자 방안을 논의하는 편지, 신한촌 하바롭스카야 거리 9번지 가옥 매도 증서 등이 그 궤짝에 들어 있었다. 어느 것이나 다 강탈 자금의 사용처로 의심되는 사안들이었다.

하마터면 범인들을 놓칠 뻔했다. 체포 작전을 마치고 불과 2시간 뒤에 연해주에서 정변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1월31일 9시를 기하여 무혈 쿠데타가 일어났다. 백위파 로자노프 지방정권이 전복되고 혁명파가 연해주 지방정부를 장악했다. 러시아 사회혁명당과 공산당이 연합한 연해주 자치위원회가 새 집권자가 됐다. 일본 총영사관에 매사 협조적이던 백위파 정부가 아니었다면 일본 헌병대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공공연하게 민간인을 체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루만 지체됐더라도 일은 틀어졌으리라.

경찰간부 기토 통역관은 제때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원인을 밀정 덕분으로 돌렸다. 보고서 내에서도 여러 차례 밀정을 언급했다. 그는 ‘우리 밀정’(我 密偵)이라고 은근하게 호칭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어쩌면 현지 부임 이래 10년 동안 세심하게 밀정을 관리해온 자신의 공로를 은근히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체포된 사람들은 금각만 부두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 지쿠젠마루(筑前丸)로 압송됐다. 군용 운송선으로 사용되는 이 배의 맨 밑창에는 특수 감금 시설이 있었다. 하루 종일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밤낮 전깃불이 켜져 있었다. 네 청년은 결박당했다. 발목, 손목, 허리에 삼중으로 쇠사슬을 채웠다. 그곳에서 청년들은 악형을 견뎌야 했다. 뒷날 청년들은 재판정에서 과감히 발언했다. 심문 과정에서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저질러졌음을 폭로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헌병대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반죽음 상태에 있었”고,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자기가 하지 않은 사실까지도 진술하였”다고 말했다.


사건 발발 1년7개월 만에 사형 집행


윤준희 등의 형이 집행된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청년들은 순순히 불지 않았다. 자신들을 돕고 지원해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렇게 노력했다. 일주일간의 심문을 마치고 일본 본국으로 출항하던 날, 총영사관이 외무장관 앞으로 작성한 수사 보고서가 있다. 사실과 다른 정보가 도처에 눈에 띈다. 현금 수송 정보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사건 이후 도주 경로가 어떠했는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했다. 시종일관 엉뚱한 답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밀 정보를 제공한 사람과 사건 이후 피신 과정을 도와준 사람, 그리고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이름이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수감자들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짐작된다.

군함 지쿠젠마루호는 2월7일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다. 군함은 규슈 북단의 모지(門司)항을 거쳐, 요코하마(橫浜)항으로 항해했다. 그곳에 체포된 청년들을 하선시키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들을 태운 배는 다시 부산항으로 출항했다. 이 사건의 재판 관할을 청진지방법원으로 지정한다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부산항에 내린 피의자들은 철도편으로 서울을 거쳐 원산까지 호송됐다. 철도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원산에서 청진까지는 다시 배편으로 이송됐다.

마침내 재판이 시작됐다. 1심은 청진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숙소에서 같이 잠자다가 변을 당한 나일은 결국 무혐의로 인정되어 석방됐다. 그 대신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했던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全洪燮)이 피고인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사건 당일 밤 일찌감치 회령경찰서에 체포됐다. 그를 의심스럽게 본 회령지점장이 고발한 탓이었다. 그는 3주 동안 계속된 심문을 견뎌야 했다. 그 결과 1920년 1월28일자로 ‘강도종범 및 정치범’ 혐의로 청진 지청 검사국에 송치됐다.

재판은 빠르게 이뤄졌다. 2심은 서울의 경성복심법원에서, 3심은 서울의 고등법원에서 진행됐다. 최종심 선고는 1921년 4월4일에 있었다. 사건 발발 이후 1년3개월만의 일이었다. 와타나베 노부(渡邊暢) 재판장을 수위로 하는 고등법원 형사부 5인 합의부 판사들은 피고들에게 극형을 선고했다. 15만원 사건에 직접 가담한 윤준희·임국정·한상호 3인에게는 사형을, 현금 수송 정보를 제공한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 사무원 전홍섭에게는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선고가 이뤄진 지 4개월20일이 지난 뒤였다. 사형이 집행됐다. 1921년 8월25일이었다. 낮 기온이 28도에 이른 더운 여름날이었다. 잠시 맑기도 했지만 종일 흐린 날씨였다. 서대문형무소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형장에서 세 청년은 영영 눈을 감았다.

세 사람의 주검은 서대문형무소 사형수들이 으레 묻히는 홍제동 밖 신사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장례를 주관한 이는 여성들이었다. 윤준희의 젊은 부인 최씨와 임국정의 어머니 ‘임뵈뵈’였다. 임뵈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북간도 성녀’라는 별호로 알려진 여성이었다. 멀리 북간도에서 살다가 남편과 아들의 주검을 찾기 위해 낯설고 번잡한 객지에 온 두 여인이었다. 주검을 수습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여인들의 흐느낌 속에 세 무덤이 나란히 들어섰다.


“홍범도·엄인섭 두 장군 활약 보는 날”


엄인섭(왼쪽)과 홍범도 장군. 임경석 제공


엄인섭(嚴仁燮)이었다. 15만원 사건 주인공들의 거처를 일본 총영사관에 알려준 밀정 말이다. 이 사실은 일본 총영사관의 정보 보고서에 암시되어 있다. 기토 통역관은 자신이 관리하던 밀정의 활약상을 자세히 기술했다. 보기를 들면 ‘우리 밀정’이 저들의 무기 구매를 알선해줬다고 한다. 그 행위는 기만이었다. 구매 협상에 나선 사람들 가운데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그 혼자뿐이었다. ‘우리 밀정’은 이 점을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교묘하게 속였다고 한다.

좀체 믿기 어려운 기록이다. 엄인섭을 신뢰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으리만큼 그는 민족혁명운동의 중견 인물이었다. 그는 1907년 개시된 연해주 반일 의병운동에 열렬히 참가했다. 1908년 여름 국내 진공작전 때에는 안중근과 함께 최선봉에 서서 두만강을 넘어 국내 진격을 영도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는 안중근의 가장 친한 동지였다. 여순감옥에서 심문받을 때 안중근은 말했다. “엄인섭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라고 속마음을 토로했다. 그뿐인가. 그들은 의형제까지 맺은 사이였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평양 출신의 반일 혁명가 김기룡(金起龍)과 함께 결의형제를 했다. 그들은 그럴 만큼 의기투합한 사이였다. 나이순으로 따진다면 김기룡(1876년생)이 큰형이고, 안중근(1879년생)이 둘째, 엄인섭(1885년생)이 막내였다.

세 사람은 목숨을 걸고 혁명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일본군의 첩보에 따르면, 1908년 4월에 세 사람은 다른 두 사람(현학표, 이범석)을 더하여 5인 단지동맹을 맺었다. 안중근과 엄인섭은 이토 히로부미 살해를 맹세했고, 다른 세 사람은 친일 매국 행위자인 이완용·박제순·송병준을 각각 암살하기로 서약했다. 다섯 사람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그 증거로 각자 왼손 무명지의 첫 번째 관절부를 절단했다.

엄인섭은 힘이 세고 성격이 담대했다. 사람이 여럿 모인 곳에서는 힘자랑을 즐겨했다. 그는 좌중의 분위기를 제압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키는 164cm였다. 당시 기준으로 중간쯤 되는 키였다. 수염이 많고 다소 뚱뚱한 체격이었다.

엄인섭의 반일 행동은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에도 계속됐다.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 설립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권업회 지회 설립을 촉구하기 위해서 연해주 각 지방에 파견한 3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1913년 11월 이동휘와 홍범도를 비롯한 혁명가 6인 간담회가 열렸을 때다. 엄인섭도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이동휘는 “홍범도와 엄인섭 두 장군의 활약을 보는 날이 있으리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무장투쟁 시기가 다시 도래할 터이므로 그에 대비해달라는 당부였다. 엄인섭은 홍범도와 병칭되는 항일 무장투쟁의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14년 동안 진행된 밀정 노릇


밀정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독립운동계 내에서 갈등 관계에 있는 혁명가들이 상대편을 밀정이라고 의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암시적이고 간접적인 의혹 말고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를 잘 몰랐다. 러시아 지역 한국독립운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조차 그랬다. 엄인섭은 최재형, 이범윤, 유인석, 안중근 등과 나란히 거론되는 의병장이었다. 주요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혔고, 향후 그에 관한 연구가 더 활성화되어야 할 인물로 지목받았다. 하지만 이제 국사편찬위원회가 해외 한국사 사료의 수집과 편찬에 노력한 성과에 힘입어, 우리는 엄인섭의 밀정 여부를 확증할 수 있게 됐다. 외무성 산하 일본 총영사관 경찰서에서 작성한 반일 단체 관련 공문서철(불령단관계잡건)에는 엄인섭의 밀정 행각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엄인섭은 1911년 반일 언론 <대양보>의 간행을 막기 위해서 한글 활자 1만5천 개를 훔쳤다. 93kg에 달하는 무게였다. 이 활자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 기토 통역관에게 전달됐다. <대양보>는 발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일본 밀정임이 발각된 서영선(徐永善)이란 자를 한밤중에 몰래 탈출시켰다. 1912년에는 연해주의 조선인 농촌 지대인 연추에서 둔전영(屯田營)을 설립하려는 은밀한 논의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 경찰에게 자초지종 밀고했다. 둔전영은 농장 경영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동시에 수행하는 무장투쟁 준비 단체였다. 이동휘, 홍범도, 이종호, 김립, 황병길 등과 같은 반일 인사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도 그의 직분이었다. 이외에도 엄인섭의 밀정 행위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밀정을 했는가? 그의 밀정 행위 관련 기록은 1911년부터 남아 있으므로,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그가 타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실제는 그보다 훨씬 앞서 있다. 총영사관의 기밀문서를 보면 “엄인섭은 재작년(1908년) 11월경 본 영사관에 출두하여 첩보자로서 고용해달라고 청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총영사관에 접근한 시기에 눈길이 간다.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미뤄보면 그가 밀정으로 암약한 시기는 1908년부터 1922년까지 14년이나 된다. 이처럼 오랜 기간 스파이 노릇을 행한 사례는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밀정이 됐을까? 첩보자로 ‘고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대목에 눈길이 간다. 그가 바랐던 것은 돈이었다. 밀정이 되면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 보기를 들면 용정 총영사관은 밀정에게 하루 1원 50전씩 지불했다. 1개월치는 45원이었다. 그 시기 회령경찰서 순사 나가토모가 받은 월급은 30원이었다. 오히려 일본 경찰관보다 월수입이 더 많을 때도 있었다. 엄인섭은 거물이었고, ‘공로’를 여러 번 세웠기 때문에 수령액이 훨씬 더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


도박 즐기고 여성 관계 문란


그는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았다. 러시아 지방관청의 기록 속에 엄인섭 인물평이 있다. “지방 거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엄인섭은 속이기와 카드놀이에 아주 능한 사람이며 방탕하다”고 한다. 도박을 즐기고 사람 속이기를 능사로 한다는 말이었다. 그뿐인가. 여성 관계도 문란했다. “그는 합법적인 아내 외에도 몇 명의 첩을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생활 습관은 그에게 많은 돈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던 1922년에 엄인섭의 밀정 생활도 끝났다. 그는 일본군을 따라 연해주를 떠났다. 처음에는 두만강 너머 함경북도 경흥에 정착했다. 그러나 일본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르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거처를 옮겼다. 연해주에 가까운 북간도 훈춘을 찾았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제가 자라던 고향 연추와 연결되는 곳이었다. 엄인섭은 1936년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52살이었다. 그로 인해 15만원 사건 주역들이 30살 고개를 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음을 상기해보면, 과연 역사에 정의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322.html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한 ‘간도 15만원 사건’ 주역들
 무기 계약 뒤 인수 전날 일본 헌병이 급습하는데…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왼쪽부터). 임경석 제공


(앞의 글 일제의 돈을 갖고 튀어라 에서 계속) 배는 8시간을 달렸다. 1920년 1월9일 밤 9시 포시에트 항구를 떠난 기선은 이튿날 새벽 5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닿았다. 어둠 속에 도시가 빛났다. 일곱 가지 색깔로 꾸민 조명이 높은 산을 꾸미고 있었다. 찬란했다. 밤하늘의 별인지 전깃불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을 정도다. 최봉설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감탄했다. 항만시설이 잘 갖춰진 금각만(金角灣)에 접어들면서 배는 길게 뱃고동을 울렸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항구에 발을 내디뎠다.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 한상호 등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이 마침내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간도총영사관과 중국 지방관청 경찰대의 급박한 추격을 벗어났으니 말이다. 사지를 벗어난 셈이었다. 그러나 이곳도 100% 안전하지는 않았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신한촌서 열린 철혈광복단 비밀회의


1년4개월 전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연해주에 간섭군을 파견했다. 러시아혁명의 파급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1918년 8월이었다. 일본·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이 제각기 연해주로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내전에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백위파 장군들을 일방적으로 지원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나라는 일본이었다. 가장 많은 군대를 가장 오랫동안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시켰다. 출병 3개월 만에 러시아 극동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 수는 7만3천 명을 헤아렸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일본 파견군의 중심지였다. 파견군 총사령부와 헌병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뿐인가. 일본 총영사관이 있었다. 이 기관은 반일 조선인의 동향을 추적하는 비밀경찰 역할을 했다. 그 때문에 스파이가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 밀집 거주지에는 일본 총영사관에 고용된 밀정들이 은밀히 활동하고 있었다.

일행은 신한촌에 숨어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7개 조선인 거주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통계에 의하면 거류 조선인의 80%가 모여 살고 인구는 6500명이었다. 네 사람은 제각기 다른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위험을 분산하려는 취지였다. 불행히 누군가 발각된다 하더라도, 남은 이들이 사명을 다하려는 의도였다. 최봉설은 채성하(40·蔡成河)가 경영하는 여관에 숙소를 잡았다. 주인 채씨는 반일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이튿날 밤, 비밀리에 철혈광복단 간부회의가 열렸다. 단장 전일(31·全一)이 소집한 회의였다. 1914년 북간도 용정에서 창립될 때부터 비밀결사를 이끌던 믿음직한 맏형이었다. 이 자리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 중인 주요 단원들이 모였다. 새로 획득한 군자금 15만원의 사용처와 책임자를 정하는 것이 주요 의안이었다. 회의 참석자들은 자금 사용처를 셋으로 정했다. 첫째 무기를 구매하고, 둘째 연해주 동부 산악지대인 수청에 사관학교를 건립하며, 셋째 신한촌 내부에 신문 발간과 도서 출판을 위한 사무소 건물을 구매하기로 했다.

결정 사항은 즉시 행동에 옮겨졌다. 장기영(40 전후·張基永)과 채영(29·蔡英) 등이 사관학교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 수청으로 길을 떠났다. 5만루블을 휴대했다. 일본돈으로 치면 1만원이었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약 10억원이다. 서류상 거래 당사자로는 합법적 신분의 사람을 내세웠다. 대동상회 대표 유찬희(柳讚熙)의 명의를 사용했다.

신한촌에 사무소 건물을 구입하는 문제도 실행에 옮겨졌다. 하바롭스카야 거리 9번지 건물이 물망에 올랐다.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백산학교 자리였다. 교사 4명에 학생 70명인 작은 학교였다. 그 건물이 일본돈 5천엔에 매물로 나왔다. 요즘 화폐 구매력으로 5억원에 상당한 돈이었다. 그것을 샀다. 신한촌 유력자이자 반일 민족주의자인 강양오(45·姜良五)와 조장원(36·趙璋元) 두 사람의 공동 명의로 매입 계약서를 작성했다.


1천 명 규모 독립군 편성할 무기 계약


무기 구입은 전적으로 ‘15만원 사건’ 주역들에게 위임됐다. 네 사람은 업무를 나눴다. 윤준희가 자금과 서류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나이가 가장 많고 ‘15만원 사건’의 입안과 집행을 이끌어왔던 터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구매는 몸집이 크고 체력이 강대한 임국정이 맡았다. 그는 1년 전 권총 구입차 신한촌에 출입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5년 전 독립군 나자구(羅子溝)사관학교 경비 조달을 위해 그 학교 사관생도 40여 명과 함께 저 머나먼 우랄산맥 삼림지대에서 벌목노동에 종사했다.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그즈음 분산 유숙 대신 단체로 합숙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김하석(40·金河錫)이 제안했다. 중책을 원활히 수행하려면 자주 회의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한집에 모여 지내자는 뜻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김하석은 일찍이 간도 광성중학교 교사를 지냈기 때문에 철혈광복단 단원들에게서 선생님 소리를 듣는 이였다. 또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지라 그의 발언은 존중됐다. 유사시에 일망타진될 위험이 상존했지만, 네 사람은 그 말을 좇기로 했다.

새로 옮긴 합숙소에서 무기 구매를 위한 논의가 급진전됐다. 임국정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무기 밀거래 파트너는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사령부 포병부 무기고 책임자 몰린 대위였다. 백위파 연해주 지방정부 포병 장교였다. 그를 통해 개인 화기는 물론이고 공용 화기도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은밀한 거래를 주선한 중개인이 있었다. 엄인섭(44·嚴仁燮)이었다.

그를 믿을 수 있느냐는 반문이 나왔다. 임국정은 주저 없이 신뢰한다고 답했다. 엄인섭은 1908년 여름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한 연해주 의병의 중견 지도자였다. 우영장 안중근과 함께 좌영장으로서 의병부대를 지휘한 이였다. 임국정 자신과 개인적 인연도 남달랐다. 우랄산맥에서 벌목노동을 마치고 돌아올 때 그와 함께 의형제 결의까지 한 사이였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했다. 연해주에서 성장한 만큼 러시아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했다. 무기 밀매 같은 은밀한 일을 추진하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임국정은 아무 걱정 말라고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무기 구매 계약은 잘 진행됐다. 비밀 담판에 나갔던 임국정이 사흘 만에 되돌아와 밝은 얼굴로 보고했다. 소총 1천 자루,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을 좋은 시세에 거래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다. 도합 3만2천여원에 해당하는 무기였다. 오늘날로 치면 32억원어치였다. 1월30일 착수금 5만루블(일본돈 1만엔)을 건네고, 이튿날 31일 밤 러시아 군용 자동차에 약속된 분량의 무기를 적재하며, 곧바로 얼어붙은 아무르만을 건너 바라바시 북쪽에 위치한 이도구(二道溝) 방향으로 수송하겠다고 약속했다. 청년들은 기쁨과 함께 긴장감을 느꼈다. 얼마나 간절히 바라던 무기인가. 단숨에 1천 명 규모의 대단위 독립군을 편성할 수 있는 장비였다.

그날 저녁, 김하석 군무부장이 찾아왔다. 뜻밖의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권총과 수류탄을 빌려달라고 했다. 현지 청년들이 일본군 병영 내부에 철병을 촉구하는 선전 삐라를 살포할 예정인데, 거사 당일에 호신용 무기를 갖기 희망한다고 했다.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하루이틀만 빌려달라는 말이었다. 반발이 있었지만 임국정이 승낙했다. 동료들은 그 판단을 존중했다. 책임자 윤준희를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의 권총과 수류탄은 김하석에게 인계됐다.


밀정 통해 동향 파악하던 일본 경찰


적은 항상 우리 안에 있었다. 영화 <밀정>처럼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역들도 거사의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일본 경찰이 심어둔 밀정 때문에 좌절을 겪는다.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제공


합숙소 위치는 하바롭스카야 거리 5번지였다. 집주인 임씨는 조선시대 종9품 말단 관리인 ‘참봉’이라고 불리는 이였다.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을 두지 않고 부뚜막에 방바닥을 잇달아 꾸민 함경도식 가옥이었다. 그 공간을 정주간이라고 불렀다. 안쪽으로 방이 여럿 있는데, 한가운데 방을 청년들이 사용했다. 그 방에는 윤준희가 관리하는, 거액의 지폐와 기밀문서를 넣은 철제 상자도 보관돼 있었다.

1월30일 밤이었다. 내일 저녁에 있을 대규모 무기 인수를 앞두고 청년들은 들떠 있었다. 최봉설과 한상호는 알고 지내는 사이인 지영감네 집을 방문해 즐겁게 놀았다. 술도 마시고 국수도 먹으며 밤이 깊도록 놀았다. 자고 가라는 주인의 친절한 권유를 사양하고 합숙소에 돌아왔다. 밤 11시쯤이었다. 북간도 용정 청년 나일(羅一)이 와 있었다. 반일 혁명 의식이 강렬하지만 ‘15만원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무람없이 신뢰하는 사이였으므로 그날 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밤 12시쯤 다섯 청년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이 들었다.

새벽 3시였다. 일본군 헌병대 1개 소대 병력이 임 참봉 집을 에워쌌다. 밀정의 길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명확히 표적할 수 있었다. 러시아인 경찰관 2명도 대동했다. 외교 문제를 고려해 사전에 연해주 경찰 당국과 교섭한 결과였다. ‘살인강도범’이 신한촌에 잠복해 있음을 탐지했으므로 범인 체포 과정에 입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게 받아들여졌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비로소 헌병대 병력을 출동시켰다.

고등경찰 기토 가쓰미가 이 과정을 지휘했다. 그는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 직함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파견된 경찰 간부였다. 조선 강점 뒤 10여 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붙박이로 근무 중이었다. 밀정을 통해 ‘범인’ 동향을 낱낱이 들여다보던 그는 마침내 디데이를 잡았다.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많은 예산을 들여 오랜 기간 스파이를 양성해온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출입문에서 네 번째 자리에 누웠던 최봉설은 잠결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정주간에서 임 참봉이 누구냐고 물었다. 조선말로 답하는 게 들렸다. “일본 헌병대에서 왔으니 문을 벗기시오!” 화들짝 잠이 깬 최봉설은 동료들을 서둘러 깨웠다. 그새 일본군이 들이닥쳤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총부리와 손전등 불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 사람당 헌병 3명이 달라붙었다. 하나는 총을 겨누고 다른 둘은 오랏줄을 들고서 결박하기 시작했다. 둘째 열에 누운 윤준희만이 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완강히 저항하며 권총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자던 중에 예기치 않은 기습으로 당황해서인지 금방 제압되고 말았다.

최봉설에게도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그는 결심했다. 나 혼자서라도 마지막 힘을 다 써야 하겠다고. 그새 헌병들은 상황이 종료됐다는 듯 긴장감이 다소 풀려 있었다. 그는 앞으로 다가오는 두 헌병의 콧등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그 옆에 선 군인의 급소를 발길질했다. 문 앞에 서 있는 총 든 군인은 박치기로 넘어뜨렸다. 빠르기가 비호같았다.


홀로 가까스로 탈출해 도주한 최봉설


복도로 나갔다. 정주간에 대기하던 헌병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팔을 잡은 놈, 목덜미를 붙잡은 놈, 등짝 옷 덜미를 쥔 놈 등 제각각이었다. 최봉설은 뛰어나가던 기세에 더욱 힘을 가해 몸을 내뺐다. 그바람에 어설프게 신체 한 부분씩을 쥐고 있던 군인들이 구들 위로 나자빠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좋아했다. 학생 시절 간도 연합운동회 때 달리기 경주에서 매번 1등을 독차지했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최봉설’이라고 일컬었을 정도다.

정주문을 나섰다. 총을 짚고서 무심히 서 있는 헌병 하나가 보였다. 그쪽 위치가 한두 계단 낮았다. 최봉설은 뛰면서 공중으로 몸을 날려 그자의 가슴팍을 찼다. 얼음판 위로 나자빠지는 헌병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마당이었다. 헌병이 여럿 모여 있었다. 마당 너머 큰길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여러 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반대편 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판자를 잇대서 짠 나무담장이었다. 함경도 방언으로 ‘장재’라고 불렀다. 여러 집이 잇달아 자리잡은 탓에 반대편 골목으로 나가려면 여러 장재를 뛰어넘어야 했다. 얼추 헤아려도 열 개는 넘었다.

헌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장재를 뛰어넘는 최봉설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는 이집 저집 장재를 무사히 뛰어넘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재를 넘을 때 오른쪽 팔에 총을 맞았다. 솜 넣은 내복을 입고 있었다. 총 맞은 곳에 불길이 일었다. 그는 눈 쌓인 밭에 드러누워 불을 껐다. 불은 껐지만 피가 흘렀고, 통증이 몰려왔다. 오른팔을 전혀 쓸 수 없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다. 이제는 추격을 따돌려야 했다. 산등성이에 비스듬히 자리잡은 신한촌 지형을 고려해 산 아래쪽으로 뛰었다. 아무르스카야 거리, 멜리니콥스카야 거리, 젤레즈노다로즈나야 거리를 차례로 횡단했다. 그 끝은 바다였다. 한겨울이라 바다가 얼어 있었다. 얼어붙은 아무르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건너편 육지까지 거리는 16km였다. 40리 길이었다. 최봉설은 바다를 건너가기로 결심했다.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무르만을 향해 뛰었다. 아무르만은 한겨울에 얼어붙기 때문에 으레 교통로로 사용되곤 했다. 사람과 말은 물론이고 자동차까지 건널 수 있었다.

1월 말 블라디보스토크의 겨울 온도는 영하 20∼30℃를 오르내렸다. 한밤중인데다 강한 바닷바람이 거침없이 불었다. 체감 온도는 더 낮았다. 잠자던 중 느닷없이 습격당했기 때문에 최봉설은 옷을 충분히 갖춰입을 수 없었다. 양말과 내복을 입었을 뿐이다.

그는 얼어붙은 바다 위를 뛰었다. 왼팔로 총 맞은 오른팔을 쥐고서 달렸다. 절반쯤 건넜을 때다. 아무르만 한가운데였다. 거기에 또 하나의 난관이 버티고 있었다. 바닷물이 얼지 않은 채 흘렀다. 절망감이 몰려왔다. 얼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퇴양난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다시 육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서 3km 떨어진 브타라야 레츠카 철도역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역전 큰 바위 밑에 도착했다. 어느덧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총상 입고 온몸이 얼어붙었는데 과연 어디로 가야 살 수 있을까?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는 신한촌에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당도해 분산 유숙할 때 머물렀던 채성하의 여관을 떠올렸다. 더욱이 그 집에는 딸 채계복(蔡啓福)이 머물고 있었다. 서울 경신여학교에 유학하는 중 3·1운동에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선 애국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채성하의 집은 아무르스카야 거리 22번지에 있었다. 피습당한 합숙소 임 참봉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최봉설은 살금살금 여관에 접근해 조심히 문을 두드렸다.

최봉설의 기대는 적중했다. 그는 채씨네 가족의 진심 어린 보호를 받았다. 운도 좋았다. 때마침 여관에 투숙 중이던 여의사 이혜근의 집도로 오른팔에 박힌 탄환을 빼냈다. 적절한 응급조치도 받았다. 여자들은 최봉설의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얼어붙은 양말을 가위로 뜯어냈다. 온몸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하지만 최봉설의 상태는 심각했다. 눈과 입을 빼고 온몸이 얼어 있었다. 몸이 녹으면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신음하는 환자를 간호하며 채계복은 안타까워 흐느꼈다.

채성하는 지혜로운 이였다. 여관은 위험했다. 환자를 안전하고 믿을 만한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는 가까운 곳에 개점한 아들 채창도의 가게를 선택했다. 가게 한쪽에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새로 벽지를 발라 밖에선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곳에 환자를 은밀히 수용했다. 가족 중에선 오직 채계복만 드나들게 했다.

병상에 누운 최봉설은 자나 깨나 끌려간 동료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악행에 얼마나 고생할지, 고문을 이겨낼 수 있을지, 말 못할 불행을 겪지나 않을지 근심이었다. 게다가 끝내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무엇이 잘못됐기에 헌병대의 습격을 받았을까? 도대체 누가 밀정이란 말인가? (다음회에 계속)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206.html 




1920년 일본 현금 호송대 습격해 탈취한 자금으로 독립군 무장 계획한 ‘철혈광복단’
좁혀오는 검거망 피해 150억원 상당 현금 들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데…



1920년 1월4일 북간도의 비밀결사인 ‘철혈광복단’이 일본은행의 현금 수송 행렬을 습격했다. 탈취한 자금으로 조선독립군을 무장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들은 성공했을까.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마적떼가 만주의 열차를 습격하는 장면. CJ엔터테인먼트 제공


48km였다. 두만강변 국경도시 회령에서 북간도 용정에 이르는 거리다. 조선의 전통적 거리 측정 단위로는 120리 길이다. 사람의 평균 걸음으로 1시간에 10리쯤 걸을 수 있으니 새벽 일찍 출발해 부지런히 걸으면 저녁 무렵 도착한다. 아직 철도나 자동차 도로가 없던 때다. 두 곳을 오가려면 걷거나 말을 이용한다.

1920년 1월4일은 월요일이었다. 무장 경관들의 호위를 받는 현금 수송 행렬이 아침 8시30분 회령을 출발했다. 호송대는 모두 6명으로 호위 경관 2명과 은행원, 우편물 호송인 등이다. 이들의 임무는 일본 식민지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거액의 현금 행낭을 인수해 용정지점에 안전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 돈은 청국 연길과 조선 회령을 잇는 길회선 철도 부설 자금이었다. 철도 부설권은 1909년 간도협약 때 청국이 일본에 양도했다.


현금 수송 행렬 습격한 조선인 마적


현금 수송은 긴장되는 업무지만 호송대에 낯선 일은 아니었다. 최근 3개월 동안 두 차례나 같은 일을 했다. 첫 번째는 1919년 10월 중순 35만원을 옮겼고, 두 번째는 11월 중순 28만원을 운반했다.①

현금을 담은 철제 궤와 우편물 행낭을 실은 말 두 마리를 앞세우고, 무장 경관들이 말에 올라탄 채 뒤따랐다. 마상에 올라앉은 두 경관은 위풍당당했다. 경관 정복을 입고 허리에 군도를 차고, 어깨에 장총을 멘 채 옆구리에는 육혈포까지 장착했다. 다른 대원들도 권총을 휴대했지만 말고삐를 쥐거나 직접 걸어야 했다. 일행은 도중에 점심 식사를 하려고 신흥평이라는 마을에 머문 것을 제외하고 쉼없이 이동했다.

호송대는 해가 진 뒤 용정에 닿을 수 있었다. 저녁 6시 무렵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철이라 일몰 뒤 40분쯤 지난 때였다. 음력 보름날이라서 달이 밝았다. 6km만 더 가면 목적지였다. ‘동량(東良) 어구’라 부르는 골짜기에 접어들 무렵 멀리 용정 시내의 불빛이 보였다. 앞서가던 선임 경관 나가토모(長友嘉相次) 순사가 말했다. “저 아래 보이는 전기불빛은 용정 일본영사관 지붕 위에 비치는 것이다. 이제는 다 온 것이나 다름없다.”② 그 말에 일행은 긴장을 풀었다. 약속이나 한 듯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때였다. ‘사격!’ 신호와 함께 한 무리의 검은 그림자가 총을 쏘며 달려들었다. 이들은 중국인 마적처럼 모자와 의복, 신발을 갖춰 입었다. 달빛 아래 교교하던 골짜기가 총소리와 고함으로 뒤덮였다. 맨 앞에서 호송대를 이끌던 나가토모 순사가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 옆에 동행하던 회령 거주 조선인 상인 진길풍(陳吉豊)도 관통상을 입고 쓰러졌다. 거리를 두고 뒤따라오던 다른 대원들은 요행히 탄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맞서 싸우는 대신 안전을 택했다. 느닷없이 닥친 일이라 어찌할 줄 몰랐고, 습격자 수도 호송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건 발생 다음날 일본군 회령 헌병대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가 남아 있다.③ 이 문서에 ‘조난’ 경위와 피해 상황이 기록돼 있다. 문서를 보면 습격자는 ‘총기를 휴대한 조선인 마적 십수 명’이었다. 범인을 ‘조선인 마적’이라 지목한 점이 눈에 띈다. 마적 복장을 한 것이 신분을 은폐하는 데 보탬이 됐지만, 끝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감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습격자 수가 10명이 넘는다고 기재한 점이 이채롭다. 수를 과대하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는 살아남은 호송대원들의 심리가 반영됐다.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피신 행위가 불가항력이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사망한 호송대원은 2명이었다. 복부 관통상을 입은 중상자는 인근 병원에 후송됐으나 이튿날 절명했다. 수송마 두 마리는 탈취당했고, 말 등에 실었던 철제 궤와 우편물 행낭도 빼앗기고 말았다.


150억원에 해당하는 현금 탈취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역들인 최봉설과 임국정. 1919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촬영. 독립기념관 제공


짐을 실은 수송마도 중요했다. 총소리에 놀라 허둥대는 사이 윤준희(26·尹俊熙)가 말에 올랐다. 또 다른 말은 최봉설(23·崔鳳卨)이 낚아챘다. 두 사람은 골짜기 서쪽 산등성이로 말을 몰았다. 내심의 목표 지점과 반대 방향이었다. 눈 위에 찍힐 말 발자국을 서쪽 화룡(和龍)현 방면으로 유도하려는 행동이었다.

그 뒤를 두 사람이 따라붙었다. 타고 갈 말이 없어 부득이 뛰어야 했다. 임국정(25·林國禎)과 한상호(21·韓相浩)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따라갔다.

습격자는 도합 6명이었다. 남은 두 사람은 사전에 약정한 대로 대열에서 벗어났다. 박웅세(朴雄世)와 김준(金俊)은 습격 작전에만 가담하고 이후에는 독립적으로 행동하자고 약속했다. 뒷날 두 사람은 각자의 행로를 걸었다. 박웅세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려고 박건(朴健)으로 개명했으며, 사회주의 항일단체 ‘적기단’의 유명한 구성원이 되었다. 문필이 뛰어났던 김준은 재러시아 고려인 사회에서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했다.

습격대는 비밀결사 ‘철혈광복단’ 단원이었다. 이들은 1910년대 북간도의 3대 항일 중학교로 이름 높던 명동(明東)중학, 창동(昌東)학원, 광성중학 졸업생 가운데 선발됐다. 민족의식이 높고 반일 혁명운동에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철혈광복단은 북간도 3·1혁명을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19년 3·13 용정 만세시위를 이끌고, 그해 7월 북간도 민족운동 방향을 평화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단체였다.④

산속으로 4km쯤 들어갔을까. 습격자들은 말을 멈춰 세웠다. 전리품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보름달이 밝게 비치는 공간에서 짐을 부렸다. 철제 궤에는 고액권 지폐가 띠지로 묶인 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5원짜리 지폐 2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100개, 10원짜리 지폐 100장을 묶은 1천원 다발이 50개였다. 도합 15만원이었다.

놀랄 만한 거금이었다. 1919년 당시 경기도 수원에 사는 4인 가족이 가장 월급 25원으로 근근이 생활하던 시절이다.⑤ 전리품 15만원은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150억원에 해당한다.

탈취금 전액을 무기 구입에 쓰면 조선독립군의 전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그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 은밀히 거래되는 무기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소총 1자루와 탄환 100발’ 한 세트를 30원 정도면 살 수 있었다. 개인 화기만이 아니다. 공용 화기인 기관총 1문을 구매하는 데 200원이면 족했다.


500명 부대 9개 무장할 수 있는 돈


‘15만원 탈취 사건’ 현장 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군 부대의 실제 무장 상태를 보자. 1920년 7월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 왕삼덕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부대의 군인은 500명, 소총 500자루, 공용 화기인 기관총 3문이 있었다.⑥ 말하자면 15만원이란 돈은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9개나 더 편성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다음 목표는 거액의 현금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자면 말 발자국을 따라 뒤쫓아올 추격대도 따돌려야 했다. 네 사람은 역할을 분담했다. 한 사람은 추격대를 유인하기로 했다. 임국정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말을 타고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기로 했다. 백두산 방향 서쪽 산악지대 깊숙이 들어가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말 두 마리를 몰고 즉각 길을 떠났다.

다른 세 사람은 현금 다발 150개를 나누어 배낭에 넣고 짊어졌다. 밤을 새워서라도 속히 안전지대로 이동해야 했다. 염두에 둔 목표지는 용정 동북쪽에 위치한 왕청(汪淸)현의 산악지대 의란구(依蘭溝)였다. 거기에는 철혈광복단 동지이자 사냥을 업으로 하는 김포수가 아내와 단둘이 거주하는 외딴 가옥이 있었다. 그곳에 집결하기로 약속했다.

세 사람은 지체 없이 길을 떠났다. 그들은 도회지인 용정을 우회하여 국자가(局子街·오늘날 연길) 교외에 위치한 와룡동까지 약 80리 길을 걸었다. 32km나 되는 눈 쌓인 산길을 밤새 걸었다.

와룡동에는 최봉설의 집이 있었다. 새벽닭이 울 즈음 도착했다. 머지않아 날이 밝을 터이므로 의심받지 않게 옷을 갈아입고, 운송 수단도 바꿔야 했다. 청년들은 한복 두루마기로 갈아입었다. 두루마기는 품이 넉넉해 돈다발을 감추기에 적합했다. 운송 수단도 얻었다. 최봉설의 아우 최봉준의 도움을 받아 소달구지를 동원해 값비싼 화물을 수송했다. 와룡동에서 의란구 김포수의 집까지 40리 길, 16km였다.

의란구 김포수의 집은 외딴 산속에 있는데다 향후 행로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북쪽으로 향하면 무장투쟁의 한 거점인 하마탕(哈蟆塘), 동쪽으로 향하면 국경을 넘어 연해주로 갈 수 있었다. 청년들은 이곳에서 뜻밖의 인물과 조우했다. 연해주 조선인들의 자치단체 대한국민의회의 군무부장으로 재임 중인 김하석(金河錫)이 그곳에 있었다. 우연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김하석은 네 청년들에게 블라디보스토크행을 권했다. 그곳에서는 손쉽게 무기를 구매하고, 일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준희와 임국정이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두 청년은 이견을 보였다. 전설의 의병장 홍범도가 본부로 삼은 하마탕을 찾아 북행하자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양쪽에서 심각한 토론이 벌어졌다. 거금을 가지고 어디로 갈 것인지가 쟁점이었다.


마침내 발각된 범인의 윤곽


용정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는 발칵 뒤집혔다. 현금 호송대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경관대 11명을 현장으로 급파했다. 밤 10시가 넘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사건 현장과 주변을 세밀하게 수색했다. 범인이 누군지, 어디로 도주했는지 추론할 단서가 필요했다.

그러나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사건 현장에서 60m 떨어진 농경지에서는 구식 엽총의 총신이 발견됐고, 서북쪽 100m 지점 산기슭에 버려진 우편물 행낭을 발견했다. 재암골, 남양동, 동량 같은 사건 현장 부근 조선인 마을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이틀에 걸친 노력이 헛수고였다.

일본 관헌들은 무차별적으로 수사를 확대했다. 평소 반일 성향을 보이던 조선인 마을과 인물에 대해 아무 근거 없이 야만적인 압박을 가했다. 북간도 주요 도로와 고개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반일 성향의 명문 중학교 소재지는 가혹한 구타와 수색의 대상이 됐다. 명동학교 소재지 장재촌, 창동학원 소재지 와룡동이 곤욕을 겪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별 증거 없이 구타하고 수색해 한동안 청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의 교통이 두절되기도 했다.

그뿐인가. 일본은 청국 정부의 북간도 행정 책임자인 연길도윤에게 범인 체포에 협력해줄 것을 요구했다. 연길도윤은 요구에 따랐다. ‘포고 제2호’를 발표하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일본돈 5원 지폐와 10원 지폐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청국 관청에 보고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본 관헌의 범인 추적이 급진전을 보인 것은 조선은행 용정출장소 사무원 전홍섭(31·全洪燮)을 체포하면서다. 경찰은 내부자를 의심했다. 현금 수송은 소수만 아는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범인이 알았을까? 내응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은행에서 근무하는 조선인 은행원들이 경찰에 불려갔다. 그 결과 평소 반일 조선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전홍섭이 표적이 됐다.

마침내 전홍섭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궁금해하던 정보들이 입수됐다. 범인의 윤곽이 떠올랐다. 조선은행권 15만원 탈취 사건에 가담한 범인의 이름과 신상이 경찰에 발각되고 말았다. 1월10일 와룡동을 일제 수색한 것은 일본 관헌이 범인 신상을 정확히 파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날 일본 경찰 37명과 청국 관헌 53명은 와룡동을 포위하고 100여 민가를 전부 수색했다. 급기야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 등 가족을 체포하고 범인 소재지를 밝히라며 가혹한 고문을 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


15만원 탈취 사건의 네 주역이 김하석과 더불어 중국~러시아 국경을 넘은 것은 사건 발생 3일째 되던 날이다. 그들은 하마탕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토크를 행선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마탕 노선을 주장하던 최봉설과 한상호가 다수결을 존중해 자신의 의사를 철회한 것이다. 그들이 포시에트 항구에서 블라디보스토크행 기선에 탑승한 것은 사건 발생 4일째 되던 날이다. 밤 9시 기선이 출발하며 뱃고동 소리를 길게 울렸다. 기선에 탑승한 네 청년은 안도감을 느꼈다. 일본 은행을 습격하여 얻은 자금으로 조선독립군을 무장시킨다는 무모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계획이 성공한 것만 같았다.⑦(다음회에 계속)


참고 문헌

① 高等法院刑事部, ‘大正10年刑上第42,43號 判決(全洪燮 등 4인) ’, 1921. 4.4. <독립군의 수기> 국가보훈처, 1995, 334쪽

② 崔溪立,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40주년을 맞으면서, ’ 1959. 1, 위의 책, 289~290쪽

③ ‘會憲機第1號,於間島公金及郵便物遭難ノ件’ 1920. 1.5.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8> 국사편찬위원회, 2002, 321~322쪽

④ ‘간도 십오만원 사건, 최계립 회상기 ’, 1958. 6.15. <이인섭과 독립운동자료집 Ⅳ> 독립기념관, 2011, 171쪽

⑤ ‘절약의 實例, 25원으로 네 식구가 살아가오’ <매일신보> 1919. 8.3

⑥ <조선민족운동연감>, 金正明 편, <조선독립운동 2> 東京, 原書房, 258쪽

⑦ 최계립, 앞의 글, 295쪽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100.html 




폭탄 반입 기도해 검거된 중립공산당 핵심 김한
 조선 자유와 해방 당위 설파한 최후진술로 보복



법정에서조차 부당한 제국주의 권력에 저항한 아나키스트 박열처럼, 김한은 피고인 최후진술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정면 비판하다 판사의 보복 선고를 받았다.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검거 선풍이 불었다. 1923년 1월17일 서울 삼판통(후암동)과 1월22일 효제동 총격전이 발발한 뒤 일본 경찰은 연루자 체포에 혈안이 됐다. 총격전의 주인공 김상옥이 이미 사망했는데도 그랬다. 현직 경관 4명이 사살당하고 총상을 입은 것에 경찰은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품었다. 김상옥과 조금이라도 접촉했거나 관련된 사람이라면 옥석을 가릴 것 없이 마구 잡아들였다.

김한(金翰)도 그 속에 있었다. 한때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법무부 비서국장을 지냈고, 합법적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 상임위원으로 재임 중이던 그는 37살의 팔팔한 장년이었다. 그가 종로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된 것은 1월28일이었다.① 효제동 총격전이 일어난 지 열흘 되던 때였다. 그날 체포된 사람은 김한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두 사람이 김상옥 사건 연루 혐의로 경찰에게 붙잡혔다.② 연루자들을 낱낱이 적발하기 위해 경찰이 큰 힘을 들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고문으로 병상에 누운 채 재판받아


되돌아보면 김상옥의 효제동 은신처가 발각된 것도 한 연루자의 자백 탓이었다. 경성우편국 소속 우편배달부로 일하는 전우진(全宇鎭)이 고문에 못 이겨 비밀을 토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3·1혁명 시기에 비밀결사 ‘혁신단’ 활동을 함께한 김상옥의 오랜 동지였다. 이번에도 비밀리에 잠입한 김상옥을 변함없이 도와주었다. 보기를 들면 경성역 수화물 취급소에 배달된 김상옥의 화물을 대신 수령했고, 비밀 편지를 여러 관련자에게 전달했으며, ‘불온 문서’ 제작을 거들었고, 회합 장소와 숙식 등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신뢰할 만한 동료임에도 그는 고문에 꺾이고 말았다. 효제동 은신처를 발설한 데 이어 경찰대를 이끌어 현장까지 안내하는 일마저 해야 했다.③

전우진의 배신은 김상옥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이 은밀한 내막은 가족도 알고 있었다. 김상옥의 부인 정진주 여사는 해방 이후 신문 기자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동지였던 전모씨의 배신’ 탓에 남편이 죽었노라고.④ 그럼에도 전우진은 김상옥 사건에 연루돼 2년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가 됐다. 1990년 한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없다.⑤

체포된 사람들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경찰들은 독이 올랐다. 시국사건이든 일반 형사사건이든 가리지 않고 피의자를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이 그들의 평소 습성이었다. 하물며 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된데다 현직 경관들이 살해되고 부상을 입지 않았는가. 취조 경찰들은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여 있었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심각한 폭행과 가혹행위가 이뤄졌다.

28살 미혼 여성 이혜수를 보기로 들 수 있다. 김상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그녀는 경찰 취조 중에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녀의 상태는 위중했다. 심지어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뒤 열린 재판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이혜수는 병상에 누운 채 재판정에 나와야 했고, 침대에 누워 신음 소리로 가족의 말을 거쳐 겨우 문답에 응할 수 있었다. 그녀는 3·1혁명 때도 비밀결사 애국부인단에 가담한 경력이 있었다. 신문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 부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⑥


경찰 취조가 끝난 뒤 ‘죄질’이 무겁다는 이유로 검찰에 송치된 이는 도합 19명이었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하나는 김상옥과 같이 비밀결사 활동을 해온 동료들이었다. 1919년 ‘혁신단’에 함께 소속된 신화수(27), 윤익중(28), 정설교(27), 전우진(41), 이혜수가 그들이다. 이 중 앞자리에 거론한 세 사람은 1920년 김상옥과 함께 암살단 사건에도 연루됐다. 상하이에서 국내로 잠입할 때 동행한 안홍한(21)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들은 범죄의 형적이 뚜렷하고 증거가 충분하다는 이유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의해 기소됐다. ‘불온’ 인쇄물을 제작한 혐의를 받은 서병두(44)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 가운데 가장 중형



1929년 42살 때 경찰서에서 사진 찍은 김한(왼쪽)의 모습.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필적(1928년 1월1일 김재봉에게 쓴 연하장). ‘마포구 224, 김한’이라고 쓰여 있다. 김윤 제공


다른 한 부류는 김상옥에게 숙식과 활동의 편의를 제공한 사람들이었다. 연락과 통신의 편의를 제공한 여관업자 이수영(37)과 승려 이종욱(40), 지방도시인 함경남도 원산에서 숙소를 제공해준 주광보(19)가 그들이었다. 효제동 은신처를 제공한 이태성(63) 집안의 경우 일가족 6명이 모두 고초를 겪었다. 이 집은 ‘딸 부잣집’이었다. 아내 고성녀(61)와 맏딸 이혜수를 비롯한 네 딸이 모두 경찰 취조를 감당해야 했다. 김상옥의 가족도 핍박을 받았다. 친동생 김춘원(32)과 매제 고봉근(28)이 곤욕을 치렀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경찰서에 갇혀 두 달 동안 끔찍한 취조를 받은 뒤에야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증거 부족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김한은 이채로운 존재였다.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김상옥과 비밀결사 활동을 함께한 적이 없었다. 이렇다 할 네트워크도 맺고 있지 않았다. 혈연이나 출신 지역의 공통성 같은 생래적 연줄도 없었다. 뭔가 편의를 제공한 적도 없었다. 김한은 다른 피의자들과 아무런 공통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김상옥과 가장 깊숙하고도 위험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김한의 피의 사실은 가장 엄중했다. 그는 적어도 5회에 걸쳐 대리인을 통해 재상하이 의열단장 김원봉과 비밀 교신을 했고, 그 결과 대규모 음모를 계획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내에 다량의 폭탄을 몰래 반입해 조선 내부를 일거에 동란에 빠트린다는 계획이었다. 김한은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김원봉에게서 2천원의 자금까지 수령했다고 한다.⑦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일간 신문사 기자 월급이 40원이고, 총독부 서기관의 월급이 50원이었다. 또 일용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원 또는 1원10전 하던 때였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2억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취조 결과에 따르면 폭탄은 미처 반입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한은 의열투쟁을 감행하려 국내에 잠입한 김상옥에게 그것을 넘겨줄 수 없었다. 일본 사법 관료들이 보기에, 범죄행위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죄질이 심각했다. 김한은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1년6개월에서 3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구형받았는데, 김한의 구형량은 징역 5년이었다. 대략 곱절이었다.

김한이 체포되자 그가 몸담은 비밀결사 구성원들은 잔뜩 긴장했다. 비밀결사의 존재가 탄로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 조성됐기 때문이다. 김한이 가담한 조직은 3·1혁명 이후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비밀결사였다. 사회주의 이념을 수용하고, 노동자를 비롯한 무산자 대중을 위해 일하며, 조선혁명의 대의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혁명가들의 결사였다.

이 비밀결사의 명칭은 ‘조선공산당’이었다. 이름이 같다고 혼동해서는 안 된다. 뒷날 1925년 전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단일한 공산당을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다른 것이었다. 둘을 구분하기 위해 김한이 가담한 1922년의 비밀결사를 ‘중립 조선공산당’이라고 부르는 게 적당하겠다. 줄여서 ‘중립당’이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그 단체를 가리켜 ‘중립공산당’이라거나 ‘중립당’이라는 호칭으로 즐겨 불렀다.


일 꾸미고 작전 짜는 데 탁월


왜 ‘중립’인가? 3·1운동 이후 조선 내부로 사회주의 사상과 운동이 도도히 흘러들었는데, 이 흐름을 주도한 단체는 해외에 기반을 둔 두 개의 ‘고려공산당’이었다. 그러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불리는 두 공산당은 조선 국내의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서로 다투는 게 옳지 않고 둘 다 정책이 부적절하다는 것이 김한을 비롯한 국내 신진 사회주의자들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제3의 공산당을 세우려 했다.

이 비밀결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가장 이른 것으로 1921년 메이데이(5월1일)에 설립했다는 정재달의 주장이 있지만,⑧ 자기 단체의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소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1922년 1월 즈음 성립됐다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그해 1월19일 ‘무산자동지회’ 명칭의 합법적 사상단체가 등장한 사실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합법 영역의 공개 단체와 비밀결사를 거의 같은 시기에 조직하는 것이 상례였다.

중립당에는 3·1혁명 투사들이 속속 가담했다. 감옥에 갇혔다가 이제 막 출옥한 청년들이 사회주의운동 대열에 들어왔다. 조봉암의 회고에 의하면 1922년 경성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이끈 두 지도자가 있었다. 바로 김한과 김사국이었다. 조봉암은 이들을 가리켜 ‘양웅’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스타일과 개성이 달랐다. 김한은 책사(策士)형이고, 김사국은 투사(鬪士)형이었다.⑨ 김한은 일을 꾸미고 작전을 짜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에 비해 김사국은 뜻이 굳세고 강직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끝까지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나아갔다고 한다.⑩

시인 황석우가 남긴 인물평도 비슷했다. 그가 보기에 김한은 일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업을 추진할 때 자신의 모든 정열과 재략을 넘치도록 발휘했다고 한다. 꾀가 많고 신출귀몰하는 재주꾼이었다. 만약 혁명가로서 사명감과 정열이 없었더라면, 김한은 천성으로 미뤄볼 때 전율할 만한 악당의 괴수가 됐을 것이라고 평했다.⑪

두 사람은 중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나란히 선임됐다. 둘이 악수하니 조선의 사상계가 크게 요동쳤다. 두 사람은 신진 사회주의자들을 이끌고 기존 양대 고려공산당을 배격하는 일련의 캠페인을 전개했다.

그중 첫 번째는 그해 1~2월에 추진된 김윤식 사회장 반대운동이었다. 구 한국의 개화파 대신이던 김윤식의 장례식을 조선 최초의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르려 했던 상하이파 공산당과 민족주의 그룹의 의도를 저지했던 것이다. 4월에는 청년운동 내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의 영향력을 약화했다.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총회 석상에서 서울청년회를 비롯한 5개 회원 단체의 탈퇴를 단행케 한 일이 그것을 의미했다. 6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에서 상하이파 공산당에 소속된 임원 6명을 제명했다. 또 서울청년회 제5회 총회 석상에서 상하이파 출신 임원 5명을 축출했다. 9월에는 노동대회라는 단체에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소속의 기존 간부들을 배제하고 노동자적 성격을 강화했다.


노동운동 헤게모니 장악한 중립당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1922년은 노동자가 비로소 직접 노동운동을 개시한 해라거나, 민중에게 혁명의 씨앗을 뿌리고 해방의 길을 제시한 첫해였다는 경찰 쪽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⑫ 국내 민중운동의 헤게모니는 신진 사회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갔다. 김한과 김사국이 공동으로 이끌던 중립당이 해낸 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협력이 항구적으로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둘은 그해 말쯤 갈라섰다. 달리 말하면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분열 과정에서 중심인물이 됐다. 김한은 뒷날 ‘화요파’라는 공산그룹의 수장이 됐고, 김사국은 ‘서울파’라고 불리는 비밀결사를 대표했다.

두 사람의 의견이 불일치한 지점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큰 것 하나가 바로 의열투쟁 전술에 대한 태도였다. 김한은 의열투쟁을 가리켜 3·1혁명 이후 가라앉고 있는 대중의 투쟁 의욕을 북돋는 수단으로 높이 평가했다. 그 때문에 해외의 의열단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대규모 폭탄 반입 공작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에 반해 김사국은 의열투쟁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것은 광범한 대중을 투쟁으로 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며, 대중과 운동단체의 괴리를 심화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은 각각 제 길을 걸었다. 김상옥 사건은 이처럼 초창기 국내 사회주의운동이 분열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1923년 5월17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정이었다. 김상옥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제2회 공판이 열렸다. 피고인 최후진술이 허용되자 김한은 작심한 듯 발언을 토해냈다. 그는 얼굴에 세상을 비웃는 듯한 빛을 띠고 일어서서, 약 1시간 동안 흐르는 물같이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그의 발언 요지는 총독부의 식민지 통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총독 정치가 얼마나 조선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조목조목 설명했다. 교육과 산업은 물론이요, 어느 방면을 보더라도 조선 사람은 ‘불평’과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에게 남겨진 것은 총독부 법령을 위반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 김상옥 사건은 다름 아니라 총독 정치가 만든 것이라고 발언했다. 김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혁명을 언급했다. 혁명을 위험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우주 만물이 살아가는 자연법칙이라고 설명했다. 헤겔과 다윈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조선 사람이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한의 진술은 감동적이었다. 신문기자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입추의 여지 없이 들어찬 방청석을 비롯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조리 있는 말을 숙연히 경청했다.

그러나 김한은 재판부에 보복을 당했다. 그로부터 10일 뒤 열린 선고 공판에서 재판장 미쓰야(三矢) 판사는 그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순간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검사 구형보다 2년이나 더 무거운 형량이었기 때문이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방청객들은 법정을 나서면서 울분을 토했다. 불평을 부르짖고 판사를 원망하는 소리가 높았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의 외조부


김한의 최후진술은 피억압자에게는 감동을 주고, 억압자에게는 보복의 칼날을 갈게 했다. 진실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그의 진술은 당대인에게만 영향을 주는 데 머물지 않았다. 60년이 지난 뒤,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투쟁하다 투옥된 그의 외손자 우원식(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그 진술로부터 감동을 받았다. 자긍심과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⑬

김한의 진술에서 주목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끝내 비밀결사 중립공산당의 존재를 발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해외 망명자들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폭탄 반입을 모의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개인의 판단과 책임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시종일관 이렇게 진술했다. 그리하여 김한은 일본 관헌들의 야수적인 취조 속에서도 비밀결사의 동료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진술 전략은 주효했다. 중립당은 삼엄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노출되지 않았다. 체포된 혁명가는 어떻게 진술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 문헌

① ‘무산자회 간부의 검거’, <조선일보> 1923년 1월30일치

② ‘李遂榮씨도 검거’, <조선일보> 1923년 1월30일치

③ 宋相燾, <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 제2집), 국사편찬위원회, 320쪽, 1955

④ ‘열사의 후예들 6: 김상옥 의사의 미망인 鄭여사’, <동아일보> 1959년 11월28일치

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⑥ ‘병상에 누운 대로 이혜수양 공판’, <동아일보> 1923년 12월26일치

⑦ ‘폭탄과 권총의 대음모 김상옥 사건의 공판’, <동아일보> 1923년 5월13일치

⑧ История и деятельность нейтральной коркомпартии: Доклад делегата Тену(중립공산당의 역사와 활동, 대표자 전우의 보고), с.7,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64, л.51-57

⑨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죽산 조봉암 전집> 1, 344∼345쪽, 1999

⑩ 金思國氏 永眠, <동아일보> 1926년 5월10일

⑪ 황석우, ‘나의 8인관’, <삼천리> 4-4, 29쪽, 1932년 4월

⑫ <고등경찰보> 4, 281쪽, 283쪽

⑬ 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53쪽, 2011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039.html 





남편 김영화 <밀정> 총격전 실제 모델인 암살단원 김상옥
 총독 암살 기도 후 경찰과 벌인 3시간 총격전 전모


750만 명이 관람한 영화 <밀정>의 초반부에 의열단원의 격렬한 총격전이 나온다. 인상적이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다. 그 총격전은 역사상 실제 모델을 재현했다고 한다. 1923년 1월 김상옥의 ‘경성 천지를 진동시킨 총격전’이 바로 그것이다. 영화 속 총격전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있다. 이를 감안해 허구적 측면을 버리고 실제만으로 구성된 신뢰할 수 있는 역사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부응하기 위해 글을 작성했다.

김상옥에 관한 기존 연구 성과들도 이 사건을 상세히 묘사한 바 있다. 하지만 사료상 뒷받침되지 않는 주관적 설명을 포함하거나, 대사를 넣거나, 전투 양상을 과장하는 등의 폐단이 없지 않았다. 임경석 교수는 아무 과장 없이, 사료에 뒷받침된 객관적 사실만으로 당시 상황을 구성했다. _편집자


영화 <밀정>의 초반부에 나오는 총격전. 1923년 1월 암살단원 김상옥이 조선총독부 경찰과 벌인 총격전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그날 해 뜨기 직전 경성 기온은 영하 18.8℃였다. 1년 중 가장 추운 때라 할 만했다. 이틀 전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차 다니는 큰길이나 구불구불 골목길 할 것 없이 꽁꽁 얼었다.

새벽 5시였다. 그날 일출 시각이 7시49분이었으므로 동트기에는 이른 때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무리 장정들이 남산 서남쪽 기슭에 위치한 삼판통(三坂通·오늘날 후암동)의 한 민가를 은밀하게 에워쌌다. 모두 21명이었다.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 소속 경관들로 이뤄진 형사대였다.


경성 천지가 물 끓듯 펄펄 끓어


그들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추적하고 있었다. 닷새 전인 1월12일 초저녁 누군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경찰서 건물의 일부가 파손되고 정문 앞을 지나던 행인 7명이 다쳤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의미는 중대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의 지휘 아래 대대적인 수사가 개시됐다. 다수의 혐의자가 붙잡혔고, 시내 요소요소에 경계망이 펼쳐졌다. 계엄령을 내린 듯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성 천지가 물 끓듯 펄펄 끓었다. 그러던 차에 동대문경찰서에 첩보가 들어왔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삼판통 304번지에 은신해 있다는 것이었다. 믿을 만한 정보였다.

음력 12월 초하루인지라 달이 뜨지 않았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고 추위도 매서웠다. 매우 어두웠지만 경관들은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혐의자 체포에 즉각 착수했다. 형사대는 돌격조와 매복조로 나뉘었다. 돌격조 4명의 민완 경관들이 널빤지를 잇대 만든 허술한 담장을 뛰어넘었다. 남은 경관들은 집을 에워싼 채 매복했다.


유도 2단에 날래기로 유명한 종로서의 다무라 조시치 형사부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선두에 섰다. 그 뒤를 종로서 경부 이마세 긴타로 사법계 주임과 동대문서 경부보 우메다 신타로 고등계 주임이 바짝 따랐다. 동대문서의 조선사람 장(張) 형사가 뒤를 이었다. 다무라는 혐의자가 은신한 건넌방 문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잠겨 있었다. 다시 한번 힘껏 잡아챘다. 그 바람에 문고리가 빠지며 왈칵 문이 열렸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쉴 새 없이 연이어 울렸다. 방 안에서 권총 탄환이 쏟아져나왔다. 다무라는 심장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즉사였다.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최후를 마쳤다. 방 안에서는 하얀 눈이 깔린 바깥쪽이 잘 보였지만, 밖에서는 어두운 방 안이 보이지 않았다. 뒷걸음치던 이마세 경부는 오른쪽 손목과 왼쪽 옆구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도망치던 우메다 경부보는 등에서 어깨로 관통상을 입고 거꾸러졌다. 열어젖힌 문짝 뒤에 숨었던 장 형사만 무사할 수 있었다.

집 밖에서 매복하던 형사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종잡을 수 없었다. 요란한 총소리가 경찰이 쏘는 것인지 반대편이 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몇 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총성이 그친 뒤 집 안으로 들어간 형사들은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다. 토방의 위아래와 좁은 마당에는 붉은 피가 낭자했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범인은 집 뒤쪽 담을 넘어 산속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를 추격하려 했으나 어둠이 가로막았다. 도망자의 행방을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권총과 폭탄으로 조선 독립에 헌신


중국 상하이 망명 중 사진관에서 찍은 김상옥의 전신 사진.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제공

 
남산에 수색망이 펼쳐졌다. 날이 밝자마자 온 산에 경찰이 쫙 깔렸다. 경기도 경찰부 지휘 아래 경성 시내 각 경찰서는 물론 인근 지방 경찰서들까지 병력을 냈다. 정복 순사 1천여 명이 동원됐다. 남산을 중심으로 광역 포위망이 구축됐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각처에 비상선을 늘어놓고, 쥐새끼 하나 도망하여 나갈 틈이 없이 엄밀히 경계”가 이뤄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경찰은 이중으로 비상선을 깔았다. 포위망이 뚤릴 것에 대비해 남산 자락의 모든 거주지를 검문하기 시작했다. 삼판통, 광희정, 동대문, 왕십리, 고양군 뚝섬 일대가 주요 수색 대상지로 꼽혔다. 가택수색을 했다. 심지어 굴뚝까지 모조리 뒤졌다. 인접 고을로 넘어가는 고갯길도 차단했다. 행여 양주 방면으로 도주할까봐 망우리고개를 경관 수십 명이 지켰다. 기마대도 출현했다.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요소요소 경계했다. 돌연히 경성 시내 풍경이 바뀌었다. 전시 상태나 다름없었다.

남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이틀 전 내린 눈이 등성이와 골짜기마다 가득했다. 경찰은 눈 위 발자국에 주목했다. 추격대를 조직해 범인 발자국을 뒤쫓았다. 끊길 듯 이어지는 발자국은 삼판통에서 시작해 산을 넘어 왕십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왕십리 방면으로 달아난 형적은 희미하게 찾을 수 있었지만 범인의 소재는 끝내 판명할 수 없었다.

쫓기는 이는 김상옥이었다. 나이는 34살. 동대문 인근에서 태어나고 자란 경성 토박이였다. 직업은 자영업자였다. 동대문 밖 남쪽 도로변에 ‘영덕(永德)철물상’이라는 상호의 번듯한 2층 가게를 지녔다. 결혼해 두 자녀가 있었다.

김상옥 삶의 행로에 전환을 가져다준 사건이 30살 때 발발했다. 바로 1919년 3·1혁명이었다. 그는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고,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발간했다.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김상옥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조선 독립에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10월에 석방된 그는 주저 없이 비밀결사 ‘암살단’ 결성에 참가했고 결국 경찰의 추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가 망명지 상하이를 떠나 비밀리에 조선에 입국한 것은 한 달 반 전이었다. 1922년 12월1일 경성 잠입에 성공했다. 목적은 식민통치의 최고 책임자 조선총독 암살이었다. 권총과 폭탄을 의열투쟁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식민지 지배자들을 응징하고 대중의식의 혁명화를 꾀하려 했다. 제 한 몸 희생해 공동체의 대의를 실현하려 했다.

김상옥이 피습당한 1월17일은 거사 당일이다.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도쿄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에 출석하려고 남대문역에서 경성을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은신처를 남대문역에서 가까운 삼판통으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막내 여동생 ‘김아기’와 매부 고봉근의 살림집이 마침 그곳에 있었다. 남대문역 거사를 준비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곳은 없었다.


맨발로 눈 덮인 산길 넘어 도주


김상옥의 계획은 그날 새벽의 피습 탓에 어그러지고 말았다. 종로서 폭탄 투척은 계획과 상충되는 사건이었다. 거사를 앞두고 절대적인 은신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폭탄 투척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의 압박 수사가 그의 일신에까지 미친 것이다.

추적자가 뒤쫓아올 게 명백했다.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경관들을 멀리 떼어놓으려면 신속히 이동해야 했다. 빠른 속도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추적자를 따돌리려면 눈 위에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눈이 덜 쌓인 돌이나 마른 풀을 골라 내디뎠다. 포위망도 벗어나야 했다. 남산 일원을 에워싼 대대적인 수색망이 펼쳐질 게 틀림없었다. 남산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 했다. 그는 쉼없이 내달렸다. 머뭇거리다 수색망에 갇히면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김상옥은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신발 신을 틈이 없었다. 맨발로 눈 쌓인 산길을 내달려야 했다. 겨우내 내린 눈이 온 산을 뒤덮었다. 눈에 발을 내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졌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길도 없었다.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과연 눈과 얼음 위를 맨발로 몇 시간씩 달릴 수 있는가? 김상옥은 그것을 해냈다. 발이 만신창이가 됐다. 동상과 상처로 인해 피투성이가 됐다.

그는 남산 능선을 따라 달리다 수철리 공동묘지가 있는 응봉산 자락으로 옮겨 탔다. 북동쪽 산기슭에 있는 왕십리의 불교 사원 안정사(安靜寺)로 향했다. 김상옥은 안정사 승려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뜨거운 물과 음식을 제공받았고, 양말과 짚신 한 켤레, 복면 모자를 얻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안심하고 잘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상옥이 동대문 일원에서 오랫동안 거주했기 때문에 아마 두 사람은 안면 있는 사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뒷날 경찰 조사 과정에서는 실제와 달리 얘기해야 했다. 안정사 승려는 낯선 자의 기만과 강압 때문에 부득이하게 소극적으로 편의를 봐주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다음날 저녁 김상옥은 다시 길을 나섰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옷을 바꿔 입어 위장했다. 그는 짚신을 거꾸로 신고 눈길을 걸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경찰의 수사망을 고려한 행위였다.

1월22일은 겨울답지 않게 날씨가 포근했다. 최저기온이 고작 영하 0.6℃였고, 낮에는 기온이 2.2℃까지 올랐다. 절기가 대한인데도 따스했다. 심지어 전날 큰비까지 내렸다. 비 온 뒤라 골목길이 질퍽질퍽했다.


“자결할지언정 포로가 될 순 없다”


총격전이 벌어진 서울 효제동 현장 지도. 재래식 변소에 숨은 김상옥은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였다.


새벽 3시였다. 종로5가에서 혜화동 방면으로 올라가는 도로 오른쪽에 효제동이 있는데, 그곳으로 경찰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효제동 73번지가 목표였다. 그곳에 김상옥이 잠복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삼판통 사건 이후 엿새 동안 잠적했던 그가 여기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첩보는 고문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3·1혁명 때 김상옥의 동료였고 이번에 국내 잠입 뒤 줄곧 그를 돕던 전우진(全宇鎭)이 악형에 못 이겨 비밀을 발설한 것이다.

경찰은 삼판통의 실패를 거울 삼았다. 지휘부 위계와 병력 수가 달랐다. 우마노 세이이치 경기도경찰부장이 지휘했고, 후지모토 겐이치 경기도경 보안과장과 모리 로쿠지 종로경찰서장이 그를 보좌했다. 이들이 현장 지휘부를 구성했다. 경성 시내 각 경찰서에 비상소집령을 내렸다. 비번 순사들까지 동원됐다. 보도에 따르면 ‘수백 명’의 무장 경관이 효제동 일대를 수십 겹 포위했다.

진압도 서두르지 않았다. 포위망을 짜놓은 채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시야를 확보한 상태에서 작전을 전개하려 했다. 동천이 밝아오는 7시쯤 경찰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완전무장한 저격병 30명이 담을 넘고 지붕을 기어올라 화선을 짰다.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 구리타 세이조 경부가 이끄는 결사대 5명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김상옥이 거처하는 방으로 한 걸음씩 접근했다.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마침내 방문을 열어 벼락같이 돌진해 들어갔다. 뜻밖에 방은 텅 비어 있었다. 방 안에는 병풍이 둘러쳐 있을 뿐, 아무런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왠지 벽장문이 수상했다. 구리타 경부는 벽장문을 열어젖히며 들입다 사격을 가했다. 벽장 속에는 옛 한적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뒤에 김상옥이 숨어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조준사격으로 대응했다. 구리타 경부는 오른쪽 어깨에 총을 맞고 거꾸러졌고 다른 결사대원들은 대응사격을 하며 구리타를 부축한 채 철수했다.

벽장 뒷벽은 흙담이었다. 김상옥은 필사적으로 벽을 뚫었다. 다른 도구가 없었다. 맨손으로 벽을 파느라 손톱이 온통 까졌다. 발을 굴러 벽을 차 발가락이 부러졌다. 다행히 뒷벽 한 귀퉁이가 헐렸다. 김상옥은 73번지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옆집 74번지 담을 타고 넘어 대각선에 위치한 76번지 집으로 잠입했다. 공포에 떨던 집주인은 김상옥을 들이려 하지 않았다. 둘은 승강이하며 서로 기를 썼다. 그 소란 탓에 김상옥의 위치가 다시 경찰에게 드러나고 말았다.

76번지와 이웃집 72번지 사이에 빈 공간이 있었고, 그 깊숙한 곳에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사각이 형성돼 탄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좋았다. 김상옥은 그곳으로 숨어들었다. 경찰은 회유를 시도했다. 목숨을 살려줄 테니 항복하라고 했다. 김상옥은 잠자코 대응사격으로 답했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상하이를 떠나면서 동료들에게 남긴 말이었다. 김상옥은 그 말을 굳게 지켰다. 결국 콩 볶듯 사격이 개시됐다. 경찰들의 일제사격이 오래 계속됐다. 아침 7시에 시작된 총격전은 3시간이나 경과한 뒤 종료됐다.


죽는 순간까지 총을 놓지 않다


김상옥의 주검은 참혹했다. 발은 물론 무릎까지 동상에 걸렸다. 총알 맞은 곳과 동상 걸린 곳에서는 죽은 뒤에도 계속 피가 흘러 땅을 붉게 만들었다. 검시관의 관찰에 따르면, 사체의 머리와 가슴, 왼쪽 발가락에 총상이 있었다. 그중 머리와 가슴의 총상이 치명적이었다. 김상옥은 죽는 순간까지 권총을 놓지 않았다.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검시관은 김상옥이 오른손 둘째 손가락으로 권총의 방아쇠를 건 채 힘있게 쥐고 있었다고 썼다.


참고 문헌

① ‘천기예보’ , <동아일보> 1923. 1.18.

② ‘종로서 타령 9, 신년벽두에 大變, 최초의 폭탄세례’ , <동아일보> 1929. 9.14.

③ ‘남산을 徒步로 安靜寺에 은신’ , <매일신보> 1923. 3.16.

④ ‘설중의 남산 포위’ , <동아일보> 호외 1923. 3.15.

⑤ <김상옥·나석주 열사 항일실록>, 김상옥·나석주열사기념사업회, 1986.

<서울 한복판 항일 시가전의 용장 김상옥 의사>, 윤우, 백산서당, 2003.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 김동진, 서해문집, 2010.

<경성을 쏘다>, 이성아, 도서출판 북멘토, 2014.

<김상옥 평전>, 이정은, 민속원, 2014.

⑥ ‘僧庵의 生米飯으로’ , <동아일보> 호외 1923. 3.15.

⑦ ‘천기예보’ ‘휴지통’ , <동아일보> 1923. 1.23.

⑧ 宋相燾, <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 제2집), 국사편찬위원회, 1955. 320쪽

⑨ ‘令人酸鼻의 血流屍體’ , <조선일보> 1923. 3.16.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8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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