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여름, 하늘은 전두환 편이 아니었다


양 김씨, 민추협을 결성하다

1984년 여름엔 하늘도 전두환 편이 아니었다. 늦은 장마로 9월 초부터 서울 일대에 무자비한 물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1925 을축년 대홍수 이래 최대 홍수가 나서 서울 망원동 일대는 아예 물속에 잠겨 버렸다.

189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였지만, 차라리 전두환에게는 이것이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감을 하늘에 대한 반감으로 대체할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북한이 제의한 수해물자 제공 의사를 덥석 받아들인 것도 그런 배경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서울 시민들은 북한에서 휴전선을 넘어온 맛없는 쌀과, 촌스러운 옷감을 받아들고 신기해했다.

 1. 1984년 9월 수해로 잠긴 서울 망원동 일대. 2.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망원동 유수지 부근 3. 물에 잠긴 망원동 길가와 버스. 4. 북한적십자사에서 보낸 물자를 실은 북측 선박이 인천항에 도착한 모습. 5. 북측에서 보낸 쌀
 1. 1984년 9월 수해로 잠긴 서울 망원동 일대. 2.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망원동 유수지 부근 3. 물에 잠긴 망원동 길가와 버스. 4. 북한적십자사에서 보낸 물자를 실은 북측 선박이 인천항에 도착한 모습. 5. 북측에서 보낸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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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홍수를 몰고 온 태풍보다 더 센 정치의 태풍이 몰려왔다. 전두환은 유화국면의 연장선에서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야당 정치인들을 83년과 84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러나 3김씨로 불리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풀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전두환은 해제된 야당 정치인들이 기존의 민한당과 국민당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투쟁력을 거세시킬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금에서 풀린 정치인들은 아직 풀리지 않은 김영삼, 김대중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더니, 1985년 총선을 향해 맹렬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전두환은 아마도 민추협이 정권에 길들여져 있던 기존의 민한당의 기세를 능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온건파와 과격파로 분열된 야당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임으로서 오히려 정권의 유지에는 도움이 될 것일 터였다. 그러나 정세는 전두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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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총회, 공개 행사로 치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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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민협과 국민회의라는 두 연합단체의 출범과 함께 운동세력 안에서는 한국 변혁 운동의 방향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투쟁의 열기가 뜨거운 학생운동과 그 출신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불이 활활 타올랐다. 민청련이 그 중심에 있었다.

민청련 3차 총회는 84년 10월 20일 열렸다. 서울 동숭동에 있는 흥사단 강당에서 공개적인 행사로 치렀다. 당시 민청련 내부의 조직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여러 공개 운동단체들이 속속 건설되는 상황이었다. 즉 정권이 조성한 유화국면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탄압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조직 구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운동이 전반적으로 활성화되면서 논의가 다양해지자 의장단 지도체제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이 변화의 주된 이유였다. 그 결과 중앙위원회가 신설되었다. 5명 내지 15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위원회는 총회가 열리지 않는 평상시의 최고 의결기구였다. 중앙위원에는 공개되지 않은 내부 조직에서 선출된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창립 당시에 비해 정권으로부터 가해올 탄압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결과였다.

 총16쪽 분량의 3차총회 보고서 표지와 민정당 점거 관련 성명서
 총16쪽 분량의 3차총회 보고서 표지와 민정당 점거 관련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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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P론을 정리하다

민청련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면 정세를 분석하고 활동방향을 정하는 일이었다.

특히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통합과 같은 사안에 대해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는 일이 잦았다.
논의가 점차 복잡해지자 김근태 의장은 이을호 정책실장에게 논의의 가닥을 간명하게 정리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을호가 연륜이 깊은 운동가들을 접촉하고 정리해낸 것이 이른바 'CNP론'이었다.

CNP란 CD 즉 Civil Democracy(시민민주주의), ND 즉 National Democracy(민족민주주의), PD 즉 (People Democracy) 민중민주주의의 약자였다. 당시 각 운동단체 및 운동세력의 성향과 노선을 분석하여 이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였던 것이다. 각 노선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추구하는 변혁노선도 다르게 표출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CD는 한국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편입된 주변부 자본주의로 바라본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구조 아래서 핍박 받는 계층은 노동자, 농민, 빈민뿐만 아니라 영세자영업자와 중소자본가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당면 투쟁의 목표는 세계자본에 종속된 독재권력을 타도하고 민주적인 민간정부를 수립하는 일이다. 70년대 이래 정치운동을 이끌어온 이른바 재야세력이 그 중심이다.   



PD는 한국의 사회구성체는 국가독점자본주위라고 본다. 즉 단순히 외세에 종속된 체제가 아니라 스스로 상당 수준의 자본축적을 이루고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운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면 과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것을 담당할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 이끌 수밖에 없다. 학생운동에서 말하는 '노동현장론'이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 구축된 것이다.

ND는 겉으로 보면 CD와 PD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민청련은 CD와 PD를 포용하며 연대한다는 지향에서 ND론을 정립시켰다.

정리된 ND론은 한국사회를 신식민주의적 독점자본 체제로 규정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신식민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민족적 모순과 독점자본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모순이 중첩되어 있다. 투쟁방향은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을 이루되 다양한 중간층을 아우르며 연합전선을 형성해 민주적이고 민족 자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가올 총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CNP론은 회원 내부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전 회원에게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CNP론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대학생 출신들의 지나친 학구적 탐구심이 발동된 것으로 실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논쟁은 다가올 85년 초로 예정돼 있는 정치일정, 즉 2·12 총선에서 운동세력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옮겨갔다.

운동권의 시각에서 보면 총선거는 제도권 정치세력들이 판을 벌이는 마당이었다. 이러한 총선거에 대해 C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선거 국면을 적극 활용하자는 주장을 폈고, P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민중의 이해와 전혀 무관한 선거를 전면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변수로 등장한 것이 양 김씨가 이끄는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은 "반민주적 법령이 민주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선거는 오직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선거를 보이코트할 기세를 보였던 것이다.

민추협의 움직임은 운동 세력에게 논쟁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민추협이 전두환 정권과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총선에 임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그들을 아군으로 여겨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선거에 대한 운동세력의 대응방향을 놓고 선거 거부론과 선거 활용론이라는 양 극단이 대립했다. 

선거 거부론은 다가올 2·12총선은 민정당과 군부 세력의 장기 독재를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민추협이 민한당과는 다른 투쟁적인 신당을 만든다고 해도 결국 정권이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가 그들과 야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에 개입해서 한국 사회 모순의 궁극적 해결을 도모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전면 거부하고, 오히려 기층 민중의 역량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선거 활용론은 선거 거부론의 논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쳤다. 즉 선거는 전두환 독재정권이라는 '지배체제의 재생산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지만,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선거 거부라는 전술을 도출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더구나 운동세력의 역량이 열세에 있을 때는 선거라는 국면을 활용하는 전술을 채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역량이 선거를 거부할 정도로 성숙해 있었을 때조차도 단순한 선거 거부가 아니라 대안적 정치 구조의 창출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방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 활용론의 입장에서 2·12 총선은 대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양되는 시기이며, 그러한 정세 조건을 활용할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즉 '민주화'와 '민중 생존권' 문제를 부각시키는 실천 프로그램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의 충격파

총선과 관련한 논쟁은 민청련 내부뿐만 아니라 운동권 전반에서 벌어졌지만, 민청련은 공개 정치투쟁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의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었다.

민청련의 선전력과 동원력은 선거라는 국가적 차원의 정치행사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민민협, 국민회의 등 운동세력의 연대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열을 편성해야 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대중동원력이 큰 야당정치세력과도 제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논쟁점이었다.

결국 야당정치세력과의 '제휴반대론'과 '제휴찬성론'이라는 틀로 의견이 갈렸다. 민청련 지도부 가운데 김병곤 상임위원장이 대체로 '제휴반대론'에 기울어 있었고, 김근태 의장이 '제휴찬성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회원들 사이에 의견의 분포는 정확히 계량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제휴찬성론이 약간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가올 총선에 대한 노선을 두고 논쟁하고 있던 중,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11월 14일,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 260여 명이 서울 안국동 민정당사를 기습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것이었다.

1984년 당시의 학생운동은 주로 교내 시위의 형태를 취했고, 이따금 가두시위를 벌이곤 했다.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은 물론 학생들 스스로도 충격을 받은 투쟁방식이었다. 이후 민정당사, 미국문화원 등에 대한 점거 농성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점거 학생들은 이전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식을 연세대에서 갖고 그 자리에서 '반독재민주화투쟁학생연합'을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직은 당시 각 학교에 만들어져 있던 조직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연대하여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준비론'이나 '노동현장론'을 비판하며 즉각적이고도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정당사를 점거한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민정당을 찾아왔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고 건물에 "노동악법 개정하라" "전면해금 실시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구호와 당면 정치정세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내걸고 글자 그대로 선도적 투쟁을 벌인 것이다.

 1. 경찰이 압수한 ‘민정당에 들어간 이유를 밝힌 대자보’ 2. 민정당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3. 민정당사 건물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성명서 읽고 있는 학생.  4~5. 진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경찰 병력. 6. 점거농성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
 1. 경찰이 압수한 ‘민정당에 들어간 이유를 밝힌 대자보’ 2. 민정당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3. 민정당사 건물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성명서 읽고 있는 학생. 4~5. 진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경찰 병력. 6. 점거농성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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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하게 대응한 민청련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는 민청련에게도 충격이었다. 민청련은 우선 정권이 이 사건을 일본의 '적군파식 테러'로 몰고 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학생들의 주장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민정당사 농성 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학생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어서 학생들이 주장한 '14개항 – 당신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에게 배포했다.

민민협과 국민회의도 학생들을 옹호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때 특히 눈에 띤 것은 민추협이 학생들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기존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학생운동의 민정당사 점거 농성투쟁은 운동 세력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자칫 노선투쟁이 이념논쟁에 빠져들 기미가 보이던 무렵에 터진 이 사건으로 각 운동은 다가올 총선을 실천과 투쟁의 관점에서 대하게 됐다. 민청련이 위 유인물에서 총선에 대해 "우리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현 체제를 거부하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것도 그 증거였다. 

어쨌든 1984년 연말은 다가올 총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집권 세력과 야당 세력은  물론 각 운동세력이 각자의 프로그램을 구상하며 보내는 시기였다. 결전을 앞둔 각 진영이 참모회의로 분주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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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운동을 주도하다


노동운동가들, 연립주택 구해 '노협'을 창립하다

민청련의 창립은 각 부문운동 전선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민청련 창립이 성공하는 것을 지켜본 노동자, 농민, 기자, 문화예술인, 지식인 등이 앞을 다퉈 공개적인 단체를 창립하고 나선 것이다. 민청련은 이러한 상황을 발판으로 삼아 각 부문운동의 연합체 건설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 활동의 중심은 김근태 의장이 맡았다.

부문운동의 연합이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기층이라고 불러온 계급의 운동 즉,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노동운동은 개별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노동자들의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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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70년에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항거함으로써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됐지만, 당시 청계천 일대의 봉제공장은 그 규모가 극히 영세해서 사업장 단위의 노조가 구성될 수 없어 일종의 지역노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청계피복노조와는 달리 대규모 단일 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정권의 탄압을 받아 붕괴된 사례들이 있었다.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노조에서 성장한 노동운동가들이 1984년 3월 10일, 당시의 노동절에 단체를 결성한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약칭 '노협')가 그것인데,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단위 사업장 노조지부장으로서 노동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그 주역이었다. 원풍모방의 방용석과 정선순, 한일도루코의 김문수, 동일방직의 이총각, YH의 최순영, 콘트롤데이타의 이영순 등이었다.    

 (‘ㄱ’자 순으로) 원풍모방 방용석, 동일방직 이총각, 원풍모방 정선순, YH무역 최순영, 콘트롤데이타 이영순. 큰 사진은 19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의 모습
 (‘ㄱ’자 순으로) 원풍모방 방용석, 동일방직 이총각, 원풍모방 정선순, YH무역 최순영, 콘트롤데이타 이영순. 큰 사진은 19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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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협 사무실은 일반 빌딩이 아니라 서울 신길동의 연립주택 한 칸을 구입해 입주했다. 당시 연립주택은 일반 단독주택에 비해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원풍모방 노조가 탄압으로 쫓겨나면서 남아 있던 조합비로 마련한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밥도 해먹고 잠도 잘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의 많은 활동가들이 이곳을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 중에는 김근태 의장을 비롯해 민청련 활동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노협의 창립과 공개적인 활동은 당시 운동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중요한 평가를 받았다. 기본 계급 혹은 기층민중인 현장 노동자들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근태 의장은 이 노협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부문들이 결합하는 방식의 연대 틀을 구상했다.

'민민협' 창립의 산파 역할을 하다

다른 부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농민이었다. 흔히 '1천만 농민, 8백만 노동자'라고 하던 때였으므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농민운동은 기독교와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보호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가톨릭농민회가 그것이었다.

지식인 단체로는 해직언론인들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있었고, 문화운동 단체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출판계와 연극계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결성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늘 운동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등 종교계의 성직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각 부문운동을 망라하여 연합체를 만들기 위해 김근태 의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이는 동아투위의 이부영이었다. 이들은 단체의 이름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약칭 민민협)'로 정하고, 참가 자격은 개인이 아니라 각 부문운동을 대표하는 자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 

마침내 1984년 6월 29일 오전 9시, 서울 돈암동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 상지회관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년 전, 민청련이 창립총회를 가졌던 바로 그 장소였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함세웅 신부의 사회로 창립총회가 진행되었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창립을 선포하는 '민중민주운동선언'은 발기인을 대표해 이부영이 낭독했다. "그동안 사회 각계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보장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과 민중생존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온 우리들 민주, 민중 운동단체 대표"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란 바로 이전과 같이 사회적 명망이 있는 개인들을 대표로 내세우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 명성은 적더라도 각 부분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운동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단체를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민민협의 대표위원은 김승훈 신부, 김동완 목사,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세 사람이 맡았는데, 김승훈과 김동완은 성직자였으므로 아무래도 대외활동에 소극적이어서 사실상의 대표 역할은 이부영이 했다고 볼 수 있다. 결성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근태는 서기를 맡아 출범 후에도 각 부문 간 협력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창립한 민민연은 민청련과 가까운 서울 종로 1가 서울빌딩 703호에 사무실을 개설했고, 8·15민족해방기념식을 민청련 등과 함께 치러냈다. 그리고 10월에는 독자적인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창간했다.

 (왼쪽부터) 민민협 대표위원이었던 김동완 목사, 김승훈 신부,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왼쪽부터) 민민협 대표위원이었던 김동완 목사, 김승훈 신부,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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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가들 '민주통일국민회의'로 모이다

민민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지만 그 활동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급력은 한계가 있었다. 7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은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명망이 있는 성직자나 재야정치인이 주도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명망성이 있다는 것은 곧 사회적 파급력이 크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민민협과 같이 명망성이 낮은, 조직 대표자들이 활동을 벌이다보니 이전의 운동에 비해 파급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렇게 명망성이 있는 운동가들이 민민협에서 제외됨으로써 그들이 가진 운동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였다. 물론 명망가들 자신도 운동에 기여할 기회를 갖기 원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재야정치인 계훈제, 백기완 등이었다.

결국 이들은 각 개인이 참여하는 운동단체를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1984년 10월 16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 발기인 50여 명이 모였다. '민주통일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발족시키는 자리였다.

조직의 성격을 보면, 국민회의는 민민협과 판이하게 달랐다. 조직의 대표자가 아닌 전국적 단위에서 국민적 명망성을 가진 성직자, 지식인, 예술인 등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해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기본조직이었다. 그리고 집행위원회와 분과위원회를 두어 실행과 연구를 병행하는 구조를 취했다. 집행위원회가 사실상 대표기구가 됐는데, 의장 문익환, 부의장 계훈제 신현봉, 사무총장 이창복으로 구성됐다.

 (왼쪽부터) 민주통일국민회의 대표 계훈제, 문익환, 백기완. 사진은 1984년 11월 전태일 기념관 ‘평화의 집’ 집들이 때 모습
 (왼쪽부터) 민주통일국민회의 대표 계훈제, 문익환, 백기완. 사진은 1984년 11월 전태일 기념관 ‘평화의 집’ 집들이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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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국민회의의 창립을 표면적으로는 축하했지만, 내부적으로 이 단체에 대해 우려의 시각을 보내는 분위기가 강했다. 민청련이 자신의 청년운동론에서 '조직운동' 노선을 주장한 것은 바로 6,70년대 명망가 위주의 운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회의가 과거와 같은 명망가 운동이 되고, 결국 운동이 쟁취해낸 정치적 성과가 오로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상황이 올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청련의 우려는 국민회의 창립 며칠 뒤 있었던 민청련 3차 총회에서 채택한 '민주통일국민회의 발족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에 그대로 드러났다. 즉 성명서에서 "역사발전에 있어서 결국에는 민중의 의지는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소박한 진리가 우리를 지탱하는 정신적 근원일 때, 우리는 민중의 의지를 어떻게 조직하며 어떻게 현실의 불합리를 투쟁 속에서 타개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직과 연대 속에서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국민회의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다.

조직이냐 명망성이냐, 통합론 대두

국민회의 구성원들도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국민회의는 창립 3개월이 지난 1985년 2월 기관지 [민주·통일]을 창간했다. [민주·통일]은 1백 쪽 가까운 두께에 표지는 컬러로 인쇄됐고, 제대로 제본이 된 책자의 형태로 발간됐다. 가격도 1500원의 유료로 책정됐고, 책 뒤표지에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광고도 실려 있었다.

창간호의 특집은 '민족통일을 위하여'로 잡아서 당시 운동 세력이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 않던 통일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그런데 더욱 눈에 띠는 글은 '민주통일국민회의의 창립 취지와 운동방향'이라는 기획기사였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적 시각에 대한 해명과 극복방안을 내놓은 글이었다.

글에서 국민회의는 현재로서는 비록 명망성 있는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각 부문운동의 활동은 자칫 국민 일반에게 조직 이기주의의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며, 국민회의야말로 일반 국민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욕구를 대변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울러 국민회의는 현역 정치인의 참여를 금지하고 있으며, 집권을 겨냥하는 정당 차원의 활동은 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국민회의가 기존 정치권에 진출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글에서 국민회의는 '민중 노선'을 견지할 것이며, 민중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위해 복무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민민협과 비록 조직노선은 다르지만 운동의 대의를 위해 함께 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었다.  

 민민협 기관지 [민중의 소리] 창간호와 민주통일국민회의 기관지 [민주·통일] 창간호
 민민협 기관지 [민중의 소리] 창간호와 민주통일국민회의 기관지 [민주·통일]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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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가 민민협과 협력하겠다는 운동노선을 밝혔지만, 그렇다면 두 단체가 별개로 운영할 필요 없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민청련의 시각은 조직운동 노선에 따라 건설된 민민협이 해소되는 것이 자칫 조직운동 노선을 포기하고 명망가 운동으로 흡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깊었다. 당시 운동 세력에서 비교적 강한 발언권을 갖고 있던 민청련의 입장이 이러했기 때문에 두 단체의 통합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두 단체의 통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강한 충격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85년 2·12 총선이었다. 

(민청련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증언을 기다립니다. 채록된 증언은 [민청련사]를 책으로 발간할 때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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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쑥담배' 유인물 배포 작전, 경찰 허를 찌르다


재갈 물린 제도권 언론들

민청련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면서부터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없애기 위해 '언론 통폐합'을 시행했었다. 그 결과 중앙일간지의 경우에는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부르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3개 신문사의 독점체제가 구축되었고, 방송의 경우에는 동양방송, 동아방송 등이 사라지고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 2개 방송으로 정리되었다. 

여기에 '언론기본법'을 제정해 정부가 언론사 설립 허가제를 실시하고 기존에 허가된 언론사의 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조항을 두었다. 따라서 언론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권력 앞에서 설설 기었다. 당시 국민들은 TV 방송의 9시 뉴스를 '땡전 뉴스'라고 비아냥거렸다. 매일 저녁 9시 정각, TV에서는 "뚜, 뚜, 뚜, 땡!"하고 시보를 울리면서 뉴스를 시작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오프닝 멘트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방송이 정부의 홍보기관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보도한 1980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보도한 1980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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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언론들은 야당의 의정활동에 대한 보도조차 가능하면 소략하게 다룰 뿐이었다.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정치 활동 금지 조치 아래 있던 이들에 대한 보도는 '보도지침'에 의해 철저하게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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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983년 5월, 정치 활동금지에 묶여 있던 김영삼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무려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을 벌였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언론에도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래도 양심이 있던 기자와 데스크는 '보도지침'을 피하여 보도할 방법을 찾다 보니 수수께끼와 같은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 신문 구석의 작은 가십난에 "최근 '정세 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신경을 쓰는 눈치"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모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라는 웃지 못할 표현도 있었다.

이러한 언론 상황에 대해 가장 큰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은 80년에 해직된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1984년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민언협)'을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에 정부의 간섭을 거부한 대항언론으로서 월간 <말>을 창간했다.

운동의 진로를 밝힐 기관지

그에 앞서 1984년 초부터 민청련 내부에서는 대항언론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민청련이 지향하는 것은 민언협의 '대항언론'과는 결이 약간 달랐다. 월간 <말>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기존 제도언론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모색되었다면, 민청련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각 부문 민주화 운동 소식을 운동세력 내부에서 서로 소통하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 나아가 당면 정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정세분석'을 운동세력들이 공유할 필요성, 운동세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다양한 논쟁들을 정리할 필요성 등이 절실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민청련 집행부는 기관지의 형태로 <민주화의 길>을 발간하기로 결정한다. 정권의 시각에서 이는 '불법 유인물'일 것이었고, 당연히 탄압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편집부는 공개되지 않는 비밀조직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 임무를 맡은 이는 당시 상임위 부위원장 이해찬이었다. 이해찬은 성균관대 73학번 김희상에게 편집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희상은 이후 민청련 집행부로 진출해 대변인을 맡았으며 김근태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2011년 아직 한창일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김희상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길> 편집에 전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대 78학번으로 이른바 '제헌의회' 그룹의 이론가로 맹활약했던 최민에게 편집 진행을 맡겼다. 최민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선후배 편집진들을 지휘하며 <민주화의 길> 창간의 산파 역할을 했다.

마침내 1984년 3월 11일, <민주화의 길> 창간호가 발행됐다. A4용지 크기의 갱지 20페이지를 흑백으로 인쇄한 뒤 중철로 제본한 소박한 간행물이었지만, 이를 받아본 편집진들은 그동안의 고생을 되돌아보며 감개무량해 했다.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창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왼쪽부터) 이해찬, 김희상, 최민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창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왼쪽부터) 이해찬, 김희상, 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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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표지는 두꺼비를 중심으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목판에 새긴 뒤 판화로 찍은 것이었다. <길>은 폐간할 때까지 이 표지를 일관되게 사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판화를 민청련 깃발로 만들어 집회 때마다 사용하여 두꺼비가 민청련의 상징이 되었다.

권두언은 김근태 의장이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들며'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 글에서 김 의장은 <민주화의 길> 임무로 5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의 방향 제시, 정확한 정세분석, 운동권 내부의 동질성 확보, 관제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의 보도, 다른 운동세력과의 연대' 등이었다. 이후에도 권두에는 논단, 논설 등의 항목으로 당면 정세에 대한 민청련의 견해를 밝히는 글이 실렸다. 대개는 김근태 의장이 썼으나, 때로는 다른 집행부 또는 김병곤, 이범영 등 비공개 간부가 작성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당시 민주화운동 전체를 이끌던 지도자 문익환 목사의 격려사, 신경림 시인의 축시가 실렸다. 그리고 정세분석, 민주화 동향이 이어졌다. 이후 <민주화의 길>의 편집체제는 대체로 이러한 형태를 유지하며 발간되었다. 발간 주기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대략 2, 3개월의 간격을 두고 발간되었다.

3호부터는 편집진이 보강돼 일선 기자 출신으로 민청련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진재학, 백현기, 김선택 등이 참여했다. 이로 인해 <민주화의 길>은 기관지로서의 틀과 격식을 제법 갖추게 됐다. 

정보기관은 <민주화의 길> 발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3월 14일, 서울 인사동 입구 파고다빌딩 5층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김근태 의장은 종로경찰서 소속 10여 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행을 거부하는 김 의장은 심한 구타를 당했다.

민청련 집행부는 '올 것이 왔다'고 느꼈지만,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이튿날, 집행부는 김 의장을 즉각 석방하고 부당한 강제 연행에 대해 내무부 장관이 사과하고 종로경찰서장과 수사관들을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청련 측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정권 측은 며칠 지나지 않아 김 의장을 슬그머니 석방했다.

 1984년 한 해 동안 6호까지 발행된 [민주화의 길] 표지들
 1984년 한 해 동안 6호까지 발행된 [민주화의 길] 표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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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앞에서 설명했듯이 4·19행사와 5·18기념식 이후에도 민청련 간부 및 회원들에 대한 폭행사태가 되풀이되었다. 바야흐로 민청련은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권의 탄압이 있었지만, 비공개된 <민주화의 길> 편집부는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은 채 다음 호 작업을 계속했다. 그래서 2차 총회가 끝난 뒤인 4월 25일에 제2호를 발행했다. 이 2호는 권두 논설에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 기만적 화해정책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실천'을 실었다. 당시 학생 운동권 내부를 뜨겁게 달구고 있던 복학조치에 대한 논쟁을 민청련의 시각에서 정리한 글이었다. 정권이 화해 제스처를 보이는 이유를 분석한 뒤 운동세력이 준비해야 할 것으로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를 제시한 것이다.

한 개의 칼이란 '국민 대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이며, 두 개의 방패란 '운동의 조직력을 강화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쓰라린 시련에 무릎 꿇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과 '기층 대중과의 구체적인 연대'를 통해 '민중운동의 토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논설은 민청련 회원뿐만 아니라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각 부분의 활동가들에게 널리 읽혔다. 이때부터 <민주화의 길>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정세분석의 안목을 길러주는 일종의 지침서 역할을 하게 된다.

80년대에 전국 각 대학 앞에는 대개 서점이 한 군데는 있었는데, 이들을 '사회과학 서점'이라고 불렀다.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 읽히는 진보적 사상을 담은 책들을 주로 판매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점은 단순히 서적 판매의 장소가 아니라 학생운동가들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화의 길>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이들 서점에서 <민주화의 길>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물론 <민주화의 길>은 정부에 등록된 간행물도 아니고, 출판사를 통해 발간된 공식 서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서적 유통경로인 서적 도매상을 통해 배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민청련 집행부 안의 사무국에서 직접 서점으로 <민주화의 길>을 배본하고, 정기적으로 그 대금을 수금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민청련의 재정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는 판매상품이 된 것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978년 이해찬이 문을 연 서울대 앞 광장서적. 1982년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건국대 앞 인서점. 1985년 문을 열어 아직도 운영 중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978년 이해찬이 문을 연 서울대 앞 광장서적. 1982년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건국대 앞 인서점. 1985년 문을 열어 아직도 운영 중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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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열사를 살려내라!'

1984년이 저물 무렵인 11월 30일, 민청련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에 있는 택시회사 민경교통의 택시기사 박종만씨가 분신자살했다. 노조 대의원이었던 그는 노조원 해고와 부당한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회사 마당에서 농성하던 중 막무가내로 노조를 무시하던 회사에 분노하여 분신자살로 항거한 것이었다. 

민청련은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14년 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분신한 것과 판박이 사건이었다. 김근태 의장, 김희택 운영위원장, 권형택 사회부장 등 민청련 집행부는 박종만의 시신이 안치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민주통일국민회의의 장기표, 청계피복노조의 김영대, 노동자복지협의회 방용석 등도 달려왔다. 그들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갈 것을 막기 위해 영안실로 들어가려 했으나 전경들에 막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자 영안실 앞 공터에 50~60여 명이 자리 잡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새벽에 전경의 체포 작전이 개시되고 민청련 집행부는 온몸을 던져 거기에 맞서 싸웠다. 전경은 민청련 집행부 등을 닭장차에 던져 넣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구타한 뒤 최루탄을 터뜨리고 문을 닫아버렸다. 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했고, 그 상태로 김근태 의장, 김희택 운영위원장, 안희대 집행국장, 박우섭 사무국장, 권형택 사회부장이 경범죄로 구류를 선고받았다. 경찰은 민청련 회원들의 항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수감했다.     

결국, 시신은 탈취당해 강제로 화장당한 뒤 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민청련은 투쟁을 이어나갔다. '박종만 열사 추모위원회'를 범민주단체로 구성하고, 추모제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12월 13일 홍제동 성당에서 추모제를 열기로 했으나 당일 경찰이 성당을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민청련 회원들은 성당 부근에서 주민들에게 '박종만 열사 살려내라' '폭력 정권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전단을 배포하며 박종만 열사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밤에는 시내 종로1가에서 학생들과 함께 야간시위를 감행했다.

이렇게 민청련은 자칫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묻힐 수도 있는 사건들을 사회문제화하고, 그것을 통해 정권의 반민주성과 폭력성을 드러내게 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는 또한 민청련이 주장하는 기층민중을 운동의 중심에 두는 민중 노선에 충실한 것이기도 했다.

 박종만 열사를 표지로 실은 [민중생활소식] 2호(왼쪽)와 박종만 열사 합동추도식 양면 안내지(오른쪽)
 박종만 열사를 표지로 실은 [민중생활소식] 2호(왼쪽)와 박종만 열사 합동추도식 양면 안내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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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유인물 배포 전술들
 
민청련 회원들의 활동은 집행부가 개최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지만, 일상적인 홍보 활동도 중요한 임무였다. 당시 언론은 철저하게 정부의 검열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세력의 주장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직접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대학별로 조직된 민청련 계반원들은 집행부에서 만든 유인물을 전달받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역에 배포하는 작업을 했다.

이때 경찰에 검거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기발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가장 많이 한 활동은 유인물을 편지봉투에 넣어 야간에 주택가를 돌며 일일이 우편함에 넣는 것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갑자기 사복형사나 정보기관원을 맞닥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기 때문에 심장이 떨리는 작업이었다. 그만큼 무사히 일을 끝냈을 때는 뿌듯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낮에 거리에서 배포하는 방법으로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정류장이 가까워 오면 천정 환기구를 열고 바깥에 유인물을 올려놓고 내리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유인물이 바람에 날려 저절로 길가에 뿌려지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거듭하면서 신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세로로 긴 플래카드를 유인물과 함께 두루마리처럼 말아 접은 다음 비닐 끈으로 묶고 그 매듭에 쑥담배(일반 담배 개비에서 담뱃잎을 빼내고 대신 한약방에서 구한, 솜같이 생긴 뜸쑥을 채워 넣은 것)를 묶어 놓는다. 이것을 시내의 빌딩에 가지고 올라가 5, 6층 정도 높이의 창문 밖을 향해 장치하고 쑥담배에 불을 붙인 뒤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 사이에 쑥담배는 천천히 타들어 가서 비닐 끈을 끊게 되고 플래카드가 건물 벽면으로 펼쳐지면서 그 안에 있던 유인물이 공중에 흩뿌려진다. 이 방법은 특히 큰 가두집회를 앞두고 그 부근에서 사전에 실행하여 집회를 대중들에게 공지하는 효과로 많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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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18, 8.15... 민청련의 집회 활동


4·19 24주년 기념식 소동

2차 총회를 통해 조직을 강화한 민청련은 공개 정치투쟁체라는 자기인식을 대외적으로 표출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4월 19일 수유리 4·19묘역에서 열린 '4·19 24주년 기념식'이었다.

이전까지 4·19 기념식은 정부의 공식행사로 치러져 왔다. 1984년 4월 19일 오전에도 수유리 묘지에서 정부 요인과 희생자유족회 등이 참석한 가운데 '4·19의거 제24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4·19가 '의거'를 벗고 1960년 당시의 이름인 '혁명'을 되찾은 것은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였다.

그날, 정부 요인이라고 하지만 대통령과 총리는 물론 기념사를 쓴 부총리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이 4·19를 얼마나 낮춰 보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였다. 신병현 부총리의 기념사는 조철권 원호처장이 대신 낭독했다. 그 내용도 4·19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서 "4·19정신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주제였다.


 (위) 1984년 정부에서 개최한 기념식에는 4·19를 ‘의거’라고 표기했으나 (아래) 같은 해 고려대에서 연 4·19 당시를 재현한 모의시위에서 학생들은 ‘4월 혁명 다시 찾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위) 1984년 정부에서 개최한 기념식에는 4·19를 ‘의거’라고 표기했으나 (아래) 같은 해 고려대에서 연 4·19 당시를 재현한 모의시위에서 학생들은 ‘4월 혁명 다시 찾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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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관에서 거행하는 형식적인 기념식과는 별도로 민주세력이 4·19의 본래 정신을 기리는 제대로 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정부 행사가 끝난 뒤인 오후 2시에 별도로 '4·19 24주년 기념식'을 갖고 묘지를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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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많은 사복 경찰과 정보기관원들이 둘러싸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참배를 마치고 해산하는 길에 경찰이 박우섭 총무부장을 검문 검색하려고 했으나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은 박우섭을 강제 연행했고, 그에 대해 민청련 회원 50여 명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은 회원들을 집단적으로 구타하며 20여 명을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장영달 부의장, 박계동 홍보부장, 연성수 사회부장 등 간부와 회원 오경렬, 예병남, 김종환, 김진의 등 수십 명이 부상당했고, 특히 장영달 부의장과 오경렬 회원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 연행된 집행부 상당수는 구류 처분을 받았다.

 4·19 행사에서 경찰의 구타로 병원에 입원까지 한 오경렬 민청련 회원. 사진은 퇴원 후 모습으로 그는 이후 민청련, 민통련, 전민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 행사에서 경찰의 구타로 병원에 입원까지 한 오경렬 민청련 회원. 사진은 퇴원 후 모습으로 그는 이후 민청련, 민통련, 전민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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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경찰의 이러한 폭압적인 행태는 당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청련은 그것을 의례적인 일로 방치해서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바로 다음 날인 4월 20일, 내외신 기자들을 불러 놓고  '죽음에 죽음이 꼬리를 물고, 폭력에 폭력이 온 사회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4·19묘지에 배치되었던 사복경찰 및 병력 지휘자의 신원을 밝히고 처벌할 것과 내a무부장관 및 치안본부장이 이 사태에 대해 국민과 민청련에 대해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기본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

한편 이날 기념식에서 민청련은 며칠 전 2차 총회에서 결의한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우리 사회는 대외적인 예속과 대내적인 독점으로 인해 크게 일그러져 있다"고 보고, 그로 말미암아 "불평등의 심화로 민중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는 주체는 '군사독재정권'이며 또한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미국'이라고 규정했다.

그 다음에 투쟁방향을 제사할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 동안 복학조치에 대해 침묵하던 민청련이 비로소 그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정권이 복학 허용 등 일련의 '화합조치'를 편 것에 대한 민청련의 시각은 이러했다.

정권이 유화국면을 조성한 배경은 "첫째 한국을 장기적으로 안정된 시장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해 야기될지 모르는 혼란이나 파국을 막아보려는 외세의 압력, 둘째 교황 방문 등을 앞두고 이제까지 실추된 대외적인 체면을 되찾으려는 전두환 정권의 궁여지책, 셋째 폭력을 통해 집권한 정권에 치명적으로 부족한 국민적 지지기반과 정통성을, 총선을 앞두고 조금이나마 회복하려는 화해 제스처, 넷째 권력 내부 강경파의 무차별한 탄압책만으로는 민주화운동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온건파 의견의 득세 등"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운동권 안에서 유화국면의 배경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투쟁방향을 정함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공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흩어져 있던 역량들을 결집시켜 내부 조직 역량을 강화시키자고 호소했다. 구체적으로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와 제적생복교대책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해직기자협의회, 노동자복지협의회 등의 결성을 그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성화된 부문운동역량을 연대의 틀로 묶어 일종의 '전선'을 형성할 것을 주문했다. 이것은 이후 민청련 활동의 주된 방향이 된다.

햇볕에 드러낸 '광주'

4·19집회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민청련은 보다 과감한 집회 개최에 나선다. 당시까지 그 어느 단체도 공개적으로 열지 못했던 광주항쟁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 민청련은 집회 장소로 광주 현장 그것도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역으로 정했다.

1984년 5월 14일, 오후 2시경 광주항쟁 희생자 127분을 모신 망월동 묘역을 찾아 추모식을 거행하고 참배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근태 의장은 '광주여,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라는 제목의 광주항쟁 4주년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리고 참배자 일동은 4년 전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던 금남로를 따라 연도의 시민들이 숙연히 지켜보는 가운데 '오월의 노래'를 부르며 가두행진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고 이날의 행사를 마쳤다.

경찰이 불법집회 및 시위라며 강제 연행을 한다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 만큼 회원들은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경찰도 뜻밖의 행진에 당황했는지 감시만 할뿐 연행은 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은 서울에서 찾아와 공개적으로 추모 행사를 가져준 데 대해 감사했지만, 누구보다도 뿌듯해 했던 이들은 가두 행진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한 민청련 회원들 자신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민청련은 5월 19일에는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란 주제를 가지고 1000여 명의 재야민주인사, 해직언론인, 해고노동자, 해직교수, 학생 및 기타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를 가졌다. 이를 통해 지난 4년 동안 음지에 가려져 있던 광주 항쟁이 대중이 모인 광장에 등장했다. 민청련은 광주항쟁 이후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뚫고 스스로 공개단체로 나선 데 그치지 않고, 광주항쟁도 공개적인 행사의 장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 흥사단 주변은 전경과 사복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집회 참석자들이 그대로 길거리로 나섰다가는 충돌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집행부는 이날은 일단 집회 자체를 성사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경찰 측과 대화를 통해 참석자들이 시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안전한 귀가와 검문 및 검색을 안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의 약속을 받고 귀가하던 50여 명의 참석자들은 결국 이화동 4거리에서 이들을 연행하려던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 측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회원 김재황 등 5명이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회원 서원기 등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날 경찰의 폭행으로 인해 여성회원 이경은이 임신 6개월의 태아를 사산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다. 민청련 집행부는 즉각 성명서를 내고 폭행자 처벌과 정부 당국의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

 (위) 아기를 잃은 불행한 일을 겪은 이경은 서원기 부부가 직접 펜으로 쓴 ‘동대문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딸을 잃어버린 죄 많은 부부가 각계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 (아래) 이경은의 1985년 민가협 집회 당시 모습
 (위) 아기를 잃은 불행한 일을 겪은 이경은 서원기 부부가 직접 펜으로 쓴 ‘동대문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딸을 잃어버린 죄 많은 부부가 각계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 (아래) 이경은의 1985년 민가협 집회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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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폭행 당사자인 동대문경찰서 측은 책임이 없다며 발뺌했다. 그러자 이경은 서원기 부부는 직접 펜으로 쓴 '동대문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딸을 잃어버린 죄 많은 부부가 각계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을 쓰고 복사해서 직접 거리에서 배포했다. 당국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없었지만, 민청련 회원들은 이러한 헌법상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주장과 호소를 통해 국민 대중들이 정권의 폭력성을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가두시위 촉발한 8·15기념식

민청련의 집회 활동은 8·15기념식으로 연결되었다. 이 역시 정부 주관의 광복절 행사가 치러지는 것이 관례였지만 민청련은 그것과 별도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명칭도 광복절이 아니라 '민족해방 39주년 기념식'이었다. 장소는 종로2가의 탑골공원으로 하고 시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오후 5시로 했다.

특히 이때는 전두환 대통령의 9월 6일 일본 방문을 앞두고 정부의 친일 외교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이 '전후 한일관계의 청산'을 마무리하고 '한일 신시대의 개막'을 여는 의미가 있다며 홍보했다.

하지만 민청련은 그것은 허위이며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재침략을 연상시키는 위험한 발언이 일어나는 시점에 전두환이 방문하는 것은 곧 일본의 정적 군사적 의도를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굳이 방일을 강행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외교적 성과를 과시함으로써 정통성 논란을 잠재우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민청련의 8·15행사는 자연스럽게 전두환 방일 반대투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러한 민청련의 의도를 간파한 정부는 8월 15일이 되자 버스 15대로 탑골공원을 에워싸고 전경과 사복경찰로 탑골공원을 봉쇄하여 기념식을 막았다.

민청련 집행부는 이러한 경찰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극기를 들고, 플래카드를 앞세워 탑골공원 진입을 시도했다. 결국 집행부는 경찰의 무차별 폭행과 구타를 당하며 연행됐다. 그러자 집회 참석을 위해 모여든 회원들과 대학생들 약 3천여 명은 가두에서 항의 시위를 펼쳤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했고, 시위대는 흩어져서 종로 3가, 회현동 신세계 앞, 제기동, 청량리 등을 돌며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여나갔다. 시위대는 주로 전두환의 '매국적 방일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민청련 간부 및 회원 30여 명과 대학생 1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종로3가에서 연행당하는 이명식 민청련 인권부 차장. 고려대 출신인 그는 이후 민청련과 민통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종로3가에서 연행당하는 이명식 민청련 인권부 차장. 고려대 출신인 그는 이후 민청련과 민통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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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 처분이라는 새로운 탄압

제39주년 8·15 민족해방 기념식' 행사를 성사시키는 데 실패한 집행부는 8월 18일 실내인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다시 개최했다. 약 6백여 명의 회원, 대학생, 민주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기념식은 정부가 주관하는 여느 8·15행사와는 다르게 기념사, 해방가 제창, 일제 강점기 증언, 1964년 6·3한일회담반대투쟁 증언, 오늘의 한일관계에 대한 강연, 8월 15일 기념식 경과보고, 메시지 채택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사는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8·15해방 3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해방은 다시 이룩해야 할 우리의 목표로서, 첫째 신식민주의 세력과 이에 유착한 집단의 수탈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둘째 통일된 조국을 향한 해방, 셋째 민중의 자기 인식과 실천을 기축으로 여기에 양심적 제 지원 세력의 헌신을 더한 전 민중에 의한 해방"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이 참석하여 "아직도 우리나라의 독립은 이룩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살길은 자주적인 국가와 완전한 통일에 있다"고 일갈했다. 6·3세대인 성유보 동아투위위원장은 "전두환씨의 일본 방문은 새로운 군국주의의 부활을 기정사실화시킬 수 있다"며 경고했다. 


 전두환씨 매국방일 저지’ 명칭 하에 개최된 민족해방 39주년 기념대회. 사회를 보는 이는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전두환씨 매국방일 저지’ 명칭 하에 개최된 민족해방 39주년 기념대회. 사회를 보는 이는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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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민청련의 과감한 집회 개최와 정부 비판 발언에 대해 전두환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판단한듯하다. 8·15 광복절과 같은 일반적인 행사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자칫 그 자체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민청련의 정치적 위상을 키워줄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방치할 경우 전두환의 일본 방문을 비롯해 5공이 금기시해 왔던 광주 문제 등에 대한 정부비판 집회가 공인되는 셈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집회 자체는 눈 감아 주되, 집행부를 소란죄나 거리질서 위반 등의 사소한 혐의로 경범죄를 적용해 유치장에 구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1984년 한 해 내내 집행부는 유치장을 들락거려야 했다. 8·15 행사 시기에만 김근태 의장 등 집행부와 회원 13명이 최장 15일에서 10일까지 구류처분을 받았다. 바야흐로 구류처분이라는 새로운 탄압 수단이 등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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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된 조직


제2차 총회로 생명력을 증명하다


청년 활동가의 대거 유입으로 활기를 띤 민청련은 1984년 4월 17일 서울 청량리 소재 신흥교회에서 2차 총회를 열었다. 창립 당시 집행부는 구속될 각오를 했고, 그에 대비해 차지 집행부를 구상해 놓을 정도였으나 모두 살아남은 것은 물론 복학조치로 조직이 크게 확대되기까지 했으니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이날 총회에 참가한 인원은 약 180명에 이르렀다.

총회는 내부 행사이므로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특히 많은 인원이 모일 넓은 장소를 기밀 누출 없이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회 직전 '계원'들에게 전달된 장소는 회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청량리에 있는 신흥교회였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는 윤반웅이었다.

그는 장준하의 동료로서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이자,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1976년 명동3.1민주구국선언 등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투사이기도 했다. 1990년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런 그였으므로 민청련에게 기꺼이 총회 장소로 교회를 내주었을 것이다.  

 2차총회가 열린 신흥교회는 현재는 옛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이름도 동녘교회로 바뀌었다. 왼쪽 사진은 윤반웅 목사
 2차총회가 열린 신흥교회는 현재는 옛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이름도 동녘교회로 바뀌었다. 왼쪽 사진은 윤반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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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에서는 조직이 확대된 것을 반영해 부의장직을 2명으로 늘려 창립 당시부터 관여해 왔던 이명준과 고려대 출신의 노동운동가 한경남(2014년 별세)을 부의장으로 추대해 집단지도체제를 갖췄다.

이명준은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창립 당시부터 모임에 참여해온 인물이었다. 한경남은 고대 재학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노동운동에 관여해오고 있었다. 그는 민청련 활동 이후 말년에는 친박연합, 새누리당 등으로 옮겨 정치를 하다가 201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경남을 부의장으로 추대한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고대 출신들이 창립에 기여한 바가 컸으므로 그 공헌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노동운동 출신을 대표로 내세움으로써 노동운동 측의 지지와 지원을 기대한 것이었다.  

 2차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이명준(왼쪽)·한경남(오른쪽) 부의장
 2차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이명준(왼쪽)·한경남(오른쪽)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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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부를 신설하다

2차 총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이었다. 여성부를 맡을 책임자는 당시 집행부에서는 가장 낮은 학번인 77학번의 임태숙이었다. 다른 부서 책임자들과의 학번 차이가 커서 부장이 아닌 부장 대리로 임명했다.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은 당시 여성 운동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다른 진보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태동됐다.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좌우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여성운동 역시 좌우로 분립됐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진보적 여성운동은 다른 모든 진보운동과 함께 거의 소멸됐다.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보수적 여성운동은 집권세력의 보호 아래 일종의 봉사단체 수준에 그쳐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강권을 동원해 밀어붙인 경제개발 과정에서 억눌리고 짓눌린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운동에 나서게 되는데, 그 구성원의 상당수는 늘 여성이었다. 즉 70년대 노동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컸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에 대한 모색이 새롭게 싹트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한국 여성운동의 모태 역할을 한 기구는 강원용 목사가 창설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는 여성사회교육과정을 도입했는데, 이 교육을 이수한 여성 활동가들이 1970년대 말에 '여성유권자연맹'을 만들어 여성의 정치적 각성을 위해 활동했다.

한편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신의 일부 여성들은 당시 미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위한 운동을 주창하며 1983년에 '여성의 전화'를 설립했다. 이러한 여성운동 단체들은 대체로 중산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가들, 특히 여성학생운동가들은 이러한 운동에 '부르주아적' 혹은 '프티 부르주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불렀다. 계급적 한계를 지닌 운동, 민중을 외면한 운동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리고 1980년에 여성학생운동가들의 인식을 확인해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여성유권자연맹 대표는 우리나라 여성운동 1세대 대표주자라고 불리는 김정례였다. 김정례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왕성한 활동력으로 '자수성가'한 여성운동가였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에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등 재야 민주세력과 가깝게 지내며 활동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광주 학살'을 저지르고 권력을 잡아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김정례가 여성 대표로 참여한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젊은 여성활동가들이 여성유권자연맹을 탈퇴하고 별도의 조직을 만든다. 그것이 1983년에 창립한 '여성평우회'(약칭 여평)였다. 여평은 1987년에 여성민우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5년 호주제 폐지는 여성민우회가 이룬 큰 업적이다.

 (위 사진) 여성평우회(1983~1987)가 발행했던 기관지. (아래 사진) 1987년 9월 여성민우회 창립식
 (위 사진) 여성평우회(1983~1987)가 발행했던 기관지. (아래 사진) 1987년 9월 여성민우회 창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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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평은 비록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여성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그 활동의 축은 이전 유권자연맹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여성학생운동가들은 '여성의 전화' 및 여평과는 다른 '변혁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인 1984년 4월 민청련 2차 총회에서 집행부 안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이었다.

민청련의 여성운동론

따라서 민청련 여성부의 여성운동론은 청년운동론과 궤를 같이하게 된다. 청년운동론에서의 청년이 단순히 연령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아니었듯이, 민청련에서 말하는 여성은 단지 성별 구분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앞장서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성부를 이끌 인물로 다른 부서와 달리 나이 어린 77학번의 임태숙이 발탁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민청련 여성부는 발족하면서 특별히 '여성부 발족에 붙여'라는 제목의 긴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결의문에서는 "여성 대중들은 같은 계층의 남성들이 받는 경제적 억압과 더불어 성차별이라는, 이중적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억압을 타파하기 위한 6가지 행동지침을 내걸었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립 분산된 여성 역량을 결집, 체계화하여 여성의 진정한 해방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투쟁한다.
1. 기층여성들이 처해 있는 경제적·성적 억압의 현실을 폭로하고 이를 여론화하며, 이들의 운동을 지원한다.
1. 바람직한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타 여성 세력과의 연대운동에 참여한다.
1. 우리의 현실이 요구하는 여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연구 및 조사 활동을 한다.
1.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길들여지고 왜곡된 문화를 지양, 현실에 뿌리 내린 건강한 여성문화를 창조한다.
1. 민주화운동 세력 내부에도 온존하고 있는 여성 차별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중 특히 마지막 결의가 눈에 띄었다. 운동권 안에서도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용기 있게' 폭로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다른 단체의 여성운동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민청련 초대 여성부장을 역임한 임태숙.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수련회 당시 모습
 민청련 초대 여성부장을 역임한 임태숙.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수련회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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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곤의 등장

한편 민청련 조직의 강화는 공개된 집행부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민청련은 창립 당시부터 공개된 집행부 이외에 공개되지 않은 조직으로 상임위원회를 두었다. 초대 위원장은 최민화였다. 상임위는 공개된 집행부의 공식적 활동과는 다르게 노동, 농민, 여성, 빈민 등 각 부문 운동과의 연대 및 지원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부서였다. 또한 정치, 경제, 국제관계 등 각 분야에 대한 정세를 분석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기능도 있었다.

상임위는 이러한 일상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공개된 집행부가 구속되어 공석이 될 경우 빠른 시일 안에 그것을 복원해내는 임무도 맡겨져 있었다. 일종의 섀도 캐비닛이었다.

이러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상임위원장에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인물이 영입되었다. 그는 바로 김병곤이었다.

김병곤은 서울대 운동권을 이끌어온 지도자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고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대 운동을 이끈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에서는 5월 1일 개교 이래 최초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1만 명이 참석하는 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앞에 20만 시위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집회의 기획에 그가 관여했다.

이후 광주 항쟁을 거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는 모처럼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직장인이 되었다. 민청련 창립에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오랜 투쟁과 투옥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유화 국면을 통해 운동의 전선이 넓어지고, 경험 있는 운동가가 요청되는 국면이 조성되자 민청련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민청련 간부 및 회원들은 그의 참여를 크게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펼칠 지도력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후 김병곤은 민청련 활동에 온 몸을 던졌고, 옥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지만 그의 활동은 그 큰 육신이 감당하기에도 너무 벅찬 것이었을까, 1991년 38세 한창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87년 가을 홍제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을 당시의 김병곤 민청련 상임위원장
 1987년 가을 홍제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을 당시의 김병곤 민청련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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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4·19 24주년을 기념하여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라는 시국성명서를 채택했다. 이 성명서는 4월 19일 서울 수유리 4·19묘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공개적으로 낭독된다.

총회를 마칠 무렵 이미 정보기관은 눈치를 채고 정복 및 사복 경찰 200여 명을 교회 주변에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기관이 판단하기에 아직은 총회 자체만으로 연행할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회원들은 긴장한 가운데 무리를 지어 청량리 로터리까지 행진을 했다. 이때 구호를 외치거나 했으면 당장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원들은 침묵의 행진을 함으로써 그들이 연행할 빌미를 주지 않았다. 무언의 시위를 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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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조직의 확대


전두환에 맞서기 위한 '청년운동론'의 내용은?


1984년 대학가는 새학기는 전두환 정권의 복학조치로 제적생들이 복학을 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특히 민청련 구성원들에게 복학 여부는 각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 셈이 되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체로 복학을 거부한 회원이 다수였다.
또한 복학조치가 정권이 의도한 대로 운동권의 약화라는 효과를 가져 오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 논쟁의 과정에서 학교를 떠난 뒤 흩어져 생활현장으로 돌아가거나 운동을 지속하더라도 소그룹 단위의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던 이들을 토론의 광장으로 불러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가 민청련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즉 전두환 정권의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에 밑거름을 제공한 격이었다.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1984년 1월 연세대 제적생들이 개최한 제적학생총회 모습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1984년 1월 연세대 제적생들이 개최한 제적학생총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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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창립 당시에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학번의 소수 활동가들을 주축으로 했지만, 복학 국면을 거치면서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초반 학번 사이의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민청련은 이들을 각 학교, 학번 별로 조직했는데, 기존의 기별 모임을 대신해 '계모임'의 이름을 모방해 '계반'이라고 불렀다.
계반은 서울의 주요 대학을 망라했고, 규모가 큰 서울대의 경우엔 각 단과대학 별로 나아가 각 학번 별로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성균관대 79학번으로 계반 모임에 참석했던 최경환(현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성균관대의 제적생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에서도 민청련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79학번에서는 내가 참석했다. 나는 낮에는 출판사 일을 하고, 저녁에는 민청련 일을 했다. 그때 우리 계반에는 은행원도 여럿 있었고, 이름 있는 건설회사 직원 등 나와 같은 직장인이 많았다. 대부분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주' 모임은 모든 활동방향과 노선이 논의되는 대의원회의 같은 성격의 모임이었다. 또한 '계반'을 이끌며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고 선전물을 배포하는 실천단위였다. 밤을 세워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고 유인물을 뿌리고 하는 일들을 했다. 그리고 '계주'와 '계반'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비공개 조직이었다. 민청련이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오랫동안 조직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계주'와 '계반'과 같은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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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풍미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민청련 조직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민청련 내부의 분위기가 한껏 고양돼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선 우선 그때 학생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의 고민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었다. 이른바 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으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던 원시 공산사회가 붕괴된 뒤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농노제 사회, 근대 자본제 사회로 단계적 발전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와 [공산당산언] 및 [자본론] 초판. 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이런 사진과 책의 소지는 곧바로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재해석한 일서들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했다
 칼 마르크스와 [공산당산언] 및 [자본론] 초판. 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이런 사진과 책의 소지는 곧바로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재해석한 일서들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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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관의 근본 뼈대는 역사는 발전한다는 테제이다.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가 모두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정도는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제 사회는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해서 마침내 계급이 소멸된 사회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학생운동가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이행 이전까지의 역사에 대한 발전사관은 대체로 받아들였다. 즉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을 극복할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기본 축은 노동운동이어야 했다. 학생운동은 우리나라에서 4·19혁명을 주도했고, 80년 광주항쟁에서도 주력을 담당했던 고도로 정치적인 세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근본적인 변혁을 이끌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다. 따라서 학생운동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각성시키고 조직하는 데 투신해야 한다는 것이 이때의 시대정신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학생운동가들은 노동 현장에 투신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운동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대학 학력으로 공장 노동자로 취업하는 것은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고졸 학력으로 속이고 이른바 '위장 취업'을 했다. 주로 구로 공단과 경인지역 공단의 제조업 기업에 취업한 그들은 노동자들의 소그룹을 만들어 함께 노동법 등을 학습하며 의식을 일깨우고, 그들과 함께 노동자 권익을 위한 '경제투쟁'을 벌여나갔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으로 나중에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심상정이 이 당시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이라는 의류생산업체에 위장 취업하여 이러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86년 구로공단 동맹파업 사건으로 수배된 시절의 심상정
 1986년 구로공단 동맹파업 사건으로 수배된 시절의 심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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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민청련 '계반'에서는 민청련 활동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 분위기도 존재했다. 그것은 민청련 운동은 기본 계급 즉, 노동자 계급에 기초하지 않은 상층에서의 정치운동이므로 결과적으로 야당 등 제도 정치권의 아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평가였다. 당시 야당은 민주한국당으로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정부의 간섭 아래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학생운동 측에서는 그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2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하고 있었다. 민청련 운동이 그들과 같은 종류의 활동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욕과도 같았다.

청년운동론을 정립하다


민청련 지도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방치해서는 구성원들을 붙잡아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학교를 떠난 학생운동 즉 청년운동의 개념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임무는 서울대 출신의 이론가 이을호에게 맡겨졌다. 이을호는 전북 전주고등학교 출신으로 서울대 미학과 74학번이었는데, 이미 학창시절부터 천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민청련 창립에 적극 참여하고 정책실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맡았다. 그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틀을 갖추어 모습을 나타낸 것이 민청련 판 '청년운동론'이었다.
주로 이범영을 통해 회원들에게 전파된 청년운동론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청년운동에서 청년이라 함은 반드시 연령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청년의 특성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혈기 넘치는 활동성에 있다. 이러한 활동성은 곧 진보적인 흐름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진보적 감수성으로도 연결된다. 즉 청년운동에서 청년은 새로운 이념을 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발할 활동으로 표출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청년운동은 전체 운동에서 '전술적 단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적 단위란 '전략적 단위'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의 변혁이다. 그런데 사회 변혁을 이루어낼 운동체나 조직이라고 하면 그 형태는 전 계급을 아우르면서 그 운동을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전위적 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운동가들의 인식이었다. 청년운동이 비록 높은 활동성을 가지고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운동의 지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략적 단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지만, 80년대 중반 당시의 운동권 안에서 이런 질문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적은 거의 없다. 왜냐 하면, 그런 조직체라면 당시 법규상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일 것이므로 지하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입에 떠올린다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그런 조직체는 우리의 운동 수준상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논의의 대상에 올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노동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심부 역할이어야 했다. 86년 구로 동맹파업 당시 공장 창밖으로 현수막을 내거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노동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심부 역할이어야 했다. 86년 구로 동맹파업 당시 공장 창밖으로 현수막을 내거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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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스스로를 '전술 단위'라고 한정함으로서 노동운동으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민청련의 운동이 정권과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전체 운동의 지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민청련 운동은 어디까지나 전체 운동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에 기초하지 않은 민청련 운동의 효용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선도적 정치투쟁'에 있었다. 노동운동은 비록 기본계급의 운동이고 장차 전체 운동의 지휘부가 되어야 할 '전략적' 운동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미성숙하여 당장의 부당한 정권에 맞서 싸울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이 정치적으로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나서서 정권에 맞서 정치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거기에서 정치적 긴장이 조성되고, 민주화를 위한 공간이 열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운동의 발전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바로 그 임무를 민청련이 떠안는다는 것이었다.
민청련이 선도적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지하에 숨은 익명의 존재여서는 곤란하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것이 민청련이 공개적으로 창립대회를 열고, 시내에 공개 사무실을 개설하며 활동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렇지만 민청련이 모든 조직 전체를 공개할 경우 정권의 탄압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직은 공개된 부분과 공개되지 않은 부분으로 나뉘어야 했다. 즉 집행부는 대중과 정권 앞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되, 집행부가 탄압으로 구속될 경우 그를 대체할 차기 지도부 및 그들을 충원할 회원 조직은 비공개로 운영되어야 했다. 이것을 민청련에서는 '반(半)공개 조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청년운동론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민청련은 '청년들이 전술적 단위로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반공개 조직'이었다. 

 반공개 조직 민청련에서 공개 및 비공개로 활동한 간부들. 윗줄 왼쪽부터 장준영, 박순섭, 한 사람 건너 장영달. 둘째줄 왼쪽부터 김병태, 유기홍, 박우섭, 김재승. 아랫줄 왼쪽부터 원혜영, 김근태, 최민화, 이을호, 임태숙. 사진은 1988년 김근태 석방 당시의 모습
 반공개 조직 민청련에서 공개 및 비공개로 활동한 간부들. 윗줄 왼쪽부터 장준영, 박순섭, 한 사람 건너 장영달. 둘째줄 왼쪽부터 김병태, 유기홍, 박우섭, 김재승. 아랫줄 왼쪽부터 원혜영, 김근태, 최민화, 이을호, 임태숙. 사진은 1988년 김근태 석방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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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집된 아들이 주검으로... '녹화사업 의문사' 6인


1984년 새해가 밝자 전두환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작년에는 많은 시련이 우리를 괴롭게 했으나, 우리는 민족의 위대한 저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착실한 전진을 이룩해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시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가장 직접적으로는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일 것이다. 그 전해인 1983년 10월 9일, 버마를 방문 중이던 그가 수행원들과 아웅산 장군 묘소를 참배하던 중, 나중에 북한인으로 밝혀진 테러범들이 설치한 폭탄이 터져 비서실장과 장관들을 비롯해 17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던 것. 이보다 한 달 쯤 전에는 대한항공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을 지나던 중 소련이 발사한 미사일을 맞아 추락해 탑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사고도 있었다. 전두환에게는 글자 그대로 시련의 한 해였을 것이다.

 민청련이 창립한 직후인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은 아웅산 묘소가 폭발한 직후 모습
 민청련이 창립한 직후인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사진은 아웅산 묘소가 폭발한 직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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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언론에 노출된 사건보다 더 큰 시련이 전두환에게는 있었다. 정치활동 금지로 꽁꽁 묶어둔 김영삼이 급기야 단식투쟁으로 항거했고, 그 사실이 언론에는 '현안 문제'라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사건으로만 보도되었지만, 사람들의 귀에서 귀로 구전되면서 정말로 전두환에게 '현안'이 되어갔다. 

더욱 큰 시련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반정부투쟁이 끊이지 않고 불타올랐던 것. 이것이야말로 전두환에게 진짜 시련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모종의 유화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연말에 학생운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에 대한 전면 복학 조치를 내놓기에 이르렀던 터였다.

'유화국면'과 복학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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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의 처지에서도 1984년은 연말에 발표된 복학조치가 초래한 논란으로 뜨겁게 시작되었다. 운동권에서는 제적생 복학조치를 '유화조치'로 불렀고, 5공이 이러한 조치를 취한 정세를 '유화국면'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궁지에 몰린 5공이 운동세력에게 숨통을 트여 줌으로서 저항의 기세를 누그러뜨려 보겠다는 심산에서 나온 고육책이라는 판단이었다.

따라서 1984년이 밝아오자, 학생운동 출신자들로 구성된 민청련 안에서는 복학 조치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다. 민청련이 대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내부에서의 논쟁은 엄청난 열기를 토해냈다.

복학 거부론의 기본 논지는 이 조치가 기본적으로 5공의 수명 연장을 위한 기만적인 제스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가장 선명하게 밀고나간 민청련 간부로는 기대(기별대표) 모임을 이끌던 이범영을 꼽을 수 있다.


이범영은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굵지만 윤기있는 목소리로 정세에 대해 또한 활동방향에 대해 조리있게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노가리'였다. 그는 매월 1회의 정기 기대 모임을 소집하고 공개된 집행부의 활동에 대한 보고와 정세에 대한 토론을 주재했다. 또한 각 기별 모임에서 제기된 의견과 기별 모임에서 거둔 회비를 집행부에 전달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1984년 초의 기대 모임에서는 복학 문제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이범영은 복학 거부론의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그는 기대 모임에서 이런 취지로 말했다.

"저들이 던져주는 떡고물을 왜 받아먹어야 하는가. 한 번 뒤로 물러서면 자꾸 물러서게 된다. 복학을 해서 학교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계속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복학한 이들을 통제하고 지휘할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복학은 우리 운동력의 손실만 초래할 것이다."

열혈 투쟁가였던 이범영은 안타깝게도 1994년 담도암으로 40세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에 반해 복학 수용론은 상대적으로 젊은 층에서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서울대의 경우 78학번들(민청련 출범 당시 78학번은 가장 어린 막내세대였다) 사이에 수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던 유시민이 대표적이었다.

수용론의 논지는 이 복학 조치 자체는 운동의 힘으로 5공을 압박해 쟁취한 성격이 있으므로 당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결코 투항이 아니며 학교라는 투쟁의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라고 했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5공에 굴복해서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싸우러 들어가는 거다. 80년 5․17 때 감옥에 가지 않고 군대에 간 것이 늘 부담이 됐었다. 이번엔 감옥 가는 것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겠다."

실제로 그는 복학했고, 복학생협의회를 이끌며 학생운동의 대열에 섰다. 그해 가을에 서울대 안에서 이른바 '학내 프락치 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기꺼이 그 책임자의 일을 떠맡았다. 그리고 그 일로 감옥에 갔으니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지킨 셈이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읽혀지는 명문장이 되었다.

어쨌든 논쟁은 뜨거웠지만, 민청련은 복학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민청련이 각 대학 학생운동의 연합체인 점에서 어느 한 쪽을 두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에 집중하기로 했다.

 복학거부론을 역설한 이범영(왼쪽)은 이후 시위 관련으로 수배되었고, 복학수용론을 주창한 유시민(오른쪽)은 서울대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복학거부론을 역설한 이범영(왼쪽)은 이후 시위 관련으로 수배되었고, 복학수용론을 주창한 유시민(오른쪽)은 서울대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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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드러난 녹화사업 공작

이때 민청련이 투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이른바 '강제 징집'과 '녹화 사업'이었다.

강제 징집이란 1979년 무렵부터 각 대학이 학칙에 총장의 권한으로 일방적으로 휴학을 명령할 수 있게 한 제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휴학을 '지도 휴학'이라고 불렀다. 지도 휴학의 요건은 학칙 상으로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유'라는 식으로 모호하게 표현돼 있지만 사실상 학생운동 관련자들을 학교로부터 강제적으로 격리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대부분의 남자 대학생들은 학사를 이유로 병역을 연기하고 있었으므로 지도 휴학을 당하면 군 입대 연기가 취소되고 곧바로 입대영장이 발부됐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도휴학 제도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도 이어져 1980년 5·17 계엄포고령 이후 수많은 학생운동 관련자들이 이 제도에 의해 본인의 뜻에 의하지 않은 군 입대를 강요당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은 지도휴학 제도의 절차적 요건조차 무시하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단순가담자를 연행한 상태에서 지도휴학과 징집을 단 하루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곧바로 군에 입대 조치했다.

따라서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사라지고, 며칠 뒤 군에 입대했다는 통지를 받게 되었다. 깜작 놀란 가족에게 학교 당국과 경찰은 구속되는 것보다 군에 입대하는 것이 일신상 좋은 것이라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렇게 군에 입대하게 된 당사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결코 단순한 군 병영생활이 아니었다. 보안사는 이렇게 강제 징집된 자들을 '특별관리'하여 마치 형사 피의자인 것처럼 불러서 조사를 하고, 학생운동에 관한 정보를 진술하도록 강요했다. 보안사는 이를 '녹화사업'이라고 불렀는데, 좌익사상으로 빨갛게 물든 머리를 녹색으로 바꾸는 작업이라는 뜻이었다.

녹화사업은 법률에 의하지 않은 정책임은 물론 오히려 헌법과 법률을 정면으로 위반한 불법행위였으나,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군 부대 안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 보안사는 학생운동 관련 군 복무자들에게 '사상전향'을 강요하는 한편 휴가를 주어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를 방문하고 선후배들을 만나 학생운동 동향을 파악한 뒤 보고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녹화사업은 그 과정에서 당사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상처를 주었음에 틀림없다. 결국 녹화사업 과정에서 의문의 죽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죽었다는 황망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가족들에게 전달된 사인은 한결같이 '신병을 비관한 자살'이었다. 가족들은 자살할 이유도 없고, 심지어 유서도 남기지 않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들의 호소는 언론을 통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었다. 

이렇게 소문으로만 떠돌던 녹화사업과 그로 말미암은 의문사 사건이 복학조치를 계기로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들에 의해 최초로 공론의 장으로 떠올랐다. 1984년 2월 20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과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가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진정한 복교를 위한 공개간담회'를 주최하려고 했으나 당국의 압력을 받은 기독교 측은 장소 대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140여 명의 복학생들이 그 장소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그들이 내세운 구호 중에 "강제징집 철폐"와  "의문사 진상규명"이 들어 있었다.

선도투쟁의 모범을 보이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민청련은 곧바로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앞장서기로 했다. 그래서 기독교 청년단체들과 함께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준비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을 이끈 이는 서울대 사범대 76학번 이원주였다. 그 자신이 5·17계엄 조치 이후 강제징집으로 군에 입대당해 '녹화사업'을 받은 당사자였다.

이원주는 민청련 활동 이후 인천민주노동자연맹 창립에 참여하는 등 평생 진보정치를 위한 활동에 헌신했다. 말년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던 중 2016년 11월,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원주는 1984년의 준비모임을 통해 그동안 입으로만 전해지던 녹화사업과 의문사의 진상을 담은 '강제징집 문제 공동조사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총 28쪽에 달하는 강집문제 보고서의 표지와 그 작업을 주도한 이원주
 총 28쪽에 달하는 강집문제 보고서의 표지와 그 작업을 주도한 이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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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 따르면 지도휴학과 강제징집은 법률상 대상이 될 수 없는 이들에게까지 마구잡이로 시행되었다. 시위 현장에서 단순 가담자로 연행된 학생, 뚜렷한 혐의 없이 '문제 학생'으로 지목된 자, 공단 부근에서 야학 강사를 하던 대학생 등이 주된 대상이었다. 그들을 불법으로 연행하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뒤 본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강압적으로 자원입대동의서에 서명하게 했다. 그리고 병역법상 정상적 절차 없이, 가족 면회도 없이 수사기관에서 곧바로 군부대로 징집 처리했다.

그들 중에는 신장 및 체중이 규정에 미달하거나 시력이 극도로 미약하여 징집 대상이 안 되는 자가 있었고, 심지어 나이가 아직 징집 대상에 못 미친 자도 있었고, 간질, 늑막염, 축농증, 소아마비 등 징집에서 제외될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도 포함됐다. 2대 독자 및 3대 독자로 징집 면제가 될 이들도 있었다.

'보고서'는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정치권은 국민의 생명이 걸린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어 야당인 민한당을 중심으로 정부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준비모임'은 정식으로 '강제징집 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더욱 광범위한 조사활동과 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때 강제징집돼 '녹화사업'의 대상이 된 뒤 의문의 죽음을 당한 6명의 신원과 죽음을 앞둔 행적을 조사하여 최초로 공개했다.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죽음이 있기 전 그 어떤 자살의 조짐이나 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그리고 의문사에 대한 문제 제기는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군은 일종의 불가침 영역이었고, 군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보안사 분실 같은 곳으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따라서 정치권의 야당은 물론 어떤 사회단체도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민청련이 총대를 메고 나선 것이었다.

공대위에 참여한 단체가 민청련 이외에는 모두 기독교와 가톨릭 교단에 속한 청년 단체였던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종교를 배경으로 삼지 않고서는 제기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의 배경이 없는 민청련은 정보기관에게 눈엣가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청련은 강제징집 문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함으로써 자칫 학생운동이 복학 문제를 두고 관념적인 논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당면 투쟁을 통해 운동 대열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녹화사업 의문사 6인 1.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2.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3.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4.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5.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6.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

 녹화사업 의문사 6인 1. 한양대학교 기계과 81학번 한영현 2. 고려대학교 정경계열 80학번 김두황 3. 연세대학교 영독불계열 81학번 정성희 4.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81학번 이윤성 5. 서울대 기계설계과 한희철 6. 동국대학교 사대 수학교육과

81학번 최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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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때문에 6번 해고... 민청련이 나섰다


김근태 의장 폭행사건

김근태 의장의 수난은 경찰에 의한 연행과 구류처분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3년 11월 28일, 안기부 수사 1국장 성용욱이 김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을 요청해왔다. 김 의장은 집행부에 대한 안기부의 집요한 협박과 방해에 대해 항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면담에 응하기로 하고 약속장소인 신라호텔로 나갔다.

그런데 저녁식사 도중 성용욱이 무례한 언동으로 김 의장을 자극했다. 이에 김 의장이 격분해 상을 뒤집어엎으며 항의했다. 결국 두 사람 간에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졌고, 김근태 의장은 눈 위가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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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안기부 요원의 행패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청련에서는 즉시 성용욱의 폭력에 대해 고소하는 법적 조처를 취하는 한편 11월 30일자로 폭력사태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9일에는 홍제동 한 중국음식점에서 회원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김 의장 폭행사태에 대한 경과를 보고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안기부는 처음에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부인했으나 민청련의 끈질긴 대응에 결국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했다. 결국 안기부 최 아무개 수사단장이 직접 병원에 찾아와 사과하고 치료비를 변상하는 선에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김근태 의장에게 가해진 안기부 폭행사태에 대한 성명서
 김근태 의장에게 가해진 안기부 폭행사태에 대한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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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철폐투쟁

12월 6일, 전북 이리에서 태창 메리야스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민청련 사무실로 전해졌다. 민청련은 진상조사와 대책 수립을 위해 즉각 박우섭 총무국장을 현지로 파견한다. 박우섭은 이리 노동부 지방사무소 등을 방문하여 진상조사를 하는 한편 농성 현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귀경하여 집행위에 출장보고를 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박우섭 총무의 조사보고를 바탕으로 가톨릭 JOC 등과 함께 공동으로 농성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연성수는 인천에서 노동현장 문화패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귄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김옥섭, 인천 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서기화(JOC 회원) 등을 만나 지원방안을 의논했다.

김옥섭은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이후에도 사업주들 사이에 돌고 있는 블랙리스트 때문에 6번이나 더 해고된 전력이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노동운동을 막기 위한 정부와 사업주의 합작품으로 노동운동에 큰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리 태창 메리야스의 쟁의 역시 이것이 문제가 돼 일어난 것이었다.

민청련은 즉시 노동⋅청년운동단체들과 함께 블랙리스트를 철폐하는 운동을 조직했다. 12월 15일 JOC 회장단 단식농성, 16일 인천지역 해고노동자 단식농성, 21일 JOC 주최의 해고노동자를 위한 예배 및 농성에 민청련이 동참했다.

이와 동시에 민청련은 12월 20일, 16개 청년단체 연석으로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 논의의 결과로 청년단체들은 12월 26일 13개 단체 연합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민주노동운동자 블랙리스트 문제 대책위원회'(위원장 문익환)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블랙리스트 철폐를 위한 연합 성명서(왼쪽)과 1978년 7월 동일방직 노조에서 일하던 김옥섭(오른쪽)  유인물 배포 사건으로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블랙리스트 철폐를 위한 연합 성명서(왼쪽)과 1978년 7월 동일방직 노조에서 일하던 김옥섭(오른쪽) 유인물 배포 사건으로 재판에 출석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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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연합회 탄압 폭로투쟁

1983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른바 '야림사건'으로 알려진 '야학연합회' 사건이 발생했다.
치안본부 직속 비밀수사기관이 150여 명의 야학교사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고 가택수사를 하는 등 전면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행된 교사들은 수사과정에서 장시간 밀실감금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며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는 강제진술서를 요구받았다. 치안본부는 이런 과정을 통해 대학생 300명, 노동자 200명이 연루된 조직표를 작성하고 야학 전체를 사회주의 단체로 낙인찍으며 좌경용공의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민청련은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파헤쳐 전두환 정권이 어떻게 순수한 야학운동을 용공조작하고 있는지 실상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농협민주화운동과 수세 현물납부운동

그리고 1983년에 가톨릭농민회 중심으로 전개된 '농협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연대했다.
'농협민주화운동'은 농협이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담보하고 농민이 식량생산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데 도움이 되는 조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농민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외국농산물을 수입해 판매하는 등 농민을 어렵게 만드는 기구로 타락해가고 있던 현실에서 출발했다.

가농은 농협의 문제는 농민이 직접 대표를 뽑지 못하고 정부가 임명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보고 농협민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83년 7월 27일부터 '농협조합장 직선제 100만 서명운동 추진 결의대회'를 연합회별로 개최하고 범국민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 서명운동에 민청련은 적극 동참하고, 지지성명도 발표했다.

아울러 민청련은 '수세 현물납부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연대를 표시했다. '수세 현물납부운동"은 경남 관방마을에서 가톨릭농민회 주도로 일어났다. 83년 11월초부터 이 마을 농민들은 추곡수매량을 늘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하자 현물(벼)로 수세(농지개량조합비)를 납부할 것을 결의했다.

농민들은 12월 19일, 경운기 17대에 261가마의 벼를 싣고 '수세 현물 자진납부 차량'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12km 떨어진 진주시내의 진양 농지개량조합으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 온갖 방해와 구타를 무릅쓰고 조합에 도착, 잠긴 출입구의 담장 너머로 벼 가마를 던져 넣었다. 이 투쟁으로 이장이 구속되기까지 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당국이 농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민청련은 이 사건의 경과를 사회에 적극 알려나감으로써 농민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이후 그해 작성한 성명서 목록. 1984년에 열린 제2차 총회 보고 문건의 일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이후 그해 작성한 성명서 목록. 1984년에 열린 제2차 총회 보고 문건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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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자율화조치와 제적학생 복학문제

1983년 12월 21일, 이른바 학원자율화조치가 발표됐다. 권이혁 문교부 장관은 전국대학 총⋅학장회의에서 제적학생 1,363명에 대한 복교조치를 발표하고, 학원대책도 처벌 위주에서 선도 위주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이튿날에는 공안사건으로 구속됐던 172명이 석방되고 142명이 복권되었는데 그 중 131명이 학생운동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학생들이었다.

제적생 복학 조치는 민청련 활동에 즉각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미쳤다. 민청련의 기반조직에 속한 회원들 중 대다수가 제적생이었기 때문에 이 복학 문제는 자신의 거취와 관련된 중대사였다.

그래서 복학 문제를 둘러싸고 민청련 각 조직 내에서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다. 집행위에서는 집행위원 모두가 민청련 상근 활동으로 복학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집행위원들은 복학하지 않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민청련 집행부는 복학 논의가 복학여부를 떠나 민청련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공개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제적생들도 대부분 이 복학논의에는 참여했고, 이 논의를 매개로 미조직 계반을 조직화하여 민청련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판단이 옳았음이 곧 드러났다.

이렇게 복학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어느덧 해는 기울어 연말이 다가왔다. 민청련은 당시 운동권 사람들에게는 낯선 모임인 대규모 송년회를 계획한다.

마리스타 송년회

송년회는 12월 28일 서울 합정동에 있는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열렸다. 2호선 전철 합정역에서 한강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병인년(1864년)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려 순교한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절두산 성지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꺽어 3-4분 가면 마리스타 수도원이 나온다. 1973년 멕시코 수사들이 세운 수도원이다.

이곳은 2013년 통진당 이석기 의원이 당원들을 모아놓고 강연했다가 내란음모를 꾸민 것으로 기소되어 당 해산의 빌미가 됐던 곳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곳은 1980년대 민청련⋅민통련의 민주화운동과 인연이 깊은 장소였다. 6월항쟁 당시 민통련과 국민운동본부의 중요한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83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28일 저녁 7시 이곳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민청련 합동송년회가 열렸다. 합동송년회라 이름 붙인 것은 민청련이 주관하는 송년회지만 민청련 회원들 외에 아직 민청련에 들어오지 않은 재야 민주청년들 모두를 초청한 송년회였기 때문이다. 마침 22일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13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석방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석방환영회도 겸하는 모임으로 자리가 마련됐다.

민청련 집행부가 공안기관의 방해공작을 뚫고 사무실에 입주한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성명서 한 장에 김근태 의장이 연행되고 구류를 사는 등 전두환 정권 탄압의 서슬이 아직 시퍼런 때라 이 합동송년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놓고도 기대(기별대표모임)에서는 논란이 많았다.

기대의 분위기는 신중론이 강했다. 아직 우리의 힘이 약한데 공개적으로 이렇게 큰 집회를 열었다가 저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공개집회란 점도 우려의 이유였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에서는 이 송년회가 운동권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민청련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회원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대에서도 결국 집행부의 적극적인 설득에 따라 합동송년회를 열기로 결의하고, 각 출신학교별로 대대적으로 참석을 독려했다. 송년회 장소는 창립총회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고려해 시내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으로 정했다.

 1983년 민청련 송년회가 열린 마리스타 수도원 현재 전경. 지금은 마리스타 교육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1983년 민청련 송년회가 열린 마리스타 수도원 현재 전경. 지금은 마리스타 교육원으로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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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회는 예상을 뛰어넘어 200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송년회는 1⋅2부로 나누어 진행했다. 1부에서는 석방된 동지들에 대한 환영회를 진행했다. 박우섭의 사회로, 석방된 청년 40여 명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소개되고 환영과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김근태 의장의 환영사와 석방자 대표의 답례 인사가 이어졌다.

석방자들은 수감 중에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기들을 환영해주리라 예상치 못했었기 때문에 감동이 컸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나이든 제적생들은 학생운동 후에 자신이 선택할 활동지로서 자연스럽게 민청련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2부에서는 연성수의 사회로 민주화운동상 시상식을 가졌다. 이것은 연성수가 직접 기획한 것인데,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한 해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활동과 인물에 대해 시상하는 것이었다. 우수성명서상에는 <황정하 학형을 누가 죽였는가!>가 차지했다. 시위 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허리를 다친 연대의 양경희와 외대의 이경옥에게도 상이 수여됐다. 민중가요대상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선정됐다.

이어서 박우섭의 사회로 흥겨운 여흥시간을 가졌다. 참석한 청년동지들은 투쟁과정의 온갖 시름을 모두 털어버리고 한데 어울려 밤이 깊도록 놀았다.

민청련은 예상외로 큰 성황을 이룬 송년회에 크게 고무되었다. 김근태 의장은 이 송년회를 이렇게 평했다.

"민청련이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한 송년회는 굉장히 열기 있는 모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자신감을 가졌고, 그리고 함께 뜻을 모아서 더욱 전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굉장한 열기가 민주주의 쪽으로 진군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송년회 모임을 기점으로 민청련은 공개정치투쟁단체로서 대내외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1984년부터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가게 된다.

 1983년 송년회에서 상을 받은 민청련 회원 이경옥. 2012년 촬영
 1983년 송년회에서 상을 받은 민청련 회원 이경옥. 2012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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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방한' 반대 시위... 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


민청련은 사무실과 조직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11월 초부터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첫 활동으로 11월 5일, 사무실 근처 음식점 대우정에서 내외신 기자와 외부인사 초청 다과회를 가지고,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장문의 성명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를 발표한다. 11월 12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는데 이는 미국이 전두환 독재정권 지지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에 대한 한국민의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성명서에서 민청련은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재권력의 지원을 위한 것인가'라고 묻고 전두환 독재정권의 지원을 위한 이번 방한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레이건 방한 반대투쟁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장문의 성명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의 첫장과 마지막장.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장문의 성명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 의 첫장과 마지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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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명서는 단순히 레이건 방한 반대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성명서는 A4 용지 9쪽에 달하는 장문의 문건으로 성명서라기보다는 당시 운동권에 떠돌던 운동론 팸플릿에 가까웠다. 여기서 당시 민청련이 바라보는 정세에 대한 인식과 향후 운동방향과 실천과제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문건의 작성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근태 의장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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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말미에는 민청련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도 정리해 놓았다. 목소리만 높이는 명망가 운동이나 권력이 그어놓은 선 안에 머무는 소극적인 운동을 배격하고 투쟁성에 기초한 조직적 대중투쟁이 청년운동의 방향임을 밝혔다.

레이건 방한 반대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치안당국은 민주인사들에 대해서 불법 연행과 불법 연금조치를 남발했다. 이를테면, 당국의 주요 요시찰 대상이던 학생운동 출신 제적생을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이때 숭실대 제적생이었던 윤여연은 다짜고짜 경찰의 급습을 받고 연행돼 구로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레이건이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꼬박 갇혀 있었다. 윤여연은 이 유치장에서 외국어대 제적생인 김성원과 첫 대면을 했는데, 이들은 훗날 민청련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민청련은 11월 11일에 기독청년협의회(EYC)와 함께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야유회에 참석한 김성원(왼쪽)과 윤여연(오른쪽)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야유회에 참석한 김성원(왼쪽)과 윤여연(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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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

11월 8일 서울대에서 레이건 방한에 반대하는 교내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 과정에서 주동자였던 4학년 학생 황정하가 시위를 주동하기 위해 도서관 6층에서 줄을 타고 5층 난간으로 내려오다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내에 상주하던 기관원들의 과잉제지가 사고의 원인이었다.

이에 민청련은 11월 30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와 공동 명의로 <이 땅에서 폭력은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누가 황정하 학형을 죽였는가?'라고 묻고, 1차적 책임은 학원에 투입된 학원사찰요원들에게 있지만 그 배후에서 이들을 '교사하고 명령한' 권력 당국이 진짜 주범이라고 주장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성명서는 아울러 억압과 감시체제를 묵인하고 침묵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 책임이 있음을 고백했다. 또한 '황정하 학형은 영웅인가?'라고 묻고, "아니다. 결코 아니다!...(중략) 그는 연속적인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꿰뚫는다는 진리 앞에 한 작은 물방울이고자 했다. 외롭고 두려운 자기 결단과 희생 앞에 지극히 겸허하게 작아지고자 한 황정하 학형은 그러기에 오히려 위대한 것이다"라고 그 죽음의 뜻을 기렸다.

 당시 배포되었던 황정하 추모 전단지 전면
 당시 배포되었던 황정하 추모 전단지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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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민청련과 청년단체들은 12월 4일 명동성당에서 황정하 추도미사를 열었다. 추도미사는 명동성당 교육문화관에서 1500여 청년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함세웅 신부가 강론을 하고 서울대학생 백낙현 군의 추도사 낭독, '학원민주화를 위한 카톨릭 학생 선언' 등으로 진행됐다. 미사 후에는 100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성당 밖 100m 앞까지 진출했다.

이 추도식장에서 민청련은 고인의 뜻을 기리는 황정하 추모카드를 만들어 300원씩에 팔았다. 이 추모카드에 공동성명서 내용을 담았는데, 당시 재정이 어려웠던 사정도 있었지만 성명서를 판매한다는 것이 집회 참석자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호응이 좋았다.

김근태 의장의 수난

안기부와 경찰에서는 민청련 간부들을 계속 감시하는 한편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로 위협을 가해왔다. 그 중에서도 김근태 의장이 가장 중요한 타깃이었다. 김근태 의장은 창립총회 때 안기부에 연행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난 이후에도 툭하면 담당서인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 민청련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집회 같은 대외 활동이 있을 때마다 경찰들은 김근태를 연행해갔고, 그 과정에서 구류도 여러 번 살았다.

11월 중순쯤 되었을까. 김근태 의장이 종로서에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 사무실로 전해졌다. 아마도 그 직전에 냈던 레이건 방한 반대 성명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실에 비상이 걸렸다.

박우섭 총무와 홍성엽 재정부장이 전화로 회원들을 불러 모으고, 박계동 홍보부장은 언론사에 연락하여 연행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종로 경찰서장에게 전화로 강력히 항의하고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비상을 건 지 한 시간쯤 지나 이해찬, 박성규, 권형택 등 10여 명의 회원들이 사무실에 모였다.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종로경찰서로 직접 쳐들어가기로 했다.

실탄이 필요했다. 실탄이란 민청련 입장을 알리는 성명서였다. 우선 급한대로 박계동이 초안한 16절지 한 장짜리 항의 성명서를 쓰고, 연성수 등 집행부원들이 함께 달려들어 수동식 먹지 인쇄기로 200여 부를 인쇄했다.

역전의 용사 이해찬, 박계동이 앞장서고 집행부원들과 회원들 10여명이 뒤따르면서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종로경찰서까지 행진했다. 간간히 "김근태를 석방하라!" 구호도 외쳤다. 사무실에서 종로경찰서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연도의 시민들에게는 이 시위행렬이 당시 전두환 철권통치 아래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광경이었다. 종로서에 도착한 이들은 경찰서 마당에서 저지하는 경찰들에 둘러싸였다. 그러자 이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서장 면담과 김근태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들과 밀고 당기고 하는 과정에서 이해찬의 안경이 깨졌다.

결국 민청련 담당이었던 정보과 소속 정아무개 형사가 쫓아 나와 정보과 사무실로 안내했다. 정보과에 들어가자마자 박계동, 이해찬이 주동해서 사무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금방이라도 책상을 둘러엎을 태세로 큰소리로 김 의장 내놓으라며 소란을 피웠다. 한참 소란을 피운 후에야 정보과장이 나와 김근태 연행에 대해 해명했다. 조사 중이니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의장의 석방 약속을 받아 내지는 못했지만 민청련의 강력한 항의 의사를 경찰 측에 전했다. 그리고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폭행에 대해서는 종로경찰서장의 사과와 깨진 안경에 대한 변상약속을 받아냈다. 김 의장은 이번에도 결국 구류 3일을 살고 나왔다.

5분대기조 공동번역실

이런 긴급동원에는 권형택이 운영하던 공동번역실이 한몫을 했다. 이 번역실은 권형택이 아현동에 있는 선배 박경희(동국대 74학번)가 운영하는 출판사 지양사 옆에 사무실 한 칸을 얻어 운동권 후배 4-5명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번역실은 일반직장에 다니는 회원들에 비해 근무가 자유로운 편이라 민청련의 긴급사태가 있을 때마다 일차적으로 동원되었다.

공동번역실은 권형택이 다음 해 민청련 집행부로 들어가기 전까지 책임자가 되어 1년여를 운영했다. 이 번역실에는 오의택, 진재학, 백병규, 김성환, 최보은 등이 있었다.

 공동번역실 멤버들. 1.천희상 2.권형택 3.오의택 4.진재학 5.백병규 6.김성환
 공동번역실 멤버들. 1.천희상 2.권형택 3.오의택 4.진재학 5.백병규 6.김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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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번역실의 일거리는 당시 운동권 선배들이 경영하는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주로 얻어왔다. 물론 바로 옆 사무실 지양사도 고객 중 하나였다. 그러나 번역일은 당시 소규모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재정사정이 워낙 뻔한 것이어서 번역료도 쌌고, 결재도 몇 달씩 미뤄지기 십상이라 썩 재미있는 일이 못되었다.

그나마 당시 여의도 전경련빌딩에 있는 현대경영이라는 잡지사에 다니는 천희상(서울대 73학번)이 잡지에 게재할 영어 원고 번역 일을 나눠줘서 큰 도움이 됐다. 원고료도 비교적 괜찮았고, 무엇보다 월말에 꼬박꼬박 결재 받을 수 있었다. 천희상은 나중에 권형택이 번역실을 떠난 뒤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실장으로 들어와 앉았다. 

공동번역실은 말이 직장이지 선후배들이 모인 동아리 비슷했다. 출퇴근 시간은 정해놓았지만 실제 규율은 느슨했다. 번역 작업을 하다가 오후 3-4시면 모여서 바둑도 두고, 고스톱도 치고, 그러다 술 먹으러 가는 일이 잦았다. 각자의 수입은 자기가 일한 분량만큼 가져가고, 그 중 일정 부분만 사무실 경비조로 내놓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협동조합과 비슷했다. 권형택이 명색이 번역실장이었지만 회사 사장처럼 지시하고 이윤을 챙기는 것은 아니고, 단순 관리자에 가까웠다. 일종의 방장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민청련이 생기고 나서 이 번역실에 변화가 생겼다. 민청련 집행부가 구성되고 사무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번역실이 집행부의 행동대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번역실 사람들에게는 민청련에서 한 달이면 몇 번 씩 동원령이 떨어졌다.

민청련이 사무실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긴급대책회의라다든지, 또 김근태 의장이 경찰서에 잡혀가서 항의방문을 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번역실로 연락이 왔다. 막상 직장 다니는 회원들을 근무 중에 불러내기는 어려웠으니 자유노동자인 번역실 사람들이 일차 동원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실 사람들은 자신을 민청련의 '5분대기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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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설렁탕의 '기대 모임', 민주화의 역사를 만들다



민청련은 그 회원들은 상당수가 주로 서울에 있는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구속과 수감생활을 경험한 이른바 '빵잽이'들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창립 이후 그들은 자연스럽게 각 대학별로 조직을 만들어나갔다.

최대 인원을 자랑한 서울대

서울대는 72학번부터 78학번까지는 1980년 이후 대체로 학번별 모임이 형성되어 있었다. 학생운동을 함께 한 동기들이 매월 한두 차례 십여 명 정도씩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모였다. 71학번 이상 60년대 후반 학번 선배들은 숫자도 적고 대개 서로 잘 아는 사이라 학번 구별 없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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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민청련 조직으로서의 기별대표 즉, '기대'는 초기에는 서울대의 학번별 모임 대표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시 기대로 활동한 면면을 보면, 71학번 이상 선배 그룹은 임상택, 72학번은 김도연, 박성규, 73학번 이범영, 박석운, 74학번 권형택, 김영현, 75학번 이우재, 연성만, 76학번 김종복, 77학번 오세중, 유기홍, 78학번 김성환, 진영효 등이었다.

공대 출신은 별도로 모임이 형성되어 기대에는 이래경, 백경진, 이종현 등이 참석했다. 농대 쪽은 1984년 이후에 이병호(75학번)가 참석했다. 문화 쪽은 학번 상관없이 별도로 연성수가 애오개소극장 문화패들과 연결되어 집행부 겸 기대 역할을 맡았다.

 서울대 기대 1.임상택 2.박석운 3.김영현 4.김종복
 서울대 기대 1.임상택 2.박석운 3.김영현 4.김종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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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의 노장이 많았던 고대와 연대

고대는 서울대 다음으로 인적 자원이 많은 그룹이었다. 조성우와 박계동이 초기에 고대 출신 인맥들을 민청련과 조직적으로 연결하려고 시도했지만 오랫동안 내려오는 학교 이념서클의 인맥들을 모두 다 커버하기 어려웠다. 그런 데다 1983년 10월 조성우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박계동도 집행부로 들어왔기 때문에 내부 조직 작업에 힘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범영, 김도연 등이 나서서 선배 그룹 쪽은 한경남(68학번)으로, 그 아래 후배 쪽으로는 이범, 고성국, 정경연(이상 75학번), 이승환(76학번) 등을 접촉하여 조직적 연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후배 쪽은 현장론이 강한데다 내부 논의가 복잡해 본격적으로 민청련과 조직적 연결이 이루어진 것은 1984년 이후였다.

연대는 선배 쪽은 최민화(연대 69학번)와 홍성엽(연대 73학번)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민청학련 사건 때 함께 옥고를 치른 김학민(67학번), 송무호(71학번), 송재덕(73학번), 고영하(71학번)와 고영하의 의대 후배 몇 사람, 문병수 등과 개인적으로 연결했다. 이들은 모임을 하면 반드시 회비를 걷었고 이를 민청련에 전달했다.

그러나 후배 쪽은 홍성엽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4년까지도 거의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현장론이 강해 공개운동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서울공대 기대 1.백경진 2.이래경 3.이종현. 서울농대 기대 4.이병호
 서울공대 기대 1.백경진 2.이래경 3.이종현. 서울농대 기대 4.이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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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참여를 결정한 성균관대

성대는 비교적 빨리 '기대'에 참여했다. 장준영(73학번)이 중심이 되어 비교적 일찍 내부논의를 정리하고 1983년 10월 말에 조직적으로 민청련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성대와 처음 접촉을 시도한 사람은 김도연이었다. 김도연은 1983년 7, 8월경 성대 쪽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장준영이 성대의 핵심인물이라고 파악하고, 전화를 걸어 만난다. 김도연으로부터 공개청년단체 논의를 처음 접한 장준영은 그것이 어느 정도 실효성 있는 논의인지 몇 번 더 신중하게 확인했다.

당시 성대는 전투적인 학생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주류는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현장론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선배 그룹은 이 문제에 대해 성균관대 학생운동 조직 전반에 집단적인 논의로 부쳐, 창립총회 직전인 9월 하순에 천마산에서 전체 회동을 가졌다. 참석자는 장준영, 김수길, 김희상, 최영삼, 탁무권, 이순동, 김찬, 최금희, 이현배, 민병두, 최경환, 이헌필 등 72학번에서 80학번까지 약 20명이었다.

이 모임에서 장시간 논의 끝에 '민청련이 변혁운동의 중심이 될 수는 없으나 당면 운동에 필요한 조직이니 참여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성대 대표로 기대에 장준영이 참석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9월 30일 창립총회에는 시일이 촉박하므로 내부적으로 좀 더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조직적인 참석은 보류하고 78학번 이현배만 개인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창립 한 달쯤 뒤인 10월 말부터 기대 모임에 장준영이 참석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화여대에서는 최정순(75학번)이 기별대표로 참석했으나, 조직적 논의 단위 형성은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이루어졌다. 중앙대에서는 이명준(68학번), 이석표(73학번)가 옵저버 자격으로 부정기적으로 참석했다.

 고려대 기대 1.정경연 2.이승환. 중앙대 기대 4.이석표
 고려대 기대 1.정경연 2.이승환. 중앙대 기대 4.이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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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중요 결정은 '기대'에서

민청련 창립에서 '기대'(기별 대표조직)는 일종의 대의원회의 역할을 했다. 그래서 기대의 조직 위상이 집행위와 상임위보다 상위에 있었다. 모든 중요한 문제의 결정이 이 '기대' 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예컨대 민청련의 조직 명칭이라든지 기관지 '민주화의 길'의 명칭도 이 기대회의에서 결정했다.

중요 집회라든지 집행부에서 발표하는 성명서나 문건도 반드시 이 기대회의를 거쳤다. 이런 권한에는 그에 상응한 책임이 따랐다. 우선 기대에서는 각 단위조직을 통해 회원들로부터 회비를 거두어 집행위에 전달해야 했다. 전체 운영경비의 1/3에서 1/2 정도가 이 기대에서 거두어들이는 회비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기대모임은 중요 집회에 인원을 동원하는 일도 맡았다. 당시 시위 주동자를 '야전사령관'이라는 뜻에서 '야사'라고 불렀는데, '야사'를 선정하는 일도 기본적으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성대가 참여한 뒤 10월 말경에 열린 기대모임에는 대략 15~20명 정도의 기별대표가 참석했다. 서울대가 7~8명 정도로 제일 많았고, 연대, 고대, 성대, 이대가 1~2명, 그 밖에 2~3개 대학 출신들이 옵서버로 참석했다. 김근태 의장 등 집행위에서 2~3명, 상임위에서도 이해찬, 이을호 등 1~2명이 배석했다.

모임은 주 1회 정례모임을 갖는 걸 기본으로 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주 2회 이상 모이는 일도 자주 있었다. 김근태 의장은 이 기대모임에 자주 나와 국내외 정세분석과 활동상황 보고했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은 '기대'의 자율적 논의에 맡겼다. 이런 김 의장의 민주적 조직운영은 기대의 책임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기대'의 운영 책임은 창립 초기에 김도연과 이범영이 주로 담당했고, 성대가 참여하고 나서 11월 초부터는 장준영이 여기에 가세했다.

기대 모임은 대외적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비밀 조직이어서 모이는 시간과 장소도 보안에 신경을 많이 썼다. 주로 모임장소로 종로 2가 이문설렁탕 등을 이용했다. 기대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직업은 자영업, 회사원 등 다양했지만 집행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직장인이 많았다. 한번 모이면 회의가 3~4시간 계속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 자정을 넘기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모임의 열기가 뜨거웠다.

기대의 역할은 기대모임 참석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기대의 논의 결과를 자기가 속한 기별, 또는 대학별 모임에 전달하고, 회비 수납, 인원 동원, 중요문제에 대한 의견 수렴 등을 해야 했다. 그래서 기대는 보통 1주일에 2~3일은 민청련 활동에 자기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1983년 12월 21일 학원자율화조치 발표 이후 민청련 조직원이 급속히 확대되면서 기대모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성균관대 기대 1.장준영 2.김희상 3.김찬 4.이현배 5.최경환
 성균관대 기대 1.장준영 2.김희상 3.김찬 4.이현배 5.최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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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직으로 월급도 받은 집행 간부들

민청련의 대외적인 활동은 집행위 간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아침 9시면 어김없이 김근태 의장의 주재로 장영달 부의장, 박우섭 총무부장, 박계동 홍보부장, 홍성엽 재정부장, 연성수 사회부장 등 6명의 집행위원들이 사무실에 모여 아침 조회를 열었다. 퇴근은 저녁 6시였다.

김근태 의장은 온유한 성품이었지만 상근 간부들의 근무 기강을 세우는 데는 엄격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 김근태 의장을 형처럼 따랐지만 한편으로 어려워했다. 장영달 부의장이 때때로 옥중투쟁, 교도관들과 싸운 무용담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안기부, 치안본부 등 민청련 담당 기관원들과의 교섭 창구는 박계동이 맡았다. 박우섭은 부지런히 재야운동과 민청련 내부조직을 오가며 일을 기획하고 추진해 나갔다. 홍성엽은  성품대로 언제나 말없이 사무실을 지키면서 온갖 궂은 살림살이를 도맡아 조용히 꾸려나갔다. 연성수는 주로 노동현장 쪽과 연결하며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고,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서 사업 전반에 활력을 주었다.

집행위 간부는 모두 상근직이었다. 민청련은 집행 간부의 상근화를 위해서 최저생계비 수준이지만 고정급여를 지불했다. 급여체계는 간단했다. 연령에 상관없이 월 10만 원을 기본급으로 하고, 기혼자는 10만 원을 추가하고, 자녀가 있을 경우 2명까지 1인당 각 5만 원씩 추가해 최대 20만 원까지 가족 수당을 지급했다.

단, 부인이 돈을 벌 때는 5만 원을 삭감했다. 예를 들면, 기혼에 자녀가 둘이 있으면 30만원을 받았고, 부인이 돈을 벌 경우 25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반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월급이었지만, 이 급여는 집행 간부들이 한눈팔지 않고 일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것이었다.

이렇게 상근체제를 유지하는 데는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노고가 숨어있었다. 특히 '기대'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매달 회원들이 내는 1만 원씩의 회비를 모아 10-20만 원 정도씩 꼬박꼬박 박우섭 총무에게 전달했다. 박우섭의 회고에 의하면 창립 초기 급여를 포함하여 매월 400~500만 원 정도 운영비가 들었는데, 그 중 대략 1/3은 회비, 1/3은 후원금, 1/3이 수익사업으로 충당되었다고 한다.

정책 기능을 담당한 상임위원회

상임위원회는 원래 집행위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는 사태에 대비해 2진 개념으로 조직했지만, 집행위가 안정을 찾으면서 주로 정책 기능을 담당했다. 초기에는 사무실과 상근자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활발하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꾸준히 정기적으로 모임을 유지하면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모임 장소로는 주로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의 돌베개 출판사 사무실을 이용했다. 최민화 의장, 이해찬 부의장, 이을호 부의장 등 4-5명이 모여 토론하고, 정세분석 등의 문건을 작성했다.

문건 초안 작성은 주로 이을호가 맡았다. 이을호는 당시 출판사에 간부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저녁 시간을 거의 전적으로 상임위 활동에 투여하다시피 했다. 1984년부터는 독자적인 사무실을 마련하고 상근 인력도 충원하면서 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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