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운이 없으면 영웅도 소용없다

제2 러일전쟁 대신 제1차 세계대전 터지며
 실패로 끝난 망국 이후 첫 독립운동 전략


<권업신문> 최초 발간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카야 거리 10번지. 권업회 신문부장 신채호가 창간호부터 30호까지 이곳에서 발행했다. 지금은 5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임경석 제공


도대체 어떻게 독립을 쟁취한다는 말인가? 일본이 저토록 강대한데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과연 이길 수 있겠는가? 망명자들을 바라보는 속마음이 이랬다. 연해주로 몰려드는 망명자들을 보는 현지 동포들의 속마음 말이다. 러시아에 이주한 지 오래된 한인 동포들, 당시 말로 원호(元戶)들의 정서는 망명자들과 똑같지 않았다. 조국이 독립하고 잘살면 그거야 말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강약이 부동인데 어쩌자는 건가. 매일 삼삼오오 모여앉아 독립! 애국! 목소리 높인다고 저 강력한 일본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차마 드러내놓고는 말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말로만 애국 외친 망명자들


원호 출신 인텔리 청년 김만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해 28살인 그는 재러동포 2세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초·중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원 자격증을 취득해 소학교 교사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문학청년이었다. 러시아문학 작품은 물론이고 여러 서유럽 국가의 유명한 저술들도 독파했다. 한인 이주민 사회에서 문학적 소양으로는 손꼽히는 이였다. 그는 언론인이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는 러시아어 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변경)의 특파원으로서, 식민지 수도가 된 경성에 파견돼 1년여 일했다.

그는 사석에서 본심을 드러냈다. 망명자들의 행동에 대해서였다. 망명자들은 열심히 애국을 부르짖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에 흥분하고 있을 뿐이다. 의병을 일으켜서 두만강을 건너자, 일본인을 한국에서 몰아내자, 고국을 부흥하자고 한다. 하지만 어떻게? 무기도 없고, 병사도 없고, 돈도 없이 어떻게 일본군에 맞설 것인가. 신한촌 한인 동포 수천 명은 아주 가난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생업을 갖지 않은 ‘다수의 자칭 애국자 무리’를 급양하고 있다. 한인들의 곤궁함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나, 김만겸은 굳게 믿는다. 오늘날 우리 한인이 취해야 할 급무는 식산흥업과 교육 진흥에 있을 뿐이라고.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도대체 1914년 전후에 망명자들은 어떤 심산으로 행동했기에, 동포 청년 김만겸이 저토록 탄식했을까.

문제의 핵심은 권업회에 있었다. 권업회란 연해주 한인들이 러시아 지방정부의 승인하에 설립한 합법적 공개 사회단체였다.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근로를 권면하고 실업을 장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비정치적 결사였다.


이 단체에는 망명자가 적극 가담했다. 주도했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특히 이종호를 필두로 망명자 그룹이 권업회의 설립을 이끌었다. 함경도 출신 인사가 많아 이들을 ‘북파’라고 일렀다. 권업회를 처음 발기한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1년 6월이었다. 바로 개척리의 두 차례 살인사건으로 한인 사회가 갈등을 겪던 시기였다. 갈등이 정점에 이르던 때였다. 정순만의 피살에 분노한 이상설 그룹이 러시아 관청에 우월한 교섭력을 이용해 안창호 그룹을 핍박하던 때였다. 신한촌 한인 사회에는 적대감이 가득 찼고, 뭐든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군정부


❶독립전쟁론은 실현 불가능한 공상일 뿐이라고 과소평가한 재러동포 2세 인텔리 청년, 김만겸. ❷대한광복군정부의 존재를 증언한 역사가이자 망명자, 계봉우. ❸권업회 결성의 주모자, 이종호. ❹저명한 독립전쟁론자이자 대한광복군정부 제2대 정도령, 이동휘. ❺권업회 활동을 지원한 러시아 연흑룡주 총독, 곤다티 / 임경석 제공


이종호 그룹은 이 상황이 더는 방치돼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그들은 러시아 한인 사회의 폭넓은 단결을 꾀했다. 먼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원호들을 끌어들이는 데 노력했다. 최재형·김학만 등의 장년층은 물론이고, 신한촌 청년 30여 명의 동의를 받아냈다. 다른 망명자 세력도 합류시켰다. 이상설을 필두로 ‘경파’ 세력이 그해 가을부터 가담했다. 가장 늦게 참여한 망명자 세력은 ‘서파’였다. 단체 결성 이듬해 봄에 이 그룹을 대표해 정재관이 합류했다. 1912년 4월, 저 멀리 자바이칼 지방의 치타로 피신한 그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되돌아와 권업회 집행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 의의가 적지 않았다. ‘북파’ ‘경파’ ‘서파’라는 망명자 중심 소규모 비공식 정치세력들이 행동을 통일했던 것이다. 마침내 연해주 한인 사회가 하나로 뭉쳤음을 뜻했다.

대동단결의 힘은 컸다. 하는 일마다 성과가 컸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일자리 소개 사업, 기관지 <권업신문> 발간, 한인 학교의 설립과 후원 등이 활발히 이뤄졌다. 규모가 큰 야심 찬 사업도 기획됐다. 연해주 내륙 ‘라블류’에 대규모 농지를 불하받아 인구 1만 명 규모의 대농장을 만드는 사업을 발족했다. 러시아 지방정부는 권업회에 공신력을 부여했다. 러시아 국적 취득 업무를 권업회에 위탁했다. 거주 등록증도 권업회의 보증이 있어야만 발급할 수 있게끔 제도를 바꾸었다. 권업회의 위신이 나날이 높아졌다. 각지에서 지회 설립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의 크고 작은 도시와 농촌 지구에서 지회를 설립하고 싶다는 청원이 잇따랐다.

그러나 권업회의 가장 큰 역할은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한광복군정부 발족의 모태이자 활동 근거지 역할을 한 것이다. 대한광복군정부란 권업회에 참가한 망명자들이 반일 무장투쟁을 하기 위해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단체 이름에서 드러나듯, 광복군을 결성해 운용하기 위한 참모본부를 조직했던 것이다.

이 비밀단체에 가담했던 계봉우의 회고에 따르면, 단체의 발족은 신한촌에서 이뤄졌다. 러시아령·중국령 연합대표자 모임이 은밀하게 열렸고, 거기서 집행부가 선출됐다. 최고 책임자의 직위는 정도령(正都領)이라고 명명됐으며, 초대 정도령에는 이상설이, 제2대 정동령에는 이동휘가 선임됐다. 또 3대 군관구가 설정됐다.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연해주(제1), 북간도(제2), 서간도(제3)가 각각의 군관구로 설정돼 각각 ‘동로, 북로, 서로’라고 불렀다. 또 군사 간부 양성 사관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그 소재지는 중국령 ‘나자구’였다. 나자구는 왕청현 소재지를 출발해 험산과 무인지경을 지나 깊은 산속 궁벽진 오지에 있었다. 당장 군대를 편성한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 시기가 되면 언제라도 대규모 무장력을 갖출 수 있는 합리적인 준비기 전략이었다.


연해주와 간도에 출현한 정도령


강대한 일본을 격퇴할 수 있는가? 김만겸 같은 원호 동포들이 회의적으로 여기던 문제였다. 대한광복군정부 참가자들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어떻게? 망명자들은 두 조건이 갖춰진다면 실현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하나는 독립전쟁 근거지의 존재였다. 간도와 연해주가 바로 그곳이었다. 100만 동포 사회가 형성됐고, 일본의 국가권력이 못 미치는 곳이었다. 양쪽을 합해 해도(海島)라고 했다. 연해주에서 ‘해’를, 간도에서 ‘도’를 땄다. 해도는 도탄에 빠진 민중의 희망이었다. 조선왕조 후기에 널리 유포되던 예언서 <정감록>에 의하면, 도탄에 처한 민중을 구원하는 영웅 정도령이 해도에서 나온다고 했다. 바로 ‘해도진인설’이었다. 망명자들은 <정감록>의 아우라를 활용했다. 대한광복군정부 수반을 대통령 대신 정도령으로 명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해도에서 정도령이 출현한 셈이다.

다른 한 조건은,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었다. 망명자들이 생각하기에, 일본은 줄곧 식민지 확장 정책을 펼쳤으므로 다른 열강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일본을 적대하는, 더 강력한 강대국이 나타난다고 예측했다. 예측은 1913년 들어 점차 현실화했다.

바로 러시아였다. 러일전쟁 10주년이 다가오자 러시아 조야에서는 배일 분위기가 고조됐다. 일본처럼 작은 아시아의 신흥 산업국에 패배하다니, 러시아인들은 치욕스럽게 생각했다. 패배의 원인을 성찰해, 좌절된 동방 확장 정책을 다시 부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동방 정책을 맡은 러시아 관료들은 한인 반일운동을 지원하는 쪽이었다. 연흑룡주 총독 곤다티는 권업회 활동에 편의를 제공하고, 권업회 명예회원으로 이름 올리는 것을 승낙했다. 연해주 일원의 정치 사찰과 방첩 업무를 맡은 우수리철도 헌병대장 셰르바코프 대령도 한인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심지어 권업회 설립을 촉진하기 위해 한인 사회에서 지도적 영향력을 가진 이종호와 이상설의 합석도 주선했다.

1913년 말에는 구체적인 전쟁 준비 조짐마저 감지됐다. 예를 들어 제정 러시아 군대에는 해마다 11월1일 만기 사병을 제대시키는 규정이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해에는 이듬해 1월1일로 연기했다. 이례적이었다. 그 기일은 또 연기됐다. 연말이 되자 다시 5월 1일로 미뤄졌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러일전쟁의 재발 가능성으로 받아들였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풍문이 널리 퍼졌다. 갑(甲)자 들어간 해에는 어김없이 전쟁이 터졌지 않았는가. 갑오년(1894년 청일전쟁), 갑진년(1904년 러일전쟁)에 병란이 있었는데, 갑인년(1914년)에도 그를 면치 못하리라는 풍문이었다.


일본에 적대할 강대국은 누군가?


갑인년에 전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전쟁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1914년 8월1일 독일과 개전한 러시아는 전쟁 승리를 위해 모든 수단을 한데 집중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연합국 일원이 됐다.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이 된 것이다. 정세가 달라졌다. 러시아는 일본 요구를 받아들여, 연해주가 반일운동 기지가 되는 것을 차단했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나 단체는 탄압 대상이 됐다. 권업회가 해산되고, <권업신문>도 정간됐다. 이종호와 이동휘 등 망명자 36명은 러시아 영토 추방 명령을 받았다. 비밀결사 대한광복군정부의 독립전쟁 계획은 넘을 수 없는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망국 이후 처음 수립된 독립운동 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어쩌랴, 시운이 따르지 않으면 영웅도 어찌할 수 없는 법이었다. 동학농민전쟁 지도자 전봉준이 사형을 앞두고 읊조린 말이다. 망명자들은 제2의 러일전쟁을 예상할 수는 있었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나리라고는 미처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일본에 적대하는 강대국이 누군가? 독일이었다. 망명자들은 독일을 파트너로 삼는 새로운 운동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참고 문헌

① ‘朝憲機 제2호, 浦潮地方鮮人狀況’, <不逞團關係雜件-在西比利亞(4)>, 국사편찬위원회, 1914년 1월7일

② 임경석, ‘권업회 설립 전후 재노령 한인정치세력과 안창호’, <도산사상연구> 5, 도산사상연구회, 1998년

③ 뒤바보, ‘아령실기(9)’, <독립신문> 1920년 3월30일

④ 윤병석, ‘이동휘의 망명생활과 대한광복군정부’,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 독립기념관, 105~107쪽, 1997년

⑤ <권업신문> 제36호, 2쪽, 1912년 12월22일

⑥ ‘朝憲機 제42호, 昨冬12月下旬 浦潮朝鮮人에 關한 諜報’, <不逞團關係雜件-在西比利亞(3)>, 국사편찬위원회, 1912년 1월12일

⑦ ‘朝憲機 제84호, 2월1일 浦潮發情報’, <不逞團關係雜件-在西比利亞(4)>, 국사편찬위원회, 1914년 2월13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863.html




독립운동 예봉 꺾은 개척리의 비극


양성춘 살해 연루 정순만의 보복 피살
동지가 적이 되며 해방운동에 치명상


개척리(아래 빨간 선)와 신한촌(위 빨간 선)의 위치.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지도 임경석 제공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정순만이 석방됐을 때 그랬다. 양성춘 살인사건(제1219호 ‘개척리 살인사건’ 참조)의 피고인인 그는 불과 1년 만에 모든 죄과를 씻고 보란 듯이 밝은 세상에 나왔다. 그의 출옥을 보고서 두 개의 상반된 여론이 조성됐다. 잘됐다고 반기는 사람들과, 과실 사고이므로 그만하면 충분히 죗값을 치렀다고 보는 사람들이었다. 분개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무고한 사람을 죽였는데도 가벼운 형벌을 받은 것은 재판이 불공정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었다. 두 여론은 팽팽히 맞섰다. 차갑고 긴장된 분위기가 한인 거류지에 감돌았다.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현지 인사의 말을 들어보자. 개척리에 오래 산 여성이었다. 사료에 ‘박산석의 모친’으로 기록된 이 여성은 여성단체 자혜부인회 회장이자, 한인 기독교회 확장을 위해 그때 화폐로 ‘5루블’을 기부할 만큼 재력이 있었다.


순식간에 꺼진 ‘애국 동포의 희망’


“상년 겨울에 본항 한인 남자 사회에서 한 풍진이 일어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일장 승부를 결함에, …대동공보가 폐간되므로, 애국 동포의 희망이 거의 단절하고 외양 사회의 기관이 거의 파괴되니, 어찌 통곡유체할 일이 아니리오.”(<대동공보> 1910년 5월15일)

지난겨울 한 풍진이 일었다는 표현은 1910년 1월 발발한 양성춘 살인사건을 가리켰다. 그 때문에 ‘한인 남자 사회’가 둘로 나눠 각각 한 모퉁이를 웅거하고 한바탕 승부를 겨뤘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열이 심각했고, 국권 회복의 희망이 물거품이 됐음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부정적 영향이 너무나 심각해 눈물 흘리며 통곡하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애국 동포의 희망’이 꺼진 데는 또 다른 원인도 작용했다. 양성춘 살인사건 뒤 불운한 두 사건이 덮쳤던 것이다. 그중 하나는 조국의 운명이었다. 1910년 8월29일 이른바 ‘일한병합’ 조약이 체결돼, 허수아비처럼 껍데기만 남았던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말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은 관내 한인들 관할권을 가진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흉사는 한인 거류지를 교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1909년 가을 개척리에서 콜레라가 유행해 한인 남녀 100여 명이 죽었다. 도시 거주민 8만 명에서 유독 개척리 한인만 그런 화를 입었다. 현지 조사한 러시아인 지방 관료는 전염병의 원인을 불결한 주거 환경에서 찾았다.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한인 거류지는 극도로 좁고 더러우며 위생 상태가 중국인 거류지와 마찬가지다. 결벽성이 있는 저 한인들로 볼 때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고 적었다.①

1911년 3월 연해주 행정 당국은 한인 거류지를 시외 외딴곳으로 이전할 것을 결정했다. 그즈음 국경 너머 중국 길림성에서 다시 전염병이 생기자 나온 대응책이었다. 개척리는 시유지에 당국의 양해를 얻어 건립된 집단 주거지였다. 그 때문에 소정의 임대료를 내면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었다. 거류지 이전을 위한 대체 부지가 제공됐다. 옛 개척리 북쪽 고개 너머 산비탈에 위치한, 아무르만을 바라보는 경사진 곳이었다. 지금이야 블라디보스토크 도심에서 멀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도시 외곽 경계선을 벗어난 궁벽진 곳이었다. 그곳을 한인들은 ‘신개척리’ 또는 ‘신한촌’이라고 불렀다. 이주는 그해 5월부터 이듬해까지 서서히 이뤄졌다.

정순만의 출옥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의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했다. 양성춘의 죽음을 동정하는 이들은 원통해했다. 아무 죄 없이 목숨을 잃은 것도 억울한데, 관청 교섭력의 우열로 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못내 분했다. 피살자의 아내 전소사가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현지 발행 한글 신문 <대동공보>(1910년 9월1일치)에 기고문을 실어, 가해자 비호 그룹이 있음을 폭로했다.

고의적 살인 행위가 분명하지만, 이를 부인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공공연히 과실치사설을 유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협잡을 꾸미려는 짓인가? 아무런 잘못도 없다 하니, 죄 없는 사람을 또 죽이려는 책동인가?” 젊은 아내는 이렇게 힐난했다. 특정인을 지목하기까지 했다. ‘이민복’이란 자가 과실치사설을 퍼뜨리는데, 그 이유를 밝히라고 했다.


또 다른 비극의 잉태, 정순만의 출옥


정순만 살인사건의 경과를 기록한 일본총영사관의 정보문서 표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이민복도 망명자였다. 대한제국의 전직 경찰 관료의 자제로, ‘일한병합’에 반대하는 성명회 선언서 작성에 참여했고, 반일단체인 국민회와 권업회에도 참가한 반일 운동자였다. 일본 헌병대의 정보 기록에 따르면, 이민복은 정순만 그룹의 일원이고 그 그룹의 리더인 이상설과 거취를 같이한다고 했다.②

양성춘을 동정하는 이들은 정순만이 풀려나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다.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됐다.

1911년 6월21일이었다. 정순만이 옥고를 치르고 출감한 지 넉 달이 지났다. 아침 8시, 이른 시간이었다. 연중 해가 가장 길 때라 날이 밝은 지 꽤 지났다. 정순만은 장 보기 위해 가게를 찾았다. 우연히 양덕춘을 만났다. 고인이 된 양성춘의 친형이었다. 껄끄러운 상대였다. 뜻밖에도 그가 부드럽게 다가왔다. 과거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잊어야 할 터이고, 산 사람들은 한마디 얘기라도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기 집으로 가자고 이끌었다.

양덕춘의 집에서 세 사람이 대면했다. 고인의 아내 전소사까지 합석했던 것이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정보 문서에 따르면, 분위기는 험악했다. 젊은 여인은 거세게 압박했다. “무슨 이유로 너는 내 남편을 살해했느냐, 내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정순만이 선선히 응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순간, 여인은 어딘가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여인은 정순만에게 거듭 타격했다. 머리 외에 여러 곳을 맞은 정순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사이 양덕춘은 계속 정순만을 붙들고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뒤 양덕춘은 결심했다. 경찰 당국에 자수하겠다고 나서는 제수씨를 말렸다. 희생자의 형인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관할 경찰서 제4분서에 자진 출두해 자신이 흉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③

보복 살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쇼킹한 뉴스였다. 현장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순만의 가까운 동료인 이상설도 한달음에 왔다. 현장엔 경찰이 배치됐다. 경찰은 이상설의 출입을 막지 않았다. 피살자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참혹한 사건 현장을 확인한 이상설은 망연자실했다. 또 분노했다. 참혹한 현장 모습에도 그랬지만,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가는 사람들이 미웠다. 때마침 사건 현장에 황공도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미운 마음이 치솟았다. 알은체를 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양성춘 지지 그룹의 유력한 일원이었던 것이다.


이상설과 안창호의 대립


신한촌 기념비 임경석 제공


정순만 피살 사건도 사적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인 사회의 내분과 관련된 음모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상황이 뒤집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상설이 지도자인 이 그룹은 러시아 관청의 힘을 빌렸다. 러시아 관청 교섭력에서는 이 그룹이 월등했다. 이는 역사가 계봉우가 논평한 바 있다. “기호파의 수령인 이상설이 러시아 헌병대 하바롭스크 정탐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파를 거기에 많이 배속한 것은 그의 평생 역사로 보아 결점”이라고 평했다.④


재러시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대동공보>. 독립기념관 제공


정순만 사건은 민족해방운동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살인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네 한인이 러시아 관청에 고발당했다.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가 그들이었다. 면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밀결사 신민회를 주도해 애국계몽운동의 주역이 됐던 안창호가 첫자리에 보인다. 그는 1910년 국외로 망명한 이래 연해주를 거점으로 국권회복운동의 중·장기적 전개를 도모했다. 정재관과 이강, 김성무는 외국 한인들의 광범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였다. 정순만 지지자들은 이 네 사람이 살인사건을 교사했다고 의심했다.

러시아 헌병대는 네 사람에 대한 구인장을 발부했다. 살인교사 혐의였다. 체포 위기에 직면한,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단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안창호는 페테르부르그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기로 작정했고, 이강과 정재관도 연해주 밖 자바이칼주로 피신했다.

결국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치명상을 입혔다. 운동권의 두 중진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바로 독립운동의 예기를 꺾어버린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에 걸쳐 해외 한인들의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던 거창한 노력이 좌절됐다. 각지에 국민회를 결성하고, 그를 통해 반일 역량의 통일을 도모하던 움직임이 분열되고 위축됐다. 국민회 기관지로 발간되던 <대동공보>도 폐간됐다.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

국권회복운동의 두 영웅이 서로 등을 졌다. 헤이그 특사 사건의 주인공 이상설과 신민회의 리더 안창호는 더는 협력하기를 꺼렸다. 그들은 고작 ‘기호파’ ‘서도파’라는 소규모 비공식 추종자 그룹의 대표일 뿐, 국권 회복의 중·장기적 전망을 제시하는 큰 지도자로 여겨지지 못했다. 가까운 동지였던 사람들이 이제 편을 갈라 서로 적대했다. 민족해방운동은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개척리의 두 살인사건은 망국 전후 국권회복운동의 끝 모를 추락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립물로 전화하지 않는 사물은 없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과오로 실패와 좌절을 겪었음에도, 인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해방 의지 말이다. 해가 바뀌는 1912년, 정초부터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사회는 침체를 딛고서 국권회복운동의 활발한 기지로 되살아났다.


참고 문헌

① В.Граве. Китайцы, Корейцы и Японцы в Приамурье, Хабаровск, 1912; 南滿洲鐵道株式會社庶務部調査課 日譯, <極東露領に於ける黃色人種問題>, 大阪每日新聞社, 147쪽, 1929년

② 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秘)明治45年 6月調, 露領沿海州移住鮮人ノ狀態> 1913년 3월3일; 정태수, ‘국치 전후의 신한촌과 한민학교 연구’,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189쪽, 1992년

③ 在浦潮斯德 總領事代理 二甁兵二, ‘機密鮮 제43호, 鄭淳萬 殺害에 관한 報告’ 1911년 6월27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3

④ 계봉우, ‘꿈속의 꿈’, <북우 계봉우 자료집 (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73쪽, 1996년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730.html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유력자 양성춘의 피살
당파싸움 끝 고의살해인가? 단순사고인가?


1910년 즈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거리 풍경(위쪽). 2018년에 촬영한 옛 개척리 자리인 포그라 니츠나야 거리.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였다. 1910년 1월23일 늦은 저녁이었다. 추위가 절정에 달한, 겨울이 깊은 때였다. 이른바 ‘일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던 바로 그해였다. 나라가 망하기 불과 7개월 전이었다. 국제 정세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대한제국의 망국이 임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던 때였다. 또 그때는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무대로 하여 동분서주하던 안중근이었던 만큼, 개척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충격과 감격이 가시지 않았다.

개척리란 한인들의 밀집 주거지 ‘코레이스카야 슬로보드카’를 지칭하는 한국어 명칭이었다. 바로 코리아타운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0년쯤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1만400명의 한인이 살고 있었다.①


아랫배에 총 맞고 4일 만에 숨져


아들 얼굴을 토대로, 상상으로 그린 정순만 초상화(이재갑 작)(왼쪽). 정순만의 가장 가까운 동지 이상설. 상동청년회가 있었던 상동교회 1900년. 독립기념관 제공


이 중에서 약 70%에 해당하는 7500명이 개척리에 모여 있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인구가 약 8만 명이었음을 참작하면,② 개척리에 사는 한국 사람들의 수는 전체 도시 인구 가운데 근 10%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피살자는 한인이었다. 집주인 양성춘(楊成春)이라는 사람이었다. 아랫배에 총을 맞은 그는 다량의 출혈 끝에 4일 만에 숨을 거뒀다. 그는 십수 년 전에 이주한 덕분에 러시아 국적까지 취득한 고참 이주민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한국말로 ‘원호’(元戶)라고 했다. 자산도 넉넉했고, 러시아어도 불편하지 않게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개척리 한인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유력자였다. 2년 전에는 한인 거류민회 ‘민장’까지 지낼 정도였다. 러시아 행정 당국의 승인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한인 자치단체의 대표였다. 개척리의 자치단체 대표로 선출될 만큼 한인들 사이에서 신망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언론기관의 보도에 따르면, “마음이 공평 정직하여 동포 사회에 공익을 극력 도모하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③

도대체 누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범인은 금방 밝혀졌다. 그도 한국 사람이었다. 살인 혐의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범인은 37살의 정순만(鄭淳萬)이었다. 그는 피살자와는 달리 러시아로 이주한 지 겨우 3년도 안 된 신참 이주민이었다. 아니, 이주민이라기보다는 망명자였다.


정순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애국지사’라고 일컬을 만큼 항일투쟁 경력이 혁혁한 이였다.④ 본래 충청도 청주의 유생 출신이었다. 청소년기에는 재야의 큰 유학자로 전국에 명성이 자자하던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 나아갔다. 그 문하에서 유교 고전학 연구와 시문 제술에 전념했다. 뒷날 언론인으로서 필봉을 휘두르던 기본 소양은 이 시절에 갖춰졌을 것으로 보인다.

20대 청년기에 들어서 정순만은 급진적인 서구화 개혁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냈다. 반정부 비밀결사 유신당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고, 독립협회의 후신이라는 평을 듣던 상동청년회에 참가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나아가 한국 최초의 적십자사 설립에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보수적인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을 받았으니, 민심을 선동한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선고받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곤장형 집행장에서는 유혈이 낭자했다고 한다.

고난 속에서도 얻은 게 있었다. 신뢰였다. 유신당 사건으로 함께 투옥된 정순만, 이승만, 박용만 세 사람은 뒷날 ‘독립운동계의 3만’이라는 이름을 얻은 데서 보듯이 사람들의 큰 신망을 얻었다.

러일전쟁(1904~05년) 시기에 일본의 식민지 침략이 노골화되자, 정순만은 그에 맞서 항일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황무지 개간을 표방하며 한국 토지 침탈에 나선 일본 상업자본과 군대에 목숨을 내걸고 감연히 맞섰고, 일본인 중개상이 주도하는 한국 노동자 멕시코 송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1905년 을사강제조약이 공포되자, 그에 맞서 서울에서 대중적인 시위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범인은 항일투쟁 망명자 정순만


정순만은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1906년 4월이었다.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조국을 지켜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국경 너머 근 100만 명의 이주민 사회가 형성된 북간도와 연해주가 곧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두 지역을 합쳐서 ‘해도’(海島)라고 했다. 연해주의 ‘해’자와 북간도의 ‘도’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었다. 해도는 망명자들에게는 희망의 땅이자, 약속의 땅이었다.

망명 동지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상설(李相卨)은 언제나 믿고 의지하는 평생 동지였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했다. 같은 충청도 출신인데다 기질과 성향이 맞았다. 두 사람은 형제간이라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 이상설은 정순만보다 세 살이 더 많고 고위 관료 출신이었다. 이상설이 앞서고 정순만이 뒤를 따랐다. 일본 정보 문서에는 정순만이 이상설의 ‘심복’이라고 표현돼 있었다.⑤

기울어가는 국운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망명자들은 과연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갖고 있을까? 그랬다. 이상설과 정순만을 비롯한 망명자들이 갖고 있던 복안은 말하자면 ‘해도 거점 임시정부 수립론’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 황제를 연해주로 망명케 하고, 그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구상이었다. 1910년 화서학파의 저명한 유학자 유인석과 이상설이 앞장서서 ‘13도의군’을 편성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 복안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상설이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중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망명자들은 러시아의 협력을 낙관했다. 왜냐하면 러일전쟁에 패배한 뒤 러시아인들은 조야를 막론하고 일본을 향한 복수심이 넘쳐흘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상설과 정순만을 중심으로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세력이 조직됐다.

이 그룹은 특징이 있었다. 첫째, 양반과 고위 관료 출신자가 중심을 차지했다. 이상설 자신이 ‘종2품 가선대부 의정부 참찬’ 자격으로 활동했고, 대한제국 정부에서 관료를 지냈던 망명자들은 대부분 이 그룹에 합류했다. 둘째, 러시아 행정 당국과 교섭력을 강화하는 데 역점을 뒀다. 특히 연해주 관내의 정치활동 단속을 책임진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에 능동적이었다.

이런 특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반이나 관료적 전통과 거리가 먼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자들 속에 그런 사람이 많았다. 양반·관료 주도의 행동 양상은 낡은 것으로 간주됐다. 평민적 지향성이 강할수록 그랬다. 또 러시아 헌병대와 협력하는 것은 스파이 활동이나 다름없었다. 러시아 헌병대에서 급료를 받고 정기적으로 한인 사회의 내막을 전하는 행위를 비루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피살을 둘러싼 두 견해


도대체 정순만은 왜 양성춘을 살해했는가? 개인적 원한이나 이해관계 탓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두 사람 사이에 금전 거래가 있었다거나, 여성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는 정황은 어느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는 정보도 찾을 수 없다. 살인 사건의 동기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견해가 제기됐다. 그중 하나는 피해자 쪽에서 바라본 것이다. 당파적 분노와 적개심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고의로 살해했다는 의견이었다. 사건이 있던 그날 낮에 거류민회에서 중대한 회의가 있었다. 한인 사회의 내부 알력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하지만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갈등이 격화되고 말았다. 참석자들은 재정 문제를 둘러싸고 두 그룹으로 나뉘어 적대적으로 충돌했다. 그날 저녁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동기는 분노 때문이었다. 자신의 견해가 무시되고 백안시된 데 대한 모멸감 때문이었다. 그가 이례적으로 권총을 갖고 방문한 것은 처음부터 살해할 뜻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행위다. 방문 첫마디에, “오늘 거류민회 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일이 너무 분하다. 너를 죽이러 왔다!”고 큰소리친 행위도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견해였다.

양성춘의 피살 이유에 관한 또 하나의 견해는 과실치사설이었다. 가해자 정순만이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는 과정에서 견지했던 견해가 바로 이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순만이 양성춘의 집을 방문한 이유는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양성춘은 정순만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정순만은 분노와 절망에 빠졌다. 휴대한 권총을 빼든 그는 “이렇게 탁한 세상에 생존할 바에야 지금 자살하겠다”고 부르짖었다. 깜짝 놀란 양성춘이 자살을 막으려고 권총을 뺏으려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와중에 권총이 오발됐으며, 불행하게도 총알이 양성춘의 아랫배를 맞히고 말았다. 이것이 정순만이 묘사한, 사건의 진상이었다.⑥

이 견해에 따르면, 양성춘은 숨을 거두기 전 가족 앞에서 유언을 남겼다. 이 사건이 사고로 난 것임을 설명하고 자신의 사후에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한인 거류지를 감도는 긴장감


러시아 사법기관에서 재판이 벌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변호사를 고용해 적극적 방어에 나섰다. 마침내 판결이 이뤄졌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그해 11월 초였다. 피고 정순만은 3개월 금고형과 정교 사원에서 참회를 명받았다. 피고인 쪽의 승리였다. 고의 살해가 아니라 과실치사를 인정한 것이다.

1911년 2월8일, 마침내 형기를 마친 정순만이 출옥했다. 양성춘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1년 남짓 만에 가해자가 돌아왔다. 모든 형사처벌을 마친 상태에서 한인 사회의 일상생활에 복귀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거류지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참고 문헌

① 현규환, <한국유이민사> 상, 어문각, 1953판. 814-815쪽

② <해조신문> 제61호 1908년 5월6일치

③ ‘양씨피살상보’, <대동공보> 1910년 4월24일치

④ ‘정순만씨의 역사’, <대동공보> 1909년 5월5일치

⑤ 박걸순, ‘연해주 한인사회의 갈등과 정순만의 피살’,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4, 독립기념관, 2009년판

⑥ 박민영,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충북인의 활동’,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 학술회의 발표문, 2011년판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591.html



블라디보스토크의 일제 비밀경찰 기토 통역관
밀정 부리는 데 탁월해 식민 통치 걸림돌 해결사로


기토 가쓰미 통역관의 활동 거점,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 건물. 1919년(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 건물의 오늘날 모습. 2018년 현재 러시아 연해주 지방법원 건물로 쓴다.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오호, 너 악마 기토(木藤)여, 오호, 너 악인 기토여! 왜 너는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가. 왜 너는 죄 없는 한인을 파멸시키는가. 어떤 경우에도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영원히 기념하리라. 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원수 갚는 것을 잊지 않으리라.”①


신분 가리는 위장 직함, 통역관


20살 처녀 최 소피아 페트로브나의 노트에 적힌 메모였다. 아버지를 빼앗아간 일본 관헌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드러나 있다. 처녀의 아버지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였다. 사망 당시 61살. 러시아에 사는 한인 동포 사회의 유지였다. 한국식 이름 최재형으로 잘 알려진 그는 1920년 4월 일본군의 연해주 정변 당시 일본군에게 학살된 4인의 한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증오의 표적이 된 기토는 도대체 누구인가? 기토 가쓰미(木藤克己)라는 이름의 그는 ‘일본 외무성 촉탁 조선총독부 통역관’이었다. 다시 말하면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에서 파견 근무하는 조선총독부 중견 관료였다. ‘통역관’이라는 용어 때문에 그가 마치 외교 기관에서 통역에 종사하는 외국어 전문가인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신분을 가리기 위해 고안한 위장 용어였다. 임무와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대외적으로 내세운 직함일 뿐이었다.

그의 본래 소속은 1910년 현재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1920년 이후 경무국) 고등경찰과 기밀계였다.② 고등경찰이란 일제강점기에 비밀결사, 혁명운동, 반체제 사상 등 식민지 통치 체제에 위협이 되는 행위를 사찰하고 탄압하던 비밀경찰을 가리킨다. 그의 소관 업무는 영락없이 고등경찰의 그것이었다.

경찰 내부 문서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그의 임무는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 관내에서 ‘무뢰 한인’의 동정을 조사하고 그를 단속”하는 것이었다. ‘무뢰 한인’이란 곧 반일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한인 혁명가들을 멸시하는 용어였다. 말하자면 독립운동가들의 동정을 조사하고 그들을 체포하는 것이 기토 가쓰미 통역관의 본분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통역관 자리는 4대 요직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국외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운용하는 핵심 보직이 넷 있었다.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지목받는 북간도, 만주의 중심도시 봉천에 더해 블라디보스토크가 4대 통역관 파견지로 손꼽혔다. 어느 곳이나 다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였다. 조선총독부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만한 곳이라면 외국 어디든지 유능한 고등경찰을 상주시켰던 것이다.

기토 가쓰미는 그중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 통역관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부터 12년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장기근속한 고등경찰이었다. 연해주,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에 근거를 둔 한국 독립운동 세력에 관한 한 일본 관료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실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방법을 아는 자였다.


여관 운영하다 전쟁 통에 인생 역전


처음부터 주목받는 관료였던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그가 처음 부임한 1910년에는 직속상관인 오토리 후지타로 총영사에게서 박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리 총영사가 작성한 내부 문서에 따르면, 기토 통역관에게는 두 개의 결점이 있었다. 뭣보다도 외국어 능력이 시원찮았다.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구사한다고는 하지만 ‘견습’ 수준이었다. 그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수준이지, 책임 있는 대화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외교관으로서는 허용되기 어려운 결함이었다.③

관료가 되기 전 기토는 생업에 종사했다. 그는 여관업자였다. 일본 내지에서 고등교육도 받지 못하고 별다른 재산도 없었기에, 신흥 도회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새 인생을 개척하고자 도항해온 모험심 가득한 젊은이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인 거류 구역을 무대로 생업을 모색하던 그는 자그만 여관을 차렸다. 숙박업에 진출한 것이다. 그가 견습 수준의 초급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익힌 것은 바로 여관을 운영하면서였다.

그가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전쟁이었다. 1904~05년 벌어진 러일전쟁에 종군했다. 통역 자격이었다. 어설펐겠지만 통역이 그의 인생에서는 역전의 교두보가 됐다. 그는 이전에 쓰던 기토 기스케(木藤喜助)란 이름도 관직에 진출하면서 기토 가쓰미로 바꿨다. 1908년에는 통감부 통역관 수행원이 됐고, 마침내 2년 뒤에는 정식 통역관으로 임명됐다.

또 하나의 결함은 그의 범죄 연루 전력이었다. 여관을 경영하던 중에 그는 러시아 쪽 관헌에게서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다. 여관에 오래 묵었던 일본인들이 위조지폐를 제작한 사실이 발각됐는데, 그때 장소를 제공한 여관 주인 기토도 조사를 받았다. 오토리 총영사의 판단으로는, 러시아 관헌에게 범죄자 혐의를 받는 사람을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에 배치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었다. 총영사는 러시아 관헌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기토를 블라디보스토크가 아니라 연해주 다른 도시나 농촌 지역에 배치하는 것을 한때 심각히 고려하기도 했다.


목적 위해서라면 살인 계획도


기토 가쓰미 통역관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앞으로 제출한 비밀 정보 보고서 <블라디보스토크 지방 조선인 소학교 유지비 보조 청원에 관한 건>(1921년 8월15일) 표지.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요컨대 기토 가쓰미의 관직 진출은 독특한 데가 있었다. 고등교육기관을 마치고 문관시험을 거쳐서 중견 관료직에 오른 다른 엘리트 관료층과는 질이 달랐다. 그는 현장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한 사람이었다. 기민한 눈치와 순발력으로 무장한, 온갖 실무에 단련된 닳고 닳은 인간형이었다. 상급자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고 하급자에게는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관료였다.

기토는 일단 통역관에 부임하자 비밀경찰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비밀 정보 보고서의 수량이 늘었고, 수준도 높아졌다. 한인 집단 거류지 신한촌을 무대로 ‘암약’하는 반일 독립운동가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능력이 현저히 증대됐다. 무장투쟁의 지도자인 홍범도·이범윤의 동향을 비롯해, 반일 비밀결사의 핵심 인물인 안창호·이동휘·김립·이종호 등의 언행을 정기적으로 보고할 수 있었다. 러시아 국적을 가진 귀화 한인들의 동향도 주시했다. 권업회, 거류민회를 비롯한 한인 자치단체, 한민학교, 삼일여학교 등과 같은 교육기관, <대양보> <권업신문> 등 언론기관의 내막을 상세히 탐지했다. 거류민회 회장 양성춘, 거상이자 대동공보 사장을 지낸 차석보, <해조신문> 사장 최만학, 상업 자본가 최봉준 등 한인 사회 주요 인물들의 거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뿐인가. 식민지 통치에 위협을 주는 현안들도 거뜬히 해결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벽두에 전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담한 독립운동 사건, 15만원 사건의 ‘범인들’을 일망타진한 것은 거의 전적으로 기토 통역관의 공로였다. 일본제국 입장에선 하마터면 북로군정서 규모의 독립군 부대를 9개나 만들도록 허용할 뻔한 위험한 사건이었다. 핵심 범인 3인을 검거했을 뿐 아니라, 탈취된 돈의 87%에 해당하는 13만원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불온’ 언론 <대양보>를 문 닫게 만든 공로도 기토에게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러시아 정부의 승인 아래 합법적으로 간행되는 신문인지라 일본총영사관도 강제로 제어할 수는 없었다. 망명 언론인 신채호가 주필이었다. 격렬한 항일 논조로 가득 찬 신문 지면은 일본에 눈엣가시였다. 이 신문을 사실상 폐간에 이르게 한 것도 기토 통역관이었다. 그는 비밀공작을 꾸몄다. 한밤중에 신문사 건물 내부에 하수인을 침투시켜서, 활자 1만5천 개를 훔쳐 나오게 했다. 신문사 소유 활자 총수의 3분의 2에 이르는, 무게 90~94㎏의 방대한 양이었다. 결국 활자가 없어 신문을 발행할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④


1년 만에 한인 밀정 다섯 고용


기토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유인, 살인 계획도 꺼리지 않았다. 그는 통역관 취임 이듬해인 1911년에 무장투쟁 지도자 홍범도를 체포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군자금 모금을 미끼로 홍범도를 중국 하얼빈으로 유인한 뒤 그곳에서 급습한다는 복안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살해도 마다하지 않는 계획안이었다.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지만 기토의 음모 기획능력이 얼마나 대담한지 잘 보여준다.

기토가 탁월한 비밀경찰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다른 비결이 있었다. 바로 밀정 덕분이었다. 그는 밀정들을 선발하고 활용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밀정 네트워크를 짜는, 음습한 업무를 하는 데 천품이 있었다.

그가 통역관으로 부임할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관이 고용한 한인 밀정은 둘이었다. 매우 유능한 자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수를 늘렸다. 기토는 갖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불과 1년 내에 한인 밀정 다섯을 고용할 수 있었다. 명단이 남아 있다. 김인순·김연정·김학문·김정우·김생려가 그들이다. 그들에게는 정기적으로 급료가 제공됐다. 매월 30루블이었다. 철도 부설 공사장에서 노역하는 노동자들이 한 달에 45루블을 받던 시절이었다.⑤ 격렬한 노동이라 다른 부문 노동자들보다 노임이 후했음을 고려한다면, 밀정들이 받는 급료는 대체로 여느 노동자들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토 통역관이 부리는 밀정은 더 있었다. 고정급이 아니라 사안별로 사례금을 주는 밀정 유형도 만들었다. 어느 유형에 속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허양승도 밀정 노릇을 했다. 그는 놀랍게도 독립운동 지도자 안창호가 세 들어 살던 가옥의 건물주였다. 그는 기토와 비밀리에 만나서 안창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고해바쳤다. 그뿐인가. 안창호가 만나는 인물들도 탐지했다. 안중근의 친동생 안공근의 동정, 블라디보스토크 기독교회 목사 최관흘의 언행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외 성명이 판명된 밀정으로는 김익지·이동환·서영선·허호·김경선·양기현·김기양·엄인섭 등이 있다. 이중에서 엄인섭은 특출난 자였다. 그는 민족혁명운동의 중진이었다. 연해주 반일 의병의 지도자로서 1908년 국내 진공작전 당시 안중근과 함께 좌우 선봉장을 맡은 이였다. 그는 심지어 안중근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권업회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그랬던 그가 영사관의 비밀경찰 기토와 은밀히 내통하면서 운동권의 비밀을 팔아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여전히 독립운동 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 1920년 15만원 사건으로 그의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계의 누구도 그를 밀정이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무려 10년이 넘도록 밀정으로 암약한, 그 분야의 전설 같은 존재였다.

이들이 다가 아니었다. 기토가 작성한 비밀 정보 보고서에는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익명의 밀정들도 등장한다. 기토가 이 숱한 밀정들을 움직이는 데 유력한 수단이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그는 기밀비를 운용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총영사관 내부 문서철 속에 기밀비의 지출과 증액을 요청하는 기토의 공문서들을 쉬이 찾아볼 수 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다. 기토의 존재와 역할은 점차 연해주 한인 사회에 알려지게 됐다. 그는 암살 위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21년 하반기부터 심해졌다. 그동안 자행했던 악행의 희생자 쪽에서 보복의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조짐과 첩보가 잇따라 입수됐다. 곳곳에 심어놓은 밀정들이 다각적으로 위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왔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했던 최 소피아의 메모도 그런 움직임 가운데 하나로 해석됐다. 기토는 움츠러들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총영사관 건물을 나설 때부터 조심해야만 했다. 거리를 지날 때, 영사관 임직원들이 함께 지내는 외교관 사택 단지를 들고 나설 때, 각별히 경계를 강화했다.

경성의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위 간부들도 블라디보스토크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처럼 유능한 경찰 관료를 잃고 싶지 않았다. 위험이 현실화되기 전에 뭔가 조처를 해야 했다. 그해 늦가을이었다. 마침내 고위 간부들은 결정을 내렸다. 연해주에 다소 정보 공백이 있더라도, 기토를 다른 곳으로 전근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내는,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다른 지역에서 활용한다는 복안이었다.


베이징의 일본공사관으로 전근

1921년 11월 초였다. 기토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중국 베이징 주재 일본공사관으로 전근 발령이 났기 때문이다. 새 임지로 가는 도중에 일본 쓰루가 항에 잠깐 들른 그는 기자의 질문에 답했다. 연해주는 어떠한 곳인가? 기토는 말했다. 결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다.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수효는 약 17만 명인데, 그중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자는 약 1만 명이라고 판단해도 좋다고 단언했다. 놀라운 비율이었다. 그러므로 어설픈 회유 정책은 불필요하며 단호한 억압 정책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기토 가쓰미에게 연해주는 그처럼 삼엄하고 위험한 곳이었다.⑥


참고 문헌

① 菊池義郞(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 機密 제49호, ‘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1921년 7월13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12

② <조선총독부 급 소속관서 직원록> 1911년판

③ 블라디보스톡 총영사 大鳥富士太郞, 機密金 交付 件, 1910년 7월12일, <한국근대사자료집성, 間島·沿海州 關係 2>, 국사편찬위원회

④ 在浦潮斯德총영사, ‘機密鮮제55호 배일신문 大洋報 활자 절취의 건’, 1911년 9월22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7 (해외언론운동편)>

⑤ 鳥居(블라디보스토크 通譯官), ‘憲機第1042號 第277號, 5월22일 木藤通譯官이 嚴仁燮으로부터 얻은 情報’, 1911년 6월1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比利亞 2

⑥ ‘연해주의 독립단체’, <동아일보> 1921년 12월7일치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486.html





김립 암살 사건은 임시정부의 국가 폭력

이젠 허위의 낙인 지우고 명예 되살려야


1920년경 상하이에서 촬영한 김립과 그의 동료들: 앞줄 오른쪽 끝이 비운의 주인공 김립. 시계 방향으로 모스크바 외교의 주역 박진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한인사회당 당수 이동휘, 신원 미상, 뒷줄 모스크바 자금 결산을 책임진 김철수, 역사가 계봉우, 신원 미상. 독립기념관 제공


‘김립’이라는 이름에 담긴 뜻


‘김립’(金立)이라는 이름은 좀 낯설다. 한국식 작명으로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름이 외자인데다가, ‘설 립(立)’이라는 글자가 이름에는 좀체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본 고등경찰들도 종종 오류를 범했다. 일본 측 정보 문서에는 ‘삿갓 립(笠)’ 자를 써서 ‘金笠’이라고 표기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시대 말기 방랑 시인으로 유명한 김삿갓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다.


여러 가명 중 ‘김립’에 애착


대한민국임시정부 1920년 신년 축하 기념사진: 두 번째 줄 한가운데가 국무총리 이동휘. 그로부터 오른쪽 한 사람 건너 노동국 총판 안창호, 다시 한 사람 건너 국무원 비서장 김립이 앉아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쉬이 예측할 수 있듯이 그 이름은 가명이었다. 비밀결사에 가담하거나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통상 그랬던 것처럼 그는 가명을 썼다. 본명은 김익용(金翼容)으로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다. 나이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짐작할 수 있다. 1880년에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①, 그보다는 몇 년 뒤에 태어났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그가 어려서부터 평생 교유했던 허헌(許憲, 1885년생)이나 이종호(李鍾浩, 1885년생) 등과 나이가 같거나 비슷한 연령층에 속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혁명운동에 참가하다보니 그에게는 가명이 많았다. 왕진덕(王鎭德), 이세민(李世民), 양춘산(楊春山) 등을 사용했다. ‘일세’(一洗)라는 아호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는 김립이라는 이름에 큰 애착을 가졌다. 그렇게 불리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가까운 동료들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계의 온갖 다양한 인사가 그를 김립이라고 지칭한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립이라는 이름은 혁명에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속 깃발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중대한 결심을 했다. 망국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하는 데 한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동향인 맘 맞는 동료 허헌과 함께였다. 두 사람은 ‘입헌(立憲)’이라는 글자를 하나씩 나눠 갖기로 합의했다. 김익용은 ‘설 립’ 자를 취하고, 허헌은 자신의 본명에 포함된 ‘법 헌(憲)’ 자에 그 의미를 부여했다. 대한제국 시절이었다. 위기에 처한 공동체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는 전제군주제를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전제군주가 갖고 있는 국가주권을 국민의 품으로 옮겨오는 시민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김립의 막역한 친구 허헌은 뒷날 인권변호사가 된다. 일제시대에 3·1혁명 피고인들과 조선공산당 사건 피고인들을 변호했으며, 민족통일전선 단체 신간회의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이였다.

김립은 20대 초반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제군주제에 반대하고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맞서는 혁명이었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이 애국계몽운동이라 이르는 이 운동 속에서 김립은 두각을 나타냈다. 공개 사회단체로서 큰 영향력이 있던 서북학회의 주요 활동가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서북학회는 재야에 있는 일종의 정당 같은 존재였는데, 김립은 이갑, 안창호 등과 더불어 그 단체 내에서 “말 잘하고 지략이 종횡하는 청년 논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②.


달변에 지략 뛰어난 청년


북간도 3대 민족주의 명문학교 길동학당 터: 중국지린성 연길현 국자가 소영자 소재. 학교 터는 밭으로 변해 있고(삼각형), 인근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공개 단체뿐만 아니었다. 그는 비공개 비밀결사 영역에도 깊이 참여했다. 그는 전국 규모의 강력한 비밀결사 신민회의 회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회원일 뿐만 아니라 중견 간부였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그가 신민회가 지향하는 사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신민회 간부급 구성원들이 망국 전후에 했던 전형적인 행동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국운이 거의 기울어가던 1910년 4월 그는 망명했다. 망국 4개월 전이었다. 일제 침략에 맞서 타오르던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불길이 점차 잦아들던 때였다. 신민회 간부들이 집단 망명을 단행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다. 독일 조차지였던 중국 칭다오에서 전략 회의를 열었던 게 1910년 4월이었다. 이갑, 안창호 등을 비롯한 십수 명의 독립지사들이 동참했다. 김립이 이 회의에 참석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김립이 신민회 간부들의 집단 망명 대열에 일원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최초의 잡지로 이름 높은 <소년> 1910년 4월호 첫머리에 ‘나라를 떠나는 슬픔’ ‘태백의 님을 이별함’이라는 권두시가 실려 있다. 바로 신민회 간부들의 망명을 읊은 노래였다③. 김립은 바로 ‘태백의 님’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김립이 선택한 망명지는 ‘해도’였다. 연해주와 북간도를 합쳐 일컫는 말이었다. 두만강을 경계로 조국과 잇닿아 있는 곳이자, 수십만 명의 한인 이주민 사회가 형성돼 동포들의 후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말 널리 유행했던 <정감록>에서 이르기를, 해도에서 진인이 출현하여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해주와 북간도는 그 음가만으로도 국권을 상실한 민중에게 희망을 주는 곳이었다.

그는 해도를 기반으로 독립혁명의 주체 역량을 양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두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는 수십만 한인 이주민들을 결속해 반일운동의 기지로 삼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북간도에서는 간민교육회(1910년)와 간민회(1913년)를, 연해주에서는 권업회(1911년) 결성을 이끌어냈다. 어느 것이나 다 이주민 자치단체였다. 1913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춘원 이광수는 권업회의 임원들을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그중에 김립이 거론된다. 김립은 책사로서 권업회의 중심인물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독립혁명의 신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특별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그가 역점을 기울인 학교는 길동(吉東)학당과 나자구사관학교였다. 길동학당은 북간도의 가장 큰 도회지 국자가(局子街) 근교 소영자(小營子)에 설립한 중등 과정의 사범학교였다. 길동기독학당, 광성중학 등으로도 알려진 이 학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지도자 양성기관으로써 기능했다. 이 학교는 장재촌의 명동(明東)학교, 와룡동의 창동(昌東)학원과 더불어 1910년대 북간도 한인 사회의 3대 명문 교육기관 중 하나로 지목받았다.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독립혁명에 헌신하는 청년들이 줄지어 배출됐기 때문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 1920년 1월에 일어난 유명한 15만원 사건 주인공들도 바로 이 세 학교 졸업생들로 이뤄진 비밀결사 철혈광복단의 구성원이었다. 어느 학교나 다 교명이 ‘동’(東) 자로 끝나는 점이 눈에 띈다.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해동’, 즉 한국을 가리키는 은유였다. 한국에 빛을 가져오고, 한국을 융성시키며, 한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 이 학교들의 교육 목표였다.


신·구학 겸비한 행동하는 지식인 

 

김립의 기고문 ‘今日 吾人의 國家에 對한 義務 及權利’가 실려 있는 <서북학회월보> 창간호 표지. 독립기념관 제공


나자구사관학교도 김립과 그 동료들이 심혈을 기울여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국자가 북쪽 150km 지점 깊은 산속에 넓은 분지가 있는데, 그곳에 자리한 이 학교는 무장부대의 지휘관을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길동학당이 정치 간부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면, 나자구사관학교는 군사 간부를 기르는 교육기관이었다. 이 두 학교는 망명객 김립이 구상한 독립운동 전략의 중요 소산이었다. 그의 오랜 동지였던 김규면이 뒷날 남긴 수기에 따르면, 김립은 ‘광성중학과 나자구사관학교의 창립자’라고 지목받았다.

그는 지식인이었다. 일본 첩보 문서의 평가에 따르면 “반일 조선인 가운데 재주와 학식이 제일류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한문과 법률에 능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유교 교양은 물론이고 법학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신학과 구학을 겸비한 이였다.

학식이 뛰어났다고 해서 그저 공론만 일삼는 책상물림은 아니었다. 그는 유능한 행동인이었다. 김립의 가까운 동료이자 역사가인 계봉우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정치 수완이 민활”해 “상하이 망명자 사회에서 그를 능가할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김립은 주·객관 정세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에 입각해 독립운동의 장래를 구상했다. 강대한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본을 포위할 수 있는 국제적 연대를 추구할 필요가 있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김립은 독일과의 국제적 연대가 한국 독립의 필요조건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 때문에 김립과 그 동료들은 러시아 정부에 위험인물로 지목됐다. 급기야 김립은 러시아 정부에 의해 적성국가 독일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다. 1916년 4월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된 그는 러시아혁명이 터진 뒤인 이듬해 5월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④.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김립과 그 동료들은 러시아 혁명파가 한국 독립의 국제적 지원 역량이 된다고 판단했다. 김립은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추구해나갔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한인사회당’이라는 명칭의 사회주의 정당을 창설하는 데 앞장섰다. 김규면의 수기를 보면, 김립은 ‘한인사회당 창립자의 한 사람’ ‘한인 적위군 조직자의 한 사람’ ‘한국공산주의 선전사업의 첫 사람’이라고 지목된다⑤.


내부의 적에게 빼앗긴 목숨


김립에게는 적이 많았다. 일본 제국주의와 그 협력자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인 사회 내에서 혹은 독립운동계 내부에 그에 맞서는 반대파가 항상 있었다는 의미다. 왜 그에게는 내부의 적이 많았는가? 교만했다거나 야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가 견지했던 독립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관련되어 있었다.

해도에서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할 때도 그랬다. 북간도에서는 전통 유학자들이 이끄는 보수적인 한인 농민단체 ‘농무계’로부터 배척당했고, 연해주에서는 러시아 국적을 가진 부유한 한인 이주민들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왜냐하면 그는 전제군주 제도를 폐지하고 국민주권주의에 입각한 혁명적 민주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간도 이주민 내부에 존재하는 보수적인 유생들, 농민들과 갈등을 겪었던 것이다. 연해주에서 알력을 빚은 이유는 그가 연해주 한인 이주민들의 공통 이익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 국적을 갖지 못한, 가난한 비귀화 한인들의 이익과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점에 섰다. 부유한 이주민 상층부와 알력을 빚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상하이에서도 내부의 적과 맞섰다. 임시정부에서는 미국과의 연대를 중시하는 두 세력, 이승만 집단과 안창호 집단과 자주 충돌했으며, 사회주의 운동권에서는 이시파(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갈등을 겪었다. 왜냐하면 김립은 미국과 연계한 외교독립론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신생 혁명국가 소비에트러시아와 연계한 무장독립투쟁 노선만이 임시정부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집단과 심각한 불화를 빚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시파 공산당과는 왜 싸웠나? 김립은 한국 혁명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당면 목표로 삼는 민족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세력이라면 설혹 부르주아적 성격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연대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시파 공산당 세력은 달랐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수행하는 것과 동일한 성격의 혁명을 한국에서도 실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김립은 내부의 적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계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상하이 망명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동지적 유대감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정견과 조직이 다르면 한때 동료였던 사람의 손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위구심을 만연케 했다. 아주 좁은 범위의 동료들 외에는 누구도 신뢰하지 않게 됐다. 상하이 한국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냉담한 기운이 휘돌았다.

그뿐인가. 한국 독립운동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김립의 죽음은 모스크바 자금의 추가 수령을 불가능하게 했다. 김립 암살 사건을 계기로 모스크바 자금 집행에 관한 의혹이 제기됐고, 이 의혹을 중시한 코민테른은 자체 감찰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약속된 총 지원금 가운데 잔여액 지급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도합 금화 200만루블이 한국 독립운동계에 제공될 예정이었다. 그중에서 실제 지급된 금액은 2회에 걸쳐서 60만루블이었다. 잔여 자금 140만루블이 남아 있었지만, 그 지급이 취소되고 말았다. 오늘날 구매력으로 환산한다면 2085억원에 이르는 거액의 혁명 자금이 날아가버린 것이었다. 그즈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은밀히 거래되던 무기시장 시세에 따르면, 소총 500정과 기관총 3문으로 무장한 북로군정서 규모의 비정규 무장부대를 무려 107개나 조직할 수 있는 자금이었다. 그 기회는 사라지고 말았다.

김립 암살 사건은 일종의 국가 폭력이었다. 임시정부 내각 결정에 의거해 경무국이 집행한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 큰 위해를 가져온 불행이었다. 임시정부는 두 가지 점에서 명백히 과오를 범했다. 첫째, 잘못된 정보와 판단을 따랐다. 모스크바 자금 금화 40만루블의 집행권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인사회당에 속해 있었다. 둘째, 설혹 유죄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 형벌의 집행 과정이 적법하거나 적절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계의 폭넓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졌어야 했다.


번번이 기각된 독립유공자 상신

지금이라도 과오가 교정돼야 한다. 마땅히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하며, 망자에게 국가적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기념사업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계승을 자임하는 한국 정부의 마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김립은 오늘날에도 ‘공금횡령범’이라는 불명예 속에 갇혀 있다. 사후 근 백 년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범한 정책적 과오의 그늘 속에 있다. 오늘날에도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의 과정에서는 임시정부 공금횡령자라는 낙인 때문에 그의 서훈 상신이 번번이 기각되고 있다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를 억누르고 있는 허위의 낙인을 지우고, 그 자리에 그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는 꽃 한 다발을 놓아야 할 때다.


참고 문헌

①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32집, 2005, 65쪽.

② 許憲, ‘交友錄’, <삼천리> 제7권 제7호, 1935. 8, 72쪽.

③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하)’, <한국학보> 9, 1977, 178쪽.

④ 반병률, 위의 글, 74쪽.

⑤ 김규면, ‘老兵 金規勉의 備忘錄’, 윤병석 편, <誠齋李東輝全書(下)>,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8, 121-245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380.html




한국 독립운동에 510억원어치 금괴 지원한 레닌
활발한 활동으로 지원 끌어낸 주체는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제2차 대회 민족·식민지 분과에서 토의 중인 박진순과 레닌. 임경석 제공


모스크바 자금은 도대체 어떤 돈인가. 김립이 독립운동계 동료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의 한가운데에 이 문제가 놓여 있었다. 이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견도 없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이 자금을 제공했다. 이것에는 누구나 다 동의한다.

자금 규모는 어느 정도였나. 도대체 얼마이기에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을까. 당연히 적은 돈이 아니었다. 자금 운송에 직접 참여했던 한형권의 증언에 따르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 레닌 정부가 한국 혁명 사업에 주기로 약속한 자금 규모는 200만루블이었다. 지폐가 아니라 금화였다. 순금 덩어리였다.


성인 5명 체중과 같은 327kg 금괴


왜 금화로 계량했을까. 당시 혁명과 내란에 휩쓸린 러시아 사회의 화폐제도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통용되는 화폐가 여러 가지였다. 제정러시아 시절에 발행된 로마노프 루블, 1917년 2월 혁명 이후 발행된 케렌스키 루블, 10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정부가 발행한 소비에트 루블, 백위파 세묘노프 정부가 발행한 세묘노프 루블 등이 혼용됐다. 어느 것이나 다 안정성이 의심스러웠다. 순금 보유고에 의거한 태환을 보장하지 않은 채 마구 찍어낸 화폐들이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초래됐고, 화폐가치가 급락했다. 예컨대 세묘노프 루블은 미국 돈 1달러당 무려 25만루블 비율로 환전됐다. 지역에 따라서는 통용이 불가능한 돈도 있었다. 케렌스키 루블과 소비에트 루블은 아무르 강변의 블라고베셴스크 일대에서는 유통 자체가 되지 않았다.

이런 형편이었으므로 지폐는 부적당했다. 국제 금융거래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유럽의 유력한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이 당시엔 불가능했다. 신생 혁명 정부를 적대시하는 제국주의 열강은 소비에트러시아에 경제 봉쇄 정책을 취했다. 오직 실물 자산만이 유용했다. 제정러시아 때 발행한 금화만이 공신력을 갖춘 결제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다.

러시아 정부는 한국 쪽의 필요에 따라 자금을 얼마씩 나눠 지급하기로 약속했다. 1차 지급액은 1920년 9월에 집행된 금화 40만루블이었다. 이 돈은 어느 정도의 금덩어리인가. 한형권의 회상에 따르면, 20푸드(러시아의 무게 단위로, 1푸드는 약 16.38kg)의 금괴를 궤짝 7개에 나눠 담았는데, 모두 합하면 성인 5명의 몸무게를 합한 것과 같았다.① 20푸드의 금괴는 약 327.6kg이다. 성인 5명의 몸무게와 같았다는 회고담이 사실에 부합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궤짝 7개에 나눠 담았으니, 한 궤짝의 무게는 약 47kg이다. 한 사람이 들기에는 너무 무겁고, 둘이서 양 끝을 맞잡는다면 무난히 운반할 수 있었다.


금화 40만루블은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얼마나 될까. 1920년 런던 현물시장 거래가에 따르면, 금 1온스(28.349g)당 가격이 20.68달러였다.②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금 1g당 약 0.729달러로, 금화 40만루블에 해당하는 순금 327.6kg은 23만8820달러였다. 1924년 1월 현재 1달러에 대한 일본 화폐의 교환가는 2원16∼2원17전이었다.③ 금화 40만루블은 미국 돈으로는 23만8820달러, 일본 돈으로는 51만5852엔이었다. 그즈음 식민지 조선 신문기자의 월급이 40~50엔이고, 일용노동자 하루 일당이 1엔쯤 했다. 금화 40만루블은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510억원쯤 되는 큰돈이었다.


흉작으로 수많은 민중 고통받던 때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한국의 독립혁명을 위해 무상 원조하기로 약속한 200만루블은 약 255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놀랄 만한 액수였다. 레닌 정부는 무상 원조 총액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하는 510억원을 1차분으로 지급했다. 혁명과 내전으로 고통을 겪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였다. 서구 열강에 의해 경제가 봉쇄되고, 도처에서 백위파 세력이 외국의 후원을 얻어 군사 반란을 일으키던 중이었다. 그뿐인가. 볼가강과 돈강 유역의 농업지대에서 흉작으로 기근이 생겨 수많은 민중이 고통받던 때였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부는 멀리 떨어진 한국 혁명의 승리를 돕기 위해 거액의 지원금을 쾌척했다. 식민지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는 국제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코민테른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구호, ‘만국의 노동자와 피억압민족은 단결하라’는 정신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는 도대체 누구에게 자금을 주었는가. 표현을 달리해보자. ‘수령 주체는 누구인가’ ‘누가 모스크바 자금을 관할하는가’ ‘자금을 운용·배분하는 권한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을 해명하려면 두 방법이 있다. 하나는 모스크바 외교를 성사시킨 행위 주체, 다른 하나는 자금 제공자인 코민테른과 러시아 정부의 견해를 확인하는 것이다.

모스크바 외교를 처음 실행에 옮긴 주체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인 한인사회당이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세 사람으로 이뤄진 대표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3·1혁명이 일어난 1919년 7월이었다. 이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평시라면 10여 일 만에 끝날 여정이 무려 120일이나 걸린 것은 러시아 내전 때문이었다. 적위군과 백위군이 엎치락뒤치락 번갈아 집권하는 탓에 교통과 통신이 평시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이 지나야 했던 경유지는 마치 적색과 백색이 어지럽게 뒤섞인 모자이크 같았다.

대표단은 코민테른과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맹렬한 외교전에 임했다. 특히 박진순의 활약상이 두드러졌다. 그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한국 혁명운동을 설명하고,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 의사를 밝혔다. 그의 연설은 국제공산당 기관지 <코민테른> 1919년 7~8호(11~12월 합병호)에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국외 정기간행물에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기고문이 실린 것은 처음이었다.

러시아 정부기관을 상대하는 외교활동도 활발했다. 그해 12월9일에 열린, 러시아 최상급 의결기관인 제7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 출석한 박진순에게 한국을 대표해 연설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인사회당 대표단이 러시아 정부 당국에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


소련, 한형권 임정 대사 깍듯이 예우


모스크바에 파견된 한인사회당 대표단 3명(왼쪽부터 박진순, 박애, 이한영). 모스크바 자금의 수령자를 명시한 ‘얀손 보고서’(오른쪽).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동료인 박애와 이한영이 1920년 4월 극동으로 귀환한 뒤에도 박진순은 홀로 남아 계속 외교활동을 했다. 그의 활동은 7∼8월 절정에 이르렀다. 그 기간에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의결권을 지닌 정식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레닌이나 마나벤드라 나트 로이처럼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이 즐비한 민족·식민지 분과에 소속돼 위원으로 활동했다. 식민지 해방운동 이론과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 머리를 맞대고 참여했던 것이다. 그 분과에서 박진순이 취했던 이론적 견해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위대한 진보’라는 제목으로 민족·식민지 문제에 대한 그의 논리가 드러나 있다.④ 그뿐인가. 대회가 종료된 뒤에는 코민테른 최상급 집행기구인 집행위원회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코민테른 역사상 한국인으로 최고위직에 진출한 것이었다.

박진순의 외교활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또 다른 유력한 외교활동가가 모스크바에 모습을 나타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전권대사 한형권이었다. 그가 모스크바에 온 시점은 1920년 5월 말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원에서 모스크바 대사 선임을 논의할 때 애초에 거론된 사람은 한형권, 여운형, 안공근이었다. 이들은 러시아말에 능통하거나,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무총리 이동휘는 여러 대사를 파견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세 사람은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3대 정치세력의 입장을 각각 반영했기 때문이다. 1919년 10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 이후 내각은 3대 정치세력의 연립정부라는 성격을 띠었다. 흥사단이 중심인 안창호 그룹, 임시정부 내 최대 지분을 가진 이승만 그룹, 국무총리 이동휘가 대표하는 한인사회당 그룹이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외교관 파견이 정치적 안배로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3인의 대사를 선임했다가는 외교활동의 단일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혼선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한 사람만 보내기로 했다. 한형권에게만 전권대사 신임장을 부여했다. 한형권이 한인사회당 당원이라는 사실도 판단의 기준이 됐을 것이다. 이미 파견된 한인사회당 대표단과 호흡을 맞춰 일하려면 한형권밖에 적임자가 없었다.

한형권은 러시아 정부의 깍듯한 예우를 받았다. 독립국 대사나 다름없는 대우였다. 러시아 국경을 넘어 들어가자마자 특별차량과 호위병을 제공받았다.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역두에서 외무차관 카라한을 필두로 하는 외무 담당 관료들의 영접을 받았다.


러시아공산당의 자금 특별감사


박진순과 한형권, 두 사람은 긴밀히 협력했다. 한 사람은 당 레벨에서 코민테른과 러시아 공산당의 요로를 뚫었고, 또 한 사람은 정부 레벨에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의 관료들과 빈번히 접촉했다. 한인사회당 대표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의 ‘콤비 플레이’는 1920년 9월에 마침내 거대한 성과를 거뒀다. 모스크바 자금 1차분 금화 40만루블을 받은 것이다.

두 사람은 궤짝 7개에 나눠 담은 327.6kg의 황금을 갖고서 극동으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제국주의 열강의 봉쇄를 뚫으려면 몽골을 거쳐 북중국 쪽으로 가는 것이 가장 유리했다. 몽골 국경까지 순금 궤짝을 운반한다면 그곳에서 순금 덩어리를 금융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두 사람이 모스크바를 떠날 때, 정거장에는 카라한을 비롯해 여러 외교관들이 배웅했다. 귀중품 수송을 위해 무장 호위병 4명이 배속된 특별차량을 보냈다.

그렇다면 김립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금화 40만루블의 관할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코민테른 기록에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문서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먼저, ‘얀손 보고서’를 보자. 김립 암살 사건으로 모스크바 자금을 둘러싼 분규가 더할 나위 없이 격화되자, 결국 코민테른이 나섰다. 코민테른은 실상을 조사하고 해결책을 입안할 수 있는 특별한 조처를 했다. 특별감사관을 임명한 것이다. 1922년 5월 초순 한국자금문제 감사관으로 선임된 이는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간부 ‘얀손’이었다.⑤ 그는 내전 시기에 극동 지역의 안정을 위해 일시적으로 설립됐던 극동공화국 외무부 장관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모스크바 자금에 대한 막강한 권한이 위임됐다. 자금을 받은 한국의 사회주의 단체들을 감찰하고, 잔여금이 있을 때는 몰수할 권한이 부여됐다.

얀손은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폭넓은 조사에 착수했다. 자금의 수령과 집행에 관련된 인사들에게 서면 결산보고서 제출을 요구했고, 필요하면 직접 대면 조사도 병행했다. 예를 들어 얀손은 동료 ‘유린’을 상하이에 파견해 한인사회당 재정 담당자 김철수를 대면 조사하게 했다. 다른 관련자들도 조사 범위에 넣었다. 자금 운용에 흑막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한 사람들도 만났다. 그들을 불러들여 청문회를 열었다. 모스크바의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에는 당시 작성된 청문 기록 가운데 5종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한인사회당 책임비서이자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를 비롯해 외교 대표단 일원이었던 박애의 진술도 있다.

마침내 얀손 보고서가 작성됐다. 얀손의 지휘하에 실무위원회가 3개월간 조사활동을 한 뒤 1922년 8월18일치로 작성한 감사보고서였다.⑥ 문서에는 모스크바 자금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의 견해가 담겼다. 그에 따르면 1920년 9월 금화 40만루블의 수령자는 ‘박진순’이었다. 다시 말하면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출석한 한인사회당 대표자이자,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된 박진순에게 자금이 갔던 것이다. 이는 모스크바 자금의 관할권이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 조직인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에 있었음을 뜻한다.


자금 관할권 가졌던 한인사회당


금화 40만루블의 관리 책임자가 박진순이라는 정보는 또 다른 문서에도 실려 있다.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공문서다. 외무차관 카라한이 작성한 한 전보를 보면, 1920년 9월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가 박진순에게 금화 40만루블을 인도했다는 기사가 쓰여 있다.⑦

이제 모스크바 자금 40만루블의 관할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해졌다. 그것은 논란의 여지 없이 한인사회당과 그 후계 단체인 고려공산당에 있었다. 이는 논란 당사자들의 설왕설래에 의존하지 않고 객관적 기록으로 입증할 수 있다. 코민테른 쪽의 얀손 보고서,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의 공문서 등은 한 가지 사실을 지목한다. 바로 한인사회당이었다.


참고 문헌

① 한형권, ‘혁명가의 회상록: 레닌과 담판, 독립자금 20억원 획득’, <삼천리> 6, 10쪽, 1948년 10월

http://www.kitco.com/scripts/hist_charts/yearly_graphs.plx

③ ‘외국우편위체’, <동아일보> 1924년 1월22일치

④ Пак Диншунь(박진순), Великий Сдвиг(위대한 진보), 1920년 8월, с.1-4,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22 л.57-60

⑤ Секретарь ИККИ Куусинен(코민테른집행위 비서 쿠시넨), тов Янсону(얀손 동무에게), 1922년 5월11일, с.2,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7 л.13об

⑥ Доклад о результатах работ комиссии по выяснению финансовых расчетов Кор.Ком.Партии / Шанх.организации(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자금결산규명위원회 결과 보고서), 1922년 8월18일, с.9,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9 л.59-67

⑦ Телеграмма Чита Янсону из Москвы Карахана(모스크바에서 카라한이 치따의 얀손에게 보내는 전보), 1922년 6월2일, с.1,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59 л.33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244.html




1987년 대선 이후, 김근태가 바라 본 '두 개의 전선'


1988년 6월 30일 가석방 돼 감옥 문을 나선 김근태는 민청련 회원들의 따듯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엄혹했던 1983년에 민청련을 창립하고 민청련뿐만 아니라 사실상 운동 전반을 이끄는 지위에 이르렀지만,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비지'를 주장하고 그것이 한 원인이 돼 대선 패배로 이어짐으로써 김근태의 위상은 이전보다 현저하게 약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김근태에게는 자기 한 사람의 위상이 낮아진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분열되고 무너진 운동 세력의 전선을 어떻게 하면 다시 복구할 수 있을 것인가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서 출옥한 김근태 전의장과 마중나온 민청련 회원들. 김근태 옆으로 부인 인재근, 김성환 의장(머리띠 묶은 이), 김두일 사무국장, 임태숙, 최민화 전부의장, 원혜영, 장영달 전 부의장, 권형택 전 부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1988년 6월 30일 김천교도소에서 출옥한 김근태 전의장과 마중나온 민청련 회원들. 김근태 옆으로 부인 인재근, 김성환 의장(머리띠 묶은 이), 김두일 사무국장, 임태숙, 최민화 전부의장, 원혜영, 장영달 전 부의장, 권형택 전 부의장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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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선 이후 와해된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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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자신의 생각을 9월 3일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의 기념강연에서, 또한 그즈음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실린 특별대담에서 밝혔다.

김근태의 강연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김근태가 아직 감옥에 있던 87년 대선 이후 운동세력 내부에서 진행돼 오던 통합 논의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앞서 민청련이 창립된 1983년 이후 이에 자극 받아 노동운동, 농민운동, 문화운동 등 운동조직들을 중심으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한편으로 재야의 명망가들을 중심으로 민주통일국민회의가 결성됐다. 그리고 이 두 연합체가 다시 통합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을 만들었다.

그런데 민통련이 제 역량을 갖추고 활동력을 키워나가는 도중에 김대중, 김영삼을 주축으로 한 야당 세력이 재기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그 순간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그 여세에 떠밀려 민통련과 양 김 세력이 연합전선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였고 이 연합전선의 깃발 아래 6월민주항쟁이 전개됐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으로 쟁취한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양 김이 분열하고 그에 따라 운동 세력도 분열함으로서 국본이라는 연합전선은 붕괴됐다. 운동 세력 내부를 보면, 연합체인 민통련이 대선에서 김대중 비지의 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민통련이 예전과 같은 운동 세력 총연합체의 위상을 가질 수는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운동 세력의 새로운 연합에 대한 논의가 촉발됐던 것이다.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김근태 전의장이 기념 강연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 원고의 목차
 성남민청련 창립식에서 김근태 전의장이 기념 강연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 원고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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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세력 내부에서 각 그룹 마다 논의해 오던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에 대해 김근태는 출옥 후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그러한 자기 생각의 대강을 9월 3일 성만민청련 창립식 기념강연에서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전망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얼마 뒤 기관지 <민주화의 길>과의 특별대담 '민족민주운동의 현 단계와 과제'를 통해 밝혔다.

김근태 생각의 핵심은 운동 세력의 재편에 대한 논의가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연합전선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정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전선을 두 개로 나누어 생각하자고 제안했다. 하나는 민족민주운동전선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전선이었다.

두 전선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사회 계급에서 차이가 있었다. 민족민주전선은 다수의 동자, 소생산자, 농민, 도시빈민, 중소자본가를 토대로 한 전선이고, 현실 정치세력으로는 민중운동역량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된다. 반면 국민전선은 중소자본가와 비독점대기업을 주 토대로 하며, 현실 정치세력으로는 제도정치의 야당 세력과 재야운동의 일부로 구성된다.

각 전선이 기반하고 있는 토대의 차이는 이들의 정치노선의 차이로 나타나는데, 국민전선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성취에 중점을 두지만 민족민주전선은 민중의 이익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그리고 분단의 극복을 추구한다.

김근태는 국민전선이 비록 불철저한 민주주의에 자족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들이 군사독재와의 비타협적 투쟁에 앞장서는 한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되며 함께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운동세력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민족민주전선을 튼튼하게 꾸려내는 것이라고 했다. 튼실한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고 그 힘으로 국민전선이 이끌어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근태의 이러한 구상은 지난 대선에서의 운동 세력 간 대립과 분열을 해소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김근태 자신은 그러한 일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한 것처럼 보였다.

 1988년 9월 3일 김근태의 성민청 창립 기념강연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중 두 개의 전선을 설명한 도표.
 1988년 9월 3일 김근태의 성민청 창립 기념강연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중 두 개의 전선을 설명한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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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지도부에 대한 비판

한편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그 힘으로 야당과 운동세력에 대한 공세를 펴나갈 기세였다. 그것이 전두환 때처럼 폭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운동 세력을 국민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고립시키려는 목적은 분명해 보였다.

이러한 정세에 속에서 민청련은 하반기 총회를 앞두고 치열한 배부 논의에 들어갔다. 관례적으로 해왔듯이 11차 총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조직 단위와 부서에 대한 평가작업에 들어갔다. 그 기조는 9차총회 이후 민청련이 내세운 '청년대중운동론'이 실제 활동에서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맞춰져 있었다.

민청련은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동서울, 남서울, 북서울이라는 지부를 건설했고, 나아가 경기도의 안양과 성남으로 지부를 넓혀나갔다. 이러한 지역지부의 건설은 분명한 성과였지만, 총준위 평가에서는 공통적으로 '지도력 부재'의 문제가 지적됐다. 

지도력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민청련은 각 대학 학생운동 출신자들의 조직이라는 틀을 벗고,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노동청년들을 자기 조직원으로 하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목표는 쉽사리 달성되지 않았다. 각 지역 지부는 여전히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주요 회원이었고, 이전의 지도부가 중앙에서 중앙 권력을 향해 투쟁했다면, 지역 지부는 지역 차원에서 지역 권력과 투쟁하는 일종의 중앙의 지역화를 수행하는 양태였다.

그러한 지역 단위의 정치투쟁 조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애초에 설정한 '청년대중운동론'에 부합하는 것인지, 그 노선에서 이탈한 것인지에 대해 김성환 의장 지도부는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 그래서 각 지역 지부는 그때그때 지역에서 발생하는 노동쟁의에 대응할 뿐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지침은 없는 상태라고 자평하기에 이른 것이다.

학생들의 통일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1988년 10차 총회 지도부를 이끈 김성환 의장이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5공비리 규탄 및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을 요구하는 선전을 벌이고 있다
 1988년 10차 총회 지도부를 이끈 김성환 의장이 종로3가 지하철역에서 5공비리 규탄 및 전두환 이순자 구속 처벌을 요구하는 선전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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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중요한 이슈가 있었다. 학생운동 쪽에서 거세게 치고나온 통일운동이었다. 이는 학생운동 속에서 성장한 이른바 민족해방(약칭 NL) 계열 노선이 외화된 것이었고 따라서 민청련 회원들은 지도부에게 NL에 대한 태도의 표명을 요구했다.

김성환 의장 지도부는 공개적이지는 않았지만, NL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통일운동에도 지지와 지원은 하지만 적극적인 자세는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5공 비리와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투쟁을 기본 방침으로 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방침'으로 NL이라는 '노선'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김성환 지도부는 당시를 풍미하던 NL에 대해 비토는 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고, 그것은 회원들에게 지도부의 노선 부재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학생운동에서 터져 나온 통일운동 열풍에 대해 김근태 전 의장이 성남 강연회에서 언급한 바가 있었다. 김 전 의장은 그것이 성과와 한계를 모두 드러냈다고 했다. 즉 기존의 운동 세력은 민주화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기계적으로 분리하는 관습에 젖어 있었는데, 학생운동이 그것을 단숨에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운동이라는 것을 제시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했다. 아울러 무엇보다도 대선 패배 이후 침체돼 있던 운동 사회의 분위기를 일신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학생들이 통일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투쟁의 배합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즉 5공 비리나 광주 문제가 뒷전으로 밀려 그쪽의 투쟁 동력을 상실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학생운동이 통일 문제를 워낙 거세게 치고나옴으로서 전체 운동의 흐름에 일종의 병목 현상이 발생하고 이것이 운동의 질곡으로까지 나아갔다고 비판했다. 또한 학생운동은 본원적으로 대중을 대표하는 지위를 가질 수 없음에도, 그들이 사회 운동 전반을 자신들의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어떤 면에서 사실상 운동 전체를 지도하려고 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 전 의장의 이러한 비판은 민청련에게 그다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이후에 김근태의 행적에서 알 수 있게 되지만, 김근태는 이제는 민청련의 범위를 벗어나 전체 운동의 재편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그만큼 민청련 회원들과의 접촉면은 넓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8년 6월 9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서 집회를 연 전대협. 이후 학생운동에서 통일운동이 투쟁의 기조를 이루었다.
 1988년 6월 9일, 6.10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연세대학교에서 집회를 연 전대협. 이후 학생운동에서 통일운동이 투쟁의 기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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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11차 총준위 논의는 지도부 교체로 모아져 나갔다.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는 민청련으로서 새 지도부는 학생운동의 새로운 흐름과 호흡을 같이 하는 이들이어야 했다. 그러나 다양한 논의 그룹들과 접촉면을 갖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에게 그러한 처방이 충분한 것인지는 판단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민청련동지회 주 : 연재를 잠시 쉬겠습니다. 다음 49회부터 민청련 해소까지의 글은 약간의 시간을 두고 내용을 알차게 보강한 뒤 다시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51379

민청련동지회 님의 방 http://www.ohmynews.com/NWS_Web/I_Room/Open/Open_Article.aspx?MEM_CD=00757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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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펼쳐진 통일운동의 대열에 민청련도 참여했다. 하지만 민청련은 학생운동과는 달리 통일운동에 전 역량을 투입할 정도로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1988년 7월 14일 종로2가 탑공공원 앞에서 재야단체 회원들과 함께 남북공동올림픽 개최 요구하는 민청련 회원들. 앞줄 왼쪽 첫 번째는 민중신문팀 최만영, 그 옆 핸드마이크 들고 있는 이는 정봉주, 그 옆은 사무국 총무부장 신기동, 한 사람 건너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그 옆 북민청 총무 남정현.
 1988년 7월 14일 종로2가 탑공공원 앞에서 재야단체 회원들과 함께 남북공동올림픽 개최 요구하는 민청련 회원들. 앞줄 왼쪽 첫 번째는 민중신문팀 최만영, 그 옆 핸드마이크 들고 있는 이는 정봉주, 그 옆은 사무국 총무부장 신기동, 한 사람 건너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그 옆 북민청 총무 남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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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비리'를 투쟁의 축으로

민청련의 지역지부인 동민청, 남민청, 북민청, 안민청 등은 사회단체들과 연대한 공동올림픽 촉구 집회에 참가하는 한편으로 각자 자기 지역의 공단 등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지원하는 일에 집중했다. 또 중앙에서는 정치권에 등장한 이른바 '5공 비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대중투쟁으로 이끄는 일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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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비리'란 전임 대통령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의 직책에 앉아 대기업들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아 챙기고 비자금을 조성한 것이 드러난 것을 계기로 전두환의 재임 중 비리까지 밝혀진 사건이다. 여소야대의 국회에서는 '5공화국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새 헌법에 따라 처음으로 청문회가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정치권에서는 '5공 비리'가 드러난 것은 노태우 정권이 전임 전두환 정권과의 연계를 끊고 차별성과 독자성을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흘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며 국민들을 윽박지르면서 강권을 휘두른 전두환 정권이 뒤에서는 엄청난 비리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민청련은 5공 비리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토대로 여러 단체들과 연합해 '광주학살 부정비리 원흉 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학생운동의 610남북학생회담 및 8.15남북공동행사에 가려져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 연말에 국회에서 열린 '5공 청문회'와 맞물려 전국민적인 투쟁으로 불타오른다.

 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어는 민청련 민중신문팀. 맨 왼쪽 이범영, 그 옆은 홍용기, 김택수.
 전두환 이순자 구속수사 촉구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어는 민청련 민중신문팀. 맨 왼쪽 이범영, 그 옆은 홍용기,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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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향한 교육, 청년학교

한편 민청련 각 지역지부와 중앙이 나름의 활동을 펴는 가운데 드러나지 않은 조직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책실이었다. 정책실은 중앙위원회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실장 이승환을 비롯해 한홍구, 노동진, 김종민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9차 총회 이후 민청련의 활동방침으로 결정된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정책실이라는 기능 속에서 고민하던 중, 청년대중에 대한 교육사업에 착안했다. 이를 위해 10차 총회에서는 교육위원회라는 기구를 신설했고, 이 기구에서 '청년학교준비위원회'를 꾸려 사업구상을 펼쳐나갔다.

민청련에서는 이전에도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꾸준히 진행돼 왔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학생운동 출신자들을 위한 것으로, 내용이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이라든가 '여러 투쟁 노선의 차이점에 대한 분석'과 같은 것들이어서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종의 '엘리트 교육'이었던 셈이다.

청년학교를 구상한 이들은 기존의 교육과는 다르게 '청년대중운동론'에 따라 일반 청년들, 특히 대학을 나오지 않은 보통의 '일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구상했다. 대개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운 우리 사회와 역사에 관한 지식들은 정권이 의도하는 바에 따라 과거와 현실를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청년학교는 그러한 제도권 교육이 심어준 거짓의 껍데기를 부수고 "우리 민족사회의 역사적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것을 목표"로 삼았다.

준비를 마친 위원들은 1988년 7월 19일, 서울 서대문 충정로에 마련한 강의 공간에서 제1기 청년학교를 개강했다. 교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진균이 맡았고, 이승환, 한홍구, 박기목, 윤석연 등이 간사로 운영을 맡았다.

강의는 매주 수, 금요일 2회씩 총 16강으로 구성됐다. 강의 주제는 첫 강의 '세계관'으로 시작해 자주, 민주, 통일, 한국경제의 구조, 80년대 운동, 애국과 매국의 역사 등이 전반기 강의였고, 이어서 후반기 강의로 사회참여와 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문화운동, 주민운동 등이 이어졌다. 강의 제목만으로는 기존 교육과 차별이 없어 보이지만 실제 강의는 철저하게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진행됐다.   

강사로는 소설가 김영현, 노동운동가 장명국 등이 참여했고 민청련 선배 활동가로 김희택, 연성수, 권형택, 김희상, 현역 간부로 의장 김성환과 청년학교 측 한홍구가 직접 참여했다. 1기 강의에 참여한 학생은 70여 명으로 다른 지역지부 활동에 비해 규모가 컸다. 직업별 비중을 보면, 사무직 노동자와 대학생이 각 35% 정도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1.청년학교 교장 김진균 2.간사 한홍구 3.정책실장 이승환 4.교육위원장 박기목 5.정책실 노동진 6.정책실 김종민
 1.청년학교 교장 김진균 2.간사 한홍구 3.정책실장 이승환 4.교육위원장 박기목 5.정책실 노동진 6.정책실 김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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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청년학교는 지역의 청년단체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곧이어 충남민주청년연합에서도 청년학교를 개강했고 광주, 부산 등으로 번져나갔다. 충남민청의 경우, 지역 교육청에서 비인가 교육 시설이라며 폐쇄하라는 공문을 보내와 갈등을 빚기도 했는데, 이는 청년학교 운동이 정권에게 상당한 타격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NL의 흐름 속으로

그런데 민청련 중앙에서 청년학교 개교를 논의하던 중 약간의 논쟁이 있었다. 청년학교의 위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였는데, 중앙위에서는 청년학교를 민청련의 '부설'로 할 것을, 청년학교준비위 측에서는 '후원'으로 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중앙위에서 부설을 주장한 것은 청년학교의 교육방침이나 인선 등이 민청련 중앙의 지도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청년학교 준비위원들은 기존의 민청련 교육이 주로 학생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그런 인상이 강하기 때문에 대중 교육은 그런 민청련과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준비위 측의 주장대로 청년학교는 민청련의 후원 아래 일정한 독립성을 갖고 운영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는 표면상 드러난 논점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청년학교를 꾸린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을 풍미하던 이른바 NL계열의 논리를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 주제도 NL운동의 핵심개념인 '자주, 민주, 통일'이 뼈대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는 중앙의 노선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후 청년학교 활동은 그 자체로는 크게 활성화됐지만, 민청련 중앙에 대해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었다.

김근태 석방되다

한편 민청련의 지역지부 사업이 또 하나의 성과를 거두었다. 9월 3일, 성남민청련이 창립됐다.

성남은 일찍이 70년대 초 서울 재개발 사업으로 밀려난 서민들이 모여 들어 만들어진 도시로 주민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특히 1980년 6월 9일, 광주 항쟁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던 때에 21살의 성남 노동자 김종태가 서울 신촌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온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했다. 이후 김종태를 기리는 지역 활동가들이 모여 모임을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 활동가 중 한 명인 허남정(서울대 철학과 77학번)이 주축이 돼 민청련 지부를 결성한 것이다. 이로서 민청련은 서울 이외 경기 지역에 안양에 이어 성남에 근거를 갖게 됐다.

  (위)성남민청련 현판식. (아래)성남민청련 초대 위원장 허남정과 성민청 임원 명단
 (위)성남민청련 현판식. (아래)성남민청련 초대 위원장 허남정과 성민청 임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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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청 창립식에서는 뜻깊은 강연이 있었다. 민청련 초대 의장 김근태의 강연이었다. 김근태는 이에 앞서 6월 30일, 구속된 지 2년 10개월 만에 가석방으로 김천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는 대학생과 노동자를 비롯한 양심수가 1천 명을 헤아리고 있었으므로 김근태의 가석방은 특별한 경우였다. 민청련에서는 그것은 미국 정치인들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았다.

6월항쟁이 있던 87년 연말,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에서 김근태를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80년 광주 학살에 미국의 책임이 있다고 보는 민청련에게 이는 뜻밖의 뉴스였다. 하지만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원로들은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은 정치와 상관없이 전 세계 인권운동을 지원하는 단체이므로 수상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했고 민청련도 수긍했다.

그런데 정작 옥중에 있는 김근태를 대신해 부인 인재근이 수상을 위해 출국하려 했으나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미국에 가지 못했다. 결국 88년 5월, 재단 관계자인 로베트 케네디의 딸이 직접 상을 들고 방한해 인재근에게 수여했다.

노태우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미국이 김근태 석방에 대한 압력을 넣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결국 정부는 6월 30일 김근태를 석방했다.

당일 김천 교도소에는 부인 인재근, 함께 민청련에서 활동했던 이해찬, 박우섭, 당시 의장 김성환 등이 찾아가 교도소를 나서는 김근태를 뜨겁게 환영했다. 김근태는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면 등과 허리가 몹시 쑤신다고 했다. 또 두통이 심해 잠도 제대로 못자고 하혈까지 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당분간 쉴 것을 권유했지만, 당시 상황은 그를 놓아두지 않았다.

김근태의 '두 개의 전선론'

 1988년 9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강연하는 김근태 전의장
 1988년 9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강연하는 김근태 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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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청 강연의 제목은 "80년대 후반 민족민주운동의 현황과 과제".

감옥을 나온 지 이제 두 달 된 김근태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였다. 김근태는 87년 대선에 대해 옥중에서 '김대중 비지'를 천명했고, 그것은 결국 노태우 당선, 그리고 운동권의 대분열이라는 업보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는 운동 전반이 처한 현실을 되짚어 보면서 무언가 방향을 찾고 싶었다.

이날 강연은 그에 대한 김근태 생각의 대강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른바 '두 개의 전선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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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들어와 학생운동 내부에서 싹이 터서 자라난 NL 계열은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나왔다. 특별히 이 해에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이를 투쟁의 계기로 삼아 남북공동올림픽이라는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위) 1988년 7월 27일 '공동올림픽 쟁취와 평화협정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에서 시내로 진출한 참가자들 (아래) 결의대회가 열린 7월 27일 이후부터 시내 곳곳에서 진행한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에서 마이크를 잡은 권형택 민청련 전 부의장.
 (위) 1988년 7월 27일 '공동올림픽 쟁취와 평화협정을 위한 범국민결의대회'에서 시내로 진출한 참가자들 (아래) 결의대회가 열린 7월 27일 이후부터 시내 곳곳에서 진행한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에서 마이크를 잡은 권형택 민청련 전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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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학생운동에서의 첫 목소리는 3월 중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NL계열 후보로 나온 김중기에게서 나왔다. 그는 '남북청년학생 체육대회와 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을 제안하고 이를 위한 남북학생회담을 6월 10일 판문점에서 열 것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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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종단 순례대행진은 북한 학생들은 백두산에서 출발해 판문점으로 오고, 남한 학생들은 한라산에서 출발해 판문점으로 와서 8월 15일에 만나 대동제를 열자는 것이었다. 학생체육대회는 9월 15일부터 17일에 걸쳐 남의 서울대나 북의 김일성대에서 열자고 했다. 서울올림픽이 9월 17일 개막하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은 서울올림픽을 통일의 축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서울대의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에게 받아들여져 '남북공동올림픽 개최'라는 구호로 확장됐고 이 깃발 아래 전국 대학생들의 '조국통일운동'이 뜨겁게 타올랐다. 전대협은 이 열기를 모아 6월 9일 연세대에서 '6.10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궐기대회'를 열기로 했다. 경찰이 집결을 차단하자 전남대, 서강대, 이화여대, 고려대로 분산 개최하여 오히려 열기를 확산시켰다.

6월 10일 연세대에서 '남북학생회담 출정식'이 열렸다. 2만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이날 출정식에는 재야에서 문익환 민통련 의장, 지선, 진관 스님 등 각계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출정식이 끝나고 '통일선봉대'의 지휘에 따라 대학생 수만 명이 연세대학교를 출발해 판문점을 향해 행진을 벌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대학생들은 홍제동 부근에서 경찰의 봉쇄에 막히자 수천 명이 8차선 도로에 들어 누워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큰사진보기 (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아래)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임진각까지 당도한 학생들이 누워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위) 6.10남북학생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향하려던 대학생 5천여 명이 홍제동 지하철역 앞 6차선 도로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중 가스차 4대가 다가오자 팔짱을 끼고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다.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쏘아 해산시켰다. (아래)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임진각까지 당도한 학생들이 누워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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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을 남북공동 주최로"

대학생들의 이러한 통일운동은 정치권에도 적지 않은 충격파를 던졌다. 우선 제1야당인 평민당 총재 김대중은 "정부가 남북학생회담을 주선할 것"을 요구하며 학생들의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김영삼의 민주당도 동조했다.

무엇보다도 집권 민정당과 노태우 정부도 학생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다. 다만 '학생들의 남북 교류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대화 창구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회피하는 처신을 택했다.

이는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의 참가를 독려하며 이른바 '북방외교'를 펼치던 정부로서의 고육책이기도 했다. 앞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당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빌미로 미국 등 서방이 불참하고, 84년 LA올림픽은 그에 대한 소련의 보복으로 동구권이 불참하는 반쪽 올림픽에 그쳤었다. 그래서 88년 서울 올림픽 성공에 대한 기대는 더욱 깊었다. 심지어 노태우 대통령은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약칭 7.7선언)을 발표할 정도였다. 

한편 재야 쪽에서는 민통련의 문익환 의장이 통일 문제를 가장 선도적으로 치고 나왔다. 민통련은 이미 2월에 문 의장의 주창에 따라 '통일위원회'(위원장 김병걸)를 구성하고 통일문제에 대해 대중강연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6.10남북학생회담'을 들고 나오자 이에 대해 발 빠르게 움직여 함석헌, 문익환, 계훈제 등 원로들의 지지선언을 이끌었다. 또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단체 68개가 연대하여 '조국통일의 대업을 앞당기기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여기에는 민청련도 참여했다.

NL과 거리 둔 민청련 지도부

그런데 민청련의 남북학생회담 지지 열기는 학생들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이는 민청련 지도부가 NL계열 학생운동에 대해 지지하지 않은 것과는 별도로, 남북공동올림픽이라는 운동 슬로건에 대해 내부에서 치열한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성환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지도부는 4.26총선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되고, 특히 광주에 기반을 둔 평민당이 제1야당이 된 정세 아래에서는 무엇보다도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혀내는 투쟁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심지어 이런 시기에 통일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투쟁 역량을 분산시키고 전열을 흐트러트릴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광주 문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장 다가온 올림픽 이슈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양심수 문제라든지 민중생존권 문제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강했다. 그래서 광주를 투쟁의 1순위에 놓더라고 적어도 통일 문제가 그 다음 순서는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8년 5월 18일 고려대에서 개최한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 처벌 범국민대에 참여한 민청련 회원들
 1988년 5월 18일 고려대에서 개최한 '광주학살 진상규명 및 학살원흉 처벌 범국민대에 참여한 민청련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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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올림픽에 대한 민청련의 태도는 민중 생존권을 도외시하는 행사이므로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전면적 거부는 아니더라도 올림픽이 가진 반민중성을 폭로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학생들의 '공동올림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고, 따라서 민청련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 열기가 뜨겁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NL 학생운동에 대한 김성환 의장의 분석은 이러했다. 1987년 6월항쟁은 한국현대사에서 4.19에 뒤이은 전 민중적 변혁의 열기가 정점에 도달한 '혁명'에 버금가는 대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군사독재 정권은 사실상 흔들림이 없었다. '도대체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에 대한 자성이 운동세력 전반에서 일어났다. 그 결과 도출된 것이 미국이라는 존재였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규정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규정력에 착안하는 순간, 그 미국과 전면적으로 맞서고 있는 강력한 대항력으로서 북한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NL에서 '한국 사회의 변혁을 남한이 아니라 한반도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학생운동에서 막연하게 대안으로 보아온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적 대안체제인 소련 안에서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즉 1985년 권좌에 오른 고르바초프가 벌이고 있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소련이 진보적 대안 체제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 폭로되고 있었다.

이래저래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는 여러 계기들이 등장했고, 그것이 학생운동에서 NL이라는 노선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김성환 의장은 그러한 계기들을 인정하면서도 김영환이 <강철서신>에서 이미 역사적으로 사실 규명이 완료된 박헌영에 대해 그가 '미제의 간첩'이라며 북한 측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운동 행태에 대해 찬성할 수는 없었다.    

 팸플릿 형태로 학생들 사이에 전파된 [강철서신] 중 하나인 10장짜리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첫 페이지
 팸플릿 형태로 학생들 사이에 전파된 [강철서신] 중 하나인 10장짜리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첫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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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냐 통일이냐    

민청련 안에서 벌어진 논쟁의 양태는 6월에 간행된 <민주화의 길> 18호 논조에 반영됐다. 즉 투쟁 방침으로 광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 조국통일 촉진 투쟁, 민중생존권 지원투쟁 3가지를 제시했다. 운동 세력 전반을 아우르면서 단결을 지향하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민청련의 이러한 나열식 투쟁방침은 현존하는 여러 경향성들을 그저 백화점식으로 모아놓은 것일 뿐 선명한 지도지침으로서는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때 올림픽을 두고 벌이던 내부 논쟁 중 누군가가  '운동적 패배주의냐, 패배주의적 운동이냐'라고 자조적으로 내뱉기도 했다. '운동적 패배주의'에서 '운동'이란 스포츠를 가리킨다. 온 민중이 올림픽에 열광하고 있는 판에 우리도 잠시 쉬고 그저 즐기자는 비관론이었다. 또 '패배주의적 운동'에서 '운동'은 민청련 운동을 뜻했는데 대중들이 열렬하게 즐기는 마당에서 그것을 거부해야 하는 어려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러한 민청련 지도부의 내부 논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표현된 문구도 상당히 정치적으로 걸러진 표현을 사용했다. 즉 성명에서는 "우리는 애국 청년학생들의 열렬한 통일에의 의지로 추진되고 있는 남북학생 교류가 백번 정당함을 확인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한 6.10남북학생회담에 대해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길>에 실린 정세분석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5공비리 척결투쟁을 중심으로 두어 올림픽 이후에 대대적으로 전개해 나가야 하고... 올림픽이라는 계기에 의해 활성화된 통일운동의 수준을 선도적인 선전전을 통해 유지하고, 학생들이 주장했던 내용이 좀 서툰 점이 있다 해도 정당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구체적으로 통일운동이 기층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내용을 찾아 전 대중으로부터 적극적 호응을 받도록 한다... 올림픽 기간까지는 올림픽의 파급효과를 극소화할 수 있는 대처와 행사를 마련하되 올림픽이라는 축제를 감안하여 대중적인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왼쪽)[민주화의 길] 18호 목차. (오른쪽)[민중신문]에 실린 남북공동올림픽 관련 기사들
 (왼쪽)[민주화의 길] 18호 목차. (오른쪽)[민중신문]에 실린 남북공동올림픽 관련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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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내부에서 성장한 NL

그러나 민청련의 조직 구성원은 각 대학 출신자들이었고, 따라서 당시 각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민청련 활동가들에게도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여러 계기들'은 강렬했다. 다시 말해서, 민청련 내부에서도 NL 계열의 노선에 대한 동조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1988년 6월에 들어서자 NL 노선을 자기 노선으로 삼는 민청련 활동가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 또한 민청련이 발행하는 기관지를 통해 반영됐다. <민주화의 길>에는 "조국통일운동의 신기원을 열자"는 특집기사가 실렸다. <민중신문>에는 "공동올림픽은 민족대단결의 신기원" "공동올림픽으로 통일에의 한걸음을" 등 지도부의 방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논조의 기사들이 점차 지면을 차지해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 전개는 민청련의 노선과 민청련의 지도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내적 계기를 만들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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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투쟁에 충격을 던진 조성만 열사


1988년 4.26총선은 여소야대라는 획기적인 정치환경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지난 87년 대선에서 분열됐던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양대 야당정치지도자가 여전히 일정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상도와 전라도라는 확고한 지역적 기반을 토대로 한 지지였기 때문에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는 지역 분할 정치의 폐해를 낳는 것이기도 했다. 야당 정치는 그렇다고 치고, 민청련에게 4.26총선은 어떠한 의미를 남겼을까.

 13대총선 결과 제1야당이 확정되자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13대총선 결과 제1야당이 확정되자 평민당 당사에서 김대중이 축하인사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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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 없는 승리?

민청련은 4.26 총선에 대해 '반민정당 투쟁'을 방침으로 삼았다. 비록 민청련 출신 중 일부가 평민당에 입당함으로써 일견 대선 때의 '김대중 비지' 노선을 버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공식적인 투쟁방침은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일 없이 반민정당 투쟁에 한정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평민당 입당파, 한겨레민주당, 민중의당 등 제도권 정치에 진입을 시도한 운동세력 어느 쪽에 대해서도 지지 여부를 표명하지 않고 거리를 두는 방침이었다. 그런데 선거 결과는 민청련이 신경을 쓰이게 하는 것으로 나왔다.

우선 평민당에는 운동 세력 전반에서 가장 많이 입당했고 그만큼 많은 국회의원 당선자를 냈다. 민청련 출신은 아니지만 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정상용, [꼬방동네 사람들]의 저자로 빈민운동가인 이철용, 시집 [겨울공화국]을 낸 저항시인 양성우 등이 국회에 입성했다. 민청련 출신으로 민통련에서 활동하던 이해찬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반면 87년 대선에서 '후단'의 입장을 견지했던 유인태, 제정구, 원혜영 등이 주축이 돼 창당한 한겨레민주당은 겨우 1석을 얻어 간신히 연명에 성공하는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그 1석도 평민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게 된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이므로 사실상 전패와 다름없는 결과였다. 양김의 지역정치를 극복하고자 한 '후단'의 정치세력화는 실패했다.

87년 대선 때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돼서 창당한 '민중의 당'은 노동자들이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 16개 지역구에 출마자를 냈다. 민청련 출신 진영효는 동대문구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고 출마한 지역구의 평균득표율은 겨우 4%에 그쳤다. 전국 득표율 0.3%로 법률에 의해 곧바로 정당 등록이 취소됐다. 그들이 주장한 '민중의 정치 진출'은 싹도 틔지 못하고 좌절됐다.

결국 운동권의 제도정치권 진출 시도에서 평민당 입당파만 성공한 셈이 됐다. 그리고 이는 민청련이 대선에 이어 김대중 비지를 계속 이어가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다. 민청련 지도부는 이 점을 우려했다. 총선이라는 정치 일정에 상관없이 운동세력의 단결을 1차적 과제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청련은 총선의 파격적 결과가 발표된 뒤 곧바로 민청련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핵심 대목은 이러했다.

"우리는 이번 총선에서 평민당의 제1야당 부상을 지난 대통령 선거 시기의 '김대중 비판적지지'로 연결시켜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무리한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아울러 한겨레민주당, 민중의 당 등 이번 총선에서 의도한 바 성과를 충분히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동지들에게도 '조소의 눈빛'을 보내는 것과 같은 소아병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큰사진보기 13대 4.26 총선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힌 민청련 성명서
 13대 4.26 총선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힌 민청련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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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면에서 맞은 5월 투쟁

총선에 이어 해마다 맞는 5월 투쟁의 계절이 돌아왔다. 1988년 5월의 정세와 환경은 예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우선 87년 직선제 개헌과 그에 따른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뒤였으므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적어도 헌법적 권리로서 보장되는 여건이 마련됐다. 민청련 지도부는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으로 군부독재 세력은 여전히 권력을 잡게 됐지만, 민중의 힘으로 쟁취한 민주적 권리들을 그들이라고 함부로 훼손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88년 5월 투쟁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철저하게 통제돼 온 광주의 진실을 전 국민에게 알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것은 "광주 학살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구호로 정리했다.

민청련은 이미 4.26총선 때부터 광주의 진상을 담은 화보집을 만들어 유세장에서 청중들에게 배포했다. 광주 항쟁 당시의 끔찍한 사진들을 편집해줄 '간 큰' 출판사가 없어서 당시 신혼 초이던 김성환 의장의 하남시 단칸 신혼집에 십여 명의 회원들이 모여 밤을 새워 편집 작업을 했다.

5월 투쟁 기간 동안에는 인쇄된 화보집 이외에 외신이 촬영한 당시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해 상영하기로 했다. 민청련은 지역지부로 편재돼 있었기 때문에 각 지부에서 대학이나 교회에 장소를 섭외해 '광주 영화 상영회'를 열었다.

동민청의 경우 성수 공단 지역에서 이미 삼성제약 파업, 대한광학 노조탄압과 관련해 아남전자 항의 방문 등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고, 그 결과 지역에서 지역 단체로서 어느 정도 신뢰를 받고 있었다. 동민청은 그 힘을 토대로 성수 교회를 빌려 하루에 2차례 씩 1주일 동안 상영회를 열었다. 여기에 연인원 2500여 명이 관람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큰사진보기 1988년 4월, 동민청 회원들이 대한광학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투쟁에 나서고 있다
 1988년 4월, 동민청 회원들이 대한광학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투쟁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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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광주 영화 상영회'는 남민청과 북민청에서도 진행됐다. 남민청의 경우, 지역 노동운동과의 연계에 활발했던 동민청과는 약간 다르게 새로 가입하는 회원들에 대한 교육사업에 열중했다. 당시 운동권에서 활발했던 청년운동론 논의에 대해 가닥을 정리하고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이 더해졌다. 남민청의 교육사업이 커지자 지부 차원이 아닌 민청련 전체 차원의 교육기관이라는 성격을 띨 정도가 됐다.     

북민청은 애초 설립 의도대로 주로 사무직 직장 청년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나중에 그러한 성과를 토대로 북민청은 직장청년회로 전환된다.

민청련의 지역지부 건설 사업은 이미 3월 말에 큰 성과를 냈었다. 바로 안양민청련의 창립이었다. 안양 지역에 거주하는 회원들이 당시 투옥 중이던 대선배 김병곤의 지지와 지원 아래 서울 이외 지역으로는 최초의 지부를 결성한 것이다. 초대 위원장은 전에 여성부장을 지냈던 임태숙이 맡았다. 

안민청은 주로 공단 지역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한 지역이었는데, 안민청은 노동운동과 함께 정치투쟁을 펼칠 단위로서 주목을 받았다.

큰사진보기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실린 안양민청련 창립대회 공고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 실린 안양민청련 창립대회 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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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투쟁에 충격 던진 조성만 열사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성당 마당에서는 곧 5.18추모 마라톤대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순간, 문화관 옥상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서울대 학생으로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하던 조성만. 그는 옥상에서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남북 공동올림픽 개최해 평화통일 앞당기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제 몰아내고, 광주학살 진상을 밝혀라!"라고 외친 뒤 할복을 하고 투신, 사망했다.

조성만의 죽음은 모든 운동 진영에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87년 국민운동본부에 버금가는 대규모 장례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옛 서울고등학교 자리(현 경희궁)에서 양 김씨를 비롯한 많은 정치인들이 참여한 성대한 장례식이 열렸다. 망월동 묘지에 안장하기로 해서 운구가 광주에 도착하자 광주 시민 30만 명이 운집해 조성만의 뜻을 기렸다.

현재 서울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그의 추모비에는 앞머리에 "조국통일열사"라는 호칭이 새겨져 있다. 조성만의 죽음은 운동 세력에게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넘어 '통일운동'으로 나아갈 것을 주문한 것이었다. 이른바 '민족해방'을 뜻하는 NL이라는 운동이념이 한 학생의 죽음을 통해 전면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큰사진보기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할복하고 투신하는 순간의 조성만 모습과 그의 학생증 및 주민등록증
 명동성당 교육관 옥상에서 할복하고 투신하는 순간의 조성만 모습과 그의 학생증 및 주민등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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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학련과 자민투

NL은 88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학생운동 쪽에서 몇 년 전부터 그 싹이 나고 자라서 이미 잎이 무성한 나무가 돼 있었다.

아마도 NL운동의 싹이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는 1986년 4월 28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정권이 학생들에게 안보의식을 고취한다는 명목으로 시행하던 '전방입소훈련'을 거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교내에서의 농성이 불허되자 신림동 사거리에서 시위를 하기로 했던 그날, 신림 사거리의 한 건물 옥상에 김세진과 이재호가 나타났다.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던 둘은 체포를 위해 다가오는 경찰 앞에서 온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해 사망했다. 그들이 외친 구호는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와 함께 "반전반핵 양키 고 홈!"이었다.

사실 광주항쟁 이후 미국이라는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 돼 왔다. 전두환 일파가 공수부대를 광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작전권'을 가진 미군의 허락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산과 서울 등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미국의 책임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투쟁 당시 학생들은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죄하라"고 외쳤지만, 동시에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6.25전쟁 이후 남한 운동권에서 '반미'는 거의 금기어에 가까웠다.

그런데 김세진과 이재호는 '반미'를 넘어 "양키 고 홈"까지 외친 것이다. 이즈음 학생들 사이에 이러한 반미의 이념을 전파한 문건이 있었다. '강철서신'이라는 필명으로 나온 지하 팜플렛들이었다. 나중에 글쓴이로 밝혀진 김영환은 이들 팜플렛을 통해 운동의 방향을 '반독재 민주화투쟁'에서 '반미투쟁'으로 전환해야 하며 반미투쟁의 근거지로서 북한을 새롭게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말하자면 북한의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그것을 남한 운동의 지침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김영환은 이러한 구상 아래 서울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지하단체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하고, 그것의 외적인 투쟁기구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약칭 자민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NL 계열의 지하단체와 투쟁 기구는 연세대와 고려대를 거쳐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됐다.

조성만의 투신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민청련 지도부도 이러한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민청련의 NL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나.

 구국학생연맹의 지도 아래 결성된 ‘자민투’의 첫 선언문과 김영환의 강철서신을 나중에 엮어낸 책의 표지
 구국학생연맹의 지도 아래 결성된 ‘자민투’의 첫 선언문과 김영환의 강철서신을 나중에 엮어낸 책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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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NL을 어떻게 보았나

김성환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운동이 북한과 연계될 경우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위험하다'는 것은 국가보안법에 엮이게 되고, 운동권이 북한에 연계됐다는 정권의 대대적인 선전으로 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유리되는 사태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동권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폭압 정권 아래서 늘 탄압을 받아왔으므로 탄압 자체를 빌미로 어떤 논의에 대해 기피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문제는 NL의 논리 그 자체의 타당성이었다.

민청련 지도부는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바라보는 NL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의 운동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하는 데 대해 반대했다. 

당시 민청련은 한국 사회는 비록 어느 정도 독자적인 국가지본주의 체제를 이루고 있지만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않은 미국의 신식민지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한국 민중이 미국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항의하고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로서 인정했다.

그런데 이때 NL 학생운동이 당면한 88올림픽에 대해 남북공동 개최를 주장하고 나왔다. 조성만이 죽음으로 외친 '남북공동올림픽'. 이에 대해 민청련은 태도를 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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