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 핵심 지도부 김한
 스탈린 대숙청 시절 ‘일본 밀정’ 혐의 들씌워 처형



1920년 수감 중인 김한의 앞모습(왼쪽)과 옆모습. 임경석 제공


김한(金翰)이 출옥했다.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에서 형기를 모두 마치고 옥문을 나섰다. 1927년 4월24일이었다.① 41살, 장년기에 접어드는 연령이었다. 이 형무소는 도쿄 서북쪽 교외에 있는 신설 형무소였다. 주로 사상범을 가두는 것으로 유명했다. 체포된 때가 1923년 1월28일이었고 이후 줄곧 갇혀 있었으므로 재감 기간은 꼬박 4년3개월이었다.


4년3개월 만에 가족과 해후


일본 도쿄 도요타마형무소 철거 전 모습, 도요타마형무소 정문. 임경석 제공


철창에서 되돌아온 김한은 동료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사회주의 비밀결사 운동을 개시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엄혹한 경찰의 취조 속에서도 조직의 비밀을 단 하나도 누설하지 않은 투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일명 중립당)의 창립 멤버이자 지도부 성원이었다. 하지만 경찰 기록과 공판 문서에는 그에 관한 단 하나의 정보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들씌워진 혐의를 폭탄 문제 하나로 귀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국외 반일 단체 의열단과 손잡고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 했으며, 폭탄을 보관하고 있다가 김상옥이나 박열처럼 필요한 혁명가에게 분배하는 역할을 했다는 게 개요였다. 그 덕분에 중립당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으며, 이후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중심 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한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노모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서울 마포 공덕리의 조그만 집이었다. 가난한 살림이었다. 아내가 10리 떨어진 용산의 대륙고무공장에 일을 나가서 한 달에 10여원 받아오는 수입으로 버티는 살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던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뒷날 노년기에 접어든 둘째딸 김례정은 12살 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이분이 정말 내 아버지가 맞나 하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두 팔 벌린 아버지 품안에 안겼다.”② 다른 집과 달리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야속한 아버지, 한편으로는 천하사를 도모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김한의 운신은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 대상이 됐다. 뭔가 의심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하면 으레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연례행사라 해도 좋을 만치 시달림을 받았다. 예컨대 출감한 그해 가을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1927년 10월21일 용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게 가택수색을 당했다. 딱히 구체적인 혐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덕리 경찰 주재소 인근에서 폭탄과 유사한 폭발 현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두 차례 온 집 안을 샅샅이 뒤졌고, 여러 문서와 도서를 압수해갔다.


이듬해 가을에는 좀더 심각했다. 경기도경찰부 소속 형사대가 출동했다. 1928년 10월19일 새벽에 그는 긴급체포됐다. 잠자던 중이었다. 여러 대의 자동차에 나눠 타고서 출동한 경관들이 그를 붙잡아갔다. 비밀결사 조직 혐의였다. 서울, 경기, 황해, 충북 등에서 십수 명의 용의자들이 체포됐다. 경찰은 기대감을 표명했다. 뭔가 거창한 불온단체를 적발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검거의 발단은 일본 경찰이 관리하는 ‘밀정배들의 밀고’였다고 한다. 그러나 취조 결과 아무런 증거도 없었고, 뭔가를 음모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검거 개시 4~5일 만에 하나둘 혐의자들이 풀려났다. 당시 언론 보도는 “그렇게 떠들던 사건이건만 결국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격으로 끝을” 맺었다고 논평했다.③


출감 이듬해 비밀결사 설립



김한이 알선한 국제선 간부의 은신처 서울 마포구 도화동 85번지 현 위치. 다음 지도

김한이 비밀결사 운동에 복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경찰의 날카로운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김한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동료의 안위마저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감옥에 있을 동안 조선 사회주의 운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가 설립했던 비밀결사는 이미 발전적으로 해체된 상태였다. 그새 전국적 통일 전위정당인 조선공산당이 창당됐고, 그 뒤로도 사회주의 운동의 내부 상황은 변화를 거듭했다. 초창기의 이론과 정책, 운동 방식으로는 더 이상 조선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김한은 운동에 기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출감하자마자 비밀결사 운동 복귀를 조심스레 모색했다. 그리하여 출감 이듬해인 1928년 8월 마침내 ‘고려공산청년회’ 위상을 갖는 비밀결사를 설립하게 되었다.④ 이 단체는 중립당 계열의 과거 동료들을 재결속한 것이었다. 수감 생활을 마치고 되돌아온 옛 동료들과 새로이 운동에 참여한 신진 인사들이 합류했다. 이 단체는 다른 계열의 사회주의자들에게 ‘화요파’ 공산그룹의 부활로 간주됐다.

시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놀랍다. 조직 2개월 만에 경기도경이 이끄는 일제 검거에 휘말렸으나,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점이 말이다. 이 단체의 가담자들이 일본 경찰과 맞대응에 얼마나 숙련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듬해인 1929년이었다. 이 비밀결사는 경찰의 억압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판단에 의해 스스로 해산했다. 그리고 코민테른이 직접 지도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합류했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와 노선을 실지에서 수행”하는 사회주의자들과 결합했던 것이다. ‘국제선’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었다.⑤ 이들은 각파 공산그룹이 운동 발전에 유해한 역할을 끼쳤다고 보았다. 기존 파벌 관계를 단절하고 국제당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노선을 천명했다.

국제선의 국내사업 지도부는 3인이었다. 김단야, 김정하, 조두원이 그들이다. 모스크바의 국제당 집행위원회가 임명한 사람들이었다. 비밀리에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는 환경 속에서 곧잘 채택되던 트로이카(삼두마차) 조직 형태를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그들은 1929년 8~9월 국내에 잠입했다. 이들에 더하여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모스크바 유학생들도 잇따라 입국했다. 권오직(權五稷)을 비롯한 공산대학 졸업생 9명이 국제선의 일원으로서 비밀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입국했다.


탄로난 비밀과 잇따른 체포


국제선 그룹은 유능했다. 본격적으로 활동한 지 2개월 만에 당과 공청 조직의 근간을 세웠다. 그해 11월 5인으로 구성된 ‘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10월에는 3인 지도부로 이뤄진 공청 트로이카를 결성했다. 하부조직도 바로바로 구축됐다. 서울을 비롯해 평양, 원산, 부산, 목포, 함흥, 마산, 청진, 웅기, 신의주 등 도시 지역에 지방 당기관을 설치했다.

김한은 이들의 리더십을 인정했다. 그들은 코민테른의 지원과 협력 속에서 활동하는 만큼 자금과 정보가 풍부했고, 비전이 뚜렷했다. 비록 10여 년 연하에 해당하는 후배들이지만 성심껏 협력했다. 그중 하나는 신뢰할 만한 은신처를 제공한 것이었다. 서울에 밀입국한 국제선 간부들에게는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숙소를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한은 자기 가족이 살고 있는 마포에서 숙소를 알아봤다. 적당한 곳이 나왔다. 도화동 85번지, 늙은 부부 둘이 사는 집이었다. 남편은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세상일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안주인이 안팎살림을 모두 감당하고 있었다. 그곳에 국제선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 김단야가 입주했다. 그는 안주인의 시골 조카로 가장하고, 병을 고치려 서울에 왔다고 위장했다. 늘 한약을 달이며 약 냄새를 풍겼으므로, 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런 줄로만 알았다.⑥

김한은 직접 국제선 그룹에 가담했다. 그는 ‘모플’ 사업을 전담했다. 모플(МОПР)이란 혁명가후원회를 뜻하는 러시아 외래어였다. 옥중에 수감된 혁명가와 그 가족을 돌보는 구호 사업이었다. 당과 공청의 비밀 조직 사업을 20~30대 젊은 세대가 주로 맡고 있는 현실에 비춰보면 적절한 역할 분담이었다. 김한은 옥중 생활을 오래 했기에 그 방면의 실정을 꿰뚫고 있었고, 변호사들과 지면도 넓었다. 적임자였다. 그는 국제선 그룹에서 상당한 금액을 받아, 그 돈을 수감자 차입비, 출옥자 치료비, 피검자 가족 구호비 등으로 썼다. 약 6개월간 그가 집행한 돈은 970엔이었다. 초등학교 초임 교원의 월급이 50엔이고, 신문사 논설부 기자의 월급이 90엔 하던 때였다. 오늘날 화폐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대략 3천만원쯤 되는 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듬해 모플 사업비로 8400엔이 필요하다고 국제당 앞으로 예산을 신청했다.

이듬해 2월경이었다. 경찰이 냄새를 맡았다. 급속히 조직을 확대해가던 국제선 그룹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체포가 시작됐다. 김한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조직의 비밀이 탄로났고, 관련자들이 연달아 체포됐다. 온갖 노력을 다해 몸을 숨기고 있지만, 언제까지 계속 숨을 수 있을지 낙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서울 바닥에서는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고등경찰의 삼엄한 경계망과 곳곳에 깔린 밀정들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사형으로 이어진 밀정 혐의



김한을 밀정이라고 지목한 이성태 의견서의 첫 페이지(위)와 해당 부분. 임경석 제공

자신이 제공했던 도화동 은신처가 수사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 경찰이 최상급 간부라고 지목한 김단야가 그곳을 근거지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이미 저들에게 탐지됐다. 그뿐인가. 공산당과 공청 지도부에 다 소속된, 김단야 탈출 이후 가장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권오직이 바로 그 집에서 체포됐다. 공청 3인 지도부의 한 사람인 김응기도 떡장수로 분장해 그 집을 방문했다가 잠복 중이던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도화동 은신처를 둘러싸고 중요 인물들이 거푸 검거된 만큼, 경찰은 그 집을 아지트로 알선한 김한을 기필코 잡아들여야 할 인물로 꼽았다.

김한은 국외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3월16일 김단야의 아내이자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여성 사회주의자 고명자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사실을 인지한 그는 곧바로 길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목적지는 소련이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30년 4월 초순경이었다.

그는 따뜻한 대우를 받았다. 핍박을 피해 망명한 혁명가답게 합당한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 근무했다. 1930~31년 조선의 적색노동조합운동을 후원하고 독려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망명 2년이 지난 1932년, 김한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 망명지 체류가 장기화할 것을 예상하고 좀더 장기적이고 유의미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간부 재교육 기관에 입학한다든가, 국제공산당 본부와 직접 연결 가능성을 모색하는 등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현실은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렀다. 모스크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벅찬 미래가 아니라 참담한 현실이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국제선 검거 사건이 그처럼 대규모로 터진 이유가 김한에게 있지 않으냐는 혐의였다. 급기야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경찰에게 체포됐다. 이 기관은 1934년부터 1941년까지 스탈린 대숙청을 앞장서서 수행하던 비밀경찰이었다.

김한이 일본 밀정 혐의를 받은 데에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내부에 존재하던 적대감이 일정한 몫을 했다. 좀더 뒷시기에 작성된 기록이지만, 언론계 출신의 저명한 사회주의자 이성태(李星泰)는 김한을 통렬히 비난하는 의견서를 썼다. 그것은 국제당 집행위원회 앞으로 제출됐다. 그에 따르면 김한은 오래전부터 밀정으로 알려져왔다고 한다.⑦ 이성태가 비단 김한만 겨냥했던 것은 아니다. 김단야, 박헌영, 김찬, 조봉암, 고명자 등도 일본의 밀정이라고 고발했다. 그는 자신이 속했던 공산당 분파와 다른 계열에 속했던 사람들을 모두 밀정이라고 지목한 셈이다. 객관적 증거를 제시했던 것도 아니다. 스탈린 대숙청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말살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밀정이라고 고발하는 일은 일종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왜 이성태가 한때 이념적 동지였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증오의 화신이 됐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김한은 밀정 혐의를 끝내 벗지 못했다.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1932~34년 어느 때에 그는 내무인민위원부 관료들의 손에 사형당했다.


격문에서 촉발된 ‘국제선’ 검거 사건


국제선 그룹의 1930년 2~4월 검거는 어떻게 터졌는가. 무엇이 단서가 되어서 대규모 검거가 일어났는가? 우리는 이 의문에 답할 수 있다. 경찰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거 사건을 마무리하던 1930년 5월 시점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작성한 긴 분량의 사건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수사의 단서는 1930년 2월22일 이른 새벽에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배포된 격문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이 계기가 되어 전국으로 학생운동이 확산되던 때였다. 학생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이었지만, 이 격문은 지질과 인쇄 상태가 통례적인 것과는 달랐다. 대다수 격문은 등사판으로 제작한 값싸고 볼품없는 외양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 격문은 활자로 인쇄된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경기도경찰부는 이 사안을 중히 여겼다. 서울 시내 각 경찰서 고등계 주임들을 소집해 연석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대규모 불온단체가 잠재했음이 틀림없다는 판단 아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참고 문헌

① ‘金翰씨 출옥’, , <동아일보> 1927.4.24

②우원식, <어머니의 강>, 아침이슬, 2011, 97쪽

③‘경찰부검거사건 무증거로 속속 석방’, <조선일보> 1928.10.24

④朝鮮總督府 警務局長, ‘朝保秘第1025?,火曜派朝鮮共産黨再組織事件檢擧ニ關スル件’, 1930.7.25, <現代史資料> 29, 1972, 238-239쪽

⑤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 186쪽

⑥김단야, ‘1929년에 조선 가서 일하든 개요’ 1937.2.23, 4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⑦Бывш.члена КП Кореи Ким-Чун-Сен /Лп-Сен-Тай/, Заявление: В Секретную Часть ИККИ (의견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비서부 앞), 1937.9.28,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439 л.9-12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5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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