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지도부 선출과 13대 총선


87년 대통령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지도부가 사퇴하자 민청련은 곧바로 차기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총회 준비에 들어갔다. 민청련은 총회를 앞두고는 각 조직 단위에서 선출된 위원들로 총회준비위를 구성해 그동안의 활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지도부 선출안을 마련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에도 그런 관례에 따라 총준위가 구성되고 활동에 들어갔다.

 민청련 제10차 총회에서 선출된 지도부. 1.의장 김성환 2.부의장 김재승 3.부의장 남승호 4.사무국장 김두일
 민청련 제10차 총회에서 선출된 지도부. 1.의장 김성환 2.부의장 김재승 3.부의장 남승호 4.사무국장 김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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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갈 길은 지역지부 건설"

총준위에는 우선 지난 9차총회에서 신설된 지역조직인 북민청, 동민청, 남민청의 위원장인 김재승, 김성환, 남근우가 참여하고 조직에서 열성 활동가들을 추천하여 구성됐다. 따라서 총준위의 논의는 주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지역조직을 어떻게 하면 성장시켜 제자리를 잡게 할 것인가에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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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지난 대선 대의 방침인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아래 '김대중 비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었다. 이는 이미 당시 지도부가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사퇴의 변'을 통해 과오를 인정하고 자숙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사실 거기에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대선 당시 민청련이 주장한 '김대중 비지'는 전술적 방침이었다. 전략적 지향은 민중운동의 성장과 그를 토대로 한 군사독재체제의 완전한 타도와 변혁에 있었다. 따라서 전략적 지향을 무시한 채 전술 방침에 대해 과도하게 책임론을 펴는 데 대한 거부감이 회원들 사이에 있었다.

아마도 더욱 중요한 요인은 당시 운동 세력의 판도였을 것이다. 김대중 비지, 후보 단일화, 독자후보의 세 갈래로 분열한 운동권의 판도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김대중 비지 측의 반성은 그것이 운동세력을 통일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분열시켰다는 것이 요지였다. 실제로 10차 총회에서 채택된 '메시지'에는 이런 내용이 그대로 담겼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후단이나 독후에도 분열의 책임이 있다'는 의식이 짙게 갈려 있었다. 이러한 상호에 대한 불신과 심지어 증오의 감정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상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준위는 이 문제를 붙잡고 논의를 계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총준위 논의의 실질적 핵심은 차기 지도부 구성이었다. 이번 총회가 지도부의 인책 사퇴로 인해 열리는 만큼 차기지도부를 선정하는 조건은 지난 대선에서의 '김대중에 대한 비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인물이어야 했다. 그 중 가장 적합한 인물은 김병곤이었으나 그는 구로구청 투표함 사건으로 투옥돼 있었으므로 제외됐다.   

다른 한편으로 9차 총회에서 좆기 방침으로 지역지부의 건설을 결정했기 때문에 그 역할에 합당한 이들이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지역지부 사업은 70년대 후반 이후 세대들이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자연스럽게 세대 교체의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기도 했다.

 민청련 10차총회 결의문은 ‘청년대중조직사업’에 매진할 것을 천명했다.
 민청련 10차총회 결의문은 ‘청년대중조직사업’에 매진할 것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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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부의 세대교체

총준위의 차기지도부 논의에서는 우선 조직구성상으로 변화를 도모했다. 이전까지 지도부 체계는 의장단과 중앙집행위원회로 나뉘어 있었다. 이는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즉 의장단은 외부에 공개되어 민청련을 대표하는 활동을 하고, 중앙집행위원회는 내부 조직체계를 대표하는 대외 비공개 성원들이 의장단을 보좌하며 조직을 이끈다. 만약 전면적인 탄압이 와서 의장단이 구속될 경우 중앙집행위가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6월항쟁과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거치면서 적어도 절차적 민주주의 측면에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사회가 됐고 따라서 운동조직도 거기에 맞추어 변화를 주어야 했다.

그래서 의장단과 중앙집행위를 통합해 '중앙위원회'로 하기로 했다. 그 구성은 의장, 부의장, 각 지역위원장, 사무국장, 정책실장으로 한다. 총준위의 가장 중요한 일은 물론 중앙위 의장을 선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커다란 고민이나 논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곧바로 김성환 동민청위원장으로 결정됐다.

김성환은 78학번으로 1983년 민청련 창립 당시 가장 연배가 어린 막내 세대로서 세대교체를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또한 대선 시기에 비록 조직의 '비지'결정에 승복했지만, '열렬한 비지'의 자세를 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9차 총회에서 지역지부 건설 사업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스스로 동민청을 조직해내는 일을 수행해냈다. 이는 대선 이후 민청련의 조직 방향 측면에서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부의장은 북민청위원장을 맡았던 김재승과 남민청 활동가 남승호가 선출됐다. 님승호는 '비지'에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로서 그를 의장단에 선출한 것은 대선 당시의 분열을 봉합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사무국장에는 김두일이 선임됐다.

3월 17일 총회를 열어 의장단을 선출하고 그 자리에서 장문의  '제10차 총회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지난 대선 시기의 '비지'에 대해 재차 반성하고 앞로는 그런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단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별도로 발표한 '결의문'은 제목이 "청년운동의 신시대를 창출하자"는 것으로 지역지부를 민청련의 주력 사업으로 삼아 각계각층의 청년대중을 회원으로 조직하자고 호소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총회가 끝난 뒤 곧바로 안양민청련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분열된 채로 맞은 13대 총선

 민청련 출신으로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평민당에 입당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 (왼쪽부터)
 민청련 출신으로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평민당에 입당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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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이후 민청련의 활동은 4개의 지역지부에서 자기 지역에서 일어나는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 회원들을 조직해내는 데 맞춰졌다. 그러나 민청련 앞에는 지역 차원이 아닌 전국적 규모의 정치 일정이 다가왔다. 4월 26일 치러질 제13대 총선이었다.
이미 4년 전 12대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구름떼처럼 유세장으로 몰려들고 그것이 신민당 압승의 돌풍을 일으킨 것을 민청련 회원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바였다. 그리고 87년 대선에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됐으므로 시민들의 집권 민정당에 대한 거부와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의장단의 주요 임무는 다가올 총선에 대한 투쟁방침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선 투쟁방침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집권 민정당에 대항할 야당이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김종필이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의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것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라는 뚜렷한 지역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3당이었다.

운동 세력의 판도 또한 비지, 후단, 독후의 3색 그대로였다. 말로는 각자 반성을 표명했고, 단결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 역시 모두 품고 있었다. 결국 3 세력은 각자의 방식으로 총선에 임하게 된다.

제일 먼저 '비지' 세력이 움직였다. 2월 초, 대선 때 '비지'에 속했던 인물들인 박영숙, 문동환, 이길재, 이해찬 등이 주축이 돼 평민당 입당을 선언했다. 민청련 활동가 출신으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가 함께 했다. 그들의 입장은 대선 때 '비지'를 내세웠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이 김영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므로 운동 세력이 정치권에 진입하려면 당연히 김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청련 출신으로 당시 민통련 간부로 활동하던 이해찬은 오히려 지역성을 강조했다. 광주 항쟁에 대한 상처, 그리고 피해의식이 깊은 호남인들의 정치적 한을 제도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여 정치력으로 승화시킬 세력은 김대중의 평민당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김대중의 처지에서도 대선 패배의 비난과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터라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운동 세력으로부터의 '젊은 피'를 수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재야 '비지' 세력과 이익이 맞아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독후 세력은 3월 초에 '민중의 당'을 창당했다. 대선 당시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본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됐는데, 총재엔 서울대 출신의 젊은 노동운동가 정태윤이 선출됐다. 민청련 활동가로는 진영효가 여기에 참여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므로 더는 보수야당에게 의탁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민중 스스로 정치 세력화하여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후단'의 입장을 취했던 일군의 인사들 즉 재야정치인 예춘호 및 학생운동 출신 유인태, 제정구, 원혜영 등이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변화된 정세에서 운동권이 제도권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는 '민중의 당'과 시각이 같았지만, '민중의 직접 진출'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았다. 그들이 중요시한 것은 지역 색으로 갈라진 3개 지역당 구조의 폐해였다. 따라서 지역 색을 거부하는 참신한 운동권이 정계에 들어가 정치판을 쇄신해야 한다고 자임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한 민청련 출신 평민당 소속 이해찬과 민중의 당 소속 진영효
 1988년 13대 총선에 출마한 민청련 출신 평민당 소속 이해찬과 민중의 당 소속 진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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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승리! 민청련의 승리?

민청련 의장단이 보기에 13대 총선은 자칫 대선의 복사판이 될 판이었다. 여기서 또 다시 '비지' 즉, '평민당지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난 대선에 대한 반성을 뒤집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민청련은 13대 총선에서 '반민정당 투쟁'에 집중하여 유권자들이 민정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다. 어느 후보에게 투표할 것인지는 유권자의 몫으로 돌렸다. 따라서 구호는 "외세와 군사독재의 하수인 민정당을 거부하고 애국민주인사를 국회로!"로 정했다. 민청련은 이 방침을 토대로 여러 단체들을 묶어서 '반민정당총선투쟁민주연합'을 결성해 공동투쟁에 나섰다.

민청련의 각 지역지부 회원들은 자기 지역구 유세장을 휘젓고 다니며 '총선투쟁'을 펼쳤다. 동민청의 경우를 보면, 4월 16일 장안국민학교에서 열린 성동을구 유세장에 수십 명의 회원이"성동주민 단결하여 민정당 독재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유세장이 쩌렁저렁하게 울리도록 구호를 외쳤다. 민정당 후보 유세 순서가 되면 일제히 뒤로 돌아 앉아 "부정부패 민정당 성동에서 몰아내자" "광주학살 구로만행 군부독재 타도하자" 구호를 외쳤다. 이에 대해 상당수 유권자들이 동조하여 유세장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결국 민정당이 동원한 용역강패들과 몸싸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이러한 투쟁은 총선 기간 내내 각 지역지부에서 벌어졌다.

 1988년 4월 14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민정당총선투쟁민주연합 제1차 국민대회에 참석한 민청련 집행부. 둘째줄 왼쪽부터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민청련 의장 김성환, 민청련 전부의장 권형택
 1988년 4월 14일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민정당총선투쟁민주연합 제1차 국민대회에 참석한 민청련 집행부. 둘째줄 왼쪽부터 동민청 위원장 김병태, 민청련 의장 김성환, 민청련 전부의장 권형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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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치러진 13대 총선은 놀라운 결과를 냈다. 민정당은 과반인 150석에 훨씬 못 미치는 125석을 얻어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한 것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 헌정사상 최초의 대이변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된 것이었다. 민청련 출신의 이해찬, 광주 항쟁의 상징 인물 정상용, '꼬방동네 사람들'의 작가로 빈민운동가인 이철용, 저항시'겨울공화국'의 시인 양성우 등이 평민당의 깃발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렇다면 13대 총선은 누구의 승리인가. 김대중의 승리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온 몸을 던져 반민정당 투쟁을 전개했던 민청련의 승리이기도 한가? 민청련은 흔쾌하게 '그렇다'고 자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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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병곤!


1987년 12월 16일, 6월항쟁의 뜨거운 열기가 채 식기 전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선거는 투표 유권자의 36.6%를 얻은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이로써 1월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시작해 6월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에 이르기까지 달아올랐던 운동의 열기는 된서리를 맞았다. 국민 대다수가 원했던 민주화와 민주정부 수립은 좌절됐다. 

마지막 불씨, 구로구청 투쟁과 명동성당 농성

 1987년 구로구청 투쟁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1987년 구로구청 투쟁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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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불씨를 살려보고자 했던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항의 농성도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십 명의 부상자와 구속자를 내고 종결됐다. 진압 과정에서 서울대 학생 양원태가 구청 옥상에서 추락해 척추 골절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큰 부상을 입기도 했다. 민청련에서는 김병곤이 주범으로 구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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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거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17일부터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한결같이 "부정선거 무효!"를 외쳤다.

국본 공정선거감시단은 전국의 개표소에 파견된 감시단으로부터 부정투개표 사례를 집계해 발표했고, 이는 곧바로 유인물로 만들어져 시위대가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선거운동 때보다는 못했지만 전국 대도시에서의 시위 열기는 상당히 뜨거웠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러 단체들이 자연스럽게 공동시위를 기획했다. 민청련도 거기에 참여했다. 그들은 12월 18일 낮 12시 시청 앞 광장에서 "부정선거 규탄 및 군부독재 퇴진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일 시청 앞은 엄청난 수의 전투경찰과 백골단에 의해 점령당했고, 오가는 시민들의 동정은 모호했다. 선거 결과에 대해 잔뜩 불만인 듯한 표정도 있었고, 체념한 듯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대회는 열리지 못했고, 민청련 회원들은 누군가 나서주길 기대하며 시청 주위를 배회했다.

마침내 오후 2시경,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청 앞 지하도 입구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열은 2,300명 정도로 6월항쟁 때 비하면 아주 적은 규모였다. 경찰의 최루탄 발사와 백골단의 습격으로 시위대는 금방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흩어진 시위대는 청계천과 명동 한국은행 앞으로 이동하면서 도로를 점거해 반짝 시위를 하고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계속 시위를 이어나갔다. 어느덧 시위대에 동참하는 시민들도 늘어갔다.

시위대 사이에서는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저녁에 명동성당으로 집결하자!"는 구호가 번져나갔다. 6월항쟁 때 명동성당 농성이 전국적 시위를 이끌어나가는 구심점이 됐듯이 이번에도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투쟁을 이어나가자는 것이었다.

과연 해가 질 무렵인 저녁 7시, 명동성당 앞에는 3천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그들은 즉석에서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고 '선거무효 국민총궐기 명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지도부는 중앙대 총학생회 간부들을 비롯한 대학생들과 각 시민단체 대표들이 맡았다. 민청련에서는 동민청 위원장 김성환이 민청련을 대표해 참여했다.  

큰사진보기 1987년 12월 1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부정선거 무효화 및 군부독재퇴진 결의대회’
 1987년 12월 1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부정선거 무효화 및 군부독재퇴진 결의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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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단식과 민통련 의장단 사퇴

한편 대선 패배의 충격과 상처가 누구보다도 컸던 측은 재야 민주운동 진영이었다. 재야를 대표하는 문익환 목사는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2월 23일, 그는 민통련 의장으로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단식 자체가 문익환에게는 하나의  속죄의식이기도 했다.

문 목사는 단식을 시작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노태우의 부정선거를 외치며 항의의 뜻을 담았다. 또 야권이 단결하지 못해 패배한 것에 대한 통절한 자기비판을 토로했다. 처절했다.

"우리는 후보단일화를 관철하지 못했습니다. 민통련 의장으로서 또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임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전대미문의 부정선거가 노태우씨에게 안겨준 승리가 영광이 아니라 치욕이지만 그것으로 저의 죄책감이 조금도 경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군정의 연장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앞으로 더 바쳐져야 할 것이냐는 것을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당장에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죽어도 시원치 않을 몸이지만 '죽는 게 아닙니다. 살아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외쳐오던 터라 그럴 수도 없어 저는 오늘부로 무기한 단식하며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으로 속죄되는 것이 아님을 저는 잘 압니다. 오로지 몸과 마음을 묶어 민족의 제단에 바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속죄의 단식으로 패배 의식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통련은 새해 1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의장단과 중앙집행위원이 선거투쟁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했다.

 1987년 12월,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면서 성명서 발표하는 문익환 민통련 의장
 1987년 12월,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면서 성명서 발표하는 문익환 민통련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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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반성과 의장단 사퇴

명동성당투쟁은 참여한 자발적 시민들의 열의에 의해 계속 이어져 나갔다. 규찰대를 세워 입구를 지키며 농성을 이어나갔다. 민청련 대표 김성환은 규찰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프락치로 오인해 과격하게 대하는 것을 말리기도 했다. 그만큼 시민 대중과는 일정한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농성 중 1백여 명의 고등학생들이 찾아와 자신들이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이라는 단체라며 집회를 갖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그들이 외친 구호 중엔 "노태우를 당선시킨 기성세대 각성하라!"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광범위한 시민 대중으로부터의 성원과 지지는 오지 않았다. 결국 시위대 지도부는 해산할 것을 의논했고, 김성환도 거기에 동의했다. 12월 24일 시위대는 마지막 촛불집회를 갖고 쓸쓸하게 해산했다. 

새해가 밝자 민청련 의장단은 침통한 분위기에서 회의를 열었다.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사건으로 김병곤 부의장은 감옥으로 갔고, 김희택 의장을 비롯해 남은 4명의 민청련 의장단은 선거패배의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사퇴의 변을 민청련 기관지 <민중신문>을 통해 공표하기로 했다. 초안 작성은 권형택 부의장이 맡았다. 작성된 초안을 장준영 부의장이 보완한 뒤 의장단 회의에서 확정했다. 이 글은 "떨쳐 일어나 투쟁의 전선으로 –민청련 의장단 사퇴에 붙여"라는 제목으로 2월 4일자 민중신문에 실렸다.

"이번 대통령선거투쟁이 이렇게 저들의 승리와 민족민주운동의 실패로 귀결된 데에는 바로 운동 내부의 격심한 분열과 혼란이 한 원인이었음을 뼈아프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민청련은 대통령선거라는 특수한 시기에 있어서의 투쟁방침으로 전두환.노태우정권 타도투쟁을 중심축으로 하여 반군사독재 민주연합전선을 강화하는 한편, … 후보문제에 관해서는 통일정책, 광주항쟁해결문제, 민중생존권 문제 등에 상대적으로 진보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판단한 김대중 씨를 비판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통해 분열된 민주세력을 단결시키려 내고자 했던 노력이 운동의 단합된 집중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의 한 요인으로 결과 지워진 점에 대해서 그 책임의 일단을 엄중히 통감합니다."

큰사진보기 1987년 12월, 침통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민청련 송년회. 장소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 부근 한 음식점이며 김희택 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1987년 12월, 침통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민청련 송년회. 장소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 부근 한 음식점이며 김희택 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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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위해

의장단이 사퇴함으로서 시급하게 새 총회를 열어 새 지도부를 선출해야 했다. 민청련은 이미 앞선 총회에서 '청대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표방하며 지역지부를 건설하고 있었다. 새 지도부는 그곳 지역지부에서의 활동을 통해 지도력을 검증 받은, 한층 젊어진 새 세대에게 맡겨질 것이었다.

한편 대선 막바지에 이르면서 선거 패를 감지한 소수의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김대중에 대한 '비지'의 '업보'가 없는 새 연합체가 필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들은 그것을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의 위한 논의'라고 불렀다.

초기의 참석자는 민통련의 김병곤, 민청련의 장준영, 노동운동 쪽의 황인범과 인천지역민주노동자동맹 및 경수지역노동자연합 대표, 농민 쪽의 카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대표 등이었다. 김병곤이 구속되자 역시 민청련에서 민통련에 파견되었던 이명식과 김두일이 참여해 논의를 이끌어나갔다.

대선은 패배했지만, 운동 진영은 세대교체를 통한 새 출발을 모색했다. 민청련 의장단의 성명의 마지막 구절 "커다란 이 아픔을 딛고 머지않아 새롭게 정비된 모습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는 이런 바람을 표현한 것이었다.     

큰사진보기  1987년 12월,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체를 논의하기 위해, 구속된 김병곤 대신 민통련·민청련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이명식(왼쪽)과 김두일(오른쪽).
 1987년 12월, 새로운 민중운동연합체를 논의하기 위해, 구속된 김병곤 대신 민통련·민청련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이명식(왼쪽)과 김두일(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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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김병곤!


1987년 12월 대선 전야, 양 김의 단일화가 무산돼 가는 순간, 재야 상층부에서도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재야의 양 거목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익환 목사와 박형규 목사도 이대로 가면 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 분이 의논한 것은 아니지만, 이심전심으로 자신과 가까운 후보를 사퇴시켜서라도 단일화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재야의 막판 단일화 노력

 1987년 11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후보단일화 쟁취대회’.
 1987년 11월 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군부독재 종식을 위한 후보단일화 쟁취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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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과 가까운 박형규 목사가 먼저 나섰다. 박 목사는 어느 날 재야 정치인 한 사람으로부터 김대중이 양보하지 않을 것이 확실해졌다는 얘기를 전달받았다. 그래서 박 목사는 곧 김영삼을 만나 '두 사람이 다 나오면 반드시 패배한다. 민주화를 염원해온 국민을 생각해서 나이가 젊은 김 총재가 양보하라. 다음번엔 김 총재에게 기회가 올 것이다.'라고 설득하며 사퇴를 권고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김대중으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면서 시간을 좀 주면 주변 사람들과 상의해 본 다음 결정하겠다고 하면서 즉답을 피했다.

문익환 목사도 대통령 선거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어느 날 절친한 후배이면서 김대중의 열렬한 지지자인 고영근 목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형님, 김대중 씨를 사퇴시킵시다. 이 대로 가면 노태우가 당선되겠습니다."라며 자신이 들은 유력한 정보를 전했다.
문익환 목사는 그날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김대중을 열렬히 지지하는 호남 민중들의 모습이 떠올라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선거 막판에 김대중에게 의사를 전달할 기회가 한번 왔다. 선거 이틀 전에 김대중을 지지하는 재야 원로들과 선거운동본부 핵심 참모들이 동교동에서 회동했다. 자체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대책을 협의하는 자리였다. 이때 문익환 목사는 김대중을 직접 대면하지는 않았지만, 김대중이 사퇴해서라도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이 노력도 김대중 필승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대통령 선거 투표일에 임박해 후보 단일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 시도됐다.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13개 단체와 백기완 선거본부의 제안으로 12월 9일 후보 단일화를 위한 비상정치협상이 제안됐다.

이에 따라 백기완이 10일에 김영삼과, 11일에 김대중과 회동을 가졌다. 그러나 김대중은 백기완의 노력을 자신에 대한 후보 사퇴 압력으로 인식하고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그래서 백기완은 12월 12일 자신의 민주 연립정부 제안의 실패를 자인하면서 후보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것으로 재야세력의 막판 단일화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됐고, 오직 선거 결과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됐다.

 독자후보론의 후보 백기완은 1987년 1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각각 김영삼(위)과 김대중(아래)을 만나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대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독자후보론의 후보 백기완은 1987년 12월 10일과 11일에 걸쳐 각각 김영삼(위)과 김대중(아래)을 만나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대한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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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 패배

대통령 선거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던 11월 2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 여객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선거 전날인 12월 15일,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가 압송돼 김포공항에 나타났다. 안보 심리를 자극하는 의도적인 일정이었다.

6월항쟁 이후 오로지 민주정부 수립으로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달려왔고, 선거승리를 확신했던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고, 왠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나름 선거승리를 예측하고 있었던 노태우 후보 측이 승리에 쐐기를 박는 마지막 정치쇼였다.

민청련 회원들은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동안 조직의 결정에 따라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12월 16일 역사적인 17대 대통령선거 날을 맞았다. 김희택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간부들은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고 사무실에 나와 언론에서 전하는 투표상황을 보면서 선거결과를 지켜보았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 국민운동본부 사무실에는 선거대책 상황실이 마련돼 투표소 상황을 시시각각 체크했고, 그 옆의 공정선거감시단 사무실에는 20여 대의 컴퓨터를 설치하고 전국의 개표상황을 별도로 집계하기 위해 20여 명의 실무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국본에 파견돼 총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권형택 부의장도 국본 사무실에서 부지런히 상황을 체크했다.

민청련 지역지부 회원들은 국본 공정선거감시단 지역지부에 소속돼 자기 지역 투개표 감시활동에 참가했다. 그런데 16일 오후 서울시 구로구청 투표소에서 긴급상황이 발생했다. 부정투표함으로 의심되는 투표함이 발견돼 시민들이 투표함을 확보하고 집단 항의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민청련과 민통련에서 즉시 실무자를 보내 상황파악에 나섰고, 국본 상황실에서도 구로구청 항의 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각 투표소에 나가 있는 공정선거감시단원들을 구로구청으로 보냈다.

 (위) 구로구청에서 농성중인 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들. (아래) 문제의 구로을 미개봉 부재자 투표함으로 1993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구로선관위에서 어디론가 옮겨가고 있는 모습. 이 투표함은 29년 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끝에 2016년 7월 22일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의해 개봉됐다. 결과는 4325표 중 노태우 3133, 김대중 575, 김영삼 404, 김종필 130 등으로 발표됐다.
 (위) 구로구청에서 농성중인 시민들을 진압하는 경찰들. (아래) 문제의 구로을 미개봉 부재자 투표함으로 1993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구로선관위에서 어디론가 옮겨가고 있는 모습. 이 투표함은 29년 간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닌 끝에 2016년 7월 22일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의해 개봉됐다. 결과는 4325표 중 노태우 3133, 김대중 575, 김영삼 404, 김종필 130 등으로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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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어수선한 속에서 투표가 종료되고, 8시쯤부터 전국적으로 개표가 진행됐다. 밤새워 개표가 진행된 결과 12월 17일 새벽에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36.6%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가 28.0%를 얻어 2위, 평민당 김대중 후보가 27.1%를 얻어 3위에 그쳤다.

6월항쟁에서 국민들이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대통령직선제로 치러진 선거에서 어이없게도 민주세력이 패배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광범한 관권 선거 개입이 있었고, 일부 투표소에서 부정 투·개표 사례들이 발견되긴 했으나 선거 결과를 놓고 보면 역시 양 김의 단일화 실패가 결정적 패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6월항쟁으로 타올랐던 국민의 민주화 열기는 급격히 싸늘하게 식어갔다.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시민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과 체념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구로구청 사건과 김병곤의 결단

모두가 패배감에 젖어 좌절하던 그 순간, 꺼져가는 투쟁의 불씨를 살려 보려고 안간힘을 쓴 이가 있었다. 김병곤이었다.

12월 17일 아침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침통한 분위기의 국본 사무실에 김대중 후보가 밤샘으로 핼쑥한 한 얼굴로 참모들과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의 광범한 관권, 금권 선거를 규탄하면서 이번 선거를 부정선거로 규정하고 선거결과에 승복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  

이때 구로구청 사건이 큰 사건으로 떠올랐다. 당시 구로구청에는 시민 수백 명이 부정투표함으로 의심되는 투표함을 점거하고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었다. 오후 들어서면서부터 구로구청에는 선거 결과에 승복할 수 없는 청년학생들과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은 구청 앞마당에서 부정선거 규탄대회를 열었다.

민청련과 민통련 회원들도 현장으로 모여들었다. 민청련에서는 김병곤 부의장을 현장 책임자로 파견했고, 해당 지역의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과 주로 남민청 회원들이 농성대열에 합류했다.

사실 김병곤은 대통령선거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치러졌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대해서는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선에서 민통련 상황실장을 맡았던 그는 선거 막판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선거 당일에도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을 돕기 위해 차량을 여러 대 구해 부정선거 고발 현장을 쫓아다니는 활동에 전력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운동본부 공정선거감시단 서울본부의 김희선 본부장으로부터 구로구청 사건 연락을 받은 그는 즉각 구로구청으로 가서 점거한 시민들과도 합류했다. 재야단체의 간부로서, 농성자 중 가장 연배가 높은 선배로서, 그는 마다치 않고 구로구청 투쟁의 지도자로 나섰다.

진압경찰의 진입이 예상되는 17일 저녁, 민통련에서는 문익환 의장과 임채정 사무처장이 구로구청으로 찾아가서 김병곤에게 현장에서 나올 것을 권유했다. 김병곤인들 왜 나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민청련 사건으로 2년여 감옥생활을 한 후 겨우 5개월 만에 다시 감옥에 갈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구로구청 상황은 그가 없으면 싸움을 지휘하기 어려웠고, 그 사실을 그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병곤은 그곳을 나올 것을 권하는 임채정에게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구로구청 사건을 접하고 구로구청으로 향하는 (왼쪽부터) 이해찬 민통련 기획실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임채정 민통련 사무처장
 구로구청 사건을 접하고 구로구청으로 향하는 (왼쪽부터) 이해찬 민통련 기획실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임채정 민통련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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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밤, 경찰 진압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다시 민청련에서 김희택 의장과 권형택 부의장이 김병곤을 구로구청 농성장으로 찾아갔다. 김 의장은 김병곤에게 이제 본인의 역할은 충분히 다 했으니 농성장에서 철수할 것을 간곡히 권했다. 그러나 이미 농성 시민 학생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 김병곤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김병곤은 민청련에서 더는 희생자가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근우 남민청위원장을 불러 회원들과 함께 철수할 것을 종용하여 구청을 나가게 했다.

2박 3일의 구로구청 부정선거규탄 투쟁은 12월 18일 새벽 쇠파이프와 각목과 최루탄으로 무장한 경찰에 의해 무참하게 진압당했다. 김병곤 등 지도부들은 엄청난 구타 속에서 1천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 체포돼 김병곤, 김희선 등 184명이 구속됐다. 그리고 진압과정에서 서울대 학생 양원태가 구청 옥상에서 추락해 척추 골절상을 입고 하반신 불구가 되는 부상을 입었다.

선거무효투쟁과 김병곤의 희생

민청련에서는 12월 22일자 <민중신문> 47호를 발행해 구로구청 투쟁을 상세히 보도함과 동시에 '민주를 짓밟은 상상 못 할 부정·조작 – 부정선거는 이렇게 자행되었다'라는 제목으로 부정선거 사례를 유형별로 분석, 보도했다.

그러면서 '선거무효투쟁은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이후 '학살범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선거무효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를 보였다. 그리고 18일 밤부터 명동성당에서 시작된 시민들의 부정선거 규탄 농성투쟁에 지지를 보냈다.

또한 민청련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학생불교연합회, KSCF, EYC 등과 연대해 23일 오후 4시 명동성당에서 '부정선거 규탄·선거무효화 및 군사독재 즉각 퇴진 결의대회'를 열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구로구청 부정선거 문제는 국민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고, 선거무효투쟁도 지속되지 못했다. 많은 국민들이 양 김 분열로 민주화운동 진영이 패배했다고 보는 상황에서 구로구청 부정선거 문제는 국민적 관심사가 되기 어려웠다.

구로구청사건은 법정에서 부정투표함 여부를 놓고 진실공방은 있었지만 가려지지 않았고, 결국 김병곤은 폭력 및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6번째 징역을 영등포 교도소에서 살게 된다.

김병곤은 수감 중 1988년 2월부터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면서 스스로 중병을 감지했다. 그로부터 4달 후인 6월에 2차례 정밀진단을 받고 위암 3기로 판정됐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김병곤은 자신의 위암에 대해서 두 가지 원인을 짚었다. 첫째는 1987년 대선 때에서의 분열이 자신한테 준 충격, 둘째는 1987년 여름 출옥 이후 몸을 돌보지 못한 채 무리한 활동을 한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대선과정에서의 운동세력의 분열이 가져온 정신적 충격이 가장 컸을 것이다.

180cm가 넘는 키에 기골이 장대한 투사 김병곤도 혼자 진 시대의 짐을 감당할 수는 없었던가. 끝내 위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1990년 12월 6일, 마흔을 못 넘긴 37살 젊은이 김병곤은 우리 곁을 떠났다.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1988년 4월 28일 항소심 재판정에 들어가는 모습
 구로구청 사건으로 구속된 김병곤이 1988년 4월 28일 항소심 재판정에 들어가는 모습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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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왜 김대중을 지지했나


1987년 10월 25일 고대집회 이후 민청련은 회원총회를 열어 대통령후보 문제에 관한 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11월 2일 저녁 영등포 성문밖교회 회의실에서 60여 명의 회원들이 모였다.

민청련 총회에서 '비지' 결정

 민청련은 의사결정을 위해 6개월마다 총회를 열었다.
 민청련은 의사결정을 위해 6개월마다 총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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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평민당으로의 분당 선언으로 양김 단일화가 거의 물 건너 간 분위기 속에서도 비판적 지지, 후보 단일화, 독자 후보 3파의 논전이 밤늦게까지 뜨겁게 전개됐다.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표결에 붙였다. 독자 후보론을 지지하는 회원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비판적 지지와 후보 단일화가 비슷했으나 비판적 지지를 지지하는 회원 수가 약간 앞섰다. 비판적지지 : 후보 단일화 : 독자 후보론의 비율이 대략 5:4:2 정도 였다. 결국 민청련의 대통령선거 시기 대선투쟁 방침은 근소한 차이로 비판적지지 입장으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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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결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면의 반전두환·노태우 투쟁을 중심축으로 하여 반군사독재 민주연합전선을 강화한다. 둘째, 후보 문제와 관련하여 민청련은 보수자유주의 세력과의 제휴 투쟁을 원칙으로 하되 통일정책의 진보성, 광주학살 원흉처단에 대한 의지, 기층민중의 지지 정도 등을 기준으로 양김 중 김대중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셋째,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통하여 분출하는 대중의 역동성에 조응하고 민족민주세력의 힘을 결집시켜 후보 단일화를 성취해 내 선거투쟁에서 승리한다. 넷째, 선거 시기의 공동투쟁을 바탕으로 민중운동연합 건설의 토대를 구축한다.'

결정의 핵심은 두 번째 항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지만 셋째 항에서 후보 단일화가 승리의 요건임을 밝히며 단일화 노력을 계속할 것을 천명했고, 넷째 항에서는 김대중 지지가 민중운동연합 건설의 토대구축을 위한 전술적 선택임을 밝히고 있다.

진통 끝에 이러한 입장을 정리한 민청련은 이후 비상체계를 가동하여 선거 시기 동안 의장단을 포함한 중앙집행위에서 당면 행동지침을 결정 집행하고, 별도로 선전기획팀과 이동선전반을 그 산하에 설치하여 운용하는 한편 기동성과 집중성을 높이기 위한 체계별 비상 동원 체계를 확립하기로 했다.

민청련의 '비판적 지지' 결정은 조직 내부의 민주적 토론절차를 밟아 내린 결정이지만 후유증이 적지 않았다. 극소수지만 후보 단일화와 독자 후보론 입장에 섰던 회원 중 조직의 결정을 어기고 개인적으로 후보단일화운동 진영이나 백기완 독자후보 진영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아주 적었고, 집단적으로 조직 결정에 반발하는 움직임은 없었다. 민통련이 비판적 지지 결정 이후 서울민통련이나 민중불교운동연합 등 산하단체에서 조직적인 반발과 탈퇴가 있었던 것에 비하면 조직적 규율이 잘 지켜진 셈이었다.

김병곤과 이범영의 '위대한 승리'

 김병곤(왼쪽)과 이범영(오른쪽)
 김병곤(왼쪽)과 이범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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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배경에는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결정에 충실히 따라준 김병곤, 이범영 등 간부들이 있었다.

김병곤은 처음에는 후보 단일화 입장에 섰었으나 자신이 속한 민청련과 민통련이 많은 토론과 내부 진통 끝에 '비판적 지지'를 결정하자 그 결정을 지지하고, 수호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결정을 끝까지 옹호하고 관철하려고 했다. 그의 건강에 결정적 타격이 된 구로구청 투쟁과 6번째 투옥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김병곤의 조직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김근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김병곤에 대해) 정말로 신화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법정에서 '사형을 주어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용기가 아니고, 자신의 의견과 달리 내려진 결정임에도 그것이 공적인 결정인 경우에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단호히 그것을 보위하는 것,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병곤이의 위대한 승리입니다. 신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미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6.29 선언 이후에도 수배가 풀리지 않아 도피생활을 하면서 주로 유기홍 등 정책실 팀과 활동을 이어갔던 이범영도 회원총회 때까지는 자신의 지론대로 후보 단일화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조직의 결정이 내려지자 주저하지 않고 그에 승복한다. 이에 대해 당시 정책실에서 함께 활동했던 유기홍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비판적 지지론에 반발하여 각 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후보단일화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당연한 일이지만 이범영에게도 함께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물리쳤다.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조직의 다수 의견에 승복하는 자세야말로 조직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덕목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태도가 민청련을 분열시키지 않고 발전시킨 힘이 되었다."

민청련의 선거투쟁

 1987년 대통령 선거 시기 민청련에서 제작한 전단지 앞면들.
 1987년 대통령 선거 시기 민청련에서 제작한 전단지 앞면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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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련과 민청련은 이후 대선 기간 동안 '비판적 지지' 입장에서 김대중 씨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선거전에 익숙하지 않은 재야단체가 선거 캠프에 들어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벌이는 선거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로 성명서 등을 통해 김대중 지지 입장을 표명하고, 전단이나 유인물로 가두선전활동 하는 정도였다. 문익환 민통련 의장만이 김대중 대선캠프의 전국 유세에 합류하여 김대중 지지를 호소하는 적극적 선거운동을 벌였다.

민청련은 주로 반노태우 운동에 집중했다. 그런 배경에는 김대중에 대한 적극적 지지와 당선 운동이 다른 한편에서 같은 반군사독재 전선에 있는 김영삼을 비난해야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청련은 [민중신문[과 여러 종의 전단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는데 그 제목만 훑어봐도 당시 민청련의 활동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용서 못할 학살원흉 전·노 일당 처단하자!"
"노태우는 절대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전두환=노태우식 안정이란 살인, 고문, 최루탄공화국!!"

그밖에도 민청련은 민통련과 함께 '일하는 청년 1,2,3' 시리즈를 발행했는데, 이것은 주로 구로, 성수 지역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선전물이었다.

"아빠, 나는 알아요. 아빠를 죽인 놈이 누군지를"이라는 제목으로 광주학살의 생생한 사진과 함께 광주항쟁의 원인과 경과, 의미를 대화 형식으로 쉽게 풀어쓴 자료집이었다. 자료집 발행자도 민통련, 민청련과 함께 동서울민청련, 남서울민청련, 북서울민청련을 전화번호와 함께 병기하여 지역지부 회원들의 선전활동에 활용했다.

선거 막바지에 가면서 김대중 후보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선거일 1주일 전부터는 민통련, 민청련, 지역지부 이름으로 '독재타도·민주쟁취 1,2,3호' 시리즈로 전단을 발행했는데, 그 중 마지막 3호의 제목은 "민주 승리의 축제를 김대중과 함께!! 우리 모두 김대중, 압도적 승리를!"(1987년12월14일자)이다.

이 전단 뒷면을 보면  12월 12일~18일을 '민주민권승리 쟁취기간'으로 설정하고, 12월 16일 선거일을 부정선거를 막아내고 승리를 쟁취하는 '민주혁명의 날', 12월 18일을 승리를 확인하고 축제를 벌이는 '민주승리의 날'로 정했다. 18일에는 정오에 시청광장에서 축제를 벌이자는 구체적인 시간 장소까지 명기했다.

선거 승리가 목전에 온 듯한 이런 선전물들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정말 승리를 확신했을까? 사실 그들에게는 단지 선거용 구호만은 아니었다. 당시 선거운동 일선에서 뛰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 캠프 사람들은 부정선거만 없다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에 차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4자필승론'과 공정선거감시단 활동

 1987년 11월 20일에 열린 민주쟁취국민운동 공정선거감시 전국본부 발대식. 제일 앞사람은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박형규 목사
 1987년 11월 20일에 열린 민주쟁취국민운동 공정선거감시 전국본부 발대식. 제일 앞사람은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박형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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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재야인사와 청년활동가들도 선거의 블랙홀 같은 마력에 빠져들었다. 애초 선거로 사회를 변혁할 수 있다는 선거혁명론을 거부하고, 선거 결과보다는 선거 시기의 대중투쟁에 더 역점을 두어야한다고 했던 청년활동가들 역시 대통령선거의 엄청난 열기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양김단일화를 전제로 했던 비판적 지지 입장의 활동가들도 점차 단일화 없이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들어 갔다. 11월 29일,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후보의 100만 선거유세, 그리고 12월 13일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150만 선거유세에 참석한 김대중 지지자들은 엄청난 인파와 열기에 열광했다. 그들은 '김대중'을 함께 연호하고 함께 대로를 행진하며 감격해했다.

이런 경험은 김대중 지지자들로 하여금 김대중이 반드시 당선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또한 당시 평민당에서는 '4자필승론'과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정보를 퍼트렸다. 이런 것들이 김대중 승리의 확신을 더욱 더 굳히게 했다. 
이런 확신은 일반 대중들만이 아니라 재야인사들 사이에도 광범하게 퍼져나갔다.

예로 선거 막바지에 국민운동본부에서 상집위의 결정으로 채택한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이 그것이다. 말하자면 4당 경쟁구도에서도 국민은 압도적으로 양김을 지지하고 있고, 야권 후보의 승리가 결정적이기 때문에 선거감시만 잘 하면 선거에서 야권의 승리는 무난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국본은 공정선거감시단을 전국적으로 결성하고 12.16 대선에서 부정선거를 방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국본 사무국에서는 독재정권의 영향 하에 있다고 생각한 공중파TV 방송과 별도로 개표결과를 집계하기 위해 당시로는 귀했던 20여 대의 컴퓨터까지 도입하여 독자 집계를 준비했다.

후보단일화가 물 건너 간 상황에서도 부정선거만 막으면 이긴다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특히 비판적 지지 입장에 서 있던 인사들 사이에서 이런 생각이 많았고, 그래서 공정선거감시운동에도 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공정선거감시단에서는 선거 당일에 투개표과정을 감시하기 위해 투표소와 개표소에 감시단을 조직하여 파견했고, 국본 사무실에 상황실을 두고 비상상황에 대비하였다. 구로구청부정투표함사건은 이런 과정에서 생긴 사건이었다.

양김 선거캠프의 판단은?

 1987년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에 대한 시도는 선거 막바지인 일주일 전까지 이어졌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단일화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
 1987년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에 대한 시도는 선거 막바지인 일주일 전까지 이어졌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단일화 집회를 열고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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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양김 선거캠프에서는 상황을 낙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사 여론조사와 자체 여론조사를 통해 판세를 계속 추적하고 있었고, 그 결과는 대체로 양김이 노태우 후보에 뒤지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래서 투표일 며칠 전에 김대중 캠프에서는 양김 중 한 사람이 사퇴해 후보를 단일화하는 시나리오가 마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은 이희호 여사의 자서전 [동행]에서 확인할 수 있다.

"투표 이틀 전 후보단일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4자필승론', '승리는 필연'이라고 끝까지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날 보라매공원의 흥분이 독이 되었던 것이다. … 나 역시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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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4자필승론'에 빠져들다


1987년 10월 12일 민통련의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지지(약칭 '비지') 결정 이후 양 김의 경쟁은 더욱 열기를 더해 갔다. 김대중이 광주와 목포를 방문해 50만 이상의 인파를 결집시키자 이에 맞서 김영삼은 부산을 방문해 수영만에서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했다. 서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세 과시가 이어졌다. 단일화의 가능성은 거의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였다.

 1987년 10월 ‘군정종식 및 후보단일화 촉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산 수영만에서 김영삼 후보가 1백만 군중을 몰고 기선을 점하자(위), 이에 뒤질세라 12월 13일 김대중 후보도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당시 선거 최대 인파를 과시하며 맞섰다(아래)
 1987년 10월 ‘군정종식 및 후보단일화 촉구대회’라는 이름으로 부산 수영만에서 김영삼 후보가 1백만 군중을 몰고 기선을 점하자(위), 이에 뒤질세라 12월 13일 김대중 후보도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당시 선거 최대 인파를 과시하며 맞섰다(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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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는 낙관론, '4자 필승론'

애초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지('비판적 지지'의 줄임말)는 민중운동에 중심을 두고 민중 역량 강화를 위해 채택된 전술적 방침이었다. 즉 '민중역량 강화'가 전략적 목표고, '대통령선거 승리'와 '김대중 지지'는 전술적 방침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 승리'는 6월항쟁과 마찬가지로 '민중역량 강화'에 결정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에 양김 후보단일화는 비지 진영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자는 "비지는 '김대중 단일화론'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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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지 진영은 점차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 논리에 빠져 들어갔다. 대통령선거가 가까워오면서 '4자 필승론'이 김대중 지지자들 사이에 광범하게 유포됐다. '4자 필승론'이란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4자가 모두 함께 나와 경쟁하는 구도가 김대중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구도라는 것이었다. 지역 지지기반이 서로 다른 후보들이기 때문에 호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고, 수도권에서 우세한 김대중 후보가 4자 대결에서 유리하다는 순전히 선거공학적인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4자 필승론'은 선거결과에서 드러났듯이 아전인수 격인 논리였고, 더구나 6월항쟁이라는 거대한 시대조류를 도외시하고 지역감정만을 토대로 한 계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논리대로라면 양김 단일화는 필요 없고, 오히려 분열되어 있는 게 좋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4자 필승론'은 운동론이라고 하기보다는 김대중 후보 선거운동본부에서 김대중 지지자들을 고무하고 단결시키기 위해 만든 선거용 구호였다. 그러나 어쨌든 김대중 선거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재야의 비지 그룹 역시 선거 막판에 점차 이 '4자 필승론'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민청련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김대중 후보가 네 후보 중 지지율에서 가장 앞서 있다는 김대중 선거운동본부의 정보를 믿었고, 그래서 선거 감시만 잘하면 김대중 후보가 무난히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낙관론에 빠져들었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김병곤의 고육지계

바로 이 때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병곤이 나섰다. 민통련 중집회의 직후 열린 민청련 의장단회의에서 김병곤 부의장은 양김을 공동투쟁 전선에 세워서 그 과정에서 대중 속에서 단일화를 성취하자고 제안했다.

즉 재야가 주도하는 대규모 반독재 군중집회를 전국 주요도시를 돌며 개최하고, 이 집회에 양 김을 앞장세우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보다 국민의 대중의 지지를 더 받는 후보가 가려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단일화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내놓은 고육지계였다. 의장단회의는 이 제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김병곤은 1985년 김근태 '고문공대위' 때부터 꾸준히 이어온 노학청 연대 테이블에 이 문제를 올려 청년학생 주도의 대규모 군중집회를 기획했다. 전두환 퇴진과 거국중립내각 수립을 촉구하는 집회였다. 당시 9총 이후 노학청 연대를 담당했던 최성웅 청년부장이 노학청 연대회의에서 이러한 집회의 공동개최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집회는 당시 진행 중이던 전국적 청년학생단체 결성 날짜와 맞추기로 했다.

한편 권형택 부의장은 국본 실무자로 근무하면서 동시에 전국의 청년단체들과 전대협 산하 학생회들을 결집시켜 전국적인 단일 청년연대단체를 국본 산하에 결성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당기간의 치밀한 조직 작업 끝에 드디어 9월 18일 대전 가톨릭 농민회관에서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아래 청학공위) 결성 총회와 대표자회의를 가졌다.

여기에서 전대협 이인영 의장과 권형택 민청련 부의장이 청학공위 공동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아울러 이 회의에서는 청학공위 공식 창립대회를 10월 중에 대중집회로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이 바로 김병곤이 기획한 집회와 시간상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청학공위에서는 10월 25일 청학공위 주최로 고려대 대운동장에서  '민주쟁취청년학생공동위원회 창립대회 및 공정선거 보장을 위한 거국중립내각 쟁취 실천대회'라는 긴 이름의 집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여기에 양김을 연사로 초청하기로 했다.

 1987년 10월 25일 청학공위 주최로 열린 "공정선거보장을 위한 거국중립내각 실천대회"에서 연설하는 김희택 민청련 의장(위)과 이인영 전대협 의장(아래)
 1987년 10월 25일 청학공위 주최로 열린 "공정선거보장을 위한 거국중립내각 실천대회"에서 연설하는 김희택 민청련 의장(위)과 이인영 전대협 의장(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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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거운동 출발이 늦어 상대적으로 약간 열세였던 김대중 측은 기꺼이 초청에 응했고, 즉시 참석하겠다고 통고해왔다. 문제는 김영삼 쪽이었다. 평소 김대중의 탁월한 대중연설 실력을 잘 알고 있는 김영삼은 김대중과 대중 앞에 함께 나서는 걸 꺼려했다. 김덕룡 비서실장 등 김영삼의 핵심 참모들도 대체로 이번 집회 참가가 별로 득이 없고 오히려 이용당할 가능성만 크다는 이유로 김영삼을 만류했다.

이때 김병곤이 나섰다. 같은 부산 출신으로 김영삼 캠프의 분위기를 잘 아는 김병곤은 단기필마로 상도동 사저로 찾아가 김영삼을 독대한다. 김병곤의 열렬하고 진심어린 설득에 결국 김영삼이 화끈하게 참석하겠다고 응락했다. 집회가 성사된 것이다.

김영삼이 집회 참석을 수락한 것은 성격 탓도 있었겠지만 바로 직전 10월 17일 부산 수영만 집회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던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수영만 집회에는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려 김대중의 보라매집회 전까지는 최대 집회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렇게 어렵게 성사된 고려대 집회는 87년 대통령선거기간 중 유일하게 양김이 함께 선 집회가 됐다.

고대 집회의 명암

10월 25일 약 10만 군중이 고려대 대운동장에 모였다. 권형택 청학공위 공동위원장의 사회로 열린 이 집회에서 양김에 앞서 김희택 민청련 의장과 전대협 이인영 의장이 연사로 나섰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즉시 퇴진할 것이며 양김은 군사독재 종식을 위해 공동투쟁에 나서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이 집회의 하이라이트인 양김 연설 순서가 됐다. 김영삼, 김대중 순으로 등단했다. 이들은 청년학생들의 촉구에 화답해 공동투쟁을 다짐하는 연설을 해서 10만 청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연설에 대한 환호의 열기는 김대중 측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김대중의 연설 실력이 돋보이기도 했지만 집회 참석자 중 다수가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연사였던 김대중은 자신의 연설이 끝나자마자 여세를 몰아 '전두환에게 심판을, 노태우에게 패배를!'이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종로5가 국민운동본부까지 '군부독재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평화대행진'을 벌였다.

외견상으로 볼 때 양김을 반군사독재 투쟁전선에 함께 세우려 한 민청련의 1차 목적이 달성된 듯 보였다. 민청련 의장단은 후속 집회를 구상하고 있었다. 애초 민청련 의장단의 생각은 서울집회가 성공하면 이어서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지역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열어 투쟁 열기를 전국으로 확산하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양김 단일화를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민청련의 계획은 다음 날 김대중 측의 전격적인 분당 발표로 좌절됐다. 10월 26일 김대중 캠프는 '고대집회에서 압도적 지지를 확인했고, 분당을 고려하고 있다'는 요지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이틀 후 10월 28일 김대중은 자신의 대통령 출마와 이를 위한 신당 창당을 공식 선언했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김대중 측은 이미 오래 전에 분당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평민당 창당을 준비해왔다. 그리고 고대집회를 분당을 공식화할 명분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양김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한 집회가 본의 아니게 김대중의 분당을 도운 셈이 됐다.
 
집회 주최자로서 뭔가 입장표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대집회를 주도했던 민청련은 이에 대해 아무 논평 없이 넘어갔다. 아마도 그 이전에 민통련과 전대협이 비지 입장을 밝혔고, 또 민청련 의장단 다수가 비지 입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김근태 인재근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1987년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한국 정부가 인재근의 출국을 거부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다음 해인 5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상을 수여했다. 당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1987년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김근태와 인재근을 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했지만, 한국 정부가 인재근의 출국을 거부했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센터는 다음 해인 5월 직접 한국을 방문해 명동성당에서 상을 수여했다. 당시 축사를 하는 김수환 추기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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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활동으로 여념이 없던 10월 중순 쯤에 민청련 사무실에 희소식이 하나 날아들었다.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심사위원회가 민청련 초대 의장 김근태와 그의 부인이며 민가협 초대 총무인 인재근에게 한국의 인권운동에 헌신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리고 11월 20일에 열리는 수상식에 참석을 요청하는 초청장을 보내왔다.

민청련은 세계 언론에 보도될 이 인권상 수상을 아직도 감옥에 있는 김근태 전 의장을 비롯한 양심수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기회로 활용하기로 했다. 마침 김근태 전 의장의 재판기록과 옥중편지 등을 모은 문집이 <이제 다시 일어나>라는 이름으로 중원문화사에서 출판된 참이었다. 그래서 민청련 사무처에서는 서둘러 준비하여 10월 22일 홍제동성당에서 책 출판기념회를 겸한 '김근태 문집 출판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기념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를 개최했다.

 김근태가 자신이 당한 고문을 폭로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1987년에 펴낸 [이제 다시 일어나](왼쪽).와 인재근 여권발급 거부에 대한 규탄 성명서(오른쪽)
 김근태가 자신이 당한 고문을 폭로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1987년에 펴낸 [이제 다시 일어나](왼쪽).와 인재근 여권발급 거부에 대한 규탄 성명서(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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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이 대회 결의문에서 "6월민중항쟁의 위대한 경험과 소중한 체험을 되살려 투쟁의 대오를 가다듬어 구속된 활동가들을 저 간악한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탄압의 사슬에서 풀어낼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 인재근의 인권상 수상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재근이 수상을 위해 신청한 출국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음으로써 수상식 참석을 저지했다. 이에 민청련은 11월 20일 민가협과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해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고 정권퇴진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 진영이 대통령 선거를 두고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이 사건은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87년 10월 22일 ‘김근태 문집 출판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기념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가 열린 홍제동 성당 앞 전경(위)과 대회 진행 모습(오른쪽).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이 대회 사회를 본 김종복 민청련 사무국장,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1987년 10월 22일 ‘김근태 문집 출판과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 수상 기념 구속자 석방 촉구대회’가 열린 홍제동 성당 앞 전경(위)과 대회 진행 모습(오른쪽).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이 대회 사회를 본 김종복 민청련 사무국장,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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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의 핵으로 떠오른 양 김 후보단일화



1987년 10월 12일, 대통령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개헌안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12월 대선이 공식화됐다. 10월 27일 국민투표를 남겨 놓고 있었지만 여야 대권 후보들의 대선 행보는 10월 들어서면서 이미 연일 주요 일간신문의 1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정국의 핵, 양 김 후보단일화

그 중에서도 김영삼과 김대중, 양 김의 단일화 문제는 국민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였다. 양 김은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정치인이었다. 또 이번 선거가 6월항쟁으로 열린 직선제 대통령 선거였기 때문에 당연히 6월항쟁의 주역이었던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

 (위)김영삼과 김대중은 9월 1일 서로 웃으면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의를 했으나 실패했다. (아래)단일화 협상이 결렬된 후 처음 만난 10월 25일 고려대 집회 자리에서는 냉랭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위)김영삼과 김대중은 9월 1일 서로 웃으면서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의를 했으나 실패했다. (아래)단일화 협상이 결렬된 후 처음 만난 10월 25일 고려대 집회 자리에서는 냉랭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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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선투표 없이 한 번의 선거로 다수 득표 후보를 뽑는 선거 제도 하에서는 야권의 두 후보가 동시 출마할 경우에는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29선언의 배경에 이런 상황에 대한 예측이 있었던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여권에서는 이미 일찍이 노태우 후보로 단일화해 다가올 대선에 대한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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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운동본부(국본)를 비롯한 민주 진영의 관심도 당연히 이 문제에 집중됐다. 9월 7일 열린 국본의 정책협의회에서는 회의의 결과로 '가급적 빨리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해 단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어 열린 9월 21일 상임공동대표 상임집행위원 연석회의에서도 양 김이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결의하고, 10월 5일까지 단일화를 이루어 줄 것을 두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그러나 6.29선언 직후부터 이미 내부적으로는 치열한 경쟁 상태에 돌입한 두 사람 간의 단일화는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본에서도 원칙적 입장을 내놓는 것을 넘어서 단일화를 이뤄내는 실효성 있고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국본에서는 상임집행위원회가 이 문제로 여러 차례 회의를 열고 격론을 벌였으나 아무런 생산적 결론을 내놓지 못했다. 그것은 양 김 진영이 세에서 비등비등하게 팽팽히 맞서고 있을 뿐 아니라 국본에 참여한 재야단체들과 인사들 사이에도 후보 문제를 둘러싼 분열이 뚜렷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통련의 '비판적 지지' 결정

국본 안에서 종교계를 제외한 재야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민통련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단일화 방법을 추진했다. 민통련은 9월 28일 '양 김씨 초청 세미나'라는 이름으로 양 김을 초청해 산하단체 대표들과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책 검증 토론회를 열었다. 김대중 씨와 김영삼 씨는 이날 각각 약간의 시차를 두고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정견을 발표하고 민통련 대표들과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민통련은 토론회 결과를 가지고 산하 단체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최종 절차로서 10월 12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격론을 벌인 끝에 표결까지 가는 진통 속에서 김대중 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13일 "범국민적 대통령 후보로 김대중 고문을 추천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87년 9월 28일 민통련이 주최한 양 김씨 초청 정책 토론회
 1987년 9월 28일 민통련이 주최한 양 김씨 초청 정책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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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련은 이 성명서에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민통련은 김대중 고문이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상, 군사독재 종식의 결의, 민생문제 해결책, 평화적 민족통일 정책, 5월 광주민중항쟁의 계승과 그 상처의 치유책 등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을 근거로, 김 고문을 범국민적 후보로 추천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택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책이라는 데 합의했다."

민청련에서는 민통련의 이 중앙집행위 회의에 김희택 의장이 참석했다. 그에 앞서 김희택 의장은 민청련 의장단회의를 열어 김대중 비판적 지지 입장을 정하고 민통련 중앙집행위에서 김대중 지지에 한 표를 던졌다. 민통련의 이 결정을 기점으로 재야세력은 급속히 '비판적 지지(비지)' '후보 단일화(후단)' '독자 후보론(독후)' 세 진영으로 분열돼 나갔다.

'비지' 진영은 일단 민주화 운동권이 내부적 통일성이나 대중적 영향력 면에서 독자 세력으로서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있는 역량이 아직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전제 하에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성을 보인 김대중을 지지하고, 압도적 지지로 김대중을 단일 후보로 만들어 대선에서 승리한다는 전략이었다.

'후단' 진영은 민주화 운동권이 독자 세력으로서 대통령 후보를 낼 수 있는 역량이 아직 없다는 판단은 비판적 지지 진영과 같았다. 반면, 김대중과 김영삼이 민주화운동을 함께 해온 민주 진영의 일원이라 할 때 대선 국면에서 두 사람의 진보성의 차이보다는 대선 승리를 위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선차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권은 어느 한 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히지 말고, 최대한 두 사람이 단일화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독후'는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는 민주화 운동권과는 정치노선에서 차별성이 있는 보수 후보이고, 따라서 선거 승패 여부를 떠나 민주화 운동권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할 수 있는 독자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거는 어차피 보수 정치인들의 판이니 진보세력은 이 선거 국면을 활용해 민중들의 요구를 전면화하고, 민중운동세력의 정치적 성장에 초점을 맞춰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1987년 11월 1일 연세대 백양로를 행진하고 있는 독자후보론 지지 학생들
 1987년 11월 1일 연세대 백양로를 행진하고 있는 독자후보론 지지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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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는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비지'와 '후단'이 다수였다. 그리고 '비지'와 '후단'은 엇비슷한 형세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서 양 김의 후보단일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비지'와 '후단' 양 진영 모두 공유하는 명분이었다. 그래서 민통련의 '비지' 결정 이후에도 단일화를 위한 재야의 노력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고 여러 형태로 단일화를 위한 시도는 계속됐다.

그러나 민통련 결정 이후에 재야의 분열은 더욱 깊어져갔고, 후보단일화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형국이 됐다. 재야를 대표하는 '문익환, 계훈제, 박형규, 백기완' 4인 원로들도 이 세 진영으로 갈라졌다. 문익환 목사는 '비지' 진영에, 계훈제, 박형규는 '후단' 진영에, 백기완은 '독후' 진영에 속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는 아직 감옥에 있었다. 이들도 감옥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목소리를 전해오고 있었다.

김근태가 보내 온 옥중메시지

후보단일화 문제는 민청련에게도 역시 가장 큰 현안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의장단의 회의에서도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했다. 김희택 의장과 박우섭, 장준영, 권형택 부의장은 대체로 김대중 씨에 대한 '비지' 입장이었지만 김병곤 부의장은 '후단' 입장에 가까웠다.

민청련의장단은 9월 말경에는 조직 전체가 완전 합의에 이르지 않았지만 대체로 김대중 지지 쪽으로 대통령 후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김병곤 부의장도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다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감옥에서 보내 온 김근태 전 의장의 편지가 큰 역할을 했다.

6.29선언 직후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근태 전 의장에게 아내 인재근이 면회를 가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깥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바깥에서 고민이 시작되고 있는데 대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앞으로 대선, 특히 대통령 후보 문제를 둘러싸고 운동세력 내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날 것을 직감한 김근태 전 의장은 이 논의를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근태 전 의장의 의중을 눈치챈 인재근이 다음 면회 때 녹음기를 가지고 갔다. 면회 때 녹음하는 것은 교도소 측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사항이었지만 김근태만은 예외였다. 당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딘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경주교도소로 와서도 소내 투쟁에서 항상 앞장서 왔던 터라 경주교도소가 어지간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녹음은 한 번의 면회 시간에 다 마칠 수 없어서 일, 이주일 간격으로 세 차례에 나누어 진행했다.

 민청련이 발표한 김근태 옥중 메시지
 민청련이 발표한 김근태 옥중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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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김근태 전 의장은 당시에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론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후보를 내고 우리 후보가 양 김씨와 연합하는 게 제일좋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정당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한참 설명을 해야 하는 난점이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독자 후보를 내서 후보연합 전술을 하는 것은 급박한 조건 속에서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요. 그렇다면 이미 71년도에 대통령 후보에 나와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을 보였던 김대중 후보가 어떠냐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후에도 군사독재에 굴복하지 않는 길을 걸어 왔고, 상대적으로 진보성이 있고, 지역 패권주의를 극복하는 방향에서도 DJ를 후보로 우리가 밀면,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거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까, YS의 반발에 대해 과소평가했어요. 당시 생각에는 민주화 운동 진영이 도덕적인 이니셔티브를 갖고 있기 때문에 민통련, 민청련, 민가협이 가능하면 만장일치로 의견을 통합하면 그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근태의 녹음은 박우섭 부의장을 통해 민청련 의장단에게 전해졌고, 민청련 의장단은 이 녹음을 풀어 녹취록을 만들어 민청련 간부들에게 회람하고, 민통련의 문익환 의장과 이창복 사무처장에게도 전달했다. 이 녹취록은 그 해 11월에 민청련에서 '민중운동 발전과 선거를 통한  민족자주화와 민주화의 실현 –김근태 옥중메시지- '라는 제목의 문건으로 발행했다.

이 옥중메시지는 김근태의 생각대로 재야 내부에 대통령 후보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그리고 민청련과 민통련이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 입장을 정리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운동권의 의견을 통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오히려 운동 내부의 분열은 가속화됐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김근태 의장은 앞의 구술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도 제가 고문 받았는데 굴복하지 않았다고 해서 발언력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감옥 안에서 주장한 것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한테 자극을 줬던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 발언이 민주화 운동권 전체를 통합해 내지는 못했죠. 오히려 그 이후에 민주화 운동 세력 내부에 참으로 어렵고 복잡한 양상이 발생하고, 정권 교체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암울했습니다."

 옥중메시지를 전달한 1987년에서 10년이 지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근태는 다시 한 번 김대중에 대한 ‘비지’를 내걸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왼쪽) 1997년 12월 1일, 캠프파랑새 유세장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후보와 지원하고 있는 김근태, (오른쪽)같은 날 서울 어린이대공원 유세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지 연설을 하고 있는 김근태
 옥중메시지를 전달한 1987년에서 10년이 지난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근태는 다시 한 번 김대중에 대한 ‘비지’를 내걸고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다. (왼쪽) 1997년 12월 1일, 캠프파랑새 유세장에서 연설하는 김대중 후보와 지원하고 있는 김근태, (오른쪽)같은 날 서울 어린이대공원 유세장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지 연설을 하고 있는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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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청년대중을 조직하라!"


1987년 8월의 제9차 총회 이후 청년대중운동을 모색하는 민청련의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지부 건설 사업이었다.

기층 청년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청년들이 일하는 지역 현장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었다. 민청련이 주목한 지역은 서울에서 공장지대라고 할 수 있는 구로, 영등포 공단과 성수 공단이었다. 그리고 서울의 특성상 서울 중심부의 사무전문직 노동청년도 조직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지역 청년 조직사업을 위해 의장단 밑에 지역위원회를 신설하고 그 안에 남서울(구로, 영등포), 동서울(성수), 북서울(사무전문직) 3개 지부를 두고 조직사업에 착수했다. 각 지부 조직책으로 남서울에는 남근우, 동서울에는 김성환, 북서울에는 김재승을 임명했다.

성수공단에 터잡은 동서울민청련 (동민청)

 1897년 가을, 성수교회에서 열린 동민청 창립식. 계훈제 민통련 부의장이 축하인사말을 하고 있다.
 1897년 가을, 성수교회에서 열린 동민청 창립식. 계훈제 민통련 부의장이 축하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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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이 조직책으로 임명된 동민청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김성환은 6.29 이전 탄압시기에 사업부장으로 민청련의 살림을 꾸리는데 남다른 수완을 보였었다. 그리고 6.29 이후 총준위에도 참여하여 민청련의 변신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논의과정에서 청년대중운동을 앞장서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지부조직사업이 실천 과제로 제시되자 자원하여 동민청 조직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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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민청을 지원한 건 당시 김성환이 성수공단에서 가까운 하남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울 쪽에 연고가 있거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동민청을 자원한 10여 명의 민청련 회원들이 동부지역 조직사업에 참여했다. 김성환 위원장과 김병태 사무국장을 비롯해 윤영헌, 변종만, 홍승창, 이금봉, 연희원, 한영수, 최정호 등이었다.

내부 살림은 김병태 사무국장이 총괄하고 한영수 회원이 적극적으로 도왔다. 한영수는 동서울 지역 거주자는 아니었지만, 북민청에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조직의 결정으로 동민청으로 옮겨야 했으나 활동은 열성적으로 했다.

김성환과 동민청 회원들은 9차 총회가 끝나자마자 9월 초에 성수동에 사무실을 얻고 바로 활동에 들어갔다. 사무실은 화양리 동부세무서 맞은 편에 있는 허름한 2층 건물의 2층에 얻었다.

 김성환 동민청 위원장(왼쪽)과 김병태 동민청 사무국장(오른쪽)
 김성환 동민청 위원장(왼쪽)과 김병태 동민청 사무국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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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지역상황을 파악해 나가면서 기존에 활동해 오고 있는 지역단체들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협조관계를 맺어나갔다.

성수지역에는 동부노동상담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모이고 있었고, 성수교회도 지역운동의 중요한 모임공간이 되고 있었다. 또 당시 국민운동본부에서도 활발하게 지역조직 건설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본부 성동구지부가 이 지역에서 막 조직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건대, 세종대 등 지역에 있는 대학의 총학생회도 연대대상이었다.

이 지역에 신입으로 활동을 시작한 민청련에 대해 기존 지역 활동가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서울 시내 사무실에서 놀던 당신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어?'하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때마침 동민청 회원들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9월 초에 조흥운수라는 성수지역 택시회사의 운수노동자 이석구씨가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여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동민청은 즉시 이 지역 운동단체들과 지역 총학생회들로 대책위를 꾸려서 회사를 상대로 한 농성에 돌입했다. 김성환 위원장 이하 민청련 회원들은 이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부에 연락하여 언론 홍보에도 노력하고 자체적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지역주민에 대한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는 사이에 기존 지역단체들과 신뢰도 차츰 쌓여갔고, 지역 청년들 사이에 민청련 이름을 알려 나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아남전자 쟁의에 대한 지원투쟁, 한양대 병원조조 지원투쟁 등 동부민청련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원 수도 꾸준히 늘어서 이길수, 구광숙 등이 새로 가입해 대략 20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

 성수동 소재 아남산업 쟁의 지원투쟁에 나선 동민청 회원들. 김성환 위원장을 비롯해 윤영헌, 원혜미, 이금봉, 한영수, 이중원, 조예진의 얼굴이 보이고, 본부에서 지원 나온 사무국의 박순섭, 신기동, 여성부의 이정심 등도 보인다. 타 지부인 북민청에서도 남정현 총무가 참여했다.
 성수동 소재 아남산업 쟁의 지원투쟁에 나선 동민청 회원들. 김성환 위원장을 비롯해 윤영헌, 원혜미, 이금봉, 한영수, 이중원, 조예진의 얼굴이 보이고, 본부에서 지원 나온 사무국의 박순섭, 신기동, 여성부의 이정심 등도 보인다. 타 지부인 북민청에서도 남정현 총무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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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민청련(남민청)

남민청은 수도권에서 가장 큰 공단 중의 하나인 구로공단이 있는 지역이어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지부였다. 1960년대 산업화 초기부터 영등포, 구로 지역은 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공장지대를 이루고 있었고,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밀집해서 사는 지역이었다.

1970년대부터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터, YH상사 등 선구적으로 노동조합을 일궈온 노동운동가들이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고, 그들이 1984년 방용석 원풍노조 전 지부장 방용석을 중심으로 모여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신길동에 사무실을 내고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남민청 사무실 현판식. 앞에 왼쪽부터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문익환 민통련 의장, 장영달 민청련 전부의장. 뒤에 왼쪽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오른쪽 최경환 남민청 회원
 남민청 사무실 현판식. 앞에 왼쪽부터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문익환 민통련 의장, 장영달 민청련 전부의장. 뒤에 왼쪽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오른쪽 최경환 남민청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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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지역에는 노동운동을 꿈꾸며 노동현장에 조직적으로 투신해 있는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목동 지역은 청계천 판자촌 철거 이후에 서울 도심에서 밀려난 사람들로 거대한 빈민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이 목동 지역 재개발문제로 빈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했다.

민청련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청년대중운동을 기치로 내걸고 새롭게 어떤 활동을 펼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민청련 내에서도 이 지역 조직사업을 하려고 하는 지원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남민청 위원장에는 두 사람이 지원했다. 한 사람은 본부 선전부에서 일했던 서울대 출신 윤형기였고, 또 한 사람은 민청련 상임위에서 빈민분과장을 오래 해왔던 숭실대 출신 남근우였다. 집행부가 조정에 나섰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경선을 했다. 치열한 경합 끝에 투표한 결과 윤형기가 2표 차이로 당선 됐다. 그러나 경선이 끝난 뒤 윤형기가 양보해 남근우가 위원장으로 확정됐다.

남근우는 자신을 지지한 양경숙, 이상강 등 숭실대 계반원들과 빈민분과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팀을 구성하고 본격적인 지역활동을 시작했다. 사무실도 마련했다. 영등포 버드나무길에 있던 명화극장 맞은편 진흥빌딩 3층에 있었다. 탄압 시기에 이름 없는 비밀 사무실을 전전하다가 이제 버젓이 간판을 내걸고 공개사무실을 열게 되니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남민청 결성대회는 영등포성문밖교회에서 열렸다. 김희택 의장 등 민청련 간부들과 문익환 민통련 의장, 장영달 등 100여 명의 축하객들이 모여 발 디딜 틈 없이 교회를 가득 메운 가운데 결성식이 거행됐다.

김희택 의장이 의장단을 대표해 인사를 하고, 남근우 위원장이 결성 경과보고와 임원소개를 했다. 김복연이 사무국장에 임명됐다. 참석 인사들의 축사와 격려사가 이어졌다. 문익환 목사가 격려사와 기념 시국강연을 했다. 마지막으로 '청년대중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며'라는 제목의 결성선언문을 낭독했다. 결성대회를 마치고 사무실 입주식과 흥겨운 뒷풀이가 이어졌다.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개최한 남민청 결성식. 앉아 있는 사람 왼쪽부터 박우섭 민청련 부의장,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권형택 민청련 부의장. 사회를 보는 사람은 최경환 남민청 회원
 영등포 성문밖교회에서 개최한 남민청 결성식. 앉아 있는 사람 왼쪽부터 박우섭 민청련 부의장,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문익환 민통련 의장, 권형택 민청련 부의장. 사회를 보는 사람은 최경환 남민청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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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대회를 성황리에 마치고 남근우 위원장은 김복연 사무국장과 함께 사무실을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남 위원장의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성이 좋아 사무실에는 항상 열 명 내지 스무 명의 청년들로 북적였다. 마침 서울 국본 영등포 구로지부 책임을 민청련 출신 김희상 씨가 맡고 있어서 서로 의논하고 협조하면서 활동을 진행해갔다.

회원 수도 꾸준히 늘어 한 때에는 100여 명을 헤아리기도 했다. 공개 대중운동단체를 표방한 만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최대한 개방했다. 영등포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변태희도 입회해서 이후 민청련 모임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열성회원이 됐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집회 때면 민청련 두꺼비 깃발을 들고 나서는 민청련맨으로 살고 있다.

북서울민청련(북민청)

북민청은 발동이 다소 늦게 걸렸다. 애초 북민청은 민청련 회원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중간층 사무전문직 청년을 대상으로 했다. 사실상 기존의 민청련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무실도 중구 쌍림동에 있던 민청련 본부 사무실을 함께 사용했다.
북민청이 조직이 늦어진 것은 조직책으로서 적합한 새 위원장 후보가 선뜻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장단에서는 김재승을 점찍고 있었지만 본인이 고사했다. 오랫동안 집안을 돌보지 않고 줄기차게 투쟁 일선에 서왔던 김재승은 얼마간 2선으로 물러나 있기를 원했다. 

 왼쪽부터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남정현 북민청 총무, 김복연 남민청 총무,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왼쪽부터 김재승 북민청 위원장, 남정현 북민청 총무, 김복연 남민청 총무, 남근우 남민청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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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가 코 앞에 다가오자 장준영 부의장과 유기홍 선전국장이 김재승을 설득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김재승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총회 전날 장준영과 유기홍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김재승이 백기를 들었다. 대의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김재승은 청년대중운동에 있어서 사무전문직 청년들의 조직이 매우 중요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왕 할 바엔 한번 제대로 해보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김재승은 총회가 끝나자 바로 선전국에서 함께 일하던 이외숙, 이덕희 등과 함께 연구전문직 그룹과 사무전문직 그룹을 조직해나가기 시작했다.

범양화재노조, 현대건설노조, 동의발전노조 등에 대해서 신규노조건설을 지원하거나 노동쟁의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또 민청련 회원들이 많이 근무하던 곳이 출판사였는데, 그동안 불모지였던 출판사 노조를 만드는 일도 거들었다. 또 당시 소장 한국사 연구자들로 이루어진 망원연구소가 있었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연구원노조 조직에도 관여했다. 

사무국장은 남정현이 맡았다. 회원들은 기존 민청련 회원들이 주축이었으나 나중에 훨씬 아래 학번인 83, 84학번 들이 대거 들어왔다. 김택수, 정동회, 설문원, 김응교 등이 이 무렵 들어왔다.

결성대회는 10월 20일 7시 종로 3가 종로성당에서 열렸다. 이날 결성대회에서 김병곤 부의장이 '현 단계 청년운동의 방향'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당시 대통령선거 열기가 치열해지고 있었고, 야권에서는 양김단일화가 난항을 겪으면서 민족민주운동 진영도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김병곤이 우렁우렁한 힘찬 목소리로 민주진영의 단결과 새로 발족하는 북민청 회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종로성당에서 개최한 북민청 결성식. 강연하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종로성당에서 개최한 북민청 결성식. 강연하는 사람은 김병곤 민청련 부의장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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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시기에 민청련은 무엇을 할 것인가?


 민청련은 87년 열린 공간에서 열린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양심수전원석방촉구대회에서 가두선전을 하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 (아래) 87년 말 대학로에서 열린 정치집회에 민청련 깃발을 들고 참여한 회원들
 민청련은 87년 열린 공간에서 열린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개최한 양심수전원석방촉구대회에서 가두선전을 하고 있는 민청련 회원들. (아래) 87년 말 대학로에서 열린 정치집회에 민청련 깃발을 들고 참여한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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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대투쟁과 민청련의 조직정비

1987년 6.29선언 이후 민청련 총회가 있던 8월 말까지 7,8월 두 달간은 온 나라가 독재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진통을 겪으면서 요동치던 시기였다.

정치권에서 민정당과 민주당의 개헌협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즈음 남쪽 울산, 마산, 창원 공업지대로부터 노동자대투쟁이 시작돼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7월 울산의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조선 등 중화학 대공장에서 시작된 노동자대투쟁은 경기 인천 수도권지역으로 번지고 엄청난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돼 생산현장을 투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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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노동자의 3분의 1 이상이 이 투쟁에 동참했다. 전례 없는 폭발적인 투쟁이었다. 군사독재에 눌려 기본적인 생존권과 노동권을 박탈당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이 6월항쟁으로 열린 공간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떨쳐나선 것이다. 이는 6월항쟁으로 쟁취한 절차적,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실질적, 사회적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대장정의 출발이기도 했다.

민청련이 9차총회에서 기층대중 청년들을 조직하기 위한 지역지부 건설을 결의한 것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9차총회로 조직을 정비한 민청련은 대내외 사업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와 민통련을 통해 6.29 이후 역동하는 정치정세 속에서 민청련의 대외정책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대내적으로는 지역지부 건설을 통해 청년대중을 조직하는 사업이 급선무였다.

민청련 의장단은 총회 직후 서울 중구 쌍림동 사무실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김희택 의장의 주재 하에 향후 조직의 운영방향을 논의하고, 의장단 개개인의 역할을 조정했다.

김병곤 부의장은 본인 희망대로 민통련 정책실로 파견하기로 했다. 그리고 국본에서 총무국장을 맡아 일하고 있었던 박우섭 부의장은 본부로 돌아와 앞으로 중요해질 정치 사안들에 대처하기로 했다. 아직은 국본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었으므로 박우섭의 자리에 대신 권형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장준영에게는 기존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민청련 내부 조직관리를 전담하는 역할을 맡겼다. 김희택 의장은 대내외 사업을 총괄하면서 국본/민통련의 연대사업에 대표로 참가하기로 했다.

 (위) 마창공단에서 노동자대투쟁이 진행될 때 민청련 간부 남근우(가운데 줄무늬 옷 입고 서 있는 사람)가 현장 지원에 나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아래)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기폭제가 된 8월 28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
 (위) 마창공단에서 노동자대투쟁이 진행될 때 민청련 간부 남근우(가운데 줄무늬 옷 입고 서 있는 사람)가 현장 지원에 나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아래)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기폭제가 된 8월 28일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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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세와 양김 단일화 문제

8월 말로 국회의 개헌특위 활동이 마무리되고, 9월 초에 12월 대통령선거 일정까지 여야가 합의하자 정국은 완전히 대선국면으로 전환됐다. 6.29 선언이 전두환 정권의 치밀한 계산과 연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나중에 모두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당시에 민주화 진영 내부에서도 그들의 속셈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들은 정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치밀한 계산 속에서 대선을 통한 정권연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6.29 이후에 집권세력이 가장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다. 6.29선언의 핵심인 직선제 개헌을 노태우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포장함으로써 노태우가 민주화를 가져온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려고 했다. 그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노태우는 8월 5일 민정당 총재에 취임하고, 9월에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양국 정상들을 면담했다.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부터 대통령후보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열린 정치공간에서 민주화운동 진영이 하나로 단결만 한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국민들이 압도적으로 민주화운동 진영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단결할 것인가?

선거 국면에서 민주 진영의 단결은 김영삼, 김대중 씨의 협력, 곧 양김의 후보단일화 문제로 압축됐다. 후보단일화 대상에 진보 진영의 후보까지 포함할 수 있었겠으나 사실상 진보 진영에는 양김에 필적할 만큼 국민에게 알려진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에서는 멀어졌다.

양김은 6월항쟁 이후 7월 들어서 몇 차례 회동하여 국민에게 단일화를 약속했다. 그리고 1980년 같은 우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개헌협상이 진행되는 7,8월 두 달 동안 두 사람은 내부적으로 단일화 국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단일화 문제에서 민주당 총재인 김영삼이 김대중 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1986년 말 김대중이 대통령 불출마를 선언한 적이 있었고, 당내 세력분포에 있어서도 김영삼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김영삼은 후보단일화 문제를 민주당 내부 문제로 묶어두고 양김 협상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진보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를 가졌고 대중연설에 능한 김대중은 이 문제를 당 밖으로 끌고 나가 국민대중 속에서 여론에 의해 결정짓고자 했다.

김대중은 9월 초, 광주와 목포를 방문했다. 여기에서 50만 이상의 인파가 모여 지지세를 과시했다. 경쟁은 더욱 가열됐고, 두 사람이 약속한 단일화가 위태롭게 되지 않나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부터 후보단일화 문제를 양김 두 사람에게 맡겨 둬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국본이나 민통련 등 재야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양김의 갈등은 대통령 선거 출마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왼쪽) 87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 연설을 하는 김영삼. (오른쪽) 9월 개운사에서 민청련 창립4주년 기념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김대중
 양김의 갈등은 대통령 선거 출마로 불이 붙기 시작했다. (왼쪽) 87년 7월 아현동감리교회에서 양심수 전원석방 촉구 연설을 하는 김영삼. (오른쪽) 9월 개운사에서 민청련 창립4주년 기념강연회에 연사로 참석한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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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과 김대중의 만남

이런 상황에서 민청련의 새 집행부가 먼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의장단은 회의를 열고 9월 30일 창립 4주년 기념대회에 양김을 초청하기로 했다. 양김 단일화에 앞서 두 사람을 대중 앞에 세워 그들의 경륜과 능력을 검증하는 자리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대회 장소는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로 정했다. 명진 스님이 주지로 있는 개운사는 아주 큰 절은 아니지만 승가대학이 있는 전통 있는 조계종 본찰 중의 하나였다. 서울시내에 있는 절로서는 마당이 제법 넓어 천 명 정도의 대중 집회를 하기에 충분했다.

양김 참여 교섭은 김병곤과 박우섭, 두 부의장이 맡았다. 김병곤은 부산 출신이어서 김도현  등 김영삼 측근들과 대부분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김영삼 쪽 연락을 맡았다. 박우섭은 김대중 쪽과 민청협 시절부터 긴밀하게 연락하고 지내던 터여서 김대중 쪽 참가 교섭을 했다. 민청련 창립 때 참여했던 고대 출신 설훈이 김대중 비서로 있어 중간 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김대중 쪽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참석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김영삼 쪽에서는 김대중과 장외에서 연단에 함께 서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일정을 이유로 정중하게 불참을 통고해왔다.

거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전 날인 29일, 양김 사이의 후보단일화 담판이 있었으나 결렬됐다. 그리고 당일인 30일 오전에는 김영삼이 "민주화를 향한 이제까지의 투쟁을 평화적 정치적으로 완결해보고 싶은 것이 나의 포부"리고 밝히며 사실상의 출마 선언을 했고, 김대중에게는 후보를 양보하는 대신 당 총재를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영삼이 새삼 대중 앞에 김대중과 나란히 서서 후보 경쟁을 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김대중으로서는 대중집회를 통해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날 낮 민가협 전국회장단 13명이 김대중을 면담하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후보단일화를 꼭 이룩하여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화를 성취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단일화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져만 갔다.

김영삼의 불참으로 후보단일화를 위한 집회라는 정치적 의미는 퇴색하게 됐지만, 민청련은 예정대로 집회를 진행하기로 했다. 9월 30일 저녁 7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창립 4주년 기념강연회'가 약 1천여 명의 청중이 개운사 법당 앞마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렸다. 주제는 "새로운 민주정부,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외부 초청 연사로 김대중 외에 오순부 인천지역해고노동자협의회 위원장이 참석했고, 민청련 대표로는 김희택 의장이 연사로 나섰다.

청중은 민청련 회원을 제외하면 김대중 지지자들이 많았다. 강연순서는 오순부, 김희택, 김대중의 순이었다. 오순부 위원장의 노동현장 고발과 김희택 의장의 차분한 연설은 좋은 반응을 받았다. 그러나 역시 김대중의 연설이 압권이었다.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 속에 등단한 김대중은 원고도 없이 때로 차분하게, 때로 힘차게, 약 1시간의 연설을 이어나갔다. 자신이 걸어온 험난한 길, 광주항쟁의 아픔과 6월항쟁의 승리, 그리고 자신이 집권해야하는 이유와 집권 이후 펼쳐나갈 정책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연설은 청중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청중들은 환호했다. 마치 대통령 선거유세를 방불케 하는 연설이었다.

 개운사에서 9월 30일에 열린 민청련 창립 4주년 기념강연회 모습. (위) 김희택 의장이 강연대에 올라서 연설하고 있다. (아래) 박우섭 부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개운사에서 9월 30일에 열린 민청련 창립 4주년 기념강연회 모습. (위) 김희택 의장이 강연대에 올라서 연설하고 있다. (아래) 박우섭 부의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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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이날 집회는 많은 청중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끝났지만 민청련 집행부의 의도와는 달리 결국 김대중을 위한 집회,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길을 닦아준 집회가 되었다.

이것이 앞으로 닥칠 엄청난 비극의 전조가 되리라는 것을 민청련 지도부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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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인사가 불명확한 의혹으로 김립 암살
정치세력 간 파벌 다툼이 부른 동족상잔의 비극


노종균. 1939년 일본경찰에 체포돼 심문을 받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기사


독립운동가 김립을 죽인 범인은 누군가? 필시 일본일 것이다! 조선과 중국의 언론계는 대체로 그렇게 생각했다. 보기를 들면 중국 <항주보>와 경성에서 간행되는 <동아일보>는 명시적으로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일본 국가기관은 범행 당사자가 아니었다. 김립의 소재를 집요하게 뒤쫓았지만, 그의 살해를 교사하거나 실행한 것 같지는 않다.


방아쇠 당긴 임시정부 경호원


오면직. 반일 독립운동에 가담한 죄로, 1938년 평양 형무소에서 사형당했다. 독립기념관 제공


김립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본 정보기관 종사자는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조선총독부 파견관 오다 미쓰루가 돋보였다. 재판소 통역관으로 재임하면서 조선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간부로 특채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에 파견된 터였다. 그는 상하이 한인 사회 내부에 독자적인 스파이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거액의 기밀비를 운용하면서 많은 밀정을 관리했다. 그가 관리하는 밀정 가운데 이치열(26)이 있었다. 유능한 스파이였다. 경성의 친일단체 국민협회의 회원이기도 한 그는, 1921년 말~1922년 초 상하이 한인 망명자 사회 내부의 갈등 양상을 상세히 전해왔다. 그에 따르면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 문제로 임시정부의 지탄을 받고 있었다.①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재상하이 일본 경찰은 김립의 행방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김립이 공공연한 자리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채 숨어 지내고, 망명객 현정건과 함께 살고 있다는 첩보였다. 비록 숨어 있지만 활동 양상은 활발했다. 조선에서 출장 나온 언론인 유진희와 회견하며 뭔가를 도모하는데, 아마 국내 비밀결사를 강화하는 일인 듯하다는 내용이었다.② 김립이 사는 주소를 특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실제 거의 다가간 첩보였다.

김립이 피살됐을 때 일본 정보기관 종사자들도 바삐 움직였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를 살해했는지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외무성, 헌병사령부, 조선총독부 등 여러 경로로 작성된 정보 보고서들은 피살 정황이나 범인 추정 문제에서 상충됐다. 그중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였다. 독자적 스파이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수사권이 있는 상하이 공동조계 경찰국의 정보 협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 40만루블을 사사로이 횡령한 혐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쪽에 피살됐다.③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불과 1년 반 전에 자기네 고위직으로 있던 독립운동가를 죽였다고? 이게 과연 있을 법한 일인가? 믿어도 좋은가? 이처럼 거듭 반문할 만큼 많은 의문점을 내포한 견해였다.


그랬다. 사실이었다. 김립에게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은 이미 밝혀져 있다. 바로 오면직(28)과 노종균(28)이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에 소속된 ‘경호원’이었다. 경호원이란 말은 오늘날 요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위험을 예방·제거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시절 상하이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임시정부 내무부 소속 직원으로, 경무국장의 지휘를 받아 공공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리켰다.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오면직과 노종균은 황해도 안악군 출신의 동갑내기로, 1919년 3·1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한 청년들이었다. 두 사람은 만세시위운동이 사그라진 뒤에도 반일 비밀결사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군자금 모금을 돕다가 비밀이 누설돼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1년 11월이었다.④ 말하자면 두 사람이 상하이에 발을 처음 내디딘 때는 김립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두세 달 전이었다. 둘은 망명지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출신지 연고에 따라 황해도 출신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와 인연을 맺게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금 40만루블 사적 유용 혐의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김구. 독립기념관 제공


임시정부 경찰관이 하는 일은 통상적인 국가의 경찰 행정과는 달랐다. 자체 영토가 없기에 치안과 질서 유지는 주임무가 될 수 없었다. 임시정부 경무국의 임무는 정치적·군사적 성격을 띠었다. 경무국장 김구의 진술에 따르면, “주요 임무는 왜적의 정탐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자의 투항 여부를 정찰하여,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입하는가를 살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스파이 방지 활동이었다. 경무국장 김구는 임시정부 경호원 20여 명을 지휘하며 이 임무를 수행했다.⑤ 임시정부 경무국의 맞상대가 있었다. 바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였다. 상하이 동북방에 있는 일본총영사관과 서남방에 있는 프랑스조계에 은밀히 자리잡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은 스파이 활동 영역에서 서로 암투를 벌였노라고, 김구는 회고했다.

김립 암살 임무를 맡은 팀은 네 사람이었다. 이 중에서 오면직과 노종균은 전방 담당 조였다. 앞길을 차단해 목표를 사살하는 임무를 맡았다. 후방에도 두 사람이 배치돼 있었으나, 어떤 이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도 임시정부 경무국의 경호원이었음이 틀림없다. 요컨대 김립 암살 사건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 지휘하에 경찰관 4명이 조직적으로 수행한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경무국장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모스크바 자금 40만루블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준 것인데,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와 비서장 김립이 공모해 횡령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임시정부 ‘공금 횡령범’들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립은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혐의도 있었다. 김구의 견해에 따르면, 김립은 비리를 저질렀다.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했고, “상하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둥 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했다고 비난했다.

김구는 김립 암살 사건이 바람직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다시 <백범일지>를 보자. 이렇게 쓰여 있다. “정부의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은 잘했다고 칭찬하며 통쾌해하였다.”⑥

김립이 죽을죄를 지었다는 판단은 경무국장 김구 혼자서 내린 게 아니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공식 견해였다. 1922년 1월26일 자로 ‘임시정부 포고 제1호’가 발령됐다. 국무총리대리 신규식을 필두로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학무총장대리 김인전, 재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손정도 등 장관급 지도자 6명이 연명으로 서명한 공식 문서였다.

이 포고문은 준엄한 심판 문서였다. ‘독립당의 영수’로서 ‘신망 있는 자’들이 파렴치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음을 규탄하는 엄중한 성격을 띠었다. 포고문은 이들을 응징하지 않으면 국기(國基)가 서기 어렵다고 규정했다. 죄를 낱낱이 밝혀 온 나라 사람들이 같이 그들을 토벌할 수 있도록 정의를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김립은 죽을죄를 졌는가


중국 상하이 시절의 김철수. 임경석 제공


특히 세 사람의 과거 지도자가 거명됐다. 첫째,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였다. 그는 러시아가 우리 정부에 증여한 거금을 김립으로 하여금 중도에 횡령케 하고, 도리어 임시정부 각원들에게 죄를 돌리며 정부를 파멸케 하려고 도모한 죄가 있다고 했다. 둘째, 군무차장을 지낸 김희선이었다. 그는 변심해 적에게 투항하는 죄를 범했다. 조선총독부와 비밀히 연락해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조선 내지로 도주해버렸던 것이다. 포고문은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렵다고 썼다.

셋째, 내각 비서장을 지낸 김립이었다. 그는 이동휘 국무총리와 결탁해 국가의 공금을 횡령하고, 자기 개인 주머니를 불리며, 같은 부류를 모아 간교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난받았다. 포고문은 그 죄가 ‘극형’에 해당한다고 썼다.⑦

김립 암살 사건이 일어난 때는 포고문이 발령된 지 13일 만이었다. 김립 사건이 포고문과 무관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경무국 경호원들이 포고문에 거론된 과거 지도자 세 명을 모두 징벌한 것은 아니다. ‘극형’을 실행에 옮긴 대상은 김립 혼자였다.

김립은 목숨을 잃었다.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한평생 헌신해온 그의 삶은 송두리째 부정당했다. 신체를 말살당했을 뿐 아니라, 명예와 정신마저 치욕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과연 김립은 죽을죄를 졌는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살아남은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이 항변하기 시작했다. 암살 현장에 김립 혼자 있었던 게 아니라 네 사람이 함께 있었음에 주목하자. 유진희, 김하구, 김철수가 조난을 목격했다.⑧ 이들은 모두 고려공산당 중앙간부였다.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같은 이름의 공산당을 ‘이시파’라고 하는 것에 대비해, 이 공산당을 ‘상하이파’라고 했다. 상하이에서 결성됐고, 중앙위원회의 소재지가 상하이였기에 생긴 별칭이었다. 이 공산당은 십수 년간 조선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람들이 만든 사회주의 단체였다. 1919년 10월 통합 임시정부가 성립됐을 때, 임시정부를 지탱한 3대 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단체였다. 그뿐 아니라, 집권여당이었다. 국무총리와 비서장(차관연석회의 의장)을 이 공산당이 담당했다.

김철수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언제부턴가 자기에게 미행자가 붙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상하이 시내에서 인력거를 타고 움직이면, 또 하나의 인력거가 자신을 뒤쫓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갖고 다니기로 했다. 한번은 큰 용기도 냈다. 뒤따르는 자들이 있음을 감지한 그는, 자신을 태우고 달리던 인력거꾼을 불러세웠다. 뒤따르던 인력거도 섰다. 인력거에서 내린 김철수는 미행자들을 태운 인력거에 다가갔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표적이 아니라고 본능적으로 확신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당황해하는 서투른 미행자들에게 따졌다. “어떤 놈이 뭐라고 했던지, 네가 네 정신으로 독립운동을 해야지. 왜 내 뒤에 따라다니냐?”고 호통쳤다.⑨ 김철수는 미행자들도 독립운동에 헌신하려고 망명한 청년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인의 잘못된 지시에 좌우되지 말고 자신의 독자적 판단에 따라서 바르게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김립의 비밀 처소가 노출된 것은 바로 미행 탓이었다. 김철수는 그렇게 판단했다. 김립이 몰래 만나던 몇 안 되는 동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부주의하게도 미행자가 뒤따르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암살자들이 노린 거액의 자금


김립이 자신의 눈앞에서 피살되는 참혹한 현장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본 동료들은 망연자실했다. 그 경황없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김철수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단박에 파악했다. 그는 사후 처리를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고 은행으로 뛰어갔다. ‘상하이상업저축은행’이었다. 김립이 거액의 모스크바 자금을 예치해놓은 은행이었다. 암살자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 자금이었다. 인출을 저지해야만 했다. 누군가 그럴듯하게 통장, 도장, 기타 문서를 갖고 와서 예금 인출을 요구하더라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은행 쪽에 설득해야 했다. 그뿐인가. 예금을 인출할 유일한 사람이 죽었으므로, 속히 그 인출권을 이양받아야만 했다.

민사상 제3자에 지나지 않는 김철수가 그 과제를 해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통상적인 경우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 김철수는 양대 과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은행장이 일본 유학생 출신인 천광푸였기 때문이다. 뒷날 대만 재무부장관까지 지낸 중국 금융계의 이 신진 기예는 신뢰를 중시했다. 김철수는 일본 유학 시절에 참여한 동아시아 각국 유학생들의 비밀결사 ‘신아동맹단’의 덕을 입었다. 그때 같은 단원으로서 의가 상통하던 중국인 유학생들이 때마침 상하이기독청년회관에 재직했는데, 그들은 김철수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였고, 천광푸는 그 신원 보증을 기꺼이 인정했다. 덕분에 김철수는 암살자들의 예금 인출 기도를 저지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잔여 예금의 인출권을 자기 명의로 옮겨놓을 수 있었다.

김립의 동료들은 통분해 마지않았다. 어떻게 독립운동계의 동지가 다른 동지에게 총을 겨눌 수 있는가. 아무리 조직과 정견이 다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부 공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는 터무니없는 거짓이었다. 저희에게만 총이 있는가? 공산당 내 열혈 청년들은 보복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철수의 회고에 따르면, 최동욱·최계립·이호반·한광우 등이 그렇게 주장했고 기꺼이 행동에 옮길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흉행을 교사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임시정부 안팎에 피바람이 불어닥칠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김철수를 비롯한 당 간부들이 적극 만류했다. 우리의 투쟁 대상은 일본 제국주의이지 결코 동족이 아니라고, 거듭된 동족상잔은 허용할 수 없다고 말이다.


치욕스런 범죄 혐의 풀어야 

 

김립의 억울한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들씌워진 치욕스러운 범죄자 혐의는 풀어야 했다. 김립 개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그랬고, 상하이파 공산당의 활동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도 그러했다. 잔여 자금의 순조로운 집행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그중 하나는 모스크바 자금의 성격이었다. 그 자금의 처분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고려공산당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인가? 다른 문제는 모스크바 자금 집행의 공정성이었다.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과연 사적으로 횡령하거나 유용한 적이 있는가, 없는가?


참고 문헌

① 憲兵司令官, 「中제30호, 大韓國民協會員 渡來에 관한 件」1922.1.6., 1-3쪽, 『不逞團關係雜件-鮮人의 部-在上海地方

(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② 조선총독부 경무국, 「高警 제29574호, 上海僭稱假政府의 運命과 共産黨」 1922.1.6.

③ 재상해총영사 船津辰一郞, 「기밀제49호, 共産黨首領金立殺害ニ關スル件」 1922.2.14., 1-2쪽.

④ 국가보훈처, 『大韓民國獨立有功者功勳錄』 제5권, 1988, 667~669쪽; 같은 책, 제12권, 1996, 550쪽.

⑤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1997, 302쪽

⑥ 위의 책, 313쪽.

⑦ 「大韓民國臨時政府 佈告 第1號」 1922.1.26.

⑧ 김철수, 「본대로 드른대로 생각난대로 지어 만든대로」, 『遲耘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 17쪽.

⑨ 「구술자료 김소중 소장본」, 『遲耘 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 50쪽.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5120.html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출신의 김립 암살 사건
 범인 오리무중에 암살 둘러싼 네 가지 설만 분분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국내 신문 <동아일보> 1922년 2월14일치 지면. 오른쪽 아래는 암살되기 1년 전에 찍은 김립의 사진. 임경석 제공


1922년 2월8일은 수요일이었다. 중국인들이 위안샤오제(元宵節)라고 하는 정월 대보름을 사흘 앞둔 때였다. 상하이 시내는 음력 새해를 맞아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음력 설날 춘제(春節)부터 거리를 떠들썩하게 한 폭죽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설날부터 대보름날까지 밤낮없이 폭죽을 터뜨리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중국인들의 오랜 풍습이었다.


정초에 울려퍼진 12발의 총성


북쪽 외곽 중국인 밀집 구역인 자베이 바오퉁루(寶通路)도 그랬다. 자동차 2대가 조심스레 마주 다닐 수 있는, 넓지 않은 차로였다. 양쪽으로 2∼3층짜리 중국인 가옥이 늘어서고, 맨 아래층에는 상점과 수공업 작업장이 들어찬 평범한 길이었다. 상하이 육로 교통의 관문인 베이잔(북역)에서 300m쯤 떨어진 이 거리에서도 폭죽 소리가 울리곤 했다. 마치 총소리 같았다.①

오후 1시였다. 점심때인지라 바오퉁루에는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네 남자가 둘씩 짝지어 걷고 있었다. 중국옷과 양복을 나눠 입은, 지식인층으로 보이는 30∼40대 남성들이었다. 스쳐 지나가면서 이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사람이라면 아마 네 사람이 이방인임을 곧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네 사람은 거리를 오가는 중국인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어였다.

바오퉁루와 추장루(虬江路)가 만나는 지점이 저기 보였다. 앞선 두 사람은 굽은 길을 돌아 추장루로 들었다. 뒤의 두 사람이 길모퉁이를 돌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잠복해 있던 양복 입은 청년 4명이 튀어나왔다. 둘은 앞을 가로막고, 둘은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멀찌감치 뒤를 가로막았다. 앞길을 가로막은 두 청년이 양복에 손을 집어넣었다. 시커먼 쇠뭉치를 꺼내 들었다. 권총이었다.

“탕, 탕, 탕….”


연이어 권총 격발음이 울렸다. 정초에 거리에 울리는 폭죽 소리에 섞여 둔탁한 총성이 바오퉁루 일대에 울려퍼졌다. 습격자들의 목표는 한 사람이었다. 40대 중반 남자가 쓰러졌다. 앞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국옷을 입은 중년 신사였다.

총성이 이어졌다. 습격자들은 권총에 장전된 탄환을 다 쓸 때까지 계속 총을 쏘았다. 마지막 탄환까지 쏜 뒤에야 두 습격자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들은 신속히 현장을 벗어났다. 멀찌감치 후방을 차단했던 다른 두 청년도 유유히 사라졌다.

바오퉁루 암살 사건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중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로 꼽히는 <신보>(申報)는 사건 직후 두 차례 이 사건을 보도했다. 그에 따르면 피습자는 바오퉁루에 거주하는 한국인 양춘산(楊春山)이었다.② 양춘산은 ‘한국 독립당의 중요 분자’인데, 애초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살다가 중국 관할 구역으로 이사한 지 불과 3~4일밖에 안 된 상태였다. 44살로, 여러 해 ‘정치관계 일’을 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었다.

신문은 피격 전후의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습격자들은 권총으로 양춘산을 사살했는데 “총탄이 비 오듯 했다”고 한다.③ 총을 맞고 땅에 넘어진 희생자는 바로 숨이 끊겨 죽었다. 사건 현장 좌우에 중국인 상점이 줄지어 있었다. 상가의 중국인들은 사건을 직접 보고 크게 놀랐으나, 범인들이 모두 권총을 들고 있어 감히 앞에 나가 간섭하지 못했다. 그래서 습격자들은 범행을 마치고 활개치며 현장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보란 듯이 현장 떠난 습격자들


신문기자는 현장 주변 상점을 돌며 목격자들에게 보고 들은 바를 물었다. 그에 따르면 “흉수(兇手)는 2인인데, 둘 다 양복을 입었고 신체는 왜소”했다. 그들은 범행을 마친 뒤 ‘철로 방면’으로 뛰어 달아났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로’란 바오퉁루와 추장루가 만나는 교차로를 축으로 북쪽과 남서쪽으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부설된, 상하이 베이잔 역과 우쑹 역을 잇는 철도선을 가리킨다. 교차로는 길이 다섯 갈래로 나뉘는 오거리였다. 습격자들이 도주하는 데 매우 적합했을 것이다. 범인 수를 두 사람이라고 증언한 것은 실제와는 다르지만 정직한 진술임이 틀림없다. 목격자들은 후방 감시를 맡은 다른 두 명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머잖아 경찰이 출동했다. 관할 경찰관서인 5구(區) 2분서(分署) 소속 순경들이 사건 현장에 왔다. 물론 흉행을 저지른 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검찰청에서도 관계자들이 나왔다. 검찰관과 검시원이 현장 검증을 지휘했다. 그 결과 주검 가까이서 탄피를 발견하고, 주검에서 12발의 총상을 확인했다. 희생자의 사망 원인은 총상으로 말미암은 것임이 명백했다.

중국 쪽 치안 관계자만이 아니었다. 인접한 공동조계 경무처에서도 이 사건에 관심을 보였다. 공동조계란 중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재상하이 외국 조차 구역을 이른다. 이 구역의 행정과 경찰권은 영국이 주도하고 미국과 일본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행사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공동조계 경무처 관리가 중국 검찰청에 찾아와 사건의 시말과 정형을 조사했다.

이 사건에 상하이 이외 지역의 중국 언론 기관도 관심을 보였다. 사건 발생 열흘 뒤인 1922년 2월18일, 저장성 항저우에서 발행되는 <항저우바오>(杭州報)에 관련 기사가 실렸다. ‘재상하이 한인 양춘산의 암살 사건을 논함’이라는 논평 기사였다.


범인은 일본인인가


김립 암살 사건을 전하는 중국 상하이 <독립신문>1922년 2월20일치 지면(왼쪽). 상하이 공동조계 경찰국이 쓴 김립 암살 사건 보고서. 임경석 제공/ 임경석 제공


기자는 ‘한국 독립운동에 분주하게 헌신하던 사람’이 살해된 점에 주목했다. 그는 죽은 이에게 깊은 동정의 뜻을 표했다. 독립을 위해 희생됐으니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터이지만,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먼저 몸이 죽었으니 그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라고 적었다. 기자는 피살자의 죽음을 가리켜 ‘순국’이자 ‘희생’이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기자는 암살자의 정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의 독립지사를 암살하는 일은 아마 ‘모국인’의 행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문맥상 일본을 가리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논평자는 그 나라의 명예를 위해서도 암살 따위를 저지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통박했다.④

이 암살 사건은 일본 식민 지배 아래 있는 한국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엿새 만에, ‘조선인 양춘산’이 상하이에서 참혹하게 피살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신문은 피살자가 일찍이 북간도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하다 근래에 상하이로 온 사람이라는 정보도 제공했다.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썼다. 보도 기사에는 ‘범인은 일본인인가’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중국 신문의 보도를 보면 범인은 일본인인 듯하다”고 적었다.⑤

피살자는 누구인가? 일본 경찰은 이 암살 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일본제국’을 적대시하는 한국 독립운동계의 거물이 피살됐으니 그럴 법도 했다.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재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부가 나섰다. 공동조계 경무처에 연락해 수사 결과를 입수했고, 상하이 한인 사회의 내부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첩보망을 가동했다.

총영사관 경찰부가 탐지한 바에 따르면, 피살자 양춘산에게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양춘산은 중국인으로 행세하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었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김립(金立)이었다.

김립은 1919년 11월 재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취임해, 임시정부의 재정과 인사를 비롯한 모든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던 거물급 인사였다. 국무원 비서장이란 국무총리 직속 집행기구의 책임자로서, 산하에 서무국을 비롯한 실무 부서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국무원 각부 차관회의를 주재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운영 전반을 좌우하는 영향력 있는 직책이었다. 그는 1920년 9월15일까지 그 직위에 있었다.⑥

피살자가 누군지에는 어떤 관찰자도 이견이 없었다. 일본 경찰뿐만 아니라 공동조계 경찰의 판단도 동일했다. 상하이 공동조계의 최고행정관리기구인 공부국(工部局) 산하 경찰국장이 일본총영사관 앞으로 발송한 1922년 2월16일치 수사 결과 통지문에도 같은 정보가 쓰여 있었다.⑦

게다가 재상하이 한국인 망명자들도 그처럼 판단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상하이에서 발간되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보자. 사건 발생 12일이 지난 뒤였다. 이 신문에 ‘양춘산의 피살’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거기에는 “양춘산이라 칭하는 나이 40여 세 된 우리 사람 하나가 지난 8일에 어떤 청년 4인에게 피살되었는데, 일설에는 그 피살된 이가 곧 김립이라고도 하더라”⑧고 적혔다.


청년 망명객이 보낸 의문의 편지


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뒤였다. 우편물 검열을 하던 일본총영사관 경찰이 우편물 더미에서 의심스러운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재상하이 청년 망명객이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재상하이 독립운동가 사회에 대한 어둡고도 우울한 풍경이 묘사돼 있었다. 바오퉁루 암살 사건의 내막을 언급한 것도 있었다. “이동휘의 심복인 김립이라면 알겠는가? 어제 대낮에 대도에서 혹자로부터 12발이나 맞고서 길 위에서 즉사했다”고 쓰여 있었다.⑨

이동휘는 김립과 같은 시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재임했던, 독립운동계의 최상급 지도자였다. 김립을 가리켜 그의 심복이라고 지목했음에 눈길이 간다. 편지에서는 사건이 있었던 날을 ‘어제’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2월9일에 쓰였음을 알겠다. 김립이 살해된 다음날 이미 재상하이 한국인 망명자들 사이에 그 소식이 신속히 퍼져나갔음을 짐작게 한다. 게다가 사건 정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알고 있음이 주목된다. 피살자가 누구라는 것, 대낮에 큰길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총상 12발을 입었다는 것, 현장에서 김립이 즉사했다는 것 등 사실을 놀랄 만치 적중시켰다.

편지 발신인이 누군지 일본 경찰 문서에는 거명돼 있지 않기에 그 신상은 알 수 없지만, 상하이 망명자 사회의 내막을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조차 누가 왜 김립을 죽였는지 쓰지 않았다. 알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워낙 기밀 사항이라 편지에 차마 적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과연 누가 김립을 암살했는가? 왜 그처럼 처참하게 죽여야 했는가? 피살자 신원에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 각종 기록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정보를 전한다.


처절한 죽음의 진실을 찾아서


네 가지 설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일본 정보기관이 김립의 암살을 사주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어떤 이는 한국인 망명자들을 의심했다. 한국인 사회주의 진영의 반대파가 그를 죽였거나, 혹은 한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은 자객이 그를 암살했을 것으로 보았다. 어떤 이는 암살자들이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일파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과연 어느 주장이 실제에 부합하는가? 혹시 네 가지 풍설 외에 달리 범인이 있을 가능성은 없는가? 도대체 범인들은 왜 김립을 그처럼 처참하게 죽였는가? 이제 이 의문들의 해답을 찾아나서자. (다음 연재에 계속)


참고 문헌

① ‘구술자료 정진석 소장본’, <遲耘 金錣洙>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222쪽, 1999년 1월

② ‘閘北寶通路發生暗殺案’, <申報> 1922년 2월9일치 14면

③ ‘閘北寶通路暗殺案 續聞’, <申報> 1922년 2월10일치 14면

④ 在杭州領事代理 副領事 淸野長太郞, ‘朝鮮人楊春山ノ暗殺事件ニ關スル新聞論評ノ件’, 1922년 2월18일

⑤ ‘조선인 양춘산, 상해에서 피살’, <동아일보> 1922년 2월14일치

⑥ ‘叙任及辭令’, <독립신문> 1920년 12월25일치

⑦ ‘상해 공동조계 경찰국이 재상해 일본총영사관 앞으로 보낸 통지문’(영문), 1922년 2월16일

⑧ ‘楊春山의 피살’, <독립신문> 1922년 2월20일치

⑨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高警第686號, 在外不逞鮮人ノ落膽’, 1922년 3월1일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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