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과 조선 독립운동 근거지인 북간도에 사회주의 기지 건설한 혁명가 박원희…
프롤레타리아혁명 위해 명멸한 삶


이번호 역사극장의 주인공인 박원희의 남편 김사국과 그 동생 김사민의 사연은 제1165호(2017년 6월12일치) 역사극장 
‘혁명으로 살다간 붉은 형제’에 자세히 담겨 있습니다. _편집자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을 그린 영화 <암살>의 스틸컷. (주)쇼박스 제공


박원희(朴元熙)는 두만강변의 국경도시 회령의 한 여관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26살 나던 1923년 7월4일 아침 8시의 일이었다. 더운 때였다. 전날 최고 기온이 섭씨 31.5℃까지 올랐다. 아침나절이라 선선했지만 그런 기분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회령경찰서로 압송됐다. 국경 너머로 잠입해 들어오는 반일 독립군과 사회주의자를 적발해내는 데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경찰서였다.


북간도 최초 사회주의 탄압 사건


혼자가 아니었다. 셋이 함께 붙들렸다. 젊은 여성이 둘이고, 남성이 하나였다. 모두 북간도의 중심 도시 용정에 소재하는 중등학교 동양학원 관계자였다. 박원희는 그 학교의 영어 교사였고, 32살의 건장한 남성 김정기(金正琪)는 그 학교의 설립자이자 서무주임이었다. 그는 북간도를 기반으로 조선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대종교 제2대 교주 김교헌의 아들로도 유명했다. 그간 경영해오던 <동아일보> 용정 지국 경영을 접고 동양학원 설립과 운영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나이 어린 진규(陳奎)는 그 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인 여학생이었다. 세 사람은 동양학원이 파견한 강연단 멤버였다. 군중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능란하게 연설할 수 있는, 말 잘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강연이 예정된 날이었다. 동양학원이 기획한 여름방학맞이 조선 내지 순회강연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회령을 필두로 청진·함흥·원산 등 함경남북도의 큰 도시들을 돌아 서울에서 마지막을 장식할 참이었다. 7월 한 달 내내 12개 도시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강연회 수입을 모아서 학교 확장에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해 4월 설립된 신생 학교 동양학원은 북간도 조선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1학년 204명, 2학년 54명이 등록해 학생 총수가 258명에 달했다. 설립 첫해 첫 학기가 지났을 뿐인데도 이미 학생들이 차고 넘쳤다. 학교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들었다. 북간도 동포들의 기부에 힘입어 새 학교 부지 4천 평을 마련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건축비가 모자랐다. 이 난관을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학교 관계자들은 순회강연을 고안해냈다. 자금 마련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동양학원의 존재를 선전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었다.

경찰은 무슨 혐의로 강연단을 체포했는가? 사람들은 강연 내용이 불온할까봐 미리 검속하는 것이리라 짐작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경찰의 목표는 강연회를 봉쇄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박원희 일행은 체포된 이튿날 첫 열차편으로 용정의 간도총영사관 경찰서로 이송됐다. 이른바 ‘동양학원 사건’이라고 하는 북간도 최초의 사회주의 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동양학원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북간도 망명 생활의 한 결실이었다. 부부가 해외로 뛰쳐나간 것은 1922년 11월 서울에서 발발한 자유노동조합 사건 때였다. 임박한 체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여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더욱 적극적인 목표를 수립했다. 조선 독립운동의 전통적 근거지인 ‘해도’(연해주와 북간도)에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3·1운동 출소자와 인텔리 여성의 결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박원희. 전명혁 제공

 
부부는 용정 시내에 은밀하게 거처를 마련했다. 행정구역상으로 ‘중국 간도 용정촌 제4구’였다. 용정은 북간도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수도라고 불러도 좋은 곳이었다. 사회주의운동 기지를 구축하는 데는 안성맞춤인 도시였다. 부부는 서울에서 조직한 것과 동일한 유형의 두 가지 사회주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하나는 공산당 조직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청년회 조직이었다. 전자는 조선공산당(중립당) 지부에 해당했다. 달리 말하면 서울파 공산그룹의 북간도 지방조직이었다. 후자는 1923년 4월 결실을 맺었다. ‘간도공산청년회’라는 명칭의 비밀결사를 창립 멤버 13인으로 처음 출범시켰다.

부부는 합법적 공개 영역 활동도 중시했다. 용정에 설립한 동양학원과 영고탑(寧古塔)에 세운 대동학원이 대표적 보기였다. 이 학교들은 서울파 공산그룹이 사실상 주도하는 합법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동양학원은 급진적 학생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지 역할을 했다. 1923년 5월 이 학교 학생회의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현대의 모순을 어이할까’ ‘현대와 종교’ ‘지상천국’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맡은 세 학생이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뒷날 이 강연회는 북간도 사회운동의 효시라고 평가받았다.

용정 생활은 김사국·박원희 부부에게 바쁘고 긴장된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신혼기에서 벗어나지 않은 젊은 부부에겐 두 사람만의 달콤한 생활이기도 했다. 결혼 뒤 둘만의 오붓한 공간이 주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둘이 결혼한 때는 1921년 7월이었다. 3·1혁명에 참가했다가 출옥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랑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마치고 교사로 재직 중인 인텔리 여성의 결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은 신문에까지 보도됐다. <매일신보>는 ‘김사국씨 결혼식, 금 30일에 거행’이라는 제하에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알렸다. 결혼 뒤 두 사람이 신접살림을 차린 곳은 신부의 친정집이었다. 당시 행정구역 명칭에 따르면 ‘경성부 계동 125번지’였다. 말하자면 신랑이 처갓집에 얹혀살았던 것이다. 서울 북촌에 위치한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신부의 아버지는 일찍 사망했으므로 그 집의 호주는 신부의 큰오빠 박광희(朴廣熙)의 몫이었다. 입학난구제기성회,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 등의 활동에 참여한 것을 보면 큰오빠도 사회주의자이거나 그 운동에 공감하는 동조자였다.

김사국·박원희 부부는 사상적 동지였다. 사회주의적 신념을 지녔음은 물론 그 운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는 점에서 동일했다. 사상적 유대가 둘 사이를 더욱 가깝게 했을 것이다.

용정 시절은 젊은 부부에게 자유롭고 오붓한 둘만의 사적 생활을 가능하게 했다. 두 사람이 아이를 가진 것도 바로 이 시절이었다. 젊은 새댁 박원희는 용정 시절에 첫아이를 잉태했다.


박헌영 부인 주세죽과 조직 결성


동양학원 사건은 김사국·박원희 부부가 북간도에서 쌓아올린 공든 탑을 허물어뜨렸다. 합법과 비합법 공간을 교차하면서 양성했던 젊은 혁명가들이 대거 투옥됐다. 3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간도총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고 그중 16명이 예심에 회부됐다. 박원희도 그 속에 포함됐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용정 감옥에 투옥됐다. 임신 중이었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옥고가 더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박원희의 적극성과 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옥중에서 미국인 여성 사회주의자이자 시청각 장애인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번역했다. 영어 교사를 해내고, 영문 저술을 번역할 만큼 그녀의 영어 능력이 출중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행히 박원희의 투옥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그녀는 예심 종결과 더불어 방면 처분을 받았다. 수감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고, 게다가 임신 중이었음이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석방된 박원희는 귀국길에 올랐다. 남편은 경찰 수배망을 피해 지하로 잠행 중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용정, 영고탑을 오가며 비밀결사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에 합류할 수도 있었겠지만 출산을 앞둔 임신부임을 감안했을 것이다.

서울로 되돌아온 박원희는 친정집에서 기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24년 4월29일 아이를 출산했다. 다행히 순산이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건강을 잃지 않았다. 아이는 딸이었다. 이름은 ‘사건’이라고 지었다. 역사 사(史)에, 세울 건(建)자를 썼다. 아마 출산 전에 작명을 해두었던 것 같다. 성별과 상관없이 그 이름을 부여하자고 부부가 논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자라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염원이 엿보인다. 자식의 이름을 ‘조국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 ‘민중을 생각하는 사람’(김사국의 동생 김사민)이라고 지었던 할아버지의 뜻이 다음 세대에도 꿋꿋이 계승됐음을 알 수 있다.


“생각 깊고 성적 좋고 연설 재주”


1928년 1월10일 거행된 박원희 장례식 행렬(위). 서울 중랑구 망우리 공원묘원 안국당 무덤 옆 박원희 묘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임경석 제공


박원희는 혁명가의 아내이자 그 자신이 견결한 혁명가였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운동 일선에 복귀했다. 그해 5월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창립에 참여했다. 14인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고, 창립 집행위원 3인 가운데 1인이었다. 창립 집행위원의 면면을 보면 흥미롭다. 박원희, 허정숙(許貞淑), 주세죽(朱世竹)이 그들이다. 셋 다 배우자가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허정숙의 남편은 임원근(林元根)이었고, 주세죽의 남편은 박헌영(朴憲永)이었다. 다시 말해, 여성동우회 창립 집행부는 커플 사회주의자들로 이뤄져 있었다.

박원희는 여성운동의 조직자였다. 각종 여성단체와 사회단체의 설립에 참여했고, 그 임원진에 취임하기를 사양하지 않았다. 1925년에만 서울청년회 집행위원, 노동교육회 대회준비위원, 경성여자청년회 집행위원, 경성청년연합회 집행위원, 국제청년데이 기념식 준비위원을 역임했다. 이듬해에는 중앙여자청년연맹 집행위원에 취임했고, 그 이듬해에는 여성계의 민족통일전선단체인 근우회 설립에 참여해 집행위원에 선임됐다.

박원희는 강연회의 단골 연사였다. 강연 요청이 있으면 기꺼이 응했다. 몇 가지 보기를 들면, 1924년 러시아혁명 7주년 기념 사상단체 연합강연회에서 ‘러시아혁명과 무산계급’이란 제목으로 연단에 섰다. 이듬해에는 서울청년회 춘계 강연회, 국제무산부인데이(여성의 날) 기념 강연회에 출연했다. 특히 여성문제가 중점 분야였다. 그녀의 강연 제목을 보면 ‘현대사회와 부인의 사명’ ‘국제무산데이의 유래’ ‘자유결혼 문제에 대하여’ ‘각국 부인운동과 조선 부인운동’ 등이었다. 서울과 지방도 가리지 않았다. 요청이 있으면 지방 출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북 이리, 평남 진남포, 평양, 안주, 함남 원산 등이 그녀가 다녀온 출장지였다.

일찍이 오빠 박광희가 젊은 시절 여동생의 인물됨을 평하되, “생각이 제법 깊고, 공부 성적도 좋으며, 연설 재주가 있다”고 했음이 인상적이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언변이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단체 임원진 내에서 역할을 분담할 적에는 으레 교양부를 맡았다. 회원과 일반 대중을 상대로 교육·선전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바쁘게 돌아다니면서도 어린 딸의 육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린 사건이는 몸이 약했다. 고열이 나고 앓는 경우가 많았다. 박원희가 딸을 업고 서둘러 병원에 가는 모습을 목도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목격자에 따르면 “흰 저고리 흰 치마에 어린 아기를 절구통같이 들쳐 업고, 부스스한 트레머리로 더풀더풀하며 재동 네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박원희도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 김사국과 마찬가지로 건강을 잃었다. 1927년 12월 초에 시작된 몸살감기가 그녀를 중병으로 몰아갔다. 전혀 예기치 않게 급속히 병세가 악화됐다. 이듬해 1월5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31살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에 사람들은 몹시 놀랐다. 그뿐이랴. 그 가족에게 거듭 몰려오는 불운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홀로 남은 어린 딸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철모르는 사건이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부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문밖에서 나는 조문객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엄마 온다고 부르며 울었다. “이 애를 보는 사람 누군들 눈물을 참을 수 있겠는가?” 비극이 꼬리를 무는 이 집안의 가족사를 취재하던 신문기자는 이렇게 썼다.


혁명가 부모 죽음 뒤 ‘사건’이의 삶


박원희의 장례식은 1928년 1월10일 거행됐다. 근우회를 비롯한 34개 사회단체가 합동으로 장례식을 주관했다.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 고 박원희’라는 명정이 덮였다. 그녀는 2년 전에 먼저 간 남편 김사국의 수철리 묘지에 함께 안장됐다.

사건이의 운명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부모 없이 자라야 할 아이의 미래가 안쓰러웠다. 북간도 용정에서 박원희와 함께 일했던 옛 동지들이 그녀의 1주기가 되던 날 추도회를 열었다. 용정의 여자청년회 주최로 열린 추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어린 사건이에게 위로금 10원과 저고리 하나를 만들어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조선일보> 1928년 4월8일치 지면에 고 박원희의 어린 딸에게 전달할 돈과 물건이 도착했다는 보도 기사가 자그맣게 실렸다.

사건이는 잘 자랐다. 다행히 외할머니가 양육을 맡았다. 박원희의 친정어머니가 일찍 가버린 딸을 대신하여 어린 피붙이를 길렀다. 박원희가 사망한 지 5년 뒤에, 한 신문기자는 9살로 성장한 사건이가 서울 북촌의 재동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다고 보도했다. 

 

참고 문헌

① ‘동양학원 巡講, 의외의 禍로 중지’, <동아일보> 1923년 7월15일치

② 재간도총영사 鈴木要太郞, ‘기밀 제271호, 동양학원 학생 조사에 관한 건’ 1923년 8월27일/ <불령단관계잡건-재만주의 부> 3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③ ‘간도 동양학원, 내지 巡講 계획’ <동아일보> 1923년 7월5일치

④ Ким-Хобан(김호반), Доклад(보고), 1923년 10월30일, с.6,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83 л.108-114

⑤ 새밝, ‘고 박원희 여사 회상’ <삼천리> 3-12, 18쪽, 1931년 12월

⑥ <매일신보> 1921년 7월30일치

⑦ 김사건, 장묘시설사용허가신청서, 1993년 12월18일

⑧ ‘여성동우 창립’ <동아일보> 1924년 5월11일치

⑨ 車相瓚, ‘想像과 印象記, 만나보기 前과 만나본 後: 朴元熙氏’ <별건곤> 3, 43쪽, 1927년 1월

⑩ ‘路上의 人’ <별건곤> 4, 39쪽, 1927년 2월1일

⑪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3)’, <동아일보> 1928년 1월9일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778.html 



 비합법과 합법 운동 병행하며 초기 사회주의운동에 큰 족적 남긴 김사국·김사민 형제
 조선공산당·고려공산청년회 활동 주도하다 폐결핵으로 숨지고 정신이상 비극적 생애



아일랜드 해방투쟁에 참여한 한 형제의 비극적 삶을 그린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 한겨레 자료


김사국씨의 출생지인 충남 연산(連山)에서 씨가 다섯 살 때에 씨의 진 아우 사민군과 24세 된 어머니를 남겨두고 가장 사랑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로부터 씨의 가정에는 눈물의 바다를 이루기 시작이다. 어머니 안국당씨는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눈물겨운 상청 앞에서 3년간이나 보냈다.” 

두 형제의 불행한 어린 시절에 대해 뒷날 한 신문 기사는 이렇게 전했다. 아버지가 예기치 않게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형은 5살이고 동생은 이제 막 갓난아기 때였다. 두 사람은 인생의 첫 출발점부터 커다란 결핍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


아버지 김경수(金慶秀)가 어린 아들들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지주였다. 떵떵거리는 대지주는 아닐지라도 한 해에 수백 석의 소작료를 거두는 유족한 집안이었다. 거주지인 충남 연산에는 물론이고 강원도에도 땅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두 아들에게 범상치 않은 이름을 남겨주었다. 큰아이에게는 생각 사(思)에 나라 국(國)자를 붙였고, 작은아이에게는 백성 민(民)자를 지어줬다. 국가와 민중을 생각하면서 살라는 뜻이었으리라. 가운데에 위치한 생각 사(思)자는 항렬이었다. 그의 본관은 연안 김씨였는데, 그 22세손의 항렬자는 ‘○수(秀)’이고 23세손은 ‘사(思)○’였다. 젊은 아버지는 문중의 항렬에 따라 자식들의 이름을 짓되, 그 속에 바람직한 삶의 규범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 약소국 조선의 운명이 위태롭던 시절이었다. 어린 아들들이 공동체의 선과 정의를 위해 살기 바랐던 아버지의 강렬한 내면의식이 느껴진다. 그는 의병 봉기에 공감하는 위정척사파 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근대화 정책을 지지하는 소장 개화파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 젊어서 요절한 김경수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더 이상의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기가 막힌 이는 젊은 아내였다. 20대 중반 새파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문자 그대로 청상과부가 된 안씨 부인의 처지는 참으로 딱했다. 평생을 남편 없이 홀로 지내야 할 뿐 아니라 어린 두 자식을 키워야 했다. 그녀는 당대의 일반화된 규범을 따랐다. 어린 자식들을 거두는 한편, 남편 삼년상을 치렀다. 사후 2주년에 지내는 제사인 대상(大祥)까지 마쳤다.


삼년상을 마친 안씨 부인은 시댁을 떠나 친정에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붙이가 사는 충북 충주로 이사했다. 친정 부모와 오라비, 자매에게 의지하면서 두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다. 두 아이는 이제 그녀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 되었다.

두 아이는 병치레가 잦았던 것 같다. 진맥을 위해 한의원들이 자주 출입했다고 한다. 더러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들도 다녀갔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안씨 부인은 불길한 말을 듣곤 했다. 형제가 둘 다 오래 살 운명이 아니라는 예언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요절한다는 말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안씨 부인은 이 예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두 아이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실행에 옮긴 것을 보면 말이다. 그녀는 절대자에게 귀의해 그 가호를 빌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멀리 떨어진 금강산의 유명한 사찰 유점사(楡岾寺)를 택했다.

안씨 부인은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입산했다. 자신은 머리를 깎고 장삼을 몸에 둘렀으며, 아이들에게는 독선생을 붙여서 한학 교육을 했다.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호적부에 기재된 ‘안국당’이란 그녀의 이름은 아마 유점사 시절에 불리던 당호인 듯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영특했다. 부처님의 도움이 있었던지, 두 아이는 몇 번만 일러주면 곧 돌아앉아서 줄줄 외울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아픈 데 없이 건강히 잘 자라주었다.


아비의 뜻대로 3·1혁명 참가한 형제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 열린 신생활사 사건 재판 사진. 앞줄 왼쪽 흰옷 입은 사람이 김사민으로 추정된다. 임경석 제공


어머니 안국당은 분별 있는 여성이었다. 산중에서 한학만 배우다가는 사람 노릇 하기 어려운 시대가 왔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결단을 내려서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신교육을 이수시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사국은 보성학교에서 수학했다. 보성학교란 1906년에 신입생 240명을 모집해 개교한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수송동 44번지 오늘날 조계사 자리에 있었다. 그는 학업을 마친 뒤 한때 함경도 덕원소학교에서 교사로 재임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요동반도에 위치한 관동도독부 육영학교에 들어가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중국어를 배운 것도 이때였다.

김사민은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아마 소학교를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조선보병대에 입대했다. 조선보병대란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 이후 조선조 왕가 경비를 위해 잔존시켰던 조선인 군대의 명칭이었다. 1931년까지 존속했는데, 해산 당시 병력은 200명이었다. 무기와 탄약, 인사관리 등을 조선 주둔 일본군이 관장했다. 그는 기질적으로 무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이 부대에서 3년간 근무했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일본 식민지로 전락한, 망해버린 조국의 해방을 위한 길에 기꺼이 나섰다. 두 사람은 1919년 3·1혁명의 참가자였다.

3·1혁명 당시 학생대표를 지낸 강기덕(康基德)의 회고에 따르면,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사국이 입국해 학생층의 독립선언문을 따로 기초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3·1혁명의 한 전환점인 한성정부 수립의 계기를 만든 이도 김사국이었다. 그는 1919년 4월 13도 대표자들로 조직된 국민대회를 개최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이 사건을 가리켜 ‘국민대회 사건’이라고 한다. 김사국은 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고,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형이 투옥 중일 때 아우가 새로운 투쟁을 조직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조선을 내방했을 때, 그에 호응해 조선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일대 시위운동을 기획했다. 김사민은 이 사건으로 동료 15인과 함께 체포됐다. 그 결과 인천 앞바다에 위치한 외딴섬 덕적도에 1년간 거주 제한 명령을 받았다.

두 형제는 민족독립운동 투사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운동의 개척자라는 점에서도 공통성이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걸었다. 비합법 영역에선 공산주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합법 공개 영역에선 노동·청년·사상단체 운동의 확장을 꾀했다. 두 사람이 참여한 비밀결사는 조선공산당(약칭 중립당)과 고려공산청년회였다. 특히 김사국은 중립당의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김한(金翰)과 더불어 양대 지도자로 지목받았다. 김한이 사회주의운동의 ‘책사형’ 지도자라고 한다면, 김사국은 ‘투사형’ 지도자라고 평가받았다.

김사국·김사민 형제는 1922년 8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의 5인 간부진에 나란히 취임했다. 국제공산청년회 가입 단체로서 조선의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지휘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최초 사회주의 재판, 신생활사 사건


합법 공개 영역에서 두 사람의 활동 거점이 된 단체들이 있었다. 청년운동에선 서울청년회가, 노동운동에선 노동대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두 형제는 이 단체들을 거점으로 하여 사회주의의 대중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거점 역할을 한 사회단체 가운데 서울청년회가 두드러진 활동성을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일군의 사회주의자를 ‘서울파’라고 불렀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바로 서울파 공산그룹의 유력한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그중에서도 김사국은 동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두뇌가 명석하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군의 머리는 천하에 가장 밝아서,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비평은 듣는 자로 하여금 경탄케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김사국은 1922년 말부터 2년 동안 해외로 망명해야 했다. 이른바 ‘자유노동조합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이다. 경찰의 추적을 받은 그는 좁혀오는 체포망을 피해 해외 망명길을 택했다. 망명지는 북간도와 연해주였다. 한 글자씩 따서 ‘해도’라고 묶어 부르던 곳이다. 일찍이 <정감록>에서 ‘해도’로부터 진인이 출현해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당시 사람들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구원할 근거지가 바로 북간도와 연해주라고 생각했다.

김사국과 김사민은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들은 한국 사회주의운동이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 속에 배태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서구에서처럼 노동운동의 한 갈래로 사회주의가 발전돼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특징은 식민지를 경유해 근대사회로 진입한 광범한 비서구의 각 민족과 국가의 사회주의운동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마는, 사람들은 일단 불행에 빠지면 과거의 불길한 예언을 곧잘 상기하는 법이다. 우연일지언정 외견상 어쩜 그렇게 잘 들어맞는지 놀라울 때가 있다. 두 형제의 운명이 그랬다. 마치 예언이 적중한 것만 같았다.

아우 김사민이 먼저 화를 입었다. 그의 나이 26살 되던 1923년 2월1일이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다.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라는 지목을 받던 ‘신생활사(新生活社) 사건’에 연루돼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은 터였다. 죄목은 “자유노동조합을 설립하고, 그 취지서를 기초했으며, 그 취지서를 <신생활> 잡지에 게재”한 혐의였다. 자유노동조합이란 1922년 10월29일 창립한 노동단체로서, 서울의 지게꾼과 막벌이꾼 200여 명을 회원으로 한 직업별 노동조합이었다. 그즈음 다른 노동단체들이 주로 지식인 출신자로 구성된 데 비하면, 이채롭고 본격적인 노동자 단체였다. 일제하 노동운동 역사 속에 획기적 의의를 갖는 조직이었다. 그 단체의 설립을 김사민이 주도했다. 조선총독부는 이 단체를 불온하게 여겼다. 김사민을 비롯한 간부들을 체포해 재판에 부쳤다. 간신히 체포를 피한 다른 간부들은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코뮤니스트


1926년 5월12일 40개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른 김사국 영결식 때 배포된 사진(왼쪽). 김사국 영결식. 만장이 수십 개 늘어서 있고, 그중 몇 개는 글자가 보인다. ‘애도 고 김사국 동무’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임경석 제공


김사민은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불법 감금을 하느냐”고 항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옥중 규칙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2월1일 그날도 그랬다. 유죄판결을 받은 지 보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는 옥중 규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간수장에게서 ‘단단히 설유(말로 타이름)’를 받아야 했다. 아마 가혹한 징벌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 뒤 간수 두 사람의 감시가 붙은 상태에서 구치감 문을 들어설 때였다. “김사민은 용맹하게 간수의 칼을 빼어 문턱에 섰던 간수 요코오 마사이치(橫尾政一)의 머리를 찍었”다고 한다. 간수는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호송됐다. 이 사건은 김사민의 꺾이지 않는 기개와 거센 기질을 잘 보여준다.

이 센세이셔널한 사건은 조선인 사회에서 큰 주목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반항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총독부 쪽의 판단과 보도 통제로 인해 다시는 신문 지상에 거론되지 못했다. 가혹한 보복을 당하지 않았을까, 몸은 무사한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무려 석 달이 지난 뒤에야 겨우 가족 면회가 허용됐다. 그해 5월3일 둘째아들을 면회하고 나온 어머니 안국당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면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김사민은 홀로 걷지 못하는 상태였다. 앞뒤로 간수 3명의 부축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머니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겨우 눈을 한 번 들어보았을 뿐 아무 소리도 없이 멍하게 허공만 쳐다봐다고 한다. 정신이상 증상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가혹한 보복과 폭력을 가했기에, 그처럼 자긍심 높던 정신이 끝내 파괴되고 말았을까.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렸다.

김사민은 이후 온전한 정신상태를 회복하지 못했다. 1924년 7월 만기 출옥했지만, 노동운동 일선에 복귀하지도 못했고 정상적인 사생활도 영위하지 못했다. 물론 결혼도 할 수 없었다. 그를 가엾게 여기는 옛 동료들의 호의로 청년총동맹 회관 한쪽에 자그마한 숙소를 마련했지만, 종신토록 어머니 안국당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그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수염을 깎지 않은 채 서울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곤 했다. 그 때문에 ‘장발홍염(長髮紅髥)의 사회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신체는 살아 있었지만 영혼은 26살 때 죽고 말았던 것이다.

아우의 삶을 파괴한 것이 식민지 통치 기관의 폭력인 데 반해, 형 김사국의 삶을 파괴한 것은 질병이었다. 1924년 5월 해외 망명지에서 서울로 되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폐결핵에 걸려 있었다. 중증이었다. 폐결핵이란 몸 안에 잠복해 있던 결핵균이 신체의 면역력이 약해졌을 때 발병하는 질환이었다. 그는 해외 망명지에서 이 병을 얻었다. 불규칙적인 식사와 불안정한 숙소, 끊임없는 업무 스트레스와 피로 누적이 그의 면역력을 약화했던 것이다.

김사국은 귀국 뒤 가족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내이자 동지인 사회주의자 박원희(朴元熙)의 병구완을 받았다. 병세가 오르락내리락 변동이 있었다. 증상이 혹은 더하고 혹은 덜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 시절 폐결핵은 치사율이 높은 위험한 질병이었다. 게다가 김사국은 투병 중에도 일손을 놓는 일이 없었다. 그때에는 단일한 전국적 전위 정당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기 위해 여러 비밀 공산주의 그룹이 밀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내지 중심론을 표방하며 이 논의를 주도했다.


35살 폐결핵으로 사망한 김사국


이러한 긴장과 과로가 그의 병세를 악화했음이 틀림없다. 급기야 귀국 2년째 되던 때 걷잡을 수 없이 병이 깊어졌다. 1926년 5월 초 입원 치료를 위해 관립 총독부병원을 비롯해 여러 사립병원의 문을 두드렸으나 어디서도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병이 너무 깊어서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김사국은 1926년 5월8일 사망했다. 향년 35살이었다.

어머니 안국당은 오래 살았다. 71살까지 살았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섭섭한 나이지만, 그때만 해도 환갑을 넘기면 장수했노라고 축복받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만년은 궁핍했다. 수중의 재산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생활의 방도는 탁발이었다. 머리 깎고 장삼을 갖춰 입은 그녀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경문을 읽어주고 얻는 탁발이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그녀는 맏아들 김사국을 보낸 이후 한 번도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그날그날 밥때를 챙기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제사상을 차리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맏아들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노모의 마음은 무거웠다. 사국이 제사나 한번 지냈으면…. 노인의 탄식은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노라고,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던 신문기자는 그렇게 썼다.


참고 문헌

① ‘비극 接踵하는 고 김사국씨 가정 (2)’, <동아일보> 1928년 1월8일치

②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조선일보> 1933년 5월4일치

③ ‘3·1절을 앞두고 떠오르는 피의 기록, 당시의 전국학생대표 康基德氏談’<경향신문> 1950년 2월26일치

④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희망> 1957년 2·3·5월호. <죽산 조봉암 전집 1>, 세명서관, 344∼345쪽, 1999년

⑤ ‘소식’, <청년조선 1>, 1922년 2월15일

⑥ ‘인쇄기 1대도 몰수’<동아일보> 1923년 1월17일치

⑦ ‘재옥 중의 金思民, 看守의 검으로 看守를 斫傷’, <조선일보> 1923년 2월2일치

⑧ ‘김사민의 위독설’<조선일보> 1923년 5월9일치

⑨ ‘고 김사국씨 母堂 斷腸의 탄식’<조선일보> 1933년 5월4일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650.html



역사는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번은 비극으로 연출되는 극장이다. 강자의 입장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희극이었지만 대다수 약자의 시선으로 보면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 비극은 어쩌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 삼아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교직하는 이유다. 우리가 잊고 있던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을 드러낼 임경석의 역사극장은 3주마다 개봉한다. _편집자
 


영화 <밀정>의 한 장면. 워너브라더스코리아(주) 제공


<한겨레21>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성균관대 사학과의 임경석 교수입니다. 이 지면을 통해 앞으로 3주에 한 번씩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근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입니다. 사료를 들여다보는 게 직업이지요. 오래된 옛날 기록을 뒤져서 유용한 정보를 캐내는 일을 합니다. 수집한 정보가 많아지면 적절히 분류도 하고요, 그것을 분석해 역사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냅니다. 지루하기도 하지만, 맛을 들이면 꽤 재밌습니다. 작으나마 새 지견을 얻을 때는 보람도 느낍니다.

제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우리 공동체가 걸어온 길입니다. 특히 가까운 과거의 궤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최근의 궤적에 주목하냐고요?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좌표를 알아야 항로를 설정할 수 있는 법입니다.


역사 본질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


콜럼버스 이래 세계는 하나로 통합돼왔습니다. 지구의 여기저기에 분산돼 있던 여러 문명과 민족이 연계를 맺게 되었지요. 그 과정은 평화롭거나 수평적이지 않았습니다. 서구는 우월한 힘을 이용해 비서구 지역을 수직적이고 위계적으로 통합해나갔습니다. 세계 어느 지역, 어느 민족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속에서 한국은 유감스럽게도 약소국 위치에 놓였습니다. 자립적으로 근대를 맞이하지 못하고 식민 시기를 경과해야 했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망국, 식민지, 전쟁, 분단, 독재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또한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영웅적 분투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쯤 전에 역사가 박은식은 한국 역사를 ‘고통’과 ‘피’의 역사로 형상화했습니다. 그는 <한국통사(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血史)>를 썼습니다. 우리 역사의 본질을 꿰뚫는 뛰어난 레토릭을 구사했던 거죠.

저는 박은식의 문제의식을 배우려 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고난과 분투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구 주도의 위계적인 세계 체제는 지금도 계속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 체제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력하고 안정화돼 있는 듯 보입니다.

이 현실을 감안해 저는 두 종류의 사료군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하나는 억압자들의 기록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식민지 통치 기록, 옛 일본제국 외무성이 생산한 해외 한국인에 대한 자료가 그것이죠. 다른 하나는 저항자들의 기록입니다. 옛 코민테른 문서보관소의 한국 관련 문서가 대표적 보기입니다. 사회주의운동과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 풍부하게 보관돼 있습니다.

정반대쪽에 선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비교하면서 읽어왔습니다. 양자를 교차시키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불꽃이 튑니다. 두 개의 시선이 충돌하는 것이죠. 관찰자의 시선이 어떠한가에 따라 동일한 사건이 완전히 상이한 이미지를 띠고 나타납니다. 이 불꽃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실 추구의 사명을 지닌 역사학자는 모순에 찬 기록을 비교하고, 엄정한 사료 비판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신뢰할 만한 역사적 지식이 생산될 가능성이 주어지는 거죠.

이제 제가 어떤 일에 종사해왔는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근대사를 연구해왔습니다. 이 연구 분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사료의 분량이 방대하다는 점입니다. 총독부 문서가 그러하고, 코민테른 문서가 그러합니다. 외무성 기록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오래도록 이 분야 연구에 집중해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사료들을 읽고 있습니다. 얼추 계산해도 벌써 30년이 넘었군요. 꾸준한 작업 덕분에 적잖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맘먹고 한번 헤아려봤습니다. 그간 80여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고 4권의 단행본을 간행했더군요.


역사 대중화에 맞춤한 글쓰기


이 지면을 통해 ‘역사 에세이’를 연재하려 합니다. 에세이 장르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글쓴이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산문 양식입니다. 그 양식을 빌려 역사에 대해 쓰겠습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므로 다채로운 글쓰기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합니다.

오늘날 역사학의 주된 글쓰기 장르는 논문입니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논문 작성에 전념합니다. 그 이유는 논문이 역사적 지식을 생산하는 데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논문은 형식과 규범이 고정화된 역사 글쓰기의 한 양식입니다. 문제 제기를 명백히 해야 하고, 기존 연구에 비춰 독창적인 입론을 세워야 하는 글입니다. 학술지에 기고할 때는 분량도 일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학계 내부의 소통에 최적화된 장르입니다.

역사학자들이 논문 집필에 몰입하는 이유에는 학문 외적인 것도 있습니다. 취업과 승진, 연구 프로젝트 수주 등이 연구논문 실적과 연계되기 때문입니다. 논문 실적을 두텁게 갖추지 않고서는 안정된 연구 여건을 보장하는 직장을 갖기 어렵습니다. 취업한 뒤에도 승진과 재임용의 문턱을 넘으려면 논문 실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논문은 시민사회와 폭넓은 소통을 목표로 하는 글쓰기 양식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전문가 내부의 소통에 목적을 둔 글이라서 역사 대중화에 필요한 덕목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학이 시민사회와 소통하려면 논문을 벗어나 다른 장르를 개척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의 역사의식 형성을 돕고 정체성 통합을 도모하는 데 적합한 글쓰기가 요구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자기 확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 다는 이유로 코카서스 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다. 그러나 자기해방의 확신으로 제우스와 타협하길 거부했다. 한겨레


역사 에세이가 그 요구에 부응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는 이야기를 담기에 적합한 글쓰기 양식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제가 전하려는 것은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들입니다. 사료를 대하다보면 더러 감정이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가슴 뭉클하고, 눈물겹고,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이야기를 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논문을 쓸 때는 이런 풍부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기 쉽지 않습니다. 논문은 논리적 짜임새를 중시해서 이런 이야기가 배제되기 일쑤입니다. 논문의 논리적 짜임새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에세이 장르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와 개인의 사적인 정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논문에는 담기 어려운 이야기를 에세이에는 쉬이 담을 수 있습니다.

역사 에세이를 통해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특히 비극과 희극을 형상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자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에는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가 가득 차 있습니다.

비극은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비극이 단순히 슬픈 얘기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 비극의 경우를 볼까요. 그리스 비극의 특성은 신이 부여한 객관적 질서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투쟁을 그리는 데 있습니다. 이 투쟁은 인간의 패배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신의 질서는 엄연하고 객관적인 것이므로 그에 맞서는 인간의 행위는 실패하기 쉽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인지라 패배와 좌절의 원인은 항상 자기 내부에 있습니다.

위대한 비극은 단지 패배만을 그리는 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클라이맥스는 인간이 참담한 실패 속에서도 해방을 향한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을 형상화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인간상을 형상화하는 것이 비극적 서사의 핵심이며, 또한 이 ‘역사 에세이’의 목표입니다. 이 연재를 통해 신이 부여한 운명을 거역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그들의 좌절과 고뇌를 재현할 것입니다.

인간에게 문명을 일굴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코카서스산맥의 높은 바위산에 묶여 고통받는 프로메테우스를 한국 역사에서 형상화하려 합니다. 그리스 비극 작가 아이스킬로스는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했습니다. 13세대의 역사가 지난 뒤에는 제우스도 파멸에 부딪힐 것이며, 그때 자기는 해방될 것을 확신하노라고. 그러한 내면의 확신 덕분에 프로메테우스는 고통을 감내하며 제우스와 타협하기를 단호히 거절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그 확신을 역사 에세이에 담고 싶습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하다



역사 속에서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을 일컫는다.
그들은 식민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반면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유관순(왼쪽)과 이완용은 비극적 서사와 희극적 서사의 상징적 인물로 꼽을 만하다. 한겨레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선한 사람입니다. 도덕성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을지라도 보통 사람들보다 다소 더 선한 사람입니다. 평균 수준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정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비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다릅니다. 그는 보편적 인류애를 실현하려 합니다. 공공선을 옹호하기 위해 사적 이익을 희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식민지 통치 권력에 맞서 감연히 혁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예견되는데도 그랬습니다. 합법적 공개 영역의 활동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을 때, 그들은 수배망을 피해 해외로 도피하거나 국내에서 신분을 감추고 비밀리에 생활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여의치 않을 때는 감옥 가는 것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험준한 산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불운하게도 혹독한 고문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공동체 구성원은 그렇게 스러져간 사람들을 기억할 의무가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인가요. 그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입증해야 하는 도덕적 책무가 있습니다.

희극적 서사의 주인공은 비극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평균 수준보다 더 낮은 윤리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정의와 공공성을 훼손하면서까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희극은 도덕적으로 저열한 군상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공공의 이익보다 사적 이익을 우선시한 사람, 대의를 저버린 사람,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 외세를 추종해 민족적 이익을 훼손한 사람이 그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희극은 보통보다 못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인간의 온갖 악에 관련됐다고 묘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의 결함과 창피스러운 점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의 특권적 지배계급의 뿌리는 식민지 시대 관변 유력자층에 잇닿아 있음을 드러내면 족합니다. 그들은 식민 체제가 종언된 뒤에도 몰락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외세 밑에서 지배 시스템을 갱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사회적 힘은 오늘날 거대하게 성장했지만, 그 본질이 우스꽝스러운 것임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습니다. 지배계급 역사는 희극의 역사로 그려야 합니다.

희극적 서사는 힘이 강합니다. 현실을 변혁하는 직접적 무기가 될 잠재력이 있습니다. 현존 지배질서를 전복할 가능성을 내포하므로, 희극은 위험하고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장미의 이름> 속 역사적 통찰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은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14세기 중세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살인 사건의 배후에는 바로 ‘희극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망실된 것으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이 그 수도원에 비밀리에 소장돼 있고, 그것이 세상에 유포되는 걸 막기 위해 살인이 저질러진다는 얘기이지요. 희극론이 세상에 나오면 교회와 기득권층이 누리는 기존 권력과 영향력이 위태로워질까 염려했던 거지요. 희극이 현존하는 권력과 지배질서에 대해 얼마나 강력한 전복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희극의 본질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돋보입니다.

제 의도는 역사 에세이에서 비극과 희극 서사를 전하는 데 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사료에서 발굴한 이야기를 소재로 비극적 혹은 희극적 형상화를 도모하겠습니다. 더러 그에 못 미치는 이야기도 있겠지요. 그저 재미로 읽는 이야기에 머물지도 모릅니다. 설혹 그렇더라도 관대하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비극적 혹은 희극적 서사를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548.html





'남영동' 찾아내고 경찰과 대거리... 여자들은 이렇게 싸웠다        

                                   

  

1985년 10월 29일 서울대 민추위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를 보도한 경향신문. 이 사건의 배후가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라는 검찰 발표를 그대로 베껴 쓰고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최환 공안검사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2017년 개봉된 영화 [1987]에서 그는 박종철 고문사를 밝힌 의로운 영웅으로 묘사됐지만, 1985년의 그는 권력에 복종하는 다른 공안 검사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다. ⓒ 민청련동지회


"김근태는 빨갱이다!"

1985년 10월 29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김근태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공안부장 최환이 마이크를 잡고 김원치, 최연희, 고영주 등 공안부 검사 8명이 배석했다.

발표에 따르면 최근의 모든 극렬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해온 용공 지하조직이 있다고 했다. '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민추위)였다. 이 비밀 조직은 위원장 문용식을 비롯하여 46명의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들로 이뤄져 있었다. 검찰은 그중 26명을 구속했고, 3명을 입건했으며, 17명을 수배했다고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검찰은 비밀 단체 민추위 배후에 또 비밀스런 배후조종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김근태였다.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는 1985년 2월 이래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과 만나 그 활동을 고무, 격려, 조종해 왔다고 지목받았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김근태는 '운동권의 대부'이고, '극렬 좌경의 사회주의자'이며, 폭력 시위 때마다 장외에서 조종하는 자였다. 그뿐 아니라 그의 가족은 온통 시뻘건 '빨갱이' 집안이라고 매도됐다. 큰형, 둘째 형, 셋째 형이 죄다 해방 후에 좌익에 가담한 끝에 월북했고, 숙부도 마찬가지였다. 외가도 그렇다고 한다. 외사촌 형 두 사람이 6.25전쟁 당시 부역 끝에 월북했고, 외숙모는 여성 동맹 활동 탓에 처형당했다. 처가도 그랬다. 장인은 6.25때 인민위원장으로 부역했고, 처이모부도 부역 끝에 월북했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친가, 외가, 처가 삼족이 모두 북한과 연루되어 있고, 김근태에게도 그런 혐의가 있다는 주장을, 국가권력이 언론매체를 통해 널리 유포했던 것이다.

독재정권의 의도는 명백했다. 고조되는 학생운동의 모든 책임을 민청련 김근태에게 지우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북한과 연루되었다는 구체적인 '범죄 사실'은 특정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구체적인 범죄사실에 대하여는 앞으로도 철저한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좌경, 용공 이미지를 뒤집어씌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1985년 11월 4일 열린 고문공대위에서 발언하는 고 문익환 목사 ⓒ 민청련동지회


온 몸을 던져 고문을 고발하다

검찰 발표에 대한 항의 운동이 불붙었다. 민청련은 '소위 '민추위' 사건과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배후조작 발표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해, 검찰의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6개 항에 걸쳐서 낱낱이 밝혔다. 그리고 "고문에 의한 강압 수사이므로 수사 결과는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선언했다. 또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수사 결과를 언론에 보도하여 여론 재판을 유도"하는 헌법 위반 행위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은 독자적으로 '현 정권의 정치적 기만술을 폭로한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배후 조작과 김근태 가족에 대한 모략 선전에 항의하고, 민청련 간부의 석방, 이을호에 대한 전문의 치료, 고문 담당자의 처단, 용공 조작의 중지 등을 요구했다.

그에 멈추지 않았다. 민청련 회원과 구속자 가족 30여 명은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 투쟁에 돌입했다.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이 주도하는 네 번째 농성이었다. 농성 참가자들은 새로운 항의 방법을 개발했다. 기독교회관이 큰길가에 위치해 있는 점을 활용하여 건물 난간에 '고문경찰 처단하라', '민청련 탄압 중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창문을 통하여 매일 한두 차례씩 가두방송을 감행했다.

소설가 김국태도 나섰다. 현대문학상(1979년)과 월탄문학상(1981년)을 수상한 중견 작가인 그는 김근태의 친형이었다. 그는 검찰 발표에 항의하는 글을 썼다. "나의 가계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왜곡, 조작한 사실에 분개"한다고 집필 동기를 밝힌 그는 "다행인 것은 나의 동생 김근태가 검찰 발표대로 나의 가계의 불행한 어느 친지와 접선한 사실이 없다"는 점이라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언론이 "나의 가계를 왜곡, 조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작가는 이렇게 묻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반 대중들에게 관습화되어 있는 고정 관념을 건드려 검찰 당국 자신의 비논리성을 은폐하고 동정받자는 저의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민청련 여성들의 항의 운동은 외롭지 않았다. 공대위와 그에 합류한 여러 세력이 동참했다. 제4차 농성 마지막 날인 11월 4일 공대위는 농성장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문익환 목사를 비롯한 공동대표 인사들과 민청련 농성자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세계 인권단체에 보내는 메시지' 등을 발표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4일 뒤인 11월 8일에 혜화동성당에서 '고문 및 용공 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농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시민대회와 시위운동을 벌이겠다는 선언이었다.

   

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미사와 보고대회 전경 ⓒ 민청련동지회


'고문 반대" 농성에서 거리 시위로 확산

뭇사람들의 관심과 긴장 속에서 보고대회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경찰은 수천 명의 사복 및 전투 경찰을 동원하여 혜화동성당 주위를 포위했다. 보고대회에 참석하려고 모여드는 시민들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과 문익환 민통련 의장을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들은 자택에 연금당했다. 시내 중심가 곳곳에도 기습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관들을 배치했다. 마치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시민들은 공포감을 느꼈다.

결국 보고대회는 경찰의 통제로 개최되지 못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공대위 임원들과 민청련 여성들 70여 명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약식으로 보고대회를 열고 30분가량 노래 부르며 항의의 뜻을 표출했다.

시민대회 개최가 봉쇄되자 공대위는 실행 가능한 다른 방법을 택했다. 11월 11일부터 3일 동안 민추협 사무실에서 연합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고문수사와 용공 조작에 항의하는 것으로는 제5차 농성인 셈이었다.

이 농성에는 구속자 가족들을 비롯하여 민청련, 민통련, 충남민주운동협의회, 가톨릭농민회, 민중불교운동연합, 인천사회운동연합, 목민선교회, 민주헌정연구회, 신민당, 사민당, 민추협 등에서 100여 명이 참석했다. 참가 단체도 많아졌고 참가자 숫자도 훌쩍 늘었다. 농성자들은 이미 개발된 행동 전술을 되풀이 활용했다. 건물 앞뒤로 '살인적 고문 및 용공 조작을 즉각 중단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핸드 마이크로 거리의 시민을 향해 구호와 노래를 전했다.

이처럼 규모가 커진 까닭은 구속자들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고문수사에 대한 시민의 공분이 고조됐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민청련 탄압 사건 외에도 여러 시국 사건의 구속자들이 고문 수사와 용공 조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삼민투 사건, 깃발 사건, 민추위 사건 등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그러했다. 삼민투 부위원장 허인회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깃발 사건 연루자들은 "뜨거운 물에 거꾸로 처박혀 매를 맞으면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읽은 것으로 자백"하라고 강요당했다.

학생들만 대상이 아니었다. 9월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장 등 언론인 3명이 신문 보도와 관련하여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가혹한 구타를 당했고, 대구교도소에서는 정진관 등 양심수 10여 명이 교도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급기야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나왔다. 민추위 사건으로 도피 중이던 서울대 학생 우종원은 1985년 10월 11일, 경부선 철로 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는 불운하게도 추적자들에게 사로잡혔던 것 같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짓을 했던 것일까? 그는 시신 상태로 발견됐고, 그로부터 하루 만에 경찰의 강압에 몰려 서둘러 화장되고 말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죽음은 고문치사의 결과이며, 서둘러 화장한 이유는 증거를 없애려는 의도 때문임이 분명했다.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끊임없이 고문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도처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피해자들과 시민들이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전민학련 사건의 이태복 모친 이정숙 여사(오른쪽)와 민가협 문양을 디자인한 이기연(왼쪽). 1986년 민가협 집회에서. ⓒ 민청련동지회


민가협 탄생의 주역, 민청련 여성들

고문 수사와 용공 조작에 반대하는 항의 열기를 이처럼 고조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탄압에 맞서서 줄기차게 운동을 전개해 온 민청련 여성들이었다. 민청련 여성 회원이거나, 혹은 구속 및 수배된 민청련 회원의 젊은 아내들이 그들이었다.

인재근(김근태 부인), 박문숙(김병곤), 최정순(이을호), 김설이(이범영), 이기연(연성수), 조명자(김희택), 이경은(서원기), 박혜숙(최민화), 김충희(김희상), 김해숙(한경남), 이미영(박우섭). 이들은 구속자와 수배자의 가족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스스로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운동 참가자였다. 이들 중에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민족문화운동 참가자들이 많았고,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비밀결사의 구성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식견이 민첩한 대응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하게 하는 내적 원동력이 됐다.

민청련 여성들은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편들을 찾아 나섰다. 관할 경찰서를 항의 방문하고 숨겨져 있는 비밀 수사 건물들을 찾아냈다. 남영동, 장안동 경동산업, 신길동 신길상사, 옥인동 서울시경 대공분실, 송파 보안사, 남산 안기부, 이문동에 위치한 비밀수사기관들을 다 찾아냈다. 그뿐인가. 가로막아서는 경찰관들과 싸우고, 갖은 어려움을 뚫고서 수감자와 면회하고, 국가기관의 폭력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만들고, 플래카드를 내걸고 농성했다. 서로 손잡고 격려하면서 그렇게 했다.

구속자 가족의 능동적인 대응은 구속자들에 대한 국가폭력을 저지하고 완화시키는 데 큰 힘이 됐다. 또 가족의 그러한 노력은 구속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어 고문을 버티는 힘이 돼 주었다.

민청련 여성들의 대응 행동은 다른 구속자 가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즈음 대학생과 노동자 구속자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시국 사건으로 인한 구속자 수가 800여 명에 이르렀다. "유신 말기의 최대 구속자 수 430명의 2배에 달하는 구속자를 양산"했다는 통계도 나왔다. 그러나 구속자 가족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없었을뿐더러 사건별로 제각기 따로따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민청련 사건의 젊은 아내들의 행동 양상은 그러한 경향을 변화시켰다. 가족들은 수사 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항의하기 시작했고, 서로 연대를 모색했다.

민청련 여성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전면화시켰다. 모든 시국사건의 구속자 가족을 규합하여 마침내 1985년 12월 12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를 발족시켰다.

   

1985년 12월 18일 민가협 현판식을 막아서는 경찰(위)과 사무실이 있는 거리 앞에서 농성중인 민가협 회원들(아래) ⓒ 민청련동지회


집 속의 태양이 거리의 전사로

민가협은 서로 다른 사건에 따로따로 엮인 많은 가족들이 공동으로 연대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구성했다. 그 결과 각 부문별 구속자 가족 모임을 대표해서 공동의장으로 9명을 선출했다.

공동의장 중 5명은 양심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소속(강길호의 부친 강영목, 김민석의 모친 김춘옥, 이춘의 모친 이청자, 함운경의 부친 함정석, 박능출의 부친 박순격)이었다. 다른 2명(전태일 모친 이소선, 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 이태복의 모친 이정숙)은 '구속노동자가족모임'을, 또 다른 2명(남민전 사건 안재구의 아내 장수향, 재일동포간첩단 사건 이철의 장모 조만조)은 '장기수 가족 모임'을 대표했다.

민가협 창립에는 민청련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단체 명칭은 민가협 창립 선언문을 함께 집필한 최정순과 이기연이 협의해 고안해 냈다. 처음에는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라고 명명했으나, 민청련과 이름이 너무 비슷하다는 비평이 있어서, 민주화를 실천하는 가족운동이라는 의미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로 정했다.

상징 마크는 민중미술 작가인 이기연이 고안했다. 태양 속에 집이 들어 있는 형상이었다. 아내라는 말의 고어가 '안해'라는 점에 착안해, 여성들이 집안에 있는 태양과 같은 존재임을 중첩적으로 표현한 디자인이었다.

기관지로 <민주가족>을 발간했는데, 그 제호는 민가협 고문으로 위촉한 백기완이 썼다.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겸손해하면서도, 그는 기꺼이 임무를 맡았다. 기관지 편집은 홍보위원회에서 담당했다. 구속학생학부모 측에서 유시춘(유시민의 누나), 장기수가족 측에서 박광숙(김남주의 아내), 민청련여성 중에서 이경은이 그를 맡았다.

민가협 창립의 산파는 인재근이었다. 장기수 가족 모임을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 구속학생학부모 측에서 반대의견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구속된 자기 아들이 좌익사범과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재근은 발 벗고 나서서 당사자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성원들의 내면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민가협 창립 이후 첫 사업으로 '장기수 석방 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인재근은 민가협의 초대 총무로 취임했다. 민가협의 총무는 다른 단체의 총무와는 그 역할의 비중이 크게 달랐다. 민가협의 모든 활동의 중심엔 총무가 있었고, 총무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기획하고 운영해야 했다. 초대 총무 인재근에 뒤이어 2대 총무 조무하(장기표의 아내), 3대총무 박광숙도 막중한 민가협 총무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민가협 기관지 [민주가족] 창간호와 2호 표지 ⓒ 민청련동지회


인권운동의 중심이 된 민가협

민가협은 출범하자마자 인권운동의 근거지가 됐다. 과거에는 양심수 지원활동이 기독교와 천주교 인권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이제 그 중심이 일거에 민가협으로 옮겨졌다.

민가협은 구속자 가족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체계를 짰다. 맨 먼저 민가협 회원 수첩과 홍보 명함을 만들었다. 홍보 명함에는 민가협이 하는 일과 전화번호,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수감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든 옥바라지의 행동 매뉴얼이 적혀 있었다.

민가협문고도 운영했다. 하루 종일 갇혀있는 양심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읽을거리였다. 단기간에 열 몇 권씩 읽어대는 이들에게 책을 차입해주는 일만 해도 경제적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민가협문고는 양심수들에게 필요한 책을 구비했다. 구치소에 차입이 가능한 범위 내의 도서 목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책의 차입을 거부당하는 비율을 낮출 수 있었다.

민가협은 '구속자 가족이여, 당신은 외롭지 않다, 당신을 보호하는 단체가 있다'는 따스한 위로와 연대의식을 심어주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에서 형상화됐던 현상, 옥에 갇힌 투사의 가족이 우여곡절 끝에 수감자의 내면의 신념에 공감하고 그 동지로 거듭나는 현상이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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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근태가 쓴 고문기록 수기 ‘남영동’과 그것을 만화로 간행한 ‘짐승의 시간’ 그리고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포스터
 김근태가 쓴 고문기록 수기 ‘남영동’과 그것을 만화로 간행한 ‘짐승의 시간’ 그리고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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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위압과 폭력은 역전의 용사들인 민청련 사람들도 위축시켰다. 그러나 그에 눌리지 않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들이었다.
민청련 여성 회원이자 수감자들의 젊은 아내들이 그러했다. 앞서 연행된 김병곤의 부인 박문숙이 그랬던 것처럼,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과 이을호의 부인 최정순은 간데없는 남편들의 종적을 찾고자 동분서주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지혜를 발휘했다. 수감자들이 언젠가는 검찰로 이관되리라고 예측하고 검찰청 문 앞을 하염없이 지키기로 했다. 변호사 김상철의 조언도 도움이 됐다. 당시 검찰청사는 덕수궁 옆 서소문동에 있었다. 지하 2층, 지상 15층의 빌딩에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이 입주해 있었다. 서울지검 공안부가 위치한 5층이 길목이었다.

기적 같은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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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이 들어맞았다. 1985년 9월 26일이었다. 김근태가 어딘가로 끌려간 지 20여 일이 지난 때였다. 인재근은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극적으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김근태는 발에 힘을 줄 수 없는 듯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옆에서 형사들이 부축해서야 간신히 한 발씩 내딛는 형편이었다.

5층에서 4층까지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인재근은 물었다. "다치지 않았느냐?"고. 김근태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실을 얘기하면 아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지만 아내의 거듭된 물음에 마침내 결심했다. 김근태는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라고 짧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뗐다. "9월 4일 2번, 5일 1번, 6일 1번... 20일 1번, 도합 10번이나 고문을 당했는데, 온몸을 꽁꽁 묶어 놓고 전기 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를 하루 5~7시간씩 당했다. 20일 마지막 고문을 받은 뒤 오늘(26일)까지 계속 치료를 받았는데도 발뒤꿈치, 팔꿈치는 짓이겨졌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다"라고 탈진한 목소리지만 뚜렷이 얘기했다.

두 사람에게 허용된 시간은 고작 1분 남짓뿐이었다. 충격적인 진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김근태는 고문 행위가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증언했다. 가해자들이 결코 부인하거나 은폐할 수 없게끔, 고문 방법과 날짜를 특정했다. 얘기를 듣는 인재근은 숨이 막혔다. 고문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양말을 벗어서 아내에게 넘겨줄 때 드러난 남편의 발뒤꿈치는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다.

 김근태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농성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김근태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농성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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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라고 김근태는 뒷날 회고했다. 그는 호송 차량 속에서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하늘이 푸르게 남아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호송 차량은 관례와는 다르게 늦은 오후에야 검찰청에 도착했다. 누군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뿐인가. 자신이 당한 고문을 낱낱이 진술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기적이었다. 이 기적이 없었더라면 저들의 고문 은폐행위를 결코 막지 못했을 것이다.

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

인재근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종로 5가에 위치한 기독교회관으로 뛰어갔다. 때마침 목요일이라 목요기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기도회 연단에 나아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야수 같은 고문이 자행됐음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알렸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에는 민청련 중앙위원회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인재근은 회의 장소로 뛰어갔다. 그녀는 회의 참석자들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밤새워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민청련 간부들은 밤새 성명서를 만들고 머리띠, 플래카드를 만들며 항의 농성을 준비했다.

인재근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여 남편에게서 들은 얘기와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국민 여러분! 저는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의 아내입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유인물에는 김근태에게 가해진 고문의 실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튿날부터 민청련 사무실에서 회원들과 수감자 가족 30여 명이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고문 수사와 구속에 대한 규탄 농성을 시작했다. 성명서와 전단도 배포했다. '김근태의 처 인재근' 명의로 작성된 전단을 필두로 하여, 민청련 명의의 '치안본부의 살인적 고문 수사를 규탄한다', '정의와 투쟁 6 - 다시는 이 땅에 민중민주화운동 탄압을 위한 살인적 고문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등의 유인물을 연이어 배포했다. 이 농성은 민청련 회원과 가족들만으로 추진된 소규모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부독재의 야만적인 고문 수사에 항의하는 광범위한 시민들의 분노를 끌어낸 첫 원동력이 되었다.

 10월 15일에서 17일까지 있었던 고문수사 탄압 항의 농성. 왼쪽 성명서를 읽는 임채정, 왼쪽에서 세 번째 아기 앉고 있는 김설이(이범영 부인), 한 사람 건너 차례로 인재근(김근태 부인), 이미영(박우섭 부인), 이경은(서원기 부인), 이기연(연성수 부인)
 10월 15일에서 17일까지 있었던 고문수사 탄압 항의 농성. 왼쪽 성명서를 읽는 임채정, 왼쪽에서 세 번째 아기 앉고 있는 김설이(이범영 부인), 한 사람 건너 차례로 인재근(김근태 부인), 이미영(박우섭 부인), 이경은(서원기 부인), 이기연(연성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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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중단하라! 농성 또 농성

고문 수사에 맞서는 시민들의 분노는 1주일 뒤에 다시 불붙었다. 1985년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1주일간 좀 더 확대된 형태의 제2차 항의 농성이 전개됐다. 장소도 옮겼다. 종로5가에 위치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이번에는 제1차 농성에 비해 참가자층이 더욱 확대되었다. 제1차 농성의 참가자는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 위주였는데, 이제 세 그룹의 구속자 가족으로 확대되었다. 다른 두 그룹이란 삼민투 사건과 민추위 사건으로 체포된 대학생들의 가족들이었다.

참가자들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농성투쟁에 대한 지지층도 확장되었다. 민통련과 민추협 등 각계 민주인사들이 농성 중인 가족들을 격려차 방문했다. 중요한 진전이었다.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 정치세력이 고문 수사에 맞서는 민청련 희생자 가족들의 항변에 호응하고 나섰던 것이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 당시에 이뤄졌던 양자의 공동행동이 두 달 만에 다시 현실화되었다. 두 세력의 공동행동은 광범위한 군중을 결집하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이미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를 저지시킨 전과를 올린 바도 있었다. 이로써 고문 수사에 대한 항의 운동은 큰 탄력을 얻었다.

종교계에서도 고문 수사 반대 투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0월 21월부터 27일까지를 폭력 추방 기간으로 설정한 데 이어, 12월 8일부터 15일까지를 인권주간으로 선포했다. 10월 10일에는 NCC 주최 목요기도회가 열렸고, 거기서 민청련 구속자 가족을 초청해 고문 수사 및 민청련 탄압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다. 그뿐 아니라 10월 14일에는 NCC 가맹 교단장 회의에서 국무회의와 관계 장관 앞으로 고문 수사에 대한 항의 공문을 발송하기로 결의했다. 같은 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청련 구속자 가족을 초청하여 증언을 청취하고, 민주화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고 호소합니다'란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근태 고문 사건 이후 1985년 결성된 민가협이 명동성당에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왼쪽 맨앞 아이 손 잡고 있는 조명자(김희택 부인). 그 한 명 건너서 뒤 왼쪽 맨 바깥쪽에 손 모으고 있는 이기연(연성수 부인). 맨앞줄 가운데 인재근. 오른쪽 뒤로 세번째 박문숙(김병곤 부인) 그 오른쪽 아이를 앉고 있는 이경은(서원기 부인)
 김근태 고문 사건 이후 1985년 결성된 민가협이 명동성당에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왼쪽 맨앞 아이 손 잡고 있는 조명자(김희택 부인). 그 한 명 건너서 뒤 왼쪽 맨 바깥쪽에 손 모으고 있는 이기연(연성수 부인). 맨앞줄 가운데 인재근. 오른쪽 뒤로 세번째 박문숙(김병곤 부인) 그 오른쪽 아이를 앉고 있는 이경은(서원기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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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 연합전선, 공대위의 결성

제2차 농성이 끝난 지 5일 만에 제3차 농성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농성 주체에 성격 변화가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상층연대기구인 민통련이 전면에 나섰다. 10월 15일 12시부터 시작된 제3차 농성에는 민통련 문익환 의장, 계훈제 부의장, 김규동, 김병걸 등 간부 15명과 민청련 구속자 가족 5명이 참여했다. 그에 더하여 야당 정치세력인 민추협 간부들도 합류했다. 황명수 간사장, 한광옥 대변인, 김병오 부간사장 등 20여 명이었다.

농성 이튿날에는 야당 정치세력의 두 지도자 김대중과 김영삼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민청련 사무실을 격려차 방문했다. 민추협의 공동의장인 두 사람은 양순직, 최형우, 이중재 등 신민당 부총재단과 신기하, 유성환, 김봉욱 국회의원 등 40여 명을 대동함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제3차 농성 중에 이뤄진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의 새로운 폭로가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부인 최정순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이을호의 정신이상 증세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검찰 취조를 받던 중 이상 증세를 일으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8주간 감정 유치되었다. 그녀는 '이을호씨를 정신이상이 되게까지 한 현 정권의 고문 수사를 고발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해, 정신착란이 발발한 경위를 설명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는 정부 당국의 거듭되는 기만 조치를 폭로했다.

세 차례 농성 투쟁은 군사독재 반대 투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야만적인 고문 수사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상설 단체의 결성을 이끌어낸 것이다. 10월 17일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 수사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가 기독교 회관에서 발족했다.

공대위는 반독재 연합전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구속자 가족 대표들을 둘러싸고 3대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민통련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 세력, 기독교와 천주교 등 종교계, 민추협을 매개로 한 야당 정치세력이 그것이다. 예컨대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면면이 그를 잘 보여준다.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문익환(목사, 민통련 의장)과 홍남순(변호사), 종교단체의 원로인 김재준(목사), 함석헌(기독교), 윤반웅(목사), 지학순(주교), 야당 정치세력의 지도자인 김대중(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민추협 공동의장), 이민우(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등이었다. 민통련, 종교계, 야당 지도자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위)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단체가 1985년 10월 17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래) 11월 11일 김대중 김영삼이 참석한 민추협 사무실에서 개최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
 (위)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단체가 1985년 10월 17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래) 11월 11일 김대중 김영삼이 참석한 민추협 사무실에서 개최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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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국제적 고립

반독재 연합전선의 결성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의 성과에 뒤이어 이번에는 전두환 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10월 18일 미국 국무성 대변인 버나드 캅(Bernard Kalb)은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는 한국의 한 청년 활동가가 한국의 공안 기관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의 신뢰할만한 보고서를 접했다고 언급한 뒤, 그 사건이 '개탄할만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0월 20일 자 <뉴욕타임즈>는 '반체제 인사 고문 의혹에 쌓인 한국'이라는 제하에 김근태 고문 소식을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는 한국 정부 관리들이 정치범을 고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목적은 간첩 행위와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거짓 자백을 얻기 위한 것인데, 한국 법률에 따르면 그것은 피고인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였다.

이 뉴스의 출처는 '재야 단체 민청련 회원 심기섭'이 한국에서 반출한 녹음테이프였다. 그는 최근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인재근의 증언이 담긴 테이프를 갖고 있었다. 신문 기사는 그 녹취 기록에 따라 김근태에 대한 고문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사화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심기섭은 민청련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회원은 아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 김대중이 운영하던 워싱턴 인권문제연구소의 핵심 실무자였다. 그는 민청련과 김대중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한 심기섭이었기 때문에 고문 수사 및 용공 조작 사건을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제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민청련이 상징으로 내세운 두꺼비의 역할, 제 몸이 뱀에 잡아먹히게 함으로써 뱀을 죽이고 수많은 두꺼비가 탄생하게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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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물고문 전기고문, 죽음 문턱까지 간 김근태


1985년 8월 24일, 김근태 전 의장이 전격적으로 체포됐다.

민통련 사무실이 있는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 부근의 한 커피숍에 들렀을 때였다. 중부경찰서 정보과 소속 형사대가 덮쳤다. 체포를 모면하려고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경계해 왔는데, 그날따라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랬는지 잠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었다. 그때부터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사복 경찰들의 미행이 시작됐던 것이다.

연행된 김근태는 구속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경범죄로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다. 민청련 제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이었다. 민청련 활동 이후 6번째 겪는 구류 처분이었다.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그는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그까짓 구류 10일 정도야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짐이 이상했다. 구류 중에 통상 허용되던 가족 면회가 이뤄지지 않았다. 몇 차례 항의했는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근태는 몰랐지만, 그의 구류 기간이 거의 종료되는 때인 9월 2일,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을호가 자택에서 괴한들에게 끌려갔다.

 199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은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바라본 모습
 199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은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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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 마지막 날인 9월 4일 새벽, 석방을 기다리고 있던 김근태는 전혀 예기치 않게 눈을 가린 채 서부경찰서 뒷마당에 대기한 자동차에 태워져 모처로 압송됐다. 행선지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이었다.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 방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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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 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옇던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그 방에 들어가던 순간을 김근태는 이렇게 기억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간부들이 연이어 체포되고 있었다. 묵과할 수 없었다. 9월 5일 민청련 회원과 가족 30여명이 민청련 사무실에 모였다. '불법 연행된 김근태, 이을호와 구속된 김병곤을 즉각 석방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틀 뒤에 다시 성명서를 냈다. '거듭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강제 납치행위를 규탄하며 - 김근태, 이을호와 모든 구속된 민주인사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경찰은 도리어 더욱 거세게 나왔다. 9월 8일 경찰은 서울 중구 삼각동 합동빌딩 602호에 있던 민청련 사무실에 대해 강제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고문으로 정신이 망가진 이을호

밖에서 민청련 회원들이 항의 농성을 하고 있는 동안에, 체포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옥 같은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을호 부위원장은 연행되자마자 안전기획부 수사관들에게 다짜고짜 심한 매질을 당했다. 그는 나중에 "무차별 구타를 당한 후 자신이 올빼미로 생각되고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매었다"고 고백했다. 고통과 공포감이 그의 정신에 상채기를 냈던 것이다.

고문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으로 옮겨 간 뒤에 더욱 혹독해졌다. "물고문과 폭행 등의 물리적 고문과 정신적 고문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급기야 "지렁이도 되고 뱀도 되며 닭 2마리, 돼지 3마리 등의 계속적인 동물 환각 속에 있었다."

연거푸 겪은 물고문 탓에 몸도 망가졌다. "머리를 물에 처박아 숨을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몇 번인지도 기억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는 변이 안 나왔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변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라고 토로했다.

 현재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잃고 있는 이을호와 그의 부인 최정순
 현재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잃고 있는 이을호와 그의 부인 최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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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갈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김근태

김근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전기고문, 물고문, 뭇매질 등의 참혹한 학대를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17일 동안이나 계속 받아야했다.

주된 것은 전기고문이었다. 김근태의 증언에 따르면, 전기고문을 할 때에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다. 고문대에 담요를 깔고 눕히고서는 몸을 다섯 군데 묶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맸다. 신체에 고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악한 의도였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가 잘 통하도록 물을 뿌렸고, 발가락에 전원을 연결시켰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됐다.

전기고문은 한마디로 불 고문이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이었다.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 당겨 마침내 마디마디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공포가 몰려왔다.

물고문은 전기고문과 한 세트로 진행됐다. 물과 불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두 고문의 상승효과는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었다. 물고문이 밑바닥이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 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은 불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이었다.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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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마음속으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는 노랫말을 떠올렸지만, 그 노랫말을 실행하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해야만 했다. 그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다.

고통의 극한으로 모는 고문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문자들은 비명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다.

조건 반사에 따른 심리적 공포도 겪어야 했다. 고문을 하는 날에는 으레 밥을 주지 않았는데, 어떤 날에는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았다. 그런 때에는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

고문자들은 협박과 능욕을 가하기를 예사로 했다.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라는 자는 고문 현장에 나타나서,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으로 죽게 만들어 버려라.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고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전기고문을 자행했던 건장한 사내는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으로 고문받고 감옥에서 병사했다)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서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고 내뱉었다.

그들은 전기고문 앞에서 벌거벗긴 채로 떨고 있는 그에게 성적인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추위와 공포로 위축돼 있는 그의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 따위야"라고 비웃었다.

 김근태는 고문을 이겨내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92년 1월 미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당시 연행되는 모습
 김근태는 고문을 이겨내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92년 1월 미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당시 연행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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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고문이 자행된 일시와 횟수를 낱낱이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겪는 와중에서도 그랬다. 그리하여 뒷날 재판정에서 자신이 겪은 고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었다.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그날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 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야수적인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동안, 민청련 사람들은 점차 고조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마음을 졸이게 했던 것은 두 사람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었다.

이을호 부위원장은 집에서, 김근태 의장은 구류가 끝나는 시점에 소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간 걸 알 뿐, 도대체 어디서 어떤 조사를 받는지 도무지 감감했다. 그저 안전기획부나 치안본부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권형택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런 상황이 2주를 넘어가면서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탄압에 대비해야 될 때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언제 연행될지 몰라 사무실 출근도 위험했다. 그 당시 몇 사람이 술집에 모였을 때, 박우섭 운영위원장이 '목이 시큰하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아마도 김근태 의장에 대한 혹독한 고문을 예감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와 이을호만이 아니라 민청련의 다른 회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민청련을 추적하는 자들의 센서는 기민하고 유능했다. 9월 6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전국학생총연맹 주최 '범국민 시국 대 토론회'에 참가하려 했던 민청련 간부들이 긴급히 수배됐다. 김희택 부의장과 서원기 집행국장이 그 대상자였다. 이어서 10월 1일에는 청년부장 김종복과 대변인 김희상이 자택에서 연행됐다. 이튿날 10월 2일에는 최민화 부의장이 자택에서 체포됐고, 10월 7일에는 권형택 사회부장이, 10월 8일에는 연성수 전 상임위 부위원장이 강제로 연행됐다.

신혼여행지에서 체포된 사회부장 권형택

체포된 이들 가운데엔 기막힌 사연도 있었다. 권형택의 경우였다.

그는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새신랑이었다. 신부와 함께 설악산으로 신혼여행길에 나섰다가 험한 꼴을 당했다.

여행 4일차 되는 날 속초 시내의 한 다방에서 쉬고 있는 때였다. 신부 황인숙은 시댁과 친정 식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건장한 남자 6명이 들이닥쳐 그를 둘러쌌다. 치안본부 수사관 둘이 현지경찰서 형사 네 명을 대동하고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이윽고 선물 쇼핑을 마치고 룰루랄라 되돌아온 신부 황인숙은 뜻밖에도 신랑이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달콤했던 신혼여행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권형택(오른쪽)이 1990년 전민련 활동으로 투옥된 뒤 출감하는 모습. 부인 황인숙이 그를 마중하고 있다
 권형택(오른쪽)이 1990년 전민련 활동으로 투옥된 뒤 출감하는 모습. 부인 황인숙이 그를 마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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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민청련 탄압사건의 막이 올랐다. 9명의 간부가 구속됐고, 7명이 수배됐다. 얼마나 더 많은 회원들이 추적을 받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당국의 탄압이 어느만큼 언제까지 계속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시계 제로의 캄캄한 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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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하지 않기로 결정한 김근태, 경고는 현실이 됐다


"총살을 해서라도 학생운동을 저지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은 칼을 뽑아들었다. 학생운동을 뿌리 뽑을 기세로 극단적인 강경책을 내밀었다. 삼민투 수사 결과를 발표한 이튿날인 1985년 7월 19일, 노신영 국무총리는 공권력을 총동원해서 법질서를 확립하겠다고 공언했다. 각부 장관들도 나섰다. 내무부, 법무부, 문교부, 노동부 등 학생운동을 관장하는 관련 부처들은 지금까지의 정책을 과감하게 수정하여 더욱 강경한 방법으로 대처하겠다고 언명했다.

뭔가를 꾸미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정권의 의도는 7월 25일에 드러났다. '학원 소요'를 근절하기 위한 강경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 지면을 시커멓게 장식했다. '학원안정법'이라는 명칭의 특별법을 입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 39개 단체들이 결성한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에서 김대중 김병걸 송건호 계훈제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학원안정법 철회 요구 성명을 발표하는 장면
 1985년 민주화운동 39개 단체들이 결성한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에서 김대중 김병걸 송건호 계훈제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학원안정법 철회 요구 성명을 발표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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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학생을 영장 없이 체포 및 구금하여 6개월 동안 집단적인 '선도 교육'을 이수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인적이 드문 오지에 '감호소'를 설치하고, 그곳에 내무반 별로 10-2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여 훈련시키겠다는 복안이었다. 만약에 교육 중에 단식, 탈출, 집단행동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가혹한 형사처벌을 가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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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적인 강제수용소 정책이었다. 전두환 집권 초창기 6만여 명의 시민을 '불량배 소탕'이라는 이름아래 영장 없이 연행하여 짐승보다 못한 고초를 겪게 했던 삼청교육대의 이른바 '순화교육'을 연상케 하는 조치였다. 그뿐인가. 1981~1983년 시기에 강제로 징집된 운동권 대학생 출신 사병들 4백여 명을 대상으로 가혹행위와 고문을 서슴지 않았던 이른바 '녹화사업'의 부활이나 다름없었다.

사회 저변에 긴장과 공포감이 흘렀다. 광주학살에 버금가는 무서운 탄압이 도래하고 있는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정권 수뇌부는 광기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한 다음날 안전기획부 간부회의에서 장세동 부장은 폭언을 내뱉었다. "주요 보안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에는 총살을 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격분했다는 것이다. 무서운 말이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제2의 학살도 불사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전두환 정권 수뇌부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학원안정법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입안된 것이었다. 그들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여름방학 중에 학생운동을 근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놓겠다고 작정했다. 즉 8월 15일경 임시국회를 열어서 학원정상화 임시조치 법안을 단독 통과시키겠다는 것이 정권 수뇌부의 복안이었다.

들끓는 학원안정법 반대 운동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학생과 시민사회, 야당 측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민청련도 앞장섰다. 민청련은 8월 10일자로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학원안정법」 제정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단호히 투쟁"하겠다고 결의를 표명했다.

 1985년, 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학원안정법 철회를 주장하는 전단지를 거리로 살포하는 광경
 1985년, 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학원안정법 철회를 주장하는 전단지를 거리로 살포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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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에는 학원안정법 저지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세력의 공동행동기구가 결성됐다. 민주화운동 39개 단체와 민추협이 공동으로 결성한 '학원안정법 반대투쟁 전국위원회'가 그것이다. 이는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 세력의 연합기관이었다. 전국위원회의 송건호 위원장과 민추협의 김대중, 김영삼 공동 의장은 그날 공동회견을 갖고, 성명을 통해 "학원안정법 입법 추진은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에 더하여 천주교와 기독교 등의 종교 세력도 나섰다. 8월 17일에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산하 인권위원회'가 신구교 합동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도 학원안정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임박한 폭풍에 대비한 5차 총회

폭풍이 곧 몰아칠 기세였다. 피신을 권유받은 김근태 등 민청련의 공개 지도부 성원들은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구속과 탄압이 다가오고 있었다. 탄압의 강도는 통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대대적인 것이 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속히 대응 조치를 만들어야 했다. 탄압의 표적이 될 공개 간부들을 보호하고 비공개 활동을 강화하는 방안이 요구됐다. 특히 김근태 의장이 맡고 있는 역할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민청련 의장 직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려면 총회 개최를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민청련 제5차 총회 준비 작업이 은밀하게 시작됐다. 통상 총회를 6개월 주기로 연 것에 비하면, 두 달이나 이른 시점에 총회 준비 활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여느 총회 때와 마찬가지로 총회준비위원회(총준)가 조직됐다. 각급 기구와 비공개 기반 조직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총준은 총회 개최에 요구되는 정치적, 실무적 준비 업무를 추진했다. 준비 업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런데 총회 개최 날자와 장소가 결정된 시점에 기밀 유출 사고가 터졌다. 총회 개최지를 홍제동 성당으로 정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그 정보가 경찰에게 누설됐다. 경찰은 성당 안팎을 통제하면서 출입자들을 감시했다. 속히 새 장소를 마련해야만 했는데, 다행히 기독교 측의 협력을 얻었다. 총회 개최지를 마포구에 위치한 신촌교회로 변경했다. 장소 변경을 알리는 은밀한 통지가 대의원들에게 전달됐다. 제5차 정기총회가 1985년 8월 10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촌교회에서 열렸다.

 20쪽 분량의 5차 총회 보고서 표지와 5차총회 결의문. 미리 인쇄된 보고서에는 장소가 홍제동 성당으로 돼 있지만, 실제 장소는 마포구에 있는 신촌교회로 바뀌었다.
 20쪽 분량의 5차 총회 보고서 표지와 5차총회 결의문. 미리 인쇄된 보고서에는 장소가 홍제동 성당으로 돼 있지만, 실제 장소는 마포구에 있는 신촌교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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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의사 진행은 김근태 의장이 아니라 김희택 운영위원장이 맡았다. 김근태는 체포당할 위험을 감안해서 이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총회가 열리는 시간 동안에 회의장 근처를 배회하며 소식을 전달받았다. 

총회에서 임원 개선이 이뤄졌다. 새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한경남(전 부의장), 부의장으로 최민화(전 부의장), 김희택 (전 운영위원장), 김병곤(구속중, 전 상임위원장)을 선출했다. 신임 의장 한경남은 김근태 창립 의장에 뒤이어 두 번째로 막중한 사령탑을 맡게 됐다.

새 의장 선출 문제는 총준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사안이었다. 처음에 신임 의장직 물망에 오른 이는 장준영이었다. 그는 5차 총회 이전에 비공개 부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비공개 기별 대표 조직과 계반 관리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래서 많은 간부 회원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힘껏 사양했다. 연령과 학번 상으로 역량 있는 선배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으므로 자신이 의장에 취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장영달 부의장을 새 의장에 선임하는 방안도 한때 고려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의장직 선임에 적극성을 보인 한경남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총준위 내부에서는 의장 후보들에 대해 다각적인 토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타협과 절충에 의하여 한경남을 새 의장직에 추천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5차 총회에서 선임된 의장단. 1.한경남 의장 2.최민화 부의장 3.김병곤 부의장 4.김희택 부의장
 5차 총회에서 선임된 의장단. 1.한경남 의장 2.최민화 부의장 3.김병곤 부의장 4.김희택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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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의장단은 곧 바로 집행부를 조직했다. 운영위원장 박우섭, 상임위원장 천영초, 사무국장 윤여연, 집행국장 이범영, 서원기, 교육선전부장 윤형기, 청년부장 김종복, 여성부장 조임숙 등 각 부서장을 임명했다. 새 집행부 성원은 의장단 4인, 위원장 2인, 국장 및 부장 6인 등 도합 12인으로 이뤄졌다.

이들이 험난한 학원안정법 국면 속에서 민청련을 이끌어갈 공개 간부들이었다. 이리하여 공개 간부와 비공개 기반 조직들로 구성된 새로운 조직 시스템이 짜였다. 예상되는 강력한 탄압에 대응하여 선제적으로 조직을 재편하는 데에 성공한 셈이었다.

제5차 총회는 학원안정법 국면이라는 삼엄한 상황 속에서 개최됐으므로 험난한 투쟁을 각오하는 결기를 세웠다. 제5차 총회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속에는 그 당시 정세를 보는 민청련의 시각과 결의가 잘 드러나 있다.

즉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 어떤, 설혹 죽음으로 헌신하더라도 우리의 민주화 투쟁은 결코 종식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또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 조직을 결의한데 이어서, 그 투쟁의 전면화를 제창했다.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은 이 땅을 「강제수용소」로 만들고 전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압살하여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학원안정법」 제정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단호히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갑작스런 학원안정법 철회

민청련 제5차 총회가 열린지 1주일이 지난 때였다. 정국이 또 한 번 요동쳤다. 8월 17일 전두환 대통령은 학원안정법 제정을 일단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조치였다. 사실상 철회한다는 의미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달 가까이 정국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조치는 '드라마틱했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살기등등하던 전두환 정권이 왜 학원안정법 추진을 포기했을까? 민청련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진단했다. 하나는 반대운동이 각계각층에 걸쳐서 광범하고 대대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법 제정을 막무가내로 추진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규모였던 것이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더하여 김대중과 김영삼이 이끄는 양대 야당 정치세력이 가담했기 때문에 민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릴 우려가 있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미국 정부의 태도였다. 미 국무성, 국방부, 정보부 세 라인을 통해서 전달되는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학원안정법 제정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온 사회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던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가 불발로 끝났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태가 조성됐다. 유화국면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야수적인 폭압 국면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쉬 판단할 수 없었다. 불안한 정적이 흘렀다.

 민청련 5차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민청련 5차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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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전 의장은 학원안정법 철회 이후의 정세를 낙관적으로 진단하는 편에 섰다. 학원안정법 보류 조치로 인해서 전두환 정권이 '대단히 유리한 정치적 입장'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보류 조치가 모든 국민에게 일종의 선물이나 은혜처럼 해석되고 있었다.

정치 군부가 이러한  유리한 분위기를 자신의 손으로 깨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대규모 구속 선풍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김근태는 피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민청련 의장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노골적인 탄압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이 그러한 결심을 굳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민주운동단체의 대표라는 자의식도 그 결정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당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사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앞서 구속된 김병곤이나 황인하의 경우와 동일하게 취급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해 마음을 수련하는 시기로 삼자"는 계획조차 품었다.

김근태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민청련의 가까운 동료들과 상의했다. 많은 간부들이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안이하게 생각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크게 다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그 경고가 현실이 되는 사태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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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정부 민청련을 배후로 지목


탄압의 먹구름이 맑은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1985년 7월 11일이었다. 민청련에 불길한 조짐이 드리우고 있음이 이날 처음 감지되었다. 그날 서울 하늘은 저기압의 영향으로 찌푸려 있었고, 이따금 비가 왔다. 전국이 온통 흐린 날씨였다.

민청련 상임위원장 김병곤이 귀갓길에 자기 집 앞에서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붙들려갔다. 밤 10시쯤이었다. 그 괴한들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 사복 경찰들이었음이 뒷날 밝혀졌다.

 1980년대엔 길거리에서 정보계 사복형사들이 시민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사진은 85년 경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이를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모습
 1980년대엔 길거리에서 정보계 사복형사들이 시민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사진은 85년 경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이를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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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젊은 아내 박문숙은 그날따라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늦은 귀가야 자주 있는 일이고, 집에 안 들어오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느낌이 이상했다. 아침부터 아내 몸이 편찮은 것을 보고,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노라고 말하고 나갔지 않았던가. 늦은 밤, 문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길 여러 차례 되풀이하던 중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내는 무심코 집 옆에 낯익은 가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아내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온 사방에 연락을 하면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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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혀 간 김병곤은 민청련 출범 초창기에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비공개 기별 대표 조직과 정책실에서 비상근으로 일했지만, 1985년 초에 결단을 내렸다. 직장을 그만두고 상근 전업 활동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해 3월 민청련 제4차 총회에서 상임위원장에 선임됐고, 비공개 영역에서 연구 조사 업무와 민중운동 지원 업무를 지휘해 오던 터였다.

경찰이 노리는 표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민청련 집행국장 이범영도 체포 대상자였다. 그는 다행히도 체포망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추적을 피해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기나긴 수배 생활의 터널에 진입했다.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가족과 친지들은 삼엄한 감시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부인 김설이는 3교대 감시조 경찰에게 온종일 둘러싸여 꼼짝도 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였다. 거친 인상의 사복 경찰들이 거칠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가족을 위협했다.

그날 붙잡혀간 사람은 또 있었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도 연행되었다. 표적은 셋이었다. 경찰 수뇌부는 그들이 학생운동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이 전두환 정권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그해 5월 투쟁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 투쟁이 그 정점을 찍었다. 정권 핵심부에게는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긴요한 터였는데,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짓이었다. 정권 핵심부는 이 사건을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삼민투 배후에 민청련이 있다?

김병곤과 황인성이 체포된 지 10일째 되던, 그해 7월 18일에 삼민투 수사결과 중간발표가 있었다. 일간 신문들은 대검찰청 공안부장의 발표 내용을 약속이나 한 듯이 대서특필했다. '용공, 좌경, 급진, 이적' 등과 같은 자극적인 글귀로 이뤄진 기사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985년 7월 18일, 대검 공안부는 삼민투를 용공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주도자를 대량 구속한다는 발표를 했다.
 1985년 7월 18일, 대검 공안부는 삼민투를 용공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주도자를 대량 구속한다는 발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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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에 따르면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배후는 삼민투였다. 삼민투는 반정부를 넘어선 급진 좌경화된 단체로 지목되었다. 그뿐 아니라 용공, 이적단체이기도 했다.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을 민중봉기로 미화했고, 해방정국에서의 전평 등 좌익을 해방 투쟁자로 보고 있으며, 자유민주체제를 뿌리부터 부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삼민투 관계자로 지목된 19개 대학 학생 56명이 구속되었다. 다수 구속자를 낸 대학은 고려대 10명, 성균관대 10명, 서울대 7명, 연세대 5명 등이었다.

심상치 않은 점은 삼민투 뒤에 배후가 있다고 규정한 데에 있었다. 삼민투위 수사결과 중간발표에는 민청련 간부들의 혐의 사실이 기재돼 있었다. '배후 관계'라는 소제목 아래에 "이번 수사 과정에서 삼민투위의 핵심분자들이 학외의 불순단체 및 종교계 일부와 연계되어 있다는 혐의를 포착"했노라고 쓰여 있었다.

저들이 문제로 삼은 사실은 6월 27일 자 '민민탄'(민중민주화운동탄압공동대책위원회) 연석회의였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6인이었다. 삼민투 학생 간부 3인 외에 민청련 간부 김병곤과 이범영,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가 그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공동 성명서를 함께 작성했고 민민탄 공동 구성 문제도 협의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삼민투 핵심분자들의 범법행위를 부추긴 혐의가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1985년 서울대학교에 열린 민족민주운동탄압 저지를 위한 학내 시위
 1985년 서울대학교에 열린 민족민주운동탄압 저지를 위한 학내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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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찰이 세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분명해졌다.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한 삼민투를 세 사람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혐의였다. 수사의 초점은 체포된 두 사람, 김병곤과 황인하에게 집중되었다.

수사 초점을 민청련으로 변경

뒷날 김병곤은 자신이 겪은 경찰의 취조 상황을 법정에서 진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처음 수사의 초점은 민민탄 연석회의에 맞춰져 있었다. 그 회의는 민청련이 학생운동을 조종해 왔음을 보여주는 한 예증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는 어려웠다. 경찰은 정권 수뇌부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김병곤이 보기에도 대공수사단은 "고심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사 초점이 이동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수사를 담당하던 '백 전무'라는 자가 짐짓 걱정스러운 듯이 토로했다고 한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상부 고위층으로부터 질책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첩해서 수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혹독한 고문을 가해서라도 저들의 계획대로 진술을 얻어내라는 뜻이었다. 김병곤은 이미 10년 전 민청학련 사건 때에 가혹한 고문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이 떠올라 치가 떨려 왔다. 그래서 "아예 각본을 달라. 그대로 쓰겠다"고까지 제안했다.

결국. 기존 수사팀은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에 '김병곤의 신병을 옮겨가려 한 곳'에서 수사팀이 새로 파견되어 왔다. 그때부터 수사 방향은 달라졌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의 행방이 취조의 초점이 되었다.

새 수사팀은 김근태의 행적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김근태에게 월북 가족이 있는 것을 아느냐, 그가 빨갱이라는 것을 아느냐고 추궁했다. 요컨대 간첩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새 수사팀이 구상하는 그림은 학생운동을 북한과 연결 짓는 데 있었다. 북한과 연계된 간첩 조직이 학생운동의 배후에 잠복해 있으며,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그 매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전한 쪽지 "피해야 합니다, 근태형"

김병곤은 김근태와 민청련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이 긴박한 상황을 동료들에게 알려야 했다. 7월 15일 수사가 일단락되어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 그는 가족 면회가 허용된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이 메시지를 밖으로 전하기로 결심했다.

아내 박문숙이 그를 도왔다. 박문숙은 남편이 연행되자마자 그 소재를 수소문해 나섰다. 용산경찰서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민청련 동료들 두셋과 동행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가족과 시민사회가 체포된 사람을 줄곧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폭압자들에게는 부담스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가해지는 폭압과 야만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서 박문숙은 그날 이후 줄곧 용산경찰서를 찾아갔다.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면회 신청을 멈추지 않았다.

 김병곤 박문숙 부부의 신혼여행 때 모습. 두 사람 모두 이제 고인이 됐다.
 김병곤 박문숙 부부의 신혼여행 때 모습. 두 사람 모두 이제 고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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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짧으나마 면회가 성사됐다. 경찰서가 아니라 검찰청에서였다. 김병곤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어 검찰청으로 이첩된 뒤였다. 면회는 담당 검사 고영주의 검사실에서 이뤄졌다.

김병곤은 아직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검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형사소송의 원칙과 규범이 파괴된 현장을 목도한 박문숙은 옥신각신하며 관료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그런데 그녀는 경황없는 와중에서도 남편이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아챘다. 남편이 눈짓으로 신체 아래쪽을 가리키면서 고무신을 벗을 듯 말 듯 하는 낌새를 보였다. 아내는 알아들었다. 신발 속에 뭔가 전하고 싶은 게 있나 보다. 박문숙은 남편의 신발을 고쳐 신겨주는 척하면서 그 속에 감춰둔 쪽지를 손에 넣었다.

쪽지 속에는 김병곤이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적혀 있었다. 공안 기관의 수사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한두 사람의 간부가 아니라 민청련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가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노출된 집행부는 모두 피신해야 하며, 특히 김근태 의장은 저들의 초점이 되어 있으므로 하루바삐 은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각한 내용이었다. 먹구름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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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승리에도 차분했던 4차 총회

총선 직후인 3월 21일, 민청련 4차 총회가 열렸다. 4차 총회는 3차 총회와는 달리 외부에 공개된 행사로 치러지지 않았다. 2·12총선의 야당 승리로 운동권은 전반적으로 고무됐지만, 민청련은 환호보다는 부담스러운 숙제를 안게 됐다는 분위기였다.

숙제의 하나는 전두환 독재체제가 건재한 가운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야당은 언제든 정권과 타협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자중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일이었다. 또 하나의 숙제는 민청련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한 탄압의 칼날이었다.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그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4차 총회에서의 조직 체계상 변화는 이명준 부의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하고 그 자리를 운영위원장인 최민화가 이어받는 정도였다. 운영위위원장은 김희택이 맡았다.

 1985년 3월 1일, 집회에서 연행되는 김희택 운영위원장
 1985년 3월 1일, 집회에서 연행되는 김희택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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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근태 의장은 85년도 사업보고를 하면서 다가올 시기가 민청련이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 그것은 총회 결의문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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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과정에서의 민중의 승리를 전면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을 우리는 반대하여야 한다. 따라서 민중, 민주 주체세력의 발전을 등한시하고 승리감에 젖어 치열성을 둔화시키는 운동 분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관념적 장기론에 빠져 준비론으로 몰락될 수도 있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중 삶의 고통의 가중과 민중생활투쟁의 치열화 앞에 우리는 모두 옷깃을 여미면서 운동과정에서 제기되는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부문운동 상호간의 작은 차별성을 해소시켜나가는 결단을 하여야 한다." 

총회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목동 재개발을 하면서 발생한 철거민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목동문제연대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다가올 5월 투쟁에 대비해서 최민화 부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단일대오 민통련의 탄생
 
한편 총선 이후 제도권의 정치 공간이 활성화되자 운동권 내부에서도 스스로를 정비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총선 결과 집권 세력이 정치적 타격을 받았으므로 반사적으로 반대 세력에게 활동공간은 넓어질 것이었다. 또한 그에 대한 역작용으로 집권 측이 운동권에 대한 대탄압 공세를 펼 가능성도 있었다. 이 모든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첫걸음은 분리돼 있던 민민협(민중민주운동협의회)과 국민회의(민주통일국민회의)를 통합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대표자 그리고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이 참여한 가운데 통합 협상이 개시됐다. 주로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에 있는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사무실에서 약 1달 동안 진행됐다. 노동사목의 간사를 맡고 있던 윤순녀씨는 1960년대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시작해 평생 노동운동을 지원해왔고 재야운동에도 호의적이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협상은 잘 진전되지 않았다. 논점은 국민회의 측을 한 편으로 하고 민청련과 기독교 단체들을 다른 한 편으로 해서 형성됐다. 첫 쟁점은 연대운동의 수준을 협의체로 할 것인지 연합체로 할 것인지였다. 협의체로 하자는 것은 통합기구의 지도력보다는 개별 단체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것이었던 반면 연합체로 하자는 것은 강력한 지도력을 갖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즉 이는 운동 발전의 성과를 부문운동의 강화에 둘 것인지 연대기구에 둘 것인지의 문제였다. 연대기구의 지도력을 집단지도체제로 할 것인지, 단일지도체제로할 것인지도 같은 문제였다.  

결국 논쟁의 핵심은 각 부문운동의 대표성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에 있었다. 즉 민청련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의 조직된 단체들이 통합기구에 대표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아가 통합기구 자체가 이러한 조직 대표성의 원칙 아래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국민회의 측은 현실적으로 그러한 조직노선을 반영한 기존의 민민협 운동이 한계를 보였다는 현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선언적 의미로 부문운동을 강조하되 현실적으로는 개인 명망가들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기구를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민청련은 자신의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회의를 마냥 끌 수는 없었다. 결국 조직운동 대표성을 주장하는 민청련과 기독교 단체들을 배제한 채 일단 통합단체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명칭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으로 했다. 

 1985년 3월 29일, 민통련 출범식 모습.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1985년 3월 29일, 민통련 출범식 모습.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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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9일, 분도빌딩에서 통합 결성대회가 열렸다. 기존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중앙위원 1백여 명이 참석한 회의는 "2·12총선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반영하여 범민주세력의 전열을 정비하고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족통일운동의 지속적 전개를 위해 두 단체가 조건 없이 통합할 것"을 결의했다.

이렇게 결성된 민통련의 정체성은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모든 국민이 참여하고 운영하는 단체"였으며 "지도적 민주 민권 운동가를 포괄하면서 전국적 지부 형성을 통해 국민적 대표성을 획득해 나갈 것"이었다. 특히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과는 구별되는 순수 재야 양심세력의 결집체"라고 규정했다.

지도체제는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와 김승훈 신부를 선출했다. 이렇게 보면 민통련은 민민협과 국민회의 중 국민회의에 보다 가까운 조직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 명망가들이 갖는 여론 파급력을 더욱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통련은 활동의 원칙을 민중노선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즉 "민중의 구체적 삶의 문제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을 조직화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통련은 출범 뒤 분규가 발생한 노동현장에 대한 지원활동에 주력했다. 당장 6월에는 인천에 있는 한일스텐레스 공장에서 쟁의가 발생하자 계훈제 부의장과 방용석 노동자복지협의회 대표 등이 회원들을 이끌고 현장을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구사대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민청련은 민통련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실제 활동에서 서로 배척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운동 지원활동 등은 함께하는 일이 많았고, 구성원 개인 사이의 관계도 친밀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당면 정세가 단체들 사이에 균열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9월 20일 열린 민통련 2차 통합대회에서는 민청련, 기독교계 단체들, 서울노동운동연합,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등 11개 단체가 가입하여 민통련은 명실상부한 통합단체가 된다.

5월 투쟁에서 '야사'를 뜬 이범영

1985년 5월은 민청련이 창립 뒤 두 번째 맞이하는 '광주항쟁기념의 달'이었다. 이번에는 총선 승리로 인한 자신감에서, 보다 과감한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광주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자료집을 제작해 대중을 상대로 배포했다. 아울러 단순히 그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정권을 직접 공격하는 가두시위 투쟁을 민청련이 학생운동과 연대해 실행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누가 가두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것인가를 두고 민청련 내부에서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회원들 대다수가 학생운동 시절에는 '야사를 떴던' 경험이 있었다. '야사'란 야전사령관의 약자로 시위의 초기에 대중 앞에 주모자로 나서는 사람을 가리킨다. 구속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민청련은 공개된 단체이고 그 회원들은 대부분 직장인인 형편에서 쉽사리 구속을 각오할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1985년 5월 17일 동대문운동장 앞 시위에서 살포한 민청련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가 제작한 5월투쟁용 전단지
 1985년 5월 17일 동대문운동장 앞 시위에서 살포한 민청련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가 제작한 5월투쟁용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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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책임은 집행부가 맡는 것이 원칙이라는 데 합의했고, 집행부 중에서 누가 나설 것인가를 두고 서로 고민이 깊었다. 이 과정에서 결단을 내린 이는 집행국장 이범영이었다.

5월 17일 서울 동대문 운동장 주변의 시위에서 이범영은 고가도로 위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며 '야사'를 떴다. 그는 다행히 현장 검거를 피해 구속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곧 다가온 민청련 대탄압에서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미문화원 점거투쟁의 여파

민청련이 5월투쟁을 정리할 무렵, 큰 사건이 터졌다. 5월 23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것이다. 서울 5개 대학 삼민투 소속 대학생 70여 명이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국문화원을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삼민투란, 그 해 4월 전국 대학을 포괄하는 학생운동 단체로 '전국학생총연합'이 결성됐고, 이 단체의 지휘 아래 각 대학에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라는 투쟁조직이 결성되는데 이를 줄여서 부른 명칭이었다. 미문화원에 들어간 함운경 서울대 삼민투위원장은 자신들이 미국에 대해 80년 광주학살의 책임을 묻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1985년 5월 23일,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문화원을 삼민투 소속 대학생들이 점거했다. 아래는 해산하며 연행되기 직전의 점거 대학생들 모습
 1985년 5월 23일,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문화원을 삼민투 소속 대학생들이 점거했다. 아래는 해산하며 연행되기 직전의 점거 대학생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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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지난 연말의 민정당사 점거 사건에 이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80년 광주로의 군대 이동에 대한 권한이 미군에게 있었으므로 미국이 광주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80년 광주로의 군대 이동을 승인한 미국에게 책임을 묻는 미문화원 점거투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민청련은 곧바로 대학생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학생들이 왜 이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 대중들에게 홍보했다. 아울러 구속된 대학생 부모들을 모아 부당한 구속과 고문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선했다.

민청련이 85년 5월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정권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민청련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민청련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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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하게 다가온 1985년 새해

1985년 새해는 온통 정치적 관심사 속에서 밝았다. 불과 40여 일 뒤에 제12대 총선이 예정돼 있었다. 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이 1988년에 7년 단임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 정국 구도를 결정하는 선거였다. 전두환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현행 헌법에 따라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대해 민한당과 국민당은 대통령을 간선제가 아닌 국민 직선제로 선출하는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때 예년과는 다르게 또 하나의 정당이 가세한 것이 예년과 달랐다. 바로 해금된 정치인, 구체적으로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주도하여 결성한 신당인 신한민주당이 창당을 준비하며 정치적 행보를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여타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총선에 나설 후보들을 공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한당 역시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집권 민정당에 대립각을 세웠다. 다른 야당들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같았지만, 국민들은 그 진실성과 추진 의지에서 '민정당 2중대들'보다는 '탄압에 저항하는 정치인' 그리고 그 지도자인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에 대해 더 주목하는 분위기였다.

 1985년 1월 18일, 양 김씨가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실질적 지도자는 양 김씨였으나 총재로는 이민우가 선출됐다
 1985년 1월 18일, 양 김씨가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실질적 지도자는 양 김씨였으나 총재로는 이민우가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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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장이 미어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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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은 곧바로 선거운동 국면에 진입했다. 선거의 초점은 야당 중 기존정당인 민한당과 신당인 신민당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표를 얻을 것인가에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선거제도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해 전국 92개 지역구에서 1, 2위 득표자 184명을 뽑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비례대표 92명을 포함 전체 의원정수는 276석).

가장 관심을 끈 지역구는 정치 1번지로 불린 종로·중구였다. 이 지역구에 민정당은 이종찬, 민한당은 정대철, 신민당은 이민우를 공천했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재직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 참여해서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력으로만 보면 군사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보이지만, 젊은 데다 개혁적인 발언으로 '차세대' 지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종로구 토박이여서 민정당 후보 중 단연 중량감이 있었다.

정대철은 야당의 원로 정치인 정일형의 아들이자, 여성계의 원로 이태영 여사를 어머니로 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그 역시 중구에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였다. 이에 맞서는 이민우는 평생 야당에 몸담아온 나이 70의 노 정치가였지만 고향은 충청북도 청주로 서울과는 인연이 없었다. 더구나 이종찬이나 정대철에 맞서 내세울 경력은 별로 없었다. 단지 새로 창당한 신민당 총재라는 직함이 전부였다. 따라서 언론에서는 대체로 이종찬과 정대철의 당선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2월 1일 종로·중구 첫 합동유세장은 무엇인가 예상치 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전까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는 각 당이 동원한 청중들이 모여들어 자당 후보의 연설에 의례적인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풍경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날 동대문 부근 창신 초등학교 운동장은 동원되지 않은 국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오더니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신민당 이민우 후보의 연설에 열광적인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그것은 유세라기보다는 일종의 반정부 집회와 같은 분위기였다. 이날 청중이 얼마나 넘쳐 났는지 동대문과 종로 일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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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민청련

이러한 예상치 못한 청중의 열기는 운동권에도 충격을 주었다. 민청련도 마찬가지였다. 제휴 투쟁론과 제휴 반대론을 두고 격론을 벌이던 민청련 집행부는 논의를 접고 거리로 뛰쳐나가기로 한다.

당시 민청련이 기획하고 주도하는 가두집회라고 해야 동원된 인원 수백 명에 거리의 동조자 수백 명, 다 합쳐도 1천 명이 모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집회를 한 번 하고 나면 구류자와 구속자가 발생하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합법적인 유세장 집회에 수천, 수만 명이 모여들고 있으니 이는 어항 속 물고기가 거대한 강물을 만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민청련은 다음 종로·중구 유세장에 적극 참여하여 민청련이 만든 유인물을 청중들에게 배포하며 선전전을 벌이기로 한다. 유인물로는 '광주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당시의 참상을 담은 사진기록물을 수록한 자료집을 제작했고,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1장짜리로 만화를 깃들여 구성한 간단한 선전지도 만들었다. 민정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말자는 뜻으로 <민정당식 지상낙원>이란 제목으로 만든 유인물이 그것인데, 그 말미에는 "조국의 민주화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군부폭력 정권의 실상을 이웃과 친지에게 널리 알리고 이번 선거를 통해 민정당 체제를 거부합시다"라고 적었다. 특히 대중들에 대한 선전력을 높이기 위해 벽에 부착하는 스티커를 제작했다. 명함보다 약간 큰 크기의 스티커에는 "군사독재 물리치고 민주사회 이룩하자. 직선개헌 쟁취하여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문구를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유인물에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라는 단체명과 전화번호 720-9452를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들에게 이 유인물이 정체불명의 조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림으로서 그 내용과 주장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선거 국면 동안 민청련 사무실에는 적지 않은 격려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앞뒤 총 6면으로 제작한 총선용 민청련 전단지 ‘민정당식 지상낙원’
 앞뒤 총 6면으로 제작한 총선용 민청련 전단지 ‘민정당식 지상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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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종로·중구의 마지막 합동 유세장인 신문로의 현대인력개발원(구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에는 글자 그대로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운동장은 물론 신문로 도로에까지 청중이 넘쳐났다. 언론들은 이를 "청중 폭발"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언론이 추정한 이 날 청중은 10만 명이었다.

유세장에서 민청련 회원들은 신이 났다. 검거될 위험 없이 마음껏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이른바 대중들을 향해 '아지(선동이라는 뜻 agitation의 약자)'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는 그동안 내부에서 노선을 두고 벌이던 논쟁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반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선거가 끝난 뒤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서 민청련은 이렇게 반성했다.

"4·19혁명 때도, 71년도 대통령 선거 때도, 또한 79년 부마사태 때도, 80년 서울 봄 때도, 광주항쟁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과오를 저질렀다. 역동성에서 뒤떨어져 있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조직 운동 수준, 활동가들의 수준이다."

 선거 선전전에는 늘 민청련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청련에서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판매하는 이명식 민청련 회원 (아래)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통련 신문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는 김지나 민청련 회원
 선거 선전전에는 늘 민청련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청련에서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판매하는 이명식 민청련 회원 (아래)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통련 신문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는 김지나 민청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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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2월 8일, 그동안 미국에 머물고 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귀국한 것이다. 미국 정치인 및 기자들과 함께 귀국한 김대중은 공항에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삼엄한 경비에 의해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이송되어 자택에 연금되었다.

대중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지만 김대중이 몰고 온 '민주화 바람'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민추협은 양 김씨가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있어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고문의 직책이었고, 김영삼 공동의장과 김상현 공동의장대행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김대중이 귀국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양 김씨 공동의장 체제가 될 것이었다.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고 며칠 뒤 있을 총선에서 신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신민당 돌풍

당시 선거구 중 관심을 끄는 또 한 곳은 서울 성북구였다. 이곳에는 민정당 김정례, 민한당 조윤형에 신민당 이철이 출마했다. 김정례는 여성계의 대표적인 이물로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조윤형은 해방정국과 자유당 정권 때의 정치 거물 조병옥의 아들로 민한당의 중진이었다. 이에 맞서는 이철은 1974년 서울대학교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학생운동 1세대였다.

이철은 지역구 유권자들에겐 낯선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심하던 중 선거 포스터 문구를 "돌아온 정치 사형수"로 했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이 문구에 의해 이철에게는 신민당이라는 참신한 정당 소속에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의로운 투사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저항의 불씨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이민우는 정대철을, 이철은 조윤형을 꺾었다. 이는 유권자들이 민한당을 버리고 신민당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태였다. 서울 전체를 보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은 전원 당선됐다. 반면 민한당은 강남구 단 1곳에서만 당선됐다. 강남구에서는 민정당이 낙선하고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되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득표율이 민정당보다 15% 더 많았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압도적인 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민정당은 35.2% 신민당은 29.3% 민한당은 19.7% 국민당은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민한 두 야당의 득표율이 집권 여당보다 14% 앞섰다. 내용으로는 민정당의 패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 지각변동의 첫 파도는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여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이었다. 민한당은 결국 단 3명이 남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다음 13대 총선에서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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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의 충격 속에서 전두환은 1979년 12·12사태 때 수도방위사령관으로서 자신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이후 자신의 후계자로 알려져 있던 노태우를 민정당 대표위원이라는 직책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앞으로 신민당이 펼칠 정치 공세에 실세가 나서서 대응하겠다는 태세였다.

신민당의 실질적 운영 주체는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은 그 입지가 재야 운동권과 비슷하게 정국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신민당이 제기할 첫 번째 정치 의제는 개헌이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 모인 대의원이 아닌,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하자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는 집권 세력에게는 자신의 토대 자체를 공격하는 엄중한 사태였다.

이제 민청련도 투쟁적 야당의 등장에 대해, 그들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했다. 내부에서는 또 한 차례 뜨거운 논쟁의 장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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