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여 년 만에 드러난 ‘101인 사건’ 재판…
박헌영 뜨거운 항의 연설의 전모


경성지방법원 건물,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임경석 제공


새 사료가 발굴됐다. 베일 속에 감춰진 역사 속 진실을 전해주는 진기한 기록이다.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에 있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서 오래 잠자고 있던 이 기록에는 방청이 금지된 한 비밀재판의 진행 상황이 담겨 있다. 1927년 9월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개정된 ‘101인 사건’ 재판정에서 한 피고인이 행한, 목숨을 건 과감한 법정투쟁의 실상이 적혀 있다(‘제목 없는 문서: 9월15일 공판 제2일에 박헌영이 발언하기를…’).


101인 사건이란 식민지시대에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3대 독립운동 탄압 재판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그중 첫 번째는 ‘105인 사건’이었다. 식민지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비밀결사 신민회 탄압 재판이었다. 두 번째는 ‘48인 사건’이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를 비롯해 독립선언 사전 모의에 가담한 인사들을 탄압한 재판이 그것이다. 이어서 항일운동 재판의 바통을 넘겨받은 것이 바로 ‘101인 사건’이었다. 3·1운동 이후 들불처럼 타오르던 사회주의운동의 대표 단체, 비밀결사 조선공산당 재판이었다. 세 재판은 피고인 수가 각각 105명, 48명, 101명이었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갖게 됐다. 언론매체들은 세 재판을 가리켜, “식민지 조선 통치 20년래의 대표적 중대 사건”이라고 지목했다(‘반도 근대사상 3대 사건의 조선공산당 공판 금일 개정’, <동아일보> 1927년 9월13일치). 항일운동 역사를 대표하는 사건으로서 신민회, 3·1운동, 조선공산당이 나란히 손꼽히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사코·반제티 사건에 비견되는 세계적 대사건


경성지방법원 제3호 법정 내부 풍경을 전하는 스케치. 임경석 제공


신문들뿐이랴. 일본 사법 관료들도 동일한 인식을 보였다. 취조를 직접 했던 사토미 간지 검사는 셋 중에서도 조선공산당이 더욱 위험하고 교묘하다고 평가했다. 더 나아가 101인 사건은 ‘조선의 대사건’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대사건’이라고 논평했다. 실제로 그랬다. 조선공산당 사건은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것은 미국에서 자행된 사코·반제티 사형 사건과 더불어 1927년 한 해 동안 “전세계 무산계급의 격동을 일으킨” 양대 사건으로 일컬었다(‘사설, 개인과 결사- 공산당사건 공판 개정에 임하여’, <조선일보> 1927년 9월14일치). 사코와 반제티는 무정부주의 신념을 가졌다는 이유로, 상충되는 증거가 있는데도 미국 법정에서 무장강도 사건의 범인으로 처형된 이탈리아계 미국인 노동자들이었다.


101인 사건의 재판이 시작된 것은 1927년 9월13일이었다. 취조 기록만도 4만여 쪽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담당한 일본인 재판장이 기록을 보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피고인들은 두 차례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체포된 20~30대 청년이었다. 그중 20명은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 때 체포됐고, 81명은 1926년 6월부터 8월까지 전국에 걸쳐 계속된 제2차 검거 사건의 희생자였다.


경성 거리는 새벽부터 삼엄했다. 시내 도로에는 길목마다 정복 경관들이 늘어섰고, 재판소 앞길과 종로 큰길에는 기마경찰대가 말굽 소리를 높게 울리며 순찰에 나섰다. 경성역과 용산역에는 경찰과 헌병이 늘어서서 승객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재판소 구내에는 정복 경관대가 밀집한 채 경계했고, 건물 주위에는 사복 경관대가 이중 삼중으로 배치됐다. 온 시내에 긴장된 분위기가 가득 찼다.


박헌영 “비공개 재판 인정하지 않겠다”


조선공산당 재판 첫날 재판소 앞에 모인 군중. 임경석 제공


일간지들은 재판 동향을 대서특필했다. 경찰의 경계 태세, 재판 진행 경과, 거리 풍경, 변호사 동향, 피고인들의 혐의 사실 등을 자세히 보도했다. 이런 양상은 확정판결이 내려진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됐다.


방청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피고인의 가족과 친지만으로도 수백 명인데다 각지의 사회운동 단체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경찰 추산에 따르면,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만도 개정 이틀 전에 이미 500명이 넘었다. 재판소 문 앞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방청권을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나 방청은 개정 직후 두 차례만 허용됐다. 제2회 공판일인 9월15일, 재판부는 방청 금지를 선언했다. 공개재판이 공공의 안전을 방해할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비밀재판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변호인단이 집단으로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때였다. 피고인석에서 한 사람이 일어나 발언권을 요청했다. 박헌영이었다. 그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재임 중에 체포됐다. 박헌영은 식민지 법정의 공용어인 일본어로 유창하게 발언했다.


“우리는 무산계급의 전위가 되어 일하는 터인데, 방청을 금지하고 엄중한 경계를 행하는 것은 곧 무산계급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는 이 재판을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재판장 마음대로 우리에게 징역형을 판결하시오.”


그러나 방청 금지는 풀리지 않았다. 비밀재판을 하겠다는 것이 식민지 통치 당국의 확고한 의지였다. 그뿐인가. 방청 금지와 더불어 법정 내부 동향을 보도하는 것도 금지했다. 언론매체들은 고작 재판소 주변 동정을 전하는 게 전부였다.


제4회 공판일인 9월20일, 박헌영은 다시 과감한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목숨을 건, 비장한 행동이었다. 재판장이 정숙하라고 고함치고 위협하는데도, 박헌영은 진술을 멈추지 않았다. 취조 중에 고문으로 사망한 동료의 죽음을 항의하는 발언이었다고만 알려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문 지면에는 법정 바깥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습만 보도됐을 뿐이다. 그에 따르면 오전 9시 개정 직후 재판정 내부에서 뭔가 사고가 일어났다. 개정 20분 만에 피고인 박헌영이 간수 서너 명에게 붙잡힌 채 끌려나왔고, 뒤이어 염창렬도 그랬다. 그 후 1시간30분 휴식 뒤 재판이 속개됐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20분도 채 못 돼 재차 재판이 중단됐다. 재판은 오후 1시40분에야 다시 열렸다. 이 동향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해 이 사실을 보도했다.


일제 경찰의 고문치사 폭로


(왼쪽부터) 비밀재판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는 러시아어 발굴 자료 첫 페이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기 이전의 젊은 박헌영. 방청 금지를 알리는 법원 앞 공지문. “치안유지법 위반 사건 공판은 방청이 금지됐으므로 재판정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경성지방법원” 임경석 제공


도대체 재판정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새 발굴 자료 덕분에 그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됐다. 아침 9시 개정이 되자마자 박헌영은 격렬한 발언을 시작했다. 일본 관헌의 야수적인 고문 행위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당신네는 법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거짓입니다. 법률에 의거하고 있다 하면서도, 당신네는 심리 중에 온갖 고문을 가해서 우리를 불구자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법정에 서 있는 것은 아직 우리가 어떻게든 살아 있는 덕분일 뿐입니다. 우리 박순병 동무를 왜 죽였습니까? 우리는 그가 죽었음을 바로 여기서 알았습니다. 그 사람을 회상하니 분노를 참을 수 없습니다.”


박헌영은 말을 미처 끝마치지 못한 채 통곡했다. 박순병은 <시대일보사>의 젊은 기자로서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비밀활동을 하던 가까운 동지였다. 그는 1926년 7월19일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대에 체포돼 취조를 받다가, 8월25일 장파열로 사망했다(‘박순병씨 요절’, <동아일보> 1926년 8월27일치).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 명백했다. 박헌영의 비분에 찬 발언은 좌중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피고인 100명이 모두 목 놓아 울었다. 박헌영은 시선을 돌려 피고인 동지들을 향해 말했다. 당부의 말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입니다. 우리는 징벌이 두렵지 않습니다. 끝까지 당당한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를 자임하는 김약수가 이 법정에서 그처럼 부끄럽게 처신할 거라고는 나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자는 그처럼 부끄럽게 행동할 수 없고 또 해서도 안 됩니다.”


김약수의 부끄러운 처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법정에서 이뤄진 문답을 가리켰다.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인 김약수에게 장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누가 통치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약수는 “그때도 천황 폐하가 다스립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이런 문답이 있었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과연 부끄러운 처신인지는 관점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수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김약수의 진술 전략은 박헌영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적법한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라는 신흥 사상을 연구하는 것 자체는 합법적으로 허용됐다. 천황 운운하는 발언도 바로 그런 고려에서 나온 진술이었다. 게다가 김약수는 조선공산당 사건에 말려들 이유가 없었다. 비록 1925년 4월 창당대회에는 참가했지만, 그해 10월 의견 다툼으로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1925년 10월 이후에는 더 이상 조선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여전히 ‘까엔당’(조선인민당)이라는 비밀결사의 지도자였지만.


11시 재판이 속개된 뒤에도 박헌영은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고문을 언급했다. “박순병 동무는 우리의 적, 바로 당신들에게 살해됐습니다. 정말로 우리 동무를 추도해서는 안 되는 겁니까?”라고 압박했다. 그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경찰과 검찰의 신문 중에 자행된 모든 고문을 폭로했다. 더 나아가 공개재판과 재판부의 재구성을 요구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의 자긍심


박헌영이 자기 요구를 강청했으므로 재판은 두 번째로 중단됐다. 변호사들은 박헌영을 설득했다. 고문 건과 박순병 살해 건에 관해서는 새로이 소송을 제기하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다시 오후 1시40분에 재판이 열렸다.

 

박헌영의 법정투쟁은 시종 당당했다. 고문과 억압 속에서 심리적으로 짓눌려 있던 피고인들의 자긍심을 회복해주었다. 이후 그는 신뢰할 수 있는 믿음직한 지도자감으로 동지들 사이에 회자됐다. 그러나 가혹한 보복이 뒤따랐다. 박헌영은 공판이 끝난 뒤 무지막지한 폭행을 당했다. 1928년 11월20일 쓴 박헌영의 자필 영문이력서에 따르면 “나는 법정에서 일본 재판관에 반대해 투쟁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옥에 돌아와서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 결과 나는 1927년 9월 말까지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자살을 기도하고, 자기 똥을 퍼먹는 등 박헌영의 ‘정신이상’ 현상은 이 폭행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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