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클레식 기타 곡으로 작곡한 타레가의 명곡이다.
트레몰로 주법이 애잔한 분위기를 낸다.

기타의 가능성을 재발견한 인물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
타레가는 기타의 현대적인 주법을 완성한 기타리스트로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비르투오소적인 테크닉 때문에 ‘기타의 사라사테’라고 불리기도 할 정도였다.
그가 아니었으면 기타라는 악기는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하여 지금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1880년대부터 약 20여 년간, 서유럽의 예술음악들, 즉 바흐나 베토벤, 쇼팽 등이 작곡한 음악들을 기타로 편곡하였다.
그 과정에서 현대적인 주법들이 사용되었고, 새로운 음향 역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기타라는 악기의 레퍼토리는 매우 확장되었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기타라는 악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뿐 아니라,
자신의 고국인 스페인의 민속음악적 요소들을 기타 작품으로 만드는 데도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빛나는 산물이 바로 이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다.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는 1852년 11월29일 스페인의 바렌시아주 카스텔론의 빌라레알에서
한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레가는 8세 때 맹인 기타리스트인 마누엘 곤잘레스(M.Gonzales)에게
최초로 기타지도를 받고, 이어 훌린안 아르카스(Fulian Arcas), 토마스 다마스(T.Damas)에게 사사하였다.
타레가는 한 후원인의 도움으로 바렌시아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브리아나로 가서 기타교수 생활로 가난하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브리아나의 재벌을 만나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875년에는 콩쿨에서 1등을 획득했으며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얻었다.
그 후 타레가는 기타리스트로서 마드리드에 데뷔한 후 스페인은 물론 런던, 파리, 스위스 등을 연주여행 했으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는 기타에 관한 일관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공부한 그가 기타에 전념하게 된 것은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부터였다.
기타의 어떤 모습도 타레가가 이 악기로부터 회의를 품도록 만들지 못했다.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타레가는 알함브라 극장에서 기타 독주회를 성공적으로 가졌으며,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전국 주요도시의 순회 연주회에서 타레가 특유의 신선하고 독특한 연주를 하여 절찬을 받았다.
1881년에는 파리, 런던 등지에서 연주, 귀국 후에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 연주여행을 가졌고
결혼하여서는 바르셀로나에 정주하였다.
타레가는 겸손, 온화, 학구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화려한 스테이지에서 멀리하는 한편
기타 예술의 탐구를 위한 엄격한 수도자 같은 생활을 하였다.
타레가가 이룬 많은 업적 가운데 일부는 기타로 하여금 그 소리가 더욱 맑게 울려 퍼지도록 한 것과
기타의 울림에 풍부한 색채감을 준 것, 그리하여 복잡한 악곡들도 기타로 연주할 수 있게 한 것 등이다.
이 모든 업적은 기타의 주법 개발과 기타의 디자인 혁신으로 인해 가능했다.
타레가는 음색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타레가가 기타를 위해 손을 댄 작품으로는 기타자체를 위한 오리지널 작품과
모차르트, 하이든, 슈베르트, 베버 그리고 바그너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편곡작품이 있다.

이 위대한 기타음악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대단한 개성과 스페인의 철저한 향토성을 감지하게 된다.
그는 투리나(Turina), 토로바(Torroba), 팔라(Falla), 빌라로보스(VillaLobos)로 이어지는 스페인 음악의 첫주자였다.
단순하고 명상적인 <전주곡>은 Lagrima(눈물)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마주르카의 두 제목은 여자의 이름을 나타내는데 그 특징은 틀림없이 음악에 비추어져 있는 듯싶다.
‘13개의 전주곡’, ‘알람브라의 회상’, ‘아라비아 기상곡’ 등 작곡, 편곡을 합해 300곡이상의 걸작이 있다.
타레가는 젊었을 때부터 지병인 안질로 계속 고생하다가 중풍꺼지 겹쳐서
1919년까지 고생하던 끝에 그해 12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서거하였다.

타레가는 생애의 반을 손톱을 사용한 주법으로 연주했으나 자신의 손톱에 결함이 생겨
손톱없이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을 수개월간 연구끝에 개발하여
그후로는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까지 손톱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레가의 직계문하인 에밀리오 푸홀(E.Pujol 1886~ 스페인)은 타레가가 손톱 없이 연주하게 된 원인은
타레가 자신의 손톱에 결함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손가락 살 이외의 불필요한 물질을 사용하여 탄주하는 것보다
신경과 직결될 수 있는 손가락 살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대의 기타리스트 중에서 타레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타레가가 존재하지 않았던들 지금의 기타는 진로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타레가는 종래의 기타연주나 작곡에서 철저한 개혁을 하였으며 아구아도 주법을 떠나
기타연주 기법의 백지상태에서 기타가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한까지 연구, 개척하였다.
왼손의 운지법, 오른손의 탄주법, 또는 음색, 음량의 풍부한 변화와 화음의 확충등,
수많은 업적은 우수한 문하생들에게 계승되어 20세기 기타 르네상스를 낳게 하였다.

금세기 초에 활약하였던 스페인의 저명한 음악가 루이스 미류트는 타레가를 찬양하는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작곡가로서의 타레가는, 페르난도 소르의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타의 진짜 위대한 면을 발견해낸 것은 타레가라고 생각한다."
현재 타레가의 유해는 출생지인 카스텔론에 안장되어 있으며
프라아나에는 타레가 일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상이 세워졌다.
알람브라 궁전은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중반에 세우기 시작하였고, 증축 및 개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약 14세기에 완성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하는 이 궁전은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이 스페인의 페르난드 2세의 공격에 대항하지 않고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이슬람 왕조와의 연을 다하였다.
트레몰로 주법이 만들어내는 애잔한 분위기는 알람브라 궁전의 이러한 서글픈 역사를 잘 표현한다.
또한, 설에 불과하지만, 타레가가 어느 여인을 사랑하였으나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떠나게 된 여행길에 이 궁전을 보았다는 이야기 역시 곡의 애절한 느낌과 잘 맞아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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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now the end is near   이제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와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인생의 마지막 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my friend I'll say it clear   나의 벗이여, 이제 사심없이
I'll state my case   내가 자신있게 살아온
of which I'm certain   나의 인생을 밝히고 싶군요
I've lived a life that's full,   난 나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아왔고
I traveled each and every highway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을 겪어왔습니다.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I did it my way   난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 겁니다.

Regrets I've had a few   조금의 후회도 없지는 않아요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그러나 다시금 되새길 만한 후회는 없었지요
I did what I had to do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다했고
and saw it thru   힘들었던 고난의 일들을
without exemption   아무런 편법도 쓰지 않고 해왔습니다.
I planned each chartered course   나는 내모든 인생의 길을 계획했고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 way   그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걸어왔습니다.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I did it my way   난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거지요.

Yes, there were times,   그래요, 친구도 알고 있으리라 확신하지만
I'm sure you knew   난 내가 할 수 없었던 일에도
When I bit off   터무니 없이 대들기도 했었던
More than I could chew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But through it all   그러나 그 모든 일을 겪어오면서도
when there was doubt   행여 의심스러웠을 때는
I ate it up and spit it out   그 모든걸 다 먹었다가도 뱉어내버렸죠
I faced it all and I stood tall   난 모든 것에 맞서서 자신있게 견뎌냈어요
and did it my way   그래요 난 내 방식대로 살아온겁니다.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난 사랑도 했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I've had my fill,   소유하는 만족감도 얻었고,
my shere of losing   잃어 버리는 좌절감도 겪었습니다.
And now as tears subside   그런데 이제 눈물을 거두고 나니
I find it all so amusing   그 모든 것이 우스웠다는걸 알게 됩니다.
To think I did all that   내가 해온 그 모든 일들을 생각해보면
And may I say,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었다고
Not in a shy way   난 말할 수 있습니다.
Oh,no,oh,no not me   그래요, 아니예요, 난 부끄럽게 살지 않았어요.
I did it my way   난 내 방식대로 살아온 겁니다.

For what is a man   남자란 무엇을 위해 사는가
what has he got   남자란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
if not himself then he has not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To say the things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he truly feels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And not the words   무릎을 꿇고 말하는 그런
of one who kneels   비굴한 자들의 말이어서는 안되는거지요.
The record shows   지난 세월들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I took the blows   내가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이죠
And did it my way   난 내 방식대로 살아온겁니다.
Yes,It was my way...  그래요, 그것이 바로 내가 걸어온 인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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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바빌론(원수의 도성)의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예, 우리는 자이언(조국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바빌론(원수의 도성)의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우리는 자이언(조국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Required from us a song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죠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수 있나요.
in a strange land  이런 낯선 땅에서


When the wicked Carried us away in captivity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Requiering of us a song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Now how shall we sing the lord's song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in a strange land  이런 낯선 땅에서


Let the words of our mouth and the meditation of our heart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가슴에서의 명상을
be acceptable in thy sight here tonight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세요
Let the words of our mouth and the meditation of our heart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의 가슴에서의 명상을
be acceptable in thy sight here tonight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세요.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바빌론(원수의 도성)의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우리는 자이언(조국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when we remember Zion.  자이언(조국 시온)을 생각하며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바빌론(원수의 도성)의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우리는 자이언(조국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By the rivers of Babylon (dark tears of Babylon)  바빌론(원수의 도성)의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there we sat down (You got to sing a song)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했어요)
ye-eah we wept, (Sing a song of love)  예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렀어요)
when we remember Zion. (Yeah yeah yeah yeah yeah)  자이언(조국)을 생각하며 (예 예 예 예 예)


By the rivers of Babylon (Rough bits of Babylon)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there we sat down (You hear the people cry)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ye-eah we wept, (They need their God)  예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신이 필요해요)
when we remember Zion. (Ooh, have the power)  자이언을 생각하며 (오, 권력을 가져요)


 ▽ ▽ ▽


1978년 흑인그룹 보니엠의 히트곡
'바빌론 강가에서'는 경쾌하고 단순한 레게 리듬에 묵직한 주제를 담은 복음성가이다.
가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바빌론의 유수(幽囚)'로 알려진 유대인 포로 행렬이다.


2,600여년 전 바빌로니아의 정복왕 느부갓네살은 세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을 점령해야 했다.
처음엔 이집트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들렀으며, 나머지 두번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짓밟았다.
그리고 당시의 관행에 따라 지도자급 유대인을 몽땅 포로로 잡아갔다.
유대인 포로들은 바빌론 강가에서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그리워하는 망향가를 불렀던 것이다.


세계사의 요충지인 팔레스타인(현재의 이스라엘)에 터를 잡은 유대인은 수천년간 강대국의 외침에 부서지고 흩어져야 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예루살렘 귀소(歸巢)본능은 독특해 부단히 시온으로 모여들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2,000년 만에 얻은 꿈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유대인은 조국 없이도 민족적 정체성을 고수해 세계사의 주목을 받았다.


고향 팔레스타인을 떠나 사는 유대인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른다.  '흩어진 사람들'이란 뜻이다.

바빌론의 유수 이전 아시리아의 유수, 혹은 모세 이전 이집트에 정착한 요셉까지도 디아스포라로 볼 수 있다.
디아스포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출발했지만 유대인의 종교적 결속과 영향력 강화라는 긍정적 성과를 거두었다.
위기이자 기회며, 도전이자 비전이다. 유대인의 종교가 세계화됐듯 디아스포라의 개념도 보편화됐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일제 침략으로 나라가 망한 20세기 초에 집중됐다.
식민치하를 겪으면서 2000만 한민족의 3분의 1 가량이 한반도를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약 600만명의 한민족이 전세계에 퍼져 있다.

구약 성경 시편 137편에서 가사를 거의 그대로 따와 만들어진 영감에 찬 노래다.

가사를 요약하면.. 바빌론 강가에 앉아 시온 (잃어버린 조국,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으로

1970년대 말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디스코 열풍의 대표적인 그룹으로

유럽 및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보니엠'은 여성3인과 남성1인 모두 4인조의 흑인 보컬이다.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게 특징이고
1976년 데뷔곡 'Daddy Cool'은 최단시일에 최정상을 차지하도록 계기가 되어준 출세작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꾸준한 애창곡으로 꼽히고 있고 그 외에도
'Rivers of Babylon', 'Bahmama Mama', 'Happy Song' 등도  히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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