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박하게 다가온 1985년 새해

1985년 새해는 온통 정치적 관심사 속에서 밝았다. 불과 40여 일 뒤에 제12대 총선이 예정돼 있었다. 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이 1988년에 7년 단임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 정국 구도를 결정하는 선거였다. 전두환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현행 헌법에 따라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대해 민한당과 국민당은 대통령을 간선제가 아닌 국민 직선제로 선출하는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때 예년과는 다르게 또 하나의 정당이 가세한 것이 예년과 달랐다. 바로 해금된 정치인, 구체적으로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주도하여 결성한 신당인 신한민주당이 창당을 준비하며 정치적 행보를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여타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총선에 나설 후보들을 공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한당 역시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집권 민정당에 대립각을 세웠다. 다른 야당들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같았지만, 국민들은 그 진실성과 추진 의지에서 '민정당 2중대들'보다는 '탄압에 저항하는 정치인' 그리고 그 지도자인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에 대해 더 주목하는 분위기였다.

 1985년 1월 18일, 양 김씨가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실질적 지도자는 양 김씨였으나 총재로는 이민우가 선출됐다
 1985년 1월 18일, 양 김씨가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실질적 지도자는 양 김씨였으나 총재로는 이민우가 선출됐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유세장이 미어터지다

ad

정국은 곧바로 선거운동 국면에 진입했다. 선거의 초점은 야당 중 기존정당인 민한당과 신당인 신민당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표를 얻을 것인가에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선거제도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해 전국 92개 지역구에서 1, 2위 득표자 184명을 뽑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비례대표 92명을 포함 전체 의원정수는 276석).

가장 관심을 끈 지역구는 정치 1번지로 불린 종로·중구였다. 이 지역구에 민정당은 이종찬, 민한당은 정대철, 신민당은 이민우를 공천했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재직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 참여해서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력으로만 보면 군사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보이지만, 젊은 데다 개혁적인 발언으로 '차세대' 지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종로구 토박이여서 민정당 후보 중 단연 중량감이 있었다.

정대철은 야당의 원로 정치인 정일형의 아들이자, 여성계의 원로 이태영 여사를 어머니로 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그 역시 중구에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였다. 이에 맞서는 이민우는 평생 야당에 몸담아온 나이 70의 노 정치가였지만 고향은 충청북도 청주로 서울과는 인연이 없었다. 더구나 이종찬이나 정대철에 맞서 내세울 경력은 별로 없었다. 단지 새로 창당한 신민당 총재라는 직함이 전부였다. 따라서 언론에서는 대체로 이종찬과 정대철의 당선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2월 1일 종로·중구 첫 합동유세장은 무엇인가 예상치 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전까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는 각 당이 동원한 청중들이 모여들어 자당 후보의 연설에 의례적인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풍경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날 동대문 부근 창신 초등학교 운동장은 동원되지 않은 국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오더니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신민당 이민우 후보의 연설에 열광적인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그것은 유세라기보다는 일종의 반정부 집회와 같은 분위기였다. 이날 청중이 얼마나 넘쳐 났는지 동대문과 종로 일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물 만난 물고기, 민청련

이러한 예상치 못한 청중의 열기는 운동권에도 충격을 주었다. 민청련도 마찬가지였다. 제휴 투쟁론과 제휴 반대론을 두고 격론을 벌이던 민청련 집행부는 논의를 접고 거리로 뛰쳐나가기로 한다.

당시 민청련이 기획하고 주도하는 가두집회라고 해야 동원된 인원 수백 명에 거리의 동조자 수백 명, 다 합쳐도 1천 명이 모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집회를 한 번 하고 나면 구류자와 구속자가 발생하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합법적인 유세장 집회에 수천, 수만 명이 모여들고 있으니 이는 어항 속 물고기가 거대한 강물을 만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민청련은 다음 종로·중구 유세장에 적극 참여하여 민청련이 만든 유인물을 청중들에게 배포하며 선전전을 벌이기로 한다. 유인물로는 '광주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당시의 참상을 담은 사진기록물을 수록한 자료집을 제작했고,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1장짜리로 만화를 깃들여 구성한 간단한 선전지도 만들었다. 민정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말자는 뜻으로 <민정당식 지상낙원>이란 제목으로 만든 유인물이 그것인데, 그 말미에는 "조국의 민주화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군부폭력 정권의 실상을 이웃과 친지에게 널리 알리고 이번 선거를 통해 민정당 체제를 거부합시다"라고 적었다. 특히 대중들에 대한 선전력을 높이기 위해 벽에 부착하는 스티커를 제작했다. 명함보다 약간 큰 크기의 스티커에는 "군사독재 물리치고 민주사회 이룩하자. 직선개헌 쟁취하여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문구를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유인물에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라는 단체명과 전화번호 720-9452를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들에게 이 유인물이 정체불명의 조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림으로서 그 내용과 주장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선거 국면 동안 민청련 사무실에는 적지 않은 격려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앞뒤 총 6면으로 제작한 총선용 민청련 전단지 ‘민정당식 지상낙원’
 앞뒤 총 6면으로 제작한 총선용 민청련 전단지 ‘민정당식 지상낙원’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2월 6일, 종로·중구의 마지막 합동 유세장인 신문로의 현대인력개발원(구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에는 글자 그대로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운동장은 물론 신문로 도로에까지 청중이 넘쳐났다. 언론들은 이를 "청중 폭발"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언론이 추정한 이 날 청중은 10만 명이었다.

유세장에서 민청련 회원들은 신이 났다. 검거될 위험 없이 마음껏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이른바 대중들을 향해 '아지(선동이라는 뜻 agitation의 약자)'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는 그동안 내부에서 노선을 두고 벌이던 논쟁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반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선거가 끝난 뒤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서 민청련은 이렇게 반성했다.

"4·19혁명 때도, 71년도 대통령 선거 때도, 또한 79년 부마사태 때도, 80년 서울 봄 때도, 광주항쟁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과오를 저질렀다. 역동성에서 뒤떨어져 있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조직 운동 수준, 활동가들의 수준이다."

 선거 선전전에는 늘 민청련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청련에서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판매하는 이명식 민청련 회원 (아래)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통련 신문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는 김지나 민청련 회원
 선거 선전전에는 늘 민청련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청련에서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판매하는 이명식 민청련 회원 (아래)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통련 신문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는 김지나 민청련 회원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이때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2월 8일, 그동안 미국에 머물고 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귀국한 것이다. 미국 정치인 및 기자들과 함께 귀국한 김대중은 공항에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삼엄한 경비에 의해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이송되어 자택에 연금되었다.

대중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지만 김대중이 몰고 온 '민주화 바람'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민추협은 양 김씨가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있어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고문의 직책이었고, 김영삼 공동의장과 김상현 공동의장대행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김대중이 귀국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양 김씨 공동의장 체제가 될 것이었다.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고 며칠 뒤 있을 총선에서 신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신민당 돌풍

당시 선거구 중 관심을 끄는 또 한 곳은 서울 성북구였다. 이곳에는 민정당 김정례, 민한당 조윤형에 신민당 이철이 출마했다. 김정례는 여성계의 대표적인 이물로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조윤형은 해방정국과 자유당 정권 때의 정치 거물 조병옥의 아들로 민한당의 중진이었다. 이에 맞서는 이철은 1974년 서울대학교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학생운동 1세대였다.

이철은 지역구 유권자들에겐 낯선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심하던 중 선거 포스터 문구를 "돌아온 정치 사형수"로 했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이 문구에 의해 이철에게는 신민당이라는 참신한 정당 소속에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의로운 투사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저항의 불씨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이민우는 정대철을, 이철은 조윤형을 꺾었다. 이는 유권자들이 민한당을 버리고 신민당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태였다. 서울 전체를 보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은 전원 당선됐다. 반면 민한당은 강남구 단 1곳에서만 당선됐다. 강남구에서는 민정당이 낙선하고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되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득표율이 민정당보다 15% 더 많았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압도적인 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민정당은 35.2% 신민당은 29.3% 민한당은 19.7% 국민당은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민한 두 야당의 득표율이 집권 여당보다 14% 앞섰다. 내용으로는 민정당의 패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 지각변동의 첫 파도는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여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이었다. 민한당은 결국 단 3명이 남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다음 13대 총선에서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 민청련동지회

관련사진보기


총선의 충격 속에서 전두환은 1979년 12·12사태 때 수도방위사령관으로서 자신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이후 자신의 후계자로 알려져 있던 노태우를 민정당 대표위원이라는 직책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앞으로 신민당이 펼칠 정치 공세에 실세가 나서서 대응하겠다는 태세였다.

신민당의 실질적 운영 주체는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은 그 입지가 재야 운동권과 비슷하게 정국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신민당이 제기할 첫 번째 정치 의제는 개헌이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 모인 대의원이 아닌,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하자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는 집권 세력에게는 자신의 토대 자체를 공격하는 엄중한 사태였다.

이제 민청련도 투쟁적 야당의 등장에 대해, 그들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했다. 내부에서는 또 한 차례 뜨거운 논쟁의 장이 펼쳐졌다.



IE002254437_STD.jpg
0.88MB
IE002254436_STD.jpg
1.25MB
IE002254442_STD.jpg
0.74MB
IE002254444_STD.jpg
0.87MB
IE002254435_STD.jpg
0.38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