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항겔리스키 성당 (대천사 성당, Archangel Michael Cathedral, Архангельский собор )  

 

영어의 앤젤(Angel 천사)을 의미하는 아르항겔리스키(Arkhangelsky) 성당은 

우스펜스키 사원과 대각으로 맞은 편에 위치한다. 

러시아의 황실 무덤인 아르항겔스키 사원은 베니스 출신 건축가이자 장식가 

알레비즈 노브(Aloisio Novyi)에 의해 1505 ~ 1508년 지어졌으며 

J.까자네스, S.례자녜쯔, S.우쉬아꼬프 등 유명 화가들이 그린 벽화가 있다.


아르항겔리스키 성당은 모스크바 대공들과 황제들이 묻혀 있는 곳으로 

14세기 초 천사 미카엘 성당이 있던 자리에 대천사 미카엘을 모신 최초의 석조 교회로 세워졌다. 

천사 미카엘은 모스크바 공후들의 군사적 수호천사였다.


이 성당은 역대 황제와 귀족의 유체 안치소이며, 총 48개나 되는 관이 성당 내 곳곳에 놓여 있다. 

유명한 사람으로는 이반 뇌제, 그의 아들 이반, 표트르 등이 있다. 

살해당한 왕자 드미뜨리가 순교자로 인정되어, 그의 묘지 위 남동쪽 기둥 근처에는 

부조장식이 있는 백석 지붕이 세워졌다.


성화로는 15세기의 페오판 그레크 작인 "대천사(아르항겔) 미하일"이 볼 만하다. 

또 20세기 중엽에는 러시아 민족 독립 투쟁을 묘사한 벽화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대천사 성당, Archangel Michael Cathedral, Архангельский собор ) 


대천사 사원은 러시아군의 수호천사인 미가엘 천사장을 위해 만든 것이고, 

모스크바공국의 대공 및 봉건 제후들, 그리고 초기 러시아제국 황제들의 무덤으로 이용되었다


대천사 사원의 건축양식을 보면, 고대 러시아와 이태리 건축양식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원은 다섯 개의 돔지붕으로 되어 있고, 전면양식은 전형적인 이태리 문예부흥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코니스(돌림띠)가 벽을 2단으로 나누고 있는데, 하단은 아케이드 모양으로 장식되고 있고, 

상단은 패널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치형 지붕은 조개 껍데기 모양을 한 백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벽 기둥은 아름다운 조각무늬가 있는 기둥머리로 장식되었다. 

서문 중앙의 아치형 다락은 메달처럼 작고 둥근 창문들로 장식하였고, 

서문과 북문은 식물문양이 조각된 백석으로 장식하였다.




인증샷


황실 무덤이 있는 아르헹겔리스키 성당


이반 1세가 처음 석조사원을 건설하고 사원에 장사된 1340년부터 류릭 왕조와 로마노프 왕조의 무덤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가장 오래된 것은 1340년 죽은 이반 칼리 공의 관이다. 

이반 대제의 머리는 인류학자인 미하일 겔리시모프에 의하여 두 개골 형태의 플라스틱에 살을 붙인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아르헹겔리스키 성당(Archangel's Cathedral) 입구


아르헹겔리스키 성당(Archangel's Cathedral) 입구의 성화


아르헹겔리스키 성당(Archangel's Cathedral) 입구의 성화


사원을 장식하는 성화들


이 성화들은 알렉세이 황제 때 제작되었다.

남쪽과 북쪽 벽의 프레스코화는 미카엘 천사장을 묘사하였으며, 서쪽 벽에는 신앙의 상징들이,

기둥에는 성자로 추앙되는 공후들의 모습이, 관 위에는 관의 주인인 공후나 황제들의 모습이 추정되어 묘사되었다. 






사원 내부는 이태리 건축가 알레비즈 노비에 의해 거대한 기둥들로 장식되었는데, 

이 기둥들은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4개의 기둥들이 본당을 세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고, 제사를 지내는 지성소와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성소는 성화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이며, 그 중 둘은 백석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지성소 앞에 성화벽이 있고 '왕의 문'이 보인다.

이반 4세(이반 뇌제)와 그의 두 아들인 이반 왕자와 표도르 황제의 묘는 

지성소 옆의 성물보관실에 특별히 마련된 장소에 있다고 한다. 


좌 - 아기예수의 정결 예식, 시몬과 안나가 아기예수를 만나는 장면이다.

우 - 축복받은 하늘 성모화, 1678~1679년에 제작되었고, 바실리 1세의 아내가 모스크바로 가져왔다고 하며, 

서유럽의 성화와 비슷한 모습이다.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내부 돔 천정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내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작품 <대천사 미하일>


사원 내부의 이콘화(벽화)는 1세기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작품 '대천사 미하일'이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20세기에 이곳을 수리하다가 발견된 러시아 민족 독립투쟁문을 묘사해 놓은 벽화도 유명하다. 

그리고 20세기에 발견된 러시아 민족의 독립 투쟁을 묘사해 놓은 벽화도 유명하다


아르항겔리스크 대천사 이콘

성당에는 15세기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작품인 '대천사 미하일'이 있는데 이 사원의 이름은 이 이콘화에서 유래한다.


제단 입구  iconostasis 


1894년10월 성당에서 화려하게 거행된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는 

구한말 고종황제가 이범진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범진은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 총리 김홍집을 살해하고 친러시아 내각을 구성해 한때나마 세력을 잡았던 인물이었다.



역대 대공과 황제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아르항겔리스키 사원의 무덤


아르항겔리스키 사원은 역대 귀족의 무덤으로 이용되고 있어서 사원 내에는 모두 48개의 관이 놓여 있다. 

이중에는 이반 대제와 그의 아들 이반의 묘당과 표트르의 관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1340년에 죽은 이반 칼리타 공의 것이 있다.  

이반 대제의 머리는 인류학자 미하일 겔리시모프에 의해 두개골 형태에 플라스틱으로 살을 붙인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1505~1508년에 건축한 이 사원은 역대 황제와 주교들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관 48개가 놓여 있다


대천사 사원의 황족들의 묘(종묘)는 러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황족 묘지이다. 

대천사 사원이 종묘로 이용된 것은 1340년부터 1730년까지이고, 

시신이 든 관을 땅(사원 바닥 아래)에 묻고, 그 위에 백석으로 만든 묘비를 세웠다. 

대천사 사원에 장사된 황족은 총 46명이고, 그 중 가장 오래된 관들은 남쪽 벽에 있는데, 

예를 들어 이반 칼라타 공과 드리트리 돈스코이 공, 이반 3세 등이 매장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이반 칼리타 무덤 (Ivan the Terrible tomb)


이반 1세 다닐로비치 칼리타(러시아어: Иван I Данилович Калита, 1288년 2월 29일 ~ 1340년 3월 31일)는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25년에 모스크바 공작으로 즉위하였고, 

3년 후인 1328년에는 블라디미르의 대공을 겸하였으며 보위 치세에 있던 중 1338년부터 1340년에 붕어할 때까지 

아들 시메온 이바노비치에게 대리청정을 부여하였다.

그는 약소국이었던 모스크바 공국을 부강하게 만들어, 

모스크바 차르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아르항겔리스크 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관은 1340년 사망한 이반 칼리타공의 관이며 은으로 장식된 총주교의 관은 

나폴레옹군이 이곳을 침략했을 때 뜯어가려고 시도하였으나 꿈쩍도하지 않아 현재의 위치에 무사히 보존되었다고 한다.



이반 1세 다닐로비치 칼리타 (Ivan I Daniilovich Kalita 1288년 2월 29일 ~ 1340년 3월 31일)

이반 1세 다닐로비치 칼리타는 모스크바 공국의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공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325년에 모스크바 공작으로 즉위하였고, 3년 후인 1328년에는 블라디미르의 대공을 겸하였으며 
보위 치세에 있던 중 1338년부터 1340년에 붕어할 때까지 아들 시메온 이바노비치에게 대리청정을 부여하였다.

그는 약소국이었던 모스크바 공국을 부강하게 만들어, 
모스크바 차르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형 유리 3세가 사망하자, 이반 1세는 모스크바 공작의 직위를 승계하였다. 
이반 1세는 황금 군단의 칸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즉위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의 대공 직위를 얻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마침내 숱한 경쟁자들을 제거한 이반 1세는 1328년에 칸으로부터 승인을 얻어, 
모든 루스 영토에서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즉위하였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클루체프스키에 따르면, 이반 1세 치세시의 모스크바 대공국의 발전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요인들에 의해 가능하였다.

첫째, 모스크바 공국이 다른 루스 공국들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쪽과 서쪽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였다.
둘째, 지속적인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던 모스크바 주변 소국들의 백성들이 대거 모스크바로 유입됨에 따라, 
노동력을 확보하고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다.
셋째, 나보그라드에서 볼가 강까지 이어지는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반 1세는 의도적으로 다른 지역의 백성들을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이거나, 
몽골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힌 루스 사람들을 돈을 주고 사 오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외적들을 제거하여 상인들의 교통 안전을 보장하였다. 
몽골의 군사들이 사라짐에 따라 모스크바 공국에는 평화와 질서가 찾아왔다.

이반 1세 치세시에 모스크바 공국은 아주 부유해졌는데, 
그는 이 돈으로 주변 대공국들에게 대출해 주기도 하였다. 
이반 1세로부터 돈을 빌린 공국들은 점점 더 빚더미에 앉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이반 1세는 공국들을 하나씩 합병해 나갔다.
그는 모스크바 주변의 영지들을 사들였는데, 가난한 주인들이 스스로 땅을 파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리하여 루스의 수많은 공국들은 차례로 모스크바 공국에 흡수되어갔다.

마침 이반 1세의 아들 시메온 이바노비치가 블라디미르 대공직을 세습하는 것에 대하여 
칸의 승인이 거의 확실시되자, 그 이후부터 중요한 직위는 항상 모스크바 공작 가문의 몫이 되었다. 
절대적인 권위를 자랑하던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의 수장은 아예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겨갔다. 

모스크바 공국을 부강한 나라로 이끈 이반 1세는 1339년 2월 1일을 기하여 아들 시메온 공자에게 
대리청정을 부여한 후 이듬해 1340년 3월 31일을 기하여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시메온은 모스크바 공작과 블라디미르 대공직을 동시에 계승하였다.

이반 1세는 성당도 많이 축조하였는데, 1333년에 완공된 아르헹겔리스키 성당은 
훗날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묘지가 되었다.


표트르 3세 묘


표트르 3세(러시아어: Пётр III Пётр Фёдорович, 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는 

1762년부터 1762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황제다.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로, 홀슈타인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1세의 딸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이다. 

이름은 표트르 표도로비치 로마노프(영어: Peter Fyodorovich Romanov, 러시아어: Пётр Фёдорович Романов)이며 

독일식 이름은 카를 페터 울리히(독일어: Karl Peter Ulrich).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는 정신적으로 미숙하고 매우 친프로이센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못한 지도자가 되었다.


알렉시스 황제 묘



러시아 황제와 왕자들의 무덤 배치도

러시아의 황제들은 대대로 대관식이나 결혼식을 마치면 이 성당을 제일 먼저 찾았다 한다.


서쪽 벽에는 봉건제후들이, 북쪽에는 권력에서 말려난 왕족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반 뇌제와 그의 두 왕자들은 특별히 성물보관실에 마련된 묘에 안장되었고, 

로마노프 왕조 형제들의 묘는 기둥들 근처에 있다.

대천사 사원이 류릭 왕조와 로마노프 왕조의 무덤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반 1세가 처음 석조사원을 건축하고 사원에 장사된 1340년부터이다.


크렘린 성벽 뒤로 보이는 아르항겔리스키 성당

1505 ~ 1508년에 건축한 사원은 역대 황제와 주교들의 관 48개가 놓여 있다.


1838년 이반대제 종탑과 대천사성당


The Archangel's Cathedral. View from the Tainitskiy Garden

대천사 성당. Tainitskiy 정원에서보기


Interior of the Archangel's Cathedral. View from the west portal

대천사의 대성당의 내부. 서쪽 포털에서보기


Grand Princes Ivan Danilovich Kalita and Simeon Ivanovich Gordy

왕자 Ivan Danilovich Kalita와 Simeon Ivanovich Gordy

Fresco on the southern wall. 1652-1666

남쪽 벽에 프레스코. 1652-1666


Tombstones at the southern wall. 남쪽 벽의 묘비


역대 대공과 황제의 시신이 잠들어 있는 아르항겔리스키 사원의 묘지

아르항겔리스키 사원은 역대 귀족의 무덤으로 이용되고 있어서 사원 내에는 모두 48개의 관이 놓여 있다. 

이중에는 이반 대제와 그의 아들 이반의 묘당과 표트르의 관이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1340년에 죽은 이반 칼리타 공의 것이 있다.  

이반 대제의 머리는 인류학자 미하일 겔리시모프에 의해 두개골 형태에 플라스틱으로 살을 붙인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Grand Prince Ivan III. Fresco on the southern wall. 1652-1666

그랜드 프린스 이반 III. 남쪽 벽에 프레스코. 1652-1666


이반 3세 바실레비치(러시아어: Иван III Васильевич) 또는 이반 대제(러시아어: Иван Великий 이반 벨리키)

(1440년 1월 22일 ~ 1505년 10월 27일)는 모스크바 대공과 전 루시의 대공(러시아어: Великий князь всея Руси)이다. 

모스크바 대공으로서 노브고로트를 비롯한 여러 공국을 쳐서 영토를 확장했으며 북동 루스를 통일하였다. 


이반 3세의 시대에 드디어 모스크바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훗날 러시아 제국이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기초를 닦았다. 

비잔티움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소피아와 결혼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 칭하고, 

비잔티움 문화를 받아들여 모스크바 문화 발전의 바탕이 되게 하였다.


초기에는 노브고르트를 비롯한 국내 제공국을 병합하여 루스 통일을 강력히 추진했다. 

1480년 킵차크 한국에서 독립하여 러시아는 240년간에 걸친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는 1472년 동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 질녀인 소피아와 결혼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비잔티움식의 전제주의가 모스크바에 유입되어 모스크바의 대공은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 및 정교회의 옹호자를 자처하며, 로마 황제의 쌍독수리를 러시아의 문장으로 하여 

모스크바는 '제3의 로마'로서 정교회의 총본산이 되었다.(러시아 정교회 참조)


그는 교회의 신성 불가침을 확인하였으며,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다. 

1497년 농노화로서의 길을 열고, 소지주 사족에게 노동력을 보증하였다.

이 시대에 모스크바에도 공업 및 농업의 발전이 보였고, 루스의 통일은 이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영국, 프랑스와는 반대로 모스크바의 농민은 이 무렵부터 토지에 얽매여서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Completion of the Archangel’s Cathedral in 1508

Miniature from the Illuminated Compiled Chronicle. Second half of the 16th century

1508년 대천사 성당 준공. 16 세기 후반


Grand Prince Vasily III. Fresco on the north-west pillar. 1652-1666

대왕 바실리 III. 북서 기둥에 프레스코. 1652-1666


1505년, 이반 칼리타 (Ivan Kalita)의 후손인 그의 왕자 정책 (이후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러시아 국가의 위상을 높인 이반 왕자 (Ivan III)는 옛 장소에 새로운 장엄한 성당을 세웠다. 

그는 건축을 베네치아 건축가 Aloisio Novyi에게 맡겼다. 

그가 모스크바에 왔을 때 노비(Novyi 신규)라는 별명을 얻었기 때문에 

이미 왕자 궁전에서 일하고 있던 러시아 프리야진 (Fryazin)이라는 이탈리아 건축가 

알레비시오 (Alexvisio)와 구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자는 이 건축물을 보지 못했다. 

그의 아들 Vasily Ivanovich III의 통치 기간 동안 건물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대성당은 1508년 11월 8일 대천사 마이클과 모든 천사 축제에서 봉헌되었다. 

성당을 벽화로 꾸미는 것에 대한 신학적 데이터는 없다. 

16세기의 기존 작품들은 바실리 III의 아들 이반 IV (1547-1584)의 시대를 가리킨다. 

웅장한 왕권에 반대하여 처형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대성당에 묻힌 모든 왕자의 즉흥 초상화는 벽화의 특징이 되었다.


 Images of princes above the tombs. Fresco on the south wall. 1652-1666

무덤 위의 왕자의 이미지. 남쪽 벽에 프레스코. 1652-1666


Archangel’s Cathedral. Colouristics of the west façade

Modern reconstruction of the 16th century image

대천사 성당. 서쪽 정면의 색상. 16 세기 이미지의 현대적 재구성


Shrine of Saint Tsarevich Dmitry at south-east pillar

남동쪽 기둥에서 생트 차레비치 드미트리의 무덤


Dmitri Ivanovich (러시아어 :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1552 년 10 월 11 일 – 1553 년 6 월 26 일)는 

러시아의 Tsardom의 첫 번째 Tsarevich 또는 Tsesarevich-후계자-러시아의 Tsardom 

또는 러시아의 Ivan IV와 그의 첫 번째 아들이었다. 

Tsaritsa,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 그는 세 번째 자녀이자 부부의 첫 아들이었으며 유아기에서 사망했다.


이반은 1533년 3세의 나이에 모스크바의 대왕이되었다. 

1547년 1월 16일 대관식에서 16세인 이반은 때때로 그의 할아버지 이반 3세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는 제국의 모든 권력을 잡고 신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결국 부유한 보이어의 딸인 아나스타시아 로마노브나를 선택했다. 


결혼 초기 4년 동안 아나스타샤는 이반과의 사이에 안나와 마리아 두 딸을 낳았다. 

하지만 유년기인 안나는 생후 11개월 만에 마리아는 6개월 만에 죽었다. 

그러나 1552년 10월 11일, 아나스타샤 (Anastasia)는 아들을 낳고

조상 드미트리 돈스코이 (Dmitri Donskoy)의 이름을 따서 드미트리 (Dmitri)라고 이름지었다. 


사진. M.V.의 무덤 스코핀-슈이스키. 1928년 9월


Mikhail Vasiliyevich Skopin-Shuisky 왕자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Скопин-Шуйский)는

1586년 11월 8일 ~ 1610년 4 월 23 일 문제의 시기에 러시아 정치인이자 군사 인물이었다. 

그는 Shuysky 가문의 마지막 대표였다.


그의 아버지 Vasili Feodorovich Skopin-Shuisky를 여읜 Mikhail Skopin-Shuisky는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Boris Godunov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stolnik (차르의 조수)로 임명되었다. 

Vasili IV의 통치 기간 동안 Skopin-Shuisky는 그의 사촌인 차르의 친밀한 동료가 되었다.


그는 1606년 이반 볼로트니코프 (Ivan Bolotnikov)의 모습으로 군사 경력을 시작했으며, 

처음에는 Pakhra River 근처에서 작은 유닛으로 Bolotnikov가 Mstislavsky와 

다른 보이어스가 이끄는 Muscovite 군대를 분쇄한 후 두 번 격파했다. 


1609년 4월 14일, Skopin-Shuisky는 러시아 왕좌를 구하기 위해 

Jacob De la Gardie의 지휘 하에 스웨덴 군인 12,000 명과 함께 노브고로드를 떠났다. 

Skopin-Shuisky는 Oreshek, Tver 및 Torzhok을 점령하고 적으로부터 나라의 북쪽을 정리했다. 

그는 Kalyazin에서 Hetman Jan Piotrus Sapieha를 물리치고 Troitse-Sergiyeva Lavra의 포위 공격을 포기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사촌 Dmitry Ivanovich Shuisky를 만들었고, 

그는 이전에 Mushailvite 군대 사령관의 지위를 미하일에게 유리하게 항복해야 했다. 

차르는 23살의 라이벌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Dmitriy Shuisky의 아내는 남편의 음식에 독을 넣었고 그는 2주 후 1610년 4월 23일에 사망했다. 

바실리 4세는 그를 대천사 마이클 성당에 묻으라고 명령했지만 다른 왕실과는 거리를 두지 않았다.


Archangel’s Cathedral. Lithography, 1856.

대천사 성당. 리소그래피, 1856.


Tombstones of Tsar Ivan IV Vasilievich the Terrible, Tsarevich Ivan Ivanovich 

and Tsar Feodor Ivanovich in the cathedral’s Diaconicon.

차르 이반 IV, 바실리에 비치, Tsarevich Ivan Ivanovich 및 차르 Feodor Ivanovich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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