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TV 봤느냐?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

전화선 너머에서 다짜고짜 따지는 억양으로 미뤄 ‘아이쿠, 또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싶었습니다.

 

부랴부랴 사실 확인을 했습니다.

봉천동에서 어렵게 사는 할아버지․할머니들 가운데 본인도 모르게 당원에 가입하고,

통장에서 당비가 꼬박꼬박 빠져나가는 분들이 많다는 얘기였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이 하얘졌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당원이 된다는 것은 민주사회의 시민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의사표현 방식입니다.

누군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당에 입당을 시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일입니다.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범죄행위입니다.

 

열린우리당은 ‘정치개혁’을 하기 위해 만든 당입니다.

과거 민주당에서 분당을 한 첫 번째이자 마지막 이유 역시 ‘정치개혁’이었습니다.

민주당의 당권을 잡고 있는 분들이 ‘정치개혁’에 동의하지 않으니 분당을 해서라도 정치개혁을 이루자고 주장해서 분당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우리당에서 ‘허위당원’이라니요?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까맣게 몰랐던 일도 아닙니다.

열린우리당은 물론이고 ‘기간당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많은 당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지고 있습니다.

‘당비를 내고 당원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주자’는 것이 기간당원제의 취지입니다.

과거 종이당원이 당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상황에서는 당원의 의사를 물을 필요도 없이 당을 장악하고 있는 분들이

당직과 공직후보를 정했는데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만든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취지를 악용해서 공직 후보가 되고자 하는 분들이 허위로 당원을 만들거나,

당비를 대납한다는 경고는 오래 전부터 나왔습니다. 이미 검찰에서 수사를 시작한 예도 많습니다.

 

변화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그런 사례가 너무 많고 노골적입니다.

이대로 가면 ‘정치개혁’ ‘정당개혁’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여기서 한발만 물러서도 ‘깨끗한 정치’는 공염불이 되고 맙니다.

가장 두려운 사태는 ‘거 봐라, 안된다고 했지?’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일입니다.

‘깨끗한 정치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상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서는 안 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시도당에서 확인을 하고 단속도 하지만 종이호랑이처럼 무기력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위법․탈법을 하는 바람에 안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다시 결단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정치개혁’은 그냥 한번 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로 전진하기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국민의 염원이고, 열린우리당이 존재하는 근거입니다.

 

이미 드러난 사안에 대해서는 당 차원에서 엄정한 조사를 해야 합니다.

위법사실이 확인되면 검찰에 수사를 요청하는 것이 옳습니다.

‘고름은 살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썩은 부위는 도려내야 상처가 낫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더 큰 문제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빙산의 아랫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결자해지’해야 합니다.

‘정당개혁’ ‘정치개혁’을 가장 소리 높여 주장한 열린우리당이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는 것이 순리입니다.

 

먼저 당비대납이나 허위당원을 걸러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당 차원의 당무감사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고, 처벌 수위도 높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정 시점을 정해 모든 당원의 자격을 정지하고, 불편하더라도 전 당원에 대해 직접 당원가입 의사를 다시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당비대납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방안이 확인되면 좀 무리가 따르더라도 추진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출발선을 만들어야 합니다.

늦어도 지방자치 단체장․의원 선거 후보를 정하기 전에 그렇게 해서 적어도 열린우리당의 공직후보는

‘돈에 오염되지 않은 후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문제만은 분명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새로 출발선을 만들었는데도 허위당원을 만들거나 당비 대납을 한 사람이 적발되면

당원자격을 영구 박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형사 처벌을 의뢰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걱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과거의 위법․탈법을 눈감아 주자는 얘기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면이 있습니다.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구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방법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위법 사실을 밝혀 형사 처벌을 하는 것은 검찰이 맡아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허위․대납당원을 찾아내고 바로잡아서

이런 행위를 한 사람이 부당한 이득을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에게 지금까지의 잘못을 사죄하고 솔직히 털어놓은 다음에 새 출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첫단추를 잘못 채우면 모든 단추가 잘못 채워집니다.

당이 처음부터 이런 문제에 대해 분명한 원칙을 갖고 대응했어야 했는데,

한번 두번 원칙을 훼손하면서 어느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문제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처음부터 허위대납 사례를 적발해서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옳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당을 바로 세우고 싶습니다.

한번 정한 원칙에 대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당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바빠지는 월요일 밤입니다.

2006.1.10
김근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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