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인 함석헌 평전/[17장] 함석헌의 야인혼과 저항정신

2013/03/02 08:00 김삼웅

 

 

"함석헌은 누구냐? 그의 사상은 무엇이냐?" 물었을 때 압축이 쉽지 않다.
그것은 마치 호메르스의 <일리아드>를 한 마디로 줄이거나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열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2010년 4월 교수신문은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 함석헌을 뽑았다.
그가 역사 분야의 대표 인물로 뽑히고, 전체로도 수위를 차지했다. 망국과 식민지, 독립운동과 친일, 해방과 분단, 독재와 민주의 굴곡진 현대사에서 속출한 수많은 학자,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을 제치고 함석헌이 1위로 뽑힌 것은 무슨 까닭일까.

함석헌은 종교인, 역사가, 언론인, 민주화운동가, 시인, 교육자, 저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고, 각 분야에서 대표적 위치에 오를 만큼 사유와 활동의 폭이 넓고 깊고 다양했다. 많은 업적도 남겼다. 정신과 철학, 사상면에서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한 ‘세기난우(世紀難遇)’의 인물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함석헌은 역사책을 썼지만 역사학자가 아니고, 시집을 냈지만 시인이 아니고,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농부도 교사도 못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목사, 신부가 되지 아니하고,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지만 정치를 하지 않았다. 당대에 언론인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론, 평론을 많이 썼지만 직업 언론인이 되지 않았다.

그럼 함석헌은 누구냐, 무엇이냐.
한마디로 야인(野人)이고 들사람이다. 여당, 야당 할 때의 권력을 잡지 못한 정당을 뜻하는 것이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야가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들사람을 말하는 야인이다. 우리 조상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이라 불렀다. 야만족이란 비하가 따랐다. 하지만 함석헌을 일컬을 때의 야인은 그런 의미와는 격이 다른 맨사람, 씨알을 말한다.

야(野), 곧 들은 도(都), 읍(邑)에 대해 쓰는 말이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읍, 그 읍 중에서도 나라 임금 있는 곳이 도다. 야는 그 도읍 밖에 나와 있는 들, 교외다. 시골, 농촌이다. 야인, 들사람은 시골사람, 두메 사람이다. (주석 1)

함석헌은 “문명의 병이 들어 정신이 약해지면 반드시 소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썩어가는 백성을 책망하여 그 마음속에 잃어버린 야성(野性)을 도로 찾도록 부르짖는다.” (주석 2)고 했다. 중국의 노자와 장자,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미국의 휘트맨과 소로를 대표적 야인으로 꼽았고, 그는 또 새시대의 문을 연 예언가를 야인으로 보았다. 예레미아, 엘리야, 아모스, 호세아, 세례 요한, 예수를 순수한 들사람이라고 지목했다.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도 들사람이라고 하였다. 함석헌 자신도 이들과 한 줄에 꿰이는 들사람이다.

 



함석헌은 누구인가?

첫째, 아나키스트다.
세계평화주의, 자연론적 사회관, 개인의 자주성과 부당한 권위에 대해 저항한 아나키스트이다. 일본인 케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가 의도적으로 오역한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라 크로포토킨에 의해 체계화된 반봉건ㆍ반전제ㆍ반강권주의, 개인의 자율과 자치를 존중하는 아나키스트다.

둘째, 소로주의자다.
자연주의, 물질과 과학 위에 서야 한다는 초절주의, 부당한 조세와 침략전쟁을 거부하는 높은 정신운동, 기계 문명의 거부, 단순한 생활을 지향하는 소로주의자이다.

셋째, 간디주의자다.
비폭력저항, 불복종 ․ 비협력주의, 불가촉민(不可觸民, 씨알)의 지위향상운동, 민중교육운동, 인도 고유의 전통사상인 사티아그라하(眞理把握)운동, 절제된 생활원칙인 브라아마차리아(brahmacharya) 등 종교적 행위와 정치적 행위를 결합하여 ‘국가의 도덕성’을 실천한 간디의 사상과 철학을 실천한 간디주의자다.

넷째, 유목주의(nomadism)자다.
그의 사유와 철학은 고정되지 않고, 장소와 상황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이동성과 도전성을 보여주는 노마디즘의 실천자이다. 고금동서를 종횡하면서 세계사의 정신과 사상을 육화(肉化)한 도전가이고, 머물면서는 민주화운동과 씨알의 세상을 위한 언로(言路)를 개척한 뉴노마니스티다.

다섯째, 퀘이커교도이다.
기록된 교리도, 교회와 성당과 같은 지정된 예배장소도, ‘선교’라는 말 대신 ‘봉사’라는 말을 선호하는, “진리를 믿는다고 스스로 내놓고 말하는” 퀘이커다. 무교회주의와도 가깝지만 보다 근원적인 종교관은 톨스토이, 간디, 우찌무라 간조, 유영모와 종교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주석 3)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기독교의 형식주의와 세속화를 거부하는 퀘이커 교도이다.

여섯째, 풍류사상가(風流思想家)다.
근래에 술 잘마시고 여성편력이 마치 ‘풍류’인 것처럼 타락했지만, 우리 민족사상의 원형인 풍류는 생각이나 생활에서 속(俗)되거나 삿(邪) 됨이 없는 생활철학을 말한다. 함석헌의 선풍도골의 헌헌한 모습이나 무애(無碍)의 사유와 활동은 한국의 마지막 풍류사상가이다.

일곱째, 평화사상가이다.
그의 모든 탐구ㆍ실천ㆍ도전ㆍ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평화에 있었다. 국가주의와 국수적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제국주의와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일체의 권위주의를 배격하였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전적 평화정신에서부터 현대 ‘무장된 평화체제’를 반대하였다. 일국의 평화가 아닌 지구촌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함석헌은 사상적으로는 간디주의, 사회적으로는 아나키즘, 철학적으로는 소로주의, 정신적으로는 노마니즘, 퀘이커신앙,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한 대사상가이다. ‘야인’, ‘씨알 사상’은 바로 이렇게 하여 생성되고 발육되고 실천되었다.

다보스포럼(세계경제포럼)은 2012년 42회 째 대회에서 <대전환 : 새로운 모델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과거 자본주의는 틀렸고,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현실사회주의는 이미 망했고, 자본주의의 낡은 기차는 종착역에 이르렀다. 클라우스 슈바프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를 기반으로 한 경제학은 위기에 도달했다. 우리는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절실히 원하고 있다.” (주석 4)고 다보스포럼에서 말하였다.

21세기 인류의 미래상이 간디주의, 아나키즘, 소로철학, 노마디즘, 퀘이커주의, 풍류정신을 융합하고 통섭하는 ‘야인주의’라면 함석헌은 이미 20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러 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기계적 합리주의자들의 눈에는 ‘바보’로 보이고, ‘배부른 돼지’들의 눈에는 ‘가난뱅이’, 세속적 권력주의자들에게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비쳤겠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그런 음해와 비난이 따랐다. 함석헌도 마찬가지였다.

주석
1> 함석헌, <인간혁명>, 일우사, 1962년.
2> 앞과 같음.
3> 함석헌, <벤들힐의 명상>, <함석헌 전집>, 제3권.
4> <다보스포럼, 자본주의를 버리다>, 매일경제신문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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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인 함석헌 평전/[16장] 88년의 거인 나래를 접다

2013/03/01 08:00 김삼웅

 

 

 

필자는 2001년 3월 <대한매일> 주필로 재직할 때 ‘김삼웅 칼럼’에서 <진짜 언론인 함석헌 100주년>을 기고한 바 있다

오늘 (13일)은 함석헌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함석헌은 역사연구가ㆍ사상가ㆍ민권운동가ㆍ잡지발행인 등 여러가지로 분류되지만 ‘진짜 언론인’도 한 범주라 하겠다.

언론인이면 언론인이지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뭐냐고 할지 모르지만 상품에 진짜와 가짜가 있고 진실한 사람과 위선자가 있듯이 언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오랜 독재와 냉전시대에 사이비언론(인)이 득세하고 판칠 때 함석헌이야말로 진짜 언론인의 역할을 했다. 제도언론에 지면이 허용될 때는 할 말을 하고, 지면이 봉쇄당할 때는 ‘언론게릴라전’을 펴면서 독재와 냉전세력과 싸웠다.

최근 어떤 신문이 ‘할 말은 하는 신문’을 구호로 내걸었지만, 그런 신문이 독재에 침묵하거나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함석헌은 진짜 할 말을 했다. 억압시대에는 비굴하고 민주시대에는 방종하는 사이비 비판이 아니라 남들이 입을 다물 때, 천지가 암흑에 덮일 때 그는 할 말을 했다.


 


 

친일언론이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갈 때 함석헌은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만들며 어둠에 묻힌 조선역사를 쓰다가 투옥되고,자유당 천하에서 대부분의 언론이 어용족 또는 만송족(晩松族)일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논설을 썼다가 감옥엘 갔다. 5·16쿠데타로 온 세상이 공포에 싸일 때는 <5ㆍ16을 어떻게 볼까>란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정치군인들에게 할 말을 다한 것이다. 당시 족벌언론이 쓴 쿠데타 지지 사설과 기사,논평은 한국언론사의 치부를 드러낸다.

독재권력이 강화되면서 지식인은 두 갈래 부류로 나타났다. 저항과 타협의 길이었다. 저항자는 설 땅을 잃고 타협자는 풍요가 따랐다. 고려무인정권 때도 그랬고 일제식민시대도 그랬다. 그리고 비굴하게 타협하면서 무인정권과 식민통치를 찬양한 세력이 당대의 주류가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석헌 등 진짜 비판자는 도태되고 사이비들이 득세하여 사세를 키우고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전두환 정권에서 이런 현상은 절정을 이루었다.

언론통제가 심해지자 함석헌은 제도언론인들에게 ‘언론게릴라전’을 제창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언론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게릴라전술로 언론투쟁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게릴라전은 정규군이 역할을 하지 못하거나 특수임무가 요구될 때 전개된다. 신문사주와 간부들이 군사독재와 유착된 상태에서 언론의 정상적 기능(정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게릴라전을 제창했던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목마른 외침은 빈 산의 메아리에 그쳤다. 독재의 짓누름도 심했지만 그들이 던져준 이권과 고깃덩이도 만만찮았다. 또 긴 세월 길들여진 보신주의 언론인들이 게릴라로 활동하기에는 너무 배부르고 비대해졌다. 특히 일부 양심적 기자들이 자유언론의 횃불을 들었다가 쫓겨나면서부터 진짜 저항언론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직접 게릴라전에 나섰다.

함석헌은 사이비들처럼 사주의 지침이나 시세에 따라 아무 권력이나 무조건 지지 또는 반대하는 따위의 언론인과는 격이 달랐다. 군사독재를 준엄하게 비판하다가도 통일문제에는 지극히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갈라진 이대로는 살 수 없고 산다고 해도 사람이 아닙니다. 남은 북을 믿고 북은 남을 믿고 일어섭시다.” <북한동포에게 보내는 편지>

30여 년 전에 쓴 글이 지금 읽어도 감동을 준다. 참 글은 이렇게 이념과 시공을 뛰어넘는다.
그 자신 진짜 언론인이었던 송건호 씨는 함석헌을 타고난 언론인으로 평가한다. 신문기자나 논설위원의 경력은 없지만 타고난 언론인이란 두가지 논거를 들었다.

첫째, 문장이 보통 언론인 이상으로 유려하고 평이하다. 언론인과 비언론인의 구분은 문장이 쉬운가 난삽한가라면 함 선생의 문장은 간결하고 쉽다.

둘째, 시대를 보는 눈이 예리하다. 나날의 시사문제에 날카롭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 이면에 흐르는 사조를 꿰뚫는 눈이 날카롭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함석헌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는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고 용기의 원천은 역사의식이었다. 역사의식이 없는 용기는 풍차에 칼질하는 만용이거나 멧돼지의 저돌성이다. 타락한 언론의 저돌성이 ‘비판’의 이름으로 설치는 시대에 함석헌의 참언론정신이 그립다.
(주석 7)

함석헌은 일제의 패악이 천지를 뒤덮을 때 1930년 <성서조선> 제22호에 <의인은 멸절하였는가>에서 “구원 하옵소서, 여호와여, 경건한 자가 없어지고, 신실한 자가 인자(仁者) 중에서 끊어졌나이다” 라고 기구하였다.

그리고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마무리에서 절규한다.

“ 그러면 젊은 혼들아, 일어나라, 이 고난의 짐을 지자, 위대한 사명을 믿으면서 거룩한 사랑에 불타면서 죄악에 더럽힌 이 지구를 메고 순교자의 걸음으로 고난의 연옥을 걷자, 그 불길에 이 살이 다 타고 이 뼈가 녹아서 다 하는 날 생명은 새로운 성장을 할 것이다. 진리는 새로운 광명을 더할 것이다.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오를 것이다.”


주석
7> <대한매일>, 2001년 3월 13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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