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는 옛날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살던 만주족을 야인(野人)이라고 불렀다. 야만인이라는 뜻이 담겼다. 사전에서는 야인을 ① 교양이 없고 예절을 모르는 사람 ② 벼슬을 하지 않는 사람 ③ 시골사람 ④ 야만인으로 표기한다.
함석헌은 야인을 ‘들사람’이라고 해석했다. 종합교양지 <새벽> 1959년 11월호에 함석헌은 ‘들사람 얼’이란 부제가 붙은 "야인정신"이란 글을 썼다. 함석헌은 20권에 이르는 전집이 간행될 만큼 많은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인터뷰를 하였지만, 나는 그의 많은 글 중에서 한 편을 고르라 한다면 서슴지 않고 "야인정신"을 들겠다.
함석헌은 교육사상가, 언론인, 종교인, 역사학자, 민주화운동 지도자 등 다양하게 불린다. 실제로 ‘어느 하나’ 가 아니라 이들 모든 분야를 넘나들고 포괄하는 큰 그릇이었다. 그렇지만 나보고 누가 함석헌의 본령(本領)을 지적해보라면 서슴지 않고 ‘야인(野人)’, 바꿔말해서 ‘들사람’이라 하겠다. 단순히 관직이나 공직에 나가지 않았데서가 아니라 그의 품성과 생각과 활동이 ‘야인’이었다. ‘야인’, 곧 들사람 정신이야말로 함석헌의 본령이고 사상이고 행동철학의 준거가 되었다.
함석헌사상의 상징어인 ‘씨알’은 들사람의 올갱이다. 함석헌의 역사관, 교육관, 민중관, 언론관, 종교관은 하나같이 야인정신, 들사람 정신에서 발원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의 들사람 정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사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야인정신"은 이승만 폭정의 말기에 많은 지식인, 언론인, 문인, 종교인들이 ‘관제화’, ‘어용화’ 된 시점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 지식인ㆍ언론인들이 어용화된 시대에 함석헌은 광야에 선 모세처럼 ‘야인정신’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폭압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고 권력에 기웃거리는 청년, 교사, 언론인, 종교인, 학자, 문인들에게 ‘내리치는’ 채찍이었다.
<새벽> 24〜38쪽에 이르는 권두논설은 함석헌 특유의 쉬운 구어체로 쓰였다. 함석헌사상의 모태이기도 하는 ‘야인정신’을 보여주는 몇 대목을 살펴본다.
“임금이구 뭐고 내게 상관이 뭐야?”
요(堯)가 천하를 얻어 임금이 된 다음, 세상에서 자기의 다스림을 어찌하나 알아보려 한번은 시골을 나갔다. 밭에서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농사꾼을 보고 슬쩍, “당신은 우리나라 임금을 아시오?” 했다. 농부가 그 말을 듣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흙덩이만 까면서 하는 말이 “아, 내가 해 뜨면 나오고, 해 지면 들어가고, 내 손으로 우물 파 물 마시고, 밭갈아 밥 먹고, 임금이구 뭐구 내게 상관이 뭐야?” 했다.
요가 속으로 내가 나 있는 줄을 모르리만큼 했으니 어지간히 하기는 했구나 하면서도 아무래도 맘이 시원치 못했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하자는 맘이오 가르치잔 생각이므로 호강이나 세력을 부리잔 뜻은 없어, 집을 지어도 백성보다 나은 것이 겨우 흙으로 싼 새 층대에서 더한 것이 없었음을 자기도 스스로 알지만, 그래도 어쩐지 맘의 한 구석에 불만이 있었다.
그래 사람을 영천(潁川) 냇가에 보내어 거기서 농사를 짓고 있는, 전에 도를 같이 닦던 시절의 친구인 소부(巢父)ㆍ허유(許由)에게 가서, 나와서 벼슬을 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권했다. 그랬더니 소부가 그 말을 듣고는 “예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군”하고, 그 영천수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 허유가 송아지를 먹이면서 마침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그 모양을 보고 “야, 그 물 더러워졌다. 그것 먹이면 내 송아지 더러워진다.”하고 끌고 위로 올라갔다.
‘허유세이(許由洗耳)’의 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순의 성군이나 소부ㆍ허유의 무욕정신, 탈권력에는 함석헌 자신의 무욕ㆍ야인정신이 배어 있음을 보게 된다.
“감탕속에 꼬리치고 싶다 해라”
장자(莊子)가 초나라에 갔다가 어느 냇가에서 낚시질을 했더니, 그 나라 임금이 듣고 신하를 보내어 예물을 잔뜩 가지고 와 하는 말이, “우리나라 임금이 선생님의 어지신 소문을 듣고, 꼭 오시어 우리나라를 위해 일을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했다.
장자 그 이야기를 듣더니 하는말이 “이애, 여기 제사 돼지가 있다. 그놈 살았을 때 진장속에 뒹굴고 있지만 제삿날이 오면 비단으로 입히고 정한 자리를 깔고 도마 위에 눕히고, 칼을 들어 잡는다. 그때 돼지가 되어 생각한다면 그렇게 죽는 것이 좋겠느냐? 또 너희나라 사당 안에 점치는 거북 껍질 있지, 그놈이 살았을 때 바닷가 감탕 속에 꼬리를 끌고 놀던것인데 한번 잡힌 즉 죽어 그 껍질을 미래를 점치는 신령이라 하여 비단보로 싸여 장안에 간직해 두게 되니, 거북이 되어 생각한다면 죽어서 그 영광을 받고 싶겠느냐? 감탕 속에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겠나?”했다.
왔던 사신의 대답이 “그야 물론 진장, 감탕 속에서 딩굴고 꼬리를 끌면서라도 살고 싶지오.”, “그렇다면, 가서 너희 임금보고, 나도 감탕속에 꼬리를 치고 싶다고 해라. 천하니 임금질이니 그게 다 뭐라더냐?” 하고 장자는 물 위에 낚시를 휙 던졌다.
조선시대에 사림(士林) 세력이 있었다. 7대 세조 때에 갈리기 시작한 유림의 파벌 중 하나로, 김종직ㆍ김숙자ㆍ김굉필ㆍ정여창ㆍ조위ㆍ김일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다. 9대 성종 때부터 관계에 등용되어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사림은 들사람, 야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권력을 추구했었다.
함석헌의 생애는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3.1만세시위 참여, 계우회사건, 성서조선사건, 독서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고, 해방후 신의주학생사건으로 소련군에 의해 구속되고, 월남해서는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는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는 진짜 글을 통해 할 말을 하고, 제도 언론이 봉쇄당할 때는 온몸을 던져 행동으로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다. 언론이 압제자의 편이 되어 왜곡과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면서 직접 월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웠다.
그의 사상적 근저에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사상, 기독교의 박애정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자연주의와 초월사상이 녹들었지만, 본바탕의 정신은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비폭력사상은 저항이고 투쟁이었다. 휘트맨의 <풀잎>이나 쉘리의 <서풍>에서 보이듯이, 치열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고난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는 결코 유약한 선비나 초월적인 종교인, 관념론적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이라는 말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행동한 ‘싸우는 평화주의자’ 이다.
근자에 함석헌을 지나치게 종교의 테두리 특히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시도가 있다. 특히 종교ㆍ정신계의 지도자인 유영모 선생과 동렬화 시키려는 것은 함석헌의 본령인 저항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가 아닌가 싶다. 평안도 호랑이, 아니 조선의 호랑이에게서 어금니와 발톱과 날램과 용기를 빼버려서는 안된다.
옛글에 ‘화호불성반위구(畵虎不成反爲狗)’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하여 개를 그리게 된다”는 뜻이다. 함석헌의 모든 연구, 평가, 분석 은 마땅히 그의 투철한 저항사상 즉 비폭력 저항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함석헌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저항’ 바로 그것이다. 그의 저항정신은 오늘에 다시 발현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