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가 쓴 고문기록 수기 ‘남영동’과 그것을 만화로 간행한 ‘짐승의 시간’ 그리고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포스터
 김근태가 쓴 고문기록 수기 ‘남영동’과 그것을 만화로 간행한 ‘짐승의 시간’ 그리고 영화화한 [남영동 1985]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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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서슬 퍼런 위압과 폭력은 역전의 용사들인 민청련 사람들도 위축시켰다. 그러나 그에 눌리지 않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성들이었다.
민청련 여성 회원이자 수감자들의 젊은 아내들이 그러했다. 앞서 연행된 김병곤의 부인 박문숙이 그랬던 것처럼,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과 이을호의 부인 최정순은 간데없는 남편들의 종적을 찾고자 동분서주했다. 도대체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지혜를 발휘했다. 수감자들이 언젠가는 검찰로 이관되리라고 예측하고 검찰청 문 앞을 하염없이 지키기로 했다. 변호사 김상철의 조언도 도움이 됐다. 당시 검찰청사는 덕수궁 옆 서소문동에 있었다. 지하 2층, 지상 15층의 빌딩에 대검찰청, 서울고등검찰청, 서울지방검찰청이 입주해 있었다. 서울지검 공안부가 위치한 5층이 길목이었다.

기적 같은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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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이 들어맞았다. 1985년 9월 26일이었다. 김근태가 어딘가로 끌려간 지 20여 일이 지난 때였다. 인재근은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극적으로 김근태를 만날 수 있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김근태는 발에 힘을 줄 수 없는 듯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옆에서 형사들이 부축해서야 간신히 한 발씩 내딛는 형편이었다.

5층에서 4층까지 계단을 내려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인재근은 물었다. "다치지 않았느냐?"고. 김근태는 잠시 머뭇거렸다. 진실을 얘기하면 아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까,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하지만 아내의 거듭된 물음에 마침내 결심했다. 김근태는 "굉장히 당했어", "굉장히 당했어"라고 짧은 말을 되풀이했다. 이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뗐다. "9월 4일 2번, 5일 1번, 6일 1번... 20일 1번, 도합 10번이나 고문을 당했는데, 온몸을 꽁꽁 묶어 놓고 전기 고문, 물고문, 고춧가루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를 하루 5~7시간씩 당했다. 20일 마지막 고문을 받은 뒤 오늘(26일)까지 계속 치료를 받았는데도 발뒤꿈치, 팔꿈치는 짓이겨졌고 온몸이 상처투성이다"라고 탈진한 목소리지만 뚜렷이 얘기했다.

두 사람에게 허용된 시간은 고작 1분 남짓뿐이었다. 충격적인 진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김근태는 고문 행위가 있었음을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증언했다. 가해자들이 결코 부인하거나 은폐할 수 없게끔, 고문 방법과 날짜를 특정했다. 얘기를 듣는 인재근은 숨이 막혔다. 고문받은 흔적이 뚜렷했다. 양말을 벗어서 아내에게 넘겨줄 때 드러난 남편의 발뒤꿈치는 완전히 짓이겨져 있었다.

 김근태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농성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김근태 부인 인재근은 검찰청사에서 농성하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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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남은 정말로 기적 같은 것이었습니다"라고 김근태는 뒷날 회고했다. 그는 호송 차량 속에서 창문을 통해 푸른 하늘을 보았다. 여전히 하늘이 푸르게 남아있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호송 차량은 관례와는 다르게 늦은 오후에야 검찰청에 도착했다. 누군가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울음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그뿐인가. 자신이 당한 고문을 낱낱이 진술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기적이었다. 이 기적이 없었더라면 저들의 고문 은폐행위를 결코 막지 못했을 것이다.

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

인재근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는 종로 5가에 위치한 기독교회관으로 뛰어갔다. 때마침 목요일이라 목요기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기도회 연단에 나아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야수 같은 고문이 자행됐음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알렸다.
공교롭게도 그날 저녁에는 민청련 중앙위원회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인재근은 회의 장소로 뛰어갔다. 그녀는 회의 참석자들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밤새워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민청련 간부들은 밤새 성명서를 만들고 머리띠, 플래카드를 만들며 항의 농성을 준비했다.

인재근은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하여 남편에게서 들은 얘기와 자신이 목도한 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라는 문서를 작성했다. "국민 여러분! 저는 민청련 전 의장 김근태의 아내입니다"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유인물에는 김근태에게 가해진 고문의 실상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이튿날부터 민청련 사무실에서 회원들과 수감자 가족 30여 명이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고문 수사와 구속에 대한 규탄 농성을 시작했다. 성명서와 전단도 배포했다. '김근태의 처 인재근' 명의로 작성된 전단을 필두로 하여, 민청련 명의의 '치안본부의 살인적 고문 수사를 규탄한다', '정의와 투쟁 6 - 다시는 이 땅에 민중민주화운동 탄압을 위한 살인적 고문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됩니다' 등의 유인물을 연이어 배포했다. 이 농성은 민청련 회원과 가족들만으로 추진된 소규모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군부독재의 야만적인 고문 수사에 항의하는 광범위한 시민들의 분노를 끌어낸 첫 원동력이 되었다.

 10월 15일에서 17일까지 있었던 고문수사 탄압 항의 농성. 왼쪽 성명서를 읽는 임채정, 왼쪽에서 세 번째 아기 앉고 있는 김설이(이범영 부인), 한 사람 건너 차례로 인재근(김근태 부인), 이미영(박우섭 부인), 이경은(서원기 부인), 이기연(연성수 부인)
 10월 15일에서 17일까지 있었던 고문수사 탄압 항의 농성. 왼쪽 성명서를 읽는 임채정, 왼쪽에서 세 번째 아기 앉고 있는 김설이(이범영 부인), 한 사람 건너 차례로 인재근(김근태 부인), 이미영(박우섭 부인), 이경은(서원기 부인), 이기연(연성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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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중단하라! 농성 또 농성

고문 수사에 맞서는 시민들의 분노는 1주일 뒤에 다시 불붙었다. 1985년 10월 4일부터 10일까지 1주일간 좀 더 확대된 형태의 제2차 항의 농성이 전개됐다. 장소도 옮겼다. 종로5가에 위치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 사무실이었다.

이번에는 제1차 농성에 비해 참가자층이 더욱 확대되었다. 제1차 농성의 참가자는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 위주였는데, 이제 세 그룹의 구속자 가족으로 확대되었다. 다른 두 그룹이란 삼민투 사건과 민추위 사건으로 체포된 대학생들의 가족들이었다.

참가자들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농성투쟁에 대한 지지층도 확장되었다. 민통련과 민추협 등 각계 민주인사들이 농성 중인 가족들을 격려차 방문했다. 중요한 진전이었다.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 정치세력이 고문 수사에 맞서는 민청련 희생자 가족들의 항변에 호응하고 나섰던 것이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 당시에 이뤄졌던 양자의 공동행동이 두 달 만에 다시 현실화되었다. 두 세력의 공동행동은 광범위한 군중을 결집하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이미 학원안정법 제정 기도를 저지시킨 전과를 올린 바도 있었다. 이로써 고문 수사에 대한 항의 운동은 큰 탄력을 얻었다.

종교계에서도 고문 수사 반대 투쟁을 지지하고 나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0월 21월부터 27일까지를 폭력 추방 기간으로 설정한 데 이어, 12월 8일부터 15일까지를 인권주간으로 선포했다. 10월 10일에는 NCC 주최 목요기도회가 열렸고, 거기서 민청련 구속자 가족을 초청해 고문 수사 및 민청련 탄압에 대한 증언을 청취했다. 그뿐 아니라 10월 14일에는 NCC 가맹 교단장 회의에서 국무회의와 관계 장관 앞으로 고문 수사에 대한 항의 공문을 발송하기로 결의했다. 같은 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민청련 구속자 가족을 초청하여 증언을 청취하고, 민주화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오늘의 현실을 보고 호소합니다'란 메시지를 발표했다.

 김근태 고문 사건 이후 1985년 결성된 민가협이 명동성당에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왼쪽 맨앞 아이 손 잡고 있는 조명자(김희택 부인). 그 한 명 건너서 뒤 왼쪽 맨 바깥쪽에 손 모으고 있는 이기연(연성수 부인). 맨앞줄 가운데 인재근. 오른쪽 뒤로 세번째 박문숙(김병곤 부인) 그 오른쪽 아이를 앉고 있는 이경은(서원기 부인)
 김근태 고문 사건 이후 1985년 결성된 민가협이 명동성당에서 시위하고 있는 모습. 왼쪽 맨앞 아이 손 잡고 있는 조명자(김희택 부인). 그 한 명 건너서 뒤 왼쪽 맨 바깥쪽에 손 모으고 있는 이기연(연성수 부인). 맨앞줄 가운데 인재근. 오른쪽 뒤로 세번째 박문숙(김병곤 부인) 그 오른쪽 아이를 앉고 있는 이경은(서원기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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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 연합전선, 공대위의 결성

제2차 농성이 끝난 지 5일 만에 제3차 농성이 뒤를 이었다. 이번에는 농성 주체에 성격 변화가 있었다. 민주화운동의 상층연대기구인 민통련이 전면에 나섰다. 10월 15일 12시부터 시작된 제3차 농성에는 민통련 문익환 의장, 계훈제 부의장, 김규동, 김병걸 등 간부 15명과 민청련 구속자 가족 5명이 참여했다. 그에 더하여 야당 정치세력인 민추협 간부들도 합류했다. 황명수 간사장, 한광옥 대변인, 김병오 부간사장 등 20여 명이었다.

농성 이튿날에는 야당 정치세력의 두 지도자 김대중과 김영삼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민청련 사무실을 격려차 방문했다. 민추협의 공동의장인 두 사람은 양순직, 최형우, 이중재 등 신민당 부총재단과 신기하, 유성환, 김봉욱 국회의원 등 40여 명을 대동함으로써 기세를 올렸다.

제3차 농성 중에 이뤄진 민청련 구속자 가족들의 새로운 폭로가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부인 최정순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이을호의 정신이상 증세는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검찰 취조를 받던 중 이상 증세를 일으켜 서울시립정신병원에 8주간 감정 유치되었다. 그녀는 '이을호씨를 정신이상이 되게까지 한 현 정권의 고문 수사를 고발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해, 정신착란이 발발한 경위를 설명하고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는 정부 당국의 거듭되는 기만 조치를 폭로했다.

세 차례 농성 투쟁은 군사독재 반대 투쟁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야만적인 고문 수사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상설 단체의 결성을 이끌어낸 것이다. 10월 17일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고문 수사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가 기독교 회관에서 발족했다.

공대위는 반독재 연합전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구속자 가족 대표들을 둘러싸고 3대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민통련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운동 세력, 기독교와 천주교 등 종교계, 민추협을 매개로 한 야당 정치세력이 그것이다. 예컨대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면면이 그를 잘 보여준다.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는 문익환(목사, 민통련 의장)과 홍남순(변호사), 종교단체의 원로인 김재준(목사), 함석헌(기독교), 윤반웅(목사), 지학순(주교), 야당 정치세력의 지도자인 김대중(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민추협 공동의장), 이민우(국회의원, 신한민주당 총재) 등이었다. 민통련, 종교계, 야당 지도자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위)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단체가 1985년 10월 17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래) 11월 11일 김대중 김영삼이 참석한 민추협 사무실에서 개최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
 (위)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단체가 1985년 10월 17일 기독교회관에서 모여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래) 11월 11일 김대중 김영삼이 참석한 민추협 사무실에서 개최한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를 위한 보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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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국제적 고립

반독재 연합전선의 결성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지난 8월 '학원안정법 반대 투쟁'의 성과에 뒤이어 이번에는 전두환 정권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10월 18일 미국 국무성 대변인 버나드 캅(Bernard Kalb)은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그는 한국의 한 청년 활동가가 한국의 공안 기관에 의해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의 신뢰할만한 보고서를 접했다고 언급한 뒤, 그 사건이 '개탄할만한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10월 20일 자 <뉴욕타임즈>는 '반체제 인사 고문 의혹에 쌓인 한국'이라는 제하에 김근태 고문 소식을 자세히 보도했다. 이 기사는 한국 정부 관리들이 정치범을 고문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 목적은 간첩 행위와 반국가 행위를 했다는 거짓 자백을 얻기 위한 것인데, 한국 법률에 따르면 그것은 피고인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였다.

이 뉴스의 출처는 '재야 단체 민청련 회원 심기섭'이 한국에서 반출한 녹음테이프였다. 그는 최근에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인재근의 증언이 담긴 테이프를 갖고 있었다. 신문 기사는 그 녹취 기록에 따라 김근태에 대한 고문 사실을 구체적으로 기사화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심기섭은 민청련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지만, 회원은 아니었다. 그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된, 김대중이 운영하던 워싱턴 인권문제연구소의 핵심 실무자였다. 그는 민청련과 김대중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러한 심기섭이었기 때문에 고문 수사 및 용공 조작 사건을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제 전두환 군사정권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됐다. 민청련이 상징으로 내세운 두꺼비의 역할, 제 몸이 뱀에 잡아먹히게 함으로써 뱀을 죽이고 수많은 두꺼비가 탄생하게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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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물고문 전기고문, 죽음 문턱까지 간 김근태


1985년 8월 24일, 김근태 전 의장이 전격적으로 체포됐다.

민통련 사무실이 있는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 부근의 한 커피숍에 들렀을 때였다. 중부경찰서 정보과 소속 형사대가 덮쳤다. 체포를 모면하려고 당분간 집에 들어가지 않은 채 경계해 왔는데, 그날따라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랬는지 잠시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었다. 그때부터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사복 경찰들의 미행이 시작됐던 것이다.

연행된 김근태는 구속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경범죄로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다. 민청련 제5차 총회 결의문과 관련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이었다. 민청련 활동 이후 6번째 겪는 구류 처분이었다. 서부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그는 차라리 안도감을 느꼈다. 그까짓 구류 10일 정도야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짐이 이상했다. 구류 중에 통상 허용되던 가족 면회가 이뤄지지 않았다. 몇 차례 항의했는데도 고쳐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근태는 몰랐지만, 그의 구류 기간이 거의 종료되는 때인 9월 2일, 민청련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이을호가 자택에서 괴한들에게 끌려갔다.

 199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은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바라본 모습
 1990년대 남영동 대공분실 전경. 지금은 경찰청 인권센터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은 지하철 1호선 남영역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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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 마지막 날인 9월 4일 새벽, 석방을 기다리고 있던 김근태는 전혀 예기치 않게 눈을 가린 채 서부경찰서 뒷마당에 대기한 자동차에 태워져 모처로 압송됐다. 행선지는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이었다. 5층 15호실, 건물 왼쪽 맨 끝 방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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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둘러보니 짐작할 만 했습니다. 이렇게 낯설고 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뿌옇던 사방이 점차 빛바랜 황갈색으로 변해가더군요." 그 방에 들어가던 순간을 김근태는 이렇게 기억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간부들이 연이어 체포되고 있었다. 묵과할 수 없었다. 9월 5일 민청련 회원과 가족 30여명이 민청련 사무실에 모였다. '불법 연행된 김근태, 이을호와 구속된 김병곤을 즉각 석방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농성에 돌입했다. 이틀 뒤에 다시 성명서를 냈다. '거듭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강제 납치행위를 규탄하며 - 김근태, 이을호와 모든 구속된 민주인사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향이 없었다. 경찰은 도리어 더욱 거세게 나왔다. 9월 8일 경찰은 서울 중구 삼각동 합동빌딩 602호에 있던 민청련 사무실에 대해 강제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고문으로 정신이 망가진 이을호

밖에서 민청련 회원들이 항의 농성을 하고 있는 동안에, 체포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옥 같은 고문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을호 부위원장은 연행되자마자 안전기획부 수사관들에게 다짜고짜 심한 매질을 당했다. 그는 나중에 "무차별 구타를 당한 후 자신이 올빼미로 생각되고 밤새 옥돌을 갈고 있는 환상 속을 헤매었다"고 고백했다. 고통과 공포감이 그의 정신에 상채기를 냈던 것이다.

고문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으로 옮겨 간 뒤에 더욱 혹독해졌다. "물고문과 폭행 등의 물리적 고문과 정신적 고문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급기야 "지렁이도 되고 뱀도 되며 닭 2마리, 돼지 3마리 등의 계속적인 동물 환각 속에 있었다."

연거푸 겪은 물고문 탓에 몸도 망가졌다. "머리를 물에 처박아 숨을 쉬지 못하게 했습니다. 몇 번인지도 기억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는 변이 안 나왔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변을 한 번도 못 봤습니다"라고 토로했다.

 현재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잃고 있는 이을호와 그의 부인 최정순
 현재도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병을 잃고 있는 이을호와 그의 부인 최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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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갈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김근태

김근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전기고문, 물고문, 뭇매질 등의 참혹한 학대를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17일 동안이나 계속 받아야했다.

주된 것은 전기고문이었다. 김근태의 증언에 따르면, 전기고문을 할 때에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다. 고문대에 담요를 깔고 눕히고서는 몸을 다섯 군데 묶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맸다. 신체에 고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악한 의도였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가 잘 통하도록 물을 뿌렸고, 발가락에 전원을 연결시켰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됐다.

전기고문은 한마디로 불 고문이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이었다.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 당겨 마침내 마디마디를 끊어버리는 것 같았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공포가 몰려왔다.

물고문은 전기고문과 한 세트로 진행됐다. 물과 불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두 고문의 상승효과는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었다. 물고문이 밑바닥이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 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은 불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이었다.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김근태가 기록한 수기 ‘남영동’을 영화화한 [남영동 1985]에서 김근태의 진술을 토대로 재현된 전기고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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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마음속으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한다'는 노랫말을 떠올렸지만, 그 노랫말을 실행하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해야만 했다. 그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절망에 몸서리쳤다.

고통의 극한으로 모는 고문에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문자들은 비명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그리고 비명 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했다.

조건 반사에 따른 심리적 공포도 겪어야 했다. 고문을 하는 날에는 으레 밥을 주지 않았는데, 어떤 날에는 고문을 하지 않을 때도 밥을 주지 않았다. 그런 때에는 고문이 다가오고 있다는 심리적인 압박과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었다.

고문자들은 협박과 능욕을 가하기를 예사로 했다. 이 사건을 지휘하고 있는 '사장'이라는 자는 고문 현장에 나타나서, "콧구멍에 고춧가루를 넣어서 폐기종으로 죽게 만들어 버려라. 내가 직접 이것을 지휘하겠다"고 말을 하는가 하면, 또 '전무'라는 자는 "정치가 법보다, 다시 말하면 주먹이 법보다 가깝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했다.

전기고문을 자행했던 건장한 사내는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 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으로 고문받고 감옥에서 병사했다)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서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고 내뱉었다.

그들은 전기고문 앞에서 벌거벗긴 채로 떨고 있는 그에게 성적인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추위와 공포로 위축돼 있는 그의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 다녀? 민주화운동을 하는 놈들은 다 이 따위야"라고 비웃었다.

 김근태는 고문을 이겨내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92년 1월 미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당시 연행되는 모습
 김근태는 고문을 이겨내고 이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사진은 1992년 1월 미대통령 방한 반대 시위 당시 연행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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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는 고문이 자행된 일시와 횟수를 낱낱이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겪는 와중에서도 그랬다. 그리하여 뒷날 재판정에서 자신이 겪은 고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었다.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 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 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그날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 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 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 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 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 날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목덜미가 서늘하다"

체포된 사람들에게 야수적인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동안, 민청련 사람들은 점차 고조되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마음을 졸이게 했던 것은 두 사람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었다.

이을호 부위원장은 집에서, 김근태 의장은 구류가 끝나는 시점에 소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간 걸 알 뿐, 도대체 어디서 어떤 조사를 받는지 도무지 감감했다. 그저 안전기획부나 치안본부가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시 사회부장이었던 권형택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런 상황이 2주를 넘어가면서 우리는 이제 본격적인 탄압에 대비해야 될 때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언제 연행될지 몰라 사무실 출근도 위험했다. 그 당시 몇 사람이 술집에 모였을 때, 박우섭 운영위원장이 '목이 시큰하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아마도 김근태 의장에 대한 혹독한 고문을 예감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근태와 이을호만이 아니라 민청련의 다른 회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민청련을 추적하는 자들의 센서는 기민하고 유능했다. 9월 6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전국학생총연맹 주최 '범국민 시국 대 토론회'에 참가하려 했던 민청련 간부들이 긴급히 수배됐다. 김희택 부의장과 서원기 집행국장이 그 대상자였다. 이어서 10월 1일에는 청년부장 김종복과 대변인 김희상이 자택에서 연행됐다. 이튿날 10월 2일에는 최민화 부의장이 자택에서 체포됐고, 10월 7일에는 권형택 사회부장이, 10월 8일에는 연성수 전 상임위 부위원장이 강제로 연행됐다.

신혼여행지에서 체포된 사회부장 권형택

체포된 이들 가운데엔 기막힌 사연도 있었다. 권형택의 경우였다.

그는 이제 막 결혼식을 올린 새신랑이었다. 신부와 함께 설악산으로 신혼여행길에 나섰다가 험한 꼴을 당했다.

여행 4일차 되는 날 속초 시내의 한 다방에서 쉬고 있는 때였다. 신부 황인숙은 시댁과 친정 식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건장한 남자 6명이 들이닥쳐 그를 둘러쌌다. 치안본부 수사관 둘이 현지경찰서 형사 네 명을 대동하고 체포하러 온 것이었다.

이윽고 선물 쇼핑을 마치고 룰루랄라 되돌아온 신부 황인숙은 뜻밖에도 신랑이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리고 달콤했던 신혼여행을 끝마치지도 못한 채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권형택(오른쪽)이 1990년 전민련 활동으로 투옥된 뒤 출감하는 모습. 부인 황인숙이 그를 마중하고 있다
 권형택(오른쪽)이 1990년 전민련 활동으로 투옥된 뒤 출감하는 모습. 부인 황인숙이 그를 마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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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민청련 탄압사건의 막이 올랐다. 9명의 간부가 구속됐고, 7명이 수배됐다. 얼마나 더 많은 회원들이 추적을 받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당국의 탄압이 어느만큼 언제까지 계속될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시계 제로의 캄캄한 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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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하지 않기로 결정한 김근태, 경고는 현실이 됐다


"총살을 해서라도 학생운동을 저지해야 한다!"

전두환 정권은 칼을 뽑아들었다. 학생운동을 뿌리 뽑을 기세로 극단적인 강경책을 내밀었다. 삼민투 수사 결과를 발표한 이튿날인 1985년 7월 19일, 노신영 국무총리는 공권력을 총동원해서 법질서를 확립하겠다고 공언했다. 각부 장관들도 나섰다. 내무부, 법무부, 문교부, 노동부 등 학생운동을 관장하는 관련 부처들은 지금까지의 정책을 과감하게 수정하여 더욱 강경한 방법으로 대처하겠다고 언명했다.

뭔가를 꾸미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정권의 의도는 7월 25일에 드러났다. '학원 소요'를 근절하기 위한 강경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는 보도가 신문 지면을 시커멓게 장식했다. '학원안정법'이라는 명칭의 특별법을 입안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 39개 단체들이 결성한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에서 김대중 김병걸 송건호 계훈제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학원안정법 철회 요구 성명을 발표하는 장면
 1985년 민주화운동 39개 단체들이 결성한 학원안정법반대투쟁전국위원회에서 김대중 김병걸 송건호 계훈제 등 재야인사들이 모여 학원안정법 철회 요구 성명을 발표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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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학생을 영장 없이 체포 및 구금하여 6개월 동안 집단적인 '선도 교육'을 이수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인적이 드문 오지에 '감호소'를 설치하고, 그곳에 내무반 별로 10-2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여 훈련시키겠다는 복안이었다. 만약에 교육 중에 단식, 탈출, 집단행동 등의 방법으로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가혹한 형사처벌을 가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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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적인 강제수용소 정책이었다. 전두환 집권 초창기 6만여 명의 시민을 '불량배 소탕'이라는 이름아래 영장 없이 연행하여 짐승보다 못한 고초를 겪게 했던 삼청교육대의 이른바 '순화교육'을 연상케 하는 조치였다. 그뿐인가. 1981~1983년 시기에 강제로 징집된 운동권 대학생 출신 사병들 4백여 명을 대상으로 가혹행위와 고문을 서슴지 않았던 이른바 '녹화사업'의 부활이나 다름없었다.

사회 저변에 긴장과 공포감이 흘렀다. 광주학살에 버금가는 무서운 탄압이 도래하고 있는듯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정권 수뇌부는 광기마저 드러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대학생들이 미문화원을 점거한 다음날 안전기획부 간부회의에서 장세동 부장은 폭언을 내뱉었다. "주요 보안 목표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에는 총살을 해서라도 저지해야 한다"고 격분했다는 것이다. 무서운 말이었다.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면 제2의 학살도 불사한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전두환 정권 수뇌부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는 말이었다.

학원안정법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입안된 것이었다. 그들은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 여름방학 중에 학생운동을 근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놓겠다고 작정했다. 즉 8월 15일경 임시국회를 열어서 학원정상화 임시조치 법안을 단독 통과시키겠다는 것이 정권 수뇌부의 복안이었다.

들끓는 학원안정법 반대 운동

반대 여론이 들끓었다. 학생과 시민사회, 야당 측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민청련도 앞장섰다. 민청련은 8월 10일자로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학원안정법」 제정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단호히 투쟁"하겠다고 결의를 표명했다.

 1985년, 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학원안정법 철회를 주장하는 전단지를 거리로 살포하는 광경
 1985년, 시위가 금지된 상황에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학원안정법 철회를 주장하는 전단지를 거리로 살포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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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3일에는 학원안정법 저지를 목적으로 하는 여러 세력의 공동행동기구가 결성됐다. 민주화운동 39개 단체와 민추협이 공동으로 결성한 '학원안정법 반대투쟁 전국위원회'가 그것이다. 이는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 세력의 연합기관이었다. 전국위원회의 송건호 위원장과 민추협의 김대중, 김영삼 공동 의장은 그날 공동회견을 갖고, 성명을 통해 "학원안정법 입법 추진은 마땅히 철회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에 더하여 천주교와 기독교 등의 종교 세력도 나섰다. 8월 17일에 '한국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산하 인권위원회'가 신구교 합동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들도 학원안정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했다.

임박한 폭풍에 대비한 5차 총회

폭풍이 곧 몰아칠 기세였다. 피신을 권유받은 김근태 등 민청련의 공개 지도부 성원들은 대응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구속과 탄압이 다가오고 있었다. 탄압의 강도는 통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대대적인 것이 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다.

속히 대응 조치를 만들어야 했다. 탄압의 표적이 될 공개 간부들을 보호하고 비공개 활동을 강화하는 방안이 요구됐다. 특히 김근태 의장이 맡고 있는 역할을 축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먼저 민청련 의장 직책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러려면 총회 개최를 서둘러야 했다.

그래서 민청련 제5차 총회 준비 작업이 은밀하게 시작됐다. 통상 총회를 6개월 주기로 연 것에 비하면, 두 달이나 이른 시점에 총회 준비 활동을 개시했던 것이다. 여느 총회 때와 마찬가지로 총회준비위원회(총준)가 조직됐다. 각급 기구와 비공개 기반 조직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총준은 총회 개최에 요구되는 정치적, 실무적 준비 업무를 추진했다. 준비 업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그런데 총회 개최 날자와 장소가 결정된 시점에 기밀 유출 사고가 터졌다. 총회 개최지를 홍제동 성당으로 정했는데, 어떤 연유인지 그 정보가 경찰에게 누설됐다. 경찰은 성당 안팎을 통제하면서 출입자들을 감시했다. 속히 새 장소를 마련해야만 했는데, 다행히 기독교 측의 협력을 얻었다. 총회 개최지를 마포구에 위치한 신촌교회로 변경했다. 장소 변경을 알리는 은밀한 통지가 대의원들에게 전달됐다. 제5차 정기총회가 1985년 8월 10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촌교회에서 열렸다.

 20쪽 분량의 5차 총회 보고서 표지와 5차총회 결의문. 미리 인쇄된 보고서에는 장소가 홍제동 성당으로 돼 있지만, 실제 장소는 마포구에 있는 신촌교회로 바뀌었다.
 20쪽 분량의 5차 총회 보고서 표지와 5차총회 결의문. 미리 인쇄된 보고서에는 장소가 홍제동 성당으로 돼 있지만, 실제 장소는 마포구에 있는 신촌교회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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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의사 진행은 김근태 의장이 아니라 김희택 운영위원장이 맡았다. 김근태는 체포당할 위험을 감안해서 이날 총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총회가 열리는 시간 동안에 회의장 근처를 배회하며 소식을 전달받았다. 

총회에서 임원 개선이 이뤄졌다. 새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한경남(전 부의장), 부의장으로 최민화(전 부의장), 김희택 (전 운영위원장), 김병곤(구속중, 전 상임위원장)을 선출했다. 신임 의장 한경남은 김근태 창립 의장에 뒤이어 두 번째로 막중한 사령탑을 맡게 됐다.

새 의장 선출 문제는 총준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뤄진 사안이었다. 처음에 신임 의장직 물망에 오른 이는 장준영이었다. 그는 5차 총회 이전에 비공개 부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비공개 기별 대표 조직과 계반 관리에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그래서 많은 간부 회원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힘껏 사양했다. 연령과 학번 상으로 역량 있는 선배들이 두텁게 포진해 있으므로 자신이 의장에 취임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장영달 부의장을 새 의장에 선임하는 방안도 한때 고려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결국 의장직 선임에 적극성을 보인 한경남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총준위 내부에서는 의장 후보들에 대해 다각적인 토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타협과 절충에 의하여 한경남을 새 의장직에 추천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5차 총회에서 선임된 의장단. 1.한경남 의장 2.최민화 부의장 3.김병곤 부의장 4.김희택 부의장
 5차 총회에서 선임된 의장단. 1.한경남 의장 2.최민화 부의장 3.김병곤 부의장 4.김희택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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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의장단은 곧 바로 집행부를 조직했다. 운영위원장 박우섭, 상임위원장 천영초, 사무국장 윤여연, 집행국장 이범영, 서원기, 교육선전부장 윤형기, 청년부장 김종복, 여성부장 조임숙 등 각 부서장을 임명했다. 새 집행부 성원은 의장단 4인, 위원장 2인, 국장 및 부장 6인 등 도합 12인으로 이뤄졌다.

이들이 험난한 학원안정법 국면 속에서 민청련을 이끌어갈 공개 간부들이었다. 이리하여 공개 간부와 비공개 기반 조직들로 구성된 새로운 조직 시스템이 짜였다. 예상되는 강력한 탄압에 대응하여 선제적으로 조직을 재편하는 데에 성공한 셈이었다.

제5차 총회는 학원안정법 국면이라는 삼엄한 상황 속에서 개최됐으므로 험난한 투쟁을 각오하는 결기를 세웠다. 제5차 총회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속에는 그 당시 정세를 보는 민청련의 시각과 결의가 잘 드러나 있다.

즉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 어떤, 설혹 죽음으로 헌신하더라도 우리의 민주화 투쟁은 결코 종식되지 않는다"고 다짐했다. 또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위원회' 조직을 결의한데 이어서, 그 투쟁의 전면화를 제창했다. "모든 민주화운동세력은 이 땅을 「강제수용소」로 만들고 전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압살하여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학원안정법」 제정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단호히 투쟁하자"고 호소했다.

갑작스런 학원안정법 철회

민청련 제5차 총회가 열린지 1주일이 지난 때였다. 정국이 또 한 번 요동쳤다. 8월 17일 전두환 대통령은 학원안정법 제정을 일단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전혀 예기치 않은 조치였다. 사실상 철회한다는 의미였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달 가까이 정국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 조치는 '드라마틱했다'고 표현해도 좋았다.

살기등등하던 전두환 정권이 왜 학원안정법 추진을 포기했을까? 민청련 사람들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진단했다. 하나는 반대운동이 각계각층에 걸쳐서 광범하고 대대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법 제정을 막무가내로 추진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규모였던 것이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더하여 김대중과 김영삼이 이끄는 양대 야당 정치세력이 가담했기 때문에 민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릴 우려가 있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미국 정부의 태도였다. 미 국무성, 국방부, 정보부 세 라인을 통해서 전달되는 미국 정부의 영향력이 학원안정법 제정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온 사회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던 학원안정법 제정 시도가 불발로 끝났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태가 조성됐다. 유화국면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야수적인 폭압 국면으로 되돌아갈 것인지 쉬 판단할 수 없었다. 불안한 정적이 흘렀다.

 민청련 5차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민청련 5차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과 시국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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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전 의장은 학원안정법 철회 이후의 정세를 낙관적으로 진단하는 편에 섰다. 학원안정법 보류 조치로 인해서 전두환 정권이 '대단히 유리한 정치적 입장'을 얻게 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보류 조치가 모든 국민에게 일종의 선물이나 은혜처럼 해석되고 있었다.

정치 군부가 이러한  유리한 분위기를 자신의 손으로 깨트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대규모 구속 선풍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결국 김근태는 피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민청련 의장직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노골적인 탄압 대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예측이 그러한 결심을 굳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민주운동단체의 대표라는 자의식도 그 결정을 내리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당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사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앞서 구속된 김병곤이나 황인하의 경우와 동일하게 취급된다면, "최악의 경우 감옥에서 휴식을 취해 마음을 수련하는 시기로 삼자"는 계획조차 품었다.

김근태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민청련의 가까운 동료들과 상의했다. 많은 간부들이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안이하게 생각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크게 다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었다.

그 경고가 현실이 되는 사태는 의외로 빨리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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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미 문화원 점거 농성, 정부 민청련을 배후로 지목


탄압의 먹구름이 맑은 하늘을 가리기 시작했다. 1985년 7월 11일이었다. 민청련에 불길한 조짐이 드리우고 있음이 이날 처음 감지되었다. 그날 서울 하늘은 저기압의 영향으로 찌푸려 있었고, 이따금 비가 왔다. 전국이 온통 흐린 날씨였다.

민청련 상임위원장 김병곤이 귀갓길에 자기 집 앞에서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붙들려갔다. 밤 10시쯤이었다. 그 괴한들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 사복 경찰들이었음이 뒷날 밝혀졌다.

 1980년대엔 길거리에서 정보계 사복형사들이 시민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사진은 85년 경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이를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모습
 1980년대엔 길거리에서 정보계 사복형사들이 시민들을 영장 없이 체포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사진은 85년 경 서울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이를 무자비하게 연행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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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귀가를 기다리던 젊은 아내 박문숙은 그날따라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편의 늦은 귀가야 자주 있는 일이고, 집에 안 들어오는 일도 흔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느낌이 이상했다. 아침부터 아내 몸이 편찮은 것을 보고, 오늘은 일찍 들어오겠노라고 말하고 나갔지 않았던가. 늦은 밤, 문밖에 나가 기다리다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길 여러 차례 되풀이하던 중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아내는 무심코 집 옆에 낯익은 가방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아내는 날이 밝기를 기다려 온 사방에 연락을 하면서 실종된 남편을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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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혀 간 김병곤은 민청련 출범 초창기에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비공개 기별 대표 조직과 정책실에서 비상근으로 일했지만, 1985년 초에 결단을 내렸다. 직장을 그만두고 상근 전업 활동가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그해 3월 민청련 제4차 총회에서 상임위원장에 선임됐고, 비공개 영역에서 연구 조사 업무와 민중운동 지원 업무를 지휘해 오던 터였다.

경찰이 노리는 표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민청련 집행국장 이범영도 체포 대상자였다. 그는 다행히도 체포망을 벗어날 수 있었지만, 추적을 피해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기나긴 수배 생활의 터널에 진입했다.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야 했다. 가족과 친지들은 삼엄한 감시의 대상이 됐기 때문이다. 부인 김설이는 3교대 감시조 경찰에게 온종일 둘러싸여 꼼짝도 하기 어려운 상태에 놓였다. 거친 인상의 사복 경찰들이 거칠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가족을 위협했다.

그날 붙잡혀간 사람은 또 있었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도 연행되었다. 표적은 셋이었다. 경찰 수뇌부는 그들이 학생운동의 배후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다.

당시는 학생운동이 전두환 정권에게 타격을 가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그해 5월 투쟁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 투쟁이 그 정점을 찍었다. 정권 핵심부에게는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긴요한 터였는데,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은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위험한 짓이었다. 정권 핵심부는 이 사건을 결코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 내고자 했다.

삼민투 배후에 민청련이 있다?

김병곤과 황인성이 체포된 지 10일째 되던, 그해 7월 18일에 삼민투 수사결과 중간발표가 있었다. 일간 신문들은 대검찰청 공안부장의 발표 내용을 약속이나 한 듯이 대서특필했다. '용공, 좌경, 급진, 이적' 등과 같은 자극적인 글귀로 이뤄진 기사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985년 7월 18일, 대검 공안부는 삼민투를 용공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주도자를 대량 구속한다는 발표를 했다.
 1985년 7월 18일, 대검 공안부는 삼민투를 용공 이적 단체로 규정하고 주도자를 대량 구속한다는 발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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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에 따르면 미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의 배후는 삼민투였다. 삼민투는 반정부를 넘어선 급진 좌경화된 단체로 지목되었다. 그뿐 아니라 용공, 이적단체이기도 했다.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을 민중봉기로 미화했고, 해방정국에서의 전평 등 좌익을 해방 투쟁자로 보고 있으며, 자유민주체제를 뿌리부터 부정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삼민투 관계자로 지목된 19개 대학 학생 56명이 구속되었다. 다수 구속자를 낸 대학은 고려대 10명, 성균관대 10명, 서울대 7명, 연세대 5명 등이었다.

심상치 않은 점은 삼민투 뒤에 배후가 있다고 규정한 데에 있었다. 삼민투위 수사결과 중간발표에는 민청련 간부들의 혐의 사실이 기재돼 있었다. '배후 관계'라는 소제목 아래에 "이번 수사 과정에서 삼민투위의 핵심분자들이 학외의 불순단체 및 종교계 일부와 연계되어 있다는 혐의를 포착"했노라고 쓰여 있었다.

저들이 문제로 삼은 사실은 6월 27일 자 '민민탄'(민중민주화운동탄압공동대책위원회) 연석회의였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6인이었다. 삼민투 학생 간부 3인 외에 민청련 간부 김병곤과 이범영,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총무부장 황인하가 그 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공동 성명서를 함께 작성했고 민민탄 공동 구성 문제도 협의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삼민투 핵심분자들의 범법행위를 부추긴 혐의가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1985년 서울대학교에 열린 민족민주운동탄압 저지를 위한 학내 시위
 1985년 서울대학교에 열린 민족민주운동탄압 저지를 위한 학내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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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찰이 세 사람을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분명해졌다.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주도한 삼민투를 세 사람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혐의였다. 수사의 초점은 체포된 두 사람, 김병곤과 황인하에게 집중되었다.

수사 초점을 민청련으로 변경

뒷날 김병곤은 자신이 겪은 경찰의 취조 상황을 법정에서 진술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처음 수사의 초점은 민민탄 연석회의에 맞춰져 있었다. 그 회의는 민청련이 학생운동을 조종해 왔음을 보여주는 한 예증으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학생운동을 약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기는 어려웠다. 경찰은 정권 수뇌부의 입맛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김병곤이 보기에도 대공수사단은 "고심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사 초점이 이동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수사를 담당하던 '백 전무'라는 자가 짐짓 걱정스러운 듯이 토로했다고 한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이 수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상부 고위층으로부터 질책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첩해서 수사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혹독한 고문을 가해서라도 저들의 계획대로 진술을 얻어내라는 뜻이었다. 김병곤은 이미 10년 전 민청학련 사건 때에 가혹한 고문을 겪은 적이 있었다. 그 경험이 떠올라 치가 떨려 왔다. 그래서 "아예 각본을 달라. 그대로 쓰겠다"고까지 제안했다.

결국. 기존 수사팀은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에 '김병곤의 신병을 옮겨가려 한 곳'에서 수사팀이 새로 파견되어 왔다. 그때부터 수사 방향은 달라졌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의 행방이 취조의 초점이 되었다.

새 수사팀은 김근태의 행적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김근태에게 월북 가족이 있는 것을 아느냐, 그가 빨갱이라는 것을 아느냐고 추궁했다. 요컨대 간첩 혐의를 덮어씌우려고 했다. 새 수사팀이 구상하는 그림은 학생운동을 북한과 연결 짓는 데 있었다. 북한과 연계된 간첩 조직이 학생운동의 배후에 잠복해 있으며,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그 매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목숨 걸고 전한 쪽지 "피해야 합니다, 근태형"

김병곤은 김근태와 민청련에게 위험이 닥쳤음을 직감했다. 어떻게든 이 긴박한 상황을 동료들에게 알려야 했다. 7월 15일 수사가 일단락되어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 그는 가족 면회가 허용된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어떻게든 이 메시지를 밖으로 전하기로 결심했다.

아내 박문숙이 그를 도왔다. 박문숙은 남편이 연행되자마자 그 소재를 수소문해 나섰다. 용산경찰서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민청련 동료들 두셋과 동행해 그곳으로 달려갔다. 면회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다. 가족과 시민사회가 체포된 사람을 줄곧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폭압자들에게는 부담스런 일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가해지는 폭압과 야만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서 박문숙은 그날 이후 줄곧 용산경찰서를 찾아갔다. 번번이 거절당하면서도 면회 신청을 멈추지 않았다.

 김병곤 박문숙 부부의 신혼여행 때 모습. 두 사람 모두 이제 고인이 됐다.
 김병곤 박문숙 부부의 신혼여행 때 모습. 두 사람 모두 이제 고인이 됐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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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짧으나마 면회가 성사됐다. 경찰서가 아니라 검찰청에서였다. 김병곤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과 국가모독죄로 구속되어 검찰청으로 이첩된 뒤였다. 면회는 담당 검사 고영주의 검사실에서 이뤄졌다.

김병곤은 아직 범죄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검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형사소송의 원칙과 규범이 파괴된 현장을 목도한 박문숙은 옥신각신하며 관료들과 승강이를 벌였다. 그런데 그녀는 경황없는 와중에서도 남편이 뭔가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알아챘다. 남편이 눈짓으로 신체 아래쪽을 가리키면서 고무신을 벗을 듯 말 듯 하는 낌새를 보였다. 아내는 알아들었다. 신발 속에 뭔가 전하고 싶은 게 있나 보다. 박문숙은 남편의 신발을 고쳐 신겨주는 척하면서 그 속에 감춰둔 쪽지를 손에 넣었다.

쪽지 속에는 김병곤이 발각의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적혀 있었다. 공안 기관의 수사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한두 사람의 간부가 아니라 민청련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가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노출된 집행부는 모두 피신해야 하며, 특히 김근태 의장은 저들의 초점이 되어 있으므로 하루바삐 은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심각한 내용이었다. 먹구름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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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승리에도 차분했던 4차 총회

총선 직후인 3월 21일, 민청련 4차 총회가 열렸다. 4차 총회는 3차 총회와는 달리 외부에 공개된 행사로 치러지지 않았다. 2·12총선의 야당 승리로 운동권은 전반적으로 고무됐지만, 민청련은 환호보다는 부담스러운 숙제를 안게 됐다는 분위기였다.

숙제의 하나는 전두환 독재체제가 건재한 가운데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선거에서 승리한 야당은 언제든 정권과 타협할 수 있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자중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일이었다. 또 하나의 숙제는 민청련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듯한 탄압의 칼날이었다.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그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4차 총회에서의 조직 체계상 변화는 이명준 부의장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퇴하고 그 자리를 운영위원장인 최민화가 이어받는 정도였다. 운영위위원장은 김희택이 맡았다.

 1985년 3월 1일, 집회에서 연행되는 김희택 운영위원장
 1985년 3월 1일, 집회에서 연행되는 김희택 운영위원장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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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근태 의장은 85년도 사업보고를 하면서 다가올 시기가 민청련이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다는 점을 강조했다.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다. 그것은 총회 결의문의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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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과정에서의 민중의 승리를 전면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을 우리는 반대하여야 한다. 따라서 민중, 민주 주체세력의 발전을 등한시하고 승리감에 젖어 치열성을 둔화시키는 운동 분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관념적 장기론에 빠져 준비론으로 몰락될 수도 있는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민중 삶의 고통의 가중과 민중생활투쟁의 치열화 앞에 우리는 모두 옷깃을 여미면서 운동과정에서 제기되는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부문운동 상호간의 작은 차별성을 해소시켜나가는 결단을 하여야 한다." 

총회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 목동 재개발을 하면서 발생한 철거민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목동문제연대투쟁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다가올 5월 투쟁에 대비해서 최민화 부의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단일대오 민통련의 탄생
 
한편 총선 이후 제도권의 정치 공간이 활성화되자 운동권 내부에서도 스스로를 정비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총선 결과 집권 세력이 정치적 타격을 받았으므로 반사적으로 반대 세력에게 활동공간은 넓어질 것이었다. 또한 그에 대한 역작용으로 집권 측이 운동권에 대한 대탄압 공세를 펼 가능성도 있었다. 이 모든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첫걸음은 분리돼 있던 민민협(민중민주운동협의회)과 국민회의(민주통일국민회의)를 통합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대표자 그리고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이 참여한 가운데 통합 협상이 개시됐다. 주로 서울 장충동 분도빌딩에 있는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사무실에서 약 1달 동안 진행됐다. 노동사목의 간사를 맡고 있던 윤순녀씨는 1960년대부터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시작해 평생 노동운동을 지원해왔고 재야운동에도 호의적이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협상은 잘 진전되지 않았다. 논점은 국민회의 측을 한 편으로 하고 민청련과 기독교 단체들을 다른 한 편으로 해서 형성됐다. 첫 쟁점은 연대운동의 수준을 협의체로 할 것인지 연합체로 할 것인지였다. 협의체로 하자는 것은 통합기구의 지도력보다는 개별 단체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것이었던 반면 연합체로 하자는 것은 강력한 지도력을 갖는 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즉 이는 운동 발전의 성과를 부문운동의 강화에 둘 것인지 연대기구에 둘 것인지의 문제였다. 연대기구의 지도력을 집단지도체제로 할 것인지, 단일지도체제로할 것인지도 같은 문제였다.  

결국 논쟁의 핵심은 각 부문운동의 대표성을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에 있었다. 즉 민청련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기층민중의 조직된 단체들이 통합기구에 대표를 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아가 통합기구 자체가 이러한 조직 대표성의 원칙 아래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국민회의 측은 현실적으로 그러한 조직노선을 반영한 기존의 민민협 운동이 한계를 보였다는 현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선언적 의미로 부문운동을 강조하되 현실적으로는 개인 명망가들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기구를 조직하자고 주장했다.

민청련은 자신의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협상회의를 마냥 끌 수는 없었다. 결국 조직운동 대표성을 주장하는 민청련과 기독교 단체들을 배제한 채 일단 통합단체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명칭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으로 했다. 

 1985년 3월 29일, 민통련 출범식 모습.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1985년 3월 29일, 민통련 출범식 모습.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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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29일, 분도빌딩에서 통합 결성대회가 열렸다. 기존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중앙위원 1백여 명이 참석한 회의는 "2·12총선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반영하여 범민주세력의 전열을 정비하고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족통일운동의 지속적 전개를 위해 두 단체가 조건 없이 통합할 것"을 결의했다.

이렇게 결성된 민통련의 정체성은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모든 국민이 참여하고 운영하는 단체"였으며 "지도적 민주 민권 운동가를 포괄하면서 전국적 지부 형성을 통해 국민적 대표성을 획득해 나갈 것"이었다. 특히 "기존의 정당이나 정치인과는 구별되는 순수 재야 양심세력의 결집체"라고 규정했다.

지도체제는 의장에 문익환 목사, 부의장에 계훈제와 김승훈 신부를 선출했다. 이렇게 보면 민통련은 민민협과 국민회의 중 국민회의에 보다 가까운 조직 형태를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개별 명망가들이 갖는 여론 파급력을 더욱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통련은 활동의 원칙을 민중노선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즉 "민중의 구체적 삶의 문제에 관해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을 조직화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민통련은 출범 뒤 분규가 발생한 노동현장에 대한 지원활동에 주력했다. 당장 6월에는 인천에 있는 한일스텐레스 공장에서 쟁의가 발생하자 계훈제 부의장과 방용석 노동자복지협의회 대표 등이 회원들을 이끌고 현장을 방문했고, 그 과정에서 구사대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민청련은 민통련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실제 활동에서 서로 배척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노동운동 지원활동 등은 함께하는 일이 많았고, 구성원 개인 사이의 관계도 친밀한 경우가 많았다. 사실 당면 정세가 단체들 사이에 균열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9월 20일 열린 민통련 2차 통합대회에서는 민청련, 기독교계 단체들, 서울노동운동연합,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등 11개 단체가 가입하여 민통련은 명실상부한 통합단체가 된다.

5월 투쟁에서 '야사'를 뜬 이범영

1985년 5월은 민청련이 창립 뒤 두 번째 맞이하는 '광주항쟁기념의 달'이었다. 이번에는 총선 승리로 인한 자신감에서, 보다 과감한 투쟁을 벌이기로 했다. 광주 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자료집을 제작해 대중을 상대로 배포했다. 아울러 단순히 그날을 기념하는 행사가 아니라 정권을 직접 공격하는 가두시위 투쟁을 민청련이 학생운동과 연대해 실행하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누가 가두시위의 주동자로 나설 것인가를 두고 민청련 내부에서 적지 않은 고민이 있었다. 회원들 대다수가 학생운동 시절에는 '야사를 떴던' 경험이 있었다. '야사'란 야전사령관의 약자로 시위의 초기에 대중 앞에 주모자로 나서는 사람을 가리킨다. 구속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민청련은 공개된 단체이고 그 회원들은 대부분 직장인인 형편에서 쉽사리 구속을 각오할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1985년 5월 17일 동대문운동장 앞 시위에서 살포한 민청련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가 제작한 5월투쟁용 전단지
 1985년 5월 17일 동대문운동장 앞 시위에서 살포한 민청련 광주사태진상규명위원회가 제작한 5월투쟁용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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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책임은 집행부가 맡는 것이 원칙이라는 데 합의했고, 집행부 중에서 누가 나설 것인가를 두고 서로 고민이 깊었다. 이 과정에서 결단을 내린 이는 집행국장 이범영이었다.

5월 17일 서울 동대문 운동장 주변의 시위에서 이범영은 고가도로 위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며 '야사'를 떴다. 그는 다행히 현장 검거를 피해 구속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곧 다가온 민청련 대탄압에서 수배자가 되어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다.

미문화원 점거투쟁의 여파

민청련이 5월투쟁을 정리할 무렵, 큰 사건이 터졌다. 5월 23일, 서울의 대학생들이 미국문화원을 점거한 것이다. 서울 5개 대학 삼민투 소속 대학생 70여 명이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국문화원을 기습적으로 점거했다. 삼민투란, 그 해 4월 전국 대학을 포괄하는 학생운동 단체로 '전국학생총연합'이 결성됐고, 이 단체의 지휘 아래 각 대학에 '민족통일 민주쟁취 민중해방 투쟁위원회'라는 투쟁조직이 결성되는데 이를 줄여서 부른 명칭이었다. 미문화원에 들어간 함운경 서울대 삼민투위원장은 자신들이 미국에 대해 80년 광주학살의 책임을 묻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1985년 5월 23일,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문화원을 삼민투 소속 대학생들이 점거했다. 아래는 해산하며 연행되기 직전의 점거 대학생들 모습
 1985년 5월 23일, 서울 을지로 1가에 있던 미문화원을 삼민투 소속 대학생들이 점거했다. 아래는 해산하며 연행되기 직전의 점거 대학생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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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지난 연말의 민정당사 점거 사건에 이은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80년 광주로의 군대 이동에 대한 권한이 미군에게 있었으므로 미국이 광주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80년 광주로의 군대 이동을 승인한 미국에게 책임을 묻는 미문화원 점거투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민청련은 곧바로 대학생들의 투쟁을 지원하는 일에 나섰다.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학생들이 왜 이러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지 대중들에게 홍보했다. 아울러 구속된 대학생 부모들을 모아 부당한 구속과 고문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선했다.

민청련이 85년 5월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정권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는 민청련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지고 있었다. 민청련 전체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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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박하게 다가온 1985년 새해

1985년 새해는 온통 정치적 관심사 속에서 밝았다. 불과 40여 일 뒤에 제12대 총선이 예정돼 있었다. 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이 1988년에 7년 단임의 임기를 마칠 때까지 정국 구도를 결정하는 선거였다. 전두환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현행 헌법에 따라 임기를 마치고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행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대해 민한당과 국민당은 대통령을 간선제가 아닌 국민 직선제로 선출하는 개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때 예년과는 다르게 또 하나의 정당이 가세한 것이 예년과 달랐다. 바로 해금된 정치인, 구체적으로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주도하여 결성한 신당인 신한민주당이 창당을 준비하며 정치적 행보를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여타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총선에 나설 후보들을 공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한당 역시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집권 민정당에 대립각을 세웠다. 다른 야당들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같았지만, 국민들은 그 진실성과 추진 의지에서 '민정당 2중대들'보다는 '탄압에 저항하는 정치인' 그리고 그 지도자인 김영삼, 김대중 양 김씨에 대해 더 주목하는 분위기였다.

 1985년 1월 18일, 양 김씨가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실질적 지도자는 양 김씨였으나 총재로는 이민우가 선출됐다
 1985년 1월 18일, 양 김씨가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이 창당됐다. 실질적 지도자는 양 김씨였으나 총재로는 이민우가 선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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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장이 미어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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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은 곧바로 선거운동 국면에 진입했다. 선거의 초점은 야당 중 기존정당인 민한당과 신당인 신민당 중 어느 쪽이 더 많은 표를 얻을 것인가에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 선거제도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해 전국 92개 지역구에서 1, 2위 득표자 184명을 뽑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비례대표 92명을 포함 전체 의원정수는 276석).

가장 관심을 끈 지역구는 정치 1번지로 불린 종로·중구였다. 이 지역구에 민정당은 이종찬, 민한당은 정대철, 신민당은 이민우를 공천했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재직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에 참여해서 민정당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력으로만 보면 군사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보이지만, 젊은 데다 개혁적인 발언으로 '차세대' 지도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종로구 토박이여서 민정당 후보 중 단연 중량감이 있었다.

정대철은 야당의 원로 정치인 정일형의 아들이자, 여성계의 원로 이태영 여사를 어머니로 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그 역시 중구에 오랫동안 살아온 토박이였다. 이에 맞서는 이민우는 평생 야당에 몸담아온 나이 70의 노 정치가였지만 고향은 충청북도 청주로 서울과는 인연이 없었다. 더구나 이종찬이나 정대철에 맞서 내세울 경력은 별로 없었다. 단지 새로 창당한 신민당 총재라는 직함이 전부였다. 따라서 언론에서는 대체로 이종찬과 정대철의 당선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2월 1일 종로·중구 첫 합동유세장은 무엇인가 예상치 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전까지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는 각 당이 동원한 청중들이 모여들어 자당 후보의 연설에 의례적인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풍경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날 동대문 부근 창신 초등학교 운동장은 동원되지 않은 국민들이 줄을 이어 찾아오더니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신민당 이민우 후보의 연설에 열광적인 환호와 지지를 보냈다. 그것은 유세라기보다는 일종의 반정부 집회와 같은 분위기였다. 이날 청중이 얼마나 넘쳐 났는지 동대문과 종로 일대의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위) 1985년 2월 1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첫 합동연설회장인 창신초등학교에 몰린 인파. (아래) 1985년 2월 6일 종로·중구 12대 총선 마지막 합동연설회장인 신문로 구 서울고 교정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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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만난 물고기, 민청련

이러한 예상치 못한 청중의 열기는 운동권에도 충격을 주었다. 민청련도 마찬가지였다. 제휴 투쟁론과 제휴 반대론을 두고 격론을 벌이던 민청련 집행부는 논의를 접고 거리로 뛰쳐나가기로 한다.

당시 민청련이 기획하고 주도하는 가두집회라고 해야 동원된 인원 수백 명에 거리의 동조자 수백 명, 다 합쳐도 1천 명이 모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그러한 집회를 한 번 하고 나면 구류자와 구속자가 발생하는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 합법적인 유세장 집회에 수천, 수만 명이 모여들고 있으니 이는 어항 속 물고기가 거대한 강물을 만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민청련은 다음 종로·중구 유세장에 적극 참여하여 민청련이 만든 유인물을 청중들에게 배포하며 선전전을 벌이기로 한다. 유인물로는 '광주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당시의 참상을 담은 사진기록물을 수록한 자료집을 제작했고,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1장짜리로 만화를 깃들여 구성한 간단한 선전지도 만들었다. 민정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말자는 뜻으로 <민정당식 지상낙원>이란 제목으로 만든 유인물이 그것인데, 그 말미에는 "조국의 민주화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군부폭력 정권의 실상을 이웃과 친지에게 널리 알리고 이번 선거를 통해 민정당 체제를 거부합시다"라고 적었다. 특히 대중들에 대한 선전력을 높이기 위해 벽에 부착하는 스티커를 제작했다. 명함보다 약간 큰 크기의 스티커에는 "군사독재 물리치고 민주사회 이룩하자. 직선개헌 쟁취하여 대통령을 내 손으로"라는 문구를 넣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든 유인물에 '민주화운동 청년연합'이라는 단체명과 전화번호 720-9452를 명기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들에게 이 유인물이 정체불명의 조직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림으로서 그 내용과 주장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 선거 국면 동안 민청련 사무실에는 적지 않은 격려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앞뒤 총 6면으로 제작한 총선용 민청련 전단지 ‘민정당식 지상낙원’
 앞뒤 총 6면으로 제작한 총선용 민청련 전단지 ‘민정당식 지상낙원’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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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종로·중구의 마지막 합동 유세장인 신문로의 현대인력개발원(구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에는 글자 그대로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운동장은 물론 신문로 도로에까지 청중이 넘쳐났다. 언론들은 이를 "청중 폭발"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언론이 추정한 이 날 청중은 10만 명이었다.

유세장에서 민청련 회원들은 신이 났다. 검거될 위험 없이 마음껏 유인물을 나누어 주고, 이른바 대중들을 향해 '아지(선동이라는 뜻 agitation의 약자)'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는 그동안 내부에서 노선을 두고 벌이던 논쟁이 얼마나 관념적이었는가를 반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선거가 끝난 뒤 기관지 <민주화의 길>에서 민청련은 이렇게 반성했다.

"4·19혁명 때도, 71년도 대통령 선거 때도, 또한 79년 부마사태 때도, 80년 서울 봄 때도, 광주항쟁 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과오를 저질렀다. 역동성에서 뒤떨어져 있는 것은 대중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조직 운동 수준, 활동가들의 수준이다."

 선거 선전전에는 늘 민청련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청련에서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판매하는 이명식 민청련 회원 (아래)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통련 신문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는 김지나 민청련 회원
 선거 선전전에는 늘 민청련 회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위)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청련에서 제작한 책자 ‘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를 판매하는 이명식 민청련 회원 (아래) 1987년 12월 대선 여의도 유세장에서 민통련 신문 ‘민중의 소리’를 나눠주는 김지나 민청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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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2월 8일, 그동안 미국에 머물고 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귀국한 것이다. 미국 정치인 및 기자들과 함께 귀국한 김대중은 공항에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 삼엄한 경비에 의해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이송되어 자택에 연금되었다.

대중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지만 김대중이 몰고 온 '민주화 바람'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민추협은 양 김씨가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있어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고문의 직책이었고, 김영삼 공동의장과 김상현 공동의장대행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김대중이 귀국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양 김씨 공동의장 체제가 될 것이었다. 이는 많은 국민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었고 며칠 뒤 있을 총선에서 신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신민당 돌풍

당시 선거구 중 관심을 끄는 또 한 곳은 서울 성북구였다. 이곳에는 민정당 김정례, 민한당 조윤형에 신민당 이철이 출마했다. 김정례는 여성계의 대표적인 이물로 장관을 겸하고 있었고, 조윤형은 해방정국과 자유당 정권 때의 정치 거물 조병옥의 아들로 민한당의 중진이었다. 이에 맞서는 이철은 1974년 서울대학교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학생운동 1세대였다.

이철은 지역구 유권자들에겐 낯선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어필할 것인가 고심하던 중 선거 포스터 문구를 "돌아온 정치 사형수"로 했다. 마치 할리우드 서부영화 제목을 연상시키는 문구였다. 이 문구에 의해 이철에게는 신민당이라는 참신한 정당 소속에 정권으로부터 핍박당한 의로운 투사의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전두환 폭압 정치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저항의 불씨를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한마디로 파격이었다. 이민우는 정대철을, 이철은 조윤형을 꺾었다. 이는 유권자들이 민한당을 버리고 신민당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태였다. 서울 전체를 보면, 14개 지역구에서 신민당은 전원 당선됐다. 반면 민한당은 강남구 단 1곳에서만 당선됐다. 강남구에서는 민정당이 낙선하고 신민당과 민한당이 동반 당선되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서울에서 득표율이 민정당보다 15% 더 많았다.

불공정한 선거제도 덕분에 민정당이 압도적인 1당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득표율로 보면 민정당은 35.2% 신민당은 29.3% 민한당은 19.7% 국민당은 9.2%였다. 정통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신민·민한 두 야당의 득표율이 집권 여당보다 14% 앞섰다. 내용으로는 민정당의 패배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198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기반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 지각변동의 첫 파도는 민한당 의원들이 줄줄이 탈당하여 신민당으로 당적을 옮기는 일이었다. 민한당은 결국 단 3명이 남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다음 13대 총선에서는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위) 12대 총선에서 가장 이목이 집중되었던 종로·중구 벽보를 사이에 두고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광경. (아래) 1985년 2월 8일 김대중 귀국을 알리는 이철 후보의 버스플래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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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의 충격 속에서 전두환은 1979년 12·12사태 때 수도방위사령관으로서 자신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했으며 이후 자신의 후계자로 알려져 있던 노태우를 민정당 대표위원이라는 직책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앞으로 신민당이 펼칠 정치 공세에 실세가 나서서 대응하겠다는 태세였다.

신민당의 실질적 운영 주체는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은 그 입지가 재야 운동권과 비슷하게 정국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신민당이 제기할 첫 번째 정치 의제는 개헌이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 모인 대의원이 아닌,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하자는 직선제 개헌이었다. 이는 집권 세력에게는 자신의 토대 자체를 공격하는 엄중한 사태였다.

이제 민청련도 투쟁적 야당의 등장에 대해, 그들과의 관계 설정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했다. 내부에서는 또 한 차례 뜨거운 논쟁의 장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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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여름, 하늘은 전두환 편이 아니었다


양 김씨, 민추협을 결성하다

1984년 여름엔 하늘도 전두환 편이 아니었다. 늦은 장마로 9월 초부터 서울 일대에 무자비한 물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1925 을축년 대홍수 이래 최대 홍수가 나서 서울 망원동 일대는 아예 물속에 잠겨 버렸다.

189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였지만, 차라리 전두환에게는 이것이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반감을 하늘에 대한 반감으로 대체할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북한이 제의한 수해물자 제공 의사를 덥석 받아들인 것도 그런 배경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서울 시민들은 북한에서 휴전선을 넘어온 맛없는 쌀과, 촌스러운 옷감을 받아들고 신기해했다.

 1. 1984년 9월 수해로 잠긴 서울 망원동 일대. 2.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망원동 유수지 부근 3. 물에 잠긴 망원동 길가와 버스. 4. 북한적십자사에서 보낸 물자를 실은 북측 선박이 인천항에 도착한 모습. 5. 북측에서 보낸 쌀
 1. 1984년 9월 수해로 잠긴 서울 망원동 일대. 2.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망원동 유수지 부근 3. 물에 잠긴 망원동 길가와 버스. 4. 북한적십자사에서 보낸 물자를 실은 북측 선박이 인천항에 도착한 모습. 5. 북측에서 보낸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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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홍수를 몰고 온 태풍보다 더 센 정치의 태풍이 몰려왔다. 전두환은 유화국면의 연장선에서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야당 정치인들을 83년과 84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러나 3김씨로 불리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풀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전두환은 해제된 야당 정치인들이 기존의 민한당과 국민당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투쟁력을 거세시킬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금에서 풀린 정치인들은 아직 풀리지 않은 김영삼, 김대중을 중심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더니, 1985년 총선을 향해 맹렬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전두환은 아마도 민추협이 정권에 길들여져 있던 기존의 민한당의 기세를 능가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껏해야 온건파와 과격파로 분열된 야당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임으로서 오히려 정권의 유지에는 도움이 될 것일 터였다. 그러나 정세는 전두환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84년 12월 11일,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이 민추협 사무실에서 이듬해 2.12총선에 대한 방침을 발표하고 있는 모습. 당시 김대중 공동의장은 국내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어서 김영삼 왼쪽에 앉아 있는 김상현 씨가 공동의장 대행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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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총회, 공개 행사로 치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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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민민협과 국민회의라는 두 연합단체의 출범과 함께 운동세력 안에서는 한국 변혁 운동의 방향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제출되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투쟁의 열기가 뜨거운 학생운동과 그 출신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불이 활활 타올랐다. 민청련이 그 중심에 있었다.

민청련 3차 총회는 84년 10월 20일 열렸다. 서울 동숭동에 있는 흥사단 강당에서 공개적인 행사로 치렀다. 당시 민청련 내부의 조직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외부적으로는 여러 공개 운동단체들이 속속 건설되는 상황이었다. 즉 정권이 조성한 유화국면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탄압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조직 구조에 큰 변화가 있었다. 운동이 전반적으로 활성화되면서 논의가 다양해지자 의장단 지도체제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이 변화의 주된 이유였다. 그 결과 중앙위원회가 신설되었다. 5명 내지 15명으로 구성되는 중앙위원회는 총회가 열리지 않는 평상시의 최고 의결기구였다. 중앙위원에는 공개되지 않은 내부 조직에서 선출된 사람도 포함돼 있었다. 창립 당시에 비해 정권으로부터 가해올 탄압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결과였다.

 총16쪽 분량의 3차총회 보고서 표지와 민정당 점거 관련 성명서
 총16쪽 분량의 3차총회 보고서 표지와 민정당 점거 관련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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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P론을 정리하다

민청련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면 정세를 분석하고 활동방향을 정하는 일이었다.

특히 민민협과 국민회의의 통합과 같은 사안에 대해 밤을 지새우며 토론하는 일이 잦았다.
논의가 점차 복잡해지자 김근태 의장은 이을호 정책실장에게 논의의 가닥을 간명하게 정리해줄 것을 요청한다. 이을호가 연륜이 깊은 운동가들을 접촉하고 정리해낸 것이 이른바 'CNP론'이었다.

CNP란 CD 즉 Civil Democracy(시민민주주의), ND 즉 National Democracy(민족민주주의), PD 즉 (People Democracy) 민중민주주의의 약자였다. 당시 각 운동단체 및 운동세력의 성향과 노선을 분석하여 이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였던 것이다. 각 노선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추구하는 변혁노선도 다르게 표출된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CD는 한국 사회를 세계자본주의 체제 속에 편입된 주변부 자본주의로 바라본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구조 아래서 핍박 받는 계층은 노동자, 농민, 빈민뿐만 아니라 영세자영업자와 중소자본가까지 포함된다. 따라서 당면 투쟁의 목표는 세계자본에 종속된 독재권력을 타도하고 민주적인 민간정부를 수립하는 일이다. 70년대 이래 정치운동을 이끌어온 이른바 재야세력이 그 중심이다.   



PD는 한국의 사회구성체는 국가독점자본주위라고 본다. 즉 단순히 외세에 종속된 체제가 아니라 스스로 상당 수준의 자본축적을 이루고 독자적인 경제구조를 운영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당면 과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며, 그것을 담당할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 이끌 수밖에 없다. 학생운동에서 말하는 '노동현장론'이 바로 이러한 논리에서 구축된 것이다.

ND는 겉으로 보면 CD와 PD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민청련은 CD와 PD를 포용하며 연대한다는 지향에서 ND론을 정립시켰다.

정리된 ND론은 한국사회를 신식민주의적 독점자본 체제로 규정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모순은 신식민주의로부터 발생하는 민족적 모순과 독점자본에서 발생하는 계급적 모순이 중첩되어 있다. 투쟁방향은 노동자와 농민이 주축을 이루되 다양한 중간층을 아우르며 연합전선을 형성해 민주적이고 민족 자주적인 정부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가올 총선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CNP론은 회원 내부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전 회원에게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CNP론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대학생 출신들의 지나친 학구적 탐구심이 발동된 것으로 실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논쟁은 다가올 85년 초로 예정돼 있는 정치일정, 즉 2·12 총선에서 운동세력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옮겨갔다.

운동권의 시각에서 보면 총선거는 제도권 정치세력들이 판을 벌이는 마당이었다. 이러한 총선거에 대해 C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선거 국면을 적극 활용하자는 주장을 폈고, PD 경향성을 띤 측에서는 민중의 이해와 전혀 무관한 선거를 전면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변수로 등장한 것이 양 김씨가 이끄는 민추협이었다. 민추협은 "반민주적 법령이 민주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선거는 오직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며 선거를 보이코트할 기세를 보였던 것이다.

민추협의 움직임은 운동 세력에게 논쟁적인 화두로 떠올랐다. 민추협이 전두환 정권과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총선에 임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 그들을 아군으로 여겨야 하는지 결정해야 했던 것이다. 결국 선거에 대한 운동세력의 대응방향을 놓고 선거 거부론과 선거 활용론이라는 양 극단이 대립했다. 

선거 거부론은 다가올 2·12총선은 민정당과 군부 세력의 장기 독재를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민추협이 민한당과는 다른 투쟁적인 신당을 만든다고 해도 결국 정권이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가 그들과 야합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에 개입해서 한국 사회 모순의 궁극적 해결을 도모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전면 거부하고, 오히려 기층 민중의 역량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선거 활용론은 선거 거부론의 논점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논지를 펼쳤다. 즉 선거는 전두환 독재정권이라는 '지배체제의 재생산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올바른 시각이지만, 그것으로부터 곧바로 선거 거부라는 전술을 도출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더구나 운동세력의 역량이 열세에 있을 때는 선거라는 국면을 활용하는 전술을 채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역량이 선거를 거부할 정도로 성숙해 있었을 때조차도 단순한 선거 거부가 아니라 대안적 정치 구조의 창출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방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거 활용론의 입장에서 2·12 총선은 대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양되는 시기이며, 그러한 정세 조건을 활용할 방안을 마련해야 했다. 즉 '민주화'와 '민중 생존권' 문제를 부각시키는 실천 프로그램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정당사 점거농성 사건의 충격파

총선과 관련한 논쟁은 민청련 내부뿐만 아니라 운동권 전반에서 벌어졌지만, 민청련은 공개 정치투쟁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민의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었다.

민청련의 선전력과 동원력은 선거라는 국가적 차원의 정치행사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민민협, 국민회의 등 운동세력의 연대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대열을 편성해야 했다.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대중동원력이 큰 야당정치세력과도 제휴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논쟁점이었다.

결국 야당정치세력과의 '제휴반대론'과 '제휴찬성론'이라는 틀로 의견이 갈렸다. 민청련 지도부 가운데 김병곤 상임위원장이 대체로 '제휴반대론'에 기울어 있었고, 김근태 의장이 '제휴찬성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회원들 사이에 의견의 분포는 정확히 계량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제휴찬성론이 약간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가올 총선에 대한 노선을 두고 논쟁하고 있던 중,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졌다. 11월 14일,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 260여 명이 서울 안국동 민정당사를 기습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간 것이었다.

1984년 당시의 학생운동은 주로 교내 시위의 형태를 취했고, 이따금 가두시위를 벌이곤 했다.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정부와 국민은 물론 학생들 스스로도 충격을 받은 투쟁방식이었다. 이후 민정당사, 미국문화원 등에 대한 점거 농성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점거 학생들은 이전 11월 3일 학생의 날 기념식을 연세대에서 갖고 그 자리에서 '반독재민주화투쟁학생연합'을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직은 당시 각 학교에 만들어져 있던 조직 '민주화투쟁위원회'가 연대하여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준비론'이나 '노동현장론'을 비판하며 즉각적이고도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정당사를 점거한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민정당을 찾아왔는가"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뿌리고 건물에 "노동악법 개정하라" "전면해금 실시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민중의 생존권을 위한 구호와 당면 정치정세에 대한 요구를 동시에 내걸고 글자 그대로 선도적 투쟁을 벌인 것이다.

 1. 경찰이 압수한 ‘민정당에 들어간 이유를 밝힌 대자보’ 2. 민정당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3. 민정당사 건물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성명서 읽고 있는 학생.  4~5. 진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경찰 병력. 6. 점거농성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
 1. 경찰이 압수한 ‘민정당에 들어간 이유를 밝힌 대자보’ 2. 민정당 사무실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 3. 민정당사 건물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성명서 읽고 있는 학생. 4~5. 진압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경찰 병력. 6. 점거농성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나오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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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하게 대응한 민청련

대학생들의 민정당사 점거는 민청련에게도 충격이었다. 민청련은 우선 정권이 이 사건을 일본의 '적군파식 테러'로 몰고 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학생들의 주장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민정당사 농성 사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학생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어서 학생들이 주장한 '14개항 – 당신은 그것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정치권은 물론 국민들에게 배포했다.

민민협과 국민회의도 학생들을 옹호하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였다. 이때 특히 눈에 띤 것은 민추협이 학생들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것이었다. 기존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학생운동의 민정당사 점거 농성투쟁은 운동 세력들에게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자칫 노선투쟁이 이념논쟁에 빠져들 기미가 보이던 무렵에 터진 이 사건으로 각 운동은 다가올 총선을 실천과 투쟁의 관점에서 대하게 됐다. 민청련이 위 유인물에서 총선에 대해 "우리는 다가오는 선거에서 현 체제를 거부하여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것도 그 증거였다. 

어쨌든 1984년 연말은 다가올 총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집권 세력과 야당 세력은  물론 각 운동세력이 각자의 프로그램을 구상하며 보내는 시기였다. 결전을 앞둔 각 진영이 참모회의로 분주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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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운동을 주도하다


노동운동가들, 연립주택 구해 '노협'을 창립하다

민청련의 창립은 각 부문운동 전선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민청련 창립이 성공하는 것을 지켜본 노동자, 농민, 기자, 문화예술인, 지식인 등이 앞을 다퉈 공개적인 단체를 창립하고 나선 것이다. 민청련은 이러한 상황을 발판으로 삼아 각 부문운동의 연합체 건설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 활동의 중심은 김근태 의장이 맡았다.

부문운동의 연합이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기층이라고 불러온 계급의 운동 즉,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노동운동은 개별 사업장에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노동자들의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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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70년에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항거함으로써 청계피복노조가 결성됐지만, 당시 청계천 일대의 봉제공장은 그 규모가 극히 영세해서 사업장 단위의 노조가 구성될 수 없어 일종의 지역노조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청계피복노조와는 달리 대규모 단일 사업장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고, 이후 정권의 탄압을 받아 붕괴된 사례들이 있었다.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노조에서 성장한 노동운동가들이 1984년 3월 10일, 당시의 노동절에 단체를 결성한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약칭 '노협')가 그것인데,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단위 사업장 노조지부장으로서 노동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그 주역이었다. 원풍모방의 방용석과 정선순, 한일도루코의 김문수, 동일방직의 이총각, YH의 최순영, 콘트롤데이타의 이영순 등이었다.    

 (‘ㄱ’자 순으로) 원풍모방 방용석, 동일방직 이총각, 원풍모방 정선순, YH무역 최순영, 콘트롤데이타 이영순. 큰 사진은 19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의 모습
 (‘ㄱ’자 순으로) 원풍모방 방용석, 동일방직 이총각, 원풍모방 정선순, YH무역 최순영, 콘트롤데이타 이영순. 큰 사진은 1978년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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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협 사무실은 일반 빌딩이 아니라 서울 신길동의 연립주택 한 칸을 구입해 입주했다. 당시 연립주택은 일반 단독주택에 비해 고급스러운 건물이었다. 원풍모방 노조가 탄압으로 쫓겨나면서 남아 있던 조합비로 마련한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밥도 해먹고 잠도 잘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단체의 많은 활동가들이 이곳을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 중에는 김근태 의장을 비롯해 민청련 활동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노협의 창립과 공개적인 활동은 당시 운동가들 사이에서 상당히 중요한 평가를 받았다. 기본 계급 혹은 기층민중인 현장 노동자들의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근태 의장은 이 노협을 중심으로 하여 다른 부문들이 결합하는 방식의 연대 틀을 구상했다.

'민민협' 창립의 산파 역할을 하다

다른 부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농민이었다. 흔히 '1천만 농민, 8백만 노동자'라고 하던 때였으므로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농민운동은 기독교와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보호 아래 진행되고 있었다.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가톨릭농민회가 그것이었다.

지식인 단체로는 해직언론인들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있었고, 문화운동 단체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출판계와 연극계 등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결성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늘 운동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 등 종교계의 성직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각 부문운동을 망라하여 연합체를 만들기 위해 김근태 의장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한 이는 동아투위의 이부영이었다. 이들은 단체의 이름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약칭 민민협)'로 정하고, 참가 자격은 개인이 아니라 각 부문운동을 대표하는 자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기로 했다. 

마침내 1984년 6월 29일 오전 9시, 서울 돈암동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 상지회관으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년 전, 민청련이 창립총회를 가졌던 바로 그 장소였다.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함세웅 신부의 사회로 창립총회가 진행되었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창립을 선포하는 '민중민주운동선언'은 발기인을 대표해 이부영이 낭독했다. "그동안 사회 각계에서 민주주의 회복과 인권 보장 그리고 사회정의 실현과 민중생존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온 우리들 민주, 민중 운동단체 대표"는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민중민주운동협의회를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활동'이란 바로 이전과 같이 사회적 명망이 있는 개인들을 대표로 내세우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적 명성은 적더라도 각 부분운동을 대표하는 조직운동의 원칙으로 운영되는 단체를 만들었다는 의미였다.

민민협의 대표위원은 김승훈 신부, 김동완 목사,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세 사람이 맡았는데, 김승훈과 김동완은 성직자였으므로 아무래도 대외활동에 소극적이어서 사실상의 대표 역할은 이부영이 했다고 볼 수 있다. 결성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김근태는 서기를 맡아 출범 후에도 각 부문 간 협력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창립한 민민연은 민청련과 가까운 서울 종로 1가 서울빌딩 703호에 사무실을 개설했고, 8·15민족해방기념식을 민청련 등과 함께 치러냈다. 그리고 10월에는 독자적인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창간했다.

 (왼쪽부터) 민민협 대표위원이었던 김동완 목사, 김승훈 신부,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왼쪽부터) 민민협 대표위원이었던 김동완 목사, 김승훈 신부,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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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가들 '민주통일국민회의'로 모이다

민민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활동했지만 그 활동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파급력은 한계가 있었다. 7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은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명망이 있는 성직자나 재야정치인이 주도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명망성이 있다는 것은 곧 사회적 파급력이 크다는 것을 뜻했다. 그런데 민민협과 같이 명망성이 낮은, 조직 대표자들이 활동을 벌이다보니 이전의 운동에 비해 파급력이 약했던 것이다.

이렇게 명망성이 있는 운동가들이 민민협에서 제외됨으로써 그들이 가진 운동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였다. 물론 명망가들 자신도 운동에 기여할 기회를 갖기 원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문익환 목사, 박형규 목사, 재야정치인 계훈제, 백기완 등이었다.

결국 이들은 각 개인이 참여하는 운동단체를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1984년 10월 16일,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 발기인 50여 명이 모였다. '민주통일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를 발족시키는 자리였다.

조직의 성격을 보면, 국민회의는 민민협과 판이하게 달랐다. 조직의 대표자가 아닌 전국적 단위에서 국민적 명망성을 가진 성직자, 지식인, 예술인 등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해 구성된 중앙위원회가 기본조직이었다. 그리고 집행위원회와 분과위원회를 두어 실행과 연구를 병행하는 구조를 취했다. 집행위원회가 사실상 대표기구가 됐는데, 의장 문익환, 부의장 계훈제 신현봉, 사무총장 이창복으로 구성됐다.

 (왼쪽부터) 민주통일국민회의 대표 계훈제, 문익환, 백기완. 사진은 1984년 11월 전태일 기념관 ‘평화의 집’ 집들이 때 모습
 (왼쪽부터) 민주통일국민회의 대표 계훈제, 문익환, 백기완. 사진은 1984년 11월 전태일 기념관 ‘평화의 집’ 집들이 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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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국민회의의 창립을 표면적으로는 축하했지만, 내부적으로 이 단체에 대해 우려의 시각을 보내는 분위기가 강했다. 민청련이 자신의 청년운동론에서 '조직운동' 노선을 주장한 것은 바로 6,70년대 명망가 위주의 운동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회의가 과거와 같은 명망가 운동이 되고, 결국 운동이 쟁취해낸 정치적 성과가 오로지 그들 개인에게 귀속되는 상황이 올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민청련의 우려는 국민회의 창립 며칠 뒤 있었던 민청련 3차 총회에서 채택한 '민주통일국민회의 발족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에 그대로 드러났다. 즉 성명서에서 "역사발전에 있어서 결국에는 민중의 의지는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소박한 진리가 우리를 지탱하는 정신적 근원일 때, 우리는 민중의 의지를 어떻게 조직하며 어떻게 현실의 불합리를 투쟁 속에서 타개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조직과 연대 속에서만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은근히 국민회의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다.

조직이냐 명망성이냐, 통합론 대두

국민회의 구성원들도 자신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국민회의는 창립 3개월이 지난 1985년 2월 기관지 [민주·통일]을 창간했다. [민주·통일]은 1백 쪽 가까운 두께에 표지는 컬러로 인쇄됐고, 제대로 제본이 된 책자의 형태로 발간됐다. 가격도 1500원의 유료로 책정됐고, 책 뒤표지에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광고도 실려 있었다.

창간호의 특집은 '민족통일을 위하여'로 잡아서 당시 운동 세력이 주된 화두로 삼고 있지 않던 통일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그런데 더욱 눈에 띠는 글은 '민주통일국민회의의 창립 취지와 운동방향'이라는 기획기사였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적 시각에 대한 해명과 극복방안을 내놓은 글이었다.

글에서 국민회의는 현재로서는 비록 명망성 있는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지만 일반 국민들에게 문호가 개방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각 부문운동의 활동은 자칫 국민 일반에게 조직 이기주의의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는 한계를 지적하며, 국민회의야말로 일반 국민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욕구를 대변해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울러 국민회의는 현역 정치인의 참여를 금지하고 있으며, 집권을 겨냥하는 정당 차원의 활동은 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국민회의가 기존 정치권에 진출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글에서 국민회의는 '민중 노선'을 견지할 것이며, 민중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위해 복무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민민협과 비록 조직노선은 다르지만 운동의 대의를 위해 함께 하겠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었다.  

 민민협 기관지 [민중의 소리] 창간호와 민주통일국민회의 기관지 [민주·통일] 창간호
 민민협 기관지 [민중의 소리] 창간호와 민주통일국민회의 기관지 [민주·통일]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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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회의가 민민협과 협력하겠다는 운동노선을 밝혔지만, 그렇다면 두 단체가 별개로 운영할 필요 없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민청련의 시각은 조직운동 노선에 따라 건설된 민민협이 해소되는 것이 자칫 조직운동 노선을 포기하고 명망가 운동으로 흡수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깊었다. 당시 운동 세력에서 비교적 강한 발언권을 갖고 있던 민청련의 입장이 이러했기 때문에 두 단체의 통합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두 단체의 통합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강한 충격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85년 2·12 총선이었다. 

(민청련 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증언을 기다립니다. 채록된 증언은 [민청련사]를 책으로 발간할 때 귀중한 자료로 사용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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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의 '쑥담배' 유인물 배포 작전, 경찰 허를 찌르다


재갈 물린 제도권 언론들

민청련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면서부터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없애기 위해 '언론 통폐합'을 시행했었다. 그 결과 중앙일간지의 경우에는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부르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3개 신문사의 독점체제가 구축되었고, 방송의 경우에는 동양방송, 동아방송 등이 사라지고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 2개 방송으로 정리되었다. 

여기에 '언론기본법'을 제정해 정부가 언론사 설립 허가제를 실시하고 기존에 허가된 언론사의 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조항을 두었다. 따라서 언론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권력 앞에서 설설 기었다. 당시 국민들은 TV 방송의 9시 뉴스를 '땡전 뉴스'라고 비아냥거렸다. 매일 저녁 9시 정각, TV에서는 "뚜, 뚜, 뚜, 땡!"하고 시보를 울리면서 뉴스를 시작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오프닝 멘트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방송이 정부의 홍보기관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보도한 1980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보도한 1980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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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언론들은 야당의 의정활동에 대한 보도조차 가능하면 소략하게 다룰 뿐이었다.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정치 활동 금지 조치 아래 있던 이들에 대한 보도는 '보도지침'에 의해 철저하게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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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983년 5월, 정치 활동금지에 묶여 있던 김영삼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무려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을 벌였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언론에도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래도 양심이 있던 기자와 데스크는 '보도지침'을 피하여 보도할 방법을 찾다 보니 수수께끼와 같은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 신문 구석의 작은 가십난에 "최근 '정세 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신경을 쓰는 눈치"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모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라는 웃지 못할 표현도 있었다.

이러한 언론 상황에 대해 가장 큰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은 80년에 해직된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1984년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민언협)'을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에 정부의 간섭을 거부한 대항언론으로서 월간 <말>을 창간했다.

운동의 진로를 밝힐 기관지

그에 앞서 1984년 초부터 민청련 내부에서는 대항언론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민청련이 지향하는 것은 민언협의 '대항언론'과는 결이 약간 달랐다. 월간 <말>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기존 제도언론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모색되었다면, 민청련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각 부문 민주화 운동 소식을 운동세력 내부에서 서로 소통하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 나아가 당면 정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정세분석'을 운동세력들이 공유할 필요성, 운동세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다양한 논쟁들을 정리할 필요성 등이 절실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민청련 집행부는 기관지의 형태로 <민주화의 길>을 발간하기로 결정한다. 정권의 시각에서 이는 '불법 유인물'일 것이었고, 당연히 탄압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편집부는 공개되지 않는 비밀조직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 임무를 맡은 이는 당시 상임위 부위원장 이해찬이었다. 이해찬은 성균관대 73학번 김희상에게 편집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희상은 이후 민청련 집행부로 진출해 대변인을 맡았으며 김근태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2011년 아직 한창일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김희상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길> 편집에 전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대 78학번으로 이른바 '제헌의회' 그룹의 이론가로 맹활약했던 최민에게 편집 진행을 맡겼다. 최민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선후배 편집진들을 지휘하며 <민주화의 길> 창간의 산파 역할을 했다.

마침내 1984년 3월 11일, <민주화의 길> 창간호가 발행됐다. A4용지 크기의 갱지 20페이지를 흑백으로 인쇄한 뒤 중철로 제본한 소박한 간행물이었지만, 이를 받아본 편집진들은 그동안의 고생을 되돌아보며 감개무량해 했다.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창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왼쪽부터) 이해찬, 김희상, 최민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창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왼쪽부터) 이해찬, 김희상, 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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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표지는 두꺼비를 중심으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목판에 새긴 뒤 판화로 찍은 것이었다. <길>은 폐간할 때까지 이 표지를 일관되게 사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판화를 민청련 깃발로 만들어 집회 때마다 사용하여 두꺼비가 민청련의 상징이 되었다.

권두언은 김근태 의장이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들며'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 글에서 김 의장은 <민주화의 길> 임무로 5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의 방향 제시, 정확한 정세분석, 운동권 내부의 동질성 확보, 관제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의 보도, 다른 운동세력과의 연대' 등이었다. 이후에도 권두에는 논단, 논설 등의 항목으로 당면 정세에 대한 민청련의 견해를 밝히는 글이 실렸다. 대개는 김근태 의장이 썼으나, 때로는 다른 집행부 또는 김병곤, 이범영 등 비공개 간부가 작성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당시 민주화운동 전체를 이끌던 지도자 문익환 목사의 격려사, 신경림 시인의 축시가 실렸다. 그리고 정세분석, 민주화 동향이 이어졌다. 이후 <민주화의 길>의 편집체제는 대체로 이러한 형태를 유지하며 발간되었다. 발간 주기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대략 2, 3개월의 간격을 두고 발간되었다.

3호부터는 편집진이 보강돼 일선 기자 출신으로 민청련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진재학, 백현기, 김선택 등이 참여했다. 이로 인해 <민주화의 길>은 기관지로서의 틀과 격식을 제법 갖추게 됐다. 

정보기관은 <민주화의 길> 발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3월 14일, 서울 인사동 입구 파고다빌딩 5층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김근태 의장은 종로경찰서 소속 10여 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행을 거부하는 김 의장은 심한 구타를 당했다.

민청련 집행부는 '올 것이 왔다'고 느꼈지만,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이튿날, 집행부는 김 의장을 즉각 석방하고 부당한 강제 연행에 대해 내무부 장관이 사과하고 종로경찰서장과 수사관들을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청련 측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정권 측은 며칠 지나지 않아 김 의장을 슬그머니 석방했다.

 1984년 한 해 동안 6호까지 발행된 [민주화의 길] 표지들
 1984년 한 해 동안 6호까지 발행된 [민주화의 길] 표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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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앞에서 설명했듯이 4·19행사와 5·18기념식 이후에도 민청련 간부 및 회원들에 대한 폭행사태가 되풀이되었다. 바야흐로 민청련은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권의 탄압이 있었지만, 비공개된 <민주화의 길> 편집부는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은 채 다음 호 작업을 계속했다. 그래서 2차 총회가 끝난 뒤인 4월 25일에 제2호를 발행했다. 이 2호는 권두 논설에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 기만적 화해정책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실천'을 실었다. 당시 학생 운동권 내부를 뜨겁게 달구고 있던 복학조치에 대한 논쟁을 민청련의 시각에서 정리한 글이었다. 정권이 화해 제스처를 보이는 이유를 분석한 뒤 운동세력이 준비해야 할 것으로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를 제시한 것이다.

한 개의 칼이란 '국민 대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이며, 두 개의 방패란 '운동의 조직력을 강화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쓰라린 시련에 무릎 꿇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과 '기층 대중과의 구체적인 연대'를 통해 '민중운동의 토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논설은 민청련 회원뿐만 아니라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각 부분의 활동가들에게 널리 읽혔다. 이때부터 <민주화의 길>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정세분석의 안목을 길러주는 일종의 지침서 역할을 하게 된다.

80년대에 전국 각 대학 앞에는 대개 서점이 한 군데는 있었는데, 이들을 '사회과학 서점'이라고 불렀다.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 읽히는 진보적 사상을 담은 책들을 주로 판매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점은 단순히 서적 판매의 장소가 아니라 학생운동가들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화의 길>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이들 서점에서 <민주화의 길>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물론 <민주화의 길>은 정부에 등록된 간행물도 아니고, 출판사를 통해 발간된 공식 서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서적 유통경로인 서적 도매상을 통해 배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민청련 집행부 안의 사무국에서 직접 서점으로 <민주화의 길>을 배본하고, 정기적으로 그 대금을 수금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민청련의 재정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는 판매상품이 된 것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978년 이해찬이 문을 연 서울대 앞 광장서적. 1982년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건국대 앞 인서점. 1985년 문을 열어 아직도 운영 중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978년 이해찬이 문을 연 서울대 앞 광장서적. 1982년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건국대 앞 인서점. 1985년 문을 열어 아직도 운영 중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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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열사를 살려내라!'

1984년이 저물 무렵인 11월 30일, 민청련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에 있는 택시회사 민경교통의 택시기사 박종만씨가 분신자살했다. 노조 대의원이었던 그는 노조원 해고와 부당한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회사 마당에서 농성하던 중 막무가내로 노조를 무시하던 회사에 분노하여 분신자살로 항거한 것이었다. 

민청련은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14년 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분신한 것과 판박이 사건이었다. 김근태 의장, 김희택 운영위원장, 권형택 사회부장 등 민청련 집행부는 박종만의 시신이 안치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민주통일국민회의의 장기표, 청계피복노조의 김영대, 노동자복지협의회 방용석 등도 달려왔다. 그들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갈 것을 막기 위해 영안실로 들어가려 했으나 전경들에 막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자 영안실 앞 공터에 50~60여 명이 자리 잡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새벽에 전경의 체포 작전이 개시되고 민청련 집행부는 온몸을 던져 거기에 맞서 싸웠다. 전경은 민청련 집행부 등을 닭장차에 던져 넣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구타한 뒤 최루탄을 터뜨리고 문을 닫아버렸다. 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했고, 그 상태로 김근태 의장, 김희택 운영위원장, 안희대 집행국장, 박우섭 사무국장, 권형택 사회부장이 경범죄로 구류를 선고받았다. 경찰은 민청련 회원들의 항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수감했다.     

결국, 시신은 탈취당해 강제로 화장당한 뒤 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민청련은 투쟁을 이어나갔다. '박종만 열사 추모위원회'를 범민주단체로 구성하고, 추모제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12월 13일 홍제동 성당에서 추모제를 열기로 했으나 당일 경찰이 성당을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민청련 회원들은 성당 부근에서 주민들에게 '박종만 열사 살려내라' '폭력 정권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전단을 배포하며 박종만 열사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밤에는 시내 종로1가에서 학생들과 함께 야간시위를 감행했다.

이렇게 민청련은 자칫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묻힐 수도 있는 사건들을 사회문제화하고, 그것을 통해 정권의 반민주성과 폭력성을 드러내게 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는 또한 민청련이 주장하는 기층민중을 운동의 중심에 두는 민중 노선에 충실한 것이기도 했다.

 박종만 열사를 표지로 실은 [민중생활소식] 2호(왼쪽)와 박종만 열사 합동추도식 양면 안내지(오른쪽)
 박종만 열사를 표지로 실은 [민중생활소식] 2호(왼쪽)와 박종만 열사 합동추도식 양면 안내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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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유인물 배포 전술들
 
민청련 회원들의 활동은 집행부가 개최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지만, 일상적인 홍보 활동도 중요한 임무였다. 당시 언론은 철저하게 정부의 검열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세력의 주장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직접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대학별로 조직된 민청련 계반원들은 집행부에서 만든 유인물을 전달받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역에 배포하는 작업을 했다.

이때 경찰에 검거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기발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가장 많이 한 활동은 유인물을 편지봉투에 넣어 야간에 주택가를 돌며 일일이 우편함에 넣는 것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갑자기 사복형사나 정보기관원을 맞닥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기 때문에 심장이 떨리는 작업이었다. 그만큼 무사히 일을 끝냈을 때는 뿌듯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낮에 거리에서 배포하는 방법으로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정류장이 가까워 오면 천정 환기구를 열고 바깥에 유인물을 올려놓고 내리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유인물이 바람에 날려 저절로 길가에 뿌려지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거듭하면서 신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세로로 긴 플래카드를 유인물과 함께 두루마리처럼 말아 접은 다음 비닐 끈으로 묶고 그 매듭에 쑥담배(일반 담배 개비에서 담뱃잎을 빼내고 대신 한약방에서 구한, 솜같이 생긴 뜸쑥을 채워 넣은 것)를 묶어 놓는다. 이것을 시내의 빌딩에 가지고 올라가 5, 6층 정도 높이의 창문 밖을 향해 장치하고 쑥담배에 불을 붙인 뒤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 사이에 쑥담배는 천천히 타들어 가서 비닐 끈을 끊게 되고 플래카드가 건물 벽면으로 펼쳐지면서 그 안에 있던 유인물이 공중에 흩뿌려진다. 이 방법은 특히 큰 가두집회를 앞두고 그 부근에서 사전에 실행하여 집회를 대중들에게 공지하는 효과로 많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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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5.18, 8.15... 민청련의 집회 활동


4·19 24주년 기념식 소동

2차 총회를 통해 조직을 강화한 민청련은 공개 정치투쟁체라는 자기인식을 대외적으로 표출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4월 19일 수유리 4·19묘역에서 열린 '4·19 24주년 기념식'이었다.

이전까지 4·19 기념식은 정부의 공식행사로 치러져 왔다. 1984년 4월 19일 오전에도 수유리 묘지에서 정부 요인과 희생자유족회 등이 참석한 가운데 '4·19의거 제24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4·19가 '의거'를 벗고 1960년 당시의 이름인 '혁명'을 되찾은 것은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였다.

그날, 정부 요인이라고 하지만 대통령과 총리는 물론 기념사를 쓴 부총리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이 4·19를 얼마나 낮춰 보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였다. 신병현 부총리의 기념사는 조철권 원호처장이 대신 낭독했다. 그 내용도 4·19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서 "4·19정신은 조국근대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 주제였다.


 (위) 1984년 정부에서 개최한 기념식에는 4·19를 ‘의거’라고 표기했으나 (아래) 같은 해 고려대에서 연 4·19 당시를 재현한 모의시위에서 학생들은 ‘4월 혁명 다시 찾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위) 1984년 정부에서 개최한 기념식에는 4·19를 ‘의거’라고 표기했으나 (아래) 같은 해 고려대에서 연 4·19 당시를 재현한 모의시위에서 학생들은 ‘4월 혁명 다시 찾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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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관에서 거행하는 형식적인 기념식과는 별도로 민주세력이 4·19의 본래 정신을 기리는 제대로 된 기념식을 갖기로 했다. 정부 행사가 끝난 뒤인 오후 2시에 별도로 '4·19 24주년 기념식'을 갖고 묘지를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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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많은 사복 경찰과 정보기관원들이 둘러싸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참배를 마치고 해산하는 길에 경찰이 박우섭 총무부장을 검문 검색하려고 했으나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경찰은 박우섭을 강제 연행했고, 그에 대해 민청련 회원 50여 명이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경찰은 회원들을 집단적으로 구타하며 20여 명을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장영달 부의장, 박계동 홍보부장, 연성수 사회부장 등 간부와 회원 오경렬, 예병남, 김종환, 김진의 등 수십 명이 부상당했고, 특히 장영달 부의장과 오경렬 회원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부상을 당했다. 연행된 집행부 상당수는 구류 처분을 받았다.

 4·19 행사에서 경찰의 구타로 병원에 입원까지 한 오경렬 민청련 회원. 사진은 퇴원 후 모습으로 그는 이후 민청련, 민통련, 전민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4·19 행사에서 경찰의 구타로 병원에 입원까지 한 오경렬 민청련 회원. 사진은 퇴원 후 모습으로 그는 이후 민청련, 민통련, 전민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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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경찰의 이러한 폭압적인 행태는 당시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민청련은 그것을 의례적인 일로 방치해서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바로 다음 날인 4월 20일, 내외신 기자들을 불러 놓고  '죽음에 죽음이 꼬리를 물고, 폭력에 폭력이 온 사회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4·19묘지에 배치되었던 사복경찰 및 병력 지휘자의 신원을 밝히고 처벌할 것과 내a무부장관 및 치안본부장이 이 사태에 대해 국민과 민청련에 대해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정권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기본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다.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

한편 이날 기념식에서 민청련은 며칠 전 2차 총회에서 결의한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우리 사회는 대외적인 예속과 대내적인 독점으로 인해 크게 일그러져 있다"고 보고, 그로 말미암아 "불평등의 심화로 민중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는 주체는 '군사독재정권'이며 또한 그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미국'이라고 규정했다.

그 다음에 투쟁방향을 제사할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 동안 복학조치에 대해 침묵하던 민청련이 비로소 그 사안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다. 정권이 복학 허용 등 일련의 '화합조치'를 편 것에 대한 민청련의 시각은 이러했다.

정권이 유화국면을 조성한 배경은 "첫째 한국을 장기적으로 안정된 시장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극단적인 독재정치로 인해 야기될지 모르는 혼란이나 파국을 막아보려는 외세의 압력, 둘째 교황 방문 등을 앞두고 이제까지 실추된 대외적인 체면을 되찾으려는 전두환 정권의 궁여지책, 셋째 폭력을 통해 집권한 정권에 치명적으로 부족한 국민적 지지기반과 정통성을, 총선을 앞두고 조금이나마 회복하려는 화해 제스처, 넷째 권력 내부 강경파의 무차별한 탄압책만으로는 민주화운동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는 온건파 의견의 득세 등"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운동권 안에서 유화국면의 배경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들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투쟁방향을 정함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공간을 이용하여 그동안 흩어져 있던 역량들을 결집시켜 내부 조직 역량을 강화시키자고 호소했다. 구체적으로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와 제적생복교대책협의회, 해직교수협의회, 해직기자협의회, 노동자복지협의회 등의 결성을 그 사례로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성화된 부문운동역량을 연대의 틀로 묶어 일종의 '전선'을 형성할 것을 주문했다. 이것은 이후 민청련 활동의 주된 방향이 된다.

햇볕에 드러낸 '광주'

4·19집회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민청련은 보다 과감한 집회 개최에 나선다. 당시까지 그 어느 단체도 공개적으로 열지 못했던 광주항쟁 기념식을 갖기로 한 것. 민청련은 집회 장소로 광주 현장 그것도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역으로 정했다.

1984년 5월 14일, 오후 2시경 광주항쟁 희생자 127분을 모신 망월동 묘역을 찾아 추모식을 거행하고 참배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근태 의장은 '광주여, 오!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라는 제목의 광주항쟁 4주년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리고 참배자 일동은 4년 전 민주항쟁의 현장이었던 금남로를 따라 연도의 시민들이 숙연히 지켜보는 가운데 '오월의 노래'를 부르며 가두행진을 했다. 그리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던 도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만세 삼창을 외치고 이날의 행사를 마쳤다.

경찰이 불법집회 및 시위라며 강제 연행을 한다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런 만큼 회원들은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경찰도 뜻밖의 행진에 당황했는지 감시만 할뿐 연행은 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은 서울에서 찾아와 공개적으로 추모 행사를 가져준 데 대해 감사했지만, 누구보다도 뿌듯해 했던 이들은 가두 행진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것 자체를 기뻐한 민청련 회원들 자신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민청련은 5월 19일에는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5월과 민족의 혼'이란 주제를 가지고 1000여 명의 재야민주인사, 해직언론인, 해고노동자, 해직교수, 학생 및 기타 많은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집회를 가졌다. 이를 통해 지난 4년 동안 음지에 가려져 있던 광주 항쟁이 대중이 모인 광장에 등장했다. 민청련은 광주항쟁 이후의 폭압적인 분위기를 뚫고 스스로 공개단체로 나선 데 그치지 않고, 광주항쟁도 공개적인 행사의 장으로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행사가 끝날 무렵 흥사단 주변은 전경과 사복경찰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집회 참석자들이 그대로 길거리로 나섰다가는 충돌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집행부는 이날은 일단 집회 자체를 성사시키는 데 목적을 두었으므로 경찰 측과 대화를 통해 참석자들이 시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안전한 귀가와 검문 및 검색을 안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의 약속을 받고 귀가하던 50여 명의 참석자들은 결국 이화동 4거리에서 이들을 연행하려던 경찰과 충돌했다. 경찰 측의 무자비한 폭력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회원 김재황 등 5명이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회원 서원기 등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그런데 이때 이날 경찰의 폭행으로 인해 여성회원 이경은이 임신 6개월의 태아를 사산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다. 민청련 집행부는 즉각 성명서를 내고 폭행자 처벌과 정부 당국의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

 (위) 아기를 잃은 불행한 일을 겪은 이경은 서원기 부부가 직접 펜으로 쓴 ‘동대문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딸을 잃어버린 죄 많은 부부가 각계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 (아래) 이경은의 1985년 민가협 집회 당시 모습
 (위) 아기를 잃은 불행한 일을 겪은 이경은 서원기 부부가 직접 펜으로 쓴 ‘동대문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딸을 잃어버린 죄 많은 부부가 각계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 (아래) 이경은의 1985년 민가협 집회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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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폭행 당사자인 동대문경찰서 측은 책임이 없다며 발뺌했다. 그러자 이경은 서원기 부부는 직접 펜으로 쓴 '동대문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딸을 잃어버린 죄 많은 부부가 각계 여러분께 드리는 호소문'을 쓰고 복사해서 직접 거리에서 배포했다. 당국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없었지만, 민청련 회원들은 이러한 헌법상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주장과 호소를 통해 국민 대중들이 정권의 폭력성을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

가두시위 촉발한 8·15기념식

민청련의 집회 활동은 8·15기념식으로 연결되었다. 이 역시 정부 주관의 광복절 행사가 치러지는 것이 관례였지만 민청련은 그것과 별도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명칭도 광복절이 아니라 '민족해방 39주년 기념식'이었다. 장소는 종로2가의 탑골공원으로 하고 시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오후 5시로 했다.

특히 이때는 전두환 대통령의 9월 6일 일본 방문을 앞두고 정부의 친일 외교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이 '전후 한일관계의 청산'을 마무리하고 '한일 신시대의 개막'을 여는 의미가 있다며 홍보했다.

하지만 민청련은 그것은 허위이며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부활하고 재침략을 연상시키는 위험한 발언이 일어나는 시점에 전두환이 방문하는 것은 곧 일본의 정적 군사적 의도를 용인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럼에도 굳이 방일을 강행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정권이 외교적 성과를 과시함으로써 정통성 논란을 잠재우려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민청련의 8·15행사는 자연스럽게 전두환 방일 반대투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러한 민청련의 의도를 간파한 정부는 8월 15일이 되자 버스 15대로 탑골공원을 에워싸고 전경과 사복경찰로 탑골공원을 봉쇄하여 기념식을 막았다.

민청련 집행부는 이러한 경찰에 아랑곳하지 않고 태극기를 들고, 플래카드를 앞세워 탑골공원 진입을 시도했다. 결국 집행부는 경찰의 무차별 폭행과 구타를 당하며 연행됐다. 그러자 집회 참석을 위해 모여든 회원들과 대학생들 약 3천여 명은 가두에서 항의 시위를 펼쳤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강제 해산했고, 시위대는 흩어져서 종로 3가, 회현동 신세계 앞, 제기동, 청량리 등을 돌며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여나갔다. 시위대는 주로 전두환의 '매국적 방일 결사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민청련 간부 및 회원 30여 명과 대학생 1백여 명이 연행되었다.

 종로3가에서 연행당하는 이명식 민청련 인권부 차장. 고려대 출신인 그는 이후 민청련과 민통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종로3가에서 연행당하는 이명식 민청련 인권부 차장. 고려대 출신인 그는 이후 민청련과 민통련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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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 처분이라는 새로운 탄압

제39주년 8·15 민족해방 기념식' 행사를 성사시키는 데 실패한 집행부는 8월 18일 실내인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다시 개최했다. 약 6백여 명의 회원, 대학생, 민주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기념식은 정부가 주관하는 여느 8·15행사와는 다르게 기념사, 해방가 제창, 일제 강점기 증언, 1964년 6·3한일회담반대투쟁 증언, 오늘의 한일관계에 대한 강연, 8월 15일 기념식 경과보고, 메시지 채택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기념사는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8·15해방 3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 내용은 "해방은 다시 이룩해야 할 우리의 목표로서, 첫째 신식민주의 세력과 이에 유착한 집단의 수탈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둘째 통일된 조국을 향한 해방, 셋째 민중의 자기 인식과 실천을 기축으로 여기에 양심적 제 지원 세력의 헌신을 더한 전 민중에 의한 해방"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이강훈 선생이 참석하여 "아직도 우리나라의 독립은 이룩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살길은 자주적인 국가와 완전한 통일에 있다"고 일갈했다. 6·3세대인 성유보 동아투위위원장은 "전두환씨의 일본 방문은 새로운 군국주의의 부활을 기정사실화시킬 수 있다"며 경고했다. 


 전두환씨 매국방일 저지’ 명칭 하에 개최된 민족해방 39주년 기념대회. 사회를 보는 이는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전두환씨 매국방일 저지’ 명칭 하에 개최된 민족해방 39주년 기념대회. 사회를 보는 이는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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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민청련의 과감한 집회 개최와 정부 비판 발언에 대해 전두환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판단한듯하다. 8·15 광복절과 같은 일반적인 행사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처벌하는 것은 자칫 그 자체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민청련의 정치적 위상을 키워줄 염려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방치할 경우 전두환의 일본 방문을 비롯해 5공이 금기시해 왔던 광주 문제 등에 대한 정부비판 집회가 공인되는 셈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 결과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 집회 자체는 눈 감아 주되, 집행부를 소란죄나 거리질서 위반 등의 사소한 혐의로 경범죄를 적용해 유치장에 구류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1984년 한 해 내내 집행부는 유치장을 들락거려야 했다. 8·15 행사 시기에만 김근태 의장 등 집행부와 회원 13명이 최장 15일에서 10일까지 구류처분을 받았다. 바야흐로 구류처분이라는 새로운 탄압 수단이 등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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